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서구적 지성론자에서 천황숭배론자로, 평론가 최재서(崔載瑞)

草霧 2013. 12. 12. 13:15

 

문학

 

최재서(崔載瑞, 창씨명 石田耕造, 1908∼1964)

 

 

서구적 지성론자에서 천황숭배론자로

 

 

 

 

창씨명 石田耕造

1908년 황해도 해주 출생

1941년 친일문학지 {국민문학} 주간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이사

1940.6 전쟁문학 인문평론
1940.7 사변당초와 나 인문평론
1941.1 전형기의 평론계 인문평론
1941.1.14 문화이론의 재편성 매일신보
1941.2 전형기의 문화이론 인문평론
1941.2 문학신체제화의 목표 녹기
1941.4 문학정신의 전환 인문평론
1941.8.2 징병감사와 우리의 각오 매일신보
1941.11 국민문학의 요건 국민문학
1942.3 나의 페이지 국민문학
1942.5-6 징병제 실시의 문화적의의 국민문학
1942.7 새로운 비평을 위하여 국민문학
1942.8 조선문학의 현단계 국민문학
1942.10 문학자와 세계관의 문제 국민문학
1943.4 선전의 효과 조선
1943.5 근로와 문학 국민문학
1943.6 사상전의 첨병 국민문학
1943.7 보도연습반(소설) 국민문학
1943.8 징병서원행 국민문학
1943.9 대동아의식에 눈뜨며 국민문학
1943.10 결전하의 내지 국민총력
1944.1.11 아세아의 해방 매일신보
1944.4 받들어 모시는 문학 국민문학
1944.5-8 비시의 화(소설) 국민문학
1944.12 금년의 신인군 국민문학
1945.2 민족의 결혼(소설) 국민문학

 

최재서(崔載瑞, 일본식 이름: 石田耕造 이시다 고조, 1908년 2월 11일 ~ 1964년 11월 16일)는 한국문학평론가이며 영문학자이다. 호는 석경우(石耕牛)이다.

 

황해남도 해주 출생이다.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에 유학하여 런던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귀국한 후 경성제국대학 강사를 거쳐 보성전문학교 영문과의 교수를 지냈다.

 

1930년대 데이비드 흄, T. S. 엘리엇 등 영국 평론가들의 이론을 주지주의 문학론으로 소개하며 모더니즘 계열의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박태원의 《천변풍경》과 이상의 〈날개〉를 리얼리즘 측면에서 분석하는 등 단순한 서구 이론의 소개에 그치지 않고 한국 문학에 적용했다는 점을 인정 받고 있다. 1939년 문예지 《인문평론》를 창간하고 주간을 맡았다.

 

손녀 수잔 최

 

1941년 조선총독부가 정책적으로 창간시킨 《국민문학》을 주재하고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를 지내면서 친일 문학계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활동했다. 《국민문학》을 통해 발표한 소설 세 편을 포함하여 〈전쟁문학〉(1940), 〈국민문학의 요건〉(1941), 〈전환기의 조선문학(일본어: 轉換期の朝鮮文學)〉(1943) 등 총 26편의 친일 작품이 발굴되었다.[1]

 

광복 후에는 평론 일선에서 물러났고 연세대학교한양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셰익스피어 작품 번역 등 영문학 연구에 전념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의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도 들어 있으며[2]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곽종원김기진김동인김동환김문집김상용김소운
김안서김용제김종한김해강노천명모윤숙박영호
박영희박태원백철서정주송영유진오유치진
이광수이무영이서구이석훈이찬이헌구임학수
장혁주정비석정인섭정인택조연현조용만주요한
채만식최남선최재서최정희함대훈함세덕홍효민

 

 

 

서구적 지성론자에서 동양적 국가주의자로

평론가, 영문학자. 호 석경우(石耕牛). 황해도 해주 출생.  최재서는 경성제대 영문과를 나와 영국 런던대학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 경성제대 강사, 보성전문학교와 법학전문학교 교수 등을 지내면서 영문학을 가르치고 문학평론을 썼다.

 

그는 종래의 경향문학 비평이나 인상주의적 비평에 대하여 주지주의적 비평을 시도, 우리 문학에 과학적 비평방법을 제시하였다. 광복후 연세대, 한양대 등에서 교수를 지내는 동안 문단과의 관계를 끊고 문학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이상은 어문각에서 출판한 {한국문예사전}에 나와 있는 최재서 항목의 설명이다. 일제 말기 문학가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친일활동을 했던 사람중의 하나였던 그의 경력에 친일부분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8.15 후 그가 친일경력 때문에 문단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강단에 설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이 그냥 '문단과의 관계를 끊고 문학연구에만 전념'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마치 그가 어떤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집념이 있어서 그 길을 선택한 것처럼 보일 소지를 남겨 주고 있다.

 

후세의 사람들도 애써 감추고자 했던 그의 친일경력은 그가 비평가였던 만큼 심정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기반을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친일의 문학논리를 구체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특히1940년 4월에 독일이 파리를 침공할 때 부터였다. 그 이전까지 그는 불안한 세계정세에 대해서 오히려 우려하고 있었고 그러한 데서 파생한 문화적 위기를 지성적 관점에서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중일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동안에 그는 다소 혼란된 모습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다가,그 자신이 주간으로 있었던 {인문평론}을 창간한 1939년 10월부터는 잡지 권두언에서 친일적 발언을 조금씩 하기 시작하였다.

 

최재서가 쓴 것으로 보이는 {인문평론} 창간호 권두언인 [건설과 문학]에는"세계의 정세는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독파(獨波:독일과 포르투갈) 간에는 벌써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구주의 위기를 고하고 있다.

 

그러나동양에는 동양으로서의 사태가 있고 동양민족에게는 동양민족으로서의 사명이있다. 그것은 동양 신질서의 건설이다. 지나를 구라파적 질곡으로부터 해방하여 동양에 새로운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함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명백한 일본의 중국침략을 서구로부터 중국을 보호하는 행위라고 비호하는 얼토당토 않은 친일적 주장이며, 서양과는 다른 일본 중심의 신체제와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는 친일 논리이다. 

 

이 무렵 그는 일본총독부의 공작으로 만들어진 친일문학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조직(1939.10)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영문학을 전공했고 주지주의와 같은 모더니즘을 옹호했던 최재서에게 현실인식 전환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은 동아시아에서 벌어졌던 중일전쟁보다는 유럽에서 벌어졌던 제2차 세계대전, 특히 1940년 4월에 있었던 독일의 침공으로 인한 파리의 함락이었다.

 

파리의 함락은 최재서에게는 바로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의 근대가 몰락하고 새로운 질서, 즉 독일 전체주의 중심의 새로운 세계질서로 재편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누구보다도 서구의 근대에 관심이 많았던 최재서에게 서구 근대의 몰락처럼 보였던 파리의 함락은 새로운 현실 인식을 요구하였고, 그것은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대결이라는 정세 판단 대신에 서구 근대의 개인주의와 문화주의의 부패 및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의 성장이라는 극히 잘못된 현실인식으로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된 생각이 가장 먼저 드러난 글은 1940년 6월 {인문평론}에 실린[전쟁문학]이다. 그는 이 글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반전적 관점에서 쓴{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비판하고 그 당시 참전하였던 독일학생들의 편지를 묶은 책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호전적 지향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그는 조선에도 중일전쟁을 다룬 전쟁문학이 나와 온 조선 사람이 전쟁에 참여하기를 바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오늘날 전쟁문학이라고 할 때 그것은 후세에 영구히 남아질 예술적 작품보다는 차라리 생생한 전장의 체험을 그대로 전할 만한 보고적인 작품을 일컫는 경우가 많다.

 

병대(兵隊)가 전장에서 어떠한 고생을 하고있는가, 그들은 전장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서로이야기하고 있는가, 이런 것을 아는 것이 현재의 우리로선 더 절실한 일이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들이 멀리 총후에 남아서 병대들과 더불어 전쟁의 감정을 나누고 그들과 매한가지로 국민의식에 연결되려면 이러한 전쟁문학이가장 손쉽고 또 현재 가질 수 있는 유일의 수단이 되기때문이다.([전쟁문학], {인문평론}, 1940. 6)

 

당시 벌어지고 있던 중일전쟁을 옹호하는 전쟁문학을 기대하던 그가 좀더 논리적으로 자신의 전환을 이야기한 것은 [전환기의 문화이론]과 [문학정신의 전환]이라는 글에서다.

 

그는 이 글에서 개인주의와 문화주의의 절멸과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의 발흥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조선은 이런 현실에 맞추어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가 이러한 현실 인식 위에서 그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국민문학이었다.

 

아직 국민 문학론의 구체적 내용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대체적인 흐름이 국민문학으로 모아져야 할 것임을 명백하게 주장하고 있다.

 

 

 

 

[전환기의 문화이론]에서는 "국민적인 분열과 항쟁의 의식을 고취하는 문화는 다만 그것만의 이유로서 국가적 입장에선 거부될 것이다. 계급적 분열을 고취하는 좌익문학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의식의 분열을 유일의 주제로 삼는 심리주의 소설이나 가족간 특히 부자간의 분열항쟁을 폭로하는 가정 비극소설이 오늘 백안시되는 것은 여상의 이유로써라도 해석된다.

 

여하튼 국민문화는 국민 전체에 통일을 주고 국민적 단결을 더욱 공고케 하게 만드는 문화가 아니어서는 아니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국민문화를 주장하였다.

 

또한 [문학정신의 전환]이라는 글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때 금번 전쟁은 우리가 즉시적인 전환을 행해야 할 것을 경고하는 동시에 그 전환의 목표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해득할 수 있다.

 

전환에 대한 경고란, 즉위기에 선 현대문화가 부패한 맹장으로서 절단되느냐 또는 신문화 창조의 배아로서 조장되느냐 하는 실로 결정적인 판단에 대응할 것을 의미한다.현대문화가 취할 바, 전환의 목표란 거지반 자명에 속한 일이 되고 만다. 

 

문화의 국민화, 이 이외에 길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문학정신의 전환도 이 전체적인 전환과 방향을 같이하게 된다"라고 강력하게주장한다. 이로써 신중하게 모색하던 새로운 문학론의 출구는 결국 친일문학론인 국민문학론으로 귀결되게 되었다.

 

 

 

'일선통혼'을 위한 민적법 수속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21. 6. 8)

 

친일문학지 {국민문학}의 창간과 친일적 국민문학론의 수립

1940년 8월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한 후에 일제 총독부는 용지 공급문제를 공식적인 이유로 모든 문학잡지를 폐간시켰다. 즉, 1941년 4월에 그동안 문학작품의 발표지로서 큰 역할을 차지했던 {문장}과 {인문평론}을 폐간시킴으로써 더 이상 문학지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 온 것이었다.

 

일제는그 후 최재서와 상의하여 국민문학을 주도할 수 있는 잡지를 내기로 결정하고 그것의 주간을 최재서가 맡아 보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협의 끝에 나온것이 친일문학지 {국민문학}이다. 

 

이 잡지는 '국체관념의 명징, 국민의식의앙양, 국민사기의 진흥, 국책에의 협력, 지도적 문화이론의 수립, 내선문화의 종합, 국민문화의 건설 등을 내걸고 노골적인 친일활동을 벌였다. 이 잡지의주간으로 있던 최재서는 이 시기 국민문학론을 주도하게 된다.

 

{국민문학} 창간호에 발표된 최재서의 [국민문화의 요건]은 이 점에서 친일적 국민문학론의 형성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논문이다.

 

이 논문이 나오기 전까지도 국민문학론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의 글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혼란을 면치 못한 것들이었다.

 

상식적인 의미에서 국민문학이라 하면 근대 이후 각 민족이 통일된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시민의 손에의해 자연스럽게 나온 문학을 가리키는 것이다. 영국에서 세익스피어,독일에서 괴테, 러시아에서 푸시킨 등은 바로 국민문학의 선구자에 해당하는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런 세계문학사적인 의미는 이 당시 일반적으로 말해지던 국민문학론과는 상당한 거리를 가지거나 혹은 병존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시기 일본 중심의 국민문학은 서구 근대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국민문학의 의미와 배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적 혼란을 바로잡아야 이른바 친일적 국민문학론이 성립될 수 있었다. 이것을 명시한것이 바로 {국민문학} 창간호에 실린 최재서의 글 [국민문학론의 요건]이다.

 

최재서는 이 글에서 국민문학은 "단적으로 말하면 유럽의 전통에 뿌리 박은 이른바 근대문학의 한 연장으로서가 아니라, 일본 정신에 의하여 통일된 동서의 문화 종합을 터전으로 새롭게 비약하려는 일본 국민의 이상을 담을 대표적인 문학으로서 금후의 동양을 이끌고 나갈 사명을 띠고 있는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이전의 국민문학의 논리적 혼란을 교묘하게 얼버무려 버리고 독특한 친일적 국민문학론을 수립하게 된다.

 

이제 국민문학론은 통일된 민족국가의 시민계급에 의해 수립되는 근대적인 의미의 문학이 아니라 일본 정신을 담는 문학으로 폭력적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문화주의로부터 국가주의 및 전체주의로의 전환이라는 문학정신의 전환을 막연하게 부르짖던 단계에서 벗어나 국민문학의 성격을 나름대로 규정할 정도로 논리적인 친일문학론을 펼친 최재서가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친일적 국민문학론에 입각하여 한층 더 그것을 정교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나온것이 '지방문학으로서의 조선문학'이라는 논리이다.

 

당시 조선어로 쓰여지던 문학이 차츰 사라져 가자 많은 사람들은 조선문학은이제 끝났다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최재서는 과거 2000만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하던 조선문학에 비해 이제 일본어로 작품활동을 하기 때문에 1억의 전국민을 대상으로 할 수 있어 조선문학이 절망하기는 커녕 오히려 규모가 커졌다고 변호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문학만을 국민문학으로 삼고 조선문학을 그것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에 대해 분개하면서 '지방문학으로서의 조선문학을 일본인들이 인정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인은 달래고,일본인에게는 구걸하고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 맺고 있다.

 

반도의 문화인들은 시대를 잘 깨닫고 대승적 문화의식을 파악하는 것이필요하며 그와 동시에 내지 동포가 또한 큰 도량을 갖고 신참 조선문학을 포용하며 너그럽게 그것을 길러 주는 이해와 열의를 갖는 것이필요하다.([조선문학의 현단계], {국민문학}, 1942. 8, 일문)

 

 

 

 

천황숭배론자로의 전락

1940년 6월의 파리 함락을 결정적 계기로 하여 문화주의로부터 국가주의와 전체주의로 전환하고, 1941년 11월 친일문학잡지 {국민문학}을 창간하면서'국민문학론'과 '지방문학으로서의 조선문학'이라는 논리를 제시한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더 이상 친일문학론의 논리적 구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그것은 수립되어 끝난 상태이고 이제 남은 것은 그것을 체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부터는 이전의 비평뿐만 아니라 대중적 호소력을 가질 수있는 소설을 통하여 자신의 견해를 풀어 보려고도 했다.

 

1943년 4월 {국민문학}에 발표된 최재서의 소설 [보도연습]은 그의 친일이 얼마나 근본적이고 확신에 찬 것인가를 잘 말해 주는 대표적인 것 중의하나이다.

 

1943년 4월 무렵이면 이전의 친일 문학단체였던 조선문인협회를 재조직하여 조선문인보국회라는, 더욱더 적극적인 친일단체가 수립되는시기이다. 이 단체는 '조선에 세계 최고의 황도문학을 수립하고자' 하는의도로 총독부와 친일문학인들에 의해 1943년 4월에 만들어진 것이다. 최재서역시 이 단체의 이사로 참가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친일 소설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중국의 전쟁을 취재할 언론계 종사원들을 미리 연습시키기 위하여 그 쪽과 지형이 비슷한 평양부근의 훈련소에서 미리 연습하는 주인공 송영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쓴 다분히 자전적인 소설이다.

 

주인공의 나이가 서른여섯이라든가, 영문학을 전공했던 것이라든가, 출판사 사장이라든가 하는 점을 미루어볼 때 이 작품이자전적 작품임은 쉽게 드러난다.

 

이 작품의 절정은, 마지막 부분에 이 훈련소에 나온 조선인 지원병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대목이다. 즉, 지원병 중 한 사람이 자신이 고향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동네 친구 중 한 사람이 징병으로 끌려가기보다는 지원병이 되는 편이 낫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그것을 한심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부분이다.

 

이 병사는"뱃속까지 완전히 황국신민이 되지 않은 자는 군대에 들어가서도 비참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물론 작중인물의 것이지만 표나게 내세우고 강조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작가 최재서의 생각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징용도 모자라 지원병을 종용하려고 이런 소설을 썼던 것을 볼 때 이 시기 최재서의 친일행각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일제의 탄압에 못이겨어쩔 수 없이 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무렵 최재서의 친일활동은 글에서 뿐만 아니라 문단활동에서도 여지없이드러난다. 그는 1943년 8월에 열린 제2회 대동아 문학자대회에 참가하기도하였고 [대동아의식에 눈뜨며]라는 일문으로 된 참관기를 1943년 9월{국민문학}지에 발표하였다.

 

대동아 문학자대회는 대동아의 문예부흥을 목표로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내 각국의 문학자가 참가한 회의인데 이는일본 문인보국회 주최로 1942년 이후 매년 열리는 것이었다. 그는 이 회의에서 행한 '조선문학운동의 보고'라는 강연에서 징병제와 해군 특별지원병제의시행으로 조선은 전쟁 방관자적 태도가 일소될 것이고 이는 조선문학에 절대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논리적인 차원을 떠나 심정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면서 그는 무조건적인 친일활동을 하게 되었고 이것의 극적인 표현은 '천황'에 대한 무한한 숭배로드러났다.

 

이는 [대동아의식에 눈뜨며]에서 시작되어 그 후 계속 이어져[받들어 모시는 문학]이라는 글에 이르면 그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그는 이글에서 '천황'을 받들어 모시고 있는 것의 행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만세일계의 천황을 모시고 있는 우리들의 행복은 새삼스럽게어느 누구에 비길 수도 없이 대견하고 고마운 일이다. 이 정도에 이르면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심정의 문제로서 최재서의친일활동이 어느 정도에 도달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최재서는 중일전쟁 이후 막연하게 동요하다가 파리 함락을 계기로 자신이 그나마 견지해 오던 모든 근대적 지성의 노력을 포기하고 전체주의와 국가주의로 전환하여 전쟁 옹호론자로 바뀌었다.

 

그 후 일본의 국가주의에맞는 '국민문학론'을 제창하고, 이어서 '지방문학으로서의 조선문학'을 국민문학의 일부로서 규정 짓기에 이르렀다.

 

그 후 그는 더 이상 논리로는 안되는 문제, 즉 일본인이 되는 것을 스스로 실행하기 위해 이시다로 창씨개명까지 하면서 천황숭배론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단활동 역시비평가로서의 문학활동 못지 않게 그의 친일행각에서 중요한 비중을차지한다.

 

이상의 그의 글과 행적은 일제의 탄압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하는것과 종류가 다름은 물론이고, 그 이후 그가 문단활동을 하지 않고 강단에서 학문활동을 했다는 것만으로 면제받을 수 없는 그런 성격의 것임을 확인할 수있다.

                                 

 

28일 오후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본관 앞에서 ‘민족고대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고려대 100년 속 친일잔재 1차 인물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이 명단에는 이 학교 설립자인 김성수 전 동아일보 사장을 비롯해 △고원훈 보성전문(고려대 전신) 교장 △유진오 전 총장 △이병도 전 교우회장 △신석호 전 고려대 교수, 보성전문을 나오거나 보성전문 교수로 있으면서 친일행위를 한 △선우순 △이각종 △장덕수 △최재서, 해방 뒤 고려대 교수를 지낸 조용만 등이 포함됐다

 

 

 ■ 김재용(문학평론가, 연세대 강사)

 

 

 

최재서 崔載瑞  1908∼1964.

문학평론가·영문학자.황해도 해주 출신. 호는 석경우(石耕牛). 필명은 학수리(鶴首里)·상수시(尙壽施).1931년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거쳐, 1933년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동국대학교 대학원장|한양대학교 교수 미숙한 문학|문학과 지성 | 전환기의 조선문학|문학원론 등

 

그 뒤 모교 강사 및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법학전문학교(法學專門學校) 교수를 거쳐 광복 이후 연세대학교(1949∼1960), 동국대학교 대학원장(1960∼1961), 한양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비평가로서 그의 문단 활동은 1931년≪신흥 新興≫ 5호에 브래들리(Bradley,A.C.)를 소개하는 <미숙한 문학>을 발표하면서부터 비롯되었고, ≪조선일보≫에 <구미현문단총관-영국편- 歐美現文壇總觀 英國篇>(1933)·<현대주지주의문학이론의 건설-영국평단의 주류->(1934)·<현대주지주의문학이론>(1934) 및 <비평과 과학>(1934) 등의 글을 발표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논문을 통하여 흄(Hulme,T.E.)·엘리어트(Eliot,T.S.)·리드(Read,H.)·리처즈(Richards,I.A.) 등의 문학이론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였다. 영문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그의 비평 방법과 태도는 한국 문학사에서 비평의 학문화의 모델, 또는 강단비평(講壇批評)의 원조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김환태(金煥泰)·김문집(金文輯)·이헌구(李軒求)와 더불어 이른바 프로비평의 방법론을 극복하려 하였다. 문학을 이데올로기의 전파 수단으로 보거나 또는 작가와 작품을 정치적인 맥락에서만 설명하려는 프로비평의 태도를 뛰어넘기 위하여 김환태와 김문집은 인상주의비평(印象主義批評)을, 최재서는 신고전주의를 중심으로 한 주지주의문학론을 제기하였다.

 

그는 당시의 문단에 올바른 비평 자세를 정립시켜보려는 뜻에서 <비평의 형태와 기능>(조선일보, 1935.10.)·<취미론 趣味論>(조선일보, 1938.1.) 등 비평의 본질과 방법론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취미론>에서는 개인의 취미에 근거를 둔 주관비평과 도그마의 통제를 받는 객관비평 모두를 비판하였는데, 후자에 대한 비판이 더욱 강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주지주의 문학론을 중심으로 한 영문학의 동향을 소개하는 한편, 당시의 한국 작가와 작품을 대상으로 한 평가와 해석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조선일보, 1936.10.)·<빈곤과 문학>(조선일보, 1937.2·3.)·<단편작가로서의 이태준(李泰俊)>(朝光, 1937.11.) 등의 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특히 이상(李箱)·박태원(朴泰遠)·이태준·김기림(金起林)·채만식(蔡萬植)·임화(林和)를 주목하였다.

 

이 밖에도 ‘지성’·‘풍자문학’·‘모럴’·‘취미’의 문제에 다대한 관심을 표시한 글도 여러 편 남겼다. 1938년에는 이러한 글들을 모아 ≪문학과 지성≫이라는 평론집을 펴내기도 하였다. 한편, 1939년≪인문평론 人文評論≫을 창간, 경영하면서 <전형기(轉形期)의 평론계>와 같은 친일의 색채가 짙은 글을 여러 편 발표하였다.

 

또한 친일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조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리고 1941년≪인문평론≫이 폐간된 뒤 친일문학지 ≪국민문학≫의 주간을 맡았으며, 또 일본어로 친일적인 평론을 다수 발표하기도 하였다.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에 가담하여 황도문학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한국 비평사에 있어서 영미 주지주의문학론을 바탕으로 하여 비평의 학문화를 꾀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저서로는 ≪문학과 지성≫ 외에, ≪전환기의 조선문학≫(1943)·≪문학원론 文學原論≫(1960)·≪최재서평론집≫(1961)·≪영시개설≫(1971)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햄릿≫·≪아메리카의 비극≫·≪주홍글씨≫·≪포우 단편집≫ 등이 있다.

 

 

모더니즘

이무영, 임화, 김정한, 최재서(왼쪽부터)

 

김기림 김유정 백철 유치환 이무영 등 탄생 100주년 문인들을 위한 기념문학제가 열린다. 한국작가회의(이사장 최일남)와 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이 주관하고 서울시가 후원한 ‘2008년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근대의 안 과 밖’이 9일 본행사인 심포지엄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이어진다. 학술 심포지엄 외에 일반대중을 위한 행사를 마련해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폭을 넓혔다. 16일에는 이무영 조벽암 이흡 심포지엄이, 31일엔 김기림 유치환 임화를 조명하는 특별 심포지엄과 백철 심포지엄이 열린다. 9월 17∼30일에는 ‘100주년 문학인 문학그림전’이, 10월 13일에는 임화 심포지엄이 예정돼 있다. 또, EBS를 통해 10월 김유정 유치환 임화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고, 11월에는 각 심포지엄에서 발표논문을 출간한다. 

 

 

최재서 평론집 '문학(文學)과 지성(知性)'

 

최재서(崔載瑞)의 평론집. B6판. 반양장. 304면.

 

저자의 첫 평론집으로, 1938년 [인문사(人文社)]에서 간행하였다. 이원조(李源朝)와 지은이의 서문, 그리고 목차와 본문의 순서로 짜여 있다.

 

본문은 <현대주지주의 문학이론(現代主知主義文學理論)> <비평과 과학> <비평의 형태와 기능> <지성옹호> <작가와 모랄> 등 19편의 논문과, <언어의 유통성과 진실성> <지식인의 노스탈지> <전통과 도그마> <불행한 비평가> 등 20편의 단평을 수록하고 있다.

 

지은이는 서문에서 ‘비평은 무엇보다도 지성의 영위’라는 근본적 태도를 밝히고 있다. < 현대주지주의 문학이론> <비평과 과학> 등에서는 흄(Hulme,T.E.)의 반낭만주의적ㆍ신고전주의적 문학론과 엘리어트(Eliot)의 전통의식, 리드(Read) 및 리처즈(Richards)의 이론들을 요약하여 소개하면서, 현대문학의 과도기적 혼돈성을 극복하기 위한 주지주의 문학의 건설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현대적 지성에 관하야> <지성옹호> 등의 글에서는 현대 정신으로서 지성의 확립과 모랄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당시에 유행하던 행동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문학발견시대>에서는 비평의 기능과 구실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작가와 독자의 중개인으로서 비평가의 구실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비평의 형태와 기능> <취미론> <쎈티멘탈론> 등에서는 비평의 세 가지 형태와 기능을 들고, 감성과 이론의 조화와 절충을 함께 하는 비평, 그리고 현대비평의 주지적 경향과 사회적 경향을 비교하고 있으며, 풍자문학의 성격,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한계도 지적하고 있다.

창작의 방법과 태도에 대해서는 <문학발견시대> <빈곤과 문학> <작가와 모랄> 등에서 “작가는 이미 탕진하여 고갈된 개성을 억지로 과장하여 표현하려 애쓰지 말고, 사회로 뛰어나가서 민중의 감정과 의욕과 예지를 발견하여야 한다.”는 점과 당시의 작가들이 실재성과 비속성을 혼동하여 재료의 빈곤에 대한 집착이 지나쳐 오히려 창작 정신의 빈곤을 낳았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는 이어 문학의 기능은 작가의 의도에 의존된다고 언급하였고, 거기에는 휴머니즘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나아가 작가는 독자에 대한 봉사와 계발 및 지도에 대한 필요를 자각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는 작가의 철저한 작업 의식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장인적 근성(匠人的根性)을 문학 정신이 기댈 도덕률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심들은 실제 비평으로 이어져, <현대시의 생리와 성격>에서는 김기림(金起林)의 장시(長詩) <기상도(氣象圖)>의 주제와 기교를 분석, 비판하고,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풍자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날개’와 ‘천변풍경(川邊風景)’에 관(關)하야>에서는 <천변풍경>이 세태풍정을 묘사함으로써 리얼리즘의 확대를 이룩하였으며, <날개>는 고도로 지식화된 소피스트의 주관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리얼리즘의 심화를 가져왔다고 평가하였다.

 

작가에게는 외부 세계이거나 내부 세계이거나 그것을 진실하게 관찰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성실성이 가장 중요하며, 그렇게 볼 때 <천변풍경>은 작품의 전체적 구성을 끌고가는 사회적 의식이 결여되어 있으며, <날개>는 삽화를 인위적으로 연결하는 데 그침으로써 모럴을 가지지 못하였다고 비판도 가하고 있다. 이 밖에도 채만식(蔡萬植)의 <명일(明日)>과 김유정(金裕貞)의 <따라지>를 각각 교훈과 풍자로 보고 있다. 또한 이태준(李泰俊)은 비속함을 실재성으로 예술화시킨 희소한 조선의 작가로 평가하는 글들과, 모윤숙(毛允淑)ㆍ임학수(林學洙)ㆍ이용악(李庸岳)의 시에 대한 비평의 글도 찾아볼 수 있다.

 

이 평론집은 저자가 도입한 외국의 주지주의 문학론을 바탕으로 카프문학이 표방하는 이념주의를 극복하는 활력소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창작의 방향과 태도를 비판적 안목에서 구한 점도 보인다. 또한 비평은 지성과 모럴로서 가치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비평의 현대화를 꾀한 점, 비평 이론을 실제 작품에도 적용시킨 점 등으로, 1930년대 한국 비평의 한 흐름을 대표하는 업적으로 평가된다.

 

최재서(崔載瑞, 1908-1964)1)는 김기림(金起林), 이양하(李敭河) 등과 더불어 30년대 한국 문단에 主知主義의 기치를 세운 비평가이다. 20년대 후반 한국 문단을 휩쓸던 카프 중심의 프로문학이 저조기에 들어서면서 부진했던 문단 상황에서 이러한 새로운 문학적 주장과 방법론은 의심할 바 없이 긍정적인 의의를 띤 것이었다. 따라서 4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러가지 친일문학활동을 하는 등 문제점2)들이 적잖이 부각됨에도 불구하고 30년대 그의 문학이론 연구와 실제 비평활동이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함은 부인할 수가 없다. 본고에서는 최재서의 비평활동을 초, 중, 말기로 나누어 그 전개양상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初期: 주지주의문학론
강단비평가로 문단에 데뷔한 최재서의 첫 논문은 영문학자답게 「未熟한 文學」(「新興」 5號 1931.7)이라는 영문학 논문이다. 그러나 문단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現代主知主義의 文學理論 建設」(「조선일보」, 1934.7.6-12) 및 「批評과 科學」(「조선일보」, 1934.8.31-9.7) 등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두 편 모두 주지주의 문학이론을 소개한 글인데, 전자에서는 우선 흄의 “不連續的 實在觀”을 소개하면서 휴머니즘의 반대편에 선 신고전주의를 제시했고, 다음 엘리어트의 「傳統과 個人的 才能」을 들어 歷史意識을 해설한다. 그리고 후자에서는 H. 리이드의 「精神分析과 批評」 및 I.A.리챠즈의 「詩와 科學」을 중심으로 소개하였다.

 

이러한 소개 평문은 문단을 주재하던 프로문학이 퇴조한 당시 상황에서는 내용 자체의 새로움도 중요하지만 난해한 이론을 설득력 있는 문장력으로 명료하게 설명했다는 데도 큰 의미를 지닌다. 그는 이러한 비평적 태도를 “作家와 讀者의 仲介人” 노릇3)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강단비평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그의 시도는 바람직한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2) 中期: 지성론, 모랄론
최재서는 “하여튼 文學傳統ㅡ즉 客觀的 規準에 의하야 개개의 作品을 통제하고 판단하려는 이 主知的 企圖는 外部的 權威를 극력 배척하고 오로지 「內部의 음성」에만 복종하려는 浪漫派로부터 당연히 공격을 받을 것이다.”4)라고 하여 주지주의를 작품에 대한 객관적 기준에 의한 통제 및 평가로 보고 있다. 따라서 그가 비평에서 知性의 개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여겨진다.

 

최재서는 「풍자문학론」(「조선일보」, 1935.7)과 「현대비평에 있어 개성의 문제」(「영문학연구」, 1936.4)를 통해 지성이 자신이 상정한 비평체계 속에서 기본적인 토대임을 밝히고 있다. 우선 「풍자문학론」에서 풍자의 바탕이 되는 것은 인생에서의 “실망을 해부하여 그 허무를 폭로하고 아울러 그 무가치를 냉소할” 지성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현대비평의 개성의 문제」에서는 개성에 대해 리드의 정의를 빌어 설명하면서 “개성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데 필요한 판단작용”은 내재적인 것이며 “감각과 기억의 자유로운 배치에 전후 통일성과 윤곽을 주는 것은 지성”이라고 밝히고 있다.5) 즉 최재서는 풍자와 개성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것이 지성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최재서가 본격적으로 지성에 관한 논의를 펼친 것은 「현대적 지성에 관하여」(「조선일보」, 1937.5.15-25)와 「지성옹호」(「조선일보」, 1937.8.23-27)에서이다. 나중에는 그것이 확대되어 「문학․작가․지성」(「동아일보」, 1938.8.20-23) 등에서는 지성 개념이 최재서 자신의 미학적인 범주에 속하는 개념인 모랄 개념으로 접근하게 된다. 그렇다면 최재서가 말하는 ‘지성’이란 어떤 내포적 의미를 가지는가?

 

최재서는 “藝術에 있어서의 知性이란 藝術家가 자기 내부에 價値意識을 가지고 그 價値感을 실현하기 위하여 외부의 素材ㅡ즉 言語와 이메지를 한 의도 밑에 조직하고 통제하는 데서 표시”된다고 했다. 그리고는 “오늘날의 知性은 知力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態度의 문제”라고 했다. 즉 “鄭芝溶氏가 그 詩에서 좀 더 現代意識을 가지고 李泰俊氏가 그 小說에 있어서 좀 더 現代的인 問題를 취급”해야 知性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라6)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知的 努力의 문제, 즉 “서구적 의미에 있어서의 敎養”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최재서는 내재적 가치판단으로서의 지성이 교양론으로 변모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내재적 판단 능력을 의미하는 지성 개념을 비평가나 작가의 교양 수준에서 풀어 나가게 되면, 최재서 비평 체계에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는 희미해지게 된다. 이런 문제에 도달한 최재서는 ‘판단 능력’이라는 의미를 충분히 살리면서도 사회와 현실의 의미를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서 ‘모랄’이라는 개념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최재서의 모랄 추구는 그가 비평의 임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최재서는 비평의 궁극적인 기능 즉 임무를 변별 기능에 의한 가치 판단이라고 정리한다. 그가 추구하려 하는 비평이란 문학 작품을 내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을 유기적인 전체로 파악해 내는 두 가지 작업 즉 분석과 가치 평가를 동시에 해낼 수 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지성인데, 이처럼 비평가의 태도를 지성 개념으로 정립하려 했던 최재서는 ‘지성’이라는 비평 태도가 궁극적으로 문학의 기틀을 세우려고 하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한계점을 주는가를 인식하게 된다. 그는 “批評에 있어서 知性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心理的 事實의 認知이고 폭로인데 그 効果는 씨니시즘과 諷刺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7)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따라서 비판적이고, 객관적이며 대상과 일정하게 유지되는 거리로서의 태도라는 지성이 아닌,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여기서 모랄 개념이 등장한다. 그러나 「사실의 세기와 지식인」(「조선일보」, 1938.7.2)에서 제시한 모랄의 개념은 명확한 정의가 없다. 다만 모랄이 문학 창작과 비평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사회의 실재성을 보다 잘 보여주기 위한,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모랄을 추구하면서도 모랄에 구체적인 정의를 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상 모랄이 현실 속에서 실천적인 의미로 자리잡지 못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남아있다는 것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그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기준’은 현실의 실재성과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문학과 모랄」(「개조」, 1936.3)에서 최재서는 스펜더의 주장을 들어 모더니즘을 용납할 여지를 짚어내고 모랄이 이데올로기가 이니라는 스펜더의 입장을 수용한다. 또한 현대 혼란을 그대로 표현한 점에서 실재성을 인정하고 있다. “특히 모랄에 대하여 단 하나의 해석밖엔 허용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는 藝術을 파괴한다. 作家는 그것 때문에 자기의 판단을 정지하고 어떤 정치적 학설로써 그 자신의 判斷體系를 대용시키기 때문이다.”8)라는 주장은 ‘보편적인 가치’ 추구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인 가치’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편적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기도 하지만 반면 아무것도 포괄할 수 없는 개념으로도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평과 모랄의 문제」(「개조」, 1938.8)에 오면 최재서는 비평에 있어서의 모랄은 “價値意識을 합리화시킨 價値體系”이기에 “批評的 모랄에 관한 일체의 논의는 批評의 基準을 어디에 구하는가 하는 점”에 귀착된다고 본다. 그러나 “아무리 생활의 목적과 行動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써 된 것이 아니라면 모랄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모랄의 실질인 바 價値는 외부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구현하는 能因者는 個性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9)라는 기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최재서에게 있어서 모랄은 결국 비평가 자신의 실천 문제와 연결되지 못하며, 일반적인 의미의 ‘도덕적 주제’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에 머무르고 만다. 「현대소설연구-토마스만, 붓덴부로-크일가」(「인문평론」, 1940.2)에서도 그가 지적하고 있는 모랄은 정의나 선이라고 하는 보편적인 윤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론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최재서는 모랄을 구현해 줄 매개를 찾게 되며, 자신의 관심을 소설에로 집중하게 된다. 그런데 실제 비평에서 최재서는 리얼리즘의 개념을 사용하면서 그것을 당시 문제시되던 창작방법의 개념과는 달리 문학에서 “개인이나 사회의 실재성을 취급”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일반적 의미에서의 리얼리티로 본 셈이다.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천변풍경’과 ‘날개’에 관하여」(「조선일보」, 1936.10.31-11.7)에서 최재서는 “觀察의 態度 및 描寫의 手法에 있어서 두 作品은 공통되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그 공통점이 바로 “될 수 있는 대로 主觀을 떠나서 대상을 보려고” 한데 있다고 했다. 그래서 「천변풍경」은 리얼리즘을 확대하였고, 「날개」는 리얼리즘을 심화시켰다고 했는데, 특히 이상의 「날개」에 역점을 두어 이상이 현대에 있어 분열된 개성의 파편을 질서 있게 포착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사실상 최재서가 두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은 소설가의 눈으로 표현되는 작가의 서술 태도인 셈이다. 그런데 “여하튼 讀者가 이곳 저곳으로 끌려 다닌 뒤에 그 의식 속에 남겨지는 바 통일감”이 부족된다고 하여 「천변풍경」의 한계를 지적하고 「날개」는 “作品에 모랄이 없다”고 하여 작품의 특성과 한계를 지적하는 관점이 각각 다르다. 형식 분석은 작가의 태도라는 틀로, 그리고 내용 분석은 모랄이라는 틀로 분리되어 있다.

 

모랄론의 또 다른 변형으로서 최재서는 창작에서의 모랄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추상적인 이론에만 머물면서 막연한 비평 체계로만 주장된 모랄을 창작의 문제에까지 확대하려 한 시도로 보여지는데, 이는 현실에 접근해 보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보여진다. 최재서는 「중편소설에 대하여」(「조선일보」, 1937.1.29-2.3)에서 소설의 양식론을 펴다가 「시와 도덕과 생활」(「조선일보」, 1937.9.15-19), 「현대 세계문학의 동향」(「조선일보」, 1938.4.12-24) 등에서는 비행동적 지성에서 행동적 모랄로의 변모를 지적하고 있으며, 심리주의 문학은 이제 몰락에 이르렀으므로 힘의 문학이 요청된다고 하였다. 그 힘의 문학으로 그는 서사문학, 그 중에서도 보고소설과 연대기 소설을 꼽고 있다. 그리고 「현대소설과 주제」(「문장」, 1939.7)에서는 작품에 있어 주제를 “한 作品에 이야기의 줄거리를 주고 觀察의 초점을 주고 등등 뿐만 아니라 실로 작가로 하여금 創作을 지속시키고 作家的 存在를 가능케 하는 根本的 원리”로 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최재서가 말하는 주제는 자신의 형식적 관심과 내용의 측면을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최재서의 용어로는 모랄을 의미하는 개념이 된다. 그렇기에 비평가는 작품의 전체를 주제를 통해 조망해 볼 수 있으며 주제에 따라 비판이 가능하게도 된다.

 

그런데 이기영의 작품에 대한 평가에서 최재서는 “主題의 貧困은 우선 素材의 變化性이 없는 것으로써 나타나 있다. ……둘째로 主題의 貧困은 作品에 事件이 空疎한 것으로서 標徵되어 있다.”10)고 하여 주제의 빈곤은 소재의 불변성과 작품 속의 사건 공소로 압축된다. 이것은 주제의 빈곤 문제가 소재에 변화를 주고 작품 속의 사건이 다양하게 전개된다면 해결될 수 있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최재서는 작품에 있어 주제의 문제를 소재의 문제와 작품의 형식의 문제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최재서가 소설론에서 주로 치중하고 있는 점은 인물의 성격에 관한 논의이다. 그는 「조선문학의 성격 5ㅡ빌헬름 마이스텔적 성격에의 탐구」(「동아일보」, 1938.6.7)에서 성격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모랄이 “그 모랄에 도달하려는 노력의 지적통제의 결과로 고정된 개성이 성격이라” 하여 모랄과 지성 그리고 개성, 성격의 문제를 정리하고 있다. 그는 모랄이라는 도덕적 의욕, 통일 원리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지성이라는 지적인 통제 원리로 통제한 결과, 개별적 개성이 고정된 것이 성격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이 「성격에의 의욕ㅡ현대작가의 집념」(「인문평론」, 창간호, 1939.10)에서는 개별적인 개성을 하나의 통일된 원리로 묶어낸 개념이 곧 성격이 된다. “내가 여기서 주목하려는 것은 性格을 창조하는 힘은 社會的 集團生活에 있다는 것, 그리고 人間이 人間된 소이 즉 완전한 性格이란 자기 자신을 ‘초극하고 창조하고 발명하고 이해하는’ 人間이라는 두 가지 점이다. 여기서 性格의 內面性과 外面性, 그리고 性格構成에 있어서의 社會의 교섭이라는 문제가 일어난다.”11) 이것이 최재서가 성격에 대해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가 될 것이다.

 

3) 末期: 論理의 抛棄와 信念의 獲得
조선문학의 전반적인 국책협력 혹은 친일화는 新體制論에서 이론적으로 전개되는데 그 주도적 논문들은 「人文評論」誌에 게재되고 있다. 이는 이 잡지의 편집인 최재서의 점진적 변모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轉形期의 文化理論」(「인문평론」, 1941.2)과 「文學精神의 轉換」(「인문평론」, 1941.3)을 통해 이때껏 기대왔던 자신의 비평관을 청산하지 않으면 안된다. 1940년을 넘어서면서 철학적 비평가들의 문화론이 막다른 골목에 부딪쳤던 것이다. “歐米流의 生活을 至極히 表面的으로 模倣하는 것으로 文化生活을 自處하였다.”12)고 고백하고 있듯이 그는 그가 영향 받아 온 구미 문학이 “至極히 表面的”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받아들인 것이 바로 국책문학 혹은 국민문학이었다.

 

국민문학은 대체로 신체제에 합일되는 문학론인 바, (1) 市民的 감정을 초극하여 국민적 감정을 대표하여 반영하는 문학일 것. (2) 국민 전체가 그 신분, 계급의 제한 없이 독자가 되는 문학일 것. (3) 민족적 의식을 자각한, 국민 전부에 새로운 「昭和」의 이상과 도덕을 부여할 수 있는 志士的 사명의식을 지닌 「臣民」의 문학일 것 등으로 종합할 수 있다.13) 따라서 이 국책문학에서 그가 비평정신의 상실을 이론적, 합리적으로, 內的 必然性에 의해 찾을 수 있었다면, 전면적으로 反民族的이라 할 수는 있어도, 비평가로서는 최소한 살아 있었다고 보아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1934년을 전후로 하여 주지주의 문학론을 도입할 때도 이와 마찬가지 태도였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최재서는 국민문학은 일본 정신에 의해 통일된 동서 문화의 종합 위에 일본 국민의 이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一人의 個人이 아니라 一人의 國民이라는 意識”에 의한 문학이라는 명제를 내걸고, 이와 관련된 비평의 기준을 “硏究와 認識의 問題가 아니라, 態度와 信念의 問題”14)라 규정했다. 바로 이 태도와 신념이 식민지하의 한국인이 국책에 야합하는 유일한 지도 원리가 된 것이다. 이러한 지도원리는 물론 그보다 앞서 이광수가 제시한 것이기도 하나 어찌되었든 「국민문학」지의 창간을 전후하여 1942년까지 평론계에 나타난, 이광수, 박영희, 정인섭, 최재서, 안함광, 김팔봉, 김오성, 유진오, 이효석, 김용제, 김종한 등 기성문인들의 논의는 바로 그 공분모를 이광수와 최재서의 “태도와 신념”이라는 명제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와 신념은 지성론을 한 몸으로 지탱하고 있던 그로서는 쉽게 합리화시킬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지성과 논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최재서가 추구했던 비평기준이 ‘보편적인 비평기준’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시켜 생각해볼 때, 그가 아직 지성론을 포기하기 전에 「인문평론」지를 통해 국책문학 혹은 국민문학의 논지를 편 평자들의 논문을 권두논문으로 발표하고 「인문평론」이 폐간된 후에는 「국민문학」을 창간하여 계속 국민문학의 논의를 편 것이 전혀 우연한 것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문학은 물론, 어떠한 문화 현상도 자기의 조국을 초월할 수는 없다는 이 절대 명제를 일단 보류한다면,”15) ‘보편적인 비평기준’은 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최재서의 비평가적 입장은 다분히 일본문학적인 것이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최재서는 1930년대 비평계에서 카프와 반카프라고 하는 상반된 경향을 무조건 배격하지 않으면서도 수용․극복하려 했고, 새로운 문학 전통을 수립하려 했으며, 비평 이론을 체계화 하면서도 실천 비평으로 완성시켜 보려 했던 비평가이다. 주지주의의 수용, 지성론, 풍자문학론, 모랄론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노력은 그의 문학 이론을 ‘보편적인 가치기준’의 추구 과정으로 귀결시킨다. 그가 주장하는 ‘보편적인 가치기준’이란 이름 없는 민중을 통해 면면히 내려오는 것이면서 동시에 당대적 의미에서 상반된 경향들을 중재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하고 보편 타당한 비평 방법을 의미한다. 결국 그가 찾아낸 ‘보편적인 가치기준’의 핵심은 모랄이었다. 그러나 이 모랄이라는 것도 명확한 정의가 없었고 그래서 그것은 추상적인 이론으로만 남을 수 있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어, 그 대안으로 실제 비평에서 구체적인 매개를 찾으려 했으나 그것마저도 이론과 실천이 괴리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최재서가 추구한 ‘보편적인 가치기준’에서의 ‘보편적인 것’의 의미는 어떤 부류의 전체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이 부류 속의 모든 개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보편적인 가치기준’은 개방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개방적이라는 것은 동시에 또 변용이 가능함을 뜻하기도 한다. 실제 비평에서는 상당히 바람직한 방법론이라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데올로기가 배제된 개방성은 민족의 보편적 가치마저 이탈한 가치기준을 만들어낼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최재서가 결국 국책문학 또는 국민문학이라는 친일문학론을 펴게 된 것도 이런 그의 문학이론의 개방성에서 단초가 주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때 다른 문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최재서의 친일문학활동이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임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최재서의 첫 논문은 앤드루 세실 브래들리의 시론을 소개한 〈미숙한 문학〉(신흥, 1931. 7)이며, 이어 T. E. 흄, I. A. 리처즈, H. 리드, T. S. 엘리엇의 문학론을 기초로 한 주지주의 문학론을 소개했는데, 이는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운동의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1934년 발표한 〈현대주지주의 문학이론〉·〈비평과 과학〉 등에 나타난 주지주의 문학론은 프로 문학의 도식성 극복과 존폐위기에 처한 조선문학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사회적 위기와 문학적 위기는 다르며 신념의 상실이라는 의미에서 조선문학은 문학적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하고, 해결책으로 풍자문학론을 내놓았다. 〈올더스 헉슬리 이론〉(조선일보, 1935. 1. 24~30)·〈풍자문학론〉(조선일보, 1935. 7. 14~29)·〈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조선일보, 1936. 10. 31~11. 7) 등에서 '풍자'를 통해 작게는 개인을, 크게는 시대의 정치적 권력을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위기는 자기분열에서 비롯된 것이며 분열된 자아의 모습을 해부하는 자기풍자가 조선문학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몫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관점에서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객관적 세계를 객관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에 '리얼리즘의 확대', 이상의 〈날개〉는 주관적 세계를 객관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에 '리얼리즘의 심화'를 보인 작품이라 평가했다. 또한 〈현대적 지성에 관하여〉(조선일보, 1937. 5. 15~20)·〈문학·작가·지성〉(동아일보, 1937. 8. 20~23)에서 지성을 행동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지성론'을 주장했고, 〈취미와 이론의 괴리〉(조선일보, 1938. 1. 8~13)·〈비평의 형태와 기능〉(동아일보, 1938. 4. 12~15)에서 문학비평의 중요성과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1939년 10월 〈인문평론〉 창간 후 그의 비평은 친일로 치닫게 되어 1943년 일본어로 된 〈전환기의 조선문학 轉換期の朝鮮文學〉이라는 평론집을 펴냈다. 8·15해방 후 〈셰익스피어 비극의 개념〉(사상계, 1964. 3) 등을 발표하여 셰익스피어 문학연구의 권위자가 되었다. 평론집으로 〈문학과 지성〉(1938)·〈최재서평론집〉(1961)·〈셰익스피어 예술론〉(1963) 등이 있다. 1957년에 펴낸 〈문학원론〉은 문학이론에 관한 명저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최재서, [전쟁문학], {인문평론}, 1940. 6.

최재서, [국민문학의 요건], {국민문학}, 1941. 11.

최재서, [받들어 모시는 문학], {국민문학}, 1949. 4.

친일문학론(임종국, 평화출판사, 1966)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김윤식, 한얼문고, 1973)

한국문학사상사시론(조동일, 지식산업사, 1979)

문학과 역사적인간(김흥규, 창작과 비평사, 1980)

최재서, 최재서평론집, 청운출판사, 1961

김윤식,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일지사, 1978

신동욱, 한국현대비평사, 시인사, 1988

최재서, 최재서평론집, (원문)조선명작선집, 대제각, 1988

김춘식, 최재서 비평연구, 동국대 석사논문, 1993

김학면, 최재서 실제비평연구, 홍익대 석사논문, 1995

소영현, 최재서 문학비평연구, 연세대 석사논문, 1996

권영민 (2004225).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반민족문제연구소 (199571). 최재서 : 서구적 지성론자에서 천황숭배론자로 (김재용), 친일파 99(3). 서울: 돌베개.

   

 

전시에 설립된 '尙古예술학원' 발기인 명부 발견

▲ 당시의 발기인 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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