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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지상주의의 파탄과 친일문학가로의 전락, 김동인 (金東仁)

草霧 2013. 12. 13. 12:25

 

 

 

문학

 

김동인 (金東仁, 창씨명 金東文仁, 1900∼1951)

 

 

 

 

예술지상주의의 파탄과 친일문학가로의 전락 

 

 

 

      곤토 후미히토(金東文仁)

    1900년 평양 출생
    1919년 {창조} 창간
    1939년 '성전종군작가'로 황군 위문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
    1955년 '사상계'에서 동인문학상 제정

    1939년 '성전종군작가'로 황군 위문.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
    1944년 친일소설 {성암의 길} 발표

    1941. 7  백마강(소설)(매일신보)

    1942. 1. 23  감격과 긴장(매일신보)

    1942. 2  아부용(소설)(조광)

    1944. 8∼12 성암의 길(소설)(조광)

    1944. 1. 1∼4  총동원태세로(매일신보)

    1944. 1. 16∼28  반도민중의 황민화(매일신보)

    1944. 1. 20  일장기 물결(매일신보)

    1944. 12. 10 문화인의 총궐기(매일신보)

    1945. 3. 8  전시생활소감(매일신보)

    1941.7 백마강(소설) 매일신보
    1942.1.23 감격과 긴장 매일신보
    1942.2 아부용(소설) 조광
    1944.8-12 성암의 길(소설) 조광
    1944.1.1-4 총동원태세로 매일신보
    1944.1.16-28 반도민중의 황민화 매일신보
    1944.1.20 일장기 물결 매일신보
    1944.12.10 문화인의 총궐기 매일신보
    1945.3.8 전시생활소감 매일신보

  • 평안남도 평양 숭덕소학교 졸업
  • 평안남도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 수료
  • 일본 도쿄 사립 중학교 수료
  • 일본 도쿄 메이지 중학교 졸업
  • 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 중퇴
  • 김동인(金東仁, 일본식 이름: 東 文仁 히가시 후미히토 / 金東文仁 가네히가시 후미히토, 1900년 10월 2일 ~ 1951년 1월 5일)은 일제 강점기대한민국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호는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仁), 춘사(春士), 만덕(萬德), 시어딤이다.

     

    1919년2.8 독립 선언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소설,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고,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친일 전향 의혹이 있다. 해방 후에는 이광수를 제명하려는 문단과 갈등을 빚다가 1946년 우파 문인들을 규합하여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였다. 생애 후반에는 불면증, 우울증, 중풍 등에 시달리다가 한국 전쟁 중 죽었다.

     

    평론과 풍자에 능하였으며 한때 문인은 글만 써야된다는 신념을 갖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나타난 자유 연애와 여성 해방 운동을 반대, 비판하기도 하였다. 현대적인 문체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필명은 김만덕, 시어딤, 김시어딤, 금동 등을 썼다. 그의 작품은 저작권이 소멸되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 중일전쟁 발발 이후 변절하였다. 1939년 2월 초중순경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를 찾아가 '문단사절'을 조직해 중국 화북지방에 주둔한 황군(皇軍)을 위문할 것을 제안했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3월 위문사(문단사절)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박영희,임학수와 함께 뽑혔고, 4월 15일부터 5월 13일까지 '북지황군 위문 문단사절'로 활동하여 중국 전선에 일본군 위문을 다녀와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1년 11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내선작가 간담회에 출석하여 발언하였고, 같은해 12월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시국적 작품을 낭독했다. 이후 1943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하에 조선문인협회, 조선하이쿠 협회, 조선센류 협회, 국민시가연맹등 4단체가 통합하여 조선문인보국회로 출범하자, 6월 15일부터 소설희곡부회 상담역을 맡았다. 그외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1944년 1월 20일에 조선인 학병이 첫입영을 하게 되자, 1월 19일부터 1월 28일에 걸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 실시 수감(隨感)'의 제목으로 학병권유를 연재하면서 선동했다. 이 밖에 김동인은 친일소설이나 산문 등을 여러편을 남겼다.

     

    8월 17일 임화김남천이 주도하는 중앙문화건설협의회 발족회에서 이광수 제명을 반대하며 퇴장하였으나, 18일 협의회가 발족되었을 때에는 회원에 가입돼 있었다. 한편 해방 직후 이광수에 대한 단죄 분위기가 나타나자 앞장서서 이광수를 변호하는 몇 안되는 문인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9월한민당이 창당되어 그를 영입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같은 해 11월, 미군정청 광공국장의 호의로 서울 성동구 신당동[6]의 적산가옥을 불하받았다.

     

    1945년 12월 이후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지지하였고, 이듬해 1946년 1월 우익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을 주선했다. 같은 해 11월 불하받은 적산가옥이 미군당국에 접수되어 하왕십리동으로 이사했다.

     

    1947년 3월 '백민'에 산문 '망국인기(亡國人記)', 1948년 5월 '백민'에 산문 '속 망국인기',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산문 '문단 30년의 자취'등을 발표하면서 일제강점기 수 많은 친일활동 행적에 대해 변명하는등 논조를 썼다. 그 주요내용은 "일제말기의 친일행위는 민족해방을 위한 결단이자 고육책, '조선어와 조선소설'을 지키기 위한 체제내적 저항행위'"라고 미화했다.

     

    김동인은 말년에 사업에 실패하고 불면증에 시달렸다.[7] 만년의 김동인은 약국에서 수면제를 다량으로 구입했다. 그 중 가장 값싸고 강력한 포수크로랄을 주로 먹었다. 그는 수면제에 의존해 살아갔고 수면제에 관한 한 박사가 됐다.

     

    1949년 7월중풍으로 쓰러졌다. 반신불수가 되면서 불면증과 함께 우울증도 찾아왔고,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서울의 쪽방에서 병마와 고독과 싸우며 수면제이 그의 유일한 동무였다. 1950년 6.25 사변이 일어났으나 몸이 불편하여 얼마 못가 다시 되돌아왔다. 6월 28일 결국 피난을 포기하고 홀로 서울에 남아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1951년 1월 용산 하왕십리집에서 사망, 동네 이웃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묻어주었다.

     

    6.25 전쟁 직후 실종자로 처리되었다가 1950년대 후반에 그의 비참한 죽음이 알려졌다. 이후 박종화, 염상섭, 장준하 등에 의해 그의 작품성에 대한 조명 및 추모운동이 시작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친일 저작물 수는 소설 3편을 포함하여 총 9편이다.[8]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일제강점기 말기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투옥되고 변절하여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하였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낸 정치인이자 한국 전쟁 때 납북된 김동원이 소설가 김동인의 이복형이다.

     

    1955년 '사상계'가 김동인의 이름을 딴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여 1956년부터 시상을 시작했다. 이후 동인문학상은 1956년부터 1967년까지는 사상계사, 1979년부터 1985년까지는 동서문화사,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사가 주관하여 매년 시상되고 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009년 11월 27일 “김동인의 소설과 글 등을 통해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소설의 한 부분만 떼어놓고 친일행위라고 단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또 “당시 행위에는 적극성이 결여돼 있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했었다. 2010년 11월 26일 재판부는 다음과 같이 친일 행위를 인정했다.

     

  • 배따라기
  • 감자
  • 광화사
  • 붉은 산
  • 운현궁의 봄〉(흥선대원군 이하응을 대장부로 묘사한 역사소설)
  • 광염소나타
  •  

     김동인은 1944년 1월 16일부터 1월 28일까지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 실시 수감’을 10회 연재했고, 20일 ‘일장기 물결-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징용을 직접적이고 자극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했다.

     

     

    “당시 매일신보는 유일한 우리글 일간지로, 게재 횟수가 11회에 이르는 점 등을 비춰보면 김씨가 전국적 차원에서 징용을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 <백마강>은 일본이 조선과 일본의 내선일체를 주제로 기획한 시국소설인데 김씨가 ‘작자의 말’ 등을 통해 우리나라와 일본이 역사적으로도 한 나라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그리려 한 것으로 보인다”

 

법원 “소설가 김동인 친일행위 인정된다”

소설 <감자> <배따라기>를 남긴 작가 김동인(1900~1951)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 처분은 적법하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오석준 부장판사)는 26일 김씨의 아들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결정 취소 청구소송에 대해 “김씨가 일부 친일행위를 한 점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해 7월 “김씨가 소설과 글 등을 통해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김씨의 아들은 “아버지는 친일소설이라고 지적된 <백마강>을 연재하던 중 ‘천황모독죄’로 구속되기도 했다”며 “소설의 한 부분만 떼어놓고 친일행위라고 단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또 “당시 행위에는 적극성이 결여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김씨 행위 중 일부가 친일행위에 해당한다고 인정했다. 재판부는 “김씨는 1944년 1월16~28일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 실시 수감’을 10회 연재했고, 20일 ‘일장기 물결-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징용을 직접적이고 자극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했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매일신보는 유일한 우리글 일간지로, 게재 횟수가 11회에 이르는 점 등을 비춰보면 김씨가 전국적 차원에서 징용을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또 “소설 <백마강>은 일본이 조선과 일본의 내선일체를 주제로 기획한 시국소설인데 김씨가 ‘작자의 말’ 등을 통해 우리나라와 일본이 역사적으로도 한 나라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그리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개척자로 일컬어지는 김동인(1900~51)의 친일 글 세 편이 새롭게 발굴되었다. 새로 드러난 동인의 친일 글은 <국민신보> 1939년 4월 16일 치에 일본어로 쓴 <이야기 같은 보고소설을 쓰다>, <삼천리> 1939년 7월호에 실린 좌담 `문단 사절 귀환보고’, 그리고 단행본 <방송소설명작선>(조선출판사, 1943. 12)에 묶인 단편 <남경조약> 등으로, 원광대 김재용 교수가 찾아내 공개했다. 

 

< …보고소설을 쓰다>는 친일문학 연구가 임종국에 의해 <설화적인 보고소설>이라는 다소 부정확한 제목으로 그 존재는 알려졌지만, 전문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 문단의 누군가를 지나 전선에 파견하고 싶다. 파견하여 조선 문단의 이름으로 전선의 장병을 위문하면서 조선에서의 전쟁문학을 일으키고 싶다. 이런 의견을 작년 가을부터 가지고 있었다”며 시작되는 <…보고소설을 쓰다>는 김동인이 박영희, 임학수와 함께 1939년 4월15일부터 5월15일까지 한 달 동안 화북(華北) 주둔 일본군을 위문하러 떠나는 길에 쓴 것이다. 동인의 친일 글로는 이제까지 알려진 글 가운데 가장 앞선 시기의 것이 되며, <삼천리> 39년 7월호의 좌담과도 연결되는 글이다. 

 

`황군위문차 북지에 다녀와서’라는 부제로 행해진 <삼천리>의 좌담에서 동인은 자신을 포함한 세 문인이 `담배 1000갑, 밀크 캐러멜과 초콜릿 각 1000개씩’을 가지고 가서는 현지에서 추가로 과일과 과자를 전달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박태원, 정인택, 안회남, 김래성, 정비석, 계용묵 등의 글과 함께 <방송소설명작선>에 수록된 <남경조약>은 1841년 아편전쟁을 소재로 삼아 영국의 악독성을 고발한 작품이다. 

 

한편, 소장 문학평론가 오창은(32)씨는 <실천문학> 겨울호에 기고한 글을 통해 친일 문인 문학상 제도의 실태와 문제점을 고발해 눈길을 끈다. 그에 따르면 지난 8월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민족문제연구소, <실천문학>이 공동작업을 통해 발표한 42명의 친일 문인 가운데 7명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현재 시상되고 있다. 동인문학상, 조연현문학상, 육당시조문학상, 소천비평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이무영문학상, 미당문학상이 그것들이다. 이 가운데 1955년 <사상계>에 의해 제정된 동인문학상은 친일 문인 문학상의 `원죄’로 지목된다. 제1회 동인문학상 심사위원 9명 가운데 김팔봉, 백철, 최정희, 이무영, 정비석, 이헌구가 친일 문인 42인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오창은씨에 따르면 친일 문인 문학상은 수상자와 심사위원으로 하여금 “친일 행적에 관대한 입장을 취하겠다는 `암묵적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특히 조선일보(동인문학상), 중앙일보(미당문학상), 한국일보(팔봉비평문학상) 등 중앙 일간지들이 친일 문인 문학상 운영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은 경계해 마땅하다. “언론사가 `친일 문인 문학상’ 운영에 자신의 조직력을 동원함으로써 마치 문인들에 대한 사회적 승인 기구인 양 행세하는 것은 더 큰 위험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거기에서는 `문학을 관리하겠다는 욕망’이 보이기 때문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신비화된 순문학자, 예술지상주의자의 숨겨진 본질

 

1900년에 평양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신 선생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청산학원 중학부를 졸업한 뒤에 처음에는 화가가 될 작정으로 천단(川端)미술학원에 재학중이다가 중도에 뜻을 달리하여 문학의 길을 택하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춘원 이광수 선생의 {무정}이 있었을 뿐으로 순문학 작품은 아직 형태조차 없던 시대건만, 어려서부터 외국문학을 섭렵하신 선생은 기미독립운동이 전개되던 1919년에 독립만세의 봉화가 터지기보다 한 달 앞서 도쿄에서 순문학잡지 {창조}를 발간하였다.……신문학운동의 봉화인 그 잡지는 순전히 선생의 사재로서 발간되었던 것이다.

 

{창조} 발간 이후 김동인 선생은 30여 년간 오로지 문학의 길로만 정진하셨다. 문학자가 문학도에 정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겠으되, 문학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는 딱한 사정에서 거개의 우리나라 문인들이 문학 이외에 반드시 생계를 위한 별도의 직업을 가졌건만, 선생만은 조석이 마루한 극도의 빈한(貧寒) 속에서도 오직 문학만을 일삼으셨던 것이다.

 

오직 한 번 조선일보사 문예부장에 일시 취임했던 일이 있으나, 선생은 그 길이 아님을 이내 깨닫고, 1주일 만에 단연 그 자리를 물러 나섰던 것이다.

 

이 글은 소설가 정비석이 쓴 [김동인의 예술과 생애] 중의 일부이다. 이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동인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순문학자, 그야말로 결벽증에 가까운 예술지상주의자로 추앙되어 있다. 문학 이외의 경력이나 이력 같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오직 소설의 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것이다. 

 

그 자신도 해방 후에 쓴 [망국인기]에서 "세상의 하구 많은 직업 가운데서, 소설 쓰는 것을 직업으로 택하여 가지고 이 길에 정진하기를 1918년부터 오늘(1945년)까지 무릇 28∼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산업(産業)을 모르는지라.

 

어버이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은 삽시간에 탕진하고, 가난한 살림을 가난하기 때문에 받는 온갖 고통과 불만과 수모를 받으면서 그래도 이 길만을 지켜온 나였소"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김동인의 문학적 생애를 추적하다 보면 이런 일반적 평가는 어느 한 지점을 확대한 것이며 그 지점을 지나는 순간 기묘한 운명의 곡예사가 그의 운명을 비틀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리하여 오늘 친일파 열전에 속하는 비극적 인물로 그를 말해야 하는, 역사가 주는 음울한 자기파탄의 음률을 듣게 된다.

 

일반적으로 김동인에 대한 순문학자 혹은 예술 지상주의자로의 신비화는 주로 이 땅의 최초의 순문학잡지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다.

 

가산(家産)까지 소비하여 {창조}를 발간하고, 이광수에 맞서 '순문학 건설'의 기치를 내걸었다는 사실을 중시하여, 여기에다 그의 대표작으로 흔히 손꼽히는 소설 [감자], [광염소나타] 등의 작품세계를 곁들여 순문학자 혹은 예술지상주의자로 추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사실 특정 시기 김동인의 문학적 삶에 해당할 뿐, 1930년대 후반기의 문학적 삶은 오히려 이를 정면으로 뒤집은 형국이다.

 

 

 

 

백만장자 자제의 호사가 가져다 준 빈곤의 문학적 파탄

김동인이 평양 갑부의 아들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흔히 그가 자기 가산을 투자하여 {창조}를 발간할 만큼 문학에 대한 열정이 지극했다는 점만을 강조하였지, 다른 한편으로 평양 갑부의 자식으로서 보여 주었던 호사스런 생활의 방탕함은 묻혀 버렸다.

 

다음의 일화만으로도 그의 호사가 어느 정도였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인이 처음 평양을 거쳐 서울 출입을 하는데, 그의 거처와 행동은 마치 왕자가 아니면 부마(駙馬) 같았다.

 

그는 용전여수(用錢如水)하면서 여숙을 남대문 안 월편 패밀리호텔에 정하고 있었다. 당시의 패밀리호텔이란 서양사람들만 유숙하고 있는 고급 호텔로서 조선호텔에 못지 아니한 고급 호텔이다.

 

그는 밤에는 명월관에서 기생 수십 명씩을 옹위시켜 밤새도록 호유(豪遊)하고, 낮에는 패밀리호텔에서 기생들을 데리고 감몽(甘夢)이 짙었었다. 월탄 박종화의 김동인에 대한 회고다(박종화, [오만한 천재 김동인의 풍류]). 

 

이 회고에서 알 수 있듯이 김동인의 호사는 가히 최상급이었다. 서울에 올라오면 기생들을 옆에 끼고 호사를 부렸고, 마음 내키면 일본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놀러다니기도 하여 문단에서는 김동인이 도쿄를 산보다니듯 한다 하여 '동인식 동경산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단장을 짚고 백금 물부리에 멋진 양복장이 신사였던 김동인의 생활은 차츰 빈곤을 향해 하강곡선을 긋기 시작한다.

 

평양에서 가장 컸던 400평 규모의 커다란 저택을 팔게 되었고, 재산은 깨진 항아리의 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런 생활상의 변화는 우울증 등 신경증의 병마를 가져다 주었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수면제, 최면제 등을 과다복용함으로써 나중에는 마약까지 손대기 시작하여, 중년 이후에는 약물중독에 의한 병마에 마지막까지 시달려야만 했다.

 

거기다가 아내 김혜인마저 가출하여 그의 곁을 떠나 버리는 가정파탄이 그를 엄습하였다. 경제적 파산과 가장파탄의 이중적 고통이 그의 삶을 뿌리채 파괴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30년 다시 재혼한 김동인은 다음해부터 서울로 이사하여 그로서는 가난한 살림살이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스스로 돈을 벌어야만 했고, 그것은 원고료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고료를 달라고 주요한*, 이광수*에게 편지를 보내고, 돈을 벌기 위해 문학을 통속화시킨다고 그토록 경멸했던 신문 연재소설 창작에 매달려야만 했다.

 

그의 문학적 훼절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이른바 김동인 문학의 제2기에 해당하는 수많은 통속역사소설, 야담소설은 이런 배경에서 산출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 자신의 삶을 예언이라도 하듯 비유적으로 표현한 '흰 담비'(白貂) 이야기는 그야말로 운명적이다.

 

백초는 자기의 털의 순백한 것을 몹시 사랑하고 아껴서 절대로 진흙밭이나 털을 더럽힐 곳은 통행을 안하고, 돌림길을 하여서라도 그런 곳을 피하여 앞에 더러운 곳이 있고 뒤에 사람이라도 쫓아오면 사람에게 잡히기를 감수할지언정 털 더럽힐 곳은 안 가지만 어쩌다가 실수해서 조금이라도 털을 더럽히면 그 뒤에는 자포가 되어 스스로 더러운 곳에 함부로 뒹굴어 온통 전신을 더럽힌다 한다.

 

말하자면 경제적 궁핍으로 원고료 수입을 위해 통속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자 근대문학 초창기에 그야말로 '문학을 위한 문학'을 소리높여 주창하였던 순백한 예술지상주의자가 통속작가로 자기 몸을 함부로 뒹굴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제 발로 찾아나섰던 친일의 길과 친일문학

문학적으로 한 번 훼절의 길로 접어들자 김동인의 정신적 파탄은 차츰 도를 더해갔다. 이와 상관관계가 깊은 병마까지 항상 그를 에워싸니 그의 삶은 곧잘 상식을 벗어나 비정상적인 양태까지 노출하고 만다. 놀랍게도 이광수와 마찬가지로 자진해서 일제에 협력하고자 총독부를 찾아가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쓴 기록을 한번 보자. 신병으로 붓대를 놓은 지 만 2년----행여 좀 차도가 있을까 하여 반 년 나마를 기다리다가 종래 차도를 보지 못하고 [정필편]의 일문(一文)을 초한 뒤에 아주 붓을 던진 지 어언간 1년 반이 되었다. 한때는 절망상태였다. 

 

다시 붓을 잡을 가망이 없었다. 재재작년(1938년----인용자) 겨울에 중환을 앓았다. 때는 마침 일지사변(日支事變)이 최고조에 달하여 한커우(漢口), 광둥(廣東) 모두 우리 손에 들어오고 국민의 애국세(愛國勢)는 그칠 바 모르게 올라가서 황군(皇軍)에게 대한 감사의 염(念)과 격려의 성(聲)이 격우격(激又激)한 때였다.

 

초동(初動)할 수 없는 중병에 누워서 매일 신문을 보면서 여기 미조(微助)도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이 여기고 자탄해 마지 않았다. 더욱이 각 단체 각방이 앞을 다투면서 위문이라 헌금이라 할 때 문사층에서 잠자코 있는 것이 부끄럽기 한량없다. 11월 중순(1938년----인용자)에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게끔 되었다.

 

즉시 택시로 총독부를 달려갔다. 학무국(文士 감독관청----인용자)의 문을 두드렸다. 당국의 내락만 있으면 문사 가운데서 대표 몇 사람을 뽑아서 현지에 보내서 황군노고와 충용의 실정을 조사하여 조선 대중에게 전달하고 싶다.

 

국어(일본어----인용자)를 모르는 다대수 민중은 간단한 신문 이상의 실정은 모르는 바니, 이 불철저를 해소하고 싶다.----이렇게 원하였더니 당국에서는 대답이, 지금 위문이라 시찰이라 너무 많이 가므로 현지군에서도 매우 귀찮게 알고 또 그 보호의 폐가 하도 군 행동에 방해가 되어 가급적 막는 형편이다.……하니 우리로서도 찬성하기 힘들다.

 

가미시바이(그림연극----인용자) 창작에나 어디 유의하여 보자 하는 것이었다. 너무 머리의 생각과는 어긋나는 대답이므로 그냥 물러 나오고 말았다.({매일신보}, 1941. 3.23∼29)

 

결국 김동인의 총독부 자진출두 행위는 뒤이어 문단에서 정식 거론되어 다시 한 번 김동인은 최재서* 등과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를 찾아가 위문을 허락받는다. 

 

그리고 1939년 여름 박영희*, 임학수와 더불어 '성전종군작가'라고 쓴 '다스케'(어깨띠)를 두르고 경성역을 떠나 북지(임둔지방)로 황군위문길에 나선다. 그 때 김동인은 {조선일보}에 새로 연재하고 있던 장편소설 [정열도 병인가]를 중단까지 하면서 떠났다.

 

김동인은 그 때 당시 마약 중독 때문에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 사고력도 좋은 편이 못되어서 연재하는 소설의 스토리도 횡설수설했다.

 

더구나 한 해 전인 1938년 봄에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로 옥살이까지 하였다. 어느 날 오후 검은 양산대 같은 긴 지팡이를 끌고 삼천리사에 들러서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의미없이 내뱉은 한 마디로 그 곳에 있던 정보계통 사람에게 들켜서 일본 '천황 모독죄'로 얼마 동안 일본 헌병대에 끌려간 적도 있었다.

 

백철*은 이를 두고 김동인 자신으로선 그런 허물도 벗을 겸 종군을 지원하고 나섰는지 모른다고 했지만, 어쨌든 자진해서 총독부를 찾아가 친일하겠다고 자청한 오욕의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이후 김동인은 친일문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무엇보다 북지를 다녀온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작품과 제재문제]({매일신보}, 1941.3.23∼29)이다.

그러나 김동인은 황군위문길에서도 병마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으며 돌아와서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고생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군(軍)으로 다시 찾아가 "전일의 기억은 죄다 잃어버렸으니 다시 한 번 현지시찰을 하고 싶다"는 촌극을 빚기도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징용대상에 포함된 것을 알고 이를 면하기 위해 염치불구하고 조선문인보국회 간사 자리를 간청하여 얻어내기도 하였다.

 

여하튼 김동인은 그 외에도 {매일신보}에 [태평양송](1942. 1. 6), [감격과 긴장](1942. 1. 13), [쾌전하 문단인의 결의----총동원태세로](1944. 1. 1∼4),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실시수감](1944. 1. 16∼28), [일장기 물결](1944. 1. 20), [문화인의 총궐기](1944. 12. 10), [전시생활수감](1945. 3. 8) 등의 글을 실어 '내선일체'와 '성전'(聖戰)을 기렸으며, [백마강](1941), [성암(聖岩)의 길](1944) 등의 작품을 통해 친일문학을 직접 빚어내기도 하였다.

 

특히 [성암의 길]은 국수주의자, 천황지지자인 일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그런데 이러한 김동인의 친일행각은 1945년 8월 15일 아침까지 이어진다. 1947년에 발표된 [망국인기]에 스스로 기록해놓은 내용이다.

 

이광수로부터 어떤 후원자가 있어 문인들이 무슨 사업을 하면 50만 원까지 내놓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 아베(阿部達一)를 찾아가 작가단을 만들겠다고 간청한 것이다. 때는 1945년 8월 15일 오전 10시 정각, 아베에게는 어디서 전화가 걸려왔소. 

 

전화로 보내는 아베의 대답---- "응? 그건……, 두 시간만 더 기다려. 단 두 시간뿐이나 절대로  미리 말할 수 없어. 응, 응, 그러구 예금이나 저금 있나? 은행에구 우편에구 간에 예금이 있거든 홀랑 찾게. 방금 곧……, 열두 시 이전에." 그냥 아베의 전화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나는 아베를 내버려두고 뛰쳐나왔소.

 

그 자신은 일본이 항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려 하였지만, 이미 일본이 패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총독부 관리 앞에 친일작가단을 만들겠다고 떼를 쓰는 김동인의 모습을 생각하면 희극적이다 못해 오히려 비극적이다.

 

 

 

김동인의 비극적인 삶의 종말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하듯 비유적으로 표현한 '흰 담비'(白貂)처럼 김동인의 친일행위는 자포자기의 삶이 가져다 준 삶의 파탄이다.

 

 그리고 이러한 파탄은 그의 죽음까지 멍들게 하고 만다. 한국전쟁 와중에 정확히 언제이지도 모르게 그는 홀로 고독히 죽어갔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김동인의 아내는 약물과용으로 인하여 중태에 빠진 김동인을 두고 한강을 건너야만 했다.

 

돈 3만 원을 이불 속에 넣어둔 채 조랑조랑 아이들만 데리고 피난하였는데, 다시 돌아와 보니 이불과 3만 원은 없어지고 김동인 혼자 냉돌방에서 싸늘히 식어 있더라는 것이다.

 

우리 근대문단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손꼽혔고 {창조}를 직접 발간함으로써 근대문학의 화려한 개척자로 칭송받았으며, 그런 그답게 근대문인 중 가장 호사스럽고 안하무인격인 행동으로 위세를 떨쳤던 김동인이었지만 호사와 방탕이 가져다 준 경제적·정신적 파탄은 그를 가장 통속적인 야담소설가로 밀어뜨리고 끝내 친일문학가라는 늪으로까지 그를 끌고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파탄이 가져다 준 희극적인 비극의 운명은 그칠 줄 몰랐다.

 

김동인의 '이 충무공과 그 아들' 발굴
(서울=연합뉴스) 신유리 기자 = 소설가 김동인(1900-1951)의 단편 소설 '이 충무공과 그 아들'. 1949년 월간 잡지 '소학생' 3월호에 실렸던 것이 이번에 처음 발굴됐다. 2011.12.9 << 문학 계간지 '연인' 제공 >> zjin@yna.co.kr

 

 

                    ■ 임규찬(문학평론가, 성균관대 강사)

 

 

김동인(金東仁, 1900∼1951)

 

 

김동인의《수평선 넘어로》(위·아들 김광명씨 소장)와 이광수의《원효대사》(이근배 시인 소장)./영인문학관 제공

 

 
소설가. 본관은 전주. 호는 금동(琴童) 또는 춘사(春士). 평양출신.

아버지는 평양교회 초대장로였던 대윤(大潤)이며, 어머니는 옥씨(玉氏)이다. 3남1녀 중 차남이다. 소년기는 유복하면서도 아버지의 엄한 훈도 아래 친구 없는 유아독존적 생활을 하면서 성장했다. 1912년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기독교학교인 숭실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중퇴하였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학원 중학부에 입학했으나, 동경학원 폐쇄로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편입하였다.


이때 주요한(朱耀翰)과의 경쟁의식 속에서, 의사나 변호사가 되려던 당초 목표와는 달리 많은 독서를 통해 문학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 명치학원을 졸업한 뒤 그림에 뜻을 두어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에 들어갔으나 중퇴했다. 이 사이 부친상으로 일시 귀국하여 1918년 김혜인(金惠仁)과 혼인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919년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동인지인 《창조 創造》를 자비로 출판하여, 창간호에 처녀작 〈약한자의 슬픔〉을, 제3∼6호에 〈마음이 옅은 자여〉를 발표하였다. 3·1운동의 파문으로 귀국한 뒤, 아우의 부탁을 받아 격문을 초(草)하여주었다가, 출판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6개월 징역을 살았다.


1921년 경영난 때문에 《창조》를 제9호로 폐간하게 되면서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1924년에는 창작집 《목숨》을 자비로 출판하고, 《창조》의 후신격인 동인지 《영대 靈臺》를 간행하였으나, 다음해 제5호로 폐간하였다.  그뒤 다시 방탕으로 가산을 탕진한 그는 1926년 평양에서 관개사업에 착수했다가 실패하고 이로 인해 부인도 가출하였다. 1928년에는 아우 동평을 도와 영화제작에 손을 대었으나 역시 실패하여 그의 생활은 극도로 궁핍해졌다. 다시 상경하여 40여일간 조선일보사 학예부에 봉직했고, 1930년 김경애(金瓊愛)와 재혼함으로써 방탕생활을 정리했다.


그뒤 생활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신문·잡지에 수많은 소설과 사담(史譚)들을 썼다. 윤백남(尹白南)이 주재하던 월간 《야담 野談》에 기고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담에 손대기 시작하였다가 1935년 12월에는 《야담》지를 직접 발간했고, 여기에 〈광화사 狂畵師〉를 발표했다.

 

1942년에는 이른바 일본 천황에 대한 불경죄라는 죄명으로 6개월간 복역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빈곤과 불면증·약물중독으로 시달리다가, 1951년 1·4후퇴 때 가족들이 피난간 사이에 죽었다. 1919년 《창조》에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면서 문학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배따라기〉(1921)로 확고한 문명(文名)을 얻었고, 〈감자〉(1925)·〈명문 明文〉(1925) 등 수많은 단편을 발표하여 우리나라의 근대단편소설의 양식을 확립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단편과 장편, 평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단편소설은 자연주의적 사실주의 계열에 속하는 〈감자〉·〈배따라기〉·〈김연실전 金姸實傳〉(1939)·〈명문〉·〈태형 笞刑〉(1922)·〈발가락이 닮았다〉(1932) 등과, 탐미주의적 계열에 속하는 〈광염(狂炎) 소나타〉(1929)·〈광화사〉, 그리고 민족주의적 색채를 보이고 있는 〈붉은 산〉(1932) 등 다양한 작품경향으로 구분된다.


이들은 모두 특유의 직선적이고 간결한 서술문체와 양식적 완결성이 잘 드러나 있는 순문학 지향의 작품들이다. 그러나 역사소설이나 사담 등을 포함한 후기의 장편소설들은 순문학적이기보다 상업적·통속적인 경향이 짙은 것들이다. 그 중 대표적인 역사소설로는 〈젊은 그들〉(1929)·〈대수양 大首陽〉(1932)·〈운현궁(雲峴宮)의 봄〉(1933) 등이 있다.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역사소설의 일반적인 지향점과는 달리, 역사로부터의 교훈보다 인물의 개성을 살리는 묘사와 허구 등에 중점을 둔으로써 독특한 양식을 이루었고, 김동인 특유의 소설적 의식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다양하게 펼쳐진 모든 작품에서 이광수(李光洙)의 계몽적 교훈주의를 배척하고자 하였으며, 문학은 문학 자체의 아름다움에 귀속시키려는 경향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다.


평론 〈제월(霽月)씨의 평자적 가치(評者的價値)〉를 비롯하여 〈조선근대소설고 朝鮮近代小說考〉(1929)·〈춘원연구 春園硏究〉(1934·1935) 등에서 이룩한 업적도 주로 이러한 문학의 예술적 독자성에 대한 인식과 기법이라는 형식주의적 차원에 집중되어 있다. 실제 작품에서도 서사적 과거시제, 액자소설적인 시점의 이동에 의한 객관적 기법, 사실주의적 문체의 확립 등 소설미학의 기법면에서 이룩한 그의 공적은 매우 크다.


물론, 지나친 이광수 비판에의 집착, 유아독존적인 성격과 예술지상주의적 문학관이 빚어낸 극단적 미의식, 작가우위적 창작태도, 뼈대만 그리는 직선적 구성 등에 있어 비판의 여지와 그 한계점도 많이 있으나, 무엇보다도 문학에 있어 교훈주의의 청산과 한국근대단편소설의 한 전형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김동인의 문학사적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그밖의 작품으로 〈목숨〉(1921)·〈정희〉·〈시골 황서방〉(1925)·〈송동이〉(1929)·〈어머니〉(일명 곰네, 1941)·〈반역자 反逆者〉(1946)·〈망국인기 亡國人記〉(1947) 등의 단편과, 장편으로 〈여인 女人〉(1930)·〈왕부(王府)의 낙조(落照)〉(1935) 등이 있다. 그리고 죽은 뒤 《동인전집》 전 10권(1964)과 《김동인전집》 전 7권(1976)이 간행되었다.

 

  

김동인의 '이 충무공과 그 아들' 발굴
(서울=연합뉴스) 신유리 기자 = 소설가 김동인(1900-1951)의 단편 소설 '이 충무공과 그 아들'. 1949년 월간 잡지 '소학생' 3월호에 실렸던 것이 이번에 처음 발굴됐다. 2011.12.9 << 문학 계간지 '연인' 제공 >> zjin@yna.co.kr

 

 

소설가 김동인(金東仁.1900.10.2∼1951.1.5)

 소설가. 호 금동(琴童)ㆍ금동인(琴童人)ㆍ춘사(春士). 창씨명 곤토 후미히토(金東文仁). 평양 진석동(眞石洞)에서 출생. 일본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거쳐 카와바타(川端畵塾)미술학교에서 화가가 되고자 미술 수업을 했다. 1919년 2월 전영택, 주요한 등과 요코하마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문예지 [창조]를 자비(自費)로 출간, 여기에 우리말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귀국 후 출판법 위반 혐의로 4개월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목숨>(1921)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염(狂炎) 소나타>(1929)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혁신에 공헌하였다. 이광수(李光洙)의 계몽주의적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 수법을 사용하였으며, 1925년대 유행하던 신경향파(新傾向派) 및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순수문학 운동을 벌였다.

 

  1924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1931년 서울 행촌동(杏村洞)으로 이사하여 <결혼식>(1931) <발가락이 닮았다>(1932) <광화사(狂畵師)>(1935) 등을 썼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雲峴宮)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학예부장(學藝部長)으로 입사하였으나 얼마 후 사임하였다. 1935년부터 <왕부(王府)의 낙조(落照)> 등을 발표하고 야담사(野談社)를 설립하여 월간지 [야담(野談)]을 발간하였다.

 

  그는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소설쓰기에 전심하다가 마침내 마약 중독에 걸리고 만다. 병마에 시달리던 1939년 ‘성전 종군 작가’로 황군(皇軍) 위문을 떠났으나 1942년에는 불경죄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 1944년 친일소설(親日小說) <성암(聖岩)의 길>을 발표하였다.

 

  1948년에는 장편 역사소설 <을지문덕(乙支文德)>과 단편 <망국인기(亡國人記)>의 집필에 착수하였으나 생활고와 뇌막염, 동맥경화로 병석에 눕는 바람에 중단하고, 6ㆍ25전쟁 중에 숙환으로 서울 성동구 홍익동 353번지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한강에 뿌려졌다. 김동인문학비 동상이 서울 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 앞에 세워져 있다.

 

  그는 소설 외에 평론에도 일가견을 가졌는데 특히 <춘원연구(春園硏究)>는 역작이다. 김동인은 작중인물의 호칭에 있어서 ‘he, she’를 ‘그’로 통칭하고, 또 용언에서 과거시제를 도입하여 문장에서 시간관념을 의식적으로 명백히 했으며,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이른바 간결체를 형성하였다. 1955년 [사상계사(思想界社)]에서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동인문학상(東仁文學賞)’을 제정, 시상하였으나, 1979년부터 조선일보사에서 시상하고 있다.


  김동인은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을 마치고 미술 공부를 하다가 방향을 바꿔 본격적인 문학 공부를 했다. 1919년 2월 전 재산을 털어 주요한, 전영택, 김환 등과 함께 우리 나라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 [창조]를 발간했다. [창조]는 그 시대 구체적 문예 운동의 장으로서 순문학 원동의 최초의 깃발이었다. 여기에 우리말로 쓴 첫 작품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했다.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로서 근대 단편 소설의 개척자이다. 구어체 문장을 확립했으며, 전 시대의 계몽문학을 거부하고 자연주의 문학을 시도했다. 단편, 역사소설, 평론, 수필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을 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자연주의, 탐미주의, 민족주의, 낭만주의 등 여러 경향이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작품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기도 하지만 같은 작품 속에서도 상반되는 요소들이 공존하는 경우도 있다. 그의 평론은 개성 있는 문체와 감각으로 이채를 띤 작품론과 작가론을 다루고 있다.

 

문학인생

김동인은 우리 신문학사상 가장 선구적인 소설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그의 사후(死後) 문학비평가들은 그에게 자연주의 작가, 탐미주의ㆍ유미주의(唯美主義) 및 예술지상주의 작가라는 여러 평을 내리고 있다. 또 그의 문장 혁신의 공로에 대해서도 시비(是非)가 있다.

 

  그의 작품이 남긴 한국현대문학사적 업적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땅에 진정한 서구적 자연주의 경향의 문학을 확립했으며, 둘째, 본격적인 단편소설의 기반을 최초로 확립했으며, 셋째, 단편이 지니는 속성의 하나인 유머와 위트ㆍ파라독스를 단일한 구성 속에 도입했으며, 넷째, 문장을 혁신했고, 다섯째, 사재(私財)를 기울여 본격적인 순수문예지 ?창조?와 ?영대(靈臺)?를 발간하여 당시 문학활동의 가교를 마련했던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시종일관 리얼리스트로서의 자연주의 문학세계를 추구, 특히 문체에 있어서도 사실적 필치의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광염 소나타> <광화사> 같은 작품에서 유미적(唯美的)인 예술지상주의 경향을 보였고, 그의 자연주의관이 설령 서구의 자연주의 개념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실적 문장과 작품세계는 확고했던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소설의 형식을 정립함에 있어서 특히 단편의 경우, 종래의 설교적ㆍ설화적 형식을 무너뜨리고 단일한 구성에 의한 본격적인 단편소설의 형식을 정립했다.

 

  더욱이 이광수의 문학에 대한 안티테에제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도 설교 위주의 계몽문학에 비하여 자신은 어떤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자각이 서 있었다.

 

<근대소설고>에서 이광수를 가리켜,  “이광수가 처음에 사회에 던진 문학은 반역적 선언이었다. 실로 용감한 돈키호테였다. 그는 유교에 선전을 포고하였다.(중략) 이런 반역적 행사도 가능하다고 깨달을 때에 조선의 온 청년은 지위를 다투려는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이광수의 막하(幕下)에 모여들었다. 소설의 취재를 구구한 조선 사회 풍속 개량에 두지 않고 인생이라는 문제와 그리고 살아가는 고통을 그려보려 하였다. 권선징악에서 조선 사회문제 제시로- 다시 일전(一轉)하여 조선 사회 개화로- 이러한 도정을 밟은 조선 소설은 마침내 인생 문제 제시라는 소설의 본무대에 올라섰다.” 고 말하고 있다.

 

  특히 그의 문장 혁신의 공적에 있어서, 오늘날 과거 시제(過去時制)의 사용과 대명사 ‘He, She' 등을 몰아 ’그‘로 표기한 것인데, 특히 시제의 확립은 우리 문학사상 시간성의 확립을 문학 작품으로 보인 최초의 중대한 업적이다.

 

  취미도 다양한 편이어서, 여행ㆍ낚시질ㆍ화초 재배와 같은 여유 있고 품위 있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꽃에 관심이 커서 필 수 있는 꽃이면 닥치는 대로 사들이곤 했다. 거기다 경마ㆍ마작 같은 도박 취미도 보통이 넘고, 레코드 수집은 물론 사진에도 전문가다운 조예가 있어 촬영ㆍ인화ㆍ수정까지 했다 한다. 또 유리그릇 모으기ㆍ물건 사들이기ㆍ옷과 구두 맞추기 같은 사치한 취미도 있었고, 의상에는 자기 나름의 일가견이 있었다.

 

  그리고 짜고 매운 한국 음식보다도 화려한 일본 음식을 좋아한 미식가이기도 했다. 칼표 담배 한 갑을 사기 위해 신의주에서 안동현(安東縣)까지 인력거를 대절할 정도로 호방했고, 또 거기다 자존심이 강하며 방약 무인(傍若無人)한 패기를 지닌, 유아독존적인 오만한 성격 때문에 한때 일부 문단인들로부터 고립된 적도 있었다. [창조] 동인과 가까운 후배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별로 친구가 없었던 그는 52세의 생애를 자양한 작품(作風)ㆍ성격ㆍ생활ㆍ취미로 일관했다.

 

  특히, 그는 집필 중 추고(推敲)의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에 원고지를 미리 책으로 꾸며 넘버까지 넣어 가지고 집필하는 습성이 있었는데, <왕부의 낙조> 같은 중편 역사 소설은 석양 무렵에 쓰기 시작하여 다음날 아침결에 탈고해 버리는 정도였다.

 

【특징】자연주의, 예술 지상주의, 탐미주의, 유미주의(唯美主義), 간결체의 문장, 현대적인 문체

 

【작품 경향】

  자연주의적 객관 묘사의 작품과 이와 대극적(對極的)인 예술지상주의적 작품, 그리고 때로는 탐미적인 작품 등 다양한 활동을 보여 천재 작가라는 평을 받았다. 경향파 문학의 반대파 선봉에 서서 순수문학을 수호하였고 후기에는 역사 소설로 전환하였다.

 

  그는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를 사용하였으며, 이광수의 계몽주의적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 수법을 보였고,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단편 소설을 확립하였다. 1925년대에 유행하던 신경향파 내지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로 순수문학 운동을 벌였다.

① 자연주의 : <약한 자의 슬픔>(1919), <감자>(1925)

② 낭만적 사실주의 : <배따라기>(1921)

③ 유미주의 : <광화사>(1930), <광염 소나타>(1930)

④ 인도적 사실주의 : <발가락이 닳았다>(1932)

⑤ 민족주의 : <붉은 산>(1932)

⑥ 역사주의 : <젊은 그들>(1929 동아일보 장편 연재), <운현궁의 봄>, <붉은 산>

 

【문학사적 위치】

[창조]의 동인으로 신문학사상 사실주의 내지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적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업적】

  1. 서구적 자연주의의 확립

  2. 한국 최초의 근대적 본격 단편 소설 기반 확립(‘배따라기’, ‘감자’)

  3. 순수 문예 운동 및 사실주의 주창(계몽?프로문학에 대항)

  4. 구어체 문장 확립

  5. 문장의 혁신 - 과거시제(過去時制) 사용, ‘He, She’를 최초로 ‘그’로 표기

  6. 사재를 털어 ?창조?(19), <영대?(24) 발간

 

【소설】

*<약한 자의 슬픔>(1919-?창조? 창간호, 최초 리얼리즘, 최초의 순수문학 단편) <마음이 옅은 자여>(1919) *<배따라기>(1921.창조 9호) <목숨>(1921) <이 잔을>(1923) *<태형(笞刑)>(1923) *<감자>(1925.조선문단 1월호.자연주의) <젊은 그들>(1929.최초 장편역사소설.동아일보) *<광화사(狂畵師)>(1930) *<광염(狂炎) 소나타>(1930) <결혼식>(1931) *<발가락이 닮았다>(1932) <대수양(大首陽)>(1931) *<붉은 산>(1932) <운현궁의 봄>(1933) <견훤>(1938) *<김연실전>(1939)

 

【창작집】

<목숨>(1924)

 

【평론】

<근대 소설고> <춘원 연구>(1934)

 

김동인의 친일 행각  - <교과서와 친일문학>(1988. 1. 19)

  김동인은 1939년 4월 17일∼5월 13일 박영희, 임학수와 함께 화북 지방(華北地方) 황군 위문 작가단(皇軍慰問作家團)에 참가했다. 친일적인 작품으로는 막부(幕府) 말엽의 양이근왕(?夷勤王)론자 야나가와 세이강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 소설 <세이강의 길>이 있으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직후 문화ㆍ사회 각 방면의 인사들이 ‘엄숙한 심경’이란 공통의 대제목 아래 릴레이식으로 쓴 <감격과 긴장> 등 몇 편의 수필이 있다. 

 

▶창씨명 : 곤토 후미히토(金東文仁)

 

▶약력

1939년 '성전종군작가'로 황군 위문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

 

▶작품 목록

1941. 7  백마강(소설)(매일신보)

1942. 1. 23  감격과 긴장(매일신보)

1942. 2  아부용(소설)(조광)

1944. 8∼12 성암의 길(소설)(조광)

1944. 1. 1∼4  총동원태세로(매일신보)

1944. 1. 16∼28  반도민중의 황민화(매일신보)

1944. 1. 20  일장기 물결(매일신보)

1944. 12. 10 문화인의 총궐기(매일신보)

1945. 3. 8  전시생활소감(매일신보)


김동인의 작품 세계  - 조연현 : <한국 현대문학사>

 

▶표현상의 특징 : 김동인 소설의 표현상의 특징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문장이 간략하다. 군더더기의 수사나 화려한 문체가 보이지 않는다. 둘째, 구성이 평면적이다. 이는 주로 그의 소설이 단편에 보다 강점을 지니는 이유가 된다. 셋째, 충격적인 수사의 내용이다. 당대의 문장으로 보면, 참신성과 독창성을 지닌 국면이다. 김동인을 직선적인 작가라고 한 이도 있는데, 이 '직선적인 작가'라는 말은 김동인의 정신적, 문학적 기질과 결부된 것이지만, 표현상의 조건만 가지고 말할 때에는 문장의 간략성과 구성의 평면성을 의미한다.

 

▶다양한 창작 영역 : 김동인은 소설, 평론, 수필 등 산문 문학의 여러 영역에 걸쳐 특이한 면모를 보였다. 소설에 있어서는 단편과 장편 모두를 썼고, 현대 소설과 역사 소설에 다 같이 정진했다. 평론의 경우에도 매우 개성있는 문체와 감각에 의해 이채를 띤 작품론과 작가론을 남겼다.

 

▶경향상의 다양성 : 1920년대에서 1930년대의 김동인의 작품을 나열해 보면, 아주 상반되는 각종의 경향들이 발견된다. '감자'나 '명문'에서는 자연주의를,'배따라기'나 '광화사', '광염소나타' 등에서는 탐미주의를 '붉은 산'에서는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그의 작품에는 낭만주의 인도주의 등의 경향이 나타난다. 이러한 상반되는 각종 경향은 작품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기도 하지만, 동일한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상반되는 혹은 이질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령, '광홧'나 '광염소나타'는 탐미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이면서도 자연주의적인 인생관이 깃들여 있으며,'발가락이 닮았다.'는 인도주의적인 경항의 작품이면서도 자연주의적인 요소가 강하게 풍긴다.

 

▶형식의 특이성 : 소설의 경우, 액자식 구조로 된 것이 많고, 그것도 단순 액자로서 외부 이야기와 내부 이야기의 단일 구조로 된 것이 많다.


전락과 광기의 죽음-작품세계 - 이재선 : <한국 현대소설사>

  미화된 모성의 상징으로 보이던 처녀를 밝은 햇빛 아래에서 보는 순간, 솔거는 그녀에게서 여인의 '눈'과 '바보', '병신'의 추함뿐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에, 솔거의 행적은 추물의 열등감, 여성 기피증 및 모성 고착증의 복합적인 감정이 발동함으로써 그는 살인의 충동을 느끼게 되며, 그 살인의 결과로 수반되는 공포 때문에 그는 자기 파괴적인 죽음에 이르게 된다.

 

  낮과 밤의 대비는 기능적으로 작용한다. 요컨대, <광화사>는 <광염소나타>와 함께 광기의 정신 병리적 징후를 지닌 인간의 내면성에 대한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해부보다는 예술가의 기벽성과 천재성 속에 숨은 범죄성에 대한 통찰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 점에서 이는 일종의 예술가 소설에 해당한다. 이광수의 선(善)의 설교자적 자세에 반발한 미(美)의 사제로서의 김동인이 그려냄 직한 인물이며 죽음이다. 야수적인 탐미 의식 때문에, 방화, 시체모독, 시간(屍姦) 등의 악마적 삼위 일체의 병리적 행동으로 짜인 <광염 소나타>와 같은 계열의 작품이다.


김동인의 탐미 의식  - 김동인 : <조선 근대소설고>(1929)

  춘원에게는 내재적인 동경과 의식적 선(善) 욕구가 있었다. 그러므로 의식적 욕구만 포기하면 미(美)의 예술가가 될 만한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반대로 선의식을 보존하고 미의 관념을 버리려 하였다. 여기에 그의 파탄이 있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은 그와 성질이 달랐다. 양자가 같이 내재적이었다. 미를 버리랴? 이는 예술의 멸망을 뜻함이다. 선(善)을 버리랴?  천성의 위에 성장과 교양으로 더욱 굳세게 박힌 이 뿌리를 뽑을 수 없었다. 이때, 나는 번민하였다. 상해에 있는 요한에게, 문인으로서의 부적당함을 말하고 문예도를 포기하겠다는 뜻을 몇 번이나 거듭하여 편지한 것도 이 때였다. 요한은 당시의 나의 유일한 벗이요 동지요 이해자였다. 이 때, 나의 마음을 구한 자는 나의 오만한 성격의 자존심이었다. 이 나의 오만한 성격의 산물인 자부심은 그 때의 나의 파탄을 구하였고, 그로부터 칠 년 뒤에 또한 나로서 성격상 파산의 구렁텅이에서 솟아나게 하였다.

 

  나는 선과 미, 이 상반된 양자의 사이에 합치점을 발견하려 하였다. 나는 온갖 것을 '미'의 아래 잡아넣으려 하였다. 나의 욕구는 모두 다 '미'다. 미는 미다. 미의 반대의 것도 미다.


김동인에 대한 평가연구 - 신동욱(申東旭) : 스포츠서울(1985. 12. 27)

 김동인 문학의 연구와 평가는 일제시대부터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져 왔다.  예컨대 그의 작품에 나타난 현실 인식을 연구 대상으로 한 평가를 들 수 있는데, 이 계통의 관점은 김동인 작품이 현실주의나 자연주의의 사조적(思潮的) 특징을 지녔다는 데 도달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심미주의(審美主義)나 퇴폐주의(頹廢主義)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문장의 미적(美的) 특징을 규명한 음미할 만한 연구 업적들도 나왔다. 그밖에도 민족주의자로서의 김동인의 사상적 일면과 작품과의 관련성이 밝혀지기도 하였고, 심리적 측면에서 작중 인물의 성격이 해석되기도 했다.

 

  이러한 연구들에 의해 김동인 문학의 여러 특질들이 탐구되었으나, 여기에 비교문학적 연구를 더함으로써 그의 미(美) 의식의 바탕이 해명되기에 이르렀다.

 

  김춘미(金春美) 교수는 김동인의 문학을 통해 발견되는 미적 가치를 근원적인 데서부터 찾기 위해 그의 교육적 배경을 조사하여 그 배경을 이해하고, 비교문학적 방법을 시도함으로써 그 연구에 심화된 해답을 기했다. 그것도 일본의 대정기(大正期) 문학과의 관련성이 중요함에 착목(着目)하여 일본의 백화파(白話派) 문학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순수한 개아(個我)의 추구와 관계되고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의 문예적 실현을 주요한 미적 의미로 이해하기 시작한 사실을 김춘미 교수는 일본 학자의 업적을 예증해 밝혀내고 있다.

 

  도덕적 문제, 현실적 문제, 사회적 문제보다도 예술을 최고의 가치로 신봉하고 실현하려는 예술지상주의의 인식이 김동인의 문학성을 이루는 데 영향되고 있음을 아울러 밝히고 있다. 이러한 논증을 위해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성격과 백화파(白話派) 문학의 차이가 밝혀졌다. 그리고 김동인과 아리시마(有島武郞)의 공통성이 사랑의 인식에서 발견되고 있음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동인의 문학적 개성을 이루는 배경적 윤곽이 비교적 선명히 해명되고 있다.

 

  이어 김동인의 <광화사>와 야자끼(谷崎潤一郞)의 <이호즈미(刺靑)>의 대비 연구를 시도해 그 미적 인식의 공통되는 바탕을 탐구했다. 연구자는 영향의 실증적 면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에 못지않게 같은 시대에 사는 작가 상호간에 같은 문학적 취향을 나누어 갖는 보편적 문예 현상으로서도 비교의 가치는 인정될 수 있다. 이 두 작가의 미적 자산의 원천적 ?가로서 연구자는 오스카 와일드를 학론(擧論)하고 있는데, 이는 미적 취미가 그것을 수용하는 동시대의 다른 나라 작가에게도 영향된다는 확실한 증거가 됨은 물론이려니와 미의 보편성에 관한 인식을 확고히 하는 논증이 된다고 하겠다.

 

  김동인은, 예술을 위해서는 도덕이나 사회적 규제를 초월했기에 <광화사>를 쓴 것이므로, 작중인물 ‘솔거’에게 있어서는 ‘미’의 가치를 관능적 향락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으며, <광염 소나타>의 주인공 '백성주’도 창조를 위한 새로운 충격을 구하는 이례적이고 충격적인 행동은 했지만, 스스로 개인의 쾌락을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고 명징(明澄)하게 작품을 분석하고 있다.

 

  이에 비해 야자끼가 추구하는 미적 가치는 자신의 쾌락의 충족에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김동인을 탐미주의자로 규명한 일반론적인 한계도 이 연구는 능가하고 있다.

 

  김춘미 교수는 김동인에 있어서 예술가의 자부심으로서 독존적 의식을 이루었음을 논평하고 있는데, 이러한 예술지상주의의 해명도 뜻이 있다. 그것은 세속적인 가치와의 구분이고 예술가만의 독자성의 존중에 기인한 것임을 김동인은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동인에 얽힌 일화

  1933년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취임하였으나 일주일만에 그만두고,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월간지 [야담]을 발간하는 한편, 소설 쓰기에 전심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었다. 1946년 다시 장편 소설 <을지문덕>을 연재하다가 심한 뇌막염으로 중단, 6ㆍ25 사변 중 서울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마쳤다. 일설에는 아사(餓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가산이 기울고 권태로 명월관 기생과 관계를 맺으며 방랑생활을 하다가 26세때 가세를 일으키려고 평양 보통벌에서 수리 사업(水利事業)을 시작했으나 실패하여 파산하였다. 대동강에서 1개월 남짓 배에서 자취를 하며 낚시하는 사이 부인이 견디다 못해 가출, 일본까지 뒤쫓아 갔으나, 딸만 데리고 왔다. 불면증 때문에 최면제를 과용하다 약물 중독, 마약 중독 증세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취미는 다양해서 여행, 낚시, 화초 가꾸기, 경마, 마작, 유리그릇 모으기, 사진, 레코드 모으기, 옷ㆍ구두 맞추기를 두루 좋아했다. 일본 음식을 즐겨 먹었으며, 오만한 성격에다 퇴고하는 법이 없어 원고지 넘버를 미리 매겨 놓고 집필을 했다고 한다.

  

김동인 문학론

지금까지 김동인과 관계되어 전개되어 온 연구 성과를 개관해 보면, 작가론 특히 작가의 전기를 토대로 해서 쓰여진 대부분의 작가론은 전기의 조사, 연구, 방법론의 미흡 등으로 인해 초기의 수준에서 큰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으며. 작품론에 있어서는 우선 양적으로도 풍성할 뿐 아니라,분석주의 혹은 구조주의적 텍스트 분석 방법의 활용에 따라 최근 무게 있는 논문들이 발표되어 왔다. 또한 비교문학적 연구와 비평에 관한 연구도 양적으로 빈약한 편이지만 구체적인 성과를 보여 주고 있다.

 

  근년에 들어 일부 비평가들의 평론에 의해 김동인에 대한 비판 내지 부정론이 두드러지게 제기되어 왔다. 이는 주로 김동인의 역사 내지 민족 의식을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비판하고 있다. 김동인의 작가 의식에 관한 연구는 그와 그의 문학에 대한 보다 실증적, 분석적인 연구 성과를 토대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문학적 특성】

  김동인은 이광수와 더불어 한국 근대 소설의 개척자요 선구자였다. 김동인은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 ?창조?를 창간하고 이를 통하여 5가지 분야를 개척했다고 조연현은 말한다. 첫째는 구어체 문장을 확립하고, 둘째는 구체적 문예운동을 전개하고 셋째는 계몽주의를 거부하고 순문학 정신 및 근대 사실주의를 도입하고 넷째는 근대적 단편소설을 개척하고 다섯째는 근대적 문예비평을 개척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김동인은 자신의 소설에서 구어체 문장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고 주장하며 그 구체적 특징으로 첫째는 '-더라','-이라'등의 구투에서 탈피 둘째는 현재법 서사체에서 과거법 서사체로 개혁 셋째는 대명사 '그'의 사용 넷째는 사투리의 처음 사용 등을 주장하고 있다.

 

  조연현은 김동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이러한 계몽주의에의 거부가 사조상으로는 사실주의를 조성시키는 방향이 되었고 근대 소설의 확립과 함께 문학의 기교적 가치를 중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기술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김동인도 계몽기의 문학의 넓은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김동인의 문학사적 공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근대적 단편소설을 처음으로 개척했다는 점이다. 그의 <배따라기>는 근대 단편 소설로서의 기본적 형태를 구비한 한국 소설사상 단편소설의 최초의 한 규범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김동인의 또 하나의 중요한 공적은 그가 근대적인 문학비평을 개척했다는 점이다. 전대 혹은 이광수의 목적 문학에 반대. 문학의 예술성과 구조를 논하는 형식주의적 비평의 길을 개척하였다.

 

(1) 자연주의

  김동인 문학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자연주의이다. 그의 문학의 자연주의적 특성은 물질주의적,결정론적 인간관과 반도덕성 등으로 그의 문학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근본적으로 그의 유년기에 형성된 쾌락주의적 인생태도에 연유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배따라기>는 그의 쾌락주의적 인생태도가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 이 작품에서 작자는 우연한 사건으로 비극의 주인공이 된 한 사나이의 스토리를 통하여 비극적, 숙명적 인생관을 구현하며 결론적으로 인간의 본능적 욕망의 충족에 의한 쾌락이 최고의 선이며 그것의 최대의 성취가 인생의 목표라는 그의 원시적, 쾌락주의적 반도덕적 인생관을 표명하고 있다.

 

  그 후 유미주의 혹은 탐미주의 경향으로 전개된다. 그의 자연주의적 작품들은 인간의 존재와 운명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유전과 시대와 환경을 강조하는 졸라의 환경 결정론이 짙게 나타내고 있다. 대표적인 자연주의 작품을 보면 <명문(明文)>은 김동인의 반형이상학적, 반종교적 신념을 구현한 작품으로 여타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환경결정론과 도덕적 가치 부정의 자연주의적 사고의 기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작자는 희화적인 태도로 인간존재와 가치의 궁극적 근거로서 신의 존재와 그에 대한 신앙을 부정하고 거부한다. 이 작품에서 작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설정한 주인공을 통해 그의 신앙을 가장 가까운 육친인 아버지, 어머니를 통하여 신랄하게 야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작자의 직접 진술로 주인공의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을 조소하고 있다. 전통적인 신앙에서 모든 존재와 가치의 궁극적, 초월적 근거인 신에 대한 이러한 거부의 태도 속에는 인간을 다만 자연적, 동물적 존재로 규정하는 물질주의적 인간관과 도덕적 가치를 부정하는 자연주의적 가치관이 내재되어있다.

 

  <감자>는 바로 김동인의 자연주의적 인간관과 가치관을 완벽한 형식을 통하여 가장 극명하게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작자는 가난한 복녀라는 한 여인이 생존을 위협하는 가난한 환경 때문에 도덕 의식을 상실하고 동물적 인간으로 점차적으로 타락해 마침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관찰자적인 냉정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여기서 작자는 반사회적인 환경으로 인해 도덕성을 상실, 도덕 절멸의 동물적 존재로 전락해 가는 한 여인의 삶의 과정을 통하여 인간 존재와 운명의 결정 요인으로서 환경을 강조하는 환경 결정론과 도덕적 가치 부정의 자연주의적 인간과, 가치관을 구현하고 있다.

 

  <태형>에서 작자는 독립 운동을 하다 피검, 수감되어 감방생활을 하는 주인공이 감옥이라는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점차 동물적 존재로 전락해 가는 과정을 역시 관찰자적인 냉정한 태도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물질적 여건의 구체적이며 철저한 제시에 있어 감자보다 더  환경 결정론에 접근되어 있으며 디테일의 정확한 묘사의 측면에서도 감자보다 더 자연주의적인 작품이지만 작품 말미에 시사되어 있는 인간의 양심과 자유의지에 대한 긍정의 태도로 말미암아 자연주의적 작품으로서의 성격이 크게 약화되고 만다. 김동인의 자연주의는 그의 사고의 폭과 깊이의 부족, 단편 위주의 창착. 작품 수량의 부족 등의 제약으로 스스로 한계를 지니게 된다.

 

(2) 탐미주의

  병적 광기를 내포하고 있는 그의 쾌락주의는 <배따라기>에서 진시황을 예찬하는 영웅주의와 결합하여 극도의 반도덕성을 띠게 되며, 후일 그의 소위 악마적 탐미주의 형성의 소지가 된다.

 

  김동인은 결국 개인적 파국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가 새롭게 안출한 사상이 그가 일찍이 <명문>, <감자> 등 자연주의적 작품을 통해 부정하고 거부한 신이나 도덕 대신 그가 진정한 가치로 선언한 미가 절대적 가치로 지향의 대상이 되는 소위 탐미주의였다. 이러한 사고의 기초 위에서 탐미주의적 특성을 보여주는 두 작품 <광염소나타> <광화사>가 창작되며 이들 작품에서 작자는 일찍이 그가 보인 이광수식 계몽주의에 대한 격렬한 반대 입장과는 달리 직접 그의 탐미 사상의 설교사의 역할을 하게 된다.

 

  <‘광염 소나타>는 천재적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한 작곡가의 기이한 창작 과정을 통하여 작자의 탐미주의 사상을 표명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나타나 있는 그의 탐미 사상은 초기작 <배따라기>에 시사된 영웅주의와 보다 심화된 병적 광기를 내포한 쾌락주의와의 혼합에 의하여 한층 기묘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지성주는 처음 고의적인 우연한 방화에 의해 그의 ‘야성적 광포적 쾌미’를 마음껏 즐기게 된 끝에 일세의 명작 <광염 소나타>를 낳는다. 그 뒤부터 방화를 거듭하며 음악 창작을 계속하게 되나 방화의 빈도가 많아지면서 창작욕이 감소되고 음악도 무력하게 된다. 보다 강한 흥분과 긴장을 찾던 그는 사체(死體) 모욕의 가혹 행휘, 나아가서는 시간(屍姦)이라는 도착 행위 끝에 작품을 얻게 되는 상태에 이르며 마침내는 살인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는 이 작품에서 ‘유미(唯美)’를 표방하는 초인적 광기에 의한 인간에 대한 무한의 폭력과 파괴가 용인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광화사>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몽상하는 탐미적 세계에서 예술적 창조가 수행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창조의 궁극적 지향의 대상으로서 ‘절대미’에 대한 환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화공 솔거와 절대미의 창조를 위해 그가 밟는 과정은 기본적으로 <광염소나타>의 주인공과 경우가 유사하다. 결국 미녀도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우연한 실수로 이르는 살인은 절대미에 이르기 위해 치르지 않으면 안된는 의식을 상징한다. 그리고 미완의 작품을 얻고 마는 것은 그러한 절대미의 이상은 전적으로 성취될 수 없는 공상적 환영에 불과함을 작자는 은연중에 시인하고 있다.

 

  김동인의 탐미 사상은 사상적으로 미숙한 것으로 그의 ‘탐미주의 작품은 근원적인 예술 충동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예술지상론을 펴기 위한 이데아의 산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탐미주의는 그의 자연주의 작품에 비해 작품적 실천에 있어 뚜렷한 성취를 보여주지 못하였다. 그의 문학에 나타나는 탐미주의적 특성은 그의 특이한 기질과 성격에 대한 선입견 우리 문학과 사상적 전통 속에서 그의 사상 자체가 지니고 있는 당돌함으로 인해 과대 평가되어 온 감이 없지 않다.

 

(3) 인형 조종술

  사실 그의 많은 작품 특히 자연주의적 작품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파악하거나 기술하려는 사실주의적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김동인이 문학적 표현이나 기법에 있어 사실주의에만 고착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것은 그의 문학 작품에서 당대의 어느 작가보다 개성적인 표현 및 기법상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동인의 개성적인 표현 및 기법은 근본적으로 그의 소위 ‘인형 조종술’에 입각한 창작관에 기인한다.

 

  김동인은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와의 관계는 인형극에서의 인형 조종자와 인형과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작가가 그가 창조한 작품 세계를 완전히 지배함이 문제지 창조한 인생의 진짜 혹은 가짜임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표현 및 기법상의 특징으로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그의 간결하고 박력 있는 언어 표현이다. 그는 많은 작품에서 과감한 생략과 비육법을 구사하면서 대상적, 즉아적. 자기적 체언형의 문장을 쓰고 있다. 또한 체언형의 생략과 비약이 심한 그의 문체는 특별히 박진감을 준다. 여기에 방언과 비속어까지를 그의 문체에 용해시킴으로써 그의 문체는 독특한 개성적 성과를 획득한다.

 

  김동인은 소설의 플롯의 요체를 제재의 단순화와 통일과 연락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그의 많은 작품은 템포 빠른 사건의 진행 및 전환, 간략한 설명과 인상 깊은 장면의 교대 제시, 액자형태에 의한 스토리 서술 등의 기법에 의하여 박진감과 강렬한 극적 인상을 주고 있다.

  
김동인과 그의 문학 세계

 

▶생애와 문학관

  김동인은 1900년 10월 2일에 평양의. 진선동에 사는 거부인 김대윤(金大潤)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15세 때에는 일본에 유학하여 명치학원의 중학부에 입학하고 나중에 청산학원의 중학부로 전학하여 졸업하고 있다. 김동인의 문학 작품에 관해 쓴 여러 사람들의 견해에 의하면 그의 성격은 오만했고 독선적인 사람이고 옷을 잘 입고 멋도 부릴 줄 아는 사치한 댄디즘의 일면도 지녔었다고 한다.

 

  그러나 특기할 것은 오만이나 독선이나 사치성보다는 사재를 들여 문학지 [창조(創造)]를 출간한 점이다. 이러한 측면은 김동인의 문화사업가적인 측면과 창작가적인 요소가 결합괸 것으로 높이 찬양할만한 점이 된다. 그는 1917년에 부친상을 당하고, 같은 해에 혼인을 했으나, 10년 후에는 부인과 헤어진다. 그 사이에 [창조]지를 통하여 많은 단편들을 빨표하고 중요한 작가적 지위를 얻고 어느 정도의 명성도 얻었지만, 개인적인 생활에서는 결코 행복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철(白鐵)의 <고 김동인 선생의 인간과 예술>([신천지] 8권 2호), 정비석(鄭飛石)의 <김동인의 예술과 생애>([자유세계] 1권 5호) 등의 기록에는 아편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보이고 있으나, 실제로 어느 정도 심각했는지, 그것을 알 수는 없다. 27세가 되던 1926년에 토지관개사업에 실패한 다음의 심경을, 그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

 

  관개사업이 실패에 돌아간 뒤의 나의 생활은 순전한 자포적 생활이었다. 어제는 군산, 오늘은 대구, 내일은 신의주, 이와 같이 방향 없이, 지향 없이 헤매었다. 파산! 눈앞에 당도한 이런 무서운 그림자에 위협되어 잠시도 한 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아아! 나는 그 때 아편이 얼마나 그리웠으랴. 이전에 병고시대에 경험하여 본 아편의 꿈, 그것은 이 세상의 온갖 괴롭고 쓰린 자취를 잊어버리는 거짓말 같은 도취경이었다. 불안과 공포에 얼뜬 나의 마음은 그것을 속이기 위하여 아편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방면의 길을 모르는 나는 아편을 구할 길이 없었다. 둘째 방책으로 나는 그 괴로운 생각이 머리에 떠오를 기회를 할 수 있는 데껏 적게 하기 위하여 이곳저곳으로 낯설은 땅을 방황하였다.

 

  이런 때에 받는 공포와 불안을, 무인 고도에 혼자 버리움을 받은 사람의 느끼는 공포와 불안은, 그 따위에는 비길 종류가 아니었다. 자활책과 처세술이라는 것을 아직 배우지 못한 내가 당연한 결과로서 그 때 나의 앞에서 발견한 커다란 두 가지의 그림자는 '죽느냐','거랑벙이냐'하는 것이었다. (<김동인전집> 2권ㆍ396∼397면)

 

  이러한 그의 술회에 의하면 그가 27세 때에 파산을 경험했던 바, 그의 충격이 매우 심각했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아편의 사용을 지적하여 단순히 그의 쾌락적 성향을 비난하는 것은 온당한 비판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비록 권장할 일은 못 된다고는 하지만 파산의 지경에 이른 젊은 사람으로서 심한 불안과 절망에서 야기되는 도피증은 있음직한 일로 보인다. 또 일부의 논자들 중에는 김동인의 여인 섭렵과 방탕을 들어 가혹하게 비난하는 말투로 언급하는 일이 있으나, 그것도 김동인의 복잡한 생애와 시대와 교육이라는 얼크러짐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냉철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자로 자랐고, 교양 있는 젊은 신사로 통했지만, 사회적 훈련과 여성에 대한 건전한 교육이 없었으므로 기녀에 빠진 후로는 거의 헤어나지 못하게 되고, 나중에는 실처(失妻)까지 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술회에 보인 바와 같이, 그는 훌륭한 문인과 예술인으로서의 꿈을 가꾸어 온 사람이었다. 또 우리 문학사에서는 하나의 독자적 봉우리를 형성하는 큰 업적도 세웠다고 생각된다.

 

  그가 동경에서 만났던 여인 중에 메리라는 소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매우 귀중한 것인데, 그 스스로의 자유 의사에 의하여 선택된 귀중한 소녀에의 사랑이 짝사랑인 채 끝나는 아쉬움이 얼마나 컸기에, 그는 나중에 <여인>이라는 자전적 소설에서 다시 생생하게 회상하고 있느냐 하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만약 그 스스로 선택한 소녀와 일생을 약속했을 때 과연 무절제한 기녀와의 사귐이 가능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는 나중에 김옥엽이라는 기녀와 깊은 사랑에 빠지지만, 그의 심정은 순정을 다하는 연정의 감정으로 그녀를 사귀고 있고, 나중에도 '세미마루'라는 일본 소녀와의 정신적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이 한 가지 사실은 적어도 구세대층의 남성이나 여성들에 있어서는 사회 문제로서 큰 비중을 차지한 공통적 주제였다. 자주적인 사고와 행동의 일치를 미덕으로 교육받은 새로운 지식인들이, 의연히 완고하고 또 풍속화 된 옛날식의 혼인에 만족하고 승복했을 리가 없다. 어른들의 권에 못 이겨 혼인은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상의 신여성을 사모했을 터이므로 가정이 행복의 보금자리로 느껴지질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 번 빠진 기녀와의 사랑은 다시 또 다른 선택에로 방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늦게나마라도 양가의 이상적인 신식 규수와 연애를 했다면 모르거니와, 모든 주당(酒黨)의 노리개인 기녀를 사랑했으므로, 이상적 여성의 일면을 지닌 기생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추한 일면을 지닌 상품적 특질도 지녔으므로 김동인에게는 애증의 복합이 급기야는 기쁨과 번뇌는 김옥엽과의 사이에 벌어지는 여러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서 선명하게 노출되고 있다.

 

  그런데다가 그는 친구로부터의 작은 나무람까지도 용서할 수 없는, 말하자면 오만보다도 더 심한 결벽증을 지니고 있었던 것같이 보인다. 김옥엽과 연애 행각을 하다가 돈을 탕진한 그는 잠시 친구들의 하숙방에 신세를 지게 되었던 듯 다음과 같은 술회도 보인다.

 

  어떤 날 밤, 이 날도 하루 종일의 방황에 노곤한 몸을 쉬이려 비슬비슬 안서(岸曙)의 하숙을 찾아갔다. 예에 의지하여 안서는 하숙에 없었다. 나는 빈 방에 들어가서 몸을 커다랗게 내어던졌다. 그리고 곧 잠이 들었다. 그러나 나의 곤한 잠은 조금 뒤에 다시 깨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등등등등! 무슨 사람의 소리를 처음에는 꿈결같이 듣다가, 마침내 정신이 들면서 들으니까, 그것은 안서의 목소리였다. 밤이 깊어서 술이 취하여 돌아온 그는 자기 방에 침입하여 정신 모르고 자는 나에게, 자리가 좁다고 무슨 나무렴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몸을 떨었다. 사소한 일에라도 몹시 신경질이 된 나는, 그 때 폭발하려는 성을 삭이기 위하여 숨소리까지 죽였다. 그냥 자는 체하였다.

 

  안서는 몇 마디 응얼응얼 나무렴을 하다가 그만 쓰러져서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러나 자존심을 상한 노여움으로 흥분된 나는 잠을 들 수가 없었다. 이것을, 이것을! 나는 몇 번을 주먹을 부르쥐며 성을 내다가, 종내 참지 못하여 몰래 저고리를 뒤집어쓰고 그 집을 뛰쳐나왔다.

 

  그러나 갈 곳은 어디? 깊은 밤, 주머니에 한 푼의 돈도 없는 이 젊은이는 몸을 쉴 곳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나는, 마지막에 할 일 없이 남산 공원으로 갔다.(<김동인전집> 2권 355면)

 

  이와 같은 기록에서 김동인의 결벽성이 분명하게 보인다. 오만이란 것도 그 스스로의 삶의 자세로서 시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남의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려는 노력은 스스로를 지키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성격적 특질은 문학을 창작하고 비평하는 데도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깊게 관여된 것으로 짐작된다. 김동인은 그의 선배 작가인 이인직이나 이광수의 문학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모범적인 것으로 바라보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일본 문학 따위는 미리부터 깔보고 들었으며 '빅토르 유고'까지도 통속 작가라 경멸할이만치 유아독존의 시절이었다.…(略)레오 톨스토이야말로 나의 경모하여 마지않는 작가였다.(<김동인전집> 8권 393면)

 

  이와 같이 그의 문학의 기준은 세계 문학의 정상에 드는 톨스토이에 두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문학관에는 최고의 것으로서 누구나 함부로 추종할 수 없는 독자적인 것에 두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춘원 연구>에서 그의 견해를 피력한 바와 같이, 도덕적 가치나 사회교화로서의 문학의 효용적 가치를 거부하고, 문학 자체의 아름다움과 흥미에 문학의 가치를 두고 있다. 문학에서는 사회적 교화 사상이나 권선징악을 다루기보다는 예술성이 높은 '내용의 미'나 '조화의 정도','작자의 사상','작자의 독창성','작중 인물의 각 개성에 대한 묘사','심리와 동작과 언어에 대한 묘사','작중 인물의 사회에 대한 분투' 등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1920년 7월달의 [창조]에 개재된 <자긔의 창조한 세계>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비교하고,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가 창조한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는데 대하여 톨스토이는 창조한 인물을 자유자재로 다루어 매우 능숙한 예술적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미루어 그는 예술의 기교적 우수성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아마도, 춘원과 달리 자유로운 상상력에 의존하여 새롭고도 대담한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예술의 위대가 자연의 위대보다 생명이 있고 더 큰 것은 정한 일이 아니냐? 사람의 힘은 위대한 것'(<김동인전집> 10권 139면)으로 이해한 것 같다. 그는 춘원의 도학자적 관념론에 반기를 들고 사회의 현실적 문제를 써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훨씬 자유스런 상상의 세계에 몰입하여, 기상(奇想)이나 환상의 신비경까지도 대담하게 창출해 낸 것같이 보인다.

 

  예술은 인생을 위하여서도 아니고 예술 자신을 위하여서도 아니요, 다만 예술가 자신이 막지 못할 예술욕 때문의 예술입니다.(<김동인전집> 10권 221면)

 

  이와 같이 대담한 자기 견해를 말하고 있다. 김동인의 비평관이나 방법에 관한 연구는 <한국 현대 비평사>1975년 한국일보사)를 참고하면 펀리할 것으로 보인다.

 

▶단편소설과 자연주의의 한계

  김 동인의 첫 작품은 <약한 자의 슬픔>으로 1919년 [창조]의 창간호와 두 번째호의 책에 수록된 것으로서 어린 가정교사인 강 엘리자베드의 비참한 곤경을 묘사하여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을 비교적 차갑게 묘사하고 있다. 문학사가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자연주의적인 작풍을 짙게 풍기고 있다.

 

  1921년 [창조] 9호에 발표한 <배따라기>를 김동인은 스스로 매우 뜻깊은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다. 젊은 작가로서는 그 당시까지에 있어서의 한국의 단편 소설들과 비교해 볼 때, 예술적 가치가 뛰어났다고 스스로 자인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에는 형제간의 우애와 형수와 아우 사이의 우애를 두루 다루고 있다. 작품의 시작에서 작자는 모란봉과 대동강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야기를 보여 주는 화자는 봄의 풍경에 취한 상태를 말하면서 '유토피아'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 화자는 진시황을 '위대한 인격의 소유자'로 말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작품의 주화와는 일단 구분되는 외화에 속한다. 그런데 외화의 주관적 시점은 실상 내화 또는 주화의 흐름을 간접적으로 제한하는 구실을 담당하는 듯이 보인다. 외화의 시점이 내화를 보여 주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내화는 배따라기의 노래를 매개로 하여 뱃사람의 어려움의 운명적인 측면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다음에 노래의 주인공이자 내화의 주인공인 형을 만나서 오해로 인한 형제와 부부 사이의 비극적 종말을 가져온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작가는 다소간 부자연스럽기는 하지만 주인공의 아내와 아우 사이를 의심할 만큼 이야기의 타당성을 조종하고 있다. 형보다 아우가 미남자이고 아내는 웃음이 많고 애교가 있는 데다가 사교적이기도 하다. 반면에 형은 못나고 과묵하여 항상 아내와 알력이 있어 왔다. 장에 갔다 온 형의 눈에 비친 아내와 아우의 쥐 잡는 장면은 그럴싸한 오해의 자료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너무 조작적이기 때문에 어색하다고 하여 만약 독자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이 소설도 거부되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작가는 오히려 이 오해의 장면을 중심으로 하여 두 형제의 운명적인 분리상을 제시하고, 그것을 통하여 비창감(悲愴感)을 창조하고 있는 것 같다. 작가는 친형제간이라 하더라도 이와 같은 불륜적 오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조하여, 보이지 않는 힘에 조종되는 운명적 인간상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이 오해로 아내는 죽고 아우는 집을 떠나 버린다. 이들의 행복은 마침내 모두 깨어져 버린 셈이다. 형은 엄청난 과오를 저지른 자신을 발견하고 아우를 찾으려 방랑의 길을 떠난다. 이 두 형제는 그 후 한 번 만나게 되지만, 작가는 아주 우연히 두 사람의 만남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도 서로 어둠 속의 악한 불빛 속에서 어렴풋이 바라볼 뿐으로 직접 오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다시 우애를 이을 수 있게 하지는 않고 있다. 이러한 사건의 배치와 행동의 조직은 어차피 작가의 뜻하는 바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운영에  전적으로 의존되기 마련이다. 만약 작가의 이러한 우연의 설정과 독단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작품을 거부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데 서편으로 바다를 향한 마을이라 다른 곳보담은 늦게 어둡지만, 그래도 술시쯤 되어서는 깜깜하니 어두웠다. 그는 불을 켜려고 바람벽에서 떠나서 석냥을 차지려 도라갔다. 석냥은 늘 잇던 다리에 잇지 아낫다. 그래서 여긔저긔 뒤적이노라니가 어떤 낡은 옷 뭉치를 들칠 때에 쥐 소리가 나면서 무엇이 후덕덕 뛰여나온다.

 

  이와 같은 장면은, 아우와 아내가 떡상을 받고 있다가 쥐 때문에 한바탕 소란을 치른 다음의 장면이다. 주인공인 형이 나타나 아내를 때린 후, 작자는 주인공이 어두운 방에서 성냥불을 찾는 행동을 보여 부면서 그의 의식이 어둠에 둘러싸여 있는 상태를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주인공이 성냥을 찾는데 헌 옷 뭉치에 숨어 있었던 쥐가 뛰어 도망가는 것을 작자는 보여 주고, 그런 다음에 주인공이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주인공이 성냥불을 찾는 행위는 상당히 뜻깊은 묘사로 보인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 어리석음을 벗어나려고 무의식적으로 밝음을 갈구해 마지않는 일종의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은 암시성이 엿보인다고 하겠다. 질투와 열등감에 사로잡힌 한 소박한 촌부의 의식은 일종의 어둠의 상태로 볼 수 있으며, 그것만으로써 이미 비극적 의미를 지녔다고 하겠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두 형제의 방랑 길에서 두 번의 독특하면서도 시적인 수사적 표현을 시도하여 작품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그의 아우와 같이 생긴 사람이 5, 6일 전에 맷산자 봇짐을 하여 진 뒤에, 싯벌건 저녁해를 등으로 밧고, 더벅더벅 동편으로 가더라 한다.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린 때는 밤이었었다. 그리고 어느덧, 그는 뭇우에 올라 고, 그를 말리우노라고 샛밝아케 피어 노은 불비츠로 자긔를 간호하는 아우를 보았다.

 

  위의 인용에서와 같이 '싯벌건','샛밝아케'의 수식어는 어둠과 대조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두 빛은 어둠을 완전히 물리치고 세계를 밝게 그리고 탁 트이게 하는 힘을 상실한 빛으로 나타나 있다. 첫 번째의 전격 해는 '시벌건' 빛이기는 하지만 기울어져 가는 빛이며, 곧 어둠이 찾아온다는 함축적 의미가 있다. 두 번째의 불빛은 완전히 어둠에 둘러싸인 불빛이다. 정지되고 정태적인 빛이며, 이미 기울어진 빛으로서 작품의 주인공들의 행복과 정상적 삶이 깨어지고 흠이 생긴 상태를 잘 암시하고 있다. 아마도 이 두 형제와 그리고 온 가족의 잃어버린 귀중한 것은 회복될 수 없고, 암담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분위기 전체를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작가는 이 두 형제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운명적인 힘을 사라져 가는, 그리고 기울어져 가는 불빛에 의해 조명해 냄으로써 작품 전체의 의미를 조종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러한 삶의 모습을 문제삼는 김동인의 미의식은 상승적인 인생의 도정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하강적인 것에 깊이 관여된 듯이 생각된다. 배따라기의 애절한 노래와 어울려 있는 이 두 형제의 방랑은 영원과 무한의 뜻을 내포한 바다 위를 헤매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의 바다는 이 작품 속에 설정된 인물의 정처없음의 의미를 결정하고, 소설 밖에서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도 삶의 길고도 불확정적인 의미를 간접적으로 일깨우는 하나의 상징으로 나타난다고 하겠다. 불확정적인 것의 인식은 불안과 모험과 관계되지만, 이 작품에서는 상실의 불안과 걷잡을 수 없는 허무감이 바다로 집약되어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두 형제의 우애의 당위적인 회복과 망망한 바다 위를 표랑하는 행위 사이에서 의미의 대조적 긴장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세속적 삶의 건실한 면, 즉 도덕적 건전성과 생활 의지의 건전성을 모두 응집적으로 수렴해 주지는 못한다. 퇴락적인 하강성을 통한 삶의 인식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김동인의 <이 잔을>([개벽] 1923년 1월)에서도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겪는 삶과 죽음의 고비를 중심으로 한 결단을 요청받고 있는 운명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의 붓은 상당히 정치(精緻)한 묘사를 보이고 있으며, 예수가 번민하는 장면도 실감있게 제시하고 있다. 예수는 희생을 요구하는 민중들에게 스스로 희생당함으로써 하느님의 높은 뜻을 보여 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이러한 작품에서도 작가는 예수로 하여 삶을 택할 것이냐 죽음을 택할 것이냐를 심각하게 촛점화하여 문제로 의식되게 묘사하고 있다. 그가 말했듯이 '귀신 울릴 만한 기묘한 사실 묘사'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박진감이 있는 묘사의 솜씨를 보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잠과 깨임의 되풀이는 암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잠들어 있는 민중을 깨임에로 이끌기 위한 예수의 결단은, 횃불을 들고 어둠 속에서 음모하고 예수를 죽이려고 뒤따르는 제사장들의 행동에 의해 더욱 선명해진다. 희생을 통한 성취를 이 이야기는 보여 주고 있지만, 이야기의 짜임은 예수의 번민과 현실적인 죽음이라는 하강적 상황을 널리 주지로 한 작품이다.

 

  <감자>는 널리 읽혀진 작품이므로 누구나 그 내용을 쉽사리 알 수 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논의를 위하여 이야기의 전개를 좇아서 살피려 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복녀이고 복녀는 나이가 15세 때에 게으른 노총각에게 80원에 팔려서 출가했다. 그녀는 '딴 농민보다는 좀 똑똑하고 엄한 가율이 그의 집에 그냥 남어 있었다.'와 같이 정상적인 도덕 의식을 지닌 소녀였다는 것을 도입부에서 알려 주고 있다. 남편의 게으름은 심한 편이어서, 소작의 전답도 떨어지고, 장인의 신용도 떨어져서, 막벌이 지게꾼 일조차도 못 하게 되고, 행랑살이도 떨어져 결국에는 칠성문 밖의 도둑과 거지질과 매음이 '정업'으로 된 특수한 마을로 들어간다. 그렇지만 칠성문 밖의 주민들이 하듯이 복녀는 비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었다는 것을 작가는 '선비의 집안에서 자라는그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었다.'와 같이 제시하고 있다. 그 다음에는 송충이를 잡는 장면이 제시되고, 여기서 복녀의 도덕 의식이 결정적으로 바뀌고 있다. 감독과 정을 통한 후 복녀도 일을 하지 않고 품삯을 더 받게 되었는데, 작가는 복녀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그는 아지껏 싼 사내와 관계를 한다는 것을 생각하여 본일도 없었다. 그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오 짐생의 하는 즛으로만 알고 잇섯다. 혹은, 그런 일을 하면 탁 죽어지는지도 모를 일로 아럿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일이 어듸 다시 잇슬가, 사람인 자긔도 그런 일을 한 것을 보면, 그것은 결코 사람으로 못 할 일이 아니었었다. 게다가 일 안하고도, 돈 더 받고. 긴장된 유쾌가 잇고, 비러먹는 것보다 점잔코……' 이 서술은 그 동안 작가가 복녀를 한정했던 바 보통 사람의 도덕 의식을 가졌다는 사실과는 크게 위배되는 갑작스런 변모라고 생각됨직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도덕 의식의 변모를 위해서 요긴하게도 '그들 부처는 역시 가난하게 지낫다. 굶는 일도 흔히 잇섯다.'와 같이 그럴 만한 구실을 미리 설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복녀의 도덕의식의 변모는 문자 그대로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고, 굶을 지경으로 가난한 사람으로서는 그런 일도 있을 수도 있겠다는 뜻을 감안하게 하고 있다. 이 장면의 다음에서 복녀의 나이는 20세가 되고, 복녀는 거리의 여인처럼 매음도 하고 도둑질도 하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다음에는 복녀와 왕서방의 거래를 제시하고, 복녀 부처가 빈민굴 마을에서는 부자가 된 것도 아울러 말해 준다. 그런데, 왕서방이 새 장가를 들게 되자. '복녀는 집 모퉁이에 숨어서 눈에 살긔를 띄고, 방안 동정을 듯고'있다고 묘사하여, 마치 복녀와 왕서방은 매음의 관계가 아니라 애정의 관계로 맺어졌던 사이인 듯이 다루고 있다. 이 점은 분명히 인물의 심리적 동향의 타당성에 비추어 볼 때 약간의 무리가 있을 것같이 보인다. 복녀와 왕서방의 관계라면, 오히려 복녀는 왕서방을 꼬여서 더 돈을 얻어 내거나 또는 다른 곳에 가서 유객을 함직한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인물 설정상의 조건을 도외시하고 복녀가 애정을 잃은 분풀이로 왕서방에게 질투를 느끼어 낫을 들고 덤비다가 죽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은 확실히 인물이 지닌 성격적 일관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제시한 것같이 보인다.

 

  그렇게 때문에 인물에게 주어진 성격적 조건을 도외시한 작가의 사건 처리를 비판적으로 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비판적 태도는 분명히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작품의 전체적 문맥 속에서만 살아가는 인물의 성격적 조건은 실상은 작가가 그의 소설의 목적에 필요한 정도로, 또는 요구되는 어떤 한계 안에서 한정된 것이지, 읽는 사람측에서 임의로 획득된 기준에 의하여 주장하는 어떤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설정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감자>라는 소설의 의미 영역을 떠난 감상의 기준이나 비평의 취미는 <감자>와는 별도로 존재할 수 있다. 이 문제를 더 논의하기 위하여 김동인이 배치한 맨 끝의 삽화를 먼저 거론하는 것이 순서상 편리할 것 같다. 복녀가 죽자, 그의 남편이 원하는 금액을 받고 나자 복녀의 시체는 장사지내게 되며, 소설도 끝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지금까지 배치한 다른 사건과 함께 작가가 목적을 가지고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요약적으로 말한다면 가난하기는 했지만 보통 사람으로서 정상적인 도덕 의식을 지닌 젊은 여자가, 게으른 남편과 극도의 가난으로 인하여 도둑질과 매음을 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하여 죽게 되었으며, 끝내는 억울한 죽음까지도 금전으로 환산되는 매우 비정적이며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는 한 가련한 삶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복녀의 성격적 타당성을 왕서방과의 관계에서 비추어 볼 때, 복녀의 질투가 만약 애정을 뜻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김동인은 인물의 심리적 요소로 포함한 것 같이 생각된다. 솔버그는 <초창기의 세 소설>([현대문학]1963년 3월)에서 복녀의 태도에 애매성이 있다고 했는데, 이 애매성은 삶의 조건이 도덕 의식을 마멸케 한 다음에도 오히려 그 잔재가 적절하게 제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덕적으로 완전히 퇴락되었다고 생각되는 한 여성 속에 잔재로 숨어 있었던 도덕 의식이 남아 있어서 왕서방과의 관계가 단순한 거래의 의미 이상의 애정이 숨어 있었다고 가정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작가는 게으른 남편과 비정한 왕서방과 한의사를 제시하여 복녀의 죽음의 의미를 비정적으로 조명하여 도덕 의식의 결정적 패배를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복녀는 정상적인 도덕 의식을 버리고 목숨을 연명하다가 끝내 완전히는 버리지 못한 그 잔재로 하여 목숨을 잃었다는 심각한  반어적 의미를 보여 준다. 솔버그는 '방관자적 스타일은 일체의 도덕적 가정을 배제하고 단순한 사실을 제시하는 데 그치는 환경 철학'을 내세우며, 동시에 '작자가 말참견할 때의 스타일'을 채용하여 이야기의 시점에 통일을 잃었으므로 애매한 작품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애매성은 소설가의 실수로 인한 애매성이기보다는 이 시기까지에 있어서의 우리 삶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복합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실을 냉엄하게 바라보는 것과 현실을 전통적인 눈으로 보는 이중성이 이 작품에는 나타나 있다.

  김동인의 이러한 두 의식이 이 이야기에 투영되어 1920년대의 가난한 사람들의 세계가 보인다. 이러한 도덕 의식 문제는 복녀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니며 모두의 문제로 의식케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비정적인 냉엄함이 이 작품의 의미를 더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김동인에 의하면 이미 이 시대는 매우 냉엄한 삶의 투쟁의 세계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복녀의 죽음은 그녀의 일방적이면서도 철저한 패배인데, 그만큼 세계의 힘은 비정적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는 뜻을 천명했다고 볼 수 있다. 솔버그는 작가가 시점의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작품의 의미가 통일적으로 나타날 만큼 일관성을 못 가졌다고 탓하고 있지만, 비평의 기준은 시대의취미의 하나일 수도 있으므로 모두가 작품의 본질이나 가치를 설명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작품의 가치는 전체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믿는다. 부분은 부분의 논리를 갖지만 그것들은 전체적 의미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인간의 문화 행위를 총체성으로 볼 때 문학 작품은 그 하나의 부분이 된다. 시점의 이론은 형식 이론에 의존되어 있는 하나의 비평적 기준이므로, 그 형식 논리를 용납하지 못하는 작품에 적용했을 때는 적절한 효과를 얻기가 어렵다고 생각된다. 미의 세계에서는 논리적 조화만이 아니라 비약적인 균형이라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관례화된  조화 의식이나 균형 의식을 깨뜨리는 경우도 미적 가치는 있기 마련이다.

 

  <감자>에서는 분명히 복녀의 짧은 일생이 다루어지고는 있지만, 작가는 복녀만을 문제삼지 않고 복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집단을 몬제삼고 있음을 쉽사리 이해하게 될 것이다. 칠성문 밖의 빈민굴의 생활을 복녀를 대표 인물로 설정하여 보여 주고 있다. 복녀가 송충이잡이를 할 때의 감독과의 만남도 다른 여인들이 이미 그러한 경로를 밟았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여 주었고, 복녀가 왕서방네 밭에서 감자를 훔쳤을 때에도, 왕서방과 관계된 다른 여인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배려는 복녀와 같은 인생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고, 그러한 사람들의 생활과 생태를 보여 주면서 비정스럽게도 사회의 일각에 버려진 빈민 집단을 문제삼은 것이다. 여기서는 복녀 한 사람의 성격적 타당성만의 미적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러한 복녀들의 사회적 문제를 인도적 수준에서 이야기라고 하는 표면적 구조로 문제삼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복녀는 복녀(福女)라고 쓰이는 이름이지만, 그 이름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또 작가가 언뜻 소묘하고 지나갔듯이 '복녀의 얼굴은 더욱 입버젓다.'와도 상관없이 비참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버려진 상태로 죽어 갔다. 이러한 반어적 삶의 현상에 대하여 김동인은 민감했던 것같이 보인다. 복녀가 겪고 죽어 간 생애의 경로는 정상적인 삶으로부터 출발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하강적 곡선을 긋고 있다. 그 중요한 원인은 가난이었다. 이 가난의 문제는 1920년대의 문학적 주제로서는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으며, 다른 많은 작가들에 의하여 되풀이되어 다루어졌다. 그만큼 가난의 문제는 그 당시의 사회적 문제로서도 심각한 것이었다. 그것이 문학의 제재로 다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김동인은 1930년에 <광화사>와 <광염소나타>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들은 흔히 심미주의적인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두 작품에서 다루어진 이야기의 소재가 지니 충격적 성격과 기상은 놀라운 바가 있다. 소설은 본질적으로 꾸며 낸 이야기이므로 작품 속의 소재를 작품 밖의 세계에서 인식하는 소재와 동일시하거나 혼동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소설의 의미는 만들어진 것이면서도 결국에는 우리의 삶 일반에 관여하는 사회적 의미가 있고, 우리의 삶 일반과 비교되는 일면도 있다고 보통은 생각되어 왔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시체에 가해한다든지, 광적으로 흥분된 상태에서 미모의 여인을 살해한다는 행위는 좀처럼 쉽사리 수긍되기는 어렵다. 독창성은 언제나 비관례적 성질을 띠거나. 기존적인 것에 반역하거나 낡은 가치와 질서보다 더 고차적이고 더 보편적인 가치를 획득할 때 시인될 것이다. 단순한 기성적인 것의 파괴만으로 새로운 가치가 획득된다고 말할 수 없다. 김동인의 심미주의는 그의 독특한 미의식의 소산임은 틀림없겠지만, 차원 높은 가치를 얻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두 작품에서도 김동인은 하강적인 미의식에 의하여 사건과 인물을 설정, 제시함을 알 수 있다.

 

  석순옥과 안 빈은 육체적인 사랑을 초극하여 정신주의적 가치를 지향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광수 문학은 상승적 일면을 지니고 있고, 상승적 문화 양식에서는 가치의 발견이 이상화의 과정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그러나, 하강적 문학 양식에서는 표면적으로는 또는 관계적으로는 감추어졌거나 잠재해 있는 특질들이 퇴락화 과정에서 나타나며 이상화를 거부하고 현실을 현실답게 냉엄하게 보이려는 경향을 지닌다. 그러나, 상승적이기 때문에 작품이 이유 없이 이상화된 세계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며, 하강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냉엄함을 일관하여 퇴락적인 세계만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닌 성싶다.

 

  하강적 구조 양식에서는 은폐된 내면적 본질을 더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상승적 구조 양식에서는 고상한 것에의 성취를 위한 인간적 노력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김동인의 심미주의는 자연주의 문학이 추악한 면을 숨김없이 폭로하는 데 주력한 한 측면만을 과장적으로 왜곡한 말기적 징조를 받아들인 것 같다. 이광수의 문학에 있어서의 도덕성을 비판한 입장을 취한 김동인은 오스카 와일드가 취한 극도의 개인주의와 허무주의를 용인하고 예술을 위한 미적 목적을 만족시키는 어떠한 허구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처럼 생각된다. <배따라기>의 첫 장면에서 유토피아를 생각하는 대목은 흡사 오스카 와일드의 그것과 상통하는 듯하다. 이렇게 볼 때, 김동인 문학이 도덕 의식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보아 온 작품들이 모두가 정상적인 도덕 의식의 허약함을 다룬 문제들이었다.

 

  1931년 1월에는 <발가락이 닮았다>가 [삼천리]에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내용도 욕망 때문에 훼손된 한 남자의 고뇌를 다루고 있다. 그런 다음 1936년 3월에는 [문장]지에 <김연실전>을 발표하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김동리의 비판은 널리 알려진 바 있다. 그런데 김동리는 상당히 격렬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때 이미 그(김동인)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상도 꿈도 취미도 아무것도 그에게는 있는 것이 없고, 간신히 그에게 약간의 자극을 주는 것은 '음란'과 '쌍말'뿐이었다. 이것만이 간신히 그에게 자극을 남긴 것은 그만치 그가 완전히 따라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김동리저 <문학과 인간> 10면)

 

  이와 같은 비판은 그럼직한 일면을 가지고는 있으나 <김연실전>을 읽고 났을 때 이 작품이 우리에게 뜻하는 것의 총체적 의미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 같다. 왜냐 하면 <김연실전>에서 주인공의 행동이 보여 주는 내용은 분명히 부도덕적인 일면을 포함한 채 무엇인가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한, 또는 원하는 대로 교육되지 못한 1920년대의 삶의 일각에 대한 재평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연실전>을 말해 주는 화자는 3인칭 객관적 시점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화자는 연실이의 부모와 연실이의 환경을 보여 주면서 구시대의 사회적 폐습과 가족제도의 한 특징을 적절히 다루어 주는 연실이가 자라나는 과정을 서술해 간다. 신시대의 학교와 기생과의 관계, 적서의 문제, '쌍것'으로서의 피해 의식, 그에 따른 연실이의 반항 의식, 연실에 대한 적모의 학대, 연실이 아버지와 첩 사이에 벌어지는 성유희, 일어 선생과의 정사 관계 등이 전작품 11장 중에서 5장을 차지하고 있다. 작가는 구시대의 한 가정을 택하여 소설화 했는데, 연실이를 통하여 빗나간 신시대의 인물상을 보이려고 한 것 같다. 그러므로 화자는 분명히 연실이가 정을 통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연실이'(<한국단편문학전집> 1권 109면 백수사간)로 나타나도록 조건을 부여해 왔다. 김동리가 지적하듯이 이 작품은 부도덕한 장면이 두세 곳 나타나지만, 연실이를 여성의 선각자로 다룬 것은 반어적 사태에 떨어진 인물로서 설정된 것으로 이해된다. 연실이는 동경의 여학교에 들어가 괴테와 단테의 소설을 읽고, '조선 여자 유학생 친목회'에 나아가고, 최 명애를 만나고 하여 문학?연애?성교의 3일치 속에서 빗나간 선각을 얻는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부인이 있는 창수가 연실이와 동침한 다음 기혼자라는 것을 말하자 작가는 연실이의 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게 무슨 관계가 있어요, 두 사람의 사랑만 굳으면 그만이지. 사랑 없는 본댁이 있으면 어때요.' 명랑히 이렇게 대답할 때는 연실이는 자기를 완전히 명작 소설의 주인공으로 여겼다.

 

  이 장면에서 보통 상식 있는 모든 독자들은 연실이의 도덕 의식이 얼마나 허약하고 잘못 방향지어졌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연실이가 동경에 온 것을 무슨 선각자로서의 대단한 목적이 있어 온 것이 아니라. '동경도 단지 가정에 있기가 싫어서 온 것이지 무슨 큰 희망이 있어서 온 바가 아님을 분명히 말하여 주고 있다.

 

  작가는 연실의 불행한 한 생애를 보여 주면서 한국의 근대화에 나섰던 여러 선각자들 중에는 연실이와 같은 빗나간 예도 있었다는 비판을 시도한 것 같이 보인다. 화자는 여러 군데서 연실이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이로 그리고 있다. 그러다가 동경에 와서 최 명애와 같은 단정치 못한 학생과 사귀고 결국 바로 잡힌 삶의 길을 발견하지 못한 채, '갈 길을 몰라서 헤매는 일천만의 조선 여성에게 광명을 보여 주기로 단단히 결심을 하였습니다.'와 같이 웃음거리로서의 선각자가 된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 준다. 이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는 바로 웃음거리가 된 근대화의 과정의 한 측면을 연실이로 하여 실연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 투영된 작가의 야유적 태도를 미처 못 느꼈을 때 김동리와 같은 비판이 나옴직하다.

주요작품 및 작품세계
<약한 자의 슬픔>(1919) 이후 <마음이 옅은 자여>(1919), <배따라기>·<목숨>(1921) 등의 작품에서 이광수의 계몽주의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을 표방하였다. 1925년에는 <명문>, <감자>, <시골 황서방>과 같이 자연주의적 작품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29년에는 춘원의 계몽주의문학관에 대립되는 예술주의문학관을 바탕으로 <근대소설고>를 발표하였고 이듬해 <광염소나타>, <광화사>와 같은 유미주의 계열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1930년부터 신문연재소설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젊은 그들>(1930~1931), <운현궁의 봄>(1933), <왕부의 낙조>(1935), <대수양>(1941) 등이 대표작이다. 역사소설 중에서 특히 <대수양>과 <젊은 그들>은 세조와 대원군을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1934년 이광수에 대한 최초의 본격 작가론이라 할 수 있는 <춘원연구>를 발표하였다. 이후 이광수의 친일행위를 비판적으로 그려낸 <반역자>(1946), <망국인기>(1947) 등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여러 가지 양식과 방법을 작품 속에서 실험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신문학 초창기에 소설가의 독자성과 독창성을 강조하여 소설을 순수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리뷰
(……) 김동인의 문학에 대한 관심은 주요한과의 교유에서 비롯된다. 소학교 동창이며 명치학원문예부 부원인 주요한에게서 문학이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서 그를 우러러보게 된 후 탐정소설과 세계 소년 문학문고를 읽으면서 문학에 대한 외경심을 갖게 된다. 명치학원 시절에 약간의 습작을 거친 후 그가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게 된 것은 1918년 성탄 전야에 주요한과 함께 동인지 <창조> 창간에 대하여 모의를 한 이후다.


1919년 2월에 발행된 <창조> 창간호와 2호에는 <약한 자의 슬픔>이라는 그의 첫 소설이 활자화되는데, 이 소설은 분량상 중편소설에 해당되는 것으로 동인 자신의 창작의 변을 보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이야기의 투와는 다른 묘사법과 작법으로 썼다고 호언을 한 소설이다. (……) 동인은 또 <창조> 2호 ‘남은 말’에서 이 소설의 창작 의도를 “엘리자베트로 대표된 현대 사람의 약점-주변의 반동을 안 받고 스스로는 아무 일도 못 하는 점, 삶을 모르고 사는 점-”을 그리려 했다고 말한 바 있다. (……) 김동인은 <약한 자의 슬픔>에 이어 <마음이 옅은 자여>를 발표하는데, 이 소설도 분량상 중편에 해당되나 주인공의 심리묘사에 공을 ?...... 

 

작가의 말
내가 첫번 동경(東京)을 갈 때는 열 다섯에 난 해 봄이었다. 그 때의 연락선은 연락선 가운데 그 중 크다는 고려환(高麗丸)이다. ‘크다. 위대하다.’ 나는 그때 그것을 보고 생각하였다. (……) 이듬해 봄, 아버지의 병이 위급하다는 전보를 받고 놀라서 귀국할 때에 나는 두번째 고려환을 타게 되었다. 위대하다 할만한 망망한 현해(玄海)와 이 또 위대하다 할 만한 사람이 창조한 고려환을 대조할 때에 어느 편이 위대하냐 또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재작년에 신혼여행으로 금강산(金剛山)에 가서 그 위대한 자연과 그 위대한 절들을 비교할 때, 작년에 또 동경서 돌아올 때에 연락선 가운데 그 중 작은 대마환(對馬丸)과 현해를 비교할 때, 금년 봄 구월산(九月山)에 가서 그 험한 산과 좋고 많은 절들을 비교할 때, 마음껏 사람의 정력의 결정의 위대란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그 큰 자연의 위대보다 승(勝)한 것을 깨달았다.


자연은 위대하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은 ‘과거’라는 것은 아무리 더러운 것이라도 아름답게 그리고 싶어하는 것과 같은 심리로써 ‘자연은 위대하다’고 평정(評定)하였으니까……. 자연은 숭엄(崇嚴)하다. 위대는 숭엄 그 물건......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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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인」(임규찬, 『친일파 99인』 3, 돌베개,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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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후명 (1983년 3월). 문화예술의 선구자 ① 김동인 / 애써 위로 받으시오. 《문화예술》.
  • 최재봉 기자. “김동인 친일글 세편 나왔다”, 《한겨레신문》, 2002년 11월 24일 작성. 2007년 11월 1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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