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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미술학교 우등생이 친일에도 우등, 김인승 (金仁承)

草霧 2013. 12. 10. 12:07

 

 

 

 

 

음악·미술

    

 

김인승 (金仁承일본명 金城仁承, 19102001)

 

 

 

 

도쿄미술학교 우등생이 친일에도 우등

   

 

친일 미술가 김인승 (金仁承)의 작품, "간호 병 (1944)"

 

 

 

1940'선전' 추천작가

1941년 조선미술가협회 서양화부 평의원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 덕수궁상

1937~1940년 조선미술전람회 연4회 특선

1939년 개인전, 삼원화랑

1947~1972년 이화여대 미대 교수 및 학장

1949~1981년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운영위원

1953년 제3회 국전 대통령상

1955~1958년 대한미술협회 부이사장

1957~1988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63년 제5회 대한민국문화훈장

1965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66년 이화여대 명예 문학박사학위 취득

1967~1970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위원

1967년 국제조형미술 한국위원장, 국제미전(브라질 상파울루)

1967년 제5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19683·1문화상

1969년 대한민국문화훈장동백장

1971년 개인전, 현대화랑

1973년 개인전, 아넥스갤러리(일본 동경)

1976년 개인전(미국 로스앤젤레스)

1990년 개인전, Simmonson Gallery (미국 로스앤젤레스)

 

작품<정물>(1936) <여인누드>(1936) <자화상>(1937) <나부>(1936) <화실>(1937) <실내>(1937) <인천항>(1938) <나부(裸婦)>(1938) <문학소녀>(1938) <덕수궁(德壽宮)에서>(1939) <촉석루>(1940) <여인좌강>(1941) <여인상>(1942) <독서하는 여인>(1942) <춘조(春調)>(1942) <무희>(1946) <조모상(祖母像)>(1947) <독서하는 여인>(1953) <홍선(紅扇)>(1954) <도기(陶器)를 다루는 소녀>(1955) <무대 뒤>(1955) <소녀>(1957) <들장미>(1964) <향원정>(1964) <()>(1966) <초하>(1972) <소년상>(1972) <모부인상>(1972) <장미>(1973) <백장미>(1985)

 

김인승(金仁承, 일본식 이름: 金城仁承, 1910년 1월 19일 ~ 2001년 6월 20일)은 한국의 서양화가로, 호는 지연(智淵), 본관은 김해이며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이다. 경기도 개성의 지주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는 6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바로 밑의 동생이 조각가 김경승이다. 김인승과 김경승 형제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김인승이 먼저 1932년 도쿄로 유학하여,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했다. 1937년 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부(裸婦)〉로 최고상을 수상했다. 초기의 작품 경향은 데뷔작 《나부》와 같이 사실적인 여성 인물화 위주였다.

 

그러나 김인승이 작품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은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8년간 전쟁을 치르던 기간이었다. 그의 인물화에도 정치색이 짙게 깔리게 되었다. 이 기간 중 김인승은 〈간호병〉(1944),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1943) 등 친일 작품들을 남겼다. 수채화인 〈간호병〉은 조선식산은행 사보인 《회심》(會心)의 속표지화로, 군복 차림의 일본군 간호병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는 친일 미술인 모임인 단광회에서 집단 제작한 대작이며, 전쟁 지원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대표적인 친일 미술 작품이다.

 

1940년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 2600년 봉축기념전'에서 입선하였고, 몸은 비록 후방에 있지만 미술로서 전쟁을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열린 시국 전람회 반도총후미술전람회에 추천 작가로도 이름을 올렸다. 김기창, 심형구, 장우성 등이 반도총후미술전의 추천 작가들이다. 그는 이들중 심형구와는 도쿄미술학교 시절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동생 김경승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어용 친일 단체로 당시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인 계광순이 이사장을 맡은 조선미술가협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서양화부 평의원이었고, 김경승은 조각부의 평의원을 맡았다. 이 단체는 다른 분야 친일 예술 단체와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로 들어가 전람회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는 일도 하였다.

 

특히 김인승은 일제 강점기 동안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표기할 때 일본식 독음에 따라 'Jinsho, Kin'이라고 적었고, 연도는 황기로 적어넣는 등 자발적인 친일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와 같은 경력으로 광복 후에 적극적인 친일 미술인으로 꼽힌 김인승은 조선미술건설본부 창설 때 배제되는 등 잠시 활동에 제약을 받았으나, 친일 청산 문제가 흐지부지되면서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어 이후 학장을 지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 작가 및 심사위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제조형예술협의회 한국위원장 등으로 한국 화단의 대부로 활동했다. 특히 서양화의 구상 계열에서 그의 영향력은 컸다.

 

1968년3·1문화상을 수여받았고, 1974년 이후로는 미국으로 이주해 활동했다. 말년에는 〈들장미〉(1964), 〈장미〉(1973), 〈백장미〉(1985) 등 장미와 모란을 주로 그렸다. '장미의 화가'라는 별칭은 이같은 후기 작품 경향에서 얻어진 것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미술 분야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조선미술가협회
  • 단광회
  • 한국미술협회
  • 김경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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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풍경(京城風景)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조각과  최초의 조선인, 이승만 동상의 동상 제작 전문가

     

     

    김경승[金景承/1915.7.18~1992.2.16]

    조각가, 서양화가. 김인승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겸 고문의 아우

    김경승(金景承, 일본식 이름: 金城景承, 1915년 ~ 1992년 2월 16일[1])은 한국의 조각가이다. 아호는 표천(瓢泉).

    경기도 개성의 지주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서양화가 김인승이 친형이다. 김인승과 김경승 형제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먼저 유학한 형을 따라 김경승도 1934년 도쿄 미술학교에 유학했다. 유화과에 다니는 김인승과는 달리 조각과에 입학하였는데, 이 학교의 조각과 학생으로는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고 1943년에는 추천 작가가 되었다. 추천 작가로서 출품한 작품까지 선전에 총 다섯 점의 인물 조각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마지막 작품인 〈제4반〉(1944)이 애국반원인 조선 여성을 묘사하는 등 작품 전부가 일제의 구미에 맞는 시국성을 띠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2] 관변 조직으로 결성된 친일 미술인 단체 조선미술가협회에서 조각부 평의원을 맡기도 했다.

     

    이같은 행적으로 인해 광복 후에는 비슷한 경우로 친일 혐의가 뚜렷하던 김은호 등과 더불어 조선미술건설본부 결성 때 제외되었다. 그의 형 김인승도 같은 이유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이순신, 안중근, 더글러스 맥아더 등과 현직 대통령인 이승만의 동상을 제작하면서 동상 제작 전문가로서 활동을 재개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로는 좀 더 정부와 유착한 행보를 보였다. 수유리의 사월학생혁명기념탑을 건설하여 3·1문화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동상을 제작했다. 불국사다보탑석가탑을 복원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이화여자대학교홍익대학교 교수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조각계와 미술계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5공화국 때는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을 지냈으며, 은관 문화훈장(1982)을 수상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미술 분야에 선정되었다.

     

    주요기념동상 대표작으로 〈이충무공동상(부산, 통영)〉, 〈맥아더장군상(인천)〉, 〈밴프리트장군상〉, 〈코울터장군상〉, 〈안중근의사상〉, 〈김성수선생상〉, 〈김활란박사상〉, 〈세종대왕상〉, 〈김구선생상〉, 〈김유신장군상〉이 있으며, 작품으로 〈목동〉, 〈유(流)〉, 〈희망〉, 〈사색〉, 〈평화〉, 〈정(靜)〉 등이 있다.

  • 조선미술가협회
  • 국립4·19민주묘지
  • 김인승
  • 김경승(金景承) - 한국학중앙연구원
  • 남산 백범 동상을 바꾸어야 하는 이유 - 미술가 김인승·경승 형제

     

     

     

     

     

     

     

     

     

     

    당대 화단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왜색풍의 솜씨

    김인승은 동생인 조각가 김경승과 함께 친일파로 활약한 화가이다. 그의 반민족적 활동상은 심형구*와의 두터운 친교 속에서 서양화 분야의 쌍벽을 이룬다.

     

    인삼밭을 경영하던 개성의 지주 집안 출신인 김인승은 어려서부터 그림 재능이 특출하였다. 보통학교나 개성공립상업학교 재학 시절 학생미술전에 늘상 입상하였고 그 재능을 살려 도쿄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였다(1932).

     

    첫해에는 떨어져 가와바다화학교(川端畵學校) 과정을 거친 후 합격하게 된다. 도쿄미술학교에서 한 해 전에 입학한 심형구와 만나 단짝이 되어 '선전'(朝鮮美術展覽會) 출품과 친일활동부터 광복 후 이대 교수 역임까지 반평생을 같이하게 된다.

     

    김인승은 심형구와 함께 이미 재학 시절부터 도쿄의 문부성미술전, 광풍회전 등에 출품하여 그 탁월한 기량을 한껏 펼쳐 보였다. 김인승은 도쿄미술학교 유화과를 졸업(1937)할 때 평균 학점이 98점이라는 학교 최고의 점수를 받을 정도로 우등생이었다고 한다.

     

    우등생답게 졸업하던 해 제16'선전'(1937)에서 [나부](裸婦)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의 영광을 안았다. 이후 네 번 연속 특선하여 1940년 추천작가에 오르게 된다. 이 때 서양화 분야에서 추천작가로 오른 조선인 화가는 심형구와 이인성뿐이었다.

     

    연구과정까지 수료(1939)한 후 귀국한 김인승은 심형구가 정치적 활동에 열심이었던 데 비하여 주로 개인전과 단체전을 통한 작품활동에 매진하였다. 김인승의 유화들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견실한 대상묘사 실력을 기반으로 하여 마치 1719세기 서양의 고전적 아카데미풍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화면 운용이나 대상 포착, 색채감각 등이 최우수 점수를 받을 만큼 일본화된 초기 자연주의풍의 유화기법에 충실한 데서 나온 결과였다. 당대 화단에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왜색풍의 솜씨였다.

     

    김인승의 그처럼 엄격한 소묘로 그린, 군국주의 색채가 농후한 작품으로는 조선식산은행 사보 {회심}(會心)지의 속표지화 [간호병](1944. 1)이 있다. 진한 연필소묘에 수채화로 그린 측면 반신상은 적십자 완장을 찬 군복차림의 여인 모습이다.

     

    건강한 미모에 쌍꺼풀진 갈색 눈, 오똑한 코, 야무지게 다문 두툼한 입술에 '성전'에 봉사하는 간호병의 결연한 표정이 역력한데, 이 세부묘사법과 홍조 띤 얼굴색감이 김인승 인물화에 나타나는 전형을 보여 준다. 이 여인상은 서구화를 지향하는 당대의 일본 미인형이기도 하다.

     

    특히 이 그림의 왼편에는 '황기(皇紀) 2603'이라는 제작 시기를 써 넣었는데, 김인승은 이미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 2000(1940) 봉축기념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경력이 있었다. 그처럼 제작 연대를 '황기'로 쓴 것만 보아도 김인승의 친일의식이 얼마나 극명했는지 짐작케 한다.

     

    또 김인승은 일본 '문부성미술전'에 입선한 [나부](1936)'선전' 출품작에 작가 사인을 'Jinsho, Kin'이라고 하여 자신의 이름을 일본어 발음으로 읽어 영어로 써 넣었다. 도쿄미술학교 98점짜리 우등생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일제 말기의 가장 선도적인 친일미술인 소모임인 '단광회'(丹光會)에 심형구, 박영선, 김만형, 손응성, 이봉상, 임응구 등 조선인 화가를 선도하며 참여하였다. 단광회는 '성전하(聖戰下) 미술보국(美術報國)에 매진한다'는 취지로 19432월에 당시 경성에 와 있던 일본인 화가를 포함하여 19명으로 꾸려졌다. '선전' 추천작가 중심의 최고 엘리트 화가 집단이었다.

     

    '미술보국'을 위한 대표적인 실천 사례는 19438월 조선인 징병제가 시행되자 합작으로 기념 기록화를 제작하여 경성과 평양에서 순회전을 가진 일이다.

     

    19명이 4개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조선징병제시행기념 기록화]'근대 반도사의 일면을 반영하는 대단히 큰 감명을 일으킨 역작'이라고 평가받았다. 내용은 징병 소집된 조선 청년을 중심으로 소집자를 전송하는 비행기를 든 소년, 그리고 조선군 보도부장, 지원병 훈련소장, 총력연맹 사무국장, 친일파 윤치호*, 경기도지사 등 구체적인 인물들을 배치해 놓은 것이다.

     

    이들 주요 근경 인물들의 주변에는 서울 풍경과 남산의 신사(神社), 병사들의 행진, 시민들의 환송 장면을 그려 넣었다.

     

    일제 말 가장 손꼽히는 전쟁선양의 친일작품이다. 이와 함께 김인승은 친일미술 단체활동에서도 심형구 못지않게 적극적이었다. '조선미술가협회'의 서양화부 평의원, '반도총후미술전'의 추천작가로 참여한 점 등이 그러하다.

     

     

     

    - 친일 미술인과 작품 -

     

     

     

     

     

    조선인들을 전쟁에 참여시키는 선전 교화논리로 미술을 이용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친일 미술인들의 작품을 엮어보았다. 이 자료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개최한 '식민지 조선과 전쟁미술전'을 정리한 것이다. <민중의소리>는 지난해 부산민주공원 열린 '식민지 조선과 전쟁 미술전' 관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전시회에 참가한 시민들의 반응에 대해 물었다. "일제의 만행과 친일의 과오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됐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전시장을 찾아온 많은 관람객들은 이렇게 유명한 작가들이 친일 미술인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다"면서 "하루 빨리 친일의 역사를 청산해서 삐뚫어진 민족관를 올바르게 세우길 바랬다"고 전했다.

     

    친일미술의 전모

    일제는 '총후직역봉공'을 조선인들에게 강요하고 후방에서 일제의 침략전쟁 후원을 요구한다.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찬미하고 헌신할 대규모의 이데올로기 조직 만들기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피억압민족의 동조를 얻기란 힘들 일. 이들은 조선인들의 전쟁참여와 수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교묘한 선전논리를 펴간다. 이른바 대중적 영향력이 큰 문화예술 분야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거 동원하는 것이다.

     

    이에 조선 미술인들은 일제의 '신체제운동'에 협력하기 위해 '조선미술가협회'를 만들고, 1943'단광회'를 조직하여 조선징병제실시 기념화를 제작하는 등 일제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게 된다. 이들의 활동으로 조선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제의 전쟁에 나가 총알받이가 됐다는 것은 친일 미술이 얼마나 위험하고 반민족적, 반인륜적 범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대표적인 친일 미술인 작품 목록

    김인승=조선미술가협회발기인, 평의원. 반도총후미술전초대작가, 결전미술전 심사위원. 구신회, 단광회 회원. 조선미전 창덕궁상. 국전 심사위원, 예술원 회원, 한국미협이사장, 이화여대 교수. 3.1 문화상, 문화훈장 동백장.

        

     

     

    간호병 1941.1

     

    이 작품은 적십자 완장을 차고 국방색 모자와 간호복을 갖춰 입은 반신상의 그림이다. 쌍꺼풀진 갈색 눈에 오똑한 코, 야무지게 다룬 입술의 얼굴은 성전에 복무하는 여성간호병의 결연한 표정을 살려내고 있는데, 게르만 여성을 연상케 한다. 특히 그림의 왼편 아랫 부분에 황기 2603이라고 표기하여 김인승의 친일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유기헌납>, 1943 - 1943년 육군성 보도부 후원 육군미술협회 주최로 일본에서 개최된 제36회 육군기념일 육군미술전람회 출품작 김인승, <간호병>, 1941.1 - 간호병은 적십자 완장을 차고 국방색 모자와 간호복을 갖춰 입은 반신상의 작품이다. 특히 그림의 왼편 아랫부분에 황기 2603(1943)이라고 표기하여 김인승의 친일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이창길기자 / 2004 서대문형무소

     

     

     

           

    김경승= 조선미술가협회 평의원. 조선미전 총독상, 추천작가. 결전미술전 심사위원. 해방 후 안중근 김구 안창호 이상재 등 조각상 제작. 국전심사위원, 예술원회원, 홍익대 교수. 3.1문화상, 문화훈장.

     

    김경승은 "이보다 더 중대한 문제는 당대 구라파 작품의 영향과 감상의 각도를 버리고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데, 새 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 하에 조각계의 새 길을 개척하는 것일 겁니다. 나는 이같이 중대한 사명을 위하여 미력이나마 다하여 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김인승의 동생이며 해방이후 애국선열의 작품을 만들었다. <여명> 1942 - 1942년 조선미술전람회 총독상 수상작, 근로보국을 고취 김경승 <4> 1944 -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추천작가 출품작, 애국반원인 여성이 시국하의 총후에 열성적으로 나선 모습을 묘사. 화가 김인승의 동생인 친일조각가 김경승은 해방 후 독립운동가의 조상을 도맡아 제작했다. 이창길기자 / 2004 서대문형무소

        

     

     

    )이충무공 동상을 제작하는 광경, )김경승이 제작한 김구선생 동상

     

    김인승-김경승 미술가 형제도 친일전력을 갖고 있다. 일본 메이지정부가 세운 관립 도쿄미술학교 유화과(인승), 조각과(경승)를 졸업한 이들은 선전(鮮展, 조선미술전람회 약칭) 등에서 입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났는데, 김인승은 선전에서 1937년부터 연속 4회 특선을, 경승은 총독상을 두 차례나 수상했다. 김경승의 선전에 출품한 조각품은 전쟁협력 등 시국색이 강한 것들이었다.

     

    이들은 친일미술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간부로 활동했고, 전람회를 열어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기도 했다. 해방 후 이들은 친일미술가로 낙인찍혀 한동안 수모를 겪었으나 선전 추천작가 등 경력을 앞세워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김인승은 이화여대 미대 학장·미협 이사장 등을 지냈으며, 김경승은 국전 심사위원·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다.

     

    김경승은 특히 이순신 장군·백범 김구·도산 안창호·안중근 의사 등 애국선열들의 동상을 도맡아 제작해 나중에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밖에 김성수-김연수 형제도 거론할 수 있으나 다른 항목에서 다루기로 한다.

        

     

     

     

    화백들은 떠나고 초상화만 남아

     

    이승만윤보선박정희 초상화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 중 이승만·윤보선·박정희 전 대통령 세 명을 그린 사람은 고 김인승화백이다. 2001년에 세상을 떠난 김인승 화백은 탄탄한 데생과 섬세한 붓질로 인물을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친일미술인 모임인 단광회(丹光會)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징병제시행기념 기록화라는 친일 미술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광복 후 화려한 정치력으로 서양화 구상 계열 주도

    김인승은 그러한 친일 매국행각 탓에 김은호*, 이상범, 김기창*, 심형구, 김경승, 윤효중 등과 함께 광복 직후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조직에서 제외당했다. 그러나 심형구의 주선으로 개성여중 미술교사에서 이화여대 미술과 교수로 부임(1947)하면서 왕성한 작품활동과 화단활동을 벌이게 된다.

     

    1회 국전(1949)에 추천작가로 참여하는 것을 시작으로 종군화가미술전(1952) 참가, 국전 심사위원, 미협(당시 대한미술협회) 부이사장(1955), 예술원 정회원(1957), 목우회 창립 주도(1958), 이대 미대 학장(1960), 한국미술협회 이사장과 국제조형미술협회 한국위원장(1967) 등 화려한 정치력으로 서양화 구상 계열을 주도해 왔다.

     

    이와 함께 개인전, 단체전, 국제전에도 관심을 갖고 작품활동을 왕성히 하였다. 이러한 김인승의 열정적 작업과 미술교육 그리고 화단정치 활동에 대하여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일상생활에서 체통과 품위가 조화를 이룬 신사'로서 '뛰어난 유머감각과 교양에서 우러나오는 원만한 인간미'를 갖추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피력하고 있다.

     

    그처럼 친일행각은 철저히 은폐시킨 채 '단정한 품성으로 질서와 조화'를 지속적으로 담아 내려는 의도에서인지 김인승의 작품세계는 일제 때에 이어 변함 없이 같은 주제, 같은 형식미를 추구하였다. 그야말로 사회현실의 변화는 철저히 도외시하고 왜색화된 서구 고전주의풍으로 무이념적 이념의 생명력 없는 자연주의를 추종한 작업만을 계속한 것이다.

     

    그런데 김인승의 이런 경향은 자신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국전과 목우회 심사위원을 지내는 바람에 무표정한 [실내의 여인 좌상] 등 서양화 구상계열에서 공모전 아카데미즘의 형식주의를 조장하고 왜색풍을 오염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데 김인승 자신도 변질되어 1970년대 이후에는 상업주의 풍조에 편승하여 견실한 인물화가라기보다 '장미 화가', '모란 화가' 등의 별명으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친일미술 그린 손으로 선열 동상제작 도맡아

        

     

     

    [특별기획-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3] 미술가 김인승·경승 형제

    지난 199811월 말 한 시민단체가 보낸 공문 한 통이 국가보훈처에 접수됐다. 발신자인 신시민운동시민연합(의장 고경철)측은 공문을 통해 친일조각가 손으로 세워진 애국선열의 동상을 방치하는 것은 민족사의 왜곡행위로 뜻 있는 국민의 성금으로 다시 세워 민족정기 회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보훈처의 조치를 촉구하였다.

     

    이 공문에서 신시민운동연합측은 친일조각가로 김경승을 지목하고는 해방 후 역대 정권과 결탁해 비호를 받으면서 조각계의 거목으로 변신한 김경승이 그 더러운 손으로 민족사에 길이 남을 애국선열과 역사적 기념물을 제작했다는 사실은 반만년 문화민족임을 자부하는 우리 민족에게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주는 반역행위라고 지적하고는 하루 빨리 친일반역자의 작품을 철거하고 국민들의 정성을 모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공문에서는 김경승이 제작한 애국선열의 동상으로 경남 충무 소재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1953년 제작), 남산 안중근 의사상(1959년 제작)과 백범 김구 선생상(1969년 제작), 도산공원의 도산 안창호 선생상(1973년 제작), 서울 종묘공원의 월남 이상재 선생상(1989년 제작) 등을 들었다.

     

    두 형제, 일제 땐 친일미술가...해방후엔 화단 '원로' 군림

    김경승(金景承, 19151992)은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손꼽히는, 유명한 조각가다. 그는 서양화가 김인승(金仁承, 89·미국 거주)의 친동생으로 두 사람은 형제 미술인으로도 유명하다. 두 사람은 일제 강점기부터 80년대까지 한국 화단(畵壇)의 원로로 군림해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제 때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미술전람회에서 상()을 휩쓸었고, 해방 후에는 교단과 화단에서 다시 명성을 날렸다. 특히 김경승은 국내의 대표적인 위인·애국선열들의 동상제작을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 예인(藝人)으로서 이들 형제는 재능을 떨쳐왔지만 민족사에서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해묵은 미술사 한 페이지를 들춰 그 이유를 알아보자.

     

    김인승·경승 형제는 1915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법문학부를 나온 지주 김세형의 6남매 중 장남·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두 사람은 미술에 재능을 보여 학생미술전에서 수 차례 입상하였다. 1932년 김인승은 재능을 살리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코(東京)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였다. 김경승도 2년 뒤 형을 따라 이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과()는 형과 달리 조각과를 택하였다.

     

    1887년 일본 메이지정부에 의해 관립학교로 세워진 이 학교는 소위 서양미술을 가르치는 일본 내 유일의 미술학교였다. 이 학교는 일본인 이외에도 조선·대만의 미술학도들을 청강생으로 받아 장학금을 주면서 미술교육을 시켰는데 이들 형제 이외에도 조선인으로 심형구(沈亨求·19081962)도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김인승과 심형구는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의 약칭) 출품과 친일활동은 물론 해방 후 이화여대에서 재직하는 동안 반평생을 단짝으로 지낸 사이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에 이어 일본 유학

    한편 김인승은 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평균 98점이라는 학교 최고점을 기록, 우등생으로 졸업(1937)하였다. 재학 시절 그는 이미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皇紀) 2000(1940) 봉축기념전에 출품,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화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졸업하던 해인 1937년에는 제16회 선전(鮮展)나부(裸婦)를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였다. 3·1만세의거 이후 소위 일제의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시작된 선전1944년까지 23회나 개최되었는데 초기 서예나 4군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부분의 심사위원들이 주최측인 총독부가 위촉한 일본작가였다.

     

    따라서 선전에 출품된 조선인 작가들의 작품들은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취향을 반영한, 왜색(倭色)이 짙은 작품들이 주로 입선되었다. 이들은 조선인 작가들이 민족적 현실을 표현하기보다는 단순한 자연미나 표현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바로 이 선전에서 김인승은 1937년부터 연속 4회 특선하여 1940년 선전의 추천작가가 되었다. 이때 서양화 부문에서 추천작가로 오른 사람은 그를 포함해 심형구·이인성(李仁星) 세 사람뿐이었다. 형에 이어 동생 김경승 역시 선전에서 연속 입상하였다. 1939S씨상(흉상), 40목동(전신상) 등이 특선으로 입상하였고 41년에는 남자 입상(立像)어떤 감정으로 총독상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여명이라는 작품으로 총독상을 2회째 수상하였다. ‘선전에서 관록을 쌓은 그는 43년 마침내 추천작가가 되었다. 44년 그는 선전4을 출품하였는데 이는 애국반원인 조선여성이 시국하의 총후(銃後)’에 열성적으로 나선 모습을 담은 것이다.

     

    '시국색' 강한 작품...은연중에 전쟁협력 부추겨

    김경승이 선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추천작가로서 출품한 작품을 포함, 다섯 점 모두 모두 강한 시국색(時局色)’을 띠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일제 침략전쟁을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식량증산이나 근로에 동원된 조선인들을 담은 것으로 이는 은연중에 전쟁협력을 부추기고 있다.

     

    한편 이 두 사람은 일제하 대표적인 친일미술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에서 간부로 활동하였다. 1941222일 시국하의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맹세하면서 탄생한 이 단체는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鹽原時三郞)가 회장,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계광순(桂珖淳)이 이사장,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학예부장 백철(白鐵) 등이 이사로 있던 관민합작 단체였는데 두 사람은 각각 서양화부(김인승), 조각부(김경승)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나중에 조선문인협회·선전미술협회·보도사진협회 등 11개 예술단체와 더불어 1943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의 예술가단체연락협의회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들은 전람회를 열어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기도 하였다.

     

    김인승의 대표적인 친일행위는 그가 단광회(丹光會)에 참여하여 활동한 점이다. 이 단체는 성전하(聖戰下) 미술보국(美術報國)에 매진한다는 취지로 19432월 조선인·일본인 화가 19명으로 결성됐는데 선전추천작가 중심의 최고 엘리트화가 집단이었다. 이 단체에서는 19438월 조선인 징병제가 실시되자 이를 기념하여 회원 전원이 4개월간 합숙하여 1백 호 크기의 조선징병제시행기록화(사진)를 제작하였다.

     

    이 그림은 강제징집된 조선청년을 중심으로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장, 지원병훈련소장, 총력연맹 사무국 총장, 경기도지사, 친일파 윤치호 등이 등장하여 징병으로 나가는 조선인 청년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내용이다. 특히 이 그림은 인물 주위로 남산의 조선신궁(朝鮮神宮병사들의 행진모습 등을 곁들이고 있어 일본정신 고취와 성전(聖戰)참여를 조장하고 있다.

     

     

     '조선 징병제 시행기념 기록화' 

    1943년 8월 조선에서 징병제가 실시되자 단광회 소속 조선인과 일본인 작가 19명이 4개월에 걸쳐 공동제작한 '조선 징병제 시행기념 기록화'. 대표적인 친일미술작품으로 꼽히는 이 그림 제작에 조선작가로는 김인승 박영선 심형구 손응성 이봉상 임응구 김만형 등이 참여했다. 

     

    제작연대-작가 사인 등 일본식 표기

    김인승은 이밖에도 194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열렸던 반도총후미술전에 운보 김기창(金基昶심형구·월전 장우성(張遇聖) 등과 함께 추천작가로 참여하였다. 또 그는 작품의 제작연대를 일본식 황기(皇紀)로 표기하였으며 선전출품작에는 작가 사인을 김인승의 일본어 발음인 ‘Jinsho, Kin’으로 표기하였다. 그의 친일의식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 후 이들 형제는 친일미술가로 낙인찍혀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이들은 도쿄미술학교 출신, ‘선전추천작가 등의 화력(畵歷)을 앞세워 다른 친일미술가들과 함께 승승장구하였다.

     

    김인승은 47년 이화여대 미술과 교수로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49년 제1회 국전(國展)추천작가·심사위원, 예술원 회원·목우회 창립 주도, 이대 미대학장, 미협(美協) 이사장 등을 지내면서 서양화 구상계열을 주도했다.

     

    김경승 역시 국전 심사위원·예술원 회원 등을 비롯해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조각가로서 평통(平統)자문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특히 그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백범 김구·도산 안창호 선생·안중근 의사 등 애국선열의 동상을 도맡아 제작하였다.

     

    이들 형제는 상복도 많아 문화훈장을 비롯해 ‘3·1문화상까지 나란히 수상하였다. 남산 중턱에 서있는 백범 동상을 새로 만들자는 주장은 이래서 나오는 것이다.

     

     

     

      

    4·19기념관서 6·25를 기념하다니, 황당하다

        

     

     

    [통통통(通統筒)의 역사 산책] 1960년 민주혁명 50주년

    묘지 조성 과정도 석연치 않았다. 묘지 설계와 조형물 제작의 책임자는 조각가로 유명한 김경승(金景承, 1915~92)이었다. 그는 형 김인승(金仁承, 1910~2001)과 함께 일제의 전쟁 수행과 조선 통치에 적극 협력한 미술계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다.

     

    그는 해방 이후 이승만·박정희 정권기에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국가의 기념사업에 참여하였다. 서울 남산공원의 김유신 장군상, 안중근 의사상, 김구 선생상, 덕수궁의 세종대왕상, 인천의 맥아더 동상 등이 그의 대표 작품이다. 당혹스러운 것은 419 당시 철거된 이승만 동상을 제작했던 그가 묘지 내의 '4월학생혁명기념탑'과 수호자상도 조각했다는 사실이다. 묘지 조성 과정에서의 결핍된 역사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4월 혁명 당시 끌려내려가는 이승만 동상 남산에 위치하던 것으로 김경승의 작품이다.

     

    4.19 50주년에 맞춰 재개관한 기념관

    기념공간으로서 4·19묘지는 김영삼 정부시절을 거치면서 또 다시 변모하게 된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는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묘지를 성역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김인승은 1970년대부터 점차 신진작가들의 정치력에 밀려 자리를 내주게 되자 1974년 정년퇴임을 앞두고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현재 그 곳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몸은 미국에 가 있으면서도 국전 출품 및 각종 화랑 초대전, 근래의 {동아일보} 주최 회고전(1987) 등에 이르기까지 국내 작품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김인승은 여타의 친일파들과 마찬가지로 문화포상(1963), 예술원상과 서울시 문화상(1965), 민족기록화 800호 제작(1967), 3·1 문화상(1968), 문화훈장 동백장(1969) 등 각종 관변의 이익을 챙겼다.

     

    미국으로 이주한 뒤 화단에 미치는 김인승의 직접적인 영향력은 퇴색하였지만, 아직도 그가 한때 확산시킨 현실 외면 경향의 자연주의적 회화관과 형식상의 오염은 제거되지 않은 채 미술계 곳곳에 남아 있는 실정이다. 이는 일제 식민잔재가 청산되지 못하여 우리 사회를 아프게 하거나 병들게 하는 제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태호 (전남대 교수·미술사,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의 대가

     

     

     

      

    김인승 [金仁承, 1911.1.192001.6.22]

    친일파 서양화가. 호는 지연(智淵). 간호병(1944),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1943), 친일 작품 제작. 국민총력조선연맹 활동. 국방헌금 기부. 이화여대 미술대학 교수,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를 통해 아카데미즘적 화풍을 정착시킨 대표적 서양화가, 조각가 김경승(金景承, 1915~1992)의 형이다. 전시체제(戰時體制)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심형구 등과 함께 적극적인 부일(附日)활동을 전개하여 여러 전람회에 참여했다.

     

    1910년 개성에서 태어나 도쿄미술학교를 수학하였다. 졸업하던 해인 1937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부>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으면서 화가로 이름을 얻기 시작하였다. 이어 4번 연속 특선한 뒤, 선전 추천작가로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 이화여대 미대 교수와 학장을 역임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1949) 및 심사위원, 대한미술협회 이사장, 국제조형미술협회 한국위원장(1967) 등을 지내면서 한국 서양화의 구상 계열을 주도하였다. 1974년 이후에는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이전의 인물화에서 그 대상이 장미와 모란으로 바뀌면서 장미화가, 모란화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20016월 사망할 때까지 대한민국미술대전과 각종 초대전 등에 출품하는 등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10년 개성에서 태어나 도쿄미술학교를 수학하였다. 졸업하던 해인 1937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부>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으면서 화가로 이름을 얻기 시작하였다. 이어 4번 연속 특선한 뒤, 선전 추천작가로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 이화여대 미대 교수와 학장을 역임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1949) 및 심사위원, 대한미술협회 이사장, 국제조형미술협회 한국위원장(1967) 등을 지내면서 한국 서양화의 구상 계열을 주도하였다.

     

    1974년 이후에는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이전의 인물화에서 그 대상이 장미와 모란으로 바뀌면서 장미화가, 모란화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20016월 사망할 때까지 대한민국미술대전과 각종 초대전 등에 출품하는 등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한국 화단에 있어서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일찍부터 사실주의의 정신과 기법을 고수하였다.

     

    그의 특징은 인물화로 중산층의 세계, 특히 소녀나 여인을 심미적 시각에서 그렸는데 그것이 하나의 전형으로서 한때 국전에서 유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전의 친일 행각으로 인해 한국 현대사에서의 입장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며 그럼에도 한국 근대화단에서 전형적 화풍을 구축한 대표적 작가라는 의미가 있다.

     

    한국 화단에 있어서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일찍부터 사실주의의 정신과 기법을 고수하였다. 그의 특징은 인물화로 중산층의 세계, 특히 소녀나 여인을 심미적 시각에서 그렸는데 그것이 하나의 전형으로서 한때 국전에서 유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전의 친일 행각으로 인해 한국 현대사에서의 입장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며 그럼에도 한국 근대화단에서 전형적 화풍을 구축한 대표적 작가라는 의미가 있다.

     

    작품세계는 충실한 데생에 중후한 색조, 정적인 분위기 등이 특징이다. 초기작품에서는 서양여인을 모델로 한 작품이 많았다. 내용과 양식면으로 볼 때 선전의 아카데미즘에 걸맞는 인물좌상, 나부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국전 서양화부 운영위원, 추천작가로 활동하면서 아카데미즘 화풍의 정착에 큰 역할을 했으며 상류층 부인, 저명인사들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197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종류의 장미를 소재로 한 작품도 남겼다.

      

    1932년 미술공부를 위해 동경으로 떠나 학생신분으로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皇紀) 2000(1940) 봉축기념전에 출품,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화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졸업하던 해인 1937년에는 제16회 선전(鮮展)<나부(裸婦)>를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였고 그 후 연속 4회 특선으로 선전의 추천작가로 활동하였다. 대상을 면밀하게 관찰한 후 정확하게 화면 위에 표현하였으며 객관적인 사실과 함께 주관이 가미된 새로운 리얼리즘의 표현을 시도하였다.

     

    작품에 대한 김인승의 태도는 정확한 관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대상을 면밀하고 정확하게 관찰한 후, 주제를 어떻게 화면 위에 작품화할 것인가를 고심했다. 따라서 그는 주제의 표현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게 되었는데, 그 재현은 결국 객관적인 진실보다 주관을 충분히 가미한 새로운 리얼리즘의 표현이었다. 대상에 대한 관찰과 아울러 김인승은 이를 뒷받침할 만한 뛰어난 소묘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구성에서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김인승은 작품에 완벽성을 기했다. 굉장히 철두철미했으며 구성, 터치 등 모든 조형적 요소를 완전하게 이해해 나갔다. 김인승의 작품 세계 저변에 깔려있는 바탕은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서양의 사실적인 미술기법을 이용하였으며 아주 모범적인 화풍에 기초하고 있다.

     

    초기에는 여인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으며 이국적인 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주를 이루었고 완벽한 표현과 마무리를 특징으로 한다. 그의 <장미>시리즈는 최근의 경향이라 할 수 있는데, 역시 장미라는 물체를 꿰뚫는 정확한 관찰력과 그것을 부각시키는 수준 높은 솜씨에 의해 작품이 형성되고 있다. 초기의 나부시대 든, 그 후의 풍경 내지 정물시대 건간에 자연을 보는 정확한 관찰과 그것을 박진감있게 다루는 뛰어난 기술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작품 활동은 86세 때인 1996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열아홉 번째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중단했다.

     

    1911년 경기도 개성의 인삼상회 집안에서 51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인승은 개성제일보통학교와 개성공립상업학교 시절 이미 두각을 나타냈다. 일본 도쿄(東京)미술학교 서양화과 재학 중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했고, 학교를 수석 졸업하던 37년엔 제16조선미술전람회(선전)’ <나부(裸婦)>를 출품, 최고상을 수상했다. 이후 4회 연속 특선해 추천작가가 됐다.

      

    1939년 제18회 선전에서는 친동생 경승 (92년 작고)씨가 조각부문에서 특선해 형제 특선작가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44년엔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다룬 간호병을 그려 친일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47년에 이화여대 미술과 교수가 된 그는 한국미술협회 제5대 이사장, 예술원 회원을 역임했다.

     

    김인승의 인물화에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대상의 정확한 관찰과 묘사이다. 그의 작업은 그릴 대상의 정확한 관찰에서 시작한다. 대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정확하게 살펴보고 그것을 어떻게 화면화시키느냐를 고심했다. 그는 무엇보다 얼굴 묘사에 정성을 쏟았는데 그것은 인물화의 본질을 인간의 성격표현에 있다고 보고, 또 그 성격은 얼굴에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적이고 정확한 묘사를 기본으로 한 그의 그림은 대상을 무조건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화가의 주관을 섞었다. 특히 그는 자신이 정한 주관적인 미의 기준을 자산의 모델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그에게 있어 미의 기준이란 서구 유럽의 여인들과 같은 이국적인 분위기였다.

     

    김인승 예술의 바탕은 서양미술의 아카데미즘을 받아들인 일본의 아카데미즘이었지만 조화와 균제를 근본으로 하는 그의 예술정신은 유행에 현혹되지 않고 내심에서 일어나는 자신만의 고전적인 세계를 이룩했다고 평가된다. 그의 유화 작품들은 뛰어난 기술의 표현으로 작가의 재능을 드러내고 있으며 화가 개인의 품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예술원 홈)

     

    1932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

    1936년 일본 문부성 전람회와 광풍회 전람회 출품·입선

    1937년 선전에 나부 裸婦출품, 최고상인 창덕궁상

    1940년 선전 추천작가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재직

    1949년 국전 추천작가 겸 심사위원

    1958년 목우회 창립

    한국 미협 이사장과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예술원 회원

    1974년 미국 이주

    1937 일본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졸업

    1966 이화여대 명예문학 박사

    1939 개성공립중학 미술교원

    1946 개성공립여자중학교 미술교원

    1947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1947 이화여대 미대 교수 및 학장(~1972)

    1949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운영위원(~1981)

    1955 문총 최고위원

    1955 대한미술협회 부이사장(~1958)

    1957 대한민국예술원 회원(~1988)

    1960 이화여대 미술대 학장

    1961 국전 심사위원장

    1965 서울시 문화위원

    1967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위원장

    1967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1970 국전운영위원

    1936 선전 창덕궁상

    1937 16회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 덕수궁상

    1937 조선미술전람회 연4회 특선(~1940)

    1953 3회 국전 대통령상

    1963 대한민국 문화포장

    1965 대한민국 예술원상

    1965 서울시 문화상

    1968 31 문화상

    1969 대한민국 문화훈장 동백장

    1939 개인전 7(~73)

    1949 국전 (~81)

    1952 한국현대미술전

    1953 1회 현대미술작가 초대전 (부산국립박물관)

    1966 현대 서양화 10인전 (~68)

    1967 국제미전 (브라질 상파울로)

    1969 한국 현대작가 초대전 (문공부)

    1970 오사카 만국박람회 미술전 (오사카)

    1971 개인전(현대화랑)

    1972 미국의 인상파전

    1972 한국 근대미술 60년전 (문공부)

    1973 개인전 : 아넥스갤러리(일본 동경)

    1976 개인전(미국 로스앤젤레스)

    1980 초대전 (L.A.한국문화원)

    1985 한국 양화 70년전 (호암갤러리)

    1986 한국 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전 (국립현대미술관)

    1987 한국 인물화전 (호암갤러리)

    1987 회고전 (서울갤러리)

    1990 개인전 : Simmonson Gallery (미국 로스앤젤레스)

    199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작가 작품전 (대구, 강릉)

    1992 한국근대미술 : 유화 - 근대를 보는 눈 (국립현대미술관)

    1998 다시 찾은 근대미술 (덕수궁미술관)

    1999 한국미술 50: 1950-1999(현대갤러리)

     

    작품세계는 충실한 데생에 중후한 색조, 정적인 분위기 등이 특징이다. 초기작품에서는 서양여인을 모델로 한 작품이 많았다. 내용과 양식면으로 볼 때 선전의 아카데미즘에 걸맞는 인물좌상, 나부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국전 서양화부 운영위원, 추천작가로 활동하면서 아카데미즘 화풍의 정착에 큰 역할을 했으며 상류층 부인, 저명인사들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197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종류의 장미를 소재로 한 작품도 남겼다.

     

    주요작품으로 <풍경>(1951) <홍선>(1954) <>(1966) 자화상(1933)·나부(1937)·실내(1937)·춘조 春調(1942)·김성수 초상·육영수 초상등과여인상시리즈가 있다.

     

    작품 리뷰

    <봄의 가락(春調)>, 1942, 1473X2070mm

    한국은행 소장품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은 <춘조(春調)>, <첼로> 등의 별칭을 붙이고 있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1942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김인승이 제21회 선전에 추천작가로서 출품했던 작품이다. 동경미술대학 재학시절인 1936년부터 선전에 입선하여 제16회 선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바 있는 김인승은 30대 초반의 나이에 추천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러한 자신감을 반영하듯 이 작품은 대형 캔버스 두 폭을 사용해 작가의 기량을 총동원하여 완성시킨 걸작 중 하나이다.

     

    작품의 제목인 <봄의 가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봄을 그리는 사람들의 설렘과 희망을 첼로연주가와 그의 연주를 듣는 청년군상들의 초상에 빗대어 형상화한 것이다.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구도의 치밀성과 인체의 해부학적 묘사, 세심한 채색, 의자, 첼로, 바이올린, 보면대, 슬리퍼, 외투 등 소품의 적절한 활용이 작품의 완성도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평론

    화가 김인승은 유채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캔버스 위에 정착시키는 기법을 추구한 전형적인 유화 화가이다. 그것은 화가 김인승이 우리나라 근대회화사상 회화의 본질문제를 누구보다도 잘 다루고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태도는 정확한 관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면밀하고 정확하게 살펴보고, 그 다음에 그 주제를 어떻게 화면 위에 작품화하느냐에 고심한다. 따라서 주제를 눈에 비치는 대로 재현하게 되는데, 그 재현이 객관주의적인 진실보다는 그것에다 주관을 다분히 섞은, 그러한 새로운 리얼리즘이다.

     

    이러한 사실계통의 작품은 사실상 오랜 세월 미술사의 주류를 이루어 왔으며 자연의 연장으로서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왔던 것이다. 이들의 예술 이념은 어디까지나 자연을 창조의 모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자연보다 더 심오한 리얼리티를 표출하는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방이나 집안이라는 인조공간 속에 풍경화, 인물화 또는 정물화 같은 자연재현의 작품을 도입함으로써 자연의 아름다움을 실내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부드러운 붓의 움직임과 조화를 이룬 색감의 세계는 김인승 작품의 본질이 되고 있지만, 그것보다도 본질적인 것은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뛰어난 데생력에 있다. 자연을 형태와 색채로 나눌 수 있다면, 곧 형태는 사람의 몸과 같은 것이고 색채는 옷과 같은 것이다. 화가 김인승은 이 두 가지 일을 다 잘 다루는 우수한 화가이다. (……)

     

    그의 예술의 바탕은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인 서양의 사실적인 미술기법이지만, 그의 조화로운 정신구조는 휘몰아치는 유행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 존속하는 고전적인 조화와 균형의 세계를 나름대로 창조해온 데에 있다. 그의 유화작품은 뛰어난 기술의 표현으로서 작가의 우수한 능력을 드러낸다. 일상생활 중의 태도가 그러하듯이 단정한 마음가짐은 질서와 조화를 작품 내에서도 이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화가 김인승은 한국 근대미술의 올바른 길을 걸어 왔으며 70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그 길을 꾸준히 걷고 있다. 비록 몸은 이역 땅인 미국에 있지만 조국을 향한 마음과도 같이 꾸준히 예술의 길을 걷고 있다. 천생 화가로 태어났고, 화가로 살아가는 노대가의 화업은 그의 생애를 수놓은 개인의 역정이지만, 또한 그것은 우리의 근대 회화사를 상징하는 것이다.

    -‘金仁承人間作品世界’, 李慶成(미술평론가)

     

     

     

     

     

    참고문헌

    {한국근대회화선집} 서양화 2, '도상봉/김인승', 금성출판사, 1990.

    국립현대미술관

    <韓國近代繪畵選集: 洋畵>, 李龜烈 , 금성출판사, 1990

    <김인승 화집>, 동아일보사, 1987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김인승>, 금성출판사, 1979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 김인승 : 도쿄미술학교 우등생이 친일에도 우등 (이태호), 친일파 993

    정운현 (1999). 남산 백범 동상을 바꾸어야 하는 이유 - 미술가 김인승·경승 형제,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서울: 개마고원

    http://book.culppy.org/bbs/board.php?bo_table=23_01&wr_id=148

    http://www.doopedia.co.kr/photobox/gallery/gallery.do?_method=print&GAL_IDX=101026000769181

    http://www.kobay.co.kr/servlet/wsauction/item/itemView;jsessionid=CLMHCMEBJADK?item.itemseq=1102MYE2RXN

    http://blog.daum.net/ygs2727/4989

    http://inews.seoul.go.kr/hsn/program/article/articleDetail.jsp?menuID=&boardID=153866&category1=NC5&category2=NC5_4

    http://blog.daum.net/kimkyoc/230

    http://twicsy.com/i/vfc3fd

    http://blog.daum.net/handra/12052918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8044

    http://www.vop.co.kr/A00000024794.html

    韓國現代美術史-彫刻-(國立現代美術館, 1974)

    瓢泉金景承彫刻作品集(김경승조각작품집간행위원회, 1984). 李龜烈

     

     

    참고 작품사진

    김인승 외 '단광회'원 작품, [조선징병제시행기념 기록화], 1943년 작 유화

    김인승, [간호병], 조선식산은행 사보 {회심}, 19441월호 속 표지화

     

     

     

     

    백우회 [白牛會]

     

     

    이여성, 이쾌대 형제가 함께 등장하는 사진의 하나.

    앞줄 왼쪽으로부터 세 번째가 이여성, 뒤줄 오른쪽으로부터 세 번째가 이쾌대다.

    이쾌대 등이 중심이 돼 일제 말기에 조직한 신미술가협회의 1943년 전시회 개막식 기념사진이다.

     

    1937년 일본 도쿄에 유학 중인 미술학교 학생들 중심으로 결성한 미술단체. 민족주의적 미술활동 및 각종 전시회 개최

    일제강점기에 결성된 미술단체다. 19186월 창설한 서화협회를 일제가 강제 해산시키고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만 남게 되자, 미술 분야에서라도 자주적인 활동을 하자는 민족적 자각에 따라 결성되었다. 1933년 도쿄에 유학 중이던 김학준(金學俊)을 회장으로 주경(朱慶심형구(沈亨求김인승(金仁承조병덕(趙炳悳김원(金源이중섭(李仲燮이유태(李惟台) 등 일본에 유학중인 화가들을 주축으로 만들었다.

     

    일제가 백우(白牛)라는 문자가 민족적 자의식을 촉발한다는 이유로 개명을 강요하여 이듬해 재도쿄미술가협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처음에는 서양화가 위주였으나 나중에 일본미술학교, 문화학원 등에 다니던 학생들이 참가해 동양화·조각 등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1942년과 1943년에 경복궁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국내에서는 조선미술가협회를 결성하는 등 백우회는 한국 미술단체의 행동을 집약하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 목일회와 함께 주로 1930년대에 활동하였으나 친목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한국미술의 일제 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

       

    "(당시) 친일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은 실력이 없었어. 당시 뽑힌 사람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인데 높은 나무가 바람을 많이 받는 것처럼 나는 지금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것."

    - 운보 김기창

     

    194772일 제정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 등에 대한 특별조례'와 이 조례를 토대로 1948929일 법률3호로 공포된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으로 약칭)

     

    "일본통치 시대에 일본세력에 아부하여 비적행위로 동포에게 해를 가한 자를 부일협력자로 함

     

    "일본통치의 부·도 이상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1), "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각 단체 및 언론기관의 지도적 간부"(-3) 조항이 있다. 또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410항은 "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본부의 수뇌간부로서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한 자", 11항은 "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 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데 진력하기 위하여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로 명시하고 있다(법조항 인용은 350~357쪽에 근거함)

     

    "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본부의 수뇌간부로서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한 자

       

     

     

    단광회 회원의 '조선징병제시행기념 기록화'. 1943

     

    내선일체를 위한 치밀한 세부묘사

    오른쪽 그림은 친일미술단체 단광회 소속 19명의 화가들이 4개월에 걸쳐 공동제작한 대작이다. 여기에 일본인 화가들과 함께 김인승·박영선·김만형·손응성·심형구·이봉상·임응구가 참여했다.

     

    이 그림은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쌍스의 화가 마사치오가 세속적인 '납세의 의무'를 설득하기 위해 그린 <세금을 바치는 예수. 1426~7>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화면 중앙의 학도병을 둘러싼 인물들의 자세와 표정에 주목하기 바란다. 징병제가 조선의 자식을 황군으로 내선일체하는 '영광된 의식'임을 암시한다.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자식의 어깨에 살포시 얹은 왼손에서 광기의 의식은 거의 종교적 수준의 절정에 달한다.

     

    여기에 그림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또 다른 보조 장치가 있다. 서로 다른 필체의 세부 인물묘사이다. 이를 통해 일억일심의 마음과 상황적 신뢰감을 불어넣는다. 바로 이것이 공동제작한 진짜 이유였다. 그림은 조선인들에게 징병제 시행에 따른 '육체헌납의 의무'를 여러 시각적 장치로 교묘히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친일미술품은 단순 심리를 이용한 선동에서부터 종교와 신화까지도 동원하는 고단수 선전물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따라서 이미지의 맥락이 지닌 의미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참고문헌

    김윤수·문명대·박용숙·안휘준·이경성·이구열·임종국·정양모·최순우. '한국미술의 일제 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 <계간미술>. 25. 1983 봄호

    최열의 <한국근대미술의 역사>(1998)

    최열. '친일미술 연구의 역사와 개념, 범주' <광복 57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발표문>. 2002.8.14.

    임헌영. '정신사적 측면에서 본 친일예술'. <친일음악의 진상기획특집: 굴욕의 노래, 친일음악>. 민족문제연구소. 2003

    원동석. '민족미술의 정립문제'. <마당>. 1983.6

    이구열. '역사 규명과 특정인 매도의 차이'. <월간미술>. 1993.8

    김재용. <협력과 저항: 일제 말 사회와 문학>. 소명출판. 2004. 122~125

    '시국과 미술'. <신시대>. 1941.10월호

    '양화 참견기'. <조선일보>. 1939.6.13.~16

    '신동아 건설에 있어 화단적 역할'. <동아일보>. 1940.5.1.

    '사변과 미술인'. <매일신보>. 1940.7.9.

    고 임종국(<계간미술> 1983)

    원동석(<실천문학> 1985년 여름호)

    최석태(<역사산책> 199012월호)

    주섭일. <프랑스의 대숙청: 드골의 나치협력 반역자 처단 진상>. 중심. 1999. 264~265

    탁석산. '한국문화의 정체성'. <디자인문화비평 05: 디자인과 정체성>. 안그라픽스. 2001. 206

    1983<계간미술> 봄호 특집기획 '한국미술의 일제식민 잔재를 청산하는 길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를 묻는다' 성명서 (조선일보·동아일보. 1983.4.21.일자)

    무크·친일문제연구(3). <반민특위: 발족에서 와해까지>. 가람기획.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