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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능(陵) - 2 (10) 제9대 성종(成宗)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懷墓

草霧 2013. 8. 5. 16:22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2

 

 

(10) 9대 성종(成宗, 1457-1494)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懷墓 

 

성종20090815-2.JPG

공혜왕후20090814-2.JPG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10) 9대 성종(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懷墓

 

   

 

천운으로 왕좌에 앉아 태평성대를 이루다

 

선릉宣陵

 

성종20090815-2.JPG

               

성종(成宗, 1457-1494), 계비(繼妃)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1462-1530),

1494, 서울 강남구 제199, 선정릉(宣靖陵)

 

9대 성종(成宗) 선릉

      조선중종 정릉     

       

9대 성종(成宗) 선릉 첫번째 작은이미지9대 성종(成宗) 선릉 두번째 작은이미지9대 성종(成宗) 선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정현왕후릉 조선성종선릉 조선중종정릉의 위치가 있는 지도맵이미지세조의 손자이고 추존(追尊)된 덕종(德宗)의 차남인 成宗(이혈 : 1457-1494, 재위 25)과 계비(繼妃)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 1462-1530)의 선릉(宣陵)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는데, 성종의 능에는 검약(儉約)해야 한다는 세조(世祖)의 명과 다르게 봉분에 병풍석(屛風石)을 둘러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한 것이 특이합니다.

 

후에 중종(中宗)의 정릉(靖陵)이 그의 두 번째 계비(繼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해 선릉의 경내로 옮겨져 선정릉(宣靖陵)의 명칭으로 불리는데, 중종의 정릉(靖陵)이 조성될 때 성종의 선릉이 그 모범이 되었다고 합니다.

 

선릉은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동원이강릉이란 하나 이상의 봉분이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된 능을 말한다. 선릉의 서쪽 언덕에는 성종의 봉분이, 동쪽 언덕에는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의 봉분이 배치되어 있다. 성종의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세웠다.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세조의 유교에 따라 세조의 광릉 이후 조영된 왕릉에는 세우지 않았던 병풍석을 성종의 봉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우편번호 135-090)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동 47길 5. 2호선 선릉역 8번출구로 나와서 도보로 5분거리에 있습니다.그 밖의 상설은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장명등의 양식은 태종의 헌릉의 것을 본떴으며, 문석인과 무석인의 얼굴은 사실적이나 몸집이 크고 입체감이 없다. 정현왕후의 봉분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려져 있다, 석주의 윗부분에는 초기 난간의 부드러운 맛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성종릉의 문무석인이 윤곽이 굵고 강직한데 비해, 정현왕후릉의 문무석인은 그 윤곽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1494(성종 25) 122438세의 나이로 성종이 승하하여 이듬해(연산군 1) 46일 당시의 광주부 서면 학당리의 언덕에 안장하고 능호를 선릉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35년 후인 1530(중종 25) 822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경복궁에서 69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같은 해 1029일 선릉의 성종 봉분 동쪽 언덕에 국장되었다.

 

    관련사진 관련사진

 

그 후 선릉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그 첫 수난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선조 26) 일어났다. 선조실록1593413일자의 기사에는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라는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의 치계와 이 서장을 보니 몹시 망극하다. 속히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치하게 하라.”는 선조의 명이 기록되어 있다. 1625(인조 3)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고, 그 다음해에는 능침에도 불이 났다.

 

선릉-선릉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작은 아버지인 예종(睿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성종(成宗)이 1494년(성종 25) 12월 24일 오시(午時)에 배꼽 아래에 난 종기를 치료하지 못해 승하하였다. 장지(葬地) 선정에 나선 대신과 상지관(相地官)들은 후보지를 압축하여 나름대로 길지(吉地) 순서를 정하여 보고를 하였다.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1444)의 무덤자리가 제일 좋고, 그 다음은 정이(鄭易, ?~1425)의 무덤자리고, 다음은 고양군 관사(官舍) 자리 순이다. 그런데 광평대군은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이니 성종의 작은할아버지고, 정이는 효령대군(孝寧大君, 태종의 차남)의 장인이면서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에게 1457년도에 무덤자리를 내주고 옮겨간 일이 있는 사람이다.

 

 

당시에 인수대비(仁粹大妃)는 “내가 듣기로는 비록 미천한 사람이라도 좋은 곳에 장사지내면 반드시 발복을 받고, 존귀한 사람이라도 나쁜 곳에 장사지내면 그 화(禍)를 받는다 하는데, 광평대군의 자손이 병들고 혹은 요사하였다. 그러니 장지를 다른 곳으로 정하라.”고 하였으나, 여러 대신과 상지관들은 장지가 이 보다 좋은 곳이 없으니 그런 것들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또 윤필상 등 대신들은 광평대군의 아들 영순군(永順君, 1444~1470)이 일찍 죽는 등의 이유는 묘의 좌향(坐向)이 잘못되어서 그런 일이 있었으니 묘의 좌향을 다르게 장사지내면 오히려 좋다고 하여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당시에 윤필상이 언급한 풍수이론은 송나라 호순신(胡舜申)이라는 사람이 쓴 이기론(理氣論) 풍수서(風水書)인 지리신법(地理新法)에 있는 내용으로 우리나라에는 1393년(태조 2) 12월 11일 계룡산 도읍지 공사를 그만두게 한 경기도관찰사 하륜(河崙)의 상소문에 언급되면서 처음으로 알려졌다. 즉 광평대군 무덤의 좌향이 건해(乾亥, 남동향)좌이기 때문에 금국(金局)에 해당되어 물이 장생(長生)의 방향으로 흘러나가니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묘의 방향을 임좌병향(壬坐丙向, 남향)으로 하면 물의 방향이 문곡(文曲)이 되어 좋다고 했다. 당시에 윤필상은 호순신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묘의 좌향을 임좌로 하면 무곡(武曲)으로 좋지 않고, 자(子)좌로 하면 물이 흘러나가는 방위가 녹존(祿存)에 해당되어 호순신 이론으로는 최상의 길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호순신은 자신의 이론을 만들어 내 놓으면서 “지리(地理)는 형세(形勢)를 근본으로 한다. 형세가 있고 나서야 이 법(호순신 이론)을 시행할 수 있다.”고 하여 터를 정할 때 이기론 보다는 형세론을 우선적으로 적용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광평대군의 무덤을 이장하고 성종을 1495년 4월 6일 묘시(卯時)에 임좌병향으로 장사 지내니 그 곳이 선릉(宣陵)이다. 그런데 성종의 묘지문(墓誌文)을 보고 자신의 어머니인 윤씨(尹氏)가 폐비(廢妃)된 것을 안 연산군은 그 경위파악에 나서면서 급기야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1506년 9월 2일에 폐위(廢位)되고 만다. 그러나 광평대군의 아들 영순군은 아들 셋을 두고 일찍 죽었지만 서울 수서동 궁말 광수산(光秀山)에 묻힌 뒤로 그 후손들은 매우 번창하였는데, 자신의 아버지 광평대군을 다시 그 곳으로 옮겨 모시게 되니 후손들에게 좋은 일이 계속 이어졌다.

 

 

 

한편 어린나이에 궁중(宮中)에 들어와 교육을 받고 있던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성종 7년(1476) 8월 9일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韓氏)와 폐비윤씨(廢妃尹氏)의 뒤를 이어 중궁의 주인이 되었으니 그가 중종(中宗)의 어머니다. 정현왕후가 중종 25년(1530) 8월 22일 신시(申時)에 승하하자 성종의 무덤 왼쪽 언덕에 같은 해 10월 29일에 남서향(艮坐坤向)으로 장사를 지냈다. 선릉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적군이 정릉(靖陵)과 함께 파헤치고 광중에 불을 지른 사건이 발생하였고, 인조 3년(1625)에는 정자각(丁字閣) 문짝이 불탔으며, 다음 해에는 성종의 무덤과 정현왕후의 무덤에 불이 나는 등 불행한 일이 있었다. 결국 인수대비가 우려한 대로 광평대군의 옛 무덤 터에서는 좋지 않은 일이 이어진 것이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왜적과 결탁하여 왕릉을 훼손한 백운기

 

백운기를 벌하라는 상소가 기록된 『선조실록』사진, 1593년(선조 26년) 11월 2일자의 기사.백운기를 벌하라는 상소가 기록된 선조실록, 1593(선조 26)

선조실록1593(선조 26) 112일자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위관(委官) 유성룡이 아뢰기를, 백운기(白雲起)가 왜적과 서로 결탁하여 선릉(宣陵), 태릉(泰陵) 두 능을 파헤친 죄상을 이미 모두 승복했습니다. 큰 죄를 범한 사람이라서 잠시도 용납해 둘 수 없으니 결안 취초(決案取招)로 조율하여 시행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선릉과 정릉은 이와 같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위의 기록은 백운기라는 자가 왜적의 앞잡이가 되어 능의 훼손에 일조를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는 왕릉 능원 내의 나무 한 그루만 뽑아도 나라 밖으로 추방시키는 엄한 벌을 주었는데, 하물며 봉분과 재궁을 무참히 훼손하는데 가담하였으니, 백운기라는 자의 죄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선릉의 조영과 수난사

    

 

1. 선릉 조영을 위한 민묘 이장

조선 왕릉의 입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신중한 일이었다. 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안이라는 기준을 충족시키면서도 다양한 풍수지리상의 길지로서의 요건을 갖춘 곳이어야 했다. 만약 이렇게 어렵게 찾은 지역이 이미 민가의 묘 자리로 쓰이고 있는 경우에는,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이 민묘를 이장시키기도 하였다. 선릉을 조성하기 위해 물색한 지역에도 이미 민묘가 자리 잡고 있어 이를 이장토록 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은 연산군일기1495(연산군 1) 126일의 기사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산릉의 영역 안에 묘가 있어 옮겨야 한다. 이 때 이장해야 할 묘가 당상관(堂上官) 및 당상관의 부모, , 조부모의 것이면 쌀과 황두를 합하여 15(), 그 나머지에는 쌀 2석과 황두 1석을 전례에 따라 보상해주었다. 임자 없는 묘는 경기 감사로 하여금 차사원(差使員)을 정해 군인을 주어 천장토록 하였다.

이러한 예는 이미 예종의 창릉을 조영할 때에도 나타났다. 민묘 이장을 위해서 같은 조건의 보상을 해준 것이다. 당시 하나의 왕릉을 조영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공을 들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평화로운 선릉의 전경

 

2. 선릉의 임진왜란 수난사

관련사진이렇게 공들여 조영한 선릉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왜병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梓宮 : 왕과 왕비의 관)이 불탄 것이다. 선조실록1593(선조 26) 413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成泳)이 치계하기를,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 하니, 상이 정원에 분부하기를, “이 서장을 보니, 몹시 망극하다. 속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조실록1593(선조 26) 89일의 기사에는 누구의 시체인지 모를 시신이 정릉 근처에 버려져 있어 이를 왕의 옥체라고 짐작하고 이 옥체를 봉안하는 공을 세우기 위해 몇몇 군사들이 경쟁하였다는 내용의 보고도 올라와 있다. 당시 선릉과 정릉의 훼손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3. 평화로운 도심의 숲 선릉

근방의 민묘를 이장시키며 공들여 조영한 선릉은 현재 서울에서도 가장 복잡한 도심의 한복판인 강남구 삼성동에 자리 잡고 있다. 빌딩숲 사이로 우거진 소나무와 푸른 능선은 바쁜 도심의 사람들에게 여유로움과 평화로운 분위기를 제공해준다. 봄가을의 소풍객, 마음의 여유를 위해 산책길에 오른 삼성동 일대의 회사원들, 답사객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위와 같은 긴 세월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사의 숲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성종과 소학이야기 - '소학''삼강행실도

   

 

1. 조선 전기 문물을 완성시킨 성종

선릉에 잠든 성종은 학문을 좋아하는 호학의 군주이자, 그의 묘호가 말해주듯이, 많은 업적을 남겨 치세를 이룬 훌륭한 군주였다. 경국대전,국조오례의등을 완성하고,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 악학궤범등을 편찬 간행하였다. 세종 때의 집현전에 해당하는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세조 때 폐지된 호당(湖堂)제도를 부활하여 독서당을 따로 두고 문신 중에 뛰어난 사람을 골라 공무에 종사하는 대신 일정기간 학문연구에 전념하게 하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다시 실시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는 성종 때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경국대전의 완성

『삼강행실도』에 실린 효자도 문충정성 그림, 효자 문충이 일을 마친 뒤 먼길을 걸어 어머니를 문안하러 온다는 이야기이다.기존의 여러 법령과 교령을 종합하여 항구적인 법전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세조 때 모든 법전을 집대성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작업은 십 수 년간 이어져, 1485(성종 16)경국대전으로 편찬되었다. , , , , , 공의 6전으로 구성된 경국대전은 조선의 국가 조직과 정치, 사회, 경제 활동을 망라하는 기본 법전이 되었다. 그 후 시대가 흐름에 따라 부분적으로 수정 보완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뼈대는 바뀌지 않고 조선 왕조 500년여의 기본 법전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성종대에 완성된 경국대전으로 조선의 정치 제도의 정비 작업은 일단락되어, 조선은 명실상부한 유교적인 법치국가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3. 삼강행실도의 보급

삼강행실도는 유교의 윤리에서 기본이 되는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강조하여 백성들에게 널리 읽히고자 간행한 책이다. 세종 때인 1431(세종 13)에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삼강행실도에서는 삼강의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를 각각 35명씩 모두 105명을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글로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서적이 한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이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번역하라는 성종의 어명에 따라 1481(성종 12) 한글판 삼강행실도가 완성, 보급되어 백성들에게 유교적 윤리를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있었다.

 

4. 소학의 애독자 성종

관련사진성종은 소학을 매우 애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종 재위 당시 신진 사대부 층으로 떠오른 사림 세력은 소학을 성리학적 윤리의 교과서로서 매우 중요시하며 소학 보급운동을 펼쳤다. 사림은 향촌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으로, 소학을 향촌사회에 보급하여 백성들이 성리학적 질서를 따르도록 꾸준한 노력을 하였다. 성종이 소학을 중시한 것은 이러한 사림 세력에 대한 지지를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성종에게는 투기가 심하다는 이유로 왕비를 폐비한 개인사가 있었는데, 이 문제에 대한 윤리적 방패막이로 소학을 부각시켰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독서를 가장 많이 한 왕

 

성종 (成宗, 이혈, 1457-1494, 재위 25)

성종은 아버지{추존 덕종(德宗)}가 생후 2달만에 승하하고, 예종 또한 1년만에 승하해 세조의 비() 정희대비(貞熹大妃)의 명으로 13살의 나이[1469]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 때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은 간난아이였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은 병약해서 결국 성종이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7년간의 섭정을 지나 친정(親政)한 성종은 재위 25년간 조선왕조의 기반을 완성시킨<> 국왕이 되었습니다.

 

성종대의 치적으로 인해 조선조의 기틀이 완성된 것은 여러 가지 업적에서 나타납니다. 홍문관(弘文館), 존경각(尊經閣), 독서당(讀書堂)을 창설해 어진 인재들을 등용했고, 세조 대부터 시작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개정, 완성 반포하여 국가의 통치체제를 확립시켰습니다. 또한 역사서인 <동국통감(東國通鑑)>과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문학서인 <동문선(東文選)> 등의 편찬에서 보이듯이 왕성한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고, 외적으로도 북방의 여진족(女眞族) 소탕이나 남방의 일본(日本)과의 무역 확대 등으로 조선조의 힘이 크게 진작된 전성기를 이룹니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와 세자빈 한씨(훗날 소혜왕후)의 둘째 아들로 1457(세조 3) 730일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두 달이 되기 전에 아버지 의경세자가 20세로 요절하자 할아버지인 세조가 얼마동안 궁중에서 키웠는데, 성품이 돈후하고 서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의경세자의 동생 해양대군이 형의 세자 지위를 승계했다가 1468(세조 14)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예종이 되었다. 그러나 예종이 즉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자 14691128일 조카 잘산군이 뒤를 이어 임금이 되니, 그가 성종이다. 성종은 즉위 후 7년 동안 할머니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을 받다가 20세가 되는 1476(성종 7) 친정을 시작했다.

 

성종은 법령을 정리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1485(성종 16) 반포했고, 1492(성종 23)에는 대전속록을 완성하여 유교적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했다. 세조 측근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진 사림세력을 등용,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등 재위 25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왕비 공혜왕후가 승하 함에 따라 계비가 된 윤씨(윤기무의 딸)가 원자를 출산한 이후 보인 일부 행실을 문제 삼아 폐비, 사사한 것이 훗날 윤씨의 아들 연산군 폭정의 도화선이 되었다. 1494(성종 25) 1224일 창덕궁의 대조전에서 보령 38세로 승하했다.

    

성종은 백성들이 사는 것을 둘러보기 위해 미행(임금이 변복을 하고 궁궐 밖에 나가 민정을 살피는 것)을 자주 했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성종이 궐 밖을 다니며 겪은 일화들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왔다. 어느 해 겨울, 성종이 여느 때처럼 미행을 나갔을 때, 남산골 초라한 오막살이에서 글 읽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담은 무너지고 서까래가 썩어가는 누추한 곳이었는데, 춘추좌전을 읽는 소리가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성종은 등불이 꺼져 불을 얻고자 한다는 핑계를 들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글을 읽던 선비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지은 문집을 읽어본 성종은 선비의 해박함과 그 문집의 명문에 깜짝 놀랐다. 훌륭한 학식을 갖춘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어려운 살림을 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성종은 선비 몰래 쌀과 고기를 그 집에 보내고, 예정에 없던 과거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선비의 문집에서 본 글을 과제로 내걸고,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선비의 문집에 있던 글이 제출되자, 성종은 더 살펴볼 것도 없이 그 글을 장원급제를 시켰다.

 

그런데 글을 지은 사람의 이름이 그 선비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여겨 장원급제자를 들이라 하였는데, 주인공은 선비가 아닌 새파란 젊은이였다. 자초지종을 묻자 젊은이는 그 분은 저의 스승이었는데, 이번 과거를 꼭 보시려고 했으나, 며칠 전 굶주리다가 갑자기 먹은 고기 때문에 크게 병이 나서 돌아가셨다.”고 답하였다. 성종은 안타까움에 크게 탄식하였다고 한다.

 

 

왕위 서열 3번이 제9대 왕이 된 사연

피로를 모르고 책을 읽다

원각사 목불 사건

위기를 발전의 계기로

미지의 섬, 삼봉도를 찾아라

실용적 국방강화 | 씨앗 전쟁

봉보부인은 누구인가?

성종시대 의술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

후처와 첩의 차이

없는 책은 수입하고, 귀한 책은 인쇄하라

연약한 백성을 보호하라

대도 김계종의 최후

76세 노인도 과거에 합격했다

성종의 풍수학 이해

요절한 자매, 함께 누워 있어 그들은 외롭지 않다

 

 

 

 

    

계비(繼妃) 정현왕후 윤씨 (貞顯王后 尹氏 : 1462-1530)

조선 태조왕비 선릉 파평윤씨(坡平尹氏)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의 딸로 태어나 숙의(淑儀)에 봉해졌다가, 왕비 공혜왕후(恭惠王后)가 승하(성종 5, 1474)하고 원자(元子-연산군(燕山君))를 낳은 숙의(淑儀) 윤씨(尹氏)가 계비(繼妃)가 되었으나 폐위되자 1480(성종 11)에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슬하에 중종(中宗)과 신숙공주(愼淑公主)를 낳고 중종 25년에 승하합니다.

 

정현왕후 윤씨는 우의정 영원부원군 윤호(尹壕)의 딸로 1462(세조 8) 626일 태어났다. 1473(성종 4) 6월 궁중에 뽑혀 들어와 숙의에 봉해지고, 1479(성종 10) 연산군의 생모인 왕비 윤씨가 폐비되자 이듬해 118일 그 뒤를 이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당시 정계에 떠오르던 소장파 윤호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외척 한명회를 견제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최후를 바라본 정현왕후는 성종에게 매우 관대하였다. 이에 성종은 다행히 어진 왕비를 찾아 마음이 평안하다.”고 흡족해 하였다.

 

정현왕후는 훗날 중종이 되는 진성대군과 신숙공주를 낳았는데, 공주는 일찍 죽었다. 연산군 때를 거쳐 아들인 중종이 왕위에 있던 1530(중종 25) 822일 경복궁에서 춘추 69세로 승하하여 1029일 선릉의 동쪽 언덕에 국장했다.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된 이후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정현왕후는 원자인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고, 연산군 역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다고 한다.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의 능지석 지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무(尹起畝)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고는, 자신이 친어머니로 알고 있는 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 윤호(尹壕)를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질 만큼 폐비 윤씨의 존재를 몰랐다. 이 질문에 승지들이 비로소 윤기무와 폐비 윤씨에 관한 일을 아뢰었고, 연산군은 그때서야 자신의 친어머니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연산군일기1495(연산군 1) 316일자 기사에는 왕이 비로소 윤씨(폐비 윤씨)가 폐위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일기1504(연산군 10) 320일자 기사에는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죽음에 연루된 귀인 정씨와 엄씨를 잔인하게 때려죽인 뒤 장검을 들고 정현왕후의 처소로 쳐들어가 어서 밖으로 나오라며 행패를 부린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해치지는 않았고, 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가 폐비 윤씨의 복위를 앞장서 반대했음에도 정현왕후에 대한 예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씨 왕비시대가 끝나고 내명부의 골육상쟁을 부르다

 

순릉順陵

 

      

공혜왕후20090814-2.JPG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1456-1474), 1494, 경기 파주 제 205 , 파주삼릉(坡州三陵)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 순릉 큰이미지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 순릉 첫번째 작은이미지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 순릉 두번째 작은이미지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 순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장순왕후 한씨 공릉성종의 비()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 1456-1474)의 순릉(順陵)은 왕비 책봉 5년만에 슬하에 자식 없이 19살의 나이로 승하[성종 6]해 언니인 장순왕후(章順王后 - 예종의 비) 공릉(恭陵)과 나란하게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순릉(順陵)이라 명명되어 자리잡게 됩니다. 당시 풍습대로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은 없고 모든 부속물들은 정갈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순릉은 조선 9대 성종의 비 공혜왕후의 단릉이다. 전체적인 상설제도는 공릉과 같지만 순릉은 왕비의 능이므로 공릉에 비해서는 석물이 많이 있다. 순릉의 장명등은 공릉의 것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어 세부적인 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조선 전기 장명등의 전반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점에서 비슷하다. 문무석인은 좌우 1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릉의 무석인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는 칼을 잡고 무관의 갑옷을 입고 목을 움츠린 모습이다. 갑옷의 선은 뚜렷하지만 얼굴은 다소 경색된 표정을 하고 있다.

 

(우편번호 413-820)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3호선 구파발역 하차 2번출구 9709, 9710, 909, 760, 30, 31 버스이용 파주삼릉입구 하차 후, 도보로 10분정도면 오실 수 있습니다.정자각의 오른쪽에 있는 비각은 정면 1,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공혜왕후의 비가 있다. 비에는 전서(篆書)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고 쓰여 있고, 1817(순조 17)에 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릉의 금천교가 원형을 잘 보전하고 있으며 현재의 진입 모습은 변형된 것이다.

 

 

 

 

 

성종(成宗)은 의경세자(懿敬世子, 德宗)와 인수대비 한씨(仁粹大妃韓氏, 昭惠王后) 사이에서 세조 3년(1457) 7월 30일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1개월여 만에 아버지를 잃는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된 작은아버지 예종(睿宗)이 왕위에 오른 14개월 만에 승하하니 할머니 자성왕대비(慈聖王大妃, 貞熹王后)는 고령군 신숙주(申叔舟) 등과 협의하여 그 뒤를 자산군(者山君, 成宗)이 잇도록 결정을 하였다.

 

 

대신들은 승지 한계순(韓繼純)을 자산군의 사저로 보내 자산군부인 한씨(者山君夫人 韓氏)를 맞이해와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앞에서 즉위식을 가졌으니 그 날이 1469년 11월 28일이다. 다음 날 성종은 예조(禮曹)에 한씨를 왕비로 칭하도록 지시를 하고, 성종 2년(1471) 1월 19일에 왕비(王妃)로 책봉을 하였다. 성종은 책봉식에서 “그대 한씨는 선(善)을 쌓은 명문 집안의 딸로 태어나 부지런하고 검소한 덕(德)이 일찍부터 나타나고, 부드럽고 순하며 깔끔한 성품을 갖고 태어나 내가 사저에 있을 때 이미 나의 아름다운 짝이 되었으며,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때에는 더욱 큰 도움을 주었으니 중궁(中宮)의 자리에 두어야겠다. 자손 또한 번창 할 것이다.”라고 칭찬을 하였다.

그러나 왕비가 성종 5년(1474) 4월 15일 사시(巳時)에 병(病)으로 구현전(求賢殿)에서 승하하자 임금은 시호를 공혜왕후(恭惠王后)라 내리고, 공혜왕후의 언니이면서 시댁 작은어머니인 예종 비 장순왕후(章順王后)의 무덤인 공릉(恭陵) 부근에서 장지(葬地)를 찾아보도록 지시를 한다. 공혜왕후는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와 여흥부부인 민씨(驪興府夫人閔氏)사이의 1남 4녀 중 막내딸로 1456년(세조 2년) 10월 11일에 태어났다. 세조 13년(1467)에 임금은 자산군의 배필을 가릴 때 마음에 드는 며느리 감이 없었는데 공혜왕후를 보고서 어진 모습을 지녔음 알아보고 혼인을 결정하여, 그해 1월 12일에 영응대군(永膺大君, 세종 8남) 집에서 결혼식의 예를 갖추었다. 정희왕후도 살펴보고는 언동이 예의범절에 맞고, 나이는 어려도 행동은 어른스럽다고 하였다. 왕비로 책봉된 뒤로는 삼전(三殿) 즉, 시할머니인 정희왕후와 시어머니인 소혜왕후, 시 작은어머니인 안순왕후(安順王后, 예종계비)를 진기한 것을 구하여 반드시 맛있는 것을 갖추어서 바치며 모셨다. 또한 후궁을 대접함에 있어서는 너그럽고 대범하게 중심을 지켰으니 궁중(宮中)이 모두 다 찬복(贊服)을 하였다.

 

 

공혜왕후가 성종 4년(1473) 7월에 병이 나서 친정으로 옮겨 요양을 하면서 치료를 하고 궁궐로 돌아왔는데, 그 해 12월에 병이 다시 나니 다음해 3월에 구현전(求賢殿)으로 옮겨 거처하도록 하고, 임금과 삼전(三殿)이 매일 같이 거둥하여 보살폈다. 한명회 부부에게는 수시로 입궐하여 공혜왕후를 돌보게 하였지만 “죽고 사는 문제는 하늘의 뜻이다. 끝내 삼전(三殿)을 못 뵈게 되고 효도를 다하지 못해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후사(後嗣)가 없이 승하하였다. 145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인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후에 1457년에 의경세자, 1461년에 예종 비 장순왕후(章順王后), 1463년에 예종의 원자 인성대군(仁城大君), 1468년 세조, 1469년 예종에 이어 1474년에 공혜왕후가 승하한 것이다.

 

 

후사가 없어 승하하기도 전인 성종 4년(1473) 3월 19일에는 판봉상시사 윤기견(尹起畎)의 딸을 숙의(淑儀)로 맞아들이는 일을 당해야했던 공혜왕후를 성종 5년(1474) 6월 7일에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 보시동(普施洞) 공릉의 동쪽 언덕에 서향(卯坐酉向)으로 장사를 지내니 그 곳이 순릉(順陵)이다. 순릉은 한북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우암산 비호봉을 지나 명봉산을 만든 다음 북두고개를 지나 작은 봉우리를 일으켜 세운 후 순릉을 만들었는데, 무덤자리가 주인의 성정만큼이나 아름답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출세를 위해 수단을 꾸몄다고 의심 받은 순릉의 능참봉

 

    이제 능참봉은 없지만, 문석인과 무석인은 여전히 순릉을 지키고 있다.

 

중종실록1528(중종 23) 118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삼공(三公)이 아뢰기를, “순릉(順陵) 참봉 송현(宋俔)은 전 이조 판서 신공제의 집에 분경(奔競 : 관직을 얻으려고 갖은 수단을 쓰는 일)한 것으로 추고를 받았습니다. 의금부는 송현이 판서의 집에 출입한 것으로 의심하여 3차 형문할 것을 계청하였고, 전하는 이를 윤허하셨습니다.

 

그러나 간관(諫官)그가 직령(直領)을 입었었으니 만일 재상을 찾아가 배알하려 했다면 절친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어찌 직령을 입고 갔겠는가?’ 하였으니, 간관이 어찌 헛된 말을 아뢰었겠습니까? 조관(朝官)이 확실치 않은 일로 여러 차례 형문을 받으니 정상이 실로 애매합니다. 직령을 입었었는지 여부는 그 금란 서리(禁亂書吏)를 심문하소서.” 하니, 전교하였다.

 

아뢴 말이 지당하다. 나도 서리를 심문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간관은 증거인으로 추고해서는 안 된다고 하므로 부득이 3차로 형추하게 하였다. 발명(發明)한 후에는 자연 공사(公事)가 있을 것이다. 전에 분경죄를 철저히 밝히지 않는다는 말이 여러 차례 소장(疏章)에 진술되었기 때문에 이제 송현을 3차로 계하(啓下)한 것이다. 지금 그 서리를 심문한다 하더라도 어찌 다른 말을 하겠는가?”

 

위의 기록은 순릉 참봉 송현이 전 이조판서의 집에 출세를 위해 드나들었다는 의심을 사고 있어 그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내용이다. 왕릉을 관리하는 공직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능권무직의 형태로 이어지다가 세조가 관제개혁을 한 이후 능참봉직이 생겼다.

 

능참봉직은 비록 종9품에 해당하였지만, 임금의 능을 관리한다는 상징성 때문에 관료진출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뿐 아니라 이제 막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자들의 청직(淸職)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능참봉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양반의 신분이어야 했다. 보통 생원, 진사 혹은 유학 중에서 임명이 되었으며, 어린 사람보다는 연륜이 있는 자가 임명되었다.

 

파주삼릉-파주삼릉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한명회 이야기

 

공릉과 순릉에 잠든 두 자매

 

파주 삼릉이라고 일컫는 공릉, 순릉, 영릉 중 공릉과 순릉은 공통점이 있다. 이 두 능에 잠든 예종 비 장순왕후, 성종 비 공혜왕후는 모두 한명회의 딸로서 친가에서는 자매지간이지만, 시가인 왕실에서는 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사이였다. 두 딸을 모두 왕가로 출가시킨 한명회는 당대 보기 드문 지략가였다.

 

겸재 정선의 <압구정> 그림, 한명회는 한강변에 별장을 짓고 '갈매기와 가까이 사귀는 정자'라는 뜻으로 압구정 이란 이름을 지었다. 이는 현재의 지명으로 이어졌다.(1741년 비단에 채색, 간송미술관 소관)

 

 

 

성종(成宗)의 비()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1456-1474)

 

 

장순왕후와 공혜왕후. 아버지 한명회의 야심에 의해 두 딸이 모두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됬지만 두 왕비 모두 단명하고 말았던 안타까운 일생을 보냈습니다. 공혜왕후는 12살 때[세조 13, 1467] 자산군(者山君-成宗)에게 출가하여 1469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지만, 5년 뒤에 슬하에 소생없이 승하합니다. 생전에 정희왕후 윤씨{세조의 비()}, 소혜왕후 한씨{추존 덕종의 비()}, 안순왕후 한씨{예종의 계비(繼妃)}가 모두 생존해 있어서 공혜왕후는 효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공혜왕후는 1474(성종 5) 415일 승하하여, 시호를 공혜, 능호를 순릉이라 하고 같은 해 67일 현재의 위치에 안장하였다.

 

공혜왕후는 1456(세조 2) 1011일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막내딸로 연화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공릉에 묻힌 장순왕후와는 친자매 사이였다. 1467(세조 13) 11212세의 나이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잘산군과 가례를 올려 천안군부인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왔으나 예의 바르고 효성이 지극해 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왕비의 자리에 오른 지 5년 만인 1474(성종 5) 41일 열아홉의 나이로 소생 없이 창덕궁 구현전에서 승하하였다. “죽고 사는 데는 천명이 있으니, 세 왕후를 모시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순릉의 지석에는 공혜왕후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가 전한다.

 

왕후는 나면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조금 커서는 온화하고 의순하며 숙경하였다. 1467년 세조가 성종을 잘산군으로 봉하고 배필을 가릴 때 뜻에 맞는 사람이 없었는데, 왕후가 덕 있는 용모를 지녔음을 알고 불러 보고서 혼인을 정하였다. ...... 왕후를 들여와 뵈이니 언동이 예에 맞으므로 세조와 대왕대비가 매우 사랑하였다. 그 때 왕후는 나이가 어렸으나 노성한 사람처럼 엄전했으며, 늘 가까이 모시되 경근하기가 갈수록 지극하니 이 때문에 권우가 날로 더해갔다.

 

위에서 밝혔듯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딸이다. 한명회에게는 슬하에 아들이 1, 딸이 4명 있었는데, 그 중 넷째 딸이 공혜왕후이며, 공혜왕후가 잠들어 있는 순릉 바로 옆의 공릉에 잠든 장순왕후가 바로 셋째 딸이다. 두 사람은 자매간이었지만 왕실에서는 언니와 동생 사이가 아닌 시숙모와 조카며느리의 사이가 된 것이다. 자매가 나란히 왕비에 오른 예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으로서, 한명회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애정 다툼을 투기로 몬 임금, 참극의 씨를 뿌리다. 연산군의 생모

 

회묘 懷墓

 

   

 

성종(成宗)의 계비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 ~ 1482, 숙의 윤씨, 제헌왕후),

1504, 경기도 고양시 제200, 서삼릉(西三陵)

성종의 계비이자 연산군(燕山君)의 생모로, 1482(성종 13) 음력 816일 사사된 폐비 윤씨의 무덤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의 서삼릉 경내에 있다. 원래는 경기도 장단군에 묻힌 묘를 연산군이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으로 천장하였으며, 이후 19691025일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대체적으로 조선 전기의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물들은 여타 왕릉처럼 문인석, 무인석을 모두 갖추고 있다.

 

▲ 회묘의 문인석과 무인석.

 

윤씨는 1479년 폐출당했으며, 1482(성종 13) 8월에 사약을 받았다. 이 때 성종은 예조에 교지를 내려 폐비 윤씨의 묘소를 윤씨지묘(尹氏之墓)’라 표시하고, 묘지기 2인을 배치, 소재지 관원에게 민속적인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며 영구히 고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1494년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1496년 효사묘(孝思廟)라는 사묘(私廟)를 짓고, 윤씨의 묘를 수봉해 회묘(懷墓)라 하였다.

    

 

그 뒤1504년 갑자사화를 겪고 난 뒤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고 회묘를 회릉으로, 효사묘를 혜안전(惠安殿)으로 승격시켰으며, 모든 석물(石物)을 왕릉의 형식과 같이 하는 한편 제향 절차도 종묘 의식과 같게 하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자 회릉은 회묘로 강봉되고, 혜안전도 철폐되어 윤씨의 신주(神主)는 묘 곁에 묻혔다. 석물은 봉분과 함께 그대로 남아 있다가 서삼릉 내 귀인(貴人숙의 묘역 바로 뒤로 이장되었다. 이장된 회묘는 곡장이 불타 기단부만 남았다. 봉분을 두른 난간석도 일부 무너졌으나, 문인석·무인석 등 다른 석물과 함께 조선 초기 왕릉의 석물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서삼릉 비공개 지역에 숨어 있는 연산군 어머니 윤씨(1445-1482)의 회묘를 볼 때마다 김영임이 부르는 '회심곡'의 구슬픈 가락이 묘 주변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폐비 윤씨 회묘의 겉모습은 왕릉과 다름없다. 오히려 웬만한 왕릉보다 외관상으로는 훨씬 훌륭하다. 연산군의 정성 때문인지 조선전기 양식을 따르고 있는 회묘의 석물은 웅장한 무인석과 문인석, 석호와 석양도 뛰어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두 문인석의 얼굴은 한결같이 어둡고 슬픈 표정이다.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길(원당동) 산 37-1회묘는 원래 동대문 회기동에 있었으나 19691025일 경희대학교 학교 공사 때 이곳으로 천묘했다. 회묘가 있던 자리는 현재 경희대학교 경희의료원이 들어 서 있다.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능을 '품을 회()', '돌이킬 회()'를 써서 회릉(懷陵)이라 한 것은 그리운 어머니의 포근한 품에 다시 안기고 싶었던 사모곡이었을까. 1506년 연산군이 폐위되자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하됐지만 '무덤을 건드리면 동티난다'는 설을 우리 조상들이 굳게 믿고 있는 덕분에 겉모습은 연산군이 조성한 회릉의 모습 그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다.

 

폐비 윤씨의 묘에서 나무들 사이로 후궁들의 묘가 내려다보인다. 이곳은 일제가 모아들인 후궁묘와 해방 이후 묘의 주변개발 때문에 옮겨온 명종 후궁 경빈 이씨 묘 외 6기를 천묘해 모두 16기의 후궁묘가 있다. 광복 후에 천묘한 묘들도 왜 일제가 만든 묘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는지 알 수 없다.

   

▲ 폐비 윤씨 회묘에서 내려다 본 후궁들의 공동묘지.

 

▲ 조선 왕들의 후궁묘.

 

▲ 겨울 석양의 그림자가 길게 깔린 대문 틈새로 보이는 후궁묘.

ⓒ2005 한성희

 

 

 

생애만큼 곡절 많은 회묘

    

 

 

성종(成宗)의 계비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 ~ 1482, 숙의 윤씨, 제헌왕후)

 

조선의 제9대 왕 성종의 후궁이자, 두 번째 왕비이며, 10대 왕 연산군의 생모이다. 한때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되었으나, 폐출된데다가 이후 왕후의 지위도 다시 추탈되었으므로 보통 폐비 윤씨라 부른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에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 尹起畝)[3]와 신씨의 딸로 윤관의 11대손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남편(성종)의 후궁들 문제로 남편과 시어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으로 유명하며,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낸 일로 인해 폐서인 된 후 사사되었다. 사사 당시 피를 토한 금삼을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넘겨주며 아들이 자라면 넘겨줄 것을 유언했고, 이는 후일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도화선이 된다.

 

연산군 즉위 후 제헌왕후로 왕후의 작호가 추숭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다시 삭탈되었다. 신숙주는 그의 외당숙이며, 명종 때의 권신 이량은 그의 오빠 윤구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여자관계가 복잡한 남편인 성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성종이 자신의 처소에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다른 후궁들을 질투하여 잡아다가 추궁, 취조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 성종의 눈밖에 났고, 말싸움 중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왕대비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는 설이 있으며, 다른 설로는 삼사의 탄핵으로 폐출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그녀에 대한 왕실의 사후 예우를 본다면 왕실의 눈 밖에 나 폐위된 것이 유력하다.

 

또한 경쟁관계에 있던 성종의 다른 후궁들이 인수대비를 찾아가 윤씨를 비판하며 그녀의 폐위를 부추기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등으로 윤씨는 마침내 1479, 자신의 생일 바로 다음날인 음력 62일에 왕비에서 폐위되었다.

 

기사 관련 사진조선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서인이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점,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 두고자 하였으나,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인수대비)와 엄숙의, 정숙용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면서 1482년 음력 816, 결국 사약을 받아 사사되고 말았다. 윤씨는 죽기 전 자신의 피가 묻은 금삼을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아들이 자라거든 이를 전달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면서 1504년에 갑자사화 등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로 인해 한명회, 한치형 등의 사람들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 이외의 사람들이 사사되거나 유배되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의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齊獻王后)에 추숭되고, 회묘는 회릉(懷陵)으로 격상되었다.

 

사후 경기도 장단에 매장되었으나 장지가 좋지 않다는 지관의 지적으로 신하들의 건의가 있자, 성종은 1488(성종 19)경 한성부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로 이장을 하였다. 뒤에 윤씨의 묘가 회묘, 회릉, 회묘로 변경되면서 이는 지명이 되어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의 지명 유래가 되었다.

 

성종은 폐비 윤씨의 묘를 '윤씨지묘(尹氏之墓)'라 비석을 세우고, 제관 2명을 보내 기일에 제사를 올리도록하되, 묘의 이름을 영구히 고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후에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묘는 회묘에서 효사묘(孝思墓)로 바꿨다가 다시 회릉으로 격상시킨다.

 

그 뒤 무덤은 현 위치인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신동(현 고양시 덕양구)로 이장하였으며, 서삼릉 내에 위치한 회묘(懷墓)이다. 왕비의 예에 따라 능으로 개장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1506(연산군 12)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어 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윤씨에게 올린 관작과 존호는 모두 삭탈되었고,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회묘 근처에는 후궁 묘역이 있으며, 그 중 윤씨의 묘소는 봉분이 크고 석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친정오빠 윤구의 손녀사위는 명종비 인순왕후의 외삼촌이자 권신인 이량이다.

 

폐비 윤씨 폐출 사건

    

 

폐비 윤씨 사사 사건

   

 

회기동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의 동명은 회묘에서 유래한 것이다. 윤씨의 묘가 회릉으로 이름이 바뀌자 이 지역의 이름은 회릉동(懷陵洞)이었으며, 이후 회묘로 격하되면서 회묘동(懷墓洞)으로 바뀌었다. 훗날 회()라는 글자가 어렵다 하여 회()로 바꾸고, ()라는 글자가 좋지 않은 글자라 하여 기()자로 바꾸어 오늘날의 회기(回基)라는 이름이 되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