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지암 이종욱

草霧 2013. 12. 5. 10:30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지암 이종욱

 

 

 

이 현 희

       

 

목 차

 

. 서 론

.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지암

.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특파원

. 2차 독립운동의 추진

. 연통제의 조직과 활동

. 지암과 진진원

.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조직과 임정의 활성화

. 대동단 단장 김가진의 상하이 임정합류

. 지암에 대한 친일논란 문제

 

 

. 결 론

 

 

 

 

 

 

 

 

 

 

 

 

. 서 론

 

 

  한국의 저명한 민족독립 운동가이며 스님이신 항일애국지사 지암 이종욱(智庵 李鍾郁: 18841969)은 강원도 평창 출신이다. 19193월 향리에서 민족운동에 나섰다가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월정사 스님으로 종무의 중심을 잡고 인재양성에 힘쓰고 있다가 3.1혁명에 참여한 이후 본격적인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한 불교계 대표적인 애국지사이다. 그는 3.1혁명 직후 광복투쟁의 구심점을 구축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를 비롯하여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특파원 및 내무부참사, 의정원의원,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외교특파원 등을 맡아 활동하는 등 8.15민족의 광복 때까지 지속적으로 90평생을 항일독립운동과 불교발전에 기여한 대표적인 애국스님 중의 한 분이었다. 특히 스님으로서 임시정부의 기반을 구축함에 크게 기여한 분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득이 일제말기 불교계의 총책임자로서 교단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정책에 협력한 행보로 인하여 일부 험담 악평 가들이 불교계의 대표적인 친일파라는 무책임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로 인하여 지암의 항일행적과 일제협력에 대한 역사적이고 교단 적 차원의 이론적, 객관적 연구가 미흡한 현실에서 이를 해명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의 위치와 법통성의 기여도, 임정을 지지 후원하는 독립운동단체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항일활동을 전개한 지암의 행적을 자료에 의거 추적하면서 그의 진정한 독립운동가의 면모를 검색 평가해 보고자한다. 아울러 그에 대한 갖가지 비난 성토 규탄 등 친일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대승적 차원에서 불교계의 소생을 위한 교단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심층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지암

 

 

  19193.1혁명 당시 월정사 스님으로 불교계 인재를 양성하고 있던 지암은 교단만을 지킬 것이 아니고 구국적인 차원에서 민족운동에 나서기로 하였다. 그는 승려 용창은(龍昌恩)과 함께 서울 탑골공원에서 개최된 3.1혁명에 참가함을 계기로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어 동년 3월초 이탁이 이완용 등 매국노(을사오적)를 총살하기 위하여 조직한 이른바 <27결사대>에도 참여하여 동지들과 보다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꾀하여 나갔다. 천도교 총수인 손병희도 일찍이 절규하였듯이 민족이 없이는 구도(求道)의 의미가 없다.’라는 애국적 견지에서 과감히 참여한 것과 같다. 이들은 191933일 고종황제의 국장인 인산 일에 지탄 받던 매국노의 처단을 위해 거사를 준비하였으나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모처럼의 큰 애국적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뒤 매국 5적에 대한 성토문과 경고문, 격문 등을 작성하여 서울 시내 요소요소에 붙여 그들의 천인공노할 매국행위를 국민에게 소상히 알리고 규탄하는 등 계속 역적의 사살을 공개적으로 꾀하다가 대원의 일부가 일경에 체포되고 말아 그 검거선풍 속에서 약간의 위축과 망설임이 있었으나 재기를 위하여 다시 거사를 계획하였다. 이때 체포를 모면한 대원들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투쟁을 계속하였으나, 지암은 이에 구애됨이 없이 국내에서 이만직(조만식?) 유근 주익 박한영 등 24명의 동지와 같이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3.1혁명 직, 전후 구심점이 될 정부형태의 통제적 사명을 띨 공공기구의 출현이 무엇보다도 민족운동의 실효성을 위하여 요청되었는데, 3.1혁명과 같은 거국거족적인 독립운동 자체를 효과적이고도 통제적, 조직적으로 발전시킬 민주공화기구의 출현을 갈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절실한 요망에 의하여 노령의 대한국민 의회정부가 성립되었다. 일찍이 박은식이 그의 명저에서 지적하였듯이 세계가 전쟁 이후에는 반듯이 혁명정부가 수립되어 그를 중심으로 신국가의 탄생을 조직적으로 완수함이 정치발전상 필수적이라고 하였는데 그런 맥락에서 지암도 임시정부의 수립은 시대적인 요청이었다고 내다본 것이다.

 

국내외 여러 곳의 임시정부 중 실질적 한성임시정부는 19193월 중순이후부터 불교계 대표인 지암을 비롯하여 한남수, 김사국, 홍면희, 이규갑 등 지사에 의해 수립이 추진되었다. 즉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20여명의 독립지사들은 정부를 조직하기 위하여 동년 4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하기로 최종 결의하였다. 이보다 1일 앞선 41일에는 나의 저서에서 언급하였듯이 천도교인 이종일이 중심이 된 기호의 대한민간정부가 천도교 내에 수립될 단계에 있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이런 임정의 수립선포 문제는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이는 이미 내가 발굴한 자료에서 밝힌바 있다. 그만큼 3.1혁명의 후속적인 성과와 대책이 곧 임정의 수립으로 구체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임시정부의 조직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대표선정, 국민대회의의 개최 등을 다각적으로 협의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침을 토의한 뒤 국민대회 취지서, 임시정부선포문, 약법 등을 기초, 지암 등 25명의 13도 대표자명단과 임시정부 조직 및 약법 등을 인쇄하였다. 이때 국민대회를 개최키 위한 취지서에 따라 뽑힌 13도 대표는 3.1혁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독립지사를 비롯하여 종교인, 학생, 농민, 노동자, 언론출판계, 교육계 등 각계각층 민족대표가 거의 추대 망라됨으로서, 이러한 면에서 국민대회 개최는 정통성문제가 정립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임정의 이승만 임시대통령이 1925년도에 탄핵을 받아 의회를 통해 그 직에서 면직되었을 때에 나는 한성임시정부의 대통령인데 누가 정통성 있는 나를 감히 면직시킬 수 있겠느냐.”면서 승복하지 아니한 채 그대로 대통령이란 직함을 갖고 워싱턴에서 대통령으로 행세하였던 일도 있었다. 그만큼 법통성 문제는 해석상의 묘수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국민대회대표 대부분은 3.1혁명을 직, 간접적으로 인도, 참여하여 성과를 거둔 민족 지사들이었다. 문화계의 명사 이돈화 함화진과 동갑인 지암 또한 이 당시 동지를 규합하여 주도적인 임무를 수행한 뒤 불교계를 비롯하여 전북과 강원도를 대표로하여 한성임시정부수립에 13도 대표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지암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약소국의 자립을 위한 전초단계로서의 임시정부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를 누구보다 더 상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니 그는 스님이면서도 민주공화 정부의 민주화 체제의식과 선진적인 감각이 앞섰던 분으로 인식된다. 이것이 그의 공화의식과 선진 정치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사전 준비에 의해 동년 423일 지암을 비롯한 13도 대표 25명으로 서울과 인천에서 조직된 국민대회명의로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하고, 군 출신 이동휘를 국무총리 총장으로 추대하는 민주제의 내각인 한성임시정부가 수립 선포되었다.

 

따라서 실질적인 국내외 임시정부 3개 처 중 하나인 한성임시정부는 비슷한 시기에 수립되었던 타 임시정부에 비하여 대표성과 주권, 국토, 국민을 보유한 상태에서 민주공화 체제와 여건에 걸맞게 수립되었으므로 그 법통사적 연결의 의미가 깊고 크다. 이에 통합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 정통성-법통 성을 국내의 민간대표와 서울 중심부에서 일제 강점하였음에도 민의를 수렴해서 자발적으로 수립된 한성임시정부에서 그 역사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그 중심에 발랄한 36세의 지암 스님이 있었던 것이다.

 

 

.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내특파원

 

 

 한성임시정부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지암은 13도 대표인 이용규, 최전구, 이내수 등이 악명 높은 종로 경찰서에 체포되는 등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상해로의 망명을 모색하고 있었다. 4월이었다. 임정의 특파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후술하겠지만 19195월 국내에서 안재홍, 송세호, 연병호 등과 같이 결성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이곳에서 외교특파원으로 선임된 뒤 다시 상하이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상하이에서 이 청년외교단의 건의서를 도산에게 전달하여 국내의 민심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것이 인연이 되어 임정의 안창호가 발기 조직하였던 대한적십자회의 자유대 대원으로 참여함으로 안창호와 친숙하게 되면서 그의 권유에 의하여 석오, 성재, 백범, 몽양, 소앙, 우천, 예관, 우사, 유정 등이 중심이 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19191945)에 본격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는 특파원의 자격으로 필요에 따라 국내외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친 것이다. 그는 임정에만 오랫동안 머물러 있지 못하였다. 왕래, 연결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주요임무였다.

 

당시 1천여 명(혹은 3천명)의 혁명지사들이 국내외로부터 상하이에 망명하여 정통세력이 합류, 항일광복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이곳에서 3.1혁명 직후 413일 김신부로에서 의정원의원 29명에 의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 선포되었다. 일찍이 1910년대 초 상하이에 독립운동의 거점을 확보한 신규식 등이 조직한 동제사를 연결하여 조동호 등의 신한청년당의 독립지사들이 석오 등 50대의 원로들을 모신 가운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주도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들은 19193월 하순 현순을 총무로 한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여 임정의 조직기반을 마련, 확대하였다. 이들은 49일 손정도, 이광수의 건의로 410일과 11일 상하이 프랑스조계 김신부로 현순의 임시 가택에서 석오, 유정 등 29명의 제헌의원이 출석하여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를 열고 석오 이동녕을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이어 신석우에 의하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민국 연호 및 관제를 민주방식에 의거 결의하고, 일본에서 법률학을 전공한 청년 소앙, 해공 등이 수초한 임시헌장 10개조와 헌정선포문을 축조심의 결정하였으며, 선서문과 정강 6개조를 통과시켰다. 그리고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선출한 뒤 4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내외에 정식으로 공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3.1혁명 직 전후 국내외에 89개의 여러 갈래로 수립된 임시정부는 항일투쟁에 있어서 분산과 혼란, 통일의 약화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한민족의 통일된 정치역량을 의심받게 되는 것이므로 임정의 단일화로의 통합이 요청되었다. 이때 미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안창호가 동포들이 거출해 준 25천 불의 성금을 가지고 천신만고 끝에 상하이에 도착함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한성임시정부, 대한국민 의회정부를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통합작업이 모색되었다. 마침내 한성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하는 대단합의 협의가 이루어짐으로 통합 임시정부는 동년 911일 제1차 개헌을 통한 대통령지도제의 새 헌법을 공포하였으며 신내각이 성립되었다. 

 

당시 상하이 임정은 한민족의 주권기관으로 수립, 선포되었으나 식민지하라는 현실적인 상황으로 정부 구성 요건 상 해외에 그 위치를 둠으로 정식국가 구성상에는 미치지 못하는 취약점이 있으나 여러 가지 혁명 정부라는 비상수단 하에서 합의된 방법을 통해 국내외의 통할 통치를 모색해 나갔다. 즉 상하이 임정은 국내에서 국민대회라는 형식을 통해 수립된 한성임시정부의 법통 성을 계승하는 한편 연통제와 교통국의 실시, 특파원 및 선전원 등의 파견 등으로 국내외를 통할 통치해 나갔다. 그 중심에 지암 스님이 있었다. 따라서 지암은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법통 성의 현주소요 산 증인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특파원은 일종의 특수정보원으로서 임정의 특별한 연결고리의 임무를 띠고 국내에 파견된 중요임무를 띤 밀사로 항일성 독립성 등, 신임이 두텁지 않으면 그 임무 수행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파원의 주요 임무는 주로 임정활동에 대한 선전을 통한 국내외 동포들의 신뢰도 제고와 시위운동, 연통제의 실시, 비밀결사의 조직과 연계활동, 독립신문 민족의식 도서 등 임정의 관련 문서의 전달과 독립운동의 주요 인사 계보 파악 각 민족운동 단체의 활동상황과 연계성의 모색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의 모집 전달 확인 등이었다. 특파원의 파견과 그 활동은 국내외 동포에 대한 통치의지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고 독립에의 자신감을 심어주는 임무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는 특파원의 파견은 임정 초기에는 석오와의 협의 하에 안창호에 의해 주도되다가9월 제1차 개헌에 따라 통합임정이 성립되어 의정원의장이던 석오 이동녕이 내무총장으로 취임한 뒤에는 논의 결과 국무회의와 이동녕에 의해 파견이 이루어졌다. 석오는 특파원으로 그가 가장 신뢰하던 지암을 선정 파견하면서 나는 기독교신자이나 지암은 불교도로서 나라 위한 애국적인 임무 수행에 종교적 분류가 무슨 다른 의미의 구분이 있겠습니까?”하면서 총명한 지암을 적극적으로 신임하고 파견한 것이다.

 

이때 상하이로 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지암은 석오등과 협의한 뒤 임정의 특파원 파견을 주도하였던 안창호에 의해 동년 716일 내무부 특파원에 임명되어 함경남도 지역의 선전과 시위운동에 대한 임무를 띠고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93일 상하이로 복귀하였다. 곧이어 98일 제2차 독립운동 준비와 실행의 임무를 석오로부터 새롭게 부여받고 연통제 경기도 특파원으로 국내에 파견된 지암은 제2차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및 대한독립 애국단, 조선민족 대동단 등과 임정을 연계하는 내외 통치활동을 자담하였다. 특히 동 경성(서울)특파원으로 파견된 지암은 1029일 대동단 총재와 구한국대신을 역임한 원로 동농 김가진을 동반하고 그 아들 의한과 같이 상하이로 귀환하여 석오와 백범 등의 큰 환영을 받았다. 의왕을 모셔오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의기소침해 있던 임정에 동농이 오게 되었으니 사실상의 구원세력이라고 평가할 만하여 용기가 충천, 배가된 것이다. 동농은 이때 석오에 의하여 임정의 상임 고문으로 영입, 위촉되어 임정을 이끌어 나가는데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이어 그는 이듬해인 1920226일 평안남도 외 12도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연통제실시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임정의 국내특파원의 파견은 19202월 지암의 파견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그것은 동년 5월경 임정 내 임시공채관리국이 설치되어 공채모집위원이 군자금모집을 전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지암은 다시 1920년 특파원의 임무대신 지방선전부 선전대원으로, 11월에는 임정에 의하여 임시공채관리국 공채모집위원으로 각기 임명되어 내외에 파견되는 등 특파원의 중차대한 임무를 전개하였다

 

한편 지암은 19191229일 임정 내무부 참사에 임명되었고, 329일에는 임시의정원 강원도의원(국회의원)으로 선임되는 등 임정의 통치를 위한 입법 활동에 있어 실질적인 광복정책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내무부 참사인 지암은 상하이 임정에 참여한 불교계 인사와 국내 항일운동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독립운동 기밀부 설치를 중개 검토하는 등 활발한 애국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국내의 주요 사찰을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한 기밀부를 만들 계획을 추진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석왕사에서 강청월등에게 조선에 기밀부를 설치하여 해외와 서로 호응하여 활동할 것을 설명하였으나 이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참사인 이종욱으로부터 그 취지를 들어 알고 있으므로 더욱 이종욱은 기밀부 설치를 말하였을 때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석왕사의 중요 4개소에도 연장하여 설치한다고 한다.

 

또한 연통제 국내본부 총책임자였던 지암은 연통제의 임무를 기밀부를 통해서 원만 활달하게 연결, 수행하고자 하였다. 동년,

 

10월 이종욱 등이 연락의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수명으로 더불어 기밀부를 조직하고 이 기밀부를 통하여 독립선언서의 제작, 운동비 마련, 후원자 연락 등의 책임을 맡도록 하고 기밀부원은 준비 완성된 후에 비밀히 전부 상하이로 건너가게 주선한다.

 

라고 하였다. 특히 상하이 임정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하여 국내 주요 사찰 승려들을 설득하여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노력하였는데, 통도사 주지 김구하는 인편으로 지암에게 거금 3천원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지암은 불교계를 대표하여 임정의 실무자로서 승려들과 긴밀히 협력하며 국내외에서 광범한 활동을 전개함으로 임정의 연락업무와 군대조직, 군자금의 모집, 선전활동 등을 맡아 지원하였다.

 

. 2차 독립운동의 추진

 

 

  지암은 미행과 감시를 용하게 피하며 191998일 대한민족대표 명의의 선언서를 휴대하고 경기도특파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대한독립 애국단, 조선민족대동단과 연계 활동을 벌이며 제2차 독립시위운동을 추진하였다.

 

2차 독립운동은 당초 천진 불변단을 중심으로 계획되어진 것이었는데 안창호가 이에 관여하면서 국내에서의 전국적인 독립시위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도산은 천진 불변단의 단원들을 국내 경원선, 경의선, 경부선 연변특파원, 황해도, 전라남북도 특파원으로 파견하는 한편 지암 이종욱 등 자신의 지인들을 평안북도, 경기도지역 등의 특파원으로 파견함으로 제2차 독립시위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때 제2차 독립시위운동은 일왕의 생일인 1031일 소위 천장절로 계획되었고, 시위운동의 실행을 위하여 남녀학생’, ‘천주교신자’, ‘적의 관공리가 된 동포에게라는 3종의 과격한 포고문과 이에 대한 계획과 방침을 특파원에게 주어 그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국내 각 지역에 파견, 활동하게 하였다. 이때 선언서는 박은식을 비롯한 30명의 대한민족대표의 명의로 작성되었고, 선언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임정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였다.

우리 민족은 대한민국의 국민이요 우리 민족을 통치하난 자는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이니 우리 민족은 영원히 다시 일본의 지배를 받지 아니할지라.

 

이러한 준비를 거쳐 1031일 천장 절을 전후하여 중국 상하이, 국내의 서울, 평양, 의주, 선천, 정주, 영변 등지에서 제2차 독립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먼저 1027일 서울 시내에는 앞에 언급한 임시정부 내무부 포고문 제1<남녀학생에게>, 2<상업에 종사하난 동포에게>, 통유 제1<천주교 동포여>가 살포됨으로 다음날부터 시내 고등보통학교 학생 약 800여명이 동맹휴학에 돌입하면서 그 파급효과에 힘입어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일 상하이에서는 대한민족대표의 명의로 된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어 111일 대한청년단 명의로 <적의 관공리 된 동포에게>라는 격문이 살포되자 개과천선한 한인 순사 40여명도 이에 감명을 받고 파업, 시위운동에 함께 참여하는 등 제2차 독립운동은 순조롭게 확대, 동참, 파급되어 갔다

 

이러한 국내의 제2차 독립시위운동에 있어서는 경기도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활동한 지암의 영향과 임무가 매우 컸다. 지암은 서울의 각 독립운동단체와 협동하여 제2차 독립운동을 추진하라는 임무를 받고 상하이 임정으로부터 대한민족대표 명의의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일층 분투노력하여 일본과 투쟁하라는 요지의 선언서를 수령, 휴대하고 국내로 들어와 이미 언급한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대한독립 애국단, 조선민족 대동단 등 10여 곳의 국내 독립운동단체에 전달, 연계하며 제2차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때 지암은 독립운동을 대규모로 조직하기 위해 나창헌 등과 함께 대동단 총재 김가진, 총무 전 협을 만나 동참을 권유하였는데, 취지에는 찬성하나 선언서의 명의가 국내 활동인사가 아니면 참여효과가 미약함으로 다시 선언서를 작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나창헌이 선언서작성을 위한 인선을 맡아 의왕 이강, 김가진, 전협, 백초월, 이신애 등 민족운동자의 동의를 받아 선언서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동년 1128일 서울시 안국동일대에서 태극기를 들고 선언서를 뿌리며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운동을 기도하다가 이신애 등이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국내에서의 애국 활동이 이처럼 제약을 당하여 운신의 폭이 그 만큼 좁혀지자 다름 방도를 강구하게 되었다. 즉 국외로의 탈출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지암도 1010일 대동단총재 김가진, 김의한 부자를 설득하여 동반하고 국내를 떠나 상하이에 합류함으로써 사실상 실제 독립시위운동의 전개과정에는 빠졌으나 제2차 독립운동의 실행을 위해 상하이와 국내 독립운동단체를 연계하는데 매우 중요한 통로와 고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 연통제의 조직과 활동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조국광복을 위한 제반 정책과 국내외를 통할할 수 있는 비밀조직으로서 연통제와 교통국을 국내외에 설치하여 조직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이것이 임정이 국내외를 통할한다는 실체이며 법통성의 현주소였던 것이다. 가령 서울 순화동에는 연통제 서울본부가 설치되어 상하이와의 연계 속에서 비밀 통로의 임무가 주어져 소기의 큰 성과를 올리기도 한 것이다. 이곳은 민강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비밀 장소였다.

 

연통제는 임정의 내무총장 안창호가 1919525일 미국으로부터 25천 불의 성금을 가지고 상하이에 도착하여 동년 7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령 제1호로 임시연통제령이 공포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업무가 개시되었던 임정의 주요 광복정책 중의 하나였다. 이 법령에 의하면 연통부를 나누어 각도에 감독부, 각 군에 총감부, 각 면에 사감부를 각각 설치하였고, 임정의 국내 지방행정기관으로 군인, 군속의 징모, 군수품의 조사 수렴, 시위운동의 계획, 애국성금의 갹출운동, 통신연락, 정보수집, 군자금모집 등의 업무를 광범위하게 수행하였다. 이는 19197월 설치된 이래 1921년말까지 줄기차게 국내외를 연결 운영하는 통로였으며, 경상남북, 충남, 제주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 설치되어 임정의 연락업무 등 행정조직과 절차를 원만하게 수행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중국 동북삼성 지역에도 별도로 총판부를 설치 운영하였는데, 이들 조직은 임정에 대한 선전, 통신, 기밀문서연락, 자금수합, 밀정보고, 친일파 총살, 독립운동의 근거지 확보, 인적 교류 등에 기여하였다. 이 조직에는 교사, 학생, 전도사, 승려 노동자 농민 등 지식인과 근로대중이 상당수 자발적으로 참여, 활동하였다.

 

이러한 우리나라 임정에만 존재, 통용하였던 독특한 연결 고리로서의 독립운동 방식인 연통제의 실시는 임정에서 국내로 파견된 특파원의 중요한 임무중의 하나였는데, 국내특파원으로 활동하였던 지암은 김인서 등과 같이 연통제에서 핵심적인 임무를 수행하였다. 지암은 그만큼 임정 내에서 신임과 역량이 인정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임정의 주요 지도자인 안창호에 의해 파견된 특파원들은 국내에의 선전과 시위운동 고취 주도 등을 주요 임무로 하였으나 국내의 연통제 조직에도 힘썼다.

 

이에 191998일 경기도 특파원으로 파견된 지암의 임무는 잠시 언급하였듯이 연통제의 조직과 활용사업을 추진하는 중대한 임무였던 것이다. 그리고 동년 10월 서울시에서 지암은 동지이자 승려인 송세호를 만나

 

조선독립운동의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상하이 가정부(임시정부)가 조선 내 각종 비밀단체와 연락하고 또 경성(서울)의 본부, 지방의 지부를 설립하여 호상 기맥을 통하고 상하이로부터 송치된 불온서(애국결의서 등)의 수수의 임에 당케 하기 가한 임무를 동행하기 위하여 연통제에 해당 되는 자를 시행하기 가한 경성에 연통본부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하고

 

라고 지적하였듯이 서울에서 상하이 임정과 국내 독립운동단체를 연결하는 연통제본부를 조직하였다. 지암에 의해 조직된 이 연통제는 임정에서 그대로 승인되어 지암의 계획과 의견에 따라 19191017일 임시 총판부를 설치하고 그 관제를 발포하였다. 당시 지암은 안창호와 독립운동의 대소사를 직접 협의, 논의하면서 긴밀한 관계에 있었는데, 서울의 연통부 조직인 총판부 설치에 관하여도 상의하면서 19202월 국내로 들어가기 직전 내무부의 연락 사명을 마치고 입국하고자 하니 지시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이러한 연통제를 주관하던 안창호와의 관계는 지암의 국내 연통제 설치에 대한 의견이 받아들여지는데 영향과 성과를 주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국내 연통제의 직원은 내무부 특파원으로 하여금 선임하게 하였다. 

 

이처럼 연통제에 있어 상하이 임정에서 파견된 특파원의 주요임무가 큰 비중을 차지하자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조직과 마찰이 생기기도 하였다. 즉 지암의 의견에 따라 서울에 연통제 임시총판부가 승인되어 설치되자 1920년 초 경성국민공회 대표인 서세충이 안창호를 찾아와 국민공회는 국내 각 단체의 제일 중심이 되는 비밀기관이며, 행정 총판부는 정부를 대리하여 국내 각 지방을 통솔할 수 있는 이상재(총재), 박중화(부총재), 양기탁 등 행정 총판부 직원과 및 각도 총감에 국내 유력한 인사를 망라하였음으로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국내에 임정이 설치한 기관과는 법적 제도적 문제가 있어 곤란하다고 거부하였다.

 

이렇게 특파원에 의해 설치된 연통제 조직과 국내 조직 간에는 협조가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잡음과 마찰도 있었지만 국내 독립운동단체가 임정의 연통제 업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이들 조직은 특파원에 의해 임정과 연계되었는데,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외교특파원으로 파견된 지암은 임정에 참여하고 활동을 위하여 국내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비롯한 대한독립 애국단,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등 여러 애국단체를 연결하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는 192037세 때 의열단원인 김상옥 열사의 서울 종로경찰서 폭파항쟁 의거에 연루되어 함흥감옥에서 3년여를 영오의 몸으로 고통을 받았던 일도 있었다.

 

 

. 지암과 전진원

 

 

  3.1혁명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철도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전진원은 남만주철도의 경의선 열차 소화물을 담당한 책임자로 기관차 기관사였다. 그는 근무 중 열차의 공무에 관계된 업무의 연락임을 위장하고 동삼성 안동역(, 단둥)으로부터 국내로 반입하는 물품에다 무기와 각종 기밀서류 선전문 등을 은밀히 들여와서 마포와 동막 일대 으슥한 철로 상에서 지암에게 전달하는 극비임무를 수행하였다. 나는 전진원의 아들(전병각)을 통해 처음 지암의 임무와 업적, 공로 등을 알게 되었다.

 

당시 동북삼성 안동시내에는 영국인인 죠지 쇼가 경영하고 있던 이륭 양행이 있었는데 이 건물 2층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의 비밀연락 장소였던 것이다. 겉으로는 사업체인양 위장하고 이륭 양행을 운영하였으나 이곳이 바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내지역을 연결시켜 중계하는 연통제의 중요한 접선거점이었던 것이다.

 

비밀 연통원인 전진원은 안동으로 와 죠지 쇼를 만나서 지령을 받거나 정보자료를 국내로 들여오고 국내에서의 극비정보 등은 다시 안동으로 반출하여 상하이 임정으로 연결되는 등 연통제의 연락원으로 비밀임무를 착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서울로 밀반입한 정보자료나 무기류 독립신문 도서 등을 그의 처소나 동막 등 철로인근에서 은밀히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지암에게 넘겨주거나 정보를 받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철도원인 자신의 신분을 십분 활용하고 조국의 독립투쟁을 위하여 철저히 위장한 채 위험한 비밀연락원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활동하였다. 이때 지암은 전진원에게 쪽지를 건네면서 특히 행동을 조심하여 발각되지 않도록 당부하였다.

 

또한 전진원은 당시 인천 주안역에서 역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리에도 밝고 그 지역주민들과도 친분이 형성, 교류되어 있는 관계로 자유롭게 왕래 할 수 있어 한성임시정부 수립당시 연락책임을 맡았고 자신도 직접 동참하였다. 이러한 전진원의 애국활동은 지암에 의해 알려졌다. 지암은 전진원의 큰 자제인 전 상호신용금고 사장을 역임한 전병각에게 보낸 서신에서

당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내로 보내는 일체 서류를 이륭 양행으로 보내면 전진원이 이륭 양행에 상용 업무 연락인 것처럼 위장하고 가서 직접 찾아오고 서울에 은밀히 안착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내가 즉시 전진원의 만리동 자택에 가서 주의를 살피면서 찾아다가 민족운동에 활용하면서 항일투쟁에 이용하였다.

 

라고 회고하였다. ,

 

전진원은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할 때 철도원으로 인천지리에 밝고 의협심이 있어 이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하였다. 나와 같이 청년외교단으로 파리강화회의 외교원을 파견할 목표 하에 조용주, 연병호, 송세호 등과 함께 힘을 쏟아 투쟁에 앞장섰다.

 

라고 회고하면서 생사를 건 일들을 조금도 주저치 않고 해냈다고 전진원의 인품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지암이 이미 1950년대에 이런 증언을 남겼던 것이다.

 

이처럼 지암과 전진원은 임정 연통제의 업무 수행을 위해 상호 긴밀하게 연계하며 활동하였다. 이를 통해 지암은 전진원의 애국정신과 비밀연락원으로서의 헌신적인 활동에 감동하여 전진원이라는 애국지사를 세상에 널리 알렸던 것이다. 이 사실은 작고한 전병각이 직접 나에게 여러 번 자료와 증언을 제공하였고 기록을 남겨서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한국일보 등 주요 일간지에 공개한 바도 있다. 아직도 전진원은 일제하의 행적관계로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지 않고 있다.

 

 

.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조직과 임정의 활성화

 

    

3.1혁명 직후에도 국내외에는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독립운동단체가 결성되었는데, 국내에서 국제외교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195월 초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조직되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청년외교단은 조소앙의 국제외교활동에 대한 후원과 임정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19194월부터 상하이에서 조용주, 연병호 등에 의해 계획되어지고 이들이 국내에 들어와 안재홍 연병호 이병철 등과 연결되면서 서울에서 결성된 외교전문단체의 성격을 띤 항일 독립운동단체였다.

 

국내외를 연결한 청년외교단은 서울에 중앙본부를 설치한 뒤 국내와 상하이에 지부를 두고 그 조직과 활동을 확대해 나갔다.

 

중앙부: 총무-안재홍, 나창헌, 이병철

외교부장-김연우 재무부장-김태규 편집국장-이의경

간사장-김홍식 외교원-조용주, 연병호, 유흥식

외교특파원-이종욱, 조소앙

국내지부: 대전지부, 회령지부, 충주지부

해외지부: 상하이지부-지부장 송세호

 

이에 중앙부의 내용을 보면 외교관련 업무와 인원이 비중을 차지함으로 청년외교단은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단체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청년외교단을 조직할 때 조용주, 연병호 등이 독립운동의 실천방략 중 외교활동과 정략이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전문단체임을 강조하였던 데에서도 그 조직의 필요성과 정체성을 알 수 있겠다.

 

이의 단원들은 40대의 지암과, 조소앙을 제외하고는 대개 20대 청년들이었다. 안재홍, 이병철 등 중앙기독교청년회 활동을 하고 있던 기독교계 인사들이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불교계에서 강원도 월정사의 스님인 지암과 송세호, 용창은 등이 함께 참여하였다.

 

청년외교단은 조소앙의 외교활동을 후원하는 한편 상하이에 해외지부를 설치하고 외교원의 해외파견을 추진하여 임정과 밀접한 연계 속에서 지원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지암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외교특파원으로 상하이에 파견되어 19198월 청년외교단이 모금한 독립운동자금 550원을 상하이 임정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참가 단체 조사표, 피해의사조사표, 일본반항행위조사표 등을 작성하여 임정에 보고하였고, 군자금 모집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청년외교단의 활동은 자체적인 독립운동과 함께 임정의 연통제 임무를 대행한 것이라 하겠다. 청년외교단은 임정 지도층에 제시한 건의서에서 독립운동의 대단결을 촉구하면서 실행방안으로는 임정을 중심으로 해외독립운동을 결집, 연결시키고, 국내에서는 임정을 지지하는 각 민족운동단체들이 연합, 확대할 것을 제의하고 있다. 이에 임정은 청년외교단의 건의에 따라 임정과 청년외교단을 연계하여 임무를 수행할 단원을 선임해서 파견하여 협의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따라 상하이에 파견된 청년외교단의 외교특파원이 곧 지암 스님이었다.

 

또한 청년외교단은 국내에서 항일독립정신을 보급, 선전하기 위한 기관지로 <외교시보>를 발행하였고, <국치기념경고문> 등 다수의 선전물을 배포하여 항일투쟁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갔다.

 

한편, 청년외교단은 여성독립운동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연계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애국부인회는 19194월 청년외교단의 지도로 혈성단애국부인회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와 통합하여 성립된 것으로 연통제 업무를 대행하면서 임정에 군자금을 모집하여 후원하였다.

 

또 청년외교단은 대한적십자회의 활동과도 연계되었는데, 1905년 창설된 적십자회의 활동은 일제 강점으로 중단되었다가 19199월 지암과 이병철에 의해 상하이의 대한적십자회의 국내지부로서 대한적십자회 대한총지부가 설치되면서 재개, 운영되었다. 적십자회는 긴급한 상황에서 구호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외교활동의 전문조직인 청년외교단과 성격상 거리가 있으나 청년외교단의 외교특파원인 지암이 상하이 대한적십자회와 관련이 있었고, 적십자회도 선전활동 등을 통해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한 독립운동단체였음으로 연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지암은 적십자회 대한총지부의 명예회원 겸 간사로 구휼과 봉사의 주도적인 임무를 수행 하면서 청년외교단의 독립운동을 더욱 강화시켜 나가 독립운동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것 역시 그의 큰 공로였다.

 

 

. 대동단 단장 김가진의 상하이 임정합류

 

 

  지암은 왕가의 이강과 한말의 대신 출신의 김가진을 상하이로 탈출시켜 임정에 참여케 하면 임정의 대외적인 위상과 관심이 보다 높아질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들의 상하이 망명을 계획, 추진하였다. 당시 일제는 임정이 무뢰배와 하층민들이 모여 만든 불온단체라며 폄하하고 있어 농상공부 대신, 중추원 의장 등을 지낸 바 있는 전 고위관리 김가진을 임정에 참여시키면 대내외에 대한 임정의 위상을 제고하고 국민들을 끌어 들이는데도 큰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라 보고 김가진의 상하이 망명을 적극 추진하였던 것이다.

 

이에 지암은 대동단의 총무 전협에게 이강과 김가진의 상하이로의 망명을 협의하였는데, 이들의 동시 망명은 현실적으로 위험이 있어 차선책으로 우선 김가진 대동단총재의 망명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의 경성특파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던 지암은 19191010일 김가진과 그 아들 김의한을 대동하고 경의선 열차를, 안전을 위해 서울역이 아닌 수색역에서 타고 신의주를 거쳐 안동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고, 1029일 상하이 임정에 도착하여 석오와 백범 등의 환영을 받았다. 동농은 석오 백범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망국대부 김가진이 죽지 않고 이곳을 왔습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의 상하이 망명과 임정으로의 합류는 대내외적으로 임정의 위상과 입지를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탐지하고 충격을 받은 조선총독부는 김가진을 회유하고 협박하기 위하여 인척을 상하이로 보냈다. 이러한 사실은 안창호의 일기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종욱군이 래방하야 김가진군과 분거할 사와 및 생활 곤란함을 진하고 또 김가진군 처소에 정병조선간전 등 적탐이 래왕한다하다.

이 같은 경로에 따라 김가진의 상해 망명을 주도한 지암은 김가진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을 돌보아주는 한편 안창호에게 일제 밀정 선우갑, 김가진의 며느리의 사촌 오빠인 정필화 등이 접근하는 사실을 보고하자 임정은 그들을 철저하게 보호해 주었다. 당시 임정 경무국장이던 김구는 정필화, 선우갑을 체포하여 일제가 파견한 첩자라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어 정필화는 교수형에 처하였으나 선우갑은 감시 소홀을 틈타 국내로 도주하였다.

 

한편 지암의 도움으로 상하이로 망명한 김가진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자신과는 사돈관계인 이강의 상하이 망명이 임정에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지암에게 이를 상의하였다. 이에 지암은 다시 국내로 들어와 대동단 총무 전협을 만나 이강의 탈출계획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자 전협은 대동단에서 그 임무를 맡겠다고 쾌히 수락하였다.

 

대동단은 지암의 계획으로 이강의 상하이로의 탈출공작을 추진하여 19191110일 이강일행이 변장한 채로 수색역에서 경의선 안동행 열차를 탔다. 그러나 김가진의 상하이 망명으로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일경은 이강의 행방불명을 탐지하고 비상령을 발동하였다. 결국 이강은 안동역에 도착할 무렵 일경에게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고, 이 사건으로 대동단도 붕괴되고 말았다. 이때 지암은 이강의 상하이탈출사건이 발각되기 전 상황을 알아차리고 상하이로 탈출하여 일경의 체포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암은 1920629일 청년외교단의 활동으로 체포되어 대구지방 법원의 궐석판결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 뒤 출옥한 지암은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하면서 불교를 발전 육성하면서 한편으로 송세호와 함께 후방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애국활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하였다. 

 

광복을 20여일 앞둔 1945723일 그는 동지 이종린, 안정식, 정인익, 학전헌 등 수십 명과 같이 국민동지회를 조직하는데 동참한 일도 있는 것을 보면 그는 3.1혁명시기로부터 광복 때 까지 근 30여 년 간을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항일독립운동에 동참한 진정한 애국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불교계를 대표하여 총독부와 눈높이를 함께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조로 일관한 조경한 임정 후기 국무위원이 지적하였듯이 항일 투쟁하다가 풀려났음에도 갑종요시찰인으로 8.15시까지 일경의 엄중한 감시를 받아 왔던 것이다.

 

 

. 지암에 대한 친일논란 문제

 

 

  불교계를 대표하여 상하이 임정을 중심으로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지암은 일제말기 그 행적에 있어 친일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지암에 대해 친일 론을 주장한 임예봉은 ?친일불교론?에서 일제시기 대표적인 친일파라고 비판하고 있다.

 

1919년 무렵 그가 항일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끝까지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1920년대 중반에 변절하여선 항일 후 친일의 전형적인 변절자에 해당하는 이종욱, 일제하의 조선불교계를 왜색불교 황도불교로 몰아넣으며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전적으로 협력하였던 화려한 친일업적을 자랑하는 불교계 제1, 아니 초특급 친일파였던 이종욱 운운이라고 폄하하였으며 또, 지암 이종욱의 친일은 조선불교계 친일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친일행적과 조선불교 조계종의 성립 그리고 종명의 제정과 그 존속 여부 등은 재고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현 조계종이 일제 당국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 하 애국운동에 평생을 몸 바쳤던 스님 지암을 친일파라고 거침없이 주장하는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그는 항일투쟁으로 인하여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이후 월정사 부채문제와 총본산 건설 운동 및 조계종 창립과정 일체를 마치 변절자의 종권 욕심에서 기인한 행위인 것처럼 마구 무책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지암이 출옥한 이후 월정사를 구하고 종단의 재건을 위해 한 몸 바쳐 일제와 타협함으로써 그의 몸체인 불교를 구하려는 애착심에서 일제당국자와 눈높이를 맞춘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대강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정리한다.

 

* 19368월 종회의장 자격으로 남차랑(南次朗; 미나미 지로) 조선 총독 부임환영 집회 참석

* 1937731일 본산 주지대표로 조선신궁에서 열린 국위선양 무 운장구 기원제 참석

* 193786일 불교계 시국대응강연회를 조선총독부와 협의하여 기획, 사회자로 참석

* 1937112일 북중국 황군위문을 위한 회의에서 임시의장에 선 출, 단체로 신사참배

* 전쟁 출동부대 환송, 신사참배 등 친일행사에 불교계대표로 참석

* 19387월 국민정신 총동원조선연맹창립총회 출석, 보고 제 참례 차 조선신궁에 참석

 

지암은 19372월 총본산 건설운동이 시작되면서 일제 정책에 본격적으로 협력하였는데, 당시 그는 총본산건설 31본산 주지대표로서 총본산건설을 위한 총책임자로 실질적인 주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는 일제 당국의 협력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문제였으므로 총독부 정책에 협력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불가항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고 본다.

 

따라서 일부 친일문제 연구자들이나 지암을 잘 아는 인사들에 의해 지적되었듯이 이종욱의 적극적인 친일은 종교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는 한국 불교계의 책임자로써 계획된 교계발전 사업을 달성하기 위함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격렬하였던 과거의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잠시 은폐하려는 위장 전술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은 은밀히 민족 독립 운동가를 지원하였고 임정의 특파원이 한국에 오면 그들을 숨겨주면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뒷받침하는 열성도 보였다. 임정에 군자금을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인촌(김성수)이 임정의 파견원이나 특파원이 재동의 자택을 방문하면 일부러 금고문을 열어 놓고 자신은 슬쩍 외출해 버리는 그런 위장 전술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얼마든지 있는 대로 가져가라는 그런 음성적 자금 지원의 경우와도 같다고 지적한다.

 

지암은 표면으로 적극 친일을 하여 환심을 사면서도 한편 임정과 계속 연계하면서 군자금을 몰래 송금하였다는 친일문제 전문가의 반론이 제기되고 있음을 유의할 일이다.

 

일제말기 조계사 창건과 조계종의 창립은 지암 개인의 명예나 이윤을 위한 사업문제가 아니라 일제의 한국불교 장악을 근본적으로 저지하기 위한 항일적인 불교계의 자구(自救)를 위한 공동과제였다. 이때 불교계의 책임자가 눈치만 살피면서 일제 당국의 정책에 협력하지 않았다면 조계종의 중흥은 사실상 어렵고 성사되기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지암의 내키지 않는 일제 협력은 총본산건설과 관련된 불교계 숙원과제를 성취, 달성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고육적인 불가분의 선택이었다. 그러므로 지암의 친일관련 행적은 개인적인 친일이 아니라 교단이라는 종교단체를 살리고 보호하고자한 공적인 처신의 결과였다. 다시 말하면 불교 교단에서 맡은 직책과 관련된 업무내용을 수행하기 위한 불가항력적인 선택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8.15 광복 후 지암을 아는 인사들은 지암의 현실적인 친일행적과 항일활동에 관해 합리적이고 사실적으로 솔직히 증언하고 있다. 독립 운동가이며 광복회장을 역임한 유석현은 다음과 같이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

 

이종욱 스님은 총독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임정과 연락을 갖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밀송하고 국내의 동지들과 회동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43월에는 강태동, 유석현, 이응진, 김현국 등과 함께 군사봉기를 계획하였다. 그때 일본군과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서 게릴라활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자금조달의 책임을 스님이 맡고 유석현씨는 무기구입의 책임을 맡았었다.

 

또한 일제말기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던 봉선사 조실이며 조계종 원로의원인 운경대종사도 지암의 친일논란에 대하여 전적으로 불교계를 살리기 위한 헌신적 고육책에서 연유하고 있음을 양심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지암 이종욱 스님과도 평소에 교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진 큰스님 운경은, 당치않은 소리, 이종욱 스님만큼 확실한 민족주의자도 드물다.

 

임정에 군자금을 보내주고 있다는 이야기도 지암에게 직접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때가 해방 10년 전 쯤으로 기억되는데 직접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적선을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월정사와 상원사를 복구하고 중앙 교무원 운영을 위해 일본사람들과 친한척하며 교섭을 한 것을 사리판단도 못하고 친일이라고 매도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그리고 불교학자 조명기(전 동국대총장)해방이 될 당시의 총무원장이 바로 월정사 이종욱 스님이다. 그 스님은 종단일도 잘 봤지만 어떻게든지 독립운동 자금도 밀송을 하는 등 사실 보기 드문 애국자였다. 그런데 해방이 딱 되니까 일제 시대에 일보던 사람들은 덮어놓고 일본인과 친했다고 해서 친일파라 한다. 이종욱씨만 해도 비밀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주는 등 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직책이 총무원장이라 사무적으로 당국과 절충을 해야 하니 꼼짝없이 앞잡이처럼 오해를 받게 된 거지요.

 

라고 지암의 현실적인 공무집행의 어려운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지암의 친일논란은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상황에 근거를 두고 검토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이는 지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불교계 보존과 중흥이라는 사명감의 결과로서의 판단차원에서 평가 심판되어야 마땅한 문제임을 새삼 인식할 필요가 있는 어려운 과제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3월에 지암은 강태동, 이응진, 김현국, 유석현, 김재호 등과 같이 탑골공원 뒤편 송죽원에서 수차 밀회를 하고 후방교란 작전을 펴는 동시에 정쟁이 끝난 후에는 교전단체로 인증을 얻어 강화회의에 우리 대표를 참석시킬 목적으로 국내에서 무장 거사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하기로 은밀히 결의하였다. 이때 지암은 재정 책임을, 유석현, 김재호 등은 무기 조달의 책임을 담당하기로 상약한 뒤 행동계획까지 다 마련하였다. 그 당시 이들은 거사 일자를 1945918일자로 정하고 김재호, 김시현 동지들을 중국국민정부에 파견하여 무기를 반입토록 하였고 지암은 월정사, 묘향사, 석왕사 등지에서 군자금을 마련하도록 하는 등 구체적으로 행동 계획이 신천에 옮겨졌었으나 일제가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였으므로 이는 실현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8.15 당시 부일 혐의로 3년간의 승권 정지처분을 받았으나 동 11월에 김구가 귀국하여 지암의 자금조달이 없었다면 임정이 유지될 수 없었다.’라고 증언하여 그 혐의가 다 풀렸다. 196911월 화엄사에서 입적하니 향년86, 법랍 74세였다. 국립현충원에 안장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20012월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는 조선불교조계종 초대 종무원장을 역임한 지암의 항일 민족운동 행적을 기록한 자료 3점을 공개하였다. 이는 지암이 직접 기록하였다고 한다. 대동단 활동의 동기, 위국선열 초혼문, 백중축원문 등이 그것이었다. 이 자료에는 지암의 백범 도산과의 인연과 활약상이 회상형식으로 자필로 증언되어있다.

그는 1977년 우리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 결 론

 

 

  지암 이종욱은 향리에서부터 3.1혁명에 참가함을 계기로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동년 3월초 매국노(을사오적)를 총살, 제거하기 위해 조직한 <27결사대>에 적극 참여하여 동지들과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꾀하여 나갔다.

 

그는 3.1혁명 직후 공공정부형태의 통제적 사명을 띨 기구의 출현을 갈망함으로 한남수, 김사국, 홍면희, 이규갑 등과 함께 13도 대표로서 서울과 인천을 왕래하며 한성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한성임시정부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지암은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상하이로의 망명을 모색하고 있던 중, 국내에서 결성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그 외교특파원으로 선임된 뒤 상하이로 파견되어 임정에서 참사 의원 등 주요직책을 맡아 활동하였고, 도산의 주선에 의한 대한적십자회의 자유대 대원으로 참여함으로 안창호와 인연이 되어 이동녕 등 30여명 중심의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19191945)에 참여하였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지암은 내무부 특파원에 임명되어 함경남도 특파원, 경기도 특파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제2차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및 대한독립 애국단, 조선민족 대동단등과 임정을 연계하는 파견원으로 애국활동을 계속하였다. 특히 대동단 김가진 단장을 동반하여 상하이로의 망명을 주도하였고, 평안남도 외 12도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연통제실시의 임무를 제한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리고 임정 내 지방선전부와 임시공채관리국이 설치되자 지암은 지방선전부 선전대원 및 임시공채관리국 공채모집위원으로 임명되어 특파원의 임무를 계승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임정 내무부 참사, 임시의정원 강원도의원으로 선임되어 임정의 내외 연결의 통치활동에 있어 실질적인 임무를 수행하였다. 법통성이 임정에 있다면 그를 창조한 분이 곧 지암스님이었다.

 

그러나 김상옥열사의거에도 관여한 지암은 청년외교단의 활동으로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 지암은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하면서 이후에도 송세호와 함께 후방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지암은 19372월 총본산 건설운동이 시작되면서 일제 정책에 타율적으로 협력함으로 친일행위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러나 지암의 일제 협력은 총본산건설과 관련된 불교계 과제를 성취하기 위한 공공의 현실적인 현명한 선택이었다. 지암의 친일관련 행적은 개인적인 친일이 아니라 교단을 보호하고 교단에서 맡은 직책과 관련된 내용일 뿐이었다. 따라서 지암을 잘 아는 인사들에 의해 그의 친일은 불교계의 책임자로써 교계사업을 달성하기 위함이자 자신의 독립운동을 은폐하려는 위장 전술이었음이 김구 조경한 등 임정을 지키던 독립운동가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지암은 적극 친일을 하는 한편으로도 임정과 계속 연계하면서 군자금을 은밀히 모아 송금하였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그러므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국내외에서 지암의 지속적인 항일활동은 분명히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평가되어 폄하되지 않아야 한다. 그의 불가피한 선택적인 친일문제는 맹목적이고 지탄성토를 위한 친일논란이 아닌 불교계를 살리려는 고차원에서 재인식되어야 하는 고민과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그는 90평생 중 국내외에서 30여 년간 민족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인 뛰어난 애국지사로 우리 사학계는 평가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마치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 16명 중 청오 정춘수(鄭春洙) 목사가 친일하였다고 성토하고 있는데, 실은 일제 강점 하 감리교 총감독으로 기독교를 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경우와도 유사하다고 본다. 그는 국민들에게 공출이나 신사참배는 요구하였지만 개인적으로 정부나 사회단체의 책임자 같은 호화로운 벼슬은 하지 않고 오로지 교계를 위하여 목자로서 80평생을 지낸 경우를 보는 것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국문초록  

  지암 이종욱은 3.1혁명에 참가함을 계기로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매국노를 제거하기 위해 조직한 <27결사대>에 적극 참여하여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3.1혁명 직후 13도 대표로서 한성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 국내에서 결성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외교특파원으로 선임, 상하이로 파견되어 임정에서 참사 의원 등 주요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지암은 내무부 특파원에 임명되어 함경남도 특파원, 경기도 특파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제2차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대동단 김가진 단장을 동반하여 상하이로의 망명을 주도하였고, 평안남도 외 12도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연통제실시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임정 지방선전부 선전대원 및 임시공채관리국 공채모집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임정 내무부 참사, 임시의정원 강원도의원으로 선임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청년외교단의 활동으로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출옥한 지암은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지암은 총본산 건설운동이 시작되면서 일제 정책에 타율적으로 협력함으로 친일행위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러나 지암의 일제 협력은 총본산건설과 관련된 불교계 과제를 성취하기 위한 공공의 현실적인 현명한 선택이었다. 지암의 친일관련 행적은 개인적인 친일이 아니라 교단을 보호하고 교단에서 맡은 직책과 관련된 내용일 뿐이었다. 따라서 그의 친일은 불교계의 책임자로써 교계사업을 달성하기 위함이자 자신의 독립운동을 은폐하려는 위장 전술이었음이 김구, 조경한 등 독립운동가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국내외에서 지암의 지속적인 항일활동은 분명히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평가되어 폄하되지 않아야 한다.

    

 

주제어  

대한민국임시정부 / 27결사대 / 한성임시정부 / 특파원 / 안창호 / 용창은 / 전진원 / 김가진 / 연통제 / 2차 독립운동 / 대한민국청년외교단 / 김구 / 조경한

    

      

Abstract

 

The Study on provisinal government of Republic of Korea

and Lee, Jong-wook

 

 

Lee, Hyun-hee

(Prof. Emeritus, Department of Korean History Studies,

Sungshin Woman's Univ.)

 

 

Jiam waged resist-Japan movement that remove 3.1 racial movements after this traitor back. He took part to establish Hansung provisinal government at domestic, and participated the provisinal government of Republic of Korea.

While he propels the second independence movement, mission as correspondent in domestic and acted.

But supported independence movement continuously after come out for was kept in prison for 3 years because is arrested in the Japan-made police.

Nevertheless, Jiam is getting that did pro-Japanese activety. But his pro-Japanese activity was thing related to duty keeping as highest executive of Buddhism organization.

His pro-Japanese activity was activity to hide own independence movement. Therefore, Jiam's anti-Japan activity is more objective and will have to be evaluated right.

 

 

Key Word  

3.1 racial movement / Hansung provisinal government / The provisinal government of Republic of Korea / Correspondent / Yeuntong system / A death defying organization / Deadongdan / pro-Japanese activ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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