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朝鮮王陵] 묘(墓) - 5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묘 (墓) - 5
조선의 갈등과 궁중비사 - 3
숙의박씨묘 淑儀朴氏墓, 이광묘 李壙墓, 이구묘 李球墓(남연군)
묘(墓)란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
조선왕릉은 42기 (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기,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기(능40, 원14, 묘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능3, 원4, 묘5)입니다.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조선왕릉[朝鮮王陵]의 묘(墓)
1. "군"이 붙는 이유
'군'이란 후궁에게서 난 아들, 그리고 대군에게서 난 아들을 말합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이 '군'이 붙는 이유는 왕이였다가 각각 인조반정과 중종반정에 의해 왕의 신분에서 강등되었기때문이죠.
2. "조"와 "종"의 차이
어느 시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최고 통지차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한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왕은 오늘날의 통치권자와는 비될 수 없는 권한을 부여받고, 그 권한을 세습할 권리가 주어진다. 조선은 1392년 태조 이성계의 쿠데타에 의해 출범했고 일본 제국주의 강압에 의한 한일합방으로 1910년 멸망했다. 그 동안 정식으로 왕위에 즉위했던 사람은 모두 27명이고 왕위에 즉위하지는 않았지만 죽은 후 왕에 추존된 사람은 모두 9명이다.
왕위에 있다가 불미스런 사건으로 쫓겨난 사례도 두 건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를 처음 일으킨 군주나 나라의 정통을 다시 일으킨 군주, 즉 창업군주나 중흥군주에게 '조'라는 묘호를,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군주에게는 '종'이란 묘호를 올린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죽은 종묘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그 종묘에 봉안하는 위패의 이름이 곧 묘호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세종이나 정조 등 왕의 명칭은 그 왕이 죽은 후에 부여한 묘호의 이름이다.
조선조의 왕들 중 처음에'종'이었다가 후에 '조'로 바뀐 왕은 영조(영종), 정조(정종),순조(순종)가 있으며 고종처럼 스스로 황제로 바꾼 사례도 있다. 왕자에게는 '군'이란 칭호를 주는데, 정식 왕비에게서 태어난 왕자는 '대군', 빈(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자는 군으로 호칭한다. 따라서 연산군과 광해군의 경우는 왕에서 쫓겨난 서자왕자로 강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딸의 경우 정식 왕비 소생에게는 '공주'를, 후궁 소생에게는 '옹주'라는 칭호를 주었다. 왕이사망한 후 편찬되는 재임시절의 공식 기록을 담은 실록은 폐위된 임금은 정식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실록 대신 일기라고 이름을 붙인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 등 '실록'이 아닌 '일기'가 두 편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단종으로 불리는 조선조 6대 왕은 세조의 쿠데타로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가 죽은지 2백년도 더 지난 숙종 24년(1698)에야 단종으로 복원되웠고, 실록 명도 '노산군일기'에서 '단종대왕실록'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이러한 호칭에서도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1) 조선왕조의 시작
조선창업의 전설, 대풍수의 명당 자미원, 조선왕조의 탯자리 삼척 준경묘 · 영경묘 濬慶墓 · 永慶墓
조선 3대 태종의 후궁, 조선왕조 7대에 걸쳐 내명부를 지킨 여인, 명빈묘 明賓墓
(2) 조선의 갈등과 궁중비사1
비운의 왕비, 조선 9대 성종의 계비이자 10대 연산군의 어머니, 회묘 懷墓
준비되지 않은 군왕, 조선 최초 폐위임금이 되다. 연산군묘 燕山君墓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 광해군의 생모, 성묘 成墓
어머니 공빈 김씨 발치에 잠든 광해군주, 광해군묘 光海君墓
조선의 사이코패스, 개망난이 왕자, 임해군묘 臨海君墓
(3) 조선의 권력투쟁과 궁중비사2
조선 17대 효종의 후궁, 안빈묘 安嬪墓
권력무상 피부로 와닿아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 대빈묘 大嬪墓
인현왕후의 추천으로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 영조의 정신적 어머니, 영빈묘 寧嬪墓
(4) 조선의 세도정치
23대 순조(純祖)의 후궁, 숙의박씨 묘 淑儀朴氏墓
왕손으로 태어남이 불행이라 박복한 삶에 객사하지만, 이광묘 李壙墓
(5) 조선, 제국이 되다
살아생전 무위도식하나 황제가 난다는 명당에 묻히면서, 이구묘 李球墓 (남연군묘 南延君墓)
(6) 서삼릉, 조선의 후궁 묘 後宮 墓역
(7) 서삼릉, 조선의 왕자 · 공주 묘역
(8) 서삼릉, 조선의 태실 胎室
(9) 조선시대의 대원군 大院君 & 부원군 府院君
(4) 조선의 세도정치
23대 순조(純祖)의 후궁
숙의 박씨(淑儀 朴氏, ? ~ 1854), 경기도 고양시 200호, 서삼릉(西三陵)
원래 궁인(宮人) 신분으로, 순조(純祖)의 승은을 입은 후 1817년(순조 17년) 10월 11일 새벽 딸을 낳아 종2품 숙의(淑儀)에 봉해졌다. 박씨가 낳은 딸은 후에 영온옹주(永溫翁主)에 봉해졌다.
그러나 유일한 소생인 영온옹주는 태어난 후 병을 자주 앓고 말을 잘 하지 못하였고, 1829년(순조 29년) 음력 4월 8일 불과 1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영온옹주 사후 박씨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어 언제 죽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숙의 박씨의 묘에 있는 묘표가 1854년(철종 5년)에 건립되었으므로, 적어도 1854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철종(哲宗) 5년(1854) 윤 7월에 건립(建立) 된 오석(烏石)의 묘표(墓表)에는 「숙의밀양박씨묘(淑儀密陽朴氏墓)」라 새겨져있으며 크기
는 폭 25척(尺), 두께 1.5척(尺), 높이 5 척(尺)이다.
사후 효창원(孝昌園,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묘)에 장지를 마련하였다. 이곳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인근인데, 일제 강점기 말엽인 1945년 3월에 강제 이장되어 현재 박씨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서삼릉 경내에 있다. 그녀의 묘는 서삼릉 전 지역이 사적으로 지정될 때 함께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조선 정조의 맏아들로 태어나 세자책봉까지 받았으나 다섯 살 때 요절한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무덤이 있던 곳으로 처음에는 효창묘라 하였다. 그 후 1870년(고종 7)에는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
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16>백범 김구 묘와 민족정기
묘역이 광활하고 송림이 울창하여 같은 묘역 안에 정조의 후궁이며 문효세자의 생모이기도 한 의빈 성씨(宜嬪成氏)의 묘,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淑儀朴氏)의 묘, 숙의 박씨의 소생인 영온옹주(永溫翁主)의 묘 등이 같이 있었다. 1944년 10월 9일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西三陵) 경내로 이장되었다.
숙의박씨(淑儀朴氏)의 소생, 영온옹주(永溫翁主, 1817 ~ 1829)
1817년(순조 17년) 음력 10월 11일 새벽 조선의 제23대 왕인 순조(純祖)와 그 후궁 숙의 박씨(淑儀 朴氏)의 딸로 태어났다. 문조(文祖, 효명세자, 헌종의 아버지) 등과는 이복 남매간이다.
그러나 영온옹주는 불과 2년 후인 1829년(순조 29년) 음력 4월 8일 13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순조의 자식들은 정비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金氏) 소생 효명세자(孝明世子) 등의 2남 3녀는 물론, 유일한 서자녀인 영온옹주까지 모두 요절하고 말았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영온옹주는 태어날 때부터 병을 자주 앓았고 말도 잘 못 했다고 한다. 이러한 영온옹주를 이복 오빠인 효명세자는 유달리 불쌍히 여겨 항상 어루만져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옹주가 요절하자 효명세자가 매우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그 자모(慈母)의 정경(情境)은 더욱 슬프게 여길 만하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 효명세자 역시 영온옹주가 사망한지 약 1년 뒤인 1830년(순조 30년) 음력 5월 6일 22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영온옹주의 묘소는 효창묘(孝昌墓,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에서 동쪽으로 99보 되는 지점에 만들어졌다. 이 자리는 현재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일대인데, 일제 강점기 때 이곳에 있던 모든 무덤이 옮겨지면서 영온옹주의 묘도 함께 이장되었다.
현재는 생모 숙의 박씨의 묘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
왕손으로 태어남이 불행이라 박복한 삶에 객사하지만
전계대원군 이광(全溪大院君, 1785 – 1841), 경기도 포천, 미 지정, 비공개지역
25대 철종의 사친. 장조(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서자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 은언군의 묘 아래인 해좌원에 예장하였다가 후에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선단리(현 포천시 선단동) 산11번지에 이장하였다.
사후에야 대원군 추존된 비운의 왕손
현재 묘역과 신도비는 1986년 4월 이후 포천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그의 셋째아들 원범이 철종으로 등극하자 먼저 전계군(全溪君)에 피봉 되었다가, 축호와 사식을 송나라 복황(濮皇)과 수왕(秀王) 및 본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의 전례에 따라 다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으로 추봉하고, 묘(墓)도 다시 정비하고, 묘 앞에 신도비를 세우게 하고, 가묘(家廟, 전계궁)를 중건하여 신주는 불천지위로 정하고 영평군과 그 후손으로 봉사하게 하였다.
조선 왕조사를 운위함에 전계대원군은 참으로 생소한 인물이다. 제25대 철종 대왕 생부라는 구체적 사실(史實)에도 낯설기 그지없다. 대원군 하면 ‘흥선대원군 이하응’만 떠올리는 대중적 인지도에도 크게 기인한다. 그러나 조선 왕실에 대원군은 또 있었다. 제14대 선조대왕 생부 이초(李 ·1530~1559)가 덕흥(德興)대원군이었고 제16대 인조대왕 생부 이부(李 ·1580~1619)는 정원(定遠)대원군이었다가 아들 인조에 의해 원종 대왕으로 다시 추존됐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잘 둬 부모가 호강함은 요지부동의 불변이치다.
왕조사에 대원군의 출현은 왕통 승계에 유고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전묘(前廟)가 후사를 잇지 못해 양자를 통해 보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대통의 변고에는 반드시 피를 불렀다. 이 중에도 전계대원군은 가장 비참한 가족사를 안고 멸시 천대 속에 살다 간 유민(流民) 인생의 전형이었다.
사도세자 손자로 철종 대왕의 생부 아버지 영조의 눈 밖에 나 쌀뒤주 속에서 굶어 죽은 사도세자(추존 장조의황제)는 1왕비 2후궁에게서 5남 3녀를 탄출했다. 혜경궁 홍씨(추존 헌경의황후)한테 장남 의소세자가 태어났으나 3세 때 조졸하고 이어 차남을 낳으니 정조대왕이다.
사도세자의 제1후궁 숙빈 임씨가 3남 은언군 인과 4남 은신군 진을 낳고 제2후궁 경빈 박씨는 5남 은전군 찬을 출생했다. 후궁 소생의 은언군·은신군·은전군 3형제는 이복형 산( )이 정조 임금으로 등극하며 천출·걸인만도 못한 신세가 되고 만다. 역모를 꾀하는 무리마다 이들 왕자를 내세워 옹립하려 했고 죄 없는 군(君)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사약을 들이키고 죽어갔다.
사도세자의 3남 은언군이 부인 진천 송씨(일부 기록에는 상산 송씨)를 득배해 아들 셋을 두었는데 상계군·풍계군·전계군이다. 이 중 셋째 아들이 후일 철종에 의해 대원군으로 추존되는 전계대원군이다. 초명이 해동(海東)으로 철종 등극 후 광으로 고쳤으며 출생연도마저 불분명하다.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1986)된 전계대원군 묘 안내표지판에는 1785년생으로 표기됐으나 공인된 사전이나 선원(璿源·왕실의 계보연원) 기록에서도 전거를 찾을 수 없다. 이는 곧 출생 당시의 열악한 환경과 성장배경을 방증하는 것이다. 사도세자→은언군→전계군의 3대 가족사는 왕손으로 태어난 게 불행이었다.
왕실서 버림받고 빈농으로 살다 객사
아들이 미우면 손자도 달갑지 않은 법이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굶겨 죽인 뒤 후회는 했으나 손자들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손자 산으로 왕위는 잇게 했지만 정조 역시 능수능란한 할아버지의 시험에 들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물며 죽은 아들 첩 자식이 뭐 그리 대단했겠는가. 더구나 영조 곁엔 며느리보다 어린 꽃다운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있었다. 할아버지 영조는 서 손자 셋을 죽든 말든 내팽개쳤다.
견디다 못한 은언군이 일을 저질렀다. 영조 47년(1771) 끼니를 이으려고 상인들에게 진 빚 소문이 할아버지 귀에 들어간 것이다. 조왕(祖王)은 진노했다. 왕손으로 품위를 실추했다는 것이었다. 호구지책으로 꾼 손자 빚을 변제해 주기는커녕 되레 직산 현으로 유배 보냈다가 다시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시켰다. 제주도에서 먼 바다와 청천 하늘을 원망하며 연명한 지 4년 만에 겨우 풀려났다.
은언군(전계군 아버지)에게 또 불행이 닥쳤다. 이복형 정조가 등극한 지 10년(1786) 되던 해. 장남 상계군이 홍국영의 모반죄에 연루돼 어명으로 자결한 것이다. 이때 둘째 아들 풍계군도 곁에 없었다. 이복동생 되는 은전군이 홍상간의 역모 때 왕으로 추대됐다 해 자진한 뒤 대를 잇기 위해 풍계군을 양자로 보냈기 때문이다. 정조는 이복동생 은언군에게 아들 전계군을 데리고 강화에 가 은거해 살도록 명을 내렸다.
은언군 부부와 전계군은 아무 연고 없는 강화 벽촌에 내버려졌다. 왕실에서 버림받은 몰락 왕손을 돌봐줄 사람 그 누구도 없었다. 정조 21년(1797) 울화가 치민 은언군이 강화를 탈출하려다 잡혀 오히려 그곳에 안치되고 말았다. 유배지가 된 것이다.
급전직하의 절박한 상황에선 천애절벽의 나뭇가지라도 잡게 돼 있다. 사면초가의 은언군 일족에게 서학(천주교)이 전하는 복음은 ‘하늘의 소리’였다. 이승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더 좋은 내세가 있다는 가르침을 따라 청국 신부 주문모에게 영세를 받았다. 청상과부 며느리 신씨(전계군 형수)와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등극하던 해(1801)인 신유년 가을. 다시 조정 권력을 장악한 벽파(노론)세력은 정순왕후와 함께 서학 교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때 전계군 부모와 형수는 왕실 본보기로 가차없이 사사됐다. 참으로 박복한 전계군(철종 생부)이었다. 혈혈단신이 돼버린 것이다. 이후 전계군이 강화 움막에서 보낸 기구한 일생은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한다. 남의 집 머슴살이에서 일일 잡역부로까지 떠돌며 막행막식으로 살아갔다. 때로는 금상(순조)과 사촌간이란 촌수도 잊었다.
전계군은 초취 전주 최씨(추봉 완양부대부인)가 장남 회평군(초명 원경·1827년생)을 낳고 죽자 후실(성씨 미상)을 만나 차남 영평군(초명 경응·1830년생)을 출생했다. 재취로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용담 염씨(廉氏·?~1863)를 다시 만나 덕완군(초명 원범)을 낳으니 바로 ‘강화도령’ 철종 대왕이다. 염성화의 딸이었던 철종 생모는 공사현장 식당(함바집) 작부였다. 병명도 모른 채 객사한 전계군은 경기 양주군 신혈면 진관에 초장됐다. 천만뜻밖에 셋째 아들 원범이 임금으로 등극하며 철종 7년(1856) 현재의 포천 장지로 천장 됐고 그해 전계대원군으로 추존됐다. 왕방산 아래 임좌(북에서 서로 15도)병향(남에서 동으로 15도)의 명당에 초취 전주 최씨와 합장돼 있다. 용담 염씨는 전계대원군 묘 좌청룡 아래 자좌오향(정남향)의 함몰지점에 용사됐다. 왕을 탄출했으나 첩의 신분이었음이 뼈저리다.
전계대원군 묘에는 왕릉 못지않은 병풍석과 함께 철종 어필의 묘비가 있다. 숙맥(菽麥) 임금 철종 비위를 맞추기 위해 세도 정권이 세운 신도비까지 있으며 6·25전쟁 당시 인민군 당사로 썼다는 99칸의 안가(安家) 일부가 전하고 있다. 사람 팔자 누구도 장담 못할 현장이다.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1785 – 1841)
조선후기의 왕족이며, 철종의 사친이다. 장조의 서자 은언군의 서자였다. 이복 형 상계군과 아버지 은언군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추방되어 빈농으로 생애를 마쳤으며, 은언군의 서자라 작위가 내려지지 않았다.
1849년 셋째 서자 원범이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전계군(全溪君)의 작호가 내려졌다가, 다시 대원군으로 추봉되어 전계대원군이 되었다. 경기도 강화군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 휘는 광(壙), 자는 창강(昌康), 초명은 해동(海東)이다.
영조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조카였던 전계대원군 이광 묘. 철종의 생부로 극심한 가난 속에 불우한 생애를 살았다.
부인은 완양부대부인 최씨(完陽府大夫人 崔氏)
‘함바집’ 작부였으나 아들이 왕위에 오르며 말년이 유복했다.
살아생전 무위도식하나 황제가 난다는 명당에 묻히면서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788 ~ 1836), 1836년, 충청남도 예산군 가야산 미 지정, 비공개지역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이며, 26대 고종황제의 할아버지
1836년에 죽은 후에 경기도 연천군에 장사되었다. 아들 흥선대원군은 약령(弱齡)에 부모상을 잇달아 당한 뒤 삼년상을 마치고 풍수가들이 길지라 일컬은 충청남도 예산군 가야산 중턱의 석탑(石塔) 자리인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대원군은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기 위해 가야사를 불태웠다.
고종은 그 덕택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하여 가야산에 보덕사(報德寺)를 세웠다. 1866년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소를 도굴하여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더욱 악화시키기도 했다.
묘소는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후 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첫 시호는 영희(榮僖)였고 뒤에 충정(忠正)의 시호가 내려졌다.
남연군묘에 얽힌 이야기는 그 명성만큼이나 다양하다. 이 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무덤이다.
1822년 남연군이 죽은 뒤 한 지관이 흥선군을 찾아와 명당자리를 알려 주었다고 한다. 혹은 흥선군이 당대의 명지관인 정만인에게 명당자리를 부탁하였다고 한다.
지관(풍수가)은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二代天子之地) 가야산 동쪽의 땅과 만대에 영화를 누릴(萬代榮華之地) 광천 오서산을 지목하였다고 한다. 두말할 것 없이 흥선군은 가야산을 택하였다. 그런데 명당으로 지목한 자리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다. 흥선군은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 뒤 산기슭으로 옮기고 절을 불태우고 탑을 부순 후 이곳에 묘를 썼다. 흥선군은 후에 보덕사라는 절을 지어 그 죄책감을 씻고자 하였다
이 자리에 묘를 쓰고 난 7년 후 차남 재황을 얻게 되었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1863년에 재황은 철종의 뒤를 이어 12살의 나이로 왕위로 오르게 된다. 그의 아들도 후에 순종이 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의 명칭을 얻게 되었으니 가히 2대 천자를 낳은 땅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터만 보면 지관의 안목이 대단함을 알 수 있지만 2명의 천자가 나온다는 설은 후대에 덧붙여진 해석일 수도 있다.
남연군묘는 풍수지리학상의 명당의 조건을 모두 갖춘 것으로 유명하다. 묘 뒤로 우뚝 솟은 석문봉이 주산이 되고, 좌로는 옥양봉과 만경봉이 청룡의 세를 이루고, 우로는 가사봉, 가엽봉, 원효봉 등이 백호의 세를 이루어 무덤을 감싸고 있다. 멀리 보이는 봉수산이 안산이 된다. 남연군 묘 앞의 논,밭이 가야사 자리이고 묘가 있는 언덕배기가 금탑이 있던 자리이다.
당시에 썼던 상여는 중요민속자료 제31호로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남연군묘를 이장할 때 운구했던 상여이다.
연천에서 가야산까지의 먼 길을 종실의 무덤을 옮기는 일이여서 상여가 지나는 길목마다 해당 지방민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상여를 마지막으로 운구했던 광천리(남은들) 사람들에게 이 상여가 기증되었다. 오페르트 도굴사건과 그후의 천주교 박해, 대한제국의 멸망과 일제로의 식민지화 등 일련의 역사를 상기해 본다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788 ~ 1836)
선 시대의 문신, 왕족으로 이름은 구(球), 원래 이름은 채중(采重)이다. 시호는 영희(榮僖)·충정(忠正).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이며, 고종황제의 할아버지이다. 원래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뒤에 아들 없이 사망한 사도세자의 넷째 서자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 무덤이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에게 훼손당한 사건으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남연군은 조선 인조의 후손으로,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인 진사 이병원(李秉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채중(寀重)이었는데, 순조 때인 1815년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구(球)로 개명하였고 남연군에 봉해졌다. 그의 가계는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으로 인평대군의 아들이자 일찍 요절한 복녕군의 후손이다.
복녕군의 가문은 숙종 때의 삼복의 변에는 연루되지 않아 몰락하지 않고 왕족의 신분을 유지했지만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복녕군의 손자인 안흥군의 대에서 끊어졌다.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그는 화가이자 학자인 추사 김정희와는 이종사촌간이 되었는데, 김정희의 큰어머니이자 양어머니인 남양홍씨와 그의 양어머니이자 은신군의 부인 남양홍씨는 자매간이었다. 이 인연으로 그는 특별히 자신의 넷째 아들 흥선군 하응을 김정희 문하에 보내 글을 배우게 하였다.
후에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 군부인 여흥민씨와 결혼하여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 흥선대원군의 4남과 1녀를 두었다. 안동김씨 세도하에서 불우한 세월을 보내다 1836년에 병사했다. 그의 증손자인 영친왕의 둘째 아들의 이름 역시 이구(李球)로 그와 동명이인이기도 하다.
대원군이 불태운 절 가야사 아니다"
2대 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 가야산 남연군묘
남연군묘는 우리 나라 근대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과의 통상 교섭을 요구했던 서구 열강들이 실권자인 대원군에 의해 모두 실패하자 급기야 1868년 4월 21일 야음을 틈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도굴하기 시작한다. 대원군의 강력한 권한이 아버지 묘가 명당에 묻혔기 때문이라는 조선 천주교도인들의 말에 미국인 잰킨스를 자본주로, 프랑스인 페롱을 통역관으로 삼아 약 100여명의 중국청년을 러시아병사로 위장하여, 조선 천주교도인들의 안내로 저지른 남연군묘 도굴 사건이다. 이 사건을 주도한 유태계 독일인 오페르트 일당은 남연군묘를 파헤쳐 흥선대원군의 기세를 꺾고, 유골을 확보함으로서 개방에 대한 최고의 협상카드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무덤은 단단한 석회석으로 다져 놓았기 때문에 쉽게 파지 못했고, 조수(潮水) 시간 때문에 철수함으로서 실패하고 만다. 이 소식을 접한 대원군은 부모도 모르는 천인공노할 오랑캐들과는 상종할 수 없다며 척화비를 세우고 더욱 강력한 쇄국정책을 시행하였다. 또 천주교인들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천주교박해를 강화하였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려 8천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한 사건의 계기가 된 것이다. 결국 이것은 풍수사상 때문에 생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남연군묘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 아래에 있다. 이 묘로 인하여 흥선군의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올랐다는 설은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다. 남연군은 조선 제16대왕인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 6대 손이다. 직계 왕손과는 먼 촌수다. 그러나 그가 어릴 때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어 영조의 증손자가 된 셈이다. 제24대왕인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세도정치의 절정을 이루었던 안동 김씨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헌종의 7종 아저씨 벌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을 보위에 오르게 하여 제25대왕 철종이 되게 한다. 안동 김씨들은 천애고아로 강화도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왕통을 이어놓고 왕족 중에서 나중에 왕위에 올라 자신들의 권력에 위협이 될만한 자가 있으면 미리 처단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흥선군의 형 이하전의 죽음이 바로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와중에 이하응은 안동 김씨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달들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호신으로 목숨을 부지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임박해오자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 대비와 연줄을 맺었다. 익종(효명세자)비인 조 대비 역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 때문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 하였다. 그리고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철종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조 대비는 양자로 삼은 명복을 등극하게 하여 철종의 뒤를 이으니 제26대왕인 고종이다. 고종의 나이 12세이므로 조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흥선군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에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위임시켰다. 이로서 고종을 대신한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20세 성인이 되어 친정을 할 때까지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대원군이 그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세도를 잡기까지의 행적은 `운현궁의 봄`과 같은 소설과 야화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안동 김씨 세도에 눌려 왕족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에 떨며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흥선군 이하응은 안동 김씨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철저하게 자신을 위장하였다. 그는 10년간 풍수 공부를 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왕권을 회복하고 정권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명당 자리에 아버지 묘를 이장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지관이 있다면 찾아가 물어보고 명산이란 명산은 빠뜨리지 않고 찾아 다녔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드는 명당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만인(鄭萬仁)이라는 지관이 찾아왔다. 그는 흥선군에게 덕산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와 광천 오서산에 만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 두 자리가 있는데 어느 것을 선택하겠냐고 물었다. 당연히 흥선군은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를 선택했다. 지관 정만인을 따라 그 자리에 도착해보니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고 묘를 쓸 자리에는 5층 석탑이 있었다. 흥선군은 그 웅장한 산세에 한참동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옆에 있던 정만인이 "여기다 묘를 쓰면 십 년 안에 틀림없이 제왕이 날 자리입니다."라고 하자 흥선군은 미소를 지으며 "잘되면 영의정 하나쯤 나겠소."라고 하였다. 정만인 또한 알았다는 뜻의 미소를 지었다. 만약 제왕지지(帝王之地)에 묘를 썼다는 소문이 나면 당장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맞아야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통이 크고 비범한 흥선군이라 하여도 절의 탑 자리에 묘를 이장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당시 가야사는 수덕사보다 큰절이었다. 다시 서울에 올라온 흥선군은 며칠 밤낮을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뾰족한 묘안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릎을 탁 치고 일어나 안동 김씨 중에서도 그래도 자신과 말이 통하는 대제학 김병학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집 대대로 가보로 내려오는 옥벼루를 빌려 영의정인 하옥대감 김좌근을 찾아갔다. "대감. 내가 이 옥벼루를 어느 선비한테 난초 한 폭을 쳐주고 얻은 것인데, 옛날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본래는 한 쌍이었는데 하나는 어디로 가고 하나밖에 없다고 하더이다. 나는 이런 귀중한 물건을 갖고 있을 형편이 못되는 사람이오. 설사 갖고 있다하더라도 결국 술값으로 없애게 될 것이니 마음에 들면 대감에게 진상하러 왔오." 김좌근이 유심히 살펴보니 대제학 김병학이 갖고 있는 거와 똑같은 진품이기에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흥선군은 "대감. 그런데 내 부탁이 하나 있소. 충청감사에게 내 청을 하나 들어주라는 편지 한 장만 써 주시오."
김좌근은 쾌히 승낙했다. 이 편지를 가지고 흥선군은 바로 충청감사에게 달려갔다. 충청감사는 세도가인 영의정의 부탁에다가 왕족인 흥선군이 직접 찾아오자 정중히 대접하고 가야사 5층 석탑을 헐고 묘를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 여기에 관한 일화는 많다. 흥선군이 전 재산을 팔아 만든 2만냥의 절반을 절의 중에게 뇌물로 주고 절을 불사른 뒤 이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흥선군의 계략에 의해서 가야사는 폐사(廢寺)되고 흥선군은 아버지 남연군을 좋은날을 택해 가야산으로 이장하였다. 이때 정만인은 후에 도굴의 위험이 있으니 묘곽에 석회 3백 부대를 써서 단단하게 다져 놓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후 흥선군은 아들을 하나 더 낳았는데 그가 명복이다. 묘를 이장하고 정확히 13년 후 명복이 등극하여 고종황제가 되었다. 대원군으로 정권을 잡은 흥선군은 아버지 묘로 쓰기 위해 절을 없앤 죄의식에 한양에서 목수를 내려보내 가얏골 상거리에 보덕사(報德寺)를 새로 지어 주었다. 가야사와 탑의 은덕에 보덕한다는 의미에서다.
예산군 덕산면 읍내리에서 옥계저수지를 지나 상가리 남연군묘로 가는 길에 들어서면 청룡의 긴 산 끝이 계곡을 막고, 그 안쪽으로 백호가 감겨 들어간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웅장한 가야산(677.6m)이 임금 제(帝)자 모양으로 중첩으로 서있다. 석문봉(653m)을 주산으로 하여 좌로는 가야봉(677.6m)이 천을(天乙)이 되고, 우로는 옥양봉(411.4m)이 태을(太乙)이 되어 시립(侍立)하여 있다. 석문봉의 중심으로 출맥(出脈)한 주룡은 수많은 기복(起伏)을 하면서 크고 작은 산을 만들며 억센 기를 정제 순화하고 산 아래로 내려와 크게 과협(過峽)한다. 그리고 굴곡(屈曲) 변화를 하는데 답사를 많이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크고 활발하게 변화하는 용을 보지 못했다. 혈의 크기는 주룡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 풍수지리의 원칙이다. 용맥을 따라 올라 가보면 저절로 큰 힘이 느껴질 정도로 감탄을 자아낸다. 과연 천자지지(天子之地)라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부분 혈처가 한번의 결인속기(結咽束氣)를 하는 것에 비해 여기는 용이 위이 굴곡하면서 많은 결인속기를 한다. 이는 그만큼 주룡의 힘이 강해 한번으로는 용의 생기를 묶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협이나 결인속기의 형태를 보고 혈의 화복(禍福)을 가늠하는데 임금 왕(王)자 맥을 두 번이나 하였다. 주산이 제왕사(帝王砂)로 중첩되고 왕자맥(王字脈)이 2개나 되기 때문에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온다고 하지 않았나 생각 해보았다.
힘차게 내려온 용맥이 해(亥) 입수1절룡(入首一節龍)으로 들어와 입수도두(入首倒頭)를 만들었다. 입수도두는 정제되고 순화된 순수한 생기만 정축(停蓄) 해 놓았다가 혈에 필요한 만큼씩 공급해 주는 곳이다. 생기가 응축되었기 때문에 둥그렇게 뭉쳐진 모습으로 단단하고 유연하면서 양명하다. 입수도두에서 양옆으로 선익(蟬翼)을 뻗어 혈을 좌우에서 보호해주고, 앞에서는 순전(脣氈)을 만들어 혈장을 지탱하면서 혈의 생기가 앞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완벽한 혈장(穴場)의 4요건을 갖춘 다음 그 가운데 혈을 결지하였다. 혈 앞에는 어보사(御寶砂)와 반석(盤石)이 깊고 튼튼하고 신비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혈 앞 순전에 큰 반석이 있는 것은 강한 혈의 생기가 앞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로 흙만 가지고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돌이 있는 것이다. 그만큼 혈의 크기를 짐작케 하는 증거가 된다. 이 모습이 마치 임금의 옥쇄와 같다하여 어보사라 하는데 이것이 있으면 제왕이 나온다고 한다. 또 제왕지지(帝王之地)가 되려면 어보사는 필수적이다.
옥양봉에서 뻗은 청룡은 목성(木星)의 산들이 서로 이어져 중첩으로 감싸주면서 수구(水口)를 막아주었다. 가야봉에서 뻗은 백호는 금성(金星)과 목성(木星)의 산들이 서로 우뚝 솟아 연이어 혈을 감싸주면서 역시 수구를 막아준다. 청룡은 길고 백호는 짧은 용장호단(龍長虎短)의 형세로 서로 자웅을 겨루며 수구를 관쇄(關鎖)해주고 있다. 청룡 백호가 감싸 안아준 공간인 명당(明堂)은 평탄 원만하고, 청룡 백호가 여러 겹으로 중첩되어 혈에서 보면 마치 군대 의장대가 양옆으로 도열한 모습으로 물을 역수(逆水)시키니 용호배아(龍虎排衙)의 길격 형상이다. 사방의 산들은 가야산 골짜기 한복판에 병풍을 두르고 서있는 모습으로 만조백관이 임금이 앉아있는 혈에 절하는 형태다. 가히 군왕지지가 분명하다. 물은 우측 신(申)방위에서 득수(得水)하여 우수도좌(右水倒左)로 혈을 감싸주면서 좌측 을진(乙辰)으로 파구(破口)되니 건좌손향(乾坐巽向)을 하여 팔십 팔향법으로 부귀왕정(富貴旺丁)한다는 자생향(自生向)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군왕지지라 하더라도 약점은 있다. 과협처(過峽處)가 너무 길고 약하다. 특히 일본인들이 혈맥을 끊기 위해서 낮게 깎아버렸다. 나무 밑 둥을 잘라 간신히 이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린 셈이다. 천하대명당임에도 발복이 오래가지 못하고 2대에 끝난 것이 이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백호가 크고 모습이 뛰어나 청룡을 압도하니 차손과 내당(집안의 여자)의 주장이 강한 곳이다.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올랐고 며느리인 명성왕후 민비의 득세가 우연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청룡 쪽의 험한 바위산이 혈장을 비추니 살이 되는데 그것도 묘방(卯方)에 있어 건좌(乾坐)의 겁살방(劫煞方)이 된다. 이로 인하여 고종과 순종은 외세의 치열한 압력 속에 숫한 시련을 받다가 망국의 서러움을 당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높이 치솟은 가야산은 안개에 가려 희미하게 그 모습을 나타낼 뿐 전체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조선이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왕을 황제로 칭하였지만 열강의 각축 속에 국운이 쇠퇴하여 결국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망국의 한을 가야산은 아는 듯 하였다.
남연군묘에서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저수지 쪽으로 올라가면 육관 손석우씨 묘가 있다. 전주 모악산에 있는 전주 김씨(全州金氏) 시조 묘의 영향으로 김일성이 북한에서 집권했고, 그 묘의 발복이 다해 언제 김일성이 사망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여 그것이 적중했다해서 유명한 사람이다. `터`라는 책과 언론에 자신을 신안(神眼)이라며 도사로 불렀던 그가 이곳에 묻히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는 곳이다. 꿩이 엎드려 있는 복치혈(伏雉穴)로 자손이 큰 부귀영화보다는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라고 언론에서 크게 보도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곳은 혈이 아니다. 묘 뒤로 산 능선이 있기는 하나 혈을 결지 할 수 있는 생왕룡(生旺龍)이 아니라 남연군묘로 가는 주룡을 지탱해주기 위한 지각(地脚)에 불과하다. 그나마 맥이 묘로 들어가지 않고 좌측으로 비켜나간 곳에 자리잡았다. 이러한 곳을 맥이 비켜갔다 하여 사맥지(斜脈地)라고 한다. 당대 최고의 풍수라 자칭했던 그의 묘지를 보면서 풍수지리는 학문과 이론이 아니라 땅속 수 십 미터를 볼 수 있는 자신의 눈만이 혈을 찾을 수 있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생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일반사람들에게 신비감을 줌으로서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지만 왜곡된 풍수관을 심어준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살아있을 때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비판도 많이 했지만 고인이 된 지금은 측은한 마음으로 명복을 빌 따름이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대, 517년, 1392 - 1910 ]
원(園) 13기(基)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호)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익종(翼宗) 一 수릉(綏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一 융릉(隆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一 영릉(永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一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一 경릉(敬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제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一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一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호)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기(基)
제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一 유릉(裕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제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一 홍릉(洪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시
왕릉 35기
제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一 예릉(睿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一 경릉(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제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一 인릉(仁陵 : 사적 제194호)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제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一 건릉(健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二 홍릉(弘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一 원릉(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二 혜릉(惠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一 의릉(懿陵 : 사적 제204호)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三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二 익릉(翼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一 명릉(明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제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一 숭릉(崇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一 영릉(寧陵 : 사적 제195호)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二 휘릉(徽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一 장릉(長陵 : 사적 제203호)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二 성묘(成墓 : 사적 제365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一 목릉(穆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一 강릉(康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一 효릉(孝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三 희릉(禧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二 온릉(溫陵 : 사적 제210호)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一 정릉(靖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三 회묘(懷墓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二 순릉(順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一 선릉(宣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路)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二 공릉(恭陵 : 사적 제205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一 창릉(昌陵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7대 세조(第七代 世祖) 一 광릉(光陵 : 사적 제197호)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二 사릉(思陵 : 사적 제209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一 장릉(莊陵 : 사적 제196호)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제5대 문종(第五代 文宗) 一 현릉(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4대 세종(第四代 世宗)
제3대 태종(第三代 太宗)
제2대 정종(第二代 定宗)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三 정릉(貞陵 : 사적 제208호)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二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一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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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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