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감리교 황민화의 앞잡이, 정춘수(鄭春洙)

草霧 2013. 12. 6. 10:52

 

 

 

종교

    

 

정춘수(鄭春洙, 창씨명 禾谷春洙, 18751951)

  

  

 

감리교 황민화의 앞잡이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4년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

 

정춘수(鄭春洙, 일본식 이름: 禾谷春洙(가타니 슌쥬), 1875년 2월 11일 ~ 1951년 10월 27일)는 한국감리교 목사로, 독립운동가였으나 후에 친일파로 변절했다. 아호는 청오(靑吾)이다.

 

충청북도 청원 출생이다. 1904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선교사를 통해 세례를 받고 감리교에 입교한 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목사가 되었다. 그는 부흥회 집도에 특히 능력을 보였고, 원산의 교회에서 근무 중 1919년 3·1 운동을 맞았다.

 

정춘수는 그해 2월 경성부에서 오화영, 박희도의 권유를 받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원산으로 돌아가 지역에서의 만세 운동을 조직한 뒤 당일 기차편으로 상경했으나, 태화관 모임이 끝나고 관련자들이 체포된 뒤였기에 자수하여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출옥한 뒤 개성의 교회에서 근무하고 신간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를 맡는 등 서울에서 목회를 하던 중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전향서를 발표한 뒤부터는 친일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듬해 일제의 비호 아래 그는 조선 감리교회의 수장인 감독으로 피선되었고, 조선감리교와 일본의 메소디스트교회의 합동을 목적으로 1941년 3월에 세워진 새로운 '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의 합동 과정에 찬동하면서 통리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일본 제국이 일으킨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내선일체 정책에 순응을 요구하며, 감리교회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할 때도 앞장서는 등 조선 개신교회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꼽혔다.

 

개신교 내부의 사상 검사 단체로 일제 경찰과 결탁하여 신사참배를 독려한 총진회 회장, 전시 총동원 체제 건설을 위한 친일 단체들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1941년), 그리고 친일 종교인 모임으로서 개신교 교인들의 지원병 참전을 부추긴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1944년)를 지냈다. 심지어는 일본군을 위한 특별 기도, 애국 헌금과 무기 제조를 위한 철문과 교회종의 헌납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으며,[1] 1944년에는 그의 결정으로 태평양 전쟁에 감리교단의 이름으로 비행기를 보내게 하기 위해 감리교 내 소속 일부 교회를 팔아 비행기 3대를 구매해 헌납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에도 감리교 내부에서 반발이 많았던 정춘수의 이러한 친일 행적은 해방 이후 감리교의 재건파가 1947년 《감리교회 배신배족 교역자 행장기》를 발간함으로써 드러났고, 1949년에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두 달간 구금되기도 했다. 감리교회 내에서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거센 비판이 계속되자, 정춘수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당시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는 체 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1949년 명동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천주교회로 개종했으며, 한국 전쟁 발발 후 고향에 피난해 있다가 사망했다.

 

청주삼일공원에 충북 출신 민족대표인 손병희, 신석구, 권동진, 권병덕, 신홍식과 함께 동상이 설치되었다가, 친일 행적과 관련된 항의로 철거된 일이 있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2008년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005년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펴낸 자료집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에서 선정한 감리교 내 친일 부역자 명단 12명 중에도 들어 있다.

  • 동대문교회
  • 흥업구락부
  • 조선임전보국단
  • 오윤주. “[사람과 풍경] 친일 흔적 씻고 역사공원 날갯짓 - 청주 3·1공원 내년 90돌 ‘새옷’”, 《한겨레》, 2008
  • 이승규. “감리회, 교단 내 친일인사와 독립운동가 명단 발표 - 광복 60주년 기념 예배자료집 발간…친일인사 선정 근거 없고, 교단 차원 친일은 빠져”, 《뉴스앤조이
  • 이 과정에서 인천에서는 화도감리교회숭의교회가 팔리게 되었다. 숭의교회75년사 출판위원회 (1992년 10월 25일). 《숭의교회 75년사》. 인천숭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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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 일생을 내 집에서 길렀노라

    어찌타 벗을 잘못 만나 외도에 눈이 떠서

    원수의 신주(神酒)에 그대 넋을 녹이길래

    '아스소 그 술은 못 마실 술이라오'

    이렇게 눈물로 몇 번이나 충고했던고?

     

    외도에 팔린 정신 신주(神酒)에 넋을 잃어

    미칠 듯 날뛰던 그대 꼴을 보았노라

    몽치 들어 죄 없는 가족을 내어쫓고

    아까울 손 선조 유산 눅거리로 팔아다가

    요부(妖夫)의 무릎 앞에 바치지 않았는가 ……

     

    신주(神酒)에 취튼 마음 구주(舊酒)에 팔렸는가

    어찌타 술을 배워 신세를 망치는고?

    사람이란 절개 갖어 값이 나나니

    젊어서 잘못 배운 술 늙어서 끊은들 어떠리.

     

    ({대한감리회보}, 1949. 12. 25)

     

     

    이 산문시는 정춘수가 일제 말기에 부일협력을 하다가 해방 후 천주교로'개종'하여 신의와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것을 풍자하여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러한 비판을 받는가.

        

     

     

    3·1 독립선언식의 지각자

    정춘수도 처음부터 친일파나 부일협력자는 아니었다. 널리 알려져 있는 대로 적어도 그는 일제하 민족운동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는 3·1 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감리교 목사로서 원산 남촌동교회에 시무하고 있었는데, 3·1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19216일경 서울에 갔다가 박희도*, 오화영(吳華英) 등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도장을 맡기고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원산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이가순, 곽명리 등을 포섭하여 서울과 연락하며 운동 준비를 하였다.

     

    그는 독립선언 일자가 31일로 잡힌 것을 알고 그 날 열차편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이미 선언식은 끝나고 시위가 시작된 후였다. 그는 선언서 서명자들이 모두 체포된 것을 알고 서울에 머물면서 상황을 살피다가 서명자들과 행동을 같이 하기 위하여 37일 종로경찰서에 자수하였다. 그는 이 일로 1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석방된 후 1922년부터 개성북부교회, 개성중앙교회 등을 전임하다가, 19272월에 창립된 신간회의 본부 간사로 선임되기도 하였고, 1934년부터는 서울 수표교 교회를 담임하고 감리교 총리원 이사에 피선되어 교회 행정에 깊이 간여하였다.

     

    그는 이 무렵 신흥우가 조직한 흥업구락부와 적극신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385월경 일제가 민족주의자들을 박멸·전향시킬 목적으로 검거에 착수한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류되어, 서대문경찰서에 구금되어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흥업구락부는 이미 1935년 이후 내분으로 사실상 활동이 중단된 상태에 있었고, 검거 후 일제의 회유와 위협에 의하여 193893일 관계자 전원의 이름으로 이른바 '전향 성명서'를 발표하여 기소 유예처분을 받고 모두 풀려나 부일협력 활동에 이용당하게 되었다.

     

    이 성명서는 "아등(我等)은 일즉이 민족자결주의의 단체인 동지회의 연장으로서 흥업구락부를 조직, 활동하다가 지나사변 이래의 급격한 변환에 감하여 종래의 포회()한 바 주의 주장의 오류를 인정하고, 참다운 황국일본의 국민인 신념하에 흥업구락부를 해산 당함에 아등의 거취와 동향과를 밝힘과 동시에 아등의 포지한 이상과 주장과를 자에 피력하려 하는 바이다"로 시작하여, 일제에 철저히 전향·협력할 것을 밝히고, "아등은 그 활동자금으로서 금일까지 저축한 금 2400원을 서대문경찰서에 의뢰하야 국방비의 일조로서 근()히 헌납하고자 한다"로 끝맺고 있다({매일신보}, 1938. 9.4).

        

     

     

     

    교회 종까지 갖다 바친 감리교 '황민화'의 선봉장

    정춘수가 부일협력을 하게 된 것은 반드시 흥업구락부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기독교계 친일협력 조직의 간부로 참여하고 있었다.

     

    , 그는 193858일 일제의 사주로 전도보국·황도실천을 위해 창립된 '경성기독교연합회'에 일본인 목사 아키츠키 (秋月致)와 함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10월에는 한국감리교회를 일본 메소디스트 교회에 종속시키기 위한 일선감리교 특별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의 친일행각이 본격화된 것은 19399월 일제의 비호를 받아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되면서부터였다. 그는 교권 장악을 위하여 일제의 지시에 충실히 '순응'하여 194010월 그가 주재하는 총리원 이사회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안과 함께 감리교 '혁신안'을 마련하여 발표하였다.

     

    () 국체의 진정신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실현하야 총후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신체제에 순응함은 아 기독교인의 당연한 급선무이다. 고로 기독교 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회는 좌기 신안(新案)을 솔선 결의 실행을 기함.({매일신보}, 1940. 10. 4)

     

    이 혁신안은 민주주의·자유주의의 배격, 일본 정신의 함양, 일본 메소디스트 교회와의 합동, 일본적 복음의 천명 등을 규정하고, 심지어는 개신교회의 애국반 활동 강화와 "교도로 하야금 지원병에 다수 참가하게 할 것"까지 규정하고 있다.

        

    한편, 19413월에는 국민총력 조선기독교 감리회연맹의 주최로 시국대응 신도대회를 열어 혁신요강의 실천과 고도 국방국가 완성에 매진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어서 감리교 3부 연회를 해산하고 일본의 교단규칙에 따른 새 교단 규칙을 마련하여 교단을 재조직하였다.

     

    같은 해 1010일에는 교역자와 신도 대표 50여 명을 이끌고 부여 신궁 조영 근로봉사를 하고 돌아와 21일에는 국민총력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 연맹 이사회를 열어 교회의 철문, 철책등을 헌납하도록 하는 이른바 '종교보국 5개항'을 결의, 실천케 하였다.

     

    1942213일에는 정춘수 통리자의 명의로 각 교구장에게 "황군위문 및철물 헌납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철문, 철책은 물론 "교회종도 헌납하야 성전(聖戰) 완수에 협력"할 것을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정춘수의 전횡은 감리교 내부에서도 반발을 일으켜 194210월에 열린 총회에서 그에 대한 불신임안을 결의하자, 그는 일본 경찰의 지원을 받아 총회해산을 공고하였다. 이런 와중에 잠시 변홍규가 통리자가 되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물러나고, 194310월에 열린 교단 총회에서 정춘수가 통리에 다시 취임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의 비호 아래 교권을 다시 장악하게 된 정춘수 통리는 19443월 교단상임위원회를 열어 교회를 통폐합시키고 나머지를 팔아 전투기를 헌납하려는 "애국기 헌납 및 교회병합실시에 관한 건"이라는 결의를 통과시켜 실천하였다({기독교신문}, 1944. 4. 1).

     

    그리고 이것도 부족하여 일제의 방침에 따라 그 해 5월부터는 예배 설교시 구약성서와 묵시록을 사용치 말고 4복음서만 사용하도록 하며 예배집회 시간도 단축하여 주 1회만 집회를 갖고 근로시간을 늘리도록 각 교회에 통고하였다.

     

    정통리가 이끄는 감리교단 본부는 19449월 서울의 상동교회 예배당에 이른바 '황도문화관' (皇道文化館)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교역자들을 모아 일본정신과 문화를 주입시켰다. 그리고 이들을 한강으로 끌고 가 신도(神道)의 재계 의식인 미소기하라이(계발)를 행하게 하고, 남산의 조선신궁까지 머리에 일장기 두건을 두르고 뛰어가 신사에 참배하게 하였다.

     

    당시 총독부 보안과장을 지낸 야기(八木信雄)의 회고록인 {일본과 한국}에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신도(神道)의 의식인 '미소기'를 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어느 날 야기와 친근한 박준영(朴駿榮, 본명 喜多毅:그는 한국인으로 드물 게 일본의 신궁황학관 출신이었다)이 야기를 찾아와 "나와 친근한 기독교 간부들 사이에 최근 기독교 탄압의 소문이 화제가 되어 매우 걱정하고 있는데 나와 함께 상의한 결과 목사들에게 신도(神道)의 계행사(行事:미소기 행사, 즉 목욕 제계하고 악을 제거한다는 의식)를 시켜서 기독교도 또한 참다운 일본인이 되게끔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로 하여 탄압을 면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합의를 보았다.……그래서 직접 그 기독교 간부들을 상면하여 그 의중을 타진한 후 가능한 한 비호하여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그래서 박준영의 소개로 '기독교 감리파의 정춘수와 이동욱 씨를 상면한 결과' 그의 말과 틀림없었고 그 후 기독교계 목사들이 계 행사를 할 때 야기가 초청을 받아 참석하여 인사말을 한 적이 있다고 회고하고 있다.

     

    결국 정춘수 등이 자진하여 기독교계에서 신도의식인 '미소기'를 하겠다고 나왔다는 것이다. 정춘수의 이와 같은 일제당국과의 관계는 해방 후 감리교 재건파측에서 나온 [감리교회 배신(背信배족(背族) 교역자 행장기]에도 상세히 언급되고 있다.

     

    조선 전 기독교를 신도화 (神道化)시켜 일제의 주구를 만들기 위해 1943년에 이르러 당시의 보안과장 야기(八木信雄), 정학회(正學會)의 기다(喜田毅:朴駿榮), 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長崎祐三) 등의 절대한 원호와 사주를 받아 '일본기독교 조선 혁신교단'을 조직했었다.

     

    그러나 전선유지신도와 교역자들의 결사적인 반대투쟁으로 혁신교단이 탄생 후 1개월에 유산되어버리고 말자 그들은 다시 경찰당국의 힘을 빌어 감리교회의 영도권을 잡고 배신·배족의 죄행(罪行)을 대담무쌍히 감행하여 온 것이다.

     

    이어서 그들의 죄상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는 가운데 "정춘수 이하 간부들은 동포의 황민화를 위한 기독교의 변질을 전 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에게 서약하였고 기독교 요인 모해에 관한 최고 비밀 상담역이 되어 있었다(194656일 남조선형무소 목사 회의 때 서대문 형무소에서 근무하던 나가사키의고백)"고 하며 증인까지 밝히고 있다.

     

    마경일 목사도 그의 회고록(1984)에서 일제 말기 정춘수를 비롯한 교단지도자들의 횡포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경찰은 '총진회'(總進會)라는 것을 만들어 정춘수 감독을 회장으로, 장로교의 정인과 목사를 부회장으로 앉혔다. 그것은 결국 경찰의 앞잡이 역할이었다.

     

    '총진회'란 결국 당시 크리스찬들의 성분이며 사상 등을 조사하여 그들을 선량한(?) 황국신민으로 전향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고 하나, 실은 교회와 신도들을 위협하는 공포의 존재였다고 함이 타당하다. 이를테면 그 기관은 일본 경찰과 밀착된 일종의 '비밀경찰'의 일을 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춘수는 이와 같은 교계 안에서의 부일협력뿐만이 아니라, 1941년 초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의 1인으로 참여하였고, 그 해 10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친일단체의 평의원을 맡았으며, 1944년 말경에는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를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천주교로 '개종'의 변

    해방 후 감리교계는 교회의 재건 방향을 둘러싸고 부흥파와 재건파로 나뉘어 분열을 가져왔다. 재건파는 주로 정춘수가 통리자로 있을 때 교계에서 소외되거나 징계를 당했던 사람들로 교계 내의 부일세력의 숙청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94723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와 함께 정춘수를 비롯한 감리교 지도자들의 친일 행각을 구체적으로 폭로하는 [감리교회 배신(背信) · 배족(背族) 교역자 행장기]를 발표하였다.

     

    1940년부터 왜적의 경찰과 군부를 업고 우리 교회를 마음대로 농락질하던 이른바 혁명파 배신교역자들은 감리교회의 재건을 거절하고 방해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작당하여 가지고 이른바 남부대회를 빙자하다가 나중에는 부흥파니 무엇이니 하면서 교파 하나를 따로 만들어 놓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손으로 죄상가죄 (罪上加罪)하였다.……

     

    우리 교회가 천직을 감당하여 인류에게 행복을 끼치며 건국 도상에 우리 조선민족에게 큰 공헌이 있으려면 교회 안에 그와 같이 불순하고 부정한 자들을 그냥 두고는 절대로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고로 교회 재건을 주장할 때에 친일적이요 배신적인 그들의 숙청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감리교회 배신(背信) · 배족(背族) 교역자행장기]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정춘수는 해방 후 감리교 내부에서도 친일파의거두로 지목되어 비판의 표적이 되었으며, 더욱이 1949년 초에는 이러한 친일전력 때문에 국회의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0일간 구속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안팎으로 강력한 비판을 받게 되자, 더 이상 감리교에 머물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교직을 사임하고 또 한 번 변신을 하였다. 194910월 어느 날 서울 명동성당 노기남 주교를 찾아가 천주교로 '개종'한 것이 그것 이다.

     

    이러한 사실은 19491122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실의 진부를 확인하려고 김유순 감독이 보낸 사람들과의 면담에서 "50년이나 정든 교회를 일조일석에 떠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위한 변명을 하고 있다.

     

    물론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를 말하려면 자연 과거지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1 운동 때 33인의 하나로 나라를 위하여 싸우겠다는 나의 정신은 오늘까지 변치 않았다. 그러나 세태의 변함을 따라 전쟁이 점점 심해짐으로 일본 정부와 협력하는 척했고, 아홉 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한 교회를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세인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나의 밑에서 나의 지도를 받고 지내던 사람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갖은 방법과 수단을 다해서 나를 중상하며 전부터 말해 오던 숙청을 하려 하니 나는 숙청을 당하기 전에 먼저 내가 자가 숙청을 한 것이다.……

        

    하여튼 내가 50년이나 인도한 교회가 나에게 불만하다. 가령 예배 보는 것도 엄숙을 많이 주장했으나 그대로 되지 않고 개신교를 무식한 구 교인들이 열교라고 하는데 참말 교파의 갈래가 너무 많아 열교이다.

     

    그러니 감리교회에서 떠난다고 장로교회나 성결교회로 갈 수 없고 결국 천주교회에 들어가 평신도의 자격으로 남은여생을 조용히 지내려 한다……정춘수는 감리교회와 아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리려 한다.({대한감리회보}, 1949.12. 25)

     

    그의 말대로라면 그가 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변하였기 때문에 '일본정부에 협력하는 척' 하였고, '개종'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에게서 진정하고 공개적인 참회의 고백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한국전쟁 때 피난길에 올라 충북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 족손(族孫)정인환의 집에 머물다가 19511027일 피난지에서 79세로 생을 마감했다. ({천주교회보}, 1952. 12. 23).

     

    김승태 (한국기독교연사연구소 연구위원,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친일 대통령 친일파 정춘수 비명 썼다

     

     

    박정희 前 대통령 "청오 정춘수 묘" 비명 내려

     

    ▲ 1969년 8월15일 세워진 정춘수씨의 청원군 강내면 묘비이다. 이 묘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비명을 쓰고 정씨의 두번째 부인 안동 임씨와의 사이에서 3자1녀를 두고, 딸(1녀) 정화숙의 남편 김상기(문학박사)씨가 비문을 쓴 것으로 돼 있다.

     


    1993충북역사정의실천협의회 정춘수 친일경력으로 철거문제 제기. 서명운동
    1994.10.19충북지역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 창립 및 정춘수 동상 철거 촉구
    1995.2.20정춘수 동상에 일장기 부착
    1995.3.1정춘수 동상 철거 및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3.1절 기념시민대회 철거시도(공무원 및 경찰저지)
    1995.4.13정춘수 동상 철거 공청회-연대회의
    1995.8.9연대회의 정진동(목사), 도종환(시인), 이관복등 도지사 면담 - 도민의 의견을 모아 95년말까지 해결하겠다는 도지사의 입장을 수용하며 8월 12일 동상철거식은 보류하기로 결정
    1995.10.16동상철거 청원 반려 의결(도의회 내무위)  반려사유 -3.1공원의 재산권 및 관리권자인 청주시에서 처리
    1995.12.8도지사 철거 지시(지사실=시장,교육감,유관기관장),  철거지시(도지사-> 정진동)
    1995.12.9행정 부지사실 - 청주 부시장 참석 의회 결과 96년 3월 1일까지 시에서 처리하도록 지시
    1995.12.20정춘수 동상 연내 강제철거 시도연기(연대회의->시), 강제철거를 일시 연기하고 충북도와 청주시의 철거 추진을 살펴본후 행동
    19961.25정춘수 동상 철거에 대한 질의 회신 통보(동상 철거 여부 결정, 이에 따른 구체적인 처리계획을 시에서 수립시행하고 그 결과를 제출할 것)
    1996.1.27철거 시도 저지(시공무원, 경찰)
    1996.2.8경찰과 시공무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동상은 무너지고 정춘수는 역사의 심판을 받음

     

     

    친일 대통령이 쓴 현판을 독립운동가 윤봉길 선생의 사적지(충의사)에 걸 수 없다며 충남의 전 민족문제연구소 지부장이 삼일절 날 현판을 부수면서 사회적 큰 파장이 인 가운데 친일파로 알려진 정춘수씨의 묘 비명을 박 대통령이 쓴 것으로 확인 돼, 또다른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지역에서도 지난 3일자 충북인뉴스 인터넷 신문을 통해 보도 된 바와 같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가 내걸린 문화유적지 및 공공시설은 모두 4개소이다.

     

    그 중에서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 삼일공원에서 친일행적이 드러나면서 충북을 대표하는 3.1운동 민족대표 6인의 동상 중 철거된 정춘수씨의 묘비명(청원군 강내면)이 친일 논란을 낳고 있는 박 대통령에 의해 쓰여진 것이 뒤늦게 확인 됐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비명을 쓰셨다"는 글이 씌어져 있다.

     

    청원군 강내면 은적산 자락에 위치한 정춘수씨의 묘비는 1951년 10월27일 향년 77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뒤 민관이 함께 모여 민주공화당 충청북도지부가 세운것으로 돼 있다.

     

    즉, 지난 69년 8월1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청오 정춘수 선생의 묘'라는 비명과 당시 건립 추진위원장이었던 박대통령의 처남 육인수 국회 문광위원장의 사적, 그리고 문학박사 김상기씨가 쓴 정춘수 선생의 일대기를 높이 2.5m 폭 60㎝ 가량의 흑색돌에 적고 있다.

     

    이 비문은 해방후 반민특위에 체포돼 조사를 받다가 한국전쟁당시 피난길에 머물던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에서 향년 77세의 나이에 정춘수씨가 죽은 뒤 18년 만에 민관이 함께 모여 민주공화당 충청북도지부가 세운 것으로 돼 있다.

     

    특히 비문에는 정춘수 선생의 탄생(고종 을해년, 서기 1875년 2월11일)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를 간략히 설명하면서 감리교회 목사로서의 포교활동과 민족주의 운동 중 치른 옥고에 대해 간력히 설명하고 있다.

     

    감리교 목사 정춘수씨는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충북지역의 출신인 손병희, 신석구, 권병덕, 권동진, 신홍식 선생과 함께 청주시 우암동 우암산 자락에 위치한 삼일공원에 동상이 세워졌으나 친일행적이 드러나면서 지난 96년 2월8일 2.8독립선언 77돌에 맞춰 '충북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공동대표 정진동 목사·도종환 시인)'라 불리던 한 시민단체에 의해 철거 됐다.

     

    PIC18F.jpg1910년 지은 종교교회 예배당. 이 예배당에서 오화영, 정춘수 목사가 3 ․ 1 운동에 대한 모의를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1910년 지은 교회 건물의 벽돌과 1959년에 지은 양주삼 목사가 기념 예배당의 벽돌을 새로 건축한 현재 교회의 외벽에 기념하여 설치해 놓았다.

     

    당시 시민단체 사무처장을 지낸 바 있는 이광희씨는 "순천에 사는 한 감리교회 목사님이 자료를 제공 하면서 정춘수씨의 친일행적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다.

     

    굴절된 역사를 바로잡고 친일청산을 통해 역사의 정의를 실현코자 어렵게 철거 된 동상은 청주시청에서 보관중인 것으로 안다. 따라서  현재 5인의 동상만이 삼일공원을 지키고 있다"고 전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청주지부(지부장 김진한)에 따르면 청주출신 정춘수씨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해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1938년 5월에 흥업구락부 사건(민족주의운동·질서유지)에 연루돼 수난을 겪다가 같은 해 9월 '전향성명서'를 발표했다. 전향발표후 일제의 비호아래 조선감리교회 제4대 감독으로 친일행적을 벌인다.

    1940년 10월에 '감리교 혁신안'을 발표하면서 일본정신 함양과 일본 메소디스트 교회와 합동 일본 복음의 천명을 규정하고 애국반 활동 강화와 교회 신도로 하여금 지원병에 다수 참여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41년 10월과 42년 2월에는 교회의 철문, 철책, 교회 종도 헌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정씨는 44년 9월 감리교단 교역자들을 남산 등에 모아놓고 신사참배를 독려하고 일본경찰의 비밀조직인 '총진회'의 회장을 맡아 보기도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친일행적으로 논란을 빚은 정씨는 또한 41년 초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그 해 10월은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맡았으며 44년께 그 나머지를 다 팔아 신사참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는 해방후 반민특위에 체포돼 조사를 받았으며 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 올라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에 머물다가 1951년 10월27일 79세로 생을 마감했다.

     

     

    ▲ 3.1운동을 기념해 충북이 낳은 민족대표 6인을 모신 삼일공원의 정경이다.

    현재는 친일행정이 드러나면서 시민단체에 의해 정춘수 동상이 철거된 채 5인만이 모셔졌다. 맨 오른쪽에 비어 있는 좌대가 친일파 정춘수의 동상이 있던 곳으로 10여년간 방치되어 왔다. 1996년 시민단체 회원들이 정춘수 동상에 밧줄을 걸어 넘어뜨리고 있다.

     

    개신교의 대표적 교파 가운데 하나인 기독교대한감리회를 이끄는 신경하 감독회장이 광복 60돌을 맞아 부끄러운 과거사를 고백하는 대사회 메시지를 발표하면서 교단 출신자들의 독립운동을 알림과 동시에 친일 행각을 한 이들을 밝혔다.

     

    신 회장은 이 메시지에서 “헐 것과 세울 것, 지킬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언제나 당면 과제”라며 “감리교회는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해 숱한 희생자를 낸 대표적인 교회지만 그럼에도 우리 역시 청산해야할 부끄러운 과거가 있음을 고백하며, 철저한 반성으로 교회의 신뢰를 회복하고, 사랑받는 민족의 교회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대한감리회는 ‘광복 60돌 예배 자료집’에서 감리교인 가운데 독립운동을 해 건국훈장을 받은 김구, 민영환, 이승만, 이승훈, 신익희, 이준, 이시영, 안창호, 오동진, 서재필과 대통령장이 추서된 주시경, 양기탁, 이동녕, 이동휘, 이상재, 지청천, 이상설, 이위종, 이회영, 신채호, 박은식, 노백린, 유인석, 나석주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지만 훈장을 받지 못한 주요한, 현동완 등 100여 명을 소개했다.

     

    대한감리회는 이와 함께 ‘친일 행각 대표적 참여자’로 정춘수, 박희도, 김영섭, 김응태, 김인영, 김종우, 박연서, 정등운, 전영택 목사와 평신도인 신흥우, 윤치호, 김활란 등을 꼽았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일제의 침략행위를 지지하거나 방조했던 독일과 일본의 교회들이 과거사를 철저히 규명하고 회개한 뒤 거듭난 것처럼 한국 교회도 과거사에서 벗어날 회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대한감리회가 자기 고백을 시작한 것이다.

     

    대한감리회 본부 기획부 송병구 목사는 “일제 신사참배 등 친일 행위가 있었지만 여전히 이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상태”라며 “앞으로 역사위원회를 구성해 과거를 규명하고 각성하기 위한 진지한 고민을 해갈 것”이라고 밝혔다.  대한감리회는 또 이준 열사(1858∼1907)의 순국 100돌을 맞아 오는 20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 기념예배당을 건립하기로 했다. 

     

    상동 감리교회 집사였던 이준 열사는 1907년 고종황제의 밀사로 을사늑약의 무효와 조국독립 지원을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회의에 참석하고자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결했다.  대한감리회는 헤이그의 여러 개신교 예배당 가운데 하나를 영구 임대받아 개조하거나 이준 열사가 만국 평화회의에 참석했을 당시 장기간 묵었던 여관을 사들여 예배당으로 꾸미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정춘수씨의 묘소가 있는 청원군 강내면 은적산의 정상에는 단군상이 있다. 한 민족의 아버지로 알려진 단군왕검상이 친일파의 종중 땅 정상에 모신것도 아이러니지만 그 옆으로 동학운동가 정필수 선생의 묘소가 함께 하고 있는 것도 우리나라의 역사적 굴곡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 지난 96년2월 청주지역 시민단체 회원들의 노력으로 17년간 3·1공원에 자리잡고 있던 친일 친일파 정춘수 동상이 강제 철거됐다. 정부로 부터 독립유강자로 공인받지 못한 친일인사의 동상을 사적공원에 건립한 자체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강내면 은적산 자락에는 정씨의 후손이 현재 살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거명치 말아 달라며 그가 말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아픔이 있는 상황에서 친일을 하지 않고 제대로 살아 남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며 "친일 대통령 박정희가 내린 비명이라 생각하지 말고 국가가 내린 비명으로 봐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충청북도에 내려진 전직 대통령 휘호는 모두 7개소인 것으로 확인됐다. 그 중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가 3개로 가장 많았다. 박대통령의 글씨는 지난 78년도에 사적 제189호 임충민공충렬사(충주시)의 사당현판과 75년 독립운동가 신홍식 선생(청원군)의 비문, 같은시기에 정춘수 선생의 비명이 있다.

    이 밖에 1955년 이승만 전대통령이 쓴 충혼탑(충주시), 1982년 최규하 전대통령이 쓴 충북 기념물 51호 고봉정사내 정사내 사당(보은군), 1958년 윤보선씨가 쓴 충북 기념물 제33호 정인지 묘의 신도비(괴산군), 2000년도에 노태우 전대통령의 충북기념물 제 73호 채화당사 현판(청원군) 등이 있다.

     

     

     

    소극적 친일에 면죄부 바라나

    정춘수, 감리교회 병합자금 헌납

    양주삼, 친일 잡지에 '일본 지지'

    김활란, "징병제는 커다란 감동"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근처에는 종교교회(기독교대한감리회·최이우 목사)가 있다. 이 교회 앞에는 '양주삼 총리사 기념교회'라고 쓰인 커다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럼 양주삼 총리사는 누구인가. 과연 누구길래 기념교회를 세운 것도 모자라, 기념비까지 세워져 있는 것일까.

    감리회 역시 친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양주삼, 정춘수, 김활란 등이 대표적인 친일 인사다. 사진은 광화문에 있는 종교교회. 양주삼 총리사 기념교회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감리회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친일을 한 인사는 정춘수 목사다. 정춘수 목사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대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되면서 그의 친일은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이 되어 버렸다. (한국교회 친일파 청산에 대한 역사신학적 접근, 이덕주)

    정춘수 목사는 1944년 3월 자신이 통리사로 있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을 통해 전국에 있는 감리교회를 통폐합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명분은 미약한 교회의 강화를 위해서지만, 속뜻은 다른 데 있었다. 장로교가 비행기 한 대를 헌납한 데 자극받은 감리교회는 교회를 통폐합해 남는 잉여자금으로 애국기(비행기)를 헌납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양주삼 총리사와 김활란의 친일은 '소극적 친일'로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덕주 교수는 둘의 친일은 정춘수 목사의 친일과 구분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교수가 이들의 친일을 옹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양 총리사의 경우 일제 말기 일제가 동원되어 끌려나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점에서 그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조이제 목사(새누리교회)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여러 사료에 양주삼 총리사의 이름이 올라가 있지만, 본인이 직접 서명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양 총리사의 이름을 쓴 경우도 있다고 주장했다.ⓒ뉴스앤조이 이승규

     

     

    소극적 친일에 면죄부 바라나        

    △1930년 일제는 장로교와 감리회 등에서 발간하는 교단 신문을 통폐합해 하나의 신문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신문은 창간호에 일본왕과 왕비의 사진을 싣는 등 친일의 역사를 갖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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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리교 황민화의 선봉장 정춘수, 목사인가? 감독인가?

     

     

     

     

    충북 청원 출생. 3.1 민족 대표 일원이다. 3.I 항쟁 당시 감리교 목사로서 원산 남촌동교회에서  시무하다가 박회도, 오화영 등의 권유로 3.1거사에 참여하였다.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후 석방되어 1922년부터 개성북부교회,  개성중앙교회 등을 전임하다가 l927년 2월 창립된 신간회의 본부 간사로 선임되고, 1934 년부터 서울 수표교교회를 담임하고 감리교 총리원 이사에 피선되어 교회 행정에 깊이 참여하였다.

     

    1938년 5월 흥업구락부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9월 관계자들과 '전향성명서'를 발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나 친일활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이들은 전향성명서 에서 '우리들은 일찍이  민족자결주의의 단체인 동지회의 연장으로서  흥업구락부를 조직, 활동하여 오던 바, 지나사변 이래의  급격한 변화에  감하여 종래 포회한 바 주의  주장의 오류를 인정하고 참다운 황국 일본의 국민인 신념하에 흥업구락부를 해산함에  당하여 우리들의 거취와  동향과를 밝힘과 동시에 우리들의 포지한 이상과 주장과를 자에  피력하려 하는 바이다' 운운하면서 전향을 선언한 것이다.

     

     

    정춘수는 1938년 5월 일제의 사주로  창립된  정성기독교연합회의 부회 장에 선임되고  이듬해 10월  조선감리교회를 일본  메서디스트교회에 종 속시키기 위한 일선 감리교 특별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1939년 9윌 일제의 비호를 받아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되고, 1941년 국민총력조선기독교감리회연맹의 주최로 시국대응 신도대회를 열어 혁신요강의 실천과  고도국방국가 완성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해 10월  신도 대표 50여 명을  이끌고  부여신궁조영에 근로 봉사한 것을 비롯,  교회의 철문, 철책을 국방 헌납토록 하는 등 온갖 친일활동에 앞장 섰다. 특히 '교회 종도 헌납하여 성전 완수에 협력'할 것을 강요하는 설교와 연설을 하고 다녔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9월 서울 상동교회에  '황도문화관' 이란 간판을 내걸고  교육자들을 동원하여 황도문화를 설교하고,  이들을 남산의 조선 신궁으로 끌고 가 선사에 참배하게 하는 등 망동을 자행하다가 해 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0일간 구류되기도 했다.           

     

     

    다음은 [동양지광] 1942년 1월호의 좌담회에서 행한 정춘수의 [응징의 이유 세 개] 전문이다. 그는 당시 조선감리교 총감독이었다.

     

     

    차제에 우리 적성국가 미·영에 대해서 철저적으로 응징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 이유로서 저는 다음 세 가지 이유를 들 수가 있습니다.

     

     

    그 첫째 그들은 스스로 기독교 국가로 자칭하면서  하느님께 선택받은 인종이라 해서 뽐내고 있지만 종래의 수법으로  보면 교인으로서 교리를 위배하며,  기독교 정신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응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둘째 그들은 우리들 도의(道義)를 다하는 국가의 입장을 전혀 무시하고 우리 제국(帝國)을 모멸하고 있숩니다. 이런 국가의 적성(敵性)에 대해서, 국민으로서 응징을 해야 마땅합니다.

     

     

      그 셋째 그들은 인도상 전인류의 적입니다. 때문에 인간의 적으로서, 인류의 적으로서 응징을 해야만 합니다.

     

     

    이상은 인터넷반민특위(http://banmin.ifp.or.kr)에서 옮긴 내용입니다.

     

     

     

     ▲ 청주는 민족 대표 33인 중 6명을 배출했다. 그중 손병희·권병덕·권동진은 천도교인이고 신석구·정춘수·신홍식은 감리교 목사다. 청주시가 이를 기념하고자 삼일공원을 만들고 동상을 세웠는데 정춘수의 동상은 없고 대신 그 자리에 다른 동상과 균형이 잘 맞지 않는 횃불 모양의 동상 하나가 있었다. ⓒ뉴스앤조이 윤희윤

     

     

    두 친구의 엇갈린 운명

    청주의 자랑 중 하나는 민족 대표 33인 중 무려 6명을 배출했다는 것이다. 그중 손병희·권병덕·권동진은 천도교인이고 신석구·정춘수·신홍식은 감리교 목사다. 청주시는 이를 기념하려고 삼일공원(상당구 수동)을 만들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 동상은 다섯 개(손병희·권병덕·권동진·신석구·신홍식)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춘수의 동상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다른 동상과 균형이 잘 맞지 않는 횃불 모양의 동상 하나가 있었다. 왜일까 신석구와 정춘수는 같은 고향(청주)에 같은 교단(감리교) 목사였다. 또 민족 대표 33인이었다. 그 때문에 함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둘은 친구이면서 독립운동 동지였다. 정춘수가 지나치게 앞선 탓일까.

     

    두 사람의 길은 정춘수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일본이  기독교 사회 운동 단체인 흥업구락부 인사들을 회유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 이후 친일 세력으로 전향하면서 갈렸다. 정춘수는 총리사가 되며 일본 정부의 종교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는 한국교회와 일본 교회의 합병을 꾀하였고 감리교 교인으로는 처음으로 자신의 창씨개명을 기관지를 통해 밝혔다. 또 조선인 징병제를 옹호, 장려했고 신사 참배에 앞장섰다. 심지어 서울과 평양 등지의 교회 34개를 폐쇄하고 부동산을 매각하여 전투기('감리교단호'라는 이름이 붙음) 값 21만 원을 일본에 헌납했다.

     

    정춘수의 친일 행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일제 말기에는 교회에서 구약 성경도 읽지 못하게 하고 찬송가도 선별해 부르도록 했다.  이에 반해 신석구는 가난과 고난의 목회를 계속 이어 갔다.

     

    신석구는 1938년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두 달 동안 감옥에 다녀왔다. 6개월 뒤에 천안읍교회에서 훨씬 작고 가난한 신유리교회(진남포 지방)로 파송받았는데 오히려 신사가 없는 작은 마을로 옮겨 가게 된 것을 감사해 했다. 신석구는 일제로부터 '불령선인'(불순한 조선인; 일본이 식민지 통치에 비협조적인 자를 이를 때 사용한 용어)이 되어 수시로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또 1945년 5월 그는 전승 기원 예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다시 옥살이를 했다.  승승장구한 삶을 살던 정춘수와 낮고 가난한 삶을 살던 신석구의 삶은 또 한 번 갈렸다.

     

    해방 후 정춘수는 친일 인사로 반민족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다. 교회에서 그를 향한 비난이 거세지자 정춘수는 또 한 번의 변신을 시도한다. 천주교로의 개종이다. 정춘수는 "아홉 교회를 살리기 위해 한 교회를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에서 숙청당하기 전 자가 숙청을 하겠다"며 자신의 친일 행위와 개종을 합리화했다. 감리교회 감독까지 지낸 사람이 천주교의 평신도로 개종했다는 사실은 교계에 큰 충격이었다. 이후 정춘수는 천주교인으로 한국전쟁 때 고향으로 피난했다가 임종했다. 경찰서에서 해방을 맞는 신석구는 목회에 복귀했다.

     

    당시 그의 목회지는 이북이었다. 신석구는 북에서 반공 활동을 했는데 1949년 이 같은 사실이 발각되어 인민재판위원회에서 10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끝까지 변치 않고 하나님과 나라를 사랑했던 신석구는 한국전쟁 때 후퇴하는 공산군에 의해 희생되었다.  

     

    수십 년이 흐르고 청주시가 공원을 만들 땐 청주 출신 민족 대표 6명의 동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해 정춘수의 친일 행각이 드러나자 동상은 시민 단체와 학생들에 의해 끌어내려졌다.

     

    다른 동상과 어울리지 않던 횃불 동상이 있던 자리가 바로 정춘수 동상이 있던 자리다. 삼일공원에서 정춘수와 신석구의 엇갈린 운명을 보면서 한국교회가 신석구와 정춘수의 삶 중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생각했다.

     

    높은 자리를 탐하며, 부유한 삶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한국교회가 정춘수 동상처럼 언젠가 사람들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흔적조차 없어지지는 않을까. 역사는 과거의 사람들을 평가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를 판단하게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처럼 한국교회는 신석구의 삶과 정춘수의 삶을 평가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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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골의 남감리회 선교부 전경

     

     

     

    정춘수 鄭春洙 (1875-1951)

    경성기독교연합회의 부위원장 종교인.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명옥(明玉), 호는 청오(靑吾). 충청북도 청주 출신. 석준(錫駿)의 아들이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 한문을 배우고 함경남도 원산에서 영국인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전국 각지를 돌며 포교활동을 벌였다. 1919년 원산남촌동교회(南村洞敎會) 목사로 재직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석방된 뒤에도 계속 독립운동과 종교운동을 벌여, 1934년 흥업구락부사건(興業俱樂部事件)으로 서대문경찰서에서 105일 동안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석방된 뒤에도 계속 종교운동을 벌여, 1938년 경성기독교연합회의 부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1939년에는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되었다. 1941년에는 전시 일제 지원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에서 활동하는 등 친일행각을 하였다.

     

    19511027일 향년 77세로 서거하니 사회장으로 엄수되어 향리 청원군 강내면 궁현리에 안장되었다.


     

    새벽기도의 유래

     

     

    -한국교회와 1907년 대 부흥-

     

    1. 대 부흥(復興)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들은 일찍이 1905625일 서울에서 한 위원회를 조직하고, 남장로교 레이놀즈(W. D. Reynoldes)의 동의를 만장일치로 가결한 바 있었다. 그 동의에 의하면 "이제 때가 성숙하였으니, 하나의 한국 민족교회를 창설하여 그 이름을 [한국기독교회]라 하리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한국의 자립·자주적인 민족교회의 형성, 그것도 교파의 구별이 없는 단일한 기독교회의 형성에 대한 범주적인 요청은 이렇게 해서 널리 깔리기 시작했다. 이제 여기에 한 획기적인 모멘트가 그 형성력에 부여되기만 하면 된다고 보았다, 그것이 바로 1907년도의 한국 교회의 대 부흥이었다.

     

    2. 그 부흥의 원류(源流)

    이 부흥회를 가능케 해서 전국을 휩쓸게 한 물결은 두 군데서 흘러 왔다. 한 흐름은 선교사들의 기도회에서 연원했다. 1903년 원산(元山)에 있던 감리교 선교사들이 기도와 성서 연구를 위한 기도회를 갖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장로교와 침례교 교인들까지 가세하게 되었고, 이때 남감리교 선교사 의사 하디(Dr. R. A. Hardie)는 몇 해 동안 애써온 자신의 선교 활동의 열매 없음에 고민하던 중 선교사로 오게된 자신의 동기에 대해 회개하게 되면서 급기야 뜨거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다.

     

    1904년 원산의 집회는 반복되었다. 이번에는 삼파 연합의 사경회 도중 장로교의 로브(Rev. A. F. Robb)가 특별한 성령의 감화에 젖어, 한국인으로서 당시 은혜에 깊이 젖어있던 전계은(全啓恩)과 함께 원산 거리를 누비며 가슴을 치면서 통회 전도를 했고, 감리교의 정춘수(鄭春洙) 역시 그 부근을 왕래하면서 감격과 열의로 이 성령의 은사를 선포하였다.

     

    또 하나의 흐름이 바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깊은 신앙 생활의 경건에서 왔다. 사경회의 영향, 국가의 비운에 통회하는 기독교인들의 내성(內省), 그래서 하나님 밖에는 기댈 곳이 없다는 한국인들의 신앙에서 이 부흥의 물결은 도도히 흘러 왔던 것이다.

     

    목사 영계(靈溪) 길선주(吉善宙)! 한국 최초로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던 그의 성령에의 뜨거운 열정이 바로 1907년 대 부흥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 이처럼 부흥의 용솟음치는 성령의 샘은 원산의 전계은, 정춘수와 아울러 평양의 길선주 이 세 한국 목사의 신앙 체험에서 연원했고, 따라서 그 부흥 뒤의 한국 교회의 신앙도 이들의 영성이 농도 짙게 그 언저리에 스며있게 된 것이었다.

     

    3. 1907113, 평양 장대현

    전날 하디 선교사의 집회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 부흥회는 다음 주일 밤 길선주가 인도한 집회에서 그 성령의 불길이 터져 올랐다. 교인들의 감동은 놀라웠다. 교회는 '신비스러운 경험'을 하였다. 교회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사이사이에 힘있는 영적 압력이 베어 구속하는 듯하였다.

     

    다음날 월요일 밤에도 장중한 신비의 세력이 임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설 때 확실히 체감으로 거기서 성령의 임재를 압도당하듯 느끼고 있었다. 그 날 전형적인 평양 대 부흥의 분위기가 감격 넘치게 펼쳐지고 있었다. 런던타임즈의 기사에 의하면, "나의 아버지여!라는 말을 하자마자, 밖으로부터 흠뻑 밀려드는 강대한 힘의 임재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교인들은 눈물과 감격으로 밤새워 기도했고, 그 감동의 격류는 몇 일 밤낮을 계속했다. 통성 기도의 음성은 신비로운 조화와 여운을 가지고 있었으며, 통회의 울음은 성령의 임재에 압도되는 영혼의 넘치는 찬양의 물결 같았다. 그 통회 자복의 광경을 묘사하는 한 여 선교사의 기록에 의하면, "저런 고백들! 마치 지옥의 지붕을 열어젖힌 것과도 같다. ... 이루 상상할 수도 없는 저 죄악의 고백들, 부끄러움도 없이! 사람이 무엇으로 이런 고백들을 강제할 수 있으랴? 많은 한국 교인들이 하나님에의 두려움에, 마루에 얼굴을 가리우고 슬피 탄식하였다"고 한다.

     

    4. 새벽예불이 새벽기도로

    한국의 최초의 영적 대각성운동이 식을 줄 모르고 빠르게 확대되면서, 한국교회역사의 새 불을 지폈다. 그토록 뜨거운 죄고백과 회개를 불러일으킨 성령의 역사는 식을 줄 모르고 밤을 새우는 게 보통이었고, 또 새벽부터 낮동안 계속 연장되었다.

     

    지나가다가 성령의 불을 받은 사람, 스스로 일어나 죄를 고백하며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하면서 예수를 영접한 그들에게 그동안 행해져 왔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기독교신자가 되기 전에 이날 까지 해왔던 불교의 새벽 예불기간이었던 것이었다. 어떤 특정한 기간이 아니더라도 새벽만 되면 예불을 드려왔던게 그 당시에 비크리스쳔들에게 보편적으로 있었던 정기행사였다. 그때 길선주 장로는 이왕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그동안 행했던 새벽에불을 없애지 말고, 하나님께 새벽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이어가자고 나오게 되었다.

     

    그것이 오늘날의 새벽예배의 원류이다. 선교의 토착화에 있어서 그 나라의 전통문화를 기독교적으로 토착화시킨 긍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새벽예배가 성경에 나온 것이며, 예수님도 행하셨다는 근거자료들을 내걸지만, 그것은 한국의 새벽예배를 교리적으로 합리화시키는 작업일 뿐이다. 그렇다고 치면, 현대에 생긴 종교적 산물을 성경의 문자로 들이댄다면 이단될 것이 뭐가 있겠나.

     

    5. 토착화의 신앙화

    토착화 신학을 이상한 이단쯤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어서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낸다. 우리나라의 새벽예불을 새벽기도로 기독교가 더 좋게 활용한 예를 토착화라고 한다.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복음전파와 신앙인의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 충분히 기독교가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중동 아랍 땅에 기독교를 전파한다면,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을 부르는 '알라'라고 부르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한국에 ''이나, 'God'로 전하지 않고, 우리의 고유 언어인 하나님을 썼으니 이 또한 선교언어의 토착화 작업이 아니겠는가?

     

    새벽기도는 긴 세월을 거쳐 오늘날 산업사회의 불편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5일근무제 확대로 인해 주일성수의 문제도 민감사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과연 토요일로 예배를 옮길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어떻게 해야하나 하며 신학자와 정치가들이 고민이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예수님의 새벽기도와 초대교회의 축제적 예배의 전통을 따르는 자손으로서, 다시한번 이 시대로 토착화시킬 필요가 있다.

     

    출처: 국민일보에서

     

     

     

     

    정춘수 동상이 철거된 자리에 빈 좌대(오른쪽)만 서 있다

     

     

     

     

     

     

     

     

     

     

     

     

     

     

     

     

     

     

     

     

     

     

     

     

     

     

     

     

     

     

     

    기독교여, 김활란과 주요한의 찬송가를 버려라


    친일작품하면 우선 떠오르는 분야는 당연 문학이나 예술작품이다. 이같은 작품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의 사상과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인구 1/5의 신도를 자랑하고 있는 개신교의 통합찬송가에도 친일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친일파가 만든 찬송가가 각 교회마다 애창되고 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일부 찬송가에서는 이들을 독립운동을 한 작가처럼 해설하고 있다. '노래로 부르는 나의 신앙고백'이라는 찬송가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이는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일제잔재 중 하나다.

    문제의 찬송가는 304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과 461장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다. 이 두 찬송가는 각각 친일행적을 한 인물로 잘 알려진 주요한과 김활란이 작사했다. 찬송가 전체 600여곡 중 비교적 많이 불려지는 곡에 속한다.

     

     

    선교탄압(교회말살)의 주모자

    윗줄 좌로부터 양주삼, 윤치호, 신흥우, 아래 좌로부터 변홍규, 정춘수, 갈홍기, 신흥우는 해방직후 한국 YMCA의 대부로 서재필을 업고 야당투사로 이승만 진영과 대립, 갈홍기는 이승만정권의 공보처 장관(초대), 김인영은 남산교회를 거처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가 됨. 장로교 김길창은 부산에서 부니엘학원 계명대학을 장악(부산피난 시 교권 장악) 한 바 있고, 유호준은 해방 후 장로교단 총무, KNCC 총무, 총회장 등 모든 요직을 거쳤다.

     

     

    김활란이 작사한 찬송가 461장 가사는 이렇다.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불 때/ 만경창파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 배 한 척이 떠나가니/ 아 위태하구나 위태하구나(1절)
    비바람이 무섭게 몰아치고/ 그 놀란 물 큰 파도 일 때에/ 저 뱃사공 어쩔줄 몰라하니/ 아 가련하구나 가련하구나(2절) <이하 3·4·5절 생략>


    이러한 대표적 친일작가 주요한이 지은 찬송가는 304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이다. 이 곡의 가사는 이렇다.

     

    어머니의 넓은 사랑 귀하고도 귀하다/ 그 사랑이 언제든지 나를 감싸줍니다/
    내가 울 때 어머니는 주께 기도드리고/ 내가 기뻐 웃을때에 찬송부르십니다.(1절)
    온유하고 겸손하며 올바르고 굳세게/ 어머니의 뜻 받들어 보람있게 살리다/
    풍파많은 세상에서 선한싸움 싸우다/ 생명시내 흐르는 곳 길이 함께 살리라(4절)

     

     

    교단을 멍들게 한 친일파들

     광복 60주년을 맞아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감독회장 신경하)가 친일 지도자 때문에 멍든 감리교 역사를 반성하고 새로운 영적각성 운동에 나선다.

    이를 위해 기감은 최근 발간한 예배자료집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에서 대표적으로 일제에 협력했던 12명의 감리교인을 선정했다.

    이는 민관기 목사 등이 한국감리교 인물사전(2002년),감리교 교회성장사(1997년) 등 관련 자료를 참고해 정리한 결과다. 기감은 자료집에서 정춘수 박희도 김영섭 등 9명의 목사와 신흥우 윤치호 김활란 등 3명의 평신도를 ‘친일 행각 대표적 참여자’로 분류했다.

    한국감리교 인물사전 등에 따르면 정춘수 목사는 1939년 기독교조선감리회 통리사(감독)로 선임된 뒤 본격적인 친일행위를 했다. 정 목사는 1940년 ‘혁신안’을 발표해 민주주의 배격,일본 정신 함양,일본적 복음 천명 등을 선언했고 일본군 지원 독려와 한국과 일본 감리교 통합에 앞장섰다. 또 교회종 등 철제물 헌납, 황도문화군 설치 등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했다. 특히 정 목사는 자신의 친일행위에 반발하는 49명의 교단 목사들을 파면·면직시켰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항일설교 등을 한 17명의 감리교인이 옥고를 치르게 했다.

     

     

     

    ▲ 조선일보에 실렸던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임원들의 신사참배

     

    박희도 목사는 1939년 ‘동양지광’이란 잡지를 발간해 일제에 대한 협조를 독려했으며 이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조선언론보국회,시국강연반 활동 등을 통해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그는 광복 후 ‘자진적으로 나서서 성심으로 일제를 위해 활동한 자’라는 이유로 반민특위에 붙잡혔다.

    김영섭 김응태 정등운 목사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에서 각각 사무국장,전도국장,임원으로 활동했다. 감신대 교장을 역임한 김인영 목사는 혁신교단 간부로 활동하며 일제에 순응했고 김종우 목사는 신사참배를 했다. 또 전영택 목사는 친일문인단체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박연서 목사는 일제가 주도한 혁신교단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평신도 지도자인 신흥우는 친일강연회 참석 등이 문제가 됐고 윤치호는 일제말기 변절해 일본제국의회 ‘칙선 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김활란은 정신대 독려 강연 등 일제 시국정책에 협조했다. 그러나 이같은 친일 인사 중에는 상당수가 독립운동을 한 경력도 있어 이들의 공적과 허물에 대한 공정한 판단과 함께 향후 보다 자세한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실제로 정춘수 박희도 목사의 경우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했고 독립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신흥우 윤치호 김활란 역시 친일과 반일의 경력이 크게 엇갈린다. 이와 관련해 충북 청원군 좋은감리교회(담임목사 한영제)는 지난달 24일 “친일행위를 했으나 공적도 기억해야 한다”며 정춘수 목사의 흉상 제막식을 열기도 했다.

    민관기 목사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하거나 반대로 양주삼 목사처럼 친일에서 반일로 돌아섰어도 누명을 쓰고 있는 경우 등 복잡한 부분이 많다”며 “단순히 친일파라고 낙인을 찍기보다는 과거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반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기감은 이르면 이달 말 ‘역사위원회’를 구성해 이번 조사내용 등을 토대로 감리교 역사연구 및 기념사업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 신사에 오르는 남산길

     

    윤치호(고문), 신흥우(핵심뿌리), 정춘수(1차 주무), 이동욱(1차 주무), 변홍규, 이동욱(2차 주무), 김인영, 갈홍기(행동 대장) * 황도문화관 지시에 따름.

     

     

     

     

     

    참고문헌

    {대한감리회보}, 1949

    {매일신보}

    [감리교회 배신·배족 교역자 행장기], 1947

    마경일, {마경일 목사 회고록--길은 멀어도 은총 속에}, 전망사, 1984

    {기독교신문}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이만열외, 보성, 1986)

    독립운동사자료집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독립운동사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3·1운동비사(이병헌, 시사시보사, 1959)

    朝鮮三·一獨立騷擾事件(朝鮮憲兵隊司令部, 巖南堂書店, 1969)

    반민족문제연구소 (1995). 정춘수 : 감리교 황민화의 앞잡이 (김승태), 친일파 99(3)서울: 돌베개

    숭의교회 75년사. 인천숭의교회

    김수진 (199351). 일본개신교회사. 서울: 홍성사

    http://jungbuya.com/bbs/board.php?bo_table=vip&wr_id=28

    http://bluecabin.com.ne.kr/split99/jcs3373.htm

    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51013

    http://blog.daum.net/jybae/1133

     

     

     

     

     

     

     

     

     

     

    기미년 독립운동 국내대표 33인

     

     

    ▲ 최린,'제일선'에 실린 '춤추는 박희도', 지금은 철거된 정춘수의 동상     © 김상구

     

     

    이름

    생존기간

    건국훈장

    서훈

    연도

    형량

    비 고

    손병희(58)

    1861.4.8~1922.5.19

    대한민국장

    1962

    3년

    천도교

    권동진

    (58)

    1861.12.15~1947.3.9

    대통령장

    1962

    3년

    천도교

    오세창

    (55)

    1864.7.15~1953.4.16

    대통령장

    1962

    3년

    천도교

    임예환

    (54)

    1865.7.17~1949.4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나인협

    (47)

    1872.10.8~1951.4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홍기조

    (54)

    1865.12.6~1938.7.6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박준승

    (53)

    1866.11.24~1921.3.24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양한묵

    (57)

    1862.4.29~1919.5.16

    대통령장

    1962

    재판 중 사망

    천도교

    권병덕

    (52)

    1867.4.25~1944.9.15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김완규

    (43)

    1876.7.9~1949.6.20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나용환

    (55)

    1864.8.7~1936.8.19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이종훈

    (61)

    1858.2.9~1931.5.2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홍병기

    (50)

    1869.11.5~1949.1.26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이종일

    (61)

    1858.11.6~1925.7.13

    대통령장

    1962

    3년

    천도교

    최린

    (41)

    1878~1958

    친일

    인명사전



    3년

    천도교

    이승훈

    (55)

    1864.4.25~1930.5.9

    대한민국장

    1962

    3년

    기독교

    박희도

    (30)

    1889~1951

    친일

    인명사전



    2년

    기독교

    이갑성

    (30)

    1889.10.23~1981.3.25

    대통령장

    1962

    2년 6월

    기독교

    오화영

    (39)

    1880.4.5~1950

    대통령장

    1989

    2년 6월

    기독교/ 납북

    최성모

    (45)

    1874.1.9~1937.3.14

    대통령장

    1962

    2년

    기독교

    이필주

    (50)

    1869.12.9~1942

    대통령장

    1962

    2년

    기독교

    김창준

    (30)

    1889~1956

    월북,

    사회주의

    -

    2년 6월

    기독교

    신석구

    (44)

    1875~1950

    대통령장

    1963

    2년

    기독교

    박동완

    (34)

    1885.12.27~1941

    대통령장

    1962

    2년

    기독교

    신홍식

    (47)

    1872.3.1~1937

    대통령장

    1962

    2년

    기독교

    양전백

    (50)

    1869.3.10~1933.1.17

    대통령장

    1962

    2년

    기독교

    이명룡

    (47)

    1872.8.2~1956.11.12

    대통령장

    1962

    2년

    기독교

    길선주

    (50)

    1869~1935.11

    독립장

    2009

    무죄

    기독교

    유여대

    (41)

    1878.11.26~1937.1.13

    대통령장

    1962

    2년

    기독교

    김병조

    (42)

    1877.1.10~1948.2.25

    대통령장

    1990

    상해 망명

    기독교

    정춘수

    (44)

    1875~1951

    친일

    인명사전



    1년 6월

    기독교

    한용운

    (40)

    1879.8.29~1944.6.29

    대한민국장

    1962

    3년

    불교

    백용성

    (56)

    1863.5.8~1940.2.20

    대통령장

    1962

    1년 6월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