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한국미술

찬란한 빛, 장신구 「조선여인의 노리개」展

草霧 2013. 7. 24. 14:42

 

 

어찌 더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 <찬란한 빛, 장신구 「조선여인의 노리개」展>

 

 

전시제목 : 찬란한 빛, 장신구 「조선여인의 노리개」展
전시기간 : 2013.5.29-2013.8.4
전시장소 : 보나장신구박물관

보나장신구박물관은 일 년에 두 번, 특별전을 할 때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장신구, 민예품, 공예품 등 1만 5천여 점을 보유한 이곳은 현대미술 전시가 주를 이루는 인사동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흔치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특별전을 그냥 지나칠 수없는 이유는 소장품만으로 이루어진 전시임에도 매번 다양한 주제를 선보이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그럼에도 아직까지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소장품들이 있어 새로운 전시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는 점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기대를 하며 찾아간 이번 전시에서는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돌아왔는데, 몇 번 방문하는 동안 박물관에 대한 애정이 생기지 않았다면, 전시품이 그토록 좋지 않았다면 갖지 못했을 감정에 의해서다.



이번년도에는 서울시의 지원을 받지 못해 매번 특별히 정성껏 제작되었던 포스터가 제작될 수 없었고 가을 전시로 계획중이었던 주제도 미정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사립박물관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시던 관장님 모습에 한 번, 국립박물관과 비교하며 전시는 당연히 무료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 때문에 한 번, 그리고 우리보다 우리의 귀한유물을 더 잘 알아보는 외국인의 안목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 진다.

보나장신구박물관의 관람객의 대다수는 일본인이고 소장품의 가치 또한 일본사람들이 더 잘 알아본다고 한다. 대여 전시에 관해 요청이 들어온 것 만해도 여러 차례지만 관장님은 “조선왕조의 장신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어떻게 일본의 백화점에서 전시를 하냐며 극구 사양하셨다고 한다. 소장품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에 거절이 가능했고 언젠가는 적절한 장소에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알릴 기회가 있을 거라는 굳은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특별전은 장신구, 그중에서도 노리개를 중심으로 그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고대 금제장식과 출토구슬, 노리개 등을 선보인다. 언뜻 작은 규모의 전시장으로 보이지만 장신구의 크기가 다양함을 생각한다면 전시품의 수가 적지만은 않고, 게다가 각각이 지닌 의미와 영롱함은 그 어느 것에도 뒤지지 않으니 전시를 보고 난 뒤에는 박물관에 대한 애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그래요. 어떻게 이렇게 많은 유물을 모았는지 대단하다고.

그런데 난 모은 게 대단한 게 아니라 개인이 박물관을 운영하고 소장품을 보존한다는 게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장신구에 대한 보관이 쉽지 않음은 관장님의 얘기 속에도 묻어난다. 매번 사람들이 오갈 때 마다, 관람객이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전시장의 불을 켜고 끄는 것이 매우 번거로울 텐데도 철저히 지키는 것은 보존에 대한 의지 때문이다.



향갑 노리개



은파란  칠작노리개


금제장식

좋은 인연을 의미하는 가지가 달린 노리개와 물총새깃털로 장식된 향갑, 아직까지는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불분명하지만 출토되기 어려워 그 존재만으로도 귀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도금장식품들이 은은한 빛을 받으며 진열되어 있다. 그 무게 때문에 집안의 가보로 전해졌을 것으로 여겨지는 장도․도끼․호랑이발톱․침통․원앙한 쌍․ 나비․방아다리 등 일곱 가지가 장식되어 있는 칠작노리개와 열쇄패 또한 볼거리이다.


보나장신구박물관 소장 떨잠

볼 때마다 예쁘다고 생각되는 떨잠은 박물관 주변 공사장의 소리에도 미세하게 떨리며 빛을 냈는데 실제로 장식했을 때 그 떨림이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짐작케 한다. 이 모든걸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의 정성 또한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박물관을 나서며 꺼진 불빛 속에서 다음 관람객을 기다리는 영롱함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나는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거라고 믿어요. 두 딸도 나의 이런 생각을 잘 알고 애써주길 바라죠.”

일본 관광객들은 일부러 찾아오는 반면 우리것의 아름다움을 알릴 수 있다는 기쁜마음으로 관람객을 맞이했으나 유료라는 말에 다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을 볼 때 힘이 빠진다는 관장님의 바람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전시에 대한 더 많은 호응과 관심을 기대해본다.

 

글/사진 관리자   

 

이상은 「방은자불우」 겸재 정선 <기려도>

 

푸른 물과 흰 바위는 나무꾼과 어부의 길

조선시대 시의도에는 당시(唐詩)가 사용된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당시라고 해서 조선시대에 모두 후한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다. 시도 유행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당나라 시인 가운데 이상은(李商隱, 812-858)의 시는 그 대표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 아는 얘기로 신라는 621년에 당나라와 국교를 맺으면서 세계적인 대제국의 새로운 문화와 문물을 적극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기가 되면 교류가 한층 긴밀해지는 가운데 새로운 지식과 견문을 얻기 위해 당나라로 건너간 신라 유학생이 수 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唐詩) 역시 이런 루트를 통해 신라에 전해진 것이다. 이때는 전해진 시는 주로 중국의 그 시대인 만당(晩唐)의 시였다. 그리고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 바로 강남의 풍경을 그림같이 묘사한 <강남춘>으로 유명한 두목(杜牧, 803-853)과 이 이상은이었다. 특히 이상은은 번영의 꽃이 만개한 뒤 산락(散落)만을 기다리는 시대정신을 반영하듯 달콤하면서도 위태로운 향기 그득한 염정시(艶情詩)가 특기였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시의 형식을 익히는 게 급선무라 내용을 진지하게 음미할 여가가 없었다. 가볍고 상큼하면서 쉽게 가슴을 사로잡는 이상은 시 같은 것이 유행을 했다. 이런 풍조는 고려에도 계승됐으나 조선이 되면서 사정이 급전직하 달라졌다. 조선시대 주자학은 중국보다 더 엄격한 근본주의에 가까웠다. 따라서 밤비니 촛불이니 하는 야릇한 시어가 등장하는 시인의 시는 당연히 기피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 점에서 이상은 시는 조선시대 내내 별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후기가 돼 경제가 발전하고 유흥 문화가 싹트면서 저절로 다시 관심이 기울여지게 됐다. 이상은 시가 다시 리바이벌된 것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도학적으로 보이는 시가 거론됐다.
  

조선시대의 대화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에 대한 인상은 여러모로 중후하고 사려 깊은 쪽에 가깝다. 금강산 그림이나 한양 일대를 그린 진경산수화 속에 보이는 인물들도 하나 같이 진지해 마치 자연과 우주를 상대하기 위해 그림 속에 들어간 도학자처럼도 보인다. 그런 겸재에게 이상은의 시구가 적혀있는 그림이 있다. 물론 이상은 시 가운데 염정과는 무관하게 은거 생활을 예찬한 시가 대상이다.



정선 <기려도(騎驢圖)>(《謙玄神品帖 중》견본수묵 24.3x16.8cm 서울대 박물관

 
서울대 박물관에 있는 정선 그림 <기려도(騎驢圖)>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콸콸 흐르는 강변을 따라 막 숲속으로 들어서려는 나귀 탄 나그네를 그린 그림이다. 나뭇잎이 시꺼멓도록 짙고 강가로 이어진 산봉우리가 불쑥 앞으로 다가온 것처럼 그려진 것을 보면 비가 온 뒤에 산과 나무가 물기를 잔뜩 머금은 것을 나타낸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챙이 넓은 삿갓 나그네와 당나귀 귀를 비례보다 훨씬 크게 그리는 것은 겸재의 특징 중 하나이다. 여기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멀리 그림자로만 보이는 산 위쪽에 칠언절구 한 구절이 적혀 있다. ‘창강백석어초로 일모귀래우만의(滄江白石漁樵路 日暮歸來雨滿衣)’. 이는 이상은 시 가운데에서, 은자를 만나러 갔다가 못 만나고 시만 두수 짓는다고 하는 <방은자불우 성이수(訪隱者不遇成二首)>의 두 번째 시의 일부다.

城郭休過識者稀   성곽휴과식자희
哀猿啼處有柴扉   애원제처유시비
滄江白日漁樵路   창강백일어초로
日暮歸來雨滿衣   일모귀래우만의

성곽에 쉬어 가니 아는 사람 드물고 
원숭이 슬피 우는 곳에 사립문 보이네 
푸른 강 밝은 해는 어부와 나뭇길의 길이라
해질 녘 발걸음 돌리니 저녁비 옷을 적시네

이상은 시가 수록된 『전당시(全唐詩)』를 보면 그림 속에 적힌 백석(白石)이란 말 대신 백일(白日)로 돼있다. 그러나 어감으로 봐서는 강가의 흰 바위라고 무관하다. 오히려 이쪽이 대자연을 무대로 생활하는 어부와 나무꾼에게 더 잘 어울릴 듯하기도 하다. 해가 돌로 바뀐 것은 이 시가 조선으로 건너오는 과정 어디쯤에선가 조선화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겸재 그림은 산속 은자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세속인 모습을 그린 것이라서 그림 내용이 시의 이미지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시(題詩) 글자를 가만히 보면 이는 왼쪽에 ‘겸재(謙齋)’라고 흘려 쓴 낙관 글씨체와는 조금 달라 보인다. 글씨만 보아서는 겸재 그림에 여러 번 제시를 대필했던 당시의 명필 이광사(李匡師, 호는 원교(圓嶠), 1705-1777)의 글씨체이 가깝다. 실제 이광사는 겸재 그림에 시나 글을 쓴 것이 여럿 있다.  

시의도 중에는 이처럼 대필로 제시를 적어 놓은 것들이 더러 있다. 이인문 그림 <우경산수도(雨景山水圖)>도 그렇다. 이인문(李寅文, 1845-1821)의 경우는 좀 더 특이한데 그는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의 호인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를 쓴 것을 제외하면 여러 점 보이는 시의도에서 스스로 시구를 적어 넣은 그림이 거의 없는 화가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이 그림은 짙은 먹색으로 미점(米点)을 많이 찍어 산도 나무도 무성해 보인다. 먼 산과 가까운 경치 사이에는 비가 물러가면서 뿌린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다. 그림 하단 쪽을 보면 나무가 우거진 사이에 집 한 채가 보이는데 사립문은 굳게 잠겨 있고 집안에서는 한 선비가 책을 펼쳐놓고 읽고 있다. 그리고 집밖 강가 길 위에는 비 그치기를 기다려 집으로 돌아오는 듯한 목동과 소의 모습이 작게 그려져 있다. 

 
이인문 <우경산수도> 지본담채 124.3x56.6 국립중앙박물관


시는 오른쪽 위에 ‘창강백석어초로, 일모귀래우만의’라고 적혀있고 뒤쪽에는 몇 글자 지워진 채 평(評)자만 보인다. 지워진 곳의 인물이 이인문 그림에 이 시구를 적어 넣은 장본인 같은데 어떤 연유에서 이름을 지웠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옆에 ‘운초산수가 적는다(雲樵山叟題)’고 하며 또 다른 칠언절구 한 수가 쓰여 있다. 운초산수란 조선말기에 운초라는 호를 썼던 궁정화가 박기준(朴基駿)을 가리킨다. 이인문은 1821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1836년부터 1865년까지 자비대령화원을 지낸 박기준과는 활동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운초 산늙이의 글은 나중에 더해진 것이다. 

그가 쓴 시는 지금까지 얘기해온 시의도의 시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이는 그림을 감상한 내용을 읊은 시다. 즉 그림에서 느낀 감정을 시로서 표현하고 그것을 다시 그림 위에 적은 것이다. 이른바 감상시인 것이다. 이런 감상시가 그림 속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은 조선의 경우는 박기준의 예에서처럼 19세기 들어서부터이다. 이 역시 시의도의 유행과 전파와 무관하지 않다.
시의도가 널리 퍼지는 것과 함께 그림 속에 시가 들어가는 데 따른 저항감이 무너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중국에서는 원나라 후기부터 시작돼 명대 유행을 하지만 조선에는 한참 뒤에 전해진 것이다. 

아무튼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면 겸재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 그림 역시 흠뻑 비가 온 여름날의 한 장면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그림 속에는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롱이 차림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는 다분히 ‘해질 녘 돌아올 제 내린 비로 옷이 흠뻑 젖었다’는 내용 그대로를 이미지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원래 시와 그 시를 가지고 그림을 그린 시의도를 나란히 놓고 보면 시의도 쪽은 시대에 내려올수록 마치 ‘말 전하기 게임’처럼 이미지가 조금씩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 사례가 있다.

이인문과 약 20살 차이가 나는 윤제홍(尹濟弘, 호는 학산(鶴山), 1764-1840 이후)이 그린 그림에 <귀어도(歸魚圖)>가 있다. 그림 속에 삿갓에 도롱이를 쓴 인물이 낚시대를 어깨에 비스듬히 메고 있어 ‘낚시를 갔다 돌아온다’는 제목과 딱 어울리는 그림이다. 그런데 그림 오른쪽에 딱 붙여서 ‘일모귀래우만의 경도(日暮歸來雨滿衣 景道)’라고 쓰여있다. 경도는 윤제홍의 자다.

윤제홍(尹濟弘) <귀어도(歸漁圖)> 삼성미술관 

당나라 시인 이상은은 애초에 은자를 만나러 갔다 못 만나고 그냥 돌아오면서 이 시를 썼다고 했다. 겸재 그림을 굳이 시의 내용과 견주면 이 시의 뜻을 십분 이해하고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은자가 사는 사립문은 그려져 있지 않지만 챙 넓은 삿갓을 쓴 나귀 위의 인물은 누군가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중이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인문처럼 도롱이를 쓰고 비 그치기를 기다려 소를 데리고 돌아오는 목동이 등장하면 좀 달라진다. 더욱이 집안의 독서인이 그려진다면 얘기가 더욱 이상해진다. 앞서 이상은 시의 이미지가 쉽게 연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억지로 시와 연관시키자면 산속 은자의 삶과, 비 오는 날의 귀가를 장면을 한 그림 속에 병치시켰다는 정도로 밖에는 해석되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낚싯대를 을러메고 귀가를 재촉하는 장면만 덜렁 그려지게 되면 원시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째서 윤제홍은 이상은 시에 낚싯대의 인물을 그려 넣은 것인가. 그는 조선시대 진사에 급제한 고급관료이자 문인이었기 때문에 이상은의 이 시 같은 정도라면 몇 십 수도 머릿 속에 외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다면 이 그림은 시와 연관지어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아마도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이력일 것이다. 그는 31살에 진사 급제하면서 중앙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과장급으로는 요직인 사간원 정언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순조 이후에 불어 닥친 당쟁에 휘말리면서 짧은 중앙부처 생활을 접는 것은 물론 멀리 창원으로 3년간 유배됐었다. 그리고 이 때 얻은 병으로 10년간 고생하게 됐다. 그후 겨우 복직했으나 이후는 지방관을 전전하는 처지였다. 늙어서 중앙에 다시 돌아오기는 했어도 반대파의 탄핵 때문에 이번에는 관직을 박탈당하는 불명예도 겪어야 했다. 

이 정도 경력이라면 그의 마음속에는 분명 어지러운 세속을 떠나 자연 속으로 돌아가리라는 마음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상은 시가 은자를 못 만나고 돌아서는 심사를 묘사했다면 윤제홍은 돌아서는 시인의 모습이 아니라 시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은자에 바로 자신을 대입한 것이다. 그래야 푸른 강 흰 바위는 어초의 길이라고 읊으면서 낚싯대를 을러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림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윤제홍 이후로도 화가들이 이상은의 이 시를 가지고 시의도를 그렸는데 이미 전대(前代)에 여러 해석이 등장한 만큼 박력이 덜하진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우선 부산지방에서 활동했던 변지순이 그린 <하경산수도> 역시 ‘창강백석어초로 해부’라고 적혀있다.(海夫는 그의 호다)

변지순 <하경산수> 지본담채 22x30.8cm 개인 
 

여름날 저녁 무렵의 호수 풍경을 묘사한 그림이다. 먹과 담채를 물에 풀어 농담의 변화를 주면서 바르고(선염법) 군데군데 가볍게 먹선으로 윤곽을 잡았다. 앞쪽 흙다리 위에는 넓은 삿갓을 쓴 인물이 바쁜 걸음을 움직이는 게 보인다. 그림 전체로 봐서는 시의 한 구절을 그렸기 보다는 마치 조선말기 무렵에 유행한 예찬(倪瓚)식 남종산수화 한 폭을 보는듯한 분위기로 바뀌어 버린 느낌이다.

변지순 만큼이나 자료가 없는 화가인 김창수(金昌秀)의 그림에도 이 시구를 가져다쓴 그림이 있다. 그림은 조선시대 그림에 익숙한 눈에는 낯설어 보일 정도로 특이하다. 김창수의 이런 류의 그림은 조선후기에 보이는 이색화풍으로 묶어서 부르고 한다. 그림 뿐만 아니라 인물 자체도 수수께끼이다.

그는 신원상의 기록이 전혀 없다. 그래서 조선 말기에 감각적 필치의 화조화나 산수화를 남긴 김수철(金秀哲, 혹은 秀喆, 호는 북산(北山), ?-1862년 이후)과 동일인이거나 형제라고 추측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인다. 다소 황당한 작가 소개인데 이 그림은 이색화풍의 장본인답게 엷은 먹물을 풀어 그려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림 내용은 비안개에 젖은 어느 산골 포구의 모습이다. 화폭 중간에는 옅은 먹 선을 여러 번 빠르게 그어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붉은 옷의 귀가인(歸嫁人) 모습이 보이는데 이 역시도 생소한 느낌이다. 이 그림의 위쪽에는 예의 ‘청강백석은 어초로요, 일모귀래하니 우만의로다’ 하는 시구가 적혀있다. 수채화처럼 경쾌한 감각 때문인지 이상은 시에 담긴 은자의 유현한 세계에 대한 동경의 마음은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김창수 <산수도> 지본담채 90.0x36.5cm 개인

이 그림도 먹을 짙게 쓴 것으로 보아 흔히 그렇듯 계절은 여름을 나타낸 듯하다. 조선후기의 화가들은 모두 이 시의 이미지를 연상하면서 여름을 떠올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이상은이 은자를 찾아갔다가 못 만나고 돌아오면서 지었다는 두 수의 시 가운데 첫 번째 시를 보면 그 내용은 이렇다.   
 
秋水悠悠浸墅扉,  추수유유침서비
夢中來數覺來稀。  몽중래삭각래희
玄蟬去盡葉黃落,  현선거진엽황락
一樹冬青人未歸。  일수동청인미귀

가을비 불어난 물 문 앞까지 차다니
꿈속에선 몇 번이고 왔건만 정작은 처음이네
가을 매미 사라지고 누런 잎도 다 떨어져
사철나무 하나 남았건만 사람은 돌아오지 않네

첫 번째 시의 이런 내용이 반영됐다면 이제까지의 그림들은 훨씬 더 쓸쓸한 가을 장면을 배경으로 그려졌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시가 그림이 되는 과정은 100%로 시(詩)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 그림을 앞에 높고 ‘여름이다, 가을이다’라는 갑론을박의 대화가 생겨나고 박장대소의 웃음도 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시의도의 매력중 하나라 할 수 있다.(y) 

글/사진 관리자

 

  • 영릉 1. 지혜를 훔친 군주 세종대왕 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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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릉(英陵) 세종(世宗 1397-1450 *1418-1450)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

    최열(미술평론가)

      처음에 영릉(英陵)은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현 서울 서초구 내곡동) 서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세종 이도(李祹)는 자신과 부인 누가 먼저건 죽으면 헌릉 곁에 묻히기로 하고 그 대모산 자락에 터를 마련해 두었다. 1446년에 먼저 부인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그 자리에 묻었으며 또 몇 해 뒤인 1450년 자신도 그곳에 함께 누웠다. 이렇게 해서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탄생했다. 동릉이실(同陵異室)로 봉분이 하나인데 속에 석실을 둘로 하는 형식의 합장릉이었다. 

    물 속에서 25년 

      그런데 아들 문종 때 영릉의 풍수가 적절치 않다는 논의가 일어났고 또 단종 때에도 논의가 줄어들지 않았다가 세조 때에도 다시 거론되었다. 그리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지금의 여주 땅으로 옮길 것을 결정하고 1469년 끝내 천장(遷葬)을 단행했다. 
      사실 천장 논의는 소헌왕후를 대모산 자락 헌릉 곁에 묻으려 할 때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장사 지내려고 미리 만들어 둔 터인 수릉을 파 보니 물길인 수맥(水脈)이 있어 대신들은 강력히 반대하였다. 하지만 세종은 부모 곁에 묻히겠다면서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부인 소헌왕후를 대모산 자락에 묻었다. 그 터는 지금의 인릉(仁陵)인데 19세기의 23대 왕인 순조대왕릉이다. 
      만약 지금의 인릉 터인 이곳에 소헌왕후를 묻지 않았다면 이곳에 터를 마련한 우의정 하연, 예조판서 김종서, 우참찬 정인지와 같은 대신들과 풍수 지관들은 벌을 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종의 고집은 꺾기 어려운 것으로 효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다른 복지(福地)를 마련해서 사후에 복을 얻는다고 해도 어찌 부모 곁보다 더 좋겠느냐"는 명분으로 반대론을 물리친 세종은 또 다음에 자신이 죽으면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 소헌왕후가 잠든 능에 "봉분은 같이 하고 석실은 다르게 만들도록 하라"는 명도 내려 이곳으로 확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과 소헌왕후가 누운 영릉은 물이 흐르는 길이었다. 예종 때 천장하기 위해 봉분을 파 보고서야 그 사실을 확인했다. 소헌왕후는 25년, 세종대왕은 19년을 물 속에서 그렇게 누워 계셨던 것이다. 부부가 물 속에서 헤엄치던 그 세월 동안 왕조는 불안과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세종의 큰 아들 문종은 2년 3월, 문종의 큰 아들 단종은 3년 2개월에 그치고 말았다. 게다가 세종의 둘째 아들 세조 다시 말해 수양대군 이유(李 瑈)가 정변을 일으켜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가 불안했던지 사약을 내려 죽여 버리는 참극을 벌였다.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은 심지어 1년 2개월 밖에 왕노릇을 하지 못했으니 세종의 고집은 참으로 참담한 후과를 불러왔던 것이다. 부인과 자신이 죽어서도 물 속에서 25년을 견뎌야 했던 것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후손들로 하여금 못할 짓을 겪게 하였으니 풍수를 그토록 무시하였던 벌을 받은 것이겠다. 


    영릉 능침. 정면에 북성산이 아름답다.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 연구소 2011. 


    천릉 대역사 

      예종은 할아버지 세종대왕의 새 능 터로 경기도 여주, 지금의 영릉 땅을 골랐다. 이 터는 풍수를 아는 이들 모두가 입을 모아 탄성을 내지르는 명당이다. 누군가는 '뒷쪽에서 생기지맥이 들어오고 앞쪽에서는 주작이 춤추듯 다가오는 주작상무(朱雀翔舞)'의 지세라면서 다음처럼 묘사했다. 

      "앞쪽의 북성산 지맥이 이곳으로 뻗어 나와 다시금 영릉이 정남향으로 이를 쳐다봄에 회룡고조형이라 했고, 정작 영릉 자리의 강이 아주 단정하고 품위 있게 앉아 있어서 모란반개형이라 하기도 했다. 또한 주위의 산자락들이 봉황의 날개처럼 펼치고서 영릉을 품어 준다 하여 비봉포란형이며, 북성산이 봉황형상을 이루었기게 양봉상락형이다. 또한 앞쪽 안대에 해당하는 산세들이 순하게 복종하며 이곳을 향하여 읍하기에 이를 군신조회격이라 하며, 더 들추면 봉황포란형에 기치창검형까지 튀어 나온다." 1

      좋은 것은 다 모아놓은 풍수지리의 땅이다. 풍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영릉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면 아담하되 힘차게 솟아오르는 북성산(北城山)이 아름다운 줄은 누구나 안다. 게다가 동북쪽으로 흐르는 남한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를 것이다. 영릉에서야 강줄기가 안보이지만 조금만 걸어 나가면 한강 상류 여강(驪江)이 있어 절정의 승경을 자랑하는 땅이기조차 하였다. 
      예종은 사람을 보내 경기지방 전역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 중 뛰어난 일관(日官)이 "여주 북쪽 5리 지점에 자리를 얻어 점을 쳐 보니 만억년을 누릴 수 있다" 2하므로 예종은 이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예종은 단호했다. 5천명과 기술자 150명을 한 달 내내 동원했다. 부역에 동원된 민인들은 자신의 양식으로 쌀 2말을 가져와야 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경기관찰사 이계전(李季甸 1404-1459)의 무덤 마저 쫓겨나는 것을 보면 식량을 주지 않는 부역이야 가벼운 부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대에는 명당터라 그랬는지 온갖 무덤들이 더욱 많았지만 예종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의 저주였을까. 예종은 그만 천장한 그 해 11월에 승하하고 말았다. 
      이 천릉으로 말미암아 조선왕조는 그 수명을 백년이나 더 연장했다는 '가백년설'이 널리 퍼졌는데 만약 그랬다면 예종이 몸을 던져 백년의 세월을 번 것이겠다. 

    지혜를 훔친 군주 

      세종대왕의 고집은 부모 곁에 묻힘으로써 그 왕릉이 왕실의 효성(孝誠)이며 더불어 인화(人和)를 상징하는 뜻을 머금도록 안팎에 과시하는 것이었다. 태조, 정종, 태종 세 왕실의 능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음에 자신은 부모를 곁에서 봉양하겠다는 바로 그 인화의 의지를 천명하였던 것이다. 이런 천명은 태조 이성계가 실현한 천시(天時), 태종 이방원이 이룩한 지리(地利)에 이어 자신은 인화를 이룩한 군주로3  개국 초기의 천지인(天地人)을 완성하는 과정의 끝자리에 자신이 서 있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왕조를 개창한 영웅 태조 이성계는 그 하늘의 시간을 훔친 군주였고, 오백년 왕국의 수도였던 개성을 버리고 천년 왕국의 수도를 되찾은 태종 이방원은 땅의 이익을 훔친 군주였으며,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거점으로 학술운동을 전개하여 인간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훔쳐낸 군주였다. 하늘의 이성계, 땅의 이방원, 사람의 이도 이 세 군주는 조선왕조 개국의 토대를 마련한 위대한 세 영웅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일보다도 선대의 왕이 이룩한 업적을 찬양하는데 앞섰다. <<연려실기술>> <세종조 고사본말>에 보면 1432년 박연이 '문무(文舞), 무무(武舞) 두 악장(樂章)을 지음에 마땅히 당세의 일을 노래해야 한다'고 아뢰자, 세종대왕은 "나는 다만 대를 이었을 뿐이니 무슨 공동을 찬송할 것이 있겠는가"라면서 다음처럼 말하였다. 

      "태조께서 전조의 말기를 당하여 백번 싸워서 백번 이기어 그의 공덕이 백성에게 흡족하여 어지러움을 헤치어 바른 세상으로 돌려서 큰 업을 창조하여 만세의 전통을 이루시었고, 태종께서는 예와 악을 지어 교화가 행하여 지고 풍속이 아름답게 되어 중외가 다스려지고 편안하였으니 마땅히 태조를 위하여 무무를 짓고, 태종을 위하여 문무를 지어서 만세를 통하여 행할 제도를 만들어야 하겠으나 혹은 말하기를 '무가 문에 앞서는 것이 타당치 못하다'하니 지난 역사 중에서도 역시 무가 문에 앞선 일이 있었던가, 박연, 정양 등과 더불어 의논하여 나에게 알리라"4  

      이 말을 들은 황희를 비롯한 대신들은 "태조와 태종의 문덕을 함께 찬송하여 문무를 만들고 태조와 태종의 무공을 함께 서술하여 무무를 만드소서"라고 하자 이를 따랐다고 한다. 이처럼 선조를 흠향(歆饗)하여 인화의 질서를 세운 세종대왕은 사후 그가 쌓은 업적으로 말미암아 '조선시대 최고의 인물'이요 '조선제일군주'라는 찬양을 아낌없이 받고 있으니, 살아생전 혼신을 다해 일을 다하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있을 동안 칭송받기를 거절해도 죽은 뒤 찬양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영릉 신도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택현 군주 

      세종이 왕위에 오른 일은 차마 눈뜨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형 양녕대군이 무려 14년 동안이나 세자위에 있었으니까 결국 형과 조카를 밀어내고 자신이 왕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태종은 세자를 폐위했다. 그렇다면 양녕대군의 아들로 세자 자리가 내려가야 했지만 태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인지는 <세종대왕 영릉 신도비명>에서 다음처럼 썼다. 

      "어린 손자를 세우신다면, 앞날의 현명함을 능히 보장할 수 없사오며, 하물며 그 아버지를 폐하고 그 아들을 세우는 일이 의리에 합당하다 하겠습니까. 그런 즉 현능한 분을 골라 국사(國嗣)로 세움만 같지 못할까 하옵니다."5 

      이러한 대신들의 견해에 따라 태종은 "그렇다면 여러 아들 가운데 충녕(忠寧)이 가장 현명하니 그를 세움이 마땅하리라"고 하며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웠다. 그 뒤 명나라 황제는 이러한 일에 대하여 "왕께서 국가 장구(長久)의 책려(策勵)를 위하고 성쇠존망의 기틀을 잘 내다보아 현능으로 세자를 세우려 한다면 왕의 택현한 처사를 청허하겠소"라고 답변해 왔는데 그야말로 현명한 인물을 선택한다고 하는 '택현(擇賢)'의 성공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1397년 4월 10일 한양의 잠저(潛邸)에서 태어났다. 태종이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때이므로 셋째 아들 이도(李祹)는 왕족의 한 명일 뿐이었다. 이도가 4살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 아버지가 아들을 안고 둥그런 태양 속에 있었다. 어머니가 이 꿈을 꾼지 얼마 안되어 태종이 즉위하였고 또 세월이 흘러 그가 왕위에 올랐으므로 실로 세종은 4살 때 왕위에 오를 운명과 마주친 것이다. 아버지가 왕위를 차지하고 궁궐에 들자 왕자가 된 이도는 궁궐에 들어가 자라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을 소개한 정인지는 이어 다음처럼 썼다. 

      "궁에 계실 때부터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시고, 침잠(沈潛), 과묵(寡黙)하시며, 씩씩하고도 아름다운 위의(威儀)가 계셨다."6 

      또한 의정부에서 지었을 뿐 그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세종대왕 행장>에는 다음처럼 묘사했다.  

      "천품의 자질이 영예하고 심중하고 후하며, 배우기를 즐겨하고 게으르지 않으셨다. 그 전에 병을 앓으면서도 글 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므로 정종이 탄성을 발하기도 하였다. '충녕군이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참으로 천성이다'"7 

      이렇게 자라다가 갑자기 왕위에 오른 세종은 왕비와 공주, 왕자에게 어질고 자상함은 물론이려니와 자신에게 왕위를 앗긴 양녕대군 및 효령대군에게도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일가친척도 보살폈으니 선대의 왕들이 베풀지 못한 덕행을 보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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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영훈,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 대원사, 2000. 66쪽.  
    2. <여주목>,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Ⅱ, 민족문화추진회, 1969.53쪽.  
    3. 
    장영훈,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 대원사, 2000. 62쪽. 
    4. 
    이긍익, <<국역 연려실기술>>1, 민족문화추진회, 1966. 245-246쪽.  
    5. 
    <세종대왕 영릉 신도비명>, <<선원보감>>2, 계명사, 1989. 183쪽.  
    6. 
    <세종대왕 영릉 신도비명>, <<선원보감>>2, 계명사, 1989. 184쪽.  
    7. 
    <세종대왕 행장>, <<선원보감>>1, 계명사, 1989. 198쪽. 
    글 최열(미술평론가)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