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능 (陵) - 2
(9) 제8대 예종(睿宗, 1450 ~ 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기 (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기,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기(능40, 원14, 묘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능3, 원4, 묘5)입니다 .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황제릉(皇帝陵) 2기(基) 왕릉 35기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왕 ‘함길도 8릉’
2. 왕조, 문을 열다
제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제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제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제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제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제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제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제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제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제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제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제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제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제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제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제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제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제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제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제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제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제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제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제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제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제8대 예종(睿宗, 1450 ~ 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탄탄대로 왕좌도 건강을 잃으니 다 잃더라
예종(睿宗, 1450 ~ 1469),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1445 ? ~ 1498) 1469년, 경기 고양197호, 서오릉(西五陵)
일반인에게 비공개 능인 창릉(昌陵)은 단명 임금 예종(이황(李晄) : 1450-1469, 재위 14개월)과 계비(繼妃)인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 -1498)의 능으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을 취하고 석물(石物)의 배치는 {국조오례의(國祖五禮儀)}의 전통적인 예를 따르고 있습니다.
창릉은 서오릉의 영역 내의 왕릉으로 조영된 최초의 능으로, 병풍석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봉분 주위에 난간석을 두르고 있다. 석물 배치는 일반 왕릉과 같고, 양쪽 능침 아래 중간에 정자각과 홍살문을 잇는 축의 양 옆으로 수라방, 수복방 등이 대칭하여 배치되어 있다.
왕비 능침의 문석인은 왕릉과 달리 왼손에 지물을 쥐고 있으며 투구가 길고 짧은 상모(象毛)가 있다. 허리띠는 좌에서 우로 대각선을 이루고 있다. 무른 석재를 사용한 탓인지 다른 왕릉에 비해 풍화가 심하여 상태가 양호하지 못하다. 예종릉 앞 장명등은 지붕돌이 없어진 상태이다.
예종은 1469년(예종 2) 11월 28일 경복궁 자미당에서 20세의 나이에 승하하였다. 능호를 창릉이라고 하여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영하였다. 1498년(연산군 4) 12월 23일에는 안순왕후가 승하하여 이듬해 2월 14일 창릉에 안장되었다.
예종 1년(1469)년 11월 28일 임금의 병이 위중하자 좌부승지 한계순(韓繼純)과 우부승지 정효상(丁孝常)으로 하여금 내불당(內佛堂)에서 기도를 하게하고, 죄인을 사면하고, 전국 각지의 유명한 산과 큰 강에서 기도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예종(睿宗)은 경복궁 자미당(紫薇堂)에서 같은 날 진시(辰時)에 승하하고 말았다.
예종의 쾌유를 빌었던 내불당은 태종 1년(1401)에 태조(太祖) 비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의 사당인 인소전(仁昭殿, 태조 승하 후에 문소전으로 고침)에 태조의 뜻을 받들어 세운 불당으로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펼쳤던 조선시대에 유교 논리와 맞지 않아 왕과 대신들 사이에 심각한 대립과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세종 15년(1433)에 임금은 문소전(文昭殿)에 있던 불당을 정릉(貞陵)의 원찰(願刹)인 흥천사(興天寺)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러나 광평대군(廣平大君)과 평원대군(平原大君)에 이어 소헌왕후(昭憲王后)를 떠나보낸 세종(世宗) 임금이 마음을 둘 곳이 없어 하자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유혹하여 궁궐 안에 불당을 다시 건립하도록 하였다.
정부(政府)․육조(六曹)․정원(政院)․대성(臺省)․집현전(集賢殿)에서 나서서 불당 건립을 반대하였으나 세종의 독단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때 대신과의 막말 수준의 대화가 오갔으나 관철되지 않자 5백여명의 성균관 유생들이 집단행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온 조정이 들끓었지만 결국 그 해 12월 5일 내불당에 금(金) 부처 세 구(軀)를 안치하고 쌀 2천5백70여석을 들여 경찬회(慶讚會)를 베풀기에 이르렀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 1년(1451)에 궁궐의 맥(脈) 위에 불당이 있는 것은 맥을 손상하는 일이니 옮겨야 한다는 상언이 있었으나 관철되지 않았다. 단종(端宗) 대에도 성삼문(成三問) 등이 불당을 철거할 것을 건의하였다. 세조(世祖) 대에는 내불당에서 법석(法席)을 베풀고, 간경회(看經會)를 열고, 계양군(桂陽君)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하고, 세조 12년(1466)에는 임금에게 재앙을 없게 하고, 병마를 덜고, 오래 살도록 비는 공작기도재(孔雀祈禱齋)를 열기도 하였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예종 대에도 내불당이 왕실을 위한 기도도량으로 적극 활용되었으나 예종의 병환이 호전되지 않고 승하해 버리자 성종(成宗) 즉위 후에 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결국 내불당은 현재 서울 청운동인 장의동(藏義洞) 화약고의 예전 터로 옮겨졌으나 이때에도 아예 철폐하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연산군 10년(1504) 7월 29일 임금의 명으로 부처는 흥천사로 옮기고 건물은 철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燕山君)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中宗)은 내불당 건립을 다시 추진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 뜻을 접게 되었고 결국 내불당 문제가 매듭 되었다.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형인 의경세자(懿敬世子)가 병으로 승하하자 세자로 책봉된 뒤 왕위에 올랐으나 14개월 만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계기로 권력을 장악하고 1455년 왕위에 오른 뒤 1457년에 의경세자, 1461년에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 1468년 세조, 1469년 예종, 1474년 성종비 공혜왕후(恭惠王后)가 승하하는 일이 일어나자 정희왕후(貞熹王后)가 매우 원통해 했다.
주상자(主喪者)가 된 성종은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하에 의경세자의 무덤 북쪽에 능지를 정하고 다음해인 1470년 2월 5일 남서향(艮坐坤向)으로 장사지내니 그 곳이 창릉(昌陵)이다. 연산군 4년(1498) 12월 23일에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가 창경궁(昌慶宮)에서 승하하자 다음해 2월 14일에 창릉 왼쪽 언덕에 장사를 지내어 창릉도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조성되었다.
성종은 이때 경릉(敬陵)과 창릉의 범위를 정하면서 일반인의 무덤은 왕릉의 사신사(四神砂, 청룡, 백호, 주산, 안산) 밖에 조성을 하도록 하되 사신사 내에 있는 밭은 경작을 하도록 허용을 하였다.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를 끝으로 20세에 요절한 왕
예종(睿宗, 이황(李晄), 1450 ~ 1469)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세조의 차남으로 태어난 예종은 세조가 즉위하자 해양대군(海陽大君)에 책봉되었다가, 세자였던 형 의경세자(懿敬世子 : 덕종(德宗))가 요절[세조 3년, 1457년]하자 세자로 책봉되어 1468년 세조 승하 하루 전에 선위(禪位)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역시 1469년 11월 2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와의 사이에 둘째 아들로 1450년(세종 32) 1월 1일 사저에서 태어났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20세에 요절하였을 때, 의경세자의 아들인 원손 월산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적통계승의 원칙에 맞는 것이었으나, 월산군은 불과 4세의 어린 아이였으므로 그 해 8세가 된 세조의 둘째인 해양대군(훗날 예종)이 1457년(세조 3) 11월 15일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1468년 9월 7일 19세의 나이에 왕위를 이어 받았다. 성년이 되지 않아 모친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한명회, 신숙주 등의 중신이 섭정하는 원상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병약했던 예종은 재위 1년 2개월 만에 요절하였다. 14개월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1468년에 남이의 옥 사건이 일어났으며, 1469년에는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에서 일본과의 개별 무역을 금지하였고,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각도의 병영에 속한 전답인 둔전을 일반 농민이 경작하게 하여 백성들을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나게 하는 등의 업적을 세웠다. 세조 때 입안하였던 『경국대전』을 완성하였으나, 채 반포하지 못하고 1469년 11월 28일 20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하였다.
예종은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이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이 지은 야사모음집『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예종이 부왕 세조가 세상을 떠난 것에 충격을 받아 건강을 해쳤다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환이 생기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세조가 돌아가매 슬픔이 지나쳐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게 되어 이 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전주 경기전, 전북 26호
예종이 승하한 당일 날, 왕대비였던 정희왕후의 명으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왕위계승서열 첫번째인 원자 (예종과 안순왕후의 아들), 서열 두번째인 의경세자의 장자 월산군은 각각 나이가 너무 어리고 병약하다는 이유로 후계자에서 제외되었으나 실상은 왕대비(정희왕후) 와 수빈 한씨 (인수대비=소혜왕후), 자을산군의 장인이었던 한명회 등의 정치적 결탁으로 인한 결과였다. 이후 원자는 왕자로 낮춰졌고 제안대군으로 봉해져, 후사도 못남기고 병으로 요절했던 평원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일곱번째 아들)의 후사로 입적되었다.
예종의 짧은 치세 사기죄를 극형으로 다스리다 평양부 여종 대비의 탄원 병사 윤계종의 탄원 사건과 왕의 준법의식 남이의 역모 사건, 그 진실은? 스무 살, 짧은 생애가 남긴 몇 개의 기록 압구정동 신화의 그늘, 장순왕후 제안대군 이현(齊安大君 李琄, 1466 ~ 1525)
계비(繼妃)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1445 ? ~ 1498) 안순왕후 한씨는 청주부원군(淸州府院君) 한백륜(韓伯倫)의 딸로 태어났는데, 예종이 세자 시절 한명회의 딸{장순왕후}이 세자빈에 책봉되었다가 다음해 요절하자 세조 8년[1462년]에 두 번째 세자빈으로 간택되었고, 왕비에 오릅니다. 예종 승하 후 성종 2년에 인혜대비(仁惠大妃)로 봉해지고 연산군 3년(1497년)에 다시 명의대비(明懿大妃)에 봉해집니다.
슬하에 제안대군(齊安大君)과 현숙공주(顯肅公主)를 두었고 연산군 4년(1498년)에 승하했습니다. 예종과 안순왕후 사이에는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할머니 정회왕후의 뜻에 따라 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 세자에 책봉되어 왕위를 이어받지 못하였다. 안순왕후는 1498년(연산군 4) 12월 23일 승하하여 이듬해 2월 14일 부군인 예종이 잠든 창릉에 안장되었다. 1468년에 세조가 승하하여 왕위에 즉위하였으나, 재위 14개월만인 이듬해 1469년 그도 형인 의경세자처럼 20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만다.
서오릉 중의 하나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능을 조성하여 능호를 창릉(昌陵)이라 하였으며, 1498년 12월 23일에 승하한 안순왕후도 이듬해 2월 14일 창릉에 안장되었다. 1461년 17세의 나이로 요절한 원비인 장순왕후는 세자빈으로 죽어 공릉(후일 추존)에 묻혔으며, 성종 때 장순왕후로 추존되었다.
여인의 시름을 마다하고 일찍 세상을 뜨니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1445~1461), 1469년, 경기 파주 제205호, 파주삼릉(坡州三陵)
예종(睿宗)의 비(妃)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 1445-1461)의 공릉(恭陵)은 세자빈(世子嬪) 때 승하했기 때문에 세자빈묘로 조성되어 봉분(封墳)의 난간석(欄干石)과 병풍석(屛風石), 무인석(武人石) 등이 생략되어 간략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후에 성종(成宗) 1년(1470년)에 공릉(恭陵)으로 명명되고 장순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주변에 장순왕후와 자매간인 성종(成宗)의 비(妃)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순릉(順陵)과 영조(英祖)의 장자(長子) 효장세자(孝章世子 : 추존-진종(眞宗))와 비(妃) 효순왕후(孝純王后)의 영릉(永陵)이 있어 파주삼릉(坡州三陵; 구 공순영릉(恭順永陵)으로도 불립니다.
공릉은 장순왕후의 능이다. 그녀가 세자빈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세자빈묘로 간략히 조영하였다.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도 없으며, 일반적으로 왕릉에 세워지는 망주석도 생략되었다. 그러나 석양과 석호가 호위하고 있는 봉분은 그 크기가 크며 혼유석과 장명등, 문석인과 석마가 놓여 있다. 석물은 조선시대 초기 형태인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석양은 네 발을 모으고 곡장(曲墻)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석호와 같이 악귀를 쫓는 기능을 한다. 이 석양은 얼굴과 뿔은 비교적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몸통은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한편 석호는 석양과는 달리 앉은 자세로 되어 있다. 봉분 뒤 좌우에 1쌍이 배치되어 있는데 위엄이 있고 용맹한 호랑이라기보다는 귀여운 고양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곡장 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악귀를 쫓는 벽사의 기능을 한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참도가 ㄱ자로 꺾인 점이 특징적이다.
장순왕후가 1461년(세조 7) 12월 5일 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하자 세조는 이듬해 2월 17일 장순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2월 25일 파주 남쪽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1470년(성종 1) 1월 22일 능호를 공릉이라 했고, 1472년 1월 11일에 장순왕후로 추존했다. 그러나 왕후로 추존된 후에도 세자빈묘로 조영한 능에 더 이상의 상설을 하지는 않았다.
의경세자(懿敬世子)를 장사 지낸지 20일 만인 세조 3년(1457) 12월 15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세조(世祖)의 차남 이황(李晄)의 세자 책봉 의식이 거행되었으니 그 가 훗날 예종(睿宗)이다.
세조 6년(1460) 4월 11일에는 한명회(韓明澮)의 셋째 딸을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책봉하였다. 책문에 “아! 그대 한씨는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온유하고 아름답고 정숙하여 종묘의 제사를 도울 만하므로 왕세자빈으로 삼는다.”는 내용으로 보아 왕세자빈으로서 손색이 없는 훌륭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왕세자빈으로 책봉된 한씨가 이듬해 11월 30일에 녹사(綠事) 안기(安耆)의 집에서 원손(元孫)을 낳자 세조는 기뻐하며 사돈인 한명회를 대궐로 불러들여 술을 대접하고,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그러나 왕세자빈이 임신 중에 병이 들어 결국 원손을 낳은 지 6일 만인 12월 5일에 안기의 집에서 향년 1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임금은 왕세자빈에게 장순(章順)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경녕군의 아들인 은천군(銀川君)으로 하여금 상례(喪禮)를 주관하되 안기의 집에 빈소(殯所)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장지(葬地)는 정승들에게 고양현(高陽縣)과 풍양(豊壤)을 중심으로 적합한 땅이 있는 지 살피도록한 후 임금이 고양에 직접 확인을 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자 파주(坡州)에 있는 동북면순문사 강회백(姜淮伯)의 어머니 무덤 자리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강회백의 어머니는 진산군부인 정신택주 진주하씨(晉山郡夫人貞愼宅主晉州河氏)로 원정공(元正公) 하즙(河楫)의 딸이다. 강회백의 어머니 무덤을 살펴본 대신들은 풍수(風水)적으로 무덤을 쓸 만한 자리라고 고하니 그 곳을 장지로 정하였다. 세조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고양의 땅에는 나중에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9)의 무덤이 조성되었다.
한편 장지로 가는 길목인 지금의 홍제동 고개(沙峴)가 길은 좁고 굽었는데 한쪽은 낭떠러지가 심하여 상여가 지나가기에 쉽지 않다고 판단한 국장도감(國葬都監)에서 도로정비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연이어진 국장(國葬)으로 소요되는 경비와 노동력이 많았음을 알고 있던 세조는 폐단을 우려하여 가급적 인력동원을 줄이려고 했다. 산맥(山脈)을 잘라 내거나 도로면을 깎아서 평평하게 만드는 정비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만약 도로를 정비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지시에 위배되는 일이 있다면 국장도감과 한성부(漢城府) 관리들을 문책 할 것이라고 엄명을 내렸다. 상여가 지나갈 수 있는지 실제 빈 상여를 통과시켜 보자는 요청도 거절하였다. 그러나 여러 우려와는 달리 상여는 무난히 이 고개를 통과하여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 보시동(普施洞) 언덕에 도착하여 장순빈을 무사히 장사 지낼 수 있었다. 그날이 이듬해 2월 25일 이고, 묘는 남동향(戌坐辰向)으로 조성되었다.
장순빈을 장사 지낸지 채 2년이 되기도 전에 그가 낳은 원손 이분(李糞)이 1463년 10월 24일에 윤사윤(尹士昀)의 집에서 풍질(風疾)로 사망하였다. 세조는 원손의 시호를 효소(孝昭)로 내리고, 인성군(仁城君)에 추봉하였다. 장지는 대신들에게 명하여 인성군의 큰아버지인 의경세자의 무덤 영역 안에서 고르도록 하여, 경릉(敬陵) 동쪽에 그 해 11월 6일에 장사지냈다.
후사(後嗣)가 없는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대신들과 상의하여 의경세자의 아들인 월산군이나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아들을 낳으면 그로 하여금 후사로 세우기로 하였다. 그러나 후사를 세우기도 전에 예종이 승하해 버려 결국은 자을산군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그가 성종(成宗)이다.
성종이 즉위한 후 예종 비 장순빈을 장순왕후(章順王后)로 하고, 무덤을 공릉(恭陵)으로 추봉하였다. 공릉 옆에는 장순왕후의 친정 동생인데도 시댁의 조카며느리가 된 성종 비 공혜왕후(恭惠王后)의 무덤인 순릉(順陵), 영조의 장남으로 정조의 양아버지라 왕으로 추존된 진종(眞宗) 무덤인 영릉(永陵)이 있어 이곳을 파주삼릉(坡州三陵)이라 한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현덕왕후의 저주
야사에서는 장순왕후와 그의 동생 공혜왕후, 형부 덕종(의경세자), 남편 예종과 아들 인성대군 등 세조의 자손들이 이른 나이에 요절한 것이 단종을 억울하게 죽인 세조에 대한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저주 때문이라고 한다. 저주의 첫 대상자로 알려진 덕종의 경우 단종보다도 먼저 사망했으며, 따라서 세조가 덕종의 죽음에 분노해 현덕왕후의 능묘를 파헤치고 폐서인했다는 설명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세조는 총애하던 며느리의 죽음에 비통해하며, 온순하고 너그럽고 아름다운 것을 장(章), 유순하고 어질고 자혜로운 것을 순(順)이라 하여 세자빈 한씨에게 장순(章順)의 시호를 내리고 장순빈(章順嬪)으로 삼았다. 후일, 장순빈의 제부이자 시조카인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를 장순왕후로 추존했다.
능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파주삼릉 내에 위치한 공릉(恭陵)이다. 장순왕후로 추숭되면서 왕후의 예에 걸맞은 제사를 지냈다고 하나, 애초에 세자빈의 묘로 지어졌기 때문에 다른 왕후들의 묘소보다 초라한 행색을 갖추었다.
한명회 이야기
1. 공릉과 순릉에 잠든 두 자매 파주 삼릉이라고 일컫는 공릉, 순릉, 영릉 중 공릉과 순릉은 공통점이 있다. 이 두 능에 잠든 예종 비 장순왕후, 성종 비 공혜왕후는 모두 한명회의 딸로서 친가에서는 자매지간이지만, 시가인 왕실에서는 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사이였다. 두 딸을 모두 왕가로 출가시킨 한명회는 당대 보기 드문 지략가였다.
겸재 정선의 <압구정> 그림, 한명회는 한강변에 별장을 짓고 '갈매기와 가까이 사귀는 정자'라는 뜻으로 압구정 이란 이름을 지었다. 이는 현재의 지명으로 이어졌다.(1741년 비단에 채색, 간송미술관 소관)
2. 궁지기로 시작한 벼슬 한명회는 1415년(태종 15)에 예문관 제학 한상질의 손자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한기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과거에도 늘 실패하여 공신의 자손을 관리로 특채하던 문음(門蔭) 제도에 의해 38세 때인 1452년(문종 2) 궁을 지키는 일로, 다소 보잘 것 없는 경덕궁직을 맡게 되었다.
3. 궁지기에서 일등공신으로 그가 말단관직에 간신히 올랐을 때에는 이미 문종이 승하하고 어린 나이의 단종이 즉위하였을 때이다. 이 때 그는 지인 권람 등을 이용하여 단종의 삼촌이었던 수양대군과 결탁, 정치적 야망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을 성공시켰다. 계유정난이 성공하여 수양대군이 실권을 잡은 후 한명회는 1등 공신에 올랐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두 차례의 단종 복위 사건을 좌절시키며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였고, 1466년(세조 12)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일개 궁지기에 불과했던 그가 13년 만에 최고의 관직에 오른 것이다.
4. 자매를 나란히 왕비로 올린 한명회 한명회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녀들을 모두 왕가의 며느리로 들여 더욱 권력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주지하듯이, 그의 슬하의 1남 4녀 중 맏딸은 세종의 사위 영천부원군 윤사로의 며느리가 되었고, 둘째 딸은 영의정 신숙주의 맏아들과 혼인하였으며, 셋째 딸은 예종의 비, 넷째 딸은 성종의 비가 되었다. 자매가 나란히 왕비에 오른 예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로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시 한명회의 권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5. 두 딸의 이른 죽음 한명회로 하여금 두 번이나 왕실의 장인어른으로서의 권세를 누리게 한 그의 딸들은 꽃다운 나이에 모두 요절하였다. 공릉에 잠든 예종비 장순왕후는 세자빈일 때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일주일이 채 안되어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순릉에 잠든 성종비 공혜왕후는 왕비의 자리에 오른지 5년 만에 열아홉의 나이로 승하한 것이다. 장순왕후와 공혜왕후그는 세조와 그의 장남이자 자신의 사위인 예종의 형인 의경세자와도 이중 사돈관계를 형성하였다.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章順王后)는 그의 셋째 딸이고,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恭惠王后)는 넷째 딸로, 이들은 친정 자매간이면서 시가로는 시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관계가 된다. 폐비 윤씨와는 먼 인척이었다. 둘째 사위 신주(申澍)의 아버지 신숙주는 폐비 윤씨의 외당숙이다. 폐비 윤씨의 친정어머니이자 금삼을 전한 군부인 신씨는 신숙주의 사촌 여동생이자 사위 신주의 당고모가 된다. 압구정한명회는 노년에 권좌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고 싶다하여 정자를 짓고 여기에 자신의 호를 붙여 '압구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노년에도 부원군의 자격으로 여전히 정사에 참여하여 권좌를 지킨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백성들에게 압구정은 자연과 벗하는 곳이 아닌 권력[5]과 벗하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6. 당대의 권력가 한명회의 최후 세조 이래 성종조까지 절대권력을 행사해 온 한명회는 네 차례에 걸쳐 1등 공신으로 책록되어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두 딸을 먼저 보내고 1487년(성종 18)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의 폐사에 찬성했다 하여 부관참시를 당하는 변을 겪기도 하였다.
박석고개 이야기
1. 구파발로 이어지는 박석고개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에서 구파발로 넘어가는 고개를 박석고개라고 부른다. 갈현동과 불광동을 양쪽에 끼고 통일로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에는 북한산이 솟아 있고, 서쪽에는 낮은 구릉성 산지가 남북으로 뻗어 있다.
2. 박석고개 명칭의 유래 박석고개는 서오릉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풍수지리적 요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지맥(地脈)이 깎이지 않도록 박석을 깔았던 데서 고개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이 고개 근처에 왕실의 전답이 있었으므로 그곳에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 흙을 밟지 않게 하려고 넓고 얇게 뜬 돌인 박석(薄石)을 깔아서 박석고개라는 명칭을 얻었다고도 전해진다.
3. 한양을 드나드는 중요한 길목 박석고개는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에 서울로 들어오고 나가는 행인은 물론 상인과 관료, 중국 사신들도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곳이다.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숱한 애환 또한 안고 있다. 파주 삼릉을 이루고 있는 공릉, 순릉, 영릉에 잠들어 있는 8대 예종 원비 장순왕후, 9대 성종 원비 공혜왕후, 영조의 맏아들이며 사도세자의 형인 추존왕 진종과 효순소황후의 장례행렬 역시 이 고개를 넘었다.
4. 현재의 박석고개 현재는 지명만이 남았을 뿐 박석을 찾아볼 수 없고,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뻗어 있다. 또한 도로공사로 고개가 낮아져서 고개라는 느낌 또한 들지 않는다. 그러나 박석고개 옆, 통일로 주변으로 위치한 파주의 삼릉에서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잠들어 있는 왕족들의 슬픈 내력과 애처로운 사연들이 여전히 묻어나고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끈다.
예종 원비(妃)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1445~1461)
압구정(狎鷗亭)으로 유명한 청주한씨(淸州韓氏)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장녀로 태어난 예종의 비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는 세조를 도와 권력을 쥐었던 아버지에 의해 세자빈으로 책봉(세조 6년, 1460년)되었으나 다음해에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고 산후병으로 17살의 어린나이에 승하해 장순(章順)의 시호(諡號)를 받았습니다. 특히 동생 공혜왕후(恭惠王后 : 성종의 비(妃)) 역시 19살의 나이에 승하해 비운(非運)의 자매가 되었습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대, 517년, 1392 - 1910 ]
원(園) 13기(基)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호)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익종(翼宗) 一 수릉(綏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一 융릉(隆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一 영릉(永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一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一 경릉(敬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제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一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一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호)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기(基) 제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一 유릉(裕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제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一 홍릉(洪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시
왕릉 35기 제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一 예릉(睿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一 경릉(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제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一 인릉(仁陵 : 사적 제194호)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제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一 건릉(健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二 홍릉(弘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一 원릉(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二 혜릉(惠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一 의릉(懿陵 : 사적 제204호)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三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二 익릉(翼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一 명릉(明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제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一 숭릉(崇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一 영릉(寧陵 : 사적 제195호)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二 휘릉(徽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一 장릉(長陵 : 사적 제203호)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二 성묘(成墓 : 사적 제365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一 목릉(穆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一 강릉(康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一 효릉(孝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三 희릉(禧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二 온릉(溫陵 : 사적 제210호)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一 정릉(靖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三 회묘(懷墓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二 순릉(順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一 선릉(宣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路)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二 공릉(恭陵 : 사적 제205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一 창릉(昌陵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7대 세조(第七代 世祖) 一 광릉(光陵 : 사적 제197호)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二 사릉(思陵 : 사적 제209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一 장릉(莊陵 : 사적 제196호)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제5대 문종(第五代 文宗) 一 현릉(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4대 세종(第四代 世宗) 제3대 태종(第三代 太宗) 제2대 정종(第二代 定宗)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三 정릉(貞陵 : 사적 제208호)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二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一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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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밥 먹고 도시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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