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朝鮮王陵] 묘(墓) - 4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묘 (墓) - 4
조선의 갈등과 궁중비사 - 2
묘(墓)란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
조선왕릉은 42기 (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기,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기(능40, 원14, 묘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능3, 원4, 묘5)입니다.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1. "군"이 붙는 이유 '군'이란 후궁에게서 난 아들, 그리고 대군에게서 난 아들을 말합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이 '군'이 붙는 이유는 왕이였다가 각각 인조반정과 중종반정에 의해 왕의 신분에서 강등되었기때문이죠.
2. "조"와 "종"의 차이 어느 시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최고 통지차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한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왕은 오늘날의 통치권자와는 비될 수 없는 권한을 부여받고, 그 권한을 세습할 권리가 주어진다. 조선은 1392년 태조 이성계의 쿠데타에 의해 출범했고 일본 제국주의 강압에 의한 한일합방으로 1910년 멸망했다. 그 동안 정식으로 왕위에 즉위했던 사람은 모두 27명이고 왕위에 즉위하지는 않았지만 죽은 후 왕에 추존된 사람은 모두 9명이다.
왕위에 있다가 불미스런 사건으로 쫓겨난 사례도 두 건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를 처음 일으킨 군주나 나라의 정통을 다시 일으킨 군주, 즉 창업군주나 중흥군주에게 '조'라는 묘호를,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군주에게는 '종'이란 묘호를 올린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죽은 종묘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그 종묘에 봉안하는 위패의 이름이 곧 묘호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세종이나 정조 등 왕의 명칭은 그 왕이 죽은 후에 부여한 묘호의 이름이다.
조선조의 왕들 중 처음에'종'이었다가 후에 '조'로 바뀐 왕은 영조(영종), 정조(정종),순조(순종)가 있으며 고종처럼 스스로 황제로 바꾼 사례도 있다. 왕자에게는 '군'이란 칭호를 주는데, 정식 왕비에게서 태어난 왕자는 '대군', 빈(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자는 군으로 호칭한다. 따라서 연산군과 광해군의 경우는 왕에서 쫓겨난 서자왕자로 강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딸의 경우 정식 왕비 소생에게는 '공주'를, 후궁 소생에게는 '옹주'라는 칭호를 주었다. 왕이사망한 후 편찬되는 재임시절의 공식 기록을 담은 실록은 폐위된 임금은 정식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실록 대신 일기라고 이름을 붙인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 등 '실록'이 아닌 '일기'가 두 편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단종으로 불리는 조선조 6대 왕은 세조의 쿠데타로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가 죽은지 2백년도 더 지난 숙종 24년(1698)에야 단종으로 복원되웠고, 실록 명도 '노산군일기'에서 '단종대왕실록'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이러한 호칭에서도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조선왕릉[朝鮮王陵]의 묘(墓)
묘(墓)란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
(3) 조선의 권력투쟁과 궁중비사2 조선 17대 효종의 후궁, 안빈묘 安嬪墓 권력무상 피부로 와닿아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 대빈묘 大嬪墓 인현왕후의 추천으로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 영조의 정신적 어머니, 영빈묘 寧嬪墓
후궁들 명칭
①======================================================================
(3) 조선의 권력투쟁과 궁중비사 - 2
조선 17대 효종의 후궁
조선 17대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安嬪 李氏, 1622 ~ 1693), 1693년, 경기도 남양주 366호, 사릉(思陵), 비공개지역
사후, 종묘에서 제사를 지낸 후궁 조선 17대 효종(재위 1649∼1659)의 후궁 안빈이씨의 무덤이다. 안빈이씨는 광해군 14년(1622)에 태어나 숙종 19년(1693)에 죽었다. 무덤 주변에는 여러 석물이 있으며, 무덤 앞에 세우는 작은 비석의 앞면에는 ‘조선국안빈경주이씨묘표(朝鮮國安嬪慶州李氏墓表)’라는 글이 새겨 있다.
묘역은 남향으로 화강석 기단의 곡장을 쌓았고 봉분은 평풍석과 난간석이 없이 단촐하게 조성되었다. 봉분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을 놓고 좌·우에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을 배치하였다. 동자석 자리에 세밀하게 조각되 작은 문인석을 놓은 것이 특이하다. 묘표는 1694년(숙종 20)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사위인 금평위 박필성이 글씨를 썼다.
祧遷 조천 종묘(宗廟)의 본전(本殿) 안의 위패(位牌)를 그 안의 딴 사당(祠堂)인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오시던 일
조선시대 무덤. 17대 효종(재위 1649~1659)의 후궁 안빈 이씨의 무덤이다. 묘의 부대시설로는 봉분, 장명등, 묘표 등이 있으며 장명등 양 옆에는 동자석이 있다. 묘표의 앞면에는 ‘조선국안빈경주이씨묘표(朝鮮國安嬪慶州李氏墓表)’라는 글이 있고 뒷면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는 효종이 대군 이였던 시절 힘들고 어려울 때 그의 곁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지켜낸 공을 두고두고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안빈 이씨는 효종이 병자호란으로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자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이역만리의 사지를 억척스럽게 함께 따라갔다.
그리고 여인의 고운 옷과 모습을 버리고 남자 옷을 입은 채 8년 간 정성껏 효종의 시중을 들었다. 왕자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볼모로 잡혀있는 효종의 설움과 울분의 세월을 곁에서 함께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효종 사후 손자인 숙종 대에까지 그 충성과 헌신을 인정받아 귀인에서 안빈으로 승격되었으며, 제사 또한 왕실에서 계속 지내게 되었다.
조선 17대 효종(재위 1649∼1659)의 후궁 안빈이씨의 무덤이다. 안빈이씨는 광해군 14년(1622)에 태어나 숙종 19년(1693)에 죽었다. 무덤 주변에는 여러 석물이 있으며, 무덤 앞에 세우는 작은 비석의 앞면에는 ‘조선국안빈경주이씨묘표(朝鮮國安嬪慶州李氏墓表)’라는 글이 새겨 있다.
안빈 이씨(安嬪 李氏, 1622 ~ 1693) 조선의 제17대 왕 효종의 후궁이다. 본관은 경주이다. 1622년(광해군 14년) 음력 9월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이응헌(李應憲)이다. 효종(孝宗)이 봉림대군으로 있던 시절 들어와 대군의 첩이 되었다. 이씨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끌려갔던 봉림대군(효종)을 끝까지 보필하였고, 훗날 효종의 손자인 숙종은 이 공을 높이 사 그녀를 조천(祧遷)하지 못하도록 하고 역대 왕이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주게 하였다.
1661년(현종 2년)에 종2품 숙의(淑儀)로 품계가 올라갔고, 이후 종1품 귀인(貴人)에 책봉되었다가 1686년(숙종 12년) 정1품 빈(嬪)에 책봉되어 안빈(安嬪)의 작호를 받았다. 1693년(숙종 19년) 음력 10월 7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녀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있으며,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6호로 지정되었다. 남편 효종과의 사이에서 딸 하나(숙녕옹주)를 낳았다.
초라 하지만 화려한 생을 마감한 장희빈 묻힌 '대빈묘' 권력무상 피부로 와닿아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
희빈 장씨(禧嬪 張氏, 장희빈(張禧嬪), 1659 ~ 1701), 1701년, 경기도 고양시 198호, 고양 서오릉(西五陵)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어머니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의 묘이다. 곡담이 봉분 주위를 에워싸고 있고, 봉분 앞쪽으로는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의 양 옆으로는 문석인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묘소는 봉분 주위를 곡담이 둘러싸고 있으며, 장명등(長明燈)과 문인석(文人石) 한 쌍이 배치되어 있다. 보통 후궁들의 묘소 중 '원(園)'에는 문인석과 석마(石馬) 등이 갖춰져 있으나, 대빈묘에는 석마 등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또 희빈의 묘는 서오릉 경내에서도 매우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규모도 작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석물이나 분위기 등이 사대부가의 묘보다도 못하다고 한다. 대빈묘 봉분에서 약 7m정도 떨어진 거리에 커다란 바위가 자리잡고 있는데, "바위로 묘역을 눌러야 희빈의 억센 기를 누를 수 있다."며 가져다 놓은 바위라는 소문이 있었다.
희빈 장씨가 1701년(숙종 27) 10월 10일, 인현왕후를 무고하고 저주한 죄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장사지냈는데, 1969년 현재의 서오릉 지구로 옮겼다. 훗날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여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에 추존하였다.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에 있는 원래 희빈의 묘자리는 현재 사유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별다른 시설물이 없이 공터로 남아있다. 역시 숙종의 후궁이면서 희빈과는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던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무덤은 서오릉이 아닌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홀로 떨어져있다. 숙빈의 무덤에는 소령원(昭寧園)이라는 묘호가 붙었다.
장희빈은 사극에서 단골로 다루는 소재이다. 악녀로 묘사하면서 인현왕후와 대비하는 구도이다. 어찌 그렇게 악랄하기만 하고 또 그렇게 인자하기만 할수 있을까??승자의 기록에 바탕을 두었다고는 하지만 어쩐지 너무 대비되는 구도이다. 이를 드라마는 극적 효과를 위해 절묘하게 이용하는 축면이 강하다. 그렇다면 장희빈은 어떤 인물일까? 실제로 장희빈은 당시에 조선의 재벌 가문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고 정치권력의 한복판에서 살아 남기위한 몸부림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묘는 원래 광주시 오포면 문형리에 있었으나 이곳 서오릉으로 이장된 것이다.
TV 드라마에도 많이 소개된 숙종의 후궁 장희빈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서오릉에서 눈여겨 볼 점은 장희빈의 무덤이 ‘능’이 아닌 ‘묘’라고 불린다는 점이다. 숙종은 궁녀 장소의를 가까이 하여 재위 14년에 왕자 균(경종)을 얻어 이듬해 세자로 책봉하면서 소의를 ‘희빈’으로 대하였다. 그후 왕비 인현왕후를 폐비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했지만 이를 후회하고 재위 27년(1701)에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희빈을 사사(賜死)했다. 대빈묘는 원래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있었는데 1969년 6월 서오릉으로 옮겨왔다.
현재 그녀의 무덤은 서오릉 경내의 대빈묘(大嬪墓)로 1960년대 도시화 개발로 옮겨진 것이다. 경내 한 구석의 음지에 그녀의 무덤과 장식품만이 초라하게 옮겨진 탓에 현대인의 오해를 얻고 있다. 그녀의 사당은 칠궁의 하나인 대빈궁(大嬪宮)이며 궁정동 칠궁 경내에 존재하고 있다. 대빈궁은 왕후만이 사용하는 원형 기둥 등의 양식을 보이는데, 이는 희빈이 한때나마 국모의 위(位)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희빈 장씨(禧嬪 張氏, 장희빈(張禧嬪), 1659 ~ 1701)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의 빈(嬪)으로, 제20대 왕 경종(景宗)의 어머니이다. 숙종 임금보다는 2년 연상이다. 본명은 장옥정(張玉貞)으로 전한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아버지는 역관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장형의 후실인 윤씨이다. 역관(驛官) 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으로서, 흔히 장희빈(張禧嬪)으로 불린다.
산림숭용과 국혼물실을 당의 제1 강령으로 추구했던 서인, 특히 인현왕후 민씨의 배경 세력이었던 노론에게 강력한 적으로 규정되었다. 1701년(숙종 36년) 숙빈 최씨의 발고로 인현왕후의 죽음을 기원하는 저주굿을 한 혐의를 받고 숙종에게 자진을 명받아 사망하였다.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사망하고 숙빈 최씨의 아들인 영조가 즉위하자 인현왕후의 오빠 민진원을 위시한 노론은 인현왕후의 폐위와 죽음의 범인이자 3대 환국(기사환국, 갑술환국, 신임사화)의 원흉으로 정의하여 비난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집필되어 민간으로 보급된 인현왕후전, 수문록 등의 언문 소설과 야사집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역사 서적과 드라마 등에 중요 사료로 활용되어 최근까지 조선 3대 악녀, 요화로 평가 매도되어 손가락질 받아왔다.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 노론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불거지고, 소설 인현왕후전이 당초에 알려진 것처럼 인현왕후를 곁에서 모신 궁녀가 쓴 것이 아닌 영정조대 남성에 의해 쓰여졌다는 사학계의 학설이 있기에 이르자 그녀에 대한 동정 여론이 생겨나 정쟁의 희생양, 신분제의 희생양 등으로 새로운 시각이 나타났다. 1701년 이후 노론에 의해 질투의 화신, 투기의 화신 또는 악의 화신으로 평가되어 왔으나, 1910년(융희 3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인현왕후와의 애증관계의 희생양 내지는 남인과 서인의 권력다툼의 희생양 또는 남인이 미는 비빈으로 평가된다.
갑술환국 신임사화
칠궁은 왕의 모친인 일곱 후궁들의 신주가 모셔진 사당으로, 육상궁(毓祥宮), 연호궁(延祜宮),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 덕안궁((德安宮)을 일컫는다. 원래 이곳에는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만 있었으나, 도성에 흩어져 있던 사당을 합치고, 이후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엄씨의 덕안궁이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칠궁이 되었다. 칠궁 답사에서는 문화재의 건축적 특성을 알아가는 것도 흥미로울 수 있지만 후궁들의 사연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 육상궁 외경
저경궁 (儲慶宮) : 조선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의 신궁. 대빈궁 (大嬪宮) : 조선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의 신궁. 육상궁 (毓祥宮) : 조선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궁. 연호궁 (延祜宮) :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신궁. 선희궁 (宣禧宮) :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신궁. 경우궁 (景祐宮) :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신궁. 갑신정변때 개화당이 고종 부부를 임시로 경우궁에 옮김. 덕안궁 (德安宮) : 조선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의 신궁. (출처: 위키백과)
육상궁과 숙빈 최씨
육상궁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 사당이다. 사실 최씨의 신분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무수리 출신으로 입궐한 설이 가장 강력하게 통용되고 있다. 수문록(隨聞錄)에 따르면, 무수리였던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가 폐비가 된 인현왕후의 복위를 위해 밤마다 몰래 기도를 올렸다. 한밤중 최씨를 우연히 발견한 숙종은 잠시 잊고 지냈던 인현왕후가 더 그리워졌고, 최씨의 갸륵한 정성에 감동하여 그녀를 가까이한다. 이후 최씨는 숙종의 승은을 입어 왕자를 낳지만, 환국이라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 권력 다툼에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서인 세력이었던 인현왕후가 폐출되면서 왕비로 승격된 장희빈과 권력을 쥐고 있었던 남인에게 최씨는 늘 불안한 존재였다. 전해 내려오는 설에 따르면, 최씨는 남인에게 독살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이 사건이 갑술환국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숙종은 민암을 비롯한 남인 세력을 축출하고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숙빈 최씨는 장희빈이 사약을 받게 된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무고했다고 숙종에게 밀고하였고, 숙종이 이에 대응하여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모두 죽고 나서도 최씨는 왕비가 되지 못한다. 숙종이 이후 당쟁을 막기 위해 후궁은 왕비가 되지 못하도록 하는 법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숙빈 최씨는 아들인 연잉군(영조)과 이현궁(梨峴宮)에 거처하면서 숙종을 모시다가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영조는 경복궁 북쪽에 사당을 지었으니 이곳이 지금의 육상궁이다. 숙빈 최씨의 묘소는 경기 파주시 광탄면에 위치한 소령원(昭寧園)이다.
대빈궁과 희빈 장씨 ▲ 칠궁 중 희빈 장씨의 신위를 모신 대빈궁
대빈궁은 희빈 장씨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 사당이다. 장희빈. 어떤 분들은 사약을 마시면서 독기를 버리지 않았던 표독스러운 여인을 떠올릴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당쟁에 희생된 처연한 여인을 떠올릴 것이다. 기자가 직접 대빈묘와 대빈궁을 찾았을 때 느낌은 후자에 가깝다. 왕비가 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쓸쓸하고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해야했던 그녀에게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진다.
현실의 투쟁에서 자아의 의지가 좌절될 때 비장미는 발현된다. 장희빈 역시 일생일대의 모험을 감행하였지만 권력의 그늘 아래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장희빈을 인간적으로 바라본다면 악랄함보다는 처연함과 비장미가 느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장희빈은 어린 시절 궁녀로 입궁하였다. 궁녀 시절 숙종의 눈에 띄어 후궁의 지위에 올랐고 왕자를 낳아 왕비가 된다. 이에 서인은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갑자기 왕비가 된 장희빈을 놓고 숙종에게 노골적으로 우려를 표한다. 환국을 벌여 왕권강화를 꾀하고자 했던 숙종의 집권 당시 당쟁은 서인 세력이었던 인현왕후와 남인 세력이었던 장희빈의 대결구도로 극명하게 나타났다. 서인과 남인의 당쟁은 계속되었고, 1680년 원자정호의 문제로 숙종은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을 등용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단행하였다. 기사환국을 시작으로 장희빈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지만 그 기간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다. 숙빈 최씨의 등장으로 상황은 반전되고 갑술환국과 인현왕후 복위로 그녀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인현왕후를 저주한 사실이 숙종에게 발각되자 그녀는 사약을 받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어머니를 추존하여 사당인 대빈묘를 지었다. 대빈묘는 대빈궁으로 승격되었고 육상궁으로 옮겨졌다.
이 두 여인의 운명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 비록 왕비가 되지는 못했지만, 무수리 신분으로 후궁 자리에 올라 이후 이현궁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던 숙빈 최씨. 궁녀 신분으로 입궁하여 왕비 자리까지 올라 사약을 받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장희빈. 육상궁과 대빈궁을 방문했을 때, 이들 삶에 관한 승패나 선악 여부의 판단은 잠시 보류해두자. 왕의 여자이자 왕의 어머니로서 짊어졌던 삶의 무게와 시선, 그리고 그들에게 적용되었던, 잔인할 정도로 엄격했던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를 놓고,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조선 3대 악녀, 연산군때 장녹수, 중종때 정난정, 숙종때 장희빈 조선시대 3대 요부, 정난정, 장희빈, 김개시
정난정 윤원형의 첩입니다. 여인천하에서는 정난정을 주인공으로 한 방송으로 거의 대부분 중종시대를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정난정의 본격적인 활약시기는 명종 즉위 이후입니다.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 윤원형의 누나인 문정왕후와 결탁하여 인종이 승하하자 즉시 계략을 꾸며 인종의 측근들을 모조리 도륙내는데 일조합니다. 그 후 윤원형의 정실부인을 독살하고 자신이 본처가 되어 권세가 윤원형의 이름 아래 온갖 횡포를 저지릅니다. 하지만 문정왕후의 죽음과 더불어 척신 정권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명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즉시 권세를 잃고 윤원형과 함께 자살합니다.
장희빈 사극으로 많이 다루어져 거의 요부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역사상으로는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한 적이 없습니다.증조부였던 인조가 서인 권신세력을 조정에서 독판치게 만들어 조선왕실의 권위를 바닥으로 실추시켰기에 어려운 상황에서 즉위했던 숙종은 서인과 남인의 대결을 역이용하여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 합니다. 조선초기와는 달리 왕권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환국정치만이 숙종으로서는 최선의 방책이었습니다. 여기에 희생당한 사람이 장희빈과 인현왕후입니다. 장희빈은 중인출신이었던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켜 중전이 되겠다는 야심이 있었지만그것은 개인의 생각일 뿐 결국 숙종의 환국정치와 서인과 남인의 대립의 희생양이 되고 맙니다. 게다가 자신의 아들 경종이 새로운 정치를 펴기도 전에 일찍 승하하는 바람에 조정은 고루한 노론세력이 독판을 치게 되어 이들에 의해 장희빈은 한낫 요부로 낙인찍혀 버립니다.
김개시 훗날 조선의 역사를 더럽힌 서인 권신세력에 의해 엄청난 왜곡을 당한 인물입니다. 김개시는 원래 공빈 처소에 있었던 궁녀로서 광해군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자 지극정성으로 어린 광해군을 돌봅니다. 이러한 정이 있어서 김개시는 광해군을 적극적으로 도와 훗날 광해군의 개혁정치에 보이지 않는 도움을 제공합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선 김개시와 광해군이 마치 연인관계인 것처럼 묘사하는데 김개시는 상궁이었을 뿐 후궁의 지위에 오른 적이 없고광해군 즉위 당시의 김개시의 나이는 40대 중반에 들어섰습니다.
조선의 3대 악녀로 문정왕후, 인목왕후, 정순왕후 문정왕후는 척신정치로 조선 중기의 문화발전을 저해, 인목왕후는 선조의 전 부인 의인왕후를 저주하고 광해군의 정통성에 시비를 걸어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급기야 몰지각한 일부 서인세력들의 불법 쿠데타를 인준하여 우리나라의 초창기 실학자들을 대량 학살시켜 우리의 근대화를 저해하였습니다. 정순왕후는 정조에게 악감정을 품어 정조 생전에도 대비의 권한을 내세워 자주 정조의 개혁정치를 방해하였고 순조가 즉위한 후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신유박해를 일으켜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자신이 눈의가시로 여겼던 수많은 실학자들을 축출합니다.
중국 3대 악녀는 전한 여태후, 당 측천무후, 청 서태후 또는 은나라 달기, 한나라 여태후, 당나라 측천무후 중국의 4대 미녀는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인현왕후의 추천으로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 영조의 정신적 어머니
영빈 김씨(寧嬪 金氏, 1669~1735), 1735년, 경기 남양주 367호, 광릉(光陵), 비공개지역
모진놈 옆에 있으면 벼락 맞는다. 희빈 장씨에 의해 인현왕후가 폐위될 때 함께 친정으로 쫓겨났고, 인현왕후가 복위할 때 같이 복위되어 궁으로 돌아왔다. 영빈 김씨의 무덤에는 여러 석물을 세워놓아 죽은 이에 대한 깍듯한 예를 갖추고 있다. 봉분 앞에 서 있는 비석에는 영빈 김씨의 행장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숙종이 후사가 없으므로 인현왕후의 추천으로 후궁이 되었다.
묘역은 곡장을 두르고 그 안에 봉분과 석물을 조성하였는데 봉분은 원형 사대석을 둘렀다. 봉분 앞 묘표는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을 얹었으며 1737년(영조13)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이의현이 짓고 썼다. 묘표 앞에는 혼유석과 상석, 향로석, 장명등을 놓고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을 배치하였다.
영빈 김씨(寧嬪 金氏, 귀인 김씨, 1669~1735) 본관은 (신) 안동, 종파는 문정공파이다. 청음 김상헌의 현손이며 영의정 김수항의 종손녀로 김창국과 그의 부인인 전주 이씨 사이의 4남 2녀 중 둘째딸이다. 1686년(숙종 12년) 입궐, 그해 음력 3월 28일에 숙의에 책봉되어 노비 150명을 하사받았다. 그녀는 숙종의 다른 후궁인 희빈 장씨나 숙빈 최씨 등과는 달리 명문가의 여식으로 정식 간택되어 입궁한 후궁이었다. 입궁 후 1년이 채 되지 않아 1686년 음력 5월 27일 소의(昭儀)로 진봉되고 곧이어 귀인(貴人)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이 인현왕후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서인 집안이었던 탓에, 인현왕후가 폐출되면서 그녀도 같이 대궐에서 쫓겨났다. 1694년(숙종 20년)에 인현왕후가 복위됨에 따라 같이 복위되었고, 1702년(숙종 28년) 정1품 영빈(寧嬪)에 봉해졌다.
1720년(숙종 46년)에 숙종이 사망하자 그녀는 관례에 따라 대궐에서 나가 살았다. 당시 경종은 그녀가 나가서 살 집을 크게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그 명을 거두라는 상소가 빗발쳤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경종은 상소를 물리치고 명대로 행하게 하였다. 그녀는 영조를 특별히 아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영조도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매우 따랐다 한다. 1735년(영조 11년)에 67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그녀가 사망하자 영조는 깊이 애도하였다. “선대 왕조의 후궁은 다만 이 한 사람만 남았었다. 일찍이 인현성모(仁顯聖母)와 더불어 기사년의 환란을 만났었다가, 갑술년 성모께서 복위되었을 때에 그도 또한 복작(復爵)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에 항상 어머니라고 일컬었는데 지금 그 상을 당한 소식을 들으니 슬픈 감회를 억누르지 못하겠다.” 그녀의 묘는 영빈묘라 하며,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에 있다. 1991년 사적 367호로 지정되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대, 517년, 1392 - 1910 ]
원(園) 13기(基)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호)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익종(翼宗) 一 수릉(綏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一 융릉(隆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一 영릉(永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一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一 경릉(敬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제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一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一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호)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기(基) 제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一 유릉(裕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제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一 홍릉(洪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시
왕릉 35기 제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一 예릉(睿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一 경릉(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제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一 인릉(仁陵 : 사적 제194호)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제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一 건릉(健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二 홍릉(弘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一 원릉(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二 혜릉(惠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一 의릉(懿陵 : 사적 제204호)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三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二 익릉(翼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一 명릉(明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제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一 숭릉(崇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一 영릉(寧陵 : 사적 제195호)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二 휘릉(徽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一 장릉(長陵 : 사적 제203호)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二 성묘(成墓 : 사적 제365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一 목릉(穆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一 강릉(康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一 효릉(孝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三 희릉(禧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二 온릉(溫陵 : 사적 제210호)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一 정릉(靖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三 회묘(懷墓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二 순릉(順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一 선릉(宣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路)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二 공릉(恭陵 : 사적 제205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一 창릉(昌陵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7대 세조(第七代 世祖) 一 광릉(光陵 : 사적 제197호)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二 사릉(思陵 : 사적 제209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一 장릉(莊陵 : 사적 제196호)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제5대 문종(第五代 文宗) 一 현릉(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4대 세종(第四代 世宗) 제3대 태종(第三代 太宗) 제2대 정종(第二代 定宗)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三 정릉(貞陵 : 사적 제208호)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二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一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참고 문헌
|
'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밥 먹고 도시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릉[朝鮮王陵] 묘(墓) - 6 조선의 왕실가족사 - 1 (0) | 2013.08.23 |
---|---|
조선왕릉[朝鮮王陵] 묘(墓) - 5 조선의 갈등과 궁중비사 - 3 (0) | 2013.08.23 |
조선왕릉[朝鮮王陵] 묘(墓) - 3 조선의 갈등과 궁중비사 - 1 (0) | 2013.08.22 |
조선왕릉[朝鮮王陵] 묘(墓) - 2 조선왕조의 시작 - 준경묘 · 영경묘, 명빈묘 (0) | 2013.08.22 |
조선왕릉[朝鮮王陵] 1. 묘(墓)에 들어가며 (0) | 2013.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