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카프문학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박영희(朴英熙)

草霧 2013. 12. 11. 11:43

 

 

 

문학

 

박영희(朴英熙, 창씨명 芳村香道, 1901?)

 

 

  

카프문학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창씨명 芳村香道

회월(懷月) , 방촌향도(方村香道), 송은(松隱)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출생(1901)

김기진과 더불어 배재고보를 같은 반에서 수학(1919)

토오쿄오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수학하다 귀국(1920)

시지장미촌,신청년동인(1921)

장미촌1호에 시()의 비곡(悲曲),과거(過去)의 왕국발표(1921)

백조동인(1922)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조직(1925)

신간회의 간부를 지냄(1927)

최근 문예운동의 신전개와 경향을 발표하여 전향(1934)

전향자 대회에 참가(1938.7)

조선문인협회 간사(1939.10)

납북(1950)

1901년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天然洞) 출생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조직 주도

1934<최근 문예 운동의 신전개와 경향>을 발표하며 전향

1939년 조선문인협회 간사

1942113일 대동아문학자대회 1차대회 참가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총무국장

19506·25 때 납북

1939.7.25-26 {보리와 병정} 서평 매일신보

1939.10 전선기행 박문서관

1939.10 전쟁과 조선문학 인문평론

1940.1.1 국민문학의 건설 매일신보

1940.4.25 문장보국의 의의 매일신보

1940.7.6 문학운동의 전시체제 매일신보

1940.8.4 지식인의 이론 매일신보

1940.8.15-20 포연 속의 문학 매일신보

1940.11.6-7 신체제를 맞는 문학 매일신보

1941.3 꾸밈없는 야심 신시대

1941.4.11-16 문학의 새로운 과제 매일신보

1941.4 부여신궁어조영근로봉사에 춘추 참례하여

1941.7.6 국민적 신문화의 제안 매일신보

1941.11 임전체제하의 문학과 문학의 국민문학 임전체제

1942.3.16 신시대의 문학적 이념 매일신보

1942.10.29 대동아문학자대회 출석을 앞두고 매일신보

1942.12 한층 더 좋은 작품을 신시대

1943.2 이천오백만의 기대 춘추

1939년 조선문인협회 간사장.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총무국장

 

박영희(朴英熙, 일본식 이름: 芳村香道, 1901년 12월 20일 ~ ?)는 한국의 문학평론가이다. 시인,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1920년대 대표적인 카프문학가로 활동했었으나 1933년 카프에서 탈퇴, 이후 순수 문학과 예술주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일제강점기 말기 중일전쟁 발발이후 사상전향을 발표하고 친일문학가로 변절했다. 본관은 밀양, 아명은 거복(巨福)이며 호는 회월(懷月), 송은(松隱)이다.

  • 1.1 출생과 성장
  • 1.2 문단 등단과 낭만주의 문학
  • 1.3 카프 결성과 경향파 문학
  • 1.4 신간회 활동과 카프 문학에 대한 회의
  • 1.5 전향과 순수 문학
  • 1.6 태평양 전쟁 시기의 친일 문학
  • 1.7 광복과 한국 전쟁
  •  

     

     

    1923년 김기진과 함께 파스큘라를 결성하고 《개벽》에 입사한 후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서구식 낭만주의풍의 작품 경향에도 변화가 왔다. 도쿄에 유학한 친구 김기진이 일본에서 유행한 프로문학에 먼저 입문하면서 박영희의 감상적 낭만주의를 강력히 비판한 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백조》를 와해시키고 프로문학을 한국에 소개했다.

     

     

     

    파스큘라는 1925년 염군사와의 통합을 통해 카프로 발전하였으며, 박영희는 카프 창립부터 지도적인 위치를 맡았다. 이 시기부터는 시 창작보다는 소설과 평론 작업으로 관심도 옮겨갔다. 1925년 발표한 단편소설 〈사냥개〉는 박영희의 의식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부도덕하고 인색한 지주인 구두쇠 노인이 기르던 사냥개에게 물려 죽는다는 줄거리의 〈사냥개〉는 우화적 수법으로 쓴 신경향파 소설로, 이기영의 〈쥐 이야기〉, 김기진의 〈붉은 쥐〉와 유사하게 동물을 등장시키고 있다.

     

    1926년 프로문학 반대 진영의 대표적 작가인 염상섭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그해 말부터는 김기진과 계급문학과 카프의 노선을 놓고 내용과 형식 중 어떤 것을 우선시할 것이냐는 유명한 논쟁을 벌였다. 김기진이 다소 유화적인 입장으로 포괄적 계급문학을 주창한데 반하여 박영희는 강경 노선을 택하여 이데올로기 우선을 내세웠다. 역시 강경파인 임화가 박영희 편에 가세하고 김기진을 공박했고, 이어진 아나키즘 논쟁을 거쳐 김화산 등 아나키스트 분파를 제명하면서 카프의 제1차 방향 전환이 일어났다.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박영희는 신간회의 활동이 활성화 됨에 따라 기존의 계급 운동, 즉 인텔리 계층에 국한된 기존의 계급문학운동에 반성하고 실천적 노력이 부족했음을 자인하게 된다. 즉 대중적 조직과 기반 조성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이념 논쟁을 거듭했다는 비판을 스스로 내렸던 셈이다. 이를 확인한 박영희는 '목적의식론'을 주창하며 계급의식의 추종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실천적 구체성을 획득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목적의식론'이 제기되자 카프 내부에서는 심각한 갈등이 야기되었다. 1927년 이후 카프는 경성 지부(박영희 등)와 동경 지부(이북만, 임화 및 제3전선파)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논쟁의 쟁점 대부분은 '계급문학운동의 방향 전환과 그 실천방향'에 대한 것이 주류였다. 요점은 '계급문학운동이 대중적 정치 투쟁의 전면에 나설 것인가 말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박영희와 경성지부는 '의식 투쟁으로 그 한계를 정해둔 것'을 주창한 반면, 이와 반대로 이북만 및 동경지부에서는 정치적 진출과 대중 투쟁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카프는 질적으로는 성장하지 못하였으나 양적으로는 성장해서 전국에 지부를 결성하고 조직을 확대하게 된다.

     

    1928년 2월과 7월에 공산당 검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각각 3차, 4차 공산당 사건이라 불리는데 이 두 차례의 검거 사건으로 모든 사회 운동은 위축되고 만다. 심지어 '민족 단일당'이라고 불리던 신간회조차도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던 공산당원들의 검거로 활력을 잃게 되었다.[2] 그리고 동년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에서는 조선공산당의 재조직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나중에 이것을 '12월 테제'라고 한다.

     

    그리고 이 '12월 테제'에 카프의 동경 지부가 반응하면서 박영희 등이 결정하고 있던 신간회 노선 지지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다. 공산당이 힘을 잃어 민족 개량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신간회를 지지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들은 1929년 5월, 독자적으로 《무산자사》(無産者社)라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정치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29년 11월에 카프 동경 지부 해체를 정식으로 발표하게 된다. 이들이 외치는 것은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론이었다. 이때부터 박영희는 카프에서의 입지가 점차 약화되어갔고, 박영희 자신은 카프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카프도 박영희의 손에서 떠나 무산자사를 세운 기존 동경지부의 주장대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먼저 신간회가 1931년에 해체되었고 평양 등에서 파업을 선동하여 노동 계급의 조직과 투쟁 역량을 확대시킨다. 그리고 공산당 재건 운동의 기반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상황을 일본 경찰이 주목하기 시작한다. 1931년 5월, 신간회 본부가 해체될 때 경성지부 해소위원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6월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제1차 카프 검거 사건)

     

    1931년 제1차 카프 검거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봄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나 석방되었다. 이후 카프의 좌경향에 회의를 품던 중 1933년 12월 10일 카프를 탈퇴했다. 그리고 박영희는 이듬해 1934년 1월 2일, 《동아일보》에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그 경향》이라는 사설을 기고하여 공개적으로 카프 탈퇴 선언과 전향 선언을 발표하고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이후 극단 신건설 창립을 계기로 1935년 5월 20일 제2차 카프 검거 사건[3]이 발생하면서 체포되어 약 1년가량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출옥한 뒤에도 사상범으로 보호관찰소에 수용되어 감시를 받았으며, 순수 문학과 예술주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 시기의 평론은 초기와 같은 신비주의적이고 심미적인 경향을 보인다. 초기 시를 묶어 시집 《회월시초(懷月詩抄)》(1937)도 발간했다.

     

    1938년 전향자 대표로 선출되어 도쿄에서 열린 시국대응전국위원회라는 행사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귀국한 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결성하였고, 1939년 조선문인협회 간사,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냈다. 김동인, 임학수와 함께 황군위문작가단에 포함되어 중국 전선에 파견된 뒤 기행문을 쓰기도 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총 18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었으며[4]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매일신보》에 실은 〈국민문학의 건설〉(1940) 등 주로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한 문학의 역할을 강조하는 논설들이다.

     

     

     

    광복 후 친일 경력 때문에 잠시 강원도 춘천으로 낙향, 1945년 12월 춘천공립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1946년 12월 사직했다. 1948년 3월부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민대학교, 홍익대학교 등에서 강사를 지냈다. 이후 좌익 경력을 가진 전향자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선도위원으로 정백과 함께 간부로 활동했다.

     

    한국 전쟁 개전 초기에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을 피해 피신하다가 체포되어 서울형무소에 수감된 것을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납북된 것으로 추정[5]되나 북한에서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곽종원김기진김동인김동환김문집김상용김소운
    김안서김용제김종한김해강노천명모윤숙박영호
    박영희박태원백철서정주송영유진오유치진
    이광수이무영이서구이석훈이찬이헌구임학수
    장혁주정비석정인섭정인택조연현조용만주요한
    채만식최남선최재서최정희함대훈함세덕홍효민

     

        

     

     

    얻은 것은 친일이요,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

    아마도 회월((懷月) 박영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라는 유명한 글귀일 것이다.

     

    이른바 백철*[비애의 성사]와 더불어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의약칭) 전향선언의 가장 대표적인 글로 손꼽히는 [최근 문예이론의 신 전개와 그 경향]({동아일보}, 1934. 1.2 - 11) 속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카프의 이론적 맹장이 스스로 유물사관의 이데올로기만 얻고 예술 자체를 잃어버렸다고 폭탄 선언 함으로써 프로문학 전반에 대한 부정을 감행한 것이다.

     

    그에 따라 프로문학 진영에서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게 터져 나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후 이 말은 정치적 의미를 갖는 사회 참여적 문학형태에 대한 비판의 도그마로 가장 많이 애용되는 문학적 구호가 되었다.

     

    문학사를 보면 우리는 간간이 위대한 문학적 변신을 목도하게 된다. 가까운 예로 시인 1960년대의 김수영, 1970년대의 고은의 변신을 상기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커다란 문학적 전환 상을 들라 하면 낭만주의 문학의 요람이었던 {백조} 동인 중 일부가 가장 현실적이고 투쟁적인 문학 흐름이었던 신경향파 문학의 선봉장이 되었다는 점과 8.15 해방 직후 과거 상호 대립적이었던 구인계 모더니즘 문인들이 카프 계 문인들과 합류하여 진보적인 문학 진영 인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한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전자를 대표하는 문인들 중에는 단연 박영희와 김기진*이 손꼽힌다.

     

    이들은 배재중학 동창생으로, {장미촌}에 뒤이어 {백조} 동인으로 활약하던 박영희의 도움으로 김기진 역시 {백조}의 동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당시도쿄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김기진이 프로문학에 동조하여 이를 박영희에게 전파함으로써 이들은 {백조}를 와해시키고 국내에 프로문학을 소개, 보급하는 첨병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박영희는 1927년을 전후하여 자신에게 프로문학의 길을 열어 주었던 김기진과 논쟁하면서, 목적의식 적으로 카프가 방향전환을 할 때 가장 강경한 계급 이데올로기자로 나서며 카프의 지도적 인물로 부상한다.

     

    그런 그가 1934년 이른바 '신건설사' 전주사건으로 일컬어지는 카프 제2차검거 사건으로 체포되어 약 1년 동안 복역한 후 저 유명한 전향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 기실 그 자신의 몸짓은 각종 친일모임 (전향자대회, 북지종군, 대동아문학자대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친일문학단체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등)의 간부로서 가장 현실정치적인 활약을 함으로써 굴곡 많은 문학적 삶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8.15 해방 직후에는 반민족자 명단에 오르는 치욕을 당하고 한국 전쟁 중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납북되고 만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옮겨간 삶의 저울추

    이처럼 박영희의 문학적 삶을 되돌아볼 때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극단에서극단으로 자신의 삶의 저울추를 선택하였다는 사실이다.

     

    극도의 개인주의에 기반한 낭만주의의 요람이었던 {백조}의 동인에서 가장 전투적이고 정치적이었던 카프의 대표적 이론가로 갑작스런 변신을 도모한 점이나, 다시1935년을 전후하여 가장 먼저 과감하게 카프로부터의 전향을 선언한 사실이나, 그리고 다시 1930년대 말 무렵부터는 반민족적인 친일문학을 스스로 주도해 나간 점에서 이를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백조}에서 카프로의 변신은 혈기왕성한 20대 초년기의 일이라 무시한다 하더라도 카프로부터의 전향과 친일문학으로의 길은 식민지 치하 우리 문학사가 뱉어 낸 불행한 자국임에 틀림없다.

     

    결국 박영희가 스스로 친일적 행동을 하게 된 배후에는 카프에서 전향함으로써 초래되는 정치적 의식적 인간의 자기파멸이란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문학과 친일문학은 사실 우리 근대문학사에서가장 정치적인 요소가 강한 문학경향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서로 결합 할 수 없는 대척적인 정치성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영희에게 있어 이것이 하나로 연결된 데에는 바로 극단끼리는 통한다는 비극적 무대장치가 가로놓여있다.

     

    1934년 카프 2차 검거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3512월 집행유예로 출옥한 박영희는 사상범 보호관찰법이라는 밧줄에 묶여 있었다. 193611월에 공포된 사상범보호관찰법에 의거, 같은 해 12월 발효되어 설치된 경성 사상범 보호 관찰소에는 약 150여 명이 수용되었는데, 박영희도 여기에 속해 있었다.

     

    1938년 일본 도쿄에서는 일제가 기치로 내건 '국민정신총동원'을 위해 시국대응 전국위원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로부터 박영희가 참여하는 시국대응 전선 사상 보국연맹이 출발하게 된다.

     

    19386월 경성보호관찰소회의실에서는 재선(在鮮) 전향자들이 모여 조선 전향자 대표로 박영희와 권충일(權忠一)을 선출하였다. 이들은 경성 관찰소 보호사 요코다 (橫田伍一)의 인솔 하에 경성을 출발, 1938620일부터 3일간 도쿄에서 열린 전향자 전국위원회격인 시국대응 전국위원회에 참석하였는데, 이로써 박영희는 공개적인 친일행위를 하기 시작한다.

     

    귀국 후 박영희를 비롯한 참석자를 중심으로 시국대응 전선위원회를 조직하기위한 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19387월 시국대응 전선사상 보국연맹이 결성된다(박영희는 경성지부 간사).

     

    이 연맹은 이후 관찰대상자의 취직 알선및 비전향자 포섭에 노력하고, 장병 위문과 물품 헌납, 유가족 방문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 때 박영희는 19397월 경성부내(京城府內) 분회 결성식에서 제1 분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한편, 다음해인 19394월에 김동인*, 임학수와 함께 박영희는 황군위문작가단으로 북지에 파견된다. 1939314일 부민관에서 문장사를 비롯한 14개 출판사의 협력으로 예비회의가 소집되어 문인 50여 명이 모였다.

        

    이광수*의 사회로 박영희를 의장에 천거한 다음, 위문사 후보로 김동인,백철, 임학수, 김동환*, 박영희*, 주요한*, 김용제, 정지용이 뽑혔다. 이 들 중 최종 위문사로 박영희, 김동인, 임학수가 뽑혔고, 이 때 박영희는 일어로 쓴 [성전의 문학적 파악]({국민신보}, 1938. 4. 16)을 통해 위문 길에 나선 마음가짐을 피력하였다.

     

    그 해 412일 부민관에 80여 명이 모여 환송모임을 가지고, 3일 뒤인 415일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을 참배한 다음 열차편으로 황군위문의 길을 나선 것이다. 당시 그와 절친했던 {매일신보} 기자 백철은 그의 친일의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내게는 선배, 같은 평론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와 나 사이는 가까웠던 편이어서 이때의 그의 심정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춘원도 그렇지만 회월도 성격이 퍽 약하고 생에 대한 애착 같은 것 때문에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는 경향이 있었다. 자연 정세에 대한 근시안적인 도취도 되기 쉬웠다.

     

    회월이 종군을 떠나기 전날 나와 둘이서 점심을 부민관 식당에서 할 때에 그는 춘원이 내게 하던 이야기와 꼭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시기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할 바에는 먼저 해서 생색을 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조선 사람의 특권을 얻어내야 한다고 했다.(백철, {문학자서전},박영사)

     

    하여간 이들의 일행은 베이징을 거쳐 석가장, 태원, 임분 지역 등을 강행군으로 한 달 가량 돌아 513일 경성에 다시 도착하였다. 그리고 돌아와 [북지여행기]({국민신보}, 1939. 6. 4), {전선기행}(박문관,1939.10) 및 영화 [지원병]의 원작을 담당하면서 본격적인 친일문학의 길로 들어선다.

        

     

     

     

    친일문학계의 선봉장

    193911월 조선 문인협회가 결성되자 박영희는 간사장으로 선출된다. 240여 명의 회원이 참여한 조선 문인협회는 명예총재에 총독부 학무국장 시오와라(鹽原時三郞)가 앉고 회장 이광수 밑에 12명의 간사 (조선인으로 백철, 유진오, 모윤숙*, 이태준, 최정희,정인섭, 김동환 등 7)를 두었다. 박영희는 19418월 확대 개편된 체제에서 간사장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1942년 기구혁신 때에도 간사장으로 선출된다.

     

    이처럼 박영희는 친일단체의 주도적 인물로 부상하면서 그 자신의 친일 행위는 바로 그 자신이 간부로 있었던 친일문학단체의 활동과 궤를 하게 된다. 이들은 첫 사업으로 자작 위문문을 담은 위문대를 모집하여 전선에 발송한다.

     

    또한 조선문인협회는 결성 1주년을 맞아 19401115일 오후 부민관에서 간사회를 열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후원 아래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시국강연회를 연다. 4개 반 중에서 박영희는 제1(경부선) 강사를 맡아 김동환, 유진오 등과 함께 그 해 1130일 출발하여 부산, 마산, 진주, 대구, 청주, 공주 등을 순례한다.

     

    최근 한일 간에 여자정신대 문제로 논란이 많았는데, 당시 친일문인들이 시국강연회를 개최한 것은 '문학정신대'란 이름의 친일행위였다.

     

    문인협회 주최로 조선 문인 20여 명이 전선(全鮮) 각지에 문예보국 강연대로 행각의 길을 떠났다는 것은 당시 신문에도 보도 되었거니와, 이것은 조선서 처음 보는 문학정신대라 사회각층에 비상한 감명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시국 인식만으로써는 도저히 이 난국을 타개할 수가 없을 정도로 모든 정세가 긴박하였다. 이러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국내 기구의 전면적 재편제를 목표로 하는 신체제가 실시되었고 이에 따라 문화 각 부분도 새로운 전진을 개시하게 되었다.

     

    이때에 문학은 직역봉공(職域奉公)의 정신을 체득하여 우수한 작품생산에 매진할 것이나, 그러나 문인의 직역을 다만 사색과 집필에만 국한한다는 것도 편협의 비방을 면치 못하리라.

        

    문인은 다만 작품을 통하여 미지의 독자와 상대할 뿐만 아니라 직접 청중과 상대하여 같이 국민적 공기를 호흡하며 국난타개를 꾀하는 데서 또한 새로운 사명을 발견할것이다.([문학정신대], {인문평론}, 1941. 1, 권두언)

     

    그렇다면 조선문인협회는 그 외에도 어떤 일을 했는가. 필자의 설명적 서술보다는 당시의 기록을 있는 대로 보여 주는 것이 보다 적합하리라.

     

    객년(客年) 113일 명치절(明治節)을 기하여 조선문인협회 주최로 조선신궁대전에서 문장보국 기서식(祈誓式)을 거행하였다. 참집한 자 조선 문인 30여명, 엄숙리에 이 획기적인 식은 끝났다.

     

    사변(事變) 이래 조선 문인은 그 시대적 임무를 자각하여 작년초에 북지에 문단사절을 파송한 것을 시초로 동년 말엔 문인협회가 결성 되고, 이래 전선위문품과 위문문 발송, 문인의 강연대 파견, 각종 군사적 행사 참여등 꾸준히 시국을 걸어오던 중 금번 이 장거를 보게 된 것이다.

     

    황기(皇紀) 2600년을 맞이하는 명치가절에 문인, 그 국가적 봉공을 신전에 맹서하였다는 것은 실로 의의 깊은 일로서 경하하여 마지 않는 바이다. ([문장보국], {인문평론}, 1941. 2, 권두언)

     

    한편, 일제 말기 친일조직으로 가장 방대했고 또한 그 해악이 가장 심했던 단체가 다름 아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후신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이다.

     

    19401016"국체의 본의에 기하여 내선일체의 실을 거하고 각 그직역에서 멸사봉공의 성을 봉하여 협심육력(協心肉力) 함으로써 국방국가체제의 완성, 동아 신질서 건설에 매진할 것을 기함"이라는 강령을 내걸고 재출발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은 194011월 산하 사상부를 이분하여 문화부를 설치한다. 여기에 박영희는 김억, 백철, 유진오 등과 함께 문화위원으로 선임된다.

     

    또한 이광수, 유진오와 함께 '1차 대동아문학자대회'(1942. 11)에도 다녀오는 등 친일적인 문학가의 대표로서 각종 정치, 사회적 단체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몇몇 예만을 간단히 들면 내선일체의 실천을 위하여 일본 정신을 깨닫고 황도를 받잡자는 취지로 발기된 황도학회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등이다.

     

    문예 분야와 관련해서 일제 말기 가장 거대한 조직은 조선문인협회 등의 발전적 해산에 따라 결성된 조선문인보국회(1943. 4)이다.

     

    '조선에 세계최고의 황도문학을 수립하자'는 기치하에 결성된 조선문인보국회에는 1000여명이 참여한 방대한 조직이었다. 회장 야나베(矢鍋永三郞), 이사장,?(辛島驍) 밑에 상무이사, 이사를 두고 실무부서로 사무국장, 총무국장과 출판부장, 사업부장, 심사부장 그리고 소설 및 희곡부, 평론 및 수필부, 시부등 6개 부서를 두었다.

     

    박영희는 여기서 총무국장이라는 막강한 직책을 맡았다. 각종 친일적 문예행사를 주도하고 또한 홍보정신대 파견, 출진학도 격려대회와 결전태세즉응(卽應)재선문학자 총궐기대회를 개최하기도하였다. 박영희가 해방 이전에 마지막까지 맡았던 직책은 총력연맹 홍보부 주필, 조선문인보국회 평론부 회장직이었다.

        

     

     

     

    박영희와 요시무라 고도의 거리감

    박영희는 요시무라 고도(芳村香道)라고 누구보다도 빨리 창씨개명하여 이를 필명으로까지 사용함으로써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이광수와 여러모로 유사한 점을 보여 준다.

     

    친일단체의 감투를 많이 둘러쓰고 있었다는 점이나 각종 친일행사의 단골손님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창씨 개명한 방식에서도 그러하다.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한 경우 한 자를 추가하거나 성씨를 두 자로 분리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들은 성과 이름자를 전부 바꾸어 버렸다. 백철에 따르면, 필명에까지 창씨 개명 한 이름을 사용한 이유를 박영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하라고 하니까 호적의 이름은 개명할 수밖에 없다 해도 글을 쓰는데 까지 '요시무라 고도'(芳村香道)라고 써야 하느냐고 했더니 회월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 "그야 누가 오랫동안 쓰던 자기 필명을 버리고 싶겠소. 하지만 이름 하나 고집하다가 큰 오해를 당하면 어떻게 하겠오, 이런 판국에..." 하고 대답을 해서 우리는 다시 더 말을 계속하지 않았다.(백철,{문학자서전}, 박영사)

     

    친일문사들 혹은 부분적으로 친일행위에 몸담은 적이 있었던 사람들 대다수는 친일의 동기를 생존 문제로 끌고 간다.

     

    박영희의 문학 활동에 대해서 상세한 연구를 한 바 있는 김윤식은 1938년 이후 회월의 친일활동은 그의 문학상에서 볼 때, {백조}파와 함께 한갓 허상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박영희의 문학활동 전반을 볼 때, 그의 문학적 본질과 어긋나는 피할 수 없는 외도와도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로 1941{문장}지에 연재한 문학원론 [문학의 이론과 실제]를 들고 있다.

        

    이러한 점을 두고 임종국도 {친일문학론}에서 "일본 정신을 파악하고 나서친일 한 것이 아니라, 친일 하고 나서 일본 정신을 파악하려 한 탓이라고 생각된다. 정신의 전향보다 행동의 전향이 앞섰고, 스스로 우러난 친일전향이 아니라 외부적 압력에 의한 그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 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복원불가능하게 흔적 없이 우리 앞에 사라졌겠지만, 그에게는 아울러 수많은 친일적 글이 지울 수 없는 상처처럼 머무르고 있다.

     

    {인문평론} 전쟁특집호에 실린 [전쟁과 조선문학](1939. 10), {매일신보}에실린 [국민문학의 건설](1940. 1. 1), [문장보국의 의의](1940. 4. 25),[문학운동의 전시체제](1940. 7. 6), [포연 속의 문학](1940.8.15-20), [신체제를 맞는 문학](1940. 11. 6-7), [국가이상의문학](1941. 1. 1), [문학의 새로운 과제](1941. 4.11-15), [국민적신문화의 제안](1941. 7. 6), [대동아문학자대회 출석을 앞두고](1942. 10.29), 그리고 {국민문학}에 실린 [임전체제하의 문학과 문학의 임전체제](1941. 11. 일문) 등이 그것이다.

     

    이들 글은 이미 제목에서 당시일제가 친일단체를 통해 의도하고자 했던 바를 느낄 수 있다.

     

    박영희는 국민문학, 이른바 신체제 문학론을 활발히 펼침으로써 스스로의 덫에 걸린 친일문학가라는 오명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국체의 이념을 떠난 작가 개인의 인생관이나 국가관이나 세계관은 있을 수 없다,

     

    국민총력운동의 일익으로서 문학의 임전체제로까지 고양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의 단호한 목소리 앞에서 시대의 아픔으로 모든 것을 떠넘길 수는 없다.

        

     

    다른 누구보다도 변혁적 이데올로기에 철저하려 했다가 탄압의 고통 속에서 그 이념을 벗어던지자 탄압의 회피를 위한 또 다른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족쇄를 차지 않을 수 없었던 박영희의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ㅤ■ 임규찬 (문학평론가, 성균관대 강사)

     

     

     

    정통극을 국내에 처음 도입한 극단 ‘토월회’ 창립동인들. 맨왼쪽이 박승희다. 무용가 최승희(오른쪽 사진)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박영희 朴英熙 1901?

    시인·소설가·평론가. 아명은 거복(巨福). 호는 회월(懷月) 또는 송은(松隱). 서울 출신. 아버지는 병욱(秉旭)이며, 어머니는 김승일(金昇日)이다. 1916년공옥소학교(攻玉小學校)를 졸업하고 그 해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에 입학, 1920년에 4년을 수료하였다. 재학시 나도향(羅稻香김기진(金基鎭김복진(金復鎭) 등과 친교를 맺었다. 적의 비곡|미소의 허화시|꿈의 나라로, 1925년 김기진 등과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KAPF)을 조직해 프로 문학의 이론적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1934년 전향했다. 호는 회월(懷月송은(松隱)(색인 :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2년간 동경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수학한 뒤, 1921년에 귀국하여 종합교양지 신청년 新靑年, 시 전문지 장미촌 薔薇村의 동인으로 활약하였으며, 1922년에는 백조 白潮동인이 되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개벽사(開闢社)에 입사하였고, 그 해 10월 신경향파 문학단체인 파스큘라를 결성하였으며 1925년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가 조직되자 지도적인 이론분자로 활약하였다.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는 한편 카프 회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31년 카프 맹원 검거사건으로 붙잡혔다가 이듬해 1932년에 불기소처분으로 풀려 나왔다. 그러다가 카프 제2차 검거사건으로 체포되어 약1년 동안 복역한 뒤 1933년 카프에 탈퇴원을 제출하고, 1934년에는 전향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1939년에는 조선문인협회 간사,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34년 조선문인보국회 등 친일문학단체의 간부로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8·15광복 직후에는 반민족자 명단에 오르는 치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49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국문학사의 강의를 맡기도 하였으나 6·25 때 납북되어 그 뒤의 행적은 알 수 없다.

        

    그의 작품 활동은 1921장미촌창간호에 시 ()의 비곡·과거의 왕국두 편을 발표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1922백조동인으로 참가하여 창간호에 미소의 허화시(虛華市)··환영의 황금탑·황진이의 항로, 2호에 꿈의 나라로4, 3호에 월광으로 짠 병실등을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까지의 작품은 그의 문학 활동에 있어 제1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탐미적이고 감상적인 낭만주의의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러나 그는 1923년 이후 김기진의 영향으로 계급의식에 눈을 뜨게 되고 그의 작품 세계 또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카프 활동과 더불어 시 대신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고 또 많은 양의 비평문을 발표하였다.

     

    이 무렵의 그의 작품과 비평들은 모두 경직된 이데올로기를 앞세우고 있었고 문학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 전락되었다. 그러나 문학이 계급이론을 위한 시녀로 전락되는 것에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고 1933년 카프 탈퇴원을 제출한 뒤, 193414일자 동아일보에 문단에 큰 충격을 준 최근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그 경향을 발표하였다.

     

    이 신문에 그의 유명한 전향선언 문구인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이며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었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의 저서로는 소설과 평론을 묶은 소설·평론집(1930), 시집 회월시초 懷月詩抄(1937), 평론집 문학의 이론과 실제(1947) 등이 있고, 8·15광복 후 집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현대한국문학사 現代韓國文學史사상계 思想界(1958.4.1959.4.)에 연재된 바 있다.

     

    시 활동은 장미촌적의 비곡·과거의 왕국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고, 백조동인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백조에 발표한 작품으로는 꿈의 나라로·어둠 넘어로·유령의 나라·월광으로 짠 병실등이 있는데, 이 작품들은 인생의 고통 또는 괴로운 현실과 반대되는 꿈의 세계에 대한 욕망을 노래한 것이다. 이렇듯 유미주의에 빠져 있던 그는 1920년대초 사회운동의 발흥과 김기진의 영향을 받아 필단을 개벽으로 옮기고 계급문학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개벽에 발표한 소설로는 전투·정순의 설움·사냥개·지옥순례·철야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초기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계급의식을 드러내고, 소재는 대부분 궁핍한 생활에서 찾으며, 작품의 의도는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고자 하는 것이었다. 특히 사냥개는 돈의 노예가 된 주인공의 말로를 그린 것이고, 지옥순례는 서울 변두리 빈민굴에 살던 주인공이 굶주린 끝에 느끼는 인간의 본능을 드러낸 것이며, 철야는 극도로 가난한 지식인의 고민을 보여준 작품이다. 지옥순례철야는 김기진에 의해 "기둥도 서까래도 없이 붉은 지붕만 있는 건물"이라는 비판을 받음으로써 카프 내부에서 벌어진 최초의 문학논쟁인 내용형식 논쟁(일명 소설건축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소설 창작을 그만두고 평론활동에 전념하게 된 것은 대체로 카프의 제1차 방향전환이 이루어진 1927년겨으로 보여진다. 대표적인 평론으로 자연주의에서 신이상주의에 기울어지려는 조선문학의 최근 경향(개벽, 1924. 2)·문예운동의 방향전환(조선지광, 1927. 4)·문예운동의 이론과 실제(조선지광, 1927. 1) 등이 있으며, 특히 내용·형식 논쟁 중에 발표한 투쟁기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조선지광, 1927. 1)는 작품의 내용 우위와 작가의 프로의식을 주장한 대표적인 글로 평가되고 있다. 그밖에도 여러 편의 글을 통해 문예운동의 이론투쟁을 강조하고 이에 따르는 작품을 쓸 것을 주장했으나, 방향을 전환할 무렵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그 경향(동아일보, 1934. 1. 2~11)을 발표한 뒤로는 문학의 자율성 회복, 비평의 정론성 배제, 작품 창작의 옹호, 그리고 카프의 전위주의 거부를 통해 순수 문예학 연구에 전념하고자 했다. 시집으로 회월시초(1937), 수필집으로 전선기행(1939)이 있고 평론집으로 소설·평론집(1930)·문학의 이론과 실제(1947) 등이 있다.

     

    회월(懷月) 박영희(朴英熙)는 시, 소설, 비평 등 여러 장르에 걸친 다앙한 활동을 보였으나, 그의 본령은 비평일 것이다. 여기서는 주로 비평 장르에 국한하며그의 문학체질과 업적 및 한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문학적 편력을 더듬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혹감를 느끼게 된다. 한때는 유미주의 시인으로서 "예술을 위한 예술"의 입장을 고수했고,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 심취했는가 하면, 또 한때는 예술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도 발을 붙이지 못한 채 방황하다가 전향선언을 발표, 카프 조직을 탈퇴했으며, 이윽고 "국책문학"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기도 했다. 이상과 같은 그의 문학적 편력은 한마디로 말해 일관성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나타난 사실만을 놓고 본다면 그러한 판단이 나올 수 있겠으나, 이는 자칫하다가 피상적 관찰의 한계에 머물 가능성이 짙다.

     

    회월의 문학과 생애를 좀더 깊이있게 이해하려면 그 배후에 숨은 의미를 탐색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회월에 대한 연구는 이런 점에서 볼 때 아직도 많은 숙제를 남겨 놓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전기적 자료들을 면밀히 고찰하고, 그것들이 그의 문학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문학이 그 원천을 이루는 역사적 배경으로서의 사회·문화 조건들과 대비시켜 볼 때 어떠한 의의를 부여받게 되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회월의 문학활등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그 첫번째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 백조동인 시절의 유미주의 시이고, 그 두번째의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비평과 소설, 그리고 그 세번째의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 카프 탈퇴 이후의 제반 문학활동이다.

     

    3단계의 전신과정을 통해 우리는 격동기 사회에서 겪은 한 지식인의 정신적 고뇌와 갈등을 엿볼 수 있다. 회월의 경우, 이러한 굴절의 파장이 누구보다도 더 크고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자기 시대의 한계에 대해 누구보다 정직하게 맞서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朴英熙論 -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金時泰,解禁文學論, 미리내, p.140~141)

     

    <박영희는 1920년대의 병적, 퇴폐적 낭만주의를 대표했던 <백조>의 동인으로 활약했다. 백조파의 문학을 우리는 흔히 몽환, 현실도피, 영탄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속하는 시인으로는 박종화, 홍사용, 박영희, 이상화, 김기진, 노자영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회월 박영희의 시는 백조파의 현실도피적 영탄의 문학을 가장 대표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1923<백조>에 발표된 박영희의 대표작이다.

     

    한없는 절망이 깊이도 모르는 어둠 속으로 기울어갈 때, 미풍 같은 한숨은 갈 곳을 모르는 채 속절없이 우리를 미치게 한다는 프롤로그로 시가 시작되고 있다. 아무런 희망이나 기쁨의 편린을 찾아볼 수 없는 칠흑의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그 어둠을 밝혀 주던 우리가 아름답게 보았던 ''도 남몰래 병들어 갈 곳을 모르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근심스럽게 걸어오는 달님이 검붉은 구름 속으로부터 나와서는 그 병든 얼굴의 '말 못하는 근심'의 빛이 나에게 흐를 때, 갈 곳을 모르는 나의 마음은 하염없이 그 달빛만을 그리워한다. 본래 아름답던 내 마음은 이때부터 병들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달빛이 쏟아지는 바닷가 모래 위에다 나는 '내 아픈 마음'의 안식처 곧 병실을 만들기 위하여 달빛을 모아 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채울 길 없는 공허한 나의 마음은 현실에 대한 공포를 처음으로 깨달아야 했다. 병든 내가 안식처 곧 병실에서 한숨과 눈물과 후회와 분노로 죽게 되었을 때, 달님이 보냈다고 하면서 천상의 세 처녀가 나타난다. 이때에야 비로소 나는 내가 고이고이 간직했던 순결한 사랑도 상처 투성이임을 발견한다. 이러한 상처의 자각은 시인의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민족적 처지일 수도 있다. 세 처녀의 이름은 상처받고 패배한 자가 가져야 되는 정서나 상태를 의미하는 '슬픔, 두려움, 안일'이었다. 이때부터 이것들은 영영 내가 고치지 못할 병이 되고 말았다.

     

    일찍이 시인은 이 작품을 일러 '현실에 대한 도피'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으며 '현실을 떨쳐 버린 순수화'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환상과 몽환의 세계가 부정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어디까지나 현실의 어떤 반영 곧 당시 민족적 조건이라는 시대정신의 소산이라면 그 의의는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1920년대 병적 낭만주의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상실과 상처의 기록'이다.>

         

    - 윤경갑 , <현대시 연구> 중에서 인용

     

        

     

     

     

    월광(月光)으로 짠 병실(病室)

     

    밤은 깊이도 모르는 어둠 속으로

    끊임없이 구르고 또 빠져서 갈 때

    어둠 속에 낯을 가린 미풍(微風)의 한숨은

    갈 바를 몰라서 애꿎은 사람의 마음만

    부질없이도 미치게 흔들어 놓도다.

    가장 아름답던 달님의 마음이

    이 때이면 남몰래 앓고 서 있다.

     

    근심스럽게도 한발 한발 걸어오르는 달님의

    정맥혈(靜脈血)로 짠 면사(面絲) 속으로 나오는

    ()든 얼굴에 말 못하는 근심의 빛이 흐를 때,

    갈 바를 모르는 나의 헤매는 마음은

    부질없이도 그를 사모(思慕)하도다.

    가장 아름답던 나의 쓸쓸한 마음은

    이 때로부터 병들기 비롯한 때이다.

     

    달빛이 가장 거리낌없이 흐르는

    넓은 바닷가 모래 위에다

    나는 내 아픈 마음을 쉬게 하려고

    조그만 병실(病室)을 만들려 하여

    달빛으로 쉬지 않고 쌓고 있도다.

    가장 어린애같이 빈 나의 마음은

    이 때에 처음으로 무서움을 알았다.

     

    한숨과 눈물과 후회와 분노로

    앓는 내 마음의 임종(臨終)이 끝나려 할 때

    내 병실로는 어여쁜 세 처녀가 들어오면서

    당신의 앓는 가슴 위에 우리의 손을 대라고 달님이

    우리를 보냈나이다 .

    이 때로부터 나의 마음에 감추어 두었던

    희고 흰 사랑에 피가 묻음을 알았도다.

     

    나는 고마워서 그 처녀들의 이름을 물을 때

    나는 '슬픔'이라 하나이다.

    나는 '두려움'이라 하나이다.

    나는 '안일(安逸)'이라고 부르나이다 .

    그들의 손은 아픈 내 가슴 위에 고요히 닿도다.

    이 때로부터 내 마음이 미치게 된 것이

    끝없이 고치지 못하는 병이 되었도다.

     

    <백조> 3(1923. 9) 수록

     

     

    참고문헌

    백철, {문학자서전}, 박영사, ?

    박영희, [문학정신], {인문평론}, 1941. 1, 권두언.

    ______, [문장보국], {인문평론}, 1941. 2, 권두언.

    근대한국문학연구(김윤식, 일지사, 1973)

    한국작가전기연구(이어령, 동화출판공사, 1975)

    식민지시대의 비평문학(김시태 편, 이우출판사, 1982)

    한국근대시사(김용직, 학연사, 1986)

    한국현대시론연구(한계전, 일지사, 1983)

    새 자료로 본 회월의 생애(문학사상사 편, 문학사상, 1973.8.)

    권영민 (2004225).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반민족문제연구소 (199571). 박영희 : 카프문학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임규찬)

    http://www.3fish.kr/Figure/Native/ParkYoungHiePoetNativeFigure.htm

    http://raincat.pe.kr/zboard/zboard.php?page=1&id=ycy_poem&select_arrange=headnum&desc=asc&page_num=2

    0&selected=&exec=&sn=off&ss=on&sc=off&category=&keyword=%B9%DA%BF%B5%C8%F1&x=41&y=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