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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원(園) - 3 대한제국의 園 & 墓 _ 흥원 興園, 영휘원 永徽園, 영원 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草霧 2013. 8. 21. 17:49

 

 

조선왕릉[朝鮮王陵] 원(園) - 3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3

  

(3) 대한제국의 & _ 흥원 興園(남양주), 영휘원 永徽園(의릉),

영원 英園(홍유릉), 숭인원 崇仁園(의릉), 회인원 懷仁園(홍유릉)

 

()또는 원소(園所)란 왕세자, 왕세자빈 또는 임금을 낳은 선왕의 후궁들의 묘소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조선 건국 초기 국가 기반을 잡은 왕

태조(건원릉)-정종(후릉)-태종(헌릉)

 

조선의 문화를 꽃 피운 왕

세종(영릉)-문종(현릉)

 

죽음조차 알릴 수 없었던 비운의 왕

단종(장릉)-세조(광릉)-추존왕 덕종(경릉)-예종(창릉)

 

육신을 잃고 떠돌고 있는 넋

성종(선릉)-연산군(연산군묘)

 

당파 싸움에 시달린 왕

중종(정릉)-인종(효릉)-명종(강릉)

 

전란을 겪은 왕

선조(목릉)-광해군(광해군묘)-추존왕 원종(장릉)

 

청나라에 맞서 싸운 왕

인조(장릉)-효종(영릉)-현종(숭릉)

 

당쟁에 휩싸인 왕

숙종(명릉)-경종(의릉)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힘쓴 왕

영조(원릉)-추존왕 진종(영릉)-추존왕 장조(융릉)-정조(건릉)-순조(인릉)-추존왕 익종(수릉)

 

세도정치에 시달린 왕

헌종(경릉)-철종(예릉)

 

황제가 된 왕

고종황제(홍릉)-순종황제(유릉)

 

서오릉

숙종을 둘러싼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날 수 있는 가족 묘역

명릉(明陵) 익릉(翼陵) 경릉(敬陵) 홍릉(弘陵) 창릉(昌陵)

 

서삼릉·온릉(溫陵)

식민지 시대와 산업화가 만들어낸 왕실의 공동묘지

예릉(睿陵) 희릉(禧陵) 효릉(孝陵) 온릉(溫陵)

 

파주삼릉·장릉(長陵)

전란에 시달리거나 요절한, 비운의 왕과 왕비들의 능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 장릉(長陵)

 

태강릉(泰康陵) · 정릉(貞陵) · 연산군묘

빗나간 욕망이 휘둘린 왕과 왕비들의 능묘

태릉(泰陵) 강릉(康陵) 정릉(貞陵) 연산군묘

 

광릉(光陵) · 의릉(懿陵)

천연 생태박물관 수목원까지 남겨준 최고의 명당

광릉(光陵) 의릉(懿陵)

 

동구릉

아홉 기의 왕릉이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대의 왕릉군

수릉(綏陵) 현릉(顯陵) 건원릉(建元陵) 목릉(穆陵) 휘릉(徽陵) 원릉(元陵) 경릉(景陵) 혜릉(惠陵) 숭릉(崇陵)

 

홍유릉(洪裕陵) · 사릉(思陵) · 광해군묘

화려해서 더욱 서글픈 두 황제의 능

홍릉(洪陵) 유릉(裕陵) 사릉(思陵) 광해군묘

 

선정릉(宣靖陵) · 헌인릉(獻仁陵)

번잡한 도시의 삶 속에서 뜻밖에 만나는 울창한 습지

선릉(宣陵) 정릉(靖陵) 헌릉(獻陵) 인릉(仁陵)

 

융건릉(隆健陵) · 장릉(章陵)

천리를 가도 그만한 곳은 없고 천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곳

융릉(隆陵) 건릉(健陵) 장릉(章陵)

 

영녕릉(英寧陵) · 영월 장릉(莊陵)

도성 80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벗어난 왕릉들

영릉(英陵) 영릉(寧陵) 장릉(莊陵)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

    

 

(1) 조선 전기의 &

경기도 순창원(서오릉

경기도 순강원 

경기도 소경원(서삼릉

경기도 영회원 

 

(2) 조선 후기의 &

경기도 소령원 

경기도 수경원(서오릉

경기도 수길원 

경기도 의령원(서삼릉

경기도 휘경원 

경기도 효창원(서삼릉

 

(3) 대한제국의 &

서울 영휘원 

결기도 흥원 

경기도 영원(홍유릉

서울 숭인원 이진 묘 

경기도 회인원 이구 묘 

 

 

 

 

 

      

 

 

 

(3) 대한제국의 &

 

(3) 대한제국의 & _ 흥원 興園(남양주), 영휘원 永徽園(의릉),

영원 英園(홍유릉), 숭인원 崇仁園(의릉), 회인원 懷仁園(홍유릉)

 

 

  

 

흥원 興園

 

   

 

헌의대원왕(흥선대원군 이하응, 李昰應, 1820 ~ 1898),

순목대원비(여흥부대부인 민씨, 驪興府大夫人 閔氏, 1818 ~ 1898),

1908, 경기 남양주 48

 

궁도령으로 스스로 몸을 낮추고 대리섭정으로 천하권력을 손에 쥐니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의 부모,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

1898(광무 2) 2월에 흥선대원군은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현재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4)의 운현궁 별장 아소당에서 사망하였고, 유해는 흥선대원군이 생전에 직접 터를 잡아두었던 아소당 뒤뜰에 매장되었다. 1908(융희 2) 129(음력 19071229)에 경기도 파주 운천면 대덕동(현재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 운천리)으로 천봉(遷奉: 왕실의 묘를 이장하는 일)하면서 흥원(興園)으로 격상되었다. 천봉은 1907(융희 1) 1110일에 시작되어서 1908(융희 2) 21일에 마무리되었다. 1966년에 흥원 일대에 미군 군사시설이 조성되면서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다시 이장되었다.

 

흥선대원군묘 바로 옆에는 납골묘 형태의 운현궁 가족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묘역에는 흥선대원군의 증조부 낙천군 이온(洛川君 李縕, 1720~ 1737)과 부인 달성 서씨(達城 徐氏), 흥선대원군의 조부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禛, 1755~ 1771)과 남양 홍씨(南陽 洪氏), 흥선대원군의 장남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1845~ 1912)과 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여주 이씨(驪州 李氏), 흥선대원군의 장손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1870~ 1917)과 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광산 김씨(光山 金氏),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문용(사람 이름 문.jpg, 1882~ 1901), 흥선대원군의 증손 이우(李鍝, 1912~ 1945)와 부인 박찬주(朴贊珠), 흥선대원군의 고손 이종(李淙, 1940~ 1966)이 매장되어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 ~ 1898)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화가이며 대한제국의 황족, 추존왕이다.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고종 황제(高宗皇帝)의 친아버지이다. 1863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하여 양반·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의 일당독재를 타도하고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였으며,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18641월부터 187311월까지 조선의 국정을 이끌었다. 직접 며느리 명성황후를 간택[주해 1]하였으나, 도리어 명성황후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된다. 187311월 명성황후와 유학자 및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에 의해 축출된 이후 명성황후와 권력투쟁을 벌였다. 일본인과 결탁하여 며느리 명성황후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유길준에 따르면 대원군은 명성황후를 제거해 달라고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부탁했다고 한다.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및 고종을 폐출하고 흥친왕, 이재선 등을 조선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손자 영선군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여러 번 정변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을미사변의 조선인 주요 협력자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쇄국정책과 천주교도 대량 학살, 무리한 경복궁 중건 과정, 일본에 명성황후의 제거를 청탁한 점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성 출신으로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해동거사(海東居士)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907101일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되었고, 헌의(獻懿)를 시호로 받아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되었다.

 

1895년말 대원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을 정하여 유폐생활을 강요당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은퇴하여 다시 양주로 가서 은거하다가 18981월 부인 여흥부대부인의 죽음을 본 후, 2월 운현궁 별장 아소당에서 죽었다. 그의 장례식에 아들 고종은 불참하였다 한다. 사망 직후 '아소당' 뒤뜰에 묻혔으며, 묘호는 흥원(興園)이라 명명되었다. 만년에는 국태공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그가 죽자 한성부에서는 7일장을 했으나, 고종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순종 즉위 후 1907826일 장례원경(掌禮院卿) 이중하(李重夏)가 그를 대원왕으로 추존할 것을 건의하였고, 1907101일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이에 따라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이라고도 부른다.

 

1898516일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에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처음 묻혔다가 1908130일 경기도 파주군 운천면 대덕동으로 이장되었다. 1907년 왕의 예로써 다시 장례하라는 명이 내려진 이후 흥원의 천봉은 융희(隆熙) 원년(1907) 1110일에 시작돼 융희 2(1908) 21일에 마무리됐다. 1966616일 다시 경기도 남양주군으로 이장되었다,

 

흥선대원군묘 (興宣大院君墓)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묘이다. 그는 철종이 후계자 없이 죽은 후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조대비와 힘을 합하여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뒤의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대원군이 되어 직접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 세도정치 근절, 서원철폐, 세제개혁, 법전정비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으며, 밖으로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조선을 중흥할 과감한 혁신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서양세력의 접근에 대해서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통해 통상요청을 거부하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는 그들의 침략을 무력으로 저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여 백성들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근대 문명의 수용이 늦어졌으며, 집권 후반기에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와 대립하게 되어 정치에서 실권을 잃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묘는 고양군 공덕리에 모셨다가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옮겼으며 19664월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묘 주위에는 돌담이 둘러져 있고, 묘역은 2단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상단에는 둘레석을 두른 봉분과 제물을 올려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이 있고, 하단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 등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조선< 朝鮮 > 말기< 末期 >에 개혁 정치를 실시한 흥선대원군 이하응< 李昰應 >(18201898)의 묘이다. 그는 고종< 高宗 >황제< 皇帝 >의 생부< 生父 >로서 자< >는 시백< 時伯 >, < >는 석파< 石坡 >, 시호< 諡號 >는 헌의< 獻懿 >이다. 철종< 哲宗 >1863년에 승하< 昇遐 >하자 후사< 後嗣 >가 없었으므로 신정왕후< 神貞王后 > 조씨< 趙氏 >에 의해 그의 둘째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이 되어 섭정< 攝政 >을 하게 되었다. 그는 국내외가 복잡다단하던 때 과감한 서정개혁에 착수하였다.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외척 세도를 일소하였으며 서원을 철폐하여 당쟁의 폐를 없애는 데 노력하였다. 대전회통< 大典會通 >등 법전을 완비하여 중앙집권적 정치기강을 확립하고, 비변사< 備邊司 >를 폐지하여 의정부< 議政府 >의 기능을 부활시키고 삼군부< 三軍部 >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다. 세제를 개혁하여 국고를 충실히 하였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경복궁< 景福宮 >을 중건하였다. 한편으로는 천주교를 탄압하였고,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비하여 서양의 통상 요청을 거부하고 1866년에 프랑스군(병인양요< 丙寅洋擾 >), 1871년에 미군(신미양요< 辛未洋擾 >)이 각각 강화도< 江華島 >로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시켰고, 일본의 국교 교섭 요구도 거부하는 강경한 대외정책을 폈다. 그는 집권 10년 만에 명성황후< 明成皇后 >와의 알력으로 1873년에 은퇴하였다. 그후 1882년 임오군란< 壬午軍亂 >이 일어나자 다시 집권하였으나, < >나라에 강제 납치되어 텐진< 天津 >4년간 갇혀 있기도 하였다. 묘는 1898년 고양군 공덕리에 모셨다가 1906년에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 移葬 >되었으며, 1966년에 다시 현 위치로 옮겨졌다.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 1818 ~ 1898)

조선의 왕족, 조선 고종의 어머니. 민치구의 딸로, 흥선대원군과 혼인하여 21녀를 두었다. 며느리인 명성황후와는 12촌간이다. 186312월 둘째 아들 이명복의 즉위 이후 여흥부대부인으로 봉작되었다. 모계로는 덕흥대원군가문의 외손이기도 하며,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6대손녀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에게 명성황후를 천거하여 며느리로 간택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한다. 또한 부대부인은 영세를 받은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다. 시호는 순목(純穆)으로, 1907년 왕비로 추증되어 순목대원비(純穆大院妃)로 추봉되었다. 따라서 순목대원왕비, 순목왕비 등으로 부른다.

 

잃어버린 역사의 뒤안길을 찾아서

 

 

영휘원 永徽園

 

▲ 순헌 귀비 엄씨의 무덤. 원은 왕릉과 달라서 석물이 작고 무인석이 생략되며 무덤 규모도 작다. 석양과 석호도 절반으로 줄어 양쪽에 한 쌍씩 4마리가 서 있다.

 

 

26대 고종의 후궁 순헌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854 1911),

1911,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 361, 의릉(懿陵)

 

26대 고종의 후궁, 영친왕의 생모, 근대여성 신교육의 설립

영휘원은 26대 고종의 후궁 순헌귀비 엄씨의 능이다. 묘역에는 홍살문, 정자각과순헌엄비 영휘원이라 쓰인 비가 있는 비각이 있고, 병풍석 대신에 호석을 두른 무덤과 혼유석, 망주석 1, 장명등, 문석인 2, 석마, 석호, 석양이 각기 2구씩 갖추어져 있다. 순헌귀비가 1911년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에 청량리에 능을 조영하였다.

 

영휘원의 규모는 55,015이다. 엄귀비는 185411월 증찬정(贈贊政) 엄진삼(嚴鎭三)의 장녀로 태어나 8세에 경복궁에 들어가 명성황후 민씨의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아관파천 때 고종을 모시며 후궁(後宮)이 되어 1897년 영친왕 이은을 출산하였다. 귀인(貴人)에 봉해졌고, 1901년 비()에 진봉되고, 1903년에는 황비(皇妃)에 책봉되었다. 191172058세로 별세하여, 순헌(純獻)이라 시호를 올리고, 8월에 양주 천수산(天秀山)에 무덤을 만들고, 원호는 영휘라 하였다. 위패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에 봉안되어 있다.

 

서울 영휘원 산사나무, 천연기념물 제506

 

영휘원과 홍릉 이야기

 

1. 천장산 부근 조선 왕실의 능터

의릉은 천장산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 줄기가 뻗어 내려오다가 천장산으로 이어지는 이 지대는 풍수지리적으로 뛰어난 길지로서 조선 왕실의 능터로 사용되었다. 이 주변으로는 26대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의 묘인 영휘원과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아들 이진의 묘인 숭인원이 자리 잡고 있다.

 

2. 홍릉으로 오해받는 영휘원

영휘원에 엉뚱하게도 이곳이 홍릉이 아니냐는 문의 전화가 심심치 않게 걸려온다. 뿐만 아니라 영휘원과 맞붙은 수목원은 홍릉 수목원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릉(洪陵)이 있고,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영조의 비 정성왕후의 홍릉(弘陵)이 위치하지만, 이 근방에는 홍릉이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곳의 수목원을 홍릉수목원이라고 부르고, 영휘원을 홍릉으로 착각하게 되었을까?

 

3. 명성황후의 홍릉이 있던 자리

의릉과 영휘원이 있는 현재의 동대문구 청량리동 일대는 왕실의 능터이자 조선 왕실 소유의 국유림이었다. 1895(고종 32) 을미사변으로 인해 명성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능을 현재의 산림과학원 안에 쓰게 되면서 이곳이 홍릉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1919216일 명성황후를 모신 홍릉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설이 거론되어, 현재의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옮겨졌고, 고종의 능과 합장을 하게 되었다. 명성황후의 능이었던 홍릉은 옮겨졌지만, 지명으로 여전히 남아 근방의 영휘원이 홍릉으로 종종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4. 영휘원에 잠든 순헌귀비

영휘원에 잠든 순헌귀비는 일반인에게 엄상궁으로 익숙하다. 50세 전후의 나이 많은 궁녀였던 그녀가 갑자기 고종의 승은을 입게 되어 후궁으로 발탁되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는 자신의 슬하에 있던 늙고 못생긴 궁녀가 남편과 동침을 한 것에 자존심이 상하여, 화를 내며 그녀를 대궐 밖으로 내쫓았다. 그로부터 10년 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었고, 엄상궁은 다시 대궐에 들어와 고종의 수발을 들게 되었다.

 

5. 여성의 신교육에 공헌한 순헌귀비

순헌귀비는 고종의 승은을 입게 되었을 당시 늙고 못생긴 여인이라고 하여 주위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공포 분위기가 짙게 깔린 대궐에서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시키는 등 왕의 부인으로서의 기품과 기지를 발휘하였다. 뿐만 아니라 생전에 모은 재산으로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여성들의 신교육을 위해 애썼으며, 나라를 짊어지고 나아갈 인재를 키우는 교육에 큰 도움을 주었다.

 

6. 일제 강점기 조선 왕실의 비극

고종과의 사이에는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영친왕이다. 1911718일 순헌귀비는 대궐에서 고종과 함께 황태자인 아들이 힘들고 고된 훈련을 받으며 점심으로 주먹밥을 먹는 광경을 활동사진으로 보게 되었다. 순헌귀비는 이 영상에 충격을 받고 입에 물고 있던 떡에 급체하여 이틀 후인 1911720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이곳 영휘원에 잠들게 되었다.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854 - 1911)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85411- 1911720)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후궁이다. 대한제국 성립 이후 황비로 책봉되었다. 8세에 입궐하여 을미사변 직후 고종의 시중을 들다 총애를 받아 영친왕 은을 출산하고 이후 상궁에서 귀인으로, 순빈을 거쳐 엄비가 되었다가 다시 황비가 되었다. 1911년에는 황귀비가 된다.

 

1907년 영친왕은 11세에 일본 유학이라는 형식 하에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고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경술국치의 변을 당했다. 귀비 엄씨는 나라를 잃은 슬픔과 아들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지내다 191158세로 눈을 감아 청량리 영휘원에 안장되었고, 신위는 덕안궁에 모셨다가 1929년 육상궁(칠궁)에 모셔져 있다. 후에 그녀의 생전에 얼굴을 못본 장손 이진이 갑자기 독살당하면서 그녀의 묘소 건너편에 안장되었다.

 

일설에는 계비란 말을 쓰기도 하는데 계비란 정식으로 책봉된 두 번째 정궁(正宮)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황후가 아닌 황귀비에 책봉된 순헌황귀비에게는 옳지 않은 칭호이다. 본관은 영월이며 185415일 서울에서 증찬정(贈贊政) 엄진삼(嚴鎭三)의 맏딸로 태어났다. 1905년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 1906년 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고등학교)와 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세웠다.

 

고종의 '아관파천' 주도한 엄 상궁

 

영원 英園

 

 

의민태자 영친왕 이은 (懿愍太子 英親王 李垠, 1897~1970),

부인 의민태자비 이방자(李方子, 1901~1989),

1970, 경기 남양주 207, 홍유릉(洪裕陵), 비공개지역

  

나라 잃고 일본에서 살다 간 비운의 마지막 황태자

26대 고종의 후궁 순헌귀비 엄씨의 아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1897~1970)과 방자비의 합장묘이다. 영친왕의 이름은 은()이며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비 엄씨이다. 순종과는 이복형제간이다. 1900(광무 4) 영왕(英王), 1907(융희 1)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1907년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되면서 융희황제(순종)가 이왕(李王)으로 폐위되자, 그도 황태자에서 왕세제가 되었다. 1920년 일본의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나시모토 마사코(方子)와 정략결혼을 했다. 1921년 얻은 아들 진()은 다음해 한국 첫 방문길에 잃고, 1931년 둘째 아들 구()를 얻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형식상 왕위계승자가 되어 이왕으로 불렸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귀국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 1963년 국적을 회복하고 방자비와 함께 귀국했다. 영원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 내에 있다.

입구에는 제실이 있으며, 묘역에는 나지막한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봉분과 석물을 조성하였다. 제실은 정면 6, 측면 2칸의 일자형 팔작지붕 건물로 다른 곳에 비해 아담한 편이다. 봉분은 둘레돌 대신 연꽃 문양을 조각한 난간석을 둘렀고, 봉분 앞으로 석양(石羊상석(床石망주석(望柱石장대석(長臺石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마석(馬石장명등(長明燈)을 두었다. 상석은 4개의 북석으로 받치고 있는데 북석에는 귀신을 쫓아 준다는 귀면(鬼面)무늬가 새겨져 있다. 또 망주석의 받침돌은 팔각형으로 그 위에 안상(眼象)문양과 꽃잎이 위로 향한 꽃문양, 그리고 청설모를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문인석으로 금관조복형(金冠朝服形)이며, 장명등은 사각형의 받침대 모양으로 사방에 꽃문양을 새기고 그 위에 불창을 만들었다. 묘역은 해방 이후에 조성되었지만, 그 형태나 조각이 홍릉·유릉의 영향을 많이 받아 양식이 비슷하다.

 

이 외에 홍유릉 능역 안에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고종의 후궁 귀인 장씨의 소생인 의친왕(義親王, 1877~1955)의 묘,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光華堂, 1887~1970) 이씨의 묘, 고종의 후궁인 삼축당(三祝堂, 1890~1972) 김씨의 묘, 고종과 후궁 귀인 양씨의 딸인 덕혜옹주(1912~89)의 묘, 그리고 의친왕 계비인 수인당 묘가 있으며, 영친왕의 아들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의 회인원이 최근 2005년 조성되어 있다.

 

 

의민태자 영친왕 이은 (懿愍太子 英親王 李垠, 1897~1970)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며, 일본 제국의 군인, 일제 강점기의 이왕(1926~ 1945)으로 본관은 전주, 휘는 은(), 아명은 유길(酉吉)이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순헌황귀비 엄씨이다. 순종 및 의친왕과 덕혜옹주의 이복 형제이다. 의민태자는 사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시호로 정식 시호는 아니다. 흔히 영친왕(英親王)으로 지칭한다. 영친왕의 이름은 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비 엄씨이다. 순종과는 이복형제간이다. 1900(광무 4) 영왕(英王), 1907(융희 1)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1907년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되면서 융희황제(순종)가 이왕(李王)으로 폐위되자, 그도 황태자에서 왕세제가 되었다. 1920년 일본의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나시모토 마사코(方子)와 정략결혼을 했다. 1921년 얻은 아들 진()은 다음해 한국 첫 방문길에 잃고, 1931년 둘째 아들 구()를 얻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형식상 왕위계승자가 되어 이왕(李王)으로 불렸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귀국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63년 국적을 회복하고 방자비와 함께 귀국했다.

 

사후에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시호를 의민(懿愍)으로 올려 시호는 문인무장지효명휘의민황태자(文仁武莊至孝明暉懿愍皇太子)이나, 이는 정식 시호가 아닌 사시(私諡)에 속한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사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편이다. 실질적으로 한국을 통치한 적은 없으나 1926년 이복 형 순종의 사후 창덕궁에서 즉위 의식을 가졌다.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뒤에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변경)에 위치한 홍·유릉에 안장되었으며 원호(園號)는 영원(英園)이다. 위패는 종묘 영녕전 제16실에 모셔져 있다. 시호(諡號)는 의민(懿愍), 존호(尊號)는 문인무장지효명휘(文仁武莊至孝明暉)이나, 대한제국이 소멸된 상황에서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주관하에 결정된 시호이므로 정식 시호라기보다 사시(私諡)에 가깝다. 그의 사후 미망인 방자(方子)는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에서 생활하면서 명휘원(明暉園)을 운영하였다.

 

2005년 친일인명사전 명단 지정에서 제외되었고, 2008년의 친일인명사전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가 일본군의 육군 중장까지 지낸 점과, 일본의 왕족으로 대우받은 점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부인 의민태자비 이방자(懿愍太子妃 李方子, 1901~1989)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 なしもとのみや まさこ)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의민태자 이은(李垠)의 비이다. 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私諡)는 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이다. 1916,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과 약혼하였다. 1921, 장남 진()을 낳았다. 그러나 이듬해, 첫돌도 채 지나지 않은 진을 조선 방문 중에 잃는 슬픔을 경험했다. 1931, 둘째 구()를 낳고 다시 단란한 생활을 하였으나 1945, 일본의 패전 후 이왕가(李王家)가 폐지됨에 따라 신분이 강등되어 재산을 몰수당하고, 의민태자의 복권을 두려워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로 귀국마저 좌절되자 재일 한국인으로서 고된 삶을 살았다. 1960,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 새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청으로 1963,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창덕궁(昌德宮) 낙선재에 기거하였다.

 

1963,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에 취임하기도 하였으며 1966, 자행회(慈行會), 1967, 명휘원(明暉園)을 각각 설립, 1970, 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설립하였다. 1973, 숙원 사업이었던 영친왕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으며 1982년에는 광명시의 명혜학교(明惠學校) 이사장으로 재직하는 등, 한국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존경받았다. 일본에서는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은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1989430,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서 운명하였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다. 200611, 일본 후지TV에서 의민태자 부부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 "무지개를 이은 왕비(ける王妃)가 방영되어 논란이 되었다.

 

황태자비를 부르는 명칭은 영친왕비, 영왕비, 이방자 여사 등이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은의 영왕 칭호는 결혼 전에 폐지되었기 때문에 황태자비 또한 태자비(세자비)로서 혼인한 것이며, 친왕(왕자)과 황태자(왕세자)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영친왕비가 아닌 의민황태자비로 부르는 것이 옳다. 흔히 이방자 여사라고 부르는데, 이방자라는 이름 자체가 일본식으로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에서 신부의 성인 나시모토(梨本)를 떼고 신랑의 성인 이()를 붙여 이방자(李方子)로 칭하게 된 것이고 여사라는 명칭 또한 황태자비의 존칭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숭인원 崇仁園

 

고종황제의 넷째 아들 의민황태자(영친왕)의 큰아들인 원손 이진(元孫 李晉, 1921 ~1922), 1922,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 361, 의릉(懿陵)

 

 

 

26대 고종황제의 넷째 아들 의민황태자(영친왕)의 큰아들

숭인원은 고종황제의 넷째 아들 의민황태자의 큰아들인 이진의 무덤이다. 병풍석 대신에 호석을 두른 무덤과 혼유석, 망주석 1, 장명등, 문석인 2, 석마, 석호, 석양이 각기 2구씩 갖추어져 있다. 순종황제는 이진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성인 왕족의 장례와 동일하게 후히 장례를 치르도록 분부하고 원호를 숭인원이라 하였으며, 이진의 조모 순헌귀비 엄씨의 무덤인 영휘원 남측 경내에 조성하였다.

 

 

원손 이진(元孫 李晉, 1921 ~ 1922)

 

 

이진(李晉)은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일제 강점기 이왕가의 원손이자 영친왕의 장남이며, 이구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순종 임금의 생전에 출생한 왕세손이었으나 생후 1년도 안 되어 병으로 사망했다. 일본에서 1921818일에 태어나 의민황태자 내외와 함께 귀국하였으나 1922511일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의문사하였다.

 

 

 

 

 

회인원 懷仁園

 

 

회은태손 이구(懷隱太孫 李玖, 1931~2005) 2005, 경기 남양주, 홍유릉(洪裕陵), 비공개지역

 

대한제국의 마지막 회은황세손 이구의 원()

불행한 운명으로 태어나 마지막 황세손으로 살다

이왕(李王)인 의민태자 이은(李垠)과 비() 의민황태자비 이방자(李方子)의 아들

대한제국의 마지막 회은황세손 이구의 원()이며,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권역 내 영원 옆에 자리잡고 있다. 2005년 일본에서 훙서하자 일본에서 운구를 창덕궁 낙선재으로 안치하였다가 국장을 지내고, 이해 문화재청과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주최로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권역 내 영원 옆에 예장하였다.

 

 

 

 

 

회은태손 이구(懷隱太孫 李玖, 1931~2005)

Yi Gu.jpg대한제국의 황족이자 한국계 일본인으로 대한제국 황실 제3대 수장인 영친왕 이은의 둘째 아들이며, 대한민국의 건축가, 공학자, 교육자, 사업가이다. 일제 강점기의 이왕가의 이왕세자(李王世子)이기도 했다. 한때 대한민국에 귀국,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에 교수로 출강하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일제 강점기의 두 번째 이왕(李王)인 의민태자 이은(李垠)과 비() 의민황태자비 이방자(李方子)의 아들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생전에 건축사와 대학교수 등으로 활동했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총재, 종묘제례 봉행위원회 총재로도 활동하였다.

 

한때 귀국하려 하였으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자 먼 일족인 이승만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군사 정권 박정희 때에 일시적으로 귀국하였으나 사업실패 등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체류하다 사망했다. 회은태손(懷隱太孫)으로도 불리며 사후 존호는 자인온유덕성순수회은황태손(慈仁溫裕德性純粹懷隱皇太孫)으로, 이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추서한 사시(私諡)이다. 일각에서는 그를 황태손이라 부르나 그의 지위에 대한 것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묘의 이름은 회인원(懷仁園)이다. 따라서 회은태손, 회은황태손으로 부르나 대한민국의 사학계에서는 이구를 황태손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조선왕조 마지막 황세손 이구 묘

줄리아 멀록(Julia Mullock, 이주아(李珠亞), 1923 ~ )

일본인 무당 아리타 키누코(有田絹子, Arita Kinuko, 이견자(李絹子)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