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밥 먹고 도시여행

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9 (2) 추존왕(追尊王)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 綏陵

草霧 2013. 8. 14. 16:23

 

 

 

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9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9

 

 

 

(2) 추존왕(追尊王)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 綏陵

 

 

수릉20100622-4.JPG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2) 추존왕(追尊王)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 綏陵

   

 

 

총명하여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나 세자로 갑자기 세상을 등지니

    

 

 

수릉 綏陵

 

 수릉20100622-4.JPG

 

익종 (翼宗, 이영, 1809 - 1830), 신정왕후, 1830, 경기 구리 193, 동구릉(東九陵)

 

 

추존왕 문조(文祖) 수릉 첫번째 작은이미지추존왕 문조(文祖) 수릉 두번째 작은이미지추존왕 문조(文祖) 수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동구릉 목록 순조(純祖)의 아들이자 헌종(憲宗)의 아버지인 추존왕(追尊王) 翼宗(이영 : 1809 - 1830)과 비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趙氏 : 1808 - 1890)의 수릉은 몇 차례 능지(陵地)가 옮겨지다가 현 동구릉(東九陵) 경내(境內)로 자리잡습니다. 세자(世子) 때 승하{헌종 즉위 후 익종으로 추존}한 익종(翼宗)20대 경종(景宗)과 계비(繼妃) 선의왕후(宣懿王后)를 모신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의릉(懿陵) 옆에 자리잡았는데, 헌종 12[1846]에 길지(吉地)로 옮기자는 논의에 따라 양주군(陽州郡) 용마산(龍馬山) 기슭으로 천장(遷葬)합니다.

 

그 후 철종(哲宗) 6[1855]에 현 위치인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 옆으로 다시 천장을 하면서 동구릉의 마지막 아홉 번째 능이 되었고, 이로 인해 東九陵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게 됩니다. 문조(文祖)라는 시호로 많이 불리는 것은 대한제국 성립 후 1899년에 황제(皇帝)로 추존(追尊)되면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라 칭한 것에 연유합니다.

    

22세의 나이로 요절(夭折)한 익종(翼宗)과는 달리 83세의 장수(長壽)와 권력의 정상에 있었던 신정왕후(神貞王后)는 고종(高宗) 27년에 승하해 수릉(綏陵)에 합장(合葬)을 합니다.

 18살에 급서한 효명세자 ‘문조’로 거한 대우를 받다 

추존왕 문조(文祖) 수릉 큰이미지수릉(綏陵)은 하나의 봉분에 혼유석 역시 하나만 마련되어 있어 마치 한 사람만을 위한 단릉처럼 보이지만, 문조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합장릉이다.

 

수릉 이전의 왕릉은 일반적으로 봉분 앞이 초, , 하계 3단의 높이로 나뉘어, 중계에는 문석인이, 보다 낮은 하계에는 무석인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수릉에서는 중계와 하계가 합쳐져 문석인과 무석인이 같은 공간에 배치된다.

 

이는 신분제도의 변화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상설제도는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따라 영조 때부터 따르게 되었다.

 

문석인은 금관조복에 얼굴이 길쭉하고 눈과 입술이 선적으로 가늘게 표현되었다. 어깨를 움츠리고 목을 앞으로 빼고 있는 형태에서 조선시대 후기 인물조각의 전형성을 볼 수 있다.

    

 

효명세자가 1830(순조 30) 승하하자 성북구 석관동 의릉 왼쪽 언덕에 세자의 무덤형식인 원()으로 능을 조영하고, 연경묘라고 하였다. 그 후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1835년 즉위하자 그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이라고 하였다. 1846(헌종 13)에는 풍수상 불길하다는 의논이 제기되어 천장하기로 하고, 현궁을 발굴하여 정자각에 봉안하였다. 그리고는 그 해 519일에 발인하여, 20일에 양주 용마산 아래로 천장하였다.

 

    동구릉-동구릉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1855(철종 6) 8월에 다시 능을 발굴하여 건원릉 좌측 언덕으로 천장하였다. 1890(고종 27)에는 춘추 83세로 승하한 신정왕후를 수릉에 합장하여 모셨다. 1899(광무 3)에는 익종은 문조익황제로, 신정왕후는 신정익황후로 다시 추존되었다.

   

3차례 천장 끝에 구리시에 자리잡은 수릉은 제례의 시작과 끝남을 알리는 배위(판위)가 홍살문 앞에 놓인 것이 특이하다. 배위의 위치는 후세에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홍살문 앞 네모난 판석이 깔린 곳이 판위다).

 

그 후 철종(哲宗) 6년[1855년]에 현 위치인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 옆으로 다시 천장을 하면서 동구릉의 마지막 아홉 번째 능이 되었고, 이로 인해 동구릉(東九陵)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게 된다. 문조(文祖)라는 시호로 많이 불린 것은 대한제국 성립 후 1899년에 황제(皇帝)로 추존(追尊)되면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라 칭한 것에 연유한다.

 

22세의 나이로 요절(夭折)한 익종(翼宗)과는 달리 83세의 장수(長壽)와 권력의 정상에 있었던 신정왕후(神貞王后)는 고종(高宗) 27년에 승하해 수릉(綏陵)에 합장(合葬)을 한다. 익종(翼宗)이 요절함으로 인해 외로운 일생을 보낸 반면에 국가 권력의 정상에 군림(君臨)하고 일생을 마친 점은 화려했다고 하겠다. 곧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도정권의 중심이었던 순조(純祖)의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승하하자[1857년, 철종 8년] 새로운 세도정권 세력으로 풍양조씨(豊壤趙氏)가 권력을 잡게 되는데, 결정적 요인은 헌종(憲宗)의 외척(外戚) 세력이 바로 풍양조씨였던 것이다.

 

효명세자(孝明世子)

풍양조씨 세도정권의 중심이었던 신정왕후는 철종(哲宗)이 후사(後嗣)없이 승하하자 철종을 이을 후계자 결정권을 쥐고 평소 친분이 있었던 종친(宗親) 이하응(李昰應)을 권력의 내부로 끌어들여 고종(高宗) 승계를 주도한다. 결국 어린 고종(高宗)을 대신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권력을 흥선대원군(興善大院君)에게 인계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희망, 촛불춤으로 지다

 

▲ 수릉은 동구릉 재실에서 가장 가까운 왕릉이다.

  

추존왕 익종(翼宗, 이영, 孝明世子, 1809 - 1830)) [문조(文祖)]

 

조선 후기 인물조각의 전형을 보여주는 수릉의 문무석인은 얼굴이 길쭉하고 눈과 입술을 선으로 정교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익종(翼宗)은 순조(純祖)와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의 슬하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났습니다. 4세 때[순조 12] 세자(世子)로 책봉되어 효명(孝明)의 시호(諡號)를 받고 1827[순조 27]에 왕명(王命)으로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는데, 민정(民政)에 힘써 어진 인재들을 등용하고 형벌(刑罰)을 삼가는 등 적극적인 왕권(王權)의 강화에 힘썼지만 안타깝게도 대리청정 4년만에 요절하고 맙니다. 결국 다시 세도정권(勢道政權)의 힘이 강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추존 황제 효명세자 문조(文祖)23대 왕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사이의 큰 아들이자 24대 왕 헌종의 아버지로, 1809(순조 9) 89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 1812(순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827(순조 27)에는 19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 어린 효명세자는 정조가 승하한 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였을 시기에 대리청정을 통해 강인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특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인재들을 고루 등용하였으며, 백성을 위하는 선정을 펼쳤다. 또한 실학파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교유하며 견문을 넓히고, 타문화 수용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원래 몸이 약했던 그는 아들을 얻은 이후 더욱 자주 의원에게 처방을 받아야 했고, 결국 1830(순조 30) 5622세의 젊은 나이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요절하였다.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으로 추대되고 고종 때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남녘 못에 잠긴 용이 있으니 / 구름을 일으키고 연기와 안개를 토하더라 / 이 용이 조화가 많으니 / 능히 사해의 물을 옮기리로다.

 

qwer_virapasas.jpg

위의「잠룡(潛龍)이라는 시는 추존 황제 문조가 세자 시절에 지은 것이다. 자신을 물속에 잠긴 용으로 표현한 것이 앞으로 강력한 군주로서 조선을 이끌어 나아갈 포부를 밝힌 듯하다. 실로 그는 세도정치에 시달린 아버지 순조의 희망이었으며, 대리청정을 하며 왕권을 강화하고,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한 결단력 있는 정책을 펼쳤다.

 

한편 효명세자는 자주 궁궐 밖을 미행하였는데, 어느 날 북촌 자하동을 지나다가 글을 읽는 낭랑한 목소리에 끌려 한 집에 당도하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규수였다. 세자는 그 자리에서 박규수의 할아버지 박지원이 지은 열하일기를 함께 보는 등 그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훗날 박규수를 등용할 것을 굳게 약속하고는 궁궐로 돌아왔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결국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22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서로 교유하며 문명을 떨친 둘 사이의 약속은 결국 훗날 효명세자의 부인인 신정왕후에 의해 실현되었다.

춤을 사랑한 익종

 

고독한 왕자의 안식처 기오헌과 의두각

이미지

효명세자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건물이 바로 기오헌(寄傲軒)과 의두각(倚斗閣)이다. 창덕궁 후원인 비원에 있는 17개 정자 가운데 기오헌과 의두각은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청해 지은 건물이다. 기오헌과 의두각이란 이름은 효명세자가 정조를 기대고 의지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으로 그의 의중이 보인다.

화려한 궁궐 건축물 중에서 극히 소박해 보이는 이 두 채의 건물 중 왼편이 기오헌이며 오른편이 의두각이다. 기오헌은 온돌방 하나와 작은 대청과 누마루로 구성된 집이며, 의두각은 한 사람 몸을 누일 수도 없는 정면 2간 측면 1간으로 구성된 극히 작은 집으로 단청이 없다.

효명세자가 독서와 사색을 하기 위해 자주 들렀던 이곳은 북향집이며 기오헌과 의두각 뒤에 규장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왕세자답지 않게 지극히 소박한 이런 건물에 와서 독서를 즐긴 효명세자는 기오헌과 의두각에서 정조를 생각하면서 난국을 타개할 정책에 골몰하기도 했으리라.



효명세자는 학문을 좋아하던 왕자답게 12권 6책으로 구성된 경헌집(敬軒集) 6권과 학석집(鶴石集) 등 문집을 남겼다. 효명세자가 죽자 효명세자와 교유하던 서유영과 박규수 등 인재들은 과거를 포기하고 칩거에 들어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가 세상을 떠났으니 뜻을 펼 수 없다는 낙심과 세상에 나가기 싫은 선비의 곧은 마음이었으리라. 시를 잘 짓고 현재 남아있는 궁중무용까지 창작했던 효명세자에게 자유로운 예술가다운 방랑자의 피가 흐르는 것일까. 살아서는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그의 끼를 달랠 수 없기에 남달리 궁궐 밖으로 미행하기를 즐겼다. 그 때 만난 사람이 박규수였으며 그들은 친구 이상의 우정과 학문을 교류했다.

다재다능했고 예술을 이해했으며 짧은 기간이지만 단호하고 개혁적인 정치를 펼쳤던 효명세자는 죽어서 이렇게 3번이나 방랑한 끝에 동구릉에 잠들었다. 헌종의 외척인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던 신정왕후의 뜻과는 달리 안동 김씨와 쌍벽을 이루며 백성의 민원은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확장에만 힘써 결과적으로 혼탁한 정치를 가속시켰고 조선은 몰락의 길로 치달아 갔다. 왕으로 등극하지는 못했지만 효명세자가 통치했던 동안이 순조의 왕권이 가장 강화됐던 시기였다.

▲ 기오헌과 의두각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관련사진관련사진

 

 

왜 왕릉 주변에 갈비집인가?
왕실 제사는 소 잡는 날 … 백성들과 함께 요리
수릉 기신제 진설(상차림) 모습. 왕실 제사는 생고기를 올리는 것이 통례로, 육제향에는 일부만 올리고 나머지는 능역 관리자나 주변 수호군, 관아 등에 보내 백성과 나누게 했다.

지금도 왕릉 주변에는 홍릉갈비, 태릉갈비, 수원(융릉)갈비 등이 자리해 인기를 끌고 있다. 왜일까. 왜 왕릉 주변에 갈비집이 모여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그만한 역사와 유래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평시 소를 잡는 걸 금기시했다. 소는 농사를 돕는 큰 일꾼이었기 때문이다. 단, 왕이 친행해 제사를 올리는 특별한 날에는 가능했다. 왕실 제사는 일반 제사와 달리 생고기를 올리는 것이 통례로 육고기는 우성(牛腥·소 생고기)과 양성(羊腥·양 생고기) 그리고 시성(豕腥·돼지 생고기)의 각 부위를 몇 점씩 올렸다. 물론 고기를 삶는 솥(鼎)도 챙겼다. 이때 제향에는 일부만 올리고 나머지는 능역 관리자나 주변 수호군, 관아 등에 보내 백성과 나누게 했다. 이 과정에서 나온 대표적 요리가 왕릉갈비다. 당시 용기가 부족했으므로 백성과 나눌 갈비를 새끼줄에 동여매 나누어 가지고 가 요리를 한 것.


세계유산위원회는 조선 왕릉을 세계유산에 올리면서 능역의 보존과 세계인이 향유할 관광자원화를 위한 계획을 권고한 바 있다. 이참에 왕릉을 대표하는 먹을거리의 보존과 개발도 병행돼야 한다. 제향에 올리는 오색과일, 전, 탕, 다과, 두부 등의 세계화도 이루어져야 지속적인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입증받을 수 있다. 한편 빠질 수 없는 술(제주, 왕주)과 술병, 술잔(爵) 등의 복원과 이것들의 상용화를 위한 관광상품 개발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들이 바로 5000년 문화민족의 고급 먹을거리였다.

 

 


관련사진관련사진

순조(純祖) 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결혼을 한지 7년이 다되어 가던 1809년(순조 9) 8월 9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아들을 낳았다. 순조는 그 아들을 1812년 7월 6일에 왕세자로 책봉을 하고, 1819년 10월 13일에는 풍양조씨(豊壤趙氏)인 판서 만영(萬永)의 딸에게 장가를 들게 하였다. 1827년(순조 27) 2월 18일부터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던 왕세자가 1830년 5월 6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병으로 승하하였다. 능동(陵洞)의 도장곡에 장지를 정하여 조성을 하던 중 옛 무덤의 흔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어 양주 천장산(天藏山) 자락에 장지를 다시 정하였다.

 

그 해 8월 4일에 동향(酉坐卯向)으로 장사를 지내고, 시호를 효명(孝明)으로 묘호는 연경(延慶)으로 하였다. “내룡이 삼각산에서부터 나누어져 전지(田地)를 뚫고 골짜기를 지나 별도로 성봉하여, 기세는 마치 말이 달리는 것 같고, 모양은 용이 내려오는 것같이 더욱 벗겨지고 바꿔지면서 그 변화가 극도에 이르러서는 다시 천장산을 만들어 문득 구천(九天)에 호랑이가 날아가는 형국을 이루었으며, 혈성이 풍후하며 청룡과 백호가 겹으로 감싸고, 주변 산은 손을 마주 잡고 조회하는 듯하다.”고 풍수적으로 연경묘를 평가 하였었다.

 

관련사진1835년에 왕위에 오른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憲宗)은 효명세자를 익종(翼宗)으로, 묘호를 수릉(綏陵)으로 추존을 하였다. 헌종은 1846년(헌종 12) 윤5월 20일에 “수릉의 국세가 산만하여 마음이 늘 불안하다.”면서 양주의 용마봉(龍馬峰) 아래 언덕(癸坐丁向)으로 천장을 하였다. 다시 1855년(철종 6) 8월 26일에는 “큰 비가 내리면 무덤 앞이 범람한다.”는 이유로 건원릉 왼쪽 자락으로 2번째 천장을 하였다. 당시에 철종은 “복지(卜地)가 진실로 좋은 곳이어서 이에 여덟 능의 영혼이 달빛 아래 노니는 자리이니, 신리(神理)와 인정에 거의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또 황형의 효성에 감동된 소치이니, 황형께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도와준 것입니다.”고 표현하였다.

 

1890년(고종 27) 4월 27일 효명세자빈(神貞王后, 일명 趙大妃)이 경복궁 흥복전에서 승하하자, 고종은 신정왕후의 뜻을 받들어 수릉의 국내를 살펴보도록 지시하였다. 당시에 상지관들은 수릉을 “주산에서 뻗어 나온 내룡은 변화무쌍하며, 좌우의 청룡과 백호는 주인을 호종하듯 잘 감싸고, 혈판은 토층이 두텁고 앞이 둥글어 아름다우며, 혈판 앞의 명당은 평탄하고, 안산은 주인을 맞이하는 듯하며, 명당수가 혈판을 잘 감싸 도는 길지(吉地)다.”라고 평하였다. 수릉이 대체적으로 아름답고 장지로서 문제가 없는 곳이라는 설명을 들은 고종은 신정왕후를 수릉에 합장을 하도록 지시하여, 그 해 8월 30일에 남향(壬坐丙向)으로 안장하였다.

 

수릉은 동구릉을 들어서면서 재실을 지나 첫 번째로 만나는 오른쪽에 있는 능으로 마치 어린아이가 외출한 부모님을 동구(洞口) 밖으로 마중 나와 기다리는 느낌을 주는 바로 그 무덤이다. 동구릉의 왼쪽 산줄기에서 뻗어 나온 내룡은 현릉(顯陵, 문종과 현덕왕후 능)의 내청룡으로 과협처를 만드는 등 변화하면서 왼쪽으로 방향을 돌려 혈을 만들었다. 과협이 다소 긴 영향으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내룡이 혈을 만들기 전에 넓게 퍼지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순한 어린용의 성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대리청정까지는 하였는데 왕위에 등극하지 못한 효명세자의 아쉬운 마음이 잘 나타나는 곳이다. 효명세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2번씩 옮겨 다녀야 하는 우여곡절 끝에서야 주인의 성격에 걸 맞는 곳에 묻힐 수 있었다.

 

 

또 “무덤 앞에 있던 커다란 나무를 베어 버리니 앞 산 언덕에 자신의 아들인 헌종과 며느리의 무덤인 경릉(景陵)이 보여 더 할 나위 없이 행복한 자리가 되었다.”고 국조보감에 기록되어 있다. 얼마만큼 자신의 가족 곁에 잠들고 싶어 했는지를 표현해주는 내용이다. 실제로 수릉에서는 남서쪽으로, 경릉에서는 북동쪽으로 서로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고종은 1899년 11월 21일에 익종을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신정왕후를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로 다시 추존하여, 수릉은 추존된 문조와 신정왕후의 무덤으로 불린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왕후 조씨는 70년 이상 왕실 주물러

 

관련사진관련사진

()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 趙氏, 1808 - 1890)

수릉은 왕과 왕비의 합장릉이지만 봉분 앞 혼유석을 하나만 마련해 단릉처럼 보인다.

 

풍양조씨(豊壤趙氏) 풍은부원군(豊恩府院郡) 조만영(趙萬永)의 딸로 태어난[순조 8] 신정왕후(神貞王后趙氏)는 순조 19[1819]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어 슬하에 헌종(憲宗)을 생산합니다.

 

신정왕후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익종(翼宗)이 요절함으로 인해 외로운 일생을 보냈지만, 그 보다는 국가 권력의 정상에 군림(君臨)하고 마친 일생이 더욱 화려하다 할 것입니다. 곧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도정권의 중심이었던 순조(純祖)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승하하자[1857, 철종 8] 새로운 세도정권 세력으로 풍양조씨(豊壤趙氏)가 권력을 잡게 되는데, 결정적 요인은 헌종(憲宗)의 외척(外戚) 세력이 바로 풍양조씨였던 것입니다.

    

풍양조씨 세도정권의 중심이었던 신정왕후는 철종(哲宗)이 후사(後嗣)없이 승하하자 철종의 후계자 결정에 권한을 쥐고 평소 친분이 있었던 종친(宗親) 이하응(李昰應)을 권력의 내부로 끌어들인 고종(高宗) 승계를 주도합니다. 결국 어린 고종(高宗)을 대신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권력을 흥선대원군(興善大院君)에게 인계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신정익황후 조씨는 1808(순조 8) 126일 조만영의 딸로 태어났으며, 12세 때 효명세자와 가례를 올려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효부라는 칭찬을 듣던 세자빈 조씨는 1827(순조 27) 헌종을 낳았고,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올라 죽은 남편인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자 왕대비가 되었다. 1857(철종 8) 순종비인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그리고 1863(철종 14) 철종도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실의 권한은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가 쥐게 되었다.

 

왕위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 이하응과 손을 잡고, 흥선군의 둘째 아들 고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또한 안동 김씨 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하여 고종을 아들로 삼아 철종이 아니라 익종의 뒤를 잇게 했다. 그리고 내전에 고종의 옥좌를 마련하고 자신은 그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며, 명성황후가 정치에 참여하기 전까지 흥선대원군과 함께 정국을 주도했다.

   

관련사진관련사진

 

여기 수릉도 서오릉의 경릉처렁 여성상위능입니다.

대왕대비 조씨는 국가가 여러 재난에 시달리자 눈물을 흘리며 죽지 않은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 대왕대비는 1890(고종 27) 417일 춘추 83세로 경복궁 흥복전에서 승하하여, 그 해 830일 수릉에 합장했으며, 1899(광무 3) 1117일에 신정익황후로 추존되었다.

 

관련사진효명세자가 일찍 승하함으로 인해 왕비로서의 영화도 누려보지 못하고, 안동김씨의 세도에 눌려 지내던 신정익황후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과 함께 손잡고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후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의 권력을 거머쥐었다. 꽃문양 담으로 유명한 경복궁의 자경전은 재건된 것이기는 하나, 흥선대원군이 그녀를 위해 1867년 지은 건물이다.

 

또 현재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에는 신정익황후의 40세 생신을 축하하는 잔치모습을 그린 8폭 병풍이 소장되어 있다. 8폭 중 7폭은 전각, 나무, 산수를 채색하여 그렸고, 마지막 폭은 도총관, 조기영 등 9명의 관등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도화서의 일류급 화원들이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1847(헌종 13) 정월 초하루 창덕궁 인정전 앞뜰에서 거행된 잔치에는 400여 명이 참석했는데, 관직에 따라 서로 다른 관복을 입은 문무백관과 행사에 참여하는 인물 그리고 창검을 들고 도열해 있는 군관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해 당시 궁중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