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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8 (3)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懿寧園

草霧 2013. 8. 13. 16:18

 

 

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8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8

 

 

    (3)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懿寧園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3)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懿寧園

   

 

 

 

 

 

음모와 당파에 휘말려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하니

 

융릉 隆陵

 

 

융릉20101031-8.JPG

 

장조(莊祖, 1735 1761), 헌경왕후(獻敬王后, 1735 1815), 1761, 경기 화성 206, 융건릉(隆健陵)

 

추존왕 장조(莊祖) 융릉 첫번째 작은이미지추존왕 장조(莊祖) 융릉 두번째 작은이미지추존왕 장조(莊祖) 융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추존왕 장조(莊祖) 융릉 조선조 최고 비극(悲劇)의 세자인 사도세자(思悼世子[장조(莊祖)] - 이선 ; 1735 - 1761)와 비()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 헌경왕후(獻敬王后) ; 1735 - 1815)의 융릉은 처음에 비극의 죽음을 맞은 세자를 양주군(陽州郡)에 장사지내고 수은묘(垂恩墓)로 명명했었는데, 정조(正祖) 즉위 후 영우원(永佑園)으로 추상(推上)하고 1789년에 수원으로 천장(遷葬)하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改稱)합니다.

 

융릉 병풍석 인석에 새겨진 연꽃은 조형적 걸작으로 평가된다.

 

풍수 비보 차원에서 조영한 융릉의 곤신지(坤申池, 아래 사진). 원형 연못은 여의주를 상징한다. 

현재의 융릉(隆陵) 추숭(追崇)1899[고종 36, 광무 3] 장조의 직계 4대 후손인 고종(高宗)에 의해 융릉으로 추존된 것이고, 시호(諡號), 묘호(廟號) 역시 영조(英祖)가 내린 사도세자(思悼世子)에서 정조가 추숭한 장헌세자(莊獻世子), 그리고 고종(高宗) 대에 추숭된 장종(莊宗), 또 장조(莊祖)로 추상됩니다.

 

 

 

 

 

정조는 융릉의 석물을 온갖 꽃으로 장식해 아버지를 애도했다.

추존왕 장조(莊祖) 융릉 큰이미지능역(陵域)의 상설(常設)은 현 위치로 천장(遷葬)할 때, 세자묘(世子墓)로 조성됨에도 불구하고 정조(正祖)의 의지에 따라 웅장하고 장엄하고 조성되었습니다. 화문(花紋)을 새긴 병풍석(屛風石), 꽃부리 모양의 봉분인석(封墳引石), 문인석 외에 무인석(武人石)의 추가 설치, 정자각(丁字閣) 앞의 넓은 박석(薄石)의 참도(參道) 등 아주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습니다.

 

 

왕손의 어미 빙애(경빈 박씨)를 죽인 일

여승을 궁에 끌어들인 일

평양을 다녀온 일

북한산성을 다녀온 일

시장에 빚을 진 일

 

반란 혐의

     

 

 

『영조실록』1762년(영조 38) 5월 13일의 기사에는 아버지인 영조가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게 되는 비극의 시작이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나경언이 고변한 후로부터 임금은 세자를 폐하기로 결심하였다.

 

임금은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에게 휘령전에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배례를 마치자, 궁성문을 굳게 막고 사람의 출입을 금한 후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의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세손이 들어와 관과 포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은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군병을 시켜 신하들을 내쫓게 하였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한림 임덕제마저 강제로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세자는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 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하고, 전문에서 나와 춘방의 여러 관원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물었다.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 세손 및 여러 왕손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허물십조’에 격분한 영조 “자결하라”

영조는 마흔에 영빈 이씨에게서 둘째 아들 사도세자를 얻었다. 세자의 휘(諱)는 선이고 자는 윤관(允寬)이며 호는 의제(懿齊)다. 맏아들 효장세자가 10세에 죽은 지 7년 만에 둘째 선이 태어나자 영조는 그를 세자에 봉하고 15세부터 부왕을 대신해 정무를 맡게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앞날은 험난했다.

 

앞이 확 트이게 비켜 있는 정자각

융릉은 능침의 앞을 확 트이게 하기 위해 정자각과 수복방을 비켜 세운 것이 특징이다.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한을 풀어주는 듯하다.

 

자신보다 열 살이나 아래인 계모(비) 정순왕후와 후궁인 숙의 문씨의 질투에 시달렸으며,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 공헌한 정순왕후의 부친 김한구 등 노론 일당의 무고로 화병과 정신병을 얻었다. 무고 사건이란 노론의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동궁(세자)이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자신을 따르는 관료들과 무단으로 관서지역을 유람했다’는 내용이 적힌 ‘허물십조’를 상소한 것을 가리킨다. 

 

이를 본 영조는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인가”라고 한탄하며 5월 13일 아들을 폐세자 하고 서인으로 강등했으며 자결할 것을 명했다. 사도세자가 부모 앞에서 자결하는 것이 효에 어긋난다고 항변하자 영조는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

융릉은 난간석을 두르지 않은 조선시대 유일의 병풍석 능침이다.

(우편번호 445-380)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 1-1. 1호선 병점역 하차, 34, 34-1, 35, 35-1, 44, 50, 50-1번 시내버스로 환승해서(15분 소요) 오실 수 있습니다.그러나 막상 아들의 죽음을 전해들은 영조는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와 세손(정조)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으랴” 하며 애도의 뜻을 담아 시호(諡號)를 사도세자라 하고 며느리 혜경궁 홍씨에게 혜빈(惠嬪)이란 호를 내려 복권시켰다. 사도란 ‘세자를 생각하며 추도한다’는 의미다. 영조는 친히 아들의 묘역 조성에 관여해 묘호를 수은묘(垂恩墓)라 하고, 장례의 제주로 영의정 홍봉한(사도세자의 장인) 등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신하들을 대동해 백관이 통탄의 곡을 하기도 했다.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장조

    

 

사도세자(思悼世子[장조(莊祖)] - 이선 ; 1735 1761)

{思悼世子 - 莊祖}, 영조와 영빈이씨(映嬪李氏) 슬하에서 태어난[영조 11] 장조(莊祖)는 이복(異腹) 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요절한 후인 영조(英祖) 춘추 44세에 태어났기에 왕세자 책봉(冊封)2세때 이루어집니다. 어려서부터 영민(英敏)했던 세자는 장래가 촉망되는 칭송을 받았지만 영조 25[1749]에 영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본 대리기무(代理機務)을 시작하면서부터 당쟁(黨爭)의 와중에서 무고(誣告)와 난행(亂行), 광포한 행동으로 인해 참혹하게 뒤주안에서 죽음을 맞는 비극을 당하지만, 그 이면에는 당파(黨派)의 내면에 잠복한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알력 속에서 발생한 필연적 비극으로 규정하는 논의가 많습니다.

 

뒤주에서 8일간 절규한 세자 “하늘이시여, 살려주옵소서!”

생부(生父)의 죽음을 목격한 정조(正祖)였기에 특히 세자의 사후에 장조(莊祖)로의 추존(追尊) 과정을 보면, 아들을 자신의 명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영조(英祖)도 후회의 회한(悔恨)으로 사도(思悼)의 시호를 내렸고,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숭하며 애절하기까지 했던 정조(正祖)의 선친에 대한 정성, 고종대(高宗代)에서의 장종(莊宗), 장조(莊祖) 추존까지 사도세자에 대한 약사(略史)가 그의 애절한 일생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야속한 아비의 아들, 장한 아들의 아버지 사도세자

 

 

 

 

정빈이씨(靖嬪李氏)가 낳은 효장세자(孝章世子)가 1728년(영조 4)에 승하를 한 후 한 동안 후사가 없다가 1735년(영조 11) 1월 25일 영빈이씨(暎嬪李氏)가 아들을 낳자 이듬해 3월 15일에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1744년(영조 20) 1월 9일에는 풍산홍씨(豐産洪氏) 봉한(鳳漢)의 딸을 왕세자빈으로 삼고 이틀 후에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1750년(영조 26) 8월 27일에는 왕세자빈이 원손(懿昭世孫)을 낳았으나 1752년 3월 4일에 죽었는데, 그 해 9월 22일에 둘째 아들(正祖)을 낳았다. 10년 후인 1762년(영조 38)에 나경언의 상소로 왕세자의 과실을 알게 된 임금이 왕세자의 빚을 갚아주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윤 5월 13일에 왕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깊이 가두어 버리도록 지시하였다. 그 달 21일에 왕세자가 승하하니 영조(英祖)는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왕세손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의 뜻을 헤아려 호를 회복시키고, 시호는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한다.”는 전교를 내리면서 이이장(李彛章)과 심수(沈鏽)를 묘소도감당상으로 안재경(安載經)을 상지관으로 삼아 그 해 7월 23일에 양주 배봉산(拜峰山) 자락에 장사(甲坐庚向)를 지내고 묘호를 수은(垂恩)이라 했다. 한편 영조는 장지에서 “지난 윤 5월 13일의 일은 종사에 관계된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아버지라 부르는 소리를 들었으니, 오늘은 아버지를 부르는 마음에 보답하려한다. 또 하나는 내가 30년 부자지은(父子之恩)을 마치러 온 것이고, 하나는 내가 친히 제주(題主)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친히 제주하면 다른 날에 반드시 신주를 묻어버리자는 논의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죽은 아들 사도세자에 대한 아픈 마음을 직접 전하려 하였다.

 

그 뒤 왕위에 오른 정조는 1776년 3월 20일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莊獻)이라하고, 원호는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가 박명원(朴明源)의 상소로 1789년(정조 13) 10월 7일에 천장을 하고 원호를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당시에 박명원은 잔디가 말라죽고, 청룡이 뚫렸으며,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고, 뒤쪽이 낭떠러지이며, 뱀이 무덤 가까운 곳에서 똬리를 틀고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심지어 정자각 기와 틈새마다 서려 있어 천장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정조는 용(龍)과 혈(穴), 지질, 명당수가 더없이 좋고 아름다울뿐더러 고산 윤선도(尹善道)가 효종(孝宗)의 장지로 추천을 하면서 “천리를 가도 다시없는 자리이고,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자리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수원 화산(花山) 자락에 마음을 두고 있음을 나타냈다. 한편 “그 곳은 용이 똬리를 틀고 앉아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盤龍弄珠形)이니 여의주처럼 생긴 작은 언덕을 안대(案對)로 해서 좌향을 정하고(癸坐丁向), 장지는 그 산의 형세를 그대로 따를 뿐이니, 보토(補土)를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을 나는 옳지 않게 생각한다. 더구나 이 묏자리의 혈체는 유두(乳頭) 밑에 웅덩이가 파여 있어 음양이 서로 붙어 있는 데 그 신묘함이 있으니 흙을 파낼 때 유두를 파지 말라. 혈 앞의 남은 기운이 생동해 구르고 있는데 만약 지나치게 흙을 보충하면 천연으로 이루어진 정교함을 잃기 쉬우니 원형 그대로 잔디를 입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구덩이의 깊이도 옅게 파고 깊이 파지 말아서 차라리 길한 기운이 밑으로 지나가게 할지언정 위로 지나가게 하지 말라는 뜻을 더욱 염두에 두어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미리 더욱더 살펴 정하라.”고 장지를 조성하는 방법까지를 상세하게 지시를 하였으니 정조가 풍수 공부를 어느 정도 하였는지 짐작할만한 대목이다.

 

1815년(순조 15) 12월 15일에 헌경혜빈(獻敬惠嬪)이 창경궁 경춘전에서 승하를 하니 이듬해 3월 3일에 남편과 합봉으로 장사를 지냈다. 고종 36년(1899) 7월 27일에 장헌세자를 장종(莊宗)으로, 헌경혜빈을 헌경왕후(獻敬王后)로 능호를 융릉(隆陵)으로 추존하였다가 그 해 11월 5일에 장종을 장조(莊祖) 황제로 다시 추존하였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사도세자를 뒤주에서 죽게 한 노론의 모습인가. 말없이 무표정한 문석인(작은사진)과 무석인의 뒷모습.

 

 융릉-융릉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헌경왕후(獻敬王后) ; 1735 1815)

 

 

풍산홍씨(豊山洪氏) 영의정(領議政) 홍봉한(洪鳳漢)의 딸로 영조 11[1735]에 탄생한 헌경왕후는 영조 20년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는데, 사도세자 사후 혜빈(惠嬪)으로 있다가 정조(正祖)가 즉위한 후 혜경궁(惠慶宮)의 궁호(宮號)를 받아 여생을 보내다가 순조 1581세의 춘추로 승하해 현륭원(顯隆園)에 합장(合葬)됩니다.

노론 집안의 딸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입궐한 여인

특히 헌경왕후는 궁중(宮中)의 비화(悲話)를 그린 자서전적(自敍傳的) 회고록(懷古錄), 곧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으로 인한 한() 많은 자신의 일생을 사소설체(私小說體)로 다룬 <한중록(恨中錄)>을 남겨,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과 함께 궁중 문학의 쌍벽을 이루고 있어 지금까지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문학작품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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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장조)의 첫째 아들, 정조의 친형

 

의령원懿寧園 (애기능)

 

 

 

의소세자(懿昭世子, 1750 ~ 1752), 1752, 경기 고양 200, 서오릉(西五陵)

 

의령원은 조선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장조)의 첫째 아들 의소세손의 묘소이다. 세손의 묘로서 장례절차며 치장에 격식을 갖추어 애기능이라 불렸다. 표석,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1, 그리고 문석인, 석마, 석호, 석양이 각 2구씩 세워져 있는데, 봉분 옆에 자리한 표석의 전면 큰 글씨와 후면의 음기는 모두 영조의 친필이라고 전해진다.

 

나란히 자리잡은 효창원과 의령원 

의소세손은 1752(영조 28) 3월 겨우 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의소(懿昭)라 하고, 그 해 512일 안현(鞍峴) 남쪽 기슭에 안장되면서 의소묘(懿昭墓)라 하였으나 1870(고종 7) 의령원으로 승격되었다. 의령원은 중앙여고 내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1949년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어, 현재 의령원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 부속건물로 추정되는 한옥 한 채가 남아 있는데, ‘동심사라 불리우며 중앙여고 배구부의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다. 

 

 

바로 효창원과 의령원이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앞에는 효창원, 바로 뒤에는 의령원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효창원은 제22대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 문효세자의 원(園)이며, 의령원은 3살의 나이로 요절한 제21대 영조의 아들 장조(사도세자)의 장남인 의소세손의 원(園)으로 큰 아버지와 조카가 나란히 잠들어 있는 모습입니다.

 

원래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에 있던 효창원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4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서울 효창공원은 그 일대가 효창원이 있던 자리였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입니다. 의령원 또한 1949년에 이장된 것으로 원래 서울시 서대문어 북아현동에 있었습니다.

 

현재 두 원(園)은 정면에 정자각이 아닌 재실이 세워져있습니다. 또한 곡장도 없으며 비석은 있으나 비석을 보호할 비각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몸부림을 쳤던 일제의 성의없는 행동이 효창원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의소세자 (懿昭世子,의소세손(懿昭世孫), 1750 ~ 1752)

 

의소세손은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의 소생으로 1750(영조 26) 8월에 출생하여 이듬해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1752(영조 28) 3월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의소라 하고, 그 해 512일 안현 남쪽 기슭에 안장하면서 의소묘(懿昭墓)라 하였으나 고종 7(1870) 의령원으로 승격되었다.

 

그 뒤 아버지 사도세자가 1899년 장종(莊宗)으로 처음 추존되었을 때, 의소세자(懿昭世子)로 격상되었고, 곧 장종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다시 추존되자, 의소태자(懿昭太子)로 역시 격상되었다. 능원은 의령원(懿寧園)이며, 조카인 문효세자의 묘소 효창원 앞에 자리하고 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