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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8 (2)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草霧 2013. 8. 13. 12:51

 

 

 

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8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8

 

 

 

(2)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진종20090814-12.JPG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2)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종묘사직 위해 한 일 없으나 추존 황제 중 첫 번째 황제라

 

영릉 永陵

진종20090814-12.JPG    

 

진종(眞宗, 이행, 1719 - 1728), ()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 趙氏,1715 1751),

1728, 경기 파주 205, 파주삼릉(坡州三陵)

 

 

추존왕 진종(眞宗) 영릉 첫번째 작은이미지추존왕 진종(眞宗) 영릉 두번째 작은이미지추존왕 진종(眞宗) 영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장순왕후 한씨 공릉 영조(英祖)의 장자(長子)이자 정조(正祖)의 친부(親父)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형이었던 추존왕 眞宗(이행; 1719 - 1728)과 비()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趙氏 ; 1715 - 1751)를 모신 능이 영릉(永陵)입니다. 영릉은 본래 슬하에 소생없이 세자로 책봉된지 3년만에 요절한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세자와 세자빈의 예()로 묘를 조성하였습니다. 그 후에 다음 세자였던 사도세자(思悼世子)마저 폐위되어 죽음을 당하고 사도세자의 아들을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할 때, 영조는 왕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養子)로 입적시켰기 때문에, 왕위에 오른 왕세손[정조(正祖)]이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고 묘 역시 왕릉으로 승격해서 영릉(永陵)으로 격상됩니다.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된 영릉은 세자묘의 예에 따라 이루어졌다가 왕릉으로 추숭(追崇)되었기에 간촐하게 상설(常設)되었습니다. 능원의 구조는 병풍석(屛風石), 난간석(欄干石) 모두 봉분(封墳)에서 생략되었고, 석물(石物)들도 석호(石虎), 석양(石羊) 한 쌍씩이며, 무인석(武人石) 없이 문인석(文人石)만 석마(石馬)를 대동하고 좌우에서 호위하고 있습니다.

 

추존왕 진종(眞宗) 영릉 큰이미지안타까운 점은 능침(陵寢) 아래의 정자각(丁字閣)이 파손되어 기공석(起工石)만 남아있는 것인데, 이러한 홰손된 문화재를 보면서 진정한 문화유산(文化遺産)의 보존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영릉(永陵)은 영조의 큰 아들 진종과 비 효순왕후의 능이다. 쌍릉으로 조영되었다. 진종은 세자의 신분으로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가 훗날 진종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능 또한 세자묘의 예를 따라 조영되었다가 훗날 왕릉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봉분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생략되었고, 봉분 주위에는 석호와 석양, 문석인이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석인은 조선 전기의 능인 공릉에 비해 다소 마르고 작은 편이다. 관모를 쓰고 양손으로는 홀()을 쥐고 있으며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한 편이다. 관복의 소매는 길게 늘어져 있고, 팔꿈치 부근에는 세 줄의 주름이 새겨져 있다. 문석인과 함께 중계(中階)에 배치된 석마 역시 조선 전기와는 다른 형태로 겸손하게 머리를 구부린 모습을 하고 있다. 전기의 석마는 둔중한 모습이지만 영릉의 석마는 전기의 것에 비해서는 살이 약간 빠지고 날렵한 모습이다. 하계는 생략되었으며 무석인 역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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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복 없는 영조의 큰아들

1728(영조 4) 1116일 어린 나이의 세자가 승하하자 영조는 그 해 122일 효장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 이듬해인 1729(영조 5) 126일 현재의 위치인 순릉 왼쪽 산줄기 언덕에 예장했다. 세자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던 효순왕후는 1751(영조 27) 1114일 창덕궁 건극당에서 소생없이 3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으며, 이듬해인 1752(영조 28) 122일 효장세자묘 왼쪽에 안장하였다. 이들이 세상을 떠난 후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를 효장세자의 밑으로 입적시켰다가 그가 왕위에 오르자, 즉위년인 1776년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존되었고, 능 또한 영릉으로 추봉되었다.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된 영릉은  세자묘의 예에 따라 이루어졌다가 왕릉으로 추숭(追崇)되었기에 간촐하게 상설(常設)되었습니다. 능원의 구조는 병풍석(屛風石), 난간석(欄干石) 모두 봉분(封墳)에서 생략되었고, 석물(石物)들도 석호(石虎), 석양(石羊) 한 쌍씩이며, 무인석(武人石) 없이 문인석(文人石)만 석마(石馬)를 대동하고 좌우에서 호위하고 있습니다.

 

 

세자빈과 결혼한 지 1년도 안 돼 이별

 안타까운 점은 능침(陵寢) 아래의 정자각(丁字閣)이 파손되어 기공석(起工石)만 남아있는 것인데, 이러한 홰손된 문화재를 보면서 진정한 문화유산(文化遺産)의 보존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죽어서 왕이 된 진종

    

하늘에서 본 영릉 전경. 뒤편에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의 순릉이 보인다.

 

 

진종(眞宗, 이행, 1719 1728)

영조와 정빈이씨(靖嬪李氏) 사이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난[숙종 45]진종은 영조가 즉위하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가 다음해 왕세자(王世子)에 책봉되니 그때 나이가 7세였습니다. 하지만 영조(英祖)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3년 뒤[영조 4]에 승하합니다. 불과 10세였습니다. 영조의 부정(父情)은 세자에게 효장(孝章)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고, 후에 왕세손{正祖}에게 유언처럼 남긴 것이 효장세자의 추존(追尊)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조는 그 유지를 받들어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했지만, 정조(正祖)에게는 진종보다 친부(親父)였던 장조(莊祖[사도세자])에 대한 정성이 지극할 수밖에 없었기에 다소 영릉(永陵)에 대한 호위(護衛 )가 소원(疎遠)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종은 1719(숙종 45) 215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있는 창의궁에서 영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영조가 1724년 즉위하자, 그 해 113일 경의군에 봉해졌다가, 그 이듬해 3207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1728(영조 4) 1116일 창경궁 진수당에서 숨을 거두었다. 영조는 그 해 122일 효장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효장세자가 요절한 뒤 영조는 40세가 넘어 둘째 아들을 얻자 아들이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그가 바로 사도세자이다. 그러나 영조는 1762(영조 38) 사도세자를 폐세자시키고, 그의 맏아들인 왕세손을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통을 잇게 하였다.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선왕인 영조의 유지를 따라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고, 능호를 영릉이라 했다.

 

영조실록17281116일자 기사에는 효장세자가 죽던 날 밤, 영조가 슬퍼하던 모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3(三更 :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에 왕세자가 창경궁의 진수당에서 훙서하였다. 이날 종묘와 사직에서 두 번째 기도를 거행하였는데, 밤에 병이 더욱 심해져 해시에 훙서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이광좌, 병조판서 조문명 등을 대하며 슬피 곡하며 말하기를, “종묘와 사직을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고, 한참 만에 곡을 그쳤다.

 

임금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뒤에 내시를 시켜 흑곤포(黑袞袍)를 담은 검은 함을 들려 앞세우고 임금이 뒤따라 나왔다. 어둑새벽에 예방 승지가 세자의 흑곤포를 담은함을 받쳐 들어 내시에게 전해주니, 내시가 전(殿)의 지붕 모퉁이에 올라가 호복(呼復)하고 내려왔다.

 

(위)동원쌍릉 형식으로 조성된 영릉.

(아래)영릉의 문석인은 유난히 작고 동안이어서 10세에 요절한 효장세자의 얼굴을 닮은 듯하다

 

 

 

 

 

 

 

 

 

 

 

 

 

 

 

 

 

 

 

 

 

 

 

 

   

세자 묘로 조성됐다 왕릉 형식 갖춰

(우편번호 413-820)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3호선 구파발역 하차 2번출구 9709, 9710, 909, 760, 30, 31 버스이용 파주삼릉입구 하차 후, 도보로 10분정도면 오실 수 있습니다.파주 삼릉에 자리한 영릉(永陵)은 조선 21대 왕인 영조(英祖)의 장남 효장세자(孝章世子)와 세자빈 조씨(趙氏)의 무덤이다. 효장세자는 1719년(숙종 45) 2월 15일 창의궁(彰義宮, 영조의 개인 집,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서 영조와 정빈이씨(靖嬪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세 살 때인 1721년(경종 1년) 8월 20일 아버지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그 해 가을 왕세제의 명으로 입궐하게 되어 그 때부터 정성왕후(貞聖王后)와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손에서 길러졌다. 1724년 8월 30일 아버지가 즉위를 하자 그 해 겨울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고, 일곱 살 때인 1725년 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727년(영조 3)에는 결혼을 하였으나 이듬해인 1728년 11월 16일 창경궁 진수당(進修堂)에서 10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관련사진관련사진


관련사진영의정 이광좌(李光佐)를 세 도감(빈궁, 묘소, 예장)의 도제조로 삼아 순창원(順昌園,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 무덤) 청룡 밖 능선과 숭릉(崇陵,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의 오른 편 그리고 순릉(順陵, 성종비 공혜왕후의 능)의 왼쪽 언덕을 장지 후보지로 압축하여 살폈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순릉의 왼쪽 언덕의 혈은 매우 좋아서 신들의 소견으로 말하더라도 조금도 미진한 데가 없습니다.

 

또 산세가 웅대하여 싸안은 정취가 있고 분명하게 맺힌 데가 있으니, 또한 쉽게 얻을 수 없는 곳입니다.”하니, 영조는 그 곳을 효장세자의 장지로 정하도록 하였다. 그 해 12월 9일에 장지 조성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땅의 깊이는 영조척으로 8척 9촌으로 정하여 이듬해 1월 26일에 서향(乙坐辛向)으로 장사를 지냈다.

 

한편 효장세자의 죽음으로 아들이 없었던 영조는 1735년(영조 11) 1월 25일 영빈이씨(暎嬪李氏)가 아들을 낳자 “언제나 두려워하여 사방으로 돌아보면서 후사를 계승할 걱정을 깊이 품었다. 집안과 나라가 외롭고 위태로우니 여러 사람의 마음을 매어 둘 데가 없을까봐 염려되었고, 내 나이 점점 늙어가니 선조의 대통을 전할 데가 없음이 두려웠었다. 세자궁의 문이 닫힌 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다행히 하루아침에 신이 아들을 점지해 주는 길사를 얻었다.”는 교문(敎文)을 선포하였다. 이 아들(사도세자)을 원자로 삼으니 효장세자빈을 빈궁(嬪宮)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대신들의 건의로 조씨(趙氏)를 1735년(영조 11) 3월 16일에 책봉하여 현빈(賢嬪)으로 삼았다. 세자빈은 살았을 때에는 한 글자의 작호를 가지지만, 죽었을 때에는 두 글자의 시호를 가지는 전례에 따랐는데, 대신들이 올린 작호의 음과 뜻이 모두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여 임금이 손수 ‘현(賢)’자를 써서 내렸다.

 

관련사진어렸을 때 남편을 떠나보낸 현빈이 1751년(영조 27) 11월 14일 창덕궁의 의춘헌(宜春軒, 건극당의 동실)에서 승하하였다. 영조는 “내가 일찍이 삶은 밤을 좋아하였는데, 예전에 밤중에 내가 갑자기 삶은 밤을 먹고 싶어 하니 현빈이 미처 신발을 신을 사이도 없이 곧바로 부엌에 들어가 친히 밤을 삶아 진상하였다. 이것이 효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하면서 시호를 효순(孝純)이라 내렸다.

 

한편 효순현빈의 행록을 시아버지가 손수 지으면서 “불쌍한 나의 효부여! 내가 쓴 효장세자의 지문 글자 가운데 빠뜨려 놓았던 것도 보충하여 새기노라. 내가 이제 노쇠한 나이에 전후 아들과 며느리의 행록을 지었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유감이 없다고 하겠으나, 옛 슬픔과 지금의 슬픔으로 아픈 마음을 어떻게 비유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눈물을 흘리고 오열하면서 쓰노라니, 밤은 어찌 그다지도 깊단 말인가? 이를 돌에 새겨 영구히 보관하여 먼 후세에까지 전하게 하노라.”라는 글을 적었다. 이듬해 1월 22일 효순현빈을 효장세자의 왼쪽에 장사(乙坐辛向)를 지냈다.

 

(왼쪽)세자의 예에 따라 조영된 영릉.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지 않았고, 하계(무석인)의 공간이 없는 게 특징이다. (오른쪽)영릉의 고석.

 

영조는 1764년(영조 40) 2월 24일에 사도세자의 아들(훗날 正祖)을 효장세자의 후사로 삼아 종통을 이어받도록 하였다. 그 뒤 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니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효순현빈을 효순왕후(孝純王后)로 추숭하고, 능호(陵號)를 영릉(永陵)이라 하였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 趙氏,1715 1751)

진종[효장세자]-영릉풍양 조씨(豊壤趙氏) 좌의정(左議政) 조문명(趙文命)의 딸로 태어난[숙종 41] 효순왕후는 영조 3년에 13살의 나이로 세자빈(世子嬪)에 간택되었으나 다음해에 세자가 승하(昇遐)하여 안타까운 생을 보내다가 역시 37세의 나이로[영조 27] 소생없이 승하합니다.

 

효순왕후는 풍릉부원군 조문명의 딸로서, 1715(숙종 41) 1214일 한성부 동부 숭교방에서 태어나 1727(영조 3) 927일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735(영조 11) 현빈에 봉해졌으며, 1751(영조 27) 1114일 창덕궁 건극당에서 소생 없이 3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영조는 그 해 1119일 효순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효장세자묘의 왼쪽에 안장하였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