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朝鮮王陵] 원(園) - 1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원 (園) - 1
(1) 조선 전기의 園 & 墓 _
순창원 順昌園(서오릉), 순강원 順康園(광릉),
소경원 昭慶園(서삼릉), 영회원 永懷園(경기도 광명)
원(園)또는 원소(園所)란 왕세자, 왕세자빈 또는 임금을 낳은 선왕의 후궁들의 묘소
조선왕릉은 42기 (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기,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기(능40, 원14, 묘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능3, 원4, 묘5)입니다.
조선 건국 초기 국가 기반을 잡은 왕
태조(건원릉)-정종(후릉)-태종(헌릉)
조선의 문화를 꽃 피운 왕
세종(영릉)-문종(현릉)
죽음조차 알릴 수 없었던 비운의 왕
단종(장릉)-세조(광릉)-추존왕 덕종(경릉)-예종(창릉)
육신을 잃고 떠돌고 있는 넋
성종(선릉)-연산군(연산군묘)
당파 싸움에 시달린 왕
중종(정릉)-인종(효릉)-명종(강릉)
전란을 겪은 왕
선조(목릉)-광해군(광해군묘)-추존왕 원종(장릉)
청나라에 맞서 싸운 왕
인조(장릉)-효종(영릉)-현종(숭릉)
당쟁에 휩싸인 왕
숙종(명릉)-경종(의릉)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힘쓴 왕
영조(원릉)-추존왕 진종(영릉)-추존왕 장조(융릉)-정조(건릉)-순조(인릉)-추존왕 익종(수릉)
세도정치에 시달린 왕
헌종(경릉)-철종(예릉)
황제가 된 왕
고종황제(홍릉)-순종황제(유릉)
서오릉
숙종을 둘러싼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날 수 있는 가족 묘역
명릉(明陵) 익릉(翼陵) 경릉(敬陵) 홍릉(弘陵) 창릉(昌陵)
서삼릉·온릉(溫陵)
식민지 시대와 산업화가 만들어낸 왕실의 공동묘지
예릉(睿陵) 희릉(禧陵) 효릉(孝陵) 온릉(溫陵)
파주삼릉·장릉(長陵)
전란에 시달리거나 요절한, 비운의 왕과 왕비들의 능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 장릉(長陵)
태강릉(泰康陵) · 정릉(貞陵) · 연산군묘
빗나간 욕망이 휘둘린 왕과 왕비들의 능묘
태릉(泰陵) 강릉(康陵) 정릉(貞陵) 연산군묘
광릉(光陵) · 의릉(懿陵)
천연 생태박물관 수목원까지 남겨준 최고의 명당
광릉(光陵) 의릉(懿陵)
동구릉
아홉 기의 왕릉이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대의 왕릉군
수릉(綏陵) 현릉(顯陵) 건원릉(建元陵) 목릉(穆陵) 휘릉(徽陵) 원릉(元陵) 경릉(景陵) 혜릉(惠陵) 숭릉(崇陵)
홍유릉(洪裕陵) · 사릉(思陵) · 광해군묘
화려해서 더욱 서글픈 두 황제의 능
홍릉(洪陵) 유릉(裕陵) 사릉(思陵) 광해군묘
선정릉(宣靖陵) · 헌인릉(獻仁陵)
번잡한 도시의 삶 속에서 뜻밖에 만나는 울창한 습지
선릉(宣陵) 정릉(靖陵) 헌릉(獻陵) 인릉(仁陵)
융건릉(隆健陵) · 장릉(章陵)
천리를 가도 그만한 곳은 없고 천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곳
융릉(隆陵) 건릉(健陵) 장릉(章陵)
영녕릉(英寧陵) · 영월 장릉(莊陵)
도성 80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벗어난 왕릉들
영릉(英陵) 영릉(寧陵) 장릉(莊陵)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원(園) 13기(基)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호)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園 & 墓
(1) 조선 전기의 園 & 墓
경기도 순창원(서오릉)
경기도 순강원
경기도 소경원(서삼릉)
경기도 영회원
(2) 조선 후기의 園 & 墓
경기도 소령원
경기도 수경원(서오릉)
경기도 수길원
경기도 의령원(서삼릉)
경기도 휘경원
경기도 효창원(서삼릉)
(3) 대한제국의 園 & 墓
서울 영휘원
경기도 영원(홍유릉)
서울 숭인원 이진 묘
경기도 회인원 이구 묘
(1) 조선 전기의 園 & 墓
순창원 順昌園
순회세자 (順懷世子 李暊, 1551 ~ 1563), 부인 공회빈 윤씨(恭懷嬪 尹氏, ? ~ 1592),
1870년, 경기 고양 198호, 서오릉(西五陵)
조선 제13대 임금인 명종과 인순왕후의 첫째 아들
묘는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경역내에 위치한 순창원(順昌園)으로 부인인 공회빈(恭懷嬪) 윤씨(尹氏)와 함께 안장되었으나 그녀의 시신은 임진왜란 당시 행방불명 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신주(神主)로만 안장되었으며 그마저도 병자호란때 분실되자 현재는 빈 관만 안장되어 있다. 순창원은 지난 2006년, 문화재청에 의해 도굴 미수 현장이 발견돼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순창원은 조선 13대 명종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와 세자빈 공회빈 윤씨의 무덤이다. 세자의 묘로 조영하였으므로 봉분에 난간석과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으며 석물이 작고 간단하다. 봉분 주위로 석양과 석호가 번갈아 배치되어 있고, 봉분의 양 옆으로는 석마를 대동한 문석인이 자리 잡고 있다. 1563년(명종 18) 13세의 어린 나이에 순회세자가 요절하자 순창원을 조영하였다. 그로부터 29년 후인 1592년(선조 25) 세자빈 공회빈이 세상을 떠나 순창원에 합장하였다.
순회세자 이부(順懷世子 李暊, 1551 ~ 1563)
순회세자의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이며 본명은 이부(李暊)이며 조선 제13대 임금인 명종대왕 이환(李桓)의 아들이다. 7세 때인 1557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561년 윤원형의 인척인 황대임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여 책빈례(冊嬪禮)까지 마쳤으나 그녀에게 복병이 있다는 이유로 양제(良娣)로 강등시키고 다시 윤옥(尹玉)의 딸 공회빈(恭懷嬪) 윤씨(尹氏)와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가례를 치른 지 얼마 안 된 1563년 중병에 걸렸고, 명종은 대사면을 하라는 명까지 내렸으나, 바로 그 날 1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 때문에 명종의 대를 이어 중종의 손자 하성군(훗날 선조)이 대통을 이었다.
부인 공회빈 윤씨(恭懷嬪 尹氏, ? ~ 1592)
공조판서를 지낸 윤사익(尹思翼)의 손녀이자 윤옥(尹玉)의 딸로 태어났는데 정확한 생년은 미상이나 실록에 의하면 간택되었을 때 10세였다고 한다. 1561년 순회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이 되었으나 2년 뒤인 1563년에 순회세자가 서거하자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어 덕빈(德嬪)이라 불렸다. 그러나 병약했던 순회세자가 13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자 공회빈은 30년을 홀로 지내다가 1592년(선조 25) 세상을 떠났다. 공회(恭懷)는 시호이다. 순회세자 사후, 선조 즉위 후에도 궁에서 계속 생활하다가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 음력 3월 3일, 창경궁 통명전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창경궁에 빈소를 설치하고 시신을 안치하여 상례(喪禮) 절차를 진행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선조와 신하들이 의주로 급히 피난을 가면서 어가가 벽제에 이르렀을 때에야 덕빈의 시신을 후원에 임시로 가매장하라는 전갈을 보냈으나, 1593년에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그의 시신을 수습하려 하였을 때 찾지 못하였다. 당시 사평(司評) 이충(李忠)이 시신을 함춘원(含春苑)에 묻었다고 했으나 그가 이미 죽은 뒤라 덕빈의 동생 윤백상에게 찾아보게 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1603년, 결국 선조는 신주(神主)만 봉안하여 순회세자와 공회빈을 순회묘(順懷墓, 고종7년 이후 순창원)에 합장하였으나 이마저도 병자호란 때 분실되었고 순창원(順昌園)에는 순회세자의 재궁(梓宮, 관)과 공회빈의 빈 재궁만 안장되게 되었다.
순강원 順康園
인빈 김씨 (仁嬪 金氏, 1555 ~ 1613), 1755, 경기 남양주 356호, 광릉(光陵)
인조반정 후, 조선왕조가 멸망까지 즉위한 모든 왕은 그녀의 후손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이며, 인조의 할머니
순강원은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 인빈(仁嬪) 김씨의 능이다. 인빈 김씨는 1555년 김한우의 딸로 태어나 14세에 선조의 후궁이 되었다. 선조가 무척 총애하였으며 정원군(원종)을 포함해 4남 5녀를 두었다. 1613년(광해군 5) 10월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쳐 이곳 순강원에 잠들었으며, 위패는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에 봉안되었다.
순강원은 봉분 주위로 곡담이 둘려있으며, 묘비석을 비롯하여 여러 석조물이 있다. 순강원 묘역 내에는 인빈 김씨의 넷째 아들 의창군(義昌君, 1589~1645)과 부인 허씨의 묘가 있다.
천성이 온화하고 부덕하여 40여년간 선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겸양지덕으로 주위사람을 생각했고, 광해군을 몹시 두려워했으나 광해군도 인빈 김씨 앞에서는 공경하였다고 쓰여 있다. 인조는 ‘내가 군왕이 된 지 12년이 지났으나 인빈 묘 앞에 신도비를 세우지 못했다. 비록 늦었으나 비를 세우고자 한다.’하여 3년 후에 신도비를 세웠다.
순강원에는 신도비를 보호하는 비각을 비롯해 재실터, 정자각 등이 있다.이신도비에는 ‘유명조선국경혜인빈순강원(有明朝鮮國敬惠仁嬪順康園)’이라고 전서(篆書)로 쓰여 있으며, 신풍부원군 장유(張維: 효종의 장인)가 찬(撰)을 하였으며 의창군 광(義昌君 珖: 인빈 김씨의 4남)이 서(書)를 했고 신익성(申翊聖: 신흠의 자로 선조의 딸 정숙옹주의 부마)이 전액(篆額)을 하였다.
1755년(영조31)에 인빈의 위패를 원종의 잠저(潛邸)인 송현궁(松峴宮)에 봉안하고 궁호를 저경궁(儲敬宮)이라 고쳤으나 1908년(순종2)에 서울 궁정동(宮井洞) 소재 칠궁(七宮: 조선시대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임금의 모친을 모신 사당)으로 옮겼다. 묘 좌측에는 인빈 김씨의 넷째 아들 의창군의 묘와 신도비가 원내에 위치해 있다.
인빈 김씨 (仁嬪 金氏, 1555 ~ 1613)
조선의 제14대 왕 선조의 후궁이다. 추존왕 원종의 생모이자 인조의 할머니이기도 하다. 1555년(명종 10년)에 전생서주부(典牲署主薄)를 지낸 김한우(金漢佑)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효성(李孝性)의 딸 이씨이다.
그녀의 외조부인 이효성은 왕실의 일원으로, 효령대군의 아들인 보성군의 증손자이다. 또 그녀의 언니가 신경과 결혼하여 낳은 딸은 광해군의 후궁으로 책봉된 숙원 신씨이다. 1613년(광해군 5년) 음력 10월 29일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조회를 3일간 정지하라고 명하였으나 사헌부에서 "인빈은 후궁일 따름이니, 법에 조회를 중지하는 예가 없었고, 예에도 역시 근거가 없습니다. 사사로운 은혜로 예법을 폐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반대하여 무마되었다. 경
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장사지냈으며, 1755년(영조 31년), 앞서 영조가 격상한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와 격을 맞추어 경혜(敬惠)라는 두 글자 시호를 증시하고, 묘(墓)도 원(園)으로 격상하여 순강원(順康園)으로 올렸으며, 사당 역시 방(房)에서 궁(宮)으로 격상하여 저경궁(儲慶宮)으로 궁호를 올렸다. 동시, 그녀가 입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촌 언니 숙의 이씨도 경빈(慶嬪)에 추증되었다.
1908년에 왕의 사친이었던 여러 후궁들의 신주를 모두 육상궁으로 옮기며 그녀의 신주 역시 육상궁으로 옮겨졌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칠궁(七宮)에 그 위패가 모셔져 있다. 1991년 10월 25일, 그녀의 묘인 순강원이 사적 제356호로 지정되었다.
남편 선조와의 사이에서 4남 5녀를 낳았으며, 그 중 정원군(원종)의 장남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되니 그가 곧 인조이다. 인조 이후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즉위한 모든 왕은 그녀의 후손이 된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그녀의 아버지 김한우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소경원 昭慶園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 ~ 1645), 1870년, 경기 고양 200호, 서삼릉(西三陵) 비공개지역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독살된 친청(親淸) 주의자
제16대 인조(仁祖)의 첫째아들, 효종(봉림대군)의 형
능원은 원래 소현묘라 불렸으나 고종때 세자의 묘를 봉원토록 하는 제도를 시행하며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으며,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에 있는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묘, 소현세자(1612~1645)는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세자로 책봉되었다. 병자호란 후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가 8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한 뒤 1645년 영구 귀국하였으나 2개월 만에 병을 얻어 34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하였다 .
소현세자 죽음, 병사일까? 독살일까?
사적 제200호인 서삼릉(西三陵) 내에 있으며 이곳에 들어선 3기의 원(園) 가운데 가장 먼저 조성되었다. 효릉(孝陵)의 우측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군부대로 둘러싸인 비공개 지역이라 찾는 사람이 없어 고립되어 있다. 봉분 주변에 장명등과 상석, 문인석 등 여러 석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정자각은 소실된 후 복원되지 못하고 터만 남아 있다. 비공개지역으로 소경원.왕자공주묘.후궁묘.회묘.태실을 함께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럼 왜 소현세자내외는 인조의 미움을 사 죽게 되었을까?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 부부는 어느새 청인(淸人)들에게 소군(小君: 작은 임금)이라 불리며 인기를 얻었다. 그들의 활동이 활발해질수록 인조의 노여움과 불안감은 커져 갔다. 세자내외는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가 아니라 청나라를 뒤에 업은 강력한 정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9년의 볼모를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환대를 받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 ~ 1645)
인조와 인렬왕후 한씨의 적장자이다. 이름은 이왕(李氵+㞷)이고, 본관은 전주이며 효종(봉림대군)의 동모형이다. 빈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 강씨이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의 한사람으로 잡혀갔으며 베이징에서 만난 천주교선교사 아담 샬 등과 서구 문명을 접하고는 반청 사상을 버리고 친청으로 돌아섰다. 1644년 11월에 석방되어 3개월만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 후 반청 사상을 고수하던 아버지 인조와 갈등하던 중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다. 1645년 음력 2월 9년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음력 4월 26일 갑자기 숨을 거두는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세자가 죽고 난 뒤, 곳곳에 검은 반점이 나고, 시신이 빨리 부패했다는 점에 인조와 인조의 총애를 받던 소용 조씨(조귀인)가 의원 이형익을 시켜 그를 독살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1645년 음력 6월 27일 《인조실록》에는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이 실려 있다.
1645년 음력 6월 그의 동생 봉림대군이 귀환하자 본인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세자에 책봉시켰다. 그해 음력 8월 강빈의 동생 강문성이 장사 날짜가 불길하다고 지관인 최남을 찾아가 항의하였는데, 인조가 이 말을 듣고 노해서 강문성과 문명, 문두, 문벽 4형제를 먼 고을에 유배시켰다. 그 뒤 세자빈 강씨와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고, 조소용은 세자빈 강씨가 소용 조씨를 저주했다고 무고하였다
1646년 세자빈 강씨의 궁녀 계향과 계환이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옥에서 죽었다. 이 혐의로 강씨는 별궁에 유치되었으며, 강씨가 인조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김자점의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당시에 첫째 석철은 12살이었고, 둘째 석린은 8살이었으며, 셋째 석견은 4살이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석철을 아깝게 여겨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했지만, 석철은 결국 1648년 음력 9월 18일 제주도에서 장독으로 죽었고, 둘째 석린은 같은해 음력 12월 23일 병으로 사망했다. 셋째 경안군 석견은 효종의 즉위 후 복위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강빈의 친정 노모와 4형제 또한 죽음을 피하지 못하였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서 돌아오기 전 청의 황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주었는데, 소현세자는 황제의 벼루인 용연(龍硯)을 청했고, 봉림대군은 볼모로 잡혀온 백성들과 함께 갈 수 있기를 원했다. 돌아와서 인조를 만난 두 아들은 자신들이 받은 선물에 대해 답하자, 인조가 노하여 소현세자가 받아온 벼루를 그에게 집어던지며 용연석이라 외쳤는데, 이 말이 ‘요년석’ 또는 ‘요녀석’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소현세자가 죽은뒤 인조는 왕권강화 차원에서 세손(世孫:소현세자의 장자)을 폐위하고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하였다.인조는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에게도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 역시 임금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씌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효종 때 두 아들은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효종은 살아남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을 석방하자고 건의하는 황해감사 김홍욱(金弘郁)을 때려죽였다고 전한다. 이후 숙종 때 강빈의 옥사를 억울하게 여기고 소현세자와 함께 복위되었다.
19세기 말에는 그의 후손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일본의 개항보다 2백년이 앞선 것으로 조선이 세계정세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역사소설 소현세자 ] 오마이뉴스
영회원 永懷園 (애기능)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 1611 ~ 1646), 1870년, 경기 광명 357호
제16대 인조의 원자인 소현세자의 부인, 당시 조선의 금지어
이 묘소는 조선조 제16대 인조의 원자인 소현세자의 강씨(민희빈)가 잠든 능원이다. 이 묘소는 조선조 제16대 인조의 원자인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愍懷殯)가 잠든 능원이다. 세자빈 강씨는 우의정을 지낸 문정공 강석기의 딸로 인조5년(1627년)에 세자빈이 되었으나 병자호란의 여파로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갔다가 귀국하였다. 심양에서의 볼모생활 동안 소현세자를 도와 조정을 대표하여 진취적인 태도로 조선 백성의 구제 및 양국간의 관계 조정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귀국 후 두달만에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어 귀국하게 되었다. 이 후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조의 후궁 조씨 등이 민회빈이 왕실을 저주한다고 무고하여 인조23년(1645년)에 폐빈 되고 그 다음해 죽임을 당하였다.
그 뒤 숙종 44년(1718년)에 세자빈 강씨의 결백함이 밝혀져 민회빈으로 복위되고 고종7년(1870년)에는 영회원이라 개칭하였다. 현재 능원의 봉분앞에는 혼유석, 장명등이 있고 봉분의 좌우에는 문인석, 망주석, 석양, 석마 ,석호등이 남아 있다.
애기능
강빈(姜嬪)의 묘소를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 옛사람들은 큰 무덤을 능(陵)이라 불렀다. 그 중에서도 임금의 능보다 좀 작으나 일반인들의 무덤보다는 큰 무덤이 애기능이다.
'소현세자가 살아 왕이 되었으면 왕비가 되어 호화로운 무덤에 묻혔을 텐데 안타깝게 친정동네에 이름 없이 묻혔구나!'
소현세자 빈인 강씨의 묘가 왜 여기에 있을까? 강씨는 금천강씨로 이곳 아방리(현 노온사동)에 친정이 있었고, 지금 능이 있는 곳은 선영이기 때문이다.
세자빈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 1611 ~ 1646)
조선 소현세자의 부인이다. 병자호란으로 남편 소현세자와 함께 도르곤에 의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귀환했다.
. 민회빈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상소를 처음 올린 김홍욱은 국문을 받던 중 장살되었는데, 이는 민회빈의 무죄가 알려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그해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세자가 되었고, 강빈과 대립관계에 있던 조소용(훗날의 귀인 조씨)이 인조를 저주했다고 강빈을 무고하여 그의 형제들을 모두 유배시키자, 강빈은 인조에게 조석문안도 거부한다. 1646년 정월 강빈 궁 소속의 궁녀들이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은 혐의로 가혹한 고문을 당했는데, 강빈은 이 혐의로 별당에 유치되고, 1646년 3월에 사약을 내려 죽게 한다. 강빈의 노모와 4형제는 모두 처형 당한다. 1646년 강빈의 죽음 이후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진다. 그곳에서 1648년 첫째 석철은 장독으로 죽고, 둘째 석린은 병으로 죽게 되며, 셋째 석견(경안군)은 작은 아버지인 효종 때에 귀양에서 벗어났다.
인조에 의해 법살당했으나 당대에도 신독재 김집, 송시열, 김홍욱, 송준길 등은 그녀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 여러 번 억울함을 신원하는 상소가 올려졌으나 거절되었고, 숙종 때 송시열이 다시 그녀의 억울함을 주장하여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숙종 때 송시열, 김수항 등의 신원 상소로 복관되었다.
강빈과 그녀의 아들들의 옥사는 김자점과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 일파의 정치공세성 성격이 짙었으므로 김집 등은 효종 때 경안군(강빈의 셋째 아들)의 석방을 탄원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서인 산림 계열은 그녀가 억울하게 죽었다 보고 김집, 송시열, 송준길은 소현세자와 강빈의 명예 회복과 복권을 여러번 건의하였다. 이 때문에 남인으로부터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기도 했다.
효종 즉위후 5년째 되던 해에 구언에 의해 황해감사 김홍욱은 강빈 옥사의 조작을 탄원하며 억울하게 옥사로 죽은 강빈의 신원회복과 소현세자의 살아있는 셋째 아들 석견(경안군)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효종은 김홍욱을 국문 끝에 장살로 죽였다. 숙종 때 송시열이 다시 그녀의 억울함을 주장하여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김수항의 신원 상소로 복관되었다. 조선 숙종은 1718년 그녀의 무혐의를 인정하고, 민회(愍懷)라는 시호를 내려 복권시켰다. 억울하게 죽은 지 80년 만이었다.
당대에 이미 법살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라 동정되었다. 그의 억울한 죽음을 주장했던 황해도관찰사 김홍욱은 장살로 고문치사하기도 했다. 이후 그녀의 죽음은 금기사항이었지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은 계속 그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주장하여 결국 숙종때에 가서 명예회복을 하게 된다.
이정근의 '역사소설 민회빈강' 오마이뉴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대, 517년, 1392 - 1910 ]
원(園) 13기(基)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호)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익종(翼宗) 一 수릉(綏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一 융릉(隆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一 영릉(永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一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一 경릉(敬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제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一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一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호)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기(基)
제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一 유릉(裕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제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一 홍릉(洪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시
왕릉 35기
제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一 예릉(睿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一 경릉(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제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一 인릉(仁陵 : 사적 제194호)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제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一 건릉(健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二 홍릉(弘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一 원릉(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二 혜릉(惠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一 의릉(懿陵 : 사적 제204호)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三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二 익릉(翼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一 명릉(明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제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一 숭릉(崇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一 영릉(寧陵 : 사적 제195호)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二 휘릉(徽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一 장릉(長陵 : 사적 제203호)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二 성묘(成墓 : 사적 제365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一 목릉(穆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一 강릉(康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一 효릉(孝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三 희릉(禧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二 온릉(溫陵 : 사적 제210호)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一 정릉(靖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三 회묘(懷墓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二 순릉(順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一 선릉(宣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路)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二 공릉(恭陵 : 사적 제205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一 창릉(昌陵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7대 세조(第七代 世祖) 一 광릉(光陵 : 사적 제197호)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二 사릉(思陵 : 사적 제209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一 장릉(莊陵 : 사적 제196호)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제5대 문종(第五代 文宗) 一 현릉(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4대 세종(第四代 世宗)
제3대 태종(第三代 太宗)
제2대 정종(第二代 定宗)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三 정릉(貞陵 : 사적 제208호)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二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一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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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