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인간 탐구론자에서 국민 문학론자로, 백철(白鐵)

草霧 2013. 12. 12. 13:12

 

 

 

문학

 

백철(白鐵, 창씨명 白矢世哲, 19081985)

    

 

 

인간 탐구론자에서 국민 문학론자로

    

 

 

 

 

1940{매일신보} 학예부장

1941년 조선문인협회 간사

1943{매일신보} 베이징 지사장 겸 특파원

1908년 평북 의주 출생

1927년 신의주고보 졸업

1930년 일본 나프(NAPF)의 맹원으로 활동

1931년 일본 도쿄고등사범 문과 졸업 / 조선일보에 <농민문학문제>를 발표하면서 평론가로 등단

1934년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전주 형무소 수감

1939년 매일신보 문화부장

1942년 매일신보 중국 화북 지방 특파원

1945년 서울여자사범대학 교수

1948년 서울대 교수 취임

1949년 동국대 교수 취임

1955년 중앙대 문리과대학 학장 취임

1957년 미국 예일대·스탠포드대 교환교수

1963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위원장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72년 중앙대 문리과대학 학장

1971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72년 국민훈장모란장

백철(白鐵, 일본식 이름: 白矢世哲, 1908년 3월 18일 ~ 1985년 10월 13일[1])은 한국의 문학평론가로, 본명은 백세철(白世哲)이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이다.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후반 천황을 찬양하는 글들을 발표하며 친일파로 활동하였다.

 

도쿄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에 가담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을 시작하였고, 당시 프로 시단의 최일선 동인지 《전위시인》에 시 〈9월 1일〉·〈우리들은 알았다 비라의 의미를〉, 평론 〈프롤레타리아 시이노가 실천문제〉를 발표하며 일본 문단에서 활약했다.[2] 1931년 귀국한 뒤 잡지 《개벽》의 기자로 근무하면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중앙위원으로서 해외문학파와의 논쟁에 참가했다. 마르셀 프루스트 류의 신심리주의를 비판하고 사실주의를 옹호하는 평론을 쓰며 카프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1934년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이 발생하여 백철도 체포되었다. 전주형무소에서 약 1년 반 동안 수감 생활을 겪고 난 뒤, 객관적 정세가 불리하게 변함에 따라 적절히 대응할 것을 주장하면서 지식인 계층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휴머니즘에 대해 논하는 평론을 발표하여 문학적 경향의 변화를 보였다.

 

중일 전쟁 이후로 《매일신보》 학예부장과 베이징 지부장 등을 지내며 조선문인협회에 참가하는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 유치진현대극장에 부설된 국민연극연구소에서 강사를 맡기도 했고, 조선문인보국회에는 평의원으로 가담했다. 쇼와 천황이 해군 함정을 돌아보는 광경을 묘사한 〈천황폐하 어친열 특별관함식 배관근기〉(1940) 등 총 14편의 친일 저작물도 발표[3]하여,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문학 부문에 들어 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동국대학교, 중앙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위원장을 여러 차례 지냈다. 일제 강점기의 신경향파 평론은 문학을 사회적 영향 관계에 종속되는 것으로 파악했으나, 1950년대의 평론에서는 문학의 역할에 대한 견해가 우파적으로 변경되었다. 이때부터 미국의 신비평이론 등 외국의 문학이론을 소개하는 계몽적인 글을 발표하거나 이무영으로 대표되는 농민 소설의 재발견에 관심을 보였다.

 

1966년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대한민국 국문학계의 현대문학사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예술원상, 국민훈장 모란장, 서울시 문화상, 3·1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중일전쟁과 '동양적 신질서'의 수용

'조국 광복을 지향하여 거족적으로 발양된 위대한 3.1 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3.1 문화상의 수상자 중 30% 이상이 친일을 했다는 사실은 좀체 믿어지지 않지만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이 중 한 사람이문학평론가 백철이다. 그는 당시 문학가 중 상당히 많이 친일을 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이 상이 그에게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상을 받는 그 자신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 상을 받음으로써 마치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기조차 했을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분위기는 이시기에서 뿐만 아니라 이미 해방 직후부터 그러했던 것이다. 백철은 자서전{문학과 현실}에서 다음과 같이 해방 직후의 자기 처신과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해방 직후의 큰 난맥상의 하나는 어제까지의 허물은 감쪽같이 숨기고 너나 할 것 없이 하루아침에 애국자들로 변신을 한 사실들이다. 그런 가운데서 공석에서 자기반성의 신상발언을 하고 명예스러운 직책을 사퇴한 예는 나의 경우 밖에 없었다고 기억한다.

 

그가 말하는 공석에서의 자기반성이라고 하는 것은 1945816일에 열렸던 조선 문화건설 중앙협의회의 예비모임 석상에서 {매일신보} 베이징 지사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 조직의 서기장 자리를 맡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당시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백철이 가장 두드러지게 친일행각을 한사람이고 보면 이러한 사퇴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19459월부터 문필활동을 다시 속개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의 반성이라는 것은 극히 얄팍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마치 자신의 재출발의 면죄부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에 3.1 문화상을 수상하고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 수 있었고 오히려 자랑할 수 있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백철이 친일활동을 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중일전쟁이다. 중일전쟁을지켜보면서 그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재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로 인정하게 된다. 이것을 부정하고 다른 것을 꿈꾸어 보았자 헛일이고 오로지 이 시대적 현실을 인정하는 것만이 진정한 지식인의 길이고 이 속에서 새로운 전망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얼마나 이 중일전쟁을 큰 시대적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또한 이것을 계기로 그가 기존의 세계관과 현실인식을 버리고 친일활동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은19393월 이전에 발표한 여러 글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이 최초로 또한 뚜렷하게 드러난 것은 193812월에 쓴 [시대적 우연의 수리]라는 글이다.

 

19377월 노구교사건으로 시작된 중일전쟁이 일본의 예상과는 다르게 장기전으로 들어가면서, 그 결과 193810월 무한 삼진이 함락된 것을 보면서 쓴 것으로 보이는 이 글에서 그는 일본의 중국 침략이 지니는 제국주의적 성격을 비판하기보다는 동아시아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전망을 읽어내었다.

 

직접 지금 동양의 현실을 두고 볼 때에도 이번 사실이 문학자나 지식인 앞에 결코 무의미한 것만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우선 그런 의미에서 한편으로는 이번 사변을 크게 평가하여 동양사가 비상히 비약한다는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사실 나는 이번 사변에 의하여 북경, 상해, 남경, 서주, 한구 등이 연차 함락되는 보도와 접하고 또는 사실 등을 통하여 지나의 모든 봉건적 성문이 함락되는 광경을 눈앞에 놓고 볼 때에, 우리들의 시야가 훤하게 뚫려지는 이상한 흥분이 내 일신을 전율케 하는 순간이 있다.

 

여기서 지식인이 눈앞에 보는 사실에 멎어서 부정적인 요소만을 보는 것은 한 개의사실주의에 떨어진 근시안적인 판단일 줄 안다. 다른 것은 고사하고 오직 그봉건적인 성문들이 함락한다는 사실 그것만을 가지고도 이번 정치에 하나의 역사적인 의미를 붙여보는 데 족한 것이다.

 

일제의 중국 침략을 봉건적 중국을 근대화시킨다고 호도한 총독부의 시각을 그대로 옮기고 있는 이 식민지 조선의 매판적 지식인의 현실 인식은 바로 친일활동으로 나아가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할 때의 구실이 또한 이런 것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맹목과 매판성은 명백한 것이다. 이후 그는 [이상주의의 신문학](1939. 1)[시국과 문화문제의 해방](1939. 4) 등에서 같은 견해를 여러번 되풀이하고 있다. 그 후 그가 쓴 소설 [전망]에서 이러한 견해는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매일신보의 학예부장과 본격적 친일활동

무한 삼진의 함락을 보면서 동양의 신질서의 전망을 읽은 백철에게 이제 친일은 본질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다. 그가 19393월 매일신보 사에 입사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로였다.

 

친일지였던 {매일신보}에 입사하는 것이 더 이상 반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새롭게 전개되는 신질서의 전망에 참가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가 후일 이를 두고 '보호색'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가 쓴 글을 읽어 보면 이것은 단지 변명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매일신보 사는 경성일보사로부터 독립하면서 그 산하에 {국민신보}라는 일문주간지를 내게 되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일하게 된다. 그 후 19401월에{매일신보}의 학예부장으로 발탁되어 거기서 1943년 베이징 지사장으로 전근 갈 때까지 계속적으로 친일 언론활동과 문필활동을 하게 된다.

 

매일신보사에 입사한 후에 그가 쓴 글을 검토해 보면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세계의 '현실 인식'은 문제가 되지 않고 새롭게 전개되는 '현실을 옹호'하는 것만 남게 된다. 이 작업 중 그가 제일 먼저 하는 문필활동은 당시중일전쟁을 취재하여 쓴 글을 평가하는 작업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일본인들이 중일전쟁을 취재한 전쟁문학을 평가하는 [전장문학 일고]라는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조선인의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다루는 글은 황군위문 작가단의 일원인 박영희*와 임학수가 쓴 {전선기행}{전선시집}을 각각 평하는 글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황군위문 작가 단은 황군을 위문하기 위해 조직된 것으로, 19394월에 조선인 문인 중에서 김동인*,박영희, 임학수 세 사람이 중일전쟁터를 방문하였다. 일본인들이 전쟁터를 방문하여 막 책을 낼 무렵이었는데, 이에 반도문인들도 참가하여야 한다는 명목으로 일제 총독부의 강요와 당시 경성부내의 출판사의 후원으로 성사되었다.

 

 

 

 

전쟁터를 방문하고 난 후 박영희는 {전선기행}, 임학수는{전선시집}을 각각 발간하였다. 백철은 이것을 평하는 독후감을 1939104일자 및 15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하였다.

 

전쟁을 고취하는 문학을 주장하던 그는 19401월에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한층 더 여러 방면으로 친일활동을 하게 된다.

 

이때는 개인적인 문필활동 차원이 아니라 매일신보 사 학예부장의 지위로여러 친일활동을 한다. 이 시기에 오면 그는 모든 저널리즘이 신체제에 복무하여야 한다는 논지의 글인 [신체제와 저널리즘]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시기에 그의 친일활동 가운데는 문학활동이 아닌 저널리스트로서의 친일활동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것에 해당하는 것이 [천황폐하 어친열 특별관함식 배관근기]({삼천리}, 1940. 12), [내선 유연(內鮮由緣)이 깊은 부소산성(扶蘇山城)]({문장}, 1941. 3), [제국 해군의 위용](1941. 5. 27)등이다.

 

[천황폐하 어친열 특별관함식 배관근기]는 일본 국왕이 전함을 돌아보는 장면을 직접 취재한 글인데 여기서 그는 반도 인으로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적고 있다.

 

[내선 유연이 깊은 부소산성]은 당시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내선일체의 전통으로 일제에 의해 선전되어 오던 부여성지에 신궁을 만드는 것에 문화인 약 30명이 근로봉사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을 적고 있는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내선일체의 사상을 구현하는 뜻 깊은 일이라고 칭찬해 마지않는다.

    

[제국 해군의 위용]은 일제 해군의 제36회 해군 기념일을 맞이하여 일제 해군을 칭송하는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나는 이 장관(壯觀)을 앞에 두고 오직 황홀한 감탄 속에 제국 해군의 위관을 예찬하는 가운데 더욱이 아() 제국이 사변 처리중에 지나 연안의 제해권을 완전히 확보한 나머지 오히려 이만한 기세를 국내 해상에 거느리고 있다는 데 다시금 제국의 국민된 긍지와 행복을 일신에 느끼는 것 이었다"라는 친일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 시기의 이런 저널리스트로서의 친일활동에 대해서는 부인하기 어려웠던지 훗날 자서전 속에서도 백철은 이 대목만은 인정하고 만다. 물론 여기에 참석하게 된 것이 우연한 친구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자신의 생애에 있어 치부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저널리스트로서의 친일활동을 하는 한편 그는 친일적 문단 활동도 꾸준히 하였다. 조선 문인협회에 참가하여 그는 열심히 친일 강연활동을 했다.

 

193912월 조선 문인협회 주최의 문학의 밤에서 그는 '전쟁 문학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그 후 194011월에는 사상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전국 순회강연에서 '총력운동과 선전의 임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19418월의 조선 문인협회 재조직에서는 간사로 선임되기도 한다. 19412월에 조직된 친일 미술가 조직인 조선미술가협회의 이사로 일하기도 한다. 이렇게 친일 문단활동과 저널리스트활동을 하던 그가 194111{국민문학}이 창간되면서부터는 다시 친일 비평 활동을 한다.

    

 

 

 

국민문학론자로의 변모와 베이징행

1941{국민문학}이 창간된 후 문단의 일부가 국민문학 논의에 들어갈 때백철 역시 이에 빠지지 않고 참가한다. 이 무렵에 들어 그는 비평가로서의 자신의 직분을 친일적으로 다시 활용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일단국민문학을 주장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국민문학 논의에 참가하지 않거나, 혹은 참가하더라도 다소 비판적이거나 현상기술적인 차원에서 그치고 마는 반면, 백철은 국민문학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그가 친일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었다는 피할 수 없는 증거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특기해야 할 점은 백철이 국민문학론을 주장했다는 점을 넘어서 어떤 논리로 그것을 옹호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시기에 이르면 최재서*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국민문학론'을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국민문학론을 주장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시기 백철의 친일 논리의특징을 제대로 해명하기는 힘들다.

 

백철은 19421{국민문학}에 일문으로 된 논문 [낡음과 새로움]을발표하는데, 여기서 여러 가지 자기 나름의 주장을 한다. 그 가운데 백철의 친일 국민문학론의 특징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개성론이다.

 

당시의 국민문학론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 국가주의에 복무하는문학이다. 그렇게 되면서 이른바 서구의 근대가 이룩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마저 배척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국가주의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국민문학론에서 개성의 배척은 일반적으로 주창되었다. 그런데 백철은 개성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그것 중에서 취해야 할 부분은 이어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이 글에서 펼쳤다.

 

언뜻 보면 당시 국가주의에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주장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일반적인 어설픈 국가주의의 국민문학론보다 더 철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국민이 국체의 관념으로 돌아가서 국민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국민이 국가라고 하는 전체관념 속에 자기를 막연히 해소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국민으로서의 입장을 깨닫는 것이다.

 

, 국민으로서 올바르게 국체와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서는 국민으로서의 자기입장을 뚜렷하게 깨닫고 자기의 입장에서 발휘할 수 있는 데까지의 재능을죄다 발휘해야 한다. 국가에 대한 봉공과 직역에 있어서 자기를 발휘하는 일이 표리가 일치해야 하는 것은 국민의 개인적 입장을 바르게 이해함에서이다.

 

그런데 국민이 각자의 입장을 깨닫지 않고 국가에의 봉사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추종일 뿐이며 국책에의 진실한 협력이라고 할 수없다.({국민문학}, 1942. 1)

 

백철의 견해에 의하면 개성이 배제된 국가주의, 즉 내면화되고 육화되지 못한 국민문학론이나 국가주의보다는 개성에 매개된 국민문학론이나 국가주의가 훨씬 더 엄밀한 국책에의 호응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그의 같은 글에 표현된 '일본적인 것을 체내에 받아들여 충분히 씹고 소화하여 문학 속의 살아있는 생명의 흐름으로 까지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논리적으로 해명한 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국민 문학론을 논하는 이 시기 백철의 친일활동의 특징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논지는 이후에 발표된 [문학의 이상성]({동양지광}, 1942. 6.7), [결의의 시대]({국민문학}, 1942. 11)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 시기에도 그는 이러한 문학 활동 이외에 저널리스트로서도 열심히 행하였다.

 

1943년 봄에 그는 매일신보 베이징 지사장 겸 특파원 자격으로 베이징으로향한다. 그는 이것을 도피행이라고 자서전에서 부르고 있지만 그렇게만 볼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베이징에 도착하여 활동하고 있을 때 그곳은 조선과는 달리 연안 지방의 독립 활동가들이 드나들 수 있었던 상황이라 조선 내에서 느끼지 못하는 긴박함을 차츰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고 세계의 현실이고 동안 자신이 인식했던 것처럼 진행되고 있지만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전황이 일본에게 불리한 쪽으로 진행되는 것을 알아차리고 눈치만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와 비슷한 행로를 걸었던 최재서가 국내에서 더 친일화 하는 것과는 달리 더 이상 강한 친일활동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 그의 베이징 행을 단순히 도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탄생 100주년…9일부터 기념문학제

 

이렇게 점철된 백철의 친일활동은 그의 말처럼 해방 직후 공석에서의 신상발언으로 '면죄부'를 받고, 그 후 곧 문단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그리고는 3.1 문화상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받을 정도로'명사'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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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캠 법학관 건너편 작은 정자 옆에는 백철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백철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김재용 (문학평론가, 연세대 강사)

   

 

 

 

백철 白鐵 19081985

프롤레타리아 문학기를 거쳐 8·15해방 이후 신비평 이론을 소개하는 등 한국 문학비평에 있어서 대들보 역할을 했다. 문학평론가. 본명 세철(世哲). 조선신문학사조사|문학개론|비평의 이해 , 2차카프검거사건, 평안북도 의주 출생. 아버지는 소지주로 무근(茂根)이다. 1927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1931년에 동경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 무렵 지상낙원(地上樂園’·‘전위시인(前衛詩人)’ 등의 동인이 되었고, 1930년에는 일본 나프(NAPF)의 맹원(盟員)이 되었다. 1932년에 귀국한 그는 개벽 開闢편집부장으로 있으면서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 해외문학파(海外文學派)와 논쟁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1934년 제2차카프검거사건에 연좌,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이 사건은 그의 문학 활동에 전향의 계기가 되었다. 1939년에 매일신보 每日新報문화부장으로 취임했으며, 1940년에는 천황폐하친열특별관함식배관근기 天皇陛下親閱特別觀艦式拜觀謹記(三千里 12월호)를 발표하였다.

 

이후 친일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간사가 되어 시라야세이데쓰(白矢世哲)로 개명, 기관지 매일신보·국민문학등을 통해 친일 문필 활동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서울여자사범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 뒤 교육계에 투신, 대학 강단에서 현대문학을 강의하는 한편 다시 비평활동을 시작하였다. 1948년 서울대학교, 이듬해 동국대학교 교수를 거쳐 1955년 중앙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에 취임하였다.

 

1957년에는 미국 예일대학과 스탠포드대학 교환교수로 다녀왔고, 1963년에는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위원장에 피임, 이후 여러 차례 재임하는 동안 수차에 걸쳐 해외 작가대회에 참가하는 한편 한국 작품의 해외 소개에도 이바지하였다. 1966년 예술원회원에 피임되고 1972년 중앙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에 다시 취임하였고, 이 사이 서울시문화상과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1972년에는 정부로부터 공로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격동의 프로문학기를 거쳐 광복을 맞고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위원장을 맡기까지 그의 비평적 편력은 한국적인 문학정신의 구명에 중요한 비중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어머니(1930) 등의 시와 전망 展望(1940)과 같은 소설을 발표하기도 하였지만, 특히 그의 비평 활동은 조선일보농민문학의 문제·창작방법문제(1932)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화된다.

 

인간묘사시대(1933)에서는 당시의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도식적 측면을 비판하여 이데올로기나 계급투쟁의 도구로서보다는 인간탐구를 본령으로 하는 문학론을 폈다. 1949년에는 그의 대표적 저서 조선신문학사조사 朝鮮新文學思潮史를 출간하였고, 1957년에는 미국의 웰렉(Wellek,R.) 등의 뉴크리티시즘(新批評) 이론을 소개, 기왕의 사회적 배경이나 역사적 상황에 작품해석의 근거를 두던 비평적 태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였다.

 

이후 영미의 새로운 세대문학(1960), 세계문학과 한국문학(1962) 등의 평론을 발표하였고 이광수(李光洙김동인(金東仁김소월(金素月이효석(李孝石채만식(蔡萬植) 등 신문학기의 대표적 인물들의 작가·작품론을 정리하는 한편, 지드(Gide,A.)·리처즈 (Richards,I.A.)·브룩스(Brooks) 등의 해외 작가나 비평가, 또는 앵그리 영맨’·‘분석비평등 해외문학의 동향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조선신문학사조사외에 국문학전사 國文學全史(이병기 공저, 1957)·문학개론(1959)·문학의 개조(1959)·비평의 이해(1968) 등의 저서와 근대세계문학강화(1955)·문학의 이론(1959) 등의 번역서와 수필집 두개의 얼굴(1967) 등이 있다.

 

격동의 프로문학기를 거쳐 광복을 맞고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위원장을 맡기까지의 백철의 비평적 편력은 한국적인 문학정신의 구명에 중요한 비중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어머니> 등의 시와 <전망> 등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특히 그의 비평 활동은 조선일보에 <농민문학의 문제>, <창작방법문제>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화된다. <인간묘사시대>에서는 당시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도식적 측면을 비판해 이데올로기나 계급투쟁의 도구로서보다는 인간탐구를 본령으로 하는 문학론을 폈다. 미국에 교환교수로 다녀온 후에는 <뉴크리티시즘의 제문제>, <뉴크리티시즘의 행방> 등을 발표, 이 땅에 처음으로 미국의 분석비평을 도입, 소개했다. 이후 주로 한국문학의 세계무대 진출에 역점을 둔 외국문학이론의 소개 등 계몽적 입장의 글을 발표하는 한편, 염상섭(廉想涉이무영(李無影)으로 대표되는 19세기 자연주의 수법의 농민소설에 대한 현대적 극복을 주장한 <신문학과 근대자연주의>, 해방 이후 소설의 변모를 일별한 <전후 15년의 한국소설>, 농민소설의 예술적 승화를 촉구한 <제재의 확대와 농촌소설> 등을 발표했다. 4·19 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한국문학의 대전환의 계기로 파악, <전환의 미학>을 발표하여 문단의 자각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후 1963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위원장에 피임, 여러 차례 재선되는 등 문학작품의 해외소개와 국제 문학자 교류의 창구 역할을 담당한 바 있다.

평북 의주에서 출생한 백철은 한학을 공부하다가 1927년 뒤늦게 신의주고보를 졸업하였다.그 뒤, 일본 도쿄고등사범 문과를 졸업하고 1930<대중지광><어머니>, <단장>, <무제> 등의 시를 발표했으나, 이어 1931<조선일보>에 평론 <농민문학문제>, <농민시인 에세닌 6주기를 제하여> 등을 발표하며 평론가로서 정식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할 무렵, <지상낙원>, <전위시인> 등의 동인이 되었고, 1930년에는 일본 나프의 맹원이 되었다. 1932년 귀국한 그는 <개벽> 편집부장으로 있으면서 카프 중앙위원으로 활동, 해외문학파와의 논쟁에 참여했다. 1934년 제2차 카프검거사건에 연좌,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이 사건은 그의 문학활동에 전향의 계기가 되었다. 1939년에 매일신보 문화부장으로 취임했으며, 1942년에는 일제의 협조 강요를 피하여 중국 화북지방 특파원으로 자원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서울여자사범대 교수로 취임했으며 그 뒤 교육계에 투신, 대학강단에서 현대문학을 강의하는 한편, 다시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 서울대, 이듬해 동국대 교수를 거쳐 1955년 중앙대 문리과대학 학장에 취임했다. 1957년에는 미국 예일대와 스탠포드대의 교환교수로 다녀왔고, 1963년에는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위원장에 피임, 이후 여러 차례 재임하는 동안 수차에 걸쳐 해외 작가대회에 참가하는 한편 한국작품의 해외소개에도 이바지했다.

 

평론집

<신문학사조사>(1953) <문학개론>(1955) <국문학전사>(1957)

<문학 A·B·C>(1958) <문학의 개조>(1959) <한국문학의 이론>(1964)

<진리와 현실: 백철의 문학생애 그 반성과 기록>(1975)

<한국신문학발달사>(1975)

 

수필집

<두 개의 얼굴>(1964) <인간이 서 있는 곳>(1965) <만추의 사색>(1977)

작품세계

(……) 작가는 인간의 탐구자다! 이 사실을 가지고 우리들은 다시 먼저 논명하던 지역, 작품의 주요 대상은 인간이냐 자연이냐 하는 곳에 돌아가기로 하자! 먼저 말한 바와 같이 작품의 형상적 대상에는 인간 외에 자연, 기타의 제사물이 있으나 그 작품의 주요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 타입과 그 생활의 우수한 묘사에서 결정된다는 것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나는 재차 결정하려고 한다. 결국 작품의 모든 대상, 예를 들면 자연과 인간은 작가에게서 통일되는 것인 이상 인간의 탐구자인 작가가 그의 이상과 정열을 직접으로 대변하는 인간, 그리고 다른 사물보다도 직접형식인 인간 타입에 주입하는 것은 결코 의심될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추상의 독단은 아니다. 과거의 어떤 작품을 대하든 그 작품의 대상으로서 자연이 인간 위에 서 있는 것은 발견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

 

하여튼 금일의 본래의 진실한 문학에 있어 인간탐구와 그 묘사는 작품의 중심과제로서 거기에는 이 시대와 현실을 대표하고 있는 전형적 인간들의 뚜렷한 자태들이 새로운 리얼리즘의 주요한 형상 실체로서 등장될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 인간은 단순히 외부적 묘사와 추상적 개발에 의하여 전형적 성격이 묘사되는 것이 아니고, 먼저 내부의 자기의 열정에 의한 적극성과 소극성이 진실하게 묘출되는 곳에 그의 진실한 출발점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내외에 충실한 인간 적극성과 창조성이 충일한 인간을 묘사, 탐구하는 곳에 새로운 작가들의 인간탐구의 도정이 있으며 그러한 인간이 적극적으로 현실에 정면하여 실천하며 행동하는 모든 복잡한 관계를 묘사, 탐입하는 곳에 새로운 인간타입을 발견하여 확립하는 창작 방법으로서의 프로문학의 진실한 능동적 리얼리즘의 태도가 있는 것이다. (……)

- ‘인간탐구의 도정’, 백철, <한국의 문학비평>, 민음사, 1995

 

평론

(……) 백철은 1930년대 초부터 우리 문단 특히 비평계에 있어서 정력적인 활동을 줄기차게 전개해온 대표적인 비평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한때 황도문학(皇道文學)이라는 훼절과 배신의 오류를 범했던 사실은 두고두고 비판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오면서 그 나름대로 농민문학론 전개, 프로문학이론 소개와 비판, 휴머니즘론 제창 및 민족주의 문학론을 펼쳐온 과정은 그대로 이 땅 근대 문예비평사의 갈등과 고민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소평가하기만은 어렵다. 또한 그가 해방 이후 문학사 연구와 새로운 서구 문학이론의 소개에 기울여온 학구적 노력은 그의 비평사적 작업과 더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따라서 본고에서는 그의 타계에 즈음하여 그의 생애사·문학사적 변모과정을 다섯 시기로 나누어 개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 먼저 첫 시기는 출생부터 일본으로 유학하여 학업을 마치기까지의 성장시기로서 시를 습작하는 등 문학수련기에 해당한다. 둘째 시기는 그가 <농민문학의 문제>라는 평론으로 문단에 나온 이래 제2차 카프 사건, 신건설사(新建設社)’ 사건으로 전주...... 

 

   

 

 

 

평론의 길 개척했지만 잦은 변신으로 오점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30> 1세대 비평가 백철

 

1970년대 중반 백철 평론가가 신문에 1920~30년대 문단 이야기를 연재할 때 한동안 그를 자주 만났다. 내가 꼬부랑 글씨라고 명명한 그의 원고에 알아보기 힘든 부분이 꽤 있었고, 간혹 문장과 문맥에 연결되지 않는 대목이 나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가 칠십을 바라보는 연배와 묵직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매우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재하던 글에도 그런 기질이 나타나곤 했지만 그 무렵 출간된 그의 자전적 문단 회고록 진리와 현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예를 들면 1935년의 이런 대목이다. 당시 이화여전의 음악교수로 있던 안기영이 제자인 김현순과 사랑에 빠져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외국으로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인 일이 있었다.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들 남녀의 불륜과 부도덕을 지탄하는 비난의 화살이 마구 쏟아졌다. 특히 미션스쿨인 이화여전 당국과 기독교계에서는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저주를 퍼부었다. 신문들이 연일 그들에 관한 독설로 도배질하는 가운데 백철은 크게 분개했다. 백철은 속물주의적인 기성의 도덕관을 비판하고 그들 남녀를 옹호하는 60장 분량의 글을 써 종합월간지 중앙에 보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사랑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제 간이라고 해서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 애정 없는 가정은 감옥인데 그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이 글이 실리면서 이번에는 백철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렸다. 어떤 목사는 백철은 악마의 화신이며 영원히 구제받지 못할 것이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그로부터 3년쯤 전 개벽지에 근무할 때 여류 작가이며 기자인 송계월과의 자유연애로 문단의 화제가 된 적도 있었지만 백철의 진취적 기질은 이미 청년 시절부터 몸에 배어 있었다. 1908년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백철은 어렸을 적부터 두뇌가 명석해 신의주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도쿄 고등사범 문과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했다.

 

재학 중 바이런, 셸리 등 영시를 탐독하고 습작으로 시를 쓰던 백철은 3학년 때 마르크스주의에 매료돼 나프(NAPF·일본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입한다. 그때부터 일본어로 시와 이론을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한 백철은 1931년 귀국해 개벽의 기자로 일하면서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입해 중앙위원이 된다. 국내에서의 데뷔작은 평론 농민문학의 문제였다. 그의 문학적 생애에 전환점이 된 것은 1934카프’ 2차 검거 때 체포돼 1년 반 동안 투옥됐다가 풀려 나면서부터였다. 프로문학에서 우파 성향의 문학으로 전향한 것이다.

 

1935년의 이른바 휴머니즘 논쟁때 좌파를 공격하고 우파를 옹호하는 글을 쓴 백철은 프로 계열의 문인들로부터 호된 공격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과의 인간관계마저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사교적이며 소탈한 성격 덕분에 백철은 문단에 두터운 친분을 쌓은 문인이 많았다. 고향 후배인 정비석을 비롯해 김동리, 최정희, 박화성 등과 한때 카프활동을 함께한 임화, 한설야, 김남천 등 좌파 문인들이었다. 특히 임화와의 우정은 유명해서 임화는 백철이 전향했음에도 이념보다는 우정이라며 백철을 감싸기도 했다.

 

그때의 전향을 시작으로 그 이후 백철의 잦은 변신은 두고두고 그에게 오점으로 따라다녔다. 1939년부터 일제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로 일하면서 창씨개명을 하고 친일의 글을 발표하는가 하면, 광복 뒤에는 좌익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기관지 문화전선의 편집을 맡은 일 따위가 그렇다. 6·25전쟁 때는 피난을 가지 못해 조선문학가동맹의 신분증으로 납북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후 학계와 문단에서 백철의 위상이 쉽사리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1세대 비평가로서 그가 이룩한 업적을 뛰어넘을 만한 것이 거의 없고, 그에 필적할 만한 후진을 찾아보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1957년 미국에 건너가 1년 동안 예일대와 스탠퍼드대에 교환교수로 다녀온 뒤 뉴 크리티시즘’, 곧 신비평 이론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면서 그의 위상은 더욱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사실 문학평론가로서 백철의 존재는 광복 이후 오랜 세월 동안 후진들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었고,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조연현이 몇몇 글 속에서 조심스럽게 백철의 이론에 반기를 든 것이 그 출발이었다. 특히 195622세의 이어령이 그의 첫 평론이라 할 수 있는 우상의 파괴에서 백철을 비롯한 선배 평론가들을 싸잡아 폄하한 것은 세대교체를 요구하는 신호탄의 의미가 있었다.

 

문단의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게 된 것은 그가 신문이나 문예지의 문학월평을 도맡다시피 한 데다 그의 인정을 받아야 행세하는 등 평단을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실수는 말할 것도 없고 다소의 편향적 시각도 용납되지 않았다. 1960년 말 최인훈의 광장과 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 대한 백철의 월평은 오독(誤讀) 혹은 작품 해석상의 문제 따위를 놓고 정비석, 황순원, 서기원, 강신재, 신동한 등 후배 작가, 평론가들로부터 집중 포화를 받기에 이르렀다.

 

 

30대의 평론가 신동한은 논전 중 50대를 갓 넘어선 그를 백철옹()’이라고 지칭했다. 지금 같으면 야유라고 했겠지만 그 지칭에는 얼마간 권위의 뜻도 포함돼 있었다. 어쨌거나 백철은 1962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위원장 직에 올라 그 권위에 힘을 보탰다. 1970년대 막바지 회장 직을 모윤숙에게 물려줄 때까지 백철은 20년 가까이 그 자리를 굳게 지켰다. 펜클럽의 정관은 2년마다 임원을 개선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후배들의 우회적 퇴진 압력에도 그는 못 보고 못 들은 체 꿋꿋하게 버텼다. 그래도 1970년 제37차 국제 펜대회 서울대회 대회장으로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른 것은 그의 큰 업적으로 꼽혔다. 일선에서 물러난 1980년대 이후에도 백철은 글을 쓰고 강의에 나가는 등 노익장의 왕성한 활동을 계속했으나 19851077세를 일기로 파란의 삶을 마감했다.

 

    

 

 

 

 

 

백철(白鐵)과 일본 동경의 지상낙원(地上樂園시대

비평가 백철(1908-1985)의 동경 시대는 1927년부터 시작된다. 그가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입학한 것이 바로 그해이며, 그때부터 그의 문학 수업이 이루어진다. 그는 동경고등사범 2학년 때부터 시인을 꿈꾸며 시 전문지 시신(詩神)을 구독하고 학교에서 간행하는 교우지에 시를 발표하기도 한다. 그의 시가 일본인 문학도들의 눈에 띄게 되면서 처음 대면하게 된 일본 동경의 문단 풍경은 백철의 자서전 진리와 현실(박영사, 1975)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시라가와[白川 *백철의 동경고사 동창생]의 안내로 민중 시인이라고 이름한 시라도리 쇼오고[白鳥省吾]의 문을 두드린 것도 이 무렵(*1929년 백철이 동경 고사 3학년에 재학하던 시절)이다. 시라도리 쇼오고는 지상낙원(地上樂園이라는 시지(詩誌)를 동인제로 간행하고 있었다. 시라도리는 그때 후꾸다(福田正夫) 등과 함께 휘트먼의 시풍을 따라 일본의 민중시파를 이끄는 권위같이 알려져 있었고, 저널리즘에선 한물 가버린 인상을 주는 기성파의 한 사람이었다. 시라가와는 전부터 시라도리 쇼오고씨와 안면이 있는 듯했다. 그는 나를 조선 출신의 젊은 문학 재사라고 추천 소개했다. 그때, 시라도리 쇼오고씨는 내개 김소운을 아느냐고 물었다. 김씨가 한때 지상낙원의 동인이었다는 말과 일본어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일러 주었다.

 

나는 찾아간 날로부터 지상낙원의 동인이 되었고, 그 동인의 자격으로 시편을 동시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동인 중엔 치바현[千葉縣] 출신으로 미즈하라[水原 * 백철의 자서전에 나와 있는 이 시인은 이름은 잘못된 것임. 市原이라는 이름임을 시 작품 <송림 松林>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음]라는 교원 시인이 있어서 나와 가깝게 사귀게 되어 치바 현으로 놀러간 일도 있는데, 치바 시 근방의 임업 시험장에서 취재한 <삼림(森林)> (* 이 작품의 제목은 송림으로 되어 있는데, 백철이 잘못 기억하고 있다. 19306월에 발표하였다.)이란 내 시편이 평판작이 되었다. 하늘을 뻗치듯이 자라나는 신록의 수림에다가 야망에 찬 청춘의 정렬적인 이미지를 오버랩시켰던 것이다. 발표된 동인의 시편들에 대한 월평적인 시평문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내가 지상낙원에 동인으로 머문 것은 약 일년간, 차츰 이 지상낙원파에 대하여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거기 모인 시인들은 대개가 농촌 자연을 따르는 전원파로서 젊은 사람들의 눈에는 그 시풍이 낡아빠진 것을 감촉하게 되었을 뿐더러 내가 개인적으로 더 그들을 경멸하게 된 동기는 동인회 같은 것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생활과 시에 대한 태도나 취미가 한인적(閑人的)인 안이성의 것으로 도무지 진지한 경건성을 느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예를 들면, 모임 뒤에 회식 같은 것을 할 때만 해도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의 내용이 진취적인 진지한 것이 없고, 마치 일본인의 만자이[漫才]와 같이 재담을 경쟁하는 것같은 이야기들이 내 비위에 거슬라고 구역질나는 기분이었다. 아마 이것은 이때 벌써 나는 그 시대 풍조인 마르크시즘의 사상에 물들어가는 증거의 반영일는지 몰랐다. 왜 그러냐 하면, 나의 고사 3학년, 그러니까 1929년 경부터 나는 어느 새 마르크시즘의 근처를 드나들고 있었던 것이다.

 

교내에서 열리는 R.S라는 데도 가 앉아보고, 자본론같은 것도 뒤쳐보고, 그들의 사회 활동에도 관심을 가져보고, 그쪽에서 동정하는 좌익파의 급우들과도 접촉하는 일이 많게 되었다. 조선 사람과 같이 특수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로서 먼저 그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것은 그들의 인간적 태도였다. 그들에겐 민족적인 차별 의식이 전혀 없고 동등한 종지의 입장으로서 대해오는 그 태도에 친근미가 느껴졌다. 오직 도오시[同志]’라는 말이 그들의 계급적인 단결을 약속하는 평등의 호칭이었는데 이런 것들은 내게다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하였다. (140-142)

 

백철이 처음으로 만났던 일본 동경의 문단 풍경은 앞의 인용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학생 신분으로 백철이 처음 발을 내딛게 된 동경 문단의 지상낙원은 무엇인가?

 

일본 근대문학관에서 펴낸 일본근대문학대사전을 보면, 지상낙원에 대해 다음은 내용의 해설이 붙어 있다. 지상낙원은 시 전문지로서, 동경 대지사(大地舍)에서 1926(대정15) 6월에 창간되었다. 1938(소화 13) 4월에 통권 87호로 종간되었다. 시라도리 쇼오고가 편집을 담당하였으며, 국정순일(國井淳一), 월원등일랑(月原橙一郞) 등이 동인으로 참가하였다. 민요의 창작과 보급에 힘썼으며, 지방 문화 의 향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 시 잡지를 주간한 시라도리 쇼오고는 와세다 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1914년 경부터 시 창작활동을 하였으며, 시에 민주주의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국가 권력에 대결하여 이를 비판하는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다. 그는 민중시 운동의 적극적인 실천가로서 소박한 정서를 바탕으로하는 평이하고도 주조가 분명한 시들을 발표하며 주목의 대상이 되었고, 시집 대지의 사랑, 공생의 깃발, 낙원의 도상등을 내었다.

 

백철이 시 전문지 지상낙원에서 활동한 것은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일년 동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잡지에서의 창작 활동을 기반으로 백철은 곧바로 동경에서 전위시인일본프롤레타리아시인회등의 좌익 문단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상낙원시절의 백철의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동경의 일본근대문학관에 보관 중인 시 잡지 지상낙원을 보면, 백철이 여기에 발표한 작품은 시 9, 비평 2편이다. 작품들의 서지 사항을 밝혀보면 다음과 같다.

 

<시 작품 목록>

った(우박이 내리던 날), (411, 1929, 11)

(누이여), (412, 1929, 12)

彼等だつて......(그들 또한 ......), (51, 1930, 1)

追悼(추도) (53, 1930, 3)

隅田川, 夕陽(스미다가와, 석양) (54, 1930, 4)

Xされた仲間( X당한 동무에게) (55, 1930, 5)

鷗群(해오라기 떼) (55, 1930, 5)

Xはれた同志 (봄과 X당한 동지) (56, 1930, 6)

松林(송림) (56, 1930, 6)

 

<평론 목록>

プロレタリア現實問題について(프롤레타리아시의 현실문제에 관하여) (55, 1930, 5)

プロレタリア詩論具體的 檢討(프롤레타리아시론의 구체적 검토) (56, 1930, 6)

 

백철이 지상낙원시대에 발표한 시 작품들은 모두 격렬한 투쟁적인 구호로 일관되어 있다. 그는 궁핍한 재난에 허덕이는 농민들의 삶의 참상을 시 <우박이 내리던 날>에서 그들은 이렇게 완전히 빈털털이가 되어버렸다./빼앗길 것은 이것저것 모두 줘버리면 된다./가엾게도 그들이 자작농이나 소지주를/꿈꿔온 작은 희망은 이젠 사라지고,/말없이 쓰러져있는 벼의 잔해를 바라보고 있다./?그들은 지금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나는 그것이 답답하다.”고 노래하고 있다. 노동자로 전락하여 일본으로 흘러 들어오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고초를 그려 놓은 시 <그들 또한>에서 몇번이고 베어도 묵묵히 자라나는 잡초처럼/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현해탄을 넘고 있다./그것이 지금에는/가는 곳곳의 길가에 보이는 잡초처럼/일본의 어느 시골에서도 여기저기/때 묻은 흰옷이 눈에 띈다.”고 적고 있다. 이같은 백철의 현실 인식은 당시의 조선인 유학생의 입장으로서는 유별난 것이었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강한 반발을 담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백철의 현실 비판 의식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향해 열리고 있는 것은 <추도><스미다가와, 석양> 등의 시에서 암시하고 있는 노동자의 단합된 힘을 추구하는 정신에서 찾아진다. 노동 운동을 선도하다가 체포되어 죽음을 맞게된 동료의 희생을 추모하는 <추도>의 경우, 단결과 투쟁으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새로운 각오를 보여주고 있으며, 노동자들의 고통이 어린 스미다가와 강물을 바라보면서, “모두다 여기 와 보라./어느 곳에 과연 평화가 있는가./어디에 아름다움이 있는가!/이처럼 수면이 두꺼운 원한의 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도,/모두, 가난한 이들의 죄라 할 것인가.”라고 절규하고 있다. 이러한 절규는 <X당한 동무에게>에서 작업 중 고장난 기계의 철판을 맞고 죽어간 노동자의 희생을 놓고 분개하는 장면에서 극치를 이룬다. 그리고 이 비극의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노동자의 단결과 복수의 의지를 강지한다.

 

백철의 시 가운데 고양된 의식의 시적 형상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은 <갈매기떼><송림>을 들 수 있다. 바닷가에 몰려드는 갈매기떼를 노동자의 무리로 환치시키고, 서녘 하늘로 넘어가는 붉은 태양에 물드는 대지를 보며, 평화와 자유와 평등을 꿈꾸는 청년 백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시 <송림>의 경우는 이미 앞에 인용한 자서전에서 당시에 평판작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거니와, 우거진 소나무 숲에서 견고하게 서로 어깨를 나누면서 곧게 자라는 나무를 보며, 전진하는 노동자들의 강인한 투쟁 의지를 발견하고 있다.

 

이러한 백철의 시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에서 볼 때, 우리 시문학사상에서 보기 드믄 사례에 해당한다. 우선, 이 작품들이 1929, 30년에 동경에서 발표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당시 일본 동경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동경지부가 존재하였으며, 그들이 <무산자>사를 설립하고 이를 근거로 조선공산당의 재건 운동을 꾀했던 것이다. 백철은 이들 조선인 프로 문단과는 관계없이 일본 문단에서 일본인들을 상대로 극렬한 투쟁적인 저항시를 일본어로 발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작활동을 통하여 그는 다시 좌파 시동인지인 전위시인에 가담하였고, 다시 일본프롤레타리아시인회의 중요 구성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우리 문학인들이 일본어로 쓴 작품들이 대부분 친일적인 경향에 빠져들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백철의 시작품들은 일본어를 바탕으로 성립된 식민지 문화에 대한 색다른 문화적인 도전에 해당하는 셈이다.

 

백철은 지상낙원에 두 편의 평론을 발표하였다. 그가 관심을 두고 있던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시의 형식 문제이다. 그가 1930년 이후 전위시인프롤레타리아시등의 잡지에 이른바 슈프레히콜이라고 명명된 집단 낭창시의 형태를 처음으로 소개하여 일본 프로 시단에 정착시켰던 것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그는 지상낙원시대부터 프로시의 형식 문제에 관하여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가 발표한 두 편의 평론이 모두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백철은 프롤레타리아 시의 현재 문제를 제재의 탐구와 형식의 탐구라는 두 가지로 구분하여 검토하고 있다. 그는 프로 시에서 제재의 탐구는 당면한 현실 운동에 기초할 것을 주장한다. 1928, 1929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운동가들에 대한 대검거 이후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침체에 빠져 있는데, 과거의 실패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운동 방향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시가 새로운 운동의 전개 방향에서 하나의 무기가 될 필요가 있음을 주목하면서,특히 자본가의 횡포에 대응하기 위한 스트라이크시를 제작해야 한다고 하였다. 프로 시의 형식은 자유시의 비대중성을 극복하고 노동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가 되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백철의 견해다. 백철은 노동 대중의 생활 감각을 살릴 수 있는 음악성을 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백철의 주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시론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새로운 시형식의 창조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당시 일본 문단의 일각에서 제기된, 프로시의 대중성 확보를 위해 민요시의 차용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에 대해 백철은 생활 감정의 변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우선 문제삼을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프로 서사시에 대해서도 공장과 기계를 상대로 하는 무산 대중의 생활감각이 과연 과거 서사시의 집단적 정서와 같을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오히려 무산 대중의 생활 감정을 살려낼 수 있는 새로운 힘있는 서정시의 구현이 중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백철은 1931년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지만, 당연시되었던 일본 중학교 교사 직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은 선택한다. 그것이 바로 국내 문단으로의 진출이다. 3년 동안 투쟁적인 시인으로서 쌓아올린 동경 문단의 경력을 안고 1930년대의 우리 문단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졸업 후 귀국을 늦춘 그가 동경의 하숙에서 탈고한 야심적인 평론 <농민문학 문제>가 조선일보에 발표된것은 193110월이며, 그의 새로운 문학적 인생도 이 평론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지상낙원에 발표된 백철 시 작품은 모두 일본 동경의 <일본 근대문학관>의 도움을 얻어 찾아내었다. <일본근대문학관>의 관계자께 고마음을 표한다. 그 가운데 두 편을 초역하여 여기 소개한다.

 

<우박이 내리던 날>

구름 구름 구름 구름

무수한 구름떼가 대군처럼 밀려간다.

……

?굉장한 구름이군!?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제기럴, 또 내리려누나,

내리는 것도 좋지만, 우리에겐 생사가 걸린 문제다.?

얼마전 그 홍수의 광경이

여윈 형의 옆얼굴에 창백하게 비쳤다.

큰비! 홍수!

다리가 떠나가고 가옥이 뒤집히고

가엾은 짐승들은 비명을 지르며 거친 물살 속으로 휩쓸려들어간다.

그리고, 논밭은 물에 잠기고 벼는 모두 썩어버렸다.

?오늘밤도 또 그럴까??

나는 불안하게 형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번개가 지하의 다이나마이트처럼 꽝하고 울렸다.

그리고 그것을 뒤따르듯 우르르꽝하고 울려오는

천둥!

우리는 모두 함께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뜰로 뛰어내려갔을 때

불가사의한 하얀 포탄이 수없이 흩어져 있었다.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소녀가 용감히 폭탄을 맞았던 것처럼,

어머니는 마을을 구하려는 생각에 그 불가사의한 우박을 입에 집어넣었다.

-조선의 전설에

(그것은 나의 먼 어린 시절 어느 날의 기억 속에 있었다.)

내리기 시작하는 우박을 부인이

주워먹으면 갑자기 멎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그렇게 멈춰설 것이 아니였다.

순간순간 세력은 커져갈 뿐이다.

1, 2, 30

- 그것은 얼마나 오랜 시간이였을까.

?제기럴! 멋대로 쏟아져라?

형이 투덜거리자 곧 우박이 멈췄다.

그런 것을 알아차리기도 한 듯 딱 멎어 버렸다.

서쪽으로는 어처구니없게도 푸른 하늘까지도 보였다.

?벌써 농작물은 다 휩쓸려 버렸다?

형의 얼굴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문앞으로 두세명의 젊은 농부들이 격분한 어조로 무언가 떠들어대며 지나갔다.

우리들도 어떤 무서운 예감에 휩싸여

그들의 뒤를 따라 들로 나갔다.

겨우 30!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겨 버렸다.

오늘 점심때 까지만 해도 솩솩, 파도치던 논과 밭이였는데,

벼잎 하나 남김없이 깨끗이 쓰러져 있었다.

단지, 퍼어런 벼 줄기만이 보기 흉하게 쓰러져 있을 뿐이다.

어느 것 하나 수리가 정돈 되지 않은

이 농촌.

옛 원시인들이 하던 그대로의 경작법으로,

어제는 내려쬐는 햇볕으로 가뭄이 들고, 오늘은 홍수로 떠들썩해 있는 그들

단 하루만이라도 편안한 밤을 맞이해 본 날은 없다.

그래도 살아가는데 이 길밖에 없다고 여기는 그들은

몇번이고 몇번이고 삽과 괭이를 다시 든다.

그처럼 힘들이고 고생하여 겨우 키워논 작물들이었거늘.

오늘은 또 이와같은 뜻하지 않은 재난이 엄습해 왔다.

아아- 말끔히 걷혀진 저녁 하늘

그들은 이렇게 완전히 빈털털이가 되어버렸다.

빼앗길 것은 이것저것 모두 줘버리면 된다.

가엾게도 그들이 자작농이나 소지주를

꿈꿔온 작은 희망은 이젠 사라지고,

말없이 쓰러져있는 벼의 잔해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

나는 그것이 답답하다. (1929.11. pp. 38-39)

 

<누이여>

누이여.

아니, 아름다운 한 사람 소지주의 따님이여.

너는 잘도 그런 건방진 말을 할 수가 있었구나.

그 소작인의 딸들은 얼마나 더러운지 몰라요.

마치 우리들과는 종자가 틀린

돼지새끼들처럼

일생, 한번도 씻어 본 일이 없는 듯한 흙투성이의 얼굴

누덕누덕 기어입은 옷.

그런데다 특유의 악취까지 풍기는

저는 그녀들 근처에 가는 것조차 싫어요.

그러기에 저는 미친듯이 소작인들을 위해 일하는 오빠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어요……라고.

 

누이여,

네가 하는 말은 정말이다. 아니 사실이다.

그러나 누이여,

네게 그런 경멸의 마음을 갖게 할 정도로 그녀들을 천하게 만든 놈은 누구인가.

돼지새끼로까지 그녀들을 타락하게 만든 것은 어느놈인가.

그녀들로부터 입을 것 먹을 것을 빼앗은 자들은 어디의 어느놈인가.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너 또한 그 중 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네가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될 정도로 너를 아름답게 만들어 준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네게 그 화려한 옷과 네 소중한 화장품을 만들어 준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저 안락의자에서 잠들고 있는 너의 부친이나 그외의 자본가들은 단 한번이라도 삽이나 괭이를 쥐어 본 일이 있는가.

그녀들은 영하 20도의 겨울이라 해도 불타오르는 듯한 여름이라 해도,

단 하루라도 편안히 지낼 시간을 갖지 못한다.

첫새벽 5시부터 일어나 발밑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분주히 일하는 그녀들이다.

그럼에도 제대로 밥조차 먹지 못하는 그녀들이 아닌가.

새로 베옷 한벌 만들지 못하게 지주들이 전부 거두어 간다.

그런데-

너는 지주의 딸이라 하여

매일-

아침에는 마음껏 늦잠을 잘 수 있고,

끼니 때마다 달고 맛있는 것을 실컷 먹을 수 있고,

하루에 몇 번이고 아름다움에 실증날 정도로 화장할 수가 있다.

(그것은 정말 따분한 생활이련만)

이것이 너의 자랑스런 생활 모습이다.

 

누이여

이래도, 너는 나의 일하는 마음을

모르노라 하겠는가.

너는 너와 너의 벗들만이 깨끗한 인종이라고 정하고 있구나.

그러나 그 소작인의 딸들에게도 너의 화려한 옷과 화장품을 주어보렴.

분명히 너 이상으로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돼지 새끼들 같은 그녀들을 너 이상의 아름다운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너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누이여,

너는 이러한 마음이 헤아려지지 않노라 할 수 있겠는가. (1929.12. p.28)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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