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일제말 친일음악계의 대부, 현제명(玄濟明)

草霧 2013. 12. 11. 11:43

 

 

음악 · 미술

 

 

현제명 (玄濟明, 창씨명 玄山濟明, 19021960)

 

  

 

일제 말 친일음악계의 대부

   

 

 

 

경상북도 대구 계성고등보통학교 수료

평안남도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 졸업

미국 시카고 무디 기독교음악대학교 졸업

미국 시카고 건 기독교음악대학교 음악대학원 졸업 (음악학 석사)

미국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 졸업 (음악학 박사)

서울대학교 명예 음악학 박사

평양 숭실전문학교

무디 성경학교

1928년 시카고에 있는 건(Gunn) 음악학교에서 석사학위

고향생각·산들바람등의 가곡과 찬송가 작곡

1930년대에는 빅타레코드사와 컬럼비아레코드사에서 음반을 취입

19322월 조선음악가협회 초대 이사장 역임

1933년 홍난파와 함께 작곡발표회

1937년 미국 건 음악학교에서 박사학위

1944년 일제의 어용음악가 조직인 조선음악가협회와 경성후생악단

1945년 지금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모체인 경성음악전문학교 설립

해방 후 한민당 당원

1950년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향전을 총지휘

1954년 고려교향악단을 조직

1955년 마닐라 음악회의에 참석

1958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국제음악회의에 참석

1955년 예술원상

1938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 간사

1944년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 조선음악협회 이사

한국음악가협회 이사장

고려교향악협회의 설립

국민개창운동에 참여

 

가곡

고향생각작사·작곡

그집앞작곡

나물 캐는 처녀작사·작곡

희망의 나라로작사·작곡

 

오페라

춘향전작곡

왕자 호동작곡

 

기타

고창고등학교 교가작사·작곡

김천고등학교 교가작곡

인하대학교 교가작사·작곡

경북대학교 교가작곡

 

현제명(玄濟明, 일본식 이름: 玄山濟明 구로야마 즈미아키, 1902년 12월 8일 ~ 1960년 10월 16일[1])은 일제 강점기대한민국피아노 연주가, 바이올린 연주가, 테너 성악가, 가곡 작사가, 가곡 작곡가, 편곡가이다. 본관은 연주(延州)이고 아호(雅號)는 현석(玄石)이다.

  • 1 생애
  • 2 소속
  • 3 학력
  • 4 사후
  • 5 작품
  • 6 주석
  • 7 같이 보기
  • 8 참고 자료
  • 9 바깥 고리
  • 대구 출신으로 개신교 가정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서양음악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대구 계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평양숭실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시카고에 유학하여 음악 공부를 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한 뒤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지내면서 한국의 서양음악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30년 조선음악가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결성된 조선문예회에 참여하여 친일 활동을 시작한 후 대동민우회,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실내악단 등 친일 단체에 연이어 참가했다. 조선음악협회의 음악회에서 친일적인 내용의 성악곡 〈후지산을 바라보며〉를 발표하고 대화숙 주최 ‘국민음악의 밤’과 같은 친일 행사에 참가해 독창을 하거나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전국 순회 가창지도대에 참가하는 등, 그의 친일 행적은 음악가들 가운데서 매우 뚜렷한 편이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소속의 우익 음악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울대학교에 음악대학을 설치해 예술학부 초대 학부장을 맡았다.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하고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창작 오페라를 무대에 올려 오페라 연출자로도 족적을 남겼다. 대한민국예술원의 종신회원을 지냈다. 1960년 10월 16일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향년 59세를 일기로 간경변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2005년 서울대학교 교내 단체가 발표한 ‘서울대학교 출신 친일인물 1차 12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문화, 종교, 언론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 경성후생실내악단

    현제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32人 선정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기념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에서 정치 외교 군사 법률 경제 학술 등 각 분야에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했다. 선정된 인물은 이승만 김성수 이범석 김용완 김창숙 정인보 한경직 김법린 등이며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를 비롯한 관련 분야의 학자들이 이들의 활동과 경력을 평했다. 이 책의 편집위원인 민현구 고려대 명예교수는 “편집위원들이 지난해부터 전문가들에게 자문해 선정작업을 벌였다”며 “해방 공간의 대립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건국사업에 참여한 인물을 분야별로 엄선했다”고 설명했다.》

         

     

     

     

    고향생각

    해는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이홀로 앉아서

    이일 저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고향하늘 쳐다보니 별떨기만 반짝거려

    마음없는 별을 보고 말 전해 무엇하리

    저 달도 서쪽 산을 다 넘어가건만

    단잠 못이뤄 애를 쓰니 이밤을 어이해

     

    희망의 나라로

     

    1.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물결 건너 저편언덕에

    산천 경계좋고 바람 시원한곳 희망의 나라로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 찬곳 희망의 나라로

     

    2. 밤은 지나가고 환한 새벽 온다 종을 크게 울려라

    멀리 보이나니 푸른 들이로다 희망의 나라로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 찬곳 희망의 나라로

     

    나물캐는처녀

     

    푸른잔디 풀위로 봄바람은 불고

    아지랑이 잔잔히 개인 어떤날

    나물캐는 처녀들 언덕위로 다니며

    고운나물 찾나니~ 어여쁘다 그 손목

     

    소먹이던 목동이 손목 잡았네

    새빨개진 얼굴로 뿌리치고 가오니

    너의 고운 마음 변함없도다~

    어여쁘다 그 처녀

     

    오라

     

    앞산과 시내는 예같이 흐르고

    하늘도 맑은데 바람은 우수수

    오라 오라 내 동무여

     

    앞산에 초동과 배 짜던 처녀여

    어디로 가느냐 눈물을 흘리며

    오라 오라 내 사랑아

     

    목동은 밭갈고 처녀는 배짜서

    기쁘게 살도록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서울음대 창설의 주역

    '현제명' 하면 누구나 곡목은 몰라도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고향생각])랄지,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 집 앞])이랄지, 또는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희망의 나라로]) 등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귀에 익숙한 노래들이 생각난다. 그만큼 현제명*은 가곡 작곡가로 널리 알려진 음악가이다.

     

    그가 살아온 생애는 분명 홍난파와 더불어 몇 안 되는 양악계의 큰 별임에 틀림없다. 그는 한국 양악계에서 부동의 중진 음악가이다.

     

    더욱이 홍난파가 광복 이전의 한국근대양악계의 대부라는 점과 달리 현제명은 근대뿐만 아니라 현대 양악계에까지 큰 산맥을 이룬 음악가라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것은 그가 단순히 노래 몇 곡 작곡하고 성악가로 활동했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각종 조직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또 광복 직후 오늘날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창설한 주역이라는 점에서도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였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이나 역사적 평가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현제명은 또한 뚜렷한 친일 전력을 가진 음악인이었으며, 광복 이후 역사적 반성 없이 악단에서 가장 강력한 대부로 등장한 인물이었다. 음악인은 오직 미적 평가의 대상이지 윤리적·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아님을 정당화시킨 병리적 계기가 그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현제명 역시 홍난파와 함께 일제 중반까지 '양악으로 민족개량운동'을 전개하다 후반부터는 음악과 관련한 모든 조선총독부 관제 친일단체에 지도자로 가장 강력하게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공교롭게도 친일 전력의 음악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개신교 출신이었고, 또 홍난파와 함께 현제명은 극소수의 미국유학파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근대양악계가 열악한 환경이었다는 것도, 이들의 음악활동이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이러한 배경은 광복 후 음악계가 '기독교-친일-친미-반공이데올로기'로 사고를 제한시키는 데 공헌한다.

        

    현제명은 1902128일에 대구 남산동에서 22녀 중 둘째로 태어나 196010월에 고혈압과 간경화증으로 작고할 때까지 성악가(전공), 국민개창운동 지도자,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 고려교향악단 창설자, 음악원 교장으로서 음악교육가, 오페라 연출가, 작곡가, 지휘자로 활동하였고, 예술원 종신회원 등을 지냈다.

     

    대구 대남국민학교와 계성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구 제일교회 성가대 단원으로 음악 체험을 시작하였다가 1924년에 평양 숭실 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곳에서 그는 선교사들로부터 성악과 피아노 지도를 받았으며, 이후 전주 신흥중학교에서 음악과 영어교사로 활동하였다. 1926년부터 2년간 미국 시카고에 있는 무디(Moody)성경학교를 다녔고, 1928년부터 1년 동안은 인디애나주 레인보우의 건(Gunn)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였으며, 귀국한 후에는 국내악단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1929년 봄부터 연희전문학교 음악교수, 조선음악가협회(1930년 결성)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부각은 뚜렷하였다.

     

    1930년대 초·중반 동안 국내 음악인으로는 홍난파, 김영환, 채동선, 안기영, 최호영, 독고선, 홍재유, 윤성덕, 김인식, 박경호, 김세형, 박태준, 김동진, 권태호, 이인선, 한기주, 김재훈, 김관, 정훈모, 채선엽, 이유선, 이영세, 홍성유, 이흥렬, 박태현, 홍종인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현제명은 작곡집 2권을 펴내기도 하였다.

     

    1937년은 현제명에게 전환점을 가져오는 해이다. , 이 해에 그는 전에 유학한 바 있는 건 음악학교에서 '자연발성법'이라는 논제로 성악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직후부터 국내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음악가로 주목받았다.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음악보국'운동 본격화

    19375월에 그는 홍난파, 김영환, 박경호, 윤성덕, 이종태 그리고 전통음악분야의 함화진과 함께 새롭게 결성된 조선 문예회의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는데, 이로부터 그는 친일의 길을 걷게 된다.

     

    홍난파와 마찬가지로 친일의 배경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이 있었고, 또한 민족음악 개량운동의 허구성도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 문예회는 사회교화단체로서 총독부 학무국이 주도하고 일본인과 조선인 문예가 30여 명이 결성한 단체였다. 음악인들은 주로 곡을 붙여 발표하거나 악보제작과 음반취입 활동을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조선 음악인이 조선인을 계몽한다는 구실 아래 일제 지배층과 손을 잡음으로써 양악전공활동을 보장받은 것이다.

        

     

    현제명은 1937년 조선문예회 활동을 통하여 '천황폐하 중심의 일본 정신으로 국체 관념을 뚜렷이 함으로써 시국인식을 고취하고 황군을 격려한다'는 취지 아래 [가는 비], [서울](이상 최남선* 작시), [전송](見送, 土生よねさく 작시)을 작곡하여 발표하였다.

     

    19386월에 현제명은 홍난파, 전영택 등 18명의 수양동우회원이 19377월에 기소된 사건을 계기로 친일 대동민우회에 가입·활동하면서 그의 친일활동을 본격화한다.

     

    그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1938년 결성)에서 경성지부 간사를 역임하였고, 친일단체인 조선음악협회(1941년 결성)가 후에 개편될 때에는 이사를 맡았다.

     

    또한 '전시하의 국민들에게 건전한 음악과 음악 자체의 예술성을 국민음악 정신대(挺身隊)로서 활동·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성(1942)'경성후생실내악단'이 제2기로 개편(1944)될 당시에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그의 친일음악활동은 정점에 이른다.

     

    그리고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구로야마(玄山濟明)라는 창씨명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그는 19416월 조선음악협회가 신체제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음악보국'(音樂報國)하자며 양악·조선음악·일본음악별로 음악회를 개최할 때(6. 4), 자신의 성악작품 [후지산을 바라보며] 등을 발표하였다 

     

    현제명 이외에 이 음악보국 음악회에 출연하거나 작품을 발표한 음악인들을 살펴보면, 지휘 겸 테너 히라마 분쥬 (平間文壽), 작곡 안기영 · 김메리 · 임동혁 · 김성태 · 박경호 · 이흥렬 · 김세형, 소프라노 이관옥 · 채선엽 · 김자경 · 최희남 · 이승학 · 이유선 · 김천애 · 주경돈, 테너 송진혁, 바리톤 최창은, 피아노 이흥렬·김영의 · 이경희, 바이올린 홍지유 · 림향자 · 하대응 · 계정식 · 김생려 · 김재훈 · 고종익, 비올라 안성교, 첼로 김태연, 플루트 김재호 등 국내 주요 음악인들이 망라되어 있었으며, 조선음악협회합창단과 이화여전 · 세브란스의전 · 경성음악학원 · 경성여자사범학교 학생연합 합창단도 출연하였다.

     

    1941119일에 현제명은 일본어 보급을 통하여 '참된 황국신민 배출을 목적으로 설립한 전국적 시국학교' 중의 하나인 경성대화숙이 주최한 '(일본)국민음악의 밤'(부민관 대강당)에서 독창을 하였다. 이 음악회에는 김자경, 계정식, 경성음악전문학교 합창단, 이화여전합창단, 경성취주악단 등이 출연하였다.

     

    그리고 경성대화숙이 19411214일에 '총후 사상전에 정신(挺身)'하면서 개최한 대화숙 1주년 기념식에서는 현제명의 반주로 군가와 성수만세가 봉창되기도 하였다.

     

    1942123일에는 역시 대화숙 주최의 '군가강연의 밤'에서도 현제명은 일본 정신과 일본 정서로 만들어진 군가와 일본 국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현제명이 대화숙과 관련을 맺은 결과, 마침내 194341일에 경성대화숙 내에 '경성음악연구원'을 개설하는 데 성공한다. 이 음악연구원 교수진은 현제명을 대표로 하여 성악 김천애, 피아노 김영의, 바이올린 김생려, 작곡 및 이론 김성태 등으로 짜여졌다.

     

    중요한 사실은 경성대화숙 부설 경성음악연구원이 광복 직후 경성음악학교로 이어지고 다시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로 발전한다는 점이다.

     

    그는 19421211일에 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 후원으로 개최한 조선음악협회 주최 제1회 음악경연대회에서 성악부 심사 전문위원을 역임하였고, 1943224일 부민관에서 경성후생실내악단 주최,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원으로 열린 '(일본)국민음악연주회'에서는 개창 지도를 하였다. 이 음악회는 미국과 영국음악을 몰아내고 태평양전쟁 결전음악으로 '1억 국민이 군가로 국민개창운동을 보급'하자는 목적에서 개최되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1943년에 태평양전쟁에 대한 결전결의 앙양기간을 설정하고, 조선음악협회와 합동으로 '국민개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여러 가창지도대를 전국에 보내 순회지도하도록 하였다.

        

     

    이 때 현제명은 가창 지도대 지도자로 나섰다. , 429일에는 수원 일원, 57일부터는 경기도 이천읍 일원, 59일부터는 경기도 강화면 일원 등에서 국민개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주요 (일본)국민가는 일본 제2 국가(國歌)로 선정된 [바다로 가면](海行かば), [애국행진곡], [흥아행진곡], [출정병사를 보내는 노래], [태평양 행진곡], [애마진군가], [대소봉대일의 노래], [대일본 청소년단가], [대일본 부인회가], [아세아의 힘], [야스쿠니 신사의 노래], [국민진군가], [일월화수목금토], [대동아결전의 노래] 등 하나같이 일본 육군성이나 해군성 그리고 전시체제를 수호하는 기관들이 공모하여 유명해진 일본어 노래들이었다.

     

    이 노래들은 조선의 민족정신을 약화시키고 민족정서를 해체시키고 일본 정신과 일본 정서를 표현한 곡들이다. 이러한 노래들을 현제명을 비롯한 국내 음악 주역들이 앞장 서서 가창지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일본정신과 일본정서로 길들이는 가창지도였다.

     

    현제명은 194381일부터 징병실시 감사주간에 실시된 조선총독부 행사에 어김없이 출연한다. , 83일 오후 7시 경성운동장에서 진행된 '야외음악·영화의 밤'에 징병실시 시행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항공일본의 노래][대일본의 노래]를 부른다.

        

     

     

     

    홍난파 사후 친일음악계의 지도자로 부상

    현제명은 홍난파가 없는 1941년 이후에 일제권력과 더욱 밀착한 결과 강력한 악단 대부로 존재하게 되었다. 19445월에 '건전한 (일본)국민음악예술의 수립을 위하여' 2기 경성후생실내악단이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면서 현제명은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가장 강력한 대부로 등장한다.

     

    단원으로는 피아노 김원복·윤기선·김영애, 편곡 이흥렬, 바이올린 정희석, 첼로 나운영, 소프라노 이규봉·고영희, 바리톤 정영재, 김학상, 이종태 등이 있었고, 상무이사에는 스즈키 칸이치로(鈴木貴一郞), 즉 이종태(李宗泰:일본 도쿄음악학교 출신의 음악교육가)가 창씨명으로 활동하였다.

     

    경성후생실내악단은 광산이나 공장 등 소위 병참기지화가 되어 버린 조선의 생산지대들을 찾아 산업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며 (일본)국민음악 건설에 매진한다는 취지에서 발족된 것이었다.

     

    한편, 조선음악협회는 19447월에 일본에서 정보과 촉탁으로 이와모토 (岩本政藏)를 영입하여 새로운 정비를 단행하는데, 이 때 현제명은 이사로 선임되었다. 조선음악협회의 회장은 아베(阿部) 총독부 정보 과장이었고, 이사는 재류(諸留) 조사관과 이와모토 정보과 촉탁이 맡았으며, 민간인 이사로는 오오바 이사노스케 (大場勇之助: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겸 경성제1고등여학교 음악교유) 및 아베(阿部文雄)와 함께 현제명이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로써 현제명은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직과 더불어 유일한 조선인 조선음악협회 이사로서 조선 최고의 친일 음악실력자가 되었다. 현제명은 조선음악협회 이사로 취임하는 것을 계기로 세 가지 주요 사업을 전개하였다.

     

    첫째,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에서 조선음악협회 회원과 경성시내 중등학교 학생을 동원(30개 단체 500여 명)하여 국가봉납식(國歌奉納式), 곧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일본신전에서 봉창하면서 황국신민으로서 일본 정신을 고취하고 음악보국을 맹세하는 식을 거행하였다(1944. 7. 26. 오후 230).

     

    이 자리에는 아베 총독부 정보과장과 음악협회 관계자, 중앙방송 관현악단, 각급 학교장 등이 참가하였는데, 일본 국가를 부르고 역시 제2 국가인 [바다로 가면]을 부르면서 음악보국을 맹세하였으며, 식이 끝난 후 밴드를 앞세워 남대문에서 총독부 앞 광장까지 시가행진을 하였다.

     

    둘째, 음악가 숙정사업이었다. 1944518일 조선총독부 부령으로 확정한 '조선흥행취체규칙'에 의거, 같은 해 91일부터 전면 실시하는 '기예자 증명서'(기예증) 발부를 기화로 음악관계자 약 400명 중 350명을 합격시키고 나머지는 숙정하였다. 물론 이 숙정사업에는 음악협회 이사장과 일본인 이사 그리고 현제명이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셋째, 조선총독부 지시하에 조선음악협회를 비롯하여 경성후생실내악단과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연대하거나 또는 독자적으로 일본국민음악 보급으로 전시체제를 갖추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각종 노래 보급과 음악회 개최, 일본 음악인 초청 등을 추진하였다.

     

    조선음악협회가 1945527일부터 910일에 걸쳐 경성부민관에서 일본음악, 조선음악, 조선양악 등 세 분야의 음악회를 개최한 것도 그의 일환이었다.

     

    또한 일본 테너로서 이탈리아를 유학하고 일본에서 꽤나 알려진 후지와라 요시에(藤原義江)를 초청하여(1945. 1. 57, 약초국민극장), 조선군 보도부, 경성군인원호회, 국민총력조선연맹 홍보부 등의 협력으로 상이군인 및 산업전사 위문 결전음악회를 개최한데 이어 경성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개최한 것도 그 예이다. 또한 일본음악을 각 급 학교에 보급한 것도 이에 속한다.

     

    그는 광복이 가까워지면서도 일본 본토 결전을 위한 경성부민대회나 그 음악회를 기획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현제명이 이사장으로 있는 경성후생실내악단은 194558일에 '조선예술상'을 받았다.

     

    "조선의 문화향상 발전을 꾀하고 그 공적이 많은 문인·화가·음악가 또는 단체에게 도쿄 신태양사가 수여"하는 조선예술상은 제5회 수상대상자로 경성후생실내악단을 선정하였던 것이다. , 결전음악과 활발한 공연활동으로 일본음악보국운동의 공적이 인정되었다.

    광복 직후 현제명은 제일 먼저 고려교향악협회와 그 산하에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하고 미군정 장관을 명예회장으로 영입하였으며, 한국 민주당 문교위원으로 정당 활동을 하였으며, 경성음악학교 교장으로,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초대 음악학부장으로 등장하였다.

     

    이는 사실 일본제국주의 잔재를 민족정기로 청산하지 못한 광복정국에 기인한다. 수많은 음악가와 음악교사 그리고 유행가 작곡가와 가수들이 펼친 식민지하의 일본식 가창운동을 광복 이후 청산하지 못한 결과 오늘날 가라오케, 비디오케 등 일본 문화 사업이 노래방 문화를 장악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 또한 그 음악가들의 친일행위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여전히 우리들에게 과제로 남는다.

     

    노동은(목원대 교수·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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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년의 계성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의 사진. 이 사진이 계산예가에 전시된 이유는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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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의 <교남4중창단>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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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광복군창립70주년 친일&항일 시민음악회

     

    17일 저녁 7시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한국광복군창립70주년 친일&항일 시민음악회'에서 광주지역 음악가들로 구성된 '꿈꾸는 예술' 회원들이 '독립군가'를 부르고 있다. ⓒ 김도균

     

    특이한 것은 만주벌판과 중국대륙을 달리며 독립투쟁을 벌였던 광복군들이 불렀던 '최후의 결전', '독립군가', '압록강 행진곡' 등 일제에 항거한 노래뿐 아니라 홍난파, 박시춘, 임동혁 등 친일음악가들이 만든 노래와 일본식 장단과 음계를 따와 불렸던 동요들이 소개됐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특히 광복절이나 3·1절 기념식장에서 단골로 연주되는 '희망의 나라로'(현제명 곡), '선구자'(조두남 곡)가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한 대표적 친일 노래였다는 사실도 소개되었다. '희망의 나라로'는 일제가 주창했던 대동아 공영권을 염원하는 노래였으며, '선구자'도 일본의 만주국 건설을 위해 나선 사람들을 찬양했던 노래가 해방 후 가사만 바꿔 불렸다는 지적이다. 심지어 일본노래의 잔재는 '독도는 우리 땅'과 같은 대표적 국민가요에까지 영향을 미치고있다고 정 교수는 꼬집었다. 이 노래의 장단과 음계역시 일본 전통의 요나누키 음계를 쓰고 있다는 것. 이날 음악회에서는 특히 광복절이나 3·1절 기념식장에서 단골로 연주되는 '희망의 나라로'(현제명 곡), '선구자'(조두남 곡)가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한 대표적 친일 노래였다는 사실도 소개되었다. '희망의 나라로'는 일제가 주창했던 대동아 공영권을 염원하는 노래였으며, '선구자'도 일본의 만주국 건설을 위해 나선 사람들을 찬양했던 노래가 해방 후 가사만 바꿔 불렸다는 지적이다. 심지어 일본노래의 잔재는 '독도는 우리 땅'과 같은 대표적 국민가요에까지 영향을 미치고있다고 정 교수는 꼬집었다. 이 노래의 장단과 음계역시 일본 전통의 요나누키 음계를 쓰고 있다는 것.

     

     
    ▲ <영남일보> 2011년 9월 29일자 19면(문화)
     

     

    북한산 순국선열 묘역, 음악가 현제명(玄濟明)

     

     

     

     

    대구 현제명나무

    인근 제일 교회에는 음악가 현제명 나무가 있는데 200년 정도된 이팝나무이다

     

     

     

     

     

    해방 이전에는 쿠로야마 사이민, 해방 이후에는 로디(Rody Hyun)

       

    연속특집/해방공간(1945∼50)의 우리 문화예술·음악

     

     

    현제명[玄濟明] 19021960. 음악가·교육자

    본관은 연주(延州). 호는 현석(玄石). 대구 출생. 기독교학교인 계성학교(啓聖學校)를 거쳐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특히, 성악과 피아노에 관심을 가지고 음악수업에 열중하였다. 1923년에 졸업하여 전주 신흥학교(新興學校)에서 음악교사를 역임한 뒤, 1925년 미국으로 가 시카고 무디성경학교(Moody Bible School)에 입학하였다. 이후 건음악학교(Gunn Music School)로 옮겨 1년간 수학한 뒤 귀국, 연희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춘향전|왕자 호동|고향생각|산들바람 등, 연희전문학교 교사|한국음악가협회 초대 이사장|예술원 종신회원

     

    1929년의 귀국독창회를 비롯하여 1930년대에 주도적인 성악가로서 활동하며 빅타와 컬럼비아 레코드 등에서 자작 가곡과 이탈리아가곡 등을 취입하였다. 1933년에 홍난파(洪蘭坡)와 함께 한국 최초의 작곡발표회를 가졌으며, 1932년과 1945년에 작곡집을 발간하였다.

     

    1950년에 우리 나라 최초의 가극 춘향전을 작곡, 지휘하고, 1958년에는 가극 왕자 호동등을 작곡하였다. 또한, 1933년에는 조선음악가협회 창설의 주역을 맡았고, 1942년에는 후생악단(厚生樂團)을 조직하였으며, 1945년에는 최초의 본격적인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을 조직하여 1948년까지 운영하였다.

     

    1945년에는 경성음악학교를 설립하였고, 1953년 음악인들을 규합하여 한국음악가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1954년과 1955년에 미국 NBC교향악단의 내한공연 등을 주선하였고, 1955년 마닐라 아시아음악회의 참석과 1958년 유네스코국제음악회의 참가 등을 계기로 한국음악의 국제적 진출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예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그의 업적은 음악교육과 창작활동에서 두드러졌으며, 특히 연희전문학교 재직 때에는 관현악단·취주악단·합창단·중창단 등을 조직하였다. 교양과목과 특별활동의 음악부를 육성하고 이를 통해 우리 나라 양악 부문의 초석이 될 인재를 양성하여, 김성태(金聖泰김생려(金生麗이유선(李宥善) 등이 배출되었다.

     

    한편 그가 일제강점기에 태평양전쟁에 대한 결전결의의 앙양을 위해 국민개창운동을 벌였고, 일본국민가요 보급을 위한 순회 가창지도 활동을 하는 등 친일적인 음악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표작품으로는 가극 외에도 작곡집 제1집에 수록된 가곡 고향생각·산들바람·그집앞·희망의 나라로·나물캐는 처녀등이 있다.

     

    난파 홍용후가 해방 이전 국내 음악계의 대부였다면, 그의 뒤를 이어 일제시대 부터 지금까지 한국 양악계의 거물로 알려진 인물이 바로 현제명이다. 그는 국내의 유명 음악 단체에서 중요한 요직을 맡아왔으며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창설한 주역으로써 국내 음악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음악적 평가와 다르게 홍난파와 현제명은 역사적으로 가장 친일 행적이 뚜렷한 '친일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다. 왜일까?

    중앙대학교 노동은 교수는 "현제명은 홍난파와 함께 일제 중반까지 양악으로 '민족개량운동'을 전개하다 후반부터는 음악과 관련한 모든 조선 총독부의 관제 친일단체에서 지도자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대표적 인물로 꼽을 수 있다"면서 그가 가장 뚜렷한 친일 전력을 가진 음악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공교롭게도 친일 전력의 음악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개신교 출신이거나 일본유학파였고, 홍난파와 함께 현제명 역시 극소수의 미국 유학파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면서 "이러한 배경은 해방 후 음악계가 기독교-친일-친미-반공 이데올로기로 사상을 제한시키는데 공헌했다"고 밝혔다.

    현제명은 친일의 선봉에서 서서 국민개창운동 지도자,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 고려교향악단 창설자 등으로 활동한 바 있다.

    현제명은 세태에 끌려 친일운동을 한 게 아니다.

    '민족개량운동'은 중앙대학교 노동은 교수가 주장하는 학설이다. 친일로 들어선 조선 음악인들이 국내 양악을 발전시키기 위해 민족개량운동을 주도했고 그것이 친일 음악으로 이어지는 전환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노동은 교수는 "'민족개량운동'의 주역으로써 음악인 현제명이 뚜렷한 친일 활동을 했음"을 지적하면서, "해방 이후 역사적 반성 없이 현제명이 악단의 가장 강력한 대부로 등장하여, 음악인은 오직 미적 평가의 대상이지 윤리적,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아님을 정당화시키는 병리적 계기가 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이용창 책임연구원은 "'민족개량운동'이라는 정확한 명칭은 없지만, 노 교수의 얘기처럼 조선 음악인들은 민족음악을 발전시킨다는 논리로 일제에 협력하여 개인의 음악활동을 보장받았다"고 동조했다.

    그러면서 이용창 책임연구원은 "국악은 규왕직아악부에 철저하게 포섭되어 체제 안에서 활동했고, 양악은 이를 도입하고 보급하는 과정에서 음악인들이 낙후한 음악환경과 교육을 개량하기 위해 일제에 맞춰나가다 변질된 것"이라면서 "당시 음악인들의 계급성이 일제의 통치제제를 뚫고 나가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음악 활동을 보장 받기 위해서는 친일을 선택해야 했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노동은 교수는 이에 더하여 "현제명은 세태에 끌려서 친일 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친일의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활동했다"고 꼬집었다. 즉 홍난파가 작성한 성명서처럼 현제명도 "일본의 대 국가적 사명의 수행, 아시아 제 민족을 백인제압의 질곡에서 해방하려는 목적"을 관철하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1938년 현제명은 "민족관, 국가관, 세계관을 깨끗이 청산하고 적화공산의 참화와 개인주의, 공리주의적인 백인문명의 추악에 염증이 나므로 팔굉일우의 일본정신으로 세계 인류를 지도할 원리로 삼을 것"주장하면서 "일본정신사도로서의 영예와 책임을 가지고 이와 같은 새로운 신념으로 활동하겠다"는 뜻을 천명한 바 있다.

    친일 음악인으로 동참한 현제명의 민족개량운동 논리

    그러면 민족개량운동에 있어서 현제명은 어떤 역할을 했으며 그의 친일 행위는 무엇일까. 노동은 교수는 '순수음악계의 일본국민음악 수립운동'제하의 논문에서 그 과정에 대해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노동은 교수는 "현제명은 1937년 홍난파, 김영환 ,이종태, 함화진 등과 함께 '조선문예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족개량운동'을 주창했으며, 그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고 밝혔다. 조선문예회는 일제가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조직한 사회교화단체로써 회장은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타카키가 맡고 있는 조선총독부 관제 단체였다.

    그러나 노동은 교수는 "현제명은 수양동우회 단우였기 때문에 일제가 전시체제를 구축하면서 사상탄압으로 검거 됐지만, 일제 관제 친일단체인 조선문예회 회원 자격으로 홍난파와 함께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의 종교보국논리와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려는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담긴 사상 전향서를 쓰고 풀려나 친일 행위를 본격화하게 됐다"면서 "이후 홍난파는 조선문예회에 복귀하여 음악활동을 했고 현제명은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 인솔하에 군 위문공연을 시작하면서 친일 음악인의 길을 확고히 했다"고 진단했다.

    결과적으로 노동은 교수는 "친일 음악인들은 '조선 음악인이 조선인들을 계몽한다'는 구실 아래 일제 지배층과 손을 잡았고 이로부터 자신들의 음악 발표와 악보제작, 음반 취입 등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고 밝히면서 "이것이 바로 민족개량운동의 선두에 있는 친일음악인들의 논리 "라고 꼬집었다.

    홍난파 사후, 해방 이후 친미 음악에 앞장 선 현제명

    현제명은 1941년 난파 홍영후의 죽음으로 조선 최고의 친일 음악인이자 권력의 중심에 우뚝 선다. 노동은 교수에 따르면 그 정점에 경성후생실내악단 제2기 이사장과 조선음악협회 이사로 현제명이 취임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경성후생실내악단은 1942년 전시에 조선 민중들의 정신대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결성된 악단이다. 이들은 현제명의 지휘 아래 광산이나 공장 등 병참 기지가 된 조선의 생산 지역 노동자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며 침략전쟁의 동참을 독려해 '조선예술상'을 받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아베가 회장으로 있던 조선 음악협회에 이사로 들어간 현제명은 국가 봉납식을 통해 황국 신민으로서 음악 보국을 맹세하고 시가 행진을 했으며, '기예자 증명서'발부를 기회로 민족 음악가 숙청사업을 진행했다. 현제명은 또 일본국민음악 보급으로 전시 체제를 갖추는 사업을 진행하는 등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친일 행위에 앞장섰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제명은 해방 직후 제일 먼저 고려교향악협회와 그 산하에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하고 미군정 장관을 명예 회장으로 영입했다. 또한 현제명은 한국 민주당 문예의원,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초대 음악학부장 등을 맡으며 출세가도를 달린다. 일제에 굴복했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미군정에 머리를 숙여, 그는 한국전쟁 이후에도 계속 민족음악인이자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음악가로 이름을 떨치게 됐다.

     

    만약, 해방이후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됐다면 어떠했을까. 적어도 홍난파와 현제명이 민족음악인으로 둔갑해 교과서에 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오페라 왕자호동, 가곡 오라·니나·나물캐는 처녀, 국민가요 희망의 나라로·조선의 노래등이 있다. 고향생각·산들바람·그집앞·희망의 나라로·나물캐는 처녀<가고파>(이은상 작사) <가을>(현제명 작사) <나물 캐는 처녀>(현제명 작사) <고향생각>(현제명 작사) <그 집 앞>(이은상 작사) <니나>(현제명 작사) <조선의 노래> <멕시코 소야곡> <산들바람>(정인섭 작사) <산 위에 올라>(이은상 작사) <새가 되어 배가 되어>(이은상 작사) <새벽 종소리>(현제명 작사) <성탄 노래>(현제명 작사) <소경 되어지이다>(이은상 작사) <여름 저녁>(현제명 작사) <오라>(현제명 작사) <우리의 봄 노래>(현제명 작사) <이 마음>(이은상 작사) <저녁별>(현제명 작사) <적막한 가을>(현제명 작사) <전원의 노래>(현제명 작사) <진달래>(이은상 작사) <황혼의 해변>(현제명 작사) <희망의 나라로>(현제명 작사), 동요<가을>(백남석 작사) <단풍잎>(김어초 작사) <물망초의 그늘>(현제명 작사) <보건체조>(정인섭 작사) <수노래>(박남규 작사) 합창곡, 남성4부합창곡 <물방아> 혼성4부합창곡 <어사와> 남성합창곡 <절름발이> 군국가요, <가는 비>(최남선 작사) <서울>(최남선 작사) <전송>(土生よねさく작사) <장성의 파수>(최남선 작사) <후지산을 바라보며> 오페라, <춘향전>(이서구, 1949년 작곡 발표) <왕자 호동>(1954년 발표), 작곡집 <현제명 작곡집 제1>, 동광사, 1931 <현제명 작곡집 제2>, 1933 <춘향전>, 을유문화사, 1958 <현제명 작곡집>, 현제명기념사업회, 1970

        

     

     

    리뷰

    왜정말기 일제의 탄압은 점점 악랄해져 급기야는 학교에서도 대외적인 활동은 물론 모든 음악행사를 못하게 했고, 급기야는 그가 작곡한 <조선의 노래>가 민족적 사상을 고취시킨 곡이라 하여 결국 음악활동을 중지당하게 되었다. 테너 한규동은 동경 유학시에 현선생이 <메시아>의 독창자로 초청되어 연주를 할 때 한국 유학생들은 어깨가 으쓱했고, 일본인들 앞에서 뽐내기도 했다고 쓰고 있다.

     

    1933년부터는 경성방송국의 초청으로 합창단과 중창단 그리고 관현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라디오로 방송함으로써 그 인기가 대단했다. 한 일간지에서는 이러한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관현악단은 중앙학우회가 있으나 미비하고, 연희전문의 관현악단은 종전보다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었다. 특히 바이올린의 활동은 현저하다. 여기서 현제명씨의 공로는 지대한 것으로 말할 수 있다. - <조선일보>, 1931(……) 그의 성격은 명랑하고 쾌활하며 활동적이었는데 언제나 순수한 예술적 정신의 토대 위에서 행동했으며, 솔직담백한 그의 성격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어 훌륭한 후배들을 포용하?......

     

    춘향전

    5. 대본 이서구(李瑞求). 연출 유치진(柳致眞). 지휘 현제명. 출연 이관옥(李觀玉), 김혜란(金慧蘭), 이인범(李仁範), 이상춘(李想春) . 널리 알려진 한국의 고전 춘향 전을 이탈리아의 그랜드 오페라 형식에 바탕을 두고 구성한 작품으로 한국오페라의 효시이다. 19505월 국립중앙극장에서 서울대학교 음대 주최로 첫 공연을 가진 후 1951년 부산 시민회관을 비롯, 작곡자와 연출자, 출연자를 바꾸어 가며 현재까지 50여 회가 넘는 공연을 하고 있다. 우리의 전래설화를 소재로 작곡에 고심한 현제명은 자신이 성악가였기에 더욱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많은 청중을 동원한 대춘향전은 춘향과 이도령이 부르는 사랑가를 오래도록 대중에게 퍼뜨리기도 하였으며, 오페라를 통해 춘향전을 한층 사랑 받는 작품으로 굳혀 놓았다.

     

    왕자 호동

    현제명(玄濟明) 작곡. 42. 대본은 삼국사기에 실려 전해 오는 고구려의 설화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1953년 작곡되어 1954년 임원식(林元植) 지휘, 이해랑(李海浪) 연출로 서울시공관에서 초연되었다. 줄거리는 고구려의 왕자 호동이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태수(樂浪太守)의 공주와 사랑을 하게 된다. 이때 낙랑에는 적의 침입을 저절로 알리는 자명고(自鳴鼓)가 있어 쳐들어가기가 힘들었는데 낙랑공주를 꾀어 자명고를 찢게 하고 군사를 이끌어 낙랑을 정복한다. 이 사실을 안 태수는 딸을 죽이고, 호동도 나라와 사랑 사이에서 번민하다가 끝내는 자살하고 만다는 비극으로 되었다. 극적 구성력과, 음악적 예술적인 면에서 수준높은 작품은 아니지만 민족오페라의 방향을 제시하고 관중에게 오페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한 매개역할을 한 데 그 중요성이 있다.

     

    그집앞

    1933년 작곡자 자신의 독창으로 발표되었다. 선율이 단조롭고 반주도 화음 위주이지만 아담한 곡이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와 또 한 절로 이루어졌다. 이 가곡은 단조가 아닌데도 서글픔을 자아내며, 이런 성격은 한국 가곡의 거의 공통된 현상이다. 현제명의 가곡은 감상적인 것이 특색이다.

     

    고향생각

    현제명 작곡 작사. 1923년 작곡자가 미국에 유학하고 있을 때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작곡하였다. 당시 일제의 지배하에 있던 민족의 슬픔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로 시작되는 2절의 시에 곡을 붙였는데, 노래가 단순하면서도 품위를 지니고 있고, 아름다움과 동양적인 정적이 감돈다. 피아노반주는 단순한 화음으로 그치고 있으나 감상적인 이 곡의 악상과 잘 조화되고 있다.

       

    ▶26일 학위수여식이 열리는 서울대 정문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김민수 교수
    재임용과 친일인사 동상 철거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사진 - 통일뉴스 이철화기자]

     

     

    서울대학교 친일인물 12명에 선정

     

     

    서울대학교 일제잔재청산위원회(·이하 서울대 청산위)7일 기자회견을 열어 현제명과 장발 등 12명을 '서울대 1차 친일인물'로 발표했다. 이날 청산위가 발표한 친일 인물은 학술분야 1, 문학 1, 음악 2, 미술 3, 법조 3, 정치 2명 등이다.

     

    학술분야 이병도(전 서울문리대 교수), 문학분야 정인섭(전 서울대 대우 교수), 음악분야 현제명(초대 음대학장)과 김성태(전 음대학장), 미술분야 노수현(전 서울미대 교수), 장발(전 서울미대 학장), 장우성(전 미대교수) 등이 꼽혔다. 또 법조분야 백한성(경성 법학 전문학교졸), 한태연(전 서울법대 교수), 민복기(경성제국대 법학부졸), 정치분야 정운갑(경성제대 법문학부졸), 함동석(경성제대 법문학부졸) 등을 친일인물로 선정했다.

       

    ▶[사진 - 통일뉴스 이철화기자]

     

    이병도(18961989) = 서울대 문리대교수, 문교부장관, 조선총독부 중추원 산하 '조선사편수회' 활동, 식민사관 총서 '조선사' 간행 참여. 국민훈장무궁화장, 인촌문화상. 5.16민족상.

     

    정인섭(19051983) = 서울대 대우교수, 펜클럽한국본부위원장, 조선총독부 산하 어용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 발기 및 간사, 대동아전을 맞는 나의 결의 '국민문학'에 발표,

     

    김성태(1910) = 서울대 음대학장, 대한민국예술원 원장, 친일 음악가들의 최대 어용 조직인 '조선음악협회' 작곡부 위원,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음악협회 등 일제 어용기관과 단체가 주최하는 정치적 연주회 활동.

     

    현제명(19021960) = 서울대 초대 음대학장,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 음악보국을 목적으로 하는 '경성후생실내악단' 결성 및 이사장 역임, 징병실시 야외음악의 밤에서 '항공일본의 노래''대일본의 노래' 불렀다, 현제명 동상.

     

    노수현(18991978) = 서울대 미대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아동 잡지인 '신시대'에 전시체제 국민요강을 선동하는 만화 그림, 중일전쟁 시기 황궁위문 부채그림을 그려 조선총독부에 납부, 조선미술상, 은관문화훈장 등 수상.

     

    장발(19012001) = 서울대 미대학장, '조선미술가협회' 평의원으로 활약, 이 단체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에 배치돼 국방기금 마련 전람회 개최, 대한민국예술원상, 서울시문화상, 서울대 개교50주년 행사에서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선정되고 학내에 동상이 세워짐, 장발의 호를 딴 우석홀 학내에 개관.

     

    장우성(1912) = 서울대 미대교수, 한국미술가협회 부이사장,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 친일미술단체인 '조선미술전람회' 에 참여하여 다수 입상, 총독부정보과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이 후원한 '반도총후미술전람회'에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참여.

     

    백한성(18991972) = 경성법학 전문학교 졸업, 평양지방법원판사, 청진, 광주, 대전지방법원 판사, 대법관, 내무부장관, 사법관 시보시험에 합격하여 일제 지침에 순응한 법조인.

     

    한태연(1916?) = 서울대 법대교수, 6·9·10대 국회의원, 유신헌법제정 관여,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한 일제 고문 출신 명망가라는 이유로 내무부장관 고문 등을 맡음.

     

    민복기(1913) = 경성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경성지방법원 판사, 대통령 비서관,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대법원장, 고등 문관시험에 합격하고 창씨개명, 국민훈장 무궁화장.

     

    정운갑(1913?) =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 친일 엘리트관료의 등용문인 '고등문관시험' 합격, 내무차관, 5선 국회의원 역임, 신민당 전당대회 의장 및 총재대행.

     

    한동석(19091956) =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 '고등문관시험' 합격, 자유당 총무부장, 함경남도 경찰부 고등경찰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독립투쟁 탄압하고 성과를 인정받아 총독부로 영전, 일제 식량수탈에도 앞장.

     

     

    참고문헌

    韓國藝術志(대한민국예술원, 1958)

    韓國洋樂百年史(李宥善, 中央大學校 出版部, 1971)

    韓國現代文化史大系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79)

    文藝總鑑(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9)

    한국예술지(대한민국예술원, 1958)

    한국양악백년사(洋樂百年史)(이유선, 중앙대학교 출판부, 1971)

    한국현대문화사대계』 Ⅰ(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9)

    문예총감(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9)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한국작곡가사전>,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시공사, 1999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 한상우, 지식산업사, 2003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41). 현제명 : 일제 말 친일음악계의 대부 (노동은), 친일파 993.

    현제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