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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정보개발원 연재 조선왕릉 시리즈

草霧 2013. 8. 22. 11:24

 

 

 

영릉 2. 문예부흥시대의 풍토부동 노선

 

http://www.koreanart21.com/column/royalTombs/main?page=1

 

 

영릉(英陵) : 세종(世宗 1397-1450 *1418-1450)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

최열(미술평론가)

동방의 요순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세종조 고사본말>에서 세종의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엮어두었다. 그 이야기에 끝이 없으나 이긍익은 세종을 다음처럼 묘사했다. 

  "임금은 심묵(深黙)하여 말이 적고 제왕의 위의가 있었다. 왕위에 오르자 총명과 지혜는 만물에 뛰어난 성인이요, 관유(寬裕)와 온유(溫柔)는 뭇 백성을 용납하고 기르는 덕을 지녔다. 사물을 처리함에는 강하고 굳센 주장이 있었으므로 위엄있고 모범되며, 근엄하고 중정한 조심성이 있었으며, 정미한 의리는 신묘의 경지에 이르렀고, 사물의 조리를 세밀히 관찰하는 분별의 힘이 있었다."1 

  이런 묘사가 몇 백년 뒤의 것이라 믿기 어려울지 몰라도 세종과 더불어 가까이 10년을 함께 한 신하 정인지(鄭麟趾 1396-1478)가 쓴 <세종대왕 영릉 신도비명>에서도 '동방의 요순(堯舜)'이라면서 다음처럼 그 까닭을 설명하였던 것이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조화의 교묘함은 만물에 나타나고 성인의 정대한 마음씨는 치정(治政)에 나타난다. 오직 우리 세종 임금께서는 생이지지(生而知之)하신 성인으로 중극(中極)을 세워 인륜의 정점에 이르시고, 선조의 왕업을 잘 이어받아 밝게 성왕의 일을 계술하시어 제왕의 효도를 천명하심에 이미 9족이 돈목하고 만백성이 모두 화락하여 온갖 정무가 해화(諧和)하여 훌륭한 이름이 사해팔방에 넘쳤다."2 

  세종 스스로도 그렇게 말하였던 것인데 "나는 서적에 대해서 눈으로 한 번 거친 것은 곧 잊지 않았다"면서 "내가 궁중에 있을 때 손을 거둔 채로 한가히 앉았던 적이 없었다"고 했을만큼 그렇게 총명하고 부지런하였던 군주였다. 워낙 책을 좋아하여 제위에 오르기 전 글 하나를 백번씩 읽었으며 또한 기관을 설치하여 온갖 서적을 편찬케 하였다. 
  세종은 탐욕을 버렸던 군주였다. 제위에 오른 뒤 비원(秘苑)에 기르던 온갖 꽃과 새들을 모두 민간에 나눠주었고 또 지역 관원이 길들인 사슴을 바치고자 할 적에도 "진귀한 짐승은 옛 사람들이 경계한 바"라며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광을 누리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서교(西郊)에 거동하여 농사짓는 일을 보던 중 효령대군 별장이라 새로 지은 정자에 올랐다. 마침 단비가 내려 온 들판을 적시자 그 정자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 하였다. 
  이상의 이야기는 모두 <세종조 고사본말>에 드러난 이야기로 연이어 집현전 설치, 사가독서 제도의 도입과 각종 찬술과 제작의 업적도 즐비하게 나열해 두었다. 놀라우리만큼 세종은 학문을 장려하고 과학기술에 놀라운 진보를 이룩하였으며 사군과 육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던 군주였다. 


영릉 능침 앞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한글 창제 

  세종의 온갖 업적을 다 해도 한글 창제를 뒤덮을 공훈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설치한 학문장려기관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를 불가하다며 누군가는 극력 반대하기도 하였다. 
  본시 한글 이전에 아주 오랜 옛 가림토(加臨土)라는 문자가 있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등장하는데 기원전 22세기 세 단군 가륵 때 삼랑 을보륵(乙普勒)에게 정음 38자를 만들도록 했다는 거다. 역사학 및 언어학 전반에서 이를 부정하고 있지만 일부는 이를 지지하고 있고 따라서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면서 고전(古篆)을 모방했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이 바로 그 정황증거라고 한다. 이긍익은 한글 창제에 대해 다음처럼 기록했다. 

  "옛날 신라 때 설총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지어서 관가나 민간에서 이제까지 행하여 왔으나 모두 글자를 빌려 만들었으므로 더러는 난삽하기도 하려니와 가다가는 통하지 않기도 하고 야비하고 근거가 없기도 하였다. 임금이 생각하기를, 모든 나라가 각기 제 나라의 글자를 지어서 그 나라의 말을 기록하는데, 유독 우리 나라에만 그것이 없다 하여 친히 자모 28자를 창제하여 언문(諺文)이라 이름하고 궁중에 언문청을 설치하고 신숙주, 성삼문, 최항 등에게 명하여 편찬시켜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이름하였다. -중략- 그 글자체는 고전(古篆)과 범자(梵字)를 모방하여 만들었다."3 

  세종은 진(秦) 나라의 고전과 인도의 범자만을 모방한 것이 아니다. 파스파(Phags-pa) 문자도 참조했던 것 같다. 파스파 문자란 원(元) 나라 세조가 1269년 티벳 승려로 세조의 국사(國師) 파스파(Phags-pa)에게 창제하도록 한 것이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할 무렵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이 요동에 귀양 와 있었는데 이 때 세종은 성삼문을 열여섯 차례나 보내 자문을 받도록 했다. 그런데 그 황찬은 파스파 문자를 연구하기도 했을 음운학 연구자였던 것이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까닭, 그 연유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연구할 적에 마침 한자를 읽을 수 있는 바른 소리에 관해 문제가 생겼다. 당시 이두가 있었지만 그것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소리를 연구한 중국의 운서(韻書) 《홍무정운(洪武正韻)》을 연구토록 하면서 조선의 음운을 기록한 조선의 운서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니까 음운을 조선의 음운으로 맞추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한글, 다시 말해 훈민정음(訓民正音)인 셈이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이유일 뿐이다. 더욱이 저 홍무정운은 초성과 종성을 사용해 글자의 소리를 나타내는 반절법(半切法)데 동국정운은 초성, 중성, 종성의 3음절(三音切)이다. 따라서 이 한글로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소리라도 모두 문자로 표기할 수 있어졌다. 이런 문자는 인류 가운데 오직 한글 하나뿐이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래 꾸준히, 지속해 사용해 왔다는 거다. 이를테면 왕은 교서를 한자로 써서 반포하였고 대왕대비나 왕비는 그 교서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해 한글 교서를 반포하였던 것이다. 그 뿐 아니다. 《소학》이니 《삼강행실도》와 같은 서적을 한글로 번역해 배포했으며 불교계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풍토부동의 논리 

  세종은 중국과 다른 문자를 창제하면서 그 까닭은 풍토부동(風土不同)이라고 설명했다. 말씀과 문자가 서로 다른데 어찌 이런 상황을 계속해야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박연(朴堧 1378-1458)이 음악의 표준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다음처럼 말했다. 

  "다만 역대 임금들이 음률을 지을 때에 기장이 한결같지 않았던 까닭으로 소리의 높고 낮음이 시대마다 차이가 있었으니 오늘날 중국의 율(律)이 참된 것이 아니요, 우리나라의 거서가 도리어 그 참된 것임이 아닌 줄을 어찌 아오리까."4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시작함에 세종 또한 "개연히 묵은 것을 개혁하고, 새것을 다시 만들 뜻이 있어" 일을 추진하였는데 그 다름은 결국 "우리나라 땅이 동방에 치우쳐 있어 중국과는 풍기(風氣)가 아주 다른"데서 연유하는 것임을 발견했고 이에 따라 한 달 내내 변형하는 작업을 지속하였다. 그렇게 해서 새로 만든 악기를 실험해 보고서 세종은 다음처럼 말하였다. 

  "중국 경쇠는 과연 음률에 맞지 않고, 이제 새로 만든 경쇠가 옳게 되어 소리가 맑고 아름다우니 박연이 율을 지어 음성을 보아 구별한 것이 참으로 뜻밖으로 훌륭하니 내 심히 기뻐하는 바이다."5 

  세종의 이와 같은 생각, 다시 말해 풍토부동이니 중국의 것이 조선에 맞지 않는다면 조선에 맞게 변경해야 하고 중국에 없다면 새로이 창제해야 한다는 생각은 한글만이 아니라 음악에도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과학기술의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었던 것이다. 사리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음률과 도량형을 고르게 함은 천자(天子)의 일이요, 제후(諸侯)가 멋대로 할 바가 아니"6라면서 누군가는 세종의 그와 같은 일에 반대를 거듭하였다. 이에 세종은 또 다음처럼 말하였다. 

 "창제라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운 것이니, 임금이 하고자 하는 것을 혹 신하가 저지하기도 하려니와 신하가 하고자 하는 것을 혹 임금이 듣지 않기도 하고, 또 임금과 신하가 모두 하고자 하더라도 시운이 불리한 수도 있는데 이제 내 뜻이 먼저 정하였고, 국가에 일이 없으니 마땅히 마음을 다할 것이다."7 

  표준음률 제정도 그랬거니와 세종은 또 중국 주(周) 나라를 모범으로 하는 음악인 아악(雅樂)을 기본으로 삼되 고려시대를 거쳐 전해 내려오는 오랜 전통을 지닌 조선 고유의 음악 다시 말해 향악(鄕樂)을 계승하여 지속시켰다. <용비어천가>가 바로 그 예인데 저 중국의 아악이 지닌 가락과 음률과 다르기 때문에 향악에 적합한 새로운 악보인 정간보(井間譜)를 창제하였다. 정간보는 오늘날 까지 생명을 유지해 오고 있을 정도로 그 탁월함이 대단한 악보다. 
  풍토부동이라는 세계구성의 원리를 문명에도 적응하는 이같은 논리에 의하여 하나의 문명권을 이루면서도 각각의 단위마다 지닌 문화의 특성을 발휘한 세종의 노선은 지금, 지구 전체가 하나의 문명권을 형성하고 있는 이 때에 더욱 깊이 있게 검토해야 할 문명운영의 원리가 아닌가 한다. 훈민정음과 같은 언어학이나 정간보 같은 음악만이 아니다. 세종은 천문학, 군사학, 역학, 의학, 농학과 자연과학 전반에 걸쳐 넓고 깊은 발전, 진보를 이룩해 나갔다. 
  저 풍토부동의 논리는 중국과 조선의 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는 논리로 농업기술에 적극 도입한 것이다. 세종은 중국과 조선의 풍토가 다르므로 심을 곡식과 그 시기, 장소가 다르지 않겠느냐며 중국 농법을 참고하되, 조선 전역의 농촌에서 이루어지는 실제 상황을 토대로 삼아 새로운 농법을 편찬토록 했다. 그렇게 해서 정초(鄭招)의 《농사직설》이 탄생했고 널리 보급하여 당시 농업이 크게 발달했던 것이다. 《오례의(五禮儀)》도 마찬가지다. 중국 의례를 기본으로 하되 고려 이전부터 내려오는 고유의 예제(禮制)를 통합하여 국가의례를 정립하였던 것이다. 



영릉 문인석 서쪽 정면                                             영릉 무인석 서쪽 정면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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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긍익, 《국역 연려실기술》1, 민족문화추진회, 1966. 231쪽.   
2. <세종대왕 영릉 신도비명>, 《선원보감》2, 계명사, 1989. 190-191쪽.  
3. 이긍익, 《국역 연려실기술》1, 민족문화추진회, 1966. 240쪽.   
4. 이긍익, 《국역 연려실기술》1, 민족문화추진회, 1966. 242쪽.    
5. 이긍익, 《국역 연려실기술》1, 민족문화추진회, 1966. 244쪽.   
6. 이긍익, 《국역 연려실기술》1, 민족문화추진회, 1966. 242쪽.
7. 이긍익, 《국역 연려실기술》1, 민족문화추진회, 1966. 245쪽.   
글/ 최열(미술평론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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