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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9 (3) 제24대 헌종 (憲宗) _ 경릉 景陵

草霧 2013. 8. 14. 21:17

 

 

 

 

 

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9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9

 

 

 

 

 

 

(3) 제24대 헌종 (憲宗, 1827 1849) _ 경릉 景陵

 

 

경릉20100622-21.JPG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3) 제24대 헌종 (憲宗, 1827 1849) _ 경릉 景陵

   

 

 

여덟 살 최연소 왕이 되어 스물셋 후사 없이 영면하다

 

경릉 景陵

 

 경릉20100622-21.JPG

 

헌종(憲宗, 이환, 1827 - 1849, 재위 15), () 효현왕후 김씨(孝顯王后 金氏, 1828 - 1843), 계비(繼妃)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 洪氏, 1831 - 1904), 1849, 경기 구리 193, 동구릉 (東九陵)

 

 

24대 헌종(憲宗) 경릉 첫번째 작은이미지24대 헌종(憲宗) 경릉 두번째 작은이미지24대 헌종(憲宗) 경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동구릉 목록 憲宗(이환 : 1827 - 1849, 재위 15)과 정비(正妃) 효현왕후 김씨(孝顯王后金氏: 1828 - 1843), 계비(繼妃)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洪氏 : 1831 - 1904)를 모신 경릉은 조선조의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세 개의 봉분(封墳)을 나란하게 배치한 쌍릉(雙陵) 형식의 변형인 삼연릉(三連陵)의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왕과 정비, 계비의 순으로 배치된 경릉은 각 봉분 앞에 상석(床石)만 별도로 설치되어 있고 여타(餘他)의 석물(石物)들은 단릉(單陵)의 상설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동구릉(東九陵) 소재 9개의 능으로 논할 때 조성 시기로는 추존(追尊)된 익종(翼宗:[문조])의 유릉(綏陵)이 마지막이지만 세가(世家) 계통(繼統)으로는 익종의 아들인 헌종의 경릉이 마지막이 됩니다.

 

경릉(景陵)은 세 개의 봉분이 나란히 있는 조선 왕릉 중 유일한 삼연릉 형태이다. 제일 우측의 능침이 헌종의 것이고, 가운데가 효현왕후 능침이며, 좌측이 계비 효정왕후 능침이다. 이는 우왕좌비의 원칙에 따른 것으로 중국 등과는 다르게 배치되어 있어 조선 왕릉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모두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으로 세 능침이 이어져 있으며, 각 능침 앞에 혼유석을 따로 놓았다.

 

24대 헌종(憲宗) 경릉 큰이미지봉분 아래가 초계, 중계, 하계 3단의 구획으로 이루어진 영조 이전의 왕릉과는 달리 문석인, 무석인이 한 단에 세워져 있다. 문무석인의 얼굴은 입체적이라기보다는 가는 선으로 조각하여 평면적이지만 눈꺼풀과 눈동자 등은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1630(인조 8) 건원릉의 서쪽 언덕에 있던 선조의 목릉을 천장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목릉에 수기가 차고 불길하다는 원주목사 심명세의 상소를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구릉을 파헤치고 현궁을 열어 보니 수기가 없어 그의 불길론은 해소되었다. 따라서 1843(헌종 9) 춘추 16세로 승하한 효현왕후 김씨의 능을 이 자리에 조성하였다.

 

그로부터 6년 후 헌종이 승하하자 효현왕후 김씨의 경릉 서쪽에다 모셨다. 건원릉 서쪽에 위치한 이곳은 헌종의 국상 이후 왕릉 택지를 위하여 13곳이나 되는 길지를 돌아다닌 끝에 찾아낸 십전대길지(十全大吉地)’의 명당이라고 전해진다.

    

1904년에는 춘추 73세로 승하한 헌종 계비 효정왕후 홍씨를 경릉의 동쪽에 모셨다. 이리하여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세 개의 봉분을 가진 왕릉이 완성되었다. 동구릉(東九陵) 소재 9개의 능으로 논할 때 조성 시기로는 추존(追尊)된 익종(翼宗:[문조])의 유릉(綏陵)이 마지막이지만 세가(世家) 계통(繼統)으로는 익종의 아들인 헌종의 경릉이 마지막이 됩니다.

 

 동구릉-동구릉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내우외환의 한가운데 있던 왕

 

 

 

 

헌종 (憲宗, 이환, 1827 - 1849, 재위 15)

23대 순조(純祖)의 아들인 세명세자(世明世子:[추존 익종])의 아들로 태어난 憲宗은 세명세자가 요절(夭折)하자 조부(祖父)인 순조의 대를 이어 1834년에 조선조 24대 왕위에 올라 15년간의 재위(在位) 시절을 마치고 슬하(膝下)에 자식없이 18492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昇遐)합니다.

 

헌종대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조의 내적 모순(矛盾)이 가중되고 외세(外勢)의 힘이 뻗쳐오기 시작한 때입니다. 국내의 정치 권력은 순조대부터 확고한 권력을 점유한 세도정권(勢道政權)이 점차 가속화됩니다. 헌종이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7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함으로 인해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 정치가 지속되는데, 한 때 헌종의 외척(外戚)이었던 풍양 조씨(豊陽趙氏)인 외조부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문중(門中)이 권력의 틈새로 들어와 두 문중의 권력 분립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헌종의 비()로 안동 김씨 김조근(金祖根)의 딸이 책봉되면서 다시 안동 김시의 세도 권력이 독점을 하고 그들의 주도로 철종(哲宗)의 왕위 계승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권력의 정체(停滯)는 그 산물(産物)로 삼정(三政: 전부(田賦),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문란(紊亂)을 가속화시키고, 그로 인해 전국적인 민란(民亂)의 원인을 제공하게 됩니다. 또한 통치 체제에 위협을 느끼게 했던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탄압은 그 정도를 더해 '기해사옥(己亥邪獄)''김대건(金大建) 신부 처형' 등으로 대처하는 등 국가의 내적 모순을 축적(蓄積)하게 된 것입니다.

 

헌종대의 외세(外勢)에 접근은 조선의 문호(門戶) 개방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게 되는데, 조선의 권력층은 이에 대한 대응책을 적절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쇄국(鎖國)의 길을 걷게 되는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자 후에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의 장남이다. 4세 때인 1830(순조 30) 56일 아버지 효명세자를 여의고, 그 해 9월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8341113일 순조가 승하하자 헌종은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헌종은 8세의 어린 나이로 할아버지인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므로 실제의 정사는 할머니이며 순조비인 안동 김씨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다.

 

요절한 비운의 ‘군주 패트론’  

11세가 되던 1837(헌종 3) 3월에는 안동 김씨인 김조근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다. 이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는 왕실 외척으로서 서로 대립하며 세도 정치를 주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두 차례에 걸친 역모 사건이 발생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 문제와 관련하여 외국 군함이 처음으로 조선 근해에 나타나 민심이 흉흉했다. 또한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 군정, 환곡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백성들은 큰 부담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15세의 나이에 친히 수렴청정을 거두고 정사를 돌보기 시작한 헌종은 동문휘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삼조보감등을 완성하였으며, 각 도에 제언을 수축하게 하는 등의 치적을 쌓았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헌종은 두 명의 왕후와 세 명의 후궁을 두었다. 1838(헌종 4) 간택령을 내려 효현성황후를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자식 없이 요절하였다. 그 후 계비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스스로 간택에 참여하였다가 훗날의 경빈 김씨를 마음에 두게 된다. 그러나 간택의 결정권은 왕실의 어른인 대왕대비에게 있었고, 경빈 김씨가 아닌 홍재룡의 딸 명헌왕후 홍씨가 최종 간택되었다. 이에 헌종은 3년을 고심한 끝에 왕비가 후사를 생산할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로 대왕대비의 허락을 받아 삼간택에서 낙선한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간택후궁은 종2품 숙의로 책봉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경빈 김씨를 바로 정1품 빈에 책봉하고, 1847(헌종 13) 창덕궁 서쪽에 별궁인 낙선재를 지어주기까지 하였다. 예술을 사랑한 헌종은 경빈 김씨와 함께 이 별궁에서 고금 명가의 유필을 벗 삼아 지내기를 좋아하였다. 낙선재에 여러 차례 불려 들어갔던 조선 후기 서화가 소치 허유(許維)의 기록에는 낙선재는 헌종이 평상시 거처하는 곳이며,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쓰여진 현판이 가득하다는 등의 묘사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헌종은 이곳에서 예술과 사랑을 누리는 생활을 2년도 채 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정국을 뒤로 하고 1849(헌종 15) 6623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835

1년

8월, 전국에 호구(戶口)조사 실시

1840

6년

12월, 영국배 제주도에 들어와 소를 약탈

1836

2년

2월, 정약용(丁若鏞) 죽음{1762- }

1841

7년

1월, 왕 친정(親政)을 시작함

4월, 김정희 성균관대사성이 됨.

1843

9년

8월, 왕비 김씨 승하{1828 - }

1837

3년

2월, 김조근의 딸{효현왕후}왕비 책봉

1845

11년

6월, 영국 군함 제주,전라 해안 측량

1838

4년

윤4월, <순조실록(純祖實錄)> 이룩됨

1846

12년

윤5월, 유릉(綏陵)을 [동구릉]에 천장함

1839

5년

7월, 기해사옥(己亥邪獄) 일어남

7월, 김대건 새남터에서 순교{1822 - }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

1848

14년

12월, 이양선 전국 해안에 출몰

11월, {척사윤음} 전국에 반포

1849

15년

6월, 헌종 승하 {1827 - }

1840

6년

9월, 김정희 제주목에 안치됨

은언군의 증손자 원범 즉위[철종]

 

 

요지경 왕릉

삼연릉

딴 나라 왕릉

군기 바진 무인석

헌종과 철종 이야기

내우외환의 한가운데 있던 왕

궁궐무단침입죄의 벌은 얼마나 무거웠나?

종교 분쟁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삼연릉의 비밀

풍양조씨의 세도정치

이양선의 출몰과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문서

 

 

 

헌종대의 사회상황
헌종 대 에는 17, 18세기부터 시작된 사회 전반에 걸친 급격한 변화로 농민층 의 분해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들 은 도시나 광산으로 흘러들어가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 빈민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부농층과 부 상인들이 생겨 나면서 천민에서 양민으로, 양민에서 양반으로 신분 상 승을 꾀하는 일이 빈번해졌는데 이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왔 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 조짐으로 나타났다. 또한 빈번하게 일어나 는 수재와 전염병의 창궐로 민생이 악 화되었으며 삼정의 문란이 가중 되어 살던 곳을 버리고 유랑하는 유민들이 급격하게 불어났다. 
    

 

 

[헌종과 경빈김氏] 낙선재(樂善齋)의 사랑
Nakseonjae area (courtyard), Changdeokgung - Seoul, Korea.JPG첫번째는 낙선재가 창덕궁에 붙어 있어서, 일반적으로 창덕궁의 부속건물 정도로 알고 있는데 이것이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기록인 [동궐도]에 의하면 낙선재는 분명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의 부속 건물 입니다.


두번째는 낙선재는 일반적인 왕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인데 이것도 틀린 이야기 입니다.이 낙선재는 임금이신 헌종이 [왕비 말고] 사랑한 여인이 있어 그 여인을 위하여 지은 건물입니다이 낙선재는 바로 왕비간택시에 떨어진 그가 따로 사랑한 여인 김씨를 위해 지은 집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지 못하고 권력에 의해 왕비를 선택 하였다.  

 

 

이렇게 낙선재는 출발부터 슬픔을 안고 지은 집이라 그 뒤로도 많은 여인들의 눈물이 뿌려진 곳이 되는데 마지막에 거주한 분이 비운의 이방자 여사십니다.

 

 

헌종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여인, 순화궁 경빈김씨

조선 제 24대 임금 헌종에게는 두 명의 왕후가 있었는데요., 정비 효현왕후 김씨가 헌종과 혼례를 올린지 2년만에 운명하자 곧 계비 효정(명헌)왕후 홍씨를 간택하여 왕후로 모셨습니다. 그렇지만 종이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은 따로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순화궁 경빈 김씨였습니다. 헌종은 경빈김씨를 지극히도 사랑하였는데요.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잘 알 수 있는 사연이 전해지고 있니다. 헌종이 경빈김씨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녀를 위해 창덕궁에 낙선재라는 전각을 지었으며 또 그녀의 처소인 "석복헌" 을 지어 선물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명문대가인 김재청의 여식으로 태어나 자란 순화궁 경빈 김씨,  그녀는 헌종의 두번째 왕후 간택때 처녀간택으로 들어온 여인으로서 당시 헌종의 첫번째 왕후인 효현왕후가 슬하에 자식도 없이 16세의 어린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뜨자, 내명부에서는 서둘러 헌종의 두번째 왕후를 맞이하는데 그 여인이 효정왕후(명헌왕후) 홍씨이며, 이 때 효정왕후 홍씨와 함께 삼간택의 마지막까지 남은 여인 중 한명이 바로 경빈 김씨였습니다.. 그러자 내명부의 최고였던 당시 대비 왕후 김씨는 효정왕후 홍씨가 더욱 참하여 그녀를 왕후로 간택했으며 또한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간택하는데 까닭인즉 김씨를 후궁에 봉함으로써 대비 자신의 친정인 안동김씨 가문에서 후궁을 들여 후사를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헌종도 경빈이 비록 삼간택에서는 떨어졌으나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메 결국 그녀를 후궁에 봉하고 경빈에 책봉하니 그녀의 궁호는 순화궁입니다. 반면 효정왕후는 왕비의 자리에 올랐지만늘 혼자 지내 했는데 경빈 김씨 때문에 졸지에 남편에게 소박을 맞은 처지가 된 그녀는 남편인 헌종의 그림자조차도 밟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217-14한편 당시 헌종에게는 경빈 김씨 말고도 두 명의 후궁이 더 있었다고 전해지는데요, 정빈 윤씨와 숙의 김씨였는데 그녀들은 모두 소생이 일찍 죽거나 낳지 못했습니다. 비록 숙의김씨와의 사이에 옹주를 두었지만 옹주는 탄생일에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순화궁 경빈김씨,  조선왕조에서 그 어느 여인보다 임금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그녀는 헌종이 승하하자 궁궐의 법도대로 사가로 내쫒기게 되니 그녀의 운명은 행복과 화려함속에서 순식간에 불행과 처절함으로 뒤바뀌는 파란만장한 생을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녀는 낙선재에서 쫓겨나 인사동 사가에서 지내다가 나이 77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낙선재는 헌종 13년(1847)에 왕이 왕비와 대왕대비를 위해 마련하여 조선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천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하고 그 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 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여사가 기거하였다. 낙선재는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나 석복헌과 수강재는 상당 부분이 변형되어 있다.  1847년(헌종 13)에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은 집이다. 그 뒤로,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고종황제의 외동딸이자 마지막 공주였던 덕혜옹주, 일본의 왕녀로 두 나라를 조국으로 섬겨야했던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 등 비운의 주인공들이 한많은 삶을 이곳에서 마쳤다.

 

낙선재 옆으로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가 나란히 붙어있는데, 보통은 이들을 모두 통틀어 낙선재라고 한다. 원래는 창경궁 영역에 속하는 건물이었다. 낙선재의 대문은 연경당 대문과 같은 이름인 장락문(長樂門)이다. 낙선재에는 청나라의 엽지선이 쓴 '낙선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딸린 집채인 남행각 12간에는 장락문이 나 있고 서행각 15간과 외행각 15간에는 중화문(中華門)이 나 있으며, 그 동쪽으로는 소금마문(小金馬門)이 나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 효현왕후 김씨(孝顯王后 金氏, 1828 1843)

헌종과 효현,효정왕후 - 景陵효현왕후 김씨(孝顯王后金氏)는 안동 김씨(安東金氏)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의 딸로 태어나[순조 28], 1837[헌종 3]에 왕비(王妃)에 책봉(冊封)되고, 1841년에 가례(嘉禮)를 올려 왕후(王后)가 되었으나 2년만에 16세의 나이로 슬하에 후사(後嗣)없이 승하합니다.[헌종 9]

 

효현왕후 김씨는 영돈령부사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로서 1828(순조 28) 314일에 태어나, 같은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의 뜻으로 10세 때인 1837(헌종 3) 318일 왕비에 책봉되었다. 4년 뒤 가례를 올렸으나, 가례를 올린 지 2년만인 1843(헌종 9) 825일 창덕궁의 대조전에서 후사 없이 요절하였다. 1851(철종 2) 경혜와 정순의 휘호가 내리고, 후에 단성과 수원의 존호가 더해졌다. 또한 순종 때는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에 추존되었다.

 

 

1827년(순조 27) 7월 18일 효명세자(孝明世子)와 세자빈 풍양조씨(豊壤趙氏)가 원손을 낳으니 순조(純祖)는 “일찍 왕자를 보았다.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총명스러움이 드러나 이미 세자로 봉하고, 크고 작은 정무를 나누어 맡아 대리청정을 하도록 명을 내렸다. 아들이 뒤를 이어 기뻤는데, 다시 손자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아기의 울음소리는 집안과 임금의 경사이고, 뛰어난 그 바탕은 진실로 군왕의 기상과 용봉(龍鳳)의 기이함이다. 나이 40도 못되어 손자를 안았으니 내 기쁨을 어찌 금할 수 있는가? 백세토록 영원히 후손이 번성하리니 지금부터 아름다움이 있으리로다.”라고 교문을 발표하며 사면령도 내렸다.

 

Gyeongneung (Heonjong).JPG그런데 원손이 태어난 지 채 3년이 되기도 전인 1830년 5월 6일에 효명세자가 병으로 승하를 하자 원손을 그 해 9월 15일에 왕세손으로 책봉을 하였다. 왕세손이 1834년 11월 18일에 할아버지인 순조의 뒤를 이어 조선 24대 왕으로 즉위를 하였는데 바로 헌종(憲宗) 임금이다. 즉위 당시에 임금의 나이가 어려서 할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가 6년 남짓 수렴청정을 하였었다. 1841년부터 혼자서 왕권을 수행하던 헌종이 1849년(헌종 15) 6월 6일 창덕궁 중희당에서 승하하니 재위기간은 15년이었지만 나이는 23세에 불과하였다. 2명의 왕비와 1명의 후궁이 있었지만 후사는 없었고, 궁녀김씨가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 딸마저 일찍 죽었다.

 

그러자 순원왕후는 영조(英祖)의 핏줄로는 헌종과 강화도에 살고 있는 사도세자의 증손 이원범(李元範)뿐이므로 그에게 종사를 부탁하고 모셔다가 군호를 덕완군(德完君)으로 하고 관례를 행하였는데 그가 철종(哲宗)이다. 헌종의 뒤를 이을 왕을 결정한 순원왕후는 장지를 찾아 나선 대신들을 접견하여 “용세나 혈증이 풍후하여 십전대길(十全大吉)의 땅”이라고 추천한 효현왕후(孝顯王后)의 무덤인 경릉(景陵)의 오른쪽을 장지로 결정을 하여 그 해 10월 28일에 헌종을 장사(酉坐卯向) 지냈다.

 

헌종 비 효현왕후는 영돈녕부사 영흥부원군 김조근(金祖根)의 딸로 1828년(순조 28) 3월 14일 출생하여 1837년(헌종 3) 3월 18일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나이 16세인 1843년(헌종 9) 8월 25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헌종의 지시로 옛 목릉(穆陵, 선조 옛 무덤) 자리를 살펴본 대신들이 “이미 증험한 길지이고, 또 원릉(元陵, 영조 무덤이나 원래는 효종의 옛 무덤)의 전례가 있어 문제가 없다.”라고 고하자 약간 왼쪽으로 옮겨 자리를 정하여 그 해 12월 2일에 효현왕후를 장사(庚坐甲向) 지내고, 능호를 경릉이라 하였다.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는 영돈녕부사 익풍부원군 홍재룡(洪在龍)의 딸로 1831년(순종 31) 1월 22일 출생하여, 1844년(헌종 10) 10월 18일 왕비로 책봉되었다가, 1903년 11월 15일 덕수궁 수인당에서 7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고종의 지시로 경릉의 국내를 살펴본 대신과 상지관들은 “청룡과 백호가 격에 맞고, 명당이 확 트였으며, 기복이 음양에 맞고, 내룡의 지맥이 머리에 와서 지혈을 이루었으며, 혈장의 둘레와 넓이가 충분하여 한 가지도 흠될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하자 장지로 결정하여 이듬해 1월 29일에 효현왕후 왼쪽에 장사(庚坐甲向)를 지내니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삼연릉(三連陵)으로 조성되었다.

 

경릉은 1608년(선조 41) 6월 12일에 선조(宣祖)를 장사 지냈던 곳인데, 1630년(인조 8)에 원주목사 심명세(沈命世)가 “목릉은 혈도(穴道)가 우뚝 드러나고, 지형이 비탈지고 험준하며, 안쪽에 가려주는 산이 없어 큰 들과 평평히 맞닿아 물이 흘러나가는 곳이 곧바로 보이니, 이것은 모두가 장법에서 크게 꺼리는 것들일뿐더러, 사대석(莎臺石) 한 모퉁이가 떨어져 나갔고, 발라 놓은 유회(油灰)가 떨어져 나간 것은 무덤 속에 물이 찼다는 근거입니다.”라고 상소문을 올리자 그 해 11월 21일에 천장을 단행하여 213년 동안 빈자리로 남아있던 곳이다. 그러나 이장 시에 무덤 속은 이상이 없어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가 묻히게 되었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왕이 가운데에 있지 않고 오른쪽에 있는 이유

대개 사람들은 왕이 가운데에 묻혀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당시의 사상으로는 무덤에선 우측(누워있는 시신 기준)이 상석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헌종은 효현왕후의 오른쪽에, 계비인 효정왕후는 정비인 효현왕후의 왼쪽에 묻힌 것이다. 이는 다른 능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유독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인수대비)의 무덤에서는 소혜왕후가 상좌인 우측에 안장되어 있다. 남편인 덕종은 죽을 때 세자 신분이었지만, 부인인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남존 여비보다 왕실의 서열이 우선된 것이다.

 

살아있을 때는 이와 반대로 좌측(앉아있는 사람 기준)이 상석이 된다. 요새 사극에서는 왕이 우측 왕비가 좌측에 앉아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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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비(繼妃)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 洪氏, 1831 - 1904)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洪氏)는 본관(本貫)이 남양(南陽)인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딸로 태어나 효현왕후(孝顯王后) 승하 후, 1844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5년 뒤에 헌종이 승하하자 철종대(哲宗代)를 이어 고종대(高宗代)까지 왕대비(王大妃)로 지내면서 여생(餘生)을 보내다가 고종 41[1904]에 역시 슬하에 소생(所生)없이 승하합니다.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후는 본관이 남양인 영돈령부사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로서 1831(순조 31) 122일에 태어나, 1844(헌종 10) 9, 14세의 나이로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헌종이 승하하고 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903(광무 7) 1115일 후사 없이 춘추 73세로 승하하여 경릉에 안장되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 size: 9pt; mso-ascii-font-family: 맑은 고딕; mso-font-width: 100%; mso-text-raise: 0pt;">-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