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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9 (1) 제23대 순조(純祖) _ 인릉仁陵

草霧 2013. 8. 14. 13:40

 

 

 

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9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9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1) 제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20090730-7.JPG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1) 제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2)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3) 제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4) 제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1)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 仁陵

   

 

 

 

고난과 역경의 인생길에서 세도정치의 희생양이 되다

 

인릉 仁陵

 

 인릉20090730-7.JPG

 

순조(純祖, 이공, 1790-1834, 재위 34), ()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金氏,1789-1857),

1834, 서울 서초구 194, 헌인릉(獻仁陵)

 

 

23대 순조(純祖) 인릉 첫번째 작은이미지23대 순조(純祖) 인릉 두번째 작은이미지23대 순조(純祖) 인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조선 3대 태종(太宗) 헌릉 純祖(이공 : 1790 - 1834, 재위 34)와 비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 1789 - 1857)의 인릉은 본래 순조(純祖) 승하 후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인조(仁祖)의 장릉(長陵) 옆에 조성했다가 현재의 위치인 태종(太宗)의 헌릉(獻陵) 옆으로 천장(遷葬)되었고 순원왕후도 함께 합장(合葬)되었습니다.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러 쌓여 있는 봉분(封墳)에 상석(床石) 하나를 설치해 놓았으며 기타 석물(石物) 역시 정연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같은 강남 지역에 있는 선정릉(宣靖陵 :성종과 중종)이 도심의 빌딩 숲 속에 포위되어 있는 것과 비교하면 그나마 헌인릉(獻仁陵)은 자연(自然)과 어우러져 있어 다행입니다.

 

인릉은 조선 23대 순조와 비 순원왕후의 합장릉이다. 겉으로 보아서는 혼유석을 하나만 설치하여 단릉과 같은 형식이다. 인릉의 능역에는 곡장 3, 난간석 12, 석양 2, 석호 2, 혼유석 1, 망주석 1, 장명등 1, 문석인과 석마 각 1, 무석인과 석마 각 1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과 재실 등이 있다.

 

23대 순조(純祖) 인릉 큰이미지봉분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 12칸만을 둘렀으며, 기타 상설은 국조상례보편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 장명등은 조선 초기의 팔각등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문무석인은 생동감 있는 표정과 힘차고 활달한 조각 기법, 이목구비의 표현 등이 매우 사실적이어 조선 후기의 석물조각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릉의 비각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이 중 하나는 최초의 조영 당시의 것이고, 하나는 고종 때 순조숙황제로 추존되면서 세운 것이다.

 

순조는 18341113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여 1835419일 파주 교하 구후(舊後) 장릉(長陵) 국내에 안장하였고, 능호를 인릉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풍수지리상의 불길론이 대두되어 천장을 결정하게 되었다.

 

철종실록1855(철종 6) 118일의 기사에는 "인릉의 능침을 봉안한지 21년이나 되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외의(外議)가 서로 논쟁하고 있다고 하니, 나의 마음이 송구스럽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어머님께서도 이런 내용으로 하교하셨지만, 일이 지극히 중차대한 데에 관계되므로, 경 등과 상의하여 결정해서 행하려 한다.”로 시작하는 내용의 인릉의 천장에 대한 논의가 기록되어 있다.

 

    홍살문 쪽에서 바라본 헌릉의 전경이다.정자각 오른편으로 비각이 서 있다

 

논의가 있은 다음해인 1856(철종 7) 1011일에 인릉은 현재의 위치인 서초구 내곡동 헌릉 서쪽 언덕으로 천장되었다. 1857(철종 8) 84일에는 창덕궁 양심각에서 순원왕후 김씨가 승하하여 같은 해 1217일에 인릉에 합장하였다.

 

 

 

  

 

 

세도정치에 기죽은 순조

 

 

순조(純祖, 이공, 1790-1834, 재위 34)

순조와 순원왕후 - 仁陵순조는 증 영의정(贈領議政) 판돈녕부사(判敦寧府使) 박준원(朴準源)의 딸인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소생인데,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의 소생인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요절하자 순조를 세자(世子)로 책봉합니다.

 

그런데 정조(正祖)의 갑작스런 승하로 11세에 즉위한 어린 임금을 대신한 증조모(曾祖母) 대왕대비(大王大妃: 영조(英祖)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외척(外戚)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조(朝鮮朝) 후기(後期)에 마련되었던 영정조대(英正祖代)의 문화적 황금기(黃金期)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 때가 바로 순조대(純祖代)입니다.

    

순조는 정조 14년인 1790년에 태어나 1800년에 왕위에 올랐고 34년을 재위(在位)하고 1834년에 승하합니다. 순조의 즉위는 천주교(天主敎) 서학(西學)의 탄압으로 시작됩니다. 바로 벽파계(僻派系)의 대표였던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시파계(時派系) 남인(南人)과 남인 중심의 실학사상가(實學思想家)들을 제거하기 위한 일대 숙청으로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킵니다. 천주교 금지를 명분(名分)으로 천주교도들은 물론이고 정약용(丁若鏞) 형제,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 등의 남인계 시파와 자수한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 등을 비롯한 300여명을 살해하고 유배시킵니다.

 

결국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후 순조 재위 시절에 몇 차례의 천주교 탄압은 세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계속되어 이 후 헌종(憲宗) 때의 기해박해(己亥迫害)[1839], 고종(高宗) 때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등으로 이어져 쇄국정책(鎖國政策)의 수단이 됩니다.

 

순조 어필 - 창덕궁 연경당 外行閣 동문 현판이와 같은 세도정치의 폐해(弊害)는 당연히 일반 농민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국가 권력 구조가 의정부(議政府)에서 비변사(備邊司)로 넘어가고 그 요직(要職)을 독차지하는 세도 권력의 전횡(專橫)으로 인해 진보적 학자들의 중앙 진출이 봉쇄되고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인한 농민들의 수탈(收奪)이 극에 달해 이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반발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특히 관서(關西)농민전쟁으로까지 불리는 '홍경래(洪景來)의 난()'은 부패한 권력 통치 체제에 대한 농민층의 저항 전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또한 홍경래의 난을 이어 안동김씨 정권 말기 철종 대의 임술민란(壬戌民亂)이나 고종 대의 동학운동(東學運動)으로 일어난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등으로 이어져 심각한 국가 위기의 상황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1790(정조 14) 618, 수빈 박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정조는 의빈 정씨가 낳은 맏아들 문효세자가 1786년 어린 나이에 요절하자, 둘째 아들을 1800(정조 24) 11일 왕세자로 책봉했다. 그 해 628일 정조가 승하하자 11세 어린 나이의 세자는 74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 후 5년 동안 나이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영조의 계비였던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이 시기에 정순왕후를 등에 업은 벽파와 반대파인 시파가 대립하고, 이는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1801(순조 1) 신유사옥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천주교 탄압이 벌어져 정약용 등이 유배당하고 1년 사이에 300명의 교인이 학살당했다.

 

1804(순조 4)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국의 주도권은 다시금 장인 김조순에게 돌아가고, 이때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조정의 요직은 안동 김씨, 반남 박씨 등 혈연을 중심으로 독점되었고, 척신들 사이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더불어 수해와 전염병 등으로 민심이 피폐해지자 홍경래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순조는 34년의 재위 기간 동안 세도정치에 밀려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하고 1834(순조 34) 1113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4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조선 후기 순조의 재위 기간은 척신들의 횡포와 자연 재해 등으로 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가운데 잦은 민란이 발생하였는데, 그 중 181112월 홍경래가 평안도 가산 다복동에서 일으킨 반란은 근대 이전 조선시대에 일어난 최대의 민중반란이었다.

 

평안도 용강 출신의 홍경래는 순조가 즉위하던 해인 1800년 경부터 이미 한반도 북쪽 지역을 널리 돌아다니며 정세를 파악하고 동조자를 모아 반란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뛰어난 무사들과 지식인을 모은 홍경래는 1811(순조 11) 군대를 일으켜 8개 군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남쪽으로 진출하다가 정부군에게 패한 끝에 농민들과 함께 정주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하였다.

 

봉기군은 저항을 계속 하였으나, 1812(순조 12) 419, 정부군이 화약을 터뜨려 성을 무너뜨리고 들어가 반란을 진압하였다. 홍경래는 전사하고 우군칙 등 다수가 체포되었으며, 봉기군 잔존 세력 중 1,917명이 효수 당했다.

 

홍경래의 난은 새로운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무력도 구성하지 못하여 정부군에게 패배하였지만, 낡은 지배체제에 저항한 사건으로써 후대 민중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801

1년

1월, 대왕대비[정순왕후] 천주교 금함

1818

18년

8월, 정약용 강진에서 유배 해제

2월, 신유사옥(辛酉邪獄) 일어남

1819

19년

윤4월, 김정희 문과에 급제

1802

2년

8월, 하늘에 일식 현상이 일어남

8월, 조만영의 딸 세자빈 책봉

10월, 김조순의 딸{순원왕후}왕비 책봉

1821

21년

3월, 왕대비 김씨 승하[1753 - ]

1804

4년

1월, 대왕대비 수렴청정을 그침

1823

23년

7월, 유생들 만인소 올려 서얼 임용 요청

1805

5년

1월, 대왕대비 승하{1745 - }

1826

26년

6월, 지진(地震)이 발생함

8월, <정조실록(正祖實錄)> 완성

1827

27년

2월, 왕세자 대리청정(代理聽政)함

1808

8년

1월, 북청,서천 등지에서 폭동이 일어남

1828

28년

12월, 전국 호구(戶口)조사 실시

1809

9년

8월, 원자[익종] 탄생

1830

30년

5월, 정약용 승지에 복귀, 왕세자 병사

1811

11년

12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남

5월, 왕세자{익종} 병사

1812

12년

4월, 관군 정주성 수복, 난 진압

1833

33년

3월, 한양 쌀값 폭등으로 곡물전 습격

1815

15년

6월, 경상도 천주교도 300여명 검거

1834

34년

11월, 왕 승하{1790 - }

12월, 혜경궁 홍씨 승하{1735 - }

11월, 왕세손{헌종} 즉위

1817

17년

6월, 신라 진흥왕 북한산 순수비 발견

11월, 대왕대비[순원왕후] 수렴청정함

 

 

경로잔치를 자주 마련한 왕

현 통합과 통합반대운동

잦은 경로잔치

충청도와 공청도

공직기강 바로잡기

국가가 있는 곳에 음악이 있어야 한다

해는 서산으로, 조선의 역사도 함지咸池를 향해 가네

 

 

 

 

 

   

 

순조(純祖:1790-1834,재위 34년)와 비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1789-1857)의 인릉은 본래 순조(純祖) 승하 후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인조(仁祖)의 장릉(長陵) 옆에 조성했으나, 순조는 1835년 4월 19일 파주 장릉내에 초장되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논의가 있어 1856년(철종 7) 10월 11일 현재의 헌릉 오른쪽 언덕에 이장했으며, 그 이듬해 12월 17일 순원왕후도 순조와 함께 합장되었다. 인릉은 헌인릉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마주 보이는 능이다.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러 쌓여 있는 봉분(封墳)에 상석(床石) 하나를 설치해 놓았으며 기타 석물(石物) 역시 정연하게 갖추어져 있다. 같은 강남 지역에 있는 선정릉(宣靖陵 :성종과 중종)이 도심의 빌딩 숲 속에 포위되어 있는 것과 비교하면 그나마 헌인릉(獻仁陵)은 자연(自然)과 어우러져 있어 다행이다.

 

11세의 어린 임금이 즉위하니 대왕대비( 영조 계비 정순<貞純>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의 손에 권력이 쥐어져, 이때부터 순조, 헌종, 철종대에 이르는 60여 년간, 외척(外戚)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된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조(朝鮮朝) 후기(後期)에 마련되었던 영.정조대(英正祖代)의 문화적 황금기(黃金期)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대왕대비는 사도세자 사건을 악화시킨 김구주의 누이동생으로 벽파(僻派)를 옹호한 인물이다. 정조 집권으로 잠시 세력을 잃고 있다가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조때부터 집권해 오던 시파(時派)에게 정치적 보복을 가하기 시작했다.

 

  관련사진순조의 즉위는 천주교(天主敎) 서학(西學)의 탄압으로 시작된다. 바로 벽파계(僻派系)의 대표였던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시파계(時派系) 남인(南人)과 남인 중심의 실학사상가(實學思想家)들을 제거하기 위한 일대 숙청으로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킨다.

 

사교를 금한다는 명분으로 2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하여 시파를 모두 숙청한 것이다. 신유박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 이승훈, 정약종, 종친 은언군 등이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귀양을 갔다.

 

1804년(순조 4:왕15세) 수렴정치를 폫하고 왕의 친정이 시작된 뒤에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1815년(순조 15년)에 경상, 충청, 강원도의 천주교 신자들을 처벌했으며, 1827년(순조27)에는 충청 전라도의 교인들에게 극심한 탄압을 가했다.

 

  1802년(순조2) 10월 13세가 되던 해에 왕은 안동 김씨인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고, 2년 뒤에는  대왕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정권은 안동김씨에게 넘어갔다. 국구 김조순을 비롯하여 김이익, 김이도, 김달순, 김희순, 김명순 등 안동 김씨 일문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하는 전례 없는 친족 일색의 인사조치가 취해졌다. 또 순조의 생모되는 반남 박씨들도 세도의 한 귀퉁이를 파고들어 경주 김씨, 안동김씨, 반남 박씨 등 씨족중심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사교를 금한다는 명분으로 2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하여 시파를 모두 숙청한 것이다. 신유박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 이승훈, 정약종, 종친 은언군 등이고 정약전 정약용형제는 귀양을 갔다.

 

왕의 친정뒤에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1815년(순조 15년)에 경상, 충청, 강원도의 천주교 신자들을 처벌했으며, 1827년(순조27)에는 충청 전라도의 교인들에게 극심한 탄압을 가했다.

 

1802년(순조2) 10월 안동 김씨인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고 3년 뒤 대왕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정권은 안동김씨에게 넘어갔다. 국구 김조순을 비롯하여 김이익, 김이도, 김달순, 김희순, 김명순 등 안동 김씨 일문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하는 전례 없는 친족 일색의 인사조치가 취해졌다. 또 순조의 생모되는 반남 박씨들도 세도의 한 귀퉁이를 파고들어 경주 김씨, 안동김씨, 반남 박씨 등 씨족중심의 정치가 엉키어져 나갔다.

 

  권문세가의 줄 없이는 누구나 벼슬자리 하나 얻어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서로 뒷줄을 얻고자 김씨나 박씨의 문전으로 모여들었다. 많은 뇌물을 바치고 벼슬자리를 얻은 사람들은 본전 생각에 재임기간 동안 최대한 백성들을 갈취하기 마련이다. 여기에 재위기간 34년 중 19년 동안은 수재(水災)가 일어나고 서부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10만여 명이 목숨을 잃는 등 천재지변까지 겹쳐 백성들의 고생은 이루말 할 수가 없었다.

 

 조선왕릉 소나무 심기 체험행사 (가족 및 팀 사진)
조선왕릉 소나무 심기 체험행사 (가족 및 팀 사진)
조선왕릉 소나무 심기 체험행사
조선왕릉 소나무 심기 체험행사
인릉 능침 전경
인릉 능침 전경
인릉 비각 내 비석
인릉 비각 내 비석
정자각
정자각
장명등
장명등
잡상
잡상
망주석
망주석

 

인릉의 석물(망주석)
인릉의 석물(망주석)
인릉의 석물(석호)
인릉의 석물(석호)
인릉의 석물(무인석)
인릉의 석물(무인석)
인릉의 석물(문인석)
인릉의 석물(문인석)
인릉
인릉
헌릉
헌릉
헌릉 정자각
헌릉 정자각
인릉제향행사
인릉제향행사
인릉제향 2
인릉제향 2
인릉 제향행사
인릉 제향행사
제기(향로)
제기(향로)
인릉 능침
인릉 능침

 

이와 같은 세도정치의 폐해(弊害)는 당연히 일반 농민들에게 돌아갔다. 국가 권력기관의   요직(要職)을 독차지하는 세도 권력의 전횡(專橫)으로 인해 진보적 학자들의 중앙 진출이 봉쇄되고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인한 농민들의 수탈(收奪)이 극에 달해 이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반발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게 된다.

 

특히 관서(關西)농민전쟁으로까지 불리는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은 부패한 권력 통치 체제에 대한 농민층의 저항 전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정치기강이 무너져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각종 비리와 참설이 유행하는 등 사회혼란이 극도에 달해ㅛ다. 그 외에도 제주도의 토호 양제해와 용인의 이응길이 일으킨 민란, 유칠재, 홍찬모 등의 흉서사건, 청주의 괘서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안동김씨의 세도를 보다 못한 순조는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풍양조씨 일문을 중용하고 1827년(순조27) 세자에게 대리청정하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고 했으나, 불과 3년 뒤 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남으로써 실패했다. 사실 초기의 세도청치는 외척의 위협으로부터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이루어졌던 정치형태다.

            

정조가 세손으로 대리청정에 임하고 있을 때 세손을 반대 모해한 세력으로부터 정조를 보호한 공으로 홍국영이 막강한 권력을 누리면서부터 세도정치는 시작되었다. 이후 정조는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지만,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남아있는 경주 김씨들이 늘 불안했다. 어린 세자를 보호해달라는 유언을 김조순에게 남긴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김조순이 경주 김씨의 벽파에 대응할 수 있는 시파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세자를 보호하려면 왕실의 외척인 경주 김씨에 맞먹는 힘이 필요하다.

 

김조순은 경주 김씨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딸을 왕비의 자리에 앉혀 정순왕후의 힘에 맞섰다. 이렇게 왕권을 보호하기 위해 비롯된 세도 정치는 차츰 변질되어, 훗날 "외척정치=세도정치"가 되어 가문의 이익이 국가와 백성의 이익에 앞서는 우를 범하게 된 것이다.

 

()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金氏,1789-1857)

 

안동 김씨(安東金氏) 집안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로 태어난[정조 13] 순원왕후는 왕비로 책봉[순조 2]되고 난 후 철종(哲宗) 대까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정상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립니다.

 

특히 철종의 왕위 계승에 결정적인 역할과 철종의 왕비 간택(揀擇)에도 자신의 집안 사람{김문근의 딸 철인왕후(哲仁王后)}을 성사시킴으로 해서 그녀는 권력을 공고히 합니다. 슬하(膝下)2{효명세자[익종], 차남 요절} 3{명온, 복온, 덕온공주}를 두었고, 철종 8년에 승하합니다.

    

순원왕후는 1789(정조 13) 515일 한성부 서부 양생방에서 태어나 1802(순조 2) 1013일 왕비로 책봉되고, 1834(헌종 즉위) 1118일 왕대비로 봉해졌으며, 이튿날인 1119일 헌종의 아버지이며 순조의 원자였던 효명세자가 익종(후일 문조로 추존)으로 추존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순원왕후는 1800(정조 24) 치러진 세자빈 간택에서, 초간택과 재간택을 거쳐 삼간택을 앞두었을 때 갑자기 정조가 승하하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외척 김관주 등의 방해로 간택에서 탈락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마침내 1802(순조 2) 10월에 왕비로 책봉되어 안동 김씨 일문의 집권에 크게 공헌했다.

 

한 때 효명 세자빈의 친정인 풍양 조씨 일문에게 정권의 주도권을 빼앗겼다가 헌종 때 다시 되찾지만, 헌종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승하하자 장조(사도세자)의 손자이며 은원군의 아들인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 강화도령 원범을 지명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다. 자신의 친정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에 책봉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이 절정기를 맞게 했다.

 

순원왕후는 헌종 즉위년부터 수렴청정을 했고, 철종이 즉위하자 다시 철종 2년까지 수렴청정을 했으며 1857(철종 8) 84일 창덕궁 양심각에서 69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순원왕후는 1800(정조 24) 치러진 세자빈 간택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정조실록1800(정조 24) 226일의 기사에는 세자빈의 첫 번째 간택을 집복헌(集福軒)에서 행하고, 김조순의 딸, 진사 서기수의 딸, 유학 박종만의 딸, 유학 신집의 딸, 통덕랑 윤수만의 딸이 두 번째 간택에 들게 되었음을 알리는 하교가 기록되어 있다. 같은 날의 또 다른 기사에는 두 번째 세 번째 간택을 한다지만, 그것은 겉으로 갖추는 형식일 뿐이다.

 

국가에서 하는 일은 형식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에 두 번째 세 번째 간택도 앞으로 해야겠지만 오늘 이 첫 번째 간택이 옛날로 치면 바로 두 번째 간택인 것이다.” 라는 기록과 김조순에게 처음 가마에서 나왔을 때 자전, 자궁이 여러 처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그를 가리키면서 저게 뉘집 처자냐고 물으시고 이어 앞으로 오게 하여 한 번 보시고는 상하 모두가 진심으로 좋아하면서, 그런 처자는 처음 보았다고들 하였다.

 

이 모두가 하늘이 명하신 일이고 하늘에 계신 영령께서 주신 일이며 청음(淸陰문곡(文谷몽와(夢窩죽취(竹醉)가 쌓아올린 경사인 것이다. 경은 이제 나라의 원구(元舅)로서 처지가 전과는 달라졌으니 앞으로 더욱 자중해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글을 하사한 기록이 나와 있다.

 

이렇게 세자빈 간택이 거의 확실시 된 상황에서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자 외척 김관주 등의 방해로 삼간택에서 탈락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1802(순조 2) 10월에 결국 왕비로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헌릉의 오리나무숲에는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이 꽃은 숲 주변에 무리를 지어 피는 고마리 꽃이다.즉위한 지 6년이 넘도록 아들이 없었던 정조에게 궁녀 성씨(成氏)가 1782년(정조 6) 9월 7일 아들을 낳아 주었다.

 

정조는 그 녀를 내명부 정3품의 벼슬인 소용(昭容)으로 삼았고, 이듬해 2월 19일에는 소용성씨에게 의빈(宜嬪)이란 칭호를 내리고, 의빈이 낳은 아들을 1784년(정조 8) 7월 2일 왕세자로 삼았다.

 

왕세자가 1786년(정조 10) 5월 3일 홍역에 걸리자 정조는 의약청을 설치하여 치료에 전념 한 결과 호전되어 5월 6일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그런데 며칠 후인 5월 10일 왕세자가 갑자기 심각한 또 다른 증세를 보이자 정조는 약원에는 알리지 못하게 하고 “이런 때에 내가 모두 몸소 점검하는 것은 대체로 지극한 정이 있기 때문이지만, 또한 뜻이 있어서이다.”라고 하면서 본인이 직접 간병을 하였다.

 

그러나 왕세자는 이튿날 승하하고 말았다. 왕세자의 시호를 문효(文孝), 묘호를 효창(孝昌)이라 하고 그 해 윤 7월 19일에 장사를 지냈다. 그런데 그 해 9월 14일에는 의빈성씨가 임신 중에 갑자기 또 승하를 하자 당시에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지 않은 가?”라고 의심을 하였다. 같은 해 11월 20일에 의빈성씨를 문효세자의 무덤 왼쪽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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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한동안 아들이 없었던 정조는 1789년(정조 13) 10월 7일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긴 다음 해 6월 18일 창경궁에서 수빈박씨(綏嬪朴氏)가 아들을 낳자 정조는 “나라의 형세는 유지해 나아갈 기쁨이 있고 전궁(殿宮)은 손자를 안는 경사가 났으니 그 기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칭호를 원자로 정하여 종묘에 고하고 대사면 령을 내려 1천 1백 54명이 풀려났다.

 

그 후 1800년(정조 14) 1월 1일에 원자를 왕세자로 삼았는데, 그 해 정조가 승하를 하자 왕세자가 조선 23대 왕으로 즉위를 하니 그가 순조(純祖) 임금이다. 즉위 할 때 순조의 나이가 어리니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02년(순조 2) 10월 13일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왕비로 책봉을 하여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효명세자(孝明世子)이고 차남은 일찍 죽었다. 불행하게도 효명세자가 1830년(순조 30) 5월 6일 승하하자 원손을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하였고, 장녀와 차녀 역시 출가를 하였으나 일찍 죽는 바람에 후사가 없다.

 

(우137-180) 서울시 서초구 헌인릉길 42. 3호선 양재역 7번출구,  2호선 강남역 6번출구로 나와 버스  140, 407, 408, 440, 462, 471 로 환승해서 헌인릉 버스정류장, 강남서초구예비군훈련장 (서울시립어린이병원 다음 정류장)에 하차하셔서 오실 수 있습니다.순조 임금이 1834년(순조 34) 11월 13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자 장지를 파주 옛 장릉(長陵, 인조 옛 무덤) 왼쪽 언덕에 정하여 조성 작업을 하던 중 수렴청정을 하던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조 비)가 흙의 빛깔이 좋지 않고, 뇌석이 깨져 불안하니 다른 곳으로 장지를 정할 것을 지시하면서, 상지관 이시복(李時復)을 처형하였다.

 

이시복은 감여술(風水)로 입신출세한 양덕현감(陽德縣監)으로 장지의 일을 독단하였는데, 장지의 흙빛이 좋지 않자 천광의 위치를 위 아래로 옮겨 도처에 구멍을 뚫고 헐면서 속이고 감추기를 일삼은 죄를 물은 것이다. 장지를 교하(交河) 장릉(長陵)의 국내로 다시 정하여 1835년 4월 9일 순조를 장사(乙坐辛向) 지내고 능호를 인릉(仁陵)이라 하였다.

 

1855년(철종 6년)에 인릉은 청룡이 낮고 혈의 전순(氈脣)이 길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천장이 결정되었다. 천장 후보지 중 하나였던 후릉(厚陵, 정종 무덤) 양쪽 언덕은 무학대사가 점지한 자리라는 증언에도 불구하고, 철종(哲宗)은 헌릉의 오른쪽 언덕(세종의 옛 무덤자리로 추정)을 천장지로 정하여 1856년 10월 11일 남향(子坐午向)으로 천장을 하였다.

 

이듬해인 1857(철종 8) 8월 4일 순원왕후가 창덕궁 양심합(養心閤)에서 승하하자 인릉의 혈 왼쪽의 뭉친 곳이 풍만하여 합봉으로 장사를 지내면 십분대길(十分大吉)하다는 상지관들의 의견에 따라 그 해 12월 17일에 순조 왼쪽 옆자리에 장사를 지냈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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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순조-헌종-철종-고종까지

 

 

정조의 아들이 순조, 순조의 손자(효명세자의 아들)가 헌종, 그러나 헌종은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23살의 나이로 승하합니다. 이때 순조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안동 김씨의 권력을 이어가고자 강화도에서 유배생활 중이던 원범을 택군해 왕으로 즉위시키니 바로 조선 제 25대 왕 철종입니다.

 

그러나 철종은 철인왕후와 8명의 후궁한테서 11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모두 요절하고 병약한 영숙옹주(후에 영혜옹주)만 남긴 채 33살로 훙어합니다. 그러자 풍양 조씨인 조대비가 흥선군과 밀약한 대로 철종의 작은 할아버지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한 남연군의 손자(흥선군의 아들) 재황을 왕으로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조선 제 26대 왕 고종입니다.

 

21대 영조 1. 진종

                 2. 장조(사도세자) ----22대정조----23대순조----익종----24대헌종

                                           ---- 은언군----상계군

                                           ---- 은신군----풍계군

                                           ---- 은전군----진계대원군----회평군

                                                                                    ----영평군

                     ----25대철종

 

16대 인조-인평대군-복녕군-의원군-안흥군-이진익-이병익-남연군-흥선대원군-26대고종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