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8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능 (陵) - 8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1) 제21대 영조(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綏吉園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기 (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기,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기(능40, 원14, 묘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능3, 원4, 묘5)입니다.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황제릉(皇帝陵) 2기(基) 왕릉 35기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왕 ‘함길도 8릉’
2. 왕조, 문을 열다
제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제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제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제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제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제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제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제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제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제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제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제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제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제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제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제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제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제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제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제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제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제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제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제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제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1) 제21대 영조(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綏吉園 (2)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3)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懿寧園 (4) 제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孝昌園
(1) 제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綏吉園
천한 몸에서 귀한 왕이 되어 조선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다
영조 (英祖, 이금, 1694-1776, 재위 52년), 정순왕후 김씨 (貞純王后 金氏, 1745-1805), 1776년, 경기 구리193호, 동구릉(東九陵)
조선조 최장수(最長壽; 83세) 임금이자 최장 재위(在位) 국왕인 英祖{이금; 1694-1776, 재위 52년}와 그의 계비(繼妃)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 1745-1805)의 원릉은 쌍릉(雙陵)으로 조성되었으며, 역시 봉분(封墳)은 병풍석(屛風石)을 생략하고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릉은 주변의 자연 경관과 능원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어 동구릉 내에서 아담하면서도 장엄함을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능입니다.
원릉은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난간석을 둘러 만든 쌍릉이다. 왕릉과 왕비릉 앞에는 혼유석이 각각 놓여 있고,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세워져 있다. 망주석 기단부에 조각된 꽃무늬가 세련되고 화려하다. 좌우 세호 중 오른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위를 향하고 있고, 왼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아래로 기어 내려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능의 중간에 놓인 사각옥개형 장명등은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 부분을 제외하고 상, 중, 하대석 부분은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문석인은 전체적으로 비율과 입체감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나, 사실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또한 무석인은 장군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위풍당당하기보다는 유약한 모습을 하고 있다. 무석인의 얼굴에서도 잔잔히 머금고 있는 미소를 찾을 수가 있다.
1776년(정조 즉위) 3월 5일 영조가 승하하였다. 영조는 무려 52년에 이르는 긴 재위 기간 동안 여덟 차례에 걸쳐 산릉원을 조성하거나 천장하는 등 산릉제도에 관심이 컸다. 원비 정성왕후가 잠든 서오릉의 홍릉을 자신의 자리로 정해 쌍릉으로 조영하기를 바랐으나, 손자인 정조는 영조가 승하한 그 해 7월 27일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그를 안장하고 원릉이라고 했다.
원래 이곳은 1660년(현종 1) 10월 효종 능인 영릉이 조영되었던 곳인데, 1673년(현종 14) 석물에 틈이나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고 하여 천봉하기로 하고 봉분을 열었으나 깨끗하여, 끝내는 당론으로 번져 전날의 영릉도감의 책임자까지 파직되었던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원릉을 조성한지 29년이 지난 1805년(순조 5)에는 61세의 나이로 승하한 영조 계비 정순왕후 김씨를 원릉의 옆에 모셨다.
조선 제21대 왕이었던 영조(英祖)는 숙종(肅宗)과 육상궁(毓祥宮) 숙빈최씨(淑嬪崔氏)사이에서 1694년(숙종 20) 9월 13일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출생하였다. 1699년에 아버지 숙종에 의하여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고, 1720에 즉위한 경종(景宗)은 후사가 없자 즉위 이듬해에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였다. 아버지인 숙종이 승하하였을 때도 국장의 주도권이 사실상 연잉군에 있었기에 예상할 수 있었던 수순이다. 병약했던 경종이 결국 재위 4년여 만에 승하하자 연잉군이 왕위를 물려받아 자신이 태어난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그로부터 52년 동안 왕위에 있었던 영조는 1776년 3월 5일 경희궁에서 83세의 일기로 승하하였다.
영조는 원비인 정성왕후를 장사 지내면서 그 우측에 자신의 자리(弘陵)를 마련해 두었으나 정조는 그 곳에 할아버지를 장사 지내지 않고 동구릉 내 구 영릉(寧陵, 효종의 옛 무덤) 자리에 장사를 지냈다. 홍릉과 소령원(昭寧園, 숙빈최씨의 무덤)의 국내, 구 영릉자리가 장지 후보지로 추천되었는데, 영의정을 비롯한 대신들과 상지관이 구 영릉이 흠이 없는 길지라고 주장을 하였다. 이 때 영의정인 김양택(金陽澤)은 “이미 증험해 본 땅이 마치 기다리고 있은 듯합니다.”라고 말하며, 그 자리에 효종을 장사 지냈었지만 흉한 일이 없었음을 추천 사유로 들었다.
상지관 김기량(金基良)은 “옛 영릉 자리의 체세(體勢)는 건원릉과 차이가 없을뿐더러 주산에서 내려오는 힘이 모두 이 자리에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김상현(金尙鉉)은 “산을 보아 온 지 50년이지만 이와 같은 길지는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니 정조는 이곳을 장지로 정하였다. 그 해 7월 27일에 남동향(亥坐巳向, 효종은 乾坐巽向)으로 영조를 장사지내고 능호를 원릉(元陵)이라 하였다. 그런데 구 영릉 자리는 1724년에 경종을 장사 지낼 때 후보지로 거론이 되었었으나 한번 사용했던 자리에 왕릉을 조성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영조가 반대하여 다른 곳(懿陵)에 장사를 지냈었다.
영조 33년(1757)에 정성왕후가 승하를 하자 중전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는 이유로 영조 35년(1759)에 15세 소녀를 왕비로 책봉을 하였다. 그 소녀는 영돈녕부사 오흥부원군(鼇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와 원풍부부인(原豊府夫人) 원씨(元氏) 사이에서 1745년 11월 10일 여주읍에서 태어나 왕비로 책봉된 정순왕후이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순조(純祖)때 4년 동안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다가 물러난 뒤 순조 5년(1805) 1월 12일 창덕궁에서 61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장지로 원릉의 좌측과 구 목릉(穆陵, 선조의 옛 무덤) 등이 거론 되었으나 “안산이 아름답고 결점이 없으며, 혈토는 오색(五色)이 구비되어 매우 아름다운 방석의 문양과 같다.”는 원릉의 왼쪽으로 결정되어 그 해 6월 20일에 영조와 같은 좌향(亥坐巳向)으로 장사를 지냈다.
원비였던 정성왕후의 옆자리에 자신의 수릉(壽陵) 자리를 마련해 두었던 영조는 결국 본인의 뜻과는 달리 계비인 정순왕후와 나란히 잠들게 되었는데, 정성왕후가 잠든 홍릉은 서오릉의 주산인 응봉(鷹峰)의 뒷면(背)이고, 원릉은 산의 앞면(面)이다. 따라서 정조 임금의 판단으로 풍수적으로 좋지 않은 자리를 피하고, 좋은 자리에 잠들게 되었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왕권강화를 위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대찬 왕
영조 (英祖, 이금, 1694-1776, 재위 52년) 조선조 최장수 임금이자 조선 후기의 중흥기(中興期)를 이룬 영조(英祖)는 붕당(朋黨)의 폐해를 시정하는데 힘써, 공정한 인재 채용의 원칙을 지킨 "탕평지책(蕩平之策)"으로 유명합니다. 이는 숙종(肅宗)-경종(景宗)대를 지나면서 무수한 당쟁(黨爭)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영조였기에 더욱 탕평(蕩平)에 매진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입니다.
영조의 치적(治績)은 사치를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며, 균역법(均役法) 확립, 신문고(申聞鼓) 재설치 등 민생(民生)의 안정에 힘쓴 것에서 크게 부각됩니다. 또한 서적을 편찬하고 예의도덕(禮義道德) 권장하여 인륜(人倫)을 바로잡는 등 문화. 산업 분야도 크게 부흥시켰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들{사도세자(思悼世子); 장헌세자(莊獻世子)}을 붕당(朋黨)의 폐해 속에서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 후 남인(南人)계통으로 사도세자 동정옹호 세력인 시파(時派)와 노론(老論)계통으로 사도세자 적대공격 세력인 벽파(僻派)의 싸움은 정조(正祖)-순조(純祖)대까지 이어져 조선조 말기의 혼탁한 정치적 기류의 단면을 보여주게 됩니다.
영조는 숙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이다. 1699년(숙종 25) 6세 때 연잉군에 봉해지고, 경종이 숙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1721년에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고 아들이 없는 것을 이유로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당시 그의 왕세제 책봉을 주장하는 노론과 시기상조론을 들어 반대한 소론 간의 정쟁이 극심했으며, 영조 자신도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경종을 시해하려는 시도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1724년 이러한 치열한 정쟁 속에 즉위한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즉위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고, 균형 있는 인재 등용을 통하여 탕평세력을 구축하였다. 영조는 탕평 정치로 조정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러 가지 폐단을 고치는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양역조의 양을 감소시키는 균역법을 시행하고, 노비 신공을 혁파하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과감하고 개혁적인 조치들을 단행하여 조선 후기 나라의 기틀을 재차 다지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1762년(영조 38)에는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벌열의 움직임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는 등, 당쟁의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1776년(영조 52) 3월 5일 춘추 83세로 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하였다.
영조는 무수리에게서 태어난 숙종의 서자이다. 비록 왕자이긴 하였으나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궁궐 외곽의 초라한 집에서 천시 받으며 어렵게 성장하였다. 영조의 어머니는 숙종이 승하하기 이전에 일찍 세상을 떠나 빈(嬪)의 대우도 받지 못했고, 양주땅 고령산 기슭에 묻혔는데, 그 묘가 매우 초라하였다. 궁중예법에 따라 능호나 원호를 붙일 수도 없었다. 이 사실이 늘 맘에 걸렸던 영조는 오랜 노력 끝에 어머니의 묘를 간신히 소령원(昭寧園)으로 승격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하루는 영조가 미복 차림으로 궁을 나와 산책하던 중에 시골의 나무꾼이 향나무를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영조가 향나무를 어디서 캐온 것이냐고 물으니, 무식한 나무꾼은 제 앞의 임금을 몰라보고, 나라님의 모후를 모신 소녕릉이 있는 고령 양주산에서 캐온 나무라고 설명해주었다. 나무꾼은 능과 원을 구별하지 못하여 능이라고 부른 것이지만, 오랜 세월 어머니의 묘를 능으로 꾸며드리고 싶었던 영조는 나무꾼의 ‘소녕릉’ 소리에 감격하였다. 그리하여 나무꾼이 팔던 향나무를 비싼 값에 쳐주고, 그를 소녕원 능참봉에 제수하였다. 영조는 강하고 결단력 있는 군주였으나, 내면으로는 자신의 출생 신분과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과 정쟁에 휘말려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연 등 평생 큰 아픔을 삭여야 했다.
왕릉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우허제 파묘와 파혈 왕릉세호를 풍수조명하면 왕들의 신분이 드러난다 역사 바로 세우기 반풍수 집안 망치기 영조 이야기 영조왕릉이후의 역사 정조의 왕릉통치술 왕릉이 만든 세계문화 유산 정자각의 정체 왕권강화를 위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대찬 왕 왕권강화를 지향하며 고래 눈알과 수염을 세금으로 바쳐라 답안지에 이름을 쓰지 않아 과거 급제가 취소되다 백의민족인가, 청의민족인가? 사도세자의 죽음과 주변 인물의 심정 당파를 없애는 방안 조선의 장수왕, 영조 탕평책으로 조선을 이끈 영조
계비(繼妃) 정순왕후 김씨 (貞純王后 金氏, 1745-1805)
1745년{영조 21년} 경주(慶州) 김씨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딸로 태어난 정순왕후는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한 뒤, 1759년{영조 35년} 15살의 나이에 당시 66세였던 영조의 계비(繼妃)로 가례를 올립니다.
정순왕후는 특히 사도세자(思悼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아 사도세자의 폐위(廢位), 아사(餓死)에 적극 동조했으며,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대립에서도 항상 벽파를 두둔해, 정조(正祖)를 이어 어린 순조(純祖)가 즉위하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남인계 시파와 종교상의 신서파(信西派)를 배격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특히 천주교도들의 대학살로 몰았던 신유옥사(辛酉獄事) 후에 사교(邪敎)의 뿌리가 뽑혔다고 축배까지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역시 슬하에 소생은 없었고, 1805년{순조 5년}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정순왕후는 1745년(영조 21) 11월 10일 본관이 경주인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태어났다.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1759년(영조 35) 6월 22일, 15세의 나이에 66세 영조의 계비로 책봉되었다. 그녀의 친정은 노론의 중심가문이었으나,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던 아들 사도세자는 소론에 기울어져 노론에게 비판적이었고, 이 갈등으로 인해 사도세자의 죽음에 정순왕후가 빌미를 제공했다고 전해진다.
정조가 승하하고 1800년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는데, 스스로 여자국왕[女主, 女君]을 칭하고 실질적으로 국왕의 모든 권한과 권위를 행사하였다. 과감하게 국정을 주도하여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다음해에는 격렬한 천주교 탄압을 일으켜 정약용 등의 남인들을 축출하고, 국왕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질서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1803년 12월에 수렴청정을 그치게 되자, 정세가 바뀌어 벽파가 조정에서 숙청되고 친정인물들도 대부분 도태되었다. 1805년(순조 5) 1월 12일 춘추 61세로 창덕궁에서 승하하여, 그 해 6월 20일 원릉의 영조 옆에 예장되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66세 영조의 비가 된 정순왕후는 그 후 사도세자를 살해하는데 빌미를 제공하고, 정조와 반대 입장에 섰으며, 순조 대에는 수렴청정을 하며 실질적인 국왕의 권한을 행사했다. 이러한 그녀의 대담하고 당찬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는 왕비 간택 때에서부터 전해진다. 간택 시 영조가 왕비 후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고 대답했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보릿고개라는 인상적인 답을 하였다고 전한다.
왕비로 간택된 후에는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하여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꾸짖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왕비의 체통을 지킬 줄 아는 당찬 여인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죽어서도 오지 않는 님 기다리는 외롭고 애달픈 여인이여
영조 비(妃)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1757), 1757년, 경기 고양198호, 서오릉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徐氏; 1692-1757)의 홍릉은 특이하게 쌍릉(雙陵)으로 조성하려다가 단릉(單陵)으로 남게 되어 곡장(曲墻) 안쪽의 반은 빈 공간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이유는 영조가 홍릉을 정하면서 후(後)에 함께 묻히고자 공간을 미리 조성했는데, 영조 승하 후에 대신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정조(正祖)는 현재의 동구릉 소재 원릉(元陵)으로 영조의 능을 정하고 홍릉의 빈 공간은 그대로 남겨둔 것입니다.
홍릉은 21대 임금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이다. 영조는 왕후의 능지를 정하면서 장차 함께 묻히고자 왕비 능의 오른쪽에 자리를 비워두고 쌍릉 형식으로 조영하였다. 능 위의 석물도 훗날 자신의 능과 함께 조성될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배치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능은 정순왕후와 함께 동구릉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곳은 현재 빈 터로 석물만 쌍릉 양식으로 남아 있다.
홍릉은 병풍석이 없는 능침에 12칸의 난간석, 2쌍의 석양과 석호, 3면의 곡담, 4각의 장명등 옥개 등으로 이루어졌다. 기본적으로 숙종의 명릉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의 제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
홍릉의 무석인은 투구와 등에 장식이 많이 되어 있다. 뒷면에는 문양이 촘촘히 넣어져 있는 목 가리개를 위로 올렸다. 갑옷의 등 부분에는 물고기 비늘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가슴 부분은 구름 형태의 판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성왕후가 1757년(영조 33) 2월 15일 66세를 일기로 승하하자 영조는 왕비의 시호를 정성, 능호를 홍릉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위치인 서오릉 지역에 명혈을 택하게 하였다. 우허제(右虛制)를 쓰게 하여 훗날 자신도 정성왕후의 옆을 지키려던 영조의 바람은 1776년(정조 1) 정조가 이 홍릉 자리를 버려두고 현재 영조가 잠들어 있는 동구릉 내 원릉으로 능지를 정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다.
정성왕후(貞聖王后)는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齊)와 잠성부부인 이씨(李氏) 사이에서 1692년(숙종 18) 12월 7일에 태어나 숙종과 숙빈최씨의 아들 연잉군(延礽君)과 1704년에 결혼을 하여 달성군부인(達城郡夫人)에 봉해졌다. 시아버지인 숙종(肅宗)의 뒤를 이어 1720년에 왕위에 오른 시아주버니 경종(景宗,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이 후사가 없자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명으로 남편인 연잉군은 왕세제로, 달성군부인인 자신은 왕세제빈(王世弟嬪)으로 책봉되었다.
1724년에 경종이 승하하자 연잉군이 그 해 8월 30일 조선 21대 왕으로 즉위하니 왕세제빈은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가 33년만인 1757년 2월 15일 창덕궁에서 66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영조는 대행왕비의 시호를 정성왕후라 올렸다. 영조와 정빈이씨(靖嬪李氏)가 낳은 효장세자(孝章世子)를 경의군(敬義君)으로 봉하였다가 세자로 책봉하였으나 1728년에 요절하자, 후사가 없었던 정성왕후는 영빈이씨(暎嬪李氏)가 낳은 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데려다 아들로 삼고 원자로 봉하였다가, 이듬해에 세자로 책봉하였으나 1762년에 당파 싸움이 원인이 되어 희생되고 말았다. 사도세자는 두 아들을 두었으나 큰아들 의소세손은 일찍 죽었고, 둘째 아들이 훗날 정조 임금이다.
정성왕후의 장지를 처음에는 장릉(長陵, 인조의 무덤) 근처에서 찾았으나 영조의 본뜻은 아버지가 묻힌 명릉(明陵)과 어머니인 숙빈최씨의 무덤인 소녕원(昭寧園) 근처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서오릉 근처에서 다시 찾아보도록 지시하였다. 장지를 찾아 나선 총호사와 상지관, 남원군 이설은 창릉(昌陵, 예종의 무덤) 왼쪽 언덕 응봉(鷹峰) 아래 서향(西向) 기슭을 추천을 하니, 영조는 “나의 뜻은 서도에 있었으니, 비록 주먹만 한 곳을 얻더라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길 만하다.”고 흡족해 하였다. 장지를 조성하면서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를 숭릉(崇陵, 현종의 좌측을 비워두었다가 명성왕후가 묻힘)과 명릉(인현왕후의 우측을 비워두었다가 숙종이 묻힘)의 예에 따라서 정성왕후의 오른쪽을 비워두는 우허제(右虛制)를 명하면서 산릉도감에게 오른쪽 비어 있는 곳에 십자(十字) 모형을 새겨 정혈(正穴)에 묻어 표시를 해두도록 하였다.
이때 자신의 수릉 자리를 파보았던 낭청 김인대(金仁大)를 만나서 흙의 빛깔이 어떠했는지를 묻자 그는 “돌 같으면서도 돌은 아니었고, 단단하면서도 윤기가 있는 것이 정성왕후의 무덤 흙과 같았는데, 그 이유는 같은 산줄기라서 그런 것입니다.”하니, 영조는 “그대가 판결사 김태연(金泰衍)의 아들인데 일찍이 좌상 송인명(宋寅明)이 김태연을 추천하였었으나 미처 헤아려서 기용하지 못하여 마음에 늘 애석하게 여겼었다. 지금 그의 아들을 보니 그의 아비와 비슷하다.”하면서 김인대를 다른 자리에 중용하도록 해조(該曹)에 지시하였다. 한편 영조는 정성왕후 무덤에는 사방석(四方石)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내광은 석회만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정성왕후 국상 중에 인원왕후가 승하(1757년 3월 26일)를 하였는데, 인원왕후의 무덤의 석실 덮개돌은 태종(太宗)의 명을 받들어 전석(全石)을 쓰지 말고 둘로 나누어진 돌로 덮도록 하여 백성들의 고생을 덜어주고자 했다. 이렇게 조성된 장지에 그 해 6월 4일 정성왕후를 서향(乙坐辛向)으로 장사를 지내고 능호는 홍릉(弘陵)이라 하였다.
영조의 명으로 우측을 비워두었던 것이 현재까지도 빈 공간으로 남아있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 임금이 영조를 홍릉의 우측이 아닌 구 영릉(寧陵, 효종의 옛 무덤) 자리에 장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게 해서 영조가 손수 마련해 놓은 자리인 홍릉에 장사지내지 않고 구 영릉 자리에 장사를 지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홍릉은 산의 앞면이 아닌 뒷면이다. 좋은 터를 고를 때 가장 우선시 하는 논리가 산의 앞과 뒤를 구분하는 일이고, 좋은 터는 반드시 산의 앞쪽에 있는 이치를 생각해 본다면 정조는 할아버지를 나쁜 땅에 장사지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홍릉을 피했을 지도 모른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천하 명당에 누웠건만 옆구리가 시리다
아직도 영조를 기다리고 있는 정성왕후 영조 원비(妃)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1757) 1692년{숙종 18년} 달성(達城) 서씨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태어난 정성왕후는 1704년 숙종(肅宗)의 네 번째 왕자였던 연잉군{영조}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夫人)에 봉해졌고, 세자빈(世子嬪)에 이어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진봉(進封)됩니다. 66세의 생을 살았지만 슬하(膝下)에 소생없이 1757년{영조 33년}에 승하합니다.
21대 임금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는 1692년(숙종 18) 12월 7일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태어났으며, 1704년(숙종 30) 숙종의 둘째 아들인 연잉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졌다. 1721년(경종 1) 왕위에 오른 연잉군의 형 경종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자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는데, 이와 동시에 정성왕후도 세제빈으로 봉해졌다.1724년(경종 4) 경종이 승하함에 따라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숙종과 경종의 부인을 극진히 모시며 내명부를 지켰다. 1757년(영조 33) 2월 15일 소생 없이 66세로 승하하였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행장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왕궁 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양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 제전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여겨 기록한다. 영조는 정성왕후 승하 2년 후 66세의 나이에 15세의 소녀였던 정순왕후를 다시 맞아들였으나, 한 평생을 함께 했던 정성왕후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위의 행장에 잘 드러나 있다.
사도세자의 생모
영조 영빈(暎嬪) 이씨(? ~ 1764년), 1764년, 경기 고양198호, 서오릉(西五陵)
수경원은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무덤이다. 후궁묘의 예로 조영하여 석물들이 단촐하게 꾸며졌다.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는 1764년(영조 40)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능은 경기도 고양 연희 신촌리(현재 서울시 신촌)에 조영되었으나, 한일합병 이후인 1920년대 연희전문학교가 인근에 개교하고 확장하면서 교내에 수경원이 위치하게 되어 1968년 6월 현재의 서오릉으로 천장하게 되었다.
영조 영빈(暎嬪) 이씨(? ~ 1764년)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이다. 어려서부터 궁녀생활을 하다 귀인이 되었으며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고, 1730년(영조 6) 영빈으로 봉해졌다. 4명의 옹주와 후일 사도세자가 되는 원자를 출산하고 그 밑으로 옹주 하나를 더 낳았다. 1762년 사도세자가 폐위되는 일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망했을 때 영조는 후궁 제일의 의식으로 장례 지냈으며, 이듬해 의열(義烈)의 시호를 내릴 때는 그 의식을 친히 집행하였다. 시호 의열과 함께 같은 이름의 사당을 세워 제향했으나, 1788년(정조 12) 선희궁으로 고쳤고, 1870년(고종 7) 한때 육상궁(毓祥宮)에 합했다가 1900년에 다시 독립시켰다.
화현재 서울시 서대문구의 봉원사 입구에는 본래 영빈 이씨의 묘소인 수경원이 위치해 있던 연세대학교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고개가 있다. 사람들은 이 고개를 보통 '버리고개' 또는 '벌고개'라 부른다. 영조는 각별히 총애했던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크게 애통해 하며 후궁 제일의 예로 장례를 치르고 수경원을 조영하여 주었다.
그런데 이 수경원의 주룡(主龍)에 해당하는 산능선을 사람들이 넘어다니게 되면 등성이가 낮아질 뿐만 아니라 불경스러운 일이 된다 하여 통행을 금지시켰고, 만일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벌을 내렸으므로 '벌(罰)고개'라 했다. 이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버리고개'가 됐다고 한다.
조선 영조(英祖)의 후궁,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생모, 정조의 조모
정빈 이씨(靖嬪 李氏, 1694?~1721), 1778년, 경기 파주 359호 , 파주 삼릉(坡州三陵), 비공개지역
영조의 세자였던 진종의 어머니인 정빈 이씨의 묘소로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후궁이 되어 진종을 낳았습니다. 경종 즉위년인 1720년에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며 1725년 영조때 빈으로 봉해졌습니다. 수길원은 현재 문화재보호법상 공개를 하지 않고 있어 들어가보진 못했습니다. 소령원 입구 바로 못미쳐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시어머니 묘와 함께 있는 셈입니다. 석물이 하나도 없고 단지 곡장만이 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수길원 원역
묘비
수길원 전경
뒤에서 본 수길원
장명등 사이로 본 문인석
장명등
하지만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세자도 10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니 결국 세자의 자리는 사도세자로 넘어갔으니 만약 효장세자가 빨리 죽지만 않았어도 사도는 뒤주에서 죽을 운명을 피할수 있었을것을....안타갑습니다. 수길원은 풍수학적으로 대가 끊기는 흉당이라고 하는데 중국풍수서에도 기록될 정도의 천하명당인 소령원 옆에 자기 후궁의 묘는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만든 영조의 심사가 궁금합니다. 소령원昭寧園)가는 길 우측에 있는데 소령원과 함께 비공개지역으로 되어 있다.
파주삼릉관리소를 통해서 소령원 관리인이 문을 열어 주어야만 출입이 가능하다. 수경원은 도랑을 건너면 바로 위치해 있는데 수령이 제법 오래되었을 법한 향나무 한그루만이 수경원을 지키고 있다. 실제로 수경원에는 정자각터, 수복방터, 비좌대만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 정조의 생부 장조의 융릉(隆陵)과 양부모 진종의 영릉(永陵) 그리고 서오릉 능역에 있는 생조모 영빈이씨의 수경원(綏慶園)과 이곳 양조모 정빈이씨의 수길원을 비교해 볼 때 정조가 양부모 쪽보다는 생부모 쪽에 대한 애틋함이 있다.
정빈이씨 [靖嬪 李氏, 1693~1720] 조선 제21대 영조의 후궁, 아버지는 이준철(李俊哲)이다. 소령원 숙빈최씨의 며느리, 파주삼릉의 영릉 진종의 어머니이다. 이준철의 딸로 동궁전 나인이었고, 영조가 아직 연잉군이었을 적에 그의 첩이 되었다. 1719년, 영조의 장남인 경의군(敬義君, 효장세자, 훗날의 진종)을 낳았다. 이후,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세자궁에 속한 내명부 종5품 소훈(昭訓)이 되었으나 1721년에 28살의 나이로 급작스레 훙서하였다. 1722년 환관 장세상이 궁녀들과 공모해 이소훈을 독살하였다는 발고가 있었고 이 사건은 신임사화로 번지게 된다. 정비인 정성왕후가 아이가 없던차라 맏아들을 낳아주었으니 영조의 애정이 없었다고는 말할수 없습니다.
1724년 영조가 왕으로 즉위하자 내명부 정 4품 소원(昭媛)에 추증되었으며, 1725년에 경의군이 세자가 되자 정빈(靖嬪)의 봉호를 받았다. 이후 정조가 즉위함에 따라 법적 부친인 효장세자가 진종대왕(眞宗大王)으로 추존되자, 온희(溫僖)의 시호와 수길원(綏吉園)의 원호, 연호궁(延祜宮)의 궁호가 추상되었다. 연호궁은 칠궁의 하나이다.
소원(昭媛)으로서 숙종 45년(1719) 효장세자[孝章世子 : 뒤에 진종(眞宗)으로 추존]를 낳았고, 영조가 즉위하기 전 2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1724년 영조가 즉위하면서 정빈에 봉해졌다. 정조 2년(1778) 수길원(綏吉園)으로 격상하고 온희(溫僖)란 시호를 올렸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대, 517년, 1392 - 1910 ]
원(園) 13기(基)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호)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익종(翼宗) 一 수릉(綏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一 융릉(隆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一 영릉(永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一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一 경릉(敬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제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一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一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호)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기(基) 제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一 유릉(裕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제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一 홍릉(洪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시
왕릉 35기 제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一 예릉(睿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一 경릉(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제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一 인릉(仁陵 : 사적 제194호)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제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一 건릉(健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二 홍릉(弘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一 원릉(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二 혜릉(惠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一 의릉(懿陵 : 사적 제204호)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三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二 익릉(翼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一 명릉(明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제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一 숭릉(崇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一 영릉(寧陵 : 사적 제195호)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二 휘릉(徽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一 장릉(長陵 : 사적 제203호)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二 성묘(成墓 : 사적 제365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一 목릉(穆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一 강릉(康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一 효릉(孝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三 희릉(禧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二 온릉(溫陵 : 사적 제210호)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一 정릉(靖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三 회묘(懷墓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二 순릉(順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一 선릉(宣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路)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二 공릉(恭陵 : 사적 제205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一 창릉(昌陵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7대 세조(第七代 世祖) 一 광릉(光陵 : 사적 제197호)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二 사릉(思陵 : 사적 제209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一 장릉(莊陵 : 사적 제196호)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제5대 문종(第五代 文宗) 一 현릉(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4대 세종(第四代 世宗) 제3대 태종(第三代 太宗) 제2대 정종(第二代 定宗)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三 정릉(貞陵 : 사적 제208호)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二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一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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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밥 먹고 도시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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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런 곳에서 글을 쓰는구나~상허 이태준 가옥인 수연산방 (0) | 2013.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