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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류 따라 기웃거린 기회주의지의 변절 행로, 박희도 (朴熙道)

草霧 2013. 12. 9. 15:13

 

 

 

 

종교

 

 

박희도 (朴熙道, 18891951)

 

  

시류 따라 기웃거린 기회주의지의 변절 행로

 

 

 

 

 

 

1939{동양지광} 사장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박희도(朴熙道, 1889년 8월 11일 ~ 1952년 9월 25일)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기독교 목회자, 사상가였다. 일제 강점기개신교 계열 인물로 언론인과 목회자로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사람으로 33인 중 최연소자였다. 3.1 운동으로 투옥됐다가 풀려난 이후 자치론 경향으로 흘러가 민족개량주의 노선으로 기울다 1934년 전후로 친일파로 변절. 월간 잡지 '동광'(동양지광)의 창립인, 주간 사장으로 활동했다. 광복 이후 1948년 반민특위에 회부되었다가 1952년 병사했다. 그의 처숙모 주룰루는 초기 기독교 전도사의 한 사람이었고, 처사촌 김명신도 독립운동가였다.

 

  • 1.1 독립운동
  • 1.2 언론 활동과 사회 활동
  • 1.3 일제 강점기 후반
  • 1.4 해방 이휴
  • 1.5 사후
  • 중일 전쟁 발발 이후인 1939년 1월 《동양지광》창간을 계기로 본격적인 친일파로 전향했다.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많은 친일 논설을 게재한 것은 물론, 최린, 윤치호, 장덕수 등 친일 인사들을 동원한 강연회를 개최하거나 전쟁 협력을 주장하는 좌담회를 열기도 했다. 이 잡지에 실린 친일 논설들은 매우 노골적인 것들로, 박희도는 〈총후 국민의 급선무〉(1941년), 〈일본은 왜 전쟁을 하는가〉(1942년), 징병제 실시에 대한 공개 감사장(1942년), 〈진심을 헌납하라〉(1943년), 〈결전 비상의 때 - 궐기하라 반도 청년〉(1944년) 등을 직접 집필했다. 잡지사 전속으로 극단 협동예술좌를 창단하여 친일 연극의 순회 공연도 주선했다.

     

    전쟁이 계속되자 전국 각지에서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독려하는 연설을 했으며 전조선배영동지회연맹 평의원(1939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1940년),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1941년)으로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임원을 맡았고, 전시 체제 확보를 위한 친일 언론인 단체인 조선언론보국회에도 참여했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풀려났고, 한국 전쟁 기간 중에 병사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하여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에는 언론/출판과 친일단체의 두 가지 부문에 선정되어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005년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펴낸 자료집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에서 선정한 감리교 내 친일 부역자 명단 12명 중에도 들어 있으며[1]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박희도의 자치론을 친일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지나치게 단선적인 견해라며, 그의 변절이 "우리 모두의 치욕이요 아픔"이라는 주장도 있다.

     

     

     

     

     

     

     

     

    최연소의 3·1 민족대표

    박희도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해주의 의창학교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감리교계 협성신학교를 잠시 다니다가 1914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들어갔으나 중퇴하였다. 이듬해부터 그는 감리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중앙대학교의 모태가 된 중앙유치원을 설립 · 운영하였고, 베커(A. L. bechker) 선교사의 신임을 얻어 협성보통학교 부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19189월부터는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회원부 간사를 맡게 되어 청년 학생들과 교유하면서 그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학생층과 감리교계가 3·1 운동에 참여하는 데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위치와 활동력 때문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31세로 자신이 포섭한 동료 전도사 김창준과 함께 가장 어린 나이로 3·1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경찰 신문에서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선언서를 배포하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 "조선은 예전에는 독립국이었는데, 강제로 일본에 '병합'을 당하여 우리는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하였으며, '병합' 당시 일본인과 같이 자유와 교육과 생활을 동등히 한다고 하였으나 오늘날 보면 여러 가지로 불합리한 것이 많으므로 어쨌든지 독립국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선언서를 인쇄 배포하였다"라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예심 판사의 신문에서도 "피고는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할 줄로 생각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할 뿐 아니라 언제든지 독립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라고 하고,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도 "그렇다"라고 확실히 답변하였다. 그는 이 일로 다른 이들보다 형량이 무거운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그는 출옥 후에도 교육과 출판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자신이 창립한 중앙유치원의 원감을 맡고, 좌파 청년 김명식·신일용·유진희 등을 편집진으로 1922{신생활} 잡지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이 잡지를 통하여 비타협적·급진적 언론항쟁을 벌였다. 이 신생활사의 취지서의 서두에서 "인간사회는 사장(沙場)인가 화원(花園)인가. 정치, 법률, 도덕, 종교가 유()하나, 대중에게는 자유와 평등이 무()하도다"라고 전제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오직 개조와 혁신이라 하는 인류의 공통한 표어의 세계 대세에 순응코자 함이로다.

     

    조선인이여 인습의 길길(拮拮)에서, 위력의 압박에서, 경제의 노예에서 이탈하고 신생활의 신 운동을 개척할 지어다"로 끝맺고 있다({동아일보} 1922. 1. 19.). 그리고 창간호에서 "신생활을 제창함, 평민문화의 건설을 제창함, 자유사상을 고취함"이라는 '신생활주지(主旨)'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일제 경찰이 좋게 보았을 리 없다. 그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수차 검열과 삭제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192211월에 발간한 제13호 기사를 트집 잡아 박희도를 비롯한 편집진들을 검거하기에 이른다. 총독부 경무국은 1923년도 보고서에서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소요 전과자 박희도를 사장으로 하는 잡지 {신생활}(경성)은 대정 11(1922)11월호의 동 지상에 '러시아 혁명 5주년 기념호'라는 제하에 가장 열악하고 천박한 언론으로 치열한 공산주의를 구가하고 현재 사회의 조직을 저주하고 계급투쟁을 고취하고 사회혁명을 종용 선동하며 유치한 사상계를 교란하고자 하므로 바로 행정처분에 의하여 차압하고 다시 언론계의 확청(廓淸)을 기하기 위하여 다음 12(1923) 18일 그 발행을 금지하고 한편 책임자를 사법처분에 부치게 되었다.({현대사자료} 1929, 5, 9) 박희도는 다시 이 사건으로 함흥감옥에서 2년여의 옥고를 치르고1924년 말경에 출옥하였다.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박희도는 192610월 자치운동단체인 연정회 부활 계획에 참여함으로써 그 때까지의 절대독립론을 포기하고 자치론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2월에 창립된 신간회에서 총회 간사를 맡고,19298월에는 안재홍, 주요한* 등과 함께 신간회 중앙 상무 집행위원회 회보 편집위원을 맡아 활약하기도 하였으나, 신간회가 해체된 후에는 신우회를 거점으로 최린* 등의 자치론자와 접촉을 가졌다. 그는 독립에 대한 희망을 점차 버리면서 일제와 타협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의 영(), 변절의 욕(), 모두 산 자들의 짐인 것을

     

     

     

     

     

    망우동 망우리 공원묘지 독립운동가 박희도(朴熙道) #109628

    한용운 연보 비 조금 지나 길 밑 두 갈래로 갈라진 나무 바로 밑에 있다. 만해선생 연보비와 서병호 선생 연보비 중간쯤에 있었다. 길옆에 있으면서도 찾기 힘든 묘 중에 한 곳이다. 독립운동가들의 이력을 보면 안타까운 것이 많다. 잘 나가시다가 끝판에 친일행각으로 돌아서서 비판을 받고 계신 분들이 의외로 많다. 아마도 호구지책으로 어쩔 수 없었다라고 이해를 하려해도 끝까지 지조를 지키신 많은 독립 운동가를 생각할 때 분명한 선은 그어져야 할 것이다. 비석은 1958년도 육군정훈학교장병일동이 세운 것이다. 그러나 박희도의 자치론을 친일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지나치게 단선적인 견해라며, 그의 변절이 "우리 모두의 치욕이요 아픔"이라는 주장도 있다.

        

     

    망우리공원에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끝까지 지조를 지킨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과 일제 말기의 친일 행적으로 속죄의 말년을 보낸 박희도(朴熙道 1889~1951)가 함께 묻혀 있다. 그들이 살아서 남긴 족적과 영욕은 무엇인가. 또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짐은 과연 얼마만큼인가.

        

     

    만해의 묘를 지나 관리사무소 방향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길 오른쪽 바로 아래에 글이 많이 새겨진 희끄무레한 비석이 하나 보인다. 비석의 크기도 평균 이상이다. 비석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기미년독립선언 민족대표 삼십삼인중 고 박희도 선생지묘” (앞면)

     

    ()선생은 단기 4222(1889) 611일에 해주에서 출생하여 그 후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삼십삼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항일투쟁을 하다 투옥되었으며 출감 후에도 계속해서 민족의 신생활 운동교육사업에 이바지하던 중 단기 4284(1951) 926일에 서거하다. 단기 4291(1958) 78일 건립 육군정훈학교 장병 일동”(뒷면)

     

        

    박희도와 육군정훈학교

    바로 위에 있는 묘가 부모님의 묘인데 비석 뒤에 차남으로 박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지만 그 이름이 생소하다. 비문 내용 그대로라면 대표적 독립지사로 관리사무소의 안내도에도 이름이 올라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박희도는 일제 말기의 행위로 친일파로 낙인찍힌 사람이다. (...) 이러한 친일 행적 때문에, 박희도의 묘는 산책로를 사이에 두고 만해의 묘와 지근거리에 있지만, 세인이 바라보는 시선의 거리는 대극적이다. 아니, 그는 아예 우리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고 오랫동안 잊힌 존재가 되고 있다.

     

    박희도가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고 풀려난 후, 1951년 사망 때까지의 행적은 어느 자료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 공백을 메우는 단서가 바로 고인의 비석에 나타난 육군정훈학교에 있을 것으로 생각해 이 학교의 후신인 육군종합학교에 문의한바, 비석이 세워진 1958년 당시의 이 학교 교장은 윤태호 준장인 것으로 추정되며 학교는 용산구 한남동에 있었다는 사실만 확인되고 그이상은 알 수 없었다.

     

    변절자에 대한 차가운 시선

    그러다 얼마 전 신동아’ 2월호에 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편을 쓰면서 만난, 유상규의 장남 유옹섭씨(준장 예편)의 도움으로 박희도가 사망 전까지 육군정훈학교에서 강의를 했다는 증언을 얻을 수 있었다. 친일의 불명예 때문에 그 누구도 고인에 대해 비석 하나 제대로 세워주지 않았지만 육군정훈학교는 그의 사후 7년 만에 한국 기독교계의 큰 인물이었으며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었고 말년에는 묵묵히 백의종군하며 교육자로 생을 마친 그를 추념하며 비석을 세워준 것이다.

        

    1934년에는 박희도를 중앙보육학교장에서 물러나게 한 사건이 있었다. 1934317일 조선중앙일보는 교육계의 대불상사, 제자들을 유인하야 정조유린을 감행이라는 제목으로 박희도의 정조유린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중앙보육학교장 박희도는 제자이자 친구의 부인 윤신실을 자기 집에 하숙시키던 중 정조를 유린했는데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언론에 이를 폭로했다 한다. 연이어 319일 자에는 각계 인사의 의견까지 싣고, 329일에는 전면에 선정적인 기사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 사건은 나중에 피해자가 진술을 번복해 진실은 오리무중에 빠져 알 수 없게 됐고, 결국 재판까지는 가지도 않고 흐지부지 신문 지상에서 사라졌다. 마치 영화 라쇼몽처럼 박희도, 윤신실, 남편의 말이 다 달랐다. 그러나 어쨌거나 물의를 일으킨 박희도는 중앙보육학교장을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중앙일보는 동아, 조선과 함께 3대 민간지로 당시 사장은 여운형이었다. 기미독립선언 33인의 한 사람으로 민족의 지도자 격인 박희도에 관한 추문을 일방 당사자의 말을 그대로 연일 대서특필한 것은 현재의 언론적 시각으론 이해하기 힘들다. 따라서 이 기사는 언론의 책임이나 선정성 여부를 떠나 저명인사 박희도에 대한 당시의 여론이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 중략 (....) 박희도의 친일행적은 1939동양지광창간 후부터 뚜렷하게 그 흔적이 나타나지만, ‘정조유린사건이 발생한 1934년 당시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친일파 (자치론자) 였기에, 보도에 있어 과거 민족 대표였다는 명예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조선중앙일보의 보도 태도는 오히려 잘 걸렸다는 투다.

     

    또 같은 해 920일에는 박희도와 같이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천도교 신파 지도자 최린(1878 ~1958)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1896~1946)으로부터 정조유린에 대한 위자료청구소송을 당한 기사가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에 실렸다. 소송의 내용은 정치 시찰차 파리를 방문한 최린이 당시 파리에 있던 나혜석과 정분이 나 수십 회에 걸쳐 정조유린을 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보살펴주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정작 그녀가 남편과 이혼하자 모른 척했으므로 이에 12천원의 위자료를 보상하라는 것.

     

    이 사건은 나혜석이 스스로 진실을 밝히고 있어 둘의 관계는 명백했지만, 나혜석에게는 친일파 인물에 대한 공격이라는 주변의 응원(예를 들면 최린과 대립적인 천도교 구파 등)도 심리적 우군으로 작용했을 공산이 크다. 동아일보 등의 언론에서도 사건의 당사자 최린의 인격은 존중되지 않았고, 오히려 총독부가 나서서 기사 삭제를 강제했다. 이 사건으로 831일 최린이 박희도 등과 함께 결성한 친일단체 시중회(時中會)는 큰 타격을 입었다.

     

    한편 천도교 계열인 개벽사의 잡지 제일선’ 19327월호에는 대경실색, 가장행렬화보라는 제목으로 저명인사 7명의 합성사진과 촌평이 실렸는데 한용운과 박희도는 (5)번과 (6)번으로 나란히 실렸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세인의 엇갈린 시선을 극명하게 엿볼 수 있다.

        

    ‘(5) 誘之不動(유지부동) 한용운씨 : 사진을 자세히 보십시오. : -스를 해주어요. : ! 점잔치 못하게 이러시오. : 점잔이 다 무어 말너비트러진거야! 엉 어서 키-스 해주어. 이와가티 섹씨가 조르나 한용운씨는 그래도 끔적아니하고잇습니다. 이 사진이 카메라놈의 작난이 아니고 사실 이러한 경우를 우리 한씨가 당한다면?

     

    (6) 곱사춤의 명인 박희도씨 : 박희도씨가 곱사춤으로 당대의 명인이(아니)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입니다. 이것을 분개한 박씨는 이삼일전에 불국 파리를 건너가 그곳에 유명한 땐서와 이와가티 곱사춤을 추는 광경을 텔레비존으로 본사에 피송하야 독자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햇습니다. ‘카메라놈도 행셋머리가 고약해!’

     

    촌평에서 제일선은 한용운을 여인(일본)의 유혹에도 꿈쩍하지 않는 지조의 인물로, 박희도는 여인의 어깨에 팔을 얹은 곱사춤의 명인으로 비유했다.

     

    이렇듯 민족대표 33인 중에 자치론으로 기운 박희도와 최린 등에 대한 민족의 시선은 따가웠다. 자치론은 적극적 독립운동을 약화시키고, 일제의 정책에 놀아난 것으로 간주됐으며, 따라서 그들의 이름 앞에는 변절자’ ‘친일파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들은 적대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자치론=비겁한 민족주의라는 논리는 너무나 단정적인 견해다. 만약 이 논리만이 바르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과거 진보세력을 무조건 친북좌파라고 매도했던 독단적 흑백논리와 다를 바 없다. ,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쟁에 광분한 일제의 총칼 밑에서 많은 인사가 저지른 적극적 친일 행위가 당사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치욕이요 아픔이라는 점에서 바라보면 더욱 그러하다.

     

    변절은 했을망정 조선의 양심

    친일파 연구로 평생을 바친 임종국(1929~1989) 선생은 책 실록 친일파’(돌베개, 1996) 일제 말 친일군상의 실태대목에서 친일행위를 인신공격의 자료로 삼으려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점에서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은 분명히 시효가 지났다. 또한 이런 자에게 묻노니, 그대는 저 여인을 돌로 칠 수 있다고 자신하겠는가? 전비(前非)로써 현재의 지위를 위협당할 사람도 없겠거니와, 이로써 위협을 하려는 자 있다면, 그 비열함이야말로 침을 뱉어 마땅한 일일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또 같은 책 민족대표 33인 중의 훼절대목에서 이렇게 밝혔다.

     

    민족대표 33인 중 10%의 변절이 한국인에게 수치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한 민족의 한 시대의 비극이 그들의 추문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친일자의 전부에 해당할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민족대표 중의 4(필자 주: 박희도, 최린, 정춘수, 최남선. 최남선은 33인에 속하지 않으나 3·1독립선언서를 기초)만큼은 한 시대의 민족의 비극을 고뇌하면서 살다간, 변절을 했을망정 그래도 조선의 양심이었다. 이들 4명의 죄상보다는 식민정략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전향자의 친일지 {동양지광}의 사장으로

    박희도가 어떠한 계기를 통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일제측의 회유 공작에 의한 것인지 자발적인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의 부일활동은 1937년 중일전쟁 직후부터 시작되지만, 본격적인 친일행각은19391월 일문으로 된 친일 월간지 {동양지광}을 창간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다른 잡지와 언론들이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되어 가고 있을 때, 이 잡지가 창간될 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내선일체와 황도선양'을 표방함으로써 총독부의 양해와 협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희도는 {동양지광}의 창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때에 반도 2천만 동포의 가슴 속에 일본 정신을 철저히 하고, 황도 정신을 앙양하고, 폐하의 적자(赤子)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으로서 예외 없이 국체의 존엄을 체득하고, 황국 일본의 대사명을 준봉하고, 황도의 선포, 국위의 선양에 정진하고, 그리하여 동양의 평화는 물론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일대이상을 펴서, 세계 인류의 문화 발달과 그 강영복지 증진에 공헌할 것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습니다. 생각 컨대 이 대의를 이해하고 이 이념을 체득할 때 일본 국민으로서의 영광과 긍지를 감득치 않을 자 누가 있겠습니까. ({동양지광} 창간호, 1939)

     

    그리고 여기에 이어서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쓴 [피로써 역사를 철한다]라는 글과 그 밖에 많은 친일논설들을 게재하였다.

     

    또한 이 잡지의 창간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해 289일에는 부민관 대강당을 빌어 이미 친일의 길을 걷고 있던 윤치호*, 최린, 장덕수* 등을 연사로 초청하여 시국문제 대강연회와 영화의 밤을 개최하였다. 1939년 말경 {녹기(綠旗)}의 편집자였던 모리타(森田芳夫)[조선 사상 제 진영의 전망]이라는 기고문에서{동양지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동양지광사가 태어난 것은 금년 1월이다. 지금까지 조선인 측의 언론은 거의 조선어였다……그런 의미에서 {동양지광}이 조선인들에 의하여 '내선일체'의주장하에 태어난 것은 실로 기쁜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장 박희도씨는 신념과 배포 있는 사람이요, 정치적 수완도 좋다. 많은 경제적 희생을 하면서도 매호 계속해서 내고 있다. 대체로 내선일체에 관하여 내선인 쌍방의 주장을 게재하고 있다.

     

    그 해 8월부터는 협동예술좌라는 신극 극단을 동양지광사에 전속시켜 친일적 내용의 연극을 서울은 물론 함북, 간도, 상해 등지까지 순회공연하게 하였다.

     

    그런데 박희도가 이처럼 열성적으로 친일활동을 했는데도, 총독부는 한때 '이 잡지가 종이 소비에 비하여 효과가 적다'는 이유로 발간 중단을 종용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수완'이 좋은 박희도의 간청으로 총독부에서 '인쇄용지 배급권'을 다시 주어 194112월부터 다시 속간하게 하였다.

     

    박희도는 이 속간 호에 [총후 국민의 급선무]라는 친일논설을 게재하고, 같은 달 20일에는 반도호텔에 신흥우, 정춘수*, 전필순*, 정인과*, 양주삼* 등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장장 7시간에 걸쳐 이른바'·영타도좌담회'를 개최하여 그 사회를 자신이 직접 보았으며, 그 내용을 이듬해 2월호에 특집으로 게재하였다.

     

    속간 무렵부터 이 잡지가 친일 논조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박희도는 징병제실시 발표에 대하여 1942513일자로 미나미() 총독과 이다가키(板垣)조선군 사령관에게 공개적으로 감사장을 보내고 이를 이 잡지에 게재하기 까지 하였다.

     

    19436월호에서 그는 [진심을 헌납하라]라는 글을 통해서"그러므로 현시의 반도 총후에서 국민의 헌납운동이 날로 치열화되고 있음은 기쁜 경향이지만 그럼에도 더욱이 중요한 것은 충군애국의 진심이 진정으로 그 헌납품에 들어있는가 하는 문제다……하물며 세계에 으뜸인 황군병사로서 제1선에 참가할 때 죽음 등을 고려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조국과 동포를 위하여 한 목숨을 헌납할 때 그 죽음은 자기 동포를 영원히 살리기 위한 죽음으로 실로 인간 최고의 영예인 것이다"라고 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하여 젊은이들의 '목숨을 헌납'하도록 촉구하였다.

     

    또한 19443월호에서도 [결전 비상의 때()----궐기하라 반도 청년]이라는 글을 실어 청년들의 전쟁참여를 독려했다.

     

    그는 이러한 문필활동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193796일 학무국 주최 시국 강연반에 참여하였고, 1943116일부터는 강원도 지역에서학병독려의 강연 행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만 그렇게 할 뿐 아니라 동료들의 이름까지 빌려 자신의 잡지를 통해 친일논설을 펴 일제의 신임을 얻기에 열을 올렸다.

     

    윤치영은 그의 회고록에서 {동양지광}에 실린 자신의 명의의 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변명하고 있다. 하루는 33인 중 한 사람으로 기미독립만세 사건에 가담하였던 박희도가 나를 만나자고 하였다. 그는 어떤 연유에서였던지 그 당시 총독부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경무부 잡지 {동양지광}(東洋之光)의 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양지광} 이번 호에 대동아전쟁 승전 특집을 냈는데 다른 지명 인사들의 것과 함께 나의 글이 실려 있다고 말하였다. 지금 일본은 1억 인구가 총동원이 되어 전쟁수행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조선의 유지들이 살아남는 길을 억지로라도 그들에게 협력하는 체 하는 길 뿐이어서 자기가 다 알아서 처리했노라고 하였다.

     

    박희도는 내 이름뿐만 아니라 백모, 현모, 이모, 신모 씨 등 다수의 이름을 본인들의 승낙 없이 게재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박씨에게 심한 항의를 하였으나 일제 전시하의 때가 때이니만치 명예훼손 소송 등은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윤치영의 20세기}, 189)

     

    박희도는 이외에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등 수많은 친일단체의 간부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도 해방 직전에는 일제의 패망을 감지하였던 것 같다.

     

    이에 대해서 윤치영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일제 말엽 대화숙에서 서슬이 시퍼런 감시를 받아 가며 일본 패망의 날을 기다리던 우리들을 가끔 찾아 준 박희도 {동양지광}(東洋之光) 사장은 총독부 경무부에서 들은 태평양전쟁의 전황과 일본군의 동향을 귀뜸해 주면서 자기는 기왕에 총독부 앞잡이 노릇을 하는 몸이 되었지만 후일 세상이 바뀌는 날 자기의 속마음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해 주기 바란다고 말한 일이 다시 기억난다. ({윤치영의 20세기}, 457)

     

    여기서도 그는 기회주의적인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박희도의 일생은 그 시대의 가장 주류를 이룬 사조에 쉽게 빠져 들어가 열성을 다해 일하다가, 그 사조가 일단 잦아들면 쉽게 포기하고 또 다른 사조를 찾아 뛰어들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운동의 최고봉이었던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였고, 그 후 사회주의 사조가 일어나자 {신생활}을 창간하여 동조하였으며, 1920년대 말경에는 신간회에 참여하면서도 자치운동에 기울었다가, 마침내 1930년대에 들어 일제의 대륙침략과 세력의 확장으로 독립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자발적으로 관제 운동인 황민화 운동에 뛰어들어 {동양지광}을 창간하여 친일논설을 펴고 내선일체와 전쟁협력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일제의 패배가 확실해 가자 총독부의 앞잡이노릇을 하지만 자기의 '속 마음 만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그의 '속마음'이 아무리 순수하다고 한들 겉으로 나타난 그의 친일행각 때문에 우리 민족이 입은 상처는 무엇으로 보상하겠는가?

     

     

     

     

     

     

     

     

    친일로 변절한 민족대표 ‘3을 아십니까

     

     

     

     

     

    [정운현 칼럼] 최린·정춘수·박희도 등독립선언서기초한 최남선도 포함

     

    친일잡지 창간, 운영...학병권유 연설도 

    그는 일제 말기 대표적 친일잡지인 <동양지광>의 발행인으로 활동했던 자입니다. 감리교 전도사 출신으로 YMCA 간사로 활동하다가 3·1의거에 참가한 그는 당시 33인 중 최연소자(30)였는데 미결구류 360일에 통산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후 중앙유치원 운영과 더불어 좌파 청년들과 함께 <신생활>이라는 주간지를 발행하면서 종래의 비타협·급진적 언론활동을 견지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1922년 말 <신생활> 필화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2년여 동안 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출옥 후 정춘수와 신간회에서 활동하던 그는 연정회활동을 통해 먼저 친일의 길로 들어선 최린 등과 교류하면서 점차 자치론으로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1934년엔 그 연장선상에서 한일 합동으로 조직된 친일단체인 시중회에 발기인과 회원으로 참가하였습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친일로 들어선 것은 중일전쟁 발발 2년 뒤 19391월 친일잡지 <동양지광>을 창간하면서부터였습니다. <동양지광>은 총독부의 비호 아래 친일논설 게재는 물론, 최린 등 유명 친일인사들을 동원해 강연회를 개최하거나 전쟁협력 목적으로 좌담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비단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동양지광사 주최로 시국좌담회를 주최하기도 하고 전속극단인 협동예술좌를 통해 신극(新劇) 황민화의 기수 노릇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자신이 일본은 왜 전쟁을 하는가’ ‘진심을 헌납하라등의 친일성이 농후한 글을 <동양지광>에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특히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강원도에서 학병권유 연설을 하였고,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 전쟁협력 단체에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얼마 뒤 불기소로 풀려났으며, 19529월 한국전쟁 기간 중에 병사했습니다.

     

    혹자는 말했습니다. 근대문학의 어머니로 불린 춘원 이광수와 역사학자이자 문필가, 출판인으로 이름을 날린 육당 최남선이 서대문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더라면 우리 역사는 더욱 자랑스러웠을 것이라고. 이는 민족대표 33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33인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변절자가 없었다면 우리 항일투쟁사가 참으로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당 이회영의 6형제 중 해방 때까지 단 한 명의 변절자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고 그래서 그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용서치 못할 민족반역자로 낙인'

    해방 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것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아마도 과거의 지나친 친일행각 때문에 나서서 행동하기가 어려웠으리라.

     

    19492월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할 무렵에 나온{민족정기의 심판}이라는 책에서는 [민족운동에서 황민화운동으로 전향한 동양지광 사장 박희도의 죄상]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변절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박희도는 과거 민족운동자의 한 사람으로 3·1 운동 당시 33인 중에 1인으로서 열심히 운동하던 자로서 한동안은 그의 명성이 자자하더니, 일본세력이 점점 강해짐을 본 그는 돌연히 방면을 돌려 일본에 아부하여 자기개성을 발전시키려고 과거의 투지와 절개를 초개같이 버리고, 또 동지를 배반하고 부귀공명을 누리려고 일제의 충신이 된 그는 황국신민화 운동을 철저히 함으로써 왜인(倭人)들에게 다대한 신임을 받았으며,……일제에 가장충견이 된 1인자로 그야말로 의식적인 일본의 적자(赤子), 황민(皇民)이었던 것이다……해방이 되고 건국이 된 오늘날은 그 모습이 가장 음흉하고 추잡한 민족반역자를 낙인 한 듯 해괴한 흉악상으로 보인 것이다. 머리털에서 발굽까지 변절하여 왜놈의 적자가 된 박희도는……민족적 견지로 보아서 용서치 못할 반역자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186187)

     

    그리고 이보다 앞서 19489월에 나온 {친일파군상}에서도 박희도를 '자진적으로 나서서 성심으로 활동한 자'로 분류하고, 그 중에서도 '친일을 하여 내선일체를 기하고 전쟁에 협력하여 일본이 승리할 시는 조선 민족의 복리를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의 대표적인 예로 거명하고 있다.

     

    그는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후, 한국전쟁 중인 1951921일에 세상을 떠났다.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新生活}, 1922

    {東洋之光}, 193944

    {민족정기의 심판}. 1949

    {친일파군상}, 1948

    윤치영, {尹致暎20世紀}, 1991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감리교인물사전 박희도 편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41). 박희도 : 시류 따라 기웃거린 기회주의자의 변절 행로 (김승태)

    이승규. “감리회, 교단 내 친일인사와 독립운동가 명단 발표 예배자료집”,뉴스앤조이, 2005

    김영식 (2008). [망우리 별곡한국의 碑銘문학 8] 민족대표 33인 한용운과 박희도 신동아(587)

    ·일운동비사(이병헌, 시사시보사, 1959)

    한국기독교사연구(김양선, 기독교문화사, 1971)

    한국기독교사(이영헌, 컨콜디아사, 1978)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전택부, 정음사, 1978)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한사람으로 33인 중 최연소자

        

     

     

     

    박희도(朴熙道, 1889-1951) 종교인.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황해도 해주 출신. 계근(桂根)의 아들이다.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기독교 목회자, 사상가, 월간 잡지 '동광'(동양지광)의 창립인, 주간 사장, 친일 연극단 '협동예술좌'순회 공연.징병 참여 연설, 친일 언론 활동

        

    해주 의창(懿昌)학교 보통과 와 고등과를 졸업

    1904년 기독교인,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와 연희전문학교 중퇴

    중앙유치원과 영신학교(永信學校)를 설립, 교감

    19166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지금의 서울 YMCA)의 회원 확대운동에 가담

    19186월 감리교 창의문밖교회 전도사

    9월에는 조선기독교청년회 회원부 간사 취임

    12월 초순 일본 유학생 대표 송계백(宋繼白)을 통하여 알게 된 2·8독립운동 계획과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선언을 듣게 되었다.

    19191월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원부 위원인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金元壁)과 의논, 각 학교 학생대표를 대관원(大觀園)에서 만났다. 이들은 국내 학생들을 중심으로 운동 전개를 꾀하다가 전기독교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것을 계획하였다.

    천도교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거족적인 민족운동 계획 추진, 회동하였으나 일시 좌절

    222일 이승훈(李承薰오화영(吳華英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台永안세환(安世桓) 등이 모인 비밀회의에서 힘을 모을 것을 최종 결정

    191931일 민족대표 33인의 1인으로서 독립선언문에 서명, 태화관 회의에 참석

    구금된 뒤 2년형의 옥고

    중앙유치원 원감, 잡지 신생활창간

    19221113호의 기사가 문제가 되어 3년간 함흥감옥에서 옥고

    1924년 말 출옥한 뒤 독립계몽운동을 전개

    1939동양지광사장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 활동

    1943년의 학병독려 강연

    광복 후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의 대상

    1948년 반민특위에 회부

    1952년 병사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에는 언론/출판과 친일단체에 선정

    2005년 광복 50주년 기념 자료집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에서 선정한 감리교 내 친일 부역자 명단 12명 중 1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 포함

     

    황해도 해주에서 박계근(朴桂根)의 차남으로 출생. 해주 의창학교에 입학하여 보통과, 고등과를 졸업하였으며 16세가 되던 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평양숭실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퇴학하였다. 1917년 영신학교(매동초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으며, 선교사 베커(A.L. Becker, 白雅德)가 교장으로 있던 협성보통학교(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으로 운영하던 초등학교)의 부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169월에는 장낙도, 유양호 등과 함께 정동교회 유치원의 분원으로 중앙교회에 중앙유치원(현 중앙대학교의 전신)을 설립, 운영하였다.

     

    3.1독립운동에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박희도는 3.1운동 당시 중앙교희의 전도사로 사무하였고(기독교미감리회 조선연회록에 의하면 1917년부터 창의문밖교회로 파송받았다), 191810월부터는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회우부 간사를 맡아 청년,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이 같은 지위를 잘 활용하여 33인 가운데에 기독교 측 참모로서 33인의 운동이나 학생운동의 주모자가 되어 연락과 회계를 담당하였다. 도쿄 한인기독교 청년회를 통해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던 박희도는 1919120일 경기도 이천읍교회에서 열린 겨울 지방 사경회에서 동석기를 만나 대화하면서 세계정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하와이 이민으로 미국에 갔다가 개렛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내리교회를 거쳐 남양교회에서 목회하던 동석기는 "미국 신문을 구독하는" 국제통 목사였다.

     

    박희도는 서울로 올라와 기독교청년회 학생부에 참여하고 있던 강기덕, 김원벽, 김형기, 주익 등 시내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학생 대표들을 소집하였다. 또한 217일 남감리회 소속 목회자였던 오화영, 정춘수와 만나 남.북감리교회 민족운동 세력 연대의 뜻을 모으고 즉시 동지를 모았다. 박희도는 미감리회 구역을 맡아 정동교회 전도사이자 기독신보주필인 박동완과 중앙교회 전도사 김창준, 해주읍교회 목사 최성모, 수원 삼일학교 교사 김세환 등을 포섭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서는 미감리회와 남감리회가 연합으로 미국 감리교 선교 백주년을 기념하는 연합집회를 열고 있었는데,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올라온 지방 목회자들은 박희도의 기독교청년회와 협성학교 사무실을 자주 찾았다. 또한 당시 서울에 올라와 있던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 신홍식을 통해 평북 오산학교 설립자였던 이승훈과의 만남이 219일에 이루어졌고, 이들의 만남을 통해 북장로회와 미감리회, 북쪽과 남쪽의 민족운동 세력이 연결되었다. 이와 같이 박희도는 3.1독립운동의 실무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그는 35일 명월관에서 다른 민족 대표들과 함께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2년을 복역하고 만기출옥하였다. 그는 출옥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무슨 별 감상이 있겠습니까. 감옥에 있으나 집에 나오나 늘상 우리 동포를 위하여 몸을 바치겠습니다. …… 나의 가슴에 차인 정성은 오직 가련한 우리 동포를 조금이라도 구원하여 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올시다."(동아일보, 1921. 11. 5)

     

    출옥 후 그는 한때 용두리교회에서 교역에 종사하기도 했으나 이후부터는 교역의 일보다는 사회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1923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교역에 종사치 못할 형편임으로 계속치 않기로 가결"되었다.

     

    그는 교육과 출판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김명식, 신일용, 유진희 등을 편집진으로 19223신생활(新生活)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신생활은 그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수차 검열과 삭제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192211월에 발간한 제13호 기사를 트집잡아 박희도를 비롯한 편집진들을 검거하였다. 결국 박희도는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함흥감옥에서 2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1924년 말경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그는 재건된 중앙유치원 사범과 교사로 있었으며, 1928년에 이 사범과가 중앙보육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으면서 초대 교장에 취임하여 1932년 임영신에게 자리를 넘겨주기까지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또한 그는 민족단일전선을 목표로 한 1927215일의 신간회 창립대회에서 간사로 선임되었으며, 192971일의 전국복수대표자대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 후보로 선임되어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민족운동을 위해 애쓰던 박희도는 1930년대 후반부터 친일"매국의 길을 걸었다. 193796일 학무국 주최 시국강연반에 참여하였고, 1943116일부터는 강원도지역에서 학병모집 독려강연반에 참가하였다. 19391월부터는 잡지에서의 조선어 사용 전폐가 최초로 실시된 동양지광(東洋之光)을 창간하여 황도문화 수립에 앞장섰다. 그리고 국민총력조선연맹(1940. 10. 16) 참사, 조선임전보국단(1941. 10. 22) 평의원, 조선언론보국회(1945. 6. 8) 참여 등 수많은 친일단체의 간부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그는 "친일을 하여 내선일체를 기하고 전쟁에 협력하여 일본이 승리할 시는 조선 민족의 복리를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의 대표적인 예로, 일제에 대해 "자진적으로 나서서 성심으로 활동한 자"로 분류되어 1949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다. 조사에서 풀려난 후 그는 한국전쟁 중인 1951921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