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황국문학의 품으로 투항한 계급문학의 전사, 김기진(金基鎭)

草霧 2013. 12. 11. 11:45

 

 

 

문학

 

 

김기진(金基鎭, 창씨명 金村八峰, 19031985)

 

 

  

황국문학의 품으로 투항한 계급문학의 전사

   

 

 

 

창씨명 金村八峯, 필명 팔봉(八峰)

1903년 충북 청원 출생
1925년 카프(KAPF)결성에 참여
1938년 7월 3일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결성위원
1944년 제3회 대동아문학자 대회 참석

1944년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 겸 평론수필 부회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03년 충북 청원 출생

1916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입학

1921년 릿쿄오대학(立敎大學) 영문학부 입학

1922년 박승희·이서구·김복진 등과 토월회창립

1923<개벽><프로므나드 상티망탈>로 문단 데뷔

1924년 매일신보 입사 / 카프의 모태가 되는 파스큘라조직

1925년 시대일보 입사

1926년 박영희와 내용과 형식 논쟁

1929년 임화와 대중화 논쟁

1930년 중외일보 사회부장

1934년 매일신보사 사회부장

1945년 애지사 창립

1952년 금성화랑무공훈장

1958년 민권옹호투쟁위원회 부위원장 취임

1960년 경향신문 주필

1961년 재건국민운동 중앙회장 

1940.2.27 문예시감 매일신보
1941.11 아세아주의와 김옥균선생 조광
1942.1.9 국민문학의 출발 매일신보
1942.1.28 역사적 명령 매일신보
1942.2.20 신세계의 첫 장(시) 매일신보
1942.2 대동아전송가(시) 조광
1943.8.1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시) 매일신보
1943.11.5 나도 가겠습니다(시) 매일신보
1943.11.5 가라 군기 아래로 어버이들을 매일신보 대신해서(시)
1944.10.4 경산시첩(시) 매일신보
1944.10.18 의기충천(시) 매일신보
1944.2.20 보도정신행 매일신보
1944.9.6 이 길로 가자 매일신보
1944.1.5 탄환과 충언 매일신보
1944.1.19 신전의 맹세 매일신보
1944.8.17 문화인에게 격함 신시대
1945.3.12 금감단편 매일신보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1923) <지배계급 교화, 피지배계급 교화>(1924)

<금일의 문학, 명일의 문학>(1924) <조선어의 문학적 가치>(1924)

<무산 문예 작품과 무산 문예 비평-동무 회월에게>(1927) <문예사상과 사회사상>(1927)

<프로문예의 대중화 문제>(1929)

<프로므나드 상티망탈>(1923) <환멸기의 조선을 넘어서>(1924)

<붉은 쥐>(1924) <불이야 불이야>(1925)

<청년 김옥균>(1936) <해조음>(1938) <심야의 태양>(1952) <최후의 심판>(1953) <통일천하>(1965) 

 

김기진(金基鎭, 일본식 이름:金村八峯 가네무라 야미네, 1903년 6월 29일 ~ 1985년 5월 8일)은 대한민국문학평론가로, 시인이자 소설가이기도 하다. 호가 팔봉(八峰)이라 김팔봉(金八峰)으로도 불린다. 조각가 김복진(金復鎭)의 동생이다. 본관은 (신)안동(安東)이다.

  • 1.1 출생과 초기 삶
  • 1.2 일제 강점기 활동
  • 1.3 대한민국
  • 2 가족 관계
  • 3 학력
  • 4 같이 보기
  • 5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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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진은 1903년 6월 29일 충북 청원출생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의 실질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충청북도 청원 출생하여,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하여 릿쿄 대학 영문학부에서 수학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매일신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등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일본 유학 중에 박승희, 이서구와 함께 토월회를 조직하여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문예운동에 뛰어들었다.

     

    1923년에는 배재고보 동창인 박영희 등과 함께 파스큘라를 조직했고, 파스큘라가 1925년 카프로 발전하면서 박영희와 더불어 카프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백조》 동인으로 시 〈애련모사〉(1923) 를 발표하며 등단하여 파스큘라와 카프 활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경향파 시와 소설, 수필 등을 활발히 창작했다.

     

    이 시기의 대표 평론으로는〈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1923), 〈지배계급 교화, 피지배계급 교화〉(1924), 〈문예사상과 사회사상〉(1927), 〈프로문예의 대중화 문제〉(1929)이 있고 정치에 문학이 종속되는 전형적인 참여문학적 경향을 보였으나, 차츰 문학의 형식성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성향이 변화되어 형식의 중요성을 낮게 보는 박영희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의 연장에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맑스주의 통속소설"의 필요성을 주창하기도 했으며, 후에 투철한 경향성을 내세운 카프 소장파 김두용, 임화 등에 의해 비판받았다.

     

    소설로는 카프 결성을 불러온 신경향파의 의식 세계와 한계를 잘 보여주는 〈붉은 쥐〉(1924),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死)〉(1925) 등이 잘 알려져 있다. 〈붉은 쥐〉의 주인공은 사회주의 운동가들 가운데서 그들을 관찰하는 나약한 지식인으로, 작가 김기진의 내면이 반영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친일 행적을 보였다. 1938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 결성위원으로 참석했고, 1944년 열린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했다. 조선문인부국회조선언론보국회에도 가담하여 박영희와 함께 카프의 지도자에서 친일 문학계의 중추로 변신했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매일신보》, 《조광》, 《신시대》를 통해 친일 저작물도 발표했다.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1943) 등 총 친일 작품 수는 17편으로 적극적으로 친일 창작 활동을 한 편이다.[1]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모두 들어 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김복진, 김기진 형제 생가 (청원군)

    정관 김복진 선생은 우리나라에 최초의 근대조각을 도입한 선구자이며 비평가로,

    팔봉 김기진 선생은 문학사에 한획을 그은 문인으로 김복진과 김기진은 형제간이다.

        

    광복 후에는 출판사인 애지사를 설립해 경영하다가 한국 전쟁서울조선인민군에 점령되자 체포되어 인민재판에 회부된 뒤 즉석에서 사형 판결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겼다. 타살형이 집행되었음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김기진은 대한민국 육군의 종군작가단 부단장으로 참전하였고, 금성화랑무공훈장을 수상하며 대표적인 반공주의 문인으로 활동했다. 5·16 군사정변 직후 관제 조직인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회장을 지내기도 했다.《경향신문》 주필을 거쳤고,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와 한국문인협회 등에서 고문을 지냈다.

     

    1936년 《청년 김옥균》을 발표한 이래 점차 역사소설에 관심을 보였는데, 광복 후에는 《통일천하》(1954~1955), 《군웅》(1955~1956), 《초한지》(1984) 등 역사소설을 많이 발표했다. 1978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사망 후 198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전7권의 《김팔봉문학전집》이 발간되었다.

     

  • 형: 김복진(金復鎭, 1901년 ~ 1940년 8월 18일, 연극배우, 조각가, 미술평론가, 문예이론가, 사회운동가.)
  • 형수: 허하백(許河伯, 1909년 ~ ?, 교육자, 정치가. 前 전국부녀총동맹 제2부총재.)
  • 딸: 김복희(金福姬, 1928년 3월 31일 ~ , 소프라노 성악가. 개신교 신자. 前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 충청북도 영동 황간보통학교 수료
  • 강원도 춘천보통학교 수료
  • 충청북도 영동보통학교 졸업
  •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 일본 릿쿄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중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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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조각 예술의 개척자 김복진(金復鎭), 김복희 (金福姬)

     

     

    곽종원김기진김동인김동환김문집김상용김소운
    김안서김용제김종한김해강노천명모윤숙박영호
    박영희박태원백철서정주송영유진오유치진
    이광수이무영이서구이석훈이찬이헌구임학수
    장혁주정비석정인섭정인택조연현조용만주요한
    채만식최남선최재서최정희함대훈함세덕홍효민

     

        

     

    金八峰과 인민재판

    “깨끗하게 죽자! 아무도 미워하지 말자! 아무도 원망하지 말자!
    내가 50도 되기 전에 일찍 죽는 것을 한탄하지도 말자!
    이것을 내가 죽는 그 최후의 순간까지 절대로 잊지 말자!”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가 기적적인 회생

    195072, 북한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한 지 닷새째 되는 날 아침, 서울 세종로 부민관(옛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6, 7백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인민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40대 후반의 한 사내가 군중들 앞으로 끌려나왔다. 곧이어 '좌익활동의 변절자', '일제 경찰의 밀정' 등의 죄목으로 그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리고는 바로 형이 집행되었다.

     

    몽둥이가 그의 뒷머리를 두 번 내리쳤고 그는 분수처럼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그런데 갑자기 쓰러진 사내가 일어나 앉아서 잠시 앞을 바라보다가는 나무 막대기하나를 집어 들고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등 뒤로 또 다시 몽둥이가 내리쳐졌다. 사내는 쓰러져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줄에 묶여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몇 시간 뒤에 한 내무서원에게 인계되었다. 나흘 후인 76일 오후, 그 사내는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에서 눈을 떴다. 기적적인 회생이었다. 팔봉 김기진의 또 다른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너무나 극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주는 이 사건은, 한국전쟁 중 인민공화국 치하의 '잔학상'을 증명하는 사례로 자주 인용되는 것인데 당시인민재판의 사진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단죄의 폭력성과 무모함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겠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잔인한 우리현대사의 우여곡절과 역사의 격량에 휩쓸린 한 지식인의 삶을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카프 2차 검거사건 이후 전향

    식민지 치하의 조선 문단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씨를 뿌리고 그 운동을 이끌었던 팔봉 김기진의 친일행위는, 현재 남아 있는 기록과 자료를 종합해볼 때 1938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35년 카프 제2차 검거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기소되지 않고 석방된 그는 그때에 이미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사회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미 그 전에 카프 탈퇴 선언을 한 박영희*도 기소되는 형편에 그가 기소되지 않고 풀려난 데에는 아마도 그의 이러한 직책이 작용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그렇다면 그가 {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한 1934년에 이미 친일행위를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은 너무 무리한 해석이다. 적어도 1935년 초 무렵까지의 팔봉은 계급 문학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문필활동을 통해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토월회 창립 동인들

     

    19351월에 쓴 [조선 문학의 현계단]이라는 평론에서 그는 민족문학파의 역사소설이 복고적이고 퇴영적인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현재의 조선 문학을 일으킬 사람들은 "중압을 뚫고 일어서는 현실적이요 진취적이요 그리고 유물적인 사상가와 시인"임을 역설한다.

     

    그러니까 1928년 이후부터 카프의 해산을 전후한 시점까지의 김기진은 비록 카프를 주도하는 소장파 이론가들과는 분명히 미학적 견해를 달리하고 있었지만, 그 기본이념에 있어서는 여전히 중요한 이론가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별 무리가없을 것이다.

     

    1934년까지의 왕성한 문필활동과는 달리 1935년에 들어서 그는 [조선 문학의 현계단] 외에 한두 편의 단평을 쓰는 것 말고는 일체의 문필활동을 중단한다.

     

    이 침묵은 19385{삼천리}지에 [문예시평----'작가''현실'에 대한단상]이라는 글을 발표할 때까지 이어진다. 이 글은 예전의 투철한 의식이 거의 탈색된 것이기는 하지만 특별히 노골적인 친일성향을 보이는 것은아니다.

     

    김기진의 친일활동은 193873일 일제가 조선의 좌익 전향자들을 규합하여 만든 친일단체 '시국 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의 결성준비위원으로 참가하면서부터였다. 이어 그 해 920일부터 28일까지 {매일신보}에 게재된 수필 [미나미() 총독 수행기]는 그의 친일 문필활동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물론 {매일신보}의 기자로서 조선총독의 지방시찰을 수행하면서 쓴 취재기이지만, 그 이전에도 기자로 근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혹시 익명으로 쓴 기사가 있어서 그것이 확인된다면 몰라도그렇기 전에는), 이 글을 그의 친일 문필행위의 첫 출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이야 새삼 말할 것도 없이 총독의 선정과 황민화 정책을 찬양하고 홍보하는 것이었다.

     

    이상의 사례를 종합해 보건대, 김기진의 경우는 대체로 1935년 이후 약 3년간의 침묵 혹은 '투항기'를 거쳐 1938년 중반 이후 친일의 행로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로부터 약 1년간 김기진의 친일활동은 그렇게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위의 '보국연맹'의 준비위원으로 이름을 내건 것과,19391{삼천리}지 주최의 '전쟁과 문학과 그 작품'이라는 좌담회에 김동환*, 박영희* 등과 함께 참석한 것, 그 해 4월 이른 바 '황군위문 작가단'의 장행식에서 개회사를 한 것, 그리고 10월에 결성된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 그리고 19398월에 {매일신보}에 실린 [한해대책 현지보고]라는 기사를 쓴 것 등이 이 기간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의 친일행위이다.

     

    물론 소극적인 것이라고 해서 그 행위 자체를 덮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문인으로서의 일차적인 행위가 글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볼 때, 그리고 같은 시기의 다른 문인들의 행위와 비교해 보았을 때이 시기 그의 행동이 훨씬 소극적이고 미약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940년 무렵부터 친일활동 적극화

    그러나 1940년 무렵부터 팔봉의 친일활동은 적극성을 띠기 시작한다. 1940227일부터 29일까지 {매일신보} 지상에 발표된 평론 [문예생활의 지표], [장래 할 역사의 파악], [재출발의 기본선]과 같은 글을 시작으로, 1941년에는[대 아세아 주의와 김옥균 선생]을 비롯한 수필 3, 1942년에는 [국민문학의 출발](평론), [역사적 명령](수필), [신세계사의 첫장](), [향항함락](), [마닐라 점령](), [신세계사 첫장 쓰던 날](수필), 1943년에는[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가라! 군기 아래로 어버이들을 대신해서](), [나도 가겠습니다](), 1944년에는 [탄환과 충언](수필), [신전의 맹서](수필), [조선영화의 신출발](평론, 일문), [이 길로가자](수필), [경산시첩](시조), [의기충천](), 1945년에는[근감단편](수필) 등을 씀으로써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이러한 문필활동 외에도 그는 조선 문인 보국회라는 친일단체를 통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 문인 보국회는 1939년에 결성된 조선 문인 협회를 확대 강화한 조직으로서 19434월에 결성되었다.

     

    팔봉은 조선 문인 협회에는 발기인으로 참여한 정도였으나, 조선 문인 보국회에서는 평론수필부회의 평의원으로 있으면서(1943. 6), 194428일부터 331일까지의 '미영격멸국민궐기대회'의 행사로써 기획된 보도특별정신대의 일원으로 강원지방에 순회강연을 다닌 바 있고, 19444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파견으로 증산전선(增産戰線)을 시찰하고 [길주펄프공장에서]라는 수필을 썼으며, 6월에는 재선문학자 총궐기대회의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그는 1944618일에 열린 조선 문인 보국회 정기총회에서 상무이사 겸 평론수필부 회장으로 선임됨으로써 일제 말엽 가장 강력한 친일문예조직이었던 이 단체의 중추적 인사가 되었다.

     

    그리하여1944817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적국항복문인대강연회'에서 팔봉은 이광수*, 유진오, 주요한* 등과 함께 '문화인에 격함'이라는 강연을 하였고,19456월에 결성된 조선 언론 보국회에는 이사로 재직하면서 그 해 7월에 그 단체가 주도한 전국순회강연회에 경북지방 연사로 활동하였다.

     

    한편 조선 문인 보국회의 상임이사로서 그는 194411월에 중국 난징(南京)에서 열린 이른바 대동아문학자대회 제3차 회의에 참석하여 문인보국회의 기금모집에 진력하다가 다음해 19일 귀경하였다.

        

     

     

    "독립을 위한 비밀공작을 했다"는 궤변

    일제 말엽의 친일행위에 대한 그 자신의 훗날의 기록은 다른 친일문인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없고 지극히 주관적이다.

     

    [나의 회고록](1964-66), [일제 암흑기의 문단](1970)과 같은 글에서 그는 조선 문인 보국회의 상무이사를 맡게 된 사정을 매우 소상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문인 보국회 상무이사가 되기 전, 그러니까 19446월 이전까지 자신은 문단과는 담을 쌓고 살았으며, 조선 문인 협회 회원도 아니었고, 그것이 조선 문인 보국회로 바뀐 것도 몰랐으며, 매일같이 술이나 마시면서 지냈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그의 말대로라면 그의 친일활동은 단지 조선 문인 보국회 상무이사를 맡은 것뿐이다. 그 어느 회고에서도 그는 그 이전에 자신이 문인으로서 쓴 글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을 뿐만 아니라 조선 문인 보국회 상무이사를 맡게 된 동기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게 설명하고 있다.

     

    또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패망이 임박한 일제가 물러간 뒤에 민족의 독립을 준비할 신간회와 같은 민족기간단체를 꾸릴 작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정무총감의 비서로 있던 김영돈(金永敦)이라는 자를 통해서 일본 정부와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합법적인 민족기간단체를 결성할 요량으로 보국회의 상무이사직을 수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한 것도 그 단체를 조직하기 위한 '정치자금'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요컨대 문인보국회의 상무이사를 맡은 것 외에는 일체의 친일활동을 한 바 없으며, 보국회에서도 전혀 일을 하지 않고 오로지 독립을 위한 '비밀공작'을 했다는 것이 그가 훗날에 남긴 기록들 속에서 되풀이 주장하는 내용이다.

     

    그의 회고록은 이러한 과정을 매우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도대체 일본정부와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대표적인 친일단체의 책임자가 꾸미는 '독립준비 조직'이라는 것의 정체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일본 관헌의 협조와 도움으로 단시일에 100만 원(지금의 100)이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을조성하는 것을 과연 독립을 준비하는 민족단체의 정치자금이며 비밀공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19507월의 인민재판 이후 팔봉은 19515월에 조직된 육군 종군 작가단에 입대하여 1952년에는 부단장으로 활약하면서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기도하였다. 이후 그는 남한 문단에서 가장 극렬한 반공작가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고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회장으로 취임하기도 하였다.

       

     

     

     

    김철 (한국교원대 교수·국문학)

     

     

    김좌진 장군 묘비문 ‘친일파’가?
    팔봉 김기진 작성 … 보령시 “누가 썼는지 몰라”

     

     

    김기진(金基鎭) 1903~1985

    소설가. 시인. 평론가. 호 팔봉(八峰). 충북 청원 출생. 배재고보를 거쳐 1923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학부를 중퇴하였다. 1924년부터 1940년까지 <매일신보>, <시대일보>, <중외일보(中外日報)> 등의 기자로 언론계에 종사하였다.

    1945년 출판인쇄업 애지사(愛智社)를 창립하여 1950년까지 경영하였고 1960<경향신문> 주필을 거쳐 1972년 펜클럽 문협(文協)의 고문이 되었다. 1920<동아일보>에 시 <가련아>를 발표한 뒤 주로 <개벽(開闢)>에 글을 발표했으며, 이때부터 문학과 연극에 관여하여 토월회(土月會)의 조직, <백조(白潮)>의 동인, 1925년 파스큘라와 염군사를 합쳐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를 만들었으며, 기타 영화사 등에서 활약하였고 문학평론가로서의 집필도 많이 하였다.

     

    1940년 무렵부터 수필시조평론 등 친일(親日) 작품을 발표하였다. 1944년 조선문인부국회 상무이사 겸 평론 수필부 회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에 선출되는 등 가장 강력한 친일문예조직의 중추적 인사가 되기도 하였다. 625전쟁 때 공산 치하에서 인민 재판에 회부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육군 종군 작가단 부단장으로 활약하면서 금성화랑무공훈장을 수상하였다. 작품에 붉은 쥐”, “군웅(群雄)”, “청년 김옥균”, “해조음(海潮音)” 등 다수가 있으며, 1989년에 <김팔봉문학전집>(7)이 발간되었다.

     

    충북 청원에서 출생한 김기진은 1916년 배제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1년 일본 릿쿄오대학(立敎大學) 영문학부에 입학했다. 19235월 릿쿄오대학을 중퇴했으며, 매일신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기자 등 17년간 언론계에 종사했다. 1945년 출판 인쇄업 애지사(愛智社)를 운영했고, 1960년부터 1961년까지 경향신문 주필을 역임했다. 일본 유학시 1922년 박승희(朴勝熙), 이서구(李瑞求) 등과 함께 토월회를 조직했으며, 1923년 박영희, 안석영, 김형원, 이익상, 김복진 등과 함께 파스큘라를 결성했다. <애련모사>(1923)를 발표하면서 <백조> 3호부터 동인으로 참가해서, <한 갈래의 길>, <한 개의 불빛>, <권태>, <비오는 날> 등 여섯 편의 시를 발표했다.

     

    또한 <떨어지는 조각조각>이라는 에세이에서 신경향파 문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붉은 쥐>(1924), <불이야 불이야>(1925),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1925) 등의 소설을 발표함으로써 카프의 이론적, 실질적 지도자의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평론으로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1923), <지배계급 교화, 피지배계급 교화>(1924), <문예사상과 사회사상>(1927), <프로문예의 대중화 문제>(1929) 등이 있다. 6·25 이후에는 <통일천하>(1954~1955), <군웅>(1955~1956) 등의 역사소설을 쓰기도 했다.

    팔봉 김기진의 초기 문학론은 정치를 우위에 두고 문학을 수단화함으로써 문학의 형식을 배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후 월평에서는 언어나 시의 리듬 등 외적 형식의 창조를 위한 표현수단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형식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박영희와의 내용 형식 논쟁의 발단이 되기도 했다. 김기진은 이러한 형식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켜 1920년대 후반부터 프로문예 양식론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이 양식론은 대중화 논쟁 중에서도 시, 소설 등 기존 장르를 중심으로 한 프로문예의 형식적 가능성을 개진하며, 독자와 관련해서는 통속화를 지향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장르인식의 한계와 실천성이 결여된 작가태도 등의 이유로 카프 소장파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된다. 한편 그의 초기 소설인 <붉은 쥐>,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 등은 작가 자신의 주관적 관념이 인텔리의 내면 독백이나 일기체 형식을 통해 직접 토로되고 있다. <몰락> 등에서는 계급관계를 중심으로 소설의 상황을 설정하고 하층민 주인공을 내세우고는 있으나, 등장인물의 사고와 행위가 구체적인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 그 자신이 제기한 통속적 경향소설을 직접 실행한 장편 <해조음>은 소재뿐만 아니라 전대 소설의 구조를 작품 내에 수용함으로써 통속성을 획득하고는 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향성을 획득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참고: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본관은 안동. 필명은 팔봉(八峰)·팔봉산인·동초·여덟뫼. 우리나라 최초로 프로 문학의 이론을 내세웠으며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의 실질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작품세계

    역사적으로 문예 사상의 발달을 보아 내려오면, 그 사상의 출발됨이 그 생활 상태로부터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바꾸어 말하면, 그 시대의 생활 상태가 그 시대의 시대 사상을 출생하게 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과학의 발달이 상공업의 발달이 되어서 도회라는 특수한 부문을 지어내고, 인구의 증식은 도회인으로 하여금 관능적으로 달아나게 하고, 생활의 불안정은 염세 사상을 지어내었다. 문예와 생활은 떼어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문예는, 그 시대의 사회 조직·생활 상태가 결정해준 생활 의식의 유로 된 것이다.

     

    문예부흥에서 발족된 개인주의의 사상이, 오늘날의 상업주의-자본주의를 만들어내고, 기계의 발달은, 대중을 인생 생활에서 질식하게 만들어버렸다. 모든 방면으로 충만된 혁명의 기운이, 어찌하여 홀로 문예의 권내에만 없을까 보냐. 문예의 혁명은, 신낭만주의 발생 이후로 최근에 일어난 새로운 운동이다. 그러나, 문학의 혁명은 입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요, 사상의 혁명은 붓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인의 생활을 개조하지 않으면, 참말로 혁명은 성취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현대인의 정신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사회 생활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다. 여기에 문예사의 유물사관적 견지가 있다.

     

    미의식이라는 것은 생의 비참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이라는 것은 유쾌와 유익의 양면을 가지고 있는 즉 심미와 공리를 합해서 가지고 있는 것인데, 상업주의·자본주의 아래에서 예술품은 장식품이 되고 유희만 위해서 생산되게 되었다.

     

    그것을 구원해 내오라는 역사적 필연을 가지고 있는 무산 대중과 악수하여 그 효적을 급속하게 할 일, 그러자면 조선에서 기괴백면의 정면의 적을 부셔버려야겠는데, 그와 같이 하자면 동일한 생활을 전민족이 생활한 일, 즉 무산 대중과 동일선상에 설 일, 그리하여 우리는 감각을 혁명하고 건전한 감각을 가져야 할 일, 그리고 신흥문학은 개성에 철저·보편화·신주류의 표현으로 중심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세계 의식에 눈을 뜰 일, 그러면 자연히 프로와 악수하게 된다. - ‘금일의 문학, 명일의 문학’, <김팔봉문학전집1 : 이론과 비평>, 문학과지성사, 1988

    평론

    (……) 김기진은 1922년 초부터 서서히 사회주의 문학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문학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이때의 그에겐 문학이 어떻게 즐거움을 주는가 하는 질문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그것은 복잡하게 짓찢겨져 있는 사회와 이러한 사회의 확대판인 세계 속에서 도대체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앙리 빠르뷔스의 클라르테 운동을 배우고, 유도무랑(有島武郞)선언하나에 접하고, 소목근강(小牧近江)<씨뿌리는 사람>을 읽고 하면서 그가 느끼고 생각한 것은 문학이 도대체 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의 제 모순들, 특히 계급적 이해관계의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당연하게도 자신의 조국 조선의 문제로 옮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인인 그에게 있어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의 구체적 형태는 조선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 당연하게도 이 질문은 지금 조선문학은 어떠하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반성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

     

    작가가 써내는 작품이 자연스럽게 그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면서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로부터 환영받는 시대는 행복하다. 그러나 작가가 다수 민중들의 열망을 대변하면서 작품을 썼을 때, 그것이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로부터 적대시되는 시대는 불행하다. 한 사회의 지배집단이 요구하는 문학과 작가 자신의 스스로 정직하게 형성한 사회의식이 첨예하게 갈등을 일으키는 사회는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이다.

     

    1923 시 「애련모사」
    1923 평론 「클라르뎨 운동의 세계화」
    1924 단편 「붉은 쥐」
    1924 평론 「지식계급의 임무와 신흥문학의 사명」
    1924 평론 「환멸기의 조선을 넘어서」
    1925 단편 「불이야 불이야」
    1926 단편 「몰락」, 「약혼」
    1927 장편 「전도양양」, 「여류음악가」
    1927 평론 「문예사상과 사회사상」
    1928 평론 「조선문학의 현단계」
    1930 단편 「해조음」
    1934 평론 「푸로문학의 현재수준」
    1936 소설집 「청년 김옥균」
    1938 소설집 「해조음」
    1952 소설집 「심야의 태양」
    1953 소설집 「최후의 심판」
    1954 수필집 「심두잡초(心頭雜草)」
    1955 단편 「군웅」
    1956 소설집 「통일천하」
    1958 「김팔봉 수필집」
    1984 소설집 「초한지」

     

    3·1운동 이후인 1922년 이적호, 송영 등에 의해 ‘해방문화의 연구와 운동’을 슬로건으로한 ‘염군사’가 조직되었고, 1923년에는 김팔봉과 박영희를 중심으로 파스큘라가 결성되었다. 이들 조직을 기반으로 프롤레타리아문학운동이 본격화되는데, 이때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팔봉 김기진이었다.


    김팔봉은 초기 프로문학운동을 이끌면서 프로문학이 기본적인 꼴을 갖추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박영희와의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주장했고, 문학의 대중에 대한 역할을 극대치까지 몰고 나간 작가였다. 그는 문학의 논리 차원과 형상화 차원을 동시에 포괄하고자 하는 노력을 집중적으로 보였다.


    김기진은 신경향파 문학이 기치를 들고 출발하던 1920년대 당대의 논객으로서 치열한 논쟁에 투신하기도 하였고 문학의 주도권을 위한 싸움에서도 누구 못지않은 역량을 발휘했다. 그리고 비평가로서 당대의 작품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날카로운 시각을 보여 주었으며, 자신 스스로 작품을 창작하여 언어적인 형상성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약혼」, 「전도양양」, 「해조음」, 「청년 김옥균」 등 장편 소설을 발표하였고, 시·시조·수필 등 창작으로 문학적 실천을 보여왔다. 그러한 점에서 문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실천에 투신한 문학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박영희와 함께 프로문학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그는 1938년 7월 3일 시국대응 전선사상 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의 결성위원으로 참가한 것을 계기로 친일노선으로 전향하였다. 《매일신보》에 황도정신을 문예생활의 지표로 삼는다는 내용의 〈문예시감 文藝時感〉(1940.2.), 〈국민문학(國民文學)의 출발(出發)〉(1942) 등의 평론, 징병 및 학도병의 출진을 권유하는 시 〈신세계(新世界)의 첫 장(章)〉(1942), 〈의기충천 意氣冲天〉(1944) 등과 시조 〈대동아전송가 大東亞戰頌歌〉(1942)를 통하여 친일어용적인 태도를 표방하면서 부일문학(附日文學)의 오욕을 한국문학사에 남기기도 하였다.

     

     

    < 백수(白手)의 탄식 >

     

    카페 의자에 걸터 앉아서

    희고 흰 팔을 뽐내어 가며

    브나르드! 라고 떠들고 있는

    60년 전의 노서아 청년이 눈앞에 있다.

     

    Cafe Chair Revolutionist

    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구나!

     

    희고 흰 팔을 뽐내어 가며

    입으로 말하기는 브나로드!’

    60년 전의 노서아 청년의

    헛된 탄식이 우리에게 있다.

     

    Cafe Chair Revolutionist,

    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구나!

     

    너희들은 '백수(白手)'

    가고자 하는 농민들에게는

    되지도 못하는 '미각(味覺)'이라고는

    조금도, 조금도 없다는 말이다.

     

    Cafe Chair Revolutionist

    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구나!

     

    아아! 60년 전의 옛날,

    노서아 청년의 '백수의 탄식'

    미각(味覺)을 죽이고 내려가고자 하던

    전력을 다하던 전력을 다하던 탄식이었다.

     

    Cafe Chair Revolutionist

    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어!

        

     

     

     

    참고문헌

    임종국, {친일문학론}, 평화출판사, 1966.

    김병걸,김규동(), {친일문학작품선집} 1, 실천문학사, 1986.

    홍정선 편, {김팔봉 문학전집}, 문학과지성사, 1988.

    <김팔봉문학전집>, 홍정선 편, 문학과지성사, 1988~1989

    <김기진의 문학연구: 문학과 이념의 관련 양상>, 신철하, 한양대 박사논문, 1997

    <팔봉 김기진 비평문학 연구>, 조홍규, 조선대 박사논문, 1997

    <팔봉 김기진 연구>, 이현우, 전주우석대 박사논문, 1996 

  • 권영민 (2004년 2월 25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5년 7월 1일). 〈김기진 : 황국 문학의 품으로 투항한 계급 문학의 전사 (김철)〉
  • 강옥희,이영미,이순진,이승희 (2006년 12월 15일).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서울: 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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