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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정인과 (鄭仁果)

草霧 2013. 12. 6. 10:51

 

 

 

 

종교

 

 

정인과 (鄭仁果, 창씨명 德川仁果, 18881972)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연맹 결성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정인과(鄭仁果, 일본식 이름: 德川仁果 또는 悳川仁果, 1888년 1월 9일 ~ 1972년)는 한국장로교 목사로, 본명은 정의종(鄭顗鍾, 개명 전 이름)이며 본적은 평안남도 순천군 은산면이다.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평양의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13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1921년 캘리포니아 주의 산 앤셀모에 위치한 샌프란시스코 신학교를 졸업했다.

임시정부 활동

정인과가 미국에서 신학교를 마칠 무렵 3·1 운동이 일어나면서 곧바로 상하이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해외에 있던 교포 단체에서도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게 되는데, 북미 지역에서는 안창호를 특파원으로, 정인과와 황진남을 수행원으로 상하이에 보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을 맡았고, 정인과와 황진남은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미국령 교민 대표로 임시정부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부의장과 외무차장을 맡아 활동하였으나 임시정부 내의 여러 계파 간 갈등이 드러나고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이탈하는 세력이 늘어났다. 정인과도 1920년 임시의정원 의원직과 외무차장직을 사임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 복귀 후에도 유학 생활을 계속하여 1922년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사를, 1923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콜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교육학을 공부하였다.

 

1924년 정인과는 약 11년 간의 해외 유학과 임시정부 활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임시정부 활동 전력으로 인해 일본 경찰은 정인과를 요시찰 인물로 분류하여 감시하였으며, 함경북도 성진에서의 강연 내용을 문제 삼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류된 일도 있다. 이 당시 정인과의 고향인 평남 순천의 순천경찰서는 그가 배일사상을 갖고 있고 비밀결사 조직의 우려가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 말기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직전 시국이 경색되면서 수양동우회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기 앞서 3·1 운동 이후 어느 정도 묵인하고 있던 민족개량주의 노선의 단체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많은 지식인들이 전향을 하게 되었다. 정인과는 안창호 계열인 수양동우회의 지도적 인물로서 구속되었다가, 역시 이 사건으로 체포된 뒤 전향한 오문환의 회유를 받아들여 풀려났고 이후 본격적인 친일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정인과가 속해있던 교파인 장로교1938년 신사참배 강요에 호응해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했고, 이듬해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조직적인 전쟁 지원과 황민화 운동에 나섰다. 물론 주기철 목사, 한상동 목사처럼 십계명의 우상숭배 금지명령을 근거로 저항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투옥, 목사직 면직등의 탄압을 받았다. 장로교회에서는 친일활동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총회 중앙상치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정인과는 총간사로 취임했다. 정인과는 각계 인물들이 함께 결성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부 위원으로도 참여했고, 《매일신보》에 '일본적 기독교'로의 조선 기독교 개조에 대한 글을 싣거나 《동양지광》 주최의 영미타도 좌담회 참석, 《조광》 기고 등으로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 국방헌금 납부를 독려하며, '조선예수교장로교도 애국기 헌납 기성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일제조선성서공회 총무 정태응을 간첩 혐의로 구속하고 정인과에게 성서공회를 넘기거나, 기독교계 언론을 모두 폐간시킨 뒤 유일한 기독교 신문으로 《기독교신문》을 창간할 때도 기독교신문협회 회장으로 정인과를 지명하는 등, 그에 대한 신임을 보여주었다. 기독교신문은 1942년 천장절에 창간호를 냈고, 정인과는 이 신문의 발간 목적이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진전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반민특위 체포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정인과는 대표적인 친일목사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광복 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개신교 목사 가운데서는 가정 먼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반민특위 활동이 친일파들과 결탁한 이승만 초대대통령에 의해 활동을 방해받는 과정에서 풀려났으나, 반민특위 조사관들이 정인과에게 예수를 배반한 가룟 유다에 빗댄 '대한의 유다'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로 지나친 친일 행적으로 인해 개신교회에 복귀하지 못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기타 부문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종교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 수양동우회 사건
  • 기독교신문
  •  

     

    198819-- 평안남도 순천군 은산면 아버지 정민직 어머니 박은감의 차남 으로 출생.

    1902--기독교로 입신.

    19041-- 추평리 예수교 학교 졸업.

    190766--숭실학교-예수교중학교 4회졸업. 평양 숭실대학 입학.

    1911524--숭실대학 제3회 졸업. 숭실중학교 교사로재임.

    19128--중국으로

    1913--도미 유학.

    1913~1914--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 태평양대학 보습과

    19131013--미국에서 흥사단에가입. 안창호와의 친밀한관계시작. 후일 흥사단의 단기가를작시. 도산일기에는 마음속의 친구(심우)라고표현.

    1914~1917--로스엔젤레스 성서학원 에서 학습.

    1917~1919--센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학습.

    191931--한국에서 3.1독립운동

    191945--안창호,황진남 등과함께 중국 상해도착

    191977--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미국령 교민대표.

    191978--의정원 상임의원회 교통위원장 피선, 대한적십자사 상의원, 임시의정원 부의장.

    19199--미국령 대의사.

    1919911--상해 임시정부 국무원 외무차장

    19208--미국 상원,하원의원 동양시찰단 래중시 영접, 한국의 독립을 강조.

    192010--상해임시정부의 모든직책 사임, 도미하여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연구.

    1921428--샌프란시스코 신학교 졸업.

    1921916--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만국 장로교대회에 임종순, 맥큔블레어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

    1921--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

    192259--프린스톤 신학교 졸업, 신학사.

    1922--프린스톤대학교 박사원 입학.

    1923713--프린스턴 대학교 졸업, 문학 석사.

    1923324--뉴욕 컬럼비아대학교 사범대학 박사원 입학.

    1924616--박사등록을 포기하고, 미국을 떠나 스코트랜드 글라스고에서개최된세계주일학교대회에 남궁혁과 함께 한국대표로참석.

    192411--상해를 경유하여 한국에 귀국.

    192411--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 주일학교 부총무.

    19251021--2회 전선주일학교대회 주관.

    1926--서울 새문안교회 동사목사.

    1928324~48--예루살렘에서 개최된 국제선교협의회에 마포삼락,시흥우,양주삼,김활란등과한국대표로 참석.

    19289--장로교 총회 농촌부 부장.

    1929--농민 생활사 사장, 총회 중앙신용조합 조합장.

    19295--신우회 조직에 참여.

    19299--조선예수교 연합공의회 농촌사업협동공의회 실행의원.

    192910--평양 제3회 전선주일학교대회 주관

    19301--함중노회 주최 주일학교대회에서의 강연, 성진경찰서에 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

    1930331--경성 지방 법원에 송치.

    193045--경성지법에서 성진경찰서에 재조사지시, 얼마후 불기소처분.

    19309--장로교 총회에서 매년 10월셋째주일을 농촌주일로 지키게함.

    1932--조선 예수교장로회총회 상설 종교교육부신설, 그총무역임.브라질 리오데자네리오 세계주일학교대회 한국대표로 참석.

    193210--(종교시보사)사장.

    1933~34--지방 교사강습회 전국적으로추진.

    19337--전필순이 (기독신보)사의 사장이되면서 정인과 주도의 서북교권에 도전하는 비서북계의 기관지로 전환시킴.

    19339--장로교 총회 농촌부 상설, 배민수총무 장로교총회에서 찬송가 편찬 작업 종교교육부가주관.

    1933--장로교총회의 중요간행사업-목사설교집, 50년약사,성서주석-총괄주도.

    1934627~30--(동아일보)(가경50년 한국교회 발전사)연제

    19346--전선목사대회 장로교 농촌부와 함께 종교교육부 주최로 개최.

    19349--농촌사역 기금문제로 미국에 다녀옴. 배민수와의 관계악화.

    19351--종교교육부에서 (신편 찬송가) 편찬 작업.

    193512--(신편찬송가) 장로교전용으로 종교교육부에서 간행.

    1935--비 서북계 구왕삼과 경남노회의(신편찬송가)비판.

    19359--장로교 총회장 으로피선, 비서북계의 적극신앙단,김영주의 창세기 저작문제,김춘배의여권문제, (아빙돈 단권주석)문제,감리교회와의 교계예양조치문제,연합고의회 에서의 탈퇴문제,등을결정.

    1936--조선총독부 국제명징정책 강행.

    193612--조선사상보호관찰령 발효.장로교총회에서 (종교시보),(농촌통신),(면려회보)등을통합하여 (기독교보)창간,그편집인.

    19375--동우회사건에연루되어 피체, 총회종교교육부 총무사임,일제에의한 국가 총동원령발효,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해체.

    19381--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송치.

    19385--면려회해체, 서울에서 친일적인 기독교연합회 총독부에의해 조직.

    19386--일부 동우회 회원 전향성명, 정인과 여기에 불참하고 항거. ymca,ywca연합회 해체,전국주일학교대회 활동정지.

    19389--장로교총회 신사참배 결의.

    19391--일본 제국의회에서 종교단체법 통과.

    19399--보석중 총회에서 종교교육부 총무로 재선, 그러나 사무협동형식. 주일학교 진흥 3개년 실행방법 계획, 총회에서 결의함에따라 전국적으로 실시. 일제에의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연맹 결성, 정인과 불참.

    193912--경성지방법원에서 언도공판, 징역2년과 집행유예3년구형.

    19409--총회상치위원회 설치,사무국 총간사로 피임.

    19414--기구개편한 조선성서공회 총무로피선.

    1941--한국 장로교회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보존하기위한 조선 기독교 사료전람회 개최준비, 정인과 총괄.

    1941522--동우회 관계자 불복하고 상고.

    1941117--경성 고등법원 상고심에서 동우회 관계자 전원 무죄석방. 정인과가주재한 일본 변호사의 변호는 지금도 잘 알려져있음.

    19424--총독부의 언론 통제로 (장로회보)폐간.

    19425--총독부에의하여 기독교 신문협회 설립. 조선 성서공회 적산관리령에의해 일제에귀속.

    19429--일제에 의해 조선기독교 사료 전람회 개최 무기연기.

    194211-- 일제에 의하여 각 교파 출판사업의 통합, 기독교 출판협회 조직.정인과 그과정에서 한국교회 재산확보에 진력.

    19435--장로교총회가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변형, 정인과 이변형과정의 불법성을 치토, 항거.감리교 일부인사와 비서북계 장로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혁신교단 설립,정인과와 한국교회의 반발로 얼마후 해체.

    19439--평북노회장 김진수와 함께 장로교 정통성 보존을 위한 교단측에 끝까지 저항하여 투쟁.

    19448--교단계인사들 교단을 해체하고 장로교 총회에복귀.

    194412--교단계 인사들 다시 일본기독교 장로교단에 병합, 정인과 상치위원회 총간사로서 끝까지반발하여, 불법성을 비판하고 저항.

    19456--한국 모든교단과 교회가 일제의 황도적 교회에병합됨.

    1945815--광복, 고려파계선교사 하밀턴,헌트 등이북 피난교역자 등 이찾아와 여러가지 제안에 사양.

    1948--대한민국 해군1기생으로 3남 정삼윤 입대. 5남 정삼도 육군입대.

    19492--반민특위에의하여 양주삼,정춘수 등과함께 검거.

    19493--재판에송치.

    19498--무죄 석방.----이때까지 정인과의 집에 서재필 박사와 함께 사무실을 사용.

    1950----6.25전란,사돈 현상윤의 납북, 5남 정삼도의 육군장교로 전사.

    19537--서울환도, 방우린보육원 설립, 전쟁고아들을돌봄, 후에 신희망보육원으로 개칭.

    195311--서울 특별시장 김태선으로부터 보육사업공로로 표창.

    1954--정인과 보육사업부지--한경직,배민수,강신명 등의참석하에 숭실대학교에 희사 협정서 작성. 미군의도움으로, 한국최초 비행기술학교 설립을 추진중, 고리부채에 전재산 채권단에 넘어감.

    1960--경기도문산 법원리의 장로교회에서 3년간 목회.

    1963--교회 사임, 차남 삼현 한국최초( 혼혈아학교) 설립을 추진중 병사.

    1972--서울에서 행방불명 사망.

     

     

     

     

     

     

     

     

     

     

    1938년에 일제의 강요에 따라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한 장로회 총회는 이듬해 제28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하고, 이 연맹 이사장으로 윤하영 목사, 총 간사로 정인과 목사를 선임하여 '종교보국'이라는 미명하에 적극적인 부일협력에 나섰다. 다음은 1940년 정인과 목사가 총회에 보고한 이 연맹의 사업 내용이다.

     

    우리 장로교 교우들이 다른 종교 단체보다 먼저 시국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승, 무운장구 기도, 전사병 위문금, 휼병금, 국방헌금, 전상자 위문, 유족 위문 등을 사적(私的)으로 공동 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하에 숫자로 표시 되었습니다……애국반원들의 활동의 소식을 들을 때……'이만하면' 하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29회 회록}, 1940, 8794)

     

    이는 장로교가 다른 교파나 타종교와 경쟁적으로 부일협력을 하여 그 성과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말이다. 이러한 장로교 부일협력의 중심적인 인물이 바로 정인과 목사였다. 그러면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미주 대표로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

    정인과의 본적지는 경성으로 되어 있지만 평남 순천 태생으로 평양숭실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1911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잠시 숭실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38월사임하고, 미국에 건너가 유학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1919년 산·엔셀모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그가 미국에 있을 때에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고 그 해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3·1 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미주의 교포단체인 국민회는 "원동에 대표를 파송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에 봉사"하게 한다는 결의를 하고 이에 따라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에서 안창호를 특파원으로 파견하고 정인과, 황진남이 그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들은 191945일 미국을 출발하여 마닐라를 거쳐 525일 목적지인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안창호는 이미 상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선임되어 있었기때문에 628일에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살림을 맡게 되고, 안창호를 수행했던 정인과와 황진남은 77일에 열린 제5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미령(美領) 교민 대표로 의원이 되어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인과는 818일에 열린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당시 부의장이었던 신익희가 법무차장으로서 업무 때문에 부의장을 사임함에 따라 부의장 보선 투표에서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당시 임시 의정원 의장이던 손정도 목사는 건강이 좋지 않아 부의장인 정인과가 회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외무차장을 맡아 19208월 미국의원단 동양유람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여운형 등과 함께 이들에 대한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내분이 격화되고 독립에 대한 전망이 흐려지자 192010월경 외무차장직과 임시의정원 의원직을사임 (그의 사임은 1921318일 제1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수리되었다) 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인과는 임시정부에서 떠나기는 하였지만 바로 국내로 들어왔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 다시 건너가 1921년 프린스턴 신학연구과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고 1923년에는 같은 대학 정치사회학과에 들어가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그는 콜럼비아 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다가 영국과 중국을 거쳐 192411월말 경 입국하여 1925년부터 조선 주일학교연합회 협동 총무를 맡았다. 그 때부터 그는 각종 강연과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인 국내활동을 하게 되었다. 19241118일자 {동아일보}는 중국남경(중국어로)발로 정인과에 대한 소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정인과 씨 환영.……12년 전 미국으로 건너가 많은 풍상을 겪으며 학업에힘쓰던 정인과(鄭仁果) 씨는 재작년 미국 가주(加州)에서 신학(神學)을 졸업하고 다시 프린스턴대학에서 더욱 연구를 가하야 신학사(神學士)와 문학사(文學士)의 존귀한 학위를 얻고 다시 교육학을 연구하다가 금년 여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만국주일학교 대회에 참석하고 동아의 그리운 땅을 밟고저 나오던 길에 상해에 들렸는데 동지의 간곡한 권고를 못이겨 할 수없이 길을 멈추고 중국에 얼마 동안 있게 되었는 바,……씨는 년 전 상해에 와서 임시정부의 중요한 직임을 띠고 많이 노력한 일도 있었다더라.

     

    이러한 전력을 가졌기 때문에 정인과는 일제 경찰에 의해 평소에도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성진에서 개최된 유년주일학교대회 겸 부흥회에서 한 강연 내용이 문제가 되어 1930125일에 보안법위반 혐의로 3일간 성진경찰서 구류되어 조사를 받고 불구속으로 풀려났다가 그 해 5월에야 경성지법에서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때 그의 고향인 평남 순천경찰서에서 작성한 [피의자 소행 조서]에서는 그를 "성품이 담백하고 온순하지만 강한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다"라 한 뒤, "전과는 없으나,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어 비밀결사 조직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요시찰인 (要視察人)에 편입되어 있는 자"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소극적이지만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인과 목사가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 것은 19376월 이른바'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취조를 받은 후부터로 알려져 있다. 동우회 사건이란 일제가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앞두고 조선 지식인 내지 지도자들을 적극적인 정책 협력자로 만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그간 묵인하거나 방조하였던 민족개량주의 노선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사건이었다.

     

    정인과는 미주와 상해 등지에서부터 안창호의 권유로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국내에 들어와서도 같은 계열인 동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지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이미 친일파로 전향하여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던 오문환의 도움으로 풀려나 일제 경찰의 비호를 받으면서 그도 적극적 친일활동에 가담하였다. 이에 대하여 해방 후 어떤 목사는 익명의 기고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기타무라(北村)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장으로 영전되자 H의 활동 무대는 서울로 옮겨졌고 대담한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전쟁 중 선교사가 쫓겨나자 대영 성서공회와 기독교서회를 작난했고,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종교 육부의 C를 무사히 석방시켜준 구실로 그를 황국신민으로 전향케 하여, 군기헌납운동에 열광케 했다. 여기서 H는 오문환이요, C는 정인과 목사를 지칭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장로교는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듬해인 19399월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고, 일제의 이른바 '국책 수행에 협력'할것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협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이듬해 일제의 지시에 따라 총회 중앙상치위원회를 조직하고 총 간사로 정인과 목사가 취임하였다. 이 상치위원회는 194011월 성명과 함께[장로회 지도요강]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체의 본의에 기하야 당국의 지도를 준수하고 국책에 순응하야 과거 구미(歐美)의존의 사념(邪念)을 금절(禁切)하고 일본적 기독교의 순화 갱정에 노력하는 동시에 교도로 하야금 그 직에서 멸사봉공의 성을 봉하야 충량한 제국신민으로서 협심육력(協心戮力) 동아질서의 건설에 용왕(勇往) 매진키를 기함({매일신보},1940.11.10)

     

    이어 실천방책으로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을 규정하고 교회의 헌법, 교리, 교법, 의식 등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여 민족주의적 색채를 배제하고 순정 일본적 기독교로 할 것과 찬미가 등 전기독교 서적 출판물을 검토하여 일본 국체에 배치되는 자구를 개정할 것 등을 규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이미 일제측이 마련한 것을 발표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제측의 요구대로 정인과를 중심으로 한 상치위원회는 이를 충실히 수행하여 교회의 본질까지도 내팽개치고 교회를 일제의 침략정책에 따르는 어용교회기구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특히 정인과가 1942511일 국민총력조선야소교장로회총회연맹 총 간사 도쿠가와(德川仁果)라는 창씨명으로 각노회 연맹 이사장에게 보낸 [헌종(獻鐘)보고서 독촉의 건] 이라는 공문은 위협적 언사까지 사용하면서 일제에 협력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제(首題)의 건에 관하여 424일부로 공문을 발하였던 바, 55일까지 다수 보고서가 도착하지 않기 때문에 전()노회의 보고 통계서를 작성함에 곤란할 뿐더러 당국 관계 방면에도 크게 영향이 되는 동시에 귀노회연맹의사무처리상에도 여하한 영향이 미치게 될 점까지 착념하여,……귀노회 연맹의 헌종 보고서를 꼭 제출하도록 주의하여 주시기를 절망(切望)하여 마지않는바 입니다. ({기독교신문}, 1942. 5. 20)

     

    한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회위원으로 활약하던 그는 {매일신보}194193일부터 5일까지 3회에 걸쳐 기고한 [일본적기독교로서-----익찬일로의 신출발]이라는 글에서 장로교의 친일협력 상황을상세하게 소개하면서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과거 50년 동안이나 구미사상에 교착되었던 조선기독교가 불과 34년간에 그 거단(巨團)을 움직여 시국의 기치 아래 일체 동원이 되도록 기구가 혁신되어 감은 멸사봉공의 정신을 함양해 온 교단으로서 현명한 당국의 선도와 지도적 원리를 일단 해득하게 될 때에 당국 신뢰의 추세는 실로 창류(漲流)의 감을 금치 못한다……그렇다고 해서 자화자찬으로 우리는 결코 이에 만족치 아니한다.

     

    앞으로 일보 일보 내선일체의 철저화에 최후적 단계에 이르도록 계속 노력하려 하는 바인즉 사회 각 방면의 편달과 당국의 끊임없는 선도를기대해 마지아니한다.

     

    , 부일협력을 자랑으로 여기고 일제의 적극적인 간섭을 자청할 정도로 그는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동양지광} 19422월호 특집'영미타도좌담회'에 참석하여 [·영인의 종교정책]을 발표하고, {조광}19422월호에도 [필승의 신념]이라는 글을 게재하여 친일논설을 폈다.

     

    당시 일제 경찰은 정인과를 매우 신뢰했으며 또한 비호했던 것 같다. 한때 신사참배 문제로 60일 동안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전필순은 그때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신문할 때 사유를 알게 되었는데 이러했다. 만주에 있는 선교사 헌트(韓富善)씨와 결탁해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체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니 그 장본인을 지명수배해서 잡아가두어 그 일을 좌절시키라는 상부의 명령이 내려져 구속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의 인물은 정인과 씨인데 장본인은 나를 위시한 모모 인사들이라고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 주임 사이가(齋賀)라는 작자의 설명이었다. 그는 또 정인과 씨와 사이가 좋아지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용한다는 것도 고려할 일이지마는, 여하간 분노가 들끓어 치솟던 것만은 사실이었다.({목회여운}, 97)

     

    성서공회도 영국인 홉스 총무가 떠난 후 정태응 총무가 맡고 있었으나 일제당국은 그를 간첩혐의로 검속하고 194141일부터 정인과에게 맡기도록 지시하였다가, 이듬해 523일자로 적산으로 압류하고 말았다.

     

    일제가 모든 기독교계 신문 잡지를 폐간시킨 후 19424월 유일한 교계언론으로 {기독교신문}을 창간할 때도, 경기도 경찰부 고등경찰과장 사노 (佐野吾作)는 정인과 목사를 이 신문의 발간 주체인 기독교신문협회회장으로 지명하였다.

     

    이것도 그가 얼마나 일제 경찰의 신임을 얻고 있었나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만큼 그는 일제 경찰에 철저히 '순응'하여 비호를 받았던 것이다. 이 신문은 1942429일 소위 천장절에 창간호를 내게 되는데, 정인과는 이 신문의 창간사에서 발행 목적과 강령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런고로 본보(本報)는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진전에 기여하려고 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취의(趣意)하에 본보는 (...) 등 강령을 실행하려 한다.

     

    1. 반도 기독교 내 국민총력운동의 강화

    1. 각교파 간 돈목(敦睦)의 기도(企圖)와 각파 간의 연계 합동의 추진

    1. 건전한 신앙의 발달과 교화기능의 증진

    1. 종교의 국민정신작흥과 국민사상 계도

    1. 상의하달(上意下達)과 하정상통(下情相通)의 원활

    1. 필승체제 확립에 관한 계도(啓導)

    1. 내선일체의 완성과 국어(일본어) 생활의 철저

    1. 국민 개로(皆勞)

    1. 부인 계발

    1. 교내 여론의 통일 지도

     

     

     

     

    이 신문은 그 첫 호부터 이러한 목적과 취지에 충실하여, 해방이 되기까지 그야말로 기독교계 부일협력의 유일한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정인과 목사는 이러한 적극적인 친일행각 때문에 해방 후 기독교 목사로서는 제일 먼저 1949222일에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이에 대하여 {반민자죄상기}(1949)['유다'의 직계 정인과]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22일 특위는 8·15 전 일제에 충성하는 데 민족과 신앙을 판 새로운'유다' 정인과를 체포하였다. 기독교 신자로서 교회 목사로서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주께 영광이 있으라' 라는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던 목사 정인과는 배신자로서 '유다'도 놀라게끔 전쟁 말기에 온갖 매족 · 매교 행위를 하였으니 기독교 대신 신도(神道)니 황도(皇道)를 모시고 기독교 총진 회장이 되어 신도배 (神道輩)들과 손을 잡고 신궁참배를 한다고 숨이 턱에 닿도록 남산 돌층계를 오르내렸으며, 십자가 앞에 수난의 미사를 올리는 양 같은 교인들을 강제로 끌고 나가 신궁참배를 시켰다.

     

    여기서 한 수를 더 떠 헌금헌납운동을 일으키고 신궁참배를 반대하는 교인들을 '비국민'이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니 '참회를 하라'고 도리어 꾸짖고 대들었으며, 신궁참배 않는 교회는 그 교회당까지 일제와 손을 잡고 폐쇄 혹은 팔아먹기까지 하였다.

     

    '신궁을 참배하자', '성전(聖戰)에 헌금 헌납을 하자','신도와 황도를 모시고 이 앞에 고개 숙여 기도를 하자'고 설교하기에 목이 쉴 지경이었으며 여기서 더욱 광신에 들떠 '미소기 (목욕제계하고 악을 제거한다는 의식----인용자)를 한 번 해 보지' 하고 나서기까지 하였다.

     

    이토록 기독교를 팔고 민족을 파는 데 애쓴 대한판 (大韓版) '유다' 정인과는 지금 죄의 심판을 앞두고 신궁 대신 철창 안에서 무슨 기도를 또 하느라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지나친 친일행각 때문에 반민특위에서 석방된 후에도 교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경기도 파주, 송탄 등지에서 외롭게 은거하다가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한국 교회 친일행적 말할 때 됐다

      

    CBS-TV 8·15특집 다큐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해방 이후 59년간 금기시 돼왔던 한국 기독교의 친일 역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CBS(기독교방송) TV본부가 8.15 특집 다큐멘터리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PD 김동민)'를 통해 그들의 친일 역사를 최초로 방송, 파장이 예상된다.

        

     

    CBS-TV 8·15특집 다큐멘터리 '한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타이틀. CBS-TV

      

    특히 교단 총회장과 지도급 인사였던 목사들이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심지어 교회 종까지 떼어다 바쳤으며 십계명과 정면 배치되는 신사참배를 하면서 황국신민사상을 전파하고 기독 청년들을 전쟁에 내모는 등 적극적 친일 행위를 한 것이 드러남에 따라 친일 목사에 대한 재평가 및 한국기독교의 정통성 문제 등에 대한 논란이 빚어질 전망이다.

     

    김동민 PD(35·시사 프로그램 'CBS저널' 담당)12"CBS저널에서 '한국교회, 친일의 추억'이라는 꼭지를 진행했다""정치권의 친일진상규명 논란과 네티즌에 의한 친일인명사전 모금운동 등의 흐름 속에서 한국 기독교의 친일문제를 60분 짜리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게 됐다"고 제작 배경을 설명했다.

     

    PD는 또한 "기독교계가 금기시 했던 친일 행위에 대해 기독교방송이 스스로 보도한다는 게 의미가 있다""한국기독교가 친일에 대한 자기반성을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는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채널 162)을 통해 네 차례(13일 밤 1130, 14일 낮12, 15일 낮12·12) 방송된다.

     

    친일 목회자가 교단 지도자로 추앙 받는 한국교회... 친일문제 금기시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제작팀은 친일 목회자들이 교단의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친일행위에 대해 회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 목회자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친일이었으며,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강변하며 교계 지도자로 건재했다. 다음은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방송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16명이 기독교 지도자일 정도로 기독교는 19193·1운동 당시까지 자주독립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일제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벌이며 파쇼화 체제로 돌입, 조선인에 대한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하면서 기독교는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교리를 어기고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

        

     

     

    1943년 일본 나라(奈良)신궁 참배 후 한국 목회자들의 기념사진. CBS-TV

      

    신사참배 강요에 가장 먼저 항복한 교단은 감리교였다. 감리교의 양주삼 초대 총리사는 1936년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또한, 마지막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기독교 최대 교파인 장로교마저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면서 기독교의 친일 행위가 본격화됐다.

     

    당시 장로교총회 부회장이었던 김길창 목사는 각 노회 임원들을 인솔해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왔다. 또한 일제가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1940년대에는 장로교를 비롯한 한국 교회는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교회 종()을 떼어다 바쳤다. 심지어 교회를 통폐합 한 뒤 교회 건물과 부지를 일제에 상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상해 임시정부의 외부차장을 지내다 귀국한 정인과 목사는 친일 성향의 기독교 신문을 창간하고 교회의 헌법 교리 의식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등 친일 인사로 변절했다. 일제는 예수를 왕으로 표현하거나 재림에 대한 찬송가를 일체 금지시켰으며 민족혼을 고취시키는 찬송 또한 부르지 못하게 하는 등 교회에서는 찬송가와 함께 기미가요가 울려나왔다.

     

    신사참배를 가장 먼저 결의한 감리교는 1940년 감리교 혁신안을 발표하면서 한국 민족은 일본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이른바 내선일체론에 가담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정춘수 감리교 감독은 교회의 철문을 뜯어 헌납하고 교회 통폐합을 실시해 일제의 전승을 위한 물질 지원에 앞장섰다.

     

    한때 독립운동가였던 박희도 전도사는 1939<동양지광>이라는 친일잡지를 창간한 뒤 이 잡지를 통해 정인과, 전필순 등 친일파 교계 지도자들이 일제의 전쟁을 옹호하고 기독 청년들을 전쟁참가를 독려하도록 도왔다. 이처럼 일제 초기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일제 말기가 되면서 기독 청년을 비롯한 조선의 젊은이들을 일제 침략전쟁에 내모는 친일 주력인사들이 됐다.

     

     

    친일 목사인가 독립유공자인가? 민문연, 독립유공자 이승길 목사 재심청구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2월 국가보훈처에 20명의 독립유공자에 대한 재심을 요청했다. 이들 재심 대상자에 이승길 목사와 김응순 목사가 포함됐다. 이 목사는 장로교 총회장과 평양노회 등의 노회장을 지낸 인물로, 1910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105인이 구속된 사건에 가담한 공로가 인정돼 독립유공자가 됐다.

        

     

     

    장로교가 헌금해 만들어진 일본군 전투기 '조선장로호' 신문 보도 사진 CBS-TV

     

     

    이승길 목사의 소속 교단 대학인 총신대학교 백년사는 이 목사가 친일파 오문환에게 포섭된 것으로 기록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장로교를 회유하기 위해 평양기독교 친목회를 이용했는데, 친목회원이던 이승길과 김응순 등은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변절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일본에서 발행하던 기독교신문 '복음신보'19388월 이 목사가 교회에 국기게양대를 최초로 세운 인물로 소개하며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 군인들에게 의연금을 모아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장신대 김인수 교수는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주동한 인물로 이 목사를 지목하고 있다.

     

    이 목사는 폐교된 평양신학교를 다시 개교시키면서 1941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총신대 백년사에서는 이 목사의 평양신학교는 채필근, 오문환 등 친일세력이 학교를 장악한 친일교육기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인수 교수는 평양신학교가 "복음이 우선이기 보다는 일본 제국주의 천왕이 앞에 나오게 되기 때문에 변질된 신학교"라고 지적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평양신학교는 일본적 기독교의 사역자 양성기관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도 평양신학교가 일본화에 합당한 기관이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평양신학교가 순수한 교육기관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또한 친일파였다면 어떻게 해방 이후에 김구선생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있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이 목사의 아들로 광복회 인천지부장을 지낸 이준경 장로는 자신의 부친을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격분하고 있다.

     

    친일 목사들 이승만 정권 거치면서 교계 지도자로 군림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면서 친일청산이 무산됐듯이 기독교계 내의 친일청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친일 목사들이 이승만 정권과 군정을 거치면서 교계 지도자로 군림하게 된다.

     

    감리교 초대총리사를 지내면서 시국연설 등을 통해 황민화 정책에 앞장섰던 양주삼 목사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지만 곧 무죄로 풀려난다. 해방 후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양 목사는 6.25 당시 납북돼 현재 행적을 알 수 없다.

     

    시국강연 등을 통해 전쟁참여를 독려한 장로교의 전필순 목사는 친일활동에 대한 신임을 물었고 교인들은 '다 같이 죄를 범했는데 누굴 돌로 칠 수 있겠냐'며 신임에 동의했다. 전 목사는 해방 이후에 총회장을 지낸 것을 비롯해 연세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1938년 장로교 27차 총회 총회록에 실린 신사참배 결의문. CBS-TV

     

     

    일제 치하에서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지내며 친일 활동을 펼쳤던 김길창 목사는 반민특위로부터 황민화정책의 수뇌부 역할을 한데 대해 조사를 받았지만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김 목사는 '말씀따라 한평생'이라는 회고록에서 친일 활동은 교회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고 해명했다.

     

    김 목사는 해방 후 고향 부산에 내려가 중·고등학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설립하며 교육사업가와 지역유지로 등장하며 교계의 노회장을 지냈다. 고신의 전호진 총무는 "(김 목사는) 그야말로 학교의 황제로 군림했으며 교주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다""친일,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어른이 해방 후에 교계 주도적인 역할 (하는데 대해) 교인들은 실망했다"고 밝혔다.

     

    성결교는 일제의 강요의 의해 자발적인 형식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는 등 교리에 대한 폄하 등의 문구가 담긴 성결교 해산 성명서를 발표한다. 당시 성결교 총회장 이었던 이명직 목사는 성결교 해산에 앞장섰으며 교단 해체 이후에도 일제 부역에 협조했다. 그러나 성결교 인물전에서 이 목사는 과()보다 공()이 많은 위대한 인물로 기록돼 있다.

     

     

    고 한경직 목사 "신사 참배한 죄인"이라고 고백교단 차원의 공개적 회개는 전무

    "저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앞에서 죄인이며 신사참배도 한 사람입니다

     

    1992년 당시 영락교회 원로 목사이던 고() 한경직 목사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 축하자리에서 이처럼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한 목사의 친일 고백은 교계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충격을 주면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지만 한국교회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는 지난 2002년 평화통일남북공동기도 주일을 맞아 자신의 조부인 고 조승제 목사의 부일 행적을 열거하며 교회와 민족 앞에 저지른 죄를 고백한다고 밝혔다. 조승제 목사는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 장로교단이라는 어용교단 창설에 협력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한신대학교 이사장과 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 출옥한 기독교 성도들. CBS-TV

     

     

    조헌정 목사는 "(조부의 친일행위에 대한 고백에 대해) 저 자신에게 괴로운 부분이었고 가족들에게, 자녀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하는 아픔이 있다""당시 많은 지인들과 목사들이 일제에 항거해 투옥과 죽음을 당한 것을 생각할 때 일제 전쟁의 승리를 빈 조부님의 부일 행각은 민족의 지탄이 되는 중차대한 죄임을 고백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교단 차원의 친일 고백과 회개를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장로교가 1948년 총회에서 1938년 일제하에서의 이루어졌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재차 취소하는 해프닝을 벌이는 데 그쳤다.

     

    김양선 목사는 1956년 한국기독교 해방 십년 사에서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취소 결의 어디에서도 진정한 참회와 고백을 찾을 수가 없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장로교는 1958년 제43차 총회에서 김 목사의 책이 교단을 모독했다며 출판금지 결정을 내리는 등 친일청산에 대한 비판마저 차단시켰다.

     

    '한국교회 친일을 말한다'는 신앙의 양심을 지키다 숨진 기독교인들의 희생이 깃든 경기도 용인의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한켠에 자리한 권언호 전도사를 통해 신앙 회복을 촉구했다. 작은 시골교회 전도사였던 그는 일제의 종교탄압이 극심했던 1941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설교를 했다가 천황모독 등으로 3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고문을 받았다.

     

    권 전도사의 사위인 조명호 목사(평택 제일교회)는 장인의 평전을 펴냈다. 조 목사는 장인이 "삼천리강산이 다 감옥인데 내가 감옥에서 나간다고 풀려날 리도 없고 난 우상 숭배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다"며 일제에게 굴복하지 않았던 한 신앙인의 승리를 후대에게 전했다.

     

    한국교회는 예수의 가르침과 교리를 부정한 친일 목사들의 승승장구로 인해 친미, 반공화 되면서 보수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빛과 소금의 사명보다는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한국교회, 물량적 팽창으로 각종 권력을 갖게 된 한국교회가 진정한 국민 종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친일 고백과 청산이 급선무라는 지적이다.

     

     

     

     

    제24회 총회장 정인과 목사(1935-1936) [2207] 1999, 기독공보

     

     

     

    정인과(鄭仁果, 1890-1972) 목사는 평북 순천 출신으로서 일찍이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다.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 유학하여 3년간의 신학과정을 이수하고 다시 뉴욕대학에서 1년간 연구생활을 하였다. 정인과 목사에 대한 평가가 시대의 흐름을 잘 따라 다녔던 사람으로 좋은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1919년 4월에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 될 때 미국의 대표로 임시정부 의정원(국회) 의원으로 교통위원장과 임정 외무부 차장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다.


     
    정인과 목사는 1933년 총회 안에 상설 부서인 농촌부와 종교교육부가 출발하자 종교교육부 총무는 정인과 목사가 맡았다. 1935년 9월 제24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회되었다. 이때 정인과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임됐다. 정인과 목사는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로 재직하면서 총회장으로 선임됐으며, 이러한 일은 유일하게 정인과 총무 때만 있었던 일이었다.


     
    1937년 총무직을 사임하였으며, 이때가 바로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해이다. 이후 그의 행적은 과거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외무부 차장 등을 역임했던 과거사를 접어 두고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치욕적인 역사를 밟아가고 있다. 1938년 9월 제27회 총회 시 신사참배를 결의를 하고 이어 일제는 창시개명, 조선 청년들에게 지원병 제도를 만들고 나선다.


     
    이때 정인과 목사는 그의 이름을 창씨개명 하여 정인과를 도꾸가와(德川仁果)로 개명했다. 1942년 10월 제31회 총회에서 총회 내에 '國民總力朝鮮耶蘇敎長老會總會聯盟(이하 연맹)'을 조직하고 이사장에 최지화(鐵原志化), 실무자인 총간사는 정인과(德川仁果) 목사가 맡아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 승리를 위해서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발행했던 신편찬송가 중 일제의 천황에 대치되는 가사는 모두 먹물로 지워야 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일본이 패망을 하자 정인과 목사가 설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그는 경기도 파주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920년대 이후에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 교회 초기의 열정과 경건이 제2세대를 맞아 교회의 조직과 기구로서 신앙을 지탱해 나가야 하는 때 우리 역사에 보내진다. 장로교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와 장로교 총회장 그리고 일제 말기 동 교회의 실무자의 길이 그가 겪어 나갔던 생의 경로다. 그 길들은 모두 교육과 조직에서 신앙을 보존하여 한국 교회의 미래를 다짐한다는 점에서 묘하게 일치점을 갖는다.

    정인과는 무엇보다 공적 교회의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선다. 공교회의 인물이란 자신의 거취를 자의에 따라 결정하면 되는 그런 개인이 아니다. 원하지 않더라도 공교회 유지의 책임으로서 감당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 사람이다. 사실상 일제 말기 신앙인의 행태에는 크게 다음과 같은 부류가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즉, 초야에 묻히거나, 해외로 망명하거나, 아니면 대놓고 친일하거나, 혹은 순교하거나, 마지막으로는 맡은 바 제 위치를 떠나 숨지 않고 역사의 거센 물결을 헤치며 생명을 이어간 경우들이 그것이다. 정인과 목사는 일제 말기 한국 장로교회의 실무자로서 일본 군국주의의 숨 막히는 교회 압살과 그 격랑 속에서 한국장로교회를 붙들고 숨쉴 틈바구니를 찾아 헤쳐 나갔던 인물이다.

    그는 도피하지 않고 현실에 남되 철저하게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확보하도록 온갖 주의를 기울이며 일제말의 시간을 겪어갔다. 그때 일제의 지시를 받아들여서 일제의 본토 교회와 합쳐서 그 명맥을 유지하려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일본 교단과 손잡은 교단파로서 정인과가 영도하는 장로교 호헌파와 반대 입장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정인과는 장로교라는 한국 전통의 교회를 꼭 지킨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일본교단에 병합된다는 것이 우선 장로교의 전통을 버리고서야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교단파에 의해 추방되기까지 한다. 이때 정인과가 딛고 섰던 저항의 원점은 장로교회의 규칙과 법이었고 그것은 장로교회의 원칙과 전통을 거스르는 불법에 대한 필사의 저항으로서 나타났다. 일제말의 전시통제 파쇼 군국의 전체주의 국가에서 의회민주주의의 장로교 정체(政體)를 고수하겠노라고 외친 정인과, 그는 그렇게 한국 장로교를 최후까지 사수해갔다.

    주요 친일 활동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연맹 총간사(1939년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1941년)
    기독교신문협회 회장(1942년)

    친일 행각 
    정인과 목사가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 것은 1937년 6월 이른바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취조를 받은 후부터로 알려져 있다. 
    장로교 중앙상치위원회 총간사로서 부일 협력
    [장로회 지도요강] - "...일본적 기독교의 순화갱정에 노력..." (1940년11월10일 매일신보)
    [일본적 기독교로서...익찬일로의 신출발] (매일신보 기고문 1941.9.3~9.5)
    "...내선일체의 철저화에 최후적 단계에 이르도록..."
    친일잡지 {동양지광} 1942년 2월호 특집 '영미타도좌담회'에 참석
    친일잡지 {조광} 1942년 2월호에 [필승의 신념]이라는 글을 게재  
    기독교계의 부일협력 기관지 [기독교신문협회] 회장으로 일경에 의해 지명됨.
    {기독교신문}의 창간사 - "...본보(本報)는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진전에 기여하려고..."  정인과

     

    대한민국외무총장대리차장

     

    안창호에게 보낸 황사용.정인과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제의안 및 봉투 (1914.2.31)

    국한문. 영문. 1914년 2월 31일 황사용(黃思溶)정인과(鄭仁果)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이다. 통신부를 북간도서간도 및 안동현으로 나누어 정신을 융통해 비관적 추락을 면하고 본회 재정을 적립하기 위해 회원은 매주 5전씩 내며 본회는 영구비밀회로 확정한다. 각 구역마다 1년에 1차 강습을 시키거나 순회강연으로 정신을 고양한다는 등의 7개항에 관한 제의안(提議案).

     

     

     

     

     

     

     

    정인과 목사의 찬송가 문제

     

    1887년 조직교회로서는 최초로 한국에 세워진 새문안교회로 정동에서 시작되었다.

     

    장․감 두 교파 교회의 갈등과 장로교회 내의 서북․비서북계 갈등을 표출시킨 사건이 1935년의?신편 찬송가사건?이다.《신편찬송가》란 당시 장로회 총회 교육부 총무로 있으면서?서북계 실세의 주도권자?로 부각되던 정인과(鄭仁果) 목사의 주도로 편집․출판된 찬송가이다. 이를 《정찬송가》라고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을?정찬송가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건의 내용은 1931년 조선예수교서회에서 발행한 《신정찬송가》를 장로교에서 사용하기를 거부하고 별도로 장로교용《신편 찬송가》를 발행하여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신정 찬송가》는 1908년 이후 장․감 두 교회에서 사용해 오던 《찬송가》를 개편한 것인데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희와 조선예수교서회가 편집 ․발행 및 판매 권한을 갖고 있었다.

     

     1934년 총회에서 ?찬송가 편찬 문제는 감리교회에 교섭하야 연합 편찬하게 하되 만일 감리회에서 불응하면 장로회가 따로 편찬함?이 가하다는 종교교육부의 헌의를 받아들여 ?찬송가 편찬에 대하야는 종교교육부에 맛겨서 더욱 잘 편찬하도록 가결?함으로 장로교 단독 찬송가 발행으로 방향이 잡혀갔다. 그 해(1934년) 종교교육부 총무로 취임한 정인과 목사의 결단이 크게 작용하여 이듬해 ?구 찬송가 중 늘 부르지 안는 것 4O장을 삭제하고 신정 찬송가 중 조흔 것 7O장을 선택하여서 너헛고 새로히 100장 가량을 너허서? 400장 짜리 《신편 찬송가》를 발행하였고.  장로교 전체 분위기는 《신편 찬송가》발행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이로써 장로교는 《신편 찬송가》, 감리교는 《신정 찬송가》를 사용케 되어 두 교회 연합운동 분위기에 큰 손상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http://blog.daum.net/kkskjs1234/15857793 정찬송가 사건

     

     

     

     [ 主日學校 주일학교]

    1922년부터는 선교사공의회의 관할에서 벗어나 연합체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기독교조선감리회·북장로교선교회·남장로교선교회·캐나다장로교선교회·호주장로교선교회·미감리교선교회·남감리교선교회·조선주일학교연합회·조선기독교서회 등 10개 단체가 가입하였다. 그러나 아직 6개 단체는 선교사 단체였으며 초기의 3대 총무는 선교사가 모두 맡아 하였다. 1925년에 정인과(鄭仁果) 목사와 한석원 목사가 협동총무가 되면서 한국 지도자들도 실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뒤 1929년에 제3차 주일학교대회에서 조선주일학교진흥체를 만들어 선교사에게 의존하려는 자세를 극복하려 하면서부터 한국인의 주도권이 강화되었다.

     

    교재로는 1927년부터 ≪계단공과≫가 출판되었고, 잡지로는 ≪주일학계≫·≪주일학교잡지≫가 있었으며, 1930년부터 ≪종교교육≫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아이생활≫은 1938년 일제의 탄압으로 주일학교연합회가 해체될 때까지 존속하여 인기가 높았다.

     

    아이생활

     

    개신교 어린이 잡지, 편저자 정인과, 19253(창간)|19444(폐간), 조선주일학교연합회, 1925년 창간되었던 월간 어린이 잡지.

     

    조선주일학교연합회에서 발행하였으며, 창간 당시의 제호는 아희생활이었다. 19253월 창간되어 19444월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창간 당시의 발행인은 나의수(羅宜秀), 편집인은 정인과(鄭仁果)였는데, 그 뒤 발행인은 허대전(許大殿, Holderoft, J. G.)·반우거(班愚巨, BonWick, G. W.)·안대선(安大善, Anderson, W. J.)·한석원(韓錫原)의 순으로 대를 이었다.

     

    편집인은 정인과·한석원의 순으로, 그리고 편집실무는 전영택(田榮澤방인근(方仁根이윤재(李允宰최봉칙(崔鳳則임홍은(林鴻恩한석원 등으로 교체되었다.

     

    편집내용은 동화·동시·소설 등 문예작품과 역사사화·성경이야기·위인전기·세계명작 소개 등의 교양물, 그리고 일기·동화·동시작법 등으로 다양하여 많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소망을 심어준 잡지였다. 일제하에서 얼마 되지 않는 어린이잡지의 하나로 많이 애독된 순수한 교양잡지로도 각광을 받았다.

     

     

     

     

     

     

     

     

    참고문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론}, 19391942

    {매일신보}, 1940

    {기독교신문}, 19421944

    {반민자 죄상기}, 1949

    전필순, {목회여운}, 1965

    대한기독교교육사(大韓基督敎敎育史)(대한기독교교육협회, 1974)

    참고문헌東光

    참고문헌韓國獨立運動史 19(國史編纂委員會, 19661978)

    참고문헌독립운동사 110(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80)

    참고문헌日帝時代史硏究(李炫熙, 三珍社, 1974)

    참고문헌韓國現代史理解(李炫熙, 瑞文堂, 1976)

    참고문헌3·1運動史論(李炫熙, 東方圖書, 1979)

    참고문헌興士團70年史(興士團, 1980)

    참고문헌大韓民國臨時政府史(李炫熙, 集文堂, 1982)

    참고문헌韓民族光復鬪爭史硏究(李炫熙, 正音文化社, 1988)

    참고문헌獨立運動(金鎬逸, 한국사 22, 국사편찬위원회, 1978)

    네이트 백과사전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 정인과 :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김승태), 친일파 993. 서울: 돌베개.

    조호진. “"한국 교회 친일행적 말할 때 됐다" - CBS-TV 8·15특집 다큐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오마이뉴스, 2004

    주재일 기자. “'조선장로호'라는 일제 전투기가 있었다 - 개인 뿐 아니라 장로교단 전체가 부일에 적극 협조국방헌금 일제에 바치기도”, <민중의소리>

    주일학교잡지(조선주일학교연합회 편, 1926)

    조선남감리교 삼십년기념보(양주삼, 조선남감리회전도국, 1926)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George Paik, 1934)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Rhodes,H.A., 1934)

    한국기독교교육사(대한기독교교육협회, 1974)

    한국기독교성장사(김광수, 기독교문사, 1976)

     

     

     

    전시체제 강화로 교계가 고통 받다 (1930~1945)

     

     

    강제 공출된 금속류,1940년대.

    한국인 가정에서 강제로 놋그릇등이 수탈되었다. 이 무렵 교회의 전킨 기념종도 빼앗겼다.

     

      

    1. 신사정책으로 씌운 올가미

    1930년대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로 한국 교회는 일대 시련에 봉착하였다. 1931년 만주 침략, 1932년 상하이 침공,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도발 등으로 군국주의 일본은 전시체제를 강화하며 한민족을 말살하려는 황민화정책을 폈고 여기에 걸림돌이 되는 기독교에 대하여는 계속적으로 탄압과 압력을 강화하였다.

     

    황민화정책은 여러 방면으로 나타났다. 일본 천황은 현인신(現人神)으로서 일본의 천황신앙의 절대 존경 대상으로, 우리 민족에게도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하였고 황국신민서사(誓詞) 제창으로 충성을 다짐하게 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하게 하고, 일상생활에서 일본어와 일본문자를 상용토록 하였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를 거부하자 1930년대 초부터는 한국 기독교의 배경이 되는 미국 선교사 경영의 기독교계 학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앞서 192510월 서울 남산에 세우는 조선 신궁 진좌제(鎭座祭)를 거행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소위 어령대(御靈代)를 일본으로부터 실어오는 철도 주변에 주민과 학생들을 동원하여 출영하게 하고 그 진좌제에 참가하도록 독려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계 학교들은 신앙과 민족적 양심에 따라 출영과 참배를 거부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처음에 소극적인 태도로 크게 문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군국주의가 대두되고 대륙침략을 전개함에 따라 종전의 태도를 바꾸어 신사정책(神社政策)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고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각종 행사마다 신사참배를 내세웠다.

     

    신사참배가 가장 먼저 강요된 곳은 교육계였다. 먼저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기르고 사상의 변화를 갖도록 훈련시키는 곳이 학교인 만큼 학교를 통한 이데올로기 교육은 당시 전시체제하에서 매우 강조되었다. 그런데 기독교계 학교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므로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19321월 전남 광주에서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를 개최하고 학생들의 신사참배를 요구하였으나 기독교 학교가 이를 거부하므로 심각한 문제가 발단되었다.

     

    또한 19329월에 평양에서도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 군인 위령제를 개최하였을 때 도지사는 각 학교에 참석할 것을 공식 통첩하였다. 그러나 숭실전문학교를 위시하여 10개의 기독교계 학교가 불참하였다. 이듬해인 19339월에 원산(元山)에서 캐나다 장로교 소속 진성(進誠)여자보통학교가 만주사변 2주년 기념 순란(殉亂)자 위령제의 참가 요구를 거부하였다가 학교 당국은 일본의 경고를 받았다. 일본 경찰들은 거부에 대한 보복으로 기독교계에 대하여 감시 사찰과 탄압을 강화하였다.

     

     

     

     

    강요된 창씨개명을 계출하기 위하여 경성부청 호적과에 줄을 선 모습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 사건

    일제가 신사참배 거부를 구실 삼아 직접적인 제재를 가한 것은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 사건이었다. 19351114일 평남 도청에서 개최된 사립 중등학교장 회의에서 도지사가 개회 벽두 학교장들에게 전원이 평양 신사에 즉시 참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참석하였던 평양 숭실학교장 맥큔(G. S. McCune, 尹山溫), 숭의여학교장 대리 정익성(鄭益成), 순안 의명학교장 리(H. M. Lee) 등이 기독교인의 교리와 신앙으로는 이에 응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으므로 다시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평남도 당국과 총독부에서는 이제까지는 신사참배 거부에 대해 경고장 발부 정도에서 그쳤으나 이후로는 엄중히 처벌할 것을 엄포하며, 불응시에는 학교를 폐교시키겠다고 하였다.

     

    일본은 이같은 강경책과 함께 선교사와 한국 교회와의 이간책을 세우고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선교사의 영향력을 배제시켜 일본 식민지교육의 직접 통제 하에 두고자 하였다. 신사참배 강요에 끝까지 굴복하지 아니한 숭실학교장 맥큔은 120일자로, 숭의여학교장 스누크(Miss V. L. Snook, 鮮于理)121일자로 교장 직에서 파면되고 미국으로 출국 당하였다.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식민지 교육의 논리는 이러했다. 신사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인 것이며, 예배 행위가 아니다. 단지 조상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일 뿐이다.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지적인 육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충실한 천황의 신민이 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신사참배를 통하여 천황에 대한 경의를 가일층 표하여야 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신사참배는 자유에 맡길 뿐이고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일제의 논리에 대해 기독교계 학교와 한국 교회는 종교적인 입장에서나 민족적 양심에서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조선 신궁의 계단

    192510월 준공,일제는 서울 남산을 훼손하여 국사당 자리에 조선신궁을 세웠다.

    조선총독부 인가 神社·神祠의 증가표(1930~1945)

    조선신궁 참배자 통계

    신궁대마(神宮大麻)의 보급 현황

     

     

    국민정신작흥(作興)운동

    1930년대 일본은 그들의 형식적인 농촌진흥운동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하여 국민정신작흥(作興)운동’ ‘심전(心田)개발운동등을 벌였고, 한편 신사 중심의 황국신민화로의 정신개조운동을 강화하였다. 일반인에게까지 신사참배와 신도적 행사(神道的 行事)에의 참여를 강요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는 신사(神社, 神祠) 설립이 급격히 증가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황민화운동의 일환인 신도(神道)사상의 보급을 위해 일본 신도의 본산인 이세신궁 (伊勢神宮)에서 만들어 낸 대마(大麻, 神符, 符籍, 符作)를 넣은 가미다나 (神棚, 일본 천조대신을 제사 드리기 위한 신주를 모시는 신사모형의 위패 선반)를 각 집에 붙여 두게 하였다. 심지어 각 교회에도 이를 설치하게 하였다. 슬프게도 서문 밖 예배당 강단 옆에 딸린 준비실 안벽에도 이것을 붙였었다.

     

    2. 교계 학교에 먼저 온 시험

    기독교계 학교에 내린 강력한 신사참배 요구에 대해 선교사들의 태도는 일치하지 않았다. 선교사 중 어떤 부류는 조선 총독의 회유와 분열책에 말려들어 의견을 달리하였던 것이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입장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로서 기독교 교리와 교육 목적에 위배되며 신앙 양심에도 거슬리는 일이므로 차라리 세속 교육에서 손을 뗄지라도 이에는 절대 응할 수 없다는 강경파와, 신사참배에 종교적 요소가 다소 있기는 하나 이것은 일본의 교육상 애국 행위에 불과한 것이므로 학교를 살리고 기독교 교육을 계속하기 위해 일본 정책을 수용해야 한다는 타협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나 결국 신사참배는 분명한 우상 숭배이니 단연코 반대해야 한다는 맥큔과 크로프트, 솔타우 등 주장에 따라 강경론으로 입장을 정리하고 1938년 조선에서의 교육 인퇴(引退)를 결의하였다.

     

    그 결과 평양의 삼숭(三崇 - 崇實中·崇義女·崇實專門)과 대구의 계성·신명(啓聖·信明), 재령의 명신(明新), 선천의 보성·신성(保聖·信聖), 강계의 영실(永實), 서울의 경신·정신여(儆新·貞信女) 등이 잇따라 폐교하게 되었다. 또한 호주 장로교 계통의 부산의 일신(日新), 마산의 창신·의신(昌信·義信), 진주의 시원(柴園)여학교 등도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감리교계 선교부와 캐나다 선교부에서 경영하던 학교들은 1930년대 전반기에는 일본 신사정책에 저항하였으나 중반기 이후에는 태도를 바꾸어 일제에 순응하고 신사참배를 국가 의식으로 받아들이며 학교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는 각 선교부는 축출당하고 말았다. 북장로교회나 남장로교회의 경우와 같이 단호히 폐교하고 일본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 예언자적 입장에서 대항하며 경고하는 적극적인 태도가 없었다는 것은 신학적 차이 때문이다.

     

    3. 신흥/ 기전 폐교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하여 어느 선교부보다도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남장로회 선교부는 193511월에 그리스도 신앙으로 양육한 학생들을 신사에 참배하게 하기보다는 학교를 폐교하자는 방침을 세웠다.

     

    즉 남장로회 선교부에서는, 총독 남차랑(南次郞)이 불교신자이면서 유교방식의 제사 예식을 지켰고 그러면서도 한국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실로 모순된 사상을 가졌지만 일본 신도를 종교로 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성명에 의하면 일본은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에 의해 다스려지는 신국(神國)’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인들은 야오요로스노 가미(8백만의 귀신)’를 섬기는 다신교의 민족이었다. 이것을 종교국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임에 대하여 확실한 신념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본부는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기 위하여 일본 신사 문제에 대하여 연구와 조예가 깊은 미국 남장로회 해외선교부 실행 총무인 풀턴(C.Darby Fulton) 박사10)를 조선 현장에 파송하여 실정을 조사하게 하고, 남장로회 선교사들의 신앙적 노선을 뚜렷하게 천명하도록 하였다.

     

    193722일 한국에 온 풀턴은 15일에 전주에 도착하여 현지 선교사들에게서 여러 상황을 청취하였다. 이후 군산·목포·광주·순천 등의 선교지를 순방하며 현 상황을 듣고 살폈으며 학교 경영을 계속하기를 청원하는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도 만났다. 풀턴이 전주에 도착할 때 전주 5처 교회의 교인들이 역에 나와 환영하였고, 217(수요일) 밤예배를 서문밖예배당에서 연합예배로 드리며 축하음악회를 가졌다.

     

    당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선교사들의 신앙 위주의 참뜻과 기본방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융통성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우상 종교에 절하면서도 교육을 계속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뿐이었던 것이다. 더욱 기막힌 것은 군산 동부교회를 선교기념예배당으로 훌륭하게 건축하고자 계획 중이던 최 목사는 이를 위해 미국 선교 본부의 경제 지원을 받고자 노력하였다.

     

    이때 마침 풀턴 총무가 한국에 오자 총무의 환심을 사기 위해 환영회와 선물 공세를 펴고자 했다. 최 목사는 현지 선교사인 부위렴(Bull) 목사에게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부위렴 선교사가 이에 불응하자 그를 비난하고 반목하여 사사건건 의견 대립을 일으켰다. 당시 일본 경찰은 선교사와 이간시키기 위해 최 목사의 사기를 부추기고 있었다. 미구에 닥쳐올 일본의 기독교 탄압정책을 바라보지 못하는 한국 목사들의 단견(短見)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에 한국 목사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지키고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인가를 외형에서만 취하려는 세속적 신앙구조를 갖고 있었다.

     

    풀턴 총무는 19372월 말경까지 현지에 체류하면서 남장로회 선교사들과 격의 없는 진지한 논의를 거쳐 전원 합의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를 풀턴성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강경 입장이 선언된 지 얼마 안되어 중일(中日)전쟁이 일어나고 당국은 기독교계 학교에 대해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풀턴 총무는 성명을 발표한 후 학교를 계속 운영해 달라는 집요한 청원을 의식함에서인지 출발 시각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이리역으로 나가 부산을 경유, 미국으로 돌아갔다. 풀턴 총무가 다녀간 후 남장로회 선교부 경영의 각 학교는 4월 봄학기부터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아서, 호남의 10여 개 학교는 일학년이 없는 학교가 되었다. 일본 총독부 당국도 별다른 간섭이나 지시를 하지 않고 수개월 동안 바라만 보았다. 그러던 중 광주의 수피아여학교 책임자인 루트 교장(Root Florence Elizabeth, 柳花禮)13)이 위의 선교부 정책을 학생들 앞에 공개하자 민감한 학생들은 맹렬한 데모를 일으켜 학교는 휴업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한 그러한 상황에서 기독교계 모든 학교들이 염려하고 있던 신사참배가 강요되었고 학교 측에서는 신사참배를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전남 광주의 숭일·수피아, 목포의 영흥·정명(永興·貞明) 등의 4학교가 먼저 폐교 조치되었다. 잇따라 순천 매산(梅山)과 전주의 신흥·기전 등도 폐교되었다.

     

    이러한 신흥·기전학교의 신사참배 거부에 대해 일본경찰은 193796일 오전에 학생들이 등교하자마자 전교생을 이끌고 다가산 위에 있는 일본 신사당으로 올라갔다. (...) 이로써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 산하의 10개 학교는 호남지방에서 신교육을 실시한 지 38년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특히 신흥은 1933년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조선총독부 지정학교 인가를 받고 명실 공히 호남의 명문고로 웅비(雄飛)의 나래를 펴려던 중에 그 날갯죽지가 무참히 꺾이고 마는 슬픔을 겪은 것이다. (...) 신흥학교 학생들은 고창고등보통학교로, 기전학교 학생들은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로 편입되었다. 922일 행해진 폐교식은 전교 학생과 전교 직원이 방성통곡하는 가운데 눈물로 치러졌다. (...)

     

    4. 교회와 신흥·기전

    서문밖교회는 미국 남장로회 호남선교 개시 제일번지의 유서 깊은 교회로서 신흥과 기전이 설립되어 폐교당할 때까지 3738년 동안 순치(脣齒)의 동기간과 같은 사이였다. 두 학교가 이 고장에 설립된 후 19071909년의 요람시대부터 주일이면 신흥과 기전학교의 학생들은 교사들의 인솔에 따라 서문밖교회에 나왔다. (...) 이처럼 신흥학교와 서문밖교회는 한 가족 같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정신적으로 한 가족과 같았다. (...) 1937년 신사참배 강요의 마수에 걸려 신흥과 기전 두 학교는 폐교가 확정되었다. (...) 서문밖교회에 출석하던 기전과 신흥학교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청동제 화병 한 쌍과 화분대 두 대를 마련하여 교회에 바쳤다.

     

     

    신흥 5학년 학생 전원이 폐교되는 학교를 떠나면서 첫 글자인 S자를 그리고 있다.

    신흥/기전 학생들이 기증한 화분대

     

     

    5. 숭덕학교와 신사참배 결의

    군국주의 침략 야욕에 기초한 일본의 기독교 억압 정책이 점차 심화되어 가고 있었으나, 교인들은 어려움을 이겨갔다. (....) 종전에 예배당 안에서 경영하였던 숭덕학교는 차츰 발전되어 특지가를 얻어 시내 노송동으로 이전하여 교사를 새로 지었고 박성근 씨와 설립자 배은희 목사의 협의로 서문밖교회에서 분리, 독자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전북노회의 신사 참배를 결의한 내용의 제 32회 회록,1938.6.8.

      

    신흥과 기전 두 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폐교된 지 9개월도 못되어, 193868일 시작된 제32회 전북노회는 각 교회의 목사 27명 중 24, 선교사 7명 중 4, 장로총대 103명 중 97명으로, 모두 125명이 회집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그 동안 일제가 기독교회 지도자들을 얼마나 위협하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지만, 전혀 항변하는 태도 없이 무비판적으로 묵종한 것은 결코 죄 없다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신도(神道)가 종교에 해당됨을 알고 있으면서도 신사참배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범죄를 정당화하려고 교인들에게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고 국가의식이라고 가르쳤으니 그들의 범죄와 위증은 역사에 뚜렷이 남아 있다.

     

    19382월 미나미(南次郞) 조선총독은 기독교회 특히 장로교회에 대하여 강압적 시정 방침을 세우고 서서히 신사참배 강요로 목을 조르기 시작하였다. 우선 장로교회 중 지역적으로 교세가 막강한 평북노회를 집중 공략하였다. 일제는 교역자 중 변절자를 내세워 유혹과 협박을 하게 하였고, 그 결과 193829일 전국 노회 중 평북노회가 가장 먼저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 의식임을 인정한다는 결의를 하게 되었고 노회원들도 신사에 참배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전국 각 노회들이 잇따라 같은 전철을 밟았다.

     

    6. 교회의 신사참배 청원서

    그 당시 전주부 도제직회 회장은 김세열 목사였고, 화호리교회 당회장은 이우석 목사였다. 이는 교회 지도자들의 변절행위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언이다.

     

    전주부 소재 5개 교회 도제직회에서는 당국의 누차 간절한 지도에 의하여 만방 무비한 황국신민 된 지위를 자각하고 검토한 결과 결코 신사는 종교가 아니므로 신앙과 기도가 없고 따라서 참배는 황실의 조선(祖先)과 국가의 공로자에 대하여 충심, 숭경의 정성을 드림으로써 국민의 적성(赤誠)을 피력하는 것임을 깊이 인식하는 동시에 국민의 당연한 의무일 것을 확신하고 이에 전북노회로서 신사참배하기로 결의하기를 청원합니다.

     

    또한 이 노회에서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하여 각 소속 교회에 결의내용을 통지하는 한편 상회(총회)에도 보고하여 건의하기로 하였다.

     

    신사참배는 원래 일본 민족의 신() 관념에 근거하며 신도에 뿌리를 두었다. ‘신도의 신은 다신교(polytheism)의 신으로서 그 수는 무려 800만에 이른다고 한다. 이같은 사신 종교에 대해 당시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는 그저 국가의식이며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결국 신도의 미소기의식까지 벗은 몸으로 실천하였다.“

     

    전북노회에서 이와 같은 결의가 이루어지기까지 경찰의 사전 공작에 협력한 노회 임원들이 있었다. 그때 경찰은 자기들의 명령에 순복할 사람을 노회 대표로 사전에 지명하였다.

     

    7. 미나미 총독의 강압정책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조선총독, 육군대장 미나미는 조선군 사령관, 육군대신, 관동군 사령관 겸 만주국 주차전권대사 등을 거친 대륙침략의 선도적 인물이며 일본 군부 파쇼를 이끌어 온 중추세력의 하나였다. 19368월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동아일보가 지면에서 일장기를 삭제한 것을 트집 잡아 무기 정간하기로 한 무단 정치가였다.

     

     

     

    동아일보 정간 명령서,1936.8.27.

     

     

    총독 중 처음으로 신사 숭경을 강조하였고 6년간의 총독 재임기간 중에 신사참배와 기독교 탄압, 조선인 황민화정책을 강요·강행하였으며 특히 장로교도에 대해 고루하고 편협한 민족의식을 선동하는 자들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는 조선에서 국체 관념의 명징(明徵)을 위해 황도 선양(宣揚) 신사참배 궁성요배 국기 게양 장려 국어(日本語) 보급 장려 등을 강조하였다. 특히 황국신민서사(誓詞)24)1937102일 제정·공포하였다. 이와 같은 방침에 따라 교회와 노회는 엄중한 감시와 탄압을 받았고 특히 장로교회는 각개격파(各個擊破)의 공격 대상이 되어 점차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8. 음녀에게 유린당한 날

    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3899일에 평양 서문밖예배당에서 개최되었다. 총회 개최에 앞서 각지 경찰서장은 노회 대표들에게 다음 3개 조건 중 하나를 택하게 하였고 불응하는 사람은 검속·투옥하여 총회 장소에 나갈 수 없게 하였다. 그 세 가지는 총회에 참석하여 신사참배 찬성에 동의(同議)할 것 신사 문제가 상정되면 침묵을 지킬 것 위의 두 조항을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출석하지 말 것 등이었다. 신사참배 문제는 총회 2일째 갑작스럽게 처리되었다.

     

    평소 강경하게 참배를 반대해 온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채정민(朱基徹·李基宣·金善斗·蔡廷敏) 목사 등은 사전에 예비 검속되어 총회에 나오지 못하였다.

     

    9. 정신적인 항의운동

     

    10. 전북노회와 선교사들의 결별

     

    11. 신사참배에 대한 전국적인 항거 운동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19389월 신사참배를 결의했지만, 일본화에 앞장선 일부 친일 교권자들이 일본 권세를 등에 업고 교계를 이끌고 간 것만이 한국 교회의 전면모는 아니었다. 신사참배는 불의한 것이고 참배반대운동은 의로운 것이라고 전반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참배반대운동은 먼저 평양장로회신학교 학생들과 교수인 선교사들의 강경한 자세로부터 일어났다. 평양신학교의 이사장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 邦緯良) 목사와 교장 로버츠(Stacy L. Roberts, 羅富悅) 목사, 교수 솔타우(T. Stanley Soltau, 蘇悅道) 목사, 홀드 크로프트(James Gordon Holdcroft, 許大殿) 목사, 로드(Harry Andren Rhodes, 魯解理) 목사 등이다.

     

    호남지방에 선교구역을 두고 있던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 역시 이미 전체회의에서 신사참배 반대 의사를 표명한 바 있었다. 그러나 선교구역인 호남지방에서 이들과 접촉하는 조선 목사와 장로의 신사참배 반대는 적극적이지 않았고 따라서 선교사들 역시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다.

     

    한국인 목사를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참배반대운동은 1939년 평북, 평남, 경남, 만주 등지에서 조직적으로 일어났다. 평양 산정현교회의 주기철(朱基徹) 목사는 평신도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하는 등 조선 북부지방에서 신사 참배 반대운동의 원동력이자 구심점이었다.

     

    그는 평양신학교 교내 부흥회에서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유명한 설교를 통하여 신사참배 반대의 굳은 신앙 자세를 천명했다. 결국 19382월부터 4차례(또는 5차례)나 일본 경찰에 검속당하였고 이후 7년간의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421일 평양 감옥에서 순교했다. 주기철 목사가 시무한 평양 산정현교회는 신사참배를 끝내 반대함으로써 변절한 교권자들과 일본의 강압으로 결국 폐쇄 당하였다.

     

    이밖에도 북부지방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지도자들의 활동이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평북 의주교회의 이기선(李基宣) 목사와 채정민(蔡廷敏) 목사 등이 북한 각지를 순회하며 전개한 반대운동이 있다. 조선 남부지방에서도 경남지방을 중심으로 한상동(韓尙東) 목사에 의해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는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에서 주기철 목사 후임으로 시무하면서 설교를 통하여 신사참배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평양의 해밀턴(F. E. Hamilton, 咸日頓), 말스버리(D. R. Malsbury, 馬斗元), 만주의 헌트(B. F. Hunt, 韓富善) 등이 그들이다.

     

    창씨개명

    일본 정부의 탄압 중에서도 교회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선두에 서서 친일행위를 하던 당시의 교권자들은 개교회 안에서는 당회장으로, 노회에서는 팀웍을 형성하여 모든 교회들을 인도하여 갔다. 각 교회들은 외형상 아무 이상 없이 운영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부일협력(附日協力)했을 뿐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점점 일본화(日本化)되어 가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 교계를 일본화하려고 여러 단계로 압력을 가해왔다. 먼저 그들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로 하여금 1938년 제27회 때 일본 신사참배 결의를 하도록 강요하여 공교회(公敎會)의 범죄를 역사적으로 나타내는 비극을 연출하였다. 또 창씨개명으로 민족의 뿌리를 말살하는 정책에 교회 지도자들이 솔선하여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게 하였다.

     

        

    창씨 개병한 전북의 목사· 장로들 명단

    80명중 배은희· 김가전은 창씨 개명을 거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38년 신사참배 결의를 하기 1년 전에 이미 기독교보 사설에 기독교인은 여력을 다해 일본 황실을 받들 것이며 황은(皇恩)을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것이며 국운을 융성하게 하며 총후(銃後) 만전을 도모하여 황운(皇運)을 부익(扶翼)하라!”라고 하였고, 또 반년이 지난 1938425일에는 감리교 유형기 목사를 비롯하여 각 교단의 대표들이 모여서 신사참배와 총후 보국주간 행사에 모두 참가할 것을 결의하고 조선기독교는 일본적 기독교에 입각해 황도(皇道) 정신을 발휘하고 선양하자.”는 선언문을 발표하게 하였다.

     

    신사참배에 굴복한 장로회 총회와 교회지도자들은 이후 자기들의 행위를 정당화했을 뿐아니라 기왕에 성삼위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또 세례를 베풀었던 성직자들이 서울 한강에서나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혹은 전국 각지에 특별히 설치한 장소에서 일본의 국조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름으로 미소기바라이’(神道淸淨의식)를 받았다.

     

    전주에서는 옛 신흥학교 교정이 황도정신 연성소 수련장으로 사용되었는데, 교내 마당에는 흰 포장을 둘러친 목욕재계소(沐浴齊戒所)가 설치되어 의식 때에는 일본식 기저귀로 하체만 가리고 전라의 모습으로 의식을 거행하였다. 교회를 담당한 많은 교역자들은 이 의식을 거쳐야만 하였다. 이 모임은 일본어로 식순을 작성하여 진행하였다. 19412월 종전의 이름을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전북노회연맹으로 바꾸고 연맹의 이름도 노회의 교정을 집행할 수 있도록 규정을 삽입하였다. 1941년 국민총력연맹 결성식에서는, 다음에서 보듯이 찬송·성경·기도 등을 빼고 진행하였다.

     

    조선 교회의 일본화운동은 조선 감리교회가 이른바 기독교 혁신안을 채택하여 그 동안 조선 교회로서 간직해 온 전통을 단절 내지는 청산하고 일본화를 앞장서서 전개한 데서 더욱 드러났다. 조선감리교 정춘수(鄭春洙) 감독은 일본 메도디스트(Methodist) 교회의 아베(阿部義宗)41) 감독을 맞이하여 일본 감리교회와 합동을 결의하고 194010월 총리원 이사회에서는 기독교혁신안 5개 조항을 마련하였다. 그 내용에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배격하고 일본의 황도정신을 함양하며 일본적 복음주의에 충실할 것이며 각 교회는 애국운동을 강조하고 일본 정부에 조직적이며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교도들로 하여금 지원병에 참가하도록 권유할 것 등이었다.

     

    1940년 전후의 교회의 일본화는 교단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개교회의 예배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더 나아가서 일제는 성경과 찬송가에 대해 제재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성경 사용에는 제한을 두어 사용하지 못할 부분을 지정하였고, 찬송가 역시 가사의 수정·삭제, 전곡 가창 금지를 명하였다. 교인들의 찬송가를 수합하여 사람을 시켜 정정 처리하게 하고 이를 경찰관이 입회하여 검열을 실시하였다. 교회마다 국기게양대를 만들게 하고 축제일과 기타 행사일에 일본 국기인 일장기(日章旗)를 내걸게 하였다.

     

    전교인들에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국가 의식을 행하도록 하고 예배를 진행하였다. 당시 조선 교회의 예배당 안에는 일본 가미다나를 설치하고 예배 시작 전에 이에 절하고 신고해야 하였고, 다시 국기에 대하여 배례하였다. 천황은 현인신(現人神)이라 하여 일본 전국 어디에서든지 그가 사는 궁성(조선에서는 동방)을 향해 90°각도의 극진한 최경례(最敬禮)를 하게 하였다. 국가 봉창과 황국신민서사(誓詞)를 제창하고 난 다음에야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였다. 일본 정부는 신도(神道) 제일주의였기 때문에 철저하게 일본신(아마데라스 오미가미) 다음에 여호와 하나님을 두었으며 일단 예배 후에는 예배당에서 시국 강연을 듣게 하거나 주일 오후에는 근로 봉사를 하게하며 방공호를 파게하고 때때로 예배당 안에서 방공훈련을 한다며 소이탄(燒夷彈)을 터뜨려서 예배 도중에 소화 작업 훈련을 실시하여 수라장이 되는 것이 일쑤였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일본 제도에 따라 명칭을 규격화하여 주일학교수련회, 교회 수양회나 부흥회는 연성회(鍊成會)’로 바꾸었다. 예배의 진행은 원칙적으로 국어(일본어) 상용이라는 명목하에 일본어로만 하게 하여 교인 전체가 일본어를 조속히 습득하게 하는 일환으로 삼았다. 주일 연보 또한 국방 헌금이라는 이름으로 탈취하였다. 일제는 교회 탄압을 위한 악랄한 방법으로 교회당을 폐쇄하거나 교회의 수를 축소하였다. ‘유휴 건물의 이용이란 명목으로 교회의 병합을 추진한 것이 하나의 예이다. 서울에서는 당시 36개 교회가 폐쇄당했는데 기막힌 일은 감리교 서울 상동(尙洞)교회를 폐쇄하는 대신 황도문화관(皇道文化館)으로 만들고 황도정신 연성소로 삼았는데 이때 관장은 갈홍기 목사였다. 한편 서울 남산에 있는 조선 신궁에 버금가는 충남 부여 신궁 조영에 전북의 72명의 지도자급 교역자들로 구성된 근로보국대가 자진하여 가서 현지 부역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일제에 굴하여 일본 이세,가시하라 신궁에 참배한 한국의 목사들,

    충남부여 신궁에서 근로 봉사하는 한국의 목사들

     

     

    조선 교계에서는 친일에 앞장서는 각종 어용기관을 조직하고 거기에 교계의 지도자들이 참여하였다. 대부분 국민총력연맹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그 외에도 자진하여 친일 어용단체를 조직하였다. 충북 괴산의 남기종(南基宗)43)목사는 박규호 장로와 더불어 기독교 황도선양회(皇道宣揚會)를 조직하고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맹세하였다. 서울의 감리교 유형기(柳瀅基), 갈홍기(葛弘基) 목사 등은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 황도문화관(皇道文化館), 황도학회, 임전보국연맹(臨戰報國聯盟) 등을 조직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을 흡수하고, 그 대표들은 신사참배와 총후보국강조주간(銃後報國强調週間) 행사에 모두 참가할 것을 결의하고 일본적 기독교에 입각하여 황도정신을 발양(發揚)하자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더 나아가 친일 교계지도자들은 194311월에 징병과 학병의 출정독려차 조선 각도에 유세를 다니고자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을 조직하였고, 조선전시종교보국회를 조직하여 감리교의 갈홍기, 장로교의 채필근, 천주교의 김한수 등을 유세에 앞장세웠다.

     

    친일을 주장한 그들의 논리와 양태는 대략 세 가지로 본다. 첫째, 중일전쟁은 대사상(大思想)의 성전(聖戰)이라고 찬양하고 황군의 위대한 공로에 감격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공산화 사상의 확대를 인류 공동의 적으로 보고 공산주의 반대는 일본 군국주의와 일치라는 측면에서 공산주의를 단죄하는 자세로 전향의 양상을 표하는 것이었다. 셋째, 신사참배의 찬양이다. 당시 교단들이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교계 내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친일로 전향한 그들은 일본의 앞잡이로서 신사참배에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신사참배 반대는 천황에 대한 불경죄라고 위협하였다. 또 이들은 일본은 국체지상(國體至上)’이라고 주장하며 우리 백성은 천황폐하의 적자(赤子)임을 감격할 따름이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망언 중 신흥우(申興雨)우리는 종교인이기 전에 또 조선인이기 전에 먼저 일본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천황폐하의 충성스런 적자로서 다만 일본만을 사랑하자!”라고 하였고, 장로교회의 교권을 잡고 있던 정인과(鄭仁果)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에 대해 국민으로서 하지 못할 자국(自國)에 반기(反旗)를 드는 행위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당시 지도자들의 친일행각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교계지도자들은 또 성경을 자신들의 논리를 내세우는 데도 이용하였는데, 신흥우는 그 나라를 사모하라는 성경구절에서 그 나라일본제국을 이르는 것이라고 설교하기도 하였다.

     

     

    국민총력예수교장로회 총연맹 이사장 鐵原志化(최지화), 간사장 德川仁果(정인과)

    ) 19432월중 연맹본부 주최로 대동아전쟁 관철과 기독교도의 책무를 재삼 격려하기 위한 시국강연회를 각지에 강사를 파견하여 실시

    ) ·해군에 애국기(전투기) 1대 헌납하고 육전대에 기관총 7정을 헌납할 자금 150,31750전을 헌납

    ) 육군환자용 자동차 3대 기금 23,22128전을 헌납

    ) 놋그릇 계2,165점 헌납

    ) 교회 종 1,540개 헌납

    ) 국어(일본어) 상용운동전개와 일본어로 초등국어 성서강습교본을 출판

    ) 징병령 실시 진

    ) 전선(全鮮) 기독교 지도자는 일본적 기독교 정신 아래에서 황도정신을 함양하고 기독교 신학사상의 명랑화를 기하며 철저하게 연성(鍊成)운동

      

    일제의 정신적 포로가 된 교단 대표자들

    1938년부터 한국 교회의 교역자들은 신사참배의 올가미에 걸려 일제의 포로가 된 듯 행사마다 일본인보다 더 극성으로 신사에 참배하고 신관(神官)의 지시에 따라 봉고제를 드렸다. 한국의 유수한 교단의 대표자들은 일본 본토의 이세신궁(伊勢神宮) 가시하라()신궁 등에 참배하였다. 1939년 종교단체법이 성립된 후 일제의 축소화 정책에 묶여, 한 도시에 한 교회만 두고 나머지 교회는 폐쇄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교회는 정신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핍박당하고 있었다. 각 교회는 가미다나의 설치는 물론이고 행사 때마다 국민의례, 궁성요배, 신사참배, 국방 헌금, 애국 헌금, 전투기헌납 헌금을 해야 했고 교회종, 철제문짝 등을 강제 공출당했다. 또 위문대(주머니) 수집과 신사 등지에 대한 근로봉사를 강요당하였고 심지어는 교회당 건물도 징발되어 임의 사용토록 하는 등 그들의 불법행위는 끝이 없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본 군당국에 전투비행기를 헌납하기로 하여 먼저 조선장로호라는 해군비행기와 병기 5정을 바치는 명명식(命名式)1942920일 거행하고 다시 육군에서 사용할 전투비행기 조선장로호를 헌납하였다. 19421117일에 서울 용산 육군연병장에서 거행된 명명식은 기독교 의식이 아닌 일본 신도 의식으로 거행되었다. 36만 장로교도들의 애국 정성을 실은 미·영 격멸의 은익(銀翼)애국기 조선장로호명명식은 국민의례에 이어 제주(祭主) 조선신궁 신관 다케시마(竹島宮司)의 헌납식사 등이 있었다고 한다. 참석한 주요 인사는 평북 삭주의 김곡청일(金谷淸一) 목사, 황해 해주의 신삼일웅 목사, 재령의 김낙영 장로, 원산의 김종대(金鍾大) 목사, 경성의 함태영 목사와 전필순, 차광석, 백낙준, 박승준, 장홍범 목사 등 무려 80여 명의 장로회 대표격 인사들과 애국기 헌납 기성회 간사 마스우라(松浦文雄, 吳文煥) 목사 등이었다. 또한 총회는 황군환자 수송용 자동차 2(대금 2322128)와 고사기관총 7(대금 12317)의 기금을 헌납하였다. 무기와 탄환을 제작할 철물로 교회의 큰 종 2,500개를 조선 기독교계에서 거두었는데 장로교에서 거둔 것이 1,500여 개였다. 전북노회는 국방헌금 모금을 위해 1937826일 임시노회를 열고 각 교회가 성의껏 연보하여 관계 관청에 헌납하였다.

     

     

    강제로 신사에 참배하는 학생들,일제는 아침 저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민족혼 말살에 광분하였다.

     

     

    교세의 감축

    1942년에서 1943년에 걸쳐 교회의 폐쇄와 합병조치

    19435월에는 전국 노회의 수효도 폐합·축소

    1943년 감리교단은 서울 안에서만도 36개 교회 폐쇄, 수입대금을 비행기 헌납기금으로 수탈

    94312월까지 안식교, 성결교, 침례교 등의 교단 강제 해산

     

    패전 직전의 기독교인 말살 계획

    일반 서민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의 대부분도 면종복배하였다. 이러한 높은 공감대야말로 흉포무도한 권력에 대항하여 불굴의 저항운동을 계속 전개시킬 수 있었던 최대의 기반이 되었다. 어느 해 총독 미나미가 제국회의에서 시정보고를 할 때, 어느 대의사가 조선통치는 원활히 행해지고 있는가하는 물음에 조선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40만의 군대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교도들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는 미나미의 기독교회관()과 탄압의 동기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미나미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 후임 총독인 고이소(小磯國昭)와 아베(阿部信行)도 조선 교회를 완전히 해체하여 일본 교단의 휘하에 두고 신사참배 거부자 등을 모두 투옥하였지만 오히려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패전 직전 미군이 필리핀을 함락시켰을 때 일본군 지도자는 미·소가 조선에 진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조선인 기독교인이 거기에 협력할 것을 두려워하여 19458월 중순경 조선인 기독교인을 모두 살해하도록 본격적으로 계획하고 있었다.”라고 블레어는 기록했으며 마펫은 그 처형이 818일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정창(文定昌)은 그 살해 예정수는 약 5만 명으로, 영변에서는 2시간에 20명씩 살인할 능력을 가진 일본군인에 의해 죽창과 일본도로 찔러 죽이는 방법으로 27천 명의 살해를 예정하였던 약 20평의 살인굴이 확인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종교단체법 성립

     

    조선혁신교단의 조직과 해산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 발족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설립

    일제는 조선의 대표적 개신교회인 장로교와 감리교를 일본기독교라는 우산 아래 예속시키는 데 일단 성공하고, 다음은 조선 안의 개신교회 각 교파 전체를 하나로 통폐합하는 정책을 세우고 1942년부터 각 교단에 종용하여 먼저 각 교단 대표들로 교단합동추진위원을 선출하여 교단의 합동문제를 다루게 하였다. 이를 배후에서 지휘하고 있는 조선총독부는 19456월부터 조선총독부 엔토(遠藤) 정무총감과 일본기독교회 전국대회 의장이었던 도미다(富田 滿)를 통해 장·감 양 교파와 구세단 및 군소교단을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하도록 적극 지시하였다.

     

    1945719일 각 교파에서 파송한 대의원 58(장로교 대의원 25, 감리교 대의원 22, 구세군 6, 그리고 5개 소교파 대의원 각 1)이 모여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성립시켰다.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들, 개신교 58

     

     

     

      평양대부흥회

        

     

     

     

    한국 교회사

     

     

     

     

     

    블루의 뜨락

    1 대장정에 돌입하며

    2 기독교와 한국교회의 접촉

    3 경교는 정말 한국에 들어왔었나

    4 천주교, 언제 어떻게 한국 전래되었나

    5 천주교 언제 한국에 본격 소개되었나

    6 개신교, 한국과 접촉하다

    7 조선에 온 두번째 개신교 선교사

    8 복음 전파의 선구자들

    9 만주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

    10 일본에서의 한글 성경번역

    11 국내외 정치상항 대변화

    12 한국 차는 선교사 줄이어

    13 , 호주의 초기 선교사들

    14 한국에 온 각 교파 선교사들

    15 잇달아 불 밝히는 한국교회

    16 주한 외교선교부 선교 정책

    17 초기 선교 정책: 선교지 분담 정책

    18 선교학교와 기독교 교육

    19 의료활동과 병원의 설립

    20 기독교의 수용과 성장

    21 한국에서 기독교 부흥 배경

    22 초기 한국교회의 찬송가

    23 국내에서의 성경번역 (1) 신약

    24 국내에서의 성경번역 (2) 구약

    25 금주. 금연 운동

    26 기독교 전파와 초기 수용자들

    27 부흥의 불길(1903~1906)

    28 1907년 평양서 일어난 대부흥

    29 백만인 구령 운동(1909~1910)

    30 평양장로회 신학교 설립

    31 협성 신학교 설립

    32 일본의 침략과 기독교

    33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 -1

    34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 -2

    35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 -3

    36 장로회 치리회의 조직

    37. 한국교회의 해외선교<1>

    38.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2>

    39.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3>

    40. 기독교와 사회변화<1>혼례. 장례

    41. 기독교와 사회변화<2>미신 타파

    42. 기독교와 사회변화<3>여성교육

    43. 기독교와 사회변화<4>신분타파

    44. 기독교와 사회변화<5>문맹퇴치

    45.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

    46. 초기 한국감리교회의 신학

    47. 1930년대 진보적 신학의 대두

    48. 1930년대 신학, 신비주의의 대두

    49. 이용도와 신비주의

    50. 일본 무교회주의와 김교신

    51. 박형룡과 전통주의 신학

    52. 김재준의 신학

    53. 신사참배 강요

    54. 기독교 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

    55. 교회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

    56. 신사참배 반대 운동

    57. 주기철 목사의 참배 거부와 순교

    58. 일제 말기 한국교회의 변질

    59. 일제 하에서의 신학교육

    60. 일본의 패망과 해방

    61.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출옥

    62. 북한에서의 교회쇄신운동

    63. 북한에서의 공산정권의 수립

    64. 북한에서의 기독교 탄압

    65. '기독교도연맹' 조직과 기독교 탄압

    66. 북한 기독교계 정당 결성과 와해

    67. 남한 정치 상황과 정부 수립

    68. 남한에서 교회재건<1>

    69. 남한에서 교회재건<2>

    70. 경남지방에서 교회재건

    71. 경남지방에서 교회분열

    72. 장로교계 신학교의 설립

    73. 선교사들의 귀환

    74. 이승만 정권과 기독교

    75. 한국교회의 상황

     

     

        

     

     

     

     

     

    교회의 훼절(毁節)과 수진(守眞)

     

     

     

     

    일제의 식민지 정책

     

     

    일제의 황민화와 전시 동원 정책

     일제는 1931년 만주침략, 1932년 상해침공,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1945년 패전하기까지 15년에 걸친 침략전쟁을 감행하였다. 또한 이러한 침략전쟁의 수행을 위하여 식민지 한국을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개편하고, 물자와 인력의 수탈․동원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한국인의 정신생활까지도 통제하였다. 일제는 식민통치 초기부터 우리 민족의 특성을 말살하여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즉 경찰과 군사력에 의한 폭력적 억압만으로는 식민지 지배의 안정을 얻기 어려웠기 때문에 식민지 민족의 정신 내부에까지 파고들어 민족의 독자성을 말살하고 일본화 시킴으로써 식민통치의 영구적 안정을 도모하며 수탈을 극대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말살의 ?동화정책?(同化政策)은 일제 식민통치의 기본방침이었으며, 1930년대에 들어 그들이 대륙침략을 재개하면서 이를 한층 강화시킨 것이 소위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이었다.

     

    ?황민화 정책?의 특징은 ?천황 신앙?의 강제를 축으로 하여 민족의 정체성(identity)을 빼앗아 민족성의 말살을 단기적으로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의 강요, 황국신민서사의 제창, ?창씨개명?과 일본어 상용(常用) 등을 강요하였다.

     

    일제가 한국인의 민족 말살적 ?황민화?와 전쟁 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내세운 논리가 소위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이었다. 이 논리에 의하면 ?한국 민족은 일본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일본 민족 속의 일부이며, 소위 흥아적(興亞的) 민족해방의 대상이 아니라 일본 민족과 함께 아시아 제 민족을 서구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주체?이며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니 ?구미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 해방?이니 ?홍아적 민족 해방전쟁?이니 ?성전?(聖戰) 등으로 미화하여 아시아 지역의 민족 해방문제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배 사이의 모순성을 은폐 시켰다.

     

    조선인에 대한?황민화?는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보다 더 적극화되었다.  조선교육령의 개정, 육군지원병제도 창설, ?창씨개명?의 실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결성, 경찰서 주재소를 중심으로 한 각종 시국좌담회의 개최 등을 강제하였다.

     

    1938년 7월 중일전쟁 1주년을 기념하여 결성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은 황민화의 중심적 기구로서, 하부조직으로 행정단위인 도(道), 부군도(府那島), 읍면(邑面), 정동리(町洞里)연맹 등의 지방 연맹과 관공서, 학교, 회사, 종교단체 등 각종 하부 연맹을 조직하고 그 아래 1O호 단위로?애국반?을 조직케 하여 민중 생활의 전반을 통제하였다.

     

    그 실천 요목으로 1) 매조 황거 요배(每朝皇居遙拜) 2) 신사참배 여행(神社參拜勵行) 3) 조선 제사 여행(祖先祭祀勵行) 4) 기회 있을 때마다 황국신민서사 낭송 5) 국기(일장기)의 존중․게양 여행 6) 국어(일본어)생활의 여행 둥 21개 항목을 정하여 실행케 하였다.

     

     일제는 전선의 확대와 전세의 악화에 따라 전쟁물자의 조달을 위하여 식민지 수탈정책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국방헌금?의 강제 징수, 저축의 강요, ?애국채권?의 강매, 유기(鍮器)․철기 등 금속 생활 집기의 강제 공출 등은 이러한 수탈정책의 일환이었다. 또한 일제의 침략전 수행과 식민지 지배에 있어서의 경제적 자원 수탈과 함께 최대의 희생을 강요하였던 것이 인력 수탈이었다.

     

    그들은 전선의 확대에 따라 부족한 병력과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조선 육군특별지원병제도(1937년), 국민 징용령(1939년), 창씨개명(創氏改名)명령(1939년),학도 동원령(1943년), 징병령(1944년)을 공포하고 수많은 인력을 강제로 동원하였으며, 급기야는 여자정신대 근무령(1944년)이라는 것을 공포하여 여성 인력까지 동원, 전선의 위안부로 전락시킴으로써 막대한 비인도적 희생을 강요하였다.

     

    일제의 교회에 대한 정책

    1930년대에 들어서 일본 정부의 종교단체법안 제정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특히 전시체제하에서 일본 정부의 종교 통제의도가 강화되어 ?종교단체 법안요강?, ?종교단체법초안? 등을 마련하여 종교제도 조사회에 형식적인 자문을 구하는 등 점차 그 포위망을 좁혀가다가 드디어 1939년 제74회 일본제국 의회에서 이를 통과시킴으로써 종교에 대한 통제를 본격화하였다. 이 법은 종교단체와 그 교화활동에 대하여 정부의 감독을 엄중히 하고 황도정신(皇道精神), 신국사상(神國思想) 등 신도적 이데올로기를 고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에 위배되는 기독교를 비롯한 제 종교는 가혹한 탄압을 받고, 그 존립을 위하여는 변질을 강요당하였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일찍이 1915년 포교규칙(布敎規則)을 발표하여 한국교회를 통제해 왔다. 그러다가 3․1운동 이후 기독교인의 저항에 놀란 총독부와 선교사들 사이에 어느 정도 타협이 이루어져 기독교만은 교회의 설립을 ?허가제?에서 ?계출제?, 즉?신고제?로 완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 종교단체법이 시행됨으로써 다시 ?인가제?로 환원되고, 교회의 설립은 물론 교역자의 자격까지도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야만 했으며 교규(敎規), 종제(宗制) 등도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이는 종교에 대한 형식적 외적 통제일 뿐 아니라 교리(敎理)와 교규에 대한 실제적인 통제로서 한국 기독교의 변질을 강요하는 가혹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를 통해 강제적 획일화와 종교의 변질을 강요하고 종교활동도 ?종교보국?(宗敎報國)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전시체제를 이유로 전쟁 협력의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1938년 2월 조선 총독부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 이라는 것을 마련하여 그들의 시책에 순응하게 하고, 국체에 적합한 야소교를 만들므로 그들의 침략정책 수행에 이용코자 하였다.

     

    신도(神道)와 신사 참배

    신도의 기원은 고대 일본인의 ?가미?(神)에 대한 신앙과 이에 대한 제사의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가미?라는 말은 신격(神格) 혹은 영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일본의 고유어로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 자연현상, 경이적인 자연물, 신화적 인물, 역사적 위인, 조상들의 영,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자들을 일본인은?가미?로 숭배하였고 이것들을 총칭하여 8십만 신, 혹은 8백만 신이라 하였다. 따라서 이?가미?라는 말은 고대인들의 공통 신앙 형태였던 자연숭배와 조상숭배에서 나온 다신교적인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가미?에 대한 신앙이 고대 일본의 천황 권의 강화와 함께 천황의 조상신으로 여겨졌던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중심으로 한 신화적 인물이나 영웅들을 신사(神社)에 봉제하여 숭배하는 신앙의 형태로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도는 고래(古來)로 일본의 정치권력 내지는 황실(皇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달하였다. 그러나 신도는 교리나 경전보다는 고대로부터의 관습적 의례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근대 이전에는 고등 종교인 불교에 눌려 그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이렇게 사상적 열세와 천황 권의 약화로 막부체제하에서 민간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던 신도가 17, 18세기 일본의 유학자들에 의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일본의 고유한 것을 찾기 위하여 고전을 연구하는 가운데 신도에 주목하고 복고신도(復古神道)를 제창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문하에서 막부말기에 신도사상에 입각한 배외적 국수주의와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나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메이지유신을 전후하여 신도는 천황을 절대 신으로 여기는 천황제 국가의 지도정신으로 이데올로기화되었고, 지배 통치의 원리로 채택되었다. 그 후 신도는 일본 정부의 보호와 육성 하에 급속히 발달하여 국수적 토착 종교로서 국교적 지위를 확립하여 갔다. 1871년에 일본 정부는 일본의 모든 신사를 국가의 종사(宗祀)로 하고 사격제도(社格制度)를 마련하여 신사에 공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조선에 신사 건립과 참배 강요

     이런 신도, 신사에 대하여 일제는 합병 후 조선총독부를 통해서 문화침략 내지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에게까지 신사신앙을 강요하였다. 총독부는 합병 직후부터 관립신사건립계획을 추진하여, 그들의 식민지 지배의 상징적 존재인 조선 신궁을 세우고 여기에 그들이 국조신으로 받드는 천조대신과 명치 천황을 봉제하였다. 그리고 일반 신사에 대해서도 점차 법령 정비를 통하여 관․공립적인 성격을 강화하고 그 설립을 장려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신사와 식민지 교육기관을 통하여 한국인에게 신도사상과 천황숭배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였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재개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사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여기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강요가 가장 먼저 발생한 곳은 교육계였다.

     

     일제는 신사신도를 국민적 애국교육정책의 기초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충성과 애국심을 기르기 위해 필요한 훈련의 일환으로서 재학중인 모든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계 학교들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다시 신사문제가 일어났던 것이다.

     

    즉 1932년 1월 전남 광주지역에서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를 개최하고 학생들을 참석하도록 하였으나 기독교계 학교가 이를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다. 같은 해 9월 평양지역에서도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를 개최하고 기독교계 학교도 참석하도록 도지사가 공식 통첩을 보냈으나 숭실전문학교를 위시한 1O개교의 기독교계 학교가 불참하였다. 이듬해 9월 원산지역의 캐나다장로교 소속 진성여자보통학교도?만주사변 2주년 기념 순란자(殉亂者) 위령제?의 참가를 거부하여 경고를 받았다. 일제는 이러한 불참 저항에 대하여 행정기관을 통하여 강력히 경고하면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사찰을 강화하고 탄압을 가중하였다.

     

    1935년 평양 숭실학교 교장 맥큔(윤산온) 박사와 숭의여학교 교장 스누크는 파면을 당하였고, 1938년 3월 평양 3숭(숭실,숭의,숭덕)이 폐교 당했고, 대구의 계성, 신명, 재령의 명신, 선천의 보성, 신성, 강계의 영실, 서울의 경신, 정신학교 등이 문을 닫았으며, 9월에는 광주의 숭일, 수피아, 목포의 정명, 영흥 4개교와 춘천의 매산, 매산녀, 담양의 광덕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 당했으며, 이어 순천의 매산, 전주의 신흥, 기전, 군산의 영명 학교도 폐교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서울의 경성신사와 부산의 용두산 신사를 각각 국폐 소사(國幣小社)로 승격시켰다. 이어 ?1면 1신사 정책?을 세워 산간 벽지의 면 단위에까지 ?신사를 세우게 하고, 일반 민중에게까지 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파출소, 주재소 둥 관공서나 학교에 신궁대마를 넣어두는 간이 신사라 할 수 있는 가미다나(神棚)를 설치하게 하더니, 마침내 관할 행정기구를 통하여 일반 민가에까지 신궁대마(神宮大麻)를 강매하여 가미다나를 설치하게 하고 아침마다 이에 참배하도록 강요하였다.

     

    교회에 신사참배 강요

    조선교회에 대하여 총독부가 직접적으로 일본적 전향을 요구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것은 1938년부터였다. 중일전쟁 이후 이른바 ?황민화 운동?의 고조와 함께 교육계에서의 신사참배문제가 그들의 의도대로 일단락 되어가자 이제직접 그 강요의 마수를 교회로 향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1938년 2월?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을 새워 일반 교도들의 신사참배를 지도, 강화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일선 경찰력을 동원하여 개개의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노회, 총회에까지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강요하였다. ?신사참배거부 교도 단호 검속’ 이라는 강경책과 함께 한국 교회 목사들을 일본에 파견하여 이미 그들의 정책에 굴복한 일본교회들을 돌아보게 하는 등 방책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6월에는 일본기독교대회 의장인 도미다(富田滿)를 내한하게 하여 신사참배에 대한 설득 강연을 하게 하였다. 1938년 여름부터는 개 교회에 대해서도 경찰을 통해 ?천황이 높으냐? 하나님이 높으냐?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냐? 국가의식이냐? 국가지상(至上)이냐? 종교지상이냐??라는 유치한 질문서를 보내 그 답변 여하에 따라 집회를 해산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일제는 종교단체법을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예배순서에까지 애국적 의식을 넣도록 강요하는 한편 예배당에도 가미다나를 설치하도록 강요하였다.

     

    신사참배 강요(神社參拜强要)와 주기철 목사 순교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결성된 조선청년회연합회 창립총회의 임원 명단에는 윤자영(尹滋瑛)·이영(李英) 같은 사회주의자, 안확(安廓)·장덕수(張德秀)·장도빈(張道斌) 같은 민족주의자와 함께 경남 창원 웅천청년운동단의 대표로 주기철(朱基徹)도 올라 있다.  주기철이 웅천에서 1500리 떨어진 평북 오산중학교로 진학해 교장 조만식을 만난 것을 아들 주광조는 ‘나의 아버지 순교자 주기철 목사’에서 ‘하나님의 섭리’라고 썼다.

     

    주기철(朱基徹, 1897년 11월 25일 ~ 1944년 4월 21일[1])은 한국의 장로교 목사이자 독립 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여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순교했다. 주기철은 1938년 제27차 신사참배를 가결한 총회 이후, 불법 총회의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에 의해서 1939년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반대 이유로 장로교 목사직을 면직당했다. 이는 불법 총회와 노회가 주기철을 면직할 정당성이 없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7년 4월 20일 산정현교회에서 예장통합 서울 동노회와 1997년 장로회신학대학교는 목사직 복권과 장신대의 학적 복적을 선포하는 등 신사참배를 가결한 불법총회와 노회에 의해 면직된 친일역사를 오히려 정당화하는 행사를 가졌다.[3] 그의 생을 기린 전기가 2007년《예수의 양 주기철》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938년 9월 10일, 장로교가 제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면서 신사참배 논쟁은 일본의 완승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한 결과는 그해 2월에 교세가 가장 강했던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면서 예견된 것이었다. 이는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이미 9월 총회 이전에 신사 앞에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우상숭배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니었다.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이라는 감언이설은 어디까지나 현실 타협론자나 순응론자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었다. 신앙 양심에 충실하고자 했던 신사참배 반대자들에게는 그러한 감언이설이 독약에 불과한 것이었다.

     

    주기철(1897-1944)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관련해 하나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신사참배에 반대한다고 네 차례나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당시 일제의 고문은 잔혹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당시 대다수의 지도자들이 어쩔 수 없이 일제에 순응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일제의 잔혹한 고문 때문이었다고 할 것이다. 단번에 순교의 칼날을 내민다면 그래도 해 볼 만하지만 목숨은 끊어지지 않도록 하면서 끝없이 가해지는 잔혹한 고문은 생각만 해도 끔직하고 몸서리쳐지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그러한 박해 가운데서도 결코 자신의 신앙을 꺾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순교자적 영성을 가진 신앙인은 아니었다. 본래 그는 민족주의 근대교육을 통해 ‘세상에 진출’하려던 사람이었다. 이는 경남 웅천의 개통학교, 평양의 오산학교, 조선예수교대학교(연희전문학교)로 이어지는 그의 교육 배경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들 모두는 민족계몽과 민족독립운동의 중심에 있던 학교들이다.

     

    하지만 진학 1년 만에 대학을 중퇴하게 되면서 그의 계획은 틀어지게 되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낙향한 후, 그는 어려운 중에도 가정을 살피며, 교회활동에도 열심이었다. 1920년 9월에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렸던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가 그 계기가 되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는 초량교회와 마산교회를 거쳐 산정현교회로 부임했다. 그때가 1936년 7월로 신사참배에 대한 분분한 의견으로 어수선한 시기였다. 이 와중에 그를 기다린 것은 시련과 고난이었다. 물론 그것은 당시 우리 민족과 교회가 부딪쳐야 했던 역사적 실존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4차에 걸쳐 검속되었다. 제 1차 검속(1938/4-1938/6)은 신사참배 강요의 분기점에, 제 2차 검속(1938/8-1939/1)은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을 앞둔 시기에 농우회사건 연루혐의자로, 제 3차 검속(1939/10-1940/4)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절정기에, 그리고 마지막 검속(1940/9-1944/4)은 일제가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일시에 검거할 때이다.

     

    제 2차 검속에서 석방된 후, 주 목사는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둘째, 장기간의 고난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이는 마치 그가 자신의 미래를 알고 유언한다는 것과 같은 설교였다. 이 설교를 들은 산정현교회의 신자들은 모두 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설교가 있은 후, 일제는 주 목사에게 3개월 내에 목사직을 사면하라고 협박했다. 그러면서 목사직을 사면하면 신사참배는 강요하지 않겠다는 타협안도 내놓았다. 그리고 어느 주일 아침, 일제 경찰대는 산정현교회당을 포위하고 그에게 “오늘부터 설교하지 말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주 목사는 “나는 설교권을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면 그만 둘 것이오, 내 설교권은 경찰에서 받은 것이 아닌즉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할 수는 없소”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경찰관은 “금지함에도 불구하고 설교하면 체포하겠소”라고 최후의 통첩을 가했다. 이에 주 목사는 “설교하는 것은 내 할 일이오, 체포하는 것은 경찰이 할 일이오. [그러니] 나는 내 할 일을 하겠소”라고 대답했다. 결국 그는 며칠 후 연행되었다. 일제의 요구를 수용하여 평안히 살기보다 끝까지 싸우다가 죽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한편, 그는 1940년 9월에 검거된 후 1944년 4월 21일에 순교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이것은 주 목사가 작사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영문 밖의 길’이라는 찬송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찬송 3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눈물 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십자가의 길은 혼자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신앙이란 어차피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이며 그분과 함께 독보(獨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기철 목사가 남긴 '남을 위해 일사각오'라는 설교를 보면, "예수의 삶 전체는 남을 위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 탄생하심도 남을 위하심이오 십자가에서 죽으심도 죄인을 (구원하기)위하심이었나니 이 예수를 믿는 자의 행위도 또한 남을 위한 희생이라야 한다. 세상 사람은 남을 희생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지만 예수교는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구원하는 것이다. 자기가 죽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殺身愛人), 그 얼마나 숭고한 정신이며 그 얼마나 거룩한 행위이냐!"라는 내용이 있다. 《예수의 양(蘇羊) 주기철》/김인수 저/홍성사刊

     

    기독교도의 조선독립음모사건(일명 의성농우회사건) 판결문

     

    교회의 훼절과 부일 행각

     

     신사참배 결의와 일제화 교회

    신사참배에 대하여 한국 교회들은 일치된 행동을 보이지 못하였다. 반대론이 있었는가하면 일본의 주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교회들도 있었다.

     

    각 교단들의 신사참배 참여

    각기 시기의 차이는 있었지만 천주교, 감리교,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 교파들이 줄줄이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에 응했다.

     

     1936년 감리교회에서는 양주삼 총리사가 총독부 초청좌담회에 참여 후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민의례라는 일본의 설명을 그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감리교 교회들이 신사참배들을 하고 감리교 계통의 학교들이 해방될 될 때까지 그대로 존속할 수 있었으며 교회의 수난도 가벼웠다. 감리교의 제3차 연회(1938.10. 5-13)가 모였을 때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참석하여 축사까지 할 정도였고, 총리사 양주삼 박사는 내선일체를 강조하기까지 하였다.

     

     장로교의 신사참배 결의

    장로교의 경우는 그 양상이 달랐다. 1931년 9월, 경남 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신사참배 강요가 계속되자 장로교 선교사들은 선교 실행 위원회를 1936년 초에 소집하고 미션 학교의 폐쇄를 원칙으로 정하며, 그해 1O월의 실행 위원회에서는 1938년까지 평양 내외의 학교 폐쇄를 단행하였고, 본국의 승인도 얻었다. 이런 장로교회가 신사참배 강요의 고통을 겪다가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강압에 의하여 불법적으로 참배 결의를 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

     

    ▶ 1938년 전국적으로 노회가 모이기 시작하자 일본은 조직적으로 파괴 공작을 하기 시작하고, 반대자들에 대한 검속이 일어났다. 이런 험악한 가운데 1938 9월 9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제27회 총회가 회집 되었던 것이다.

     

     일본 경찰 97명이 193명의 총대들 사이에 끼어 앉아 회의를 감시하는 가운데 다음날, 오전 1O시 일제의 각본대로 박 응률 목사가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이니 국민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 참배 결의와 성명서 발표 제안을 하였다. 이에 회장 홍 택기 목사는 가(可)만 묻고 부를 묻지 않은 채 가결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방 위량 선교사와 한 부신 선교사가 결의의 불법을 외치자 일본 경찰들은 폭력으로 밖으로 끌어냈다. 총회 폐회 후 부회장 김 길창 목사가 각 노회장들을 인솔하고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하였다. 한국 교회의 신앙적 지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변질 신학교 설립

     

     조선 신학교 설립

    1938년 9월 조선 예수교 장로회 체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선교회에서는 평양신학교 제2학기 개강을 무기연기 하였다. 제3학년 1학기 수강자들에게 대하여는 통신으로 수업하여 1939년 3월 28일부로 졸업증서를 우편으로 보내었다. 이것이 선교사들의 마지막 신학교육이었다. 이 때의 졸업생은 52명이었다. 이렇게 선교사 운영의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았을 때 서울에서 새로운 신학교 설립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1939년 9월 신의주에서 모였던 제28회 총회에서 조선신학원 설립 경영을 인준하였으며, 194O년 4월 19일 서울 인사동 승동교회 하층에서 개강을 보았다. 이 신학교의 설립 목적은 「본 신학원은 복음적 신앙에 기초하여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여 충량유위의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한다」이었다. 역대 교장과 교수, 강사 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 학원장 : 김 대현〔金大鉉), 윤 인구(尹仁駒), 김 재준〔金在俊), 송 창식〔宋昌植), 함 태영〔咸台永), 김 정준〔金正俊)

     

    ▶ 교수, 강사 : 윤 인구, 김재준, 궁내창〔宮內彰), 이 정로, 전필순, 현제명, 김 창제, 갈 홍기, 송 본탁〈松本卓), 전 성천, 유 호준, 花村芳夫, 村岸淸彦, 박 태준, 한 경직, 정 대위, 권태희, 공 덕귀, 최 윤관 (1945년까지).

     

    이 신학원은 1943년 2월에 감리교 신학교와 합동 수업을 실시하였으나 5월에 분리하여 덕수교회에서 수업하게 되었고, 김 재준 목사가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군정청에 학교인가를 제출하여 인가를 받고 김 재준 목사가 신학교장으로 정식 취임하였다.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 신학의 본산지인 오늘의 한신대학인 것이다.

     

     평신〔平神)의 변신 복교(變身復校)

    1939년 3월 평양에서 신학 교육부가 모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신학교는 총회에서 직영한다. 기본금 5O만원을 모금하고 신학교 인계 청원을  선교부에 발송한다」 이 청원에 대하여 선교사 연합 공의회에서는 수락할 수 없다고 통보하였다. 그러나 동년 9월 총회에서는 평양신학교 복교를 결의한 뒤 1940년 4월 11일에 개교하였다. 그 진영은 다음과 같았다.

     

    이사 : 이사장-김 석창〔金錫昌), 실행이사-김 석창. 이 문주, 이 인식, 이 승길, 이 영희, 김 선환, 고 한규, 김 관식.

    장 : 채 필근. 교수, 강사 : 고려위, 田中理夫, 이 승길, 齊藤佐, 山本新, 김 관식.

    이렇게 되어 장로교회의 신학교가 서울과 평양에 따로 따로 서서 일본의 어용 기독교 일군들을 양성하였다.

     

    만주 신학교 설립

     1941년 만주에 있는 교회들이 총회를 결성하여  신학원을 설립하였는데 교장에 정 상인, 교수에 박 윤선, 박 형룡, 菊地一郞 이었으며, 강사에는  김 선두, 안 광국, 와다나베, 이 성주, 김 세진, 제 창봉 이었다. 졸업생들을 보면 3회에 걸쳐 이 웅화, 김 치묵, 황 금천, 이 성찬, 장 동훈, 오 병수, 최 의종, 남 영환, 전 영흥, 장찬준, 백 리언 이었다.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

    일제는 기독교 계통의 기관들을 해산하고 일본 체제에 알맞게 변형시켜 나갔다. 선교사들은 아무리 총회의 결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신사참배를 할 수가 없어 한국 교회에서 제명하고 개인 자격으로 전도하였다. 선교부 경영의 미션 스쿨은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한국인이나 일본 재단에 이양하기 시작하였고. 1939년에 그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연희 전문학교의 경영은 194l년까지 원 한경 박사의 고집으로 유지되었으나 총독부 손에 넘어갔고, 이화 여자 전문학교는 1940년 1O월에 경성 여자 전문 학교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자 1940년 1O월 서울 주재 미국 공사 마쉬(Marsh)는 선교사의 완전 철수를 명령하였고 이에 대부분이 철수하였다. 마지막으로 철수한 것은 원 한경 박사인데, 1942년6월에 부산을 떠났다.

     

    194l년 l2월 18일,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미국과 영국에 도전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 박해는 더욱 심하여졌다. 미국식 교파 이름은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일본식의 교단(敎團)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하였으며, 여러 교파들을 합동하여 일본기독교조선 교단을 만들었다. 침례교, 성결교 등이 재림 사상 문제로 1943년 해체되었고, 지도자들은 시골에 은거하거나 만주 등지로 망명하였으며, 감옥에서 수난을 겪고 있었다.

     

    조선 교회의 일본화를 꾀하기 위하여 일본은 1942년 3월 <革新敎團>을 조직하고 헌법을 제정하며 전 필순 목사를 의장으로 뽑았다 .성경에서 출애급기, 다니엘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구약성경을 없애고, 요한 계시록과 찬송가를 개편케 하였다. 이 부분을 떼어내든지 먹으로 칠하여 보지 못하게 하였으며. 후에 와서는 구약을 전부 없애고 신약성경도 4복음서 외에는 모두 없애 버렸다, 그러다가 1945년 7윌 19일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교파들도<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으로 통합하여 일본 기독교화 시켜버렸다.

     

    교회의 부일(付日)행각

    일본의 앞잡이 교역자들은 일본의 정책에 협력하여 하나님을 배신하며 조국을 배신하고 동역자를 배신하고 신사참배에 동조하였고 황국신민이 된 것을 감사하였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예수 이름으로 세례 받은 것을 깨끗이 씻고 천조대신 아들이 되기 위하여 한강에서, 부산의 송도 앞 바다에서 일본의 귀신대장 '미소기바라이'(淸淨)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944년 9월 경성 상동교회에 황도 문화관을 설치하여 갈홍기 목사를 관장으로 임명하고 류형기 목사 등은 교역자들에게 친일 교육사상을 교육시킨 후 이들을 한강에 끌고 가 '미소기바라'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머리에 일장기를 두르고 남산 조선신궁까지 구보시켜 신사참배를 하게 하였다.

     

      해주 장로교 김응규 목사는 천황사진에게 배례하기를 건의하여 배례를 할 정도였고.  해주 강태동감리교회 관리자 박봉근은 신자 20여 명과 함께 아예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폐쇄해 버렸다.  경남 조평리 성결교회 신도들도 교회 사상이 일본 정신과 상용될 수 없다고 하여 해산하였다. 교인들은 가정에 '가미나다'라는 신사를 설치하고 거기에 '천조대신 지궁'이라는 팻말을 붙이도록 강요하였다.

     

      전북 금산의 이칠봉은 기독교의 신사참배 거부에 불만을 품고 탈교하였고, 전남 보성에서는 기독교 교리가 국체에 반하는 것이라 하여 교인들이 탈교하고 예배당을 대일본 정신도장으로 개칭하고 그 안에 가미다나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정든 교회와 고향을 떠나 멀리 이역의 땅 만주로 이사한 은기호 집사를 한국인 목사가 일본 경찰을 앞세워서 고발하여 옥고를 치르며 탄식하게 하였다. ‘조선 종교 전시보국회’는 감리교의 갈홍기, 이동욱, 구세군의 황종률, 장로교 신삼일웅, 채필근, 천주교 김광한, 일본의 강본 등이 가담되어 조직되었다.

     

      유형기, 정춘수, 정인과, 갈홍기 등은 '시국대응 전선 사상 보국연맹'과 '황도문화관'등의 단체에 적극 앞장섰다.  구자옥은 황도학회에 가입하여 일본을 찬양하였고 윤치호, 구자옥, 정인과, 정춘수, 양주삼, 신흥우 등은 임전대책 협의회와 임전보국단에 가입하였다.  김활란은 조선언론 보국회에 가입하여 일본의 하수인 노릇을 하였다.

     

      정인과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것은 국민으로서 하지 못할 자국에 반기를 든 것"이라고 하여 일본을 '자국'이라고 하였다. 교회 안에는 '가미다나'가 설치되었고, 예배를 드리기 전 여기에 절을 먼저하고 천황을 향해 머리 숙여 동방요배를 한 다음 예배를 드렸으며 목사들 복장은 일본식 군복이었다. 장로교 총회 교육부 사무실에는 일본의 국조신인 아마데라스 오오카미의 사진을 걸었다.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이 신도의 창조설화와 위배된다고 하여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를 고백하지 못하게 하여 빼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또한 찬송가 260장도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1939년 성결교회 이명직 목사는 기독교가 서양종교가 아니라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지지하면서 일본은 로서아보다 기독교를 보호한다고 일본을 찬양하였다.    1941년 활천 9월호에 그는 “우리는 황국의 신민이다.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세계 어느 곳으로 가든지 일등국민의 대우를 받는 것이다.  만세일계 천황봉대에 천황의 적자이다...  이것은 실제로 영광이다”고 하였다.

     

      1940년 5월 31일 성결교 산하 성서학원이 경성신학교로 승격되어 11월 5일 오후 2시 개교식 때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제송, 만세삼창 등을 하여 조선총독부에서는 성결교총회에는 굳이 신사참배를 결의해 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없었다.

     

      1938년 9월 9일 제27회 장로교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총회 기간 중 평양 기독교 친목회 회원 심익현 목사는 총회 회원 전원에게 신사참배 즉시 실행하기를 특청하여 12시에 부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내로 전국 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해서 평양 서기산 신사에 도착, 신사참배하였다.

     

      1938년 12월 12일 홍택기, 김길창, 양주삼, 김종우, 이명직 목사 등은 전국 기독교를 대표해서 일본의 이세신궁 가시하라신궁 등에 참배를 하였다.  이때 홍병선 목사는 “황국신민으로서 신사참배는 당연하다”고 하였다. 

     

      1939년 10월 8일, 경성 성서학원 강당에서 일제의 앞잡이 조직인 국민정신총동원 성결교회 연맹 결성식이 관계 당국자들의 축사와 함께 있었다.  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규약선언, 묵도(황군장병과 동양평화 위해) 일제 내빈축사 일황을 위한 축포가 있었다.  규약에는 내선일체 거국일치 국민정신 동원이란 취지를 달성하고 전도보국을 실천하기 위해 각 지방에도 연맹을 조직하였고 이사장에는 이명직 목사였다.

     

      1941년부터 활천의 매호마다 성결교회 신도(神道) 실천보고가 실렸고 십일조헌금을 명하여 총독부에 바쳤다.  설교시간인데도 12시가 되면 전체가 일어나 일본국가를 위해 일분간 묵도를 하였다.  이명직 목사는 황실은 신성불가침이요 절대요 통치자이므로 공경해야 한다.  신자는 제도에 순응해야 한다고 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2월 12일 이명직 목사는 경성 성결교회 신도에게 전시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수요일 정기 연합기도회를 시달하면서 “일본 필승의 기도”를 시달하였다.

     

      1936년 6월 29일 총독부에서는 양주삼 목사에게 “감리교가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해달라”고 요청하자 양주삼 통리는 “국민의 의무일진데 누구나 참배할 것이니 구태어 결의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1937년 전영도 목사가 “중일전쟁은 성전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미국의 주지사, 시장, 상·하의원들에게 4,800여 통을 송달하였다.

     

      1941년 8월 20일 조선 임전복구단에 윤치호, 구자옥, 정인과, 채필근, 정춘수, 양주삼 목사와 김활란, 신흥우 등이 앞장 섰으며, 1943년 11월 조선 전시 종교복구회가 조직되어 감리교 갈홍기, 장로교 채필근, 천주교 김한수 등이 앞장섰다. 혁신교단들은 예배시작 전 5분간 천황사진 또는 동방요배, 전몰용사들의 영혼을 위한 묵념, 출정장병의 무운장구 기원, 황국신민의 서사제송을 한 후 예배를 드렸다.  1943년부터는 밤 예배는 아예 금지시켜 버렸다.

     

      1942년 5월 8일 육밀 제1147호 “조선에 징병제 시행 준비의 건”이 발표되었다. 이 발표를 했을 때 친일파들은 일제히 환영을 하고 나섰다. 윤치호, 최린, 박춘금, 백락준, 배상명, 현제명 등은 대대적으로 환영하였던 것이다.  일반인들만 환영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까지 환영을 하여 세인을 탄식케 하였다.

     

      1942년 5월 11일 저녁, 기독교 대표들은 “징병제 시행감사 전 경성 신도대회”를 열었다. 국민의례를 마치고 화곡춘수 감독의 개회사에 뒤이어 전필순 목사로부터 징병제 시행에 대한 감사와 아울러 이날 밤 장내의 감격이 동포에 전하여지기를 기도한 후... 총독과 일본 수상 이하 관계 당국에 감사문을 타전할 것을 결의하였다.

     

      1942년 10월 서문밖교회에서 모인 조선예수교장로회 31회 총회에서 교회 종 헌납이 1,540개였다.  다른 교단 것까지 합해서 2,500여 개를 헌납하여 교회는 군수물자 지원부대가 되었다. 감리교는 교회를 매각하여 군납헌금도 하였다

     

      1942년 7월 1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본군 환자용 자동차 2대를 헌납하였다.  그리고 조선 장로호라는 해군 비행기와 육군 비행기를 미군과 싸워 이겨달라고 헌납하였으며 그들은 1942년 11월 17일 용산역 연병장 헌납식에서 기독교 예배가 아니라 일본의 신도의식으로 거행하였다.

     

      1944년 2월 2일 기독교신보 사설에서 “미·영을 토벌하기 위하여 하루라도 빨리 일선에 비행기를 보내자”라고 외쳤다.

     

     1942년 12월 김활란은 <신시대>에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라는 글을 썼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반도여성은 웃음으로 내 아들과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 라고 하면서 전시 동원에 적극 협력하라고 외쳤다.

     

      1941년 12월 모윤숙은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직후 조선임전 보국단이라는 친일 어용단체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우리들 여성의 머리 속에 대화혼이 없고 보면 이 위대한 승리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 이라고 권장하였다. 김동환, 노천명, 김동인, 주요한, 김상용, 서정주, 장덕조, 김소운 등은 일본을 대대적으로 찬양하였다.

     

      1941년 12월 20일 반도호텔에서 미·영타도 좌담회가 박희도 목사의 사회로 15명이 참석하여 7시간 동안 개최되었다.

     

      1939년 박희도는 동양지광을 창간하고 권두언에서 “반도 2천만 동포는 일본정신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황도를 앙양해야 한다.  또한 폐하의 적자로서 황국 일본의...  현재의 내지인 조선인이라는 호칭이 단순한 지방적 호칭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징병제가 실시되자 동방을 향해 엎드려 경배하며 “감격에 목이 메였다”라고 하였다.

     

      채필근은 “국민 정신 총동원이 필요한 이때 종교인들도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야말로 도리어 이단이다”라고 단정하였다.

     

     친일파인 그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한 분들에게 “유다 같은 사람이다”라고 매도하였다. 친일파들은 독립을 위해서 무엇을 하였는가.  감히 기독교는 얼굴조차 들 수 없는 형편이었다.


    교회의 수진과 항일 운동

     

     

     

     

    항일 민족 운동

    일제하 한국 기독교인들은 복음에 대한 철저한 신앙과 함께?민족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각종 항일 민족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도 일부 친일분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반일적 성향은 매우 강하였다.

     

     황해도 해주의 감리교 전도사 김만식과 전남 나주의 기독교 개량서당 교사 김영환은?전쟁은 죄악?이라고 비난하여, 중일전쟁을?성전?(聖戰)이라고 선전하는 일제에 맞섰다. 강원도 이천의 감리교 유치원 보모인 전영신은 일본군 위문을 위한 천인침(千人針 : 출정 병사의 무사를 빌기 위해 천 명의 여자가 한 땀씩 붉은 실로 천에 매듭을 놓은 것)을 미신적 행위라 하고 금지시켰다. 평남 중화군 도제직회 때는 관할서에서 제직회 인도자 노영선 목사를 사전에 경찰서로 불러들여 시국좌담회 개최, 일장기 게양, 동방요배 실시 둥을 명령하여 실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교회 제직들이 반대하여 실행치 못하였다. 평북 강계의 기독교계 사립 영실학교에서 시국 강연회를 개최할 때도 기독교를 믿는 학생 2O여 명이 고의로 결석하였다.

     

    조직적인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로는 수양동우회와 흥업 구락부를 들 수 있다. 수양동우회와 흥업 구락부는 개량주의적인 측면도 없지 않지만 이중의 목적을 가진 일종의 민족주의 비밀결사였다.

     

    수양동우회

    수양동우희는 안창호의 흥사단 계열의 국내조직으로, 겉으로는 총독부로부터 양해를 얻은 인격수양․민족개조를 표방한 친목 수양단체였으나, 이면적으로는 민족의식고취와 민족 실력 배양을 통한 주권회복이 그 궁극의 목표였다.

     

     한편, 흥업구락부는 이승만의 동지회 계열의 국내 조직으로 겉으로는 산업의 진흥을 표방하였지만, 이면적으로는 해외 독립운동 자금의 지원과 국내 동지 확보, 계몽활동 전개를 통한 조국 독립운동 지원이 그 목적이었다.  이 두 단체는 다수의 사회 지도급 기독교인들이 가입, 활약하였고 해외 독립운동과 연계를 가친 국내 조직이었다는데 특색이 있다.

     

    수양동우회는 1922년 이광수 등에 의해 조직된 수양동맹회와 1923년 김동원 등에 의해 조직된 평양지역의 동우구락부가 1926년에 합동하여 만들어진 단체이다. 여기에는 주로 서북계 장로교인들이 많이 참여하여 활약하였는데, 서울의 주요한․이용설․김윤경․이대위․이윤재 등과 평안도의 김동원․백영엽․정인과․김성업․김선량․김항복․김하현․한승곤․한승인 및 함북의 송창근 등이 그들이었다.  1937년 이들의 활동이 발각되어 6월부터  서울․평양․선천 ․안악 지회의 관계자 181명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검거하여 이들 중 42명을 기소하였다.

     

    이들은 결국 1941년 1O월 제3심 공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이는 이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일제의 술책에 불과하였다. 이들은 주로 변호사, 의사, 목사, 저술가, 상공인 등 지도적 위치에 있던 민족주의자들이었으며, 특히 평양 선천지역 회원들은 거의 기독교 신자들이어서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흥업 구락부

    흥업 구락부는 1925년 신흥우․이상재 ․구자욱 등 기독교 유력 간부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표면으로는 국민의 복리향상과 산업 진흥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사실은?민족 관념을 보급하고 조선 독립을 도모?하여 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운동 자금을 대어주고자 하는 일종의 정치적 비밀결사였다. 이 단체의 주요 회원들은 모두 상류 유식 계충에 속하는 기독교 장로와 목사 및 교사 등 사회 유력자들로서 조직 당시부터 사회 각층의 우수한 지도자들 중에서 엄선하였기 때문에 기독교계 문화단체 및 사회단체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의 한 보고서는 이를?기독교를 통하여 조선독립운동의 실천에 착수한 현저한 사안(事案)?이라고 보았다. 비밀리에 활동을 전개하던 흥업구락부가 일제 당국에 탄로난 것은 중일전쟁 이듬해인 1938년의 일이었다.  신흥우․이건춘․구자옥․이관구․최두선 ․홍병 덕․정춘수 등 54명이 체포되어 견디기 힘든 가혹한 신문을 받았다. 일제는 이 사건 관련 인물들이 모두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었으므로, 이를 계기로 이들을 이른바 ?전향?(轉向)시켜 그들을 전쟁 협력자로 역이용하고자 온갖 위협과 회유를 하였다. 결국 이들은 이러한 일제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사상전향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6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비록 강요에 의한 것이긴 하였지만 일단 절개를 굽힌 이들은 일제의 각종 부일 협력 활동에 동원되어 철저히 이용당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행각은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민족과 교회의 변질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신사참배 반대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 첫째는 일제 당국이나 일제의 영향력 있는 기관 또는 인사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 것을 청원하는?신사참배 강요 금지청원운동?이요, 둘째는 일제의 강요에 끝까지 저항하여 신앙과 교회를 지키고자 한?신사참배 거부 권유운동?이었다. 물론 저항자들 가운데는 청원이나 거부 권유 등 대외적인 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은둔하여 자신의 신앙만이라도 지키려는 소극적인 항쟁 자들도 많았다. 이 때문에 일제의 경찰에게 끌려가 많은 고난을 받고, 이러한 것이 증거가 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신앙과 용기를 주고 적극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도 사실이다.

     

     박관준(朴寬俊) 장로는 수차에 걸쳐 총독에게 청원서와 경고문을 보내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경고하다가 여러 차례 경찰서에 끌려가 구류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청원, 경고가 효력이 없자 1939년 2월 일본 정계 요로 및 제국의회에 청원하기 위하여 마침 신사참배 거부로 선천 보성여학교 음악교사직을 사퇴하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하던 안이숙(安利淑)을 대동하고 일본에 건너갔다. 이들은 일본에서 신학교에 다니던 박장로의 아들 영창(永昌)과 함께 구세군 사령관 야마무로(山室軍平) 중장, 일본 기독교회 장로 히비끼 중장, 정우회(政宇會) 대의사 마쪼야마(松山常次郞), 전 조선총독 우가끼 등을 방문하여 진정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들은 순교할 각오를 하고 ?종교단체법안?을 심의하던 제74회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들어가 첫째, 종교법안 제정 반대, 둘째, 국교를 신도(神道)에서 기독교로 할 것, 셋째, 신사참배강요 등 악법 실시 강요와 양심적 교역자 투옥을 철폐할 것 둥을 내용으로 한 경고서를 단상을 향하여 투척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들은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경시청에 구금되었다가 평양으로 회송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박장로는 6년간의 옥고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일제의 강압으로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하자, 이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신도들은 서로 연대를 맺고 조직적 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 당국과 신사참배를 결의, 시행하는 한국교회를 비판하면서 신자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고 거부자들 간의 결속을 강화하였다. 그 중심 인물은 평안남도의 주기철, 평안북도의 이기선, 경상남도의 한상동․이주원 ․주남선, 전라남도의 손양원 등으로 전국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만주지역에서도 박의홈․헌트(B. F. Hunt, 韓富善) 등이 활약하였다. 이들은 초기에는 교회와 개인의 인적 지역적 연대를 가지고 활동하였으나 점차 지역간의 연대가 이루어져 경남지역, 서북지역, 만주 봉천지역 간의 교류가 있었다.

     

    의주의 북하단동교회 목사로 시무하던 이기선은 1938년 7월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교회를 사면하고 각지를 순회하며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다가 경찰에 여러 차례 검속을 당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순회활동을 통하여 동지들을 규합하다가 1940년 3월경에는 만주의 안동을 방문하여 이 지역의 신사참배 거부운동 자들인 최용삼․김형락․박의홈․계성수․김성심 등과 회합을 갖고 첫째, 신사참배를 죽어도 반대할 것, 둘째, 신사참배를 하는 학교에 자제들을 입학시키지 말 것, 셋째, 세속화되어 신사참배 하는 현 교회에 절대 출입하지 말 것, 넷째, 신사 불참배 동지들끼리 가정예배를 드릴 것, 다섯째, 신앙동지들을 확보하여 신령한 교회출현의 소지를 육성할 것 등을 협의, 결정하였다 그리고 계성수와 함께 지방전도를 하면서 신사참배와 궁성요배 거부를 역설한 뒤 평양의 채정민 목사에게 자신의 활동을 보고하고 향후 대책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황해도 지역 순회운동 계획을 세워 김의창과 함께 황해도 각지를 돌며 활동하다가 1940년 6월경 일경에게 체포당하였다.

     

    1938년 마산 문창교회 목사로 시무 하다가 신사참배 반대로 목사직을 사면한 한상동은 이주원과 함께 경상도 지역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1939년 12월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단지 종교운동으로만 그치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우므로 조속히 정치운동으로 전회시킬 필요가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첫째,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노회(老會)를 파괴하도록 할 것, 둘째, 신사불참배주의 신도로 신노회를 조직할 것, 셋째,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목사에게 세례를 받지 못하게 할 것, 넷째, 신사불참배 동지의 상호 원조를 도모할 것, 다섯째, 가정 예배 및 가정기도회를 힘써 개최하며 한편 개인전도 둥의 수단으로 동지들을 획득할 것 등을 협의, 결정하였다․그리고 부산․마산․진주․거창․통영 등 활동구역을 나누어 맡아 맹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하여 주기철 목사가 3차 구속에서 석방된 기회를 이용하여 평양을 방문하여 최봉석 ․박관준․주기철․채정민․오윤선․김의창․김지성․김인후․김형락․박의흠 등과 회합을 갖고 그 확대방안을 논의하고 돌아왔다. 한상동 목사는 이 운동의 전국 확산의 실행을 위해 노력하다가 그해 7월 부산 경찰서에 검속 되었다.

     

    3․1운동 직후 독립군 군자금 모금과 지원병 모집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룬 바 있는 주남선(朱南善) 목사도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38년 말경에는 그가 시무 하던 거창읍교회를 사임하고 한상동․이인재 등과 함께 조직적인 거부운동을 펴기 위하여 거창․합천․함양 등지의 교회를 순회하면서 설교를 통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수차 거창경찰서에 끌려가 수난을 당하였다. 1940년 7월 16일 다시 검속되어 부산을 거쳐, 이듬해 7월 평양으로 이송되어 해방이 될 때까지 거기서 옥고를 치렀다.

     

    ▶ 평양지역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본거지는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는 산정현교회였다. 주기철 목사는 순교를 각오하고 신사참배를 공개적으로 반대하였기 때문에 일제의 주목을 받아 1938년 1차 검속 이래 1944년 4월 21일 평양 감옥에서 순교할 때까지 전후 4차에 걸쳐 검속 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순교하였다. 산정현교회도 주기철 목사를 쫓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1940년 폐교되었다.

     

     규모가 작거나 개인적 차원의 신사참배 거부 저항은 전국 어디서나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전남지역의 손양원 ․백영홈 ․박영대 등과 전북의 배은희․김가전. 충북의 허성도․송희용, 경남의 조용학, 황해도의 이종근․박경구 등이 있으며, 교파적으로도 감리교의 이영한․강종근․권원호, 성결교의 박봉진․김 연, 동아기독교의 전치규․김영관, 안식교의 최태현 등이 있고, 천주교 신자들도 양심에 따라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투옥된 이는 대략 2천여 명에 달하고 2백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50여 명이 순교하였다.

     

    이러한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으며, 당시 교회의 변질을 경고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일본적 체제를 부정하고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한 저항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 민족사적 의미가 큰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에 한국 기독교가 두 가지 상반된 행동 양태를 보여주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거나 편승해서 저지른 친일 ․부일 행각과 민족정신과 순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 행적이 그것이다. 대다수의 교회 지도급 인사들과 제도적 교회, 기독교 기관들이 친일․부일적 행위를 보여준 반면에 소수?무명의?신앙인들은 주로 지방에서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같은 저항운동을 폈던 것이다.

     

    민족 문화 수호 운동

    일제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여 기독교 지식인들은 민족문화 수호운동에도 앞장을 섰다. 구한말 이래의 전통을 이어 일제하에서도 우리의 얼과 문화가 담긴 국어․국문․국사 등을 연구, 수호하고 가르친 것 등이 그것이다.  한말 기독교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한글학자들이 나타나 일제하에서 활약한 한글학자․교육가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많았다.

     한말 한글운동의 선구자인 주시경을 비롯하여 이윤재․김윤경․정태진․정인승․장지영 ․최현률이 그들이다.

     

    안동교희 장로로 시무하였던 이윤재는 한글연구, 《우리말 사전》의 편찬,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 한글보급에 한평생을 바친 인물로 ?한글장로?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그는 결국 이러한 활동 때문에 일제의 주목을 받던 중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1943년 12월 함흥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정동교회 장로였던 김윤경도 한글연구와 교육에 힘쓰면서 《조선문자 급 어학사》(1938년)를 저술하였다. 조선어 전기,(1924년)와 《조선어 철자법 강좌》(1930년) 등을 지은 장지영도 1920년도부터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여 한글연구와 보급운동에 헌신하였다.

     

     새문안교회 집사로 봉사하였던 최현배도 한글연구와 교육에 일생을 바쳤는데, 그는【우리말본》(1935년),《중등 조선어법》(1936년),《한글의 바른길》(1937년), 《한글갈》(1940년) 등 수많은 값진 한글연구 저서를 남겼다. 이들은 모두 한글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조직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활약하였기 때문에 1942년 일제가 국어에 대한 탄압정책의 일환으로 조직한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해방이 되기까지 함흥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관학자들에 의해 날조된 식민주의 사학에 대항하여 우리 역사를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주체적으로 보고했던 기독교인 역사가들도 출현하였다. 이러한 역사가들로 <동사략>(東史略) 5권과 아동용 한국사인 《죠션니약이》 5권 저술한 남궁억(南宮億), 우리 역사를 기독교적 사관에 입각하여?고난의 역사?로 인식하고 이러한 고난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갈파한?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써서 <성서조선〉지에 연재한 함석헌, 《한국개신교사》를 쓴 백낙준,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여 《조선상고사감》을 쓴 안재홍, <조선과학사>를 쓴 홍이섭 등이 활약하였다.

     

     1930년대에 기독교인의 민족문화 수호운동과 관련된 유명한 사건으로 ?모곡리 무궁화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사건은 일제가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그들의 국기인 일장기와 그들의 국화인 벚꽃을 보급하고 장려하는데 대항하여 홍천 모곡 감리교 전도사로 시무 하던 남궁억과 그 동지들이 민족정신을 고양하기 위해서 무궁화 묘목을 전국에 배포하는 운동을 전개한 것을 일제가 탄압한 사건이다.

     

     한말 기독교인으로서 언론활동과 교육활동을 전개했던 남궁억은 1918년 자신의 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보리울)에 내려와 모곡감리교회를 세우고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교회 내에 4년제 보통학교를 설립하여 선교활동과 함께 민족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학교에서 한국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는 한편, 민족 정신을 앙양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무궁화심기운동?을 펴고 무궁화 묘목을 가꾸어 보급하였다. 이와 함께 무궁화 자수, 무궁화 창가, 무궁화 시 등을 가르쳐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1933년 남궁억의 무궁화보급운동을 ?불온사상을 고취하고 민족주의를 선전하는 것?이라 하여 그와 모곡학교의 직원들, 그의 친척들을 모두 구속하고 무궁화 묘목 8만주를 불사르고 모곡학교도 공립학교로 강제 편입시켜 버렸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1932년에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춘천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십자가당이 적발되어 홍천지방 감리사로 시무하던 남천우(南天祐) 목사, 유자훈 목사 등 많은 기독교계 인사들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를 십자가당 사건이라 한다.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도 기독교인 문인․예술가들이 출현하여 활약하였다. 문학에는 전영택 목사․김말봉 장로․김현승․박두진․박목월․윤동주 등이 출현하였고, 미술 분야에는 한국화가로 김은호․김기창 둥이 활약하였다. 음악 분야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찬송가 창가 등이 한국 근대음악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물론, 기독교인 음악가로서 현제명․안익태 등이 활약하였는데, 안익태는 그때까지도 외국 곡에 붙여 몰래 부르던 애국가에 곡조를 붙여 오늘날의 애국가로 발전 시켰다.

     

     

     

     

     

     

     

     

    1937.06.06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 발생

         

    평양수양동우회 회원들 모습

     

    수양동우회는 1926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계몽적 독립운동단체로

    1922년에 조직된 수양동맹회를 개칭한 것이다.

     

    193766일 일본경찰이 수양동우회에 관련된 181명의 지식인을 검거한 사건이 일어났다. 수양동우회는 1922년 이광수가 조직한 흥사단 국내조직인 수양동맹회가 그 모체이다. 19227월에는 평양에서 안창호의 대성학교와 조만식 주도의 물산장려운동 관련자들이 동우구락부를 조직했다. 192618일 수양동맹회가 동우구락부를 흡수하는 형태로 통합이 이루어져 수양동우회가 되었다.

     

    수양동우회에서는 김윤경·이윤재·주요한·박현환 등이 기관지 <동광>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37년 재경성기독교청년면려회에서 금주운동 계획을 세우고 '멸망에 함()한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 등의 내용을 담은 인쇄물을 국내 35개 지부에 발송하자 일본경찰은 수양동우회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수양동우회에 대한 일본경찰의 탄압 결과 모두 181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송치되었고, 이광수가 징역 5년을 선고받는 등 재판에 회부된 42명이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4111월 경성고등법원 상고심에서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다.

     

    1937년 재경성기독교청년면려회에서 금주운동 계획을 세우고 그해 5'멸망에 함()한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 등의 내용을 담은 인쇄물을 국내 35개 지부에 발송했다.

     

    이를 알아낸 일본경찰은 그 배후에 이용설(李容卨정인과(鄭仁果이대위(李大偉주요한(朱耀翰유형기(柳瀅基) 등이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이들이 관계하고 있는 동우회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그해 66일 중앙간부 10여 명을 검거했고 이때 압수한 회원명부를 가지고 전국적인 검거에 나섰다. 그해 628일에는 안창호를 비롯한 평양지회 관계자들이 체포되었고 계속해서 선천지회(1937. 11)·안악지회(1938. 3) 관계자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19383월에 이르기까지 서울 55, 평양지회·선천지회 관계자 93, 안악지회 관계자 33명 등 모두 181명이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송치되었다. 그해 8월에는 49명이 정식으로 기소되었고 57명이 기소유예, 75명이 기소중지처분을 받았다. 기소된 49명 중 42명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안창호가 19383월에 사망하여 실제 재판에는 41명이 회부되었다.

     

    이들은 1939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검사의 공소로 19408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이광수 징역 5, 김종덕(金鍾德) 4명 징역 4, 김동원(金東元) 4명 징역 3, 조병옥(趙炳玉) 징역 26개월, 오봉빈(吳鳳彬) 7명 징역 2, 나머지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그러나 194111월 경성고등법원 상고심에서 전원 무죄를 판결받았다.

     

    45개월간의 구금기간 동안 일본경찰의 고문으로 최윤세(崔允洗이기윤(李基潤)은 옥사하고 김성업(金性業)은 불구가 되었다. 한편 검거 뒤인 19386월 전영택(田榮澤현제명(玄濟明홍난파(洪蘭坡) 등 수양동우회원 18명은 변절하여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에 가입하는 오점을 남겼다.

     

     

     

     

    '조선장로호'라는 일제 전투기가 있었다

     

     

     

      

    개인 뿐 아니라 장로교단 전체가 부일에 적극 협조국방헌금 일제에 바치기도

    친일 교육 기관을 통해 목회자가 양성되는 동안 장로교는 적극 부일에 협력했다. 신사참배를 교회의 친일행각 전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부일의 경우 훨씬 다양한 영역에서 다른 단체보다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경향을 띄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에 따르면, 장로교회는 1937년부터 3년간 국방헌금 158만원, 휼병금 172천원을 걷었고, 무운장구기도회 8953, 시국강연회 1355, 전승축하회 604, 위문 181회를 치렀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애국기(愛國機·전투기) 한 대와 기관총 7정 구입비 1531750전을 바치고, 미군과 싸워 이겨달라는 신도의식을 거행했다. 1942년 열린 제42회 총회 보고를 보면, 교회종 1540개 유기 2165점을 모아 12만여 원을 마련해 일제에 바쳤다.

     

    이러한 친일 부역이 '조선예수교장로교도 애국기 헌납 기성회' 회장 정인과 목사를 비롯한 일부 목회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장로교의 헌신(?)에 자극받은 감리교는 한술 더 뜬다. 1944년 교단 상임위원회의 결의를 보면, 애국기(감리교단호) 세 대 값인 21만원을 헌납하기로 했다. 모금은 '선도의 헌금 전액과 본 교단 소속 교회 병합에 의한 폐지 교회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충당하는' 방법을 택하고, '교회병합 실시 명세표'를 만들어 전국 교회에 보냈다.

        

     

     

     

     

     

    부역한 목사들, 기소유예로 풀려

    수많은 집회에 연사로 나서고, <동양지광>(발행인 박희도) 같은 친일 잡지에 글을 써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몰고, 친일 부역하도록 부추긴 기독교 인사들도 많았다. 또 구약 전체와 신약의 요한계시록을 폐지하고 나중에는 복음서만 성경으로 사용한 교회, 하나님나라 재림 심판 종말과 관련된 찬송가를 부르지 않는 교회, 예배마다 신사참배나 동방요배를 실시한 교회도 있었다. 그래도 "해외로 도피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사람의 고생은 마찬가지였다"(홍택기 목사)는 발언 정도는 삼가야 했다.

     

    그러나 홍 목사 같은 이들의 반발로 해방 후 출옥교인 중심으로 일어난 교회 내부의 회개운동은 무산되었고 (<복음과상황> 158),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반민특위)를 중심으로 일어난 교회 외부의 역사청산 움직임도 '기독교 정권' 이승만 정부의 방해로 실패했다.

     

    반민특위에 연행된 목사는 장로교의 정인과, 전필순, 김길창, 김동만, 전인선, 감리교의 양주삼 정춘수 등 친일 부역한 목사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김길창 목사는 적산을 불하받아 동아대학교 이사장, 학교법인 남성 대동 훈성 한성 등 사학재단 네 곳을 설립했고, 1962년에는 부산신학교를 설립해 교장을 맡았다. 그는 재산과 사회적 영향력을 배경으로 교계의 각종 단체 회장을 역임하는 등 '화려한 일생'을 보냈다.

     

    전필순 목사는 출옥 후 1957년 총회장이 되고,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이 분열될 때 예장통합의 중심 인물로 깊게 관여했으며, 1961년 연동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반면 정인과 목사는 지나친 친일행각 때문에 반민특위에서 석방된 뒤에 교계로 복위하지 못했다.

    주재일 기자/뉴스앤조이

     

     

     

    [주재용] 만우 송창근의 성빈의 삶과 사상(3)

     

     

     

     

    그러나 송창근의 평양목회 기간은 겨우 3년이었다. 1936년 4월에 그는 평양 산정현교회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가 산정현교회를 사임하게 된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설(設)이 있다.


    김재준에 의하면 신사참배의 문제가 있었다.

     

    “평양에서 안정할 것 같던 무렵에 ‘신사참배’ 문제가 있었다. 목사 이하 모든 기독교인들이 예외 없이 신사에 참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晩雨는 강경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설교할 때마다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전국 교역자들의 보조가 맞지 않아서 일은 난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산정현교회를 사임하고 부산에 가서 호주 선교부의 후원을 얻어 빈민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은 이른바 삼숭(三崇), 즉 숭실전문, 숭실, 숭의여학교 등의 존폐문제로 격론을 벌일 때 당시 종교교육부 총무이던 정인과(鄭仁果)가 신사참배를 해서라도 학교 교육을 계속 해야 한다고 하자 송창근이 정총무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회장 밖으로 밀어 내쳤다는 이야기”와 연결되기는 하지만 신사참배 문제가 송창근의 산정현교회 사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는 보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송창근의 후임으로 주기철이 부임해 왔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지역적 갈등과 교권과의 충돌이 있을 수 있다. 사실 정인과 사건은 이 두 가지 갈등을 모두 포함한다. 정인과는 당시 장로교 총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서북계의 총수격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정인과에 대한 송창근의 행동은 곧 비서북계가 교권에 대한 도전을 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가 있었다. 송창근은 교회내 당파, 지역갈등에 대해서 한탄하고 있었다.

     

     

     

     

     

     

     

    친일파(親日派)에 관하여..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협력한 한국인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 19세기 말에는 조선정부를 일본의 종속하에 두기 위하여 정부 요인에 대한 친일공작이 있었다. 특히 일본에 정치적 망명을 한 사람이나 일본유학생이 대상이 되었다.

     

    1905년 이후 실질적인 일본 지배 하에서는 한일합병을 위한 매판적 관료와 명리(命理)에 급급한 사람들이 이용되었다. 친일파가 가장 대량적· 계통적으로 육성된 것은 3· 1운동 이후의 이른바 문화정치기로서 민족운동, 노동· 농민운동, 공산주의 운동이 일체가 되어 발전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일본의 위정자들은 그 분열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친일파를 활용하게 되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에 들어갔으나, 이승만과 경찰 등 당시 실질적인 세력의 방해로 친일파 척결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친일파는 사회적 권력과 금권력을 바탕으로 점점 확고한 위치를 굳혀 국가의 핵심적 세력으로 존재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을 주도해 나갔다.

     

    친일인명사전 기독교 수록인물

    기독교 박마리아 마리아 교육학술전쟁협력

    기독교 갈홍기 葛弘基 전쟁협력

    기독교 고한규 高漢奎  

    기독교 곽진근 郭塡根  

    기독교 구연직 具然直  

    기독교 구자옥 具滋玉 전쟁협력

    기독교 김관식 金觀植  

    기독교 김길창 金吉昌  

    기독교 김수철 金洙喆  

    기독교 김영섭 金永燮  

    기독교 김우현 金禹鉉 전쟁협력

    기독교 김응순 金應珣  

    기독교 김응태 金應泰  

    기독교 김인영 金仁泳  

    기독교 김종대 金鍾大  

    기독교 김진수 金珍洙  

    기독교 김형숙 金瀅叔  

    기독교 남천우 南天祐  

    기독교 박연서 朴淵瑞  

    기독교 박현명 朴炫明  

    기독교 변홍규 卞鴻圭  

    기독교 송창근 宋昌根  

    기독교 신흥우 申興雨 전쟁협력

    기독교 심명섭 沈明燮  

    기독교 양주삼 梁柱三 전쟁협력

    기독교 오문환 吳文煥  

    기독교 유각경 兪珏卿 전쟁협력

    기독교 유일선 柳一宣  

    기독교 유형기 柳瀅基  

    기독교 윤하영 尹河英  

    기독교 이동욱 李東旭  

    기독교 이명직 李明稙  

    기독교 이용설 李容卨 전쟁협력

    기독교 장기형 張基衡  

    기독교 장홍범 張弘範  

    기독교 전필순 全弼淳  

    기독교 정순모 鄭順模  

    기독교 정인과 鄭仁果 전쟁협력

    기독교 정춘수 鄭春洙 전쟁협력

    기독교 조승제 趙昇濟  

    기독교 채필근 蔡弼近 친일단체

    기독교 최지화 崔志化  

    기독교 최활란 崔活蘭  

    기독교 한석원 韓錫源  

    기독교 홍병선 洪秉璇  

    기독교 홍택기 洪澤麒  

    기독교 황종률 黃鍾律

    가톨릭 [7]김명제 김윤근 남상철 노기남 신인식 오기선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