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근대연극사의 거두, 유치진 (柳致眞)

草霧 2013. 12. 12. 13:17

 

 

 

문학

 

유치진 (柳致眞, 1905∼1974)

 

 

친일 '국민연극' 주도한 근대연극사의 거두 

 

 

 

 


1941년 현대극장 대표

1942년 이용구를 찬양한 장막희곡 [북진대] 발표

1905년 경남 통영 출신

1940년 조선극작가동호회 회장

조선연극협회 이사

1941년 현대극장 대표

조선문인협회 상무간사

1943825일 대동아문학자대회 2차대회 참가

19446월 조선문인보국회 극문학부 회장

1945년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1940.7 대륙인식 인문평론

1941.1.3 국민연극 수립에 대한 제언 매일신보

1941.2 신체제하의 연극 춘추

1941.3 아름다운 도시 신시대

1941.12 연극계의 회고 춘추

1942.2.19 축 싱가폴 함락 매일신보

1942.6 북진대 여화 국민문학

1942.7.30-8.5 개척과 희망 매일신보

1942.9 극장은 연극을 결정한다 신시대

1942.9 만주분산개척민촌을 보고 춘추

1942.11-43.1 대추나무(희곡) 신시대

1943.6 싸우는 국민의 자세

 

유치진(柳致眞, 19051119~ 1974210)은 대한민국의 연극인, 극작가, 소설가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아호는 동랑(東朗)이다.

 

경상남도 통영군 충무읍 출신으로, 한학을 공부한 뒤 10대에 일본에 유학하여 릿쿄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31년 귀국하여 곧바로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고, 문예월간에 연재한 토막 (土幕)을 시작으로 농촌을 무대로 한 사실주의 작품을 발표하며 극작가로 활동했다.

 

토막을 비롯하여 버드나무 선 동리 풍경(1933), 빈민가(1935), (1935) 1930년대 초중반에 발표한 작품들은 식민지의 농촌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하여 카프와 같은 경향파적 특성을 보이고 있는데, 이 때문에 카프 문인들로부터 동반자 작가로 평가 받기도 했다. 이 무렵 발표한 평론인 노동자 구락부극에 대한 고찰(1932) 등에도 계몽적 한계는 엿보이나 진보적인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유치진의 초기 성향이 잘 드러나 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친일 연극을 다수 공연했다. 예를 들어 1942년 발표한 북진대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생애를 찬양한 작품이다. 관제 연극 공연을 위한 현대극장을 주도했고, 현대극장 창립 작품으로 일본의 만주 침략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흑룡강의 희곡을 썼으며, 함세덕, 조천석 등의 친일 작품을 연출하고 친일 수필도 발표한 기록이 있다. 조선연극협회, 조선문인협회의 간부를 지냈고, 1944년에는 어용 문인 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의 소설·희곡부 회장이 되었다.

 

광복 후 우익 연극계에서 활동하며 반공 작품을 공연했고, 대한민국 연극계의 기초를 닦았다. 해방기의 대표 희곡으로는 좌익 측에 대한 비판 의식이 포함된 조국(1946), 자명고(1946), (1948), 흔들리는 지축(1949)이 있다. 한국 전쟁 이후로는 우파적 경향성은 희석되고 영화, 음악, 무용 등 인접 장르의 방법론을 도입하는 실험적 기법을 시도했다.

    

 

1958년에는 서울예술대학의 전신이 되는 한국연극연구소를 설립하였고, 1960년대 이후로는 희곡 창작보다 드라마 센터 건립 등 연극 교육에 몰두했다. 국립극장 극장장, 한국연극협회 회장, 동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도 역임했다.

 

유치진은 일제 강점기 당시 현대극장을 중심으로 한 친일 행적이 뚜렷한 편이었기 때문에 반공주의가 다른 이념이나 논리에 앞서던 1950년대에 극예술연구회 시절부터의 동료인 김광섭과 희곡 왜 싸워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등 이미 연극계 친일 논란의 중심이었다.

 

1991년 대한민국 문화부가 유치진을 4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했지만 경상남도 충무시(현재의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 예술인들이 유치진의 친일 행적을 문제삼는 바람에 김정호로 교체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 부문에 포함되었다. 12편의 친일 저작물이 밝혀져,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시인 유치환의 친형이며, 자녀들은 모두 연극계에서 활동했다. 맏딸 유인형은 서울예대 연극과 교수를 지냈고, 맏아들 유덕형은 서울예대 학장과 이사장을 역임했다

 

  • 경상남도 통영보통학교 졸업
  • 일본 도쿄 도요야마 중학교 졸업
  • 일본 릿쿄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 극예술연구회
  • 현대극장
  • 서울예술대학
  • 동랑청소년종합예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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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종원김기진김동인김동환김문집김상용김소운
    김안서김용제김종한김해강노천명모윤숙박영호
    박영희박태원백철서정주송영유진오유치진
    이광수이무영이서구이석훈이찬이헌구임학수
    장혁주정비석정인섭정인택조연현조용만주요한
    채만식최남선최재서최정희함대훈함세덕홍효민
     

     

     

     

    유치진의 문학 세계

     

     

     

    유치진은 우리 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리얼리즘 희곡작가로서, 역사극의 장르를 개척한 극작 가 이며, 극작, 연출, 연극비평, 연극교육, 연극 행정등 연극 전반에 걸쳐 활동한 근대 연극사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 된다. 희곡 <토막 (土幕)>(문예월간,1931.12-1932.1)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으며, 이어 30여편의 희곡을 발표했다.

     

    그의 문학 세계는 작품이 쓰여진 시기와 성격에 따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뉜다.초기는 1930년대 중반 까지이며, 주로 일제에 수탈당하여 가난에 허덕이는 농촌의 현실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드러내는 작품을 썼다.

     

    < 토막><버드나무선 동리의 풍경><><마의태자>등이 이에 속한다. < 마의태자>를 제외한 세작품은 일제시대에 고통받는 농민의 삶을 통해 민족의 현실을 보여 주려는 의도로 쓰여졌으며, 특히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1935년 동경 학생 예술좌에 의해 공연 되었는데, 내용이 불온하다고 해서, 박동근 이해랑 등과 종로 경찰서에 3개월 정도 구금 되 었다.

     

    <마의태자><>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나서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쓴 작품이며, 신라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를 등장시켜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중기는 일제의 탄압이 극도로 심해진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 전까지 시기이며, 이 시기에 그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 친일을 내세우는 희곡을 쓰거나 연출했다. 이시기의 그의 작품들은 역사극과 낭만주의로 경도되어 주로 애정을 주제로한 작품을 쓰는등 현실 도피적인 경향이 강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희곡 <흑룡강><북진대><대추나무>등이 친일 희곡에 속하며, <흑룡강>은 일제의 군국주의를 합리화 하고 홍보하는 내용이고, <대추나무>는 조선 농민에게 만주로 이민 갈 것을 권장하는 내용이다.

     

    <북진대>후기는 해방이후부터 활동한 시기로서, 민족 분단과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낸 사실주의 극을 주로 썼다. 역사를 소재로한 <원술랑><자명고><><사육신>등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나도 인간이 되련다>등이 있다.

        

    주요 희곡 작품

    <토막>(1932), <버드나무선 동리의 풍경>(1933), <빈민가>(1934), < >(1934), <마의태자>(1937), <제사>(1938), <조국>(1946), < 자명고>(1947),<>(1948), <장 벽>(1950), <가야금>(1952), < 처용의 노래>(1953), <푸른 성인>(1954), <청춘은 조국과 더불 어>(1955), < 논개>(1957), <한강은 흐른다>(1958) .

     

     

     

     

     

     

     

     

     

    근대연극사 제일의 희곡작가 

    대한민국 국민치고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유치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아직도 연극문화가 일반대중의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지 못한 우리의 현실에서 연극 한 편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일생을 보내면서도, 희곡 작가 하면 으레 유치진을 떠올리게 된다.

     

    왜냐하면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3.1 운동에 참여한 학생 정도와 그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하는 희곡 [조국]이나,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는 김유신의 아들 원술화랑을 주인공으로 한 [원술랑]을 누구나 한 번 쯤은 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치진(아호 동랑)1905년 경남 통영에서 아버지 유준수(柳俊秀)와 어머니 박우수(朴又秀) 사이의 장남 으로 태어났다. 1921년에 도일하여 호우야마(豊山)중학에 편입한 이후 1931년 릿교(立敎)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기까지 10년여 동안을 일본에서 지낸 그는, 1931년 귀국하자마자 신극운동 단체인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한다.

     

    이후 그는 [토막](1932), [](1935)를 비롯하여 [조국](1946), [흔들리는 지축](1947), [나도 인간이 되련다](1953)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희곡을 발표하여 근대연극사 제일의 희곡작가로 인정받게 된다.

     

    또한 그는 1974년 고혈압으로 운명하기까지 연극 연출을 비롯하여 연극평론 발표, 극단 운영, 드라마센터 건립 등 다방면에서 연극문화의 발전에 공로가 큰 인물이다.

     

    이렇듯 근대연극의 발전에 공로가 크고, 그것도 3.1 운동을 희곡화한 작가 유치진에게 친일 작가 운운하는 것은 얼른 보면 부당하 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조국]만을 읽고서 자란 세대에게 유치진은 민족적 양심을 지닌 작가로서만 기억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조국]은 해방 이후, 즉 이 땅에서 일제가 물러간 후 누구나 애국을, 독립을 운운하던 바로 그 시절에 창작된 작품이다.

       

     

     

     

     

    [왜 싸워]를 두고 왜 싸워?

    이 말은 1957년 말 지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왜 싸워 사건'을 다룬 한 신문 기사의 제목이다. '왜 싸워 논 쟁'은 흔치 않은 연극계의 논쟁이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에게는 지금도 아슴프레 하게나마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희곡 [왜 싸워]1957년 당시 한국연극학회 회장이던 유치진이 전국남녀 대학생 연극경연대회에 상연하고자 제출했던 작품이다. 학생극 진흥을 위해 좋은 창작극을 선보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자유문학}지에 1차 발표를 하고, 동시에 대학생들에게 작품을 주어서 무대에 올리도록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엉뚱한 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자유문학}를 주관하고 있던 김광섭(金光燮)[왜 싸워]는 친일작품 [대추나무]의 개작이므로 경연대회에 상연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제기를 하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유치진과는 1930년대 극예술연구회 시절 활동을 함께 했던 오랜 친구이자 동지이던 김광섭에 의해서 '친일작품'을 상연하려 한다고 갑작스럽게 매도를 당하니, 유치진으로서는 이만저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일간지에 두세 차례 설전이 있고 나서 사태는 흐지부지 진정이 되었지만, 유치진에게는 다시 한 번 '친일작가'라는 낙인이 찍히는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구미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유치진이 돌아오자마자 벌인 첫 사업에서 하필이면 [대추나무]의 개작을 들고 나섰는지 어지간한 상식인 이라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시대에 '친일' 작품이 필요했던 것은 절대로 아닐 터 이고, 그렇다면 그만큼 그 작품에 작가로서의 애정이 간절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밖에는 안 된다. 그러나 그의 많고 많은 작품 가운데 하필이면 [대추나무]였을까.

     

    훗날의 자서전에서 유치진은 이 [왜 싸워]를 선택한 이유를 나름대로 밝히고 있다. [대추나무]1941년 내가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현대극장을 주재하던 무렵에 쓴 작품이었다.

     

    [대추나무]는 이렇게 일제의 강압하에서 쓴 작품이지만, 그 무렵에 쓴 [흑룡강]이나 [북진대](北進隊)와는 달라 아첨하는 구석이 없다. 작품상으로 [대추나무]는 그대로 재미 있는 것이었고, 지금도 나는 이 작품을 나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는 데 서슴지 않는다.

     

    이렇게 내가 작가적 양심으로 아끼던 작품이라 [대추나무]만은 친일작품으로 도매 취급당하는 것이 몹시 언짢았다. [대추나무]는 나의 작가적 고충이 적잖이 서려 있는 유달리 애착이 가는 작품이었다.

     

    내가 대학 연극 콩쿠르에 내놓은 [왜 싸워]는 이러한 [대추나무]를 개작한 것이었지 친일성이 강한 [흑룡강]이나 [북진대]를 개작한 것은 아니었다.({동랑자서전}) 유치진은 친일성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흑룡강]이나 [북진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대추나무]는 작가적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작품일 뿐더러, 대학생 연극대회에 [왜 싸워]를 내보임으로써 [대추나무]에 씌워져 있던 친일의 굴레마저 벗어 던질 수 있다는 자못 거대한 욕심까지 가지고 있던 것 같다.

     

    그런데 [대추나무]1942년 가을 당시의 관제 연극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 주관의 제1(친일)연극경연대회에 출품하여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는 전력이 있는 친일연극이다.

     

    그럼에도 [대추나무]가 외형의 경력은 그렇더라도, 내면에 있어서는 당시 민족의 현실을 우회적으로나마 다룬 작품이라는 작가 자신의 평은 견강부회적 변명에 가깝다. [대추나무]{신시대}라는 잡지에 발표하였던 194210, 유치진은 [창성둔(昌城屯)에서]라는 기행수필을 {국민문학}지에 발표한다.

     

    이 무렵 희곡 발표 외에도 [싱가폴 함락을 축하하며]({매일신보}, 1942. 2. 19)라는 일본의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일반 시사 수필까지 틈틈히 발표하던 그는, 그 해 여름부터는 직접 만주지방을 기행하면서 보고서 형식으로 쓴 수필 [개척과 희망]({매일신보}, 1942. 7. 30-8. 5)을 발표한다.

     

    [창성둔에서] 또한 만주지방의 기행 수필 가운데 하나이다. 그 내용은 평북 창성군이 수풍 수력발전소 건설로 수몰되자 마을 주민 전체가 만주에 입식(入植)하여새로운 마을 창 성둔을 개척한다는 것이다. 말이 수필이지 만주에 와서 갖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창 성둔이 모범 개척촌으로 자리 잡기까지의 사례담을 통해 한국인의 만주 입식을 선동하는 성격의 글이었다.

     

    이러한 사례담의 형식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 성공사례 발표를 떠올리면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이 수필은 공교롭게도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일제가 강행하던 만주로의 '분촌운동'(分村運動)의 실상을 실감 나게보여 주는 자료가 된다.

     

    그런데 [대추나무]야말로 바로 이 창성둔 사례를 그대로 희곡화했다는 오해를 받을 만큼, 당시 한국 농촌이 살기가 힘들다는 사실 그리고 좁은 땅덩어리에서 이웃 간에 아웅다웅하고 살 일이 아니라 광활한 만주로 이주해 가면 넓은 농토에 자작농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전하는 분촌운동 선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럼에도 유치진은 분촌운동에의 독려 부분은 살짝 빼 버리고 살기 힘든 농촌현실에서의 인간들의 삶의 애환을 그렸다 하여 내심 작가적 애정을 보이고 있으니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구한말 친일의 선봉 이용구를 찬양----장막희곡 [북진대]

    그런데 [대추나무]의 친일성이 이 정도라면 작가 자신이 친일작품으로 인정하는 [흑룡강](1941)[북진대](1942)는 어떠했겠는가.

     

    [북진대](45)는 대추나무를 발표하기 반 년 전인 194244일부터 7일 까지 경성부민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서 현대극장 배우들이 출연한 가운데 경성대화숙(大和塾: 일본정신 교육기관) 주최로 상연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러일전쟁이 일어났던 19048월부터 19053월까지 사이에 일진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을 위해 경의선 군용철도의 부설에, 혹은 군수품의 수송에, 혹은 러시아 국내에 잠입하여 적정(敵情)을 탐색하는 등, 일부 배일파(排日派)의 치열한 박해와 매도 속에서도 과감하게 일한 양국의 합병에 헌신하는 모습"'대동합방론'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가지고 일진회 를 이끌었던 이용구*야말로 "한국을 열국의 세력쟁탈장에서 구하고, 동양 영원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조선은 그 동맹국인 일본과 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친 선각자"로 인식시키려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일종의 역사극이다.([북진대], {삼천리}, 1942. 7)

     

    이 공연을 기획한 경성대화숙은 "이 연극은 내선일체의 심화철저를 기하고, 대동아 전쟁 하에 있어서의 반도청년의 궐기를 촉구하려고 한 작품으로, 내선일체의 철저는 일한병합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 출발해야만 한다는 의도로 기획된 것으로서, 이 연극을 보면, 당시 조선반도가 남진하는 러시아의 호구(虎口)에 놓여 있었던 것과, 반도 민중이 일한병합을 얼마나 열망하고 있었는지, 또한 일한병합이 무력 압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반도민중의 자발적 열망을 일본이 용인한 것 이었음을 명료하게 보여 준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북진대를 기획하고], {국민문학}, 1942. 6)

     

     

     

     

    '국민연극'의대표주자 현대극장을 주도

    이처럼 당시에 훌륭한 국민연극으로 평가받던 [북진대]가 상연된 표면적 계기는 경성대화숙의 기획에 의한 것이었지만, 실제 창작에 있어서는 유치진 스스로 몇 개월에 걸쳐 작품 구상을 한 결과라 한다.

     

    그 사연인즉, 1941년 여름, 유치진이 이끌고 있던 극단 현대극장의 사무실이 견지정(堅志町)에 있는 시천교(侍天敎) 교당으로 옮겨 왔는데, 그 곳은 다름아닌 대동일진회(일진회의 후신)의 본산이었다.

     

    그 곳에서 유치진은 러일전쟁 때 철도부설에 참여하였던 구일진회 간부들로부터 직접 당시의 추억담을 듣곤 하였는데, 그에 감동을 받고서, 들을 때마다 "존경스러운 체험담을 주제로 작품을 쓰고자 욕망"(유치진, [북진대 여화]) 하고 있었다 한다.

     

    그리고 집필에 들어가기에 앞서 {원한국 일진회 역사}(4,문명사), 이선근(李宣根){조선근세사} 15권 정도의 역사책을 참고하여 상세한 조사까지 했다 한다.

     

    결국 [북진대] 상연을 계기로 보았을 때, 대동일진회와 극단 현대극장의 관계가 어떠한 것이었나 하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면 현대극장은 어떻게 만들어진 극단인가. 1937년 중국을 침략하면서 전시체제로 돌입한 일제는 문화예술부문에 있어서까지 전쟁동원 체제를 강화시킨다. 그 결과, 이동연극 등을 통한 일선 위문공연을 비롯하여, 후방에서도 징병이나 징용에 대한 선전, 내선일체나 국민 (사실은 일본 국민으로서의) 정신의 선전 등에 나서도록 적극 독려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9413월 총독부 연극담당 사무관 나라데(星出壽雄)가 주도하여 직접 만든 극단이 바로 현대극장인 것이다.

     

    그 진용은 유치진을 대표로 함대훈(咸大勳), 서항석(徐恒錫), 주영섭(朱永涉), 이원경(李源庚), 함세덕(咸世德), 등과 이백수(李白水), 강홍식(姜弘植), 전옥(全玉), 김양춘(金陽春), 김동혁(金東爀), 마완영(馬完英), 이해랑(李海浪) "전일의 극예술연구회와 동경학생 예술좌, 토월회, 그리고 일부 상업극단과 영화인들로 구성되어 마치 예술계 전반의 대동단결로 보여진다"(박영호, [예술성과 국민극], {문장}, 1941. 4)고 하였다.

     

     

     

     

    현대극장의 창립공연은 유치진 작 [흑룡강](5)이었다. [흑룡강]"2년에 걸쳐 5차의 퇴고를 거듭한 조심루골()의 야심작"으로서, "소박하고 거칠고 야성적인 것을 리얼한 면에서 취하여 대륙기질의 다이나믹한 박진력을" "비열(沸熱)된 이념의 승화"로 이끌고자 하였다는 것이 작자의 말이다(유치진, ['흑룡강' 상연에 제()하여, {매일신보}, 1941. 6. 5).

     

    만주에서의 조선 농민이 일본영사관의 보호 아래 복지 만주(福地滿洲)의 터전을 닦아 나가는 것을 내용으로 한 [흑룡강]은 본격 '국민연극'으로서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이라 할 것이다.

     

    이후 현대극장은 함세덕 번안의 [흑경정](黑鯨亭, 1941), 유치진의 [북진대](1942)[대추나무](1942), 함세덕의 [에밀레종](1943)[남풍](1943), [황해](1943), [청춘](1944), [백야](1945), 조천석(朝天石)[셔어멘호](1944) '유수한' 국민연극을 상연하였다.

     

    유치진은 희곡 창작보다 연출을 위주로 활동을 했는데, 해방이 되던 1945815일에도 약초(若草)국민극장(지금의 스카라극장)에서 박재성(朴在成) [산비둘기](4)를 공연 중이었다 한다.

     

    그런데 유치진은, 현대극장을 조직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총독부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훗날 자서전에서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유치진은 현대극장이 창립되기 이전에 이미 국민연극 지도기관인 조선연극협회(1940. 12)의 이사로서 국민연극의 주요 사업을 제 안할 정도로 국민연극에 적극적이었다.

     

    문화단체로서 연극인협회가 앞으로 연극을 위해서 해야 할 사명은 실로 크다. 문화단체로서 해야 할 사업의 범위를 적어본다면, (1) 우선 새로운 국민극 수립을 위해서 연극 인 양성을 목표로 한 연극학교는 가까운 장래에 하나쯤 설립되어야 하겠고, (2) 극본 감독부 라는 부서를 협 회 내에 두어서 당국에 제출하기 전에 협회로서 우선 극본의 사전검열을 행하여, 당국에서는 주로 극본의 치안상 검열을 한다면 극본감독부에서는 문화적 내지 예술적인 검열을 하게 함이 어떨까 한다.

     

    연극의 질적 향상과 국민극의 방향을 건전케 함은 무엇보다도 극본이 먼저 그 성과의 열쇠를 가졌으니, 좋은 극본의 생산을 위한 격려와 감상은 그 책임을 당국에서보다 연극의 전문단체인 협회에다가로 분담시킴도 일 방책 인 듯하다.

     

    (3) 협회에서는 잡지를 발행하여 협회가 내포하는 극단 내지 회원 상호간의 소식전달과 국민 극 수립에 대한 이론적 확립과 희곡의 활자화와 관객층의 교도와 지상 개척을 책()해 봄도 좋을 듯하고, (4) 연극상제도(상금은 많을수록 좋음)를 제정하여 연 1회 그 해에 가장 우수한 업적을 남긴 연극인 (협회에 소속된 극작가나 배우나 무대미술가나 기타 연극종업자)에게 상을 정여(呈與)하여 연극기술의 장려와 연극의 질적 향상을 꾀하였으면 좋겠고, (5) 연극종업자의 공제회 같은 것을 만들어서 실업한 혹은 병환에 신음하여 일하지 못하는 협회원의 생활개척의 일조를 삼으면 어떨까 한다. (유치진, [신체제하의 연극---- 조선연극협회와 연관하여],{춘추}, 1941. 2)

     

    그리고 그는 "연극협회가 조직되어 문화통제의 일익으로서 연극통제가 실시되게 되자", "연극은 종전과 다른 의미에서 진흥의 기운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세계연극사를 들쳐보더라도 연극이 국가적인 보호를 받았을 때에 보다 왕성했던 전례를 지적할 수 있다"며 국민연극이야말로 연극의 발전을 의미한다고 강변하고 있기도 하다(유치진, [원칙적인 것과 구체적 인 것], {조광}, 1941. 6).

     

    이로 보면, 유치진은 조선연극협회의 결성에 대해 문화신체제라는 시국적 요구 에 대한 대응 외에도, 연극 부진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적극적 지원과 장려의 기회로까지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유치진에게는 조선 신극 사에서 처음으로 당국의 탄압 없이, 나아가서는 당국의 '지원' 아래 연극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로까지 인식되었기 때문에, '암흑기'의 사업이 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연극학교, 연극잡지, 연극상 제도, 연극인 공제회의 조직 같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사업 구상을 펼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조선연극협회와 현대극장의 결성이 단지 일제 당국의 강압과 강요에 의한 것만은 아니고, 당시 연극인들의 '자발적' 참여 과정과 결부되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오늘에 남은 친일연극의 청산 문제

    유치진이 친일연극 활동에만 전념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유치진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극예술연구회(1931)를 조직하여 신극운동을 전개하던 초기에는 [토막], [], [버드나무 동리에 선 풍경] 등 비교적 일제하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던 가난한 농촌의 현실에 대한 리얼리즘적 작품을 남김으로써, 우리 희곡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작가다.

     

    그렇다고 그가 당시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을 하던 작가들보다 저항성이나 민족의식의 토대가 강했던 것도 또한 아니다. 그의 민족의식이 허약했기 때문에, 일제 말이 되자 앞에서 살펴본 대로 '국책연극으로서의 국민연극'의 진흥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러나 '국민연극'에 관해서라면 비록 유치진만의 문제는 아니다. 유치진만이 유별나게 나서서 설친 것도 아니고, 신파 배우든 좌익 출신이 든 할 것 없이, 어떤 면에서는 한결같이 '국민연극'의 각본을 쓰고, 연기를 하고, 연출을 하고, 무대장치를 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일일이 거명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거의 모든 연극인이 국민연극에 종사했다.

     

    일제의 탄압이 가장 심해진 1940년대에 들어서 그 많은 연극인 가운데 한 사람도 투옥되거나 심지어는 상연 금지된 작품이 나오지 않은 것은 이를 잘 웅변해 준다.

     

    따라서 유치진의 친일연극은 그 개인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비극적이지만 전체 근대연극사의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연극계는 해방공간에서 일제 잔재 청산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이 문제를 훗날의 과제로 남겨 놓게 된다.

     

    일제하에서 활동하던 지식인치고 '친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흔치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식민지하에서의 연극인 또한 우리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과 조건에서 연극을 해야만 했을 것이고, 어떤 면에서 그러한 고충을 우리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줄 안다.

     

    그러나 아무리 개개인의 면면과 고충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국민연극'으로 근대연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역사적 과오는 오늘의 우리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개인의 친일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친일의 과정을 통해서 오늘의 우리 연극 문화가 주체적,자주적 문화로 자리 잡지 못하고, 대중으로부터 유리된 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더욱이 우리 연극의 잘못된 뿌리에 대한 진지한 점검 한 번 없이, 유치진과 관련된 것이라면 친일도 괜찮은 것이라는 안이한 사고방식 자체에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연극 [격정만리]의 사태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현재의 한국연극협회가 연극계 선배들의 친일문제는 그저 덮어 두려고만 하면서 건전한 민족연극의 발걸음을 붙잡으려고 한다는 데, 그 심각한 문제 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태는 해방 직후 일제 잔재의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데 가장 큰 원 인 있을 것이며, 그 이후로도 계속하여 교과서나 일반인의 인식 속에 무감각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이 글이 우리 연극사의 큰 위치를 가지고 있는 유치진에게 일단의 욕이 되는 내용으로 비칠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덮어 둔다고만 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냉엄한 지적만이 그에게 덧씌워진 역사의 굴레 또한 바르게 벗겨 내는 길일 수도 있다. 죄가 밉지 인간이 미운 것이 아니라는 상투적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유치진의 친일행각을 살펴보면서 오늘의 연극이 바른 방향을 찾아나가는 데 타산지석이 되길 바랄 뿐이다.

     

     

       

     

    ▲ 통영 남망산 기슭에는 1990년 설치된 유치진의 흉상이 있었는데 친일행적이 밝혀지면서 1995년 자진철거되었고, 지금은 빈 터만 남아 있다.

     

     

    박영정 (연극평론가, 건국대 국문학과 박사과정)

     

     

    ▲ 민족문제연구소 경남서부지회 회원들이 유치진 재조명 심포지엄이 열린 30일 오후 통영시민문화회관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 오마이뉴스 윤성효

    유치진 柳致眞 1905∼1974.

    극작가 겸 연출가.호는 동랑(東朗). 경상남도 통영 출신. 아버지 준수(焌秀)는 한약방을 경영하였고, 동생 치환(致環)은 시인이다. 1914년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졸업하였다. 그 뒤 부산우편국 부설 체신기술양성소에 입소하여 6개월간의 교육을 마친 뒤 귀향하여 통영우체국 사무원이 되었다. 토막|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빈민가|철조망|

     

    3·1운동 이후 일어난 교육열의 영향으로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중학교(豊山中學校) 2학년에 편입하여 1925년에 졸업하고, 다음해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여 1931년에 졸업하였다.

     

    롤랑(Roland,R.)의 <민중예술론>을 읽고 연극에 뜻을 두고 귀국, 해외문학파(海外文學派) 동인들과 함께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 약칭 극연)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신극운동을 벌였다. 극연을 주도하면서 극작·연출 등을 주로 맡았다.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극연이 해산된 후, 1941년에는 극단 현대극장(現代劇場)을 조직하여 <흑룡강 黑龍江>(1941)·<북진대 北進隊>(1942)·<대추나무>(1942) 같은 어용극을 직접 쓰기도 하면서 총독부의 지시에 따른 연극을 주도하였다. 광복 이후 잠시 침묵하다가 1947년 봄부터 연극계 전면에 나타나 좌익연극과 대결하여 우익민족극을 주도하였다.

     

    이해랑(李海浪) 등을 내세워 극단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를 조직하였고, 한국무대예술원을 창설하여 초대원장(1947)이 되었다. 1950년에 국립극장이 창설되자 초대극장장에 취임하였고, 자작극 <원술랑 元述郎>으로 개관기념공연을 가졌다.

     

     

    6·25전쟁 때에는 은거하면서 희곡창작에만 전년하였다. 1958년부터는 국제연극협회(ITI) 한국본부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국제회의에 자주 참가하였고, 1960년에는 동국대학교 연극학과 창설과 드라마센터 건립공사에 전념하였다. 1962년 드라마센터가 완공되자 초대소장으로 취임하여 연극진흥에 힘썼다.

     

    그러나 드라마센터가 재정난으로 문을 닫게 되자, 인재양성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1962년부터 드라마센터에 부설 연극아카데미를 설치하여 배우·연출가·극작가 등의 양성에 힘썼는데, 이것은 몇 년 뒤 서울연극학교로, 다시 서울예술전문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유인촌, 할아버지인 희곡작가 유치진과 작은할아버지 청마 유치환 시인, 숙부인 유길촌 PD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식민지수탈과 민족의 궁핍화과정을 사실주의수법으로 그렸으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역사극과 낭만주의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주로 애정을 주제로 한 작품을 쓰는 등 현실도피를 꾀하였다. 광복 후에는 주로 분단문제와 공산주의비판, 전쟁의 참혹상 등을 주제로 한 민족주의적 리얼리즘 작품을 발표하였다.

     

     

    주요 희곡작품은 데뷔작 <토막 土幕>(1932)·<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1933)·<빈민가>(1934)·<소>(1934)·<마의태자>(1937)·<제사>(1938)·<조국>(1946)·<자명고>(1947)·<별>(1948)·<장벽>(1950)·<가야금>(1952)·<처용의 노래>(1953)·<푸른 성인>(1954)·<청춘은 조국과 더불어>(1955)·<한강은 흐른다>(1958) 등이다. 시나리오로는 <철조망>(1953)·<논개>(1957)·<단종애사>(1957)·<개화전야>(1958) 등이 있다.

     

    연극계에 끼친 공로로 예술원상, 문화훈장, 5월문예상, 3·1연극상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유치진희곡전집≫ 상·하권과 ≪동랑자서전≫, 그리고 많은 연극관계 논문을 남겼다.

     

    그는 우리 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리얼리즘 희곡작가로서, 역사극의 장르를 개척한 극작가이며, 극작·연출·연극비평·연극교육·연극행정 등 연극전반에 걸쳐 활동한 근대연극사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된다.

     

    1940년 : 조선연극협회 이사, 조선극작가동호회 회장
    1941년 : 조선예술상 문학상 심사위원, 극단 현대극장 대표, 국민연극연구소 강사, 조선문인협회 간사
    1942년 : 조선연극문화협회 상임평의원, 조선문인협회 문학부 소설 희곡부 부원, 조선영화기획심의회 위원
    1943년 : 대동아결전문학자대회 2차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 조선문인보국회 이사, 조선문인보국회 소설 희곡부 회장
    1944년 : 이동연극보국대 결성, 조선문인보국회 극문학부 회장
    1945년 :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1948년 : 백범 김구 선생 지시로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승학 선생이 작성한 친일파 263명 명단에 유치진 포함
    1991년 : 문화부 ‘4월의 문화인물’로 유치진을 선정, 명백한 친일행위가 드러나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선생으로 교체
    1992년 :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파 99인>에 유치진 포함
    1995년 : 통영문화재단, 남망산에 세워진 유치진의 동상을 스스로 철거
    2005년 :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발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에 유치진 포함

    지방 순연(<흑룡강> - 1941.6 현대극장 공연작, <북진대> - 1942.4 현대극장 공연작).
    제1회 연극경연대회 현대극장 참가작인 <대추나무>로 작품상 수상(1942.9).
    【참고문헌】『朝鮮年鑑』(1940, 1943, 1944) ;『일제협력단체사전』(2004)

    1940.7            대륙인식                                인문평론
    1941.1.3         국민연극 수립에 대한 제언        매일신보
    1941.2            신체제하의 연극                      춘추
    1941.3            아름다운 도시                         신시대
    1941.12           연극계의 회고                         춘추
    1942.2.19        축 싱가폴 함락                         매일신보
    1942.6            북진대 여화                             국민문학
    1942.7.30-8.5  개척과 희망                              매일신보
    1942.9            극장은 연극을 결정한다             신시대
    1942.9            만주분산개척민촌을 보고           춘추
    1942.11-43.1    대추나무(희곡)                        신시대
    1943.6            싸우는 국민의 자세                   국민문학

     

    근대연극사의 비극 이끈 유치진

    유치진은 1974년 운명하기 전까지 연출, 평론을 비롯해 우리나라 연극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또 희곡 작가로 우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람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3.1운동을 주제로한 <조국>이나 김유신의 아들 원술을 주인공으로한 <원술랑>같은 작품은 학창시절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그러나 유치진의 삶과 문학을 평가할 때 피해갈 수 없는 가장 큰 논란은 친일행적이다. 지난해 발표됐던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발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치진은 공연예술계의 대표적인 친일인물로 거론되기도 했다.

    우선,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이재명 교수는 70~80년대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유치진의 '조국'이라는 작품을 예로 들면서 그동안 선배연구가들에 의해 한국 연극사가 얼마나 왜곡돼 왔는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일이냐 친일이 아니냐는 논쟁을 떠나 사실마저도 왜곡됐던 지난날 연극계의 현실을 질책하는 이야기다.

    "조국의 내용을 살펴보면 억압받던 시민들이 3.1운동을 일으키고 일본헌병이 함께 만세를 부른다는 내용입니다. 이 얼마나 희화적인 내용입니까. 현실인식이 없는 작품인데, 선배연구가들은 그 작품을 최고 작품으로 평가해 왔습니다. 반면 해방이후 좌익활동을 하고 월북했던 함세덕의 작품 '기미년 3월1일'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선배연구가들은 유치진의 작품에 맞서기 위해 함세덕이 이 작품을 발표했다고 주장했지요. 하지만 시기상으로만 봐도 맞지 않습니다. 함세덕의 <기미년 3월1일>이 발표된 해는 1946년이며 유치진의 <조국>은 1947년이거든요. ‘친일청산’도 청산이지만, '이념'이라는 정치적 잣대로 문학적인 평가마저 왜곡됐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당시 자료가 없어서 심도 있는 연구도 어려웠고요."

    국민극 운동의 선봉에 선 극단 '현대극장'의 대표 유치진

    동랑 유치진(왼쪽)과 정윤주 작곡가 제승당 가는 배 위에서. 1960년대

     

    유치진은 1930년대 신극운동을 주도했던 연극인이었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서 국민극 운동의 선봉에 선 극단 '현대극장'을 이끌면서 <흑룡강>, <북진대>, <대추나무>등을 발표하고 친일 국민극 작가로 변모한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이재명 교수는 "유치진은 1930년대 식민지 통치하의 실상을 광명과 희망이 없는 현실로 인식하다가 1940년대에 갑자기 광명의 날이 가능하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치진은 1930년 리얼리즘 문학관에서 1940년대 어두운 현실에 광명을 던지는 계몽적인 문학관으로 변신한 것입니다. 어려운 현실을 일부러 외면하고 다른 데에서 광명을 찾으려는 형국이지요."

    "유치진의 1930년대 작품 <소>는 어더운 현실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는 조선 농민들의 실상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속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아스라하거나, 자포자기의 몸부림으로 지주 곡간에 불을 지르며 빛을 발할 뿐입니다."

    "또다른 1930년대 작품 <개골산>에서도 역시 패망할 위기에 있는 신라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소수의 태자일행이 국난을 극복할 계획과 행동을 결행하지만 역부족인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렴풋하게나마 빛을 찾을 듯한 장면이 연출되나 이내 절망 속에 사그라들고 맙니다. 1930년대 유치환의 작품은 '일점의 광명'이 없는 비극적 인식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치진은 1940년 극단 '현대극장'을 통해 <흑룡강>과 <대추나무>를 발표하면서 달라진다.

    "<흑룡강>에서는 조선 청년들이 온갖 고난을 겪지만, 추운 겨울밤 야음을 틈타 적을 무찌르고 적을 회유시켜 새로 건설될 만주국의 희망을 전합니다. <대추나무>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청춘남녀가 무지몽매한 지주의 반대와 완고한 부모세대의 이기적인 고집과 갈들을 넘어 화해와 사랑을 이끌어내면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유치진의 40년대 작품들은 인위적으로 광명을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인위적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희망을 찾는 멜로드라마의 도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40년대 작품에서는 일제가 표방한 대동아공영권 주장 및 오족협화의 이념과 일맥상통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제가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고, 한민족을 내선일체화시키고, 나아가 침략저쟁의 야욕을 구현하기 위해 조작해낸 이념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유치진이 만들어낸 주동인물이 현실저항적인 아웃사이더에서 지극히 현실참여적인 친일 지도자로 탈바꿈한 것이죠."

    "작품 <흑룡강>의 주인공 성천은 만주국 건설의 꿈을 지녔습니다. 그 믿음 뒤에는 일제의 든든한 군사력이 바탕에 깔려 있지요. 이처럼 그는 신생 식민지 개척의 최전선에 나서는 '신청년'의 이미지를 표상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를 통해 피식민지로서 조선의 자기 위치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구체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내선일체를 넘어 멸사봉공의 신념을 지닌 신식민지의 개척자요 계몽자로서의 아상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며, 아시아 내부에서 일본을 정점으로 한 위계화, 즉 일본-조선-만주 등의 신생 식민지로 구분되는 정치적 위계화를 실천하는 모습도 읽을 수 있다."

    일제말기 대부분의 연극인들은 국민연극(친일연극)에 종사했다. 일제의 통제와 탄압이 가장 심했던 1940년대 들어 공연이 취소되거나 투옥된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을 보면 조선 공연예술가들이 얼마나 친일에 적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국민연극을 이끌어온 유치진의 행위가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울러 유치진의 연극은 시루에서 자라는 콩나물과 같이 친일의 테두리에서 성장한 조국의 비극적인 운명을 상징하고 있으며 근대연극사의 불행과 함께 한다. 그리고 해방된 후 친일 청산이 유야무야돼 영영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문화를 생산해내는데 실패했던 우리의 과제와도 닿아있다.

    이동권 기자 ⓒ민중의소리

     

     

     

     

     

     

    참고문헌

    유치진, {동랑자서전}.

    [북진대], {삼천리}, 1942.7.

    [신체제하의 연극----조선연극협회와 연관하여], {춘추}, 1941. 2

    권영민 (2004년 2월 25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반민족문제연구소 (1995.7.1). 〈유치진 : 친일 ‘국민연극’ 주도한 근대연극사의 거두 (박영정)〉, 《친일파 99인 (3)》

    『한국연극사』(이두현, 민중서관, 1973)
    『한국현대희곡사』(류민영, 홍성사, 1982)

     

    통영시 관광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