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 김동환(金東煥)

草霧 2013. 12. 9. 15:16

 

 

 

문학

 

 

김동환(金東煥, 창씨명 白山靑樹, 1901∼?)

 

 

 

각종 친일단체의 핵심으로 맹활약한 친일시인

 

 

 

 

 

강북인(江北人), 파인(巴人), 백산청수(白山靑樹)
1901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16년 서울 중동 학교(中東學校) 입학
1921년 일본 도요(東洋) 대학 영문과 입학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 중지
1924년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로 등단
1925년 카프(KAPF)에 가담
1927년 조선일보사 기자
1929년 종합지 {삼천리} 발간
1937년 문예 전문지 {삼천리 문학} 주재
1950년 6·25 때 납북
{국경의 밤}(1925)

 {승천하는 청춘}(1925),
{삼인(三人) 시가집}(공저,1929)

{해당화}(1932, 1939)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

김동환(金東煥, 일본식 이름: 白山靑樹 시라야마 아오키, 1901년 9월 27일 ~ 1958년)은 대한민국시인이다.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아호는 파인(巴人)이다.  함경북도 경성군 출신이다. 경성 중동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에 유학하여 도요 대학교 영문과에서 수학하다가 관동 대지진으로 중퇴하고 귀국했다. 함북에서 발행된 《북선일일보》를 비롯하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에서 기자로 근무하며 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24년 발표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가 본격적인 등단작이다.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1925)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시적 특색으로는 국경 지대인 고향에서 얻은 북방적 정서와 강한 낭만성, 향토적인 느낌을 주는 민요풍의 언어를 들 수 있다. 1929년 종합월간지 《삼천리》와 문학지 《삼천리문학》을 창간해 운영했는데, 일제 강점기 말기에 삼천리사를 배경으로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고 전쟁 지원을 위한 시를 발표하는 등 활발한 친일 활동을 하였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친일파 708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광복 후 이광수, 최남선 등과 함께 문단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꼽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다.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했다. 그 후 노동자수용소에 송치되었다가 1958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친일 작품으로는 지원병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이인석을 칭송하며 젊은이들에게 참전할 것을 촉구하는 시 〈권군취천명(勸君就天命)〉(1943)을 비롯하여 총 23편이 밝혀져 있다.[1] 이는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수록자 가운데 5위에 해당하는 편수임에도, 창작 작업보다는 단체 활동을 통한 친일 행적이 더 뚜렷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흥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 황군위문작가단, 조선문인협회, 국민총력조선연맹, 국민동원총진회, 대화동맹, 대의당 등 많은 친일단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여류소설가 최정희(崔貞熙.1912∼1990.12.21)

 

3남인 김영식이 김동환의 친일 행적을 인정하고 사과한 예는 친일파로 지적되는 인물의 후손이 조상에 대한 친일 혐의를 인정한 드문 예로 종종 인용된다. 두 번째 부인이 소설가 최정희이며, 최정희와의 사이에서 얻은 두 딸 김지원김채원도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 아버지 김석구(金錫龜)와 어머니 마윤옥(馬允玉)의 3남 3녀 중 장남이자 셋째(아버지 김석구는 김동환이 어릴 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만주에서 보따리 장사를 하며 떠돌다가 중국 만주 지린에서 일본군에게 살해되었음.).
  • 前 배우자 신원혜(申元慧, 1903년 ~ 1993년, 함경남도 원산 출생.)
  • 아내 최정희(崔貞熙, 1912년 12월 3일 ~ 1990년 12월 21일, 소설가.)와 3남 3녀.
  • 첫째 아들 김영사(金英思, 1927년 경성부 출생. 신원혜 소생. 어려서 요절.)
  • 둘째 아들 김영창(金英昌, 1930년 경성부 출생. 신원혜 소생. 어려서 요절.)
  • 셋째 아들 김영식(金英植, 1934년 경성부 출생. 신원혜 소생.)
  • 첫째 딸 김영주(金英珠, 1939년 경성부 출생. 신원혜 소생으로 김동환이 신원혜와 이혼한 뒤 잠시 다시 만나고 있다가 신원혜와의 사이에서 얻은 실질상 사생아 딸.)
  • 둘째 딸 김지원(金知原, 1942년 경성부 출생. 최정희 소생.)
  • 셋째 딸 김채원(金采原, 1946년 경기도 남양주 출생. 최정희 소생.)
  • 함경북도 경성보통학교 졸업
  • 경성 중동고등보통학교 졸업
  • 일본 도요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중퇴
  • 시 《적성을 손가락질하며》
  • 시 《국경의 밤》
  • 시 《북청 물장수》
  • 시 《산 너머 남촌에는》
  • 수필 《나의 반도 산하》
  • 임전대책협의회
  • 조선임전보국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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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으로 유명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갔다--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곰실이 밀수출 마차를 띄워놓고

      밤새가며 속태이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맥이 풀려서

      파! 하고 붓는 어유등잔만 바라본다.

       

      북국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가는데.

     

     

     

    시는 파인(巴人) 김동환의 유명한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1925) 제1부의 첫머리이다. 너무나 잘 알려진 이 시는 그를 우리 국문학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중요한 위치에 올려 놓았다.

     

    두만강 유역을 무대로 하여 소금을 밀수하는 남편의 월경(越境)을 걱정하는 아내의 불안한 마음이 잘 나타나있는 인용 부분은 망국민의 민족적 비애를 노래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이 작품전체에서 특히 절창을 이루는 부분이다.

     

    우리 근대시사에서 서사시 양식을 최초로 도입한 공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겠거니와, 그 밖에도 그는 민요시 창작을 통하여 향토성에 기반한 민족적 전통성의 계승에 기여한 점이 인정된다. 이러한 그의 문학세계의 이념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민족주의'이다.

     

    젊은 시절 그는 카프에도 잠시 참여하여 경향문학에 다소 경도되기도 했지만,1927년경부터 민요시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광수*, 주요한*과 함께{삼인시가집}(1929)을 냄으로써 민족주의 문학노선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당시 민족(개량)주의 노선을 걸었던 문인들이 흔히 그러했듯이, 그도 역시 적극적인 친일로 나서게 된다. 아마도 그에게서 민족주의 이념의 실체가 김팔봉(金八峰)이 지적한 것처럼 소시민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았던 때문일지도 모른다([조선문단의 현재수준], {신동아}, 1934.1).

     

    그만큼 그의 민족주의 이념이 취약했던 것인데, 이광수에게서 잘보여지듯이 그것은 민족주의의 개량적 성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이광수가 '민족을 위한 친일'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자신을 변명했듯이,김동환 또한 그럴 여지를 적잖이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곽종원김기진김동인김동환김문집김상용김소운
    김안서김용제김종한김해강노천명모윤숙박영호
    박영희박태원백철서정주송영유진오유치진
    이광수이무영이서구이석훈이찬이헌구임학수
    장혁주정비석정인섭정인택조연현조용만주요한
    채만식최남선최재서최정희함대훈함세덕홍효민

    친일문학 작품목록


    1901년 함북 경성 출생

    1929년 6월 종합잡지 {삼천리} 경영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1년 임전대책협의회 발기인으로 참여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
    1939.12 일천 병사의 삶(시) 삼천리
    1939.12 고란사에서(시) 삼천리
    1940.7 탄환과 펜의 인연 삼천리
    1940.7.6 전승과 문화의 융성 매일신보
    1940.11.19 신윤리의 수립 매일신보
    1941.1 백림개선 신시대
    1941.2.24-27 문화부대의 신궁공역봉사기 매일신보
    1941.9.18 건국영웅과 문화 매일신보
    1941.11 임전보국단 결성에 제하여 삼천리
    1942.1.10 비율빈 하늘 위에 일장기 매일신보
    1942.1.12 대전과 반도아동(시) 매일신보
    1942.1.13 미영장송곡(시) 매일신보
    1942.1.14 남국에서 오는 배(시) 매일신보
    1942.1.15 남방만리 새 동무(시) 매일신보
    1942.2.6-7 이십오만의 대진군(시) 매일신보
    1942.2.6-7 축삼배 매일신보
    1942.5 내외 동포에 호소함 대동아
    1942.5 군복 깁는 각씨네(시) 대동아
    1942.5 남원기행(시) 대동아
    1942.3.9 오호 태평양 상의 군신(시) 매일신보
    1943.8.7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시) 매일신보
    1943.11.6 권군 '취천명'(시) 매일신보
    1944.1.6 적국 항복 받고지고(시) 매일신보 

     

     

     

     

    앞줄 왼쪽부터 현진건, 김일엽, 한사람 건너 최정희 뒷줄 왼쪽 두번째 김동인, 다음이 최학송, 김동환.

     

     

     

     

     

     

     

     

     

     

     

    성전에 나가 어서 죽으라고 외쳐대

    어쨌든 우선 김동환의 생애를 간단히 추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아명(兒名)이 삼룡(三龍)인 그는 1901년 9월 21일 부 석구(錫龜), 모 마윤옥(馬允玉)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함경북도 경성(鏡城)에서 태어났다.

     

    1913년 경성보통학교를 마친 그는 1921년 중동학교를 거쳐 일본 동양대학 영문학과에 진학하였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말미암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계에 종사하였으며, 1929년6월 종합잡지 {삼천리}(三千里)를 경영하였다.

     

    그의 문단활동은{금성}(金星)지(1924. 5)에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시집으로는 서사시 {국경의 밤}(1925)과 {승천하는 청춘}(1925), {삼인시가집}, {해당화}(1939)가 있다.

     

    그가 시인이었던 만큼 그의 친일시부터 살펴보자. '특별지원병에게 보내는 한시인의 편지'라는 부제가 붙은 시 [권군취천명](勸君就天命)(1943. 11. 6)은 지원병으로 나가 전사한 이인석(李仁錫) 군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조국의 젊은이들에게 일제가 벌인 전쟁의 총알받이가 될 것을 강권하고 있다.

     

    "조국을 나아가 막지 않은 자엔 천벌이 내리느니라"라는 저주까지 덧붙여 성전에 나가 어서 죽으라고 외쳐댔다. 실제로 그는 1941년 10월 7일 중앙중학교 강당에서 열린 지원병 보급혈전 대강연회에서 '궐기하라, 나서라' 고외쳤던 것이다.
     

     

      그대는 20대 우리는 40대

      부자 이대 서로 나란히 서서 전장에 내닫세

      다만 오늘은 그대 선진되고 내일날 우리 뒤따르리

      안 나서면 무얼 하나

      못쳐서 오륙십 살면 무얼하나

      차라리 한 두 해도 번듯하게 살아버리지

       

      번듯하게 사는 길이란----

      제 목숨 나라에 바쳐, 나라가 그 생사 맡아주심일레

      그러면 살 제는 후하게 따뜻하게 뜻같게 하여주시고

      죽을 젠 그 자리 거룩하고 높게 꾸며주시네

      지금, 조국은 전쟁하는 때

      살고 죽고를 더욱더 군국에 바칠 때일세

       

      이인석 군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도 병(兵) 되어 생사를 나라에 바치지 않았던들

      지금쯤 충청도 두메의 이름없는 농군이 되어

      베옷에 조밥에 한평생 묻혀 지내었겠지

      웬걸 지사, 군수가 그 무덤에 절하겠나

      웬걸, 폐백과 훈장이 그 제상에 내렸겠냐

     

    [권군취천명]의 제1∼3연인데, 이쯤 되면 이는 시도 뭐도 아닌 것이다. 이런류의 작품으로는 [일천병사의 숲](一千兵士の森), [우리들은 칠인(七人)],[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이 더 있다.

     

    [고란사에서]는 부여신궁(扶餘神宮)건설에 근로봉사하는 감격을 읊고 있으며, [비율빈 하늘 위에 일장기]나[미영장송곡], [적국항복 받고지고] 등은 전쟁을 예찬하고 '지도민족','조국일본 강토'를 외치면서 대동아공영의 이념을 합리화시켰다. 이런친일적인 내용의 작품을 일일이 예거하면서 해설을 덧붙이는 것이 오히려욕될 지경이다.

     

     

     

    그의 친일 시국논설 가운데 중요한 자료로는 [신윤리의 수립]과 [임전보국단 결성에 제하여] 등이 있다. 후자는 뒤에 설명하겠거니와, '국방국가의 입장에서'라는 부제를 단 전자는 당시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이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친일문학'이 바탕하고 있는 정신적·논리적 저류를 엿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신체제론에 입각하여 "신체제하에 있을 문학이란 오직 국가 때문에 있고, 오직 신민의 길을 실천하여 나가기 위해서 있어야 할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 따라서 신체제의 문학은 성전에서 일제가 승리하여야 하고 전후에도 동아경륜의 이상이 실현되도록 애국심을 격려하는 문학이어야 하며, 그 문학적 주조(主潮)는 이상주의적이어야 한다고주장하였다.

     

    "부친의 '친일 죄과' 민족 앞에 사죄"

    [인터뷰] '친일문인' 파인 김동환 3남 김영식씨(69)

    "부친의 '친일죄과'를 대신 사죄합니다" 파인 김동환의 3남인 김씨는 지난 94년 부친의 일대기를 펴내면서 서문 말미에 부친의 친일행적에 대해 민족과 역사앞에 대신 사죄한다고 밝힌 바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취재 및 정리 - 정운현 최유진 / 사진 - 권우성 기자

     

    그는 지난 94년 부친의 일대기 <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을 펴내면서 '펴내는 말' 말미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가 일제 말엽에 한 때 저지른 치욕적인 친일행위를 뉘우치고 변절고충을 고백하면서 '반역의 죄인'임을 자처했던 바 있음을 되새겨 보면서, 저는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친일로 변절했던 최린은 반민특위에 끌려와 눈물로 자신의 죄과를 사죄했으며, 일제때 전남도 광공부장 출신으로 제2공화국 때 국방장관을 지낸 현석호는 '한 삶의 고백'이라는 자선전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적을 뉘우친 바 있다. 또 일제말기 군수를 3년여 지낸 걸 두고 부끄럽다며 남들이 오해할 정도로 참회를 해오고 있는 전 홍익대 총장 이항녕씨도 당연히 이 대열에 설만한 사람이다. 이런 사례가 많을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겨우 이 정도가 전부일 정도다. 대부분의 친일인사들은 말로, 더러는 자서전이나 후학들이 쓴 일대기에서 글로 자신들의 친일행적을 변명하거나 심지어 미화, 왜곡, 은폐해 왔다.  자신의 죄과도 아닌, 선대의 죄과를 대신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기는 말만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쉽다면 아마 김씨와 같은 사례가 속출했을 것이나 김씨 전후로 아직 그런 사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지난 14일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서 친일문인 42인의 명단과 작품목록을 공개했다. 그 속에 선친의 명단도 포함돼 있는데 심경이 어떤가?
    "새로운 사실도 아니고, 이미 내 자신이 수용한 내용이어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날 제시된 아버지의 친일작품은 40여건으로, 내가 찾아낸 52건에도 미치지 않는 수치다. 아버지는 반민특위 재판부에서 실정법(반민법)으로 처벌을 받은 인물로, 죄상을 두고는 왈가왈부할 것이 전연 없다. 내 자신이 공개석상에서 부친의 친일행위를 사죄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버지의 경우는 신문기자, 가곡작사자로서는 공(功)이 크나 문인, 잡지인, 출판인으로서의 행적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저께 학술세미나장에 갔더니 사회자가 뜻밖에 나를 인사를 시켜 미안한 마음으로 두 번이나 인사를 했다. 그분들이 왜 나를 소개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참석자들이 나를 향해 항의를 하지 않았는데 아마 내가 아버지의 친일죄과에 대해 사죄를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 부친을 친일문인으로 지목한 이번 결과에 대해 승복하는가?
    "아버지가 명단에 포함된 것에 대해 아무런 이의가 없다. 아버지는 반민법에 의해 처벌을 받은 사람이다. 다만 친일문인을 가늠하는 잣대로 식민주의와 파시즘 옹호를 들이댄 것은 조금 이견이 있다. 그들의 친일행태를 '이즘', 즉 '주의'로만 판단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본다. 친일문제는 현시점에서 역사적인 교훈의 사례로 이야기돼야 한다고 본다. 내 자신이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회원이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며, 그래서 그날도 학술회의장을 찾은 것이다."

     

    - 부친의 친일행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첫째, 문인으로서 시와 평론을 통해서 50편 정도의 친일성 글을 썼다. 또 일제하 전시협력단체인 임전보국단 출범의 산파역을 맡았으며, 조선문인협회 간사 등 친일단체에서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둘째, 잡지인으로서 1938년도 이후 친일 성향의 잡지인 <삼천리>, <대동아>를 발행했으며, 셋째, 출판분야로 단행본 출간에서도 역시 같은 문제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3가지 분야에서 친일행적을 남겼다고 본다."

    - 친일경력자 후손 가운데 유독 혼자 선대의 친일죄과를 사죄했는데 특별한 동기가 있었나?
    "93년 3월 모친이 돌아가신 후 누이동생(김영주·시인·캐나다 거주)과 함께 아버지의 행적을 기록으로 정리해 보자고 의견일치를 보고서 아버지 관련자료를 수집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일대기는 그로부터 1년 뒤인 94년 11월 출간하게 됐는데, 자료수집 과정에서 아버지의 친일행적이 담긴 자료도 같이 입수하게 됐다. 아버지의 친일행각을 대신 사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아버지가 해방후 간행한 <꽃피는 한반도>라는 책에서 '반역의 죄인'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친일에 대해 사죄한 글을 보고 나서다. 아버지가 사죄한 이상 나도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해 아버지 일대기를 펴낼 때 서문에 그 내용을 실었다"

    - 다른 친일경력자 후손들이 사죄하지 않는 이유는 뭐라고 보나?
    "남의 일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나는 내가 관련된 일만 상관한다. 잘 모르겠다."

    - 부친을 대신해 사죄를 했을 때 주위의 반응은 어땠나? 혹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나?
    "나를 잘 알고 아껴주시는 어떤 대학교수 한 분이 그런 일을 왜 했느냐고 따지듯이 말한 적이 있다. 그 분은 나의 사죄가 좋지 않은 선례가 될 수 있다, 꼭 그렇게 해야 되는 거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친일파에 대한 잣대 자체가 분명하게 서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친이 실정법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거기에 관해서 아무런 의의가 없다고 봤다."

     

    - 이번에 발개된 친일문인 명단 작성은 적절하다고 보는가?
    "문학인 분야는 상세하게 자료가 분석이 되어서 불만이 없다. 해방전에 우리 나라에서 알려진 문인이 50여명이었는데 이번에 친일문인으로 지목돼 발표된 사람의 숫자가 42명이다. 친일성이 극히 경미하거나 작품이 하나밖에 안돼 이번 명단에서 제외된 정지용, 김정한, 김사량 등 몇몇을 포함하면 대부분의 문인들이 친일을 한 셈이다. 항일시인이랄 수 있는 윤동주, 이육사, 이상화 등 겨우 몇 사람이 빠지는 셈이다. 이것은 언젠가 누구의 손에서라도 밝혀지게 되는 사안이다. 문학분야에 비해 다른 분야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진하다고 본다."

    - 14일 장철 광복회장이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친일파는 다 죽고 후손만 남았으니 이제 (친일파를)용서하자고 했는데, 이같은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도 그 내용을 봤다. 그 내용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강하게 반발한 것으로 안다. 친일파 청산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광복회 회장이 '친일파청산 중단론'을 주장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광복회 내부에서 그런 얘기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할 경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공(功)이 있을 경우 과(過)가 상쇄될 수 있다고 보는가?
    "이율배반적인 얘기가 되겠는데, 잘 된건 잘된 것이고 잘못된 건 잘못된 것이다. 따로 생각해야한다. 공이 있다고 과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 흔히 공과론을 거론할 때 자주 거명되는 김성수와 김활란에 대한 그동안의 평가는 제대로 돼 왔다고 보는가?
    "나는 아버지 것만 관심이 있다. 다른 사람 것은 잘 모르고, 또 설령 안다고 해도 말하기 곤란하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 우리사회에 민족정기는 반듯하게 세워져 있다고 보는가?
    "민족이 존재하는 한은 민족정기가 바르게 서고 전승이 되어야 한다. 다만 시대상황에 따라 그것이 조금 가려질 때도 있다고 본다.친일문제 연구가 본격 시작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그런 노력에 비해서 역작용이 오히려 강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언젠가 서강대에서 친일파 모의재판이 열려 보러 간 적이 있다. 행사 전에는 행사알림 기사가 나왔는데 정작 대상자 10명이 모두 사형판결을 받은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곳에서도 보도하지 않았다. 다루기 어려운 사안이었는지 빈 메아리일 뿐이었다. 신문이 이같은 사안을 다뤄야 한다고 본다."

     

    - 그간 언론의 친일문제 보도가 미약했다는 얘긴가?
    "종합적으로 판단해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신문보도가 좀 의아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사전에 행사소개는 보도해놓고 그 결과를 보도하지 않는다면 그 보도태도는 납득하기 어렵다. 친일문제와 같은 주제가 언론에서 소외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부친과 관련된 자료를 오랫동안 수집해 왔는데, 그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할만한 일이 있다면.
    "지난 93년 어머니(신원혜)가 작고하신 후 아버지 관련기록을 모으기 시작한 지 근 10년이 돼 간다. 아버지의 친일자료를 접하면서 언젠가 가진 의문은 대체 부친이 어떤 이유로 친일의 길로 들어섰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모 대학교수를 통해 그가 국회도서관에서 아버지가 반민특위에 잡혀와서 쓴 '자술서'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교수에게 여러 차례 자료를 좀 보여달라고 부탁했으나 자기 논문에 먼저 사용한 뒤 보여주겠다니 몇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늘 아버지의 친일변절 이유가 궁금했는데 최근에 그 해답을 찾았다. 금년 5월쯤에 한 자료수집가가 1949년도에 발행된 신문들을 내게 보여준 적이 있는데 거기서 1949년 당시 반민특위서 재판을 받고 있던 아버지 관련 기사를 발견했다. 그 기사에서 아버지는 자신은 잡지를 지키기 위해 친일을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아버지는 시인이자 기자출신이지만 <삼천리> 창간 이후 잡지에 미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지난해 부친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한 것으로 안다.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또 자식으로서 어떤 정을 느끼는가?

    "지난해 파인탄생 100주년행사는 총 7회의 행사를 가졌는데 많은 분들의 은혜를 입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감사드린다. 아버지는 공인이었기 때문에 탄생100주년 행사도 공인으로서의 모습을 부각시켜 행사를 진행했다. 따라서 아버지의 어두운 면도 당연히 드러냈다. 올 9월 100주년행사 기념 자료집을 내는데 여기에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 수록된다. 30여 편의 논문, 평론, 언론의 보도기사 등 파인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사적으로 아버지는 대단히 노력가였던 것 같다. 아버지는 초기에는 분명 민족지사의 풍모와 올바른 역사관을 가진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시국순응이다 시류편승이다 해서 결국은 친일변절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이런 형태로 친일대열에 끼여 잡지를 만들다가 43년 3월에 잡지가 막을 내리면서 뜻한 바를 이루지도 못하고 결국 하루아침에 몰락한 그런 분이다.

    역사적 평가에서 공과가 교차된 아버지의 행적은 분명히 그 분야에서 일하는 후배들에게 교훈이 될 것이다. 잘 한 것은 잘 한대로, 못한 것은 못한대로."



     

     


     

     

    문필활동보다 단체활동에서 더 두드러진 친일행각

    ▲ 파인 김동환이 조선일보 총독부 출입기자 시절 총독부로 받은 촌지를 모아 창간한 잡지 <삼천리>. 이 잡지는 초창기 민족적 색채가 짙었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잡지로 돌아섰다.

    그러나 그의 친일행각은 문필활동 쪽보다는 단체활동 쪽이 훨씬 활발한편이었다. 그는 수많은 부일단체에 주요 인사로 가담하였는데,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뭐니뭐니 해도 자신이 직접 경영하던 {삼천리}라는 잡지를이용해서 직접 '임전대책협의회'를 결성하고 나선 일이다.

     

    1938년 5월호{삼천리}에 여류인사들의 시국논설을 실은 것을 필두로, 1939년 4월에는 총독미나미(南次 郞)의 [새로운 동양의 건설](新うしき東洋の建設) 등을 실어잡지의 내선일체 체제를 마련하였다. 그가 친일의 대열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계기와 시기는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때쯤부터가 아닐까 싶다.

     

    나아가 1942년 5월에는 잡지명을 {대동아}(大東亞)로 바꾸면서 더욱노골적으로 부일협력에 나섰다. 삼천리사를 앞세워 김동환은 아주 적극적으로 친일매족의 선봉으로 나섰다.

     

    1941년 8월 그는 임전체제하의 자발적인 황민화운동의 실천방안으로 물자 및 노무공출의 철저·강화책, 국민생활의 최저 표준화운동 방책, 전시봉공의 의용화방책 등을 내세워, 이에 대한 협의라는 미명 아래 각계의 유력인사198명에게 안내장을 발송하였다.

     

    이 안내장에 근거하여 8월 25일임전대책협의회가 발족하였다. 그의 발기에 의해 개막된 이 협의회에는 8월28일 제1차 위원총회를 열어 모임의 명칭을 '임전대책협력회'로 고치고 그를비롯하여 11명의 상무위원을 선출하였다.

     

    9월 4일에는 부민관 대강당에서 임전대책연설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윤치호*, 최린*,신흥우(申興雨) 등과 더불어 '송화강수여 말하라'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아울러 일제가 전쟁자금 조달을 위해 매출했던 1원짜리 채권을 소화시키기위해 이 협의회는 채권가두유격대를 결성, 거리로 나섰다. 이광수, 모윤숙*,최린, 방응모(方應謨), 윤치호 등과 함께 종로 화신 앞에 나가 행인들에게 채권을 팔았던 것이다.

     

     

    김동환이 주동이 되었던 이 협의회는 윤치호 중심의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와 1941년 9월 11일 통합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0월 22일에'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친일단체가 출범하게 되었다. 

     

    이단체야말로 친일분자들이 총망라된 것이라고 하겠는데, 그 강령을 보면 이단체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첫째, 황도정신의 선양, 둘째, 국민생활의쇄신, 셋째, 근로보국, 넷째, 국채의 소화, 저축의 여행, 물자의 공출,생산의 확충, 다섯째, 국방사상의 보급 및 의용 방위 등이 그것이다.

     

    ▲ <삼천리>를 발행하던 당시의 파인 김동환과 문인들. 왼쪽부터 춘원 이광수,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그리고 파인. 최정희와 파인은 한 때 동거했었다. /춘원 옆을 끼어든 야속한 이선희때문에 모윤숙의 애절함이 역력하다. 반면 최정희는 자리는 잘 잡았으나 김동환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감출 수가 없다. 한 방향으로 선 세 여자의 가지런한 오른팔의 연출과 커텐이 있는 뒷배경으로 보아 사진관인 듯하다.]

     

    그가 이임전보국단의 간부(전시생활부원 및 상무이사)로 선임되었음은 말할 나위도없다. 1942년 10월 29일 해산하여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흡수되기까지 그는임전보국단의 핵심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임전보국단 결성에 제하여](1941. 11)는 임전대책연설회의 개회사에 해당하는 글로서, 김동환은 여기서 일본과 발맞춰 조선에서도 성전에 임해야할 3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사상전으로, 조선인은 모두 황도정신을 파악한 일본 국민이 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청산하고 내선일체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돈과 땀을 나라에 바치자는 것이다. 즉, 물자 헌납과 노력 동원으로 국책에 협력하자는내용이다. 셋째는 피를 바치는 일, 다시 말해 생명을 전장(戰場)에 바쳐야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쳐 일제에 충성하자는 얘기다. 그렇게 하고 나면 과연 무엇이 남겠는가. 영혼마저 일제에 바쳤는데, 어찌 '민족을 위한 친일'(이광수)이라는 변명으로 이엄청난 죄과를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 김씨의 부친 파인 김동환이 자신이 친일한 이유를 "잡지를 위해"라고 보도한 <평화일보> 기사(1949.5.8)

    나아가 임전보국단은 1941년 12월 14일 전선대회를 열어 전시하 사상통일의 구체적 방침과 군수자재 헌납운동을 결의하였으며, 같은 날 오후 6시에는 미영타도강연대회를 가졌다.

     

    이 강연회에서 김동환은 '적이 항복하는날까지'라는 연설을 하였는데, 그 요지는 "적 장개석 정권을 비롯하여 영·미를 이 지구상에서 격멸치 않고서는 오늘의 배급쌀까지도 편히 얻어먹을수 없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인 소설가 최정희(崔貞熙)까지도 친일의 현장으로 내몰았다. 임전보국단은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를발족시켜 군복수리작업 등 근로봉사운동을 전개하게 하였는데, 부인대의 간부는 김활란*, 임영신(任永信), 고황경*, 박마리아, 박인덕*,박순천(朴順天), 노천명(盧天命), 모윤숙, 임효정(林孝貞) 등이었다.

     

    그런데이들은 이미 그 이전인 1941년 12월 27일에는 결전부인대강연회를 개최하였는바, 여기서 최정희는 '군국의 어머니'({대동아}, 1942. 5)라는제목으로 연설하였다.

     

    그 내용은 어린 자식의 "내가 전쟁에 나가 죽으면울테야"라는 질문을 받고 엄마인 자신이 당황하자 아이가 "엄만 틀렸어"라고말하며 낙망하더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강한 어머니가 될것을 맹세한다는 것이다.

     

    최정희의 친일 작품으로는 소설 [장미의집]({대동아}, 1942. 7), [야국초](野菊抄)({국민문학}, 1942. 11) 등과 수필[어머니 마음]({국민신보}, 1939. 5. 14), [꿈은 남역으로]({대동아}, 1942.5), [동아의 새 아침]({매일신보}, 1942. 2. 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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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40년대 문단의 '편안한 마돈나'로 불리던 최정희 소설가. 그의 남편과 둘째딸.

     

    이외에도 김동환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친일단체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많다.

    먼저 '황군위문작가단'부터 보자. 일제에 비행기 2대를 헌납한 바 있는 친일부호 문명기*가 1937년 8월 20일 화북지방 장병 위문을 떠난 이래로 위문단 파견은 일대 유행을 이루었는데, 이에 발맞춰 황군위문작가단이조직되었다. 

     

    1939년 3월 14일 최재서*, 임화(林和), 이태준(李泰俊)이 중심이되어 이루어진 한 모임에서 작가단 파견이 논의되었다. 이 때 그는 김동인*,김용제(金龍濟), 박영희*, 주요한*, 백철*, 임학수(林學洙) 등과 함께 위문사 후보로 선출이 되고, 작가단 실행위원으로 뽑힌다.

     

     

     

     

     

     

    이 작가단의 위문은 단지위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고, 전쟁문학 창조의 실천적 바탕이 되었던것이다. 이 작가단의 결의에 따라 1939년 4월 15일 김동인, 박영희, 임학수세 사람은 화북 장병을 위문하였으며, 돌아와서는 [전선기행](박영희)과[전선시집](임학수)을 각각 남겼다.

     

    또한 그는 이광수, 박영희, 유진오(兪鎭午), 최재서, 김문집(金文輯), 이태준등과 함께 조선문인협회(1939. 10. 29 결성)의 발기인이었다. 이 단체는1943년 4월 17일에 조선문인 보국회로 바뀌는데, 여기서도 그는 유진오,최재서, 유치진* 등과 함께 상임이사로 활동하였다.

     

    한편 1940년 10월 16일에 발족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은 그 해 12월에 문화활동의 신체제를 갖추기 위하여 문화부를 독립시켰는데, 여기에 김동환이 빠질 리 있었겠는가.

     

    그는 김안서,백철, 박영희, 유진오, 정인섭(鄭寅燮), 홍난파* 등과 함께 문화위원에위촉되었다. 나아가 1943년 1월 24일에는 개편된 총력연맹의 참사로서 임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1937년 도쿄에서 제20회 중의원 총선에서 당선된 박춘금*이조직한 단체로 '대화동맹'과 '대의당'이 있었다. 대화동맹은 일제의 필승체제 확립과 내선일체의 촉진을 목표로 하는 단체로서, 1945년 2월 11일에결성되었다.

     

    또 대의당은 대화동맹의 자매단체로서, 1945년 6월 24일에 결성되었다. 이들 두 단체에 김동환이 위원으로 가담한 것은 불을 보듯 뻔한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대의당이 표면적으로는 '평화적으로 사회정책부면을 담당'하여 일제의 전시체제에 적극 부응하고자 하였다고 하나,이면적으로는 '항일반전 조선 민중 30만 명을 학살코자 직접적 행동을 위할 폭력살인단체'였다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일제가 패망하기 불과 한두 달 전에 대의당이 결성되었음을 볼 때, 위의 언급이 만일 사실이라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용자가 그 진부를 판별할 수없었다고 단서를 달고 있기는 하지만, 패망 직전에 몰린 일제가 마지막 발악으로 그 앞잡이들을 내세워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있었을 것임은 능히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가당찮은 창씨명 白山靑樹

    이상에서 보듯이 그는 친일단체라면 거의 대다수의 모임에 한 구석이라도 차지하지 않은 적이 도대체 없을 지경이다. 삼천리사를 발판으로 그는시국관련 좌담회를 여러 번 개최하였는데, [전쟁과 문학과 그 작품을 말하는좌담회](박영희·김팔봉 참석, {삼천리}, 1931. 1), [신체제하의 조선문학의 진로](이광수·유진오·박영희·정인섭·최정희 등 참석, {삼천리}, 1940.12), [상하이·경성 양지(兩地) 예술가 교환(交驩) 좌담회](박거영·박계주등 참석, 1940. 12) 등이 대표적인 좌담기사들이다. 이외에도 여러 친일내용의 좌담회에 단골손님으로 나섰다.

     

    김동환의 창씨명은 시라야마 아오키(白山靑樹)이다. 참으로 가당찮은 이름이아닐 수 없다. 백산청수라 하였으니, 삼천리 금수강산의 푸른 나무를 뜻함인가? 비록 친일은 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이고, 사실은 내심으론 조국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백산청수'라고 하였다고 발뺌이라도한다면, 그것도 어느 정도 변명 축에 든다고 할 도리밖에 없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가 운영했던 잡지사가 {삼천리}였으니, 이렇게 우겨도 영 억지는아닌 셈인 듯싶다.

     

    결국 해방 이후 그는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어 공민권을 정지당하는 처벌을받았다. 민족을 팔고 민중을 도탄에 몰아넣은 자가 받아야 할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김동환의 친일행적을 더듬어 볼 때, 그 정도의 처벌은 응분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민특위가 온전하게 자신의 몫을 다할 수 없었음은 잘 알려진 바이며, 우리 역사의 오점임에 틀림없다.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역사적 오류는 새삼 지적할 것도없으리라.

     

    어쨌든 그의 말로는 비참(?)하였다. 결국 그는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 되었던것이다. 납북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더 알려진 바가없다.

     

    많은 부일도배들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양지를 밟아가며 계속 복락을누린 것에 비하면, 그는 오히려 어쩌면 불행한 쪽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않을까?

     

     

     

     

                                         ■ 김윤태(민족문학사연구소 연구원)

     

     

    김동환(金東煥·1901∼?, 함경북도 경성)

    아명은 삼룡(三龍). 호는 파인(巴人). 창씨명은 백산청수(白山靑水). 1901년 9월 21일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파인이 어렸을 때 러시아로 장사를 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홀로 갖은 고생을 하면 6형제를 공부시켰다. 경성보통학교를 졸업 후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 진학을 포기했으나, 호빵 장수 등을 하며 16세인 1916년 서울중동중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일본 토오요오대학 영문과에 진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24년 처녀시집 '국경의 밤'을 발간해서 당시의 신경향파적 시단풍조와는 이질적인 향토색 짙은 민족정서의 시풍을 보여 주었다. 특히 여기 수록된 대표작 '국경의 밤'은 최초로 서사시의 형식을 갖춘 작품으로 평가되어 당시의 시단에 상당한 반응을 일으켰다.

     

     첫 시집 발표 후 한때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자로 활약했다. 그는 순회기자로 함북지방을 돌며 일본인들이 이 지역 조선인들의 토지·어장을 탈취한 실태를 파헤쳤다.‘원산 총파업사태’를 현지취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29년부터 종합잡지 <삼천리>와 순문예지<삼천리문학>을 주재하면서 경영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경영난으로 폐간, 해방 후 다시 <삼천리>를 복간하는 한편 시론에 손을 댔다. 

     

     김동환은 중일전쟁을 겪으며 황도사상을 노래하고 징병을 강요하는 친일파로 변절하고 만다. 친일잡지인 '삼천리'의 사장으로서 '임전대책협의회' 창설했다.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와 통합하여 '조선임전보국단' 을 재출범시키고 상무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대화동맹' 위원 등을 지내면서 일제말기 친일대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부인 최정희를 내세워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결성하기도 했다. '권군 취천명', '적국항복 밧고지고', '1천병사(兵士)의 삼(森)', '고란사에서', '미영장송곡'등 여러 친일 작품을 남겼다.

     

     해방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반민특위에 자수한 김동환은 재판에서 공민권 정지 5년을 선고받고 한국전쟁때 납북됐다. 그후 생사는 알려지지 않고, 부인의 헌법소원으로 55년 사망신고가 되었다가 아들 김영식씨의 취소청구로 현재는 행방불명 상태로 되어있다. 

     

     

    아내 최정희에 이어 딸 김지원 김채원 남매가 소설가로 활약하고 있다.

     

     "봄이 오면", "산너머 남촌에는" 등 30여개의 시가 40여명의 작곡가의 손을 거쳐 노래로 만들어지는 등 김동환의 시는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본관은 강릉(江陵). 아명은 삼룡(三龍), 아호는 파인(巴人). 1926년 동환으로 개명하였다. 함경북도 경성 출신. 아버지는 석구(錫龜), 어머니는 마윤옥(馬允玉)이다. 6남매 중 장남이다. 1926년 신원혜(申元惠)와 혼인하여 분가한 이후 경성에서 서울 종로구 돈의동으로 옮긴 것으로 되어 있다.국경의 밤|북청 물장수|우리들은 칠인|오호 태평양상의 군신

     

    1913년 경성보통학교(鏡城普通學校)와 1921년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를 거쳐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영문학과에 진학하였다가,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그 뒤 함경북도 나남에 있는 북선일일보사(北鮮日日報社, 1924)·동아일보사(1925)·조선일보사(1927) 기자를 지냈다.

     

    1929년 6월 종합 잡지 ≪삼천리 三千里≫를 자영하였으며, 1938년에는 그 자매지로 문예지 ≪삼천리문학 三千里文學≫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문화부위원, 조선문인협회 회원으로 피임되면서 ‘총력전의 문화부대’, ‘문화인의 성철부대’를 발표하는 등 전쟁 협력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1942년 5월 ≪삼천리≫를 ≪대동아 大東亞≫로 개명하면서 시, 논문, 강연 등을 통해서 황국신민화운동을 벌이는 등 친일 행각을 하였다.

     

    이런 친일 행각으로 광복 후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의하여 공민권 제한을 받다가 6·25남침 때 납북되었다. 그 뒤 행적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문단 활동은 1924년 ≪금성 金星≫ 5월호에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를 처음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조선지광 朝鮮之光≫·≪조선문단≫·≪신민 新民≫·≪동광 東光≫·≪삼천리≫·≪신동아 新東亞≫·≪조광 朝光≫·≪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 등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에 시·소설·희곡·수필·평론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25년에는 제1시집 ≪국경의 밤≫과 제2시집 ≪승천(昇天)하는 청춘(靑春)≫ 2권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1929년에는 주요한(朱耀翰)·이광수(李光洙)와 함께 제3시집 ≪삼인시가집 三人詩歌集≫을 펴냈고, 이어 1942년에는 제4시집 ≪해당화 海棠花≫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세계는 <국경의 밤>·<북청(北靑) 물장수>등 북방의 정서를 보여준 초기 시와, <우리들은 칠인(七人)>·<오호 태평양상(嗚呼 太平洋上)의 군신(軍神)> 등 자기 안주를 위하여 현실에 순응하여 친일성과 야합한 중기 시, 그리고 <무명전사(無名戰士) 묘 앞에>·<33인의 송가(頌歌)> 등 자신의 친일 행각을 참회하고 애국주의를 표방한 광복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국경의 밤>은 우리 나라 최초의 서사시로 일컬어지는 그의 대표작으로서, 두만강 일대의 겨울밤을 배경으로 하여 밀수꾼으로 위장하고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불안한 마음을 통하여 망국민의 민족적 비애를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시세계의 커다란 맥을 형성하는 일련의 민요시들 가운데 <산(山)너머 남촌(南村)에는>은 따사로운 자연과 순박한 인정을 노래한 것으로 곡을 붙여 널리 불리고 있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그 밖에 그가 납북된 후 최정희(崔貞姬)가 유고를 모아 펴낸 제5시집 ≪돌아온 날개≫(1962)가 있으며, ≪삼천리≫에 실린 논설들을 모은 산문집 ≪평화(平和)와 자유(自由)≫ (1932)가 있다. 또, 시·소설·평론을 함께 묶은 ≪조선명작선집 朝鮮名作選集≫ (1936), 명사들의 기행문을 모은 ≪반도산하 半島山河≫(1941), 수필집으로 ≪꽃피는 한반도(韓半島)≫(1952)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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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_____, [신윤리의 수립], {매일신보}, 1940. 11. 19.

    ______, [임전보국단 결성에 際하여], {삼천리}, 1941. 11.

    『친일파군상』(민족정경문화연구소 편, 1948)
    『한국현대시인연구』(정태용, 어문각, 1976)
    『한국랑만주의시연구』(오세영, 일지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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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환론」(조남현, 『국어국문학』 75, 1977)
    「파인 김동환연구」(장부일, 서울대학교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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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東煥論(金起林, 東光, 1932. 7.)
  • 金東煥論(曺南鉉, 國語國文學 75, 1977)
  • 巴人 金東煥硏究(張富逸, 서울大學校大學院碩士學位論文, 1982). 〈金㶅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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