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8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능 (陵) - 8
(4) 제22대 정조(正祖, 1752 - 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孝昌園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기 (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기,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기(능40, 원14, 묘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능3, 원4, 묘5)입니다 .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황제릉(皇帝陵) 2기(基) 왕릉 35기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왕 ‘함길도 8릉’
2. 왕조, 문을 열다
제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제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제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제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제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제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제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제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제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제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제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제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제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제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제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제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제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제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제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제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제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제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제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제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제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4) 제22대 정조(正祖, 1752 - 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孝昌園
효성 극진하고 어진 성군으로 조선의 문예부흥을 이끌다
정조(正祖, 이성, 1752-1800, 재위 24년), 비(妃)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 金氏, 1753–1821), 1800년, 경기 화성 206호, 융건릉(隆健陵)
正祖(이성 ; 1752 - 1800, 재위 24년, 본래 시호(諡號)가 정종(正宗)이었으나 고종대[광무3년, 1899년]에 정조(正祖)로 추존됨)와 비(妃)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金氏 ; 1753 - 1821)의 건릉은 본래 정조(正祖) 승하 후 친부(親父)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현릉원(顯陵園; 후에 장조(莊祖) 융릉(隆陵)으로 개칭) 동쪽에 안장(安葬)되고자 했던 유언에 따랐으나 풍수학(風水學)으로 나쁘다고 해서 천장(遷葬)의 논의가 있던 차에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승하[순조 21년]하자 현재의 위치인 융릉(隆陵) 서쪽으로 이장(移葬)하고 함께 합장(合葬)을 하게 됩니다.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합장릉이지만 융릉과 같이 혼유석이 하나이다.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을 두른 차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융릉의 상설과 흡사하다. 기단부가 향로와 같은 형태로 8면에 둥근 원을 그려 매난국의 무늬를 팔면에 새긴 장명등도 융릉과 같다. 또한 등신대에 가까운 문석인과 무석인의 조각은 매우 사실적이며, 무석인은 금관조복을 입고 있다.
19세기 왕릉 석물 제도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융릉과 건릉은 정조 때의 문운이 융성하던 기운과 양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능원 아래에 정자각이 있고, 정자각 동쪽에 비각이 세워져 있다. 6.25 당시 무너졌던 것을 1992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비각 안에는 1900년(광무 4) 고종이 어필로 ‘대한 정조선황제 건릉 효의선황후 부좌’라고 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정자각 서쪽에 주춧돌만 있던자리에 2002년 수라간을 복원하여 세웠다. 그리고 정자각 남쪽 참도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으며, 융릉과 마찬가지로 참도 좌우에 정자각까지 박석을 깔아놓은 것이 다른 왕릉에 비하여 특이하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49세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21년 후인 1821년(순조 21) 3월 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따라서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고 하자 훗날 딸이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됨으로써 영안부원군에 오르게 되는 영돈령부사 김조순이 현재의 건릉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길지를 찾아 천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길지를 물색한 결과 현륭원 서쪽의 산줄기를 찾아냈으며, 1821년(순조 21) 정조의 능을 현 위치인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효의왕후의 능호는 정릉이라고 하였다가 위와 같이 건릉으로 합장하게 됨에 따라 능호를 따로 쓰지 않게 되었다.
능제(陵制)는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은 없이 난간석(欄干石)만 돌리고 상석(床石) 하나에 8각의 장명등(長明燈)과 망주석(望柱石)을 설치하였으며 문무인석(文武人石)과 수석(獸石: 석호(石虎),석양(石羊),석마(石馬))들은 왕릉(王陵)의 예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특히 정자각(丁字閣) 앞의 참도(參道)가 넓게 박석(薄石)으로 깔려있는 모습은 정조(正祖)의 업적을 느끼게 하는 웅장함이 있습니다.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한 왕의 능 행차
『시흥어행렬도』화성원행도방의 8폭 중 일부 그림이다. 정조는 이러한 행차를 통해 백성과 소통하였다.
『정조실록』 1792년(정조 16) 윤 4월 7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장용영(壯勇營)의 돈 4만 냥을 경기 감영에 꿔주어 현륭원(顯隆園) 화소(火巢) 안에 있는 백성들의 전답 값을 보상해주고 그 나머지로는 임금이 행차할 때 외탕고(外帑庫)의 경비 및 나무 심는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정조실록』 1792년(정조 16) 1월 24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왕이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하는 도중 갈현(葛峴)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서 초상에 앉아 마을 노점의 노인들을 불러서 고통스러운 일을 물어보았다.
『정조실록』 1793년(정조 17) 1월 12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왕이 현륭원을 뵈러 가는 길에 관왕묘(關王廟)에 들렀다. 과천(果川)에서 주정(晝停)하였다. 인덕원(仁德院) 들녘을 지나다 길가의 부로(父老)들을 불러서 위로하며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저녁에는 수원 행궁에 머물렀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수원 화성에 자주 행차했던 정조의 효성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조의 능행길은 단순한 참배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위의 기록이 말해주듯이 정조는 능행길에서 백성들과 소통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정조는 궐 밖 행차 중에 3,355건의 상언과 격쟁을 처리하였다. 한 번 행차마다 약 50건의 민원을 처리한 셈이다.
조선 후기의 많은 왕들이 이를 행했으나, 정조는 특히 상언과 격쟁을 처리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이는 정조의 화성행차가 단순히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보여 주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행차가 지나가는 시흥, 과천, 화성 일대 주민들의 민정을 직접 시찰, 민원을 해결하는 기회로 활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조의 화성 행차 이야기, 한양에서 화성까지, 정조의 화성 행차
1. 비극을 딛고 일어선 위대한 임금 정조는 조선 22대 임금으로서 위대한 임금으로 칭송 받는 인물이다. 1752년(영조 28)에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나 국왕의 운명을 받았지만,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1776년(정조 1)에 영조가 서거함으로써 당쟁의 와중에서 어렵게 25세의 나이로 국왕에 즉위하여, 수많은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2.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달래는 화성 행차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花山)으로 이장한 후 묘를 현륭원(顯隆園)으로 승격시켰으며,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아버지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 화성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때마다 화성에 머물며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고, 한 차례의 행차마다 수십 건의 민원을 처리하였다.
3. 8일간의 화성 행차 기록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1795년(정조 19)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기 위해 8일간의 화성행차를 했던 기록을 담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1795년(정조 19) 윤2월 9일 아침 화성 행차에 나섰다. 1km에 달하는 현란한 깃발과 연주가 어우러진 국왕의 행렬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출발하여 보신각 앞길을 지나 숭례문을 통과한 뒤 노량진 배다리에 이르렀다. 배다리를 건너는 동안에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백성들은 국왕의 행렬을 축제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이 행차를 위해 6,000여 명의 사람과 788필의 말이 동원되었는데, 국왕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24개 처의 요지에 배치된 수천 명의 척후 복병까지 계산하면 1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된 대규모 행사였다.
4. 화성에서 치러진 화려한 회갑연 이 긴 행렬이 도착한 화성에서는 성대한 회갑연이 열렸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은 조선시대 왕실 행사 중 가장 크고 화려했던 행사로 궁중 문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회갑 잔치는 오전 9시 45분부터 화성 행궁의 주 건물인 봉수당에서 거행되었다. 혜경궁 홍씨의 내외친척들도 초대됐다.
『화성성묘진배도』1795년 8일간의 화성행차의 과정을 그린 8폭 병풍 그림이다. 이 그림은 중화성에 도착하여 향교에서 성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명이다.<호암미술관 소장>
내빈이 13명이었고, 외빈이 69명이었다. 정조와 신하들은 차례로 혜경궁 홍씨에게 술잔을 올리며 천세를 불러 축하했고, 그 때마다 음악과 정재(呈才)가 공연됐다. 한양과 화성유수부 등에서 선발된 33명의 여령(女伶)들이 다양한 궁중무용을 추었다.
5. 화성 행차를 통해 보인 개혁 의지 그런데 정조는 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도성이 아닌 화성에서 열려고 했을까? 그리고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끄는 정조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날 정조의 화성 행차는 실로 대규모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행렬이었다. 행렬에 동원된 3,000여 명의 군사들은 정조가 직접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는데, 장용영의 외영은 바로 화성에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장용영과 화성은 군제개혁의 상징이었고, 국왕의 정치개혁을 뒷받침하는 군사력의 상징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의지를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1800년(정조 24) 49세의 젊은 나이에 돌연 세상을 떠남으로써, 조선을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미완의 개혁정치가’로 역사에 남았다.
화성 행궁 이야기
1. 정조의 임시 처소로 건립된 행궁 화성 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할 때에 머무는 임시 처소이자 수원 신읍치의 관아로서 건립되었다.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이장하고 그곳에 있던 수원부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함에 따라, 수원부의 관아를 옮겨짓고 행궁의 역할을 겸하게 하였다. 1793년(정조 17)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이를 화성 행궁이라 하였다.
2. 대대적인 확장을 거듭한 화성 행궁 화성 행궁은 1789년(정조 13) 장남헌(壯南軒 : 봉수당의 옛이름)을 중심으로 그 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인 1790년(정조 14) 5월에 약 360여 칸의 건물들이 완성되었다. 1794년(정조 18)부터 화성 성역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화성 행궁의 대대적인 확장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맞추어 주요한 건물들이 건축되었고, 화성성역이 끝날 무렵에는 모두 620여 칸에 이르는 건물들이 조성되었다. 또한 화성 행궁정리수성향곡(華成行宮整理修成鄕穀)이라는 별도의 제도를 두어 관리, 운영하게 하였다.
3. 화성에 대한 정조의 특별한 포부 화성 행궁은 여러 차례의 증축을 통해 경복궁 다음가는 궁이라 할 정도의 규모와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그것은 현륭원 천봉 이후 11년 간 12차에 걸쳐 화성에 행차할 만큼 정조의 능행이 정례화 되었고 이때마다 화성 행궁에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성이 정조의 특별한 포부를 담은 도시였다는 점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4. 강력한 왕권 구축과 개혁을 향한 의지 화성 신도시 건설의 직접적인 계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화성 신도시 건설은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상업이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부강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고자 하는 정조의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사업으로 강력한 왕권 구축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아울러 정조는 세자가 15세가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이 되어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화성에 머물려고 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각종 문헌에 등장하기도 한다.
5. 화성 행궁에 남겨진 미완의 계획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화성과 행궁에 대한 정조의 계획들은 모두 미완의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1801년(순조 1) 행궁 옆에 정조의 영정을 모시는 화령전(華寧殿)이 건립되었고, 이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현륭원과 정조의 능인 건릉(建陵)에 전배하고 화령전에 참배하는 원행(園行)을 계속하면서 화성 행궁은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행궁으로서의 기능을 이어가게 되었다.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를 합장한 동릉이실(同陵異室)이다. 원래 생부 장헌세자의 현릉원(顯陵園) 동쪽 언덕에 있었던 것을 순조 21년(1821) 효의왕후 김씨가 69세로 승하하자, 정조의 능역이 풍수지리상 불길하므로 길지를 찾아 천장해야한다는 논의에 따라 현재의 위치인 현릉원 서쪽 언덕에 이장하여 효의왕후와 합장한 것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가 다른 능에 비하여 넓게 박석을 깔아 놓은 것이 특이하다.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그 밖의 모든 상설은 융릉의 예를 따랐으며, 합장릉인데도 상석을 하나만 놓았고 장명등은 융릉의 것과 같이 화문이 새겨져 화려하다. 문무석의 조각이 극히 사실적(寫實的)이고 안정감이 있는 수작(秀作)이며, 문관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입고 있다. 융건릉은 능석물 제도의 새로운 표본을 제시하였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참화를 당한 후 왕세손에 책봉되어 25세 때,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며 선왕의 뜻을 이어 탕평정치(蕩平政治)를 하고 왕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까지 하였으나 정치에 뜻이 없어 홍국영에게 정치를 맡기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왕실 연구기관인 규장각(奎章閣)을 두어 국내의 학자들을 모아 경사(經史)를 토론케 했으며, 활자(活字)를 개량하여 인쇄술을 발전시켜 많은 서적을 간행(刊行)한다. 특히 청(淸)나라 고증학(考證學)의 영향을 받은 실학(實學)을 크게 발전시켜 근대(近代) 문예부흥(文藝復興)을 이루었으나, 한때 천주교(天主敎)의 유입을 막기 위해 청으로부터 들어오는 서적 구입을 막은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이 실학사상가(實學思想家)들이 어느 정도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고 왕조(王朝)의 지배 질서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였으나 천주교(天主敎)가 전래됨으로 인해 변화를 두려워한 보수세력(保守勢力)의 반발을 야기(惹起)시키는데, 정조(正朝) 승하 후 순조(純祖)의 즉위와 함께 단행된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커다란 반격을 가한 보수 세도(勢道) 정권이 이후 60여년을 이어가게 된다.
이와 함께 조선조 후기의 문화적 황금기(黃金期)를 이룬 정조(正祖) 자신의 심정은 친부(親父) 사도세자(思悼世子[莊祖])의 참혹한 화난(禍難)에 대한 원한(怨恨)으로 인해 평생 우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정조는 영조(英祖)의 명으로 후사(後嗣)가 없이 요절(夭折)한 백부(伯父) 효장세자(孝章世子: 사도세자의 형)의 계통을 이어 양자(養子)로 올려지게 되어 즉위 후에 효장세자를 추존(追尊)해 진종(眞宗)으로 올리게 되는데, 이로 인해 생부(生父)인 사도세자는 정조(正祖) 당대에는 추존이 되지 못하고 고종대(高宗代)에 가서야 장조(莊祖)로 추숭(追崇)된다.
한편 생부인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시절에 갖은 위험속에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정조를 세손 때부토 보호해 온 사람이 홍국영(洪國榮)이었다. 홍국영이 영조 말년 세손의 승명대리를 반대하던 정후겸, 홍인한, 김구주 등을 탄핵하여 실각시키고 1776년에도 세손을 반대 모해하려는 홍상간, 홍인한, 윤양로 등의 모역을 적발하여 처형시켰기 때문이다.
그 공으로 정조의 총애를 입어 정조가 즉위하면서 도승지 겸 숙위대장에 임명되어 왕의 신변을 보호케 하는 한편 모든 정사는 상주(上奏)와 결정이 그를 통하도록 하니 이때부토 홍국영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국가의 대신.원로 등이나 서료(庶僚)들까지도 대궐에 들어가면 국영의 숙위소(宿位所)에 들어가서 정치를 논의하였으며, 국영의 위세는 왕을 모욕할 정도였다. 그러나 뒤에 정조는 여론의 귀추와 승지 김종수(金宗秀)의 진언을 받아들여 국영의 벼슬을 빼앗고 강릉으로 추방, 거기서 3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으니 그의 세도는 불과 5년을 못 미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실각할 때까지 도승지.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자주 자립의 나라를 지향한 왕
정조(正祖, 이성, 1752 - 1800, 재위 24년) 조부(祖父)였던 영조(英祖)의 대를 이어 25세의 왕성한 나이에 왕위(王位)에 오른 정조(正祖)는 18세기를 마감하는 24년간의 재위(在位) 기간 동안 선왕(先王)인 영조가 마련한 중흥기(中興期)를 완성시키는 많은 업적을 이룹니다.
즉위 직후부터 선왕의 뜻을 이어 왕실(王室)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할 정도로 탕평정치(蕩平政治)를 계승해서 행하고 규장각(奎章閣)을 두어 왕실(王室) 연구기관(硏究機關)으로 학자들을 모아 경사(經史)를 토론케 했으며, 활자(活字)를 개량하여 인쇄술을 발전시켜 많은 서적을 간행(刊行)합니다. 특히 청(淸)나라 고증학(考證學)의 영향을 받은 실학(實學)을 크게 발전시켜 근대(近代) 문예부흥(文藝復興)을 이루었으나, 한때 천주교(天主敎)의 유입을 막기 위해 청으로부터 들어오는 서적의 수입을 막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실학사상가(實學思想家)들이 어느 정도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고 왕조(王朝)의 지배 질서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였으나 천주교(天主敎)가 전래됨으로 인해 변화를 두려워한 보수세력(保守勢力)의 반발을 야기(惹起)시키는데, 정조(正朝) 승하 후 순조(純祖)의 즉위와 함께 단행된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커다란 반격을 가한 보수 세도(勢道) 정권이 이후 60여년을 이어가게 됩니다.
정조 어필 파초도이와 함께 조선조 후기의 문화적 황금기(黃金期)를 이룬 정조(正祖) 자신의 심정은 친부(親父) 사도세자(思悼世子[莊祖])의 참혹한 화난(禍難)에 대한 원한(怨恨)으로 인해 평생 우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현륭원(顯隆園)을 수원부(水原府) 화산으로 옮기고 매년 배알(拜謁) 행차를 하며, 왕조 초기의 도성(都城) 축성, 흥선대원군 시절의 경복궁(景福宮) 재건(再建)과 함께 조선 3대 토목공사(土木工事)로 일컬어지는 수원성[화성(華城)]을 축조하고 소경(小京:제2도읍지)으로 승격시키는 등의 일들이 실제 생부(生父)에 대한 단순한 회한(悔恨)의 발로(發露)라기 보다는 개혁의지가 강했던 정조의 보수세력 견제와 실학적(實學的) 정치세력의 추구를 위해 행해진 것으로 봄이 마땅할 것입니다.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정조는 영조(英祖)의 명으로 후사(後嗣)가 없이 요절(夭折)한 백부(伯父) 효장세자(孝章世子: 사도세자의 형)의 계통을 이어 양자(養子)로 올려지게 되어 즉위 후에 효장세자를 추존(追尊)해 진종(眞宗)으로 올리게 되는데, 이로 인해 생부(生父)인 사도세자는 정조(正祖) 당대에는 추존이 되지 못하고 고종대(高宗代)에 가서야 장조(莊祖)로 추숭(追崇)됩니다.
정조는 장헌(사도)세자(훗날 장조로 추존)와 혜경궁 홍씨(훗날 경의왕후로 추존)의 둘째 아들로, 1752년(영조 28) 9월 22일 창덕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1759년(영조 35) 8세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762년(영조 38) 2월 가례를 올렸으며, 그 해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1764년에는 그에게 왕위 계승의 명분을 주기 위해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삼았다. 1775년(영조 51)부터는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으며, 다음 해 3월 10일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후 정조는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된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상하였으며, 아울러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 일당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드용하였으며, 임진자 등을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기하고, 『증보동국문헌비고』등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이론이 중시되는 학문에 치우치지 않고, 실학을 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의 문예 부흥기를 가져왔다. 가난한 백성의 구제를 위해 자휼전칙을 공포하고, 제도 개편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많은 업적을 남긴 정조는 1800년(정조 24) 6월 28일 49세의 나이로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정조 14)에서 1795년(정조 19)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1796년(정조 20)에 화성을 축성한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576칸 규모로 건립하였으며, 그 전까지는 1789년(정조 13) 수원읍치를 화산에서 팔달산으로 옮기면서 관아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행궁으로 고쳐 지은 후에도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복장을 갖추지 않아 파면된 관리들 서민 여인도 90세가 되면 관직과 작위를 받았다 천민과 사족의 관계 단군의 묘소를 보호하라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의 꿈을 펼친 수원 화성과 행궁 정조와 효찰 대본산 용주사 온 세상을 비추는 달이 되고자 했던 정조
정조(正祖)는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빈홍씨(惠嬪洪氏) 사이에서 1752년(영조 28) 9월 22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영조(英祖)가 자신을 너무 닮았다고 좋아하면서 당일 날 원손으로 삶았고, 1759년 2월 12일에 왕세손으로 책봉하였다. 1762년 2월 2일에 청풍부원군 김시묵(金時默)의 딸과 혼인을 하였으나 그 해 윤 5월 21일에 아버지가 승하하자 7월에 세손궁(世孫宮)을 동궁(東宮)으로 칭하니 사실상의 왕세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1764년(영조 40) 2월 24일 왕명으로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가 되어 1776년 3월 10일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큰아버지인 효장세자의 승하로 아버지가 왕세자가 되었고, 형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이 죽어 자신이 왕세손이 되었는데, 아버지가 또 승하하는 바람에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 22대 왕위에 올랐다가 1800년 6월 28일 창경궁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였다.
솔깃한 음모론, 정조 독살설
영웅사관에 기대어 절대계몽군주의 개발독재를 용인하는 ‘정조신화’ 전통적 정치이념인 ‘붕당정치’를 파괴한 절대왕정이 사대부보다 보수적
승하를 하던 해 봄에 아버지 무덤에 참배를 갔다가 수원에 사는 풍수가의 추천으로 융릉(隆陵)의 왼쪽 언덕아래 옛 군기고(軍器庫)의 터를 살피려 하였으나 숲이 너무 우거져 분간을 할 수가 없어 훗날 자세히 살피기 위해 푯말을 세워두라고 지시를 하였다. 그러나 다시 살피지 못하고 승하를 하였는데, 간신배들이 정조가 그 자리를 자신의 수릉(壽陵) 터로 정하였다고 우기는 바람에 그 곳에 11월 6일에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묻히게 되었다. 당시에 대신들은 용혈사수(龍穴砂水)가 더할 수 없이 좋고 아름다워 실로 최상의 대길지라고 평하였었다. 그러나 1821년 3월 9일 정조 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승하를 하자 순조(純祖)의 장인인 영돈녕부사 김조순(金祖淳)이 장지와 관련된 건릉(健陵)은 문제가 많다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당시에 김조순은 송나라의 효종이 승하한지 몇 년이 지나도록 무덤 자리를 정하지 못하자 주자(朱子)가 이에 따른 문제를 지적해 영종에게 올린 글인 산릉의장(山陵議狀)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여 건릉을 풍수적으로 분석하였다.
“무덤자리가 좋지 못할 경우 반드시 샘물, 땅강아지, 개미, 바람 등이 그 안을 해치게 되어, 죽은 이의 형체와 정신을 불안하게 하고 자손들도 사망하여 후손이 끊어지는 근심이 있다. 그런데 건릉은 산기슭이 약하여 웅장하게 꿈틀거리는 것이 없고, 묘역이 높은 것은 오로지 보충해 쌓은 것이므로 질고 습하여 사철 내내 마르지 않고, 가로로 떨어진 줄기가 도움이 없이 고단하게 내려가 오른쪽은 닿아서 높고 왼쪽은 기울어져서 푹 꺼졌고, 청룡과 백호가 갖추어지지 않고 안산(案山)이 참되지 않는가 하면, 독성(禿城, 앞산)이 높이 솟아서 바위가 쫑긋쫑긋 서 있고, 넓은 들판이 바로 연하고, 큰 시내가 바로 흘러 달아나니 능의 잔디가 자주 무너지고, 습한 곳에서 벌레가 생기어 서식하는 것은 다만 미세한 근심입니다.”라고 상소를 하자 순조 역시 건릉의 문제점에 대해 평소에 효의왕후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음을 내비치면서 남공철(南公轍)을 천릉도감 총호사로 삼아 천장을 추진하였다.
건릉의 천장 후보지에 대해 대신과 상지관들은 “수원의 옛 향교 터는 산맥의 형세가 웅장하고 존엄한 가운데 또 아름답고 곱습니다. 그리고 거기다 청룡과 백호가 잘 감싸 바람을 막아주고, 혈성이 뚜렷하며 수구(水口)가 막히고 조회(朝會)하는 산과 안산(案山)이 모여들었는데 수풀 사이에 아름다운 기운이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으니 이는 최상의 길지입니다.”라고 추천사유를 밝혔다. 융릉의 우측 언덕이기도 한 옛 향교 터에 남향(子坐午向)으로 장지를 조성하여 1821년(순조 21) 9월 13일에 정조를 옮겨 모신 옆자리에 같은 날 효의왕후를 장사지내고 능호는 건릉이라 하였다. 정조의 옛 무덤 자리에서는 김조순이 상소문에서 우려한 대로 광중에 물이 가득 차 있었을 뿐 아니라, 관이 움직여 방향이 틀어져 있을 정도였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비(妃)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 金氏, 1753 – 1821)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는 영조(英祖) 29년에 명문가(名文家)인 청풍김씨(淸風金氏)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로 태어나 10세 때에 당시 왕세손(王世孫)이었던 정조(正祖)의 빈(嬪)이 되었다가 1776년 정조 즉위와 함께 왕비(王妃)에 책봉됩니다. 성품이 온화(溫和)하고 겸손하여 조모(祖母)격인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와 혜경궁(惠慶宮) 혜빈홍씨(惠嬪洪氏)를 극진히 섬겨 궁궐내에서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슬하(膝下)에 소생(蘇生)이 없이 안타까운 생을 보내지만 기꺼이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소생을 원자(元子: 순조)로 삼게 됩니다.[정조 14년, 1790년] 그 후 순조(純祖) 21년까지 여생(餘生)을 보내다가 69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합니다.
효의선황후는 1753년 좌참찬 김시묵의 딸로 태어났다. 1762년(영조 38) 10세의 나이로 세손빈에 책봉되고, 정조의 어머니 혜빈 홍씨를 잘 섬겨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고, 슬하에 소생이 없어 1790년(정조 14) 수빈 박씨가 아들을 낳자 왕세자로 삼았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와 혜빈홍씨를 공양하여 칭송을 받았다.
일생을 검소하게 지냈으며, 수차에 걸쳐 존호가 올려졌으나 “선왕께서 존호를 받지 못하신 것이 마음 속에 지통으로 남아 있는데, 미망인으로서 이를 받는 것이 어찌 가당하단 말인가.”하며 모두 거절했고, 1820년(순조 20) 68세가 되어 여러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을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 1821년(순조 21)에 창경궁 자경전에서 소생없이 6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효의왕후는 선천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자식을 낳을 수 없어 후사를 위해 후궁을 들여야 하는 등 불운하다면 불운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타고난 덕망으로 뭇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순조실록』에 실린 효의왕후의 행장에는 효의왕후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효의 왕후는 아랫사람을 반드시 성의와 신의로써 대하여 일찍이 천히 여기고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마음을 열고 얼굴을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사적인 은정으로 봐주지 않았으므로, 좌우에 있는 궁중의 심부름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할 줄 알았다. 친척 중에 과실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꾸짖지는 않았으나 묵묵히 말을 하지 않아 그로 하여금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였으므로, 그 사람이 “마음에 부끄럽고 송구하여 벌을 받는 것보다 더 심하다.”라고 하였다.
효의 왕후는 자신의 봉양에 매우 검소하여 복식과 기물이 하나도 좋은 것이 없었고 겨우 사용할 수 있는 것만 취할 뿐이었다. 평소의 반찬이 더러 마음에 맞지 않을 때 좌우에서 담당자를 치죄할 것을 청할 경우 “어찌 구복(口腹) 때문에 사람을 치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정조(正祖)의 후궁이자 순조(純祖)의 생모
정조(正祖)의 후궁 수빈 박씨(綏嬪 朴氏, 1770~1822), 1863년, 경기 남양주 360호,
휘경원은 제22대 정조의 후궁이며 23대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綏嬪 朴氏: 1770~1882)의 묘이다. 순조22년 12월 창덕궁 보경당에서 별세하였다. 시호는 현목(顯穆)이다. 동대문 밖 배봉산 자락에 묘를 쓰고 휘경원이라 정하였다.1855년(철종6) 인릉(순조의 능)의 천장지를 구하면서 휘경원도 옮기기로 하여 진접읍 내각리 순강원 뒤로 옮겼다가 1963년(철종14) 다시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조선시대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임금의 생모인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칠궁(七宮: 종로구 궁정동 소재) 내의 경우궁(景祐宮)에 신위가 봉안되었다. 묘역은 곡장을 두르고, 봉분과 석물을 배치하였는데, 봉분에는 24개의 사대석을 원형으로 둘렀으며 세밀하게 만든 석호와 양석이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망주석 및 장명등과 좌우에 문인석이 있다.
묘역 아래에는 홍살문을 중심으로 신도가 있고 정면에는 정자각이 있으며 좌측으로 어수정, 우측에는 능표각이 있는데 능표는 팔작지붕형 옥개석을 올린 형태로 ‘유명조선국현목수빈휘경원(有明朝鮮國顯穆綏嬪徽慶園)’이라 써있다.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拜峰山 :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산 7∼8번지 일대) 아래에 있었으나 뒤에 두 차례나 이장하였다. 1855년(철종6) 인릉(순조의 능)의 천장지를 구하면서 휘경워도 옮기기로 하여 진접읍 내각리 순강원 뒤로 옮겼다가 1863년(철종 14) 다시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기록은 묘비(墓碑)는 세워져 있지 않고 정자각(丁字閣) 앞에 비(碑)를 세웠는데 비(碑)의 전면(前面) 비명(碑銘)은 '유명조선국현목수빈휘경원(有明朝鮮國顯穆綏嬪徽慶園)'이라 새겨져 있고 후면의 비문(碑文)은 다음과 같다. '영종사십륙년경인오월팔일탄생정종십일년 정미선교명위수빈사궁호가순십사년 경술탄순조이십륙년임오십이월이십륙일염대? (파손) 오십삼상익현목계미이월이십칠일장우양주배봉산묘좌원원호휘경당우륙년을묘시월팔일천봉우양주순강원후강간좌십사년계해오월팔일천봉우양주달마동임좌향원 숭정기원후이백삼십륙년 월 일''(英宗四十六年庚寅五月八日誕生正宗十一年 丁未宣敎命爲綏嬪賜宮號嘉順十四年 庚戌誕純祖二十六年任午十二月二十六日厭代? (破損) 五十三上謚顯穆癸未二月二十七日葬于楊州拜峰山卯坐原園號徽慶堂于六年乙卯十月八日遷奉于楊州順康園後岡艮坐十四年癸亥五月八日遷奉于楊州達摩洞任坐向原 崇禎紀元後二百三十六年 月 日)'
철궁 조선시대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임금의 생모인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철궁(종로구 중정도 소재)내의 경우궁에 신위가 봉안되었다. 영조 이후 7명의 왕 또는 추존왕의 생모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 후궁 출신의 생모 숙빈 최씨를 추념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올리던 육상궁이 있던 곳에 원종의 어머니 인빈 김씨의 저경궁,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의 대빈궁, 정종의 어머니 정빈 이씨의 연우궁, 장조의 어머니 영빈 이씨의 선희궁,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의 경우궁, 이후 영친왕의 생모인 순비 엄씨의 덕안궁을 이곳에 옮겨 온 뒤 칠궁(七宮)이라 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다가 2001년 11월에 다시 공개돼 청와대 관람을 통해서만 칠궁을 둘러볼 수 있다. 휘경동(徽慶洞) 휘경동은 조선시대 말기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徽慶園)이 있는 데에서 유래된다. 수빈 박씨는 판돈령부사 박준원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질과 언행이 특출하여 정조 11년 왕실의 후사를 잇기 위한 후궁 간택에 수위로 뽑혔다. 같은해, 2월에 입궁하여 ‘가순당’의 궁호를 받았다. 이어서 정조 14년 6월에는 원자(후일의 순조)가 경복궁 집복헌에서 탄생하니 조정이 기뻐하였다. 정조 24년에는 원자가 세자에 책봉되고, 그 해 6월 왕이 승하하니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이 때 순조의 나이 겨우 11세이었다. 때문에 효의왕후가 수렴청정하였지만, 생모인 수빈의 부조도 컸던 것이다. 수빈은 1822년 순조 22년 세상을 떠났다. 순조는 양주군 배봉산 아래 휘경동 산 7∼8번지를 묘역으로 정하고, 1823년 순조23년 2월 27일을 택하여 장례식을 거행하였으며 묘소를 ‘휘경’(徽慶)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 뒤로 왕은 세자를 데리고 자주 이곳 휘경원에 거동하니, 당시 한적한 마을이던 휘경원 일대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이름도 ‘휘경원’ 또는 ‘휘경리’로 불렀다. 땅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휘경동은 처음에는 휘경원으로 부르다가 차츰 휘경리, 휘경동 등으로 고쳤다.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동서 인창동 동소문 외계 휘경원으로 1936년 4월 1일 경성부 확장에 따라 경기도에서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휘경정’으로 칭하였고, 1943년 6월 10일 구제 실시로 동대문구에 속하게 되었다. 광복후 일제식 동명을 우리 고유의 명칭으로 고칠 때 ‘휘경원’을 현재 명칭인 ‘휘경동’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원자는 11세에 세자에 책봉되고 그 이듬해 6월 왕위에 올랐으므로 직접 수렴청정 하지는 않았으나 수빈 박씨의 부조가 컸다. 수빈 박씨는 순조 22년(1822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왕은 현목(顯穆)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휘경(徽慶)’이라 정한뒤 배봉산 아래에 묘역을 정해 그해 7월 27일 장례를 했다. 그 뒤 수빈 박씨는 철종 6년(1855년) 10월 6일 양주 순강원(順康園)의 우측에 이장됐다가 명당이 아니라 하여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로 옮겨졌다가 다시 1949년 7월 6일 ‘서삼릉’에 이장됐다. 한편 수빈 박씨의 묘소가 양주 순강원으로 옮긴지 52년이 지난 광무 11년(1907) 6월에 제24대 헌종의 후궁인 순화궁(順和宮) 경빈(慶嬪) 김씨(金氏)가 76세로 세상을 떠나자 고종황제는 조서를 내려 특별 예장을 명했다. 같은 해 7월 5일에 장례를 지내고 묘소의 명칭을 수빈 박씨의 ‘휘경원’과 같게 하므로써 이 곳의 땅이름은 계속 ‘휘경’으로 영속성을 띄게 됐다.
울창한 숲과 조선 역사의 흔적 '배봉산(拜峰山)'
옛 사도세자의 묘터(영우원)에 이어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의 묘터로 땅이름의 연속성을 지닌 자리가 휘경동이다.
장마 덕에 후궁이된 수빈 박씨
금성위(錦城尉) 박명원( 朴明源 영조의 3녀 화평옹주 夫君)은 자신도 모르게 절로 한숨이 나왔다. "허허, 과인의 나이 아직 어린데 무엇이 급하다고 이리 서두르는지 모르겠소." "과인이 이토록 건강한데 무엇이 그리 걱정이랍니까?" 박명원은 퇴궐하자마자 사촌의 집으로 달려가 의논하였다. 그 날부터 박명원은 혼자 속을 끓이기 시작했다. 질녀라고 말해놓고 다른집 규수를 고를 수도 없고.....
"옥이 진흙에 묻혀있었구나.! 시골 아이인데다가 집안이 가난하여 기대 하지 않았거늘......" "전하 지난번 말한 규수의 집에서 허락을 받았습니다."
휘경원지(徽慶園址) 휘경원은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景祐宮 綏嬪 朴氏의 묘였으며, 나중에 다른 곳으로 천장된 뒤에도 다시 헌종의 후궁인 順和宮 慶嬪 金氏의 묘가 휘경원 경내로 예장되었지만 휘경원의 園號는 그대로 사용되었다. 수빈 박씨는 본관이 潘南인 판돈녕부사 증영의정 準準源의 3녀로 1770년(영조 46) 5월 8일 출생하여 1878년(정조 11)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한 뒤 수빈에 봉해지고 嘉順宮의 宮號를 받게 되었다. 수빈 박씨는 정조와의 사이에 순조와 淑善翁主를 두었고, 1822년(순조 22) 12월 26일 창덕궁 보경당에서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顯穆, 묘호를 徽慶이라 정하였다.
이후 양주 배봉산으로 묘역을 정하고 1823년(순조 23) 2월 27일에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1824년에는 龍虎營의 자리에 사당을 지어 경우궁으로 부르다가 七宮에 합사되었다. 1855년(철종 6) 仁陵의 遷葬地를 구하면서 휘경원도 천장하게 되어 같은 해 10월에 양주 順康園 右岡으로 옮겼다. 그러나 1864년(철종 14)에 풍수지리상 문제가 있어 같은 해 5월 다시 양주 달마동으로 천장하여 예장하였다. 한편 1907년(광무 11)에는 헌종의 후궁인 順和宮 慶嬪 金氏의 묘소가 휘경원에 예장되었으나 묘호는 그대로 휘경원이라 불렀다. 이후 1949년 7월 서삼릉 경내의 귀인·숙의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현, 배봉산 생태공원 이다.
장마 덕에 후궁이 된 수빈 박씨(綏嬪 朴氏, 1770~1822) 경우궁
본관은 반남(潘南), 좌찬성 박준원(朴準源)의 딸로 전라도 여수에서 태어 났으며, 정조 11년 수빈(綏嬪)이라는 빈호와 가순궁(嘉順宮)이라는 궁호를 받아 음력 2월 12일 가례를 치렀다. 평소 예절이 바르고 사치를 멀리하였으며, 성품 또한 온화하여 어진 후궁이라는 뜻으로 현빈(賢嬪)이라 일컬었다. 그 후 1790년에 정조의 2남인 순조를 낳았고 다음에 숙선옹주(淑善翁主)를 낳았다. 왕자를 낳은 후에도 당시의 왕비인 효의왕후를 위로하며 공경하였고, 왕자가 세자로 책봉되고 나서 아첨하는 무리들이 재물을 보내다가 그 무리들이 의금부에 잡혔다고 한다.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보위에 오르고 나서도 당시 대왕대비 김씨와 혜경궁 홍씨, 그리고 왕대비 김씨를 늙어서까지 봉양하여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사후 궁정동 경우궁에 제향되었다.
반공탑과 운동장에 포위된 근현대사의 현장이 된, 조선 정조의 후궁과 조선 정조의 장자
정조(正祖)의 의빈 성씨(宜嬪 成氏), 문효세자(文孝世子)은 일제 강점기에 서오릉(西五陵)으로 천장, 사적 200호 효창원(孝昌園) 건물은 효창공원에 존속, 사적330호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 1786),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 1786년, 경기 고양 200호, 서오릉(西五陵)
조선조 제22대 왕 정조(正祖)의 장자로 5세에 작고한 문효세자(文孝世子)(1782∼1786)의 묘소 즉 효창원(孝昌園) 자리인데, 그후 이 경내에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성씨(宜嬪成氏), 순조(純祖)의 후궁인 숙의박씨(淑儀朴氏) 및 숙의박씨(淑儀朴氏)의 소생 영온옹주(永溫翁主)를 안장한 조선왕실의 묘원(墓園)이었다.
효창원은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묘소이다. 세자묘의 예로 조영되어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지 않았으며, 석호와 석양이 봉분 주위를 번갈아가며 배치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과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석마를 대동한 문석인 한 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1786년(정조 10) 문효세자가 5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용산구 청파동 효창공원에 원호를 효창원이라 하여 묘를 조영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인 1944년에 서삼릉 경내인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효창원은 지금의 효창동과 청파동 일대에 걸쳐 소나무·밤나무 등 수림이 울창하여 매우 유수한 곳이었는데, 1894년 5월 청일전쟁 발발 직전 우리나라에 불법으로 침공한 일본군의 주력부대인 대도(大島) 혼성여단이 지금 효창운동장 남단의 솔밭에 주둔하면서 효창원의 아름다운 경관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1924년 6월 효창원의 일부를 떼어서 효창공원을 개설하고,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에는 문효세자 이하의 상기 묘소를 모두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 서삼능 경내로 천장함으로써 효창원은 그 의미와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
효창 공원(孝昌公園)
원래5살의 어린 나이에 죽은,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와 몇달 후 죽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무덤으로 효창원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불순한 의도로 두 무덤은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 당하고, 이름도 효창공원이 되었다.
현재는 김구의 묘소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이동녕, 군사부장 조성환, 비서부장 차이석의 묘소와, 윤봉길·이봉창·백정기의 묘소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지가 있다. 원래는 지금의 공원형태가 아닌 송림(松林)이 우거지고 인적도 드물었던 곳이었으며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구(舊)용산고지' 라 불리며 일본군이 숙영목적과 독립군 토벌 및 소탕작전 등을 펼쳤던 비밀작전지로도 사용되었다. 해방 후에는 일본군 숙영지가 철거되었다. 백범 김구의 묘 (1949) 삼의사묘 (1946,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임정 요인의 묘(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효창동(孝昌洞) 효창동은 조선시대 왕실의 묘역인 ‘효창원’이있던 곳이다. 동네 명칭이 된 효창원은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묘원으로 5세때 이곳에 ‘효창묘’, 또는 ‘애기능’으로 칭하다가 고종 7년에 효창원을 승격시켰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효창원은 청파동1가에 마포구 공덕동 5거리 부근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숲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부근에서 말을 타고 지나갈 수 없도록 하마비가 효창동 6번지 49호에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이곳 마을 이름이 ‘하마비계’로 불린 적도 있다. 현재는 효창공원과 효창운동장, 백범기념관과 효창종합사회복지관이 있다.
효창원 (孝昌園) 효창공원은 1989년 6월 8일 사적 제330호로 조선 22대 왕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무덤이 있어 효창원(孝昌園)이라고 불렸다. 정조의 후궁이자 문효세자의 어머니인 의빈 성씨와 순조의 후궁 박숙의(朴淑儀)의 무덤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묘역이 광활하고 송림이 우거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구용산고지(舊龍山高地)라고 불렸으며, 일본군이 한때 야영지로 삼기도 했었다. 일제강점기의 경성부(京城府)가 효창원의 일부인 8만 1460평을 공원용지로 책정한 것은 1924년 6월의 일이며, 순환도로 ·공중변소 등을 갖추어 일반에게 공개한 것은 같은 해 8월부터였다.
오늘날 공원의 북쪽 높은 동산 위에는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동쪽 다른 동산에는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3의사(義士)의 묘가 있다. 3의사의 유해는 1946년 6월에 일본에서 봉환되어 국민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공원 정문 오른쪽 언덕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으로, 이동녕(李東寧) ·조성환(曺成煥) ·차이석(車利錫) 3위의 묘가 있다.
언덕 위쪽으로는 어린이놀이터가 있고, 원효대사(元曉大師)의 동상이 서 있다. 공원 아래쪽에 있는 면적 2만 7,593㎡의 효창운동장은 1960년 10월에 문을 연 이래 축구 ·육상 ·정구 등의 스포츠 경기가 자주 열려 왔고, 그 밖에 시민의 집회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조선 르네상스 정신의 상징 효창원, 日帝가 없앴지만 백범이 가치를 알고는…
'동작릉(중종 후궁 창빈 무덤)'이 '동작동 국립묘지'로 바뀐 것이나 '효창원(문효세자 무덤)'이 순국열사의 묘가 된 것도 땅의 팔자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효창원은 원래 문효세자의 무덤이었다. 서른 다섯 정조 임금의 당시 유일한 혈육인 문효세자가 다섯 살 때 갑자기 죽었다. 이후 문효세자 무덤 근처에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 등의 무덤이 추가로 생겨난다. 이곳은 수십만 그루의 소나무와 묘역 사이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로 한양 최고의 경승지가 된다. 그러나 조선이 몰락할 즈음 일본 군대가 주둔을 하고, 부근에 일본인들이 거주를 하면서 이곳은 점차 파괴되기 시작한다. 지속적으로 이곳을 잠식하던 일제는 1920년대에 조선 최초의 골프장을 허가한다. "1930년대 이곳은 당시 40만 경성부민의 행락지로 전락하였다. 일본 국화인 벚꽃도 당연히 심어졌다."(김해경 박사·전통문화대학교) 창경궁이 동물원으로 전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모자라 1940년대 일제는 이곳에 영면하던 조선 왕족들을 서삼릉 쪽으로 옮겨버린다. 그것을 알고도 일제가 효창원을 없앤 것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정조 임금을 지우고, 더 나아가 조선의 정신을 지우고자 함이었다. 해방 이후 일이다. 이 터를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백범(白凡) 김구다. 1892년 소년 백범이 해주에서 시행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한다. 실망하던 백범에게 아버지가 입신양명책으로 풍수와 관상 공부를 권한다. 1945년 말 귀국한 백범이 서두른 것이 해외에서 순국한 열사들의 유골을 봉환하는 것이었다. . 이듬해인 1946년 5월 3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 유골이 일본에서 부산항에 도착한다. 맨 첫 자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안장하려고 비워두었다(6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 안 의사의 유골을 찾지 못해 지금도 빈 무덤으로 남아 있다). 백범에게 효창원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해방 후 남과 북에서 순국선열을 위한 묘역 조성에 대한 관심은 백범이 가장 빨랐다. 이어서 1955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동작동 '국군묘지'(현재의 '현충원')가 만들어진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1975년에서야 비로소 '혁명열사릉'(평양 대성산)을 만든다. 효창원 바로 뒤쪽에 있는 '용산노인전문요양원→효창로즈아파트→배문중·고등학교→만리재→환일고등학교→아현'으로 이어지는 지맥을 밟아본다.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 1786)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正祖)의 후궁으로, 정조의 장남인 문효세자를 낳았다. 본관은 창녕(昌寧). 정조의 다른 후궁들은 간택되어 들어온 후궁들이나, 의빈 성씨는 궁녀 출신의 후궁이다. 같은 해에 죽은 아들 문효세자와 함께 효창원(현재 효창공원)에 묻혀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강제 이장되어 지금은 서삼릉의 후궁 묘역에 묻혀 있다.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무덤에 각각 죽음을 애도하는 어제 신도비(御製神道碑)를 내렸는데 현재 모두 서삼릉에 옮겨져 있다. 1773년,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군주, 청선군주와 함께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하였다.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 문효세자는 정조와 의빈 성씨의 소생으로 1782년(정조 6)에 태어나 1786년(정조 10) 5세의 어린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없던 정조는 아들의 탄생을 소원하였고 따라서 그가 두 살 때 바로 왕세자로 책봉했던 것이다. 사후 문효세자로 추증되었고 대한제국 수립 후 태자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그의 백부인 의소세자의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문효세자, 의빈 성씨의 미스터리한 죽음 실제 역사에서 보면 당시 의빈 성씨와 그녀가 낳은 옹주, 문효세자의 연이은 죽음이 정조에게 상당한 심적 타격을 줬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대, 517년, 1392 - 1910 ]
원(園) 13기(基)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호)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익종(翼宗) 一 수릉(綏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一 융릉(隆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一 영릉(永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一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一 경릉(敬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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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릉(皇帝陵) 2기(基) 제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一 유릉(裕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제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一 홍릉(洪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시
왕릉 35기 제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一 예릉(睿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一 경릉(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제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一 인릉(仁陵 : 사적 제194호)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제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一 건릉(健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二 홍릉(弘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一 원릉(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二 혜릉(惠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一 의릉(懿陵 : 사적 제204호)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三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二 익릉(翼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一 명릉(明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제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一 숭릉(崇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一 영릉(寧陵 : 사적 제195호)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二 휘릉(徽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一 장릉(長陵 : 사적 제203호)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二 성묘(成墓 : 사적 제365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一 목릉(穆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一 강릉(康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一 효릉(孝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三 희릉(禧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二 온릉(溫陵 : 사적 제210호)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一 정릉(靖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三 회묘(懷墓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二 순릉(順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一 선릉(宣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路)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二 공릉(恭陵 : 사적 제205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一 창릉(昌陵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7대 세조(第七代 世祖) 一 광릉(光陵 : 사적 제197호)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二 사릉(思陵 : 사적 제209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一 장릉(莊陵 : 사적 제196호)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제5대 문종(第五代 文宗) 一 현릉(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4대 세종(第四代 世宗) 제3대 태종(第三代 太宗) 제2대 정종(第二代 定宗)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三 정릉(貞陵 : 사적 제208호)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二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一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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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밥 먹고 도시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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