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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7 (2) 제20대 경종 (景宗) _ 의릉懿陵, 혜릉惠陵

草霧 2013. 8. 12. 14:44

 

 

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7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7

 

 

 

(2)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경종과 선의왕후릉

혜릉-단의왕후릉 [복원된 정자각]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2)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모진 생모 만나 권세는 커녕 후사조차 못 이어

 

 

 

 

 

의릉懿陵

   

 

 

경종 (景宗, 이균; 1688-1724, 재위 4), 계비(繼妃) 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 魚氏; 1705-1730),

1724, 서울 성북구 204

 

20대 경종(景宗) 의릉 큰이미지

 

 

20대 경종(景宗) 의릉 첫번째 작은이미지20대 경종(景宗) 의릉 두번째 작은이미지20대 경종(景宗) 의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조선경종 의릉의릉은 20대 왕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의 능으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한 언덕에 앞뒤로 나란히 배치한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능이다. 위쪽에 있는 경종의 능침에만 곡장을 둘렀고, 왕릉과 왕후릉 모두 혼유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석물은 별도로 배치하였다. 이러한 배치 양식은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생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 이유이며 자연의 지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능원을 조성하려는 우리 민족만의 자연관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능묘 조각들은 규모가 작고 왜소한 편이다. 봉분에는 난간석을 설치하였으며, 난간 석주에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를 문자로 간략히 새겨 넣었다. 경종 능의 망주석 세호는 왼쪽은 위를 향해 기어오르고 오른쪽은 아래로 내려오게 조각되어 있다. 이와 달리 계비 선의왕후 능의 망주석 세호는 경종 능과 반대로 조각되어 있다. 장명등은 지붕이 4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숙종대 이후 나타난 새로운 형식으로 건원릉부터 나타난 8각등에 비해 한결 간략하면서도 소박한 인상을 준다.

   

 

문무석인은 전체적으로 4등신의 땅딸막한 비례에 움츠러든 어깨가 경직된 느낌이다. 갑옷을 걸치고 장검을 두 손으로 힘차게 짚고 있는 무석인의 뒷면에는 짐승 가죽을 나타내기 위해 꼬리가 말린 것을 재미있게 표현하였다.왕후릉은 왕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 없이 난간석 만으로 봉분을 호위하고 있으며, 석물들의 배치 또한 왕릉과 같은 형식이다.

 

 

눈이 많이 내린 그해 의릉
눈이 많이 내린 그해 의릉
지금 의릉에는 진달래와 미선나무가 만발하였습니다.
지금 의릉에는 진달래와 미선나무가 만발하였습니다.
신과 인간이 만나는곳!
신과 인간이 만나는곳!
남다른 메세지_영준
남다른 메세지_영준
의릉 답사기
의릉 답사기
의릉에 가다
의릉에 가다
왕릉... 그 신비로운 곳
왕릉... 그 신비로운 곳

 

아름름다움을 엿보는 곳
아름름다움을 엿보는 곳
의릉(懿陵)-아름다운 릉
의릉(懿陵)-아름다운 릉

 

의릉 풍경
의릉 풍경

 

경종과 선의왕후.. 슬픈 영혼들이 잠든 곳
경종과 선의왕후.. 슬픈 영혼들이 잠든 곳
의릉답사기?
의릉답사기?

 

1724(경종 4) 825일 경종이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자 같은 해 1216일 양주 중량포의 천장산 기슭 언덕에 예장하고 능의 이름을 의릉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6년 후 1730(영조 6) 629일 경덕궁 어조당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계비 선의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1019일 경종 왕릉 아래에 능을 조영하였다.

   

천장산과 의릉
천장산과 의릉
의릉의 봄봄봄
의릉의 봄봄봄
의릉의 봄봄봄

 

정자각에서 본 의릉
정자각에서 본 의릉
정자각에서 본 의릉
정자각에서 본 의릉
태풍구름 걷힌 의릉
태풍구름 걷힌 의릉
태풍걷힌 구월의 의릉
태풍걷힌 구월의 의릉
태풍걷힌 의릉
태풍걷힌 의릉
태풍 걷힌 의릉
태풍 걷힌 의릉
의릉 금천에는
의릉 금천에는
의릉의 싱그런 여름
의릉의 싱그런 여름
의릉의 여름
의릉의 여름

 

의릉의 가을
의릉의 가을
의릉의 가을
의릉의 가을
의릉의 가을
의릉의 가을

 

눈 내린 의릉과 천장산
눈 내린 의릉과 천장산
눈 내린 의릉과 천장산
눈 내린 의릉과 천장산
눈 내린 의릉과 천장산
눈 내린 의릉과 천장산
눈 내린 의릉과 천장산
눈 내린 의릉과 천장산
눈 내린 의릉과 천장산
눈 내린 의릉과 천장산
의릉의 겨울
의릉의 겨울
의릉의 겨울
의릉의 겨울

 

사적 204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나 1960년대 초 당시의 중앙정보부가 의릉 경역 내에 자리잡았던 탓에 일반인에게는 철저히 봉쇄된 구역이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돌다리를 놓는 등 훼손이 심해 궁궐의 후원처럼 변모하였다. 국가안전기획부로 변경된 중앙정보부가 이사가면서 199651일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었다.

 

    의릉관리소-의릉 관리소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景宗{이균; 1688-1724, 재위 4}과 계비(繼妃) 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魚氏; 1705-1730)의 의릉은 쌍릉(雙陵)의 형식이면서도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영향으로 좌우로 나란한 봉분 조성이 아니라 앞뒤로 봉분을 조성했습니다. 여주(驪州)에 있는 효종(孝宗)의 영릉(寧陵)과 유사한 모양이지만, 경종의 의릉은 영릉보다 더 정확하게 앞뒤로 조성되어 정자각(丁字閣)에 보았을 때 앞의 능은 선의왕후릉이고 뒤의 능은 경종의 능입니다. 경종의 능에만 뒤에 곡장(曲墻)이 있어 쌍릉(雙陵)의 형식임을 알 수 있고, 숙종의 명릉(明陵)에 이어 역시 왜소한 석물(石物)들과 사각(四角)의 장명등이 특이합니다.

 

 

    (우136-150) 서울시 성북구 예술길 100. 1호선 신이문역 1번 출구, 6호선 돌곶이역 7번출구에서 도보로 약 15분정도면 오실 수 있습니다.

 

 

의릉(懿陵)은 경종(景宗)을 위쪽에,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를 24m 아래에 장사를 지낸 동원상하봉릉(同原上下峰陵)의 형식으로 조성된 능이다. 경종은 숙종 14년(1688)년 10월 27일에 희빈 장씨(禧嬪張氏)가 낳은 이윤(李昀)이다. 왕위에 오른 지 14년 만에 아들을 얻은 숙종(肅宗)은 나라의 근본이 정해지지 않아서 인심이 매인 곳이 없었는데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며 매우 기뻐하였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정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아직 젊은데 후궁의 소생을 원자(元子)로 삼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강력하게 반대를 하였으나 숙종은 경종이 태어난 두 달 만에 원자로 삼았다.

 

 

 

 

 

경종은 1720년 6월 13일에 경덕궁에서 조선 20대 왕위에 올랐으나 병약하여 후사가 없었으니 이듬해에 이복동생인 연잉군(延仍君)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경종은 즉위한지 4년여 만인 1724년 8월 25일 창경궁에서 37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총호사 이광좌(李光佐)가 상지관 11명을 거느리고 장지를 구하다가 구 영릉(舊寧陵, 구 효종릉)·중량포(中粱浦)·용인(龍仁)·교하(交河)·왕십리(往十里) 등 다섯 곳을 선정하였다. 이광좌는 구 영릉을 주장하고, 도감당상 김일경(金一鏡)·이사상(李師尙) 등은 중량포를 주장하였다.

 

 

 

이광좌는 “구 영릉은 건원릉(健元陵)의 좌측에 있는데, 옛 부터 대신들과 상지관들에게 대단한 땅으로 일컬어졌으며, 영릉을 옮길 때에도 병풍석 등 석물에 틈이 벌어졌으나 풍수적으로 나쁘다고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으니 구 영릉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대신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천릉(遷陵)한 장소는 다시 쓰는 전례가 없다고 하니, 오직 임금께서 결정하실 뿐입니다.”하였다. 한편 김일경은 “비록 사대부의 집안이라 하더라도 옮겨간 장소에다가 그 어버이를 장사지내려고 하지 않는데 하물며 왕릉을 조성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신하들은 중량포를 장지로 정할 것을 주장합니다.”하였다. 용인과 교하 땅은 선조 임금을 장사지낼 때 후보지로 거론되었으나 이항복(李恒福)이 반대하여 쓰지 안했다는 이유로 제외하였다. 영조(英祖)의 명으로 중량포를 다시 살펴보게 하였는데, 모두 아름답다고 하니 대비(大妃, 선의왕후)에게 아뢰고 마침내 중량포 천장산(天藏山)을 장지로 결정하여 그해 12월 16일에 북동향(申坐寅向)으로 장사 지내고 능호를 의릉이라 하였다.

 

구 영릉을 옮길 때 상지관 반호의(潘好義)가 “지금은 비록 천릉을 하나 훗날 반드시 이 자리를 다시 쓸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근거로 이명언(李明彦)이 다시 구 영릉을 장지로 정할 것을 주장하니 영조는 “산릉의 일은 매우 중요하여 총호사나 나도 함부로 결정을 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조선 3백 년 동안 천릉한 곳에 다시 쓴 전례가 없을뿐더러 새 능 자리를 번복하여 다시 정하는 것은 매우 중대하다. 그런데 이를 다시 상언하는 것은 아주 경솔한 행동이다.”면서 이명헌을 추고 할것을 명하였으나 다른 대신들의 반대로 철회하였다. 이명헌은 김일경의 오른팔이었으나 산릉의 일을 가지고는 다른 논리로 나왔었다. 그러나 구 영릉은 52여 년 후에 영조의 능인 원릉(元陵)이 되어 반호의의 말이 현실로 되었다.

 

경종을 장사 지낸지 6년 뒤인 영조 6년(1730) 6월 29일에 선의왕후 어씨(魚氏)도 경덕궁에서 26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총호사인 우의정 이집(李㙫) 등의 추천으로 장지를 의릉의 아래에 정하여 그 해 10월 19일에 경종과 같이 북동향(申坐寅向)으로 장사를 지냈다. 이 터는 경종을 장사 지낼 때 그 왼편에 묘(墓)를 쓸 만한 혈(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친정아버지인 함원부원군에게 “나는 반드시 이곳을 돌아갈 터로 삼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영조가 선의왕후의 뜻을 저버릴 수 없어 영릉(寧陵)을 모방하여 경종의 무덤과 상하혈(上下穴)로 장사를 지냈다.

 

선의왕후는 어유귀(魚有龜)와 해미현감 이하번(李夏蕃)의 딸 사이에서 숙종31년(1705) 10월 29일에 태어나 1718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9월 16일에 혼인을 하고, 1720년에 왕비가 되었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의릉(경종)20090922-29.JPG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한 왕의 능 행차

 

의릉 행차 시 백성들의 민원을 해결했던 조선 21대 왕 영조(1694~1776) 『영조실록1725(영조 1) 827일자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날 임금이 의릉(懿陵)에서 환궁하다가 길가에 가마를 멈추고 양주(楊州)에 나이 많은 사람을 불러서 그 고을의 폐막을 물었다.

 

영조실록1726(영조 2) 212일자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의릉(懿陵)에 행행하여 예법대로 성묘를 하고, 재전(齋殿)에 환어하여 경기 관찰사 및 수령을 불러 백성의 폐단을 물었다.

 

궁궐의 정전에서 신하들의 상소문만을 처리하던 조선의 왕은 백성들이 어떠한 삶을 사는지 직접 살필 기회가 적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성에서 10리 이상 떨어진 선왕의 능에 행차하는 것은 백성들과 소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실제로 능행차 시 백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민원을 처리한 기록이 영조의 의릉 행차 기록 외에도 다수 남아있으며, 능행에 나선 왕과 백성들의 만남에 대한 일화가 다양하게 전하고 있다.

 

 

의릉의 수난 이야기

    

 

 

의릉의 현대사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의 사초지에 조성한 인공연못, 현재는 사초지로 복원되어 남아있지 않음1. 18세기에 조성된 의릉

의릉은 조선 20대 왕인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의 능이다. 1724(경종 4) 경종이 37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경릉을 조영하였고, 그로부터 6년 뒤 계비 선의왕후가 승하하여 경종의 능 앞쪽에 선의왕후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렇게 왕과 왕비의 능을 하나의 능역에 앞뒤로 놓아 조영한 동원상하릉 형식은 조선 왕릉에서는 매우 드물다. 당시의 양주 중량포 천장산 기슭에 조영되었으며, 현 주소는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1-5번지이다.

 

2. 접근 금지 구역으로 설정된 의릉

의릉은 다른 왕릉들처럼 긴 세월을 별 탈 없이 견뎌왔고, 조영된 지 약 250년이 지난 1970526일에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204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문화재로 지정된 이곳을 함부로 답사할 수 없었다. 1962년 중앙정보부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일반인들의 접근이 철저히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관련사진3. 궁궐의 후원처럼 변모해 버린 의릉

일반인들의 접근만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릉의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는 왕릉의 우측 능선을 깎아서 넓은 축구장을 조성하고 콘크리트 청사 건물을 세우는가 하면, 좌측 능선 역시 청사를 짓기 위해 산허리를 잘라냈다. 1972년경에는 정자각 앞과 홍살문 사이 사초지의 땅을 파서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고 관상어를 기르며, 외래수종 식재와 전통에 어울리지 않는 조경시설물들을 설치하였다. 2003년 발굴조사 당시 남아 있던 고 건축물로는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뿐이었으며, 수복방, 수라간, 재실은 멸실되어 남아 있지 않았다.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의 사초지에 조성한 인공연못, 현재는 사초지로 복원되어 남아있지 않음

 

4. 다시 개방되는 의릉

의릉은 능의 주인인 경종이 당쟁 속에 순탄치 못한 짧은 삶을 살다간 것과 같이 많은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국민들과 격리된 채 원형을 잃고 궁궐의 후원처럼 변모해 버렸던 의릉은 약 30년 만에 접근 금지 구역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국가정보원(구 중앙정보부)이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새로운 청사를 짓고 19959월에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5. 문화원형의 계승을 위한 노력

199651일부터는 일반 국민들도 그 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의릉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친 토지 반환으로 현재는 의릉 대부분의 능역을 되찾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의릉이 국민에게 돌아온 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문화재청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는 조선 왕릉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자 다양한 복원 방법을 동원하며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온전하게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영휘원과 홍릉 이야기

  

홍릉 수목원 옆 자리 잡고 있는 순헌귀비의 원 영휘원. 1. 천장산 부근 조선 왕실의 능터

의릉은 천장산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 줄기가 뻗어 내려오다가 천장산으로 이어지는 이 지대는 풍수지리적으로 뛰어난 길지로서 조선 왕실의 능터로 사용되었다. 이 주변으로는 26대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의 묘인 영휘원과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아들 이진의 묘인 숭인원이 자리 잡고 있다.

 

2. 홍릉으로 오해받는 영휘원

영휘원에 엉뚱하게도 이곳이 홍릉이 아니냐는 문의 전화가 심심치 않게 걸려온다. 뿐만 아니라 영휘원과 맞붙은 수목원은 홍릉 수목원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릉(洪陵)이 있고,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영조의 비 정성왕후의 홍릉(弘陵)이 위치하지만, 이 근방에는 홍릉이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곳의 수목원을 홍릉수목원이라고 부르고, 영휘원을 홍릉으로 착각하게 되었을까?

 

관련사진3. 명성황후의 홍릉이 있던 자리

의릉과 영휘원이 있는 현재의 동대문구 청량리동 일대는 왕실의 능터이자 조선 왕실 소유의 국유림이었다. 1895(고종 32) 을미사변으로 인해 명성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능을 현재의 산림과학원 안에 쓰게 되면서 이곳이 홍릉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1919216일 명성황후를 모신 홍릉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설이 거론되어, 현재의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옮겨졌고, 고종의 능과 합장을 하게 되었다. 명성황후의 능이었던 홍릉은 옮겨졌지만, 지명으로 여전히 남아 근방의 영휘원이 홍릉으로 종종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4. 영휘원에 잠든 순헌귀비

영휘원에 잠든 순헌귀비는 일반인에게 엄상궁으로 익숙하다. 50세 전후의 나이 많은 궁녀였던 그녀가 갑자기 고종의 승은을 입게 되어 후궁으로 발탁되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는 자신의 슬하에 있던 늙고 못생긴 궁녀가 남편과 동침을 한 것에 자존심이 상하여, 화를 내며 그녀를 대궐 밖으로 내쫓았다. 그로부터 10년 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었고, 엄상궁은 다시 대궐에 들어와 고종의 수발을 들게 되었다.

 

5. 여성의 신교육에 공헌한 순헌귀비

순헌귀비는 고종의 승은을 입게 되었을 당시 늙고 못생긴 여인이라고 하여 주위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공포 분위기가 짙게 깔린 대궐에서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시키는 등 왕의 부인으로서의 기품과 기지를 발휘하였다. 뿐만 아니라 생전에 모은 재산으로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여성들의 신교육을 위해 애썼으며, 나라를 짊어지고 나아갈 인재를 키우는 교육에 큰 도움을 주었다.

 

6. 일제 강점기 조선 왕실의 비극

고종과의 사이에는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영친왕이다. 1911718일 순헌귀비는 대궐에서 고종과 함께 황태자인 아들이 힘들고 고된 훈련을 받으며 점심으로 주먹밥을 먹는 광경을 활동사진으로 보게 되었다. 순헌귀비는 이 영상에 충격을 받고 입에 물고 있던 떡에 급체하여 이틀 후인 1911720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이곳 영휘원에 잠들게 되었다.

   

 

힘없는 왕 경종

 

  

경종(景宗, 이균, 1688-1724, 재위 4)

장희빈(張禧嬪)의 아들로 유명한 경종은 33세의 나이에 왕위(王位)에 오르지만, 평소 병이 많아 불과 4년 밖에 재위에 있지 못한 비운(非運)의 국왕이었습니다. 신축옥사(辛丑獄事)과 임인옥사(壬寅獄事)로 노론(老論) 세력이 대거 축출되고 소론(小論) 세력이 집권했던 신임사화(辛壬士禍)가 격렬하게 진행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병약(病弱)한 경종은 즉위 원년에 후사가 없을 것으로 예측되니 이복동생인 숙빈(淑嬪) 최씨(崔氏)의 소생(所生) 연잉군{영조}을 세자(世子)로 책봉해야 한다는 노론의 의견을 따라할 정도였습니다.

 

경종은 1688(숙종 14) 1027일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왕궁에서 허드렛 일을 하던 나인 출신의 희빈 장씨이다.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세 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그들에게서 아들이 없어 1690(숙종 16) 당시 3세였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르렀다.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가 폐출되자 왕후가 되었다가 1701(숙종 27) 죽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무고의 옥사건으로 사사되는 일이 있었다. 이 때 경종의 나이 14세였다.

 

그 뒤로 경종은 병약하여, 세자로 있으면서 그의 이복동생 연잉군(훗날 영조)가 대신하여 세자대리청정을 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1720613일 경덕궁 숭정문에서 3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재위 4년간의 재위시절에도 신하들의 당쟁에 시달려 재위기간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1724(경종 4) 825일 마음의 병을 이기지 못하고 창경궁에서 승하하였다.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721

1년

8월, 왕제(王第) 연잉군 세자 책봉

1723

3년

5월, 서양의 수총기(水銃器:소화기) 만듬

12월, 김창집 등 4대신 귀양{신축옥사}

10월, 남구만 <약천집(藥泉集)> 간행

1722

2년

3월,목호룡 상언으로 대옥사{임인옥사}

1724

4년

8월, 왕 승하{1688- } 세자 즉위

 

어설픈 왕릉

왕릉 아닌 왕릉

원에서 능으로

당쟁에 휘둘린 병약한 왕

수총기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죽실이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게와 감, 상극 음식 먹고 절명
간질과 비만에 시달린 경종

경종 최후의 날, 왕은 독살당했는가

경종은 장희빈의 아들로 영조의 이복형이 됨. 당시 소론은 경종을 지지했고, 노론은 영조를 지지했음.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최씨는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했다고 고발한 그 여인이다. 즉,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은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최씨가 죽게 한 것이다. 숙빈최씨는 서인세력이라 볼 수 있고, 장희빈은 남인세력이라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희빈이 저주한 사실을 알게 된 숙종은 장희빈을 사사했지만, 장희빈의 처리를 두고 서인들간에 의견대립이 있었었다. 장희빈을 죽이려고 하자 경종은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소론측은 세자를 불쌍히 여겨 살려주자고 주장했고, 노론측은 죽여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죽게 된다. 이런 배경에서 숙종과 노론측에서는 경종의 즉위가 영 껄끄러웠던 것이고, 영조를 포함한 노론측의 경종 독살설이 제기된 것이다.


독살설에 연루된 임금 인종, 효종, 경종, 정조, 고종

2003년 방영된 TV 사극 ‘장희빈’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어머니를 부여잡고 슬퍼하는 경종. 실제의 경종은 어릴 때부터 비만이었다. 

 

경종 사망 당시 상황

 임금의 병환이 여러날 동안 낫지 않아 수라 올리는 것마저 싫어하였는데, 이날은 한열(寒熱)의 징후까지 있어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 경종실록

보름후, 8월 20일 연잉군의 주장으로 게장과 생감을 올리다. 어의들은 반대했지만, 경종은 이로 인해 식성을 되찾아 식사량이 많았음. 이날 밤 가슴과 배가 조이듯이 아파옴. 왕세제가 울면서 말하기를, '인삼과 부자를 급히 쓰도록 하라'고 하였다.- 경종실록

 

어의들의 반대:삼다를 쓰면 안됩니다. 제가 처방한 약을 진어하고 다시 삼다를 올리게 되면 기를 능히 움직여 돌리지 못할 것입니다.

   

연잉군(영조): 사람이란 본래 자기 의견을 세울 곳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이 어느때라고 자기 의견을 내세우느라 인삼을 쓰지 못하게 하는가. ㅜ8월 25일 경종 승하하다. 이로 인해 경종의 독살설이 제기되어 영조를 괴롭힘

영조 3년 전라도 전주에서 괘서 사건 발생. 영조 4년 3월 이인좌의 난 발생, 이후 계속해서 크고 작은 독사설 제기됨

 

 

독살설에 대한 설명
 생감, 게장을 사용하게 한 영조의 처방에 대한 의구심
 감과 게를 함께 먹으면 복통과 심한 설사가 따른다.- 중약대사전
        
영조 vs 어의
어의들의 처방: 계지 + 마황
 영조의 처방: 인삼 + 부자

 어의들은 부자, 마황은 상극이므로 함께 사용하면 안된다고 함.  조금 지나자 임금의 눈동자가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이날 밤 경종은 사망. 생감과 게장을 먹어 경종의 환후가 나빠졌고, 어의들의 처방과 상극인 인삼과 부자를 사용한 점을 들어 독살설을 제기함.

 

 

경종은 아들이 없었기에 노론의 주장에 못이겨 이복동생인 영조를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집권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노론의 이런 주장은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피만 흘리지 않았지 쿠데타라고 볼 수 있는 정도의 월권행위인 것이다. 당시 경종의 처방을 통해, 한의사는 스트레스성 증상이었을 것이다라는 의사들이 병명을 알 수 없을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처방을 내린다. '신경성입니다. 좀 쉬십시오'

 

 

 

어의들은 부자, 마황은 상극이므로 함께 사용하면 안된다고 했다.부자는 독한 약재로 함부로 사용하면 안되는 놈이다. 과용하면 혀나 입술이 뻣뻣해지면서 말이 안되고 입안과 위가 찌르는 듯이 아파온다고 한다.

영조는 노론,소론간의 당파싸움을 종식키 위해 탕평비를 세우고 탕평책을 실시하나, 소론들의 끊임없는 경종 독살설의 제기로 이를 철회하고 일당 독재로 변경해 버리고 만다.

 

 

 

관련사진

 

 

 

계비(繼妃) 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 魚氏, 1705-1730)

관련사진1705{숙종 31} 함종(咸從) 어씨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구(魚有龜)의 딸로 태어난 선의왕후는 1718년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고 1722{경종 2}에 왕비에 진봉(進封)됩니다. 영조 즉위 후 대비(大妃)로 지내다가 26세의 나이{영조 6}로 요절합니다.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고 전해지는데, 역시 슬하(膝下)에 자식은 없었습니다.

 

1721(경종 즉위)1722(경종 2) 신축, 임인 두 해에 걸쳐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큰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를 신임사화라고 한다. 1720(숙종 46)에 숙종이 승하하자, 세자였던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으며 3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당시는 노론과 소론의 위험한 당쟁이 계속되던 때였는데, 당시 노론의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가 중심이 되어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소론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1721(경종 즉위) 8월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자 노론 측은 한 발 더 나아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경종을 두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소론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결국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신들은 파직 후 유배를 당하였다. 그 뒤에도 소론 강경파들은 노론의 숙청을 요구하였다. 1722(경종 2)에는 노론측이 세자 시절에 경종을 시해하려고 했다는 고변을 기점으로 노론 4대신을 사사하며 수백 명의 노론파를 제거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소론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지만,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자 조정에는 또 한 차례의 숙청의 바람이 불게 된다.

 

선의왕후와 경종의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다. 경종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둘 희망이 없다고 여겨진 선의왕후는 종친 중 어린 아이를 입양하여 후사를 정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경종비를 중심으로 한 궁중의 일각에서는 소현세자의 후손인 밀풍군의 아들 관석을 입양하려는 움직임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경종 즉위 1년 만인 1721년 8월의 어느 날, 하룻밤 사이에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이 세제로 책봉되었다.


경종이 아무리 병약하다고는 하나 즉위 1년 후 세제를 책봉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노론은 소론과의 알력 다툼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제 책봉 뿐 아니라 세제의 대리청청까지 주장하였고, 계속적인 당쟁과 숙청의 바람을 몰고 왔다. 이러한 어지러운 정국의 한 가운데에, 결국 선의왕후의 양자 입양은 무산되었다.

 

 

여자로 태어남이 이토록 서러울까 죽어 팔자를 고친들 마음에 흡족하리

 

 

혜릉惠陵

   

 

 

단의왕후 심씨(端懿王后 沈氏, 1686-1718), 1718, 경기 구리 193, 동구릉(東九陵)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 혜릉 큰이미지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 혜릉 첫번째 작은이미지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 혜릉 두번째 작은이미지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 혜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동구릉 목록 경종(景宗) 즉위 후 추존(追尊)된 정비(正妃) 단의왕후 심씨(端懿王后 沈氏; 1686-1718)의 혜릉은 소실되어 초석만 남아있던 정자각(丁字閣)과 홍살문(--)을 근래에 다시 고증(考證)을 통해 복원해서 주변의 다른 능들과 보조를 맞추게 되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에 작은 석물(石物)들 등이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고, 특이하게 능의 방향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면서 자리잡고 있습니다. 봉분은 병풍석(屛風石) 없이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있으며, 난간석에는 12지수(十二支獸)가 새겨져 있습니다.

 

혜릉(惠陵)은 동구릉 서측 능선 숭릉과 경릉 사이에 조성된 단릉이다. 비교적 낮은 구릉에 조성되었으며, 능역이 전반적으로 좁은 형태이다. 석물의 크기 또한 다른 왕릉 보다 작게 만들어졌다. 단의왕후가 승하 시에는 세자빈의 신분이었으므로, 원의 형식으로 단출하게 지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곡장 안의 봉분은 병풍석 없이 12칸의 난간석만 둘러져 있고, 봉분 주위에는 네 쌍의 석호와 석양이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문석인은 173cm의 키에, 눈을 치켜뜬 차가운 이미지로 조각되었다. 무석인은 문석인보다 약 10cm 큰 키에, 이목구비가 상당히 이국적인데 특히 치아를 잔뜩 드러내 놓고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망주석 역시 다른 능보다 훨씬 작은 규모로 만들었는데 조각된 세호의 좌우 방향이 다르게 되어 있다. 장명등은 현재 터만 남아 있고 사라진 상태이다

 

1718(숙종 44) 경종의 비 단의왕후 심씨의 혜릉을 조성하였다. 단의왕후는 1718(숙종 44) 27일 소생이 없이 창덕궁 장춘헌에서 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하였다. 28일에 소렴하고, 9일에 대렴하였다. 산역은 각 도에서 승군 1,000명을 징발하여 조성하였다. 416일에 발인하여, 19일 현종의 능인 숭릉 왼쪽 산줄기에 안장하였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추봉하여,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고 하였다.

 

 동구릉-동구릉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는 서울 성북구 석관동의 의릉에 같이 모셔져 있으나, 일찍 승하한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은 이곳에 홀로 조성되었다. 6.25로 인해 홍살문과 정자각이 불타서 주춧돌만 남은 상태였으나 1995년 새로 복원하여 왕릉의 면모를 다시금 갖추게 되었다.

 

혜릉(경종비)20090905-24.JPG    

 

혜릉(惠陵)은 경종 비(景宗妃)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沈氏)의 능으로 동구릉 내에 있다. 단의왕후는 청은부원군 심호(沈浩)와 고령박씨(高靈朴氏) 사이에서 숙종 12년(1686) 5월 21일에 태어났다. 단의왕후의 13대조 청성백 심덕부(沈德符)는 본관이 청송(靑松)으로 조선개국의 원신(元臣)이며, 영의정 안효공(安孝公) 청천부원군 심온(沈溫, 세종대왕의 장인)은 12대조이다. 영의정 충혜공 심연원(沈連源)은 8대조이고, 영의정 익효공 심강(沈鋼)은 7대조이다. 영의정 충정공 심열(沈悅)은 5대조이며, 홍문관교리 심희세(沈熙世)는 고조부이시다.

 

 

어머니는 고령 박씨인데, 외조부는 군수 박빈(朴鑌)이고, 외증조부는 이조판서 박장원(朴長遠)이고, 외고조부는 직장(直長) 박훤(朴烜)이다. 선조(先祖)의 무덤이 있는 곳에서 십리정도 떨어진 동리 밖까지 밤마다 연달아 빛이 뻗쳐 동리가 대낮처럼 밝아 주변 산에 있는 새와 짐승들이 보일 정도였다. 어느 날 스님이 용문산(龍文山)에서 내려와 말하기를, “이 곳에 날마다 연달아 서기(瑞氣)가 있으니, 아주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시기에 박씨 부인이 비로소 임신하고 꿈을 연달아 꾸었는데, 달빛이 환하게 비추고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현란하여 마치 비단과 같았고, 또 여러 마리의 봉황새가 쌍쌍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뒤 단의왕후가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빼어나게 슬기롭고 의젓하고 유순하였으며, 첫돌을 지나기도 전에 말을 하였다.

 

 

11살이 되던 1696년에 간택되어 왕세자빈에 책봉되었다. 어린나이에 대궐로 들어간 단의왕후는 인현왕후, 인원왕후, 숙빈최씨, 명빈박씨 그리고 시어머니인 희빈장씨를 극진히 모시면서 병약한 남편도 잘 섬겼다. 그러나 인현왕후의 폐출과 복위, 희빈장씨의 사사(賜死) 등을 지켜보는 생활이 편안할 리가 없었다. 병약하였던 남편은 어머니가 사사된 뒤 병환에 줄곧 시달렸으며 후사 또한 없었다. 그런 와중에 단의왕후는 갑자기 병을 얻어 남편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숙종 44년(1718) 2월 7일에 승하하였다. 시부모와 남편에게 정성을 다한 며느리를 매우 아끼고 소중하게 여겼던 숙종은 뜻하지 않은 상을 당하자 통곡하고 매우 애통해 하면서 시호를 단의빈(端懿嬪)이라 내렸다. 상사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전례에 따랐다.

 

 

 

① 망주석은 다른 왕릉들보다 작게 만들어졌으며 좌우 세호의 방향이 다르게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봉분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러져 있고, 난간석에 새겨진12지가 비교적 또렷하게 남아 있다.

② 무석인은 얼굴의 3분의 1을 코가 차지하고 있으며, 동그란 눈은 움푹 들어갔고 입은 치아를 일곱 개나 내놓고 웃는 모습이 이국적이다. 이에 반해 한 단 위에 있는 문석인은 가느다란 눈을 위로 치켜뜬 채 입을 꼭 다물고 있다.

③ 1990년대 초에 재건된 정자각.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217-14묘소도감에서 장지(葬地) 후보지로 명릉(明陵, 인현왕후 능)과 익릉(翼陵, 인경왕후 능) 사이의 남서향(艮坐)의 언덕과 숭릉(崇陵, 현종과 명성왕후 능) 왼쪽의 동향(酉坐)의 언덕 외에 한 곳을 더 추천하면서 도형을 그려 함께 전하였는데, 숙종은 동구릉 내 숭릉의 왼쪽 언덕을 며느리의 장지로 선택을 하였다. 또한 묘소도감의 건의로 각도의 승군(僧軍) 1천 명으로 하여금 식량 1개월분을 각자 준비하게 하여 무덤을 조성하는 일에 동원하였다. 이렇게 조성된 곳에 그해 4월 18일에 단의왕후를 장사지냈다. 단의왕후는 세자빈 시설에 승하하였기 때문에 무덤이 원(園)의 형식으로 조성되었고, 석물은 명릉의 제도를 따랐기 때문에 문인석과 무인석이 사람과 비슷한 크기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1720년 6월 13일에 즉위한 경종(景宗)은 이틀 후인 6월 15일에 단의빈을 추봉하여 단의왕후로, 능호는 혜릉이라 교서를 반포하고 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나 원의 형식으로 조성된 혜릉은 왕릉의 규모로 정비를 하였을 법도 한데 병약하고, 정치적으로 힘이 없었던 경종은 원래대로 두었다. 그래서 혜릉은 동구릉 내에서 가장 작고 좁은 규모의 능이다. 터 또한 낮고 작아 힘이 없어 보인다.

 

 

무덤을 칭하는 능호(陵號)는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세손, 왕의 생부(生父)와 생모(生母)의 무덤’은 원(園), 그 밖에 ‘왕자, 공주, 옹주, 후궁 그리고 일반인의 무덤’은 묘(墓)라고 한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이름도, 흔적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어요

 

경종 원비 단의왕후 심씨(端懿王后 沈氏, 1686-1718)

관련사진1686{숙종 12} 청송(靑松) 심씨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로 태어난 단의왕후는 11세 때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는데, 왕비에 오르지 못하고 33세의 나이{숙종 44}로 슬하에 소생없이 생을 마감합니다. 경종 즉위 후 왕후에 추봉(追封)되고 1726{영조 2}에 휘호(徽號) 공효정목(恭孝定穆)을 추상(追上)했습니다.

 

단의왕후는 1686(숙종 12) 521일 회현동에서 청은부원군 심호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순하면서도 의젓하였으며 타고난 지혜로움이 있었다. 1696(숙종 22) 11세의 어린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간택에 참여하고 집에 돌아간 후에는 손수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집안의 여러 사람들에게 대접했으며 두 번째 간택하던 때는 종일토록 눈물을 흘리며 부모의 곁을 떠나는 것을 슬퍼했다고 한다.

    
관련사진관련사진

 

별궁에 들어와 거처하게 되자 하루 종일 단정하게 앉아서 잠시라도 함부로 기대거나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시녀들이 궁궐 구경하기를 청해도 따르지 않고 소학(小學)을 읽었다. 이와 같은 타고난 의젓함과 총명함으로 궁궐의 어른들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고 전하는데,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인 1718(숙종 44) 27일 병을 앓다가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 해 418일 숭릉 왼쪽 산줄기에 안장했으며,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추봉했다.

 

단의왕후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의젓하면서도 유순했으며, 첫 돌이 지나기 전에 말을 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또한 놀이를 하더라도 반드시 법도가 있었으며, 3세 때 할머니를 공양하는데 정성과 효도가 돈독하고 지극했다고 한다. 말은 항상 단정하고 조심스럽게 했고, 물건을 처음 보면 희귀한 것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어른에게 먼저 바쳤으며, 비록 맛있는 음식이 있더라도 어른이 먹으라고 명하지 않으면 멋대로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어른들께 문안인사를 드렸다.

 

단의왕후가 5세 때이던 어느 여름날, 아버지 심호가 술에 취해 낮잠을 자면서 딸에게 부채를 들고 파리를 쫓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저녁때가 되도록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그래서 심호는 그 딸을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항상 가인들에게 이를 칭찬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천성이 간소한 것을 좋아하여 남이 좋은 옷을 입더라도 부러워하지 않았으며, 좋은 것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여러 동생들에게 모두 나누어주는 등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