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능 (陵) - 2
(8) 추존왕 덕종(德宗, 1438 ~ 1457) _ 경릉 敬陵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기 (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기,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기(능40, 원14, 묘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능3, 원4, 묘5)입니다 .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황제릉(皇帝陵) 2기(基) 왕릉 35기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왕 ‘함길도 8릉’
2. 왕조, 문을 열다
제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제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제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제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제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제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제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제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제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제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제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제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제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제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제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제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제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제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제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제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제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제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제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제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제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8) 추존왕 덕종(德宗, 1438 ~ 1457) _ 경릉 敬陵
마음의 병은 백약도 무효라 아들 덕에 왕으로 추존되니, 성종의 부모
덕종(德宗, 1438 ~ 1457),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 1437 ~ 1504) 1457년, 경기 고양 198호, 서오릉(西五陵)
아들{성종(成宗)}이 왕위에 올라 왕의 아버지로 뒤에 추존(追尊;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제왕의 칭호를 올리던 일 - 추숭(追崇))된 덕종(이장(李暲) : 1438-1457 : 세조의 장남)과 왕비(王妃)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韓氏 : 1437-1504)의 경릉(敬陵)은 서오능(西五陵)에서 처음으로 조성되었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을 취했는데, 특이하게 일반적인 능 배치와 상반되게 오른쪽이 덕종의 능이고 왼쪽이 소혜왕후의 능입니다.
소혜왕후덕종의 능은 세자(世子) 신분으로 승하했기 때문에 세조(世祖)의 평소 소신인 간략한 장례로 인해 봉분에 병풍석(屛風石), 난간석(欄干石), 무인석(武人石) 등도 없이 대군묘(大君墓) 형식으로 간략하게 조성되어 이후의 추존(追尊)된 능의 전례를 삼게 됩니다. 그러나 소혜왕후의 능은 생전에 덕종 추존과 함께 왕비(王妃)로 추숭(追崇)되었고, 예종(睿宗)보다 뒤에 승하했기 때문에 예종의 창릉(昌陵)을 모범으로 조성되어 병풍석(屛風石)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왕릉의 형식을 취했습니다.
경릉은 추존왕 덕종과 그의 비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동원이강릉의 형태로 조영되었다.능침의 배치는 왕이 우측에, 왕비가 좌측에 모셔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경릉에서는 왼편에 왕릉이, 오른편에 왕비릉이 있다. 왕릉은 난간석이나 망주석 등이 없고 석양과 석호도 2쌍이 아닌 1쌍만 설치되어 있다. 이는 덕종이 세자로 있을 때 죽었고, 부왕인 세조가 간소한 장례 의례에 준해 사대석(莎臺石) 등을 설치하지 말 것을 명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왕비는 생전에 덕종의 추존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능제도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성종대에 이르러 왕릉의 규범에 따라 덕종의 능침에도 의물을 가설하고자 하였으나, 덕종의 비이며 당시 대왕대비였던 소혜 왕후가 석물을 가설치 말라 하여 그 모습 그대로 남게 되었다. 왕릉과 왕비릉의 문무석인은 모두 신장이 매우 크고 당당해보이도록 제작되었는데, 마모가 심해 현재는 그 윤곽만 살필 수 있다.
1457년(세조 3)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그 해 풍수지리설에 따라 길지로 추천된 현재의 위치에 안장하였다. 성종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해인 1472년(성종 3)에 아버지인 의경세자를 온문의경왕으로 추숭하고 능호를 경릉이라 하였으며, 어머지 수빈을 왕비에 봉하고 인수왕대비라고 하였다. 그리고 1476년(성종 7)에는 묘호를 덕종이라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4월 27일에는 소혜왕후가 승하하여 경릉의 오른편 언덕에 안장하였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지 2년 2개월 여 만인 1457년 9월 2일에 장남인 의경세자(懿敬世子)가 병으로 승하하였다. 병환 중에 남긴 한 절구의 시를 보면 그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한 듯하다. “비바람 무정하여 모란꽃이 떨어지고, 섬돌에 펄럭이는 붉은 작약(芍藥)이 주란(朱欄)에 가득 찼네. 명황(明皇)이 촉(蜀) 땅에 가서 양귀비(楊貴妃)를 잃고 나니, 다른 궁녀도 있었건만 반겨 보지 않았네.”
세조는 세자의 무덤 속은 일체 임금의 능에 준하여 조성할 것을 명하고, 무덤 자리를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세자가 승하한지 3일 후부터 22명의 대신과 7명의 상지관(相地官)을 19군데의 후보지를 나누어 둘러보게 한 후 토론을 거쳐 본인이 현장을 직접 확인하였다. 임금인 본인이 현장에 나선 것만 여섯 차례에 이른다.
우의정 강맹경, 계양군 이증, 좌의정 정창손, 좌찬성 신숙주, 우찬성 황수신, 세자좌필선 임원준이 상지관 안효례, 노목, 방문중을 거느리고 경기 고양현(高陽縣)의 벌고개에 있는 도총제(都摠制) 정이(鄭易)의 무덤 자리를 살펴보고 능지로 적합함을 아뢰자 세조는 다음 날 현장에 나가 안산(案山)에 올라 살펴 본 후 매우 흡족해 했다. 정이의 무덤을 옮기고 그 자리에 세조 3년(1457) 11월 24일에 의경세자를 남서향(艮坐坤向)으로 장사지내니 그 곳이 곧 경릉(敬陵)이며, 서오릉(西五陵)내에 첫 왕릉이 조성되었다.
의경세자가 승하하니 동생 해양대군(海陽大君)이 세자에 책봉되어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그가 예종(睿宗)이다. 예종 역시 즉위한지 1년 2개월 만에 승하하자 뒤를 이어 의경세자의 차남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성종(成宗)이다. 성종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아버지를 잃었으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병약하여 작은아버지인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조선 중기 이후의 왕들이 그의 후손이다. 차남인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의경세자는 덕종(德宗)으로 추존되었다.
아버지 대신 작은아버지에게 승계되었던 왕위를 성종이 다시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인 세조가 아버지 의경세자의 무덤자리를 찾는데 심혈을 기울인 덕분일 것이다. 세조는 의경세자의 무덤자리를 찾기 위해 사평원(沙平院, 서울 신사동), 과천(果川) 청계산(淸溪山), 원평(原平, 파주), 전간(箭干), 풍양(豊壤, 남양주 진건), 고양(高陽) 벌고개에 직접 나가 후보지를 둘러볼 정도였다.
아울러 과천 청계산과 원평의 땅을 둘러 본 후 경회루(慶會樓)에서 대신과 상지관을 불러 모아 주산(主山)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세조가 “나는 이른바 어떤 것을 주산이라고 하는지 잘 모르는데, 무덤 뒤에 있는 산이 주산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산이 쭉 뻗어 가다가 청룡과 백호 10여 리 밖에 있는 높은 봉우리를 주산이라고 하는지?”라고 물었다. 임원준(任元濬)과 노목(魯穆)은 “무덤 뒤에 있는 산이 주산이 됩니다.”하고, 이순지(李純之)와 안효례(安孝禮)는 “산맥이 생겨 나오다가 가장 높게 솟은 곳이 주산이 됩니다.”하여 서로 말이 달랐다. 이처럼 의경세자의 무덤 터를 정하는 과정에서 주산에 대한 논쟁을 벌일 만큼 세조는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의경세자의 무덤은 왼쪽 산줄기에, 소혜왕후(昭惠王后, 仁粹大妃)의 무덤은 오른쪽 산줄기에 정하여 사회 통념과는 다르게 장사를 지낼 정도로 좋은 땅에 의경세자를 장사지냈다.
그 후 연산군 10년(1504) 4월 27일 창경궁(昌慶宮)에서 덕종 비 소혜왕후가 승하하자 연산군(燕山君)은 공조참판 임사홍(任士洪)에게 명하여 경릉의 오른쪽 능선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계좌정향(癸坐丁向)의 능선은 의경세자의 무덤을 선정할 때 세조가 정해놓은 소혜왕후의 무덤 터다. 당시에 세조는 의경세자를 장사지내고 소혜왕후에게 말하기를 “경릉 옆에 또 아름다운 곳이 있다. 너 역시 만세 뒤에 그곳에 장사지낼 것이다.”라는 유교를 남겼는데 이를 따른 것이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어? 비의 능이 왕의 능보다 높은 곳에 있네!
덕종 (德宗, 1438 ~ 1457) 수양대군{세조}의 장남으로 태어난 덕종은 총명하게 자라 의경세자(懿敬世子)가 되었으나 병약하여 슬하에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성종(成宗)을 두고 20세의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이에 성종 2년[1471년]에 의경왕(懿敬王)으로 추존되고, 성종 7년[1476년]에 묘호를 덕종(德宗)으로 능호를 경릉(敬陵)으로 명명했습니다.
추존왕 덕종의 아버지 세조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 단종을 유배 보낸 후 사약을 내렸다. 따라서 늘 이에 대한 마음의 짐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세조의 업보로 인해 그의 아들들이 단명하였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곤 하였다. 의경세자의 죽음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세조가 영월에 귀양 보낸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마음먹고 잠이 든 날 밤, 그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났다. 그녀는 분노한 얼굴로 나타나 세조를 꾸짖었다. “너는 흉악하고 표독스럽게도 내 아들의 왕위를 빼앗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벽지로 내쫓더니 이제는 목숨까지 끊으려고 하는구나! 무슨 원한으로 이러는 것이냐? 네가 나의 아들을 죽이니, 나 역시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 꿈에서 깬 세조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는데, 동궁의 내시가 급히 달려와 세자가 위독하다는 말을 전한다. 세조는 급히 동궁으로 달려갔지만, 의경세자는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고 한다.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에 세자가 숨을 거두었다고 생각하고 분노한 세조는 단종 복위 사건을 빌미로 현덕왕후를 폐위한 뒤 능을 파헤쳐 바닷가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세조가 맏며느리 한씨에게 특별히 궁궐에서 살아도 좋다고 하였음에도 이를 사양하고 두 아들과 궁궐을 떠나려하자 이를 가엽게 여긴 세조는 그녀를 위해 특별히 집을 지어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덕수궁이다.
소혜왕후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에 위치한 경릉(敬陵)으로 남편인 덕종과 같은 묘역에 묻혀있으며 조선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왕비가 우측(누워있는 시신 기준)에 안장된 능으로 조성되어 있다. 본디 왕릉을 쓸 때는 우측에 왕을, 좌측에 왕비를 안장한다. 살아있을 때는 좌측(앉아있는 사람 기준)이 상석이니 죽으면 그 반대라고 여겼던 것인데, 경릉은 부인인 소혜왕후가 상좌인 우측에 안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승하할 당시의 신분 차이 때문인데, 덕종의 경우는 승하할 때 세자의 신분이었지만, 소혜왕후의 경우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서 승하했기 때문에 군신 관계에 따라 위가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남편 덕종의 무덤에는 석물도 문인석만 서 있다. 무인석은 왕권의 상징이라 왕이 되지 못한 세자, 세자빈 이하의 무덤에는 세울 수 없다. 소혜왕후 능상의 석물은 무인석까지 갖추고 있다.
유일한 왕비 상위릉
소혜왕후 한씨 (昭惠王后, 1437 ~ 1504)
조선의 세자빈이자 덕종(德宗, 추존왕)의 왕비이며 성종(成宗), 월산대군 형제의 모후이다. 1437년[세종 19년]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의 딸로 태어나 세자빈(世子嬪)에 간택됩니다. 덕종 승하 후 예종(睿宗)을 지나 아들 성종(成宗)대에 덕종의 추존과 함께 왕후에 책봉되었고, 손자 연산군대(燕山君代)까지 살다가 승하[연산군 10년]했습니다. 특히 소혜왕후는 불경(佛經)에 조예가 깊었으며, 부녀자들을 위한 <여훈(女訓)>을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소혜왕후는 1504년(연산군 10) 4월 27일에 68세로 승하하였는데, 이는 손자인 연산군의 폭행에 기인한 죽음이었다고 전한다.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모함을 받아 폐위된 후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노하며 관련자들에게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병상에 누워 있던 소혜왕후는 그러한 손자를 꾸짖었는데, 연산군이 이에 반발하며 그녀를 머리로 받았다고 한다. 소혜왕후는 이러한 충격으로 며칠 후 승하하였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대, 517년, 1392 - 1910 ]
원(園) 13기(基)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호)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익종(翼宗) 一 수릉(綏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一 융릉(隆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一 영릉(永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一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一 경릉(敬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제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一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一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호)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기(基) 제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一 유릉(裕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제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一 홍릉(洪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시
왕릉 35기 제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一 예릉(睿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一 경릉(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제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一 인릉(仁陵 : 사적 제194호)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제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一 건릉(健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二 홍릉(弘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一 원릉(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二 혜릉(惠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一 의릉(懿陵 : 사적 제204호)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三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二 익릉(翼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一 명릉(明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제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一 숭릉(崇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一 영릉(寧陵 : 사적 제195호)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二 휘릉(徽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一 장릉(長陵 : 사적 제203호)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二 성묘(成墓 : 사적 제365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一 목릉(穆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一 강릉(康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一 효릉(孝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三 희릉(禧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二 온릉(溫陵 : 사적 제210호)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一 정릉(靖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三 회묘(懷墓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二 순릉(順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一 선릉(宣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路)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二 공릉(恭陵 : 사적 제205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一 창릉(昌陵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7대 세조(第七代 世祖) 一 광릉(光陵 : 사적 제197호)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二 사릉(思陵 : 사적 제209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一 장릉(莊陵 : 사적 제196호)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제5대 문종(第五代 文宗) 一 현릉(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4대 세종(第四代 世宗) 제3대 태종(第三代 太宗) 제2대 정종(第二代 定宗)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三 정릉(貞陵 : 사적 제208호)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二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一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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