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朝鮮王陵] 묘(墓) - 2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묘 (墓) - 2
(1) 조선왕조의 시작
묘(墓)란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
조선왕릉은 42기 (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기,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기(능40, 원14, 묘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능3, 원4, 묘5)입니다.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조선왕릉[朝鮮王陵]의 묘(墓)
(1) 조선왕조의 시작 조선창업의 전설, 대풍수의 명당 자미원, 조선왕조의 탯자리 삼척 준경묘 · 영경묘 濬慶墓 · 永慶墓 조선 3대 태종의 후궁, 조선왕조 7대에 걸쳐 내명부를 지킨 여인, 명빈묘 明賓墓
(1) 조선왕조의 시작
조선창업의 전설, 대풍수의 명당 자미원, 조선왕조의 탯자리 삼척
추존왕 목조(穆祖, ? ~ 1274년)의 아버지, 조선 왕실의 선대 능묘, 1899년, 강원도 삼척 두타산(頭陀山) 524호
준경묘와 영경묘는 조선 태조의 5대조(목조의 부모, 즉 양무장군과 그 부인 이씨)의 능묘로, 해당 묘역(墓域), 재실(齋室), 목조대왕 구거유지(舊居遺趾)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곳은 북한 함경도의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의 4대조의 능묘와 함께 보존되고 있는 능역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 이곳은 명산인 두타산의 지맥에 자리를 잡고 있어 조선 왕조의 태동을 비롯해 500여 년 왕조의 정기를 이을 수 있는 명당으로 평가되는 지역이다. 아울러 이 지역의 송림은 일부 간벌해 궁궐건축과 문화재 복원 목재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숭례문 복원 시 준경묘의 용맥 능선의 소나무를 일부 간벌해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이며 목조의 아버지 남한 지역에 있는 조선 왕실 최고의 시조묘이자, 조선왕조 태동의 발상지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준경묘와 영경묘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가 묻힌 곳으로 묘역과 재실, 목조의 옛 살림집 등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활기리 소재 준경묘는 조선 태조의 5대조부인 양무장군(陽茂將軍)의 묘이다. 양무장군의 부인 이씨의 묘인 영경묘는 영경묘는 약 4㎞ 떨어진 하사전리에 있다. 영경묘와 함께 조선 왕조가 인정한 선조의 묘역으로 조선 왕조태동의 발상지로서의 역사성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적 가치 등 중요한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양무장군의 부인 이씨의 묘인 영경묘는 영경묘는 약 4㎞ 떨어진 하사전리에 있다. 영경묘와 함께 조선 왕조가 인정한 선조의 묘역으로 조선 왕조태동의 발상지로서의 역사성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적 가치 등 중요한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1899년에 왕명으로 묘소를 짓고, 재각(齋閣)·제실(祭室)·비각(碑閣) 등을 세웠다. 준경묘 앞에는 앞면 3칸·옆면 2칸짜리 제각이 있는데, 지붕은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이 제각은 왕릉에 세워지는 정(丁)자형이 아니라 단순한 일(一)자형으로 되어 있다.
남한에서 최고의 시조묘로 매년 4월 20일에 전주이씨 문중 주관으로 제례를 올린다. 이 일대는 원시림의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되어 있으며 이곳의 소나무들은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쓰였음은 물론 최근 화재로 복원중인 숭례문의 자재로도 쓰였을 만큼 훌륭한 황장목이다.
조선왕조 창업의 산실로 불리는 준경묘에는 유명한 백우금관(百牛金冠)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목조 이안사가 삼척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게 되자 묘자리를 찾기 위해 산 속을 헤매고 다녔다. 목조가 잠시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을때 한 도승이 지나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루 살펴보고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혼잣말로“참 좋구나 . 대지(大地)로다”라고 하였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도승은 계속해 “개토제(開土祭)에 소 일백 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관을 금으로 만들어 장사지내면 5대 안에 왕이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제압하고 창업주가 될 명당이로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안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골몰히 생각하였으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백마리와 금으로 만든 관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안사는 궁리 끝에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이므로 숫자상 일백 백자와 발음이 통하므로 소 일백마리는 흰 소 한 마리로 대신하고 귀리 짚이 황금색이니 이것으로 금관을 대신하면 될 것이라 판단하였다. 마침 처가에 흰 소가 있어 부인에게 내일 밭갈이를 하려고 하니 처가의 흰 소를 잠시 빌려오라고 하였다. 다음날 부인이 몰고 온 흰 소를 잡아 제물로 사용하고 황금색 귀리 짚으로 관을 만들어 장사를 지냈다. 이렇게 장례를 치른 후 이양무의 5대손인 이성계가 마침내 왕이 되어 조선을 건국하였다.
제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일자각(一字閣)으로 왕릉의 제각(祭閣)인 정자각(丁字閣)과는 그 규모가 다르다. 비각 안에는 "어제준경묘비(御製濬慶墓碑)"라 적힌 비가 있는데, 이 비는 광무 3년(1899)에 자헌대부 이근명이 비문을 서했다. 재실은 활기리 마을에 있으며 재실 바로 앞에 "목조구거유지(穆祖舊居遺址)"라는 비와 비각이 있다. - 준경묘 비각 -
목조(穆祖, ? ~ 1274년), 재치로 왕업을 닦다 목조인 이안사는 전주 유력 가문의 자제로 성품이 호방하고 천하를 경략할 뜻이 있었다. 용맹과 지략이 뛰어났던 그는 스무 살 때 전주 지주사(知州事)와 사이가 멀어졌다. 지주사는 전주 안렴사와 함께 목조를 역적으로 몰아붙인다. 당시 유행하던 이씨가 왕이 된다는 목자왕기설(木子王氣說)의 주인공이 이안사라는 주장이었다. 그 근거로써 전주의 명산으로 왕의 기운이 서린 기린산 왕자봉 밑에 전주이씨 3세인 이천상의 묘가 있다는 것을 들었다. 이 묘의 후손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왕이 된다는 것이다.
목조는 가족과 자신을 따르는 170호와 함께 삼척으로 몸을 숨겨야 했다. 태조실록에는 목조를 따라나선 집을 170호로 표현했는데 전주군지에는 7000여 명이라고 되어 있다. 몇 만 명 되지 않았을 당시 전주의 인구와 급박했던 상황을 감안할 때 목조의 인품을 추앙한 백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목조는 삼척에서 피신생활을 한 지 1년 만에 아버지 이양무 장군의 상을 당했다. 목조는 아버지 묏자리를 구하려고 좋은 산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가 지쳐 잠시 나무 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길을 가던 한 도승이 한 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옆에 있던 동자승에게 말했다. “대지(大地)로다, 길지(吉地)로다.”
목조가 나무 밑에서 보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도승은 계속 말했다. “이곳에 장사지내면 5대 안에 왕이 태어날 자리인데 반드시 개토제(開土祭) 때 100마리 소(百牛)를 제물로 바치고, 금으로 만든 관(金棺)을 사용해야 한다. 이 땅은 천하의 명당이니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
이안사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나라를 창업할 후손이 태어난다는 말에 고무됐다. 그러나 자신은 전주에서 삼척으로 피신한 처지로 관원에게 노출되면 안 되는 도망자 신세였다. 그러니 재정이 넉넉할 리 없었다.
이때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신하여 1천년 사직이 반으로 줄어 5백년을 유지했다고 하고, 준경묘 사방 5봉의 산 수명이 각각 1백년이라 도합 5백년의 조선왕조의 수명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얘기가 전해지고 있어 준경묘 자리는 오늘날도 풍수를 따지는 사람은 제일의 명당 중 하나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묘역.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양무장군의 묘(준경묘)와 양무장군의 부인 이씨의 묘(영경묘)이다. 고종 광무 3년(1899)년에 묘소를 고쳐 짓고 제각(제사를 지내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머무는 공간 또는 제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공간)과 제실(제사를 모시는 집), 비각(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건물) 등을 세웠다. 이 일대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기도 했을 만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개국을 예언한 명당, 영경묘”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 삼척으로 왔을 때였다. 삼척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 양무장군이 세상을 떠났다. 묘 자리를 찾고 있던 중 산 속에서 한 도승이 동자승에게 하는 얘기를 우연히 엿듣게 된다. “이곳에서 장사를 지내면 5대 안에 한 나라를 개국하는 그런 인물이 태어날 것이다. 그럴려면 반드시 개토제(開土祭) 때 100마리 소를 제물로 바쳐야 하고, 금으로 만든 관을 사용해야한다” 이에 목조는 궁리 끝에 100마리의 소(百牛)는 흰 소(白牛)로 대신하고, 금으로 만든 관(金棺)은 황금빛이 나는 귀릿짚으로 대체했다. 그렇게 해서 예언대로 이성계가 태어나게 됐다고 한다. 이때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신하여 천년 갈 조선이 5백년만 유지됐다고도 하고, 준경묘 사방 5봉의 산 수명이 각각 1백년이라 조선왕조의 수명이 500년이었다고도 한다.
준경묘는 조선 태조의 5대조인 양무장군(陽茂將軍)의 묘이고, 영경묘는 양무장군의 부인 이씨의 묘이다. 준경묘는 활기리에 있고, 영경묘는 약 4㎞ 떨어진 하사전리에 있다. 1899년에 왕명으로 묘소를 짓고, 재각(齋閣:제사를 지내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머무는 공간 또는 제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공간)·제실(祭室)·비각(碑閣) 등을 세웠다. 준경묘 앞에는 앞면 3칸·옆면 2칸짜리 제각이 있는데, 지붕선이 옆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이 제각은 왕릉에 세워지는 정(丁)자형이 아니라 단순한 일(一)자형으로 되어 있다. 이 일대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되어 있어 원시림의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경치가 좋은 곳이며, 이곳의 소나무들은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쓰였다고 한다 삼척 준경묘·영경묘는 조선 왕조 태동의 발상지 목조는 궁리 끝에 ‘소 백 마리는 백우(百牛)이고, 백우(百牛)는 백우(白牛)와 음이 같다’ 하는 생각을 해냈다. 또 금으로 만든 관은 보릿대의 누런색으로 꾸밀 수 있음을 알았다. 목조는 처가에 있던 흰 소(白牛)를 가져오고 황금색으로 보이는 누런 보릿대로 관(金棺)을 만들어 장사를 지낸다. 목조는 장사를 지낸 후 다시 함흥으로 피신해야 했다. 갈등 관계에 있던 전주 지주사가 관동 안렴사로 부임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지를 하늘이 받아들여 5대째인 이성계가 왕에 등극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태조의 5대조인 양무장군(陽茂將軍, 이양무, 李陽茂, ? ~ 1231)의 묘 목조가 모신 아버지 무덤이 준경묘이고, 어머니 무덤이 영경묘이다. 조선은 개국과 함께 두 묘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계속 허사였다. 왕실의 염원을 안 근거없는 꿈 등을 제시하며 묘를 찾았다는 허튼 소리를 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오랜 바람은 고종36년(1899년)에 이뤄졌다. 이양무 장군 부부의 묘를 찾아 대대적인 정비작업을 했다.
준경묘는 조선 태조의 5대조부인 양무장군(陽茂將軍)의 묘이고, 영경묘는 양무장군의 부인 이씨의 묘이다. 준경묘는 활기리에 있고, 영경묘는 약 4㎞ 떨어진 하사전리에 있다.
1899년에 왕명으로 묘소를 짓고, 재각(齋閣:제사를 지내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머무는 공간 또는 제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공간)·제실(祭室)·비각(碑閣) 등을 세웠다. 준경묘 앞에는 앞면 3칸·옆면 2칸짜리 제각이 있는데, 지붕선이 옆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이 제각은 왕릉에 세워지는 정(丁)자형이 아니라 단순한 일(一)자형으로 되어 있다.
이 일대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되어 있어 원시림의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경치가 좋은 곳이며, 이곳의 소나무들은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쓰였다고 한다. 부속문화재이성계의 5대조부 양무장군의 묘로 1899년에 영경묘와 같이 묘소를 수축하여 정자각, 비각을 건축하고 舊居址에 재실, 비각을 건축하였으며, 특히 이 일대는 울창한 송림으로 되어 있어 원시림의 경관을 여기서만 구경할 수 있는 산자수려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 전주이씨의 실묘로는 남한에서 최고의 시조묘로 매년 4월 20일에 전주이씨 문중 주관으로 제례를 올리고 있다. 1984년 8월에는 삼척군에서 영경묘와 함께 재각, 비각, 재실, 홍살문 등을 일제히 보수하였다.
묘 앞의 제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일자각(一字閣)으로 왕릉의 제각(祭閣)인 정자각(丁字閣)과는 그 규모가 다르다. 그리고 제각 우측에 "어제준경묘비(御製濬慶墓碑)"라 적힌 비가 비각 안에 있는데, 이 비는 광무 3년(1899)에 자헌대부 이근명이 비문을 서했다. 활기리 마을에 있는 재실은 ㅁ자 와가(瓦家)로 대문은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고 여기에 제기(祭器)가 보관되어 있다. 재실 바로 앞에 "목조구거유지(穆祖舊居遺址)"라는 비와 비각이 있으며, 이 비는 광무 3년(1899)에 이중하가 어명으로 세웠고, 재실도 이때 이중하의 감독으로 지어졌다. 영경묘는 태조의 5대조모 평창 이씨의 묘로, 1899년에 준경묘와 같이 묘소를 수축하여 정자각, 비각을 건축하고 영경묘라고 하였다. 이 묘는 준경묘와 함께 전주 이씨의 실묘로는 남한에서 최고 시조묘이며 매년 4월 20일 전주 이씨 문중에서 제례를 지낸다. 비각 안에 있는 "어제영경묘비(御製永慶墓碑)"는 광무 3년(1899)에 정헌대부 민병석이 서(書)했다.
1981년 8월 5일 강원도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그 대상은 묘(43-1), 재각(43-2), 비각(43-3), 비(43-4), 재실(43-5)이다. 백우금관의 설화조선왕조 창업의 산실로 불리는 준경묘에는 유명한 백우금관(百牛金冠)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목조 이안사가 삼척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게 됩니다. 목조는 아버지의 묘자리를 찾기 위해 산 속을 헤매다가 나무 밑에서 잠시 쉬는데, 한 도승이 지나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루 살펴보고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혼잣말로“참 좋구나 . 대지(大地)로다”라고 하였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도승은 계속해 “개토제(開土祭)에 소 일백 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관을 금으로 만들어 장사지내면 5대 안에 왕이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제압하고 창업주가 될 명당이로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안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골몰히 생각하였으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백마리와 금으로 만든 관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양무장군의 부인 이씨의 묘 준경묘·영경묘의 묘역과 재실, 목조대왕구거유지 등으로 구성된 삼척 준경묘·영경묘는 조선 태조의 5대조(목조의 부모, 즉 양무장군과 그 부인 이씨)의 능묘다. 비록 왕의 능침은 아니지만 조선 왕조가 인정한 선조의 묘역이다. 삼척 준경묘·영경묘는 남한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조선 왕실 선대(先代)의 능묘로서 조선 왕조 태동의 발상지로서의 역사성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적 가치 등 중요한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된 이 곳은 조선 태조의 5대조모이며, 목조의 어머니가 되는 이씨의 묘이다. 고종 광무 3년(1899)에 태조의 5대조 묘인 준경묘와 함께 묘소를 수축하고 제각과 비각을 지었다. 이 일대는 울창한 송림으로 되어 있어, 매년 4월20일에 전주이씨 문중에서 제례를 올리고 있다. 이 곳에서 4km 떨어진 활기리에 준경묘가 있다.
조선 3대 태종의 후궁, 조선왕조 7대에 걸쳐 내명부를 지킨 여인
명빈 김씨(明嬪 金氏, ? ~ 1479), 1479년, 경기도 구리시 364호, 동구릉(東九陵)
조선 3대 태종의 후궁 명빈 김씨의 묘이다. 묘의 시설은 호석과 곡장이 없이 민간인의 묘처럼 나지막하게 봉분이 조성되어 있고, 상석과 문석인만 설치되어 있다. 명빈 김씨의 묘인 명빈묘(明賓墓)는 사적 제364호이며,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峨川洞)에 위치해 있다. 묘역의 석물(石物)은 표석 1기, 문인석 1쌍, 상석(혼유석) 향로석 등이 있다.
봉분의 비석 앞면에 ‘명빈김씨지묘(明嬪金氏之墓)’, 뒷면에는 ‘양주00면성화기해7월초7일(楊州ㅇㅇ面成化己亥七月初七日)’이라 새겨져 있어 이 무덤이 명빈 김씨의 것이며, 1479년 음력 7월 7일에 세운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무덤은 일반 사람들의 무덤처럼 눈에 띄지 않고, 몇몇 석물만이 갖추어져 있다. 무덤에 있는 비석 앞면에는 ‘명빈김씨지묘(明嬪金氏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명빈 김씨(明嬪 金氏, ? ~ 1479) 조선의 제3대 왕 태종의 후궁이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안정공(安靖公) 김구덕의 딸이다. 남동생 김오문의 딸은 문종의 세자 시절 첫 번째 세자빈이었던 휘빈 김씨이다. 1411년(태종 11년) 11월에 명빈으로 개봉되었으며, 1479년(성종 10년) 음력 6월 5일에 사망하기까지 태종부터 성종에 이르는 7대에 걸쳐 내명부를 지켰다.
휘빈 김씨 (徽嬪 金氏, 1410년 ~ 1429, 문종의 세자 시절 세자빈으로 판돈녕 김구덕의 손녀)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대, 517년, 1392 - 1910 ]
원(園) 13기(基)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호)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익종(翼宗) 一 수릉(綏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一 융릉(隆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一 영릉(永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一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一 경릉(敬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제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一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一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호)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기(基) 제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一 유릉(裕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제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一 홍릉(洪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시
왕릉 35기 제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一 예릉(睿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一 경릉(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제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一 인릉(仁陵 : 사적 제194호)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제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一 건릉(健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二 홍릉(弘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一 원릉(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二 혜릉(惠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一 의릉(懿陵 : 사적 제204호)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三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二 익릉(翼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一 명릉(明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제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一 숭릉(崇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一 영릉(寧陵 : 사적 제195호)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二 휘릉(徽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一 장릉(長陵 : 사적 제203호)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二 성묘(成墓 : 사적 제365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一 목릉(穆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一 강릉(康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一 효릉(孝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三 희릉(禧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二 온릉(溫陵 : 사적 제210호)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一 정릉(靖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三 회묘(懷墓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二 순릉(順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一 선릉(宣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路)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二 공릉(恭陵 : 사적 제205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一 창릉(昌陵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7대 세조(第七代 世祖) 一 광릉(光陵 : 사적 제197호)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二 사릉(思陵 : 사적 제209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一 장릉(莊陵 : 사적 제196호)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제5대 문종(第五代 文宗) 一 현릉(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4대 세종(第四代 世宗) 제3대 태종(第三代 太宗) 제2대 정종(第二代 定宗)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三 정릉(貞陵 : 사적 제208호)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二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一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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