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여성 교화사업의 첨병, 모윤숙(毛允淑)

草霧 2013. 12. 5. 10:36

 

 

 

문학

 

모윤숙(毛允淑,  1909∼1990)

            

 

 

여성 교화사업의 첨병

 

 

 

1941년 조선교화단체 연합회 간부
1942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간부

1910년 함남 원산 출생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 졸업 / 북간도 용정 명신여학교 영어교사 부임
1932년 배화여학교 교사 부임 / 극예술연구회 가입
1935년 경성제국대학교 전과 2년 수료 / 경성 중앙방송국 근무
1948년 세계 YWCA 뉴욕대회 참석 / 제3차 파리 UN총회 한국대표
1949년 문예사 창립 / 문학지 <문예> 발간 / 제4차 뉴욕 UN총회 참석
1950년 대한여자청년단 총본부단장
1951년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 강사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사 / 한국문화단체 총연합회 최고위원 / 제27차 국제펜클럽 비엔나대회 참석
1956년 미국무성 초청 문화교육시설 시찰
1957년 제29차 국제 펜클럽 동경대회 참석
1958년 제10차 유네스코 총회 참석
1959년 세계여성 필리핀대회 한국대표
1960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피임 / 자유아시아 마닐라대회 한국대표
1961년 세계여성 워싱턴대회 한국대표
1967년 제35차 펜클럽 아비잔대회 한국대표
1969년 제36차 펜클럽 파리대회 한국대표
1970년 제37차 세계펜클럽대회 준비위원장 / 문화계 비례대표로 국회의원(문공위원) 선임
1972년 IPU 파리대회 참석 / 유네스코 파리대회 참석
1974년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 취임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 명예문학박사 학위 / 제42차 시드니 국제펜클럽대회에서 국제펜클럽 부회장 인준
1978년 재단법인 한국문학진흥재단 이사장
1987년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
1963년 대한민국정부 모란훈장
1965년 대한민국예술원 문학상
1968년 이화여자대학교 문화공로상
1979년 3·1문화상 / 세네갈정부 문화훈장
1990년 대한민국 금관문화상 추서

1940.9.10 신생활운동과 오락취미의 정화 매일신보

1940.9.17 창조적인 생활 매일신보

1942.1.6 동창 매일신보

1942.1 동방의 여인들 신시대

1942.2.21 호산나.소남도(시) 매일신보

1942.3.9 어머니의 힘 매일신보

1942.5 여성도 전사다 대동아

1943.5.27 아가야 너는(시) 매일신보

1943.11.12 내 어머니 한 말씀에(시) 매일신보

1943.12 오시지 않았는데(시) 신시대

1943.12 어린 날개(시) 신시대

1945.1.3 신년송(시) 매일신보

1991년 금관문화훈장 추서

 

 

  • 1.1 일제 강점기
  • 1.2 해방 이후
  • 1.3 사후
  • 2 저서
  • 3 금욕주의
  • 4 관련 항목
  • 5 대중문화에 나타난 모윤숙
  • 6 참고자료
  • 7 주석
  •  

    모윤숙(毛允淑, 1910년 3월 5일 ~ 1990년 6월 7일)은 일제 강점기대한민국의 시인이며 수필가이다. 1948년 UN한국위원회 방문 시 크리슈나 메논 등을 설득하여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도록 설득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UN총회에도 파견되었다. 한국 전쟁 때는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시를 발표하여 화제가 되었다. 안호상의 부인이었으나 이혼했다. 아호는 영운(嶺雲)이다. 영문명은 메리 앤 모(Mary Ann Moh)이다.

     

    1933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를 하면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선과 야간반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다. 이때 첫 시집 ≪빛나는 지역≫을 발간하였다. 1934년 중매로 보성전문학교 철학과 안호상(安浩相)을 만나다가 그와 결혼하였으나 곧 이혼하고, 이후 평생을 독신으로 생활하였다.

     

    1935년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여 경성제국대학 야간반을 나온 최초의 여학생이 된다. 1945년 경성제국대학 본과 조선어문학을 전공한 신진순이 나오기 전까지 한반도 내에 설립된 대학교를 최초로 졸업한 사람이 된다.

     

     

    극중에서 이보영은 시인을 연기했으나 정용기 감독도 '일부러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드러냈다'며 간접적으로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를 부르는 시인이 모윤숙임을 밝혔다.극 중 모윤숙을 모델로 한 문석경 역을 연기하였다.

     

    이후 시와 소설 외에 외국 작품, 논문의 번역일 등을 했다. 모윤숙은 초기부터 외국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해외문학파와 가까이 지냈으며 일기체의 감상적인 장편 산문시집 《렌의 애가》(1937)가 스테디셀러가 되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 중 각종 친일 단체에 가입하여 강연 및 저술 활동으로 전쟁에 협력했다. 조선문인협회에 간사로 가담해 친일 강연을 했고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교화단체연합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2), 국민의용대(1945)에 가담하였고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등에 친일 논설을 기고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대동아공영권 논리를 형상화한 〈동방의 여인들〉(1942)을 친일 잡지 《신시대》에 기고하고 《매일신보》에는 〈호산나 소남도〉(1942)라는 전쟁 찬양시를 발표하였으며, 지원병 참전을 독려하는 시 〈어린 날개 - 히로오카(廣岡) 소년 학도병에게〉(1943), 〈아가야 너는 - 해군 기념일을 맞아〉(1943), 〈내 어머니 한 말씀에〉(1943) 등을 연달아 발표하는 등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 이 시기 비슷한 주제의 시들을 창작한 노천명과 함께 문인 중 가장 노골적인 친일파로 분류되고 있다.

     

    광복 후 미군정 치하에서부터 이승만과 밀착하여 단독 정부 수립에 협력하였다. 모윤숙은 크리슈나 메논 유엔한국위원장이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하던 것을, 미인계를 이용해 1948년 3월 12일 표결에서 남한의 독자적 선거안에 찬성표를 던지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모윤숙은 김수임의 단짝이기도 하며 또한 이강국을 좋아했다는 설이 있는데, KBS 드라마 서울 1945에서 이 설을 차용하기도 했다. 한편, 김수임이 간첩 혐의를 받고 재판을 받을 당시 모윤숙은 김수임을 적극 변호하였다.

     

    귀국 후 이화여자대학교에 강사로 출강하여 국문학을 강의하였고, 1949년 월간 순수문예지 ≪문예 藝術≫를 창간하였으며, 김구의 국민장에 참석하여 추도시를 낭독하였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조선인민군서울을 점령했을 때, 모윤숙을 즉결 처형하고 시신은 탱크에 매달고 다녔다는 소문이 나돌았을만큼 우익 문단에서도 대표적인 이승만 계열 인물이었다. 모윤숙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점령 하의 석 달 동안의 체험을 극도로 부정적인 입장에서 기억하고 묘사했는데, 이와 같은 관점은 오랫동안 남한에서 한국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주류를 이루고 남한의 공식 입장을 대변했다.[2]

     

    한국 전쟁중에 그는 낙랑클럽을 이끌고 고위 미국인들을 상대로 로비를 하였는데, 모윤숙은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논개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 때 접대한 사람은 델레스 미 국무장관, 리지웨이, 콜터, 밴프리트 장군과 무쵸 대사 등이었다. 그는 후일에 "김활란 박사가 외국인과 대화하는 매너와 에티켓을 지도했고, 서툴지만 사교 댄스도 추었으며 때론 미인계도 썼지 뭐"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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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제3회 한글시백일장(창경궁)의 심사를 마친 후 입상한 두 학생을 중심으로 기념촬영 (앞줄 왼쪽부터 이영순, 이헌구, 이하윤, 입상한 두 학생, 김광섭, 모윤숙, 최성실, 뒷줄 유정, 김종문, 김용호, 양명문, 한사람 건너 양주동, 김경린, 이인석, 이봉순, 김남조, 고원 선생 등) 

     

    1951년 부산의 피난지에서 열린 이화여자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휴전 후에는 계속 이화여대 교수로 출강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선무 방송에 참여해 종군하였고, 이후로는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1955년 국제펜클럽 한국측 대표로 참가하였고, 이후 1960년 국제 팬클럽 한국본부 회장을 지냈다.

     

    1971년에는 민주공화당 공천으로 제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국민훈장 모란장, 3·1문화상 등을 수여받았으며 제5공화국에서는 문학진흥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1981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고, 1989년에는 예술원 원로회원에 추대되었다.

     

     

    사후 1991년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후일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친일파 708인 명단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총 12편의 친일 작품이 밝혀져[4]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금욕주의

  • 《빛나는 지역(地域)》(1933)
  • 렌의 애가》(1937) - 산문시집
  • 《옥비녀》(1947)
  • 《풍랑》(1951)
  • 《정경(情景)》(1959)
  • 《풍토(風土)》(1970)
  • 《논개(論介)》(1974)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1987)
  •  

     

     

    선무 방송중인 모윤숙 (1950년 11월 8일)

     

    친일 여류시인에서 단독정부 수립의 막후 주역으로

    이번에 영·미국의 죄상을 듣고 알고 보니까 참으로 황인종으로서는 견디지 못할 괘씸하고 분한 일이 여간 많지 않습니다. 그 사탄의 정체에 같이 춤추는 여자가 한 분 동양에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저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입니다.

     

    이 여자는 어떻게 된 셈인지 동양 여성이면서 미국 발바닥을 핥아야 행복감을 느끼는 변태 여성입니다. 미국의 온갖 향락성, 개인주의 관념에 잔뜩 물이 먹은 이 여자는 그 생활이 말 못하게 향락적입니다.

     

    ……미국에 왔다갔다 하면서 온갖 망녕된 사상을 추려서는 남편인 장개석의 머리에 불어넣어 줍니다.…… 이런 여성이 동양에 있어 사태를 어지른다는 것은 같은 동양 여성으로 한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가슴에 대화혼의 무형한 총검을 가져야겠습니다.……가문에서 쫓겨나더라도 나라에서 쫓겨나지 않는 며느리가 됩시다.

    ([여성도 전사다], 1941년 12월 27일 부민관에서 개최된 '결전부인대회'의 강연)-

     

    그들 미국인은 20세 이상이 되면 의존심이 없고 확고한 자아에 입각해서 행동하고 사색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어디까지나 동등하고 불공평은 멸망의 씨라는 것을 통감하고 있는 듯하다. 사소한 불공평이라도 있다면 당장에 공론에 의해서 억제되고 만다.

     

    이와 같은 미국의 현재는, 즉 그들의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문명과 민주주의는 그들의 짧은 역사 위에서도 미국의 교육정신, 이념이 오랜 역사를 가진 타국을 비판하고 투쟁하는 데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엿볼 수 있었다.

    ([미국문화와 한국적 반성], 1956년 미국 국무부 초청 문화교육 시찰기)-

     

    모윤숙의 위의 두 글 사이에는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가 스치고 지나갔다. 영국과 미국을 타도해야 할 이념적인 적대국으로 여겼던 중오심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상전으로 모시게 되기까지의 사연과 그 과정에서 여류시인 모윤숙의 변신과 역할은 구태여 여기서 자세히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1909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난 모윤숙은 원산 진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1917), 졸업은 함흥 영생보통학교에서 했다(1925). 개성 호수돈여고(1928)와 이화여전을 나왔으며, 간도 명신여학교(1932), 배화여고(1933) 교사를 지내면서 시를 쓰는 한편 연극활동을 했다.

     

    해외문학파와 가까이 지내는 한편 모윤숙은 이 무렵부터 이광수*와 개인적으로 가까이 지냈는데, 이광수는부전호(赴戰湖) 여행 때 "아무리 높은 고개에 올랐어도 저 구름송이를 잡을 재주는 없지"라면서 '고개 위에 떠가는 구름', 영운(嶺雲)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안호상(安浩相)과의 결혼 중매까지 섰다(1934).

     

    잡지 {삼천리}의 기자를 거쳐 경성방송국 조선여성 교양강좌과로 들어간(1936) 모윤숙은 이미 시집 {빛나는 지역}(1933)을 낸 데 이어 유명한 일기체 연가 수상인 {렌의 애가}(1937)로 명성을 얻었다.

     

    자신의 회고록이나 문학사전 등에는 첫 시집을 낼 때 고초를 당했으며, 이 밖에도 시 [조선의 딸], [이 생명을] 등 때문에 1940년에 구류를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모리(毛利)로 개명하라는 일제의 압력을 거부하면서 '군국 일본의 시종살이를 해야 하는 악취의 선풍이 휩쓸고' 지나는 계절을 견딘 것을 자긍심으로 회고한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 경기도 경찰국으로 끌려가 취조를 당하다가 풀려 나왔을 때 모윤숙을 맞아 준 것은 방송국장과 일본육군 소장 구라하시 군보도과장이었는데 이 때 그녀는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 같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게도 이런 강압이 오거늘 총독부가 보아서 쓸 만한 인재는 모두가 억지와 탄압으로 꼼짝 못하게 눌러서 저희 편을 만들었을 게 아닌가? 그러나 정말 그들의 편이 된 이가 몇 사람이나 될까?" 그러나 모윤숙은 1940년경부터 자신의 회고록과는 다른 활동을 한 여러 기록들을 남겨 두고 있다.

     

     

     

     

    '조선민족의 딸'이기보다 '동방의 딸'이기를 강조

    일제의 어용화를 위하여 만들어진 조선문인협회 문예대강연회(1940. 1∼2)의 연단에 서는 것을 시작으로 모윤숙은 임전대책협의회(1941), 총독부 학무국이 만든 조선교화단체연합회(1941. 9),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1942) 등 각종 여성 관련 친일 단체에서 활약을 했다.

     

    {매일신보}에 실은 전시체제 아래서의 신생활운동을 강조하는 글들----[독서와 교양미],(1940. 8. 1), [신생활운동과 오락취미의 정화], (1940. 9. 10), [창조적인 생활], (1940. 9. 17) 등----은 당시의 식민문화 생활정책의 대중화를 주장한 내용으로, 내핍, 사치향락의 배격, 근로동원에의 참여 등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련의 글들은 방송국의 조선 여성 교화업무와도 관련된 것이었으며, 그는 노천명과 함께 여류 문인으로는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대동아공영권의 이념을 살려 조선 여인으로 하여금 고루한 민족 관념을 버리고 일본의 서양 정복전에 협력해야 한다는 주제를 노래한 시 [동방의 여인들]({신시대}, 1942. 1)에서 모윤숙은 이렇게 노래한다.

     

    비단 치마 모르고 연지분도 다 버린 채 동아의 새 언덕을 쌓으리다 온갖 꾸밈에서 행복을 사려던 지난 날에서 풀렸습니다 벗어났습니다 들어보세요 저 날카로운 바람 새에서 미래를 창조하는 우렁찬 고함과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산 발자욱 소리를 우리는 새날의 딸 동방의 여인입니다

     

    전쟁의 단말마 속에서 내핍을 강조하면서 '조선민족의 딸'이기보다는 '동방의 딸'을 강조한 이 시는 대동아공영권의 이념을 여성들에게 교화시킨 전형적인 작품의 하나다.

     

    이어 모윤숙은 일본군의 싱가포르 점령을 찬양하는 "2월 15일 밤!/대아시아의 거화!/대화혼의 칼이 번득이자/사슬은 끊이고/네 몸은 한 번에 풀려 나왔다/처녀야! 소남도(昭南島)의 처녀야!"([호산나 소남도], {매일신보}, 1942. 2. 21)라는 시를 썼다.

     

    점령 후 싱가포르를 소남도로 고쳐 부른 일제의 침략을 미화한 이 시에서도 모윤숙은 서구에 대한 '동방'의 단결을 강조하면서, 침략과 점령을 일본에 의한 해방으로 풀이한다.

     

     "거리엔 전승의 축배가 넘치는 이 밤/환호소리 음악소리 천지를 흔든다/소남도! 대양의 심장!/ 문화의 중심지!/여기 너는 아세아의 인종을 담은 채/길이길이 행복되라/길이길이 잘살아라"고 끝맺는 이 시는 서구 제국주의와의 전쟁 예찬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아시아 약소 민족국가의 점령을 미화한다.

     

    그리고는 이런 성전을 위하여 모든 아시아인 전체가, 그 중 특히 조선의 학도가 먼저 참여해야 한다는 취지의 [어린 날개----히로오카(廣岡) 소년 학도병에게]({신시대}, 1943. 12), [아가야 너는----해군 기념일을 맞아]({매일신보}, 1943. 5. 27), [내 어머니 한 말씀에]({매일신보}, 1943. 11. 12) 등의 시를 발표했다. 

     

     

    1948년 3월 12일 유엔 조선임시위원단 메논 단장이 ‘남한 단독선거안’을 지지하도록 로비한 시인 모윤숙은 그해 12월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파리에서 열린 이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자 한국대표단 8명이 기쁜 표정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 왼쪽부터 모윤숙 시인, 조병옥·장면 박사,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 등이다. [길을 찾아서] 야합이 낳은 ‘반쪽 건국’ / 정경모 : : 한겨레

     

     

    메논 설득에 한몫

    1945년 11월, 이기붕의 연락으로 이승만을 만난 모윤숙은 결혼했다가 헤어진 사실과 딸이 하나 있다는 것, 부모님이 이북에서 타계한 일 등에 대하여 이야기했는데, 이승만은 이 여류시인에게 "참, 우리나라에 재주있는 문인들이 더러 있었지! 그 이광수 씨 어디 있나? 주요한*이던가, 그 분도 문인이지"라고 되묻는다.

     

    이 '노 독립운동가'가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논하는 자리에서 고작 친일문인을 거론한 것은 그 당시 이승만의 정치문화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자리에서 모윤숙은 며칠 전에 만났던 춘원의 말을 상기한다.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는 결의안 통과를 위해 1948년 9월부터 12월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한국 대표단.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모윤숙, 조병옥, 장면, 김활란, 성명 미상, 장기영, 김우평, 정일형.

     

    "나는 죄인이지. 그러나 그 잘못은 내가 책임을 질 것이고, 또 져야 옳은 일이지. 다만 조선 사람의 마음가짐을 나는 슬퍼하는 게야. 또 앞날이 무섭단 말야. 이제는 사상의 침략을 조심해야 해. 서로의 잘못을 캐내는 데 열을 낼 게 아니라 잘못을 찾는 대로 서로가 다시는 그런 세상이 안 되도록 정신 소제를 해야 한단 말야."

     

    여기서 '사상의 침략'이란 좌익이었고, '서로의 잘못을 캐내는 데 열을 낼 게 아니라'는 것은 친일의 과거를 묻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런 정서는 이승만, 이광수와 같은 계층의 인사들에게 넓게 확산되어 갔다.

     

    그 출구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었고, 이 계획은 1947년 11월 유엔 소총회의 결의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한국 방문과 활동으로 진행되었다. 인도인 쿠마라 P. S. 메논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위원장에 선출되어 유엔소총회가 1948년 2월 26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결의할 때까지 많은 활동을 해 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처음부터 단정수립 반대국이었던 인도의 대표로서 한국에 온 메논은 모윤숙의 노력으로 하지 중장을 떼어 버린 채 이승만과의 단독 대좌를 했는가 하면, 이광수와도 자리를 마련해 즐거운 한때를 가졌다.

     

    이승만으로부터 메논을 설득하기 위하여 간곡한 당부를 받은 모윤숙은 일제 때부터 가장 존경하던 선배이자 결혼 중개인이며, '영운'이라는 자신의 아호까지 지어 주었던 이광수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고 상의했다. 단정수립 확정 후 메논이 한국을 떠난 뒤의 심경을 모윤숙은 "고마운 사람! 나만 아는 잊을 수 없는 은인.

     

    그는 정치인이라기보다 우정과 신의에 가득 찬 영혼을 가진 세계의 외교관이었다. 이박사는 실로 그 은혜를 잊을 수도, 또 잊어서도 안 될 것이다"라고 썼다.

     

    이 중요한 역사적인 고비를 넘긴 뒤 모윤숙의 활동은 차라리 사족이 될 것이다. 제3차 유엔총회 대표로 참석(1948. 10), 월간 {문예} 창간(1949) 등을 거쳐 한양여성클럽 회장, 대한여자청년단 총본부단장(1950),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1955), 국제펜클럽 한국위원회 위원장(1959∼62, 1977), 공화당 전국구 의원(1972) 등을 지냈으며 1990년에 세상을 떠났다.

     

     

    펜클럽의 대모

     

    대한민국 예술원상(1967), 국민훈장 모란장(1970), 3·1 문화상(1979) 등을 수상했으며, 주요 저작으로는 두번째 시집 {옥비녀}(동백사, 1947)에 이어 시집 {풍랑}(문성당, 1951), {정경}(일문서관, 1959), {풍토}(여원사, 1970) 등과 수필집 {내가 본 세상}(수도문화사, 1953), {포도원}(일문서관, 1960), {구름의 연가}(삼중당, 1964) 등과 {렌의 애가}(초판 때는 산문집으로 일월서방, 1937, 재판은 일문서관, 1951) 등이 있다.

                                                                             

     

     ■ 임헌영(문학평론가)

     

     

    모윤숙毛允淑,1910∼1990

    1940.9.10 신생활운동과 오락취미의 정화 매일신보
    1940.9.17 창조적인 생활 매일신보
    1942.1.6 동창 매일신보
    1942.1 동방의 여인들 신시대
    1942.2.21 호산나.소남도(시) 매일신보
    1942.3.9 어머니의 힘 매일신보
    1942.5 여성도 전사다 대동아
    1943.5.27 아가야 너는(시) 매일신보
    1943.11.12 내 어머니 한 말씀에(시) 매일신보
    1943.12 오시지 않았는데(시) 신시대
    1943.12 어린 날개(시) 신시대
    1945.1.3 신년송(시) 매일신보

     

    여류시인. 호는 영운(嶺雲). 함경남도 원산 출생. 학수(鶴壽)의 둘째 딸이다. 피로 색인 당신의 얼굴들|문을 여소서|조선의 딸|내 어머니 한 말씀에|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1925년함흥 영생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개성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2년에 편입하였다. 1927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1931년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그해 북간도 용정에 있는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 교사로 재직하며, 시 <피로 색인 당신의 얼골을>(東光, 1931.12.)을 발표하였다. 1932년서울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자리를 옮겼으며, 첫 시집 ≪빛나는 지역(地域)≫(朝鮮彰文社, 1933)을 발간하였다. 1934년 보성전문학교 교수였던 안호상(安浩相)과 혼인하였으나 곧 이혼하고 독신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제3차UN총회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정부수립에 여류외교관으로서 활약한 바 크다. 1949년 월간 순수문예지 ≪문예 藝術≫를 창간하였고, 1951년 이화여자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1955년 국제펜클럽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고, 1960년 국제 펜클럽한국본부 회장, 1971년 공화당의 전국구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초기 작품 <피로 색인 당신의 얼골을>에는 과거의 영광을 생각하거나 찰나의 환희를 구하기보다 논쟁과 분열을 지나 건전하게 살아가는 굳센 주인공을 찬양하고 신뢰한다는 서정적 내용을 보인다. 여기에 찬양된 주인공은 굳센 사람이고 피로 물든 얼굴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 열정의 인물로 보이는데, 일제치하에서 민족적인 진로를 모색하는 의미와 정열적인 삶을 추구하는 시인의 지향이 엿보인다.

     

    시집 ≪빛나는 지역≫에는 신변적인 것과 자연과의 교감이 시적 제재로 나타나 있으나, ≪옥비녀≫(동백사, 1947)에 이르면 민족적인 주체의식이 전경화(前景化)되며 화자의 역사적 인식이 보인다. 예컨대, 화랑 무사를 노래한 <문을 여소서> 같은 작품과 <조선의 딸>·<이 생명을> 등 민족의식이 뚜렷한 작품들을 발표하여 1940년 경기도 경찰국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는 학도병 출정을 찬양 고무한 시 <내 어머니 한 말씀에>·<오시지 않았는데>·<신년송> 등을 ≪매일신보≫에 발표하여 친일적인 경향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광복 후 6·25를 겪으면서 시집 ≪풍랑 風浪≫(1951)을 출간하였는데, 그 중에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와 같은 애국적 시상을 작품화하기도 하였다.

     

    이강국, 김수임, 모윤숙을 말한다

    1925년 3월6일 동아일보에 실린 보성고보, 중앙고보, 배재고보 수석 졸업생들의 기사. 사진 상단 우측 이강국, 상단 좌측 고유섭. ⓒ동아일보(시민의신문발췌)

     

    젊은 군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으로서 정열과 슬픔이 교차하는 감상성이 짙은 작품이다. 시적 화자의 이러한 정열과 감상성에 의거하여 ≪렌의 애가(哀歌)≫(1937·1949·1951)와 같은 연애 장편 산문시를 창작하여 발표하기에 이른다. 작품에는 한국 남성을 연모하는 절실한 서정적 화자의 호소가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그 이루지 못한 절절한 호소력으로 인한 듯 1950년대 중반의 독서계에 큰 호응을 일으켰다.

     

    시집으로는 ≪정경 情景≫(1959)·≪구름의 연가(戀歌)≫(1964)·≪풍토 風土≫(1970) 등이 있고, 서사 시집으로 ≪논개 論介≫(1974), 수필집으로 ≪내가 본 세상≫(1953)·≪포도원≫(1960)이 있으며, ≪모윤숙시전집≫(1974)·≪모윤숙전집≫(1982)·≪국군은 죽어서 말한다≫(1987) 등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예술원상(공로상)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일제강점기에 발표한 ≪어린 날개≫·≪아가야 너는≫ 등이 일제의 조선 학도 징병을 고무, 찬양한 작품임이 밝혀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모윤숙의 초기 시세계는 자유분방한 정열을 직접적이고 화려한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때로는 센티멘탈리즘의 유혹에 빠져버린 것으로 비판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감정의 자유로운 분출의 이면에는 ‘님’으로 표상되는 강렬한 민족지향성이 놓여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역사와 국토, 풍물 등 지방적인 것에서 제재를 취하려는 태도 역시 이러한 민족지향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940년대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점차 순수시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해방 후에는 민족주의적 이념으로 조국애와 민족애를 고취시키는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1937년 발간된 <렌의 애가>는 ‘시몬’이라는 중년 남성과의 플라토닉한 사랑을 묘사한 것으로, 여성의 연모와 동경이 세련된 언어와 감정적인 이미지로 잘 짜여진 그의 대표작이다.- 참고: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1910년 3월 5일 함남 원산에서 출생하였다. 함흥 영생여학교, 호수돈여학교 등을 거쳐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하였다. 간도 명신여고 교원, 배화여고 교사, 삼천리사 기자, 중앙방송 기자로 활동하였다. 1935년 <시원>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했다. 1940년에는 시 <조선의 딸>, <이 생명>을 써 경기도 경찰서에 구류되기도 했으나 이후에는 친일적인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문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48년 유엔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1949년 <문예>를 창간했다. 1954년에는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창립에 참여하였으며, 1976년에는 이화여대로부터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자유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문총 최고위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위원장, 국제펜클럽 부위원장, 한국현대시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국민훈장모란장, 예술원상, 3·1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집<빛나는 지역(地域)>(1933) <옥비녀>(1947) <렌의 애가(哀歌)>(1937) <풍랑>(1951) <정경(情景)>(1959) <풍토>(1970) <논개>(1974) <황룡사구층탑>(1978)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1983)

     

    소설집 <그 아내의 수기>(1949)
     
    작가의 말

    (……) <렌의 애가>는 나의 애정백서였다. 아무런 부끄럼도 없이 용케도 나는 내 젊음의 전부를 불태우는 듯한 마음으로 그 길고 긴 시를 썼다. ‘렌’이라는 숲 속에서 목이 타도록 우는 새를 나는 주인공이라 정해놓고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한 사람의 대상을 향해 편지를 썼다. 그가 누구였든 나는 <렌의 애가> 속에서 목을 놓아 인생을 부르고 사랑을 찾았다. 젊음의 통곡, 슬픔의 찬가를 기록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사는 정다운 땅과 해와 별이 온통 그의 존재를 위해 빛나고 변화하고 있음을 증언하고 싶었다. 나는 땅 위에 존재하는 인간의 애정이란 것이 그렇게 모멸적일 수가 없고 그렇게 비굴할 수가 없음을 써 보고 싶었다. 끝까지 좇아가서라도 한없이 높은 가지에 걸린 생명의 불꽃에 나를 태워보고 싶은 욕망에서였다. 아마도 이 시절이 나에게 있어선 남성에 대한 환멸의 정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 ‘남성, 그 허구의 초상화’, 모윤숙, <물레를 돌리는 여인>, 명문당, 1993
     
    평론
    (……) 시세계의 특징을 시집별 특징으로 전기와 중기, 후기로 나누어 고찰함으로써 시적 변모를 알 수 있었다. 전기의 특징은 식민지 시대를 겪으면서 낭만적인 정열과 민족애를 드러내고 있었다. 첫시집 <빛나는 지역>과 <옥비녀>는 모윤숙의 낭만적인 애상과 더불어 민족사상과 기독교 사상을 표출하였으며, 이 시집에서 모윤숙은 기독교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희생의 미학과 북간도 이주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통해 고향상실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모윤숙은 개인적인 절망감보다는 민족적인 아픔을 시로 형상화하는 데 주력한 시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정신은 중기 시에도 그대로 이어져 역사적 인식과 비애로 나타난다. 시집 <풍랑>을 통하여 6·25전쟁의 수난을 시로 담아내어 애국사상을 그렸으며, 이러한 경향이 후기시인 서사시집 <논개>와 <황룡사구층탑>에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렌의 애가>, <논개>, <황룡사구층탑>에서 시의 특징을 살폈는데, <렌의 애가>는 서정성과 서사성을 지닌 시로 고독과 동경의 세계를 통하여 자기화해의 공간을 형성하였다. <논개>에서는 ‘작가 서술’과 ‘주석적 제시’라는 서술 양식을 통해 ...... 

     

    동방의 여인들

      대일본제국의 서양 정복전에 협력하자

      - '동방의 여인들' 발표

      - 대동아 공영권의 이념을 살려 조선 여인으로 하여금 고루한 민족 관념을 버리고 일본의 서양 정복전에 협력해야 한다는 주제

      - '동방의 여인들' 내용은 아래와 같음

       

      비단 치마 모르고
      연지분도 다 버린 채
      동아의 새 언덕을 쌓으리다
      온갖 꾸밈에서
      행복을 사려던 지난 날에서
      풀렸습니다
      벗어났습니다

      들어보세요
      저 날카로운 바람 새에서
      미래를 창조하는
      우렁찬 고함과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산 발자욱 소리를

      우리는 새날의 딸  
      동방의 여인입니다

     

    호산나 소남도

        일본군의 싱가포르 함락을 찬양함

         - '호산나 소남도' 발표 (매일신보, 1942. 2. 21)

         - 싱가포르를 '소남도'로 이름 부름

         - 일본군의 싱가포르 점령을 찬양

         - 서구에 대한 '동방'의 단결을 강조

         - 침략과 점령을 일본에 의한 해방으로 풀이

         - 일제의 침략을 미화하고 서구 제국주의와의 전쟁을 예찬

         -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아시아 약소 민족국가의 점령을 미화

         - '호산나 소남도'의 내용은 아래와 같음

       

      2월 15일 밤!
      대아시아의 거화!
      대화혼의 칼을 번득이자
      사슬은 끊이고
      네 몸은
      한 번에 풀려 나왔다
      처녀야! 소남도(昭南島)의 처녀야!

      거리엔 전승의 축배가 넘치는 이 밤
      환호소리 음악소리 천지를 흔든다
      소남도!
      대양의 심장!
      문화의 중심지!
      여기 너는 아세아의 인종을 담은 채
      길이길이 행복되라
      길이길이 잘살아라

     

    어린 날개

      날아라 맑은 하늘 사이로

      억센 가슴 힘껏 내밀어

      산에 들에 네 날개 쫙 펼쳐라.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

       

      아름드리 희망에 팔을 벌리고

      큰 뜻 큰 세움에 네 혼을 타올라

      바다로 광야로 나는 곳마다

      승리의 태양이 너를 맞으리.

       

      고운 피에 고운 뼈에

      한번 새겨진 나라의 언약

      아름다운 이김에 빛나리니

      적의 숨을 끊을 때까지

      사막이나 열대나

      솟아솟아 날아가라.

       

      사나운 국경에도

      험준한 산협에도

      네가 날아가는 곳엔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라.

       

       

      김수임(뒷줄 오른쪽)과 모윤숙(뒷줄 왼쪽)이 1945년 일본의 디자이너 노라노(앞줄 가운데)씨 가족과 함께 한 기념촬영

    http://j.mp/dRhyQL . 

    "최근 하남시 문화원이 6·25발발 50주년 상기를 위해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로 유명한 모윤숙 시비건립을 추진하자 시민단체들이 친일(親日)성향 등을 이유로 반발하고 있다.

     

    시민단체에 따르면 모윤숙 씨의 경우 위안부문제를 비롯, 태평양 전쟁 당시 전쟁참여를 독려한 대표적 친일 여류시인으로 분류돼 있는데다 모윤숙 씨의 시비가 건립될 곳이 위안부역사를 후손에게 전하기 위한 '역사관'이 있는 국내 대표적 위안부 집단생활소인 '나눔의 집'과 인접해 있다.

     

    이 때문에 문화원과 시민단체의 뜨거운 찬반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물론 '나눔의 집'이 강한 반발을 보이고 있다. 광주군 퇴촌면 원당리에 위치한 나눔의 집은 지난 95년 서울 혜화동과 명륜동을 전전하며 생활하던 정신대 위안부 할머니들의 노후생활을 위해 조계종 조영자 보살이 대지 8백여평을 기증, 건립된 곳이다.


    문화원은 모윤숙 씨가 여류시인으로서의 위치가 클 뿐아니라 건국 당시 기여한 점이 많다며 시비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문화원장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문구가 국정교과서에도 게재될 만큼 널리 알려진 모윤숙 씨의 시비를 건립하는데 친일행각을 드러내 반대할 것까지는 없는 것 아니냐"며 "시비 건립을 강행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나눔의 집' 관계자는 "모윤숙 씨는 지난 40년대 태평양전쟁과 위안부 동원시 이를 독려한 대표적 친일 여류작가인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며 "인근지역인 하남시에 모윤숙 씨의 시비를 건립한다는 것에 대해 구체적 대응책을 강구하겠다"가 밝혔다."


    모윤숙은 초기 일제하에서 민족적 색채가 강한 시를 발표하고, 창씨개명에도 반대하는 등 저항적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일제의 회유와 압력에 굴복하여 친일 행동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가 광복 후 UN한국 대표, 한국 펜클럽 회장 등을 역임했으면서도 높이 평가받지 못하게 하는 오점이 되었다. 위의 시는 10년 소년들을 동원하여 가미가제 폭격대(일명 자살 특공대로 유명하다)에 투입시키는 것을 찬양한 노래로, 모윤숙의 평생 오점으로 남게 된 친일 작품들 중 하나이다.

     

     

     

     

     

     

    1932년 명신여고 7회 졸업 앨범 사진. 용정 출신으로 이화여전을 나와 1931~32년 이 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모윤숙(가운데 왼쪽) 시인의 모습도 들어 있다. 명신여학교는 1913년 영국인 선교사 베이커의 부인 박혜선(레베카)이 세운 곳으로, 가운데 보이는 건물이 초기의 기와집 교정이다.

     

     

    ■ 참고문헌

    모윤숙, {자화상}, 대호출판사, 1982.

     ______, {호반의 밀어}, 대호출판사, 1982.
    『문학과 지성』(최재서, 인문사, 1938)
    「모윤숙론」(김우종, 『범우에세이선 』18, 범우사, 1978)
    「모윤숙시연구」(김유선, 숙명여자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2)
    『신시대』(1943.12)
    『매일신보』(1943.5.27)

    <모윤숙 시전집>, 모윤숙, 서문당, 1974
     <모윤숙 시 연구>, 송영순, 국학자료원, 1997
     <모윤숙 평전: 물레를 돌리는 여인>, 장석향, 명문당, 1994
     <시몬, 그대 창가에 등불로 남아: 영운 모윤숙 평전>, 장석향, 한멋사, 1986
     <영운 모윤숙 시 연구>, 송영순, 성신여대 박사논문, 1997
     <모윤숙 시 연구>, 김유선, 숙명여대 박사논문, 1992
     <한국현대여류시에 나타난 애정의식연구: 모윤숙, 노천명, 김남조, 홍윤숙을 중심으로>, 김복순, 서울여대 박사논문,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4월 1일). 〈모윤숙 : 여성 교화사업의 첨병 (임헌영)〉, 《친일파 99인 3》. 서울: 돌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