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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 심형구 (沈亨求)

草霧 2013. 12. 10. 12:05

 

 

 

음악·미술

 

심형구 (沈亨求, 19081962)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

 

 

심형구(1908-1962)[흥아(興亞)를 지키다](1940년작, 조선 미전 입선작)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도쿄 미술학교(2년제 대학) 졸업 

1941년 조선미술가협회 서양화부 이사

1944'선전' 참여 작가

 

심형구(沈亨求, 1908년 6월 4일 ~ 1962년 8월 6일[1])는 한국의 서양화가로, 성악가 김자경의 남편이다. 호는 운봉(雲峰), 본관은 청송이며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이다.

 

경기도 용인군의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 심종협조선총독부 관리였다.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서 정현웅을 만나 함께 그림 공부를 했다. 이후 도쿄에 유학하여 도쿄 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했다.

 

도쿄 미술학교 재학 중이던 1936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노어부〉를 출품하여 특선에 입상하면서 화단에 등단하였고, 이후 연속으로 특선으로 입상해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향토적 소재를 황갈색조로 다룬 심형구의 인물화와 풍경화는 붓질과 색면의 처리 기법이 당시 도쿄미술학교의 화풍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잡지 《신시대》에 미술도 군국주의에 복무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친일 논리를 담은 〈시국과 미술〉을 발표하는 등 친일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황도학회 발기인, 조선미술가협회 서양화부 이사, 단광회 회원으로 친일 단체와 친일 미술인 모임에 참여했고,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는 일본군을 묘사한 〈흥아를 지킨다〉, 조선식산은행 사보 속표지화인 〈기관총을 쏘는 병사〉 등 친일 미술 작품도 다수 남겼다. 전쟁을 선동하는 친일 전람회인 반도총후미술전람회에도 초대 작가로 참가해 출품했다. 친일 작품의 창작 행적과는 별도로 화풍 자체가 일본풍이라는 지적도 있다.

 

광복 후 이화여자대학교에 미술대학을 하고 미대 교수와 박물관장을 지냈다. 1949년부터는 9년간 미국에서 생활하였으며, 1962년 화진포에서 사고로 익사했다.

 

심형구 夫人... 김자경[金慈璟/1917.9.9~1999.11.9] 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 소프라노 성악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미술 부문에도 선정되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많은 인물을 선정하지 않은 친일파 708인 명단에 미술계에서 포함된 사람은 심형구와 김은호 뿐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에는 아버지 심종협도 함께 들어 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딸 : 심영혜(1943 ~ )
  • 아들 : 심홍(1945 ~ )
  • 아들 : 심현식(1954 ~ )
  • 조선미술가협회
  • 단광회
  • 심종협
  • 김자경
  •  

     

        

     

     

    <초상(草上, 풀밭 위)>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 등장 작가

    이번 칼럼은 일제 강점기 활동했던 우리 화가들의 작품엽서들을 보며 한국 미술사의 흐름을 잠깐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한국 최초의 미술교육기관은 1911년에 세워진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 출신의 신인들이 1920년대 동양화단의 중심인물로 전통회화의 명맥을 이어갔다고 하지요. 이 경성서화미술원에서 춘전 이용우, 이당 김은호, 청전 이상범, 심산 노수현, 소정 변관식, 의재 허백련 등 한국 근대 동양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들이 배출됐습니다.

     

    조선왕조 말기 화단을 마지막으로 꽃피운 대표적인 인물은 오원 장승업(張承業, 1843~1897)과 해사 안건영(安健榮, 1841~1876)입니다. 특히 장승업은 안견,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3대화가중 한명으로 손꼽히지요. 19세기말에는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과 소림(小琳) 조석보(趙錫普, 1853~1920)가 조선화단을 대표했습니다. 이들은 중국 유학까지 다녀온 조선의 대표적인 산수화가들이었습니다. 그들 문하생으로 1915년 최초의 일본 동경 미술대학 유학생인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이 한국인 서양화가의 효시가 됐다고 합니다.      
         
    이번 소개하는 미술작품 엽서는 당시 조선총독부에선 1922년에 시작해 1944년까지 계속된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鮮展)]때 등장한 엽서들(19회부터 23회)입니다. 이 선전(鮮展)은 일본의 문전(文展)을 모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선전은 일본이 시행한 문화정책의 일환이었지요. 심사위원들은 모두 일본인 화가였다고 합니다.

     

    이 선전을 통해 서양화가로 부각된 작가가 이인성, 김인승, 심형구 등입니다. 이들은 나중 최고로 인정받는 심사참여자격까지 획득하지요. 그러나 김은호, 김기창 화백과 함께 대표적 친일미술가로 지탄을 받고도 있습니다. 45년 해방 후엔 미술계가 좌우익으로 나뉘어 난맥상을 이루다가 49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國展)]로 다시 탄생케 됐습니다. 이 국전은 1981년 제30회를 끝으로 폐지되고, 후신으로 대한민국미술대전[약칭 미전(美展)]으로 개편됐지요.

     

    또 47년 7월 일본에서 유학한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등이 주축이 되어 화가 동인그룹인 '신사실파'를 형성하고 1948년 12월 창립전을 열었습니다. 이 때를 한국추상미술의 기점으로 삼고 있으며 신사실파의 주축인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은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효시가 됐다는 것입니다.  

     

    경기도 용인출신. 서양화가로 성악가 김자경의 남편입니다. 도쿄 미술대학에서 유화를 공부했습니다. 해방 후 이화대학 미술대학을 창립하고 同 대학 교수와 박물관장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49년부터 9년간 미국에서 생활해 화단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54세의 나이에 화진포에서 사고(익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심형구 - 기관총을 쏘는 병사 ⓒ민족문제연구소

     

     

    조직적인 친일미술활동의 총책격

    1940년대에 들어서 일제의 폭압이 강화되면서 미술계에도 군국주의에 동조하자는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성전'(聖戰) 승리를 위해 병사들이 총을 들고 싸우는 것 못지않게 후방의 화가들도 미술의 무기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전

     

    ▲ △ 심형구, <흥아를 지키다>, 1940 - 조선 미전 입선작, 이 작품은 본격적인 친일 주제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선도 사례이다. △심형구, < 기관총을 쏘는 병사>, 1944.

     

    ▲ 일제의 미술정책은 △조선 미술의 고유성 말살, 전통 양식 파괴와 일본식 화풍을 강요 △일제 식민통치와 황국신민화 선전교화수단으로 악용 △미술계의 관변화와 친일화 고착 △전시 파시즘 미술 육성 등이었다. 중일전쟁 후 화필보국, 성전미술, 신체제미술, 총후미술, 결전미술 등의 이름으로 전시파시즘 미술이 등장했다. 조선인 화가 다수가 일제의 전시총동원체제에 협력했다. 미술은 전쟁을 찬양하고 총력전을 독려하는 선전도구로 전락했다. 상당수 조선인 화가들 또한 화필보국의 친일배로 변절하였다. 20세기 제국주의가 자행한 잔혹한 식민지 수탈과 전쟁의 광기와 비참함. 예술의 자살이라 할 전쟁미술과 친일미술의 추태.(<전시를 열면서>중에서), 황군에 부채를 헌납한 화가 △김용진(1882-1968) 1938년 황군위문용 부채그림 조선총독부에 헌납 △정종녀(1914-1984) 결전미술전 출품, 대동아전쟁 출정자와 입영자에게 <수호 관음불상> 헌납.

     

    ▲ 친일미술이란? △내선일체 황국식민화 정책에 호응 △일제의 대외 침략전쟁을 찬미, 예술의 군국주의화 추구 △징병, 징용, 정신대 등 강제동원과 공출을 비롯한 전쟁물자 수탈에 협력 △각종 친일단체나 친일행사 등 총후 활동에 복무. ⓒ 이창길기자 / 2004 서대문형무소

     

     

    그 핵심을 담은 글이 최근배의 [미술계의 제문제]({조광}, 1939. 1)와 구본웅의 [사변과 미술]({매일신보}, 1940. 7. 9) 그리고 심형구의 [시국(時局)과 미술]({신시대}, 1941. 10) 등이다. 심형구는 [시국과 미술]에서 아예 일본인의 입장이 되어 독일 파시즘 미술의 예를 들어가며 미술의 무기화를 위해서는 그 전문성을 가지고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삽화나 포스터 제작에 참여해야 된다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금일은 문학이나 예술이나 무엇이나 좀더 국민생활이라 하는 것과 직접으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학을 위한 문학, 미술을 위한 미술은 벌써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 사람은 일본 사람으로서의 국민생활을 좀더 향상시키자는 점만을 생각하게 된다는, 당연 협소한 경지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반 문화인은 각자 각자가 자신의 순수한 목적만으로만 생각하여 왔다. 이는 예술가만을 책할 수 없겠으며, 모든 사람이 국가에 봉사한다는 목적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하등의 목적이 없이 민족이상도 국가의식도 가지지 않는 예술이요, 미술이라면 무가치한 물건이다.

     

    한 민족의 예술이라는 것은 그 민족을 강대하게 한다는 목적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경에서는……일류화가가 신문삽화나 무대장치 같은 것을 하게 될 때 무대장치나 삽화가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 정도가 높아졌다 한다.

        

     

     

     

    , 훌륭한 회화를 제작하는 동시에 그와 동일한 기백으로서 삽화나 무대나 자기 기능을 충분 발휘한다는 일이 미술을 생활화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 화실에서 조용히 앉아서 제작만 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보겠다.……필요하다면 포스터나, 책의 장정이나, 극단으로 성냥곽 레텔이라도 소위 대가가 그려도 좋겠으며 또한 그려야 될 줄 생각한다. 좁은 문을 나와서 독선고립주의는 청산해야 될 줄 안다.>

     

    결국 화가 자신들의 일층의 자각과 노력을 요구하게 된다. 심형구는 위와 같은 시국미술관에 걸맞게 군국주의적 경향의 삽화나 그림을 그렸고, 일제 말 조직적인 친일활동의 총책격으로 선봉장에 나섰다.

     

    그가 개인적으로 그린 전쟁 선양의 작품으로는 1940년 제19'선전'(朝鮮美術展覽會)에 출품한 [흥아(興亞)를 지키다]와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의 속표지 그림 [기관총을 쏘는 병사](1944. 2) 등이 알려져 있다.

     

    [흥아를 지키다]는 유화로 총칼을 들고 보초를 서는 병사의 뒷모습을 담은 것이다. 초소에서 먼 산풍경을 바라보며 대동아공영의 '성전' 승리를 꿈꾸는 병사의 표정이 결연하다. [기관총을 쏘는 병사]는 연필소묘에 담채를 가한 소략한 삽화로 기관총을 중심으로 사수와 조수의 상반신을 그린 것이다.

     

    예비탄창을 들고 웅크린 조수의 자세나 적을 향한 눈초리는 매섭기 그지없다. 이처럼 전쟁에 광분한 일제의 군국주의에 부화뇌동하는 주제의 그림 제작에 적극적이었던 만큼 심형구는 단체활동에서도 선도적이었다.

        

    해인사 가는길

     

    그는 1941222일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을 회장으로 하여 '시국하의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맹세'하면서 결성된 '조선미술가협회'에 서양화부 이사로 참여한다. 이 단체에는 내선일체를 내세워 일본인들 관료 화가들과 함께 김은호*, 이상범, 이영일, 이한복(이상 서양화부), 김경승(조각부) 등이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심형구는 이들보다 한 급 높은 이사의 위치였다.

     

    더욱이 조선인 이사로 {매일신보} 학예부장인 백철*도 있었으나 조선인 화가로는 유일하게 심형구가 뽑혔다. 친일활동을 인정받아 그러한 위치에까지 오른 것이다.

     

    한편, 심형구는 그 예우에 답하기 위하여 문인들과 더불어 시국좌담회, 강연회 등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는 조선미술가협회가 황민문화(皇民文化) 건설을 보다 강고히 하기 위해서 조선문인협회, 보도사진협회 등 11개 예술단체들과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소속으로 결합되면서 생긴 예술가 단체 연락협의체 활동의 일환이었다.

        

    그리하여 심형구는 '조선미술가협회'를 이끄는 조선인 화가의 행동대원이 되었다. 지방을 순회하면서 '성전' 승리를 위해 농민에게는 증산을, 화가들에게는 그것을 작품화하도록 부추겼으며, '선전미술협회''보도사진협회' 등에도 관여하였다. 또한 194211'조선미술가협회'가 주최하여 첫 전람회를 갖은 '반도총후미술전'에 김인승*, 김기창*, 장우성 등과 함께 초대작가로서 3(1944)까지 참가하였다.

        

     

     

     

    이 전시회는 '선전'을 압도한 일제 말기의 대규모 친일지향의 전람회였다. 여기에 출품된 주제들은 '방공훈련', '징병제도를 맞이하며' 등 주로 군국주의에 야합하는 내용이었다. 심형구의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대표적인 친일미술 활동은 김인승*, 박영선, 김만형, 손응성, 이봉상, 임응구 등과 함께 '단광회'(1943)에 참여한 일이다.

     

    그리고 심형구가 자행한 친일활동의 백미는 '황도학회'의 결성 발기인에 낀 사실이다. 안석주와 함께 참여한 황도학회는 조선인을 황국신민화 (皇國臣民化)하려는 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황도교육'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이다. 특히 이를 통해서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당대의 문화계 인사로서 심형구의 정치적 수완과 탁월한 능력을 충분히 엿볼 수 있으며, 역시 아무나 친일파가 되는 것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다.

        

     

     '조선 징병제 시행기념 기록화'

     

    19438월 조선에서 징병제가 실시되자 단광회 소속 조선인과 일본인 작가 19명이 4개월에 걸쳐 공동제작한 '조선 징병제 시행기념 기록화'. 대표적인 친일미술작품으로 꼽히는 이 그림 제작에 조선작가로는 김인승 박영선 심형구 손응성 이봉상 임응구 김만형 등이 참여했다.

     

    대표적인 친일행위는 그가 단광회(丹光會)에 참여하여 활동한 점이다. 이 단체는 ‘성전하(聖戰下) 미술보국(美術報國)에 매진한다’는 취지로 1943년 2월 조선인·일본인 화가 19명으로 결성됐는데 ‘선전’ 추천작가 중심의 최고 엘리트화가 집단이었다. 이 단체에서는 1943년 8월 조선인 징병제가 실시되자 이를 기념하여 회원 전원이 4개월간 합숙하여 1백 호 크기의 〈조선징병제시행기록화〉(사진)를 제작하였다.

     

    이 그림은 강제징집된 조선청년을 중심으로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장, 지원병훈련소장, 총력연맹 사무국 총장, 경기도지사, 친일파 윤치호 등이 등장하여 징병으로 나가는 조선인 청년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내용이다. 특히 이 그림은 인물 주위로 남산의 조선신궁(朝鮮神宮)·병사들의 행진모습 등을 곁들이고 있어 일본정신 고취와 성전(聖戰)참여를 조장하고 있다.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실력파

    이처럼 친일파 화가의 선봉장이 되기까지 심형구의 행적은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실력파답게 화려하기 그지없다. 심형구는 용인의 지주집안 출신으로 아버지 심종협 (沈鐘協)은 광주군수를 지냈고, 할아버지 심원용(沈遠用)은 교회 장로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인정받았으나 집안의 반대로 갈등을 겪다가 형 심원구의 도움으로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소학교 때 서울로 옮겨 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중학교)를 다녔고, 같은 반의 정현웅(鄭玄雄:월북화가)과 어울려 그림공부에 주로 관심을 쏟았다고 한다. 졸업 후 일본에 건너가 도쿄미술학교 유화과를 두 번 실패하고 가와바다화학교 (川端畵學校)에서 데생 훈련을 거친 후 다시 응시하여 합격하였다(1931).

     

    도쿄미술학교 재학 시절 1년 늦게 입학한 김인승과 만나 두 사람은 모두 실력파 학생들로 친교를 두터이 가졌다. 또 이들은 '선전' 참여와 친일활동으로부터 광복 후 이대 미대 교수를 지내기까지 평생을 함께 하게 된다.

        

    심형구의 소질과 탁월한 실력은 이미 도쿄미술학교 재학 시절에 제15'선전'(1936)에 첫 출품하여 [노어부]로 특선한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연이어 다음해인 16'선전'에서는 풍경화 [해변]으로 총독상을 받았고, 17·18회에는 물론 제19(1940)에도 [소녀들]로 연속 특선하여 추천작가의 영광을 안았다. 19회 때는 앞서 거론한 [흥아를 지키다]를 함께 출품하기도 하였다.

     

    그 때 이인성과 김인승도 연 4회 특선의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추천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선전'(1944)에는 심사위원격인 '참여작가'의 특혜를 받기도 하였는데, 이는 역시 그의 열렬한 친일활동에 대한 대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도쿄 시절에는 일본의 권위 있는 '제국미술원전람회''문부성미술전'에 출품하여 특선과 입선을 한 바도 있었다. 이러한 심형구의 작품세계는 인물화나 풍경화의 넓은 붓질과 대담한 색면 처리, 황갈색조의 향토색 소재나 형식으로 역시 당시 도쿄미술학교풍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이러한 심형구에 대하여, 그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1977년 문화화랑에서 가진 '심형구 회고전' 화집의 발문을 쓰면서 '부드러운 인품과 성실한 자세'를 높이 산 바 있다. 회고전은 미망인 김자경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심형구가 그러한 인품과 생활자세로 일제 말 친일행각에 앞장 섰으니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을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생각할수록 끔찍한 일이다.

     

    심형구도 광복 직후 '조선미술건설본부' 결성시 김은호, 이상범, 김기창*, 김인승, 김경승, 윤효중과 함께 친일파로 분류되어 제외당했다. 그러나 성악가로 일제에 부역했던 부인 김자경과 친일여성의 선두주자인 김활란*의 친분으로 이화여고 미술교사를 하다 1945년 최초로 미술과를 이화여대에 창설하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심형구는 이대 미대 교수와 박물관장을 지낸 것을 제외하면 9년여의 미국생활(194958) 탓에 광복 후 화단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또한 55(1962)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김은호, 김기창, 김인승 등 친일작가의 경우와 달리 3·1 문화상이나 문화훈장, 예술원 회원의 그 흔한 영예(?)를 누리지 못하였다.

     

        

    <광화문(光化門)>

     

     

    이태호(전남대 교수·미술사,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심형구 (沈亨求, 19081962)

    한국의 서양화가. ()는 운봉(雲峰). 경기도 용인(龍仁), 본관 청송(靑松).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장 저서(작품) 수변|포우즈|피리소리

     

    1935년 서양화가로 첫 입문. 서양화가로 성악가 김자경의 남편입니다. 도쿄 미술대학에서 유화를 공부했습니다. 해방 후 이화대학 미술대학을 창립하고 대학 교수와 박물관장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49년부터 9년간 미국에서 생활해 화단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54세의 나이에 화진포에서 사고(익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29년 일본으로 가서 1931년 도쿄 미술 학교(東京美術學校)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 이 때 김인승(96)을 만나 평생 교우 관계를 맺었다. 1936년 재학 중에 제15회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노어부(老漁夫)]를 출품하여 특선을 하고, 이듬해 제16회 선전(鮮展)[부인상(婦人像)][해변(海邊)]을 출품하여 조선 총독부상(朝鮮總督府賞)을 받았다. 그 뒤 광복되기 전까지 선전에 계속 특선되어 재능을 인정받았다.

     

    1938년 도쿄 미술 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5년 동안 이화 여자 고등 학교(梨花女子高等學校) 교사로 있었다. 1939년 서울 화신 화랑(和信畫廊)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1940년 선전 추천 작가가 되어 김인승이인성(453)와 함께 추천 작가 3인전(三人展)’을 가졌다.

     

    일본이 전시(戰時) 체제를 구축해 가던 무렵, 조선 총독부가 주최하는 선전의 한국인 추천 작가는 김인승심형구이인성(453)뿐이었는데, 이에 걸맞게 2차 대전(19391945)에 복무하는 군인을 그린 [흥아(興亞)를 지키다]1940년 제19회 선전에 출품하는 등 친일적인 행각도 벌였다.

     

    1941년 김자경(金慈璟, 1917~1999, 한국의 성악가이며 교육자)과 결혼하였고, 1945년 이화 여자 대학교(梨花女子大學校)에 미술과를 창설하여 예술 대학장이 되었으며, 서울 특별시 문화 위원을 지냈다. 1949년 예술원(藝術院) 회원이 되었고, 19491958년 미국 중서부 일리노이주 아델피 대학교(Adelphi University)에서 객원 교수로 있었다.

     

    1958년 귀국한 뒤 심장마비로 죽을 때까지 이화 여자 대학교에서 교수와 박물관장을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심형구 씨는, 명화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수제자이고, 이화여대 초대 예술대학장, 이화여대 박물관장이었으며, 부인 김자경씨는, 성악가이며, 김활란과도 교우가 깊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國展) 심사 위원과 초대 작가를 지냈고, 목우회(木友會) 회원이었다. 1963년 서울 신문 회관(新門會館)에서 심형구 유작전이 열렸다.

     

    작품경향은 사실적 자연주의로 일관하면서 인물화와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대표작으로는 수변(水邊)(1938)·포우즈(1939)·피리소리(1959) 등이 있다. 작품은 인상파(印象派, impressionism)적 시각을 근저로 한 사실적(寫實的)이면서 서정적 분위기를 풍긴다. 작품으로 [수변(水邊)](서울 한국 은행)[향원정(香園庭)](이화 여자 대학교) 등이 있다

     

    심종협[沈鍾協/1882.9~1950] 경기도 광주군수의 아들.

     

     

    
	2011년 7월 26일 웬만한 미술관보다 더 많은 작품을 보관하고 있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 한국은행 본점 1층 창고의 모습. 한은은 6.25전쟁 이후 미술가들을 후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내 유명 작가들의 작품 1300여점을 매입했다. /조선일보DB

    ▲ 2011년 7월 26일 웬만한 미술관보다 더 많은 작품을 보관하고 있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 한국은행 본점 1층 창고의 모습. 한은은 6.25전쟁 이후 미술가들을 후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내 유명 작가들의 작품 1300여점을 매입했다. /조선일보DB

     

     

     

    참고문헌

    심형구, [시국과 미술], {신시대}, 1941.10.

    한국현대미술전집(韓國現代美術全集)7(한국일보사, 1978)

    심형구화집(沈亨求畵集)(문화화랑, 1977)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4월 1일). 〈심형구 :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 (이태호)〉, 《친일파 99인 3》

    역사문제연구소 (2003년 4월). 〈일제를 위하여 붓을 잡은 화가들〉,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비의책 15)》

     

     

    참고 작품사진

    심형구, [흥아를 지키다], 1940년 작 유화.

    심형구, [기관총을 쏘는 병사], 조선식산은행사보 {회심}19442월호 삽화.

     

     

     

    〈표13〉전시파시즘기 친일지식인의 잡지 기고글(필자별 주요 글)

    필자 제목 출전잡지 형태
    갈홍기종교적인식의 방법삼천리 1941년 12월호논설
    그리스도교의 인생관녹기 1940년(5권) 6호논설
    고승제전환기의 문화이론인문평론 1941년 1월호논설
    곽종원결전문학의 이념국민문학 1944년 4월호논설
    구자옥전선에서 진실 발휘조광 1943년 12월호논설
    김기진문화인에 격함신시대 1944년 9월호논설
    대동아전쟁송조광 1942년 2월
    김동인아부용조광 1942년 2월소설
    김동환국방관념과 상무열의 고취삼천리 1940년 7월호논설
    의무를 충실히하라재만조선인통신 1939년 2월호논설
    임전보국단 결성에 제하여삼천리 1941년 11월호논설
    伯林凱旋신시대 1841년 1월
    아세아 부흥과 내선일체동양지광1939년 4월호논설
    징병제 실시와 반도청년의 연성동양지광 1943년 3월호논설
    김문집조선민족의 발전적 해소론 서설조광 1943년 9월논설
    김용제
     
    전쟁문학의 전망동양지광 1939년 3월호논설
    내선일체의 노래동양지광 1939년 4월호
    아세아시집동양지광 1939년 7월호
    內鮮結婚我觀내선일체 1940년 1월호논설
    해신조광 1942년 2월호
    御東征녹기 1943년 2월호
    민족적 감정의 내적 청산으로동양지광 1939년 4월호논설
    김한경동양문화와 일본정신동양지광 1939년 2월호논설
    현대조선청년론동양지광 1939년 6월호논설
    청년의 성격과 그의 연성에 대하여동양지광 1943년 9월호논설
    김해강아름다운 태양조광 1942년 6월호
    김활란반도여성의 궐기삼천리 1941년 12월호논설
    최대임무동양지광 1942년 1월호논설
    여성의 무장조광 1942년 2월호논설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신시대 1942년 12월호논설
    뒷 일은 우리가조광 1943년 12월호논설
    노천명기원조광 1942년 2월호
    승전의 날조광 1942년 3월호
    지원병에게삼천리 1942년 1월호
    동방의 여인들신시대 1942년? 1월호
    어린 날개신시대 1943년 12월호
    박남규결혼의 인식내선일체 1940년 1월호논설
    내선일체생활의 인식으로내선일체 1940년 2월호논설
    박영희황국신민의 각오를 새롭게재만조선인통신 1939년 2월호기타
    전쟁과 조선문학인문평론 1939년 10월호논설
    임전체제하의 문학과 문학의 임전체제국민문학 1941년 11월호논설
    반도신체제의 기치: 신체제와 문학녹기 1940년(5권) 10호논설
    박인덕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삼천리 1941년 11월호논설
    미영타도 좌담회-미국 부인의 전쟁관동양지광 1942년 2월호좌담회
    동아여명과 반도여성대동아 1942년 5월논설
    의식주에 관한 필승의 길신시대 1943년 4월호논설
    박희도신동아 건설과 우리의 사명동양지광 1939년 4월호논설
    사변전도에 대한 각오동양지광 1939년 7월호논설
    배영운동강화론동양지광 1942년 8월호논설
    일사보국의 생각동양지광 1940년 1월호논설
    미영타도 좌담회-일본은 왜 싸우는가동양지광 1942년 2월호좌담회
    싱가포르 함락과 팔굉일우동양지광 1942년 3월논설
    백낙준미영의 民情과 식민 정책동양지광 1942년 2월호좌담회
    백철시국과 문화문제의 행방동양지광 1939년 4월호논설
    天皇陛下御親閱 특별관함식 배관근기삼천리 1940년 12월기타
    전쟁문학 일고인문평론 1939년 10월호논설
    금후엔 문화적 사명이 중대인문평론 1940년 7월논설
    서강백세계신질서 건설의 장래춘추 1942년 2월호논설
    세계전국의 전망춘추 1942년 5월호논설
    서광제신체제와 영화인문평론 1940년 11월호논설
    서정주스무 살 된 벗에게조광 1943년 10월호수필
    崔遞夫의 군속지망조광 1943년 11월호소설
    서춘준선시체제에서 전시체제로조광 1937년 12월호논설
    正業轉換에 대하야재만조선인통신 1939년 1월호논설
    조선과 총력운동신시대 1941년 2월호논설
    필승의 신념대동아 1942년 7월호논설
    송금선시대도 새로운 이날 여인으로 알아둘 예절신시대 1941년 1월호논설
    부인부대와 지원병삼천리 1941년 1월호논설
    신봉조적이여 보라조광 1943년 2월호논설
    신흥우태평양풍운의 전망삼천리 1941년 11월호논설
    조선기독교도의 국가적 사명동양지광1939년 2월호논설
    미영타도 좌담회-영국인의 민족성동양지광1942년 2월호좌담회
    신가파와 공영권대동아 1942년 5월논설
    신태악신내각과 오인의 각오녹기 1941년(6권) 11월호논설
    심형구시국과 미술신시대 1941년 10월호논설
    안용백우리 국민성과 반도인녹기 제3권 10호논설
    양주삼미영타도 좌담회-아메리카는 왜 싸우는가동양지광 1942년 2월호좌담회
    오긍선의무교육실시와 교육시설확충삼천리 1940년 9월호논설
    유각경시국과 여성의 각성삼천리 1938년 8월호논설
    유광렬쫓겨가는 미영세력신시대 1941년 1월호논설
    12월 8일과 우리의 각오조광 1942년 12월호논설
    의무교육과 징병제조광 1943년 2월호논설
    해군지원병제 실시와 반도청년의 영예조광 1943년 6월호논설
    징병제 감사문세와 그 의의조광 1943년 7월호논설
    대동전쟁의 聖戰 의식동양지광 1943년 9월호논설
    대동아전쟁의 史的 의의동양지광 1943년 9월호논설
    결전 국내태세의 강화조광 1943년 11월호논설
    태평양 전황과 총후의 결의조광 1944년 2월호논설
    필승회의와 국민의 실천조광 1944년 3월호논설
    유억겸황국과 余의 심경삼천리 1941년 4월호논설
    戰必勝功必取조광 1942년 2월호논설
    유진오소감삼천리 1940년 7월호논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신시대 1944년 9월호논설
    유치진대륙인식인문평론 1940년 7월호논설
    싸우는 국민의 자세국민문학 1943년 6월호논설
    윤치호조선인의 갈길을 알라재만조선인통신 1939년 2월호논설
    내선일체 철저화를 위하여동양지광1939년 2월호논설
    내선일체에 대한 소신동양지광1939년 4월호논설
    내선일체에 대한 이념조광 1940년 3월호논설
    수십만, 수백만에 달하도록삼천리 1940년 7월호담화
    극동의 결전과 오인의 각오삼천리 1941년 11월호논설
    결전과 시련동양지관 1942년 1월호기타
    산 역사의 주인공조광 1943년 12월호논설
    이광수지원병 장행가삼천리 1939년 12월호
    가끔씩 부른 노래동양지광 1939년 2월호
    신시대의 윤리신시대 1941년 1월호논설
    신체제하의 예술의 방향삼천리 1941년 1월호논설
    우리집의 노래신시대 1941년 1월호
    대화숙수양회 잡기신시대 1941년 4월호수필
    사변과 조선-국민의식의 앙양과 지위향상신시대 1941년 7월호논설
    싱가포르 함락되다신시대 1942년 3월호
    진주만의 九軍神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신시대 1942년 6월호논설
    앞으로 2년신시대 1942년 9월호논설
    전망녹기 1943년 1월호
    국민문학문제신시대 1943년 2월호논설
    이숙종비상시 부인보국삼천리 1938년 8월호논설
    전시하의 가정생활조광 1943년 1월호논설
    이종린鴻恩感泣대동아 1942년 7월호논설
    이창수지나사전 6주년과 대동아전조광 1943년 7월호논설
    중대한 시국에 처하야조광 1944년 2월호논설
    이 시련을 극복하라조광 1944년 8월호논설
    국민징용과 성업익찬조광 1944년 9월호논설
    인정식내선일체의 필연성에 대하여동양지광 1939년 1월호논설
    전시체제하의 조선경제동양지광 1939년 2월호논설
    동아권의 경제적 성격과 조선의 지위삼천리 1941년 1월호논설
    내선일체의 문화적 이념인문평론 1940년 1월호논설
    내선일체와 언어삼천리 1940년 3월호논설
    감히 도시의 청년에게 경고한다.동양지광 1943년 5월호논설
    희망의 농촌조광 1943년 10월호논설
    건전농촌과 모범부락조광 1943년 11월호논설
    장덕수전시체제하의 산업보국동양지광 1939년 3월호논설
    장기전을 각오하자동양지광 1942년 1월호논설
    미영타도 좌담회-美英敵性의 정체동양지광 1942년 2월호논설
    한 마음 한 뜻으로조광 1943년 12월호수필
    정춘수應戰의 이유 3가지동양지광 1942년 1월호논설
    주요한팔굉일우삼천리 1942년 1월호
    동양해방삼천리 1940년 12월호
    임전조선신시대 1941년 9월호논설
    루스벨트여 답하라신시대 1942년 1월호논설
    명기하라 12월 8일신시대 1942년 1월호
    상해조계 진주일에 왕군에게 보냄조광 1942년 2월호
    마음속의 싱가폴신시대 1942년 3월호
    戰必勝功必取신시대 1942년 4월호논설
    첫피신시대 1942년 9월호
    최저생활의 실천- 모든 물가가 군수품이다신시대 1943년 3월호논설
    12월7일의 꿈신시대 1942년 12월호
    채만식문학과 전체주의 -우선 신체제 공부를-삼천리 1941년 1월호논설
    최남선동방민족의 중원진출과 역사상으로 본 아세아제민족의 향방재만조선인통신 1937년 10월호논설
    만주가 우리에게 있다재만조선인통신 1937년 11월호논설
    만주건국의 역사적 유래신시대 1943년 3월호논설
    성전의 설문신시대 1944년 2월호논설
    최린자기 완성이 필요재만조선인통신 1939년 2월호논설
    대동아공영권과 고도국방삼천리 1940년 9월호 논설논설
    최재서전쟁문학인문평론 1940년 6월호논설
    사변당초와 나사변당초와 나수필
    전형기의 문화이론인문평론 1941년 1월호논설
    징병서원행국민문학 1943년 8월호수필
    최정희5월9일半島の洸 1942년 7월호수필
    군국의 어머님들半島の洸 1944년 2-4월수필
    야국초국민문학 1942년 11월호소설
    징용열차반도지광 1945년 2월호소설
    군국모 성찬半島の洸 1944년 6-7월수필
    함대훈지원병제훈련소 1일입영기인문평론 1940년 11월호수필
    함상훈구주대전의 신단계조광 1942년 10월호논설
    歐洲戰局의 1년조광 1942년 12월호논설
    조선학령아동의 의무교육 실시조광 1943년 1월호논설
    현영섭사변의 인류사적 의의동양지광 1939년 7월호논설
    내선일체의 세계사적 의의내선일체 1940년 1월호논설
    내선일체와 총후청년의 임무조광 1940년 5월호논설
    내선일체 완성으로 가는 길녹기 제3권 제1호논설
    국민정신운동과 우리의 임무조광 1940년 6월호논설
    현제명싱가포르 함락 감상동양지광 1942년 3월호논설
    황신덕비상시국과 가정경제삼천리 1938년 8월호논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