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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교단 조직한 기독교 황민화의 앞잡이, 전필순(全弼淳)

草霧 2013. 12. 6. 10:49

 

 

 

종교

 

 

전필순(全弼淳, 창씨명 平康米洲, 18971977)

 

 

 

 

혁신교단 조직한 기독교 황민화의 앞잡이

 

 

 

장로교가 헌금해 만들어진 일본군 전투기 '조선장로호' 신문 보도 사진

 

일본인들에게 잘 보이고 자신들을 각인시키기 위해 이름도 '조선장로호'라 붙였으니 더욱 가관이다.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나고 광복되자, 3년간의 미군 군정 (1945~1948) 이 실시되었으며, 개신교 세력은 이 때, 친일에서 친미로 변신하여 계속 살아남았다. 1948,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정권이 들어서자 이들 개신교세력은 정치권과도 결탁하였으며, 기독교를 중심으로한 친일세력들은 '반민특위' (반민족 행위자 특별조사 위원회) 를 해체시켜 버리고, 이승만에게 협력하였다. 반민특위의 해체로 인해 우리나라는 매국노들을 제대로 쓸어내지 못하고, 친일세력들과 그 자손들은 자칭 보수/애국 세력으로 둔갑하여 그들의 부와 지위, 권력 등을 계속 유지 할 수 있었다.

 

 

 

1941년 장로회 총회 부의장

1943년 혁신교단 조직

 

전필순(全弼淳, 일본식 이름: 平康米洲, 1897년 ~ 1977년)은 한국장로교 목사이다. 부인은 교육인 차사백이다. 경기도 용인 출신이다. 개신교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은 10대 초반인 1909년부터이며, 1914년 세례를 받았다. 당시 용인 지역에는 경성부연동교회에서 농촌 전도를 목적으로 파견한 팀이 내려와 있었는데, 전필순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농촌 활동을 함께 하다가 1919년에는 연동교회 조사(助事)로 발탁되었다.

 

이 무렵 개신교 계열 인물들이 많이 참여한 3·1 운동이 발생하면서 전필순도 박용희의 지도에 따라 가담한 적이 있고, 이후 세워진 상하이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을 계속하다가 대동단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3·1 운동의 좌절 이후 독립 운동은 여러 갈래로 발전하게 되는데, 전필순은 옥중에서 장기적인 실력양성과 구국계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출옥한 뒤 기독교 문화사업을 중심으로 강연회 등에 참가했다.

 

이러한 활동이 여의치 않자 1922년부터 4년간 고베 시의 신학교에 유학하였으며, 잠시 연동교회 전도사를 거친 뒤 1927년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묘동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다. 1931년에는 묘동교회에서 사임을 한 뒤 계속 뜻을 두고 있던 기독교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 설립한 기독교보사의 기자를 맡았고, 이후 전필순이 개인 명의로 기독교보사를 인수하여 1933년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독교보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윤치호, 양주삼, 정인과 등 교계 인물들의 반발을 겪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반일 인사로 분류되던 전필순은 이 무렵부터 차츰 조선총독부와 가까워지면서 친일파 인물로 불리게 되었다.

 

1941년 다시 연동교회의 위임목사를 맡고 경기노회 회장으로서 장로회 총회에서 부의장으로 당선되는 등 교계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황민화 운동에도 적극 나섰다. 중일 전쟁 기간 동안 지방을 순회하면서 전쟁협력을 권유하였고, 교회 내에 가미다나를 설치할 것과 황도연구회를 설립할 것을 결의했으며, 특히 1943년 친일성이 강한 혁신교단을 조직하고 통리를 맡았으나 교단 내의 심한 반발에 부딪혀 한달 만에 무산된 바 있다.

 

광복 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구속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개신교 내에서 전필순과 같이 친일 행적이 뚜렷했던 정인과, 정춘수 등은 반민특위에 체포된 뒤 친일 논란 속에 교계에 다시 복귀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필순은 교인들에게 신임을 물은 뒤 '다같이 죄를 범했는데 누굴 돌로 칠 수 있겠느냐'는 논리에 따라 재신임을 받았다.

 

특히 한국 전쟁 초기에 피난하지 않고 조선인민군 치하에서 교회를 지킨 일로 신임을 회복해 재기했다. 19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부회장으로 다시 선임되었고, 1957년에는 총회장을 맡았다. 장로교는 1959년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는데, 전필순은 전 총회장으로서 통합 측의 중심인물이었다. 1961년 연동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1962년 은퇴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기타 부문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종교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 대동단 사건
  • 혁신교단
  • 연동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
  • 차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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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사백(車士伯, 1899년 ~ ?)

    한국의 교육인이다. 장로교 목회자 전필순의 부인이다.  이 학교는 일제 강점기의 경성무학공립고등여자학교가 전신이며 현재의 무학여자고등학교이다.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교육/학술 부문에 포함되었다. 전필순은 이 명단의 종교 부문에 선정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전필순과 마찬가지로 전쟁 지원에 나선 혐의가 있다. 김활란 등 신여성 세력과 조선귀족 부인들이 함께 조직한 애국금차회에서 간사를 맡은 것을 비롯하여,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의 지도위원을 지냈다. 총후부인부대에 포함되어 함경도 지역으로 순회 강연을 떠나는 등 영향력 있는 교육인으로서 친일 강연과 좌담회에 여러 차례 참석했다. 임영신, 독고선과 함께 조선보육연맹에도 가담했다.

    국민정신선양 각도 강연 행각

     

     

    "반민족적인 행위는 한 일이 없다"고 발뼘

    1949725, 이승만 정부의 압력과 친일파들의 방해공작으로 활동이 거의 중단되다시피 한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에 전필순 목사가 찾아와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하였다.

     

    저는 반민행위 피의자로서 반민특위 조사부에 피검되었다가 금년 48일 불구속으로 취조를 받게 되어 석방된 사실이 있습니다. 저는 과거 일제시 교회 목사로서 득죄(得罪)한 일은 있으나 반민족적인 행위는 한 일이없습니다.

     

    그러자 특별검찰관은 이 사실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청취 형식으로 전필순에 대한 신문을 하였다. 다음은 이 청취서 문답의 일부 이다.

        

     

     

     

    : 공술인은 일제시에 일본 침략정책에 정신적으로 협력을 하였다는데, 여하 (如何).

     

    : 그것은 당시 교회인들이 일본 정책으로서 교회를 주목하고 갖은 탄압이 있었던 관계로 대부분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고 다만 제1선에서 교회를 보존하면서 유지하겠다고 생각한 사람들만이 나서서 일본 강압정책을 형식적으로 순응하면서 합법적으로 유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개인의사로는 할 수도 없고 또 하지도 못하는 관계로 전국 총회의 결의하에 방법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그런즉 여()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교회의 보존을 하였던 것이고 일본 정책에 정신적 협력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저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부회장이었던 관계로 제가 책임지고 그런 방법을 정하였는데, 당시 회장이었던 최지화, 김응순 양명(兩名)은 현재 평양과 해주에 있습니다.

     

    : 공술인은 중일 전쟁시에 국내를 순회하면서 각지 교회당에서 일본의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는 법인즉 거족적으로 전쟁협력을 권유하였다는데 사실 여하.

     

    : 강연을 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당시 연제가 총독부로부터 나오기를 '정의필승(正義必勝)'이라고 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는 총회의 결의로서 강연을 하였는데 전술 제목을 가지고 하는 것인 만큼 보편적인 의미에서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일본의 전쟁이 정의의 전쟁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 공술인은 그러면 과거 모든 행위에 대하여 양심상 가책을 느끼는 점이있는가.

     

    : 민족적인 입장에서는 하등 양심상 가책이 없고 다만 종교적 정신에는 배치되었던 관계로 하나님께 대하여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1943년 일본 나라(奈良)신궁 참배 후 한국 목회자들의 기념사진.

     

     

    종교적으로 하나님께는 죄를 지었지만, 민족적으로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그는 {목회여운} (1965)이라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당시 만 5년간을 경기노회장으로 또는 총회 부회장으로 일본인과 상의, 충돌, 협상 등을 행해 국면 타개에 노력하는 동안에 진흙투성이며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러한 거리낌이 없었다. " 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대상과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사람, 어느 것이 진실일까? 이것은 종교나 민족 모두에게 죄를 지은 자가 말하는 자기변명이거나, 아니면 반민족 행위가 무엇인지 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사람의 착각이 아닐까?

     

    3·1 운동 참여로 옥고

    전필순은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1912년 그 지역 사립 봉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동안 독학을 하면서 그 지역 장평리 교회를 중심으로 농촌활동에 참여하였다가, 1917년에는 YMCA 소년부 간사를 맡게 되고, 19191월에는 연동교회 조사(助事)로 발탁되었다.

     

    그는 1909년부터 교회에 나가고 1914년에 세례를 받았는데, 그가 기독교인이 된 동기도 바로 '공부할 의욕'과 기독교계 학교의 '장학금을 타려는 심산'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어떻든 그가 농촌활동을 할 때 서울연동교회에서 이 지역에 내려와 농촌 전도를 하던 원세성, 박용희 등의 지도와 영향을 많이 받았고, 연동교회의 조사가 된 것도 바로 원세성 장로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조사로 부임할 무렵은 바로 3·1 운동이 태동하던 때로, 그도 같은 교회의 교인이자 자신을 지도해 준 박용희와 함께 3·1 운동에 참여하여 주로 동지들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이 운동의 지속을 위해 상해임시정부의 연락원과 접촉하다가, 전협 (全協) 등 수십 명의 동지들과 함께 제2의 민족대표를 내세워 독립선언을 하려다 일제에 발각된 대동단사건에 연루되어 191911월에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다가, 19215월에 만기 출옥하였다.

     

    당시 {동아일보}1921527일자는 '만기 출옥한 대동단 전필순, 옥중생활의 감상을 말하여'라는 제목으로 이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옥중 감상을 "이 중에서 나에게 가장 깊이 느끼게 하는 것이 실력양성이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회고록에서도 "우리는 선동도 필요하지만 장기전(長期戰)으로서 계몽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교육을 통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려는 심산 이었다……교회로서는 정치운동에 가담한다는 것보다 구령운동(救靈運動)이 모든 운동의 근본"이라고 생각하여, 출옥 후 계몽과 전도를 위한 강연회나 기독교 문화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일제 경찰의 방해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여의치 않자 박용희와 김영구 목사의 권유와 후원으로 19223월 일본 고베(神戶) 신학교에 유학하였다. 19263월 이 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같은 해 4월부터 다시 연동교회 전도사로 일하였다.

     

    그는 그 해 가을 평양신학교에서 한 달간 공부하고 돌아와 이듬해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묘동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9년에는 장로회 총회와 조선 예수교 연합공의회 종교 단체법안 반대 진정위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는 그 때까지만 하여도 일제에 저항적인 활동에 참여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권에 현혹되어 혁신교단의 통리로

    전필순은 1931년 묘동교회를 사임하고 기독교 문화 사업에 뜻을 두어 당시 유일한 장·감 연합의 초교파 신문인 기독교보사의 기자로 들어갔다. 그런데 마침 발행인 겸 사장으로 있던 선교사가 기독신보사의 경영을 조선인에게 양도하려 하였으므로 전필순이 개인 명의로 이를 인수하여 19337월 사장에 취임하였다.

        

    1938년 장로교 27차 총회 총회록에 실린 신사참배 결의문

    1938년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신사참배 결의를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총회 이후 찍은 임원진 기념사진이다. 앞줄 중앙에 홍택기 목사, 그 오른쪽이 김길창 목사이다. 우상숭배의 대가로 받은 "은전(가롯 유다의 은전)"을 헤아리던 자들이며,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목사들을 이단이라고 했던자들이다. 크리스찬트리뷴.

     

    그러나 이에 불만을 가진 윤치호*, 양주삼, 정인과* 등 교계인사들과 마찰이 생겨 {기독신보}는 기독교연합지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전필순 개인의 신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는 교계의 보조가 중단된 상황에서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기독신보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하였으나 일제의 간섭과 재정난으로 6개월 동안 휴간한 끝에 결국 1937년 폐간하고 말았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교권에 대한 야망을 갖게 되었으며, 일제의 비호 없이는 이것이 불가능함을 몸소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승동 교회에서 분립한 수송교회를 얼마간 담임하였다가, 19414월 다시연동교회의 위임목사로 전임하였다. 그리고 그 해 경기노회 총대로서 장로회 총회에서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사실 그 당시의 총회 임원은 친일적 성향을 갖지 않은 인물이 아니면 맡을 수 없는 지위였다. 이때쯤 그는 교권의 노예로 전락하여 부일활동에 동원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반민특위의 의견서에 의하면 그의 '범죄사실'은 다음과 같다.

        

     

     

    피의자 전필순은 예수교 목사로서 중일 전쟁 시에 일본 황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여 조선 민족혼을 말살시켰으며, 일본의 침략전(侵略戰)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으며, 일본국책을 추진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그 단체의 수뇌 간부가 되어 악질적 행동을 한 일본의 충견(忠犬)이라는 보고임. 위자를 엄밀히 문초한 결과 다음 각항의 사실이 명확함.

     

    . 피의자 전필순은 중일전쟁시에 예수교 목사로서 국내 각지에 순회하여 신성한 교당에서 일본 침략전쟁을 정의(正義)라고 하였으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강연을 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전쟁협력을 권유한 사실이 명확함.

     

    . 피의자 전필순은 기독교인을 망라하여 혁신교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그 단체 수뇌간부로서 일본 국책을 추진시킨 사실이 명확함.

     

    . 피의자 전필순은 신성한 교당(敎堂)에 일본 가미다나 (神棚)를 설치할 것과 또는 황도(皇道)연구회를 설립하자는 것을 결의한 사실이 명확함.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그의 친일행각으로 입증된 순회강연과 가미다나 설치문제 등은 그만두고, 기독교 변질의 극단을 보여 주었던 혁신교단의 성격에 대해 그의 반민특위 피의자 신문조서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 4276(1943) 4월경에 피의자는 장로회 총회 부회장 재직중 소위혁신교단을 조직한 사실이 있는가?

     

    : 네 있습니다.……

     

    : 피의자가 혁신교단의 통리로 추대되게 된 동기는 어떤가?

     

    : 규칙에 의해서 추대를 받았습니다.

     

    : 혁신교단의 규칙은 어떤가?

     

    : 각 교회 구내에 가미다나 (神棚)을 설치할 것. 황도연구위원회를 설치할 것. 구약교본 작성 위원 설치의 건 등이올시다.

     

    : 혁신교단의 목적은 어떤가?

     

    : 내적으로 기독교의 현상유지를 하며 외부로는 국면타개를 위함에 있었습니다.

     

    : 혁신교단의 구성분양 및 요소는 어떤가?

     

    : 감리교회 전부와 당시 장로회 경기노회의 합작입니다.……

     

    : 혁신교단의 본질은 어떤가?

     

    : 본질은 기독교회의 본질을 떠난 것이 없사오며 각 교회당 구내에 일본 가미다나 설치와 황도연구위원회와 구약교본 제작위원회 등을 부설함은 천추만대에 기독교 순수성을 모독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혁신교단의 간부는 누구누구인가?

     

    : 사무관장 김영섭(金永燮), 총무국장 이동욱(李東旭), 전도국장 박연서(朴淵瑞), 교육국장 윤인구(尹仁驅), 재무국장 최석주(崔錫柱),연성국장 김수철(金洙喆) , 각도 교구장 등이 있었으나 기억나지 않습니다.……

     

    : 그러면 세상에 물의가 많은 혁신교단은 어떠한 의도로 해산하였는가?

     

    : 혁신교단이 내부적으로는 조직되었으나 장로회 경기노회는 본 장로회로 귀환되고 감리교회 내부에서도 규칙해석에 이견이 생하였사오며 당시 포교 규칙에도 불합하여 5월중에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상의 신문 내용은, 교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일제의 방침에 따른 혁신교단을 조직하고 통리가 되었으나 교계 내부의 반발로 한달 만에 무산되고 말았던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일로 전필순은 경기노회의 불신임을 받아 약 1년간 장로회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개인적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194410월 총회에서 부회장으로 다시 복권되어 교계의 부일활동에 참여하였다.

        

     

     

     

    자숙(自肅)의 철회와 재기

    전필순에게도 해방은 감격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의 회고록인{목회여운} (1965)[8·15 해방][자숙(自肅) 결의]라는 항에서 해방 직후자신의 처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천황이 무조건하고 연합국 측에 항복한다는 선언을 했다 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조화인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감사함과 기쁨을 어찌할 바 몰랐다.……

     

    1945817, 승동 교회에서 각파 대표들이 회집해서 교회의 앞일을 토의하던 때, 내 기억에 용이치 않은 장래를 예견(豫見)하였다.……

     

    이것을 본 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 만 5년 간의 경기노회장으로 또는 총회 부회장으로 일본인과 상의, 충돌, 협상 등을 행해서 국면 타개에 노력하는 동안에 진흙투성이며 만신창이가 되어 시대의 국면(局面)도 교체되었으니 후퇴해서 응수(應酬)나 되는 대로 해보겠다고 결심하고 물러섰다.……

     

    교회에 돌아온 나는 먼저 당회와 시국수습을 토의하고 물러날 결심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제직회를 열고 똑같은 심경(心境)을 토로하였다. (116117)

     

     

     

    그가 해방을 기뻐한 것은, 그 때쯤이면 일제 당국에 의해 끊임없이 요구되던 부일협력 활동에 지쳐, 자신도 일제에 의한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 승동 교회 모임에서 자신을 비롯한 친일지도자의 처신이 용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일단 목사직에서 물러나 자숙하면서 대처하는 것이 현명하리라고 판단하여, 그가 담임하던 연동교회의 당회와 제직회에 그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러자 당회와 제직회원들은 그를 위로하면서 같이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리하여 교인전체의 재신임을 묻기로 하고, 당시 그 지역 시찰자이던 김춘배 목사를 사회자로 청하여 19451028일 주일예배 후 공동의회를 소집하였다.

     

    이때의 회의록에는 "주님의 광명이 이 강산에 비치오니 종래 암흑 속에서 봉직하던 교회 제직원은 총사직함에 대하야 장시간 토의하다가 결국은 투표로 신임을 판정하기로 하니 목사 전필순, 장로 윤봉선· 정재영· 진석오· 신태선, 집사 김한성……이상 다 유임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당시 교회로서는 자숙을 표명한 목사와 제직들에 대한 동정과 이들이 총사퇴하면 교회가 해산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재신임을 결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필순 목사가 자숙을 철회하고 교계에 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이와 같이 자기가 담임한 교회에서는 일단 신임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의 친일경력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1949310일 반민법 위반 혐의로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48일에 불구속 처분을 받아 풀려났다.

     

    이 때 조사한 그의 소행 조서에 따르면 그는 "허영심과 자존심이 강하야 신앙사도로서 적당치 못하나 양심적인 점도 있음. 한때는 교인들에게 신임을 받아 지도적 역할을 하였으나 왜의 정책에 동조하야 변절한 것을 유감이라고 비난" 받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해 810일 특별 검찰부는 그에게 기소유예를 내리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피의자는……민족관을 망각하고 가증하게도 일제 침략정책에 순응하여 소위 황민화운동 등에 적극 협력하였고, 그 방법으로 기독교 신도를 총망라하여 일본기독교와 합류한다는 소위 혁신교단을 조직하고 지방순회 강연 등을 감행하여 일본전쟁 필수(必需)에 협력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반민족행위를 감행하였다는 사실에 관하여 수사한 바, 피의자는 위 행위사실을 솔직히 자인(自認)하고 그 이유로서 당시 일제의 마수가 기독교단에까지 침범함으로 동 교단을 합법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부득이 반민족행위까지도 감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호소하는 바, 피의자의 진술과 당시의 국내 정세 및 피의자의 반민족행위로 인하여 민족에게 끼친 영향 등을 종합 고찰한즉 그 죄상이 경미(經微)하고 개전(改悛)의 정이 현저하며, 동기 및 정황에 대하여 민량(憫諒)할 점이 있으므로 주문과 같이 결정함.

     

     

     

    그가 반민특위에서는 그 소행을 대체로 인정하고 개전의 태도를 보인 듯하나, 그의 회고록에는 전혀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아마 그의 기억에서 지우고,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필순은 그 후 한국전쟁 초기에 피난하지 않고 교회를 지켜 다시 신임을 쌓고, 195556년에는 장로회 총회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1957년에는 총회장에 피선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1959년 장로교가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분열될 때도, 전임 총회장로서 통합측 중심인물로 깊이 간여하였다. 그는19616월 연동교회의 원로 목사로 추대되었고, 이듬해 정식으로 은퇴하였으며, 19772월에 세상을 떠났다.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전필순(全弼淳, 1897-1977)

    개신교, 장로교 목사, 종교인, 호는 일우(一愚). 경기도 용인 출신, 저서(작품) 승리의 길|목회여운, 대한예수장로회 총회장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1912년 용인군 외사면 면소재지에 있던 사립 봉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뒤 독학으로 교역자가 되고자 준비하다가 19191월 원세성(元世性)의 추천으로 연동교회 (蓮洞敎會) 조사로 부임하였다. 그 해 10월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15월 출감하였다.

     

    출옥 후 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박승봉(朴勝鳳유성준(兪星濬) 등과 함께 기독교 민간문서 사업기구인 기독교 창문사 설립에 노력하다가 19223월 일본 고베신학교 (神戶神學校)에 유학하여 19263월에 졸업하고, 귀국하여 같은 해 4월 연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그 해 11, 1개월간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수학하고 19275월에 교회를 사임한 뒤, 묘동교회(妙洞敎會) 전도사로 가서 6월에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묘동교회 위임목사가 되었다. 1929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와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회 종교단체법안 반대 진정위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국회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19315월에 묘동교회를 사임한 뒤 긔독신보기자로 새롭게 출발하였으며 선교사들이 긔독신보를 한국측에 양도하게 되자 개인 자격으로 이를 인수받아 발행인이 되었다. 1935년 수송교회 목사가 되었다가 19414월에 영동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42년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종교지도자의 ·미타도좌담회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19434월에는 새로 조직된 일본기독교조선혁신교단의 통리(統理)가 되었다. 1957년에 대한예수장로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59년 제44차 총회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국제복음주의연합)측의 대립으로 장로회가 분열되었을 때 증경총회장으로서 연동교회에서 총회 속개준비회를 주재하였고, 이로써 WCC 중심의 연동측 장로회가 탄생하였으며 이것이 오늘의 예장통합측을 이루게 되었다.

     

    19616월에 연동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19625월 교역 일선에서 은퇴하기까지 21년 여를 연동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1963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승리의 길·목회여운등이 있다.

     

    1894년 출생하였고 용인군 장로파(長老派) 대표로서 27세때인 1920년 최익환(崔益煥)등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 35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이 단체는 귀족, 관료, 유림, 학생, 의병, 종교인, 여자, 보부상(褓負商) 등 각층에서 수많은 단원을 포섭하고 인쇄기를 구입, 영업을 하면서 대동신문을 비밀히 발간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친왕(義親王) ()의 동생 김춘기(金春基)는 일찍이 미국에 건너가 공부하다가 돌아와 의친왕과 몇몇 귀족중 중망(重望)있는 이들이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를 옹호하며 독립운동 세력을 확장하자는 전협(全協)의 계책을 말하자 의친왕은 이에 찬성하고 대동단 고문 김가진(金嘉鎭)으로 하여금 의친왕의 의지를 임시정부 국무총리 안창호(安昌浩)에게 전달토록 하였다.

     

    그리고 의친왕과 김가진 등 35인이 대동단을 대표하여 선언서를 인쇄하고 의친왕이 상해에 도착했을 때 이들 발표하려고 하였다. 전필순은 이 선언문에 서명하여 출판법, 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된 후 옥고를 치루었다. 물론 상복차림으로 안동까지 내려갔던 의친왕은 거기서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상해로 가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의친왕의 선언서 발표안>

     

    1.일본이 아국의 기개(畿個) 간신과 야합하에 나의 부왕과 모후를 시살하였으니 이 원한을 열국에 호소하려 한다.

     

    2.31일 이후 거국 인민이 빈손으로 만세를 부르거늘 저 왜적은 개준치 않고 학살만 자행하거니와 우리민족은 백절불굴하는 기백으로 독립을 요구하는 열혈(熱血)은 갈수록 비등하여 우리 국민의 정신은 결코 일본에 동화(同化)되지 아니할 것을 천하에 선포한다.

     

    3.일본이 우리 한국에 대하여 10여년 전후에 제종조약(諸種條約)으로 국토까지 합병한 것은 간신 놈들을 이용하여 협박으로 늑체된 것이죠, () 부왕의 윤허하시지 아니한 것은 내가 확지(確知)하는 것이니 이 실정을 세계에 공표함.

     

    4.나도 한국의 일민(一民)이라. 차라리 독립된 한국의 일서민(一庶民)이 될지언정 우리나라를 삼킨 일본의 황족됨은 원치 않는 바이며, 반드시 임시정부가 설립된 땅에 나아가 정부 제공(諸公)과 악수동심하여 생사간에 광복에 힘을 다하여 여러 동포의 고심하는 만의 일은 자가(自家)의 복수를 위한 것이며 하나는 조국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위함이로다.

     

    이 사건의 특성은 친일단체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귀족, 또는 요인들이 주동이 되었고 의친왕 이강의 상해탈출기도였다는 점에서 황족으로부터 서민대중에 이르기까지의 자주독립을 이룩하고자 했던 국민의 열망은 한결같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겠다.

     

     

    경신학교 [儆新學校] 경신고등학교

    1886년 미국의 선교사 H.G. 언더우드가 서울 정동에 설립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갖는 기독교계의 중등교육기관으로 재단법인 경신학원의 인가를 받고 전필순(全弼淳) 목사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다. 1964. 4. 25. 재단법인 경신학원을 학교법인 경신학원으로 변경하여 인가를 받다. 1952년 화재로 정릉교사가 소실되자 19554월 혜화동 현교사로 이전했고, 곧 전필순(全弼淳) 목사를 이사장으로 하는 재단법인 경신학원을 설립했다. 1957년 신교사를 건립했고 그후 몇 차례 교사를 증축했다. '경신학교 대학부'라 하였는데, 이것이 곧 연희전문학교 및 연세대학교의 전신(前身)이다.

     

      

     

    42회 전필순 총회장

    해방이 되자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어 친일 부역자로 30일간 마포형무소에 구금이 되었다. 이러한 일로 연동교회에 사의를 표하였지만 그를 받아 주지 않아 목회를 하던 중 19579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연동교회에서는 그를 원로 목사로 추대를 하였으며마지막 여생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반민특위조사기록, 사건송치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제67

        

    죄명반민법위반, 반민법(410, 11) 위반

    발각원인인지 , 단기 428255, 단기 4282[1949] 810일 결정

    수리4282[1949] 310

    유치4282[1949] 310

    방면4282[1949] 28

    비고기소의견 , 기소유예

    피의자불구속 전필순[全弼淳] 피의사건(증거물 첨부) 송치함. 4282[1949] 48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김상덕[金尙德]

    반민족행위특별검찰부 관장 권승렬[權承烈] 귀하

        

     

    사실이유 피의자는 일찍이 일본 신호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서 서울시 연동교회 등에서 종사 중 일제시 그의 사명인 기독신도에 대한 신앙심 앙양과 양심적 지도를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민족혼을 망각하고 가증하게도 일제 침략정책에 순응하여 소위 皇民化運動 등에 적극 협력하였고 그 방법으로 기독교 신도를 총망라하여 일본 기독교와 합류한다는 소위 혁신교단을 조직하고 지방순회강연을 감행하여 일본전쟁 필승에 협력할 것을 강조함으로서 반민족행위를 범행하였다는 사실에 관하여 수사한바 피의자는 범행사실을 솔직히 자인하고 그 이유로서 당시 일제의 마수가 기독교단에까지 침범함으로 교단을 합법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부득이 본의 아닌 행위까지도 감행하게 되었던 그 사실을 부연하는바 피의자의 진술과 당시의 국내정세 피의자의 반민족행위로 인하여 민족에게 끼친 영향 등을 종합 고찰한즉 그 죄상이 경미하고 改悛의 정이 현저하여 동기 정황에 대하여 할 점이 있으므로 주문과 히 결정함.”

           

     

     

    일본기독교조선교단 日本基督敎朝鮮敎團

       

    일제에 의해 강제로 조직된 한국 개신교 통일재단.

    일제는 1930년대부터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황국신민화정책을 강화했으며 그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 신사참배 강요였다. 이 정책은 일부 그리스도교도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한국 그리스도교의 교단 차원에서 수용되었다. 그후 일제는 종교단체법 등을 제정하면서 종교탄압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전신은 19423월 조직된 일본 그리스도교 조선혁신교단(朝鮮革新敎團)이다. 이 혁신교단은 일제가 전시하의 종교통제를 위해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 중 일제에 타협적인 자들을 뽑아 조직한 교단이었으며, 의장은 전필순(全弼淳)이었다. 이들은 성서 중에서 구약성서의 모세 5경과 신약성서요한의 묵시록을 불온사상으로 간주하여 삭제했다. 전시상황이 더욱 악화되자 구약성서는 전부 폐지하고 신약성서4복음서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삭제했다. 그리고 4복음서도 당국이 허가한 해석의 범위에서만 설교할 수 있었다.

     

    1943년에는 성결교(聖潔敎안식교(安息敎동아기독교(東亞基督敎) 등의 재림(再臨)사상을 위험사상으로 간주하여 이 교단들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남아있던 감리교를 중심으로 하여 장로교와 구세군(救世軍) 등을 포섭하고 일본 그리스도교 조선감리교단으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총리에는 감리교의 정춘수를 임명했다. 또한 일요일의 오후 집회와 수요일의 집회를 금지시키고, 청년회·사경회·아동집회 등을 모두 해산시켰으며 교회 안에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황도실천(皇道實踐전도보국(傳道保國) 등의 표어를 강제적으로 달게 했다. 1945년에는 마침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창립하여 완전히 일본 그리스도교 교단에 예속시켰으며 교단의 최고 책임자인 통리에는 김관식을 임명했다. 그러나 이 교단은 1개월도 채 안 되어 일제의 패망으로 자동 해산되었다.

     

        

     

     

    기독교조선혁신교단 [基督敎朝鮮革新敎團]

     

    일제 말기 강제에 의해 조직된 기독교 단체.

    19423월 서울지역 친일계 기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회합을 갖고 전필순(全弼淳)목사를 의장으로 교단을 설립했다.

     

    그러나 전필순 의장이 소속된 장로교 경성노회의 반발로 혁신교단가입을 철회하자 감리교회 정춘수(鄭春洙)목사가 의장이 되었다.

     

    혁신교단은 한국 교회 전체 방향을 친일성향으로 머물지 않고 기독교의 본질 자체를 저버리는 경우에까지 이르렀다. 성경의 부분삭제, 찬송가 삭제, 교회 안에서의 일본종교행위 거행, 국방헌금과 예배당의 전용 등 일제가 요구하는 파행적 요구에 적극 순응, 솔선하는 조직이었다.

     

        

     

     

    기독신보 基督申報

     

    1915년 재한 미국 장로교선교회와 감리교선교회가 연합으로 발간하던 주간신문. 1915(창간)|1937(폐간) 원래의 명칭은 긔독신보(The Christian Messenger)였고, 최초의 편집진은 선교사인 크램(Cram, W. G.)과 케이블(Cable, E .M.), 그리고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이던 김필수(金弼秀)였다.

     

    신문의 발행권은 조선예수교서회가 가지고 있었으며, 비용은 찬송가 판매금과 원조금으로 충당하였다. 1919년에는 항일적인 논조로 인해 네 차례나 압수당하였고, 편집장 박동완(朴東完)33인 민족대표 중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징역을 받았다. 또한, 극심한 물가 폭등 등으로 매주 3천 부 이상을 발행하던 것이 2천부를 겨우 상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독자 확장운동을 벌여, 1920년에는 6천 부 이상을 발행하면서 계속하여 장로교와 감리교가 64의 비율로 책임 부수를 정하여 신문구독운동을 펴 나갔다.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초교파적으로 조직되었을 때, 기독신보를 예수교서회에서 연합공의회로 이관시켜 일간신문으로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32년에는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해 연합공의회에서 확대위원회를 구성했으나, 예수교서회측은 김관식(金觀植)을 이사장으로 하는 새 이사회를 구성하고 발행권의 법적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필로 임명된 전필순(全弼淳)은 예수교서회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경영체계를 세우고, 19338월부터 새롭게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역대 사장은 크램·김필수·게일(Gale, J. S.)·하디(Hardie, R. A.)·로드스(Rhodes, H. A.)였고, 주필은 김필수·박동완·조상옥(趙尙玉박연서(朴淵瑞전필순 등이었다. 이 신문은 한국 교회사상 최초의 초교파적인 연합신문이며, 1937년에 폐간될 때까지 가장 수명이 길었던 교회신문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기독신보}, 193337

    [반민특위 피의자 신문조서 및 청취서], 1949

    전필순, {목회여운}, 1965

    연동교회90년사편찬위원회, {연동교회 90년사}, 1984

    묘동교회57년사와 사회상(임이덕, 묘동교회, 1964)

    연동교회90년사(연동교회90년사 편찬위원회, 연동교회, 1984)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 전필순 : 혁신교단 조직한 기독교 황민화의 앞잡이 (김승태)

    김수진 (2005). 42회 총회장 전필순 목사 (1957-1958), 총회를 섬겨온 일꾼들.한국장로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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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개신교회사/김수진 지음/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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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youtube.com/playlist?list=PL2C0D1D79772E0FE1기독교 실체

    http://blog.naver.com/ahndj21/150136891553 기독교 친일자료

    http://blog.daum.net/greatestman/6636071장로교단 일제에 적극 협조··· 국방헌금 바치기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85131 친일파 명단

    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jbjoon63&categoryNo=15&from=postList&parentCategoryNo=15 한국교회사

    http://www.kbs.co.kr/1tv/sisa/aboutkorea/vod/vod.html한국사회를 말한다. - 선교 120주년, 한국교회는 위기인가 2004KBS 방송.

    반민족문제연구소 (1994년 3월 1일). 〈임영신 : 이승만에 대한 애정과 반공의 신념 (박태균)〉, 《청산하지 못한 역사 1》. 서울: 청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