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대동아공영의 꿈 읊조린 어릿광대, 주요한(朱耀翰)

草霧 2013. 12. 13. 12:23

 

 

 

문학

 

주요한(朱耀翰, 창씨명 松村紘一, 1900∼1979)

 

 

 

 

대동아공영의 꿈 읊조린 어릿광대

 

 

 

 

  • 평안남도 평양 숭덕소학교 졸업
  • 일본 도쿄 메이지 중학교 수료
  • 일본 도쿄 제1중학교 졸업
  • 중국 상하이 후장 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시부회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주요한(朱曜翰, 일본식 이름: 松村紘一(마쓰무라 고이치), 1900년 12월 5일 ~ 1979년 11월 17일)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사회운동가·시인·언론인이며 극작가이고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임시 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었으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전후로 변절, 일제 전시체제때 총독부의 내선일체 체제에 순응하여 적극적인 협력활동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고, 제2공화국 장면 내각에서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을 역임했다. 본관은 신안(新安)이다.

     

    '불놀이'를 지어 한국근대시 형성에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겼다.[1] 아호는 송아(頌兒)이며, '송아지'와 '목신'(牧神), 주락양(朱落陽[1]), 벌꽃, 낙양(落陽)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 1.1 생애 초기
  • 1.2 일제 강점기 후반
  • 1.3 광복이후 정치 활동
  • 1.4 사후
  • 2 가족 관계
  • 3 학력
  • 4 저서
  • 5 상훈 경력
  • 6 같이 보기
  • 7 참고자료
  • 8 주석
  • 9 바깥 고리
  • 그는 꾸준히 안창호와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안창호를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인국민회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 뒤 안창호수양동우회를 결성하자 가입하여 회원이 되었다. 1930년대부터는 화신산업 취체역 등 기업 활동을 하면서 시작이 뜸해졌고, 광복 후에는 문단 활동을 접고 기업인, 언론인, 정치인으로만 활동했다. 1930년대 후반 화신상회 이사로 선출되었다. 

     

    일제강점기 시기 동안 주요한은 언론인으로 지내면서 '합법적인 공간'하에 실력양성운동과 사회계몽운동 발전에 힘써왔으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지식인들이 대거 체포되었을 때 주요한도 검거되었고, 이듬해 이광수, 전영택, 현제명, 홍난파 등과 함께 전향하였다.[2] 이후 전시체제기 동안 총독부의 체제에 순응하면서 적극적인 협력활동을 하게 된다. 조선문인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 조선언론보국회 등 여러 친일 단체에 가담해 징병제를 선전하는 등 태평양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했다. 창씨개명한 이름도 일본의 팔굉일우(八紘一宇) 이념에서 따온 것이다.

     

    1944년 종로의 인사들이 학도병을 독려하기 위해 조직한 종로익찬위원회의 회원[3]이 되었다. 1945년 초 조선언론보국회에 가입하였다.

     

    광복 후 흥사단에 관계하여 활동하였으며 1945년 9월 한민당이 창당되자 그에게 영입 제의가 들어왔으나 거절하였다. 그 해 조선상공회의소(대한상공회의소의 전신) 특별위원에 선출되었다. 그 뒤 대한무역협회 회장(1948)을 지냈고, 국제문제연구소 소장에 피선되었으며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한 뒤 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58년 5월 서울 중구에서 대한국민당의 윤치영을 누르고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며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뒤 그해 5월의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재선되었다. 8월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제2공화국 내각에 장면에 의해 발탁되어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으로 입각했으며, 1961년 초 경제과학심의회 위원에 피선되었다.

     

    1961년 5월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정권이 무너진 뒤에는 공직을 사퇴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대한일보》 사장과 대한해운공사 대표이사 등을 지냈다. 이후 정치정화법에 걸렸다가 1963년 정치정화법에서 해금되면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나 박순천장면, 정일형 등의 재건 민주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4] 이를 두고 야당에서는 그가 군사정권에 타협한 것이라며 비난을 가했다. 

     

    1964년 경제과학심의회의 위원, 1965년부터 73년까지 대한일보사 회장을 지냈다. 이후 문필 활동에 전력하다가 1979년에 사망했다. 경기도 고양군(현 고양시[5]) 벽제면에 안장되었다.

     

    〈불놀이〉는 한국 근대 자유시의 효시로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작품이며, 주요한은 김억과 함께 초기 시단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낭만적인 찬송가 작사도 하여 한국교회 음악발전에 공헌하였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어 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와카 형식으로 쓴 일본어 시집 《손에 손을(일본어: 手に手を)》(1943) 등 총 43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6]되어,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선정된 문인 가운데 이광수 다음으로 편수가 많았다.197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 아버지: 주공삼(朱孔三, 1875년 ~ ?, 개신교 목사. 평안남도 평양신학교 졸업.)
  • 동생: 주요섭(朱耀燮, 1902년 11월  ~ 1972년 11월 14일, 소설가, 시인, 영문학자. 前 한국문학번역협회 회장.)
  • 동생: 주영섭(朱永涉, 1912년 ~ ?, 연극배우, 극작가, 연극연출가. 前 국립연극연구소 연구위원.)
  • 시집 《아름다운 새벽》
  • 《3인시가집(三人詩歌集)》(1929), 이광수(李光洙)·김동환(金東煥)과 공저
  • 《봉사꽃》(世宗書院) (1930)
  • 《자유의 구름다리》(1959)
  • 《부흥논의》(1963)
  •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1963)
  • 1979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  

    주요한이 지원병 출신으로 죽은 이인석 상등병에게 바친 <첫피>(1941.3)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목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부르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피는 뿜어서/ 누런 흙 우에/ 검게 엉기인다/ 형아!아우야!

    이 피는/ 너들의 피다/ 너들의 뜨거운 피가/ 2천3백만 너들의 피가/ 내 몸을 통해서/ 흐르는 것이다/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 반도의 무리가/ 님께 바친/ 처음의 피다.

    나는 내 피에/ 고개를 숙이어/ 절한다/ 그것은/ 너들의 피기 까닭에/ 장차 내 뒤를 따라올/ 백과 천과 만의/ 너들의/ 뜨거운 피기 때문에/ 아아/ 간다/ 나는/ 너보다 앞서서/ 한자욱 앞서서/ 만세, 만세.

     

     

    애국시인에서 친일시인으로의 변신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가는 사람소리……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수 없는고?

     

    이 작품은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근대 자유시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불놀이]({창조} 창간호, 1919. 이 시를 자유시의 효시로 보는 견해는 이제낡은 주장이다)의 첫머리이다. 이 시의 작자는 잘 알다시피 주요한이다.

     

    주요한은 1900년 10월 14일 평양에서 목사인 아버지 공삼(孔三)의 8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2년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유학생 목사로 파견된 그의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이듬해 일본 메이지(明治)학원 보통부(중등부)에 입학하였다. 

     

    1918년 보통부를 졸업하고 그 해 9월 도쿄 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때 그는 오사카(京都) 유학생회지{학우}(1919. 1 창간)에 [에투우드]라는 제목 아래 5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그는 우리 근대시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그는 김동인*, 전영택(田榮澤) 등과 함께 {창조}를 창간하면서 문학 활동을 통하여 민족운동에 관여하고자 하였다.

     

    이 점은 그가 신시 운동의 목표를 민족적 정조와 사상의 표현 및 조선 말의 미와 힘의 발견([노래를 지으시려는 이에게], {조선문단} 제2호, 1924. 11)에 두고 있음에서 다소 짐작되는 바이거니와, 더욱이 그가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송아지'라는 필명으로 [대한의 누이야 아우야], [조국] 등 독립운동을 외치는 몇 편의 시를 발표하고 있음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는 3·1 운동 이후 일시 귀국하여 무슨 격문을 돌리다가 그 해 여름 중국 상하이로 피신해 갔다. 이 때 이광수*를 도와 {독립신문}의 편집을 맡았는데,이광수와의 교분은 이미 상당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광수는 1921년 4월에 귀국하였으나, 그는 1921년에 상하이 후장((水+扈)江)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면서 이광수가 주재하던 {조선문단}에 여러 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1925년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동아일보}에 입사하고 이듬해 학예부장으로 취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광수가 이끄는 수양동우회의 중요한 멤버로 활약했다.

     

    우회는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흥사단'의 국내 단체로서,이광수가 그 실질적인 책임자로 있었다. 그는 역시 이광수와 함께 동우회 기관지인 {동광}을 편집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동우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기여코자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37년 6월 6일 해산령을 거부하던 수양동우회에 대해 일제 검거를 시작했다.

     

    150명의 피검자 가운데 2명이 옥사하고, [화수분]의 작가 전영택, 작곡가 현제명*과 홍난파* 등18명이 전향성명을 발표하였다(1938. 6. 29). 이 사건과 함께 그도 역시 친일의 대열로 들어서게 된다.

     

    이 사건은 1941년 11월까지 4년여에 걸쳐 진행된 것으로, 결국 전원 무죄판결로 일단락 났으며 이 과정에서 이광수 등과 더불어 친일문학에 나서게 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그의 친일행위는 1938년 12월 수양동우회를 대표하여 국방헌금조로 4000원을 종로경찰서에 기탁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12월 14일 부민관 강당에서 열린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하여 내선일체의 구현, 동아협동체의 건설 등의 문제에 대하여 이광수, 조병옥(趙炳玉),현영섭*, 권충일(權忠一), 갈홍기(葛弘基) 등과 토론하였다.

     

    젊은 시절 상해임시정부에 가담하고 애국시를 쓰면서 조국의 독립을 누구보다도 갈망했던 그가 어찌하여 정반대의 길, 치욕스런 민족배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일까? 물론 이에 대한 답변은 그 스스로가 잘 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부끄러운 행위이면 일수록 그 답은 더욱 내면화될 것이다.

     

     

     

    이광수에 버금 가는 화려한 친일 문필활동

    주요한의 창씨명은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이다. 여기서 고이치(紘一)란 일본의 조국(肇國)이념인 '팔굉일우(八紘一宇)'에서 따온 것임이 너무나 분명하다. 이름 조차도 일본 정신에 철두철미하게 따르겠다는 의지에서 나온것일까? 팔봉 김기진*이나 백철*처럼----이들의 친일행각도 주요한에 결코뒤지는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성씨 다음에 한 자 끼워넣는 정도만으로는부족했던 것일까?

     

    그의 친일행위는 문인협회, 문인보국회, 임전보국단, 언론보국회, 대의당,대화동맹 등 수많은 부일단체의 간부를 역임했음에서 명백한 것이다. 이러저러한 단체들에서 그가 어떠한 일들을 했는가는 그리 자세히 드러나있지 않다. 하지만 이는 능히 미루어 짐작될 터이기에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들만 살펴보도록 하자.

     

    1943년 12월 4∼5일 이틀에 걸쳐 만주의 신징(新京)에서는 '만주국 예문가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대동아전쟁 2주년 기념 결전예문전국대회의 행사 중의 하나였다. 

     

    그는 이 회의에 조선문인보국회의 특파사절로,국민총력조선연맹의 데라모토(寺本喜一)와 조선연극문화협회의 유치진*과함께 참가하였는데, [결전하 만주의예문태세](決戰下滿洲の藝文態勢)({신시대}, 1944. 1)라는 참관기를 남기고있다. 또 이 회의 개회식장에서 축사를 낭독하였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금일의 문학은 다만 이기기 위한 문학, 미·영 격멸을 위한 문학이 있을뿐입니다. 동양이 오늘의 찬연한 문화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은 금일 미·영격멸의 피비린내 나는 문화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할 뿐입니다.……우리들은 친애하는 만주제국 5000만 민중들 역시 하루라도 속히 직접 총을 잡고 포학한 미·영의 두상에 불의 세례를 내릴 것을 기원해 마지 않는 바입니다."

     

    또한 그는 1941년 12월 14일 조선임전보국단에서 개최한 미영타도강연대회에서 '루즈벨트여 답하라'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반도의 2400만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성전의 용사 되기를 맹세하고있다"고 외쳐댔다.

     

    게다가 1943년 11월 4일 화신 6층 회의실에서 있었던 학도병 종로익찬위원회에서 호별 방문, 권유문 발송, 지역별 간담회 및 학교강연회 개최 등을 통하여 학병권유를 결의하였는데, 그는 이 모임에 참여하여 학병 권유 연설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한 11월 5∼9일에 진명학교교정 등 10군데에서 학병권유 부형간담회가 있었는데, 그를 비롯하여 이광수,양재창(梁在昶), 송문화(宋文華) 등이 연사로 참여하였다. 그는 [비약의시대]라는 글에서 "출진 학도의 구두 소리는 아시아 부흥의 진군이 되고 조선의 일본적 재생의 새벽 종소리가 될 것"이라며 학병 출전을 권유하였던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친일 문필활동은 1944년 4월 25일 제5회 조선예술상 문학상 수상시집인 {손에 손을}(手に手を)(박문서관, 1943. 7)이다. 일본의'와카'(和歌) 형식으로 씌어진 이 시집은 [우리들 황국신민], [소집되는아들들], [승리의 보(譜)], [송가] 등 4장으로 구성된 19편의 일문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 중 [오늘에서야]라는 작품을 보자(제1절).

      오늘에서야 우리를

      부르시는 높으신 뜻을

      서로 전하여 말하며

      눈물 흘리는 것을

    징병제를 예찬하고 있는 이 시는 조국의 젊은이들을 전장의 사지(死地)로 몰고 가려는 일제의 만행을 오히려 눈물 흘리며 감사하고 있는 꼴이다.

     

    이러한 내용은 [아침햇발], [파갑폭뢰](破甲爆雷), [대군에게], [댕기],[첫피] 등의 시에도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는데, 특히 지원병 출신으로 죽은 이인석 상등병에게 바친 [첫피](1941. 3)라는 시는 더욱 친일의 절정을이루고 있다. 첫째, 둘째, 아홉째 연을 읽어보자.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목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부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피는 뿜어서 누런 흙 우에

      검게 엉기인다.

       

      형아! 아우야! 이 피는 너들의 피다.

      너들의 뜨거운 피가, 2천 3백만 너들의 피가

      내 몸을 통해서 흐르는 것이다.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

       

      반도의 무리가 님께 바친 처음의 피다.

      나는 내 피에 고개를 숙이어 절한다.

       

      그것은 너들의 피기 까닭에,

      장차 내 뒤를 따라올 백과 천과 만의

      너들의 뜨거운 피기 때문에.

       

      아아 간다,나는

      너보다 앞서서

      한자욱 앞서서,

      만세, 만세.

       

    또 [마음 속의 싱가포르], [승리의 태평양], [12월 7일의 꿈],[상해조계진주일에 왕군에게 보냄], [동아의 새 봄], [싱가포르],[임시대제(大祭)의 날에], [명기하라 12월 8일], [성전찬가], [대동아행진곡]등과 같은 수많은 시들은 미영연합국을 격멸하는 전쟁 자체를 칭송하고 그러한 성전을 수행하는 일본 정신과 대동아공영의 꿈을 노래하고 있다.

     

     "천가지 풀에 물방울은 빛나고/이슬마다 맺힌 구슬에 어능위(御稜威), 빛나는듯이/사방은 무성한 수풀처럼 괴괴히 웃으며 살다"([비온후]雨後)와 같이일본 국왕의 권위를 찬양하면서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성심을 기쁜 마음으로읊조리고 있다.

     

    이러한 친일시들의 이론적 토대에는 '결전문학'(決戰文學)론이 밑받침되어있다. 이 결전문학은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 위에서 생긴 것으로서,'국민문학 내지 동방예술이 통과해야 할 재생의 용로(熔爐)'라고 주장하고있다([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1943. 6).

     

    계몽선전의 도구로서 시가'무대에서 방송실에서 전선에서 직장에서' 읽히고 낭송되도록 씌어야 하며,이런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의 공용어로서 일본어가 등장할것'이라는 그의 생각이 일본어 상용을 강요하는 결과로 나타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대동아권과 문화의 문제]라는 글에서 이렇게 주장한 근저에는 '팔굉일우'로 표현되는 일본주의가 기초해 있음은 물론이다. 

     

    그 밖에도 그는 [임전조선], [최저생활의 실천], [직장·도장·전장],[나서라 지상명령이다], [징병령 실시와 조선 청년] 등의 수많은 시국논설을 통하여 내선일체의 완성, 황국신민으로서의 임무 완수, 자발적인 성전참여 독려, 국민생활의 최저화 등을 부르짖었다.

     

    일례로 1943년 6월에 발표한[다섯 가지 사명](五つの使命)이라는 글을 보면, 특별지원병제에 임하는 우리 청년들의 각오를 5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즉, 성전의 세계사적 의의를 체득하는 반도의 세계적 사명, 미·영 격멸과 아시아 부흥을 위한 반도의 동아적 사명, 황국신민으로서 충성하는 반도의 일본적 사명, 고난 극복과 책무 완수하여 향토의 명예를 앙양할 반도의 향토적 사명,멸사보국·생사초탈이라는 반도의 인간적인 사명 등이 그것이다. 

     

     

     

    해방 후 여러 분야의 요직 두루 맡아 

    이상에서 보았듯이 주요한의 친일행적도 양에서나 질에서나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하다. 젊은 시절 독립운동에 청춘을 던져 애국적인 시를 썼던 '송아지'(그의 필명으로, 어딘지 민족적인 냄새가 담긴 듯도 하다.

     

    그의 아호 송아(頌兒)도 이 말에서 나왔다)가 '팔굉일우'라는 일본 정신의 기수 '마쓰무라 고이치'로 변신해 간 것은 그 자신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불행한 일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더욱 불행한 일은 해방조국에서 그 불행의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채 그가 독립투사로 우국적인 지도자의 자리를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해방 이후 흥사단에 계속 관계하였으며, 대한상공회의소 특별위원,대한무역협회 회장, 국제문제연구소 소장, 민주당 민의원(초선, 재선)을지냈다. 4·19 이후에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을 거쳤고, 5·16 후에는경제과학심의회 위원, 대한일보사 사장, 대한해운공사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정계, 재계, 언론계, 문화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늘 양지 쪽에 있었다고 하겠다. 그는 1979년 80세를 일기로 영욕의 한국 근대사와 함께 하면서 마침내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 해 정부에서는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우리 근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의 하나가 해방 직후 부일세력의 척결을 철저하게 수행해내지 못한 데 있다고 만일 말한다면, 주요한의 이 같은 맹활약은 분명 우리 역사의 비극이리라. 친일한 부분은 축소되고, 그의능력만 강조되어 많은 후세대에게 훌륭한 인물로 전해진다는 것은 역사의 진정한 자기 비판을 상실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 김윤태(민족문학사연구소 연구원)

     

     

    주요한 朱耀翰 1900∼1979.

    젊은 날의 송아 주요한(頌兒 朱耀翰)

     

    시인·언론인·정치가.호는 송아(頌兒). 필명은 벌꽃·낙양(落陽) 등. 평양 출신. 목사 공삼(孔三)의 8남매 중 맏아들이며, 소설가 요섭(耀燮)의 형이다. 마을집|불놀이|빗소리|아름다운 새벽|자유의 구름다리 등, 경제과학심의회 위원|대한일보사 사장|대한해운공사 대표이사 

     

    1912년 평양숭덕소학교, 1918년 일본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등부, 1919년 동경의 제1고등학교를 거쳐, 1925년상해(上海)후장대학(滬江大學)을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 상해의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을 지냈고, 일제 말기에는 실업계에 투신하여 화신상회(和信商會)의 중역으로 있었다. 한편,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 이후 전향한 주요한은 1940년대에는 조선문인협회·조선문인보국회·조선임전보국단·조선언론보국회·대의당·대화동맹 등 수많은 친일 단체의 간부를 역임하였다.

     

    학병권유 연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흥사단(興士團)에 관계하는 한편, 대한상공회의소 특별위원, 대한무역협회 회장, 국제문제연구소장, 민주당민의원 의원 초선 및 재선, 4·19 당시는 부흥부장관 및 상공부장관을 역임하였고, 5·16 후에는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대한일보사 사장, 대한해운공사 대표이사 등을 지냈다.

    메이지학원 재학 시절에 학우들과 회람지를 발행한 것을 계기로 시인이 되기를 소망하였고, 그때 스승이었던 가와지(川路柳虹)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전하여진다. 그의 문단 활동은 1917년 11월호 ≪청춘 靑春≫지에 낙양이라는 필명으로 소설 <마을집>을 투고하면서부터 전개되었고, 이어 번역소설 <밥>(미하일 알치바세프 원작)이 ≪학지광 學之光≫에 발표되었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19년 1월에 간행된 ≪학우≫ 창간호에 ‘에튜으트’라는 큰 제목으로 창작시 <시내>·<봄>·<눈>·<이야기>·<기억>의 5편을 발표하면서, 그리고 같은 해에 김동인(金東仁) 등과 더불어 창조(創造)동인에 가담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대표되는 시로는 <불놀이>(≪창조≫ 창간호)와 <빗소리>(≪폐허이후≫ 창간호)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미국 시인 휘트먼(Whitman,W.)과 일본 낭만파 시인들의 영향을 받아 시를 썼지만, 그들과는 달리 전원과 자연을 바탕으로 하여 맑고 차분한 서정의 시세계를 이룩하고 있다. 이러한 특색은 첫 시집 ≪아름다운 새벽≫(1924)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 경향은 초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수양동우회 관계자 검거에 대한 일제 경찰문서

     

    일제 말기에는 제5회 조선예술상문학상 수상시집인 ≪손에 손을 手に 手を≫(박문서관, 1943)을 비롯한 다수의 친일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많은 시국 논설을 통하여 이른바 내선일체의 완성, 황국신민으로서의 임무 완수, 자발적인 성전 참여 독려, 국민 생활의 최저화 등을 부르짖었다.

     

    광복 후에는 정치와 경제 분야에 관여함에 따라 그에 관한 논문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그는 한국 근대시의 형성기에 그 선구자적 공적을 남긴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해는 경기도 고양시 벽제에 있는 새문안동산에 안장되어 있고, 1979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시집으로는 ≪아름다운 새벽≫ 외에, ≪3인시가집 三人詩歌集≫(三千里社, 1929)·≪봉사꽃≫(世宗書院, 1930) 등이 있고, 일반 논저로는 ≪자유의 구름다리≫(泰成社, 1959)·≪부흥논의≫(大成文化社, 1963)·≪안도산전서 安島山全書≫(三中堂, 1963) 등이 있다.


    불놀이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西便) 하늘에, 외로운 강(江)물 우에, 스러져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四月)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동광』 표지

     

    아아 춤을 춘다, 싯벌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우에서 나려다보니, 물 냄새, 모래 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不足)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過去)의 퍼런 꿈을 찬 강(江)물 우에 내어던지나, 무정(無情)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 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임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버릴가 이 설음 살라버릴가,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 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 시원히 오늘밤 이 물속에…… 그러면 행여나 불쌍히 여겨 줄 이나 있을가…… 할 적?...... 
     
    호는 송아(頌兒). 1900년 10월 평양에서 출생. 1912년 숭덕소학교 6학년 때 선교목사로 도쿄에 주재하게 된 부친을 따라 도일,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및 도쿄 제일고교를 졸업했다. 그의 문단활동은 1917년 <청춘>이란 잡지에 소설을 투고하면서 시작되었으며, 1919년 김동인과 함께 <창조>를 발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919년 5월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신문 기자로 일했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1924년 <조선문단>이 창간되자 시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24년 처녀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간행하였다. 1925년 귀국하여 동아일보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 등을 지낸 데 이어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는 등 언론인으로도 활약했다. 1930년 이후 간혹 시를 쓰기도 하였으나 언론인, 정치가, 상공인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무역협회 회장(1947), 민주당의원(1958), 상공부장관(1960) 등을 지냈다. 

     

    주요작품 및 작품세계
    일본에 체류하면서 시작활동을 시작한 주요한의 초기 시는 서구 및 일본 근대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산문적 표기와 인상의 감각화 기법으로 나타난 이러한 징후는 <불놀이>에 잘 반영되어 있다. 또한 밝음과 의지의 에너지가 분출하는 이상주의적 지향의 시도 선보이는데, <해의 시절>, <아침처녀> 등이 이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한편, <봄> 연작시에서 민요 및 동요조의 경향을 나타내는데, 이는 민중에 가까이 가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러한 전통 지향적인 민요시 창작은 후기 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상하이 망명시절의 작품들은 망향의 그리움과 이국적 풍물을 서정적으로 노래한 <상해이야기>, <지나 소녀>, <공원에서>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불놀이>, <아침처녀>, <빗소리>는 그 자신이 뽑은 대표작들이다. 한편 평론 <노래를 지으시려는 이에게>에서 민족정서와 사상을 표현하고, 국어의 미와 생명력을 창조할 것을 강조하여 본격적인 시론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김억과 마찬가지로 한국 초기시단의 개척자로서, 서구 모방의 시풍에서 전통 지향의 시풍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리뷰
    1919년 2월 <창조> 창간호의 서시로 실린 주요한의 자유시. 실연한 한 청년을 시적 자아로 하여 가신 님을 그리워하며 회한에 젖는 불안과 감상적 울분을 강렬한 어조로 표출하고 있다. 정형률을 과감히 파괴하여 산문성을 지향하고 있고, 계몽적 설교의 구각에서 벗어나 내적 정서를 분방하게 표출하여 한국시단에 큰 반향을 가져온 작품이다. 이 작품은 주요한이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에 소개된 서구상징시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것이다. <불놀이>에 보이는 애매모호한 느낌의 상징주의 시풍은 이러한 영향으로 볼 수 있는데 특히 산문적 표기, 인상의 감각화 기법은 프랑스 상징시인인 폴 포르(Paul Fort)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도로 내밀한 언어의 음악성을 통해 만상의 내면세계를 조응하는 상징시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으로, 오히려 감정의 과잉 토로와 데카당적 분위기로 인해 감상적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시 장르 면에서 최초의 자유시냐 산문시냐의 논의가 있어왔는데, 최초의 자유시나 산문시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작품의 평가에 대해서는 ‘자아의 발견과 개성의 발로’(박철희), ‘불의 상징과 리비도의 억압을 통해 당대의 이념적 갈등을 물과 불의 이미지로 형상화’(오세영), ‘낙원 회귀의 의지 표출’(최원규) 등 긍정적 평가가 있는 반면, ‘소박한 내용과 단순구조로 된 감상적 니힐리즘’(김재홍), ‘신파의 변사조 리듬’(김윤식), ‘착란된 감정의 과장과 우발적 감각’(김흥규) 등의 부정적 평가도 있다.
    참고: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 주요한의 시는 김억에 의해 그 기반이 확보되기 시작한 근대적인 자유시의 시적 형태를 정립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 같은 평가는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시적 리듬과 그 언어적 표현의 성과에 근거한 것이다. 주요한의 대표작으로 지목되고 있는 <불놀이>와 같은 작품을 보면 이 같은 성과를 확인할 수 있다. (······)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사랑 잃은 청년’으로 표상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랑을 그리워하며 회한에 젖어 있는 서정적 자아의 불안과 감상과 울분이 함께 엉켜 강렬한 어조로 표출되고 있다. 이 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형태적인 자유분방함이다. 고정적인 율격을 과감히 파괴하면서 이 시가 지향하는 것은 자유분방한 정서와 그 정서의 표현에 어울리는 형태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일이다. 계몽이라든지 지식이라든지 하는 관념의 구각을 벗어나고 있는 이 시에서 볼 수 있는 지적 정서의 분방한 표출은 이전의 시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확인되는 형식의 개방성은 근대적인 자유시의 개념과 일치한다. 우선 외형적인 율격의 규칙성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시적 진술?...... 
     
    작가의 말

    (……) 과거 우리 사회에 노래라는 형식으로 된 문학이 있었다면 대개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중국을 순전히 모방한 한시요, 둘째는 형식은 다르나 내용으로는 역시 중국을 모방한 시조요, 셋째는 그래도 국민적 정조를 어지간히 나타낸 민요와 동요입니다. (……) 그런데 근래에 와서 새로운 풍물이 수입되어 문체가 한문의 전제에서 벗어나는 동시에(아직까지 그 전제를 아주 벗지는 못하였으나) 지금 우리가 토론하려는 신체시가 생겨났습니다. 그 신체시를 이하부터는 간단히 신시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신시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이 문제는 역사적으로 관찰할 때 명백히 대답됩니다. 산문학의 시작을 말하려면 반드시 예수교의 성경을 들지 않을 수 없음 같이 신시의 기원을 말하려면 ‘찬미가’를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미가는 예수교인들이 예배하러 모일 때에 부르기 위하여 서양곡조에 맞추어서 조선말로 쓴 노래입니다. (……) 찬미가 다음으로 신시의 형식을 가진 것이 소년잡지 등에 실린 칠오조(7·5조)의 신체시와 갑오 이후에 유행한 창가라고 보겠습니다. 그 가운데는 아직도 한문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것도 있었?......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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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_____, [雨後/同義語], {신시대}, 1944. 5. 

    ______, {手に手を}(일문), 박문서관, 1943. 7. 

    ______, [루즈벨트여 답하라], {신시대}, 1942. .1

    ______, [대동아권과 문화의 문제], {매일신보}, 1942. 3. 23. 

    ______, [五つの使命](일문), {신시대}, 1943. 6.

    『한국현대시문학사』(정한모, 일지사, 1974)

  • 『한국현대시인연구』(정태용, 어문각, 1976)
  • 『한국현대시작품론』(김용직·박철희 편, 문장사, 1981)
  • 『한국근대시사』(김용직, 새문사, 1982)
  • 「해에게서 불놀이까지」(이상섭, 『인문과학』 22,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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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한 연구>, 이용호, 동광문화사, 2002
     <한국 현대시 작품론: 최남선에서 김수영까지>, 김용직·박철희 공편, 문장, 1996
     <한국현대시사 연구>, 조창환 외, 일지사, 1987
     <한국근대시사>, 김용직, 학연사, 1986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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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5년 7월 1일). 〈주요한 : 대동아공영의 꿈 읊조린 어릿광대 (김윤태)〉, 《친일파 99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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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임
    전예용
    제6대 부흥부 장관
    1960년 8월 23일 ~ 1960년 9월 12일
    후 임
    김우평
    전 임
    이태용
    제15대 상공부 장관
    1960년 9월 12일 ~ 1961년 5월 3일
    후 임
    태완선
    전 임
    김우평
    부흥부 임시 장관
    1960년 12월 ~ 1961년 1월 30일
    후 임
    태완선
    전 임
    태완선
    제9대 부흥부 장관
    1961년 5월 3일 ~ 1961년 5월 18일
    후 임
    박기석
    (건설부 장관)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전 임
    (중구 갑)윤치영
    (중구 을)정일형
    제4대 민의원(중구 갑)
    1958년 5월 31일 ~ 1960년 7월 28일
    민주당
    중구 을: 정일형
    후 임
    (중구 갑)주요한
    (중구 을)
    정일형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전 임
    (중구 갑)주요한
    (중구 을)
    정일형
    제5대 민의원(중구 갑)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민주당
    중구 을: 정일형
    후 임
    (중구)정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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