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의 주역, 최린(崔麟)

草霧 2013. 12. 9. 15:14

 

 

 

종교

  

여암(如庵) 최린(崔麟, 창씨명 佳山 麟, 18781958)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의 주역

    

 

 

 

 

1934년 중추원 칙임참의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회장

최린(崔麟, 일본식 이름: 佳山 麟 가야마 린 , 1878년 1월 25일 ~ 1958년 12월)은 일제 강점기천도교 인사 겸 언론인이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사람으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친일 인사로 변절, 전향했다. 아호는 고우(古友)이며, 천도교 도호(道號)는 여암(如庵)이다.

  • 1.1 생애 초기
  • 1.2 일제 강점기 활동
  • 1.3 광복 이후
  • 1.4 월북과 최후
  • 2 사후
  • 3 같이 보기
  • 4 참고자료
  • 5 주석
  •  

    출옥한 후 1922년 1월부터 3월까지 천도교 중앙교단에서 서무과,교육과 주임에 선출되어 활동하면서 교단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해 5월 동지였던 손병희가 사망했고, 그 해 9월부터 1924년까지 종리사를 거쳐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종법사를 지냈다. 그외에 1923년에는 민립대학기성회 중앙부 집행위원으로 홀동하며 점차 활동영역을 사회문화 전반으로 넓혀갔다. 같은 해 9월 동경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 발기인, 상무위원에 선임되었고, 1924년 조선기근구제회 위원, 1925년 조선체육회 위원, 1926년 조선문헌협회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1927년 6월부터 1928년 4월까지 유럽과 미국등 21개 국가를 시찰하고 돌아온 후 1929년에 교단 최고직인 도령에 올랐다.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0년 7월 전조선수재구제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폭 넓은 사회활동을 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1920년대 초 손병희가 죽고 난 이후 천도교는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된다. 이때부터 최린은 '민족개량주의' 경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론'을 내세우며 신파를 주도했다. 이 자치론은 “독립의 전단계로서의 자치와 실력 양성”을 뜻하였고, 이는 곧 독립을 위한다는 명분과 실력 양성이라는 실리를 만족하므로 최린을 비롯한 민족주의 계열의 유산계층의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자치론은 친일 세력으로 전향시키려는 일제의 정치모략이었다.[1] 아무튼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자치운동 조직 연정회의 부활을 기도하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신간회의 구파와는 대립했다. 총독부와 밀착한 이러한 행보는 변절의 단초가 된다.

     

    1934년 4월에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고, 그 해 8월 일선융합(내선일체)과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우는 한일 연합 친일 조직인 시중회를 조직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1937년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사장에 취임하여 내선일체를 설파했다.

     

    1937년 7월 중추원에서 주편하는 시국강연회의 강사로 선발되어 전주, 군산, 남원, 광주, 목포, 순천, 이리 등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며 '국민의 자각을 촉구하는'강연활동등을 수행했다.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단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회장 등등 각종 친일단체에 주요간부를 맡으며 강연 활동과 학병권유 유세, 내선일체 적극지지, 전쟁을 지원하는 등등 수없이 많은 친일행적을 남겨 극렬 친일 인사가 되었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5] 최린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광복 이후 1945년 11월 3일 미군정청이 발표한 '이동사령 제29호'에 따라 같은 날짜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서 파면되었다. 천도교측은 그의 죄를 물어 은퇴를 권고하였으나 그는 거부하다가 결국은 교단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다고 한다.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을 때 체포되어 세 차례 공판을 받았다. 재판과정에서 최린은 자신의 친일행각을 시인하고 재판장과 방청객들 앞에서 솔직한 참회를 보였다.

     

    1950년 한국 전쟁 기간 중에 납북되어 끌려갔다. 이후 조소앙, 김원봉, 엄항섭, 안재홍 등의 인사들과 함께 북한의 대남한 통일 선전기관에 참여를 요구받았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그 이후 행방은 1958년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80세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을뿐 그외에는 알려지 않았다.

     

    독립운동가였으나 후에 변절하여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료를 역임하였으므로 1962년 3월의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에 올랐으나 곧 제외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하여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중추원, 천도교의 두 부문에 들어 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최린은 공개적이며 노골적으로 친일한 인물인데다 천도교 신자로서 김일성과 직접 교류한 박인진, 최동오, 김달현 등과는 대립하는 관계였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낮게 평가한다. 예를 들어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대표적인 민족 배반자로 언급되었다.[6] 북조선에는 역시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이광수의 묘도 조성되어 있을 정도[7]지만, 최린의 최후나 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 매일신보
  • 조선임전보국단
  • 조선언론보국회
  •  

     

     

     

     

    변절의 극치

        

     

     

    "기미독립선언을 주도한 피고가 왜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는가?"

        

    재판장 서순영(徐淳永)이 매섭게 추궁하였다.

     

    "기미년 당시 일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들은 그 후 나를 주목하고 위협하고 또 유혹하여 끝내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 오직 죄스럽고 부끄러울 뿐이다.”

     

    피고는 목멘 소리로 대답하고 머리를 숙여 버렸으며, 방청석도 침통한 분위기였다. 이윽고 답변이 계속되었다.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뿐이었다. 첫째는 망명하는 길이요, 둘째는 자살하는 길이며, 셋째는 일본 군문(軍門)에 항복하는 길이었다. 첫째와 둘째 길을 택하지 못한 것은 늙은 부모에게 불효할 수 없어서였다."

     

    죄명 : 반민법 제42(중추원참의), 3(칙임관 이상의 고관), 10(친일단체의 수뇌간부)위반.

     

    범죄사실 : 피고인 최린은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일본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하여 보성중학교장 및 보성전문 강사를 역임하고, 기미독립 운동시 33인의 1인으로서 천도교회의 대표로 기독교, 기타 종교단체와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였으므로 인하여 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고, 그 후 천도교 중앙종리원 등 장로로 있었던 자인 바, (1) 1934년 이른 봄부터 1937년까지의 약 2년여, 1939년부터 1945815일 해방시까지의 약 5년여에 도합 7년여 간 조선총독부의 유일한 자문기관인 중추원 칙임참의로서 조선총독의 자문에 의하여 총독정치에 기여하고, (2).’

        

     

     

    "나를 광화문 네거리서 찢어 죽여라

     

     

    반민특위 법정서 참회하는 '민족대표'

    [특별기획-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17] 33인 중 1인 최린

         

    반민특위로 압송돼 가는 최린(뒷편).

    앞의 흰 두루마기 차림은 경성방직 사장을 지낸 김연수. 최린 의 연행 장면 이다 .( 끝에 안경쓴 사람 ) 그는 중추원 참의를 지냈지만, 명륜동 자택에서 연행됐다. 27일 서울 종로 경찰서에 수감되는 반민 피의자들 일본귀족원 의원을 역임한 < 친일파> 120일 대구에서 잡혀 서울로 이송되어 재판정으로 향하고 있다. 이름은 박중양 , " 이또 히로부미 " 의 양아들 이다. 아래 는 194915일 중앙청 ( 조선총독부) 205호실에 사무실을 차리고 18( 1)" 화신재벌 " < 박흥식>, ( 2)" 대동신문"을 앞세워 < 반민법 제정> 반대를 주장한 ( 일본헌병)의 앞잡이 < 이종형 >을 구속하고 <최린> 친일변호사 ( 이승우) 평안북도 경찰고등과장 < 이성근 > 등을 구속하며 국민의 열화와 같은 지지속에 활발하게 활동 했다 . 그러나 이와 반대로 < 이승만 > 정부의 방해는 집요했다 . <이승만 >110일 담화를 통해 , 우리 힘으로 주권을 회복치 못해 < 이완용, 송병준 > , 반역 원괴의 처분을 국제정세로 인하여 실시를 연기해 왔으나 , 국권을 찾고 건국하는 오늘에 있어 공분도 다 풀리고 형편도 많이 달라졌으니, 라면서 친일파 숙청을 반대하는 담화를 발표해 ,<반민특위>의 반발을 크게 샀다 . 그러나 이승만의 담화에 힘을 얻은 친일파들은 각계각층에서 목소릴 내며 노골적 행동을 하는 무리들이 늘어났다 . 가장 적대적으로 나온 세력은 당시 <친일세력 의 온상> 이었던 경찰과 <친일인사 , 원용덕 > (헌병사령부 )였다 .헌병사령부는 <반민특위>에 쫓기는 (친일경찰 ) 들을 숨기고 <원영덕>은 이들을 (헌병 영관급)으로 임용해 보호 하였으며 ,(경찰청, 수도청 부청장 )<최연>,김제경찰서장 < 이성엽 >, 전북도경 사찰과장 <이 안순> , 경주경찰서장 <서영출 > 30 여명 의 < 친일경찰을 구속하자, 이들은 오히려 <반민특위> 요원을 암살하려 했다 , 수배중 이던 유명한 < 친일경찰 >( 노덕술 )(시경수사과장) < 최난수>, 사찰과 차석 < 홍택희 > 등과 "테러리스트"< 백민태 >를 사주해 ,< 김병로 , 김상 덕 , 김상돈 > 등을 암살하려다 변심한 < 백민태 >의 자수로 음모가 폭로되었다.

     가출옥 후 변절... 해방후 눈물로 사죄

     

     

        

     

    최린이 3.1만세의거 주동자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211222일 가출옥한 후 자신의 가출옥을 도와준 일본인 아베에게 보낸 편지.  ‘이번에 최린 군을 비롯하여 제군의 출감을 보면서 백열(柏悅)의 정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특히 당사자들도 선생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19211225일자,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소장) 일본 국회도서관 소장

     

     

      

    최린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기고한 '학병권유 등 친일성향의 논설기사들. 매일신보

     

     

    천도교청년당 산하의 조선농민사가 추진했던 농민공생조합중앙회 제3차 대회에 참석했던 전국 대표들.

    제일 뒷줄 오른쪽 세번째가 임문호.(1933. 12. 26, 중앙대교당 앞)

     

     

    http://blog.ohmynews.com/jeongwh59/tag/%EC%B5%9C%EB%A6%B0

    http://thesisaviewtimes.com/bbs/board.php?bo_table=colum11&wr_id=21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print.php?mgz_part=shin&n=201202220500028

    http://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table=byple_news&uid=353&PHPSESSID=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5154

     

     

     

     

     

     

     

     

    재판과정에서 최린은 자신의 친일행각을 시인하고 재판장과 방청객들 앞에서 솔직한 참회를 보였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사면될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고 덤덤하게 반응하였다. 그는 재판정에서 최후 변론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민족 대표에 한사람으로 잠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곳에 와서 반민족 행위를 재판을 받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사지를 소에 묶고 형을 집행해 달라. 그래서 민족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

     

    우리는 일제 침략 하에서의 민족 해방 운동으로 흔히 3·1 운동을 꼽고, 이를 준비했던 인사들을 '민족대표'로 기억하고 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서도 천도교 측 인사로서 3·1 운동 준비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사람으로 최린을 떠올리게 되는데, 위의 글은 3·1 운동으로부터 꼭 30년이 지난 1949330일 반민특위 재판정에서 최린 자신이 친일행각을 구차하게 변명하던 모습이다.

     

    이 날의 공판을 지켜봤던 한 기자는, 공교롭게도 법정 정면에 엄숙히 걸려있는 독립선언서가 최린을 모욕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고 썼다.

     

    독립선언의 주역으로서 일제 법정에 서서 당당하게 열변을 토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가 친일파로 법정에 끌려나와 고개를 떨구던 모습을 두고 흔히들 험난했던 근대사의 격랑 속에 끝내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훼절했던 한 인간의 말로를 운운하게 된다.

     

    독립선언의 주역과 친일파라는, 서로 극과 극을 달리는 두 모습만을 현상적으로 대비시켜 보면 그의 개인적 삶은 분명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변절의 극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자라온 환경과 살았던시대의 역사 속에서 그의 삶의 궤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를 반드시 변절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듯하다. 오히려 독립선언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예외적인 현상이었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나혜석과의 연애

      

     

     

    수덕여관 손님, 나혜석과 김일엽 (2) [이야기가 있는 문화기행 2]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로 천도교 교령이던 최린(崔隣)이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을 때였다. 한국 유학생들이 주최한 환영회에서 최린을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빠져버린 혜석은 불타는 사랑에 빠진다. 이러한 염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김우영이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는 것으로 그들의 사랑은 막을 내릴 수 있었지만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생활을 청산하는 이혼의 빌미가 되었다. (....) 그들의 세계 일주여행은 끝났지만 파리에서의 최린과 나혜석의 만남은 사랑이었지만 남편 김우영에게는 아내의 스캔들이었으므로 결혼생활은 파탄의 시작이었다. (.....) 애정 없는 결혼생활은 인생의 낭비라고 결심한 혜석은 1930년 가을 김우영과 이혼하고 '이혼의 비극은 여성해방으로 예방해야 하고 시험결혼이 필요하다'라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칼럼을 <삼천리> 잡지에 기고하여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때 비로소 육()과 영()이 결합하는 사랑이 지고지순한 사랑이라는 낭만적 사랑론에 머물러있던 여자(女子) 나혜석이 육과 영이 분리된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열정적 사랑을 찬미하는 섹슈얼리티 여성(女性) 나혜석으로 재탄생했음을 그 당시 신문사 문화부에 있던 여기자와 오간 서간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동생은 아직도 연애가 무엇인지 모르는 모양이로군! 서로 눈동자만 바라보고 앉아서 좋기는 뭣이 좋아, 수박 겉핥기지, 육체의 신비를 모르는 것은 연애가 아냐…… 그런 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요, 연애를 하는 그 순간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야, 나는 지금도 그 때 생각만 하면 미칠 것만 같아, 이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사람같이 바보는 없을 거야...

        

    뿐만이 아니다. '삼천리' 잡지에 기고한 <이혼 고백장>에서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오. 오직 취미다. 밥먹고 싶을 때 밥먹고 떡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거와 같이 임의용지(任意用志)로 할 것이오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글을 발표하며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관념을 통렬히 비판함으로서 사회적인 논란을 일으켰다. 나혜석, 그녀의 사회 인습에 대한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에나 동경 사람쯤 하더라도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이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의 정조를 유인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詛嚼)시키는 일이 불소하외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 자신에게 성()을 가르쳐준 최린을 상대로 '유부녀의 정조를 유린했으니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지방법원에 소를 제기한다. 조건 없는 열정적인 사랑을 주장하던 혜석으로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였다.

     

    경성 장안에 화제를 뿌리며 조롱거리의 주인공으로 전락한 혜석은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최린측의 제의로 사건을 합의하고 종결하지만 혜석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1928년 우연히 파리 시에서 나혜석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파리 한인 사회에 화제거리가 된, 당시 파리에 외교관으로 주재하고 있던 중 나혜석과의 염문이 발단이 되어 1930년 나혜석은 이혼하게 된다. 프랑스어를 몰랐던 두 사람은 통역을 고용해 식당, 극장, 뱃놀이, 시외 구경을 다녔다. 19281120일 저녁, 두 사람은 오페라를 관람하고 함께 나혜석의 숙소인 셀렉트 호텔로 돌아왔다. 그날 밤 최린은 자기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 관계가 수십 회 이어졌고, 파리 유학생 사회에 나혜석은 최린의 작은댁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한국 유학생들이 주최한 환영회에서 최린을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빠져버린 혜석은 불타는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나혜석이 여러 남성과 연애한다는 소문을 들은 김우영은 비밀리에 파리로 돌아와 나혜석의 뒤를 따라갔고, 최린과의 연애 장면을 목격한다. 이러한 염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김우영이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는 것으로 그들의 사랑은 막을 내릴 수 있었지만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생활을 청산하는 이혼의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나혜석이 이혼한 뒤, 그녀의 자유 연애관과 여성주의 사상을 피곤하게 여긴 그는 나혜석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최린과의 연애가 이혼의 원인이 된 이상 나혜석은 가만히 있지 않고 그를 정조 유린죄 라는 명목으로 법원에 고소하게 된다.

     

    나중에 나혜석은 그를 상대로 12000원의 위자료 소송을 청구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의 기사를 매수하고, 그는 2천원의 돈을 나혜석에게 전달하고 입막음을 한다. 그러나 타인의 아내를 유혹하고 가정을 파탄냈다는 사회의 조롱과 함께 총독부로부터도 신뢰가 깎이게 된다. 그의 도덕성을 시비하는 주요소재로 이용되었다.

     

     

    나혜석과 최린이 파리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는 모습.

    '파리에서의 나혜석' 다큐픽션의 한 장면. 파리에서의 나혜석

     

     

    나혜석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바꾸게 했던 남자 최린.

    이루지 못한 가슴 아픈 사랑으로 인해 결국 나혜석은 지탄을 받기도 했다 

        

     

     

     

    시세의 변화와 출세에 민감한 중인집안의 청년정객

    최린은 1878년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은 중인 출신으로 상당한 재산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는 안으로 봉건사회가 해체되어가고 있었으며 밖으로는 개항과 함께 서구문물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당시 중인들은 오랫동안 양반들로부터 억압을 받아온 까닭에 봉건체제의 변화, 나아가 조선왕조의 변혁을 갈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시세의 변화와 출세에도 극히 민감한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최린 역시 이러한 양면성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나 출세에 대한 집념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점은 그의 삶의 행로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고, 1896년 당시 개화파 정권에 줄을대고 있던 아버지의 권유로 19세에 함경남도 관찰부 집사가 되었다. 그런데 이 해 10월 새로 부임한 관찰사 서정순(徐正淳)이 갑오개혁의 신제도를 실시하여 순검(巡檢)'인민보호관'이라고 하면서 도내 유지의 자제들을 모집하였다.

     

    순검이 무슨 대단한 벼슬자리인 줄 알고 응모했던 그는 미관 말직임을 알고 곧바로 박차고 말았다. 젊어서부터 유난히 야심이 컸던 그가 궁벽한 지방 감영의 미관말직에 만족할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1901년 상경하여 벼락출세의 길을 찾으며 전전긍긍하다가 1902년 활빈당과 일심회에 가담하게 되었다. 당시 활빈당은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를 추종하는 불평객들의 집단으로 부호들의 재물을 탈취하여 박영효의 정치자금을 마련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곧 해산되고 말았다.

     

    이무렵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도 조선 정부로부터 임관통지가 없어 귀국하지 못하고 불만만 쌓아가던 일단의 청년장교들이 있었는데, 일본에 망명해 있던 유길준이 이들을 국내에 있던 불평 정객들과 연결시켜 대한제국정부를 전복하고자 일심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야심 많던 최린은 오세창, 유동근 등과 함께 여기에 가담하게 된다. 그러나 곧 발각되어 조택현,장호익, 김형섭 등 주모자들이 체포되었으며 최린은 체포를 모면하고 일본군의 도움으로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니, 일본이라는 나라로 정치적 도피를 할 수 있었던 경험을 한 셈이었다.

     

    이듬해 최린은 일심회사건 연루자들에 대한 특사령이 내리자 귀국하여 개화파의 주선에 의해 외부주사에 발탁되었다. 그 후 190426세의 늦은나이로 황실유학생에 선발되어 다시 일본에 건너가 도쿄부립 제일중학을 거쳐 메이지대학 법과를 다니면서 일본을 통해 서구의 근대문물을 익히게 되었다.

     

    이 때 그는 같은 중인 출신으로 3·1 운동에서부터 친일행각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정치적 궤적을 그렸던 최남선*을 같은 황실유학생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고, 1920년대 이후 정치적 보조를 같이하게 된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등보다는 한 발 앞서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09년 귀국하였다.

     

    이 무렵 일본에서 최린은, 충청도 부자 이상헌으로 이름을 바꾸고 망명해있던 손병희를 만난다. 그의 일생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가 손병희를 알게 된 것은 일심회 일로 같이 활동했던 천장욱이라는 사람의소개에 의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후 손병희를 자주 만나면서 장차 그가 천도교에 입도할 수 있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귀국하여 정계 진출을 모색하였으나 이미 국운이 기울어 '한일합병'과 함께 모든 정치단체가 해산되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그는 종교단체인 천도교가 바로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펼칠 수 있는 입지가 되리라 판단하고 1910년 천도교에 입도하여 곧 손병희의 측근이자 일급 참모로 활약하게 되면서, 이후 천도교는 일생 동안 그의 활동기반이 되었다.

     

    당시 손병희의 주위에는 천도교를 정치활동의 발판으로 활용하고자했던 권동진, 오세창 등의 개화파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가 3·1 운동의 준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도 손병희의 측근에 있으면서 권동진, 오세창 등 천도교 간부들과 함께 1차 대전 후 변화하는 세계정세의 흐름을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일보다 변절이 더 밉다

       

     

     

     

    민족의 '혜성'으로 떠오르다

     

    변절의 첫 단추 : 자치만이 살길이다.

     

    '루스벨트여, 귀가 있거든 들어보라. 내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속아 천황의 반신(反臣 )노릇을 했다. 이 절치부심할 원수야. 이제는 속지 않는다. 나는 과거를 모두 청산하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었다는 것을 알라

     

    '바칠 것 다 바치고 나서 찾아 가질 것을 갖자

     

    우리 조선사람은 앞으로 더 시국을 인식하여야 한다. 日本은 동아공영권의 확립을 위하여 敵性국가의 방해를 어디까지나 배제하여야 한다. 백색인종의 노예로부터 벗어나는데 이번 성전에 큰 뜻이 있다. 우리 조선의 애국운동도 말로만 외칠 것이 아니라 철저한 황국신민으로 갱생하고 돈만 아는 유태인이 절대로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조선의 남아는 씩씩하게 나아가라.

    최린의 사자후(1941)

     

    3·1운동의 영광이여 다시한번 !

    해방을 맞아 천도교는 최린을 친일행적의 속죄양으로 삼아 그에게 출교를 종용했다. 최린의 정치적 입지도 협소해졌다. 미군정은 최린을 일개 신흥종교의 교주로 치부할 뿐이었다. 옛 동지들이 집결한 한민당조차 자신들의 친일 컴플렉스로 인해 변절과 친일의 상징적 인물인 최린을 기피했다. 김구 역시 최린과의 협력을 거부했다. 이제 그가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은 '천도교청우당'이었다. 그러나 1946년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이 결성되어 독자적인 활동에 들어가면서 그의 영향권을 벗어났다.

     

    최린은 1946년 찬·반탁이 논란되던 정국을 틈타 교권탈환을 시도했으나 북한 천도교대표들의 서울행이 저지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194712월 유엔에서 유엔 감시하 남북한총선거안이 제기되자 최린은 북한지역에서 기득권을 회복할 수 있는 호기라며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북한당국은 유엔한국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했다. 최린의 분노의 화살은 소련과 북한 당국을 향했다. 공산주의를 박멸해야 할 악성전염병인 매독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할 만큼 그의 반공의식은 철저했다.

     

    19482월 최린은 북한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밀사를 파견했다. 그는 31일 북한지역 천도교인이 총궐기하여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총선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국을 환영하는 평화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지시했다. 소위 '3·1재현운동'이 그것이다. 북한 천도교 지도자들은 최린의 지시를 거부했다. 이러한 사실이 북한 당국에 탐지되면서 상당수의 천도교 지도자들은 감시와 탄압을 피해 월남해야 했다. 최린의 북한정권 전복기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천도교 비밀결사인 '영우회'를 결성하여 인민군의 무기를 탈취하여 유격대를 결성하는 등의 반공투쟁을 전개했다.

     

    1949113일 최린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다. 최린은 자신의 죄상을 추궁하는 판사를 향해 민족을 위해서, 민족정신의 요람인 천도교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희생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다른 친일파들과는 달리 고분고분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최린의 예견대로 6·25사변이 일어났고 그는 북한당국에 의해 친일파라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다. 최린은 195812월 말 평북 선천의 요양소에서 여든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최린은 민족의 영도자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내던지고 반역자라는 오명을 감수하면서 변절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는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민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삶을 왜곡·굴절시켰던 '타협적·종속적' 부르주아지식인의 유형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민중들은 이광수, 최남선과 마찬가지로 최린의 친일행적보다는 그것이 변절이라는 사실에 더욱 분노했다. 해방 후 최린의 정치적 좌절도 그가 변절과 훼절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라는 사실에 연원한 것이었다.

     

      

     

     

     

    http://blog.ohmynews.com/jeongwh59/tag/%EC%B5%9C%EB%A6%B0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amu1023&logNo=110045459750

    人面獸心崔麟可殺罪狀  

    http://blog.daum.net/windada11/875898431운동 민족대표는 33인이 아닌, 48인 이었다.

     

     

     

     

     

     

    독립선언의 주역, 흑막 속의 자치운동 주모자

    손병희를 위시한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의 천도교 지도부가 1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정치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18년 말경부터라고한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적으로 풍미하고 있는 민족자결주의의 물결 속에서 잘 하면 일제통치하에서나마 자치(自治)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도쿄에 건너가 일본 정계요로에 이를 교섭하는 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9년 초 도쿄유학생을 비롯하여 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최린은 국내외의 혁명적인 분위기에 고무되기 시작하였으며 또 이러한 시세의 흐름에 뒤떨어져서는 사후 판세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될 수 도 있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재빨리 독립선언을 발표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짐작되듯이 3·1 운동 시기에 최린이 일제에 대결하는자세는 결코 투철한 것이 아니었다. 최린은 3·1 운동의 재판정에서'한일합병'에 대해 "조선이 병합된 것은 러일전쟁의 당연한 결과로 어쩔 수없는 일이었으며, 또 당시 조선의 정치는 지독한 악정이어서 도저히 조선의 안녕 · 행복을 유지 · 증진하기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병합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피치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민족대표'최린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안타깝게도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면서 선전했던 내용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만큼 그의 생각은 일제의 침략논리에 세뇌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 현재의 조선인의 지모와 실력으로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재판장의 물음에 "일본 정부의 도움을 얻으면 독립국으로 설 수 있다"고 대답하였으니, 이 말은 곧 일본의 도움이 없으면 독립국으로의 유지가 어렵겠다는 뜻이 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의 독립사상의 실체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짐작하게 되는데, 총독부 당국은 그 점을 이미 간파하여 독립선언으로 성망(聲望)을 얻은 그를 본격적으로 회유하여 자신들의 품안에 끌어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최린은 3·1 운동으로 3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총독 사이토 (齊藤實)를 비롯한 당국자들은 최린을 '문화정치'에 이용하고자 192112월에 가출옥시켰다.

     

    이후 그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천도교에서 발행하는{개벽}에 게재하는 등 일제 당국자의 '문화정치' 이념에 충순하기 시작하여 민족주의 세력의 타협화를 유도하는 '문화운동', '자치운동'에 앞장 섰다.

     

    1920년대 사이토 총독의 통치정책에 호응하여 벌였던 그의 활동 가운데 가장 집요하게 전개되었던 것이 바로 자치운동이었다. 그는 1924년 초{동아일보}의 송진우, 김성수 등과 함께 자치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단체인 '연정회' 결성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광수의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 경륜]에 비난이 쏟아지자 일단 이를 유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26년에 들어 사이토 총독의 정치 브레인이었던 아베 (阿部充家)의 간여 아래 송진우, 김성수, 최남선 등과 다시 자치 운동조직인 '연정회'의 부활계획을 주도하였으며, 해외 민족주의 세력의 후원을 얻기 위해 외유의 길에 올라 이승만, 안창호, 장덕수 등을 만나 교섭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민족주의적 요소가 많았던 천도교를 분열시키고 그 가운데 신파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자치운동 분쇄를 위해 결성된 신간회에 참여한 구파측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또 민족주의자들이 상당수 망라되어 조직했던 '조선 농민사'를 자치운동의 기간부대로 삼고자 이를 천도교 신파측의 천도교 청년당의 산하단체로 편입시켜 버렸다.

     

    이런 최린은 1930년대 초까지 사이토 총독이나 사카다니 (阪谷芳郞) 등 일본정계의 거물들과 교류하면서 집요하게 자치운동을 벌여 나갔다.

     

    그러나 자치운동이란 실질적으로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용인하는 것으로 독립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최린 자신도 아베와의 대담에서 밝혔듯이"조선은 독립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가 끝끝내 자치운동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던 것은 그의 권력욕 때문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며, 그런 점에서 자치운동은 가장 그다운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베에게 "나도 민중의 신임(?)만 얻으면 반드시 조선의회의 한 사람이 되기를 사양치 않겠다"고 말한 대목이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민족대표 33' 중 변절자

     

    1895년 구한국 정부에서 일본에 파견한 제1회 관비유학생들. 이들 가운데 적잖은 친일파가 생겨났다

     

    민족대표 3319193·1만세의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종교계 대표를 일컫는다. 종교별로는 천도교 대표 15, 기독교 대표 16, 불교 대표 2명 등이다. 이들은 31일 태화관에 모여 조선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는 선언서를 낭독하고는 자진신고 후 일본경찰에 의해 잡혀갔다.

     

    이들 가운데 상해로 망명해 체포를 피한 김병조와 나중에 무죄판결을 받은 길선주, 그리고 체포 직후 구금 중에 사망한 양한묵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사건으로 징역 16개월~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일각에서는 33인이 종교계 인사인 점을 민족 전체의 대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이들이 3·1만세의거를 이끈 공로만큼은 폄훼할 수 없다.

     

    일제의 탄압과 회유가 심해지면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친일로 변절한 인사도 생겨났다. 천도교 신파의 거두 최린, 기독교측의 정춘수·박희도 등 3인이 그들이다. 33인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육당 최남선까지 넣으면 4명이 되는 셈이다. 이들 4인은 모두 해방 후 반민특위에 검거돼 반민법정에 서게 됐다.

     

    체포 당시 71세였던 최린(崔麟)은 법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왜 일제에 협력했느냐?”는 서순영 재판관의 질문에 대해 “3·1운동 이후 줄곧 주목과 위협, 유혹을 받아 왔다. 이를 물리치지 못한 것이 죄스럽고 부끄러울 뿐이다.”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특히 최린은 민족 앞에 죄지은 나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라고 사죄해 재판부와 방청객들로부터 동정을 샀다.

     

    3·1의거로 의거 당일 일경에 체포된 최린(崔麟)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211222일 일제 당국의 배려로 가출옥했다. 그의 가출옥은 사이토 총독의 정치참모인 아베의 공작 결과였다. 19269월 최린은 일제의 경비지원으로 유럽여행을 떠나는데 이는 일제의 유화책의 일환이었다.

     

    1928년 초 귀국한 그는 대동방주의를 내걸고 일선융합을 외치면서 종래의 비타협적·급진적 투쟁노선에서 점진적 타협노선을 거쳐 친일노선으로 갈아탔다. 이후 그는 중추원 참의가 되었고, 1937년에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에 취임하여 내선일체·신도(臣道)실천·성전완수 등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인 194110월에는 임전보국단을 결성, 단장에 취임하였으며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조선언론보국회 회장 등을 맡아 전시 황민화정책에 적극 앞장섰다.

     

     

     

    "다시는 민족자결주의에 속지 않겠다." 던 가야마 린 (佳山 麟)

    사이토 총독의 조종 하에서나 가능했던 최린의 자치운동 행각도 만주침략이 터지고 일제의 파쇼화 정책이 노골화되면서 설 땅을 잃게 되었다.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동원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그를 이용하려는 일제의 회유가 본격화되었고 그의 출세욕은 아무런 저항 없이 이를 받이 들이게 했던 것 같다.

     

    19344월 중추원 칙임참의가 되어 세인들의 이목을 끌더니 11월에는 내노라하는 친일파 박영철* 등과 함께 '시중회' (時中會)를 조직하여 대동방주의 (大東方主義)를 내걸고 일선융합 (日鮮融合)을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제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곧이어 1937년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동양평화의대정신'이라는 연제하에 내선일체로 국민적 적성(赤誠)을 발휘할 것을 외쳐댔으며, 중추원 참의 지방강연 행각에 참여하여 충성스런 황국신민이 될것을 떠들어댔다.

     

    1940년에는 일제가 전시체제를 한층 강화하여 결전체제로 끌어올리기 위해 내선일체와 전시경제체제의 완성을 목표로 전국의 모든 직장과 개인을 얽어 넣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가 되었다.

        

    1941년에 접어들자 그는 {삼천리} 사장 김동환*과 함께 임전체제하에서 자발적인 황민화운동을 하기 위해 '임전대책협의회'를 조직한 뒤 각지에서 강연행각을 벌였는데, 94일 부민관에서 열린 임전대책연설회에서'읍소'(泣訴)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조선 사람은 희생심이 부족한데 이비상시국을 희생적 각오로 떨쳐 일어서야 할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이 해 10'임전대책협의회'가 윤치호* 계열의 '흥아보국단' (興亞報國團)과 통합하여 '조선임전보국단'으로 재 발족될 때, 최린은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1214일 부민관에서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열린 미영타도 대 연설회에서 그는 "루즈벨트여, 귀가 있거든 들어보라. 내가 윌슨에게 민족자결주의에 속아 천황의 반신(反臣) 노릇을 하였다. 이 절치부심할 원수야! 이제는 속지 않는다.

     

    나는 과거를 모두 청산하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라"라고 까지 하여 자신이 주도했던 독립선언 자체를 깡그리 부정하고 있으니, 이 대목에 이르면 그가 벌인 친일행각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가히 짐작케 한다. 그런 그였기에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온 19456월까지도 '조선언론보국회'를 결성하여 회장으로서 언론총진격 대강연회를 열어 본토 결전작전에 호응할 것을 외치고 있었다.

     

    이처럼 그의 생애는 출세에 민감한 중인 출신이라는 집안 배경과 적극적이고 야심많은 성격, 그리고 많은 신진지식인들이 세례 받았던 근대화 지상주의와 실력양성론이라는 사상적 조류, 끝으로 일제의 끊임없는 협박과 회유가 교차되면서 한때는 독립선언의 주역이 되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의 거두가 되고 말았다.

     

    민족반역자 최린은 반민특위에서 석방되어 서울에 칩거하던 중 한국전쟁 때북으로 납북되어 그 후의 정확한 근황을 알 수는 없다.

     

        

     

              김경택 (연세대 사학과 박사과정,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짧은 '항일', '친일' - 민족대표 33인 중 변절자 1인 최린

     

     

     

      

    여암(如庵) 최린(崔麟 1878~1958)

    천도교 인사, 언론인. 호는 고우(古友), 도호(道號)는 여암(如庵). 창씨명은 가야마[佳山麟]. 아버지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덕언(德彦)이며, 어머니는 김씨이다. 3.1 운동 참여, 신민회 및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으나 변절. 민족개량주의와 내선일체 주창.총독부 중추원 참의. 나혜석과 불륜. 한국전쟁 시 납북,사망. 3·1운동에 참가했으나 이후 변절해 1945년까지 친일행각으로 일관했다. 천도교장로(長老)|매일신보 사장|임전보국단 단장,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덕언(德彦)의 아들이다.

     

    8세 때 도필두(都必斗)에게서 한학(漢學)

    13세 때 밀양박씨와 결혼

    1895(고종 32) 함경남도관찰부 집사

    1902년 쿠데타를 음모한 일심회(一心會) 가담했다가 계획이 발각되자 일본 망명해 손병희를 만났다.

    귀국해 외부주사(外部主事)

    1904년 황실특파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 입학

    1905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동맹휴학으로 퇴학

    1906년 일본유학생회 부회장을 거쳐 2대 회장,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 진학

    19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조선 왕이 굴복하는 인형극을 보고 분격, 공연장 습격로 검거

    1909년 대학 졸업

    1910년 각국 영사관에 방화 모의로 체포, 한일합병이 되자 석방, 천도교 입교,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의 교장 재직, 보성전문학교에서 강의

    19193·1운동 준비단계에서부터 참여, 불교계의 한용운(韓龍雲)에게 계획을 설명하고 승낙을 얻었으며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을 이룰 수 있게 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31일 오후 2시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을 선언한 뒤 일본경찰에 체포, 3년형 선고받고 옥고

    192112월 가출옥

    1923년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의 정치고문인 아베[阿部充家]의 배후관여로 민족개량주의자들과 접촉하기 시작

    1924년 자치운동단체인 연정회(硏政會) 결성 모의와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반발, 그리고 좌절

    1926~ 1928년 구미 30여 개 나라 유람, 천도교 도령(道領)

    1932년 천도교가 합법적 자치운동으로 기울어진 신파와 비타협적 민족운동을 주장하는 구파로 분열하자 신파의 대도령(大道領)

    1933년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워 "동아(東亞) 제민족(諸民族)은 일본을 맹주(盟主)로 하여 매진해야 하며, 특히 조선은 내선융합(內鮮融合공존공영(共存共榮)이 민족갱생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성명 발표하여 일제에 협력할 것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19344월 중추원 칙임참의(勅任參議)

    총독부의 후원 아래 김사연(金思演박영철(朴榮喆박희도(朴熙道) 등의 친일파와 정광조(鄭廣朝) 등 천도교 신파를 모아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정치단체인 시중회(時中會) 조직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추원 시국강연반으로 호남일대에서 전쟁에 적극적 협조할 것을 유세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사장이 되어 내선일체·성전완수 등의 각종 시국행사 주최

    19386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조선연맹의 발기인, 이사

    194110,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결성하고 단장 취임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조선언론보국회 회장, 각종 시국강연에 참가, 여러 차례 친일 담화를 발표했다.

    1949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체포와 병보석 석방, 공소 취하.

    6·25전쟁 중에 납북

     

     

    종로구 헌법재판소내의 최린의 집터

     

     

     

     

     

     

     

    참고문헌

    여암선생문집편찬위원회, {如菴文集} ·, 1971

    市川正明 編, {3·1 독립운동} 1·2,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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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사자료집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金鎭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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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인물한국사 3 : 이이화, 한길사, 1993

    실록 친일파 : 임종국, 돌베개, 1991

    친일논설선집 : 임종국 편, 실천문학사, 1987

    일제침략과 친일파 : 임종국, 청사, 1982

    일제의 침략정책사 : 강동진, 한길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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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독립선언서 [三一獨立宣言書]

     

     

     

     

    1919313·1運動을 기하여 民族代表 33韓國獨立內外宣言한 글. 獨立運動이 계획된 당초에는 건의서 형식으로 日本政府에 대하여 韓國獨立을 요구하기로 발의되었으나, 건의서는 民族自決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강력한 獨立의 의지와 그 당위성을 內外에 선포할 독립선언서로 해야 한다는 최린(崔麟)의 주장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해 2月 初, 최린·송진우(宋鎭禹현상윤(玄相允최남선(崔南善) 등은 협의를 하고, 선언서의 초안 작성을 자청한 최남선에게 이를 위임했다. 손병희(孫秉熙)가 세운 선언서 작성의 대원칙은 平和的이고 온건하며 감정에 흐르지 않을 것, 東洋平和를 위하여 朝鮮獨立이 필요하며, 民族自決自主獨立의 전통정신을 바탕으로 정의(正權)와 인도(人道)에 입각한 운동을 강조한다는 등이다. 최남선은 日本 警察의 눈을 피하기 위해 광문회(光文會) 임규(林圭)日本人 婦人의 안방에서 약 3週日 만에 이를 작성하여 최린에게 전달하였고, 최린은 손병희 등의 동의를 얻어 227까지 民族代表 33의 서명을 끝마쳤는데, 선언서 뒷부분에 첨가된 공약 삼장(公約三章)은 한용운(韓龍雲)이 따로 작성한 것으로 전한다. 선언서의 원고는 오세창(吳世昌)에 의해 천도교(天道敎)에서 경영하는 보성인쇄소 사장 이종일(李鍾一)에게 넘겨져 227오후 6경부터 10까지 21000장을 인쇄하였다. 인쇄된 선언서는 경운동(慶雲洞)에 있는 천도교당으로 옮겨지고 28아침부터 전국의 배포 담당자에게 전달되어, 31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도시에서 일제히 선포되었다. 한편, 民族代表들은 31아침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독립선언서 100장을 탁상에 펴놓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열람하게 하였으며 오후 2정각이 되자 한용운이 일어나 이를 낭독한 다음 일동이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축배를 들었다. 이날 같은 시각인 오후 2탑동(파고다) 공원에서는 각급 學校 學生 ·市民 5,000명이 모여 정재용(鄭在鎔)이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민족대표 33[民族代表三十三人]

    3·1運動 獨立宣言書獨立通告書署名한 사람들. 各 團體에서 個別的으로 이루어졌던 民族獨立運動은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各 團體를 묶는 대연합전선이 절실하였다. 천도교와 그리스도교는 19193·1運動初期 조직단계에서 民族 大聯合戰線 형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독립선언서의 작성은 천도교 측이 담당하기로 하였다. 이에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측의 독립선언서 원고 지침에 따라 최남선이 기초하였다.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천도교 측의 오세창(吳世昌)이 총책임을 담당하고, 천도교 직영의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鍾一)이 총실무를 담당했다. 이종일은 보성사의 직공 신영구와 감독 김홍규에게 지시하여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면서 극비리에 227독립선언서 21000장을 인쇄하였다. 독립선언서의 배포는 오세창의 총책임 아래 천도교, 그리스도교, 불교, 학생단 등으로 분담하였다. 독립선언서는 그 자체가 독립만세시위를 지시하는 기능과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따라서 적어도 독립선언서가 사전에 배포된 범위까지는 초기 조직단계의 활동가들에 의하여 3·1운동이 사전 조직화된 범위라고 볼 수 있다. 독립선언서가 사전에 배포된 지역은 서울, 평양, 선천, 원산, 개성, 서흥, 수안, 사리원, 해주, 대구, 마산, 전주, 군산 등이었다. 민족대표의 선정은 교단별로 추천을 받았다. 천도교 측에서는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 임예환(林禮煥), 나인협(羅仁協), 홍기조(洪基兆), 박준승(朴準承), 양한묵(梁漢默), 권병덕(權秉悳), 김완규(金完圭), 나용환(羅龍煥), 이종훈(李鍾勳), 홍병기(洪秉箕), 이종일·최린(崔麟) 15명이 선정되었다. 그리스도교측에서는 이승훈(李昇薰), 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 오화영(吳華英),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박동완(朴東完), 신홍식(申洪植), 양전백(梁甸伯), 이명룡(李明龍),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16명이 선정되었다. 불교측 대표로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城)이 서명·날인했다.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 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己未獨立宣言文

    1. 吾等(오등)()() 朝鮮(조선)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로써 世界萬邦(세계 만방)()하야 人類平等(인류 평등)大義(대의)克明(극명)하며, ()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하야 民族自存(민족 자존)政權(정권)永有(영유)케 하노라. 2. 半萬年(반만년) 歷史(역사)權威(권위)()하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誠忠(성충)()하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恒久如一(항구여일)自由發展(자유발전)()하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發露(발로)基因(기인)世界改造(세계개조)大機運(대기운)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하야 ()提起(제기)함이니,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大勢(대세), 全人類(전 인류) 共存 同生權(공존 동생권)正當(정당)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 하물)이던지 ()沮止抑制(저지 억제)치 못할지니라. 3. 舊時代(구시대)遺物(유물)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犧牲(희생)()하야 有史以來(유사이래) 累千年(누천 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痛苦(통고)()한 지 ()十年(십 년)()한지라. () 生存權(생존권)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 心靈上(심령상) 發展(발전)(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 新銳(신예)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문화)大潮流(대조류)寄與補裨(기여보비)奇緣(기연)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 4. (), 舊來(구래)抑鬱(억울)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苦痛(고통)을 파탈하려하면 장래의 협위를 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壓縮銷殘(압축소잔)興奮伸張(흥분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正當(정당)發達(발달)()하려 하면, 可憐(가련)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자자손손)永久完全(영구완전)慶福(경복)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급무)民族的(민족적) 獨立(독립)確實(확실)케 함이니, 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마다 方寸(방촌)()()하고, 人類通性(인류통성)時代良心(시대양심)正義(정의)()人道(인도)干戈(간과)로써 護援(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하야 ()하매 何强(하강)()치 못하랴. 退()하야 ()하매 何志(하지)()치 못하랴. 5. 丙子修好條規(병자 수호 조규) 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金石盟約(금석맹약)()하얏다 하야 日本(일본)無信(무신)()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實際(실제)에서, () 祖宗世業(조종세업)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 文化民族(문화민족)土昧人遇(토매인우)하야, 한갓 征服者(정복자)()()할 뿐이오, ()久遠(구원)社會基礎(사회기초)(탁락)民族心理(민족심리)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少義(소의)함을 ()하려 안이 하노라. 自己(자기)策勵(책려)하기에 ()吾人(오인)()怨尤(원우)()치 못하노라. 現在(현재)綢繆(주무)하기에 ()吾人(오인)宿昔(숙석)懲辯(징변)()치 못하노라. 6. 今日(금일) 吾人(오인)所任(소임)은 다만 自己(자기)建設(건설)()할 뿐이오, ()()破壞(파괴)()치 안이하도다. 嚴肅(엄숙)良心(양심)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新運命(신운명)開拓(개척)함이오, ()舊怨(구원)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嫉逐排斥(질축배척)함이 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기미(기미)日本(일본) 爲政家(위정가)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연), () 不合理(불합리)錯誤狀態(착오상태)改善匡正(개선광정)하야, 自然(자연),() 合理(합리)政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7. 當初(당초)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치 안이한 兩國倂合(양국병합)結果(결과),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統計數字上(통계숫자상) 虛飾(허식)()에서 利害相反(이해상반)() 民族間(민족간)永遠(영원)和同(화동)할 수 없는 怨溝(원구)去益深造(거익심조)하는 今來實積(금래실적)()하라. 勇明果敢(용명과감)으로써 舊誤(구오)廓正(확정)하고,眞正(진정)理解(이해)同情(동정)基本(기본)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지)할 것 안인가. 8.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축원)()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永久(영구)平和(평화)保障(보장)하는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하야 東洋安危(동양안위)主軸(주축)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日本(일본)()危懼(위구)猜疑(시의)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結果(결과)東洋(동양) 全局(전국)共倒同亡(공도동망)悲運(비운)招致(초치)할 것이 ()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朝鮮獨立(조선독립)朝鮮人(조선인)으로 하여금 邪路(사로)로서 ()하야 東洋(동양) 支持者(지지자)重責(중책)()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여금 夢寐(몽매)에도 ()하지 못하는 不安(불안),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東洋平和(동양평화)重要(중요)一部(일부)를 삼는 世界平和(세계평화), 人類幸福(인류행복)必要(필요)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리오. 9. 아아, 新天地(신천지)眼前(안전)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時代(시대)()하고 道義(도의)時代(시대)() 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鍊磨長養(연마장양)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曙光(서광)人類(인류)歷史(역사)投射(투사)하기 ()하도다. 新春(신춘)世界(세계)()하야 萬物(만물)回蘇(회소)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呼吸(호흡)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일시)()라 하면 和風暖陽(화풍난양)氣脈(기맥)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일시)(), 天地(천지)復運(복운)()하고 世界(세계)變潮(변조)()吾人(오인) 아모 주(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 ()固有(고유)自由權(자유권)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飽享(포향)할 것이며, ()自足(자족)獨創力(독창력)發揮(발휘)하야 春滿(춘만)大界(대계)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結紐(결뉴)할지로다. 10.吾等(오등)()奪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幷進(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노소) 업시 陰鬱(음울)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起來(기래)하야 萬彙(만휘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復活(복활)成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 백세) 祖靈(조령)吾等(오등)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吾等(오등)外護(외호)하나니, 着手(착수)가 곳 成功(성공)이라. 다만, 前頭(전두)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따름인뎌.

     

    (公約三章)

    -. 今日(금일) 吾人(오인)此擧(차거)正義(정의), 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하는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發揮(발휘)할 것이오,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 最後(최후)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正當(정당)意思(의사)()發表(발표)하라.

    -. 一切(일체)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主張(주장)態度(태도)로 하여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종교

    • 최 린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의 주역
    • 박희도 시류 따라 기웃거린 기회주의지의 변절 행로
    • 정춘수 감리교 황민화의 앞잡이
    • 정인과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 전필순 혁신교단 조직한 기독교 황민화의 앞잡이
    • 김길창 신사참배 앞장 선 친일 거물 목사
    • 이회광 불교계의 이완용
    • 이종욱 항일투사에서 불교 친일화의 기수로     
    • 권상로 불교계 최고의 친일학승
    • 김태흡 조선 제일의 친일 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