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朝鮮王陵] 묘(墓) - 6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묘 (墓) - 6
조선의 왕실가족사 - 1
조선의 후궁 묘 後宮 墓, 조선의 왕자·공주 묘
묘(墓)란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
조선왕릉은 42기 (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기,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기(능40, 원14, 묘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능3, 원4, 묘5)입니다.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조선왕릉[朝鮮王陵]의 묘(墓)
1. "군"이 붙는 이유 '군'이란 후궁에게서 난 아들, 그리고 대군에게서 난 아들을 말합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이 '군'이 붙는 이유는 왕이였다가 각각 인조반정과 중종반정에 의해 왕의 신분에서 강등되었기때문이죠.
2. "조"와 "종"의 차이 어느 시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최고 통지차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한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왕은 오늘날의 통치권자와는 비될 수 없는 권한을 부여받고, 그 권한을 세습할 권리가 주어진다. 조선은 1392년 태조 이성계의 쿠데타에 의해 출범했고 일본 제국주의 강압에 의한 한일합방으로 1910년 멸망했다. 그 동안 정식으로 왕위에 즉위했던 사람은 모두 27명이고 왕위에 즉위하지는 않았지만 죽은 후 왕에 추존된 사람은 모두 9명이다. 왕위에 있다가 불미스런 사건으로 쫓겨난 사례도 두 건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를 처음 일으킨 군주나 나라의 정통을 다시 일으킨 군주, 즉 창업군주나 중흥군주에게 '조'라는 묘호를,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군주에게는 '종'이란 묘호를 올린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죽은 종묘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그 종묘에 봉안하는 위패의 이름이 곧 묘호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세종이나 정조 등 왕의 명칭은 그 왕이 죽은 후에 부여한 묘호의 이름이다.
조선조의 왕들 중 처음에'종'이었다가 후에 '조'로 바뀐 왕은 영조(영종), 정조(정종),순조(순종)가 있으며 고종처럼 스스로 황제로 바꾼 사례도 있다. 왕자에게는 '군'이란 칭호를 주는데, 정식 왕비에게서 태어난 왕자는 '대군', 빈(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자는 군으로 호칭한다. 따라서 연산군과 광해군의 경우는 왕에서 쫓겨난 서자왕자로 강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딸의 경우 정식 왕비 소생에게는 '공주'를, 후궁 소생에게는 '옹주'라는 칭호를 주었다. 왕이사망한 후 편찬되는 재임시절의 공식 기록을 담은 실록은 폐위된 임금은 정식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실록 대신 일기라고 이름을 붙인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 등 '실록'이 아닌 '일기'가 두 편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단종으로 불리는 조선조 6대 왕은 세조의 쿠데타로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가 죽은지 2백년도 더 지난 숙종 24년(1698)에야 단종으로 복원되웠고, 실록 명도 '노산군일기'에서 '단종대왕실록'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이러한 호칭에서도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1) 조선왕조의 시작 조선창업의 전설, 대풍수의 명당 자미원, 조선왕조의 탯자리 삼척 준경묘 · 영경묘 濬慶墓 · 永慶墓 조선 3대 태종의 후궁, 조선왕조 7대에 걸쳐 내명부를 지킨 여인, 명빈묘 明賓墓
(2) 조선의 갈등과 궁중비사1 비운의 왕비, 조선 9대 성종의 계비이자 10대 연산군의 어머니, 회묘 懷墓 준비되지 않은 군왕, 조선 최초 폐위임금이 되다. 연산군묘 燕山君墓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 광해군의 생모, 성묘 成墓 어머니 공빈 김씨 발치에 잠든 광해군주, 광해군묘 光海君墓 조선의 사이코패스, 개망난이 왕자, 임해군묘 臨海君墓
(3) 조선의 권력투쟁과 궁중비사2 조선 17대 효종의 후궁, 안빈묘 安嬪墓 초라 하지만 화려한 생을 마감한 장희빈 묻힌 '대빈묘' 권력무상 피부로 와닿아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 대빈묘 大嬪墓 인현왕후의 추천으로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 영조의 정신적 어머니, 영빈묘 寧嬪墓
(4) 조선의 세도정치 23대 순조(純祖)의 후궁, 숙의박씨 묘 淑儀朴氏墓 왕손으로 태어남이 불행이라 박복한 삶에 객사하지만, 이광묘 李壙墓
(5) 조선, 제국이 되다 살아생전 무위도식하나 황제가 난다는 명당에 묻히면서, 이구묘 李球墓 (남연군묘 南延君墓)
(6) 서삼릉, 조선의 후궁 묘 後宮 墓역
(7) 서삼릉, 조선의 왕자 · 공주 묘역
(8) 서삼릉, 조선의 태실 胎室
(9) 조선시대의 대원군 大院君 & 부원군 府院君
(6) 서삼릉, 조선의 후궁 묘 後宮 墓역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201-85(서삼릉비공개지역)
조선시대에는 궁실(宮室)안에서 생활하거나 출입을 할 수 있었던 여자들이 있는데, 크게 외명부(外命婦)와 내명부(內命婦)로 분리됩니다.
외명부는 왕족 종친(宗親)의 딸이나 처, 그리고 문무(文武) 관리의 처 등으로 남편의 관직 품계(品階)에따라 작위를 받은 사람입니다. 흔히 공주(公主: 嫡女)나 옹주(翁主: 庶女)로부터 부부인(府夫人: 왕비 母 - 정1품) 등의 종친 딸이나 부부인(府夫人: 대군 처 - 정1품), 군부인(郡夫人: 군의 처) 등의 종친 처(妻)가 있고, 문무관리 처로 경경부인(貞敬夫人 - 정,종1품), 정부인(貞夫人 - 정,종2품) 등이 있는데, 특이한 점은 혹 재가(再嫁)를 하면 품직을 박탈당했습니다.
내명부(內命婦)가 바로 문의하신 일반적인 후궁을 포함한 궁중에서 여러 부문에 일을 맡은 여자 관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역시 내명부에도 각각의 품위(品位)가 있는데, 정1품부터 종9품까지 모두 있습니다. 그 중에 흔히 후궁(後宮)이라 말하는 왕의 곁에서 총애를 받는 여인들은 직무는 없었는데, 품계의 순서에 따라 정1품은 빈(嬪), 종1품은 귀인(貴人), 정2품은 소의(昭儀), 종2품은 숙의(淑儀), 그 다음 정3,종3,정4,종4품의 순서대로 소용(昭容), 숙용(淑容), 소원(昭媛), 숙원(淑媛)입니다. 이들이 모두 우리가 알고 있는 후궁들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고, 임금의 총애를 받기 위한 노력을 다했던 여인들입니다.
그 다음인 정5품은 상궁(尙宮)이며 그 이하 종9품까지의 궁녀(宮女)들이 있습니다. 특히 상궁 이하 궁녀들은 품계가 종4품 이상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지만, 무수리라고도 불리는 아직 상궁이 되지 못한 궁녀들 중에서도 임금의 총애를 받으면 한 번에 종4품의 숙원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내명부와 관련된 야사 이야기가 흔히 고전의 사극 배경에 많이 등장하는데, 특히 장희빈의 이야기는 내명부의 암투를 다룬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아울러 정1품인 빈(嬪)의 명칭에 사용하는 이름들은 특별한 규칙으로 붙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때 그때의 작위를 내리는 상황에 따라 의미를 부여해 내리는 칭호입니다. 예를 들어 희빈(禧嬪)의 禧의 의미는 '온갖 상서(祥瑞)로움이 모이는 것이므로 하늘의 경사가 펼쳐진다'는 의미입니다.
조선시대에 후궁은 거의 승은을 입은 궁녀들이다. 아니면 중전이 태기가 없자 명분가의 딸을 후궁으로 맞들인것이다. 궁녀가 승은을 입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고 한다. 후궁은 왕의 첩이나 같은 것인데, 왕의 첩이기 때문에 품계가 있고, 귀하다. 그런데 천민이 궁녀로 들어와 승은을 입으면 엄청난 행운이다. 대부분의 궁녀들이 승은을 입으려고 들어오는 여자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후궁은 품계가 있었기에 아들을 낳아 그 품계를 올릴려고 하였다. 만일 중전이 아기를 못 낳고 후궁에 몸에서 아들이 낳오면 그 후궁은 자신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해 다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그리고 장희빈처럼 국모, 중전의 자리에 앉기도 한다. 후궁이 중전의 자리에 앉으려면 피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품계는 '정'과 '종'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정이 더 높은 것이고 종이 더 낮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상하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성리학적 명분론을 강조했습니다. 상하관계란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남녀(男女), 처첩(妻妾), 양천(良賤) 등, 이와 같은 성리학적 의식의 팽배로 가족제도도 종법사상((宗法思想)에 기초해 가부장중심으로 발전해나갔죠. 그러므로 조선 왕실내에서도 처첩인 정궁(왕비)과 후궁의 관계는 엄격했습니다. 엄격한 적서 차별를 표방하는 일부일처다첩제(一夫一妻多妾制)의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바탕으로 서자(후궁의 아들)도 후계자로 삼을수 있다는 몇가지 특권을 제외하고는 왕실도 일반사대부와 같은 가법을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숙종 때의 명빈박씨는, 상궁으로 10년을 있다가 왕자를 낳고 `빈`에 올라 명빈 이 되었습니다. 꼭, `특별상궁`의 회임을 하지 않아도 `후궁`으로 승격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숙종 때의 그 유명한 `희빈 장씨`는, 회임을 하지 않았지만 `숙원`을 거쳐 `소의`에까지 올랐으며, `소의`에서 회임을 하고 왕자를 낳아 `빈` 즉, `희빈`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중요한것은, 품계의 오름은 왕과 중전의 소관이므로, 이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유동성을 가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세도가 대단한 후궁이 죽었다해도 궐내에 빈궁을 만들고 장례를 치르지 못했습니다. 엄격한 왕실 법에 의거해 궐내에서는 왕의 직계가족만이 죽을 수 있었거든요. (왕, 왕비, 대왕 대비, 대비, 세자 내외) 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총애를 받았던 영빈 이씨도 자신의 처소에서 죽자마자 궐 밖으로 시신을 내보내 장례를 치렀고, 명문사대부가에서 태어나 왕비처럼 삼간택을 거쳐 친영을 제외한 육례를 갖춰 정조의 후궁이 되었던 수비 박씨도 생전에는 왕비 못지않은 대접을 받았고 왕의 생모(순조의 어머니)이었음에도 궐내에 빈궁을 설치해 장례를 치르겠다고 고집하는 순조를 향해 신하들의 반발상소가 빗발쳤다. 왕의 어머니라도 종묘에 신위를 모시지도, 능호를 받을 수도 없어서 항상 그녀들의 아들들은 가슴아파했죠. 기본적으로 후궁들이 낳은 자식은 후궁들이 키웠습니다. 그 외 왕비가 아들이 없어 후궁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는 특별한 경우에만 왕비에게 입적해서 왕비가 양육했습니다.
또한 후궁은 자신이 낳은 왕 자녀들에게 하대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이 낳았다해도 지존의 자식들이기 때문이죠. 효종의 후궁이었던 안빈 이씨가 자신이 낳은 딸인 숙녕옹주에게 ' 너 '라고 호칭했다하여 효종의 노여움을 사 쫒겨날뻔했다는 기록이 있는것을 보면 몹시 엄격했던것 같습니다. 이때 효종의 진노가 대단해서 왕비까지 나서서 안빈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는 실록에는 기록되어 있거든요. 자기 자식이라도 맘대로 하대해서 말하지 못했고 아기씨라고 부르며 모시고 살았다. 사극들을 보면 일개 후궁이 세자빈에게 하대하고 자신의 자식들에게 하대하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전부 잘못된 일입니다.
상궁, 후궁의 소생은 누가 키워주나? 일반적으로, `특별상궁`이 회임까지 하면 대부분은 그 상태로 두지 않고, 정식 후궁으로 첩지를 주고 당을 내리는 등 예우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만삭의 몸이 되어 출산을 할 때쯤이면 대부분 당당한 후궁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뭐, 태어난 아기가 왕자라면 더 높은 품계로 승차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습니다. `후궁`의 지위이므로, 그를 시중드는 상궁 나인도 있었을 것이며, 조정대신에게 부탁하여 훈육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임금에게 후궁만큼 총애를 받은 조선시대 왕비 세조는 유별나게 부인과 의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을 부인과도 흉금을 터놓고 의논하였으며 신하들에게 부인의 자랑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신적인 동반자였고 사이좋은 동지라고 하겠습니다.
세종비 소헌왕후도 몹시 의가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세종이 후궁을 보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후에 소헌왕후 친가를 경계한 태종에 의해 후궁을 맞이하게 되고 그 후엔 세종도 궁녀를 취하긴 하지만 소헌왕후와 같이 음악을 연주하며 즐기기도 할 정도로 완전히 밀착된 부부였습니다.
정종비도 있습니다. 2대 왕 정종의 왕비는 남편과 몹시 금슬이 좋기로 유명했습니다. 워낙 다정하기로 이름높았습니다. 하지만 너무 금슬이 좋으면 자녀가 없다는 속설대로 자녀가 없습니다.
헌종비 김씨도 행운의 왕비입니다. 숙종의 어머니이죠. 그녀는 남편을 꽉 잡았는지 남편이 후궁 하나도 두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왕비로서 남편을 독점하다시피 살았으며 그녀가 살아있을땐 친정의 위세도 막강하였습니다.
신덕왕후 강씨 (神德王后) 신덕왕후 강씨는 자색이 아름답다기 보다는 이성계에게 많은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또한 무척 총명하기도 하였을 뿐만아니라 정비 신의왕후 한씨와는 달리 권문세가였기 때문에 조선을 건국하는 데 많은 힘이 되주었고 이성계는 그런 여장부다운 기질을 좋아했죠. 그래서 이성계는 심지어 신덕왕후의 두번째 아들인 의안대군을 왕세자에 봉하려고 까지 했습니다.
명성왕후 민씨 (明成王后) 명성왕후 민씨도 아름답지는 않았습니다. 고종은 명성왕후가 간택될당시에 궁인이씨(귀인 이씨)를 무척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성왕후 민씨를 초기에는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명성왕후도 그녀의 특유의 지성과 매력을 살려서 또 그녀만의 어른스러움등은 고종이 그녀를 총애하게 만든 이유중 하나였죠, 게다가 귀인 이씨에 대한 고종의 총애가 뜸해지면서 민씨의 처소로 많이 찾게 되었고 순종을 비롯해서 빨리 죽기 하였지만 다른 남자아이도 낳게되었는데, 이 때부터를 계기로 더욱 금실이 좋아졌습니다. 귀인 이씨도 아름답다기 보다는 그냥 귀여운 여인이라고 조선왕조실록에 묘사되어있습니다.
효의왕후 김씨 (孝懿王后) 효의왕후 김씨는 정조의 비로써 매우 현숙한 여자였습니다. 정조가 아버지 장조의 일로 무척 괴로워하고 있을때 정조의 슬픔을 누구보다도 잘 느끼고 있었던 여자엿습니다. 그만큼 세자와세자빈 시절부터 정조와 금실이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효의왕후 김씨가 석녀엿다는 것이였습니다. 효의왕후 김씨는 제 2의 인현왕후라고 불리정도로 예의바르고 덕이 있으며 영조비인 정순왕후와 장조비인 경의왕후 홍씨를 잘 모셔서 효성이 뛰어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모격인 화평옹주가 그녀를 많이 괴롭혔으나 그녀는 항상 웃음으로 대했고 또 현목수빈 박씨가 들어와서 순조를 나은 이후로도 조금도 투기하지 않으며 순조를 진정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였다 합니다. 여자의 자색보다는 여자의 됨됨이를 보고 여자를 사랑했던 정조(다른 왕들과 현격히 차이나죠. 후궁도 대신들이 권할때 아니면 전혀 들이지 않았습니다. 인현왕후가 정조의 비였다면 엄청난 총애를 받았을텐데...)는 자연히 그녀를 총애하였습니다. 또한 그 시기에 그녀에게 많은 존호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후궁이 없었던 왕 : 명종, 현종, 경종, 순종
후궁을 많이 배출한 성씨 1위 김씨 - 12명 2위 이씨 - 11명 3위 박씨 - 7명 4위 홍씨 - 5명 5위 권씨 - 4명 6위 안씨, 최씨, 양씨, 정씨, 조씨 - 3명
조선시대 최고의 바람둥이 왕 조선 3대 태종과 9대 성종은 12명에 이르는 정비와 후궁을 두었음
장자로 계승한 왕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경종 등 7명
내명부 관직 명칭 빈(嬪) - 내관 정 1품 귀인(貴人) - 내관 종 1품 소의(昭儀) - 내관 정 2품 숙의(淑儀) - 내관 종 2품 소용(昭容) - 내관 정 3품 숙용(淑容) - 내관 종 3품 소원(昭嫄) - 내관 정 4품 숙원(淑嫄) - 내관 종 4품 승은상궁(특별상궁) 상궁(尙宮), 상의(尙儀) - 궁관 정 5품 상복(尙服), 상식(尙食) - 궁관 종 5품 상침(尙寢), 상공(尙功) - 궁관 정 6품 상정(尙正), 상기(尙記) - 궁관 종 6품 전빈(典賓), 전의(典依), 전선(典膳) - 궁관 정 7품 전설(典設), 전제(典製), 전언(典言) - 궁관 종 7품 전찬(典贊), 전식(典飾), 전약(典藥) - 궁관 정 8품 전등(典燈), 전재(典彩), 전정(典正) - 궁관 종 8품 주궁(奏宮), 주상(奏尙), 주각(奏角) - 궁관 정 9품 주변징(奏變徵), 주징(奏徵), 주우(奏羽), 주변궁(奏變宮) - 궁관 종 9품
부인(후궁포함)이 많은 왕 02대 정종 (1398~1400) -- 부인 8명 (정안왕후김씨외 후궁7) 03대 태종 (1400~1418) -- 부인 12명 (원경왕후민씨외 후궁11) 04대 세종 (1418~1450) -- 부인 6명 (소헌왕후심씨외 후궁5) 09대 성종 (1469~1494) -- 부인 12명 (공헤왕후한씨외 계비2, 후궁9) 11대 중종 (1506~1544) -- 부인 10명 (단경왕후신씨외 계비2, 후궁7) 14대 선조 (1567~1608) -- 부인 8명 (의인왕후박씨외 계비1, 후궁6) 19대 숙종 (1674~1720) -- 부인 6명 (인경왕후김씨외 계비2, 후궁3) 21대 영조 (1724~1776) -- 부인 6명 (정성왕후서씨외 계비1, 후궁4) 25대 철종 (1849~1863) -- 부인 8명 (철인왕후김씨외 후궁7) 26대 고종 (1863~1907) -- 부인 7명 (명성황후민씨외 후궁6)
부인(후궁포함)이 적은 왕 07대 세조 (1455~1468) -- 부인 2명 (정희왕후윤씨외 후궁1) 08대 예종 (1468~1469) -- 부인 2명 (장순왕후한씨/안순왕후한씨) 10대 연산 (1494~1506) -- 부인 2명 (폐비신씨외 후궁1) 12대 인종 (1544~1545) -- 부인 2명 (인성왕후박씨외 후궁1) 13대 명종 (1545~1567) -- 부인 1명 (인순왕후심씨) 15대 광해 (1608~1623) -- 부인 2명 (폐비유씨외 후궁1) 17대 효종 (1649~1659) -- 부인 2명 (인선왕후장씨외 후궁1) 18대 현종 (1659~1674) -- 부인 1명 (명성왕후김씨) 20대 경종 (1720~1724) -- 부인 2명 (단의왕후심씨/선의왕후어씨) 23대 순조 (1800~1834) -- 부인 2명 (순원왕후김씨외 후궁1) 27대 순종 (1907~1910) -- 부인 2명 (순명효황후민씨/순정효황후윤씨)
조선왕조에는 13대 명종과 18대 현종이 정비가 1명뿐 후궁은 없습니다. 왕하고 한번 잤다고 해서 무조건 첩지를 받는건 아니었습니다. 왕은 부인뿐만 아니라 궁녀와 기생, 평민신분의 아낙네까지 모든 여자와 잘 수 있었다. 첩지를 받은 후궁을 포함해서 왕의 부인이 6~7명 정도였다면 실제로 첩지를 받지 못한 여자는 부지기수였을 거라고 추측 됩니다. 여자들이 첩지를 받는데는 왕의 요청에 의해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이 첩지를 내리는 걸로 되어 있다. 왕의 자손을 가지게 되면 무조건 첩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정비가 죽는 바람에 후궁이 아닌 왕비를 맞아들인 왕 정식으로 결혼을 하는 경우와 후궁으로 들어가 살다가 왕비가 죽으면 진급을 통해 중전이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세자빈으로 있다가 죽었는데 그세자가 나중에 왕이 되면 먼저 죽은 세자빈은 왕비로 추존 됩니다. 9대 성종의 제1비 공혜왕후한씨는 성종이 등극한지 5년 만에 병사했고, 제2비 폐비윤씨는 후궁으로 있다가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중전으로 진급된 경우이며, 제3비 정현왕후윤씨 역시, 후궁으로 있다가 폐비윤씨가 폐출 당하자 진급 되었습니다. 성종은 정비가 3명이지만, 제1비를 제외하면 가례를 통한 정식부인은 없다. 내부 진급이 아닌 정식가례를 통해 계비가 된 정비이다.
19대 숙종이 정비를 포함해서 가례를 통해 3명의 부인을 얻었다. 후궁출신이긴 하지만, 한때 중전에 오르기도 했던 희빈장씨까지 포함시키면 숙종은 인경왕후 김씨에서 인현왕후 민씨로, 희빈 장씨에서 다시 인현왕후민씨로, 죽은 다음에 인원왕후 김씨까지.. 4번이나 중전이 바뀌게 되는 진기록을 수립하게 됩니다. 8대 예종과 27대 순종의 제1비 (장순왕후 한씨 / 순명효황후 민씨)는 세자 빈였다가 죽었고, 다시 가례를 올려 제2비 (안순왕후 한씨 / 순정효황후 윤씨)를 맞이한 후에, 등극함으로서 제1, 2비 모두가 정비가 된 경우입니다. 20대 경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1비인 단의왕후 심씨는 세자빈 시절에 죽었고, 이어서 세자빈이 된 선의왕후 어씨가 경종이 등극하면서 제2비가 되었습니다.
9대 성종은 제1비 외에 2명의 정비가 있었지만 내부승진을 통해 정비가 된 경우라고 먼저 말씀드렸고요.. 11대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윤씨, 문정왕후윤씨 또한 내부승진을 통해 중전이 되었습니다. 11대 중종의 부인은 10명(정비3,후궁7) 였는데, 제1비인 단경왕후신씨는 중종이 등극하자 왕비가 되었다가, 왕후의 친정이 역모에 몰리면서, 결국 폐출 당했다가 21대 영조때 가서야 복권되었습니다.
01대 태조 (1392~1398) -- 정비(신의왕후한씨) 계비(신덕왕후강씨) 08대 예종 (1468~1469) -- 정비(장순왕후한씨) 계비(안순왕후한씨) 14대 선조 (1567~1608) -- 정비(의인왕후박씨) 계비(인목왕후김씨) 16대 인조 (1623~1649) -- 정비(인렬왕후한씨) 계비(장렬왕후조씨) 19대 숙종 (1674~1720) -- 정비(인경왕후김씨) 계비(인현왕후민씨,인원왕후김씨) 20대 경종 (1720~1724) -- 정비(단의왕후심씨) 계비(선의왕후어씨) 21대 영조 (1724~1776) -- 정비(정성왕후서씨) 계비(정순왕후김씨) 27대 순종 (1907~1910) -- 정비(순명효황후민씨) 계비(순정효황후윤씨)
후궁 後宮 墓 서울 제 1대 태조 성빈 원주원씨 묘 원상의 딸, 원충의 누나 경기도 제 2대 정종 성빈 충주지씨 단 묘는 북한 소재. 덕천군,도평군의 생모 경기도 숙의 행주기씨 단 순평군,금평군,정석군,무림군 &숙신옹주,상원옹주,고성옹주,전산옹주의 생모 경기도 숙의 평창이씨 단 진남군의 생모 경기도 숙의 해평윤씨 묘 수도군,임언군,석보군,장천군 & 인천옹주의 생모 경기도 제 3대 태종 효빈 청도김씨 묘 경녕군의 생모 경기도 신빈 영월신씨 묘 함녕군,온녕군 & 정신옹주,정정옹주,숙정옹주,소신옹주,숙녕옹주,숙경옹주,숙근옹주의 생모 경기도 소빈 노씨 묘 숙혜옹주의 생모 서울 선빈 안씨 묘 익녕군 & 소숙옹주,경신옹주의 생모 경기도 숙의 최씨 단 희령군의 생모 경기도 명빈 안동김씨 묘 숙안옹주의 생모 서울 의정궁주 한양조씨 묘 전라북도 제 4대 세종 영빈 진주강씨 묘 화의군의 생모 경기도 신빈 청주김씨 묘 계양군,의창군,밀성군,익현군,영해군,담양군의 생모 경기도 혜빈 청주양씨 단 한남군,수춘군,영풍군의 생모 충청남도 상침 송씨 묘 정현옹주의 생모 경기도 제 7대 세조 근빈 선산박씨 묘 덕원군,창원군의 생모 경기도 제 8대 예종 공빈 전주최씨 묘 경기도 제 9대 성종 명빈 안동김씨 묘 무산군의 생모 경기도 숙의 남양홍씨 묘 완원군,회산군,견성군,익양군,경명군,운천군,양원군 & 혜숙옹주,정순옹주,정숙옹주의 생모 서울 숙용 청송심씨 묘표 이성군,영산군 & 경순옹주,숙혜옹주의 생모 충청남도 숙의 진주하씨 묘 계성군의 생모 경기도 제 11대 중종 경빈 밀양박씨 묘 복성군 & 혜순옹주,혜정옹주의 생모 경기도 희빈 남양홍씨 묘 금원군,봉성군의 생모 서울 창빈 안산안씨 묘 영양군,덕흥대원군 & 정신옹주의 생모 경기도 숙의 남양홍씨 묘 해안군의 생모 경기도 숙의 경주이씨 묘 덕양군의 생모 경기도 숙원 김씨 묘 숙정옹주의 생모 경기도 제 12대 인종귀인 영일정씨 묘 경기도 제 13대 명종 경빈 이씨 묘 경기도 제 14대 선조 순빈 김씨 묘 순화군의 생모 경기도 정빈 여흥민씨 묘 인성군,인흥군 & 정인옹주,정선옹주,정근옹주의 생모 경기도 정빈 남양홍씨 묘 경창군 & 정정옹주의 생모 경기도 온빈 청주한씨 묘 흥안군,경평군,영성군 & 정화옹주의 생모 경기도 제 16대 인조 숙의 나씨 묘 경기도 숙원 장씨 묘 경기도 제 17대 효종 안빈 경주이씨 묘 숙녕옹주의 생모 충청남도 제 19대 숙종 명빈 밀성박씨 묘 연령군의 생모 경기도 영빈 안동김씨 묘 경기도 귀인 경주김씨 묘 경기도 소의 강릉유씨 묘 경기도 제 22대 정조 의빈 창녕성씨 묘 문효세자의 생모 경기도 원빈 풍산홍씨 묘 경기도 화빈 남원윤씨 묘 경기도 제 23대 순조 숙의 밀양박씨 묘 영온옹주의 생모 경기도 제 24대 헌종 경빈 광산김씨 묘 경기도 숙의 김해김씨 묘 경기도 제 25대 철종 귀인 밀양박씨 묘 경기도 귀인 평양조씨 묘 경기도 숙의 온양방씨 묘 경기도 숙의 나주범씨 묘 영혜옹주의 생모 경기도 숙의 김해김씨 묘 경기도 제 26대 고종 귀인 경주이씨 묘 영보당 이씨, 완친왕의 생모 경기도 귀인 덕수장씨 묘 의친왕의 생모 경기도 귀인 청주양씨 묘 복녕당 양씨, 덕혜옹주의 생모 경기도 귀인 해주정씨 묘 보현당 정씨, 우의 생모 경기도 귀인 이씨 묘 내안당 이씨 경기도 상궁 광산김씨 묘 정화당 김씨 경기도 귀인 이씨 묘 광화당 이씨로 이완흥, 육의 생모 경기도 상궁 김해김씨 묘 삼축당 김씨로 김옥기 경기도 의친왕 상궁 정씨 묘 수관당 정씨 경기도 상궁 김씨 묘 수인당 김씨로 김흥인
후궁 1묘역 19대 숙종, 소의 강릉유씨 묘 숙종은 정비 인경왕후(대제학 김만기의 따님 광산김씨), 제1계비 인현왕후(영돈령부사 민유중의 따님 여흥민씨), 제2계비 인원왕후(영돈령부사 김주신의 따님 경주김씨)가 있고 후궁으로 희빈 장씨(20대 경종의 생모, 사역원 부봉사 장형의 따님 인동장씨), 숙빈 최씨(무수리 출신으로 21대 영조의 생모), 명빈 박씨, 영빈 김씨, 귀인 김씨, 소의 유씨가 있다. 23대 순조, 숙의 밀양박씨 묘 슬하에 자녀로 영온옹주가 있는데 일찍 죽어 묘소가 이곳 왕자, 공주 묘역에 있다. 24대 헌종, 숙의 김해김씨 묘 26대 고종, 서장자 완화군(후일 완왕, 모:영보당 귀인 이씨) 묘 영보당 귀인 이씨는 2남을 두었는데 완왕과 육이다. 16대 인조, 숙의 나씨 묘 16대 인조, 숙원 장씨 묘
후궁 2묘역 13대 명종, 경빈 이씨 묘 19대 숙종, 귀인 경주김씨 묘 25대 철종, 귀인 평양조씨 묘 25대 철종, 귀인 밀양박씨 묘 25대 철종, 숙의 온양방씨 묘 25대 철종, 숙의 김해김씨 묘 25대 철종, 숙의 나주범씨 묘 22대 정조, 원빈 풍산홍씨 묘 22대 정조, 의빈 창녕성씨 묘 22대 정조, 화빈 남원윤씨 묘 24대 헌종, 대한 경빈김씨 묘 26대 고종(보현당) 해주정씨 묘 26대 고종(정화당) 광산김씨 묘 26대 고종(덕혜옹주 생모) 귀인양씨 묘 26대 고종(영보당 완왕의 생모) 귀인이씨 묘 26대 고종(내안당) 귀인이씨 묘
40여 년만에 빗장 푼 조선 후궁들의 사당
청와대 경호 문제로 근 40 년간 출입이 금지됐던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서편의 칠궁(七宮·사적 149호)이 2001년 11 월 24 일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 칠궁은 조선시대 역대 제왕(죽고 나서 뒤에 왕에 추존된 경우 포함)의 어머니로,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후궁(빈·嬪) 7 인의 신주(神主)를 봉안한 사당. 문화재청은 "1968 년 1·21 무장공비 침투 사건 이후 관람이 금지되어 왔으나 청와대 관람과 연계해 일반에 공개한다"고 밝혔었다.
대한민국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청와대 내)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사적 제149호로 등록되어 있다. 조선의 왕들을 낳은 친모이지만 왕비에 오르지 못한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영조가 후궁 출신인 모친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 '육상궁'을 건립한 이후 역대 왕 또는 왕으로 추존되는 이의 생모인 후궁의 묘를 옮겨와 합사하게 된 것으로 원래는 1724년(영조 원년)에 지은 육상궁만 있던 터였으나 1908년(순종 2년) 연호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이 옮겨왔고 1929년 덕안궁이 들어오면서 7명의 신위를 모시게 되어 칠궁이 되었다. 칠궁 합사는 봉사된 법모와 아울러 사친, 즉 생모에 대한 효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저경궁 (儲慶宮) 조선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의 신궁. 남양주 순강원(順康園) 대빈궁 (大嬪宮)조선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의 신궁. 대빈묘(大嬪墓) 육상궁 (毓祥宮)조선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궁. 소령원(昭寧園) 연호궁 (延祜宮)조선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신궁. 수길원(綏吉園) 선희궁 (宣禧宮)조선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신궁. 수경원(綏慶園) 경우궁 (景祐宮)조선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신궁. 갑신정변때 개화당이 고종 부부를 임시로 경우궁에 옮김. 휘경원( ) 덕안궁 (德安宮)
청와대 경계 서쪽과 맞닿아 있고 경복궁 담장 북쪽에서 조금 떨어진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자리한 칠궁은 건물을 중심으로 이 일대 7 천 815 평이 1966년 3 월 22 일 사적 제 149 호로 지정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적 지정 초기 및 그 이전에는 일반 출입이 자유로웠으나 1968 년 1 월 21 일 김신조씨가 포함된 무장공비 침투사건이라는 된서리를 맞아 청와대 경호를 이유로 폐쇄됐으며 청와대가 관리했다. 이 칠궁이 근 40 년간만에 일반 개방에 들어갔다. 칠궁은 정식 왕비가 아니면서도 왕을 생산한 후궁 7 명(이런 후궁을 사친<사친>이라 한다)의 신주를 봉안한 묘궁(廟宮)이라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이곳은 원래 무수리 출신으로 나중에 숙종의 후궁이 되어 영조를 생산한 숙빈최씨를 모신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숙빈묘'라 했다가 영조 즉위 20 년(1744) '육상묘'로 이름을 바꿨다. 9 년 뒤인 같은 왕 29 년(1753)에는 다시 '육상궁'이라 했다. 칠궁의 공식 사적 지적 명칭이 아직도 육상궁인 것은 이때문이다. 육상궁은 고종 19 년(1882) 화재로 소실됐다가 이듬해 6 월 중건됐다. 융희 2 년(1908) 서울 주변에 흩어져 있던 여러 사친묘를 합사함으로써 육궁(六宮)이 됐다.
칠궁만 별도로 관람할 수는 없고, 청와대 관람 후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개인 관람은 4,5,9,10 월 매주 금 토요일, 단체 관람(30 인 이상)은 1,7 월을 제외한 달의 매주 화∼토요일. 이곳의 법정동명이 [궁정동]인 이유도 이 칠궁에서 유래된다.
*각 궁의 뜻:
16기의 후궁묘 유명 조선국 증경빈 이씨 지묘 - 조선 제13대 명종대왕의 후궁 조선국 귀인 경주김씨 지묘 - 조선 제19대 숙종의 후궁 귀인 평양조씨 지묘 - 제25대 철종 장황제의 후궁 귀인 밀양박씨 지묘 - 제25대 철종 장황제의 후궁 숙의 온양방씨 지묘 - 제25대 철종 장황제의 후궁 숙의 김해김씨 지묘 - 제25대 철종 장황제의 후궁 숙의 나주범씨 지묘 - 제25대 철종 장황제의 후궁 원빈 풍산홍씨 지묘 - 제22대 정조 선황제의 후궁 의빈 창녕성씨 지묘 - 제22대 정조 선황제의 후궁 화빈 남원윤씨 지묘 - 제22대 정조 선황제의 후궁 경빈 김씨 지묘 - 제24대 헌종 성황제의 후궁 보현당 해주정씨 지묘 - 제26대 고종 태황제의 후궁 정화당 안동김씨 지묘 - 제26대 고종 태황제의 후궁 귀인 양씨 지묘 - 제26대 고종 태황제의 후궁, 덕혜옹주 생모 귀인 이씨 지묘 - 제26대 고종 태황제의 후궁, 영보당 귀인 이씨 지묘 - 제26대 고종 태황제의 후궁, 내안당 소의 강능유씨 지묘 - 제19대 숙중 후궁 숙의 밀양박씨 지묘 - 제23대 순조의 후궁, 경성부 청엽정에서 옮겼다. 숙의 김해김씨 지묘 - 제24대 헌종의 후궁 유명 조선국 왕자 영종정경부사 완화군 증익익 효헌공 묘 - 제26대 고종의 서자 귀인이씨 소생, 양주군 치남에서 옮겼다. 숙의 나씨 지묘 - 제16대 인조의 후궁 숙원 장씨 지묘 - 제16대 인조의 후궁, 서울 은평구에서 옮겼다.
(7) 서삼릉, 조선의 왕자 · 공주 묘역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201-85(서삼릉, 비공개지역)
공주 公主 & 옹주 翁主
무슨 창녕대군, 경혜공주 하듯이 이름을 쓰지 않고 -대군, -군, -공주, -옹주 이렇게 불렀잖아요. 그 앞에 창녕이라든지, 경혜라던지. 이런 칭은 작위 앞에 붙는 이름은 좋은 글귀에서 따온 가명(嘉名) 또는 지명(地名)을 붙입니다만 그냥 별호(別號) 또는 호(號)라고 하시면 됩니다
막 태어난 어린 왕자녀들은 모두 "아기씨"라고 부릅니다. "대군 아기씨", "왕자 아기씨" 이런 식으로 그리고 8~10세쯤 되어 관례를 치루고, 혼례를 치루면 위와 같은 별호를 받게 되는거죠. 물론 이것은 아랫 사람들이 부를 때 쓰는 말이고, 웃전이 부를 때에는 "왕자야~" "옹주야~" 이런 식이나, 아명을 부르구요.별호를 받으면 그 별호를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왕비가 낳은 아들들은 "대군"의 칭호를 받지만, 그 중 첫째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원자"의 칭호를 받으며, "원자 아기씨"라고 불립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이 원자는 8~10세쯤 되면 자동으로 왕세자에 책봉되죠. 이것은 조선의 적장자 승계 원칙(왕비의 장남이 왕위를 잇는다)에 따른 것이구요.
그러니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한 상태에서 후궁이 임금의 장남을 낳아도 원자라는 칭호는 받을 수 없습니다. 후궁의 아들들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왕비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가 원자가 되고, 왕세자가 되므로 다른 후궁의 아들들은 당연히 왕위에 오를 수 없게 됩니다.
한 예로, 복성군은 경빈 박씨의 소생으로, 중종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나중에 태어난 장경왕후 소생의 인종이 원자가 되었고, 왕세자가 되었죠. 만약 왕비가 아들을 낳을 가망성이 없다고 여겨져 후궁의 아들을 미래의 후계자로 삼아야겠다 싶으면 이 후궁의 아들은 왕비의 양자로 삼아 원자에 책봉하고, 역시 나이가 차면 왕세자에 책봉하죠. 그 예로, 경종은 숙종과 희빈 장씨의 아들로 태어나, 숙종의 비였던 인현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인현왕후의 양자가 되어 원자에 책봉되었으며, 또 왕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원자, 왕세자의 교육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알려져 있지만, 일반 왕자녀들의 하루 일과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특히 당시는 남성과 달리 여성에게는 교육을 잘 시키지 않았던 때라 공주, 옹주들도 한글 교육과 사서삼경 정도 밖에 익히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원자가 태어나면 보양청을 설치해 원자의 양육을 관리하는데, 두 살쯤 되면 유아 교육이 시작되고, 이 보양청은 원자의 나이가 네 살쯤 되면 강학청으로 바뀌면서 천자문 등을 익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왕세자에 책봉되면 세자 시강원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구요. 왕세손은 세손 강서원이라고 합니다.
왕세자의 하루는 아침, 점심, 저녁 웃전 어른들께 문후를 여쭙는 것 외에는 거의 공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른 왕자들은 왕세자처럼 우수한 과외 선생과 체계적으로 1:1로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종학이라고 하는 교육 기관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왕자들은 과거 시험을 보거나, 벼슬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목표 의식이 부족해 공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죠. 물론 개중에는 공부가 좋아 열심히 하는 왕자들도 있을 수 있지만, 너무 잘난 왕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좋든 싫든 역모죄로 몰려 죽임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주,옹주,군,대군은 그냥 부르지 않고 앞에 별호를 붙인다. 동궁(東宮)은 왕세자가 거처하던 곳으로, 왕세자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왕세자를 제외한 다른 공주, 옹주, 대군, 군은 동궁에서 지낼 수 없었구요. 공주, 옹주, 대군, 군은 어릴 때에는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지내다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어머니가 거처하는 처소에서 가까운 곳에서 지냈으리라 봅니다.
지금은 사라져 공터나 잔디밭으로 남아있을지라도 예전엔 그곳에도 전각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생활 공간이 있었고, 또 하나의 전각만 있는 곳도 있지만, 여러 전각이 복도로 연결되어 이것이 하나의 전각처럼 이동이 쉬운 곳도 있었으니까요. 물론 당시에는 조혼이 성행했고, 왕실의 혼례는 사가보다 더 일찍 치루므로 10세 즈음이 되면 혼인을 하게 되는데, 혼인을 함과 동시에 공주, 옹주, 대군, 군은 모두 궁을 나가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궁 가까이에 집을 지어 그곳에 가정을 꾸리고 살았습니다.
공주와 군주는 적녀. 옹주와 현주는 서녀 대군:왕비가 낳은 아들.즉,적자.왕비가 첫째 아들은 대군이 아니라 "세자"가 된다. 군:후궁이 낳은 아들.즉,서자.왕비가 낳은 아들이 없을경우에는 서자가 세자가 되기도 한다. 공주: 아버지는 왕 어머니는 왕비인 왕의 딸 즉, 적녀. 경신공주, 경선공주, 경순공주,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 정소공주, 정의공주, 경혜공주, 세희공주, 의숙공주, 현숙공주, 순숙공주, 신숙공주, 휘순공주, 효혜공주, 의혜공주, 경현공주, 효순공주, 인순공주 등 옹주: 아버지는 왕 어머니는 후궁인 왕의 딸 즉, 서녀 군주: 아버지는 세자 어머니는 세자빈인 세자의 딸 현주: 아버지는 세자 어머니는 세자후궁인 세자의 딸
공주와 옹주, 군주와 현주로 나눈 까닭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 태종대왕 때 태종대왕은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로써 신덕왕후 강씨가 왕후의 자리에 오른 것을 몹시 분개하였어요. 그리고 태조가 세자책봉을 할 때 한씨의 아들들은 다 제치고 강씨의 아들인 이방석이 세자자리에 오릅니다. 태종은 세자 방석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을 때 강씨를 서모의 예로 장사했고, 또 강씨의 왕후의 지위를 박탈해 종묘에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이 때 부터 태종대왕은 적자와 서자, 적녀와 서녀로 나눠 왕의 왕비에게서 난 딸은 공주, 왕의 후궁에게서 난 딸은 옹주라고 부르고 세자의 세자빈에게서 난 딸은 군주(아비인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공주로 진봉), 세자의 후궁에게서 난 딸은 현주(아비인 세자가 왕위에 올라 어미인 세자후궁이 왕의 후궁으로 진봉되면 옹주로 진봉)로 나눴지요.
옹주도 왕자 못지 않게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물론 왕 개개인의 차이도 있겠지만 워낙 혈손이 중요한 왕실이라 번창하면 번창할수록 좋았기 때문에 부왕의 총애를 많이 받았을 겁니다. 선조, 효종, 영조 등도 옹주나 공주들에게 그들의 그리움을 담겨낸 편지들이 많이 ㄴ나와서 그런 추측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있는 상태에서 중전이나 후궁이 딸아이를 낳았다면 실망감이 크진 않겠지요. 그 사례는 성종이 1계비 폐비윤씨에게서 연산군이라는 아들 하나 얻고 2계비 정현왕후 윤씨에게서 순숙공주와 신숙공주를 얻었어도 실망이 크진 않았습니다. 이미 자신에겐 폐비에게 얻은 아들이지만 이미 후계자로 정할 원자 하나는 있었으니까요. 물론 정현왕후 윤씨는 그 뒤에도 1488년에 11대 왕 중종이 되는 진성대군을 하나 낳았지만요.
그리고 사랑을 독차지하는 딸아이도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바로 고종이 환갑나이에 귀인 양씨에게 얻은 덕혜옹주였죠. 하지만 그녀는 자라서 대마도주와 강제로 결혼하고 딸 마사에(정혜)를 낳지만 마사에는 자신의 어머니 덕혜옹주를 조선의 왕녀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순수한 일본여인으로 살고 싶다고 덕혜옹주와 곧잘 다퉜죠.
부마란 부마副馬 즉 주마 主馬에게 딸린 말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천자의 사위라는 뜻으로 바뀐데에는 까닭이 있는데 한漢나라 무제때 부마도위 駙馬都尉 라는 벼슬을 두어 부마를 관장하게 했는데 공주의 남편으로 하여금 그 벼슬을 맏게 했던 까닭이다.
옛날 농서 에 신도도라는 남자가 있었는데 지방으로 유학을 가서 돈이 궁해 굶주리며 옹주 서쪽 50리까지 왔을때 웬 커다란 저택이 잇고 그 문전에 하녀인 듯한 여자가 서 있었다. 신도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밥을 청했더니 하녀가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안주인의 방으로 인도하는것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안주인이 말을 했는데 나는 진秦나라 민왕의 공주였는데 조曹나라로 출가 했다가 남편을 여의고 그로부터 22년동안 홀로지낸다오. 손님께서 모처럼 와 주셨으니 제발 부부가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신도도는 너무나 고귀한 여인이라서 사양을 했으나 간청에 못이겨 허락을 하고 말았는데 인연을 맺기를 사흘낮 사흘밤이 지나자 여인이 신도도에게 처량하게 말했다 당신하고 더 지내고 싶지만 사흘밤 밖에는 안된답니다 더 지내다가는 화를 입을 테니 헤어져야겠는데 헤어지고 나면 나의 정성을 드릴수 없겠구려 다만 정표로서 이걸 받아 주세요. 여인은 신도도에게 금베개를 주고 하녀더러 대문까지 배웅케 했는데 대문을 나와서 돌아보니 저택은 온데간데없고 잡초가 우거진 벌판에 무덤 하나가 있을뿐이었다
그러나 금베게만은 어김없이 품에 들어 있어 그는 그 베개를 팔아 음식을 사먹었고 훗날 진나라 황비가 장터에서 그 베개를 발견하고 조사를해보니 신도도라는 남자가 나타나 황비는 이상히 여겨 무덤을 파고 관을 열어보았더니 장례때 넣어준 물건들 중에 다른것은 다있는데 오직 금베개만이 없었다. 그래서 딸의 몸을 살펴보니 정사를 치른 흔적이 완연해 황비는 비로소 신도도의 말을 곧이듣고 이사람이야 말로 자기 사위라고 여기도 부마도위 의 벼슬을 주어 금마차를 베풀어서 본국으로 보내주었는데 부마라는 말은 여기에서 생겨난 것이다.
조선시대 대군(大君), 군(君), 공주(公主), 옹주(翁主)의 호칭
1. 왕의 아들, 손자 칭호
① 원자(元子) 왕의 장자로서 아직 왕세자로 책봉되지 않은 사람
② 원손(元孫) 왕의 장손로서 아직 왕세손로 책봉되지 않은 사람 (대표적으로 영조때 정조가 이에 해당한다)
③ 대군(大君) 왕비에게서 난 아들(왕의 적자)
④ 군(君) 후궁에게서 난 아들, 또는 대군의 아들.
2. 왕의 딸, 손녀 칭호
① 공주(公主) 왕비에게서 난 딸 - 왕의 적녀(嫡女) 이 명칭은 중국의 진(秦)·한(漢)나라 때 황제가 딸의 혼인을 삼공(三公:大司馬·大司公·大司徒)에게 맡겨 주관하도록 한데서 비롯되었다. 중국에서는 주위의 군주를 회유하기 위하여 외민족(外民族)에게 출가시킨 제실(帝室)이나 왕족의 부녀를 화번공주(和蕃公主)라고 하였는데, 고려시대 충렬왕(忠烈王) 이후 공민왕에 이르기까지7명의 왕에게 출가해 온 원(元)나라의 공주가 그 예이다.
한국의 경우 삼국시대이전부터 이 명칭을 사용하였으며, 고대에는 고구려의 왕자 호동(好童)과의 비련의주인공 낙랑공주(樂浪公主), 고구려 평원왕의 딸로서 온달(溫達)에게 시집간 평강공주(平岡公主) 등이 있다. 또한, 고려시대는 공주에게 정1품 품계를 주었으며, 조선 전기의 《경국대전》에서는 왕의 정실이 낳은 딸을 공주라 하고, 측실이 낳은 딸을 옹주(翁主)라 하여 구별하는 한편, 공주는 품계를 초월한 외명부(外命婦)의 최상위에 올려놓았다. 따라서 공주의 남편은 중국과 같이 부마도위(駙馬都尉)라 하고, 공주의부마에게는 처음에 종1품의 위(尉)를 주었다가 정1품의 위로 올려 주었으며, 옹주의부마에게는 처음에 종2품, 다음에 정2품으로 올리는 등 역시 구별하였다.
② 옹주(翁主) 후궁에게서 난 딸, 왕의 서녀(庶女) 고려 초기에는 내 ·외명부에 일정한 제도를 설치하지 않았으나 현종 때 국왕의 첩에게 귀비(貴妃) ·숙비(淑妃) 등의 호(號)를 주었고, 정종(靖宗)때에는 이들을 원주(院主) ·원비(院妃)와 궁주(宮主)라 하던 것을 충선왕 때 궁주를 옹주로 개칭, 정1품의 품계를 주었다. 그 뒤 옹주라는 칭호가 남용되어 논란이 있자 1391년(공양왕3) 왕자의 정비(正妃)와 왕의 유복(有服) 동성자매(同姓姉妹), 조카딸, 군(君)의 정처(正妻) 등에 한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후궁(後宮) 소생의 딸에게 주던 작호이다. 공주(公主)와 함께 품계(品階)를 초월한 무계(無階)로, 외명부의 가장 윗자리이다. 옹주에게 장가 든 자는 처음에는 종2품의 위(尉)로 봉(封)하였다가 나중에는 정2품으로 올려주었다. 또한 옹주의 처소를 옹주방이라 하였다.
③ 군주(郡主) 왕세자의 적녀(정2품)
④ 현주(縣主) 왕세자의 서녀(정3품)
3. 왕의 후계자 ① 세자(世子) 아들을 후계자로 정할 때 칭호(정상적 후계 확정) (세종 때 문종 등) ② 세제(世弟) 동생으로 하여금 후계자를 정할 때 (경종 때 - 영조 : 경종의 무사(無嗣)이기 때문) ③ 세손(世孫) 손자로 하여금 후계자를 정할 때(? 순조 때 - 효명세자의 사망으로 원손 헌종이 세손이 되었음)
세자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이 왕과 비슷합니다. 다만 격을 약간 낮춘 정도. 최고 예복으로 칠장복이라고 해서 구장복보다 무늬가 두개 적은 옷을 입었고, 곤룡포도 왕이 오조룡을 새긴 곤룡포를 입었다면 세자는 사조룡四爪龍(발톱이 네 개인 용)이 새겨진 곤룡포를 입었습니다.
왕자들의 경우는 곤룡포 따위의 왕실예복은 입을수가 없고, 평상시에는 그냥 일반 사대부들의 옷을 입고 예복으로는 사극에서 대신들이 입궁할 때 입는 예복에 가슴에 수놓은 흉배만 달리한 옷을 입었습니다. 대군은 기린麒麟, 군은 백택白澤 문양이었습니다. 구장복은 왕이 제사나 큰 행사 때 입는 옷이고 황제는 십이장복,왕은 구장복, 왕세자는 칠장복, 왕세손은 오장복을 입는데, 이는 문양 수의 차이에서 구별되며 황제는 12가지 문양 즉 해,달,별,용,산,불꽃,꿩,수초,쌀,도끼,호랑이와 원숭이, 불(한자인 활궁자가 서 로 등을 대고 있는 형태)이 있는 십이장복을 착용하는데 왕은 해,달,별이 빠진 구장복을 사용한다죠.
박영규저 "조선의 왕실과 외척" 왕의 딸 중에 적녀는 공주(公主)라 하고, 서녀는 옹주(翁主)라고 부릅니다. 허나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적녀 · 서녀에 대한 호칭 구분은 분명히 않았습니다. 조선 초에는 왕의 딸과 후궁을 모두 궁주(宮主)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다 태종 대에 이르러 후궁과 왕의 딸을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면서, 왕의 딸을 공주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또 태종 대에 서자에 대한 차별을 규정하는 법률이 생김에 따라 자연스럽게 왕의 딸에게도 적서의 차별이 적용되기에 이릅니다. 그 결과 적녀는 공주, 서녀는 옹주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원래 옹주라는 칭호는 왕의 후궁이나 대군의 부인에게 주어진 명칭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종 대에 내명부와 외명부에 대한 칭호법이 확립된 뒤부터 옹주는 왕의 서녀를 부르는 칭호로 굳혀지게 됩니다. 공주와 옹주는 품계가 없는 무품 작위로서 외명부에 속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들이 내명부에 속할 것 같지만 궁중에서 자란 뒤에 궁 밖으로 시집을 가기 때문에 외명부가 되는 것입니다.
공주와 옹주 외에도 궁중에서 자란 뒤 궁 밖으로 출가하는 여자가 또 있는데 바로 세자의 딸들인 군주(君主)와 현주(縣主)입니다. 공주나 옹주와 달리 군주와 현주는 정2품과 정3품上의 작위를 각각 받았습니다.
이들 왕녀들은 통상적으로 대개 13살을 전후하여 결혼을 했습니다. 일반 왕자들의 혼례와 마찬가지로 왕녀들의 결혼을 위해서도 금혼령을 내린 뒤 몇 명의 부마 후보를 택하여 왕과 왕비가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대개 부마는 정치적 이해 관계를 통해 내정되곤 했는데 이 때문에 공주와 옹주는 정치 상황에 따라 처지가 급변한 경우가 종종 나타납니다.
왕녀의 신분이라고는 하나 일단 출가한 뒤에는 남편 집안의 정치적 입지가 그들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녀들의 삶은 시가의 상황 변화보다는 친정의 처지에 더 크게 좌우되었습니다. 시아버지나 남편, 또는 시가의 혈족들이 정치적 이유로 가문이 몰락하더라도 왕녀들은 대체적으로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친정이 몰락하는 경우에는 신분 보장은 고사하고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든 지경으로 치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문종의 딸인 경혜공주는 동생인 단종이 쫓겨난 뒤에 남편은 사약을 받아 죽고, 그녀는 순천의 관비가 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이 밖에도 성종의 서녀인 공신옹주는 어머니 귀인 엄씨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내쫓는 데 가담한 것에 연좌되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종의 또 다른 서녀인 정혜옹주도 같은 사건으로 어머니 귀인 정씨의 죄에 연좌되어 유배지에서 노예로 살아야 했으며 연산군이나 광해군의 딸들도 서인으로 전락하여 어렵게 생활해야 했습니다. 중종과 경빈 박씨의 딸인 혜순옹주는 경빈 박씨가 "작서의 변"으로 죽자 서인으로 전락했으며 그녀의 동생 혜정옹주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남편을 잃고 서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왕녀들도 당대의 여느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남편의 축첩에 마음을 상하고 무관심에 눈물을 흘리며 사는 일도 많았습니다.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는 남편이 다른 사람의 첩을 빼앗아 와서 첩으로 삼는 바람에 망신살이 뻗치기도 했으며, 그녀는 남편과 별로 관계가 좋지 않았던 모양인데 그녀가 죽을 때 남편인 남휘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다고 하며 그 일로 탄핵을 당하기까지 했다고 하며 그래도 반성의 기미가 없자 세종은 그를 유배시켜 버립니다.
왕녀들은 재가나 개가를 할 수 없었습니다. 대개 조선 일반 민가의 아낙내들에게 재혼과 개혼이 허락된 것에 비하면 왕녀들은 결혼 생활의 폭이 좁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여성들과 비교할 때, 왕녀들의 삶은 부유하고 호와로웠으며 평탄했습니다. 왕녀라는 신분 덕분에 늘 특권을 누린 것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 엄청난 혜택을 누렸으며 잘못을 저질러도 반역이나 불충과 관계된 일이 아니라면 형벌을 받는 일도 드물었습니다.
역사 속에 많이 기억되는 왕의 딸들로는 먼저 태조의 딸로 동정심을 받고 있는 여승이 된 경순공주를 들 수 있겠으며, 태종의 딸이자 남이 장군의 생모인 정선공주도 있습니다. 세종의 딸이었으며 동시에 훈민정음 창제에도 기여한 차녀 정의공주도 들 수 있겠습니다.
성종의 딸이며 연산군과 이복남매로서 연산군과 간통을 벌인 휘숙옹주도 있으며, 영조의 딸이며 친조카였던 정조와 정치적 경합을 벌인 화완옹주도 있으며, 고종의 딸이며 비운의 여인인 덕혜옹주도 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간 총 116명이나 되는 공주들과 옹주들 중에서 왕의 딸이기에 겪어야 했던 삶의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일곱 명을 선별했다. 조선시대 부마간택의 역사적 연원이 된 정선공주와 왕의 딸이라는 이유로 권력투쟁에 휘말렸던 경혜공주, 정명공주, 효명공주, 화완옹주 등의 삶을 깊이 있게 살펴보았으며, 국익을 위해 다른 나라에 인질로 잡혀가야만 했던 의순공주와 덕혜옹주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 누구보다 화려하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으나 공주는 최고의 권력자인 왕의 딸이다. 또한 전국의 처녀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간택에서 최종 선택된 왕비의 딸이기도 하다. 그런 왕과 왕비에게서 태어났으니 공주는 분명 빼어난 지성과 미모를 가졌으리라 상상되곤 한다. 게다가 공주는 왕과 왕비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 존재였으니 세상에 부러울 게 하나도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들의 삶은 언제든지 수단화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조선의 많은 공주들이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적 삶을 희생당했다.
부왕인 태종의 뜻에 따라 과부의 아들과 혼인했으나 부부관계가 단절돼 갖은 어려움을 겪은 정선공주 계유정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남편과 친동생 단종을 잃고 노비로까지 전락한 경혜공주 왕실 저주사건에 연루되어 서궁에 유폐되었으나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서예로 승화시킨 정명공주 인조의 편애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냈으나 저주혐의로 어머니와 남편을 잃고 귀양에 처해진 효명공주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효종의 양녀로 공주에 봉작된 의순공주 어린 세손(정조)을 편집증적으로 아꼈으나 후일 정조의 최고 라이벌이 되어 사사건건 대립한 화완옹주 14세 때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도쿄로 유학 갔다가 대마도 번주 종무지와 정략적으로 결혼한 덕혜옹주
하루아침에 공주에서 노비로-경혜공주(제5대 왕, 문종의 딸) 옹주의 남편은 왜 미녀 사냥꾼이 되었나-휘숙옹주(제9대 왕, 성종의 딸) 공주는 어떻게 땅부자가 되었을까-정명공주(제14대 왕, 선조의 딸) 왕의 딸도 퇴짜를 맞았다!-정신옹주(제3대 왕 태종의 딸) 부마의 첩 때문에 소박맞은 공주-(효정옹주 제11대 왕, 중종의 딸) 급조된 공주, 족두리 묘의 전설을 남기다-의순공주(제17대 왕, 효종의 양녀) 질투심에 눈이 멀어 자작극을 벌이다-(현숙공주 제8대 왕, 예종의 딸)
조선공주실록
- 화려한 이름 아래 가려진 공주들의 역사
1. 정선공주_태종의 딸 : 과부의 아들과 결혼한 공주 꼬인 혼사길/조선 최초의 부마간택/대를 잇는 인연/부마 남휘/순탄치 않은 부부생활/죽음과 자손
2. 경혜공주_문종의 딸 : 나는 왕의 딸이다 어머니를 세자빈으로 만든 딸/사연 많은 혼인길/계유정난/연이은 비극/공주에서 노비로/자식들을 위해 원수와 대면하다/되찾은 명예
3. 정명공주_선조의 딸 : 공주로 죽고 싶소 환영받지 못한 출생/어린 시절의 고난/서예로 승화된 유폐 생활/혼인/대비의 죽음과 위기일발/고진감래
4. 효명옹주_인조의 딸 : 옹주에서 해도여자로 인조의 고명딸/인조의 편애에 따른 갈등/위험한 총애/축복받은 어린 시절/조 귀인과 강빈의 숙명적 대결/조작된 부마간택/비극적 결말
5. 의순공주_효종의 딸 : 급조된 공주의 비극적 운명 약소국의 딸들/청에 끌려간 공녀들/섭정왕 도르곤의 통혼칙/의순공주 선정 배경/의순공주의 삶
6. 화완옹주_영조의 딸 : 정조의 최고 라이벌 언니의 결혼과 때 이른 죽음/일성위의 부인/딸과 남편의 죽음/사도세자를 돕다/세손에 대한 지나친 애정/죽음 앞에 선 영조/세손의 대리청정/정처
7. 덕혜옹주_고종의 딸 : 조선과 함께 지다 망국의 옹주/천황의 황족이 된 고종/고종의 유일한 낙/미묘한 문제들/복녕당 아기씨/가장 행복했던 나날들/고종의 죽음/정략결혼의 희생자
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역사도 몰랐던 조선 왕실 가족사
제1장 왕이 살다 1 영희전, 세조의 잠저 왕위를 찬탈한 세조 세조, 문수보살을 만나다 의숙공주와 음나무의 인연 여섯 왕의 어진을 모시다 영희전을 그리다
2 이현궁, 광해군의 잠저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 공빈 김씨를 모신 봉자전 계운궁, 숙빈궁, 장용영으로 사용된 이현궁터 이현궁의 은행나무
3 어의궁, 인조와 효종의 잠저 효종이 태어난 상어의궁 용흥궁으로 불렸던 하어의궁 가례장이 된 하어의궁 ㆍ 51 《계곡선생집》에 나타난 하어의궁 인조반정이 일어난 어의궁 ㆍ 55
4 창의궁, 영조의 잠저 화려했던 숙휘공주의 궁 창의궁과 양성헌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의 효장묘 사도세자의 아들, 의소세손의 의소묘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문희묘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문호묘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 역사의 산 증인, 통의동 백송 창의궁 가는 길
5 운현궁, 고종의 잠저 가야사를 불사르고 이장한 남연군묘 명복, 익종의 양자가 되어 왕위에 오르다 작은 궁궐, 운현궁 자영의 꿈에 나타난 인현왕후 팔려나간 운현궁
제2장 왕을 낳은 부모가 살다 1 도정궁, 덕흥대원군의 궁이자 선조의 잠저 중종의 막내아들 덕흥군 창빈 안씨의 음덕을 받고 태어난 하성군 역모로 죽은 이하전 운경기념관과 경원당 긍구당과 담연정을 거닐다
2 누동궁, 전계대원군의 궁 사도세자의 후궁, 양제 임씨 역모와 순교 속에서 살아남은 사도세자의 후손 강화도령 원범, 왕이 되다 전계군을 전계대원군으로 추봉하다 누동궁에 들어선 한옥들
3 경모궁, 사도세자의 사당 창경궁의 정원, 함춘원 뒤주 속에서 8일 만에 죽은 사도세자 정조, 아버지 묘를 천장하다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 함춘원 마두봉 언덕에 세워진 대한의원 내신문과 삼계만 남은 경모궁터
4 칠궁, 숙빈 최씨의 사당과 정빈 이씨의 사당 칠궁의 주인들 어머니의 은혜를 온전히 보존하는 육상궁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소령원 죽어서도 시어머니를 모시는 정빈 이씨 김신조 사건과 칠궁
5 저경궁, 인빈 김씨의 사당 서모의 은혜를 잊지 않다 인빈 김씨의 사당, 저경궁 인빈 김씨의 묘, 순강원 송현 언덕의 달성위궁 조선은행이 된 저경궁
6 대빈궁, 희빈 장씨의 사당 숙종의 여인들 천민에서 왕비로 빈어가 후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하라 268년 만에 숙종 곁으로 가다 경종의 사모곡 대빈묘와 대빈궁으로 남다
7 선희궁, 영빈 이씨의 사당 아들을 사지로 내몬 영빈 이씨 의열묘에서 수경원으로 의열묘에서 선희궁으로 세심대와 감류천 선희궁터에 들어선 국립서울농ㆍ맹학교
8 경우궁, 수빈 박씨의 사당 내가 죽은 뒤에는 행록을 짓지 말라 수빈 박씨묘 휘경원과 사도세자묘 영우원 경사스러움을 돕는 사당 경우궁으로 피신한 고종 경우궁터에 세워진 학교
9 덕안궁, 순헌황귀비 엄씨의 사당 명례방의 명례궁 정릉동의 명례궁 시위상궁, 황귀비가 되다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 경성부민관에서 서울시의회 건물까지
제3장 왕자와 공주가 살다 1 자수궁, 무안대군의 궁 장인 때문에 세자가 되지 못한 무안대군 후궁들이 모여 살다 명나라 궁녀, 굴씨가 살다 북학과 병원을 세우다 자수궁을 찾아서
2 안국동별궁, 영응대군의 궁 세종, 영응대군 집에서 숨을 거두다 왕의 자손이 사는 집 정명공주가에서 연령군가로 순종의 가례를 위한 별궁 궁중 나인들의 거처에서 풍문여고로
4 순화궁, 길안현주의 궁 구수영과 길안현주 인헌왕후 탄생지 헌종이 사랑한 여인, 순화궁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다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
5 용동궁, 순회세자의 궁 공회빈 윤씨의 시신이 사라지다 박동궁이 되다 교육을 통한 부국강병, 숙명여학교 최승희의 ‘숙명여자전문학교 설립 모금 운동’ 묄렌도르프가 본 용동궁
6 창성궁, 화유옹주의 궁 영조와 일곱 옹주 화유옹주와 창성위 황인점 엄황귀비, 진명여학교를 설립하다
7 죽동궁, 명온공주의 궁 궁궐에서 쫓겨난 단경왕후 죽도를 들고 춤을 추다 죽어서도 함께였던 네 남매 매란여사 명온공주 죽동궁 폭탄 테러 사건
8 계동궁, 남연군의 종가 명당 중의 명당 남연군의 종가를 이어가다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계동궁 연못, 번댕이
9 사동궁, 의친왕의 궁 완화군 사망과 독살설 범숙의궁에서 태어난 의친왕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의친왕가 사동궁 회화나무
10 수진궁, 왕자와 공주를 모신 사당 평원대군, 제안대군, 영창대군으로 이어지다 3세에 죽은 원손 인성대군 용성대군, 의창군과 낙선군의 신위를 모시다 숙신공주와 명선공주, 명혜공주 외로운 혼백의 안식처였던 수진궁
비운의 조선 프린스(조선왕실 적장자 수난기)조선왕실 적장자 수난기
제1장 아버지가 거부한 아들 불노와 지운 준비된 허수아비 왕┃야욕가 이방원이 꾸민 묘책┃억지로 앉은 세자 자리┃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불노의 비극┃난언죄로 생을 마친 지운┃세상의 비웃음거리로 산 나머지 자식들
제2장 지나친 억압과 감시로 무너진 양녕대군 양녕대군 폐위에 대한 다양한 견해┃부동의 적장자, 세자가 되다┃왕세자제도에 도사린 세 가지 함정┃권력유지를 위해 태종이 만들어놓은 덫┃세자를 엇나가게 만든 감시와 억압┃태종의 폐세자 언급┃복수의 칼을 빼든 양녕대군┃폐위의 멍에를 안다
제3장 성종과 뒤바뀐 운명, 월산대군과 제안대군 무너진 왕위승계 원칙이 가져다준 돌발상황┃인수대비의 지나친 교육열┃철저한 계산하에 후사로 임명된 잘산대군┃이준의 몰락과 월산대군의 유배 아닌 유배생활┃제안대군의 전화위복
제4장 결코 왕이 될 수 없는 적장자, 영창대군 준비된 비극의 주인공┃선조의 위신을 추락시킨 임진왜란┃명나라의 세자 책봉 승인 거부┃계비를 간택한 선조의 속마음┃수포로 돌아간 계획┃살해당한 왕의 형, 임해군┃폭풍 전야의 나날들┃모함으로 인해 생을 마감한 영창대군
제5장 부친의 견제로 불운을 맞이한 소현세자 포로가 된 자의 숙명┃광해군이 자초한 모반사건┃부당한 정치개혁의 후과, 정묘화약┃적국 청나라의 볼모가 된 소현세자┃용골대의 비상한 계책┃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화려한 귀환이 부른 비극
공주 公主 & 옹주 翁主 墓
경기도 이애 & 경신공주 묘 제 1대 태조 신의왕후 한씨 적 1녀 상당부원군 청주 이씨로 이거이의 子 경기도 심종 & 경선공주 묘 적 2녀 청원군 청송 심씨로 심덕부의 子 서울 이등 & 의령옹주 묘 신덕왕후 강씨 서 1녀 계천위 개성 이씨로 이덕시의 子 경기도 홍해 & 숙신옹주 묘 서 2녀 당성군 남양 홍씨로 홍언수의 子 경기도 이숙무 & 경혜공주 묘 진안대군 방우 충주 지씨 - 양도공 한산 이씨로 이종학의 子 경기도 박갱 묘 제 2대 정종 숙의 충주지씨 서 1녀 밀영위 밀양 박씨로 박득중의 子 함양옹주 묘 경기도 김세민 & 숙신옹주 묘 숙의 행주기씨 서 2녀 양평공 경주 김씨로 김겸의 子 경기도 변상복 & 덕천옹주 묘 서 3녀 원천위 원주 변씨로 변이의 子 경기도 이관식 & 인천옹주 묘 숙의 해평윤씨 서 7녀 - 전의 이씨로 이성간의 子 경기도 이백강 & 정순공주 묘 제 3대 태종 원경왕후 민씨 적 1녀 청평위 청주 이씨로 이거이의 子 경기도 조대림 묘 적 2녀 평양부원군 평양 조씨로 조준의 子 경정공주 묘 경기도 권규 & 경안공주 묘 적 3녀 제간공 안동 권씨로 권근의 子 경상남도 남휘 & 정선공주 묘 적 4녀 의산군 의령 남씨로 남경문의 子 경기도 박종우 & 정혜옹주 묘 의빈 안동권씨 서 1녀 운성부원군 운봉 박씨로 박신의 子 경기도 조선 & 정정옹주 묘 신빈 영월신씨 서 3녀 한원군 양주 조씨로 조말생의 子 경기도 이정녕 & 숙혜옹주 묘 소빈 장연노씨 서 6녀 성원군 성주 이씨로 이사후의 子 경기도 윤우 & 숙녕옹주 묘 신빈 영월신씨 서 7녀 파성군 파평 윤씨로 윤수미의 子 경기도 이완 & 경신옹주 묘 선빈 안씨 서 10녀 전성위 전의이씨 경기도 황유 & 숙안옹주 묘 명빈 안동김씨 서 11녀 회천위 황자후의 子 경기도 정소공주 묘 제 4대 세종 소헌왕후 심씨 적 1녀 서울 안맹담 & 정의공주 묘 적 2녀 연창위 죽산 안씨로 안망지의 子 경기도 심안의 & 정안옹주 묘 숙원 이씨 서 2녀 청성위 청송 심씨로 심선의 子 경기도 정종 & 경혜공주 묘 제 5대 문종 현덕왕후 권씨 적 1녀 영양위 해주 정씨로 정충경의 子 경기도 강자순 & 경숙옹주 & 경주이씨 묘 혜빈 청주양씨 서 1녀 반성위 진주강씨로 강징의 子 경기도 정현조 & 의숙공주 묘 제 7대 세조 정희왕후 윤씨 적 1녀 하성위 하동 정씨 정인지의 子 경기도 홍상 묘 덕종 (추존) 소혜왕후 한씨 적 1녀 당양위 남양 홍씨로 홍응의 子 명숙공주 묘 경기도 신항 & 혜숙옹주 묘 제 9대 성종 숙의 남양홍씨 서 1녀 고원위 고령 신씨로 신종호의 子 경기도 임숭재 & 휘숙옹주 묘 숙의 김씨 서 2녀 풍원위 풍천 임씨로 임사홍의 子 경기도 정원준 & 정순옹주 묘 숙의 남양홍씨 서 6녀 봉성위 봉화 정씨로 정현의 子 경기도 조무강 & 숙혜옹주 묘 숙용 청송심씨 서 7녀 한천위 양주 조씨로 조광세의 子 경기도 한기 & 정혜옹주 묘 귀인 초계정씨 서 10녀 청평위 청주 한씨로 한형윤의 子 경기도 윤섭 & 정숙옹주 묘 숙의 남양홍씨 서 11녀 영평위 파평 윤씨로 윤승류의 子 서울 구문경 & 휘순공주 묘 제 10대 연산군 거창군 부인 신씨 적 1녀 능양위 능성 구씨로 구수영의 子 경기도 한경록 & 의혜공주(옥혜)묘 제11대 중종 문정왕후 윤씨 적 2녀 청원위 청주 한씨로 한승권의 子 강원도 구사안 & 효순공주(옥련)묘 적 3녀 능원위 능성 구씨로 구순의 子 경기도 인순공주 묘 적 5녀 경기도 김인경 & 혜순옹주(철환)묘 경빈 밀양박씨 서 1녀 광천위 광산 김씨로 김헌윤의 子 경기도 홍려 & 혜정옹주(석환)묘 서 2녀 당성위 남양 홍씨로 홍서주의子 경기도 송인 & 정순옹주(정환)묘 숙원 대원이씨 서 3녀 여성위 여산 송씨로 송질의 子 경기도 구한 & 숙정옹주(수환)묘 숙원 김씨 서 5녀 능창위 능성 구씨로 구신경의 子 경기도 왕녀 제 14대 선조 인빈 수원김씨 경기도 윤신지 & 정혜옹주 묘 서 2녀 해숭위 해평윤씨로 윤방의 子 경기도 홍우경 & 정인옹주 묘 정빈 여흥민씨 서 4녀 당원위 남양 홍씨로 홍식의 子 경기도 박미 & 정안옹주 묘 인빈 수원김씨 서 5녀 금양군 반남 박씨로 박동량의 子 경기도 류정량 & 정휘옹주 묘 서 6녀 전창위 진주 류씨로 류열의 子 경기도 권대임 & 정선옹주 묘 정빈 여흥민씨 서 7녀 길성군 안동 권씨로 권신중의 子 경기도 김극빈 & 정근옹주 묘 서 9녀 일선위 선산 김씨로 김이원의 子 경기도 권대항 & 정화옹주 묘 온빈 청주한씨 서 10녀 동창위 안동 권씨로 권희의 子 경기도 시녀 굴씨 묘 소현세자 - - - 소현세자의 청국 시녀 경기도 구봉장 & 경숙군주 묘 민회빈 강씨 적 1녀 능산부위 경기도 숙신공주 묘 제 17대 효종 인선왕후 장씨 적 1녀 경기도 홍득기 & 숙안공주 묘 적 2녀 익평위 남양 홍씨로 홍중보의 子 경기도 심익현 & 숙명공주 묘 적 3녀 청평위 청송 심씨로 심지원의 子 경기도 정제현 & 숙휘공주 묘 적 4녀 인평위 연일 정씨로 정창징의 子 경기도 정재륜 & 숙정공주 묘 적 5녀 동평위 동래 정씨로 정태화의 子 경기도 원몽린 & 숙경공주 묘 적 6녀 흥평위 원주 원씨로 원만리의 子 경기도 명선공주 묘 제 18대 현종 명성왕후 김씨 적 1녀 경기도 명혜공주 묘 적 2녀 경기도 오태주 & 명안공주 묘 적 3녀 해창위 해주 오씨로 오두인의 子 경기도 옹주 묘 제 21대 영조 정빈 함성이씨 서 1녀 충청남도 김한신 & 화순옹주 묘 서 2녀 월성위 경주 김씨로 김흥경의 子 경기도 화억옹주 묘 영빈 전의이씨 서 4녀 경기도 왕녀 묘 서 6녀 경기도 정치달 & 화완옹주 묘 서 9녀 일성위 연일 정씨로 정유량의 子 경기도 정재화 & 청선공주 묘 장조 (추존) 헌경왕후 홍씨 적 2녀 홍은위 연일 정씨로 정인환의 子 경기도 홍현주 & 숙선옹주 묘 제 22대 정조 수빈 반남박씨 서 1녀 영명위 풍산 홍씨로 홍인모의 子 서울 김현근 & 명온공주 묘 제 23대 순조 순원왕후 김씨 적 2녀 동녕위 안동 김씨로 김한순의 子 경기도 김병주 & 복온공주 묘 적 3녀 창녕위 안동 김씨로 김연근의 子 경기도 영온옹주 묘 숙의 밀양박씨 서 1녀 경기도 왕녀 묘 제 24대 헌종 숙의 김해김씨 서 1녀 경기도 박영효 & 영혜옹주 묘 제 25대 철종 숙의 나주범씨 서 4녀 금릉위 반남 박씨로 박원양의 子 경기도 공주 묘 제 26대 고종 명성왕후 민씨 적 1녀 경기도 옹주 묘 귀인 경주이씨 서 1녀 경기도 덕혜옹주 묘 귀인 청주양씨 서 3녀 경기도 옹주 묘 귀인 경주이씨 서 4녀
정소공주 / 세종의 제1녀, 소헌왕후 심씨 소생 인성대군 /예종의 제1남, 장순왕후 한씨 소생 인순공주 / 중종의 제5녀, 문정왕후 윤씨 소생 숙신공주 / 효종의 제1녀, 인선왕후 장씨 소생 명선공주 /현종의 제1녀, 명성왕후 김씨 소생 명혜공주 / 현종의 제2, 명성왕후 김씨 소생 화억옹주 / 영조의 제4, 영빈이씨 소생 영온옹주 / 순조의 제1녀, 숙의박씨 소생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대, 517년, 1392 - 1910 ]
원(園) 13기(基)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호)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익종(翼宗) 一 수릉(綏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一 융릉(隆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一 영릉(永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一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一 경릉(敬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제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一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一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호)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기(基) 제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一 유릉(裕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제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一 홍릉(洪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시
왕릉 35기 제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一 예릉(睿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一 경릉(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제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一 인릉(仁陵 : 사적 제194호)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제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一 건릉(健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二 홍릉(弘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一 원릉(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二 혜릉(惠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一 의릉(懿陵 : 사적 제204호)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三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二 익릉(翼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一 명릉(明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제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一 숭릉(崇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一 영릉(寧陵 : 사적 제195호)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二 휘릉(徽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一 장릉(長陵 : 사적 제203호)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二 성묘(成墓 : 사적 제365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一 목릉(穆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一 강릉(康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一 효릉(孝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三 희릉(禧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二 온릉(溫陵 : 사적 제210호)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一 정릉(靖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三 회묘(懷墓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二 순릉(順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一 선릉(宣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路)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二 공릉(恭陵 : 사적 제205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一 창릉(昌陵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7대 세조(第七代 世祖) 一 광릉(光陵 : 사적 제197호)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二 사릉(思陵 : 사적 제209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一 장릉(莊陵 : 사적 제196호)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제5대 문종(第五代 文宗) 一 현릉(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4대 세종(第四代 世宗) 제3대 태종(第三代 太宗) 제2대 정종(第二代 定宗)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三 정릉(貞陵 : 사적 제208호)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二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一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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