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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사에서 불교 친일화의 기수로, 지암 이종욱 스님(李種郁, 1884∼1969)

草霧 2013. 12. 5. 10:33

 

 

 

종교

 

이종욱(李種郁, 창씨명 廣田種郁, 18841969)

                            

현 조계종의 산파역할을 한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 지암 이종욱 스님

 

 

항일투사에서 불교 친일화의 기수로

 

 

 

1954년 8월 선학원에서 열린 전국비구승대표자회의

 

 

지암화상

1937년 총본산건설위원회 31본산주지대표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

 

이종욱(李鍾郁, 일본식 이름: 廣田種郁(히로다 쇼이쿠), 1884년 ~ 1969년)은 일제 강점기불교 승려이다. 초년에는 항일 운동을 했지만 나중에는 일제에 협조했고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과 동국대학교 이사장도 지냈다. 호는 지암(智庵)이다.

 

강원도 평창 출신으로 13세에 출가하여 오대산 월정사에서 승려 생활을 했다. 월정사 승려로 있을 때인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고, 이종욱은 만세 시위에 참가했으며 이탁의 무장 단체인 27결사대에도 가입했다. 3·1 운동의 결과로 한성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강원도 대표로 참가했으며, 상하이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설치된 임시의정원에서도 강원도 대표를 맡았다.

 

그러나 이종욱은 1920년대 중반부터 다시 국내 불교계에서 활동을 했으며, 이때부터 광복 시점까지 일관된 친일 행적을 남겼다. 해외로 망명까지 했던 독립 운동가에서 친일파로 전향하게 된 계기와 정확한 시기는 분명치 않다. 어쨌든 그는 1923년에는 상하이에서 국내로 돌아와 월정사에 복귀해 있었고, 1930년 조선총독부의 임명을 받는 월정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그해 불교계 대표격인 종회(宗會)의 의장으로도 선출되었다.

 

이종욱이 일제에 겉으로 드러나도록 협조한 것은 1936년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의 부임 때 불교계를 대표하여 미나미 환영식에 참가한 무렵부터이다. 1937년 31개 본산의 주지들이 모여 총본산(조계종)을 설립하기로 했을 때 총본산건설위원회 대표가 되었는데, 당시 이처럼 불교계의 수장으로 인정 받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조선총독부의 후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일본군을 위한 기원법회나 시국강연회를 열어서 적극적으로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협력했다. 《신불교》 등의 잡지에 친일 논설을 싣기도 했다.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단체 국민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도 빠짐없이 가담했다. 이처럼 적극적인 친일 승려로 오래 활동했기에 광복 이틀 후에는 1941년부터 맡아온 종무총장 직에서 사퇴해야 했으며 승권 정지의 징계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종욱은 이후 우익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반탁 운동에 뛰어들면서 다시 불교계의 원로로 복귀했다. 1950년 고향인 평창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1년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 1952년 불교계 대표인 중앙총무원장 자리로 돌아왔다. 이종욱이 동국대학교 이사장으로 있을 때는 친일 승려로 유명한 권상로가 총장으로 기용되기도 했다.

 

이종욱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으나, 1993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친일 경력이 있는 독립유공자들을 대상으로 재심을 할 때 재심 대상자 8명 중의 하나로 명단에 올랐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현 조계종을 사실상 창설한 인물인 그를 겨냥한 끊임 없는 친일파 논란은 불교계에서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반박하기 위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동국대에서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된 박희승의 《지암 이종욱 연구》(동국대 불교대학원, 2000) 는 이종욱의 대동단 가담이나 김구와의 만남 등에 대해 서술하면서 항일 투사로 평가하고 있고, 친일 행위 자체가 고도의 위장전술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2010년 서훈이 취소되었다.

건국훈장 독립장 - 1977년 서훈, 2010년 취소

제2대 총선국회의원(강원 제8선거구)2대국민회
  • 월정사
  • 조선임전보국단
  • 조선불교근로보국대
  • 한용운
  • 이갑성
  • 이춘성
  • 최남선
  • 송만공
  • 김법린
  •  

     

    그는 파고다공원의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3월 3일에는 이탁(李鐸) 등과 함께 '27결사대'의 대원으로 매국역적을 제거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월 23일에는 한성임시정부에 참가하였으며, 4월에는 상하이로 가서 상해임시정부에 동참하여 청년외교단과 애국부인회에 관여하여 체포는 되지 않은 채 궐석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0년 이종욱은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강원도 대표)이 되어 활동하다가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함흥감옥에서 3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이종욱은 1937년 31본산주지회의에서 다시 의장으로 선출되어 총본산 설립을 의결하고 그 자신은 총본산건설위원회의 31본산주지대표로 취임하였다. 그는 강원도 대본산 월정사의 주지로서 31본산주지대표가 되자 실질적인 조선불교의 종권을 한몸에 장악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조선불교의 교권을 좌우하게 되자 총본산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중일전쟁 발발 이후의 전시체제에서 불교계의 친일기수가 되어 일제당국의 황민화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협조하면서 젊은 날의 항일투사에서 전적으로 변절하여 골수 친일파로 전락하였다.

     

     

     

     


    이종욱은 이와 같이 그 자신이 주도하여 일본군을 위한 무운장구 기원제와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중국으로 출정하는 일본군을 송영하는 등의 행동으로 조선불교계의 친일기수가 되었을 뿐 아니라 불교 언론에 친일 시사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불교시보』에 4편, 『신불교』에 7편의 친일논설을 발표

     

     

     

     

     

     


     


     

    지암화상 이종욱(1884 – 1969)

     

    항일투사에서 골수친일파로 전락

    월정사 강원(講院)에서 불교 내전(內典)을 강의하며 감무(監務)의 소임을 보고 있던 이종욱이 항일투쟁에 뛰어든 것은 1919년의 3·1 독립만세 운동 때 부터였다.

     

    그는 파고다공원의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33일에는 이탁(李鐸) 등과 함께'27결사대'의 대원으로 매국역적을 제거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23일에는 한성임시정부에 참가하였으며, 4월에는 상하이로 가서 상해임시정부에 동참하여 청년외교단과 애국부인회에 관여하여 체포는 되지 않은 채 궐석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0년 이종욱은 상해임시정부의정원 의원(강원도 대표)이 되어 활동하다가 의열 단원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함흥감옥에서 3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이종욱은 이 공적으로 훗날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받았다(1977). 그리고 {독립유공자 공훈록} 5(국가 보훈회, 1988, 746)에 의하면 그는 출옥 후에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하면서 송세호 (宋世浩)와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지하에서 활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1920년대의 범어사. 18~19세기 전국의 사찰에서는 각종 계가 번성하면서 조선후기 사찰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시켰다. 

     

    이종욱은 출옥 직후라고 여겨지는 1923년부터 월정사의 사채 정리위원이 되어 이 난제를 무사히 해결하고는 그 공로가 인정된 탓인지 1926년에는 중앙교무원의 사무원이 되었고, 1927년에는 월정사의 감무로 복직하였으며, 1929년 각황사에서 개최된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에서의 안심사 위원 7인 중 1인으로 선정되었고, 대회 부의장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에는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으며" 라고 되어 있어 그의 복역 사실도 현시점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월정사 부채 문제를 정리하고는 일제 당국의 신임을 얻어 강원도 대본산인 오대산 월정사의 주지에 취임하였다. 이렇듯 왕성한 활동력을 보인 이종욱을 독립 공훈록에서 월정사에 은거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사실과 진실의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이종욱은 19303월에 종회(宗會)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5월에는 일제 당국이 항일투사 출신의 이종욱을 회유하고 조선 불교에 은덕을 입혀 마음대로 조정하려는 의도로 제1급 친일파들인 후작 박영효*, 남작 이윤용, 자작 민병석*, 자작 윤덕영*, 자작 권중현* 등의 중추원 고문들을 역원으로 앉히고 조선총독 사이토 (齊藤實)와 정무총감 등의 고관들과 열렬한 친일명사 이완용*, 친일 승려들인 31본사주지들을 발기인과 평의원 및 회원으로 하는'오대산 석존정골탑묘찬앙회'를 발족시켰다.

        

     

    제 3대 조선총독 ‘사이토 미노루’   

     

     

    조선총독과 정무총감이 자신들이 통치하는 식민지에서 한낱 불교 신행단체의 회원으로 가입한 것은 이 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또한 이 사실을 보더라도 식민통치당국이 조선불교와 이종욱을 회유하고자 얼마나 고심했는가를 역력히 알 수 있다.

     

    이종욱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서서히 친일파로 경사되어 갔고 그의 직접적인 친일 행적은 제7대 조선총독이 부임할 때 공공연하게 밖으로 드러났다.

     

    1936826일 미나미 (南次郞)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자 이종욱은 종회의장 및 월정사 주지 자격으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이사인 김상호와 황금봉 그리고 보현사 주지 김법룡, 사간정 (司諫町) 유 점사포교소 대표 박대륜, {불교시보}의 발행인 김태흡* 등과 함께 경성역으로 마중을 나가 미나미의 총독 부임을 축하하였다.

     

    이종욱은 193731본산주지회의에서 다시 의장으로 선출되어 총본산 설립을 의결하고 그 자신은 총본산건설위원회의 31본산주지대표로 취임하였다. 그는 강원도 대본산 월정사의 주지로서 31본산주지대표가 되자 실질적인조선불교의 종권을 한 몸에 장악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조선불교의 교권을 좌우하게 되자 총본산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중일전쟁 발발 이후의 전시 체제에서 불교계의 친일기수가 되어 일제 당국의 황민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 협조하면서 젊은 날의 항일투사에서 전적으로 변절하여 골수 친일파로 전락하였다.

     

     

     

    조계종 재건주 이종욱스님은 항일파 친일파?

     

     

     

    조계종단을 재건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조선불교조계종’(조계종의 옛이름)의 초대 종무총장(총무원장의 옛이름) 이 지암 이종욱 스님(1884~1969)이다.

     

    그는 항일운동가라는 영광의 월계관과 친일반민족행위자란 굴욕의 굴레를 동시에 쓰고 있는 인물이다. 13세에 출가한 지암은 오대산 월정사에 머물던 중 3·1운동을 계기로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을사오적 매국노를 제거하기 위해 조직된 27결사대에 참여한데 이어 한성임시정부 수립 때 불교계 대표로 함께했다. 이어 상해임시정부 특파원으로 국내 항일조직과의 연락과 정보 수집, 독립자금 모금 등을 담당하며 내무부 참사, 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다 일경에 체포돼 함흥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지암은 1930년대 후반 조계종 총본산 건설운동 때는 31본산주지대표를 맡아 태고사(현 조계사)를 창건하고 조선불교 조계종을 재건했다. 또 농지개혁 조치로 몰수당할 위기에 처한 전국 사찰의 토지를 돌려받는 것과 함께, 조계종립대학인 동국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는데도 기여도 했다.

     

    하지만 지암은 총독부의 인가로 1941년 5월1일 출범한 조계종의 종무총장에 히로다 쇼이쿠란 창씨명으로 취임했다. 그는 그해 12월 8일 대동아전쟁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전 조선 1500여개 사찰에 (일제의) 전쟁승리를 위한 기도법회를 열게하고, 전국사찰에 군용기 헌납기금 5만3원을 내도록 본말사별로 할당해 징수했다. 이런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지암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됐다.

     

    ‘지암의 친·반일 논쟁’을 재연시키고 있다. 저자는 총무원 불학연구소 연구과장으로 재직할 당시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으로 국가훈장을 받은 이종욱 스님이 친일파로 비판 받는데 대한 조계종단의 의견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후부터 지암을 연구해왔다고 한다. “지암이 조선 불교도의 오랜 염원인 총본산 건설과 교단 재건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은 채 31본산 주지대표와 종무총장을 맡아 오욕을 감수했다”고 주장한다. 지암이 일제말 한 친일행위도 실은 독립운동을 위한 ‘위장 친일’이었다는 변호다. 지암이 은밀히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조달하고, 일제말기인 1944년에도 국내에서 독립운동가들과 미밀부장봉기를 모의하였고, 백범 김구가 귀국하자 마자 제일 먼저 찾은 인물이 지암이었다는 점 등을 ‘위장 친일’의 근거로 들고 있다.


     “무작정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여 다른 모든 성과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라며 “지암 스님이 남긴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지암에 대한 정부의 서훈은 취소돼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사리도 올해 대흥사로 이전됐다.

    조현 기자 cho@hani.co.kr

     

     

     

    총독부 출입 잦았던 친일 전향자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의 모습.

    일제는 남산에 있던 ‘국사당’ 을 헐어 인왕산으로 옮기게 하고

    그 자리에 일본신사를 세웠다. 국사당은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이었다.

     

    강석주 스님의 {불교근세백년} (중앙일보사, 1980)에 의하면 이종욱의 총독부 출입은 월정사의 부채 정리 때부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어 총본산건설을 추진하면서 1937년에도 4월부터 7월 초 사이에 8회나 총독부에 출입하였고, 중일전쟁 발발(1937. 7. 7) 후에는 9월까지 무려 15회나 총독부를 방문하였다. ({신불교} 3, 1937. 5. 1에서 제10, 1938. 2.1까지의 종합)

     

    또한 그는 1938년에 전반부에만도 12회나 총독부를 출입하였는데 중일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주로 당국과의 시국대처에 관한 일로 총독부를 부지런히 드나들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이종욱은 중일전쟁이 시작된 지 1주일 만인 715일에는 총본산 건설위원 이자, 송광사 주지인 임석진과 교무원 재무이사인 황금봉을 데리고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제 참례 차 조선신궁 (일제가 설치한 조선최고의 일본신사)에 다녀왔다.

     

    그 이틀 뒤에는 일제의 침략전쟁인 중일전쟁에 협력하기 위하여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제를 조선 사찰에서도 시행하는 건에 대해 총독부를 방문하여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김대우*와 협의하였다.

     

    이 날의 협의로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비상시국을 극복하기 위하여, 전국31개 본사는 725일과 812, 각 말사와 포교소는 811회 오전5시를 기하여 일제히 국위선양·무운장구 기원제를 봉행하기로 결정, 조선의모든 사찰에서는 일본의 침략전쟁인 중일전쟁을 위하여 일본군의 무운 장구를 기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1940 11 10일 조선총독부 청사 앞마당에서 개최된 기원절(紀元節) 행사.

     

    기원절(紀元節)은 일본의 개국신(神)이랄 수 있는 신무(神武) 천황이 일본을 건국하고 즉위한 날(2월 11일)을 기념한 것으로, 우리로 치면 개천절에 해당된다. 이 행사에 초대된 친일 인사들은 '자자손손 가문의 영광'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봐 충성심이 검증된 인사들로, 소위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평가된 사람들이다. 

     

    이종욱은 이 때 이후에도 31본사주지대표로서 조선불교계의 실질적인종무사암과 포교소에 소집 통문을 특사 배달하였다. 그리하여 83일 오전 9시교무원 포교사실에서는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법요 및 시국대응강연회' 개최에 대한 타합회를 열었다. 이 회의 참석자는 30명이었으며 제반사항을 논의· 의결하였다.

     

    이종욱은 이 결의 내용을 취합하여 조선총독부에 보고하였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주최 : 조선불교 중앙교무원.

    후원 : 경성 각 사암 및 포교소.

    기원(祈願)은 개운사(開運寺)에만 한함.

    강사는 제1일 김경주(金敬注), 박성권(朴聖權), 김포광(金包光).

    2일 권상로*, 김태흡*, 최남선*.

     

    이렇게 결정이 되자 이종욱은 효제정 (孝悌町) 최남선을 방문하여 출연을 간청하였으나 최남선은 거듭 고사하여 결국 그의 출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종욱은 중일전쟁이 시작된 이후 처음 갖는 이 중대한 친일 행사를 제대로 잘 치르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84일 한성훈을 데리고 총독부사회교육과 (강사건), 부민관 (대강당 냉방장치 및 영화실 건), 경성일보사 및 오사카 아사히신문사 (중일전쟁 뉴스건), 동대문경찰서 (개운사 청중 의뢰건) 등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이종욱이 추진한 이 친일 행사로 교무원 직원들도 프로그램 인쇄, 입간판, 마이크로폰 따위의 물품을 준비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또한 행사허가를 얻기 위해 본정(本町)경찰서와 동대문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하고 총독부 학무국장에게도 보고를 하였으며 강사와 연제도 결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일본으로 보내지는 사찰의 범종들.

     

     

    개운사에서의 기원법요 후의 강연에는

    박성권 : 세계 평화를 위하여

    김경주 :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다. (爲國不爲身)

    김영수 : 동양 평화를 위하여

     

    부민관에서의 강연에는

    권상로 : 선각자로서

    김태흡 : 입정안국 (立正安國)

     

    이런 갖가지 준비 끝에 85일 저녁 8시 개운사에서는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법요 (竝在滿在 支將兵 在留同胞安寧幸福祈願) 및 박성권, 김경주, 김영수의 강연회가 개최되어 밤 10시에 폐회하였다. 청중으로 승려 100, 남자신도 150, 여신도 350명 등 도합 600명이나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86일 오후 7시 부민관 대홀에서 이종욱의 사회로 시국강연회가 열려 국기요배 (일장기) 및 삼귀의 등의 일본과 불교적인 국민의례를 한 후, 이종욱은 시국에 대해 의미심장한 (?) 개회사를 하고는 권상로와 김태흡 두 스님의 열변으로 친일 강연이 행해져 무려 2300여 청중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으며, 이어 북지사변 영화를 상영하는 것을 끝으로 이종욱이 주도한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친일 행사는 막을 내렸다.

        

     

     

    이종욱이 주도하여 전국 사찰과 승려들의 헌금으로 구입해 일본군에 헌납한 비행기.

    이들은 태평양전쟁 기간동안 모두 다섯 대의 비행기를 일본 군부에 헌납했다. 

     

     

    조계종의 실권자 되어 친일화 주도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지 꼭 한 달 만인 87, 이종욱은 교무원 재무이사 황금봉을 대동하고 총독부를 찾아가가 각 불교단체 연합으로 중일전쟁 전병사자 위령법요에 대해 논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앙교무원에서는 중국으로 파견되는 일본 군대를 송영 (送迎)하기 위해 간부와 직원들이 번갈아 경성역, 용산역, 군부대 등으로 나갔다.

     

    이종욱은 88일부터 일본군대의 송영을 나가 102일까지 13회 전송하였으며, 역시 그 해 1017일이종욱은 교무원 이사인 김상호, 황금봉과 부원 한성훈를 대동하고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제 참석차 조선신궁 및 경성신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이종욱은 이와 같이 그 자신이 주도하여 일본군을 위한 무운장구 기원제와 시국 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중국으로 출정하는 일본군을 송영하는 등의 행동으로 조선불교계의 친일기수가 되었을 뿐 아니라 불교 언론에 친일 시사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황민화 교육.

     

     

    그는 {불교시보}4, {신불교}7편의 친일 논설을 발표하였는데 그 목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불교시보}에 실린 이종욱의 친일 시사문

    [총본산의 실현과 조선불교의 장래] (42, 1939. 1. 1, 2)

    [조선불교도의 새로운 각오] (54, 1940. 1. 1, 2)

    [성전필승과 불일증휘] (90, 1943. 1. 15, 3)

    [징병제실시에 대하여 검선일여(劍禪一如)에 투철을 바라노라] (97, 1943. 8. 15, 2)

    {신불교}에 실린 이종욱의 친일 시사문

    [종정 유시를 봉()하여] (33, 1942. 2, 45)

    [전첩(戰捷)의 춘()] (36, 1942. 5, 45)

    [징병제실시의 영()을 예대(譽戴)하고] (38, 1942. 7, 46)

    [개병주의](皆兵主義) (43, 1942. 12, 35)

    [연두감](年頭感) (44, 1943. 1, 5)

    [연두감] (56, 1944. 1, 45)

    [훈시] (66, 1944. 11, 56)

        

     

    ▲ 이종욱은 일제의 징병제 실시와 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친일문장 10여 편을 불교잡지에 남겼다.

    사진은 <신불교> <불교시보> 등에 그가 쓴 친일논설들.  

     

     

    이와 같이 이종욱은 도합 11편의 친일 논설들을 발표하였고, 19406월에는 중일전쟁(1937) 당시 일본 근위내각의 외무대신 히로타 고우키 (廣田弘毅)의 성을 취하여 히로타 쇼우익 (廣田種郁)으로 창씨개명 하였다.

     

    한편, 그는 전시 체제의 중압 속에서도 총본산의 건설을 완료하여 총본사의 명칭을 태고사(太古寺), 종명(宗名)을 조계종(曹溪宗)으로 확정하고 1941423일에는 총본사 태고사법을 총독부로부터 인가받은 뒤 그 자신은 종무총장으로 취임 (1941. 8. 18 종무총장 인사발표, 9. 29 총독부인가, 10. 8사령장 교부)하여 명실 공히 조선불교의 대표가 되어 종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종욱이 이렇게 신설된 조선불교 조계종의 실권자가 되기 위해 총독부를 쥐가 뒤주간 드나들 듯이 뻔질나게 출입하고, 게다가 '선학원(禪學院) 문제'가 얽힌데 다, 전적으로 친일로 전향하자 당시 스님들로부터 비난이 자자했다. (강석주, {불교근세백년}, 180).

     

    이종욱은 194012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이 되었다. 또 그는 임전대책협의회 (19418월 결성)에 참여하여 일제가 전쟁비 조달을 위해 매출하였던 1원짜리 꼬마 채권을 소화시키기 위해서 채권가두유격대가 되어 거리로 진출하였다.

     

    같은 해 97, 이종욱은 '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터'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종로4가대 (동일은행 앞)의 일원이 되어 행인에게 일제의 전쟁채권을 팔았던 것이다.

     

    이종욱은 19411022일에 설립된 조선임전보국단이 그 해 124일에 개최한 '조선임전보국단 전선대회'에 참석하였고, 129일에도 역시 임전보국단 회의 참석차 부민관에를 갔다.

     

    이종욱의 친일행각은 그의 휘하에 있던 조선불교 조계종의 친일화로 직결되어, 전조선 사찰과 7000여 승려들이 힘을 짜내서 비행기 1대를 일본 군대에 헌납하고자 53000원을 모았다.

     

    1942130, 종무총장 이종욱은 총본사의 서무부장 김법룡 (金法龍), 교무부장 임석진 (林錫珍), 재무부장 박원찬 (朴圓讚)을 대동하고 용산에 있는 조선군사령부로 가서 53000원은 97식 전투기 1대의 대금으로, 526원은 국방헌금으로 헌납하였다. 이들이 헌납한 돈으로 구입한 육군전투기는 '조선 불교호'로 명명되었다.

     

    일제가 고도국방국가 건설을 위해 조직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매월 8일을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로 정하였다. 이 대조봉대일은 태평양전쟁 (1941. 12. 8)을 기념하는 날이었는데 조계종 종무총장 이종욱은 194223일 전국31본사 주지들에게 대조봉대일의 식순을 공문으로 발송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경례 궁성요배 국가 (일본국가) 합창 조서봉독 (詔書奉讀) 필승기념 (必勝祈念 : 대동아전쟁 완수를 위한 필승의 기원) 훈화 [황국신민의 서사] 제송 경례(옥외에서는 마지막 경례 앞에 '천황폐하 만세 봉창'을 할 것) 등인데 행사의 식순이 황민화를 위한 내용으로 꾸며져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그는 같은 해 26일에는 신도(神道불교· 기독교 연합 간담회에 참석하여 '종교보국'을 의논하였고 210일에는 임전보국단 상무이사회에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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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운동가로 활약했던 젊은시절의 지암 이종욱 사진 <한겨레>자료 

     

     

    "황은에 보답하고 출정장병의 노고에 감사하라"

    이종욱은 일왕의 태평양전쟁 선전포고에 맞추어 종정 방한암 (方漢岩)이 내린 '유시' (諭示: 종정사서 허영호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됨)를 받들어 중국 침략에 이어 동남아와 영·미 각국을 상대로 대동아전쟁을 벌인 일제에게 전조선의 불교도가 협력할 것을 촉구하는 '종정유시를 봉()하여' 라는 제목 아래 다섯 가지 실천요목을 {신 불교} 33(1942. 1, 45)에 발표하였다.

     

    , '위로황은에 보답하고 아래로 출정 장병의 노고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저축실행의 적극화 필승기도법회의 개최 민중사상 선도의 적극화 근로보국의 실행 시국에 순응한 시설의 급속실현 등 다섯 가지 실천 요목을 철저하게 시행할 것을 전조선 불교도들에게 시달하였다.

     

    1942325일 임시종회에서 이종욱은 "대동아 건설과 한가지로 아제국(我帝國)의 전첩(戰捷)의 봄을 봉영하여 시시각각으로 세계 인류로 하여금 시명(時命)의 시정(是正)을 하게하고 그 분()에 자안(自安)해서신의대도와 불타의 본회를 심체(深體)하게 하는 것은 우리 황도불교(皇道佛敎)의 종도(宗徒)된 직분이며 또한 제국 신민으로서의 보국에의 적성(赤誠)"이라는 요지의 개회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이 회의에서 국방자재 헌납을 결의하고는 전국 사찰의 철, , 청동, 황동 등의 모든 금속을 거두어 들였다. 그리하여 모든 조선사찰의 범종, 촛대, 불기(佛器)등이 일본군대에 헌납되었다.

     

    194255일 종무총장 이종욱은 일본어 상용을 종용하는 일제의 정책에 호응하여 '국어(일본어) 전해(全解) 운동'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전국 본사에 발송하였다.

     

    194258일 일본각의가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시행을 결의하자 이종욱은 전조선의 사찰에 '조선 징병제도 실시에 즈음한 기원(祈願) 행사에 관한'공문을 시달하고, 또한 {신불교}지에는 [징병제 실시의 영()을 예대(譽戴)하고] 라는 글을 발표하여 조선인들을 일본의 침략 전쟁에 동원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징병제 실시를 영광이라고 기꺼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국가만반 조직에 간발의 실()이 없이 총체적 진행을 여실히 보이고 있음은 동아의 공영과 제국의 다행으로 보아 민초(民草)의 대망(待望)이 날로 높아가는 때 황화(皇化)의 역내(域內)에 동인(同仁)의 혜()를 시()하게된 쇼와(昭和) 13(1938) 칙령 제95호 육군 특별지원령이 발표되고 58일 각의에서 쇼와 19년도(1944)부터 징병제 실시를 행하게 될 것을 준비진행중이라 하니 내선일체 동아공영이 명실구전(名實俱全)으로 실시됨이라하겠다.

     

    이 영()에 욕()한 반도대중은 비로소 이기(利器)를 들고 가장효과적인 동아개척의 제1실추((+))로 일제히 나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제국의 일 여수(一黎首)로 동아의 일 민초 (一民草)로서 천의(天意)에 존()하고 성명(聖命)에 전()해서 반도인의 남김 없는 천자(天資)를발휘하게 됨이 아닐까?……메이지 천황의 조서환발(詔書渙發) 후로 33년을 지나 이제 내선일체 일시동인 (一視同仁)이 당초의 성지(聖旨)대로 여실히 실현 됨은 시이무의 (恃而無疑:믿어 의심치 않음) 임은 지명(至明)이었지만 쇼와19년을 기하여 반도청년을 동일한 병제(兵制)에 수()하게 되는 희열은 실로 공구감격(恐懼感激)하여 불감(不堪)하는 바입니다. ({신불교} 38, 1942.7. 1, 46)

     

    이종욱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4386일에는 고양군 숭인면 경국사(慶國寺)에서 숭인면 관내 5개 사찰의 연합 징병제 실시 감사법 요식에서 '검선일여(劍禪一如)의 신생활' 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하여 "7000여 승려와 아울러 반도 민중은 검선일여의 정신에 투철하여 용약 군문(軍門)에 달려가 젊은이의 지성과 충성을 다하여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종욱은 조계종 종무총장 (지금의 총무원장)이라는 직책으로 불교도들에게 '황위팔굉 (皇威八紘)에 찬연히 빛나며 혁혁한 전과(戰果)를 올리는 대동아전쟁' 시기에 '광대무변한 황은(皇恩)에 감분흥기(感奮興起)하여 청사(靑史)에 빛나는 황국의 일원으로서의 영예를 뼛속에 깊이 삭여서 성전필승(聖戰必勝)을 완수하자'고 외쳤다.

     

    그는 1944127일에는 태고사에서 대조봉대(大詔奉戴) 3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대동아전쟁 전몰장병 위령법요를 근행하였는데, 국민총력연맹임원들과 경기도의 고위 관료들, 그 외 관민 및 신도 유력자들이 참례하였다.

        

     

     

     
    1932년 월정사 부채를 정리한 기념으로 그 주역들이 한자리에 섰다. 앞줄 오른쪽부터 김대우 김용우 지암스님 황금봉, 뒷줄 오른쪽부터 홍석모 성낙헌 김성권 이승우 이갑득 한상훈.

     

     

    변절한 친일파가 건국훈장을 받은 불가사의

     
    ▲ 항일과 친일의 논란에 서있는 지암 이종욱 스님

    그는 이렇게 친일행각에 동분서주하다가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8173부장과 함께 총사직을 하고 922일에 소집된 전국승려대회에서 부일협력자 제1호로 지목되어 승권 정지 3년이라는 징계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징계기간 동안에도 추호의 반성도 없이 김동진 (金東振)이 위원장으로 있는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의 강원도 대표(1945. 12. 31)가 되었고, 1946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이시영) 총무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더구나 기이한 것은 그가 승려의 몸으로 정치 활동을 한 것도 그러하지만 3년의 승권 정지 징계가 풀리지도 않는 19471월에 이미 강원도 교구 원장이 되어 그 이름이 당시 복간된 {불교}지의 축하 광고란에 게재되었다는 점이다. 더더욱 기괴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가 1977'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은 사실이다.

     

    3·1 운동 때 항일투쟁을 하였다지만 그는 끝가지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변절하여 1920년대 중반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극렬한 친일파로 전락하여 조선 불교의 종권을 완전 장악하였고, 이 땅의 불교를 왜색불교, 황도불교로 몰아넣었으며,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전적으로 협력하였던 조선불교계 제1급 친일파인 이종욱이 건국훈장을 받은 것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의 공훈록에는 '1945723일에는 이종린, 안정식 <인정식???확인요망>, 정인익, 학전헌 (鶴田憲) 등과 국민동지회조직에 참여한 일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지암(이종욱의 승명) 화상평전}에는 '1944년 강태동, 유석현등과 함께 무장봉기를 위한 유격대 조직에 착수하여 이듬해 818일을 거사일로 삼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가 199273일 용산구효창동에 있는 백범회관에 가서 이 부분을 확인하고자 독립운동 관계 사료들을 조사하였으나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현시점에서 이종욱이 1919년경에 행한 항일투쟁은 인정되나 194445년의 지하 항일 행적은 그 자료도 발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가 1920년대 중반부터 광복 때까지 행한 그의 철저한 친일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결코 수긍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렇게 변절한 친일파 이종욱이 건국훈장을 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1938년 조계사 대웅전 이건 모습. 사진제공=불교중앙박물관

    총본산 태고사(현 조계사) 건축공사 장면.

        

     

    임혜봉 (불교사연구가)

        

     

     

    독립 수단으로 친일을 택한 두 얼굴의 승려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쓴 박희승씨

     

     

    지암(智庵) 이종욱(李種郁)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는 독립운동가들의 추천을 받아 1977년 대한민국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 찍혀 2010년 국민장 서훈이 취소됩니다. 혁혁한 독립운동 기록과 친일 이력을 동시에 갖고 있는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조계종 출판사)을 지난 11월 말 내놓은 박희승(48)씨는 이종욱에 대해 이렇게 말을 꺼냈다. “이종욱은 36살이던 1919년 승려의 신분으로 3·1운동에 참가했고, 을사오적 매국노를 처단하기 위해 조직된 ‘27결사대에 참여했습니다.

     

    청년외교단을 조직해서 대한독립을 위한 국제활동을 펼쳤고,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해 독립운동을 했으며, 상하이임시정부 특파원(공작원)으로 국내 항일조직을 규합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했지요. 대한의승군총사령부를 조직해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무장독립 투쟁을 벌였습니다. 그는 일제에 붙들려 함흥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14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그는 보훈처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으로 훈장까지 받은 이종욱 스님이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는 데 대한 종단 의견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1997년 받고 이종욱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고 했다. 박씨는 동국대 대학원(불교학)을 졸업한 뒤, 조계종 기획차장을 거쳐 불교사회연구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박씨는 일제시대라는 특수 상황에서 조국의 독립과 한국 불교를 지켜내기 위한 이종욱의 고뇌를, 객관적 자료와 증거를 통해 더듬어보고 싶었다고 이종욱 연구 동기를 설명했다. 1997년 시작된 이종욱 연구는 14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박희승 지음조계종출판사 펴냄16000

     

     

    다비식 때 96개의 사리 수습

    이종욱은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와 그를 존경하는 불자들의 신임을 바탕으로 1930년 월정사 주지를 맡아 서울에 태고사(현 조계사)를 창건하고 조선불교조계종을 재건했습니다. 조선불교조계종은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기반이 됐습니다. 불교계의 큰스님인 강석주 스님(전 총무원장, 2004년 열반)은 이종욱에 대해 조계종의 산파라고 칭했습니다. 이 책의 제목에 조계종의 산파라는 표현을 넣은 것은 강석주 스님의 평가를 따른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종욱은 혁혁한 독립운동가이자 현대 불교를 일으킨 불교계의 거목이다.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는 약간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종욱은 조계종 종무총장(지금의 총무원장), 동국대학교 이사장을 맡아 불교를 널리 알렸으며 67세 때였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강원도 평창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조선불교조계종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를 출입하며 협조를 구했습니다.

     

    당시 일제는 불교가 조선의 민심을 좌우한다고 판단, 종단에 대한 인가제를 실시하며 조선의 종교를 억압했습니다. 이종욱은 이런 상황에서 총독부에 드나들며 일제의 지원을 얻어냈습니다. 그는 일제 창씨개명에 맞춰 자신의 성()을 이()씨에서 히로다(廣田)로 바꿨으며, 조선 불교의 대표 자격으로 일제에 비행기 두 대를 헌납하기도 했습니다.”

    이종욱의 행적은 변환기의 한복판에선 한 인간의 어려운 처신을 보여준다. “이종욱은 광복 이틀 뒤에 새 시대는 새 인물이 맞아야 한다며 스스로 종무총장직에서 물러납니다. 이것은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기득권을 누렸던 사람들이 광복 후 자진해서 물러난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던 중 한때 파계, 속세 여인과 결혼해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광복 후 승려도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2대 국회의원선거에 나가서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이종욱은, 하지만 주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3대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1954년 스스로 총무원장직에서 물러난 그는 월정사에 안거했는데 그해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나자 아무 말도 없이 웃으며 월정사 주지에서도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박희승씨는 그는 독립운동가, 주지, 총무원장, 동국대 이사장, 국회의원 등 온갖 지위를 다 누렸지만 아무런 재산과 지위가 없는 상태에서 1969년 세수 86세로 구례 화엄사에서 입적했다고 말했다.

    모순된 시대 상황부터 살펴야

    박희승씨는 어느 것이 이종욱의 진짜 모습이냐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모순된 시대상황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지금의 조계사가 있는 서울 종로구 수송동 자리는 원래 천도교 산하의 인쇄소 보성사가 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3·1독립선언서를 인쇄했습니다. 보성사가 있던 자리에는 친일파 이용익(李容翊)이 세운 보성학교가 있었습니다. 이 학교의 후문 자리가 지금 조계사의 정문 자리입니다.”

    박씨는 역사는 무척 아이러니하다며 이종욱이 조선불교 조계종을 재건하게 된 배경으로 말을 이었다. “1930년대 들어 일제는 조선불교 종단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했습니다.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박문사란 절이 있었어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일본 사찰이었는데 이걸 조선불교 총괄조직으로 만들려 했던 겁니다.

     

    이종욱은 일본 불교는 조선에서 건너간 것이고 조선의 불교와 일본의 불교는 엄연히 성격이 다른 것인데,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 조직 산하로 통합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했습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반대 여론을 조성했죠. 여론이 형성됐다고 판단한 이종욱은 조선의 독립적 불교 본산을 만들어야 한다고 총독부에 건의를 합니다. 총독부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묵인한 것이지요.”

    박씨는 이렇게 해서 1938년 설립된 것이 조계사이며 3년 뒤인 1941년 조선 불교 조계종이 총독부 허가를 얻어 재건됐다고 말했다.

    이종욱은 1937년 총본산 추진이 본격화되면서 일제에 적극 협력합니다. 조선 불교 대표 자격으로 친일 단체에 참여하면서 일본에 비행기 2대를 헌납했습니다. 이는 다른 종교와 비춰보면 상대적으로 적은 수치입니다. 1944경향’ 5월호에 따르면 당시 천주교계는 비행기 200대 헌납운동을 벌여 248대분, 무려 2481만원의 헌금을 냈습니다.

     

    장로교는 애국기 헌납 기성회를 만들어 비행기 1대와 기관총 7정의 대금으로 15만원을 냈고, 자동차 2대의 기금으로 23000원을 조선군사령부에 헌납했습니다. 감리교는 34개 교회의 재산을 처분해 비행기 3대의 헌납 기금으로 바칠 것을 결의했습니다.”

    임시정부 국내진공작전의 자금책

    이종욱의 삶에 대해 친일연구의 대가인 고 임종국 선생은 이종욱이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친일을 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민족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고 평했다고 한다. 박씨는 “1944년 상하이 임정은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했다. 군사력을 사용한 독립운동을 계획한 것이다. 이 진공작전의 자금책을 맡았던 것이 이종욱이었다. 이는 1984123일자 중앙일보 유석현 증언에 나와 있다. 광복회 회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유석현 옹을 직접 만나 이 사실을 재확인했다고 말했다.

    2005~2009년까지 활동한 대통령 산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종욱의 이 같은 이력을 들어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박씨는 이종욱이 재건한 조선불교 조계종은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으로 거듭나 올해 출범 50주년을 맞는다. 이종욱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조계종은 없었을지 모른다. 이종욱, 그는 정말 친일파였을까라고 물었다.

     

     

    지암 스님의 친일, 교단 보호 위한 선택

     

    지암의 일제 협력은 개인적인 친일이 아니라 총본산 건설 등 불교계 과제를 성취하기 위한

    공공의 현실적 선택이다. 교단에서 맡은 직책과 관련된 내용 일뿐이다.” 

     

    친일과 항일에 위장이란 없었다

    세상을 살다보면 참 도저히 말이 될 것 같지 않은 주장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속이는 경우를 자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참으로 기묘하게도 이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나 조직도 많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펼쳐서 사람들을 실컷 웃게 만드는 개그나 코미디 프로그램처럼, 세상이 이처럼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목소리가 큰소리를 내고 그 말에 속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 쇼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세상사는 재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쇼가 너무 많은 사람을 속이고 세상을 우롱하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광전종욱(廣田種郁)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불려갔다. 명경대에 비춰진 그의 과거 행적을 살펴본 염라대왕이 종욱에게 친절하게 묻는다. 다음은 염라대왕과 종욱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가상으로 꾸며 본 내용이다.

     

    그대는 힘들게 사는 조선 민중들을 위해 한 때 좋은 일을 한 것이 많군요. 이 기록이 확실한가요?”

     

    , 확실합니다. 기미년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일제에게 고문도 당하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도 쪼끔 참여했고요. 그밖에도 제가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 그랬군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일제의 조선 지배가 확고해져서 도저히 독립의 희망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일제 식민지 정책에 적극 협조했다는 기록도 나오네요. 조선 불교계의 높은 자리를 맡기 위해 대동아공영권을 적극 홍보하고 학병과 지원병에 나가서 미영 귀축(鬼畜) 무리들을 섬멸하라고 선동했다는 기록도 있고. ……그뿐이 아니네요. 전국 사찰을 독려해서 돈을 끌어 모아 비행기를 사서 일제 군부에 헌납하는 등 살생을 조장하는 일도 많이 했네요.”

     

    ……

     

    왜 아무 말이 없나요?”

     

    그것은, 제가 영화를 누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위장 행위이었습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존 본능을 탓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생존 본능을 이유로 저를 지옥으로 보낸다면 이 세상에 지옥에 가지 않을 중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 내 이제까지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는 인간인 줄 알았더니 도대체 양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불쌍한 중생이구먼. 젊은 시절 잠시라도 했던 좋은 일을 참작해서 지옥으로 보내는 일만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구나. 옥리야, 이 못된 놈을 곧바로 지옥으로 보내 버리거라.”

     

    억울합니다. 저는 일제가 혹 영미 귀축의 무리에게 패할지도 모른다는 단 1%의 가능성을 고려하여, 남몰래 중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돈을 쪼끔 보낸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저의 이 탁월한 위장 전술이 효과를 발휘해서 김구도 나중에 제게 감사 인사를 하기도 했고, 나중에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비록 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하기는 했지만. 조선 독립에 기여한 이 작은 공을 참작해서 저를 지옥에는 보내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에끼,이놈아! 네가 앞장서서 헌납한 그 비행기가 중국 전선과 동남아 전선에서 얼마나 많은 중생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 아느냐? 너란 놈은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는 못된 놈이다. 여봐라, 옥리는 뭐하느냐? 이 놈을 곧바로 무간지옥으로 떨어뜨리지 않고 ……

     

    염라대왕이 적절히 지적하였듯이, 설사 종욱이 김구선생에게 돈을 조금 보내서 임시정부를 도운 적이 있고, 혹 어떤 이의 주장대로 그가 겉으로 드러냈던 친일 행적이 조계종을 세우기 위한 위장 친일이었다고 봐준다 해도, 그가 앞장서서 일제에 헌납한 무기가 숱한 중생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식민지 조선 불교계에 얼마나 큰 피해를 주었는지, 또 얼마나 큰 죄의식을 안겨 주었는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본래 위장이란 외부 적이 감지되면 재빠르게 나뭇가지 모양을 취하는 자벌레 처럼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모습을 바꾸는 생존본능의 발현이다. 이런 생물적인 본능의 행위를 가져다가, ‘조계종을 살리기 위한 위장 친일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게 되면 이것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그저 해괴망측한 억지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해괴망측한 논리를 펴는 책을 조계종단에서는 자신들을 위하는 애종심의 발로로 오해하고 종단 출판사에서 발간하고 언론에 선전까지 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우리 조계종단은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중생을 저버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도 있다는 선언을 온 세상에 널리 전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전쟁물자 조달위해 사찰 범종도 떼 헌납, 친일승려 이종욱

     

    우리 역사에서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로 자리매김돼 있다. 평시에는 속세와 떨어져 구도자로 살다가도 국난(國亂)을 당하면 의연히 일어나 군대를 조직하거나 민족진영에서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우리 불교계였다. 임진왜란 때의 서산대사와 사명당이 그랬고 일제 강점기에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城)이 그랬다.

     

    항일운동을 한 승려 가운데 이종욱(李鍾郁)이라는 사람이 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로로 그는 지난 77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받고 현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돼 있다. 그러나 그는 지난 93년 국가보훈처가 재심(再審) 대상자로 발표한 8명 속에 포함됐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지사인 그가 재심 대상에 오른 것은 왜인가. 문제는 그가 임시정부시절 이후의 행적 때문이다.

     

    '재심' 대상에 오른 독립유공자

    일제 말기 그는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동시에 1급 친일승려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종교인 출신이었음에도 그는 해방 후 참회나 자숙은 커녕 도리어 정치권을 기웃거리며 불교계의 거물로 행세하였다.

     

    이종욱(18841969, 창씨명 廣田鍾郁)은 강원도 평창 사람이다. 일찍 출가하여 월정사(月精寺) 승려로 있다가 3·1의거가 일어나자 고을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틀 뒤인 33일에는 이탁(李鐸·건국훈장 독립장) 27명으로 구성된 ‘27결사대대원으로 매국역적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3·1의거를 계기로 서울에서 이승만(李承晩)을 집정관으로 한성(漢城)임시정부가 구성되자 그는 강원도 대표로 참가하였다. 1919413일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 내무부 참사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3월 임시의정원에서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됐다.

     

    그는 임정의 국내 비밀연락조직인 연통제(聯通制)조직을 위해 국내로 파견돼 활동하기도 했다. 이 무렵까지 그가 독립진영에서 활동한 사실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국가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5)에 따르면, 그는 1920629일 청년외교단 운동으로 대구지방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그 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고 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나와 있다. 무슨 사건에 관련돼 일경에 체포됐는지가 분명치 않아 현재 이 부분은 일단 미확인 상태로 남아있다.

     

    다시 공훈록에 따르면 그는 출옥후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하면서 송세호(宋世浩·건국훈장 애국장)와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지하에서 활동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그가 은거하면서 지하활동을 했다는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1920년대 중반 이후 그는 불교계에 복귀하여 공공연히 활동을 하였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역전된다. 이 무렵부터 그는 친일대열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3년 월정사의 사채 정리위원으로 얼굴을 드러낸 그는 26년 중앙교무원의 사무원을 거쳐 27년부터 월정사의 감무(監務)로 취임하였다. 29년에는 각황사(覺皇寺)에서 개최된 승려대회에서 의안심사위원 7인중 1인으로 선출되었고 대회 부의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이듬해 그는 31본사(本寺)의 하나인 오대산 월정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본사 주지는 총독이 임명하는 주요 승직(僧職) 가운데 하나였다. 이 무렵 그는 총독부측의 회유로 이미 친일로 기운 상태였다. 368황민화 정책의 사령탑인 미나미(南次郞)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오자 그는 마침내 친일의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종회(宗會) 의장 및 월정사 주지 자격으로 불교계 인사들을 대동하고 경성역(서울역)으로 마중을 나가 미나미를 환영하였다. 이듬해 37년 그는 31본사주지회의에서 다시 의장으로 선출돼 총본산 설립을 의결하고 자신은 총본산건설위원회의 31본사 주지대표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그는 조선불교의 종권(宗權)을 장악, 당대 불교계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총독부가 있었다.

     

    19377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전쟁 발발 1주일 만인 715일 서울 남산 중턱에 위치한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참배하고는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에 참석하였다. 조선신궁은 일본의 개국신 등을 모신 일본정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 사찰에서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 독려

    이틀 뒤 그는 당시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김대우(金大羽, 일제 말기 경북도지사 역임)를 찾아가 조선 내 사찰에서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를 지내는 문제를 상의하고는 며칠 뒤 조선내 각 사찰에서 기원제를 지내도록 하달하였다.

     

    이어 85일에는 개운사에서 중앙교무원 주최로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법회'를 개최하였으며 다음날에는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청사)에서 그의 사회로 친일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자신이 주도하여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나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중국으로 출정하는 일본군 송영(送迎)행사에 조선승려들을 이끌고 참석하기도 하였다.

     

    19402월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그는 일본 고노에(近衛)내각의 외무대신 히로다(廣田弘毅)의 성을 따서 히로다 쇼우익(廣田鍾郁)로 창씨하였다. 같은 창씨라도 그의 창씨는 친일성이 짙게 배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흔히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총독부의 강요로 할 수 없이 창씨는 하였지만 그래도 자신이 (원래) ()씨였다는 의미에서 ()’김원(金原)’ 또는 김본(金本) 등으로 창씨한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당시 승려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불교의 총본산 건설을 완료하여 총본사의 명칭을 태고사(太古寺, 曹溪寺), 종명(宗名)을 조계종(曹溪宗)으로 고치고 그 자신이 종무총장(현 총무원장)에 취임(1941818)하였다. 이로써 그는 조선불교의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되었다.

     

    그는 종무총장 취임사에서 지난날 이조(李朝)의 압정하에 근근히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일한병합(日韓倂合) 후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은(皇恩)에 힘입어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사찰령에 의하여 조선불교가 발전되었다”(신불교31, 194112월호)며 총독부의 황도(皇道)불교건설을 찬양하였다.

     

    이 무렵 그는 전시(戰時)협력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여하여 길거리에서 전쟁채권을 판매하는 등 일제의 전쟁비 조달에도 앞장섰다. 또 조선 내 사찰과 승려들을 쥐어짜 53천 원을 갹출,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전투기 1대 구입대금으로 헌금하였다.

     

    1941128대동아전쟁이 다시 발발하자 조선 내 1500여 사찰에 1215일부터 일본군의 연전연승을 기원하는 법회를 열라고 전국 사찰에 명하였다. 전쟁이 말기로 치닫자 그는 부족한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임시종회를 소집, 국방자재 헌납을 결의하고는 사찰의 범종과 쇠붙이 불구(佛具)를 거두어 일제 당국에 헌납하였다.

     

    전쟁물자 조달 위해 사찰 범종, 쇠붙이 거둬 일제에 헌납

    19425월에는 일본어 상용(常用)을 종용하는 일제의 정책에 호응하여 국어(國語, 일본어) 전해(全解)운동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전국 본사(本寺)에 하달하였다.

     

    19438월 징병제가 실시되자 감사법요식에서 검선일여(劍禪一如)의 신생활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7천여 승려와 아울러 반도 민중은 검선일여의 정신에 투철하여 용약 군문에 달려가 젊은이의 지성과 충성를 다하여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학병권유 대열에서도 그는 빠지지 않았다. 이밖에도 그는 불교관련 매체에 10여 편의 친일문을 남겼다.

     

    해방이 되자 그는 817일 후 그는 종무원 3부장과 함께 종무총장직에서 사퇴하였다. 이어 922일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 그는 친일승려 제1로 지목돼 승권(僧權)정지 3년의 중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승권 정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471월 강원도 교구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반탁세력과 연계, 자신의 친일경력을 위장하였다.

     

    19505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강원도 평창에서 당선되었으며, 51년 동국대 재단이사장, 527월에는 제4대 조계종 중앙총무원장에 취임하였다. 해방 후 7년 만에 그는 일제 때의 위상을 완전 회복하였다. 사후에는 건국훈장과 국립묘지 안장의 예우까지 받았다. 이제는 그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정운현/오마이뉴스

     

     

     

    지암 이종욱 스님(18841969)

    13세에 출가, 강원도 월정사에 머무르던 중 3·1운동을 계기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을사오적 매국노를 제거하기 위해 조직된 '27결사대'에 참여하였으며,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불교계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후 상해임시정부 특파원으로 국내 항일조직과의 연락과 정보 수집, 독립자금 모금 등을 담당하며 내무부 참사, 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함흥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폐사 직전이던 월정사를 구하여 주지에 추대되고, 1930년대 후반 총본산 건설운동 당시 31본산주지대표를 맡아 태고사(현 조계사)를 창건하고, 조선조 이래 최초의 합법적 교단인 조선불교조계종을 재건하였다.

     

    8·15 광복을 맞자 지암은 이틀 만인 817새시대는 새 인물이 맞아야 한다며 자진하여 물러났다. 8.15 광복 직후 일제강점기 기득권 인사들이 스스로 물러난 사례를 찾기가 어려운데 이것은 매우 희유한 일이었다. 또한 지암은 강원도 평창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압도적으로 당선되어 국회에 진출하여 전국 사찰이 농지개혁조치로 토지를 완전 몰수당하는 위기 상황에서 다시 총무원장을 맡아 정부를 설득하여 이를 반환받았고, 종립 동국대 이사장을 맡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켜 오늘날 조계종단의 기틀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이후 지암은 종단정화운동이 일어날 무렵 물러났고, 월정사에서도 밀려나 종단에서도 세상에서도 거의 잊힌 인물이 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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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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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운암 김성숙기념사업회 http://www.kimsungsuk.or.kr

    임혜봉 (2005). 〈이종욱 : 항일 투사에서 변절한 불교계 최고의 친일파〉, 《친일 승려 108인》. 서울: 청년사.

    반민족문제연구소 (1995). 〈이종욱 : 항일투사에서 불교 친일화의 기수로 (임혜봉)〉, 《친일파 99인 (3)》. 서울: 돌베개

    이종욱 - 대한민국헌정회

    이종욱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이재형, 불교계 친일행적 어떻게 볼 것인가, 《불교평론》, 2002년 여름가을호

    《불교신문》 (2007.4.18) 이종욱스님 친일은 위장전술

    https://www.google.co.kr/search?q=%EC%A7%80%EC%95%94+%EC%9D%B4%EC%A2%85%EC%9A%B1&newwindow=1&hl=ko&rlz=1T4ADRA_koKR456KR459&tbm=isch&tbo=u&source=univ&sa=X&ei=JmdnUv

    DPFsHkiAfZ4oEw&ved=0CHIQ7Ak&biw=1524&bih=748#facrc=_&imgdii=_&imgrc=6tTmK5YZmbwCWM%3A%3B6kHs0feBV_On4M%3Bhttp%253A%252F%252Fwell.hani.co.kr%252Ffiles%252Fattach%252Fimages%252F71%252F009%252F036%252Faaa1.jpg%3Bhttp%253A%252F%252Fwell.hani.co.kr%252F36009%3B660%3B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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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841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0700

    http://www.bulgyofocus.net/news/articleView.html?idxno=65067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476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3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 스님

     

     

    위장친일 논란의 중심을 재조명하다

    저자 박희승 씨 15년 간의 지암 연구 집대성

    객관적 자료와 증거 통해 실체에 접근평가 

     

    지암 이종욱에게는 참으로 많은 수식어가 필요하다. 교단적으로는 근대 불교 교단의 재건자이며, 특히 오늘날 조계종을 성립시킨 산파의 역할을 수행한 어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보인 행보에는 항일과 친일 양면을 다 가진 인물로 기록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지암은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한국불교를 지켜내기 위한 목숨을 걸고 풍찬노숙의 항일운동을 하였다. 지암은 은밀히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조달하였으며 일제말기 1944년 국내에서 독립운동가들과 비밀무장봉기를 모의하였다.

     

    백범 김구가 귀국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 이종욱 스님일 정도였다. 지암은 월정사를 구하고, 조선불교총본산 조계사 건설과 조계종의 재건과정에서 총독부를 출입하였고, 이후 창씨개명을 하고 재건한 종단의 종무총장을 맡아 조선불교의 대표로서 비행기를 헌납하는 등 일제에 협력했다. 명백한 친일행위였던 이 일로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후대에 자발적 친일이냐, 위장 친일이냐는 논쟁이 일어났다.

     

    이후 지암의 삶은 항일친일’,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친일이냐, 위장 친일이냐는 논쟁이 분분하지만 아쉽게도 실제 지암의 삶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미진했다. 그러는 동안 지암의 삶은 한국사의 그늘로 숨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임혜봉의 <친일불교론> 발간 이후 지암은 독립유공자 자격으로 묻혔던 국립묘지에서 내쫓겼다. 친일파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지암의 유택은 그 후 그의 문손들이 관장하고 있는 해남 대흥사가 되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공부하는 종무원박희승과 지암의 인연이 맺어진 것은 이즈음이었다. 조계종 불학연구소 연구과장 재직 시, 박희승은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으로 국가훈장을 받은 이종욱 스님이 친일파로 비판 받는데 이에 대한 종단의 의견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지암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지암 연구에 바친 15년 동안 그는 지암과 관련한 단 한 줄의 신문기사까지 찾아내는 등 철저한 자료 수집으로 지암의 삶에 대한 여러 편의 논문을 썼다. 이후에도 지암을 아는 고승, 주변 인물들을 찾아 인터뷰 하며, 객관적이고 심층적인 논증에 정확성을 기했다. 그리고 책을 펴냈다. 이번에 펴낸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은 박희승이 15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해온 작업을 종합적,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제 치하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라의 독립과 한국불교를 지켜내기 위한 지암의 고뇌를 더듬으며, ‘친일행위라는 단편적인 사실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자료와 증거를 통해 지암의 삶에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지금 불교계에 조선조의 억불정책과 식민지 유산으로 자기 비하의 부정적인 역사인식이 있다. 나는 조계사와 조계종의 재건자인 지암을 통하여 한국불교 근현대사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길 바란다. 이 시대에 지암과 불교계 인사들은 상해임시정부를 조직적으로 참가 지원하였으며, 수백 년 만의 종단 재건을 성사시켜 민족의 전통 사상과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나갈 초석을 놓았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공정하고 균형 잡힌 재평가가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의 의의와 가치에 대해 동국대학교 김광식 연구교수는 박희승의 저술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의 학술적 의의는 먼저 항일과 친일의 연구 지평을 확대시켰다고 말한다. 또한 근대기 조계종단사의 시야를 새롭게 하였으며, 종단의 핵심 주역인 총무원장의 연구를 추동하였고, 한암 및 탄허로 대변된 월정사 근대연구의 지평을 넓혔으며, 근대 고승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촉발시켰다고 덧붙였다.

     

    이 책의 발간에도 불구하고 지암 이종욱의 일제기 행적을 둘러싼 친일-항일 논쟁은 종지부를 찍지 못할 것이다.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자료들은 대개 증언이나 지암의 글들을 통해 그가 항일을 위한 위장친일을 했을 것이라는 거의 확실한 믿음을 갖게 하고 있지만, 직접적인 근거자료을 찾아내 제시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조계종의 산파역을 했던 지암 이종욱에 대한 연구는 이제 박희승 개인의 일이 아니다. 문도들은 물론 불교계 전체, 학계가 나서서 밝혀야 할 지난한 과제일 수도 있다. 지암과 똑 같이 임혜봉의 <친일불교론>에 의해 친일파로 몰렸던 구하 스님이나 효당 최범술 등이 문도나 후학들의 각고의 노력을 통해 위장친일과 항일의 근거를 찾아내어 명예회복을 한 것처럼 이제 지암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지암의 문손들과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불교학자들에게 남겨진 셈이다.

     

    조계종이, 한국 불교가 그런 집단인가?

     

    고뇌에 찬 결단그래도 친일

     

    박희승 씨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 출간

    지암 이종욱 일제 강점기의 스님으로 창씨개명 후 이름은 廣田種郁’. 19193.1 만세운동에 참가하는 한편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강원도 대표를 맡기도 했으나, 1930년 조선총독부의 임명을 받는 월정사 주지가 된 이후부터는 눈에 띄는 친일행적을 보이기도 했던 스님.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기도 했으나 30여년 뒤인 2010년 국무회의에서 서훈이 취소되어 국립묘지에 안장한 사리마저 수습해 대흥사로 이운되는 수모를 겪은 스님.

     

    이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지암 이종욱 스님을 재조명한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이 출간됐다. 조계종 총무원 박희승 문화차장이 펴낸 이 책은 지암 이종욱 스님의 일대기 속에 비쳐진 공과(功過)를 모두 담고 있다.

     

    이종욱 스님은 그 동안 친일위장친일논란 속에서 늘 뜨거운 감자 같은 존재였다. 일제 강점기 총본산 태고사를 세우고 지금의 조계종단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총독부를 출입하며, 창씨개명을 하고 조선불교의 대표로서 전투기를 헌납하는 친일행위를 저질렀다. 책은 '친일논란에 가려진 지암스님을 재조명'한다고 발간 의도를 밝히고 있으나 내용의 많은 부분은 '지암스님의 친일 행위는 위장 친일이며 교단 재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에서 친일파는 단순이 일제에 부역하거나 일본을 좋아하는 자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자신의 영욕을 위해 민족과 동포를 배신하고 팔아먹은 매국노, 민족반역자이자 천인공노할 을 의미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종욱 스님의 친일행위를 일제강점기에 총본산 조계사 건립과 조계종 재건과정에서 31본산 주지 대표로 일제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을 상황이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를 공적(公的) 친일이라고 표현했다. 친일파로 지목된 이들이 개인의 영욕을 위해 친일을 했다면, 이종욱 스님은 공심(公心)에 의거해 교단의 재건과 불교를 위해 총독부와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교단 재건과 불교를 위한 위장친일

    나아가 지암은 일제강점기 합법적인 종단 건설을 위해 민족의 전통사상과 문화를 수호하기 위해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 스스로 친일행위를 하고자 한 것이라고 저자는 규정하고 있다. 그는 내면에 누구보다도 투철한 항일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위장친일을 통하여 일제 총독부 관리들의 신임을 얻어 조선의 불교도들의 염원을 실천한 것이라고 추켜세우고 있다. 한때 논쟁이 되었던 위장친일론의 재연이다. 그 근거로 지암 이종욱 스님의 <동아일보> 해방 이후 기고글과 각종 증언을 통한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 가담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직접적인 사료는 제시하지 못했다. 저자 역시 “1944년 전후 조계종 종무총장 지암 이종욱 스님은 항일무장조직의 자금책을 맡아 전국 사찰을 다니며 자금을 마련했다는 글과 증언은 많지만, 이와 관련한 직접적인 사료는 아직 발견된 것이 없다고 적고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필승기도법회를 주창하거나 일제의 전쟁협력을 촉구하는 연설, 근로보국대의 조직 등에 대한 친일 자료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공적친일이자 위장친일이었다는 논리를 펴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

     

    박 씨의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은 그 동안 구하스님 등의 친일행적 논란에 대해 통도사와 문도회에서 자체적으로 사료를 정리해 스님의 친일행적을 해명, 친일인사에서 제외된 것과도 비교된다. 저자 역시 불교 근현대사에서 지암에 대한 자료가 앞으로도 나올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까지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기초로 이 책을 완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종욱 스님의 항일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사료가 발견된다고 해도 친일행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 한편으로 주목할 점은 이 책이 현직 조계종 종무원이 쓰고 종단 산하의 조계종출판사에서 출간됐다는 점이다. 비록 개인이 연구에 천착해 이뤄낸 책이지만, 대처승이었던 이종욱 스님을 비구 종단인 조계종에서 재조명을 시도한 것이다. 아울러 저자가 조선불교조계종 재건 70주년에 맞추어 발간했다고 밝히는 한편 책 속에서도 내년 통합종단 출범 50년을 맞는 조계종의 역사를 이종욱 스님이 세운 조선불교조계종과 연결하고 있다. 조태 분규과정에서 어정쩡하게 사라진 대한불교조계종의 근대사를 재구성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조계종에서 그 동안 이종욱 스님에 대한 언급이 많지 않았던 것은 친일 문제라기보다는 대처의 문제라는 시각도 있다. 2007년 지암불교문화재단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학술세미나를 열기도 했지만, 종단 차원의 대회는 아니었다. 2009년 이종욱 스님의 친일논란 당시에도 조계종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공문을 보내 재심의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과정 역시 비공개로 진행됐다.

     

    이종욱 스님의 문손인 한 중진스님은 그동안 이종욱 스님은 조계종 재건의 중요한 역할을 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대처승이라는 이유로 조명 받지 못했다이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우리 불교사에서 마땅한 대접을 하지 못하는 이유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이종욱 스님이 교단 분규 과정에서 당시 조선불교 교정 만암스님의 뜻을 받들어 비구승을 정법중, 대처승을 호법중으로 하여 점진적인 변화를 주도해 대안을 마련하고 총무원장에서 물러났으나 이 역할 역시 주목받지 못했다.

     

    저자는 조계사와 조계종의 재건자인 지암을 통해 한국불교 근현대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봐야 한다지암과 불교계 인사들은 상해임시정부를 조직적으로 지원했고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8천민으로 살아오며 거의 붕괴된 교단을 재건해 전통사상과 문화를 계승 발전 시켜나갈 초석을 놓았다며 공정한 재평가를 요구했다.

     

    재평가 앞서 친일행위 참회부터

    그러나 이 책 한 권으로 이종욱 스님의 친일 행위가 뒤집어지지 않는다. ‘조계종 재건과 항일운동을 위한 위장친일이라는 논리모순도 설명하기 힘들다. 친일이라는 방식을 취하지 않더라도 항일운동은 할 수 있었고, 종단 재건 역시 반드시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해야 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 500년을 천민으로 살면서도 불법의 연과 불가의 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국통을 잇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활동했던 것은 아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있을 수 없으나 교단의 재건을 총독부에 기대지 않고 자주적으로 실현했더라면 이후 종단이 쪼개지는 분규는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공정한 재평가와 재조명은 과거에 대한 인정과 참회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종욱 스님의 친일행위가 위장이었건 공적이었건 전투기를 만들어 바치고 전쟁 참여를 독려한 것은 재해석이 불가능한 친일행위다. 이종욱 스님이 현재의 조계종이 있게 한 산파 역할을 했고, 이를 조계종의 역사로 받아들기 위해서는 먼저 친일 행위에 대한 조계종 차원의 참회가 있어야 한다. ‘친일은 친일이고 보살행은 보살행이라는 논리는 자칫 과거는 덮고 가자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지암 이종욱 스님의 문손인 보선스님(중앙종회의장) 역시 역사는 사실을 기록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스님의 행위는 분명 친일이라고 추천사를 통해 밝혔지만, 이어 스님의 안위와 사욕을 위한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벼랑에 선 한국불교를 지키기 위한 스님의 고뇌에 찬 결단이라고 덧붙여 이종욱 스님의 친일을 사실상 인정하지 않았다.

     

     

    일제하 초대 총무원장 항일기록 생생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

    3.1만세운동의 숨은 주역이자 조계종 재건 주역인 지암스님이 재조명됐다. 세랍 36세 월정사 강사 주지대리 등 삼직을 지낸 중진 지암스님이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 학승들과 파고다공원에서 만세를 부르고 대한문으로 행진했다.

     

    김법린(범어사, 문교부장관) 신상완, 백성욱 등 그간 알려진 일제하 독립운동 참여 학승들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지암스님(속명 이종옥)이었다는 주장이 새로 제기됐다.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옥>191933일 고종황제 국장 장례 행렬이 지나가던 망우리 고개에서 이완용 등 친일오적의 암살을 시도했던 ‘27결사대에도 그가 참여했다고 밝혔다.

     

    책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 참여와 종단재건이 시도됐다고 분석했다. ‘독립운동불교도본부를 구성한 것과 독립운동가들이 결집하던 상해에 월정사 송세호 스님을 파견하고 지암 자신은 서울에서 임시정부인 한성정부수립에 불교계 대표로 참여한 것 등이 근거로 제시됐다.

     

    위장친일로 조계종단 재건주장에 주목

    이완용 암살 결사대 참여일부 비판도

    물론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재무부 총장 이시영을 비롯해 안창호 등 해외 망명 기독교 세력이 주축이 되고 천도교 쪽이 완전 배제된 한계는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 구성까지 활동에 대해 내무부 특파원에 임명돼 함남지역의 선전 및 시위 사명으로 국내에 파견돼 임무를 마쳤고 다시 경기지역 특파원으로 2차 독립운동대 조직임무로 국내에 들어왔다고 적었다.

     

    임시정부에서도 독립운동에 적극 가세했던 지암스님은 역설적이게도 해방직후 불교계 최초의 승려대회에서 친일승려 1로 낙인 찍혀 공권정지 3년의 징계를 받았다. 책은 지암과 김상호는 한국불교의 일본불교 병합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전국 사찰을 순례하며 자주적 총본산 건설의 필요성을 설득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31본산을 일본 박문사에 귀속시켜 병합시키려 했던 음모에 대응해 총본산을 꾸리려는 저항이었다.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31본산 주지회동은 그렇게 이뤄졌고, ‘조선불교진흥책이 쟁점이 됐다. 직후 지암스님은 본산주지 대표가 됐고, 총본산으로 서울 태고사(현 조계사) 대웅전이 정읍 보천교의 십일전(十一 殿) 목재를 뜯어 옮겨 개축됐다.

     

    이제 관건은 총독부가 규정한 사찰령과 본말사법의 개정, ‘조선불교선교양종이란 명칭의 변경이었다. 여기서 지암스님은 조계종명칭 확정의 주역이 된다. 저자 박희승 씨는 이를 일제강점기 수십년 만에 한국불교도들의 지속적 염원과 활동을 통해 새로운 한국불교의 교단체계가 합법적 형태로 확립됐다고 평가했다.

     

    초대 종정 한암스님과 종무총장(총무원장) 지암스님 체제 출범에 대한 긍정평가는 조계종 총본산 토지대장을 통해 31본사와 1000여 말사의 토지현황 재건에서 찾았다.

    조선 불교도의 염원과 일제의 식민지 전략의 타협산물이라며 사찰령으로 주지 인사권 재산처분권 포교권 등을 총독부에서 장악했던 한계상황에서, 당시 지암의 생각을 근거로 개인과 교단을 분리한다. 자기 한몸 친일이라는 욕을 먹더라도 조선불교도를 결속시켜 나갈 교단 재건 성취가 목표였다라고 해석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옥고도 치렀지만 불교 종단 운영에서는 친일파로 규정된 이중구조에 대한 해석은 일제하 조계종의 평가에서 매듭이 묶어진다. 그것이 정치적 항일을 위해 불교의 친일부역을 의미하는 것인지, 개인 지암스님의 위장친일에 의한 불교재건 기도인지를 판가름하기 위한 정밀분석이 유보됐다.

     

    조계종 총무원 문화차장인 저자는 한국 불교계에 끼친 영향에 대한 평가와 검증은 뒤로 미뤘다. 해방 후 국회의원 등 정치가로 활동하고 동국대 이사장을 맡았던 대처승 지암스님의 재평가는 불교계 내부의 친일 연구성을 절감케 한다.

     

    [불교신문 2779/ 1224일자]

     

    조계종이 친일파에 의해 만들어졌다?

     

    지암 이종욱을 재조명하다

    그의 친일행적은 실은 특이한 것이었다. 이종욱이 총독부와 접촉을 시작한 것은 폐사의 위기에 처한 월정사 사채정리 업무를 맡으면서였다. (중략) 이종욱의 이러한 적극 친일이 실은 독립운동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이었다고 한다. 해방 후 밝혀진 바인데, 이종욱은 적극 친일을 하는 한편 임정과 계속 연락을 가지면서 군자금을 밀송하곤 했다고 한다.”(본문 219)

     

    친일파 연구로 일생을 바친 시인 임종국은 저서 <실록 친일파>에서 지암 이종욱 스님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암 이종욱(1884~1969) 스님은 누구인가. 지암 이종욱 스님은 한국불교의 상징인 조계종과 조계사를 재건한 주역이다. 하지만 이보다 불교계의 대표적 친일파로 사람들에게 더 알려져있다.

     

    10여 년 동안 지암 이종욱 스님을 연구해온 저자 박희승 조계종 문화부 차장은 최근 <조계종의 산파, 지암 이종욱>을 펴내 스님의 일대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재조명했다.

     

    박희승 차장은 일제 치하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라의 독립과 한국불교를 지켜내기 위한 지암의 고뇌를 더듬으며 친일행위라는 단편적인 사실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자료와 증거를 통해 지암의 삶에 신중하게 접근하려 했다고 밝혔다.

     

    저자는 조계종 불학연구소 연구과장 재직 당시,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으로 국가훈장을 받은 이종욱 스님이 친일파로 비판 받는데 이에 대한 종단의 의견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그 후로 지암 이종욱 스님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지암 이종욱 스님의 친일파가 전면화 된 것은 임혜봉에 의해서다. 임혜봉은 저서 <친일불교론>(민족사)에서 이종욱의 친일은 조선불교계 친일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친일행적과 조선불교 조계종의 성립 그리고 종명의 제정과 그 존속 여부 등은 재고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현 조계종이 일제 당국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암의 일제협력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전반부에 눈부신 항일운동을 했던 지암이 3년간 감옥살이 후 월정사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 사찰과 교단활동에 뛰어들었다. 조선불교도의 숙원이었던 총본산 건설을 성사시켜 조선불교조계종을 재건하고 종정 한암 스님의 지시로 종무총장 자리를 맡아 종단을 책임졌다이 과정에서 지암은 종단의 책임자로 일제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지암은 31본산 주지 대표를 맡으며 여러 관변 단체에 불교계를 대표해 참가해야 했다. 지암은 19401<불교시보>31본산 주지 대표로 총본산 기구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실현시키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니까라고 말하며 강력하게 교단 재건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실제로 지암은 일제강점기 말기 법명 종욱 앞에 출생지 광정리에서 따온 광전(廣田)’을 앞에부터 광전종욱(廣田鍾郁)’이라고 창씨개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지암을 친일파로만 비판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가 없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일제강점기의 많은 친일파처럼 지암은 자신의 출세나 부귀영화를 위한 행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그는 조선불교도의 오랜 염원이 총본산 건설과 교단 재건을 위해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31본산 주지 대표와 종무총장을 맡아 오욕을 감수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친일 비판의 집중적 표적이 되는 총독부 출입 기록도 내용을 살펴보면 총본산 건설과 조계종 인가 관련 출입 기록이 훨씬 많다고 말했다.

     

    저자는 지금은 대부분 입적하셨지만, 조계종 원로 큰스님들이신 석주·고송·관응·범룡·천운 스님 등 20여 분을 직접 찾아 당시 증언들을 들어본 결과 한결같이 지암은 친일파가 아니라 일제에 협력하는 척하면서 속으로 항일운동을 했던 애국자였다고 말했다고 강조했다.

     

    지암 이종욱 스님은 파고다공원의 3·1만세운동에 직접 참가했으며,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불교계 대표로 참여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내무부 참사, 국내특파원으로 연통제 국재조직 총책,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대동단과 김가진 이강공 상해망명사건 주도, 청년외교단 애국부인회 대한적십자사 조직, 대한불교 독립선언서 대한의용군승단 주도, 불교계의 상해임시정부 지원 등 많은 항일운동을 펼쳐왔다.

     

    저자는 이로 인해 3년간 옥살이를 했고, 출소 뒤에는 폐사 직전의 월정사를 구해 주지에 취임하고 이후 전국 31본산 주지 대표로 총본산 건립과 조계사를 창건했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로 주목받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지암은 1944년 항일무장투쟁을 도모했다는 증언도 있다고 설명했다.

     

    저자 박희승 차장은 조계사와 조계종의 재건자인 지암을 통해 한국불교 근현대사의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길 바란다책은 모든 사실을 통해 엮어졌다. 앞으로 이런 사실에 대해 공정하고 균형 잡힌 재평가가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