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김기진(金基鎭, 창씨명 金村八峰, 1903∼1985)
황국문학의 품으로 투항한 계급문학의 전사
창씨명 金村八峯, 필명 팔봉(八峰) 1903년 충북 청원 출생 1944년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 겸 평론수필 부회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03년 충북 청원 출생 1916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입학 1921년 릿쿄오대학(立敎大學) 영문학부 입학 1922년 박승희·이서구·김복진 등과 ‘토월회’ 창립 1923년 <개벽>에 <프로므나드 상티망탈>로 문단 데뷔 1924년 매일신보 입사 / 카프의 모태가 되는 ‘파스큘라’ 조직 1925년 시대일보 입사 1926년 박영희와 ‘내용과 형식 논쟁’ 1929년 임화와 ‘대중화 논쟁’ 1930년 중외일보 사회부장 1934년 매일신보사 사회부장 1945년 애지사 창립 1952년 금성화랑무공훈장 1958년 민권옹호투쟁위원회 부위원장 취임 1960년 경향신문 주필 1961년 재건국민운동 중앙회장 1940.2.27 문예시감 매일신보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1923) <지배계급 교화, 피지배계급 교화>(1924) <금일의 문학, 명일의 문학>(1924) <조선어의 문학적 가치>(1924) <무산 문예 작품과 무산 문예 비평-동무 회월에게>(1927) <문예사상과 사회사상>(1927) <프로문예의 대중화 문제>(1929) <프로므나드 상티망탈>(1923) <환멸기의 조선을 넘어서>(1924) <붉은 쥐>(1924) <불이야 불이야>(1925) <청년 김옥균>(1936) <해조음>(1938) <심야의 태양>(1952) <최후의 심판>(1953) <통일천하>(1965)
김기진(金基鎭, 일본식 이름:金村八峯 가네무라 야미네, 1903년 6월 29일 ~ 1985년 5월 8일)은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로, 시인이자 소설가이기도 하다. 호가 팔봉(八峰)이라 김팔봉(金八峰)으로도 불린다. 조각가 김복진(金復鎭)의 동생이다. 본관은 (신)안동(安東)이다.
김기진은 1903년 6월 29일 충북 청원출생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의 실질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충청북도 청원 출생하여,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하여 릿쿄 대학 영문학부에서 수학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매일신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등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일본 유학 중에 박승희, 이서구와 함께 토월회를 조직하여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문예운동에 뛰어들었다.
1923년에는 배재고보 동창인 박영희 등과 함께 파스큘라를 조직했고, 파스큘라가 1925년 카프로 발전하면서 박영희와 더불어 카프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백조》 동인으로 시 〈애련모사〉(1923) 를 발표하며 등단하여 파스큘라와 카프 활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경향파 시와 소설, 수필 등을 활발히 창작했다.
이 시기의 대표 평론으로는〈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1923), 〈지배계급 교화, 피지배계급 교화〉(1924), 〈문예사상과 사회사상〉(1927), 〈프로문예의 대중화 문제〉(1929)이 있고 정치에 문학이 종속되는 전형적인 참여문학적 경향을 보였으나, 차츰 문학의 형식성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성향이 변화되어 형식의 중요성을 낮게 보는 박영희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의 연장에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맑스주의 통속소설"의 필요성을 주창하기도 했으며, 후에 투철한 경향성을 내세운 카프 소장파 김두용, 임화 등에 의해 비판받았다.
소설로는 카프 결성을 불러온 신경향파의 의식 세계와 한계를 잘 보여주는 〈붉은 쥐〉(1924),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死)〉(1925) 등이 잘 알려져 있다. 〈붉은 쥐〉의 주인공은 사회주의 운동가들 가운데서 그들을 관찰하는 나약한 지식인으로, 작가 김기진의 내면이 반영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친일 행적을 보였다. 1938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 결성위원으로 참석했고, 1944년 열린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했다. 조선문인부국회와 조선언론보국회에도 가담하여 박영희와 함께 카프의 지도자에서 친일 문학계의 중추로 변신했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매일신보》, 《조광》, 《신시대》를 통해 친일 저작물도 발표했다.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1943) 등 총 친일 작품 수는 17편으로 적극적으로 친일 창작 활동을 한 편이다.[1]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모두 들어 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김복진, 김기진 형제 생가 (청원군) 정관 김복진 선생은 우리나라에 최초의 근대조각을 도입한 선구자이며 비평가로, 팔봉 김기진 선생은 문학사에 한획을 그은 문인으로 김복진과 김기진은 형제간이다.
광복 후에는 출판사인 애지사를 설립해 경영하다가 한국 전쟁 때 서울이 조선인민군에 점령되자 체포되어 인민재판에 회부된 뒤 즉석에서 사형 판결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겼다. 타살형이 집행되었음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김기진은 대한민국 육군의 종군작가단 부단장으로 참전하였고, 금성화랑무공훈장을 수상하며 대표적인 반공주의 문인으로 활동했다. 5·16 군사정변 직후 관제 조직인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회장을 지내기도 했다.《경향신문》 주필을 거쳤고,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와 한국문인협회 등에서 고문을 지냈다.
1936년 《청년 김옥균》을 발표한 이래 점차 역사소설에 관심을 보였는데, 광복 후에는 《통일천하》(1954~1955), 《군웅》(1955~1956), 《초한지》(1984) 등 역사소설을 많이 발표했다. 1978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사망 후 198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전7권의 《김팔봉문학전집》이 발간되었다.
근대조각 예술의 개척자 김복진(金復鎭), 김복희 (金福姬)
金八峰과 인민재판 “깨끗하게 죽자! 아무도 미워하지 말자! 아무도 원망하지 말자! |
김좌진 장군 묘비문 ‘친일파’가? |
팔봉 김기진 작성 … 보령시 “누가 썼는지 몰라” |
김기진(金基鎭) 1903년~1985년
소설가. 시인. 평론가. 호 팔봉(八峰). 충북 청원 출생. 배재고보를 거쳐 1923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학부를 중퇴하였다. 1924년부터 1940년까지 <매일신보>, <시대일보>, <중외일보(中外日報)> 등의 기자로 언론계에 종사하였다.
1945년 출판인쇄업 애지사(愛智社)를 창립하여 1950년까지 경영하였고 1960년 <경향신문> 주필을 거쳐 1972년 펜클럽 ․문협(文協)의 고문이 되었다. 1920년 <동아일보>에 시 <가련아>를 발표한 뒤 주로 <개벽(開闢)>에 글을 발표했으며, 이때부터 문학과 연극에 관여하여 토월회(土月會)의 조직, <백조(白潮)>의 동인, 1925년 파스큘라와 염군사를 합쳐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를 만들었으며, 기타 영화사 등에서 활약하였고 문학평론가로서의 집필도 많이 하였다.
1940년 무렵부터 수필․시․시조․평론 등 친일(親日) 작품을 발표하였다. 1944년 조선문인부국회 상무이사 겸 평론 수필부 회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에 선출되는 등 가장 강력한 친일문예조직의 중추적 인사가 되기도 하였다. 6․25전쟁 때 공산 치하에서 인민 재판에 회부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육군 종군 작가단 부단장으로 활약하면서 금성화랑무공훈장을 수상하였다. 작품에 “붉은 쥐”, “군웅(群雄)”, “청년 김옥균”, “해조음(海潮音)” 등 다수가 있으며, 1989년에 <김팔봉문학전집>(전7권)이 발간되었다.
충북 청원에서 출생한 김기진은 1916년 배제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1년 일본 릿쿄오대학(立敎大學) 영문학부에 입학했다. 1923년 5월 릿쿄오대학을 중퇴했으며, 매일신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기자 등 17년간 언론계에 종사했다. 1945년 출판 인쇄업 애지사(愛智社)를 운영했고, 1960년부터 1961년까지 경향신문 주필을 역임했다. 일본 유학시 1922년 박승희(朴勝熙), 이서구(李瑞求) 등과 함께 ‘토월회’를 조직했으며, 1923년 박영희, 안석영, 김형원, 이익상, 김복진 등과 함께 ‘파스큘라’를 결성했다. 시 <애련모사>(1923)를 발표하면서 <백조> 3호부터 동인으로 참가해서, <한 갈래의 길>, <한 개의 불빛>, <권태>, <비오는 날> 등 여섯 편의 시를 발표했다.
또한 <떨어지는 조각조각>이라는 에세이에서 신경향파 문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붉은 쥐>(1924), <불이야 불이야>(1925),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死)>(1925) 등의 소설을 발표함으로써 카프의 이론적, 실질적 지도자의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평론으로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1923), <지배계급 교화, 피지배계급 교화>(1924), <문예사상과 사회사상>(1927), <프로문예의 대중화 문제>(1929) 등이 있다. 6·25 이후에는 <통일천하>(1954~1955), <군웅>(1955~1956) 등의 역사소설을 쓰기도 했다.
팔봉 김기진의 초기 문학론은 정치를 우위에 두고 문학을 수단화함으로써 문학의 형식을 배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후 월평에서는 언어나 시의 리듬 등 외적 형식의 창조를 위한 표현수단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형식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박영희와의 내용 형식 논쟁의 발단이 되기도 했다. 김기진은 이러한 형식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켜 1920년대 후반부터 프로문예 양식론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이 양식론은 대중화 논쟁 중에서도 시, 소설 등 기존 장르를 중심으로 한 프로문예의 형식적 가능성을 개진하며, 독자와 관련해서는 통속화를 지향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장르인식의 한계와 실천성이 결여된 작가태도 등의 이유로 카프 소장파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된다. 한편 그의 초기 소설인 <붉은 쥐>,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 등은 작가 자신의 주관적 관념이 인텔리의 내면 독백이나 일기체 형식을 통해 직접 토로되고 있다. <몰락> 등에서는 계급관계를 중심으로 소설의 상황을 설정하고 하층민 주인공을 내세우고는 있으나, 등장인물의 사고와 행위가 구체적인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 그 자신이 제기한 통속적 경향소설을 직접 실행한 장편 <해조음>은 소재뿐만 아니라 전대 소설의 구조를 작품 내에 수용함으로써 통속성을 획득하고는 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향성을 획득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참고: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본관은 안동. 필명은 팔봉(八峰)·팔봉산인·동초·여덟뫼. 우리나라 최초로 프로 문학의 이론을 내세웠으며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의 실질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작품세계
역사적으로 문예 사상의 발달을 보아 내려오면, 그 사상의 출발됨이 그 생활 상태로부터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바꾸어 말하면, 그 시대의 생활 상태가 그 시대의 시대 사상을 출생하게 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과학의 발달이 상공업의 발달이 되어서 도회라는 특수한 부문을 지어내고, 인구의 증식은 도회인으로 하여금 관능적으로 달아나게 하고, 생활의 불안정은 염세 사상을 지어내었다. 문예와 생활은 떼어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문예는, 그 시대의 사회 조직·생활 상태가 결정해준 생활 의식의 유로 된 것이다.
문예부흥에서 발족된 개인주의의 사상이, 오늘날의 상업주의-자본주의를 만들어내고, 기계의 발달은, 대중을 인생 생활에서 질식하게 만들어버렸다. 모든 방면으로 충만된 혁명의 기운이, 어찌하여 홀로 문예의 권내에만 없을까 보냐. 문예의 혁명은, 신낭만주의 발생 이후로 최근에 일어난 새로운 운동이다. 그러나, 문학의 혁명은 입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요, 사상의 혁명은 붓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인의 생활을 개조하지 않으면, 참말로 혁명은 성취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현대인의 정신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사회 생활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다. 여기에 문예사의 유물사관적 견지가 있다.
미의식이라는 것은 생의 비참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이라는 것은 유쾌와 유익의 양면을 가지고 있는 즉 심미와 공리를 합해서 가지고 있는 것인데, 상업주의·자본주의 아래에서 예술품은 장식품이 되고 유희만 위해서 생산되게 되었다.
그것을 구원해 내오라는 역사적 필연을 가지고 있는 무산 대중과 악수하여 그 효적을 급속하게 할 일, 그러자면 조선에서 기괴백면의 정면의 적을 부셔버려야겠는데, 그와 같이 하자면 동일한 생활을 전민족이 생활한 일, 즉 무산 대중과 동일선상에 설 일, 그리하여 우리는 감각을 혁명하고 건전한 감각을 가져야 할 일, 그리고 신흥문학은 개성에 철저·보편화·신주류의 표현으로 중심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세계 의식에 눈을 뜰 일, 그러면 자연히 프로와 악수하게 된다. - ‘금일의 문학, 명일의 문학’, <김팔봉문학전집1 : 이론과 비평>, 문학과지성사, 1988
평론
(……) 김기진은 1922년 초부터 서서히 사회주의 문학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문학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이때의 그에겐 문학이 어떻게 즐거움을 주는가 하는 질문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그것은 복잡하게 짓찢겨져 있는 사회와 이러한 사회의 확대판인 세계 속에서 도대체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앙리 빠르뷔스의 클라르테 운동을 배우고, 유도무랑(有島武郞)의 ‘선언하나’에 접하고, 소목근강(小牧近江)의 <씨뿌리는 사람>을 읽고 하면서 그가 느끼고 생각한 것은 문학이 도대체 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의 제 모순들, 특히 계급적 이해관계의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당연하게도 자신의 조국 조선의 문제로 옮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인인 그에게 있어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의 구체적 형태는 조선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 당연하게도 이 질문은 지금 조선문학은 어떠하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반성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
작가가 써내는 작품이 자연스럽게 그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면서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로부터 환영받는 시대는 행복하다. 그러나 작가가 다수 민중들의 열망을 대변하면서 작품을 썼을 때, 그것이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로부터 적대시되는 시대는 불행하다. 한 사회의 지배집단이 요구하는 문학과 작가 자신의 스스로 정직하게 형성한 사회의식이 첨예하게 갈등을 일으키는 사회는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이다.
1923 시 「애련모사」
1923 평론 「클라르뎨 운동의 세계화」
1924 단편 「붉은 쥐」
1924 평론 「지식계급의 임무와 신흥문학의 사명」
1924 평론 「환멸기의 조선을 넘어서」
1925 단편 「불이야 불이야」
1926 단편 「몰락」, 「약혼」
1927 장편 「전도양양」, 「여류음악가」
1927 평론 「문예사상과 사회사상」
1928 평론 「조선문학의 현단계」
1930 단편 「해조음」
1934 평론 「푸로문학의 현재수준」
1936 소설집 「청년 김옥균」
1938 소설집 「해조음」
1952 소설집 「심야의 태양」
1953 소설집 「최후의 심판」
1954 수필집 「심두잡초(心頭雜草)」
1955 단편 「군웅」
1956 소설집 「통일천하」
1958 「김팔봉 수필집」
1984 소설집 「초한지」
3·1운동 이후인 1922년 이적호, 송영 등에 의해 ‘해방문화의 연구와 운동’을 슬로건으로한 ‘염군사’가 조직되었고, 1923년에는 김팔봉과 박영희를 중심으로 파스큘라가 결성되었다. 이들 조직을 기반으로 프롤레타리아문학운동이 본격화되는데, 이때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팔봉 김기진이었다.
김팔봉은 초기 프로문학운동을 이끌면서 프로문학이 기본적인 꼴을 갖추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박영희와의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주장했고, 문학의 대중에 대한 역할을 극대치까지 몰고 나간 작가였다. 그는 문학의 논리 차원과 형상화 차원을 동시에 포괄하고자 하는 노력을 집중적으로 보였다.
김기진은 신경향파 문학이 기치를 들고 출발하던 1920년대 당대의 논객으로서 치열한 논쟁에 투신하기도 하였고 문학의 주도권을 위한 싸움에서도 누구 못지않은 역량을 발휘했다. 그리고 비평가로서 당대의 작품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날카로운 시각을 보여 주었으며, 자신 스스로 작품을 창작하여 언어적인 형상성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약혼」, 「전도양양」, 「해조음」, 「청년 김옥균」 등 장편 소설을 발표하였고, 시·시조·수필 등 창작으로 문학적 실천을 보여왔다. 그러한 점에서 문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실천에 투신한 문학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박영희와 함께 프로문학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그는 1938년 7월 3일 시국대응 전선사상 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의 결성위원으로 참가한 것을 계기로 친일노선으로 전향하였다. 《매일신보》에 황도정신을 문예생활의 지표로 삼는다는 내용의 〈문예시감 文藝時感〉(1940.2.), 〈국민문학(國民文學)의 출발(出發)〉(1942) 등의 평론, 징병 및 학도병의 출진을 권유하는 시 〈신세계(新世界)의 첫 장(章)〉(1942), 〈의기충천 意氣冲天〉(1944) 등과 시조 〈대동아전송가 大東亞戰頌歌〉(1942)를 통하여 친일어용적인 태도를 표방하면서 부일문학(附日文學)의 오욕을 한국문학사에 남기기도 하였다.
< 백수(白手)의 탄식 >
카페 의자에 걸터 앉아서
희고 흰 팔을 뽐내어 가며
브나르드! 라고 떠들고 있는
60년 전의 노서아 청년이 눈앞에 있다.
Cafe Chair Revolutionist
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구나!
희고 흰 팔을 뽐내어 가며
입으로 말하기는 ‘브나로드!’
60년 전의 노서아 청년의
헛된 탄식이 우리에게 있다.
Cafe Chair Revolutionist,
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구나!
너희들은 '백수(白手)'
가고자 하는 농민들에게는
되지도 못하는 '미각(味覺)'이라고는
조금도, 조금도 없다는 말이다.
Cafe Chair Revolutionist
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구나!
아아! 60년 전의 옛날,
노서아 청년의 '백수의 탄식'은
미각(味覺)을 죽이고 내려가고자 하던
전력을 다하던 전력을 다하던 탄식이었다.
Cafe Chair Revolutionist
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어!
■ 참고문헌
임종국, {친일문학론}, 평화출판사, 1966.
김병걸,김규동(편), {친일문학작품선집} 1권, 실천문학사, 1986.
홍정선 편, {김팔봉 문학전집}, 문학과지성사, 1988.
<김팔봉문학전집>, 홍정선 편, 문학과지성사, 1988~1989
<김기진의 문학연구: 문학과 이념의 관련 양상>, 신철하, 한양대 박사논문, 1997
<팔봉 김기진 비평문학 연구>, 조홍규, 조선대 박사논문, 1997
<팔봉 김기진 연구>, 이현우, 전주우석대 박사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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