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미술
운보 김기창 (金基昶, 1914∼2001)
스승에게 물려받은 친일화가의 길
경성 승동보통학교 졸업 이당 김은호 화숙에서 수업 세종대학교 명예 교육학 박사 '선전' 추천작가 1942년 반도총후미술전 추천작가 ▲1914년 =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출생 ▲1920년 = 장티푸스로 인한 청신경 마비로 후천성 귀머거리가 됨 ▲1930년 = 승동보통학교 졸업후 이당 김은호 화백 문하로 입문 ▲1931년 = 조선예술전람회서 < 판상도무(板上跳舞) > 입선해 데뷔 ▲1936년 = 김은호 화백 후학모임인 후소회(後素會) 창립 ▲1940년 =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 ▲1946년 = 동료화가 우향 박래현과 결혼 ▲1947년 = 첫 `운보- 우향 부부전' 개최. 국립민속박물관 미술부장 ▲1950년 = 전북 군산으로 피난해 월북한 동생 기만 씨 등과 헤어짐 ▲1952년 = 예수 일대기 그린 작품 30점 제작 ▲1954년 = 군산생활 청산하고 상경. < 오수 > 등 인물과 풍속화 시리즈 제작 ▲1955년 = 대작 < 군마도 >와 < 탈춤 > 시리즈 제작. 홍익대 강사로 강단에 섬 ▲1960년 = 참새 1천여 마리 그린 < 군작 > 제작 ▲1962년 = 수도여자사범대(세종대 전신) 회화과 학과장 ▲1968년 = 부인 우향 미국으로 건너가 7년간 헤어짐 ▲1970년 = 청록산수 첫선 ▲1971년 = 3.1문화상 수상. 서울 인사동에 `운향화실' 개설 ▲1976년 = 우향 타계. 민화에 바탕 둔 바보산수 제작 ▲1977년 = 대한민국 은관 문화훈장 수상. 운향미술관 성북동 자택에 건립 ▲1979년 = 한국농아복지회 초대회장 취임 ▲1981년 = 예술원 정회원 위촉. 국민훈장 모란장. 한독미술가협회 회장 ▲1982년 = 예술원상 수상. 농아복지회관 서울 서계동에 개관 ▲1984년 = 충북 청원에 `운보의 집' 완공 ▲1985년 = 가톨릭으로 개종. 김수환 추기경에게서 영세 ▲1988년 = 자서전 `침묵의 심연에서' 출간 ▲1989년 = 국립현대미술관서`운보전' . 대걸레작업 < 걸레수묵 > 발표 ▲1993년 =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서`운보 김기창 팔순 기념 대회고전' ▲1994년 =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전5권) 발간 ▲1996년 = 후소회 창립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쓰러진 후 투병생활 ▲1997년 = 롯데화랑서 `운보 김기창 예술 60년-미공개 작품전' ▲1999년 = `천연기념물이 된 바보' 출간. ▲2000년 = 갤러리현대 등서 미수(米壽) 기념특별전. 월북동생 기만 씨와 상봉 ▲2001년 = 타계 1977년 은관문화훈장(2등급) 2001년 금관문화훈장(1등급, 추서)
김기창(金基昶, 1913년 2월 18일~2001년 1월 23일)은 대한민국의 동양화가로, 호는 운보(雲甫), 운포(雲圃)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경성부 출생이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베드로였다.
그는 그의 뛰어난 붓놀림으로 일제 군국주의를 떠받쳐 준 전력을 가진 화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의 그림들이 고스란히 남아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운보는 친일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평의원으로 있던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그림을 통해 일제의 전쟁동원에 적극 협력하였다.
일제 말 친일 미술전의 핵심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후소회 동문인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다.(1942∼44) 자연스레 친일파의 나락에 빠져든 것이다. 김기창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고무하기 위한 선전 작업에도 앞장섰다. 이는 우선 신문·잡지류의 대중매체에 실린 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총후병사〉1944.4 매일신보에 게재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43.8.6),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지에 실린 그림과 훈련병을 그린 〈총후병사〉는 펜화에 담채를 가한 삽화이다. “완전군장으로 간이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병사의 옆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얼굴과 주먹 쥔 손에는 성전에 참여한 멸사봉공의 굳은 의지가 생생하게 담겨있다”고 이태호 명지대 교수는 《친일파 99인》에서 밝혔다.
그러나 〈총후병사〉에 대해서 김기창은 "정식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삽화에 불과해 친일한 작품으로 볼 수 없다."고 친일작품행위를 부정했다. 이러한 운보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에 당시 남양군도에서 대검을 소총에 끼운 채 적진을 향하고 있는 일본군의 육박전을 묘사한 〈적진육박〉(1944)이라는 작품이 공개되면서 이 말은 거짓말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적진육박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소위 ‘황국신민’의 영광을 고취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경성일보사가 1944년 3월부터 7개월간 서울에서 연 ‘결전’ 미술전람회에 출품됐다”고 밝혔다.
24살 때인 조선미술전람회(줄여서 “선전”)에서 최고상을 받은 운보는 연4회 특선 경력으로 27살 나이에 “선전” 추천작가가 되면서 “추천 작가된 영광”을 일제군국주의에 동조하는 것으로 갚은 사람이다. 조선남화연맹전(1940.10), 애국백인일수전람회(1943.1)를 통해 일제의 기금 모집에 적극 협력 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유려한 붓끝을 놀려 일제군국주의를 찬양, 고무하는 그림을 그려낸 화가이다.
사후인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미술 분야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이글은 그가 죽기 전인 1994년경 씌어진 글임을 감안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기창(金基昶)의 친일 그림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1943년 8월 7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삽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는 운보의 가장 대표적인 친일화로 알려져 있다. 학도병으로 입대를 앞둔 아들과 이를 바라보는 부모를 그린 운보의 그림은, 파인 김동환이 쓴 '님이 부르실 이 거룩한 자녀를 / 앞으로- 어서, 앞으로...'라는 내용의 시와 함께 실렸다.
화풍만 아니라 친일행각까지 스승의 길 따라
김기창은 여러 면에서 친일화가의 선두주자였던 김은호*의 수제자격이다. 섬세한 사실 묘사 위주의 일본화식 채색화법을 고스란히 배웠을 뿐 아니라 친일 행각까지도 착실히 스승의 길을 따랐기 때문이다.
김기창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장티푸스를 앓으면서 청각장애를 일으켜 정상적으로 학교 과정을 마치지 못하였다. 그는 어머니 한윤명(韓潤明)의 정성으로 한글과 일어, 한문 등을 익혔고, 그림에 대한 재능이 일찍 발견되었다.
김기창의 어머니는 감리교 신자로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개성의 정화여학교 교사를 지낸 바 있는 신여성이었다. 김은호의 문하생이 되어 본격적인 화가 수업을 한 것도 어머니의 배려 덕택이었다.
그의 나이 17세 때(1930)의 일이다. 김기창은 김은호의 문하에 들어선 지 6개월 만에 제10회 '선전'(朝鮮美術展覽會)에 [널뛰기](板上跳舞)를 출품하여 입선하는 기량을 발휘하였다(1931).
이 때 어머니로부터 '운포'(雲圃)라는 아호를 받게 된다. 이후 계속해서 '선전'에 입선하다가 24세 때인 제16회 '선전'(1937)에 할머니의 옛 얘기를 듣는 아이들을 담은 [고담](古談)을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다음해에는 [여름날](夏日)로 '총독상'을 받고, 18·19회 '선전'에 계속 특선으로 입상되어, 연 4회 특선 경력으로 추천작가가 되었다. 약관의 27세였다. 16회와 17회 때에는 스승인 김은호가 직접 심사원으로 참여하였고, 19회 때에는 주변의 시샘과 방해가 있었으나 김은호의 주선으로 무난히 무감사 특선에 올라 추천작가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이러한 김기창의 '선전' 출품작들은 대부분 향토적 내용에 장식적인 색채 감각과 호분의 사용, 섬세한 필치 등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요구에 충실히 부응한 것이었으며, 스승인 김은호의 일본식 채색 화풍을 전수받은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김기창의 뛰어난 묘사력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1938년에는 일본인 화가(失澤弦月, 野田九浦 등)를 만나 본토의 정통 채색화풍을 익히러 도쿄에 잠시 다녀오기도 했다.
'선전'에 추천작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파 대열에 합류한 김기창은 자신의 탁월한 회화 기량으로 젊은 나이에 '추천작가가 된 영광'을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것으로 갚았다. 그 영광을 가져다 준 스승 김은호가 밟은 길을 따라 총독부의 전시 문예정책에 부역한 것이다.
화가로서 개인의 명예를 한 몸에 얻게 되었으니 척박한 민족현실이 안중에 있을 리 만무다. 김기창은 '조선남화연맹전'(1940. 10)과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전람회'(1943. 1)를 비롯하여 김규진, 김은호*, 이상범, 이한복, 허백련 등 대가급 친일 미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기금마련 전람회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그는 김은호, 이상범이 심사위원 으로 참여한 일제 말 친일미술전의 핵심인 '반도총후미술전' (半島銃後美術展)에 후소회 동문인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다(1942∼44).
자연스레 친일파의 나락에 빠져든 것이다. 김기창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고무하기 위한 선전 작업에도 앞장 섰다. 이는 우선 신문 · 잡지류의 대중매체에 실린 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매일신보}에 게제 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43. 8. 6),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지에 실린 완전군장의 [총후병사](1944. 4)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는 '축 입영(祝 入營)……'이라는 어깨띠를 두른 학도병 좌우에 갓 쓰고 안경 낀 연로한 아버지와 수건을 쓴 어머니가 수묵 소묘풍으로 그려진 삽화이다.
이는 1943년 8월부터 시행된 조선 청년 징병제를 선전하기 위한 작품이다. 종군하게 되어 감격스러운 듯한 학도병의 진지함과 장한 아들을 굽어보는 아버지의 표정에 선전효과를 높이려는 의도가 다분히 배어 있다. 훈련병을 그린 [총후병사]는 펜화에 담채를 가한 삽화이다.
완전군장으로 간이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병사의 옆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얼굴과 주먹 쥔 손에는 성전에 참여한 멸사봉공의 굳은 의지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또한 제21회 '선전'(1942)에 출품한 채색화 [모임]은 마을 부녀회의 반상회 광경을 연상시켜 주는데, 전시 후방에서 지원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 김기창 <총후병사>(1944). 운보 김기창은 장애를 극복한 천재화가이자 대중적인 사랑을 받아온 한국의 대표화가이다. 그는 완전군장을 한 병사가 쉬고 있는 모습을 그린 <총후병사>(1944년작)로 친일의 도마에 오르기도 했으나 "정식 그림이 아닌 삽화였다"고 친일행적을 부인했다.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인 어머니의 지극한 교육에 힘입어 미술의 길로 들어서게 된 운보는 17세 때 당시의 친일화가인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를 만나게 됨으로써 당시 화단의 인정과 친일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운보는 총독부의 "전시 미술행정"에 일조를 하며 급기야는 일제의 말기(1943년)에 실시된 조선 청년 징병제에 대한 찬양의 그림을 그렸다.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와 ‘총후 병사’ '전진육박' 등이 그것이다. 1943년 8월 7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삽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는 운보의 가장 대표적인 친일화로 알려져 있다. 학도병으로 입대를 앞둔 아들과 이를 바라보는 부모를 그린 운보의 그림은, 파인 김동환이 쓴 '님이 부르실 이 거룩한 자녀를 / 앞으로- 어서, 앞으로...'라는 내용의 시와 함께 실렸다.
젊은 나이에 '선전'의 추천작가가 된 '영예'와 기량으로 김기창은 일제 군국주의에 부화뇌동하였다. 김기창의 작업들은 당시 일본인 화가들의 전쟁선양 작품들에 버금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친일 경향과 활약으로 김기창은 광복직후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스승인 김은호를 비롯하여 이상범, 심형구*, 김인승*, 김경승, 윤효중 등과 함께 당연히 제외당했다.
그러나 그 역시 미군정과 이승만 친미 파쇼정권의 등장 이후 친일행적은 감추어진 채 제도권 미술계의 중심으로서 일제 때 친일 하면서 누렸던 명예와 인기를 유지하게 된다.
김기창은 광복 후 나름대로 '눈 뜬 장님으로' 친일파가 된 자기변명과 극복론을 폈다.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환경 지배론과 점진적 식민잔재 극복론이 그것이다.
원로화가가 된 김기창은 최근 한 일간지 기자와의 대담에서 친일의 변으로 "사람은 자기가 살아가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물론 의지가 강한 자기 정신을 소유한 사람은 문제가 없지만 평범한 인간이면 누구나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겠지요"({경향신문}, 1991. 8.3)라고 피력한 바 있다. 친일파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자기반성치고는 너무나 안일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 대담에서 "내 살 속의 과거를 깎아 내며 민족적인 것에 이르고자 신체적 장애를 딛고 끊임없이 정진해 왔다"는, 전혀 '평범한 인간'의 논리와 걸맞지 않는 발언에 이르면 가증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화가로 출세하기 위해 '선전'에 출품해서 추천작가의 영예를 안았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고 그 '환경' 속에서 더 출세하기 위해 스스로 친일행각을 벌였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광복 직후 어머니가 지어 준 아호인 '운포'(雲圃)의 '포'(圃)에서 '口'를 떼어 내고 '운보(雲甫)'로 바꾼 이유가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는 얘기와도 맞물려 있다. 어차피 형식적 자기변명에 불과하다.
그의 형식주의적 경향은 점진적 식민잔재 청산론과 광복후 변모가 큰 화풍에서도 찾아진다. 이런 논리는 광복이듬해 화단활동을 본격화하면서 쓴 아래의 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우리의 모든 문화면은 오랜 왜정 압박하에 자유를 속박당하며 가사상태에 빠져 그 향상력이 저지되어 왔고, 특히 미술에 있어서 그 영향을 지독히 흡수한 것이 동양화였다.
그야말로 눈 뜬 장님처럼 예술 관념을 인식치 못한 제작을 했고, 그 작품에서 예술의 대명사의 대접을 받아 떳떳이 내놓을 무엇이 있었던가. 결국 환경적으로 왜놈의 탈을 쓰고 그들의 유행성을 모방만 하느라고 급급했기 때문이었으니, 일종의 고질적인 우리들의 비예술관념과 깊이 뿌리박힌 일본적인 습관을 현재에 있어서 여하히 처리할 것인가. 단지 지금 와서 일본적인 것을 이탈하려고 성급한 초조를 하더라도 안 될 것이니, 차라리 그것이 일본적이라 하더라도 서서히 이탈하도록 자신을 다시 한 번 반성하고, 자기 실력을 가다듬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광복 기분으로 가뜩이나 어리뻥뻥한 모호한 제작태도를 지닌 우리들이 '조선적, 조선적' 하기만 하고 날뛴다면 자신을 더욱 방황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게 될 것이요, 그 작품이란 죽도 밥도 아닌 엉터리 작품이 될 것이니, 우리는 그런 태도를 청산하고 제일 먼저 화안(畵眼)의 양성, 즉 그림을 바로 인식할 줄 아는 교양을 쌓을 것이오…….(김기창, [해방과 동양화의 진로], {조형예술} 1호, 1946).
이 점진론은 결국 식민지 시절 벌인 반민족적 행각에 대한 반성의 핵심은 간과한 채 '현실'이 아닌 '그림을 바로 인식할 수 있는 교양'을 쌓자는 주장만 담긴 것이다.
그런데 그의 '그림 교양'은 또다시 광복후 격변하는 시대현실과 무관하게 형식 실험적 태도로 바뀌었고, 개인주의적 작업과 사회활동 그리고 화단정치에서도 점진론과는 정반대로 맹활약을 벌였다. 특히 다양한 화풍의 변화가 그것을 잘 말해 준다.
김기창은 '운보적이고 민족적인 것을 찾기 위해, 야성적이고 생명감 넘치는 격정적인 힘찬 화면'을 만들어 내기 위해 분방하고 '줄기찬 자기연소'(이구열, 1979) 과정을 거쳤다.
그 자신의 고백대로 김은호를 배우면서 형성된 일본식 채색화풍을 벗고, 1952년 전후로는 형상 변형이 반추상적인 입체파풍의 시기였고, 1964∼65년은 문자를 변용하거나 완전 추상에 빠진 시기, 1970년대는 수묵의 강한 선을 쓰는 시기, 그리고 1975년부터는 민화류 소재를 이용한 바보산수 시기 등으로의 변모가 그것을 잘 말해 준다.
그런데 이런 화풍의 변모는 개인적 갈등과 창작 욕구에 의한 것이지만, 실제는 이후 우리 미술계에 물밀듯이 유입된 모더니즘의 조형 논리를 그대로 답습한 데 불과하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화풍에 매몰되었듯이 광복 후에는 또 다른 서구 제국주의 미술에 기대어 자기 회화세계를 변모시켜 낸 결과이다. ▲ 김기창 <적진육박>(1944) 최근 '결전미술전 조선군보도부장상'을 수상한 <전진육박>(1944년작)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의 친일행적은 명백해졌다. 이당 김은호의 수제자이기도 한 김기창은 반도총후미술전 초대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광복 후 김기창의 회화적 변모에는 여성 화가로서 추상주의를지향한 박래현의 영향도 있었다. 광복 다음해 결혼한 박래현과는 17회의 부부전을 열어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자유신문}의 미술기자, 민속박물관의 미술부장을 잠시 지낸 것(1947∼48)을 제외하고는 작업과 화단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미협과 국전 운영에 깊이 관여하고 국전과 민전의 심사위원으로서 꾸준히 화단의 세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백양회 창립 주도, 해외전에 한국 대표로 적극 참여, 해외여행, 홍익대 미술과 교수 (1954)와 수도여사대 (지금의 세종대) 교수 (1962∼74) 역임 등 그의 정치력에 걸 맞는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또한 왕성한 활동으로 상복도 많아 여타의 친일 인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12회 3·1 문화상(1971)을 받았고 3·1 문화상 심사위원(1972, 1977)에 위촉된 바도 있다.
이외에도 은관 문화훈장(1977), 국민훈장 모란장(1981), 예술원 정회원(1981), 중앙일보 중앙문화예술상 본상(1982), 예술원상(1983), 5·16 민족상과 서울시 문화상(1986), 색동회상(1987)등 관민단체의 상을 두루 받았다.
△ 대표적인 친일부역화가 김기창이 그린 영정을 바탕으로 건립된 세종대왕 동상. 선배 예술가들의 친일 경력을 고발했던 서울대 김민수 교수는 세종대왕 영정이 김기창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왼쪽 위로부터 김기창, 김기창이 그린 세종대왕 영정, 김기창이 그린 영정을 바탕으로 새로 건립된 세종대왕 동상, 김기창의 동상)
그는 왜 ‘판상도무(板上跳舞)’를 다시 그렸나
왼쪽이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의 데뷰작 ‘판상도무(板上跳舞)’
한편, 화단과 사회활동도 국제적이어서 한독미술가협회 회장(1981), 후소회 회장(1985)을 비롯해서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지부 실행위원(1967), 한국농아복지회 창립과 초대 회장(1979), 세계농아연맹 문화예술분과 부위원장(1985), 아시안게임 동남아채묵(彩墨)전 추진위원장(1986)을 역임하였으며, 88 올림픽 아트포스터 제작 작가로 선정되는 등 다채롭고 의욕적인 면모를 과시하였다.
또한 박정희 군사 정권 아래서는 초상화나 기록화 제작을 도맡기도 하였다. 추사 김정호와 의병장 조헌의 영정(1974), 을지문덕과 신숭겸 영정(1975), 그리고 신라 태종무열왕과 문무대왕 영정(1974)을 제작하여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받은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공공건물의 벽화나 그림제작도 많았고 성화집 {예수의 생애}에서는 한복을 입은 기독교화를 그려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현재는 1979년에 착공한 청주 교외의 화실에서 노년의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의 생가
김기창 화백은 서울 운니동의 이 집에서 1914년에 태어났다.이 생가는 현재 어머니의 고향인 충북 청원 ‘운보의 집’에 옮겨져 있다.‘운보의 집’은 김기창 화백이 부인 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 화백)과 1976년 사별한 후 7년 여에 걸쳐 1984년에 완공한 후 타계(2001년)할 때 까지 노후를 보낸 곳이다. 운보의 집’은 김기창(金基昶)화백 어머니의 고향인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 8만 여m²의 터에 대규모 예술타운으로 만들어져 1984년에 완공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2001년 타계할 때 까지 여생을 보냈다. 전통 한옥과 정원, 조각공원, 미술관, 도예관 등으로 이뤄졌으며 주말이면 평균 2000여 명이 찾는 문화 관광 명소였다. 그러나 운보(雲甫) 타계 후 운영에 어려움을 겪으며 재산권 문제와 맞물려 파행을 거듭하다가 한동안 문을 닫기도 했었다. 꿈에 그리던 동생 중 한 명이 2000년 12월 남북 이산가족 상봉단으로 서울에 와서 극적인 상봉을 했으니 운보의 생에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또 최근에는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간행위원회를 발족시켰는데, 63년 동안의 작품 활동을 총망라해서 초대형 화집을 발간할 예정인 모양이다. 그 간행위원회에 참여시킨 문화계 · 미술계 위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역시 김기창의 정치력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운보 화백이 한국 미술에 있어서 도저(到底)한 거봉이요, 또한 그의 작업이 장강처럼 맥맥히 이어져 왔음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즉, 운보의 80년 생애와 그 방대한 작품이……특히 그의 삶이나 예술은 육체적 이중고를 초극한 실로 '위대한 실존상'으로 우리 모두의 삶의 귀감이 될 것이다.(구상 시인의 글, 발간위원회 두번째 소식지, 1993. 1)
이 글을 쓴 시인 구상은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발간위원장이다. 아직도 우리는 김기창의 친일활동은 철저히 밀쳐놓은 채 그를 '삶의 귀감'으로 삼자는 주장이 공공연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 이태호 (전남대 교수·미술사,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 참고문헌 김기창, {나의 사랑과 예술}, 정우사, 1977. 화집 {운보 김기창}, 경미문화사, 1980. {한국근대회화선집} 한국화 9권,'김기창/박래현', 금성출판사, 1990.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4월 1일). 〈김기창 : 스승에게 물려받은 친일화가의 길 (이태호)〉 임형두. “운보 김기창 화백 별세”, 《연합뉴스》, 2001년 한국미술작가 500인의 공간 / 김기창 운보미술관 <김기창 박래현: 구름 사내와 비의 고향>, 오광수, 재원, 2003 <운보 김기창-불굴의 화가>, 정현웅, 오늘, 2001 <운보 김기창 예술론 연구>, 최병식, 동문선, 1999 <천연기념물이 된 바보>, 최병식, 동문선, 1999 <20인의 한국현대미술가>, 오광수, 시공사, 1997 <나의 사랑과 예술>, 김기창, 정우사, 1993 <운보 김기창>, 김기창, 예술의전당, 1993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김기창>, 문선호 편, 금성출판사, 1975 http://www.sunjooschool.com/zbxe/class_06/34918/page/5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0155 결전미술전람회목록(1944) ??每日新報 1943.8.7 ;小國民?? 1944년 5월호 ; 김민수, 한국 화폐의 초상과 기억의 죽음,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7집(2006) 畵壇 풍상 七十年??(2003) ; 친일문학론 (1966) 친일파 99인 3권(1993) 한국근대미술의 역사(1998), 식민지 조선과 전쟁미술 : 전시체제와 민중의 삶(2004)
■ 참고 작품사진 김기창,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매일신보, 1943년 8월 6일자 삽화. 김기창, <총후병사>, 조선식산은행사보 {회심}지, 1944년 4월호 속표지화
어머니가 지어주시고 8.15 광복 때 까지 사용되었던 '운포(雲圃)'라는 호 32세 되던 해인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기쁨을 맞이하여 아호 ‘雲圃(운포)’에서 포'자의 굴래같은 '口'를 벗겨내고 '甫'자로 시원스레 해방 시켜 ‘운보(雲甫)’가 되었다.
운보(雲甫) 김기창 [金基昶] 동양화가 서울 출생. 7세 때 장티푸스로 청각을 잃고, 16세에 승동(勝洞)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이당화숙에서 김은호에게 그림을 사사하였다. <판상도무(板上跳舞) 널뛰기>(1931)로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한 후, 연 5회의 입선과 연 4회 특선을 기록했다.
1946년에 우향 박래현과 결혼하였고, 1956년 국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수도여자사범대학과 홍익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백양회(白陽會)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는 동시에 수많은 해외전을 가졌다.
김기창의 작품세계는 1930년대의 초기작에서부터 1990년대까지 매우 급변의 단계를 거치면서 독자적인 발전과정을 보여준다. 정통 회화에서부터 추상 등의 실험작을 거쳐 자신의 조형에의 욕구를 끊임없이 형상화시키면서 대작을 펼친다. 이러한 모습은 안주를 기피하는 창의적인 예술가의 초상이 될 수 있다. 산수·인물·화조·영모(翎毛)·풍속 등에 능하며, 형태의 대담한 생략과 왜곡으로 추상과 구상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고, 활달하고 힘찬 붓놀림, 호탕하고 동적인 화풍으로 한국화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대표작으로 <가을>(1934), <보리타작>(1956), <새와 여인>(1963), <소와 여인>(1965), <태양을 먹은 새>(1968), <나비의 꿈>(1968), <군마도>(1970), <웅(雄)>(1970), <달밤>(1978) 등이 있다. 5·16민족상(1986), 서울시문화상(1986), 색동회상(1987)을 받았다.
1930년대에는 이당의 문하에서 일본화풍의 사실적인 경향이 주류를 이루는 훈련단계를 거쳐 광복 후 자재로운 운필의 구사를 통해 필선이 만들어내는 구성의 세계에 돌입한다. 기초적인 관찰력과 묘사력을 바탕으로 대범한 스케일의 운필력을 보여주는 그림을 많이 그린다.
우향 박래현과 결혼 후 부부작가는 새로운 조형성에 대한 고민과 몰입을 통해 서구적인 회화양식을 수용하고 해체과 구성을 시도하는 변신이 이루어진다. 1965년 이후에는 본격 추상 작품(태고의 이미지) 시리즈와 청자의 이미지 시리즈를 통하여 동양화의 새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우향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 <태양을 먹은 새>, <나비의 꿈>, <석양의 군마도> 등으로 적색과 황색이 채색의 주조를 이루어 매우 현대적이면서 다이나믹한 그림을 보여준다.
또한 청록산수에 대한 실험적인 경향을 동시에 선보인다. 이 과정을 통해 1975년 바보회화 창출이라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1980년대에 들어 운보 김기창의 화풍은 바보회화 시리즈를 민화적인 요소와 청록산수 등으로 다양하게 진전시켜 가면서 실험적 창작정신을 발휘하였다.
전시 리뷰 한국화단(동양화)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운보 김기창, 그의 부인 박래현 양(兩) 화백의 제5회 부처전이 오는 5월 11일부터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최된다. 일찍이 18세 시(時) 선전에 초입선, 24세부터 연 4회 특선하여 천재적 질을 나타낸 운보 화백은 그 후 20여 년을 오로지 예도(藝道)에 정진, 오늘의 한국화단에 확고부동한 위치를 확립하고 정체되어 있는 동양화계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전통적인 이름 아래 어느 한 개의 고정적인 형식에 치우쳐서 그 발전성이 저지되고 있는 동양화의 영역에 자유로운 조형정신으로써 시대적인 이념에 즉응할 수 있는 발전의 터를 모색하고 있는 화백의 예술적 정신에 의한 것이다. 그러기에 동(同) 화백은 동양화가이면서 산수나 화조나 신선도를 그리는 화가가 아니다.
이번에 전시될 작품 중 <보리타작>(10척×4척)은 그가 순동양적인 화법을 고지(固持)하면서 소재 선정에 구애를 받지 않고 재래의 동양화의 전통에서 출발하여 소재를 현대화시켜 보려는 시도인 것이다. 또 작품 <힘=소>(10척×7척)는 화제(畵題)와 같이 힘찬 작품으로 여기 작가가 포착하고 지향하는 시대성이 나타난 것이라고 보겠다.
한편 인생의 반려로 같은 화도(畵道)의 정신을 추구하면서 섬세하고 감각적인 수법을 가진 박래현 여사는 그의 작품 <달밤>에서 담백하고 우아한 황색과 연한 연두빛과 점점(點點)으로 선에 색에 함빡 향토의 정서를 달밤처럼 비치고 있다. 이번 전시될 작품은 김 화백이 19점, 박 여사가 13점이다.
- <서울신문>, 1956년 5월 3일, ‘제5회 김기창 부처전(夫妻展) 동양화의 현대화 시도-자유로운 조형’
평론 雲甫(운보) 후반기에 가장 두드러진 변모의 양상은 민화(民畵)에 대한 영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 초반, 운보가 민화에 대해 쏟은 관심과 애착은 돋보이는 바였다. 물론 민화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운보에 한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기울였던 민화수집과 민화가 갖는 예술성의 고취는 선각적인 일면을 지닌 것이었다고 할 만하다. 민화가 지니는 독특한 예술성을 다시금 재구현해내는 창조의 작업을 시도한 이는 운보를 제쳐두고 그 예를 찾을 수 없다. 운보가 유달리 민화에 대한 관심과 애착을 보인 것은 단순한 골동취향이 아니라 자신의 새로운 창조적 영감원으로 수용했다는 데서 유일한 예를 만나게 한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운보 예술을 새롭게 꽃 피어나게 한 촉매이기도 했으나, 민화가 지니는 참다운 예술성의 재발견이란 차원에서 그 의미를 찾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민화의 독자적 예술형식이 단순한 지나간 한 시대의 양식으로 머물지 않고 우리의 잠재된 미의식의 구현으로 재창조되었을 때에야말로 민화는 비로소 살아있는 미술양식으로 우리 앞에 놓이게 된다. (……) 민화를 자신의 방법으로 변형해내는 일련......
1914년 서울 출생 1920년 장티푸스로 인한 청신경 마비로 후천성 귀머거리가 됨 1930년 승동보통학교 졸업 후 이당 김은호 화백 문하로 입문 1931년~1940년 제10회∼19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및 특선 1936년~1943년 제1회∼6회 후소회전 1941년~1944년 제20회∼23회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 1948년~1971년 부부전(8회) 1950년~1993년 제7회∼20회 후소회전 1955년~1961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4,5,6,8,10회) 1957년~1977년 제1회∼26회 백양회전 1958년 한국현대미술전, 뉴욕 월드하우스갤러리 초대 1960년 제4회 현대작가초대전(조선일보사 주최) 1963년 제2회 5월문화상 수상 1970년 김기창 화전, 현대화랑 1971년 제12회 ‘상일문화상’ 수상(상일문화재단) 1972년 운보 김기창 화백 신작 감상회, 서울화랑 / 한국근대미술 60년전(1900∼1960), 국립현대미술관 1976년 김기창 화전, 서울화랑 1977년 운보 김기창 성화전, 경미화랑 / 한국화 구주 순회 전시회 초대, 왕립동양박물관(스웨덴 스톡홀름)·라젠시 싱리미술관(네덜란드)·슈투트가르트 문화교류관(독일)·파리 세르니스미술관(프랑스) 1980년 화도 50년 기념 운보 김기창 초대 회고전, 국립현대미술관 / 운보 김기창·송남 신상호 도화전, 롯데백화점 화랑 198년1 국민훈장모란장 수상 1983년 농아복지 기금마련 운보 김기창 풍물 스케치전, 국립현대미술관 / 김기창 작품 전시회, 롯데미술관 1983년 이탈리아 한국 현대미술전, 밀라노 비스콘티아홀(이탈리아) 1985년 운보 김기창 작품전, L.A.한국문화원 1985년 6대가 중진 작가전, 동원화랑 1986년 서울시문화상 수상 1989년 김기창전, 송원화랑 1991년 운보 김기창 화백의 어제와 오늘, 롯데백화점 잠실점 그레이프홀 1991년 현대 한국화의 뿌리, 송원화랑 1992년 한국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전, 부산한국미술관 1993년 운보 김기창 팔순 기념 대회전, 예술의전당 / 김기창전, 현대화랑 1995년 롯데화랑 부산점 개관기념 초대전 1997년 운보 김기창 예술 60년-미공개 작품전, 롯데화랑
한국화의 추상화
우향(雨鄕) 박래현 [朴崍賢, 1920~1976]동양화가 호는 우향(雨鄕). 1944년 도쿄 여자 미술학교[東京女子美術學校] 일본화과를 졸업하여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1956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노점 路店〉을출품해 대통령상을 받았다.
동양화가 김기창(金基昶)과 결혼하여 전통적인 동양화의 형식을 벗어난 조형실험적인 작품과 추상적인 작품들을 함께 제작했으며, 판화와 오브제 작업도 했다. 1969년미국으로 건너가 판화를 연구했으며, 다양한 작품세계를 구현했다.
김기창과 함께 세게각지에서 부부전을 가졌다. 성신여자대학교 교수,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지냈다. 대표작으로 〈노점〉·〈부엉이〉·〈이른 아침〉 등이 있다.
왼쪽에서 두번째 소년이 운보, 가운데 분이 외할머니, 맨 오른쪽이 어머니, 검은 두루마기 입은 분이 아버지.
- 운보 김기창 화백 '별세’에 뉴스기사 내용 -
머리글 아래는 2001년 1월 23일 운보의 사망 당시 신문 기사다(한국일보).신문 기사만을 보면 그는 전혀 친일파가 아니다. 어디에도 친일했다는 기사는 없다. 그는 오로지 애국자요 훌륭한 예술가이다. 죽으면 미운 마음도 누그러지는 것은 우리네 인정이긴 하지만 건망증이 너무 심하다. 헷갈린다. 독립운동가 분들이 작고하셨을 때도 이렇게 대서특필을 하지 않았는데 우리나라는 정부나 언론이나 기려야 할 사람이 누군지를 도대체 모르고 있다.
향년 88세… 청록산수 등 2만 여점의 작품 남겨
운보 김기창 화백 '별세' 한국화의 거두 운보 김기창 화백이 23일 오전 9시 35분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 운보의집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운보의 아들 완씨는 이날 "어제(22일)까지만 해도 비교적 건강하시던 아버님이 새벽에 의식이 끊기고 호흡이 사실상 멎는 등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면서 "이후 급거 서울 삼성의료원으로 옮겨 확인한 결과 타계하신 것으로 최종 진단됐다"고 전했다.
1914년(호적은 1913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7살 때 후천성 농아가 됐으나 넘치는 정열과 예술적 투혼으로 이를 극복하고 한국회화의 대가로 우뚝 섰다.
김 화백은 17살 때 이당 김은호 화백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받아 이듬해 제10회 조선예술전람회에서 <판상도무 (板上跳舞)>가 입선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광복한 해 뒤 평생의 반려이자 화우(畵友)였던 우향 박래현과 결혼한 그는 수차례에 걸쳐 부부전을 개최하는 등 금실을 과시했지만 1976년 아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만년을 외롭게 지냈다.
김 화백은 청록산수, 바보산수 등 독자적 예술영역을 개척해가며 2만여점의 작품을 남겼으나 1996년 자신이 창립한 후소회 창립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뒤 뇌출혈로 쓰러져 그동안 긴 투병생활을 해왔다.
한국전쟁 때 동생들과 헤어진 그는 지난해 11월의 제2차 남북이산가족상봉 때북에서 온 동생 기만(基萬.72.공훈화가) 씨와 50년만에 병상해후를 해 민족 분단의 아픔을 또다시 실감케 한 바 있다.
대표작은 <정청> <군마도> <가을> <갓 쓴 예수> <흥락도> <문자도> <점과 선 시리즈> 등.
유족으로는 아들 완(完.52)씨와 딸 현(玄.54.미국 거주), 선(璇.49.미국 거주), 영(瑛.45.수녀.세례명 아나윔) 씨 등 1남 3녀. 북한에는 여동생 기옥(75. 의사) 씨와 남동생 기만 씨가 생존해 있다. 빈소(☎(02)3410-3151∼3)는 삼성의료원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27일 오전 9시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원로시인 구상 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미사와 예술인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이에 앞서 오전 8시에는 운보가 오랫동안 살았던 서울 성북동자택을 잠시 들르게 한다. 장지는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에 있는 운보의집이다.
운보 김기창의 생애와 작품세계 23일 타계한 운보 김기창 화백은 왕성한 실험 정신으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변신을 거듭한 한국화단의 거목이다. 타고난 예술혼과 활화산 같은 창작열로 호평 받았으며 청각 장애로 인한 침묵의 고통을 딛고 우뚝 선 의지의 인물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1914년 서울 운니동에서 태어난 김씨는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한 7살 때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신경이 마비돼 후천성 귀머거리 (전농)가 됐다. 그는 12살에 복학했으나 강의를 듣지 못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공책에 새, 꽃, 사람, 개 등을 그렸다. 아들의 소질을 알아본 어머니는 그가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이당 김은호 화백에게 사사하도록 주선했고, 이는 그의 일생에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이당에게 그림을 배운 지 6개월 만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출품할 기회가 생기자 어머니는 아들에게 운보(雲 口에甫)라는 아호까지 지어줬다. 이 때문인지 운보는 1931년 선전에 <판상도무(板上跳舞)>라는 널뛰기 소재의 작품으로 입선해 일찍이 대가의 소질을 보였다.
당시 신문에는 귀먹고 말 못하는 18살 소년이 선전에 입선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이듬해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딱한 처지에 놓이자 이당이 후견인 역할을 맡는 등 어려운 젊은 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털고 선전에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해 추천작가가 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1937년 선전에서는 할머니에게서 옛이야기를 듣는 아이들 모습을 그린 <고담>으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광복 후 아호 운보 (雲 口에甫)에서 口자를 없애 장애의 굴레를 벗고 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과 의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이듬해 동료화가 우향 박래현과 결혼했는데, 이는 그의 삶과 예술에 일대 전기가 됐다. 필담으로 의사를 교환하는 데 한계를 느낀 그는 우향에게서 입으로 말하는 구화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아내의 작품 세계에서도 크게 영향 받았다.
한국전쟁은 그에게도 뼈아픈 고통이었다. 기만, 기옥 씨 등 동생이 사상 차이로 월북한 것. 그는 피난지 군산에서 조선시대 한국인의 모습으로 예수의 일대기를 그린 <성화> 연작을 2년에 걸쳐 제작했다.
전통 한국화의 평면구성에서 탈피해 입체 구성의 <노점>, <구멍가게> 등 대표작을 제작, 입체파 선두로 나선 것도 이때였다. 야생마의 움직임이 격정적 구도로 나타나는 대작 <군마도>와 전통 가면극을 작품화한 <탈춤> 등 춤 연작으로 힘찬 운필을 구사했다. 나아가 완전 추상인 <문자도> 제작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밖에 1천여 마리의 참새 떼가 양편에서 날아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담은대작 <군작>은 운보의 표현적 특징과 스케일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60년대 들어 해외 화단에 나선 운보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가장 뚜렷한 변화를 보이는 완전추상 <태고의 이미지>, <청자의 이미지> 등 이미지 연작으로 한국화의 새 가능성을 제시했다.
부인이 60년대 후반 미국에 유학하자 적색, 황색이 주를 이루는 <태양을 먹은 새> 등을 발표하는 등 천변만화하는 작품세계를 과시했다. 이어 장식적 산수화 <청록산수>를 선보이고, 민화풍 산수화인 <바보산수>와 해학성이 돋보인 <장생도>도 차례로 발표해 호평 받았다.
그러나 수차례 부부전을 가진 화업의 친구이자 인생의 반려인 부인이 1976년에 타계하자 그는 말할 수 없는 허탈에 빠졌다. 일생에서 가장 활발한 작업을 했던 게바로 그 이후로, 공백을 메우고자 하는 그의 안간힘을 느끼게 한다.
아내를 기려 성북동에 운향미술관을 세운 그는 성화집 「예수의 생애」 발간을 기념해 예수생애 연작으로 `운보 김기창 성화전'을 갖는 등 미친 듯이 화면에 빠져들었고, 만년에는 대걸레 작업인 <심상> 연작을 내놓기도 했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운보 김기창 팔순기념 대회고전'을 계기로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발간위원회가 작품 4천여점으로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전 5권)을 발간했다. 전작도록이 발간된 것은 그가 최초. 이 과정에서 그가 제작한 작품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의 30-40년대 작품 32점이 북한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돼 있음도 이 무렵 확인돼 화제가 됐다.
운보는 90년대 중반 서울 롯데화랑에서 `운보 김기창 예술 60년-미공개 작품전'을 갖는 등 `붓을 움직일 힘이 있는 한 그림을 그린다'는 신념으로 제작한 작품들을 속속 선보였다. 지난해에는 갤러리현대 등에서 미수기념전이 개최돼 병상의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감격을 안겼다.
전농인 운보는 농아복지에 남달리 관심이 컸다. 세계 스케치 여행 중 선진국의 농아복지 시설을 돌아보고 낙후된 국내 농아복지 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한국농아 복지회를 국제농아연맹에 가입시켰다.
80년대 중반 외가가 있던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에 `운보의 집'을 세우고 그 옆에 운향미술관과 도예전시관, 운보공방 등 문화공간을 조성했다. 이중 운보공방은 농아들에게 도자기 기술을 가르쳐 자립기반을 닦도록 한 곳으로, 청각 장애인의 권익옹호에 앞장선 운보의 자상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거구였던 운보도 79세 때 심장질환으로 쓰러졌다가 기적적으로 원기를 회복하는 등 만년에 건강문제로 고생을 했다. 그러다 지난 96년 후소회 창립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뒤 뇌출혈 증세를 보이며 더 이상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지난해 연말 제2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는 월북했던 동생 기만 씨를 극적으로 만나 가슴 아픈 가족사와 민족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인간승리 교훈 안기고 간 운보 한국현대미술의 `미스터리'로 일컬어지는 운보 김기창 화백이 한국화단에 불멸의 족적을 남기고 23일 떠났다. `미스터리'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그의 삶 자체가 워낙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7살에 청각을 잃은 운보는 타고난 생명의지와 폭발하는 정열로 누구도 범접키 힘든 독보적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인류사에서 장애를 이기고 우뚝 선 위인들이 간헐적으로 나왔다.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였던 미국의 헬렌 켈러와 농아작곡가였던 베토벤 등이 그렇다. 스페인 출신의 화가 고야도 농아라는 장애를 뛰어넘어 근대미술사의 거장으로 성장했다.
이중 헬렌 켈러는 운보에게 큰 힘을 주었다. 운보는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온 헬렌 켈러가 금강산을 여행하고 판소리를 감상한 뒤 정상인보다 더 즐거워하더라는 얘기를 꺼내 들려주곤 했다. 그는 자신의 귀에서도 가끔 칸타타같이 장엄한 소리가 아름답게 들려온다며 흥분과 함께 눈가에 이슬 같은 눈물을 맺혀놓곤 했다는 것. 고막을 상실한 그에게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베토벤과 고야도 그가 예술의 거장으로 부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청각마비에 생활고까지 겪은 베토벤은 자살을 결심하고 `가을에 낙엽이 땅 위에 떨어지듯 내 희망도 사라졌다'는 내용의 유서를 썼으나 마침내 <제5교향곡 운명> <제6교향곡 전원> <제9교향곡 합창>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고야는 또 어떠했던가. 나이 46살에 청각을 잃은 그는 불타는 투혼으로 불운을 털고 일어나 <성 앤토니오 데 라 프로리다 성당의 천장화> <마야>같은 대작을 만들어 인류문화사에 기여했다. 그가 농아가 된 것은 궁정수석화가라는 최고명예에 오른 뒤였다.
물론 운보가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예술의 샘으로 이끌어준 어머니와 젊은 날 그를 건사해준 외할머니 그리고 사랑으로 감싸준 동료화가이자 평생반려인 아내의 뜨거운 사랑과 배려가 있었다. 어머니 한윤명은 타계 한해 전에 아들을 이당 김은호 화백 문하에 넣어 예술의 길을 가게 했고, 외할머니 이정진은 77살까지 살면서 오갈 데 없는 운보를 친히 거두었다. 아내 박래현이 남편 뒷바라지한 얘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설명이 필요치 않을 정도다.
그러나 아무리 주변도움이 많다고 할지라도 본인이 이를 수용하지 못하면 별무소용일 수밖에 없다. 그는 18살 때 <판상도무>가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것을 계기로 미술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그리고 한국과 동양미술의 전통적 정체성을 추구한가운데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 처럼 돼 있는 바보산수가 바로 그렇다. 모두 피나는 노력 뒤에 거둔 결실들이었다.
그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박애정신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농아자로서 아픔을 뼈저리게 체험한 운보는 특히 80년대를 전후해 갖가지 장애사업을 펼쳐나갔다. 한국농아복지회 초대회장(1979년)과 한국농아복지회 회장(81년), 서울 서계동농아복지회관 개관(82년), 경기 남양주 운보복지원 개원(85년), 한국청각장애자복지회 창립(86년), 충북 청원의 장애자시설 `운보의공방' 개원(88년) 등이 그의 궤적을 잘 말해준다.
이 같은 삶을 산 그에게 `천연기념물' `바보 인간' 등의 별칭이 따라 다닌다. 모두 범인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생명력과 예술혼 그리고 박애실천을 두고 하는 찬사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새해의 벽두에 그를 보내는 감회는 그래서 더욱 크다. 경희대 최병식 교수가 "슬픔과 고뇌의 삶과 예술에는 재치와 익살이 넘쳤다. 그래서 그를 만나면 눈물부터 났다. 이제 그는 고통이란 고통을 다 안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운보 화백 장례는 어떻게 치러지나
운보 김기창 화백은 한국화단의 거물인 만큼 그 장례도 미술계를 비롯한 문화예술인들이 두루 참석한 가운데 뜻 깊게 치러진다. 23일 구성된 `운보 김기창 화백 예술인장 장례위원회'(위원장 시인 구상)는 고인의 뜻을 살려 장례를 치르되 외적 화려함을 지양하고 내적 충실성에 역점을 둘 방침이다.
일정은 5일장으로 확정됐고, 빈소는 충북 청원에 있는 운보의집과 서울 삼성의료원에 동시에 마련됐다. 운보 화백이 예술원 회원인 만큼 대한민국 예술원(회장 차범석) 차원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고인은 27일 오전 7시께 삼성의료원을 떠나 자신이 삶의 대부분을 보냈던 서울 성북동 자택을 둘러본 뒤 오전 9시 명동성당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미사와 예술인장이 차례로 이어질 예정. 미사는 운보 화백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주었던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서의 장례절차를 마친 운보 화백은 곧바로 청원으로 내려가 1976년에 타계한 아내 우향 박래현 옆에 묻히게 된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그림은 국민총력조선연맹 기관지『國民總力』1943년 9월 15일호 표지에 게재된 김기창의 '여자산업전사'라는 작품 1941년 2월 심형구(沈亨求)·김인승(金仁承)·김경승(金景承)과 5인의 일본인 미술가들이 함께 미술단체 ‘구신회’(九晨會)를 조직해 일제에 채화보국(彩畵報國)의 열의를 다짐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 단체는 일본화부·양화부·조각부로 나뉘어 1941년 6월에 제1회 전람회를, 1942년 9월에 제2회 전람회를 개최했다. 김기창은 일본인 화가 이마다게이 이치로(今田慶一郞)·나가우치 토시히코(中內利彦)·에구치 게이시로우(江口敬四郞)과 함께 일본화부에 참여했다. 1942년 10월 ‘조선남화연맹(朝鮮南畵聯盟)’ 제1회 전람회에도 참여했다. 조선남화연맹은 남화정신을 기초로 한 작가들을 총망라해 채화보국의 결의를 다지고, 그림의 판매수익금을 전부 일제에 헌납하기 위해 결성된 미술단체다. 같은 해 11월에는 ‘반도총후미술전람회’ 일본화부에 초대작가로 ?폐품회수반?을 출품해 참여했다. 이 전람회는 조선미술가협회가 주최하고 조선총독부가 후원하여 일제의 신체제에 조선미술가들의 직역봉공과 단결을 독려하기 위해 결성된 대표적 친일미술전이었다. 1942년 제1회 전람회는 전쟁 후방의 생활을 묘사한 그림들을 진열해 민중의 시국인식을 계발지도하는 데, 1943년 제2회 전람회는 징병실시의 광영을 국민생활에 반영해 전쟁열을 고취시키는 데 각각 목적을 두었다. 이 전람회에 그는 김인승·심형구 등과 함께 초대작가로 참여했다. 이와 함께 신문 잡지류의 대중매체에 그린 삽화를 통해서도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 고무했다. 1943년 8월 7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화 연재물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에서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고 조선 젊은이를 전쟁터로 내몰기 위한 목적의 삽화를 그렸다. 이는 징병에 응해 떠나가는 장한 아들과 이를 자랑스럽게 배웅하는 늙은 노부모를 그린 것이었다. 여기서 청년은 ‘축 입영’이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있어 일제의 부름에 자랑스럽게 ‘선택된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제는 1943년 8월 1일부터 조선인징병제가 실시되자 1주일간을 ‘징병제실시 감사결의 선양운동주간’으로 선포했다. 이에 따라 국민총력연맹은 8월 1일에 조선신궁에서 징병제 실시 기념 필승기원제를 개최했는데, 이에 발맞춰 ??매일신보??는 8월 1일부터 8월 8일까지 1면에 총 7회에 걸쳐 시인과 화가가 함께 시화를 제작한 기획특집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를 시책홍보용으로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연재물 중에서 8월 7일자 신문에 시인 김동환(金東煥)의 헌시에 붙여 삽화를 그렸던 것이다. 1944년 4월에는 조선식산은행 사보 ??회심(會心)??에 완전 군장한 병사가 접이걸상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일명 ?총후병사?를 그렸다. 1943년 12월 8일자 ??매일신보??에 삽화 ?천마(天馬)?를 그렸다. ??매일신보??는 대동아전쟁 2주년을 맞아 12월 8일자에 일본 천황의 ‘조서(詔書)’와 ‘대동아전 제3년에 거국 멸적 총진군’이란 굵직한 제목을 가운데에 배치하고, 조선총독과 군사령관의 담화와 사설로 1면 전체를 채웠는데 이 지면 아래쪽에 이병기(李秉岐)의 헌시 ?28일?에 천마가 구름을 흩트리며 날고 있는 삽화를 그렸다. 친일미술은 1944년 결전미술전람회(決戰美術展覽會)에 출품해 멸사봉공의 결전의지와 전쟁열을 고취시킨 선동용 그림 ?적진육박(敵陣肉薄)?에서 절정을 이뤘다. 조선군보도부장상을 수상한 이 그림은 남양군도의 밀림에서 총부리에 착검을 하고 적진을 향해 육박전을 치르기 위해 돌진하고 있는 황군의 살기어린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적진육박?의 구도와 기법은 1972년 김기창이 제작한 월남전쟁기록화인 ?적영(敵影)?에서 유사하게 복제되었다.
하늘 끝 산수화를 그리소서-운보의 영전에 부쳐
천진한 해학을 그리워하며-운보 김기창선생님의 영전에 청록의 자연으로 돌아간 순수한 예술혼 운보 김기창의 삶과 예술-불굴의 의지와 해학 넉넉함과 자연회귀로 이루는 바보의 세계-운보 김기창
1세(1914년, 호적상으로는 1913년)
어머니는 감리교 신자였으며, 개화된 교육을 받은 진명여고 1회 졸업생으로, 17세나 18세에 동거적인 결혼생활에 들어감. 아버지는 충남 공주 태생으로 사립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후, 총독부 토지관리국에 근무하게 된 연유로 어머니집에 하숙한 것이 인연이 되어, 이미 조선경과 공주에서 결혼한 몸이었으나 다시 한윤명과 23세에 서류상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결혼을 하였고, 이후 금광을 찾는 사업가로 변신했으나 가정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하여 어머니에게 의지함.
5세 (1918년)
6세 (1919년)
7세 (1920년)
10세 (1923년)
12세 (1925년)
13세 (1926년)
14세 (1927년)
15세 (1928년)
한편으로 운보의 보통학교 시절은 성격이 극히 활발하였고, 모험심이 있었고, 개구쟁이처럼 뛰놀기를 좋아하였고, 조선어 독본·작문·산수·미술시간에 특히 뛰어난 재능을 보임. 운동에도 재능을 보여 전국체육대회 육상선수로 출전하기도 하는 등 농아로서의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극복해 감.
16세 (1929년)
17세 (1930년)
18세 (1931년)
부스 박사는 이후 1940년 일본인에 의해 추방당하기까지 미국인 자녀들의 동양화를 지도하도록 주선한다던가, 그림을 팔아 주면서 운보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었고, 또 하나의 은인적인 역할을 함. 후일 운보는 자신의 생애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은인 다섯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음.
19세 (1932년)
10월 15일 어머니가 허약한 몸으로 출산 후 산후 부황과 심장마비·뇌일혈 등이 한꺼번에 겹쳐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 후일 운보는 자신의 생애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세 사람의 여인으로서 외할머니 이정진과 어머니 한윤명 그리고 부인 우향을 꼽았을 정도로 세 사람의 은혜는 절대적이었음. 운보는 어머니를 여의면서 극심한 충격과 시름에 잠김. 어머니의 급서로 당장 생활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자, 스승인 이당 김은호는 특별한 배려로 그림을 팔 수 있도록 주선하고, 세브란스 병원의 부스 박사 역시 외국인들에게 그림을 팔아 주었음은 물론, 여름에는 해당화가 만발한 명사십리 별장에서 소품전을 열게 해줌. 돌아오는 길에는 석왕사·금강산에 들러 스케치를 함. 후일 많은 풍속도를 그리게 된 것도 당시 부스 박사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고,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절대적인 후원자가 됨.
20세 (1933년)
21세 (1934년)
22세 (1935년)
24세 (1937년)
25세 (1938년)
26세 (1939년)
27세 (1940년)
28세 (1941년)
29세 (1942년)
30세 (1943년)
31세 (1944년)
32세 (1945년)
33세 (1946년)
34세 (1947년)
35세 (1948년)
36세 (1949년)
37세 (1950년)
38세 (1951년)
39세 (1952년)
40세 (1953년)
41세 (1954년)
42세 (1955년)
43세 (1956년)
제8회 <운보-우향부부전>을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최. 미국의 스튜벤 글라스(Steuben Glass) 회사가 기획한 동남아 16개국 국제전시인 <수정으로 본 동방미술전>에 한국 대표로 <검무도劍舞圖> 출품.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펜클럽 국제회의 전시장에 <보리타작> 출품. 셋째 딸 영瑛 출생. 《한국일보》에 연재된 정비석 소설 《낭만열차》 삽화를 ’56년 4월 25-11월 24일까지 그림.
44세 (1957년)
45세 (1958년)
46세 (1959년)
47세 (1960년)
48세 (1961년)
49세 (1962년)
운보·우향 만남 20주년 기념 제11회 부부전을 신문화랑에서 개최. 한국 최초의 화문집畵文集 《화방여적畵房餘滴》이 학원사에서 간행됨. 운보는 책의 서문에서 많은 청각장애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일환으로 펴낸다고 쓰고 있으며, 50여 편의 수필과 회화론·삽화·스케치 등을 실었음. 결혼 15주년 기념 부부전에서 겸하여 출간기념회를 가짐. 수도여자사범대학(세종대 전신) 회화과 학과장.
50세 (1963년)
51세 (1964년)
5월에 이미 도미해 있던 우향과 그해 10월에 국제교육학회(I. I. E) 초청으로 도미하여 만남. 1년여 동안 유럽·동남아의 신, 고대 문명을 돌아봄. 뉴욕의 미술·박물관을 보고 나서 많은 자극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인디언 박물관에서는 그들의 예술세계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아 가지고 오게 됨.
52세 (1965년)
53세 (1966년)
54세 (1967년)
55세 (1968년) 미국시절
56세 (1969년)
57세 (1970년)
58세 (1971년)
59세 (1972년)
60세 (1973년)
61세 (1974년)
62세 (1975년)
마치 어떤 정형에 못 미쳐 언제나 덜된 것 같다는 의미에서 <바보산수>라 명명되었으나, 실제로는 인식을 초월한 자유분방한 식간과 공간 형상개념에 바탕을 두고 해석함. 이 바보회화시리즈는 민화 民畵의 세계를 재해석한 화풍으로 한국 현대미술사에 전통 회화를 계승하는 획을 긋게 됨. 을지문덕 장군·신숭겸申崇謙 장군 영정 제작. <한국현대미술 대표작가 100인 선집> 시리즈에 《운보김기창화집》 발간.
63세 (1976년)
5월 21일-27일/남경화랑에서 <김기창화전> 개최. <산 그리고 물> 42점, <꽃과 그리고 새> 13점, <사람과 그리고> 9점 등 총 64점의 바보산수를 선보임으로써 미술계의 커다란 반향을 얻게 됨. 제25회 국전 비구상부 초대작가(운영위원)로 <작품> 출품.《동아일보》 주최 제4회 <동아미술대상전>, 제7회 <불교미술전> 심사위원. 제3회 <한국미술대상전> 심사위원(부위원장). 수필집 《침묵沈默의 세계에서》를 민음사에서 출간. 성북동에 우향 생전에 약속했던 미술관의 건립을 시작.
64세 {(1977년)
7월 9일/우향을 추모하는 뜻에서 우향과 운보의 호를 딴 <운향미술관雲鄕美術館>이 성북동 자택에 완공됨. ’35년 이후 작품 50여 점이 전시됨. 산문집 《나의 사랑과 예술》이 간행됨. 문공부 주최 <한국화 구주순회전>이 프랑스·스웨덴·오스트리아·네덜란드에서 개최되었고, 이상범·변관식·노수현·천경자·서세옥과 함께 초대됨. <군마>·<새벽 종소리>·<청산도>·<부엉이> 등 출품. 스웨덴 스톡홀름 <국립동양박물관> 전시 현지 참관. 문공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 수여 받음. 태종 무열왕·문무왕 영정 제작. 경주 통일전에 봉안. 제19회 3·1 문화상 수상
65세 (1978년)
66세 (1979년)
67세 (1980년)
68세 (1981년)
69세 (1982년)
70세 (1983년)
제9회 <세계농아연맹총회>가 열린 이탈리아 시칠리 섬 팔레르모 시에 직접 참가하고, 유럽 농아 관계시설 현지 시찰. 이 시기 막내딸 瑛이 수녀가 되며, 마더 테레사 재단의 수녀원이 있는 마닐라·홍콩·대만 등지로 수련을 떠남. 그녀의 영세명은 아네스였고 수도명은 아나빔, 빈자貧者라는 뜻. 마닐라 교외에서 있은 종신허원에는 장남 완 부부가 현지에 참가. 영의 수녀 선택은 이후에 운보 역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데 직접적인 원인이 됨.
71세 (1984년)
72세 (1985년)
L.A. 한국문화원에서 개인전개최. 《한국일보》 L.A. 지사에서 주최했으며 바보산수·서상도瑞祥圖 등 출품. <우향 박래현 10주기 유작전>을 중앙 갤러리에서 개최. 경기도 남양주군에 청각장애자 기능훈련을 목적으로 한 ‘운보복지원’ 개원. 후소회後素會 회장이 됨. 세계농아연맹(World Federation of the Deaf)의 예술문화위원회 부회장에 위촉되고, 한국 최초로 농아 스포츠 대회에 선수 파견.
성 라자로 성당에서 이경재 신부의 주선으로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가톨릭 영세를 받음. 그는 개종 이후 청주 ‘운보의 집’ 근처의 시골 성당인 내수성당에 주일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미사에 참석하였으며, 복지사업과 회화적인 변신에도 직·간접적으로 의지가 됨.
73세 (1986년)
74세 (1987년)
75세 (1988년)
충북 청원군 <운보의 집>에 청각장애자 시설인 <운보의 공방> 개원. 운향 미술관에서는 우향의 <유작판화전>도 겸하고, 서울 올림픽 판화작가 안토니 타피에스·자오우지〔趙無極〕와 칼더·베이컨·미로·무어 등의 작품도 함께 전시. 또한 법조각에서 간행한 자서전 《침묵沈默의 심연深淵에서》의 출판기념회도 동시에 겸함. 세종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학위 수여받음. 장애자 복지대책위원회 위원 위촉. MBC-TV 시청자 미술 부문 인식도 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한국인 화가로 선정됨.
76세 (1989년)
77세 (1990년)
78세 (1991년)
‘운보공방’에서 제작된 <운보 김기창 황금백자전>이 롯데 백화점 본점 미술관에서 개최되고, 동시에 <운보 김기창 화백의 어제와 오늘전>이 롯데 백화점 잠실점 미술관에서 개최됨. 인촌상仁村賞 공공 부문 수상.
79세 (1992년)
80세 (1993년)
’92년에 조직된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발간위원회’가 ‘운보 김기창 팔순기념 전작도록 발간 및 전시추진위원회’로 개칭되어 전시 개최의 기념사업을 포괄하게 됨. 청원군 <운보의 집>에서 <전복도>·<수성동>·<여인상> 등 작품 15점을 도난당함.
10월/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운보 김기창 팔순기념 전작도록 발간 및 전시추진위원회’와 예술의 전당 공동 주최로 <운보 김기창――팔순기념 대회고전>이 개최됨. 《운보 김기창》 도록을 API에서 발간.10월 20일-30일/현대화랑에서 <운보 김기창 근작전> 개최. 91-93년작 30여 점이 전시됨. 이후 작품제작 불가
81세 (1994년)
82세 (1995년)
8월/서울 인사동 도올아트타운에서 광복50주년을 맞아 기획한 <북한미술의 오늘전3부>에서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작품활동을 해 온 서울의 운보 김기창과 평양 김기만 형제의 작품 30여점을 전시. 장애인체육대회(5월)·전국 농아인축구대회(10월)·인천 농아인 수화경연대회(11월) 등에 참석. 12월/<운보신작전>이 부산 롯데 화랑에서 열림.
83세 (1996년)
84세(1997년)
86세(1999년)
87세(2000년)
89세(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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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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