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미술
심형구 (沈亨求, 1908∼1962)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
▶심형구(1908-1962)의 [흥아(興亞)를 지키다](1940년작, 조선 미전 입선작)
前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도쿄 미술학교(2년제 대학) 졸업 1941년 조선미술가협회 서양화부 이사 1944년 '선전' 참여 작가
심형구(沈亨求, 1908년 6월 4일 ~ 1962년 8월 6일[1])는 한국의 서양화가로, 성악가 김자경의 남편이다. 호는 운봉(雲峰), 본관은 청송이며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이다.
경기도 용인군의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 심종협은 조선총독부 관리였다.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서 정현웅을 만나 함께 그림 공부를 했다. 이후 도쿄에 유학하여 도쿄 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했다.
도쿄 미술학교 재학 중이던 1936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노어부〉를 출품하여 특선에 입상하면서 화단에 등단하였고, 이후 연속으로 특선으로 입상해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향토적 소재를 황갈색조로 다룬 심형구의 인물화와 풍경화는 붓질과 색면의 처리 기법이 당시 도쿄미술학교의 화풍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잡지 《신시대》에 미술도 군국주의에 복무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친일 논리를 담은 〈시국과 미술〉을 발표하는 등 친일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황도학회 발기인, 조선미술가협회 서양화부 이사, 단광회 회원으로 친일 단체와 친일 미술인 모임에 참여했고,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는 일본군을 묘사한 〈흥아를 지킨다〉, 조선식산은행 사보 속표지화인 〈기관총을 쏘는 병사〉 등 친일 미술 작품도 다수 남겼다. 전쟁을 선동하는 친일 전람회인 반도총후미술전람회에도 초대 작가로 참가해 출품했다. 친일 작품의 창작 행적과는 별도로 화풍 자체가 일본풍이라는 지적도 있다.
광복 후 이화여자대학교에 미술대학을 하고 미대 교수와 박물관장을 지냈다. 1949년부터는 9년간 미국에서 생활하였으며, 1962년 화진포에서 사고로 익사했다.
심형구 夫人... 김자경[金慈璟/1917.9.9~1999.11.9] 前 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 소프라노 성악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미술 부문에도 선정되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많은 인물을 선정하지 않은 친일파 708인 명단에 미술계에서 포함된 사람은 심형구와 김은호 뿐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에는 아버지 심종협도 함께 들어 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초상(草上, 풀밭 위)>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 등장 작가 이번 칼럼은 일제 강점기 활동했던 우리 화가들의 작품엽서들을 보며 한국 미술사의 흐름을 잠깐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한국 최초의 미술교육기관은 1911년에 세워진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 출신의 신인들이 1920년대 동양화단의 중심인물로 전통회화의 명맥을 이어갔다고 하지요. 이 경성서화미술원에서 춘전 이용우, 이당 김은호, 청전 이상범, 심산 노수현, 소정 변관식, 의재 허백련 등 한국 근대 동양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들이 배출됐습니다.
조선왕조 말기 화단을 마지막으로 꽃피운 대표적인 인물은 오원 장승업(張承業, 1843~1897)과 해사 안건영(安健榮, 1841~1876)입니다. 특히 장승업은 안견,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3대화가중 한명으로 손꼽히지요. 19세기말에는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과 소림(小琳) 조석보(趙錫普, 1853~1920)가 조선화단을 대표했습니다. 이들은 중국 유학까지 다녀온 조선의 대표적인 산수화가들이었습니다. 그들 문하생으로 1915년 최초의 일본 동경 미술대학 유학생인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이 한국인 서양화가의 효시가 됐다고 합니다.
이 선전을 통해 서양화가로 부각된 작가가 이인성, 김인승, 심형구 등입니다. 이들은 나중 최고로 인정받는 심사참여자격까지 획득하지요. 그러나 김은호, 김기창 화백과 함께 대표적 친일미술가로 지탄을 받고도 있습니다. 45년 해방 후엔 미술계가 좌우익으로 나뉘어 난맥상을 이루다가 49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國展)]로 다시 탄생케 됐습니다. 이 국전은 1981년 제30회를 끝으로 폐지되고, 후신으로 대한민국미술대전[약칭 미전(美展)]으로 개편됐지요.
또 47년 7월 일본에서 유학한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등이 주축이 되어 화가 동인그룹인 '신사실파'를 형성하고 1948년 12월 창립전을 열었습니다. 이 때를 한국추상미술의 기점으로 삼고 있으며 신사실파의 주축인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은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효시가 됐다는 것입니다.
경기도 용인출신. 서양화가로 성악가 김자경의 남편입니다. 도쿄 미술대학에서 유화를 공부했습니다. 해방 후 이화대학 미술대학을 창립하고 同 대학 교수와 박물관장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49년부터 9년간 미국에서 생활해 화단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54세의 나이에 화진포에서 사고(익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심형구 - 기관총을 쏘는 병사 ⓒ민족문제연구소
조직적인 친일미술활동의 총책격 1940년대에 들어서 일제의 폭압이 강화되면서 미술계에도 군국주의에 동조하자는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성전'(聖戰) 승리를 위해 병사들이 총을 들고 싸우는 것 못지않게 후방의 화가들도 미술의 무기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전
▲ △ 심형구, <흥아를 지키다>, 1940 - 조선 미전 입선작, 이 작품은 본격적인 친일 주제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선도 사례이다. △심형구, < 기관총을 쏘는 병사>, 1944.
▲ 일제의 미술정책은 △조선 미술의 고유성 말살, 전통 양식 파괴와 일본식 화풍을 강요 △일제 식민통치와 황국신민화 선전교화수단으로 악용 △미술계의 관변화와 친일화 고착 △전시 파시즘 미술 육성 등이었다. 중일전쟁 후 화필보국, 성전미술, 신체제미술, 총후미술, 결전미술 등의 이름으로 전시파시즘 미술이 등장했다. 조선인 화가 다수가 일제의 전시총동원체제에 협력했다. 미술은 전쟁을 찬양하고 총력전을 독려하는 선전도구로 전락했다. 상당수 조선인 화가들 또한 화필보국의 친일배로 변절하였다. 20세기 제국주의가 자행한 잔혹한 식민지 수탈과 전쟁의 광기와 비참함. 예술의 자살이라 할 전쟁미술과 친일미술의 추태.(<전시를 열면서>중에서), 황군에 부채를 헌납한 화가 △김용진(1882-1968) 1938년 황군위문용 부채그림 조선총독부에 헌납 △정종녀(1914-1984) 결전미술전 출품, 대동아전쟁 출정자와 입영자에게 <수호 관음불상> 헌납.
▲ 친일미술이란? △내선일체 황국식민화 정책에 호응 △일제의 대외 침략전쟁을 찬미, 예술의 군국주의화 추구 △징병, 징용, 정신대 등 강제동원과 공출을 비롯한 전쟁물자 수탈에 협력 △각종 친일단체나 친일행사 등 총후 활동에 복무. ⓒ 이창길기자 / 2004 서대문형무소
그 핵심을 담은 글이 최근배의 [미술계의 제문제]({조광}, 1939. 1)와 구본웅의 [사변과 미술]({매일신보}, 1940. 7. 9) 그리고 심형구의 [시국(時局)과 미술]({신시대}, 1941. 10) 등이다. 심형구는 [시국과 미술]에서 아예 일본인의 입장이 되어 독일 파시즘 미술의 예를 들어가며 미술의 무기화를 위해서는 그 전문성을 가지고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삽화나 포스터 제작에 참여해야 된다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금일은 문학이나 예술이나 무엇이나 좀더 국민생활이라 하는 것과 직접으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학을 위한 문학, 미술을 위한 미술은 벌써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 사람은 일본 사람으로서의 국민생활을 좀더 향상시키자는 점만을 생각하게 된다는, 당연 협소한 경지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반 문화인은 각자 각자가 자신의 순수한 목적만으로만 생각하여 왔다. 이는 예술가만을 책할 수 없겠으며, 모든 사람이 국가에 봉사한다는 목적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하등의 목적이 없이 민족이상도 국가의식도 가지지 않는 예술이요, 미술이라면 무가치한 물건이다.
한 민족의 예술이라는 것은 그 민족을 강대하게 한다는 목적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경에서는……일류화가가 신문삽화나 무대장치 같은 것을 하게 될 때 무대장치나 삽화가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 정도가 높아졌다 한다.
즉, 훌륭한 회화를 제작하는 동시에 그와 동일한 기백으로서 삽화나 무대나 자기 기능을 충분 발휘한다는 일이 미술을 생활화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즉, 화실에서 조용히 앉아서 제작만 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보겠다.……필요하다면 포스터나, 책의 장정이나, 극단으로 성냥곽 레텔이라도 소위 대가가 그려도 좋겠으며 또한 그려야 될 줄 생각한다. 좁은 문을 나와서 독선고립주의는 청산해야 될 줄 안다.>
결국 화가 자신들의 일층의 자각과 노력을 요구하게 된다. 심형구는 위와 같은 시국미술관에 걸맞게 군국주의적 경향의 삽화나 그림을 그렸고, 일제 말 조직적인 친일활동의 총책격으로 선봉장에 나섰다.
그가 개인적으로 그린 전쟁 선양의 작품으로는 1940년 제19회 '선전'(朝鮮美術展覽會)에 출품한 [흥아(興亞)를 지키다]와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의 속표지 그림 [기관총을 쏘는 병사](1944. 2) 등이 알려져 있다.
[흥아를 지키다]는 유화로 총칼을 들고 보초를 서는 병사의 뒷모습을 담은 것이다. 초소에서 먼 산풍경을 바라보며 대동아공영의 '성전' 승리를 꿈꾸는 병사의 표정이 결연하다. [기관총을 쏘는 병사]는 연필소묘에 담채를 가한 소략한 삽화로 기관총을 중심으로 사수와 조수의 상반신을 그린 것이다.
예비탄창을 들고 웅크린 조수의 자세나 적을 향한 눈초리는 매섭기 그지없다. 이처럼 전쟁에 광분한 일제의 군국주의에 부화뇌동하는 주제의 그림 제작에 적극적이었던 만큼 심형구는 단체활동에서도 선도적이었다.
해인사 가는길
그는 1941년 2월 22일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을 회장으로 하여 '시국하의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맹세'하면서 결성된 '조선미술가협회'에 서양화부 이사로 참여한다. 이 단체에는 내선일체를 내세워 일본인들 관료 화가들과 함께 김은호*, 이상범, 이영일, 이한복(이상 서양화부), 김경승(조각부) 등이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심형구는 이들보다 한 급 높은 이사의 위치였다.
더욱이 조선인 이사로 {매일신보} 학예부장인 백철*도 있었으나 조선인 화가로는 유일하게 심형구가 뽑혔다. 친일활동을 인정받아 그러한 위치에까지 오른 것이다.
한편, 심형구는 그 예우에 답하기 위하여 문인들과 더불어 시국좌담회, 강연회 등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는 조선미술가협회가 황민문화(皇民文化) 건설을 보다 강고히 하기 위해서 조선문인협회, 보도사진협회 등 11개 예술단체들과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소속으로 결합되면서 생긴 예술가 단체 연락협의체 활동의 일환이었다.
그리하여 심형구는 '조선미술가협회'를 이끄는 조선인 화가의 행동대원이 되었다. 지방을 순회하면서 '성전' 승리를 위해 농민에게는 증산을, 화가들에게는 그것을 작품화하도록 부추겼으며, '선전미술협회'나 '보도사진협회' 등에도 관여하였다. 또한 1942년 11월 '조선미술가협회'가 주최하여 첫 전람회를 갖은 '반도총후미술전'에 김인승*, 김기창*, 장우성 등과 함께 초대작가로서 3회(1944)까지 참가하였다.
이 전시회는 '선전'을 압도한 일제 말기의 대규모 친일지향의 전람회였다. 여기에 출품된 주제들은 '방공훈련', '징병제도를 맞이하며' 등 주로 군국주의에 야합하는 내용이었다. 심형구의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대표적인 친일미술 활동은 김인승*, 박영선, 김만형, 손응성, 이봉상, 임응구 등과 함께 '단광회'(1943)에 참여한 일이다.
그리고 심형구가 자행한 친일활동의 백미는 '황도학회'의 결성 발기인에 낀 사실이다. 안석주와 함께 참여한 황도학회는 조선인을 황국신민화 (皇國臣民化)하려는 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황도교육'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이다. 특히 이를 통해서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당대의 문화계 인사로서 심형구의 정치적 수완과 탁월한 능력을 충분히 엿볼 수 있으며, 역시 아무나 친일파가 되는 것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다.
▲ '조선 징병제 시행기념 기록화'
1943년 8월 조선에서 징병제가 실시되자 단광회 소속 조선인과 일본인 작가 19명이 4개월에 걸쳐 공동제작한 '조선 징병제 시행기념 기록화'. 대표적인 친일미술작품으로 꼽히는 이 그림 제작에 조선작가로는 김인승 박영선 심형구 손응성 이봉상 임응구 김만형 등이 참여했다.
대표적인 친일행위는 그가 단광회(丹光會)에 참여하여 활동한 점이다. 이 단체는 ‘성전하(聖戰下) 미술보국(美術報國)에 매진한다’는 취지로 1943년 2월 조선인·일본인 화가 19명으로 결성됐는데 ‘선전’ 추천작가 중심의 최고 엘리트화가 집단이었다. 이 단체에서는 1943년 8월 조선인 징병제가 실시되자 이를 기념하여 회원 전원이 4개월간 합숙하여 1백 호 크기의 〈조선징병제시행기록화〉(사진)를 제작하였다.
이 그림은 강제징집된 조선청년을 중심으로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장, 지원병훈련소장, 총력연맹 사무국 총장, 경기도지사, 친일파 윤치호 등이 등장하여 징병으로 나가는 조선인 청년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내용이다. 특히 이 그림은 인물 주위로 남산의 조선신궁(朝鮮神宮)·병사들의 행진모습 등을 곁들이고 있어 일본정신 고취와 성전(聖戰)참여를 조장하고 있다.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실력파 이처럼 친일파 화가의 선봉장이 되기까지 심형구의 행적은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실력파답게 화려하기 그지없다. 심형구는 용인의 지주집안 출신으로 아버지 심종협 (沈鐘協)은 광주군수를 지냈고, 할아버지 심원용(沈遠用)은 교회 장로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인정받았으나 집안의 반대로 갈등을 겪다가 형 심원구의 도움으로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소학교 때 서울로 옮겨 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중학교)를 다녔고, 같은 반의 정현웅(鄭玄雄:월북화가)과 어울려 그림공부에 주로 관심을 쏟았다고 한다. 졸업 후 일본에 건너가 도쿄미술학교 유화과를 두 번 실패하고 가와바다화학교 (川端畵學校)에서 데생 훈련을 거친 후 다시 응시하여 합격하였다(1931).
도쿄미술학교 재학 시절 1년 늦게 입학한 김인승과 만나 두 사람은 모두 실력파 학생들로 친교를 두터이 가졌다. 또 이들은 '선전' 참여와 친일활동으로부터 광복 후 이대 미대 교수를 지내기까지 평생을 함께 하게 된다.
심형구의 소질과 탁월한 실력은 이미 도쿄미술학교 재학 시절에 제15회 '선전'(1936)에 첫 출품하여 [노어부]로 특선한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연이어 다음해인 16회 '선전'에서는 풍경화 [해변]으로 총독상을 받았고, 17·18회에는 물론 제19회(1940)에도 [소녀들]로 연속 특선하여 추천작가의 영광을 안았다. 19회 때는 앞서 거론한 [흥아를 지키다]를 함께 출품하기도 하였다.
그 때 이인성과 김인승도 연 4회 특선의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추천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선전'(1944)에는 심사위원격인 '참여작가'의 특혜를 받기도 하였는데, 이는 역시 그의 열렬한 친일활동에 대한 대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도쿄 시절에는 일본의 권위 있는 '제국미술원전람회'와 '문부성미술전'에 출품하여 특선과 입선을 한 바도 있었다. 이러한 심형구의 작품세계는 인물화나 풍경화의 넓은 붓질과 대담한 색면 처리, 황갈색조의 향토색 소재나 형식으로 역시 당시 도쿄미술학교풍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이러한 심형구에 대하여, 그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1977년 문화화랑에서 가진 '심형구 회고전' 화집의 발문을 쓰면서 '부드러운 인품과 성실한 자세'를 높이 산 바 있다. 회고전은 미망인 김자경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심형구가 그러한 인품과 생활자세로 일제 말 친일행각에 앞장 섰으니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을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생각할수록 끔찍한 일이다.
심형구도 광복 직후 '조선미술건설본부' 결성시 김은호, 이상범, 김기창*, 김인승, 김경승, 윤효중과 함께 친일파로 분류되어 제외당했다. 그러나 성악가로 일제에 부역했던 부인 김자경과 친일여성의 선두주자인 김활란*의 친분으로 이화여고 미술교사를 하다 1945년 최초로 미술과를 이화여대에 창설하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심형구는 이대 미대 교수와 박물관장을 지낸 것을 제외하면 9년여의 미국생활(1949∼58) 탓에 광복 후 화단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또한 55세(1962)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김은호, 김기창, 김인승 등 친일작가의 경우와 달리 3·1 문화상이나 문화훈장, 예술원 회원의 그 흔한 영예(?)를 누리지 못하였다.
<광화문(光化門)>
■ 이태호(전남대 교수·미술사,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심형구 (沈亨求, 1908~1962) 한국의 서양화가. 호(號)는 운봉(雲峰). 경기도 용인(龍仁), 본관 청송(靑松).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장 저서(작품) 수변|포우즈|피리소리
1935년 서양화가로 첫 입문. 서양화가로 성악가 김자경의 남편입니다. 도쿄 미술대학에서 유화를 공부했습니다. 해방 후 이화대학 미술대학을 창립하고 同 대학 교수와 박물관장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49년부터 9년간 미국에서 생활해 화단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54세의 나이에 화진포에서 사고(익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29년 일본으로 가서 1931년 도쿄 미술 학교(東京美術學校)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 이 때 김인승(96)을 만나 평생 교우 관계를 맺었다. 1936년 재학 중에 제15회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에 [노어부(老漁夫)]를 출품하여 특선을 하고, 이듬해 제16회 선전(鮮展)에 [부인상(婦人像)]⋅[해변(海邊)]을 출품하여 조선 총독부상(朝鮮總督府賞)을 받았다. 그 뒤 광복되기 전까지 선전에 계속 특선되어 재능을 인정받았다.
1938년 도쿄 미술 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5년 동안 이화 여자 고등 학교(梨花女子高等學校) 교사로 있었다. 1939년 서울 화신 화랑(和信畫廊)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1940년 선전 추천 작가가 되어 김인승⋅이인성(453)와 함께 ‘추천 작가 3인전(三人展)’을 가졌다.
일본이 전시(戰時) 체제를 구축해 가던 무렵, 조선 총독부가 주최하는 선전의 한국인 추천 작가는 김인승⋅심형구⋅이인성(453)뿐이었는데, 이에 걸맞게 2차 대전(1939~1945년)에 복무하는 군인을 그린 [흥아(興亞)를 지키다]를 1940년 제19회 선전에 출품하는 등 친일적인 행각도 벌였다.
1941년 김자경(金慈璟, 1917~1999, 한국의 성악가이며 교육자)과 결혼하였고, 1945년 이화 여자 대학교(梨花女子大學校)에 미술과를 창설하여 예술 대학장이 되었으며, 서울 특별시 문화 위원을 지냈다. 1949년 예술원(藝術院) 회원이 되었고, 1949~1958년 미국 중서부 일리노이주 아델피 대학교(Adelphi University)에서 객원 교수로 있었다.
1958년 귀국한 뒤 심장마비로 죽을 때까지 이화 여자 대학교에서 교수와 박물관장을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심형구 씨는, 명화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수제자이고, 이화여대 초대 예술대학장, 이화여대 박물관장이었으며, 부인 김자경씨는, 성악가이며, 김활란과도 교우가 깊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國展) 심사 위원과 초대 작가를 지냈고, 목우회(木友會) 회원이었다. 1963년 서울 신문 회관(新門會館)에서 ‘심형구 유작전’이 열렸다.
작품경향은 사실적 자연주의로 일관하면서 인물화와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대표작으로는 「수변(水邊)」(1938)·「포우즈」(1939)·「피리소리」(1959) 등이 있다. 작품은 인상파(印象派, impressionism)적 시각을 근저로 한 사실적(寫實的)이면서 서정적 분위기를 풍긴다. 작품으로 [수변(水邊)](서울 한국 은행)과 [향원정(香園庭)](이화 여자 대학교) 등이 있다.
심종협[沈鍾協/1882.9~1950] 前 경기도 광주군수의 아들.
▲ 2011년 7월 26일 웬만한 미술관보다 더 많은 작품을 보관하고 있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 한국은행 본점 1층 창고의 모습. 한은은 6.25전쟁 이후 미술가들을 후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내 유명 작가들의 작품 1300여점을 매입했다. /조선일보DB
■ 참고문헌 심형구, [시국과 미술], {신시대}, 1941.10. 『한국현대미술전집(韓國現代美術全集)』7(한국일보사, 1978) 『심형구화집(沈亨求畵集)』(문화화랑, 1977)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4월 1일). 〈심형구 :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 (이태호)〉, 《친일파 99인 3》 역사문제연구소 (2003년 4월). 〈일제를 위하여 붓을 잡은 화가들〉,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비의책 15)》
■ 참고 작품사진 심형구, [흥아를 지키다], 1940년 작 유화. 심형구, [기관총을 쏘는 병사], 조선식산은행사보 {회심}지 1944년 2월호 삽화.
〈표13〉전시파시즘기 친일지식인의 잡지 기고글(필자별 주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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