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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묘(墓) - 3 조선의 갈등과 궁중비사 - 1

草霧 2013. 8. 22. 16:54

 

 

 

 

 

 

 

 

조선왕릉[朝鮮王陵] 묘(墓) - 3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3

   

 조선의 갈등과 궁중비사 (1)

 

 

 

 

회묘 懷墓, 연산군묘 燕山君墓, 성묘 成墓, 광해군묘 光海君墓, 임해군묘 臨海君墓

 

 

()란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왕의 남자 포토 보기광해, 왕이 된 남자 포토 보기 포토 보기 포토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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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토 보기 포토 보기연산군 포토 보기

 

 

 

조선왕릉 [朝鮮王陵]의 묘 ()

 

(2) 조선의 갈등과 궁중비사 - 1

비운의 왕비, 조선 9대 성종의 계비이자 10대 연산군의 어머니, 회묘 懷墓

준비되지 않은 군왕, 조선 최초 폐위임금이 되다. 연산군묘 燕山君墓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 광해군의 생모, 성묘 成墓

어머니 공빈 김씨 발치에 잠든 광해군주, 광해군묘 光海君墓

조선의 사이코패스, 개망난이 왕자, 임해군묘 臨海君墓

 

 

 

 

 

(2) 조선의 갈등과 궁중비사 - 1

 

 

 

 

 

비운의 왕비, 조선 9대 성종의 계비이자 10대 연산군의 어머니

 

회묘 懷墓

   

 

 

조선 9대 성종 임금의 계비이자 10대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 ~ 1482),

경기도 고양시 200, 서오릉(西三陵)

 

 

애정 다툼을 투기로 몬 임금, 참극의 씨를 뿌리다

 

 

 

조선의 제9대 왕 성종{成宗)의 계비인 폐비 윤씨(廢妃 尹氏)의 무덤이다. 한때 폐비 윤씨가 제헌왕후(齊獻王后)로 복위되면서 무덤의 이름도 회릉(懷陵)으로 바뀌었던 적이 있다. 성종의 계비이자 연산군(燕山君)의 생모로, 1482(성종 13) 음력 816일 사사된 폐비 윤씨의 무덤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의 서삼릉 경내에 있다. 원래는 경기도 장단군에 묻힌 묘를 연산군이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으로 천장하였으며, 이후 19691025일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대체적으로 조선 전기의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물들은 여타 왕릉처럼 문인석, 무인석을 모두 갖추고 있다.

 

'품을 회()', '돌이킬 회()'를 써서 회릉(懷陵)

'윤씨지묘(尹氏之墓)', 회릉(懷陵), 회묘(懷墓) 폐비 윤씨 회묘의 겉모습은 왕릉과 다름없다. 오히려 웬만한 왕릉보다 외관상으로는 훨씬 훌륭하다. 묘에서 능으로, 능에서 다시 묘로 격하된 폐비 윤씨의 슬픈 운명이 죽어서도 서삼릉 비공개 지역 끝자락에 숨어서 이렇게 눈물을 감추고 있는 것인가. 회묘는 원래 동대문 회기동에 있었으나 19691025일 경희대학교 학교 공사 때 이곳으로 천묘했다. 회묘가 있던 자리는 현재 경희대학교 경희의료원이 들어 서 있다.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고부간 갈등 희생자

이 역시 권력에 희생된 여인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의 딸인 윤씨는 아버지 윤기무가 죽자 집안이 궁핍해 어머니에 의해 궁에 들어온다. 폐비 윤씨가 성종보다 12살이나 연상이라는 사실은 그리 알려진 바가 없다. 빼어난 미모로 성종4(1473) 숙의에 봉해졌던 윤씨는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자리에 오른다. 성종이 13세 소년왕으로 왕위에 올라 7년간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을 받던 시절이 끝나고 친정으로 들어선 성종7(1476)년의 일이다.

 

성종은 어머니 인수대비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상의 여인이자 집안이 별 볼일 없는 윤씨를 왕비로 책봉했고 그해 연산군이 탄생한다. 정희대비, 인수대비, 안순대비의 세 과부 대비들의 비호 아래 성종의 여성 섭렵은 조선조 제왕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화려했다. 힘이 되어줄 마땅한 배경이 없는 윤씨는 명문가를 등에 업은 여성들과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되었다. 성종이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으나 지아비에 의해 죽음을 당한 윤씨는 오직 한 남자의 사랑을 갈구했던 불행한 여인이었을 뿐이다. 21살에 청상과부가 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불과 8살의 차이에 시샘 당한 여자들의 다툼이었을까.

 

갑자사화와 중종반종

 

 

 

성종이 14941224일 창덕궁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자 29일 연산군이 20세의 젊은 왕으로 즉위한다. 국장기간이던 1495316일 성종의 능에 묻을 지석(誌石)의 초안이 발단이 되어 연산군은 비로소 자신이 폐비 윤씨의 자식임을 알게 된다. 지석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연도, 행적을 숨김없이 적어 상석과 능상 사이에 묻는다. 지석의 초안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무의 이름이 드러나면서, 연산군은 생모로 알았던 윤호의 딸 정현왕후의 아들이 아니고 윤기무의 딸 폐비 윤씨의 아들이 자신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폐비 윤씨가 아들 연산군에 의해 회릉(懷陵)으로 복원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인 연산군 10(1504)이다. 1504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갑자사화는 임사홍이 윤씨의 폐출을 빌미 삼아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을 동시에 제거하려고 벌인 피바람이다.

 

성종이 사후 1백년간 폐비 윤씨 사건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한 유명을 깨고 연산군에게 밀고하면서 유래 없는 사화가 벌어졌다. 연산군의 향락으로 국고가 비게 되자 공신들에게 공신전과 노비를 몰수해 보충하려 한다. 그때까지 폭정을 묵인하면서 자신들의 배를 채우던 권신들은 태도가 돌변한다. 자신들의 경제기반을 빼앗길 수 없던 권신들은 비로소 왕의 향락을 자제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겉으로 갑자사화는 폐비 윤씨 사건 때문이나, 연산군과 대신들의 대립을 이용해 사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으려는 임사홍의 속셈과 사림을 싫어했던 연산군의 내심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피비린내 나는 갑자사화에서 권신과 사림, 훈구의 거의 모든 세력들이 화를 당했고 중종반종이 일어난 계기가 됐다.

 

이 과정에서 인수대비는 손자에게 머리를 받혀 죽고 시어머니에게 쫓겨나 죽음을 당한 폐비윤씨는 제헌왕후로 추존되고 회릉으로 격상하게 된다. 이 덕분에 폐비 윤씨는 어느 왕릉 못지 않은 능상과 석물로 단장했으나, 고작 2년 후에 중종반정으로 아들이 쫓겨나고 비참하게 죽게되니 과연 한삼의 피에 서린 원한이 풀렸을지는 의문이다.

 

   

 

무덤을 건드리면 동티난다

1506년 연산군이 폐위되자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하됐지만 '무덤을 건드리면 동티난다'는 설을 우리 조상들이 굳게 믿고 있는 덕분에 겉모습은 연산군이 조성한 회릉의 모습 그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다.

 

회기동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의 동명은 회묘에서 유래한 것이다. 윤씨의 묘가 회릉으로 이름이 바뀌자 이 지역의 이름은 회릉동(懷陵洞)이었으며, 이후 회묘로 격하되면서 회묘동(懷墓洞)으로 바뀌었다. 훗날 회()라는 글자가 어렵다 하여 회()로 바꾸고, ()라는 글자가 좋지 않은 글자라 하여 기()자로 바꾸어 오늘날의 회기(回基)라는 이름이 되었다

 

폐비 윤씨 묻힌 ' 회묘 '서 지명 유래

[번외] 궁중 암투 속, 어이없는 피해자?,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 ~ 1482)

 

 

조선의 제9대 왕 성종의 후궁이자, 두 번째 왕비이며, 10대 왕 연산군의 생모이다. 한때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되었으나, 폐출된데다가 이후 왕후의 지위도 다시 추탈되었으므로 보통 폐비 윤씨라 부른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에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미지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 尹起畝)[3]와 신씨의 딸로 윤관의 11대손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남편(성종)의 후궁들 문제로 남편과 시어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으로 유명하며,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낸 일로 인해 폐서인 된 후 사사되었다. 사사 당시 피를 토한 금삼을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넘겨주며 아들이 자라면 넘겨줄 것을 유언했고, 이는 후일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도화선이 된다.

 

연산군 즉위 후 제헌왕후로 왕후의 작호가 추숭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다시 삭탈되었다. 신숙주는 그의 외당숙이며, 명종 때의 권신 이량은 그의 오빠 윤구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성종 4(1473) 319()에 간택후궁으로 입궁하여 숙의에 봉해지고 성종 5(1474)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그로부터 2년 뒤에 숙의였던 그녀가 임신중인 몸으로 왕비로 승격되어 4개월 뒤 원자(연산군)를 낳아 중전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성종보다 12살 연상이며 후궁에서 왕비로 오른 여인이다.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여자 관계가 복잡한 남편인 성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성종이 자신의 처소에는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왕대비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는 설이 있으며, 일련의 사건 등으로 마침내 1479년 음력 62일에 폐위되었다.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서인이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점,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주려 하였으나,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인수대비)와 엄숙의, 정숙용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면서 1482년 음력 816, 폐비 3년뒤 결국 사약을 받아 사사되고 말았다. 495(연산군 1) 연산군은 그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엄(() 두 숙의를 궁중 뜰에서 살해하고 그들의 아들인 안양군 항과 봉안군 봉도 귀양 보낸 후 죽였다.

 

폐비 윤씨는 정말 용안에 손톱자국을 냈을까?

제헌왕후 윤씨(폐비 윤씨) 폐출 사건

김처선과 폐비 윤씨, 실제 관계는 어땠을까? - 오마이뉴스

장서희부터 전혜빈까지…폐비윤씨를 맡은 배우들은?:SBS뉴스

 

 

 

준비되지 않은 군왕, 조선 최초 폐위임금이 되다.

 

연산군묘 燕山君墓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 ~ 1506),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 夫人愼氏)( ? 1537),

1513, 서울 도봉구 362, 정릉(貞陵) 비공개지역

'부인 폐비신씨가 보고 싶다  

왕 또는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고 하지만 연산군은 그 지위가 군()으로 강봉되었기 때문에 묘()라 하였다. 그 후 중종 7(1512) 12월 부인 신씨가 상소하여 묘를 강화에서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선영(先塋)이며 연산군의 사위와 딸의 무덤이 있는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현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하기를 청하여, 이듬해(1513) 2월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이장하고 양주군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자신의 사후 100년간 폐비윤씨의 문제를 논하지 말라'

묘의 시설은 대군으로 예우하여 봉분, 곡장, 혼유석, 장명등, 향로석, 재실 등을 갖췄으나, 병풍석, 석양, 석마, 사초지, 문석인 등은 세우지 않았다. 연산군의 묘비 전면에 燕山君之墓’, 뒷면에는 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이라 새겨져 있다. 부인 신씨의 묘비는 전면에 居昌愼氏之墓’, 뒷면에 六月二十六日葬이라 새겨져 있고, 연도 부분은 마멸되어 있다.

 

연산군은 150611월 유배지인 강화 교동에서 3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부인 신씨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로서, 연산군의 폐왕과 함께 폐비가 되었다. 연산군이 죽은 뒤에는 묘를 강화에서 양주군 해동면 원당리(현 위치)로 이장하기를 청하여, 15132월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이장하고 양주군 관원으로 하여금 치제하게 하였다.

    

연산군묘역의 중앙에 자리한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義貞宮主趙氏)의 묘

세종4년에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 되었으나, 태종이 승하하면서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궁주의 작호를 받았습니다. 이 땅의 원래주인은 임영대군으로 후사 없이 죽은 조씨의 제사를 임영대군이 맡으면서 의정궁주의 묘를 조성하였으며, 훗날 폐비신씨의 요청에 의하여 궁주 위쪽에 연산군묘를 이장한 것입니다

 

연산군 묘역의 제일 아래쪽으로 사위와 딸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이 사위인 부마능양인 구문경(駙馬綾陽慰 具文暻)

 

 

왼쪽이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徽順公主)

 

 

 

연산군(燕山君, 이융 李忄隆, 1476 ~ 1506)

연산군은 성종의 아들로 조선 10대 왕이다. 1494년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3년 동안은 별 탈 없이 정사를 펼쳤다. 그러나 1498(연산군 4) 훈구파 이극돈, 유자광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삼아 김종직 등 많은 신진 사류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1504(연산군 10)에는 생모인 폐비 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 엄씨의 모함으로 내쫓겨 사사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경연을 없애고 사간원을 폐지하는 등 비정이 극에 달하여 결국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었으며 강화의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 

채홍사(彩虹使)와 채청사(採靑使)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의 집에서 최고의 요부라 불리는 '장녹수(張綠水)'를 만나다. 

흥청망청(興淸亡淸) 

대표적인 패륜 사건 '월산대군 대부인 박씨사건 

갑자사화(甲子士禍) 

중종반정(中宗反正) 

'부인 폐비신씨가 보고 싶다

 

 

연산군묘와 은행나무

   

'한여름 산행은 모두가 함께 갈 수 있는 둘레길로'

정만진의 대구여행 (28) 구지 일대

올바른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해

 

 

폐비 신씨, 거창군부인 신씨(廢妃 愼氏, 居昌郡 夫人愼氏, ? 1537)

10.연산군 - 연산군 및 거창신씨묘본관은 거창(居昌)이며 아버지는 거창부원군 신승선(居昌府院君 愼承善)이며, 어머니는 세종의 넷째인 임영대군의 딸 중모현주 이씨(中牟縣主 李氏)로 세종에게는 손녀가 됩니다. 연산군의 비였으나 연산군의 폐위로 부인 역시 폐위되어 폐비 신씨라 불립니다.

 

연산군과의 신씨 사이에는 51녀를 두었으며, 연산군과 후궁사이에는 21녀를 두었으나, 공주를 제외한 아들은 모두 요절하였거나 연산군 폐위당시에 유배되어 사사되었습니다. 결국 교동에 묻힌 연산군의 시신을 신씨는 중종에게 이장헤 줄것을 상언하였고, 중종은 이를 허락하여 중종8(1513)에 이르러 대군의 예에 맞게 장을 해 주었다.

 

묘역은 능성구씨인 사위의 선영으로, 지금의 도봉구 방학동 자리에 연산군의 사위와 딸도 이곳에 묻혔으며, 중종31(1537) 부인 폐비 신씨도 연산군묘 옆에 나란히 쌍분묘를 이루고 있습니다.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 광해군의 생모

 

성묘 成墓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恭嬪 金氏, 공성왕후(恭聖王后), 1553 ~ 1577),

경기도 남양주시 365, 사릉 (思陵) 비공개지역

 

 

잊혀진 왕비묘, 성릉의 공성왕후

광해군이 어머니 발치에 묻어달라 했던 공빈(恭嬪) 김씨(1553~1577) 묘는 아들의 묘에서 그리 멀지 않다. 광해군 어머니 공빈 김씨의 성묘(成墓)는 한때 능으로 추존돼 난간석과 무인석 문인석을 갖추고 있어 능과 다를 바가 없다. 성묘가 있는 진건읍 송능리라는 지명은, 소나무가 많고 성릉이 있는 마을이라는 송능(松陵)에서 유래된 것이다. 성릉은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으나 성릉의 흔적이 묻은 지명은 남아있다.

 

공빈 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고 25살의 나이로 죽어 양주에 묻힌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광해군은 즉위하자 어머니를 왕후로 추존한다. 광해군 2(1610) 329일 생모 공빈 김씨는 공성왕후(恭聖王后)라 하고 석물을 왕비릉에 준하게 하며 능호를 성릉(成陵)이라 한다.

 

이전에 연산군이 폐비 윤씨를 회릉으로 추존한 예가 있는데다 전쟁을 겪은 후라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대신도 없었다. 또 숙종이 장희빈 사건 이후 후궁을 왕비로 올리지 못하게 국법을 정하기 이전이라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성릉에 관한 기록은 빈약할 정도로 몇 줄 없지만 추존 절차는 별 난관을 겪지 않았다.

 

성릉은 광해군이 폐위되자 성묘로 강등된다. 성묘 바로 앞에 풍양조씨 시조묘인 조맹의 묘가 있다. 공빈 김씨가 묻히자 조맹의 봉분을 헐자 했으나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성왕후로 추존되자 광해군은 조맹의 산소를 파내게 할 것인가 의논했으나 영의정 이덕형이 불가하다고 하자 봉분만 헐게 했다. 비석과 표석이 없던 조맹의 묘는 인조8522일 후손인 조수이가 봉분할 것을 상소하니 이를 허락했다.

    

 

이때 인조는 법에 어긋나게 세운 성릉의 석물을 허물라 했으나 그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인조의 명은 지켜지지 않았다. 무덤을 건드리면 동티난다는 설을 두려워한 관료들이 그대로 두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어린 나이로 어머니를 잃었던 광해군이 어머니 발치에 묻어달라 한 것은, 왕위를 잃고 유배지에서 사무치게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광해군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에 있는 공빈 김씨의 무덤이다. 공빈 김씨의 아들인 광해군이 왕위에 올라, 그녀를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로 추존하고 사당의 이름은 봉자(奉慈)라 하였으며, 능호는 성릉(成陵)이라 하였다. 1613년에는 사신을 파견하여 명나라로부터 책봉고명을 받아오기도 했다.

 

 

1616(광해군 8) 명헌의 존호가 더해졌다. 그러나 1623년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그녀의 위치도 원래대로 돌아갔고 그녀의 왕후로서의 시호와 왕릉도 모두 추탈되고 격하되었다. 다만 추숭 당시에 만들었던 석물들은 그대로 보존하였기 때문에 여느 왕릉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 그녀의 묘인 성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있으며, 19911025일 사적 제36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14대 선조(재위 1567∼1608)의 후궁이며 광해군을 낳은 공빈김씨의 무덤이다. 공빈김씨는 명종 8년(1533)에 태어나 선조의 후궁이 되었으나 선조 10년(1577)에 세상을 떠났다. 무덤 주변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비롯한 많은 석물이 있으며, 왕의 무덤과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의 규모이지만 비석 등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어머니와아들(광해군묘와성묘)

 

 

공빈 김씨(恭嬪 金氏, 공성왕후(恭聖王后), 1553 ~ 1577)

 

 

 

조선의 제 14대 왕 선조(宣祖)의 후궁이자 추존왕후이며 임해군(臨海君), 광해군(光海君) 형제의 생모이다. 광해군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후로 추존되어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의 시호와 성릉(成陵)의 능호가 올려졌으나 광해군 폐위 후 시호 및 능호는 모두 삭탈되었다. 존호는 명헌(明獻)이다. 본관은 김해이다. 그녀는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하였고, 그 때문에 다른 후궁들은 선조에게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이 위독해지자 누군가 자신을 저주하고 있다며 이를 선조가 조사하지 않아 자신이 죽게되는 것이라는 말을 선조에게 아뢰었는데, 이 말을 듣고 난 후 선조는 다른 후궁들에게 더욱 모질게 대하였다. 그런 왕을 소용 김씨(훗날의 인빈 김씨)가 극진히 모셔 선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인빈은 왕에게 공빈의 허물을 자주 들춰내었고, 이 때문에 선조는 공빈을 애도하는 마음이 점점 적어지게 되었다. 훗날 인빈에 대한 선조의 총애는 이전에 공빈에 대한 것보다 훨씬 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1572(선조 5)에 선조의 서장자인 임해군을 낳았으며, 서차자 광해군을 낳은 지 2년 만인 1577(선조 10) 음력 527일에 산후병으로 죽었다. 임해군은 선조의 첫 아들이었으나 성격이 난폭하여 세자에 오르지 못하고 둘째 아들인 광해군이 세자가 된다.

    

공빈 김씨와 인빈 김씨 그리고 광해군

인빈 김씨(仁嬪 金氏, 1555 ~ 1613) - 의안군(義安君), 신성군, 원종(정원군)의 아들이 훗날 인조(仁祖), 의창군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 ~ 1600) - 광해군의 양모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 ~ 1632) - 영창대군 (永昌大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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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부인, 인빈김씨 & 공빈김씨 : 네이버 블로그

 

 

 

어머니 공빈 김씨 발치에 잠든 광해군주

 

광해군묘 光海君墓

 

 

15대 광해군(光海君, 李琿, 1575 ~ 1641), 폐비 문성군부인 유씨 (廢妃 文城郡夫人 柳氏, 1576 ~ 1623), 1643, 경기도 남양주시 363, 사릉 (思陵), 비공개지역

 

패륜자의 대명사, 광해, 왕이 된 남자로 현대에 재조명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의 광해군묘로 가는 길은 찾기 어렵다. 사릉관리소의 안내를 받아 영락교회묘지 길로 올라가면 오른쪽에 '광해군묘'라고 붙은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선조의 둘째 아들로 공빈 김씨 사이에 태어난 광해군(1572~1641)1608년 왕위에 오른다. 광해군은 뛰어난 외교로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며 국력을 키웠다. 재위 15년만인 1623312일 이귀, 김류, 김자점 등 능양군이 이끄는 군사 1천여 명이 창덕궁으로 진입해 반정에 성공하자 14일 폐위된다.

 

인조는 광해군과 폐비 유씨는 강화부의 동문 쪽에, 폐세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는 서문 쪽에 위리안치 시킨다. 유배당한 지 두 달 후 폐세자와 폐세자빈 박씨는 담밑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탈출을 시도하려다가 잡히자 자살을 하고 그 화병으로 1623108일 폐비 유씨가 죽는다.

 

부인과 아들 며느리를 잃고 홀로 유배생활을 하던 광해군은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태안으로 이배되었다가 다시 강화로 돌아온다. 청이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쳐들어오자 교동으로, 전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제주로 이송되어 유배 19년만인 인조197167세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시중드는 시종이 '영감'이라고 부르며 모욕을 줘도 묵묵히 초연하게 세월을 보낸 광해군의 심장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광해는 폐방(廢放)된 지 19년 만에 마침내 천수를 마쳤고, 상장(喪葬)에 이르러서도 은례(恩禮)를 다 갖추어 주었으므로 나라에서 모두 상의 성덕에 감복하였다'

 

왕위를 빼앗긴 광해군의 슬픈 시는 남아있고 어머니 공빈 김씨의 발치에 묻어달라 했던 광해군의 마지막 소원대로 부인 유씨와 나란히 잠든 조선 15대 왕 광해군 묘는 곡장 밖 작은 망주석, 정자각을 대신하는 상석과 향로석 그리고 비석만이 쓸쓸하게 서 있는 작고 초라한 무덤이다. 비운의 왕 광해군 묘소의 비석을 착잡한 심정으로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광해군의 비통한 피눈물이 이렇게 비석을 시커멓게 변하게 한 것일까? 광해군과 부인 유씨의 비석만 유달리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광해군이 죽자 제주목사 이시방(李時昉)이 조정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위리안치된 문을 부수고 들어가 예로 염빈했다고 하자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그르다고 했으나 식자는 옳게 여겼다. 그리고 사관은 광해군이 교동에서 제주로 가면서 남긴 칠언율시를 적어놓는다. 실록은 '이 시를 듣는 자마다 비감에 젖었다'고 적었다.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風吹飛雨過城頭)

후덥지근한 장독(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운 백 척으로 솟은 누각(?氣薰陰百尺樓)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滄海怒濤來薄暮)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碧山愁色帶淸秋)

 

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歸心厭見王孫草)

나그네 꿈 자주도 제자주에 깨이네(客夢頻驚帝子洲)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故國存亡消息斷)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烟波江上臥孤舟)

 

1623년 인조 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인조 19년인 1641년에 6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643년 에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위치한 현재의 묘로 옮겨졌으며, 그의 유언대로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묘가 보이는 곳에 묘소를 잡았다.

 

조선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과 왕비 문성군 부인 유씨의 무덤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재위 15년 동안 실리외교, 서적편찬, 대동법, 국방력 강화 등으로 나라 안정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동생인 영창대군 등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패륜적인 행위로 인조반정 이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생을 마쳤다. 사후 2년 뒤 이곳으로 옮겨졌다.

무덤 주변에는 비석과 상석, 문석인 1쌍 등의 여러 석물들이 있으나, 다른 왕릉에 비해 초라하다.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 달라”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은 지 2년 만에 산후병으로 죽었다. 광해군은 어렸을 적 인빈 김씨를 어머니처럼 따랐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인빈 김씨의 손자이다. 광해군은 인조반정 이후 강화와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수모를 당하며 재위기간(15년)보다 긴 19년을 살다가 인조 19년(1643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제주도에 묻혔다가 이곳에 다시 이장되었다. 광해군은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어머니의 발치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과 문성군 부인 유씨의 무덤이다. 봉분이 두개인 쌍분이며, 무덤 주변에는 석물들이 있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아들로 형인 임해군 대신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형인 임해군과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경희궁에 가두는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였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이 되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강화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인조 19년(1641)에 사망했다. 처음엔 제주도에 묻혔다가 인조 21년(1643) 이곳으로 옮겨졌다.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임진왜란 이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서적 편찬과 대동법 실시, 국방력 강화 등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부인유씨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고,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로 함께 유배를 갔다가 1623년 사망했다. 양주에 무덤을 모시고, 광해군이 죽은 후 같은 곳으로 옮겨졌다.

 

 

 

광해군 이혼(光海君, 李琿, 1575 ~ 1641)

조선의 제15대 임금이다.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이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힘썼다. 임진왜란 동안 세자의 몸으로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부왕의 인정은커녕 견제와 냉대를 당해야 했다.

 

임진왜란 이후 우여곡절 끝에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듯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금과의 전쟁 위기 상황에서 실리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위 옹립에 공이 컸던 대북파의 반발로 당쟁에 휘말리고 말았으며, 이후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이후 줄곧 인목왕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했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이유로 패륜자로 일컬어져 왔으나, 현대에 들어와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건저(建儲) 문제

인조반정

상궁 김개시, 선조 독살설 배후 의혹

이이첨

 

생전에 폐위되었기에 사후 시호는 없으며 살아있을 때 받은 존호는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이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 후반기 내내 친형 살해와 폐모살제를 이유로 패륜자로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조금씩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명나라와 후금의 전쟁 중 강홍립을 파견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점 역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배신한 것으로 간주되어 조선 시대 내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강홍립을 통한 외줄타기 외교 등 광해군 대의 외교를 중립 외교 혹은 실리 외교로 보는 시각이 등장하면서 여러모로 재평가, 현재는 폭군으로서의 이미지가 많이 희석됐다. 그의 묘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사적 제363호로 지정되었다.

 

 

 

 

 

 

폐비 문성군부인 유씨 (廢妃 文城郡夫人 柳氏, 1576 ~ 1623)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의 왕비이다.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이라고도 한다. 유자신의 딸이며 본관은 문화이다. 판윤 유자신의 딸로 태어나 선조 때에 광해군의 부인으로 간택되어 길례를 올렸다. 그 뒤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되자 왕세자빈이 되었으며 그 후 광해군이 34세로 즉위하자 왕비로 진봉되었다.

 

16233월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왕으로 즉위하면서(인조반정) 유씨도 남편 광해군과 함께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 해 6월 아들 질과 며느리 박씨가 탈출기도 실패 후 자결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결국 같은 해 108일 폐위된 지 7개월여 만에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경기도 양주 적성에 장사지냈으며, 폐비인 까닭에 능은 조성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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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이코패스, 개망난이 왕자

 

임해군묘 臨海君墓

   

 

 

임해군 이진(臨海君 李珒, 1574 1609), 임해군부인 허씨(1571~1644),

경기도 남양주시, 사릉 (思陵), 사적 아님

 

 

조선 제14대왕 선조의 골칫덩어리 장자, 15대 광해군 동복형

 

 

임해군 이진(臨海君 李珒, 1574 1609)

조선 제14대왕 선조의 서자.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진국(鎭國). 뒤에 진(?)으로 고쳤다. 모친은 공빈 김씨, 사도시첨정 김희철(金希哲)의 딸이다. 서자이지만 서열이 첫째이므로 당연히 세자가 되어야 하나 성질이 난폭하여 아우인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기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명에 의하여 순화군(順和君)과 함께 김귀영(金貴榮)?윤탁연(尹卓然) 등을 대동하고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함경도로 떠났다. 그해 9월 반적 국경인(鞠景仁) 등에 의하여 포로가 되어 왜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넘겨져 고원(高原)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여러 차례 석방협상 끝에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본래 성질이 포악한데다가 포로가 되었던 정신적인 압박으로 인하여 그 포악함은 더욱 심해져서 분을 발산시키기 위하여 길거리를 헤매었고 민가에 들어가 재물을 약탈하고 상민을 구타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한편, 왜장 가토는 포로로 있을 때 친분을 기화로 여러 차례 그에게 서신을 보내서 내정을 탐사하려고 하였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세자봉작에 대한 서열문제가 명나라에서 다시 거론되어 현장실사를 위하여 사신이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일부 대신들의 주청에 의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화의 교동으로 이배되었고, 이듬해 죽음을 당하였다. 1623(인조 1)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등극하자 복작신원되었고, 시호는 정민(貞愍).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이 빠르게 북상해 오자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파천하기로 결정한다. 4월 29일 파천하기 직전, 선조는 장남 임해군(臨海君)과 5남 순화군(順和君)에게 함경도로 가라고 지시했다. 태조 이성계 선조들의 근거지이자 왕업의 발상지였던 함경도로 왕자들을 보냄으로써 지역의 민심을 다독이고 의병을 규합해 전란을 극복하는 데 보탬이 되게 하려는 조처였다.

 그런데 두 왕자는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는커녕 7월 23일 회령(會寧)에서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포로가 되는 과정이 충격적이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일본군에 직접 붙잡힌 것이 아니라 당시 회령에 귀양 와 있던 전주 출신의 아전 국경인에게 포박돼 가토에게 넘겨졌던 것이다. 국경인은 반란을 일으킨 뒤 회령의 객사(客舍)를 습격해 두 왕자 부부와 그들의 외척들, 수행했던 신료들을 모두 결박해 가토에게 넘겨주었다.

 국경인은 왜 이렇게 엄청난 반역 행위를 저질렀을까. 『조야첨재(朝野僉載)』를 비롯한 사료들은 두 가지 입장에서 그 배경을 서술하고 있다. 먼저 “평소 간악했던 데다 전주에서 회령까지 유배된 것에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라며 국경인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입장이다. 또 하나는 “가토가 이끄는 일본군이 함경도로 진입하자 주민 대다수가 반란을 꾀하게 되었다”고 해 지역의 분위기가 이미 반정부적으로 돌아선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어느 분석이 맞든 이 사건을 계기로 중앙의 위정자들은 함경도를 비딱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교화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여차하면 반기를 들지도 모르는 위험한 지역’이라는 인식이 조선 후기 내내 이어졌다.

 하지만 『선조수정실록』 『용사일록(龍蛇日錄)』 『재조번방지(再朝藩邦志)』 등에는 국경인의 ‘반역’ 동기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내용이 실려 있다. “임해군과 순화군이 함경도로 들어가 회령에 머물며 사나운 노복들을 풀어 백성들을 침학하고 수령들을 핍박해 인심을 크게 잃었다”거나 “순화군의 장인 황정욱(黃廷彧)이 궁노(宮奴)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 가는 곳마다 침탈하고 소란을 피워 인심을 잃고 반란을 재촉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임해군 부인 허씨(1571~1644)

본관이 양천인 허명의 딸로 선조 4(1571)에 탄생하여, 선조의 서장자 임해군에게 출가하여 11녀를 낳았다. 인조 22(1644)74세로 훙서하였다. 후사가 없어 선조의 아들 경창군의 아들 양녕군 경이 계자가 되었다.

 

 

광해군은 폭군이었는가?

희대의 망나니 , 동생을 왕으로 만들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 ②
불의 여신 정이,알고보면 더 재미있는 광해군과 임해군의 라이벌 관계.
http://tv-review.tistory.com/153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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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