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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원(園) - 2 조선 후기의 園 & 墓 _소령원 昭寧園, 수경원 綏吉園, 수길원 綏慶園,의령원 懿寧園, 휘경원 孝昌園, 효창원徽慶園

草霧 2013. 8. 21. 16:40

 

 

 

조선왕릉[朝鮮王陵] 원(園) - 2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2

 

 

 

(2) 조선 후기의 & _

 

 소령원 昭寧園(파주 삼릉), 수경원 綏吉園(파주 삼릉), 수길원 綏慶園(서오릉),

 

의령원 懿寧園(서오릉), 휘경원 孝昌園(서오릉), 효창원 徽慶園(광릉)  

 

   기사 관련 사진

기사 관련 사진

남양주 휘경원 문화재 사진

 

 

()또는 원소(園所)란 왕세자, 왕세자빈 또는 임금을 낳은 선왕의 후궁들의 묘소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조선 건국 초기 국가 기반을 잡은 왕

태조(건원릉)-정종(후릉)-태종(헌릉)

 

조선의 문화를 꽃 피운 왕

세종(영릉)-문종(현릉)

 

죽음조차 알릴 수 없었던 비운의 왕

단종(장릉)-세조(광릉)-추존왕 덕종(경릉)-예종(창릉)

 

육신을 잃고 떠돌고 있는 넋

성종(선릉)-연산군(연산군묘)

 

당파 싸움에 시달린 왕

중종(정릉)-인종(효릉)-명종(강릉)

 

전란을 겪은 왕

선조(목릉)-광해군(광해군묘)-추존왕 원종(장릉)

 

청나라에 맞서 싸운 왕

인조(장릉)-효종(영릉)-현종(숭릉)

 

당쟁에 휩싸인 왕

숙종(명릉)-경종(의릉)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힘쓴 왕

영조(원릉)-추존왕 진종(영릉)-추존왕 장조(융릉)-정조(건릉)-순조(인릉)-추존왕 익종(수릉)

 

세도정치에 시달린 왕

헌종(경릉)-철종(예릉)

 

황제가 된 왕

고종황제(홍릉)-순종황제(유릉)

 

서오릉

숙종을 둘러싼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날 수 있는 가족 묘역

명릉(明陵) 익릉(翼陵) 경릉(敬陵) 홍릉(弘陵) 창릉(昌陵)

 

서삼릉·온릉(溫陵)

식민지 시대와 산업화가 만들어낸 왕실의 공동묘지

예릉(睿陵) 희릉(禧陵) 효릉(孝陵) 온릉(溫陵)

 

파주삼릉·장릉(長陵)

전란에 시달리거나 요절한, 비운의 왕과 왕비들의 능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 장릉(長陵)

 

태강릉(泰康陵) · 정릉(貞陵) · 연산군묘

빗나간 욕망이 휘둘린 왕과 왕비들의 능묘

태릉(泰陵) 강릉(康陵) 정릉(貞陵) 연산군묘

 

광릉(光陵) · 의릉(懿陵)

천연 생태박물관 수목원까지 남겨준 최고의 명당

광릉(光陵) 의릉(懿陵)

 

동구릉

아홉 기의 왕릉이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대의 왕릉군

수릉(綏陵) 현릉(顯陵) 건원릉(建元陵) 목릉(穆陵) 휘릉(徽陵) 원릉(元陵) 경릉(景陵) 혜릉(惠陵) 숭릉(崇陵)

 

홍유릉(洪裕陵) · 사릉(思陵) · 광해군묘

화려해서 더욱 서글픈 두 황제의 능

홍릉(洪陵) 유릉(裕陵) 사릉(思陵) 광해군묘

 

선정릉(宣靖陵) · 헌인릉(獻仁陵)

번잡한 도시의 삶 속에서 뜻밖에 만나는 울창한 습지

선릉(宣陵) 정릉(靖陵) 헌릉(獻陵) 인릉(仁陵)

 

융건릉(隆健陵) · 장릉(章陵)

천리를 가도 그만한 곳은 없고 천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곳

융릉(隆陵) 건릉(健陵) 장릉(章陵)

 

영녕릉(英寧陵) · 영월 장릉(莊陵)

도성 80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벗어난 왕릉들

영릉(英陵) 영릉(寧陵) 장릉(莊陵)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

 

(1) 조선 전기의 &

경기도 순창원(서오릉

경기도 순강원 

경기도 소경원(서삼릉

경기도 영회원  

 

(2) 조선 후기의 &

경기도 소령원 

경기도 수경원(서오릉

경기도 수길원 

경기도 의령원(서삼릉

경기도 휘경원 

경기도 효창원(서삼릉

 

(3) 대한제국의 &

서울 영휘원 

경기도 영원(홍유릉

서울 숭인원 이진 묘

경기도 회인원 이구 묘 

 

 

      

 

 

 

(2) 조선 후기의 &

   

소령원 昭寧園(파주 삼릉), 수경원 綏吉園(파주 삼릉), 수길원 綏慶園(서오릉),

 의령원 懿寧園(서오릉), 휘경원 孝昌園(서오릉), 효창원 徽慶園(광릉)  

 

 

 

소령원 昭寧園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 ~ 1718) , 1753, 경기 파주 358, 파주 삼릉(坡州三陵), 비공개지역

 

장희빈을 밀어 낸 조선 숙종의 후궁 <동이> 이며, 영조의 사친(私親)

숙빈 최 씨는 무수리 출신이었다가 인현왕후가 폐출되었을 때 복위를 진심으로 기원하여 복위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그 공으로 자신은 후궁에 오른 분이다. 숙빈 최 씨는 숙종 20년에 영조를 낳았으나 생전에 아들이 보좌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숙종 4449세로 서거하였다. 효성이 지극했던 영조는 보위에 오르자 모친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숙빈 최씨의 묘를 소령원으로 추봉하면서 가까이에 있던 고령사를 원찰로 삼고 이름을 보광사로 고쳤다.

 

원역은 산기슭 중단부에 동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봉분의 양쪽으로 석호, 석양을 각 2필씩 배치하였다. 봉분 정면에는 비석,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일렬로 놓여 있고 그 좌우로 망주석, 문인석, 석마가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원소 아래 동북방에는 비각 2동이 있으며 동쪽으로 중앙에 정자각과 왼쪽에 수복방이 배치되어 있다. 진입로 초입에 있는 비각은 숙빈 최씨의 신도비 보호각이다. 수복당은 조선시대의 원소 중 이곳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사적 제358호 처음에는 소령묘(昭寧墓)로 불렀으나 영조의 사친이므로 1753(영조 29)6월 숙빈최씨를 화경(和敬)이라 추시(追諡)하고, ()를 궁()으로,()를 원( )으로 승격시켰으며, 같은해 9월에 이 사실을 태묘(太廟))에 고하고 진하반사(陳賀頒赦: 축하를 하고 널리 알림)하였다.

 

숙빈최씨의 장례에 대한 숙종의 처사는 실로 냉정하기 그지 없었다. 171839일 그녀가 연잉군 사제에서 병사하자 제수를 넉넉히 보내고 예장하라는 말만 있었을 뿐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하지 않았다.(역대 임금들은 왕실 지친이나 오래도록 내명부의 후궁으로 있거나 총애가 깊은 후궁이 죽으면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를 했다) 또한 그녀의 장지로 거론된곳이 공주들의 묘역 옆산이라는 이유로 감히 공주들의 묘역인 청룡의 터를 침범하려 했다며 그말을 전한 내관을 파직할 정도로 화를 내었다. 이어 두번째로 거론된 장지에 대해서도 왕실 능 부근은 백성이 장사를 지낼수 없는데 최씨를 그곳에 장사 지내면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하며 왕자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후궁이었던 최씨를 일반인과 같은 취급을 하고 있는 실록 기록이 있다.[6] 현재 숙빈의 묘역은 숙종이 정해준것이 아니라 영조(당시 연잉군)가 풍수지리에 밝은 지관 목호룡을 대동하고 둘이 직접 고른곳이다.

 

그녀의 아들 연잉군은 왕세제를 거쳐 마침내 왕으로 등극하니, 바로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英祖)이다. 그는 즉위 원년, 어머니 최씨의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廟)라 하였고, 영조20(1744) 육상묘(毓祥廟)라고 올렸다가 다시 영조 29(1753)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 육상궁은 현재 칠궁에 합사되어 있다. 묘소 또한 영조 20년에 소령묘(昭寧墓)라고 올렸다가 29년에 소령원(昭寧園)으로 다시 승격시켰으며, 또한 사당과 무덤에 궁호와 원호를 올릴 때 함께 화경(和敬)의 시호를 올렸다. 후일에 여러 차례에 걸쳐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의 존호가 더 올려졌다.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를 결국 왕후로 추존하는데에는 실패하였지만 이런 식으로 그녀에 대한 신분을 높이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하였다.

 

175711월 예조판서 이익정(李益柾)이 각 능의 예에 따라 소령원에도 동지제(冬至祭)를 지낼것을 주청하였으나 원묘(園墓)에는 정해진 예가 없다 하여 영조는 이를 반대하였다. 영조 만년에는 각 지역 유생(儒生)들이 원을 능()으로 승격시키자는 상소가 수년간 잇달았으나 시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능으로 승격시키자는 유생들의 속셈은 최씨가 영조의 생모라는 점을 들어 그러한 소를 올림으로써 조정에 관심을 끌어 벼슬자리라도 얻어보려는 의도적인 것이 강하였다. 영조는 이에 대해 처음에는 상소자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그 수가 증가되자 단호히 대처하였다.

 

영조의 사모곡(思母曲)

 포토 보기소령원은 그 자체만으로 숙빈을 향한 영조의 효심이 느껴졌습니다. 최고의 명당자리에 웅장하면서도 아늑하게 모셔진 모습이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죠. 실제로 영조는 자신을 키워 온 인원왕후와 함께 숙빈 또한 극진히 모셨다고 합니다.

 

정조는 살아생전에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성이 극진해 화성행궁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성대하게 여는 등 오늘날까지 그 효심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소령원을 다녀오고 생각해보면 정조의 이러한 효심은 어쩌면 영조가 어머니인 숙빈을 모시는 모습을 보고 배운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영조는 어려서부터 무예와 산타기를 좋아하여 틈만 나면 사냥을 하고 이산 저산을 두루 다녔습니다. 풍수지리에도 밝아 산세를 살피면서 다니던 중 지금의 광탄면 용미리 산을 지나가다 초라한 장례로써 산소자리를 파는 것을 발견하여 올라가보니 험준한 망지에다 자리를 잡아 수인이 역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딱한지라 상주에게 사연을 물은 즉 원채 가난한 집에 태어나 좋은 자리에 산소를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자리를 봐준 사람은 누구냐고 물은 즉 아래 산기슭에 사는 선비가 묘소를 정하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 상주를 위해서 영조는 양주목사에게 쌀 1가마니와 돈 100냥을 보내라는 편지를 써 보내니 양주목사가 이를 보고 즉시 포졸을 시켜 돈을 보내어 이 뒤편에 묘소를 다시 잡아주고 장사를 잘 치르게 하였습니다. 장사를 치른 후 영조가 산을 내려와 선비를 찾아가서 왜 이런 나쁜 곳에 산소자리를 잡아 주었냐고 묻자 이 선비는 쌀 1가마니와 돈 100냥이 생길 자리인데 왜 그러냐고 말합니다. 이에 영조는 깜짝 놀라며 자기가 한 일이 꼭 맞아 감탄하며 치하하고 돌아가면서 명지사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얼마 후 사친인 숙빈 최씨가 서거하자 각지에서 명지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였으나 영조는 이들을 전부 물리치고 아무개에 사는 이 선비를 데리고 오라고 하여 묘지를 잡은 곳이 바로 광탄면 영장리 산1번지 소령원인 것입니다. 소령원은 중국의 풍수지리지에 수록될 정도로 길지라고 합니다. 영조는 소령원 자리를 잡아준 명지사 이 선비를 후사하기 위하여 궁궐로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을 한 후 얼마만큼 맞추나 시험하기로 합니다.

영조는 경기도 일대에 명당자리가 몇 군데 있느냐고 물으니 어디는 정승 날 자리, 어디는 판서 날 자리 등등 수 십군데를 마구 지껄이고 있어 역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명지사임이 틀림없고 학문에도 뛰어나 유능한 인재임을 알게 되죠. 이에 한번만 더 시험하리라 생각하고 별궁을 시켜 쥐 한 마리를 잡아오라 하여 용상 및에 감추고 "이번 질문을 맞추면 큰 벼슬도 주고 후사할 것이나 만약 맞추지 못하면 죽일 것이다."하며 하문하기를 "짐의 용상 및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하자 이 선비는 한탐 생각한 뒤에 "쥐가 들어있는 것으로 믿습니다."하니 아연실색한 영조는 "그럼 몇 마리가 들어 있느냐?"고 하자 "3마리가 들어 있습니다."하니 "이 놈 짐을 속이는구나!"하고 선비를 참하라 명하였다. 얼마 있다가 별궁이 달려와서 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 두 마리가 들어있다고 하자 영조는 이런 인재를 등용하여 정사를 맡기리라 생각하고 즉시 이 선비를 죽이라고 명한 것을 취하면서 별궁을 시켜 죽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별궁이 가보니 애석하게도 이미 죽은 후라 할 수 없이 돌아와서 그 사연을 고하니 영조는 깜짝 놀라며 짐의 잠깐 실수로 나라의 아까운 인재를 잃었노라며 애석해 하였다는 설화도 전해집니다.

 

영조는 사친의 묘가 능()으로 모시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승격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조정 중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가장 반대가 심한 중신 박사정(朴師正)을 소령원 제사 지낼 적에 보내 봉노를 시켜 숯불이 이글대는 향로를 맨손으로 들게 하니 열손가락 사이로 기름이 흘러 내리는 찰나 영조가 이래도 능으로 책봉하지 않겠느냐고 하문하니 소신은 죽사와도 능지하원지상(陵之下園之上)입니다.”라고해서 능으로 격상하는 것을 단념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나무꾼이 도성에 들어와 모화관 부근에서 나무를 팔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영조가 이 나무꾼을 보고 어디서 해온 나무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평시에 말하던 대로 자랑스럽게 양주(당시에는 양주군에 속했음) 소령릉이 있는 마을에서 해왔다고 대답하자 영조는 이 나무꾼을 궁궐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대신들 앞에서 다시 물으니 역시 같은 대답이었죠. 이때 영조는 대신들에게 백성들은 소령릉이라고 하는데 조정 대신들은 왜 소령원이라 부르냐고 호통을 친 일도 있습니다. 후에는 대신들이 능으로의 승격을 주장했다지만 영조는 궁중의 법도에 맞춰 그대로 원으로 했다고 전합니다.

 

이후 영조는 나무꾼에게 통훈대부에 작위를 내리고 대대로 능세원(능에서 나무를 간수하는 직책)을 지내게 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영장리에 김해 김씨가 몇 집 살고 있는데 김호길(金好吉)8대손 이라고 하며 당시 능참봉(陵參奉) 능순원(陵巡員) 능수복(陵守僕)이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조의 모친에 대한 애틋한 효심이 이런 이야기를 낳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은 상주하는 관리인이 없는 왕릉도 있는데, 소령원은 원()인데도 유일하게 참봉이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소령원에서 앞을 보면 안산인 고령산이 눈에 들어오고, 고령산 아래 있는 보광사는 영조가 숙빈 최씨의 제사를 봉향하는 원찰로 지정하고 어필을 내린 사찰입니다. 보광사와 소령원 곳곳에 남아 있는 영조의 흔적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모곡입니다. 궁녀의 세숫물을 떠다 바치는 하녀에서 왕의 어머니가 된 여인의 숨어 있는 눈물을 아들이 알고 헤아리지 않았을까요?

무수리 어머니를 향한 영조의 회한

"일찍이 임금의 은총 입어 / 순종으로써 공경히 모셨네 / 마음에 성실함 온축하시니 / 궁궐 법도에 부합했네 / 이내 상서로운 복 품으시어 / 우리 성궁(聖躬) 낳으셨네 / 대왕이 될 점괘에 부합하니 / 하늘이 우리나라 도우셨네" 영조가 즉위하던 해인 1725년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지어 비석에 새기게 한 '숙빈최씨 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기사 관련 사진숙빈최씨는 무수리로 궁궐에 들어갔다가 숙종의 성은을 입어 영조를 낳았다. 영조는 70세에 도달한 1763년에는 자신의 출생 내력을 기록한 '갑술년 호산청일기'(護産廳日記)를 열람하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승정원일기는 적고 있다. "! 칠순이 되는 해 9월에 우연히 호산청일기를 얻어 보고는 감회가 일어나 (육상궁<毓祥宮>으로 가서) 다만 배알(拜謁)만 하고 돌아오니 이 마음 갑절이나 새롭다"

 

이 육상궁은 숙빈최씨를 봉사(奉祀)하기 위한 사당으로 지금은 청와대 경내의 칠궁(七宮) 중 하나로 남아있다. 워낙 출신이 미천한 까닭에 자세한 가문 내력이나 초반기 생애가 알려지지 않은 숙빈최씨는 1670(현종 11) 116일에 태어나 7세에 궁중으로 들어갔다가 1692년 우연히 한밤중 왕궁 '순찰'에 나선 숙종의 눈에 띄어 성은을 입고, 아들을 낳아 일약 내명부 최고 품계인 숙빈까지 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품계가 높아졌다 해도, 그리고 그 아들이 임금이 되었다고 해도, 숙빈최씨의 신주는 종묘에 갈 수 없었다.

 

1718(숙종 44) 3, 49세로 생을 마감한 숙빈은 그 해 512, 양주 고령동 웅장리 묘향(卯向) 언덕에 안장됐다. 국왕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강고한 신분제 아래서 임금인 아들은 죽은 어머니를 대대적으로 추숭하는 일들을 벌이게 된다. 재위 29(1753)에는 화경(和敬)이라는 존호를 올린 데 이어 묘() 또한 소령원(昭寧園)으로 격상했다. 조선시대 능묘제도에서 원()은 왕이나 왕비 무덤에나 붙일 수 있는 능() 다음 칭호였다.

 

재위 34(1758), 어머니 묘소를 참배한 영조는 어머니가 죽던 그 옛날을 회상하면서 감회에 젖어 "붓을 쥐고 회포를 써 내려가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통곡했다. 이처럼 무수리 출신 어머니를 향한 영조의 절절한 회포의 정을 담은 흔적 중에서도 산도(山圖)와 비문만을 정리한 자료집이자 해제집이 최근 이들 자료 소장처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도록 형태로 나왔다.

 

이에는 숙빈최씨의 장지를 물색하고 지관(地官)이 그림 형식으로 올린 산도와 그 지역 풍수론을 정리한 산론(山論), 소릉원 전체와 그 석물(石物) 배치도, 그리고 소릉원 주변 화재 방지선인 화소(火巢) 그림 등이 포함됐다. 나아가 영조가 어머니를 위해 제작한 각종 비문 7종의 탁본도 있다. 영조는 자기 어머니 관련한 기록은 한장도 버리지 않고 육상궁에 모아뒀다.

   

 

 

 

"미천한 집안에 태어나 어려서 입궁한 후 우연히 한밤중 왕궁 순찰에 나선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아들 연잉군(영조)을 낳아 일약 내명부 최고 품계인 ()의 자리에 올랐다"

숙빈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 毓祥宮(육상궁)은 종로구 궁정동에 있다. 영조 원년(1724)에 세워 淑嬪廟(숙빈묘)라 했으나 영조 29(1753)에 승격하여 육상궁으로 改名했다. 육상궁을 7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1908년 육상궁 경내에 역대 왕들의 生母로서 왕비에 오르지 못한 나머지 6神位를 모신 祠堂(사당)을 옮겨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7은 모두 사당이 5 채이다. 그것은 영조의 生母 사당인 육상궁과 영조의 후궁으로 추존된 왕 眞宗의 생모 정빈이씨의 사당인 延祜宮(연호궁)이 한 건물에 들어 있고, 또 영조의 후궁으로 추존된 왕 莊祖(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의 사당인 宣禧宮(선희궁)과 정조의 후궁으로 純祖의 생모 수빈박씨의 사당인 景祐宮(경우궁)이 한 건물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육상궁은 廟號(묘호.사당 이름), 화경, 휘덕, 안순, 수복은 시호, 숙빈은 내명부 호칭이다. 후궁인 에게 내려진 시호(임금이 내린 )가 무려 네 개나 된다. 조선 왕가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것은 모두 아들 영조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올린 것으로 영조의 사모곡의 한 표현이다.

 

숙빈 최씨의 후손 중 국왕이 5 (영조-정조-순조-헌종-철종)이다. 고종과 순종은 養孫 계통이다. 이들 중 가장 聖君으로 존경 받는 인물은 아들인 영조와 曾孫子인 정조이다. 이 두 국왕은 조선 27대 국왕 중 敬天勤民하여 泰平盛代를 연 대표적인 군왕이다. 흔히 英正 시대로 일컬어지는 약 80여년이 조선의 泰平天國, 르네상스시대였다. 그래서 숙빈최씨가 더욱 돋보인다.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 ~ 1718)

숙빈 최씨는 숙종 비 인현왕후의 궁인이었다. 인현왕후가 폐비되어 사가에 나가 있을 때, 숙종이 우연히 밤에 후원을 거닐다가 밤중에 부엌에서 음식을 마련하는 최씨를 발견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숙종이 물어서, 인현왕후의 궁녀라는 것과 내일이 인현왕후 생일이어서 아침밥 준비를 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숙종이 인현왕후가 죄가 없느냐?”고 물었다. 이에 최씨는 죄의 유무를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저를 따라오셔서 보시면 알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곧 숙종이 최씨를 따라 토굴 속을 들여다보니, 벽에 인현왕후의 화상을 붙이고 장희빈이 활로 쏘고 있었다.

 

그 길로 돌아와 숙종은 최씨에게 동침을 요구했다. 최씨가 옛 주인을 밖에 내보내 놓고 어찌 감히 임금을 모시겠습니까?” 하면서 거절했다. 그래서 숙종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날 밤 동침했다.

 

하루는 숙종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황룡이 큰항아리 밑에 치어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꿈을 깬 숙종이 뒤뜰에 나가 보니 과연 큰항아리가 엎어져 있기에, 뒤집게 하니 최씨가 그 속에 갇혀 거의 기진한 상태였다. 장희빈이 질투해 한 짓이었고, 이 때 최씨는 임신한 상태였다. 곧 침전에 데려다가 깨어나게 했고, 이듬해 1694년에 아들이 태어났다.(이 아이가 뒤에 영조 임금임.) 그리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었다가 얼마 후 사망하고, 장희빈은 저주 사건이 탄로되어 사사(賜死)되었다. (김현룡, 한국문헌설화3, 건대출판부, 1998. 69-70.)

 

이와 같이 숙빈최씨는 의리와 책임을 다하는 성품으로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며 7세에 궁에 들어와서 궁녀로서의 최고의 지위인 숙빈까지 오르게 된 행운아로 요즈음 TV드라마에서 평범한 여자가 재벌가 아들의 애인이 되는 신분상승의 전형적인 모델이 된다.

 

영조는 1694(숙종 20) 913일 창덕궁에서 숙빈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복 형인 경종(20대왕)이 병약하고 아들이 없어 세자로 책봉되어 연잉군이 되었고 숙빈최씨가 죽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한 효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된 연잉군은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위험을 느끼고 있어 시묘살이를 이유로 소령원 깊은 산중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을에 전하는 얘기로는 영조가 시묘 살이를 하는 중에도 자객의 기습이 몇 차례나 있었으나, 그때마다 동네 개들이 일제히 짖어 위험을 알렸고, 마을에 장사가 숨어 지내다 자객들을 물리치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조는 이 마을 사람들을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고 한다.

 

영조대왕은 즉위하자 죽은 후에도 왕비가 될 수 없는 어머니를 위해 최초로 육상묘(毓祥廟)를 건립해(현재 서울 종로구 궁정동 1-1 칠궁(七宮)) 후궁으로 왕의 어머니가 된 신위를 모시는 곳을 만들었고, 소령원 묘소 동남편에 친필 비각을 4곳에다 세웠다고 하며 명복을 빌기 위하여 보광사를 중수하는 한편 어실각을 짓고 매년 백중날 절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동이> 오마이뉴스

 

 

 

수길원 綏吉園

    기사 관련 사진

 

정빈 이씨(靖嬪 李氏, 1694?~1721), 1778, 경기 파주 359, 파주 삼릉(坡州三陵), 비공개지역

 

조선 영조(英祖)의 후궁,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생모

영조의 세자였던 진종의 어머니인 정빈 이씨의 묘소로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후궁이 되어 진종을 낳았습니다. 경종 즉위년인 1720년에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며 1725년 영조때 빈으로 봉해졌습니다. 수길원은 현재 문화재보호법상 공개를 하지 않고 있어 들어가보진 못했습니다. 소령원 입구 바로 못미쳐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시어머니 묘와 함께 있는 셈입니다. 석물이 하나도 없고 단지 곡장만이 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세자도 10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니 결국 세자의 자리는 사도세자로 넘어갔으니 만약 효장세자가 빨리 죽지만 않았어도 사도는 뒤주에서 죽을 운명을 피할수 있었을것을....안타갑습니다. 수길원은 풍수학적으로 대가 끊기는 흉당이라고 하는데 중국풍수서에도 기록될 정도의 천하명당인 소령원 옆에 자기 후궁의 묘는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만든 영조의 심사가 궁금합니다.

 

 

정빈 이씨(靖嬪 李氏, 1694?~1721)

 

 

▲ 효장세자의 어머니 정빈 이씨 수길원. 장마철이면 사진 아래 부분 바위가 있는 곳에 물이 솟는다. 풍수가들은 이 바위가 후손이 끊기는 흉당이라는 증거라고 한다.

 

이준철의 딸로 동궁전 나인이었고, 영조가 아직 연잉군이었을 적에 그의 첩이 되었다. 1719, 영조의 장남인 경의군(敬義君, 효장세자, 훗날의 진종)을 낳았다. 이후,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세자궁에 속한 내명부 종5품 소훈(昭訓)이 되었으나 1721년에 28살의 나이로 급작스레 훙서하였다. 1722년 환관 장세상이 궁녀들과 공모해 이소훈을 독살하였다는 발고가 있었고 이 사건은 신임사화로 번지게 된다. 정비인 정성왕후가 아이가 없던차라 맏아들을 낳아주었으니 영조의 애정이 없었다고는 말할수 없습니다.

 

1724년 영조가 왕으로 즉위하자 내명부 정 4품 소원(昭媛)에 추증되었으며, 1725년에 경의군이 세자가 되자 정빈(靖嬪)의 봉호를 받았다. 이후 정조가 즉위함에 따라 법적 부친인 효장세자가 진종대왕(眞宗大王)으로 추존되자, 온희(溫僖)의 시호와 수길원(綏吉園)의 원호, 연호궁(延祜宮)의 궁호가 추상되었다. 연호궁은 칠궁의 하나이다.

 

잘난 남편보다 잘난 아들이 더 낫네

 

 

수경원 綏慶園

 

 

 

영빈 이씨(? ~ 1764), 1764, 경기 고양 198, 서오릉(西五陵)

    

조선 영조(英祖)의 후궁, 추존왕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생모이며, 정조의 조모

경원은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무덤이다. 후궁묘의 예로 조영하여 석물들이 단출하게 꾸며졌다.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는 1764(영조 40)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능은 경기도 고양 연희 신촌리(현재 서울시 신촌)에 조영되었으나, 한일합병 이후인 1920년대 연희전문학교가 인근에 개교하고 확장하면서 교내에 수경원이 위치하게 되어 19686월 현재의 서오릉으로 천장하게 되었다.

 

수경원은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무덤이다. 후궁묘의 예로 조영하여 석물들이 단촐하게 꾸며졌다.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는 1764(영조 40)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능은 경기도 고양 연희 신촌리(현재 서울시 신촌)에 조영되었으나, 한일합병 이후인 1920년대 연희전문학교가 인근에 개교하고 확장하면서 교내에 수경원이 위치하게 되어 19686월 현재의 서오릉으로 천장하게 되었다.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이다. 어려서부터 궁녀생활을 하다 귀인이 되었으며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고, 1730(영조 6) 영빈으로 봉해졌다. 4명의 옹주와 후일 사도세자가 되는 원자를 출산하고 그 밑으로 옹주 하나를 더 낳았다. 1762년 사도세자가 폐위되는 일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망했을 때 영조는 후궁 제일의 의식으로 장례 지냈으며, 이듬해 의열(義烈)의 시호를 내릴 때는 그 의식을 친히 집행하였다. 시호 의열과 함께 같은 이름의 사당을 세워 제향했으나, 1788(정조 12) 선희궁으로 고쳤고, 1870(고종 7) 한때 육상궁(毓祥宮)에 합했다가 1900년에 다시 독립시켰다.

 

연세대학교 입구의 바른쪽에 자리잡은 원묘의 일대가 수경원이다. 이곳은 즉위에 앞서 무고(誣告)로 뒤주에 갇혀 굶어서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思悼世子 : 장조왕[莊祖王]莊獻世子)의 어머니이신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원묘이다.

 

버리고개

화현재 서울시 서대문구의 봉원사 입구에는 본래 영빈 이씨의 묘소인 수경원이 위치해 있던 연세대학교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고개가 있다. 사람들은 이 고개를 보통 '버리고개' 또는 '벌고개'라 부른다. 영조는 각별히 총애했던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크게 애통해 하며 후궁 제일의 예로 장례를 치르고 수경원을 조영하여 주었다.

 

그런데 이 수경원의 주룡(主龍)에 해당하는 산능선을 사람들이 넘어다니게 되면 등성이가 낮아질 뿐만 아니라 불경스러운 일이 된다 하여 통행을 금지시켰고, 만일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벌을 내렸으므로 '()고개'라 했다. 이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버리고개'가 됐다고 한다.

 

 

영빈 이씨(暎嬪 李氏? ~ 1764)

사도세자의 고백영빈 이씨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이다. 어려서부터 궁녀생활을 하다 귀인이 되었으며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고, 1730(영조 6) 영빈으로 봉해졌다. 5명의 옹주와 후일 사도세자가 되는 원자를 출산하고 그 밑으로 옹주 하나를 더 낳았다. 1762(영조 38) 사도세자가 폐위되는 일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망했을 때 영조는 후궁 제일의 의식으로 장례지냈으며, 이듬해 영조가 친히 의열(義烈)의 시호를 내렸다. 시호 의열과 함께 같은 이름의 사당을 세워 제향했으나, 1788(정조 12) 선희궁으로 고쳤고, 1870(고종 7) 한때 육상궁(毓祥宮)에 합했다가 1900년에 다시 독립시켰다.

 

 

 

 

의령원 懿寧園 (애기능)

 

   

 

의소세자(懿昭世子, 1750 ~ 1752), 1752, 경기 고양 200, 서오릉(西五陵)

 

 

조선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장조)의 첫째 아들, 정조의 친형

의령원은 조선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장조)의 첫째 아들 의소세손의 묘소이다. 세손의 묘로서 장례절차며 치장에 격식을 갖추어 애기능이라 불렸다. 표석,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1, 그리고 문석인, 석마, 석호, 석양이 각 2구씩 세워져 있는데, 봉분 옆에 자리한 표석의 전면 큰 글씨와 후면의 음기는 모두 영조의 친필이라고 전해진다

 

의소세손은 1752(영조 28) 3월 겨우 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의소(懿昭)라 하고, 그 해 512일 안현(鞍峴) 남쪽 기슭에 안장되면서 의소묘(懿昭墓)라 하였으나 1870(고종 7) 의령원으로 승격되었다. 의령원은 중앙여고 내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1949년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어, 현재 의령원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 부속건물로 추정되는 한옥 한 채가 남아 있는데, ‘동심사라 불리우며 중앙여고 배구부의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다

 

영조의 애도사

 

 

의소세자 (懿昭世子,의소세손(懿昭世孫), 1750 ~ 1752)

한중록의소세손은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의 소생으로 1750(영조 26) 8월에 출생하여 이듬해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1752(영조 28) 3월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의소라 하고, 그 해 512일 안현 남쪽 기슭에 안장하면서 의소묘(懿昭墓)라 하였으나 고종 7(1870) 의령원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정조의 동복형이며,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의 이복 형이다. 

 

영조 26년(1750년) 음력 8월 27일 영조(英祖)의 장손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빈 홍씨(惠嬪 洪氏)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둘째 아들 사도세자를 정적시한 영조는 어린 손자의 탄생에 크게 기대하였으며 바로 원손(元孫)으로 책봉하였다.영조 27년(1751년) 음력 5월 13일 영조에 의해 세손(世孫)에 책봉되었으나, 1752년 3살의 어린 나이로 통명전(通明殿)에서 훙서하였다. 

 

영조는 그해 4월 12일 요절한 손자에게 의소라는 시호를 친히 내려주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1899년 장종(莊宗)으로 처음 추존(追尊)되었을 때, 의소세자(懿昭世子)로 격상되었고, 곧 장종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다시 추존되자, 의소태자(懿昭太子)로 역시 격상되었다.능원은 의령원(懿寧園)이며, 조카인 문효세자의 묘소 효창원 앞에 자리하고 있다.

    

그 뒤 아버지 사도세자가 1899년 장종(莊宗)으로 처음 추존되었을 때, 의소세자(懿昭世子)로 격상되었고, 곧 장종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다시 추존되자, 의소태자(懿昭太子)로 역시 격상되었다. 능원은 의령원(懿寧園)이며, 조카인 문효세자의 묘소 효창원 앞에 자리하고 있다.

 

 

 

효창원 孝昌園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 1786),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

1786, 경기 고양 200, 서오릉(西五陵)

  

반공탑과 운동장에 포위된 근현대사의 현장이 된, 조선 정조의 후궁과 조선 정조의 장자

정조(正祖)의 의빈 성씨(宜嬪 成氏), 문효세자(文孝世子)은 일제 강점기에 서오릉(西五陵)으로 천장, 사적 200, 효창원(孝昌園) 건물은 효창공원에 존속, 사적330

조선조 제22대 왕 정조(正祖)의 장자로 5세에 작고한 문효세자(文孝世子)(17821786)의 묘소 즉 효창원(孝昌園) 자리인데, 그후 이 경내에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성씨(宜嬪成氏), 순조(純祖)의 후궁인 숙의박씨(淑儀朴氏) 및 숙의박씨(淑儀朴氏)의 소생 영온옹주(永溫翁主)를 안장한 조선왕실의 묘원(墓園)이었다.

 

효창원은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묘소이다. 세자묘의 예로 조영되어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지 않았으며, 석호와 석양이 봉분 주위를 번갈아가며 배치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과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석마를 대동한 문석인 한 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1786(정조 10) 문효세자가 5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용산구 청파동 효창공원에 원호를 효창원이라 하여 묘를 조영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인 1944년에 서삼릉 경내인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효창원은 지금의 효창동과 청파동 일대에 걸쳐 소나무·밤나무 등 수림이 울창하여 매우 유수한 곳이었는데, 18945월 청일전쟁 발발 직전 우리나라에 불법으로 침공한 일본군의 주력부대인 대도(大島) 혼성여단이 지금 효창운동장 남단의 솔밭에 주둔하면서 효창원의 아름다운 경관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19246월 효창원의 일부를 떼어서 효창공원을 개설하고, 패망 직전인 19453월에는 문효세자 이하의 상기 묘소를 모두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 서삼능 경내로 천장함으로써 효창원은 그 의미와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

 

효창 공원(孝昌公園)

원래 5살의 어린 나이에 죽은,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와 몇달 후 죽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무덤으로 효창원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불순한 의도로 두 무덤은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 당하고, 이름도 효창공원이 되었다.

 

현재는 김구의 묘소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이동녕, 군사부장 조성환, 비서부장 차이석의 묘소와, 윤봉길·이봉창·백정기의 묘소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지가 있다. 원래는 지금의 공원형태가 아닌 송림(松林)이 우거지고 인적도 드물었던 곳이었으며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용산고지' 라 불리며 일본군이 숙영목적과 독립군 토벌 및 소탕작전 등을 펼쳤던 비밀작전지로도 사용되었다. 해방 후에는 일본군 숙영지가 철거되었다.

백범 김구의 묘 (1949)

삼의사묘 (1946,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임정 요인의 묘(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효창동(孝昌洞)

효창동은 조선시대 왕실의 묘역인 효창원이있던 곳이다. 동네 명칭이 된 효창원은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묘원으로 5세때 이곳에 효창묘’, 또는 애기능으로 칭하다가 고종 7년에 효창원을 승격시켰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효창원은 청파동1가에 마포구 공덕동 5거리 부근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숲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부근에서 말을 타고 지나갈 수 없도록 하마비가 효창동 6번지 49호에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이곳 마을 이름이 하마비계로 불린 적도 있다. 현재는 효창공원과 효창운동장, 백범기념관과 효창종합사회복지관이 있다.

 

효창원 (孝昌園)

 포토 보기효창공원은 198968일 사적 제330호로 조선 22대 왕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무덤이 있어 효창원(孝昌園)이라고 불렸다. 정조의 후궁이자 문효세자의 어머니인 의빈 성씨와 순조의 후궁 박숙의(朴淑儀)의 무덤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묘역이 광활하고 송림이 우거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구용산고지(舊龍山高地)라고 불렸으며, 일본군이 한때 야영지로 삼기도 했었다. 일제강점기의 경성부(京城府)가 효창원의 일부인 81460평을 공원용지로 책정한 것은 19246월의 일이며, 순환도로 ·공중변소 등을 갖추어 일반에게 공개한 것은 같은 해 8월부터였다.

 

오늘날 공원의 북쪽 높은 동산 위에는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동쪽 다른 동산에는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3의사(義士)의 묘가 있다. 3의사의 유해는 19466월에 일본에서 봉환되어 국민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공원 정문 오른쪽 언덕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으로, 이동녕(李東寧) ·조성환(曺成煥) ·차이석(車利錫) 3위의 묘가 있다.

 

언덕 위쪽으로는 어린이놀이터가 있고, 원효대사(元曉大師)의 동상이 서 있다. 공원 아래쪽에 있는 면적 27,593의 효창운동장은 196010월에 문을 연 이래 축구 ·육상 ·정구 등의 스포츠 경기가 자주 열려 왔고, 그 밖에 시민의 집회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 1786)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正祖)의 후궁으로, 정조의 장남인 문효세자를 낳았다. 본관은 창녕(昌寧). 정조의 다른 후궁들은 간택되어 들어온 후궁들이나, 의빈 성씨는 궁녀 출신의 후궁이다. 같은 해에 죽은 아들 문효세자와 함께 효창원(현재 효창공원)에 묻혀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강제 이장되어 지금은 서삼릉의 후궁 묘역에 묻혀 있다.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무덤에 각각 죽음을 애도하는 어제 신도비(御製神道碑)를 내렸는데 현재 모두 서삼릉에 옮겨져 있다. 1773,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군주, 청선군주와 함께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하였다.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

문효세자는 정조와 의빈 성씨의 소생으로 1782(정조 6)에 태어나 1786(정조 10) 5세의 어린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없던 정조는 아들의 탄생을 소원하였고 따라서 그가 두 살 때 바로 왕세자로 책봉했던 것이다. 사후 문효세자로 추증되었고 대한제국 수립 후 태자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그의 백부인 의소세자의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휘경원 徽慶園

    남양주 휘경원 문화재 사진

 

수빈 박씨(綏嬪 朴氏: 1770~1882), 1822, 경기 남양주 360, 광릉(光陵)

 

조선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

휘경원은 조선 22대 정조의 후궁 수빈(綬嬪) 박씨의 능이다. 1770년 좌찬성 준원의 딸로 태어난 수빈 박씨는 1787(정조 11) 218일 삼간택을 거쳐 빈으로 결정되었으며, 같은 해 211일 수빈의 빈호를 하사받고 입궁하였다. 1790년에는 득남을 하였는데 그가 곧 조선 23대 임금인 순조가 된다. 평소 성품이 온화하고 예절이 바르며, 검소한 생활을 하여 현빈 (賢嬪)이라 일컬었다. 아들이 왕위에 오른 지 22년만인 1822(순조 22) 1222일 세상을 떠나 지금의 이곳에 묻혔다. 그러나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1855(철종 6)에 순조의 무덤인 인릉을 다른 자리로 옮기면서 휘경원을 순강원으로 옮겼다가 1863(철종 14)에 순강원의 자리가 풍수지리학 상 좋지 못하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로 또다시 옮겨졌다.

 

묘역은 곡장을 두르고, 봉분과 석물을 배치하였는데, 봉분에는 24개의 사대석을 원형으로 둘렀으며 세밀하게 만든 석호와 양석이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망주석 및 장명등과 좌우에 문인석이 있다. 묘역 아래에는 홍살문을 중심으로 신도가 있고 정면에는 정자각이 있으며 좌측으로 어수정, 우측에는 능표각이 있는데 능표는 팔작지붕형 옥개석을 올린 형태로 유명조선국현목수빈휘경원(有明朝鮮國顯穆綏嬪徽慶園)’이라 써있다.

 

사적 제360.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拜峰山 :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산 78번지 일대) 아래에 있었으나 뒤에 두 차례나 이장하였다.

 

수빈 박씨는 1770(영조 46)에 태어나 1787(정조 11) 후궁 간택에 일등으로 뽑혀 수빈에 봉해지고 가순궁(嘉順宮)이라는 궁호를 받았다. 정조와의 사이에 순조와 숙선옹주(淑善翁主)를 두었고, 1822(순조 22)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죽었다.

 

이에 현목(顯穆)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廟號)휘경이라 정한 뒤, 상지원(相地員)을 시켜 당시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 아래에 묘역을 정하고, 1823227일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그 뒤 1855(철종 6) 인릉(仁陵 : 순조와 비 순원왕후의 능)의 천장지(遷葬地)를 구하면서 휘경원도 천장하기로 하였다. 이 해 106일 수빈 박씨의 묘소를 양주 순강원(順康園 :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묘) 우강(右岡)으로 옮겼다가 1863년 풍수지리상 부적당하다고 해 다시 양주의 달마동(達摩洞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동)으로 옮겨 예장하였다. 이어 또다시 194976일서삼릉(西三陵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경내로 이장하였다.

 

그런데 1907년에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慶嬪金氏)가 죽자 그 묘소를 수빈 박씨의 묘소가 있는 휘경원 경내 서쪽 기슭에 정한 뒤 산역(山役)을 시작해 장례를 치렀다. 여기에서 묘소의 명칭도 수빈 박씨의 원호(園號) 그대로 휘경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의 상설(象設)로는 혼유석, 장명등, 망주석 1, 문인석 1, 양석(羊石) 1, 표석(表石제각(祭閣) 등이 있었다. 또한, 휘경원을 보호하기 위해 영(, 5) 1인과 참봉 1인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현재는 혼유석과 표석만이 남아 있다.

 

동대문구 휘경동의 명칭은 수빈 박씨의 무덤인 휘경원이 있었던 것에 유래한다. 신위는 칠궁(조선시대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7명 후궁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청와대 서쪽에 있음)에 모셔져 있다. 광무 5(1901, 고종 38) 정조대왕을 정조선황제로 추승할 때 수빈을 수비(綏妃)로 추존하였다.

 

휘경원원소도감의궤

 

휘경동(徽慶洞)

휘경동은 조선시대 말기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徽慶園)이 있는 데에서 유래된다. 수빈 박씨는 판돈령부사 박준원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질과 언행이 특출하여 정조 11년 왕실의 후사를 잇기 위한 후궁 간택에 수위로 뽑혔다. 같은해, 2월에 입궁하여 가순당의 궁호를 받았다. 이어서 정조 146월에는 원자(후일의 순조)가 경복궁 집복헌에서 탄생하니 조정이 기뻐하였다. 정조 24년에는 원자가 세자에 책봉되고, 그 해 6월 왕이 승하하니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이 때 순조의 나이 겨우 11세이었다. 때문에 효의왕후가 수렴청정하였지만, 생모인 수빈의 부조도 컸던 것이다. 수빈은 1822년 순조 22년 세상을 떠났다. 순조는 양주군 배봉산 아래 휘경동 산 78번지를 묘역으로 정하고, 1823년 순조23227일을 택하여 장례식을 거행하였으며 묘소를 휘경’(徽慶)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 뒤로 왕은 세자를 데리고 자주 이곳 휘경원에 거동하니, 당시 한적한 마을이던 휘경원 일대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이름도 휘경원또는 휘경리로 불렀다. 땅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휘경동은 처음에는 휘경원으로 부르다가 차츰 휘경리, 휘경동 등으로 고쳤다.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동서 인창동 동소문 외계 휘경원으로 193641일 경성부 확장에 따라 경기도에서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휘경정으로 칭하였고, 1943610일 구제 실시로 동대문구에 속하게 되었다. 광복후 일제식 동명을 우리 고유의 명칭으로 고칠 때 휘경원을 현재 명칭인 휘경동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수빈 박씨(綏嬪 朴氏, 유빈 박씨, 1770~1882)

 

 포토 보기22대 정조의 후궁이며 23대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綏嬪 朴氏: 1770~1882)의 묘이다.수빈 박씨는 본관은 반남(潘南), 좌찬성 박준원(朴準源)의 딸로 1787(정조11) 정조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숙선옹주를 낳고 빈으로 봉해져 가순궁에 거하였으며 예절과 행실이 바르고 근검절약하는 성품으로 칭송을 받았다. 순조2212월 창덕궁 보경당에서 별세하였다. 시호는 현목(顯穆)이다. 동대문 밖 배봉산 자락에 묘를 쓰고 휘경원이라 정하였다.1855(철종6) 인릉(순조의 능)의 천장지를 구하면서 휘경원도 옮기기로 하여 진접읍 내각리 순강원 뒤로 옮겼다가 1963(철종14) 다시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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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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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