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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의 이완용, 이회광 (李晦光)

草霧 2013. 12. 5. 10:34

 

 

 

 

 

종교

 

 

이회광 (李晦光, 18621933)

 

 

 

 

불교계의 이완용

 

 

 

 

    

1912년 조선선교양종각본산 주지회 의원 원장

1915년 불교진흥회 조직

1919 일본 임제종과 합병 획책

 

이회광(李晦光, 1862년 ~ 1933년)은 한국승려이다. 양주 출신으로 19세에 출가하여 설악산 신흥사에서 정함스님에게 득도한 뒤 건봉사에서 보운스님의 법통을 이었다. 이회광은 역대 고승들의 행적을 적은 《동사열전》에 조선의 마지막 대강백(大講伯)으로 기록되었을 만큼 명망이 높은 승려였다. 이 때문에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앞두고 1906년 조직된 친일 성향의 불교 단체 불교연구회1908년 원종이라는 종단을 창설해 이회광을 종정으로 추대했다.

 

이때부터 친일 행적을 보이기 시작한 이회광은 이용구의 권유에 따라 일본인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를 원종 고문으로 임명하였고, 1910년 한일합방이 성사되자마자 일본의 소토슈(曺洞宗)와 연합을 추진했다. 연합 조인은 1910년 10월 6일의 일로, 이에 따르면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합병된 셈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연합 조약을 직접 체결한 이회광은 ‘불교계의 이완용’으로 불리며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조선총독부는 이듬해 사찰령을 발포하여 이회광이 추진한 소토슈와의 연합은 부결하였으나, 그를 해인사의 주지로 임명했다. 사찰령에 따라 통폐합된 30본산 연합체의 대표격인 주지회의원 초대 원장도 맡았다. 원종 고문으로 임명된 다케다는 일본 불교 소토슈 승려로 현성사 주기를 하였고, 을미사변에 참여하였으며 이용구를 통해서 동학의 분열과 일진회의 어용화를 획책한 사람이다.

 

이후 1915년에는 친일 단체인 불교진흥회를 조직하고 경술국적 중 한 명인 조중응을 고문으로 추대한 뒤, 또다른 친일 승려인 강대련과는 대립하면서 열성적인 친일 활동을 벌였다.

 

김구하, 강대련, 곽법경, 권상로 등 다른 친일 승려들과 함께 삼십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 김구하가 추진한 일본불교시찰단에 참여하여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들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현금으로 여행 경비를 받았으며, 한국에서 떠날 때는 이완용이 전송하고 일본에 도착해서는 조선총독을 지낸 일본 총리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초대를 받는 등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이회광은 족자를 선물로 준비해 데라우치에게 전달했다.

 

1919년 3·1 운동 직후에는 일본 불교와 조선 불교 임제종을 합병하고자 다시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 정부의 고위 관료들과 접촉하고 돌아와 합병을 추진했으나, 강대련과의 갈등으로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여론이 악화되면서 해인사 승려들이 이회광의 사임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1924년 결국 해임사 주지 자리에서도 밀려났다. 조선총독부를 제치고 일본 본국과 직접 접촉하다가 말썽을 일으키는 지나친 친일 성향과 권력욕은 총독부와의 관계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회광은 이에 굴하지 않고 위봉사 주지직에서 밀려난 곽법경과 함께 현 조선불교를 근간부터 바꾸어 정교일치(政敎一致)와 일선융화(日鮮融和)로 불교계를 개혁해야 한다는 친일적인 내용의 건백서를 제출했다. 김구하도 함께 공작에 참가했고 곽법경은 건백서를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기까지 했으나,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계획은 또다시 좌절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민족문제연구소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불교를 일본에 팔아먹은 ‘불교계의 이완용’으로 지탄을 받고 있다. 또한 그가 추진한 일본 불교 소토슈와 연합 조약은 민족계와 친일계로 불교계가 나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울러 1980년 후반까지 이어져온 불교계 내분의 뿌리가 되었다.

  • 원종
  • 불교진흥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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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 마지막 대강백에서 매종역조의 친일승려로

    28세의 나이에 보운 긍엽 (寶雲 亘葉) 선사의 법맥을 상속받은 뒤 강당을 개설하고 독자적으로 설법을 시작하였을 때, 양서(황해·평안도)와 삼남(충청·경상·전라도)의 학인들이 풀덤불을 헤치며 모여들었다는 이회광스님.

     

    그는 범해(梵海)가 편찬한 {동사열전}(東師列傳)에 기록된 조선 왕조 마지막 대강백 (大講伯)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처럼 뛰어난 학덕과 명성을 보전하지 못하고 한낱 권승 (權僧)이 되어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부속시키는 친일의 길을 걸어 불교계의 이완용이라는 오명을 남기고 말았다.

     

    이회광이 이른바 종단을 팔고 조상을 바꾼 '매종역조'(賣宗易祖)를 행하였다 하여 비난의 원인이 된, 조선의 원종(圓宗)과 일본 조동종(曹洞宗) 간의 연합 획책은 19108월의 강제적인 한일'합병'조약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인 그해 106일이었다.

     

    이회광이 저지른 매종역조의 망동은 원종이 성립되면서부터 비롯한다. 그런데 원종의 뿌리는 19062월에 설립된 친일 성향의 불교연구회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불교 연구회는 화계사(華溪寺)의 승려 홍월초(洪月初)와 봉원사의 이보담(李寶潭)이 조직한 단체로서, 초기에는 명진 학교 (明進學校)를 설립하는 등 불교계에 새 기운을 진작하려는 면도 있었으나, 이들은 일본 정토종의 종지 (宗旨)를 따르고 또한 일본 정토종 승려 이노우에 (井上玄眞)와 결탁하여 일찍부터 친일화의 길을 걸었다.

     

    불교연구회는 창설 인가를 얻자 일본 정토종을 표방하고 또한 일본 정토종의 '정토종교회장' (淨土宗敎會章)이라는 뱃지를 회원에게 달게 하는 등 친일행위로 말썽을 일으켰다.

     

    이렇게 되자 불교연구회 일파들은 19086월 단체의 이름을 원종종무원 (圓宗宗務院)으로 바꾸고 종정으로는 당시 학인들 사이에 명망이 높았던 이회광 스님을 추대하였다.

     

    원종의 종정이 된 이회광은 '조선불교의 장래를 위해 반드시 일본불교의 원조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에게 설득당해 그가 추천하는 일본 조동종의 승려 다케다 (武田範之)를 원종의 고문으로 앉혔다.

     

    이회광이 이용구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일본 승려를 원종의 고문으로 앉힌 것은 그가 친일파로 전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원종의 고문이 된 일본 승려 다케다가 불교수행에만 몰두하는 수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다케다는 일제가 조선을 '병합'했듯이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병합'시키려는 야심을 가진 권승 이었던 것이다.

     

    다케다는 자신이 소속된 일본 조동종과 조선불교 원종을 병합시키고자 활동을 개시하여 먼저 이회광을 회유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일본불교 종파 가운데 조선에 진출하여 많은 세력을 확장한 정토종, 진종(眞宗) 등과 조선불교 원종사이를 이간시키는 공작을 벌였다.

     

    원종의 종정인 이회광도 선()을 종지로 하는 조선불교는 일본의 진종이나 정토종과는 도저히 융화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를 눈치 챈 다케다는 일본의 선종(禪宗)인 조동종과의 '병합'을 적극 추진했다.

        

    이러던 차 19108월에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다케다는 즉시 이회광 일파에게 일본 선종인 조동종과의 연합을 설득하고 나섰다. 이리하여 이회광은 조선불교와 연합할 수 있는 일본 종파는 조동종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합병'되던 그 해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의 일본 조동종 관장 (管長:종정을 가리킴) 이시카와(石川素童)는 이회광의 제의를 듣고 조선불교 원종이 일본 조동종에 종속되는 형식으로서의 연합을 고집했다. 그러나 이회광 역시 완강하게 대응해 조선불교 원종과 조동종은 마침내 종속이 아닌 약간 대등한 관계에서 1910106일에 연합을 조인했다.

     

    이는 같은 해 822일 한일'합병'의 조인이 있은 지 꼭45일 만의 일이었다. 나라가 강제로 '합병'당한 지 45일 만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 불교 마저 일본에게 '합병'되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 조동종 종무대표자 히로쓰 (弘津設三)와 이회광이 조인한 연합조약은 전문(全文) 7개조였다. 이 조약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제2항부터 제5항까지가 일본 조동종 위주의 불평등한 내용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2항에서 일본 조동종이 조선 원종의 설립 인가를 담당한다는 것은 은연중에 원종이 조동종에 부속됨을 의미한다.

     

    둘째, 3항에서 조선 원종은 일본 조동종에서 고문을 초빙하지만 조선원종에서 고문을 파견한다는 내용이 없는 것도 대등한 입장에서 이 조약이 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는 근거가 된다.

     

    셋째, 4항 역시 불평등하다. 4항에서 조선 원종은 조동종의 포교에 편리를 제공하고 각지의 사찰에서 숙식처를 제공한다고 되어 있지만 조선원종의 일본 포교에 대한 조동종의 배려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조약을 체결하고 귀국한 이회광은 13도의 중요한 대사찰을 방문하여 연합을 찬성하는 날인을 받고자 했으나, 조약 전문이 원종 종무원 서기의 손으로 통도사 승려들에게 누설되자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회광이 조약의 찬성을 얻고자 동분서주할 때 조동종은 와카오 (若生國榮)를 특파하여 조선총독부에 조선불교 원종의 설립 인가를 청원했다.

     

    한편, 조약의 전문을 읽어 본 조선 승려들은 조선불교를 조동종에 개종(改宗)내지 매종(賣宗)한 행위라면서 이회광을 규탄하였다. 이회광의 매종역조의 망동에 반대하여 전남 백양사(白羊寺)의 학승 박한영(朴漢永), 화엄사의 강사(講師) 진진응(陳震應), 범어사의 한용운(韓龍雲)과 오성월(吳惺月) 등을 필두로 많은 조선 승려들이 이회광의 연합운동을 맹렬하게 반대하였다.

     

    이들은 태고(太古) 보우국사(普愚國師) 이후 조선의 선종은 임제(臨濟)계통이라고 주장하면서 송광사, 쌍계사, 범어사 등에 임제종(臨濟宗)사무소를 두면서 초대 종정에 선암사(仙岩寺)의 김경운(金擎雲)을 선출한 뒤격렬하게 이회광을 비판했다.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지 반 년도 되지 않아 일본 조동종이 개입한 조선불교계의 대결상황을 지켜보던 조선총독부는 조동종의 승려가 접수시킨 조선 원종의 설립 인가에 대한 결정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116월에 조선총독부는 사찰령(寺刹令)을 발포(發布)하면서, 조선불교는'선교겸수'(禪敎兼修)를 종지로 한다는 공식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총독부는 조선 원종의 설립 인가를 부결한 셈인데 이로써 이회광의 조동종과의 연합운동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회광은 이러한 망동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친일 성향을 총독부로부터 인정받아서인지 사찰령 반포 후에 30본사의 하나인 법보사찰 해인사의 제1세주지로 1911124일 인가를 받았다. 이어 그는 19126월에는 30본산주지회의를 발기해 '조선선교양종각본산 주지회의원'을 발족시켜 초대 주지회 의원 원장이 되었다.

        

     

    친일단체 불교진흥회 조직

    1대에 이어 제3대 주지회 의원 원장이 된 이회광은 조선불교의 종권을 한손에 움켜쥐고 있었으나, 이 무렵(1914) 공명심이 많았던 30본산의 하나인 용주사 주지 강대련 (姜大連: 창씨명 渭原馨, 18751942)의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이회광과 강대련의 종권 다툼은 강대련의 승리로 끝났다. 강대련은 일본 진언종(眞言宗)의 예를 따라 '30본산연합제규'(三十本山聯合制規)를 만들고 경성 각황교당(覺皇敎堂)에 연합사무소를 설치하였으며, 이어서 1915116일 강대련이 30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렇게 전국 사찰의 권리를 강대련이 좌우하게 됨에 따라 이회광은 스스로 자기의 권리가 시든 줄 알고 강대련과 대립코자 191412월에 경성의 유생들과 연락하여 불교진흥회를 조직하고 자기의 권리를 옹호하려 했는데, 당시 조선 승려들은 이회광의 이러한 행동을 비난하였다. ({동아일보}, 1920.7. 3)

     

    불교진흥회의 발기인은 30명으로 이회광을 비롯한 30본사 주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1914115일자로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았다.

     

    이 회의 대표는 회주(會主) 이회광이었고 소수를 제외하고는 29명에 이르는 간사들 대부분이 일반인 또는 유생들이어서, 당시의 조선 승려들은 이회광과 유생들이 결탁하여 불교계의 종권을 장악하려고 불교진흥회를 조직했다고 비판했다.

     

    친일 승려 이회광의 주도로 조직된 불교진흥회는 19151년 동안에는 정기간사회(1915. 5. 9)와 정기총회(6. 20)를 개최하고, 실업가 70여 명의 입회를 받아들이면서 입교의례를 장엄하게 거행하기도 하고, 기관지{불교진흥회월보}(1915. 3. 1512. 15, 통권 9)를 발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강대련의 세력을 제압하고자 조직했던 불교진흥회는 1915년 반짝 활동을 보이다가 곧 시들해지고 마침내 19172월 친일 거두 이완용*, 권중현* 등이 발기한 불교옹호회로 대치되고 말았다. 따라서 불교진흥회가 친일인사들인 이완용 일파의 불교옹호회로 계승된 것을 보더라도 이 단체가 친일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교진흥회의 친일경향은 '위로는 일본 천황의 통치를 보필하며 아래로는 백성의 복()을 도모'한다는 설립취지문에서도 명백하게 목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일'합병'조약체결 당시 각료였던 제1급 친일파 조중응* 등을 고문으로 추대한 것에서도 불교진흥회가 친일성향을 띠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일본 총리 데라우치에게 족자를 선물하다  

    19174월 통도사 주지 김구하(金九河)가 제330본산 연합사무소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위원장이 되자 그 해 9월 일본 시찰을 추진하였는데, 단장은 김구하였고 단원으로는 당대의 대표적인 친일 승려들인 이회광, 강대련, 곽법경, 권상로* 9인이었으며, 이들을 안내한 사람은 총독부 학무국 촉탁인 일본인 관료 가토(加藤灌覺)였다.

     

    이들은 조선총독 하세가와 (長谷川好道)로부터 특별희사금 300원을 그리고 정무총감으로부터도 현금 100원을 하사받아 일본 시찰의 경비로 보조받았으며, 심지어 여행중인 98일 도쿄에서도 조선총독부 도쿄출장소에서 마침 본국에 출장 중이던 정무총감을 다시 만나 이세대묘(伊勢大廟)의 배관(拜觀)을 권유받고 현금100원을 기부받기도 했다.

     

    이회광을 포함한 조선불교 대표급 승려로 구성된 일본 시찰단은 1917831일 제1급 친일거두인 이완용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며 일본 시찰 길에 올랐다.

     

    이들은 본격적인 시찰 여행이 시작된 94일 오전 일본수상관저에 초대를 받았다. 당시의 일본 총리는 데라우치(寺內正毅)였다. 데라우치는 19105월에 제3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하여 한일'합병'을 성사시키고 초대 조선총독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조선불교 일본 시찰단의 단장 김구하는 무려 150원이나 하는 은제향로를, 그리고 약삭빠른 친일 강백(講伯) 이회광은 특별히 준비해 간 그림족자를 무단통치자 데라우치에게 선물했다.

     

    데라우치는 이회광, 김구하를 비롯한 시찰단 일행을 식당으로 인도하여 다과와 향응을 베풀고,{조선불교총보}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미(美美)(아름답고 아름다운)담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조선 승려들이 조선 땅에서는 결코 받아보지 못한 성대한 환대였다. 이런 환대는 시찰이 진행되는 25일 동안 줄곧 계속되었는데 이들이 만끽한 융숭한 대접은 총독부와 일본 정부가 정치적 선전을 목적으로 한 치밀한 계산 아래 마련한 회유책이었지만 당시 조선불교 일본 시찰단의 승려들은 민족적 주체의식을 망각하고 오히려 자진하여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그 대표적인 행동이 김구하가 메이지(明治) 일왕의 능에서 '천황의 권속들인 우리들'이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축문을 봉독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시찰단이 메이지 일왕의 능에 참배를 한 것은 물론이고, 도쿄호국불교단의환영회에서는 김구하가 답사를, 이회광과 강대련이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이회광을 비롯한 시찰단의 친일행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행동으로는, 다이쇼(大正) 일왕이 일광산 (日光山)에 와서 피서를 하고 궁궐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 승려들이 카미노(上野)역에 나가 문부성의 지도로 일본 황족· 귀족의 다음 자리에 서서 '천황의 행차'를 배영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일본 신사(神社)의 본원지인 이세신궁 참배,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묘소 참배 등도 일본 시찰시의 대표적인 친일행적으로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임제종과의 합병 획책

    3·1 독립만세운동의 열기가 아직 식지도 않은 191911, 30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 강대련은 일본 승려와 '황실'의 인척관계를 예로 들고는, '일본 승려와 조선 승려들이 조선왕족의 여자나 양반의 딸과도 결혼할 수 있게 하자'[조선불교기관확장 의견서]를 조선총독사이토(齊藤實)에게 제출하였다.

     

    강대련의 이 친일 망발로 조선불교계가 시끌할 때인 역시 같은 해 11월에 이회광은 일본 임제종과 조선불교의'합병'을 추진하고자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는 일본 임제종의 한낱 포교사에 지나지 않는 아토후지 (後藤瑞岩)와 결탁하여 외면상으로는 일본의 포교방법을 배우고 일선(日線)융화를 도모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그의 추종자인 청암사(靑岩寺) 주지 김대운(金大運), 대원사(大源寺) 주지 조영태(趙永泰) 그리고 진창수 (陳昌洙)3명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일한 이회광 일파는 총리대신과 체신대신을 찾아가 "조선 불교는 다른 종교와 같은 사회에 대한 자선사업이 없어 세상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대로 두어서는 조선불교가 진흥하지 못할 것이니, 조선불교의 종명(宗名)을 개정하고 사찰의 재산을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때마침 조선총독 사이토가 도쿄에 가 있었는데, 이회광은 총리대신을 만난여세를 몰아 체신대신과 함께 사이토를 만나 종명을 바꿀 것과 사찰재산을 정리할 것 그리고 사찰재산을 일괄해 관장하여 사업을 일으킬 주관 부서로 새로운 조선불교종무원을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이 때 사이토는 이회광에게 "조선에 돌아간 뒤에 잘 조처할 터이니 그대로 돌아가라"고 했고, 체신대신은 "계획을 후원할 테니 실행에 옮기도록 노력하라"고 했다.

     

    이회광 일행은 도쿄에서 일본 정부 요로의 인물들과 접촉한 뒤에 교토(京都)의 묘심사 (妙心寺)에서 아토후지와 합류하여 조선불교의 일본임제종과의 합병문제를 숙의했다.

     

    이같이 이회광과 함께 모의한 아토후지까지도 "내가 이회광과 친하여 일선(日鮮)의 융화를 도모코자하였더니 급기야 그 사람의 심리를 본즉 조선불교를 개혁하려는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 자기가 조선불교의 권력을 통솔하려는 모양이다"라고 총독부종교과장 나카이(半井淸)에게 말할 정도였다.

     

    19202, 일본에서 돌아온 이회광은 김룡사, 고운사, 은해사, 동화사,기림사, 통도사, 범어사 등 경남·경북 7개 본산주지를 대구로 초청하여 자신의 음모를 구체화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10년 전 조동종과의 연합을 획책할 때 조약 전문을 밝히지 않고 진실을 감추면서 연합을 성사시키려했듯이, 이번에도 경상도의 7개 본산주지들에게는 일본 묘심사와의 관계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불교 교육 사업을 진흥하며 조선불교를 개혁하기 위해 불가불 종명을 개칭하고 종무원을 설립하여 사찰재산을 정리해야 되므로 30본산에 통문(通文)을 보내 종명개칭신청서와 이유서에 연명하여 총독부에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이 때 모인 사람들은 "그렇게 되면 이 일을 30본산연합사무소와 의논해야 되고, 의논하게 되면 자연히 의견이 충돌하여 일이 잘 되지 않을 것이므로 경상도 8개 본산(앞의 7개 사찰과 이회광이 주지로 있는 해인사를 포함한 본산 숫자)이 먼저 주창하고, 그 취지를 각 본산에 알려 동의하면 좋으려니와, 듣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는 합의를 보아 각 본산에 그 뜻을 알렸다.

        

    이회광의 통문을 받은 각 본산에서는 30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인 강대련에게 그 진위를 물어왔다. 그 무렵 일본 교토의 {중외일보}(中外日報)는 이회광이 일본에서 조선불교를 임제종 묘심사파에 부속시켰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로 인해 일본에 유학중인 조선 승려들로부터 진위를 묻는 서신이 강대련 앞으로 쇄도했다.

     

    이에 강대련은 총독부 종교과장 나카이를 찾아가 "이회광 스님이 중앙 정부에 교섭하여 조선의 각 사찰을 일본 임제종 묘심사에 부속시킨다 해서 전국사찰의 승려들이 동요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고 물었다.

     

    나카이 종교과장은 아토후지에게 들었다면서 "이회광 스님이 조선불교의 권력을 쥐고 통솔하려는 야심이 있다고 하나, 조선 사찰은 사찰령에 의하여 조선총독이 결단할 것이므로 아무리 본국대신에게 진정서를 제출해도 효과가 없을 것이니 조선의 승려는 하등 동요할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강대련은 종교과장과 있었던 이야기 내용을 그대로 공문에 실어 각 본산에 회신했다. 이렇게 되자 이회광은 전국의 많은 승려들로부터 빗발 같은 비난의 화살을 받게 되었다.

     

    이에 이회광은 태고 보우국사와 중국 석옥청공(石屋淸珙) 선사와의 관계를 얘기하면서 임제종 태고파(太古派)라고 개칭하자는 뜻이었지 일본 임제종 묘심사에 부속시키려 한 것은 아니었다고 궁색한 변명을 했다.

     

    이회광은 궁지에 몰리자 {중외일보} 기사의 영향을 최소화시키려 노력했으나, 도리어 1920626일자에 '일조불교 제휴 반대'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강대련은 다시 이 {중외일보}의 기사를 번역하여 각 사찰에 돌려 이회광 일파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이회광 일파는, 자신들의 계획이 실패한 것은 강대련이 {중외일보} 기사를 번역하여 각 사찰에 돌렸기 때문이며, 이 일이 국내 신문에 보도되어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추종자 조영태, 김대운을 시켜 경성 지방법원에 고소를 제기했다. 이 소송은 후일 이회광과 강대련이 화해함으로써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회광의 일본 임제종 귀속 획책을 안 조선의 승려와 불교인들, 심지어 일반인들까지도 분개·비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일본의 조선불교 유학승들도 620일 일제히 도쿄에 모여 이회광을 성토하는 반대운동을 열렬하게 전개했다. 또한 그들은 이회광의 음모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4개항의 성토문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이회광의 이 경거망동에 처음 회동했던 경상도의 8개 본산과 국내외 불교청년들이 거세게 비판하는 가운데 19231014일 해인사 대중 승려들은 총독부에 주지 이회광의 사임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에 총독부에서는 이회광을 사임시키고 후임으로 김만응(金萬應) 스님을 인가하였다. (1924. 9. 10).

       

     

     

     

    이회광의 마지막 친일 음모

    해인사 주지직에서 쫓겨난 이회광은 역시 본산 주지직이 박탈된 곽법경(郭法鏡)과 손을 잡고 또 다른 친일 음모를 꾸몄다. 이회광의 공범자가 된 곽법경은 전주의 본산 위봉사(威鳳寺) 주지 출신인데 그는 매불(賣佛)사건으로 1925219일 총독부로부터 주지직을 취소당한 자였다.

     

    이회광과 곽법경, 이 두 사람은 불교유신회가 개혁운동을 일으켜 조선불교 중앙총무원을 조직했을 때(1922. 1. 9) 곽법경은 임시 총무원장에, 이회광은 사무부장이라는 요직에 앉았다.

     

    그러다가 4개월 뒤에는 변절하여, 친일 성향의 본산 주지들이 총무원에 대응하여 화급하게 급조한 교무원의 이사가 되었다. , 이회광은 교무원측의 서무이사로, 곽법경은 학무이사로 변신한 전력을 가진 기회주의자들이었다. (1922. 5. 30).

     

    이런 과거를 가진 두 사람은 30본사의 하나인 법보사찰 해인사와 대찰위봉사의 주지직을 박탈당하자, 본산주지 시절의 영광과 명리(名利) 그리고 조선불교계의 교권을 한때나마 접해본 그 권좌의 달콤함을 잊지 못하고 조선불교계의 종권(宗權)을 다시 탈환하기 위하여 은밀하게 음모를 꾸몄다.

     

    이회광, 곽법경 외에 김보운 (金寶雲:일명 사바하)과 김구하가 가세된 이일파들은 일정한 직업이 없는 일본인 마사키 (正木一郞)와 조선인 송진옥(宋鎭玉) 등과 의논하여 이른바 조선불교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일선융화를 표방한 불교운동을 일으켰다.

     

    우선 그들의 대표자로 나선 곽법경은 장문(長文)의 건백서(建白書)를 휴대하고 19265월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도쿄에서 귀족원 의원 도변(渡邊) 아무개 씨와 아무개 통신사 사장 우우언태랑 (宇佑彦太郞)과 결탁하여 건백서를 내각에 제출하려고 수상을 방문하는 등 맹렬히 암중모색을 했다.

     

    그런데 그 건백서의 내용은, 현재의 조선불교의 모든 기관을 파괴하는 동시에 새로이 경성에 조선불교 총본산을 건설하고 그 본산 법당 안에는 석가여래와 메이지 일왕과 고종태황제 (高宗太皇帝)를 한자리에 안치하여 정교일치(政敎一致)로 일선융화를 철저히 실천하겠다는, 불교의 본지(本旨)를 망각한 기괴하고도 전적으로 친일적인 것이었다.

     

    곽법경은 이 음모를 추진하면서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조선불교 유학생들로부터 무슨 위해나 당할까 하여 도쿄 경시청에 보호원(保護願)을제출하는 동시에 조선불교 유학생들을 모함·중상하기도 하였다.

      

      

     

     

     

    이회광과 곽법경 일파가 획책한 이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일본인 마사키(正木) 등이 1925년 가을부터 선승 임해봉(任海峰)을 앞세워 이른바 조선불교부흥회 또는 조선불교 임제종연합회를 조직하였다.

     

    마사키와 임해봉은 회관을 경성의 견지동에 두고 그 동안 수삼차 도쿄을 오가며, 역시 우우언태랑의 소개로 조선인 몇 사람을 방문하여, 조선불교가 일선융화에 공헌할 터이니 임해봉을 수원 용주사 주지로 임명하고, 그 외의 다른 절도 누구누구에게 맡겨 달라는 등 별별 공작을 다 하였다.

     

    이런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 임해봉이 경비조달을 위해 수원 용주사 소유 전답의 소작사음권 (小作舍音權)을 제주도 사람 이종태 외 5, 6명에게 팔아 수천여 원을 편취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19264월 도쿄에서 경성으로 온 임해봉이 경찰서에 구속, 음모가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일본인 마사키는 또다시 이회광, 곽법경, 김보운, 김구하 일파와 더불어 계속 음모를 추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국내 신문에 보도되자 이들의 음모는 백일하에 폭로되어 마침내 이회광 일파의 음모는 와해되었다.

     

    이회광은 1908년 원종 종정이 된 이래 1926년의 곽법경 사건에 가담하기까지 18년 동안 조선불교계의 중심권에서 갖가지 파란을 일으키다가 이 사건을 끝으로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혀 버리고 다시는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내외전(內外典)을 두루 섭렵하고 '물푸레나무 꽃의 향내를 맡았고 매화나무 열매가 익었음을 보았다'{동사열전}의 저자가 극찬한 조선조 마지막 대강백 이회광.

     

    그는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 친일단체 불교진흥회의 조직, 조선을 무단통치한 일본 총리 데라우치에게 족자를 선물한 사건 그리고 일본 임제종과의 합병 및 곽법경 사건 등 반민족적이고 조선불교의 전통에 먹칠을 하는 매종역조적인 망동으로 이 땅의 불교계에 몇 차례 소용돌이를 일으키고는 1933년 한강변에 있는 견성선원에서 세수 72, 법랍(法臘) 53년의 생애를 쓸쓸하게 마감했다.

        

        

     

     

     

                                                 임혜봉 (불교사연구가)

     

     

     

    친일승려 이회광의 야욕과 몰락

     

    [역사추적] 덕수궁 선원전, 해인사 포교당 되다

    그리 잘 알려진 일은 아니지만 오래 전에 하마터면 팔만대장경 경판이 몽땅 일본으로 옮겨질 뻔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대장경을 간행하겠다고 해인사 주지승과 일본인 사토 로쿠세키(佐藤六石)가 공모해서 추진했던 이 일이야 결국 당국의 사전저지로 무산되고 말았지만, 어쨌거나 팔만대장경 밀반출 미수사건은 19103월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자칫 이 땅에서 팔만대장경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떠올린다면 누구라도 그저 섬뜩한 느낌을 지우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어찌된 일인가 했더니 그토록 험한 꼴을 당할 위기의 이면에는 친일승려로 널리 알려진 이회광(李晦光; 1862-1933)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1918년 어느 날, 우연찮게 친일승려 3인방이 나란히 섰다.

    왼쪽이 용주사 주지 강대련(姜大蓮)이고, 가운데가 통도사 주지 김구하(金九河)이며,

    오른쪽이 문제의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다.

     

     

    일찍이 1908년에 불교교단 원종(圓宗)을 성립한 이래 1910년에 일본 조동종(曹洞宗)과의 예속적 연합을 추진하였고, 사찰령(寺刹令)의 제정 이후에도 계속하여 30본산 연합체제를 주도하면서 1920년에는 역시 일본 임제종(臨濟宗)과의 병합을 추진하는 등 일관되게 친일의 길을 걸었던 이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나름의 권세를 한껏 누렸을 것 같은 그의 행적을 죽 따라가 보면 어째 말로(末路)가 전혀 평탄하지 못했던 사실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이 친일행위에 대한 당연한 업보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동아일보> 1924818일자에는 '이회광(李晦光)의 과실(過失)로 해인사의 대치욕(大恥辱), 돈 십원에 가장 집물을 경매, 부처님만 무사하게 되었다'는 제목의 기사 하나가 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매일신보> 1926522일자 기사.

    이때까지도 이른바 '이회광 사건'과 관련된 법률적 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시내 정동(貞洞)에 있는 합천 해인사 중앙포교소에서는 광화문 금융조합에서 육천 원을 차용하였던 바 그 기한이 지났으되 변리도 물지 않으므로 광화문 금융조합에서는 약 한 달 전에 그 포교소 안에 있던 가장 집물을 차압하여 두었던 바 드디어 재작 16일 오전에 경매하여 버리고 말았다.

     

    경매 당한 물건은 풍금과 난로 등 기타 약 백 구십여 원어치이며 부처님만은 겨우 무사하였다는데 기만(幾萬)의 재산을 가진 대본산 해인사로 이와 같이 몇 십원을 변통치 못하여 변리도 못물다가 내종에 차압을 당한 것은 현주지 이회광씨와 본사와의 갈등이 심한 까닭이라더라."

     

    이게 과연 무슨 뜬금 없는 소리일까? 알고 봤더니 사건의 개요는 대충 이러했다. 해인사 주지 이회광이 정동 일대의 광활한 부지를 인수하여 그곳에다 '해인사중앙포교소(海印寺中央布敎所)'라는 이름으로 사찰을 건립한 것이 1920년 봄 무렵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해인사에서 직접 불상을 모셔오기까지 했는데, 정작 그 관리와 운영은 아주 엉망이었던 모양이었다.

     

    분명히 포교소 건립과 관련된 자금은 그 자신이 주지로 있는 해인사 측에서 나왔을 테지만, 정작 해인사의 명의로 확보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자기 개인명의로 해둔 데다 그 마저도 식산은행이나 한성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에 여기저기 저당을 잡혀 추가자금을 변통했던 지라 그럭저럭 수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빚이 잔뜩 누적되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회광 개인의 영광과 권세를 위해 애꿎은 해인사의 재산을 순식간에 다 부려먹은 꼴이 된 셈이다.

        

     

     

    19201225일에는 해인사에서 직접 불상을 모셔와

    총독부 관리의 참석 하에 화려한 봉불식 (奉佛式)을 거행하였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 일로 인하여 이회광은 해인사 주지로서의 권능을 완전히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1924911일에는 조선총독부가 김만응(金萬應)을 해인사 후임주지로 인가함에 따라 그는 스스로 친일승려의 자격(?)조차도 상실하는 처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확인된다. 일관되게 친일행적을 보여왔던 그를 구태여 내칠 까닭이 뭐 있겠냐 싶지만, 그는 이미 구제불능의 '사고뭉치'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수년 전부터 일본 임제종 묘심사(妙心寺)를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조선불교에 관한 모든 권한과 결정권이 조선총독에게 귀속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연히 일본 본국의 고관들을 들쑤시고 다닌다고 하여 총독부 당국의 눈밖에도 벗어난 상태였다. 그러므로 총독부로서도 그의 과오를 감싸줄 리는 만무했을 터였다. 친일승려 이회광의 몰락은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이회광이 1920년에 건립했던 불교포교소가 바로 '정동(貞洞)'이라고 했다. 승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된 것이 1895년이고 보면, 불과 25년 사이에 시내 한복판에 번듯한 사찰을 세웠으니 그것이 제나름의 큰 공적이라면 공적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어쨌거나 이 대목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포교소라고 말하는 것이 있었던 곳이 다름 아닌 '덕수궁 선원전(德壽宮 璿源殿)' 구역이었다는 점이다.

     

    잘 알려진 바대로 흔히 '영성문 대궐(永成門 大闕)'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던 덕수궁 선원전 구역이 해체되기 시작한 것은 1919년에 고종 임금이 승하한 때부터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겠다. 그 중에 일부는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가 되었고 또 일부는 '덕수공립보통학교'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쪽이야 지금도 학교부지는 그럭저럭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대략 그 영역과 이후의 내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당최 그 윤곽을 그려내기가 어려운 곳이 하나 남아 있었으니 원래 선원전(璿源殿)과 사성당(思成堂)이 자리했던 정동 1-24번지 일대 (즉 지금의 미국대사관 부대사 관저지역)였다.

        

     

     

     

    <매일신보> 19201222일자 기사.

    여기에는 분명히 "영성문 대궐 구적 (즉 덕수궁 선원전 구역) 칠천 팔백 평의 넓은 터에

    해인사 포교당이 건설되었다"는 구절이 들어있는 것이 보인다.

        

     

    이 자리에 대해서는 약간 세월이 흐른 다음 19341224일에 이르러 조선저축은행이 이 터를 인수하여 중역사택을 짓는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한데, 그렇더라도 적어도 1920년 이후의 10여 년간의 연혁은 전혀 알려진 바 없었던 지역이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역사의 공백기에는 친일승려 이회광이 건립했던 사찰이 있었던 것이다.

        

     

     

    1920년 무렵에 촬영된 덕수궁 일대의 원경이다.

    아래의 파란색은 '대한문'이고, 위의 파란색은 '영성문'을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붉은색이 고종 승하와 더불어 해체되기 시작한 선원전 구역

    즉 지금의 미국대사관 부대사관저 일대이다.

    그 어디메에 '해인사 불교포교소'가 들어섰던 것이다.

        

     

    "서대문통에 고색이 창연하게 서 있던 '영성문'이 헐리기는 작년 여름의 일이다. 지금은 그 영성문 자리로부터 남편으로 정동까지 탄탄한 신작로가 새로이 뚫려있다. 이 신작로의 왼편 대궐자리에는 지금에 절이 되어 '선원전'의 뒤편자리에는 금칠한 부처님이 들어앉았다. 일시 정치풍운의 중심으로 동양의 주목을 모으는 '수옥헌'은 외국사람들의 구락부된 지가 이미 오래지마는 외국사신접견의 정전으로 지었던 '돈덕전'은 문호가 첩첩이 닫힌대로... 운운."

     

    이것은 <동아일보> 1921725일에 수록된 기사의 한 토막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대궐 자리의 절'이란 것이 바로 '해인사 중앙포교소'였다. 그러니까 선원전 구역을 헐어냈던 1920년부터 이른바 '이회광 파문'으로 불거진 사태의 수습을 위해 '정리위원회'가 구성된 1925년 무렵에 이르기까지는 불교사찰이 버젓이 선원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사실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옳겠다.

     

    그런데 이회광은 왜 하필이면 덕수궁 선원전 자리에다 절을 지으려고 했던 것일까? 여기에도 그냥 흘려듣기 어려운 숨은 뜻이 들어 있었다. 나중에야 결국 일개 '해인사'의 포교당으로 귀결되고 말았지만, 애당초 이회광은 이곳에다 일본 임제종에 부속된 '임제종태고파(臨濟宗太古派)'가 자신의 계획대로 성립하는 경우에 그 종무원(宗務院)을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빈민을 위한 시약원(施藥院)도 만들고 또 불교청년회 중앙회관도 만들 계획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조선불교의 본산을 구축하겠다는, 그것도 도성 한복판의 광활한 자리에다 절을 지어 올리겠다는 야심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가 무리하게 육, 칠천 평에 가까운 선원전 구역을 사들이려고 했던 까닭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나중에 스스로의 몰락을 자초하는 결과를 불러오는 직접적인 단초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덕수궁 선원전 구역의 해체 이후 굴절된 역사의 단면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다시 세월이 흘러 이곳은 해방 이후 미국대사관 권역으로 편입되고 말았으니 그 곤혹스러운 내력은 더욱 가중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그나저나 여기가 한때나마 어느 친일승려의 야망과 좌절이 잔뜩 배어든 곳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이제 몇이나 남았을까?

     

    이순우 기자(takehome)

      

      

    "풍전의 등화 같은 해인(海印) 고찰의 운명"

     

     

     

     

     

    친일승려 이회광의 말년행적은 이러했다

    <조선일보> 19241029일자에 '풍전의 등화 같은 해인(海印) 고찰의 운명, 이회광의 포교소 설치 이래로 그럭저럭 진 빚이 삼십여 만 원, 부속기관도 전부 폐지' 제하의 기사가 들어 있다. 여기에는 친일승려 이회광의 말년 행적이 어떠했는지가 잘 정리되어 있다. 그 전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합천 해인사의 보물 전부를 광화문금융조합(光化門金融組合)에게 차압(差押)을 당하였다 함은 이미 작지에 보도하였거니와 이제 그 해인사의 자세한 내용을 듣건대 속담에 '십년 공부 남무아미타불'이라더니 참으로 천여 년 동안 쌓고 쌓은 탑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과연 애처롭게도 되어 있다.

     

    그 절에서는 대정 9(1920) 경 당시 주지 이회광(李晦光) 시대에 경성에다 불교중앙포교소(佛敎中央布敎所)를 두기로 하고 정동(貞洞) 일번지의 건물을 육천 원에 매수하여 가지고 포교사업을 계속하던 바 그 포교소 구내에 잇는 제중원(濟衆院)으로 말하면 그 절의 경영이 아니오,

     

    다만 이회광 씨와 그 원장 장일(張一) 씨와의 사사 경영인데 지금 그 건물 소유권을 보면 그 포교소는 이회광 개인의 명의로 있고 제중원은 더욱이 중도 아닌 장일의 명의로 있는 바 본래 절 돈으로 산 개인명의로 권리를 넘겨 놓은 것은 잘못이며 또는 그 기지(基地) 육천 평에 대하여는 지난 12(1923) 이왕가(李王家)2월에 십 삼만 팔천 원에 매수하기로 계약하고 매년 일만 삼천 팔백 원씩 납부하기로 한 바

     

    그것은 사내의 경비 곤란으로 인하여 작금 양년(兩年)에 한 푼도 납부치 못하였으며 장차도 도저히 어렵게 되겠음으로 그 장소를 그대로 포교소로 사용할 수는 없겠으며 포교소의 존폐 문제는 본사에서 결정되기 전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기지에 대해여는 결국 이왕가와 해약하는 수밖에 없다는데 해약케 되면 계약에 의하여 매월 백 원의 위약금만 물어주면 그만이고

     

    그 건물 중 포교소는 이회광 씨의 명의로 한성은행 남대문지점(漢城銀行 南大門支店)에 삼천 오백 원에 저당되어 있고 그 제중원은 장일 씨가 금년 2월에 영동역전(永同驛前) 모에게 이천 오백 원에 저당하였는 바 이것만 이곳이 포교소의 건물과 기지에 대한 목잡한 문제이며 이 포교소 설치 이래에 그 영행이 직접 해인사에 미쳐 마침내 해인사 자체의 존폐 문제가 박절해 왔다.

     

    그 동안 소비한 금액이 절의 동산 소모가 십 사만 원이며, '해인사 주지 이회광'의 명의로 현금 돌아다니는 수형(手形)이 구만 원이니 십만 원이니 하여 자못 요령을 얻을 수가 없으며 그외 그때 사무원으로 있던 진창수가 이회광의 명의로 시내 수창동(需昌洞) 일백 칠십 번지 천일청(千一淸)의 재산을 사기횡령한 것이 육만 이천여 원이라.

     

    이것을 통계하면 근 삼십만 원의 거액의 금전이 경성중앙포교소를 중심으로 하고 일어난 소비액이다. 그 가운데 현재 채무로 되어 있는 것이 이회광의 유행 수형까지 합산하면 십 오만 원 이상이나 되는데 현재 해인사의 재산이라고는 남은 것이 다만 산림(山林)분인 바 그 산림은 직경 사십 리에 평가 사 오만 원밖에 되지 않는다 하니

     

    무엇으로써 이 채무를 보상하고 사내의 일을 정리할까 하여 사내승려 이백여 명은 좌불안석으로 매우 초조한 상태에 있으며 또는 일백 오십여 명이나 수용하는 사내학교는 부득이 지난 4월부터 문을 닫았다 하니 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 불교계의 기초인 해인사의 운명이 장차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을 아무래도 정리해 보겠다는 정신에서 지난 911일에 새로 주지의 자리를 김만응 씨가 차지하게 되어 여러 가지 교섭차로 일전 상경하였다가 차압의 급보를 듣고 재작 27일밤 차로 귀사하고 작 28일 밤차로는 농사 권업(勸業) 주임으로 있는 백성원(白聖元) 씨도 귀사하였으며 포교소에는 김구봉(金九奉) 씨가 혼자 남아 있어 본사의 결정을 기다린다더라

     

     

     

     

     

    이회광 李晦光 (1862 ~1933)

    서울. 승려. 법명은 사선(師璿유선(有璿). 호는 회광.

    19세에 설악산 신흥사 설허(雪墟) 문하의 정함(定含)에게 출가

    1890년 건봉사(乾鳳寺) 주지 긍엽(亘葉)의 법을 이어받고, 개강(開講)

    1895년 조선 승려의 친일행위가 가속화 또 의병 투쟁시 일본군의 사찰 주둔을 원하기조차 하는 경우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시도

    1906년 일본 정토종의 영향을 받아 불교연구회와 명진학교(明進學校) 설립

    1907년 이회광이 이 단체의 회장 및 교장 취임

    1908년 서울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圓宗) 설립, 그 초대 종정에 취임, 또 일본 조동종(曹洞宗) 승려인 다케다[武田範之]를 원종 고문으로 추대하고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에 종속시키려는 본격적인 작업

    1910년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조약 체결

    1911년 사찰령(寺刹令) 반포와 조선 승려들의 임제종(臨濟宗) 설립으로 반발로 무산

    조선불교가 30본산(本山) 체제로 전환, 총독부의 승인을 얻어 초대 해인사 주지, 조선선교양종(朝鮮禪敎兩宗) 각본산주지회의원 원장

    1920년 일본 임제종에 조선 불교를 종속 음모, 동경의 조선불교유학생청년단이 음모 폭로로 실패

    1923년 해인사 승려들이 이회광 사면 탄원서를 내는 등 큰 물의

    1924년 해인사 주지가 만응(萬應)으로 교체

    1933년 견성선원(見性禪院)에서 세수 72, 법랍(法臘) 53세로 입적

    저서로 목암집 牧庵集(2)이 있다.

    불교연구회

    원종

    한국 임제종

    한용운과의 갈등

     

     

    원종(圓宗, 1908~1912)

    대한제국 말기에 창립된 불교 종단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불교 종단으로 불린다. 1908년 이회광의 주도로 창설된 종단이다. 조선 왕조의 억불 정책으로 인해 500년 동안 종단 없이 연명해온 시대를 청산하고 불교계를 다시 결집시켰다는 평가가 있다.

     

    종단이 없이는 불교의 조직적 발전과 성장을 추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종단 설립은 불교계의 숙원 사업 중 하나였다. 또한 개화기에 이르러 불교 탄압이 완화되면서 1895년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를 해제시킨 사건을 분기점으로 불교는 근대적 종교로의 변화를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성출입 금지 해제 조치는 일본니치렌슈 승려 사노의 건의를 친일 내각의 김홍집이 받아들이는 형태로 달성되어 이후 불교계가 전반적으로 친일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무렵 일본의 영향력 확대와 함께 일본 불교의 각 종파가 밀려들어와 세련된 포교를 펼치게 되자 한국 불교계는 위기 의식에 빠졌다. 오랜 탄압으로 세력이 미약해진 한국 불교는 결집하여 종단을 설립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다케다 고문 영입 이후 친일화하던 이회광은 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에 원종과 일본 조동종의 연합맹약을 체결해버림으로써 불교계 소장파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한용운, 박한영, 진진응 등 민족주의 계열은 임제종 종단을 결성해 이회광의 원종에 대항하려 했다. 이것은 교세를 확장하겠다는 욕심이 일본 불교로의 예속 자처로 이어져 원종의 한계가 드러난 사건으로 평가된다.

     

    원종은 병합 이후 조선불교선교양종본산주지회의원으로 개칭해 활동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미 쓸모가 없어진 이 종단에 대해서 지원이나 승인을 해주지 않았으며, 1911년 사찰령을 내려 전국의 사찰에 대한 통제권을 스스로 장악하고 친일색이 짙은 원종과 이에 대항하던 임제종을 모두 배제했다. 결국 1912년 6월에 두 종단의 종무원은 나란히 문을 닫아야 했다. 다만 원종 창립 인사들은 대부분 삼십본산연합사무소 체제에서 주지직에 임명되어 공로를 인정받았다.

    각황사

    장영섭. “원종 창립 100주년, 빛과 그림자”, 《불교신문》, 2008

     

     

     

    불교진흥회(佛敎振興會)

    일제 강점기 초기에 조직된 불교 계열의 단체이다. 해인사 주지인 이회광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1914년 11월 5일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출범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불교 종단인 원종의 종정을 지낸 이회광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친일 승려이다. 1912년메이지 천황이 사망했을 때 추모 봉도식과 49제 봉행을 앞장서 실행했으며, 일본 제국과 대한제국이 하나가 되는 한일 병합이 이루어진 것처럼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와 합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

    조선 시대에 극심히 탄압받아온 불교계는 일제 강점기 초기까지 다른 세력에 비해 일제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이회광의 지나친 친일 행적은 조선 불교의 말살이라 하여 많은 승려들의 비난을 받았다. 이회광이 주도하여 창설된 불교진흥회도 설립 당시부터 친일 색채가 뚜렷했다. 회주는 이회광 본인이 맡고 부회장에는 용주사 주지 강대련이 임명되었다. 고문으로 권중현여규형이 추대되었다.

     

    이 단체는 명목상 불교를 진흥하여 한국인을 모두 불교에 귀의하게 할 목적에서 설립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설립취지문 서두에는 “위로는 일본 천황의 통치를 보필”하여 불교 진흥을 이룬다고 명시되어 있다.

     

    주요 활동은 1915년 3월부터 12월까지 《불교진흥회 월보》라는 월간지를 펴낸 것이다. 주요 참여자들은 승려였으나, 여규형이나 오재풍과 같은 유교 계열 인물도 포함되어 있다. 1917년이완용과 권중현이 직접 발기해 설립한 유사한 성격의 단체 불교옹호회로 개편되었다.

    불교옹호회

     

     

    한국에서 제일 돈 많이 쓰는 승려

     

    -급전(急錢) 필요한 분, 전국 노숙자는 그 승려를 찾아야-

     

    돈을 물쓰듯 하는 승려

    승려의 진면목은 무소유사상(無所有思想)을 실천하면서 고해 중생들에게 헌신 봉사하는 승려의 상이다. 고해중생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명제로 생계대책에 돈에 탐욕을 부리고, 집착하고 더러는 비양심적으로 죄를 짓기도 하지만, 무소유를 말하는 승려가 돈이 많고, 가난한 고해중생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천문학적 돈을 매년 물쓰듯 한다면, 우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목해야 하고, 둘째는, 그 많은 돈이 어디서 샘솟듯이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1년에 작게는 수억, 수십억, 때로는 1백억원정 가까이 돈을 물쓰듯 하는 그 승려는 누구인가? 어느 사찰에 주석하며, 성명 삼자는 무엇이며 법호는 무엇인가? 하지만 불교정의를 외치는 필자는 자신의 안녕을 위해 그 승려를 모()승려로 지칭하지 않을 수 없다. 독자 여러분이 승려를 알고자 한다면, 어느 승려에게 작금에 불교계에 돈을 물쓰듯 하는 승려는 누구인가?” 물으면 대답을 해줄 것이다.

     

    도대체 승려는 돈이 어디서 샘솟듯 하는 것인가? 제품을 제조하여 판매한 대금인가, 아니면 만병통치의 약, 아니면 불노장생의 약을 개발하여 판매하여 돈을 버는 것인가? 아니면 로또 당첨을 연속적으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제(日帝)가 한국 땅에 숨겨둔 금괴를 발견하여 꺼내 현금화 하는 것인가? 믾은 돈을 뿌리듯 하는 그 승려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세금은 내는 것인가? 세무서는 알고 있는 것인가? 하루 일해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가난한 고해중생들은 궁굼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역사속에 돈을 물쓰듯 한 승려는 일제 시대에도 있었다. 그는 전통의 한국불교를 망치고, 일제불교에 충성한 전 해인사 주지인 이회광(李晦光, 1862~ 1933)이 있었다. 작금에 돈을 물쓰듯 하는 승려나 이회광을 분석해보면, 찰떡궁합의 돈많은 여자가 돈을 준다는 것이다. 이회광은 고종황제가 신임하여 재정을 맡긴 천상궁(千尙宮)이 있었고, 작금의 승려는 재벌 노회장이 총애하는 젊은 첩과 절친하다고 한다. 고종황제는 천상궁이 이회광에게 왕실의 돈이 몽땅 나가는줄 까맣게 몰랐고, 재벌의 노회장도 총애하는 첩이 돈을 어떻게 쓰는 줄 까맣게 모르는 것같다. 한국사회는 물론 일본, 미국 교포사회에서도 화제가 된 지 오래인데 말이다.

     

    이회광과 천상궁

    이회광의 역사적 평가는 조선 불교를 일본에 팔아먹은 불교계의 이완용으로 지탄을 받고 있다. 또한 그가 추진한 일본 불교 소토슈와 연합 조약은 민족계와 친일계로 불교계가 나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울러 1980년 후반까지 이어져온 불교계 내분의 뿌리가 되었다. 이완용이 조선 천하의 명필이듯이, 이회광은 조선 천하의 대강백(大講伯)으로 알려졌지만, 매국노(賣國奴)라는 지탄을 받는 인생을 살았을 뿐이다

                                                  

    이회광은 경기도 양주출신이다. 19세에 불문에 출가하여 설악산 신흥사에서 정함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건봉사에서 보운스님을 법사로 법통을 이었다. 1894(고종 31)에 승려 각안(覺岸)이 우리나라 역대 고승들의 전기를 모아 엮은 책. ‘동사열전(東師列傳)에 이회광은 당시 대강백으로 전해온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앞두고 1906년 조직된 친일 성향의 불교 단체 불교연구회는 1908년 원종이라는 종단을 창설해 이회광을 종정으로 추대했다. 이회광은 키가 큰 미남이었고, 남근이 마음장상(馬陰藏相)이었다 전한다.

     

    이회광이 해인사 주지를 하고, 원종 종정 등 승려의 감투를 쓰고 활약하게 된 핵심배경은 천상궁이 막대한 돈을 비밀리에 저원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대궐에서 천상궁은 이회광스님을 만나보기 위해 돈과 물품과 함께 가마를 타고 해인사를 찾았으니 천상궁의 이회광을 사랑하는 애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해인사 부도전에 가면 이끼 낀 작은 비석이 세워졌는 바, 비석에는 풍우(風雨)에 씻긴 희미한 글자로 천상궁공덕지비(千尙宮功德之碑)라 새겨져 있는 것을 필자는 직접 확인했다. 이회광이 살았던 사찰에는 언제나 천상궁의 공덕비가 서 있었다.

     

    고종황제의 총애, 신임을 바탕으로 천상궁은 고종황제의 공금을 마음껏 빼돌려 이회광의 중감투를 마구 쓰게 돈을 지원해주었다. 천상궁은 대한제국이 몰락하기 직전 황금과 돈을 몽땅 빼돌려 마포쪽에 대저택을 마련하여 이회광을 비밀리에 환속하게 했다. 이회광은 어느 날 친일파들이 단죄된다는 것을 예감하고, 승복을 벗고, 머리를 기르고, 천상궁이 준비한 대저택에서 금슬좋은 부부로서, 살다가 운명했다. 독자는 어떻게 생각 하는가? 이회광과 천상궁의 사랑은 순애보적(純愛譜的) 사랑인가, 아니면 고종황제를 사기치고, 불교계, 나아가 전 국민을 상대로 하는 사기꾼 남녀의 애정행각인가?

     

    이회광은 천상궁과 찰떡궁합이 되어 고종황제의 공금을 빼돌려 행복하게 살다갔지만, 불교계의 매국노(賣國奴)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승려는 돈을 어떻게 뿌리는가

    작금에 불교계에서 돈을 물쓰듯, 하는 승려는 고성대갈(高聲大喝)자본주의 세상에 내돈 내가 쓰는 데 웬 시비요, 웬 개소리냐고 코방귀를 소리내어 날리고 욕설을 퍼부을지 모른다. 필자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첫째, 종북좌파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요, 둘째, 속인보다도 청정해야 할 불교계의 선거판과 중감투 쓰는 탐욕으로 돈을 물쓰듯 해대는 것이니 돈으로써 불교계에 먹칠을 해대면서 수치를 모르는 작태를 보이는 것이다. 그가 조만간 1백억원이 넘는 돈으로 한국불교계 총수자리를 매수할것이라는 설이 불교계에 파다하다.

     

    휄체어 신세가 되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재벌회장은 자신이 번 돈이 총빈(寵嬪)같은 첩을 통해 종북좌파 지원에 쓰이고, 중감투 쓰는 데 무진장 방출되어 불교계에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을 꿈속에서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천상궁에 대해 고종황제가 까맣게 몰랐듯이 깜깜절벽일 것이다.

     

    돈이 무진장 샘솟듯 한다고 해서 제 멋대로 써대는 것은 국민 간에 살 맛 안나는 위화감을 조성할 수도 있다. 그것도 땀흘려 번 돈이 아니라 재벌의 첩을 통해서 얻어낸 돈으로 각종 중감투를 쓰고 거들먹 거리는 작태는 진짜 수행승의 모습은 절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이회광이 입으로는 대장경을 줄줄 외우고 해석 한다해서 대강백 소리를 들으면서 천상궁과 찰떡궁합으로 살았듯이, 승려 역시 앵무새 같이 중국 선사(禪師)들의 어록을 줄줄히 외우고 지껄이면서 돈 장난을 치는 것이다.

     

    국세청과 검찰청, 경찰청은 경제의 아려움으로 자살자는 급증하고, 파산이 줄줄인 세상에 돈 지랄, 돈 장난 쳐서 감투나 쓰고 종북 좌파 지원하고 혹세무민하는 자를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50년 가까이 승려생활을 해오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필자가 경험컨대 승려가 돈을 물쓰듯 해대는 것은, 첫째, 돈 나오는 사찰주지로 재직하면서 사찰공금과 시줏돈을 훔쳤다는 것이요, 둘째, 이회광이 천상궁과 찰떡궁합이 되어 천상궁이 고종황제의 돈을 훔쳐 지원한 것과, 작금의 승려처럼 재벌이 총애하는 첩과 인연이 깊어야 지원을 받는 것이다.

     

    사실 여자를 이용하여 돈을 물쓰듯 하여 중감투를 무겁게 쓰는 승려는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절정고수이다. 이런 자들 탓에 청정한 불교교단이 구린내가 진동하고, 복마전(伏魔殿)을 이루는 것으로 청정한 수행승들이 억울하게 도매금으로 욕을 당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자들은 노숙자 등 불우한 사람들에게는 보시하지 않는다.

     

    전국 노숙자는 돈 잘쓰는 승려에게 자비를 구하면

    예컨대 이조 5백년간 부지기수의 승려들이 인연있는 사찰에서 살다 죽어갔지만, 도도한 백성들이 기억하고 존중하는 수행자의 상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표상, , 백성이 왜병의 총칼에 도륙나는 것을 보고 전선으로 달려간 서산, 사명대사 등을 꼽을 뿐이다. 사명대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과의 전쟁이 없도록 강화조약을 맺고 포로로 끌려간 조선남녀 4000여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한반도 역사에 사명대사 같은 분이 또 있을까?

     

    신라, 고려 때 불교는 국교였다. 작금의 한국불교는 어떤가? 이미 기독교에 교세가 추월당한지 오래이다. 왜 불교는 망조가 든 것일까? 첫째, 중생의 사표가 될 만한 수행자들이 태부족한 탓이다. 육조 혜능(慧能)의 불립문자(不立文字)정신을 하늘처럼 떠받들어 선수행(禪修行)만 진력하기에 무식한 승려들이 부지기수이다. 고작 염불이나 몇 가락 익혀가지고 남도창(南道唱)처럼 하여 생계대책을 삼을 뿐이다. 고준한 법문 듣기는 하늘에 별따기요, 도처에 수행자가 아닌 재물을 탐하는 승려들이 법을 묻는 속인들의 등을 치고 간을 꺼내려 든다.

     

    망조에 가속도를 붙이는 자들은, 첫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한민국을 망치려는 -껍데기는 승려인데-종북 좌파 승려들이다. 둘째, 재벌의 첩실이라도 인연을 만들어 돈을 얻어내고, 그 돈으로 종북 좌파 지원하고, 중감투에 환장한듯한 승려들이 세상을 더욱 혼탁하게 하는 자들이다. 찰떡 궁합의 인연이 되어야 죽기 살기로 돈가방을 던지는 일부 정신나간 여성도 큰 문제이다.

     

    끝으로, 모래밭에 혀를 박고 죽더라도 추잡한 돈은 욕심내지 않겠다는 고매한 인격자는 승속을 불문하고 부지기수이다. 때문에 대한민국이 희망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급전(急錢)이 필요한 고해 대중이 있다면, 전국 노숙자는, 승려를 찾아 현금의 자비를 구하면 어떨까? 이회광이 천상궁과 마포 저택으로 은거하듯이, 앞서의 승려도 재벌의 첩실과 만년에 함께 은거를 할까? 속세에는 돈으로 고통받는 남녀가 많은데, 승복을 입고 원숭이처럼 선()의 대가(大家)흉내를 내는 승려조차 속세를 추악하게 하는 짓을 하는 것이니 개탄은 물론 질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대에는 진짜 무소유속에 조국 대한민국을 뜨겁게 사랑하고, 중생에게 헌신하고, 구름에 달가듯이 떠나는 비구승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씨가 말랐나?

     

    이법철(李法徹, 大佛總 지도법사/bubchul.kr)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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