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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파란 눈의 선교사, 양화진선교사묘원

草霧 2013. 8. 5. 12:40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파란 눈의 선교사

양화진선교사묘원에 묻혀있는 헐버트 박사 추모 64주기

시민기자 박미령 | 2013.08.01

[서울톡톡]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힌 호머 헐버트(Homer B. Herbert 1863~1949) 박사의 64주기 추모식이 오는 8월 12일 오전 11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안에 있는 백주년선교기념관에서 열린다. 이와 함께 서대문 독립공원 역사자료관에서는 헐버트 박사의 사진 및 자료 전시회가 오는 8월 31일까지 이어진다.

헐버트 박사 기념 사업회 주관으로 열리는 추모식에는 미국에 사는 박사의 증손자, 킴벌 헐버트도 참석한다. 독립 유공자인 헐버트 박사는 외국인 최초로 올해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 맨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느 과장법의 대가가 한 발언이려니 하고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박사의 생애를 살펴본 후 그 불가사의한 일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1907년)를 사전에 고종에게 알려 밀사 파견을 도운 그는 유럽 언론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도 밝혔다. 당시 감리교 선교사였던 헐버트는 '선교사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오직 선교에만 힘쓰라'는 미국 정부와 선교 본부의 충고를 저버리고 한국 독립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 이 모습은 일본 정부에도 눈엣가시로 비쳐 늘 주의 인물로 감시했다는 일본 통감부 기록이 남아있다.

그가 처음 이 땅을 밟은 것은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 영어교사로 부임할 때다. 헐버트는 세계에 관심이 많은 조선 학생들을 위해 최초 한글 세계 지리지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직접 써서 가르치는 열정도 보였다. 육영공원이 재정상 어려워 문을 닫자 미국으로 돌아간 헐버트는 다시 1893년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온다.

을사늑약 바로 전, 헐버트는 고종의 밀사로 황제의 친서를 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 하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과 가츠라태프트 조약을 체결한 후라 그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 조약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이권과 일본의 조선 침략을 서로 묵인하자는 밀약이었다. 그때 헐버트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한정책(對韓政策)을 비난했다.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헐버트는 선교사 언더우드, 에비슨과 함께 밤마다 고종의 불침번을 서기도 했다. 명성 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 후 고종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태였다. 언제 누구에게 독살당하거나 살해될지 몰라 불안할 때 그는 외국인이지만 믿을만한 사람이었다.

그 후 강제 퇴위된 고종은 헐버트에게 상하이 독일계 은행에 예치한 비자금 25만 달러를 독립 자금으로 쓰기 위해 안전한 곳으로 옮겨달라는 밀명도 내렸다. 하지만 일본 통감부가 이 돈을 빼돌려 찾을 수 없었다. 일본의 그런 만행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미국에 돌아간 헐버트는 틈나는 대로 신문 기고, 순회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86세 때 내한하지만 긴 여행의 피로로 쓰러져 독립기념식에 참석도 못한 채 1949년 8월 5일 세상을 떠났다. 미국에서 발견된 그의 유서는 한국에 오기 바로 전에 쓴 것이다. 헐버트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한국 땅을 다시 밟은 것이다.

이외에도 그는 경천사 10층 석탑(국보 제86호)을 되찾아 주었다. 1907년 순종 결혼식에 참석한 일본 궁내 대신 다나카는 이 탑을 해체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를 알게 된 헐버트는 영국 언론인 E. 베델(Ernest Thomas Bethell)과 함께 일본 신문 'Japan Chronicle'과 'New York Post' 등에 이 사실을 기고하고 만국평화회의에도 폭로하여 되찾게 되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는 한 살 때 죽은 그의 아들 Sheldon Herbert의 묘도 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호머 헐버트 박사의 삶은 오늘도 내일도 자손 대대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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