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흥인문은 수도 서울의 동쪽 관문으로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방위하기 위하여 도성을 축성할 때 함께 건설된 문이다. 태조 5년(1396) 9월 건설되어 현재까지 590년 간 내려오는 동안 수차에 걸친 수축과 개축이 있었으나 그 원형만은 현재까지 보전되어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 태조 7년에 창건되었고, 고종 6년에 전면 보수하였다. 원래 이름은 흥인지문이며, 일제강점기부터 동대문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중앙에 홍예문을 두고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문루를 세워 지은 2층 건물로 서울의 8대문 중 유일하게 바깥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벽을 쌓았다. 대문 주위로 성벽은 모두 헐려 나가고 옹벽과 문만 남아 있는데, 원래 차도 한가운데 있던 것을 주변에 광장을 만들고 포토아일랜드를 설치하는 등 직접 앞에서 관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근에 동대문 패션타운 등이 있어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특히 패션타운 등의 화려한 조명과 대조적으로 은은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흥인지문이 조화를 이루어 야간 사진촬영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조선 왕조 태조의 한양천도와 함께 한성부(漢城府)의 행정구역은 동,서, 남,북,중 5부(部)로 나뉘고, 이는 52개 방(坊0으로 세분되었는데 동대문(흥인지문) 밖 우리 동대문구 지역은 동부에 소속된 12개방 중에 성밖 2개방인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에 속하였다. | | 조선 왕조 태조의 한양천도와 함께 한성부(漢城府)의 행정구역은 동,서, 남,북,중 5부(部)로 나뉘고, 이는 52개 방(坊0으로 세분되었는데 동대문(흥인지문) 밖 우리 동대문구 지역은 동부에 소속된 12개방 중에 성밖 2개방인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에 속하였다.
고종4년(1867)에 간행된 육전조례에 보면 인창방에는 청량리계, 전농리계, 제기리계, 답십리계 뿐만 아니라 왕십리계, 마장리계, 중량계까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고종 31년(18940)에 있은 갑오개혁으로 많은 동리가 한 계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때 동서(東暑) 숭신방 동문외계에 신설동, 신리, 우산각리가 속하였고, 인창방의 동소문외계(東小門外界)에 제기리, 용두리, 전농리, 답십리 청량리, 회묘리, 휘경원, 이문리 등 동대문구의 대부분 지역이 속했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일제가 한성을 경성(京城)으로 개명하고 5부(府) 8면(面)으로 개편할 때 종전에 써오던 방이란 명칭을 면으로 고쳐 숭신면, 인창면으로 불렀고,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현 동대문구의 전 지역은 숭신면에 통합되어 경기도 고양군 숭신면에 속했다.
그 뒤 1936년 경성부 구역확장을 하면서 리(里)가 정(町)이 되어 다시 모두 경성부 동부출장소에 소속되었다. 1943년에 구(區) 재도 실시에 따라 출장소는 폐지되고 동부출장소 관내는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분할되었다. 이때 동대문구에 소속된 정은 창신, 숭인, 신설, 안암, 종압, 돈암, 용두, 제기, 청량, 회기, 이문, 휘경 전농, 답십리. 14개 이듬해에는 성북동까지 15개 정이 되었다.
1946년 9월 경성부가 서울특별시가 되고 10월1일, 행정명칭을 동(洞)으로 개칭하였고 1955년 21개 행정동으로 새 출발 한 동대문구는 1963년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의 상봉리, 중화리, 묵동리, 신내리, 망우리까지 편입되어 크게 확충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5년 10월1일 서울특별시 구역변경 때 속칭 게리맨더링으로 동대문구의 창신동, 숭인동 및 신설동 일부가 종로구에, 면목동, 용두동, 답십리동의 각 일부가 성동구에, 보문동과 신설동의 각일부가 성북구에 편입되고 대신에 성동구의 중곡동, 능동, 군자동의 각 일부가 동대문구에 편입되고 장안동이 설립됨으로서 32개동이 되었다.
1988년1월1일을 기해, 인구 76만이 넘는 구는 다시 조정되었는데 이때 동대문구 관할이었던 면목동, 상봉동, 중화동, 묵동, 망우동, 신내동은 신설된 중랑구 관할이 되었으며 동대문구는 신설동, 용두동, 제기동 전농동, 답십리동, 장안동, 청량리동, 회기동, 휘경동, 이문동 등 10개 법정동과 26개 행정동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 지형을 보면 동으로는 구룡산과 아차산이 바람막이를 해주고, 북한산에서 남으로 흐르는 중랑천은 넓은 평야를 형성해준다. 또한 남으로는 도성에서 흘러온 청계천이 있어 비록 홍수 때에는 주변 저지대가 범람하는 피해를 입기도 하지만 대신 이것이 넓은 범람원을 이루는 구실을 하였다. 지질 역시 비교적 두터운 충적층을 이루고 있고 연평균 기온이 11.1℃로서 생물이 살아가기 적합하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예전에는 이곳의 농토를 대체로 상답으로 평가하였는데, 특히 현재 경동시장에서 오스카극장 부근의 방아다리 일대는 비옥한 곳으로 이름이 났었다고 한다.
2. 농본정책의 상징인 적전과 선농단 중농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 권농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적전(籍田)을 설치 운영하였는데 이를 동대문구 지역에 설치한 것은 이곳이 도성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농경지로서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전농시(典農寺)는 적전을 경영하여 권농의 모범을 보이고 아울러 제수를 마련 선농단 같은 곳에서 제례를 지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기구였다. 즉 전농시의 적전경영은 국왕이 적전을 친히 경작함으로써 농업을 중히 여기고 농업을 권장한다는 방침을 널리 알리는 목적과 함께 적전에서 농작물을 시험적으로 재배하여 품종을 개량하고 농사기술을 개선하고자 함이었다. 제기동에 선농단을 설치한 것이나 방아다리 일대의 비옥한 토지를 파종답(播種沓)으로 이용하였다는 기록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준다. 더욱이 방아다리 일대는 일제시대에 종묘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적전령,적전사,적전승 등의 관리가 일을 맡아보던 필분각이 있었던 전농3동은 적전이 있었던 자리라 하여 텃골이라 불리어졌으며, 적전의 소출을 임시 저장하였던 창고가 있었던 전농4동이 창말이라 불리어진 것을 보면 이 지역의 자연부락 이름이 모두 적전과 관계있음을 알 수 있다.
3. 한양의 야채수요를 충족시키던 채소밭 조선후기 도성의 인구가 급증하고 그에 따라 채소,연료의 수요가 증가하자 동대문구 지역내 개간이 가능한 땅은 채소밭으로 바뀌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초기 10만에서 후기 20만으로 늘어난 한양의 인구가 소비하는 식량과 부식, 그리고 연료는 막대하였다. 기본적 식량인 쌀,콩 등 곡물은 외방에서 운반되었으나 채소,과일,수산물,화물 등은 주로 원거리 수송이 불편하여 대개 근교에서 조달되었다. 특히 북한산,수락산,불암산에 발원하여 연변에 비옥하고 넓은 충적지대를 형성해주는 청계천과 중랑천 주변에 있는 전농동,답십리,장안동 일대는 비교적 넓은 평야를 갖춘 비옥한 지대로서 농경에 적합하였고 채전으로 유명하였다. 즉 답십리 일대에서는 미나리 배추, 제기동 일대에서는 토란/배추, 청량리동 일대에서는 미나리가 주로 생산되었다고 한다. 조선후기 경동시장 부근이 미나리꽝으로 불린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4. 경기도,강원도,충북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 동대문구는 본래 태종의 능이 있는 동구능으로 왕래하는 능행로가 지역을 관통하고 있어 국왕의 행차가 가끔 지나는 곳일 뿐이었다. 능행로는 동대문→신설동→안암로→종암동→월곡동→화랑로→묵동교→신내동→양원리→망우리고개 코스가 일반적이었나 때로는 동대문→신설동→왕산로→망우로→망우리고개로 이어지는 길을 택해 동대문구 지역을 관통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함께 경기도 내륙의 양평/포천, 강원도, 충청북도 등지에서 물자를 갖고 오는 사람들이 지나는 길목이 되면서 후자의 경로가 보다 널리 이용되었고 이로 인해 동대문구 지역은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왕산로와 망우로의 주변에는 상업취락이 형성되었는데 망우리고개를 넘어 가쁜 숨을 잠시 쉬어야 하는 곳이 상봉동이라면 잠시 요기를 하는 곳이 회기동 떡전거리, 그리고 다시 길을 걸어 하룻밤을 유숙하면서 동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곳이 용두동이었다. 용두동 일대가 객주거리로 번창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한 두 시간이면 도성안으로 출입할 수 있다는 사정 때문에 별도의 산업 또는 교통의 거점이 형성되지 못하여 이 지역이 부도심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흥인지문(동대문) 한성부의 동쪽을 지키던 큰 대문 보물 제1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옛날 중요한 국가 시설이 있던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서울 성곽의 여덟 성문 가운데 동쪽의 큰 대문에 해당한다. 동대문이라는 이름도 거기서 기인했다.
'흥인(興仁)'은 어진 마음을 북돋운다는 뜻으로 유교사상의 첫 번째 덕목인 인(仁)을 뜻한다. 다른 4대문과 달리 네 글자의 현판이 독특한데 도성의 동쪽 방면이 텅 비어 있어 ‘의’에 해당하는 지(之)자를 넣어 무게감을 주었다고 한다.
흥인지문은 남쪽의 큰 대문인 숭례문과 마찬가지로 조선 초기에 창건했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됐고 50여 년이 지난 문종 원년(1451년)과 단종 원년(1453년)에는 일부 보수 작업을 진행했다. 그 후 400여 년이 지난 고종 5년(1868)에 동대문 전체가 썩어 지탱하기 어려워지자 전면적으로 개수 공사를 시작했다. 문루가 매우 낮아 문지를 8척 돋우고 그 위에 새로 홍예(虹霓)를 쌓고 초루(譙樓)를 중건했다. 공사는 1년 동안 진행돼 고종 6년(1869)에 완공됐다.
그 후 일제강점기(1934년)를 거치면서 일본에 의해 '동대문'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재 지정이 됐고 오랫동안 그리 불려왔다. 그러다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재평가 작업을 통해 본래의 이름인 흥인지문을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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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고 화려한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
흥인지문은 중앙에 홍예문을 두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문루를 세워 지은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으로 되어 있다. 사래 끝에는 토수를, 추녀 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를 올려 왕성의 대문으로 손색이 없다. 기둥 위의 공포는 다포양식이다. 모양새가 가늘고 연약해 보이며 장식이 강조된 것이 조선 후기 양식을 잘 드러낸다.
흥인지문은 다른 문과 달리 옹성이 있는 것도 큰 특징이다. 옹성은 '곡성(曲城)' 또는 '치성(雉城)'이라고 하는데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도록 성문을 둘러쌓은 작은 성을 말한다. 형세가 낮고 평탄해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지형적 약점을 보완하고, 반대로 적을 공격하기에 용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흥인지문은 조선 후기의 섬세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지닌 문화재로 현재는 좌우의 성벽이 모두 헐러져 나가 도로 가운데 성문만 남았다. 하지만 숭례문 화재 이후에 그 소중함이 한층 더해진 우리네 문화재다.
- 흥인지문의 역사를 설명하는 안내판
- 처마를 4면에 두는 우진각 지붕을 이고 있다.
- 보물 제1호인 흥인지문
- 흥인지문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다.
- 태조 7년(1398)에 완성했으나 현재의 문은 고종 6년(1869)에 다시 지었다.
- 바깥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반원 모양의 옹성(饔城)을 쌓았다.
'서울의 동교(東郊)'로 불렸던 동대문구 지역백제 건국초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위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혼재하여 아직 정설 또는 통설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제까지 하북위례성의 위치를 모색 또는 고증한 여러 학자중의 반수이상이 삼각산 동록(東麓) 그 중에서도 특히 중랑천 일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주장이 가장 강하다는 점으로 미루어 서울의 동교(東郊), 지금의 동대문구 지역은 옛날부터 천연의 수어지(守禦地)이며 동시에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비옥한 토지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는 동대문지역의 동북일대가 남경(南京)의 후보지로 거론되기도 했다. 서울 도성(都城)이 축조되게 된 시초는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한양에 정도(定都)한지 겨우 1년 반도 안되는 태조 5년(1396년) 정월부터의 일이다. 이때 도성에는 모두 8개의 대·소문(大·小門)을 설치하였는데 그중 세 개는 대문(大門)이고 다섯 개는 소문(小門)이었다. 그리고 3개 大門에 위계(位階)가 있었으니 첫째가 숭례문(崇禮門;南大門)이었고 두번째가 흥인문(興仁門:東大門)이었다. 예(禮)를 숭상(崇尙)한다는 뜻의 남대문에 대한 대칭(對稱)으로 동쪽의 大門은 인(仁)을 흥(興)하게 한다는 뜻의 명칭이었다. 그러나 흥인문(興仁門) 또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는 이름으로 이 문(門)을 부르는 사람은 거의없고 모두가 속칭인 동대문이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으니 아마 동대문이라는 이름은 전국 방방곡곡에 즉시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또 한가지 특기할 것은 서울이 아닌 지방의 큰 고을에도 성문이 있어 남문이니 동문이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개중에는 개성의 경우처럼 남대문이라는 것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어떤 지방에 가도 동문(東門)을 동대문이라고 불리워지는 예는 없다. 그러므로 동대문이란 지명은 온 나라 안에 단 한 개밖에 없는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조선왕조시대, 이 동대문을 나서면 강원도일대로 통했고 혹 삼남지방(三南地方)으로 가는 사람들 중에도 이 문을 나서서 한강 뚝을 따라 살곶이다리를 건넜으며 북쪽 함경도로 가는 이중에도 동소문(東小門)을 택하지 않고 동대문에서 안암동·종암동의 길을 택하는 자도 있었다. 해가 동쪽에서 뜨기에 동녘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의 고향이고 또 그곳이 비옥한 땅이면 농경사회의 중심이 되기 마련이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능묘(陵墓)인 동교(東郊)의 끝에서 찾아 「근심을 잊게 되었다」(忘憂)고 했고 조선왕조 마지막의 능묘(陵墓)도 동교(東郊)가 끝나는 자리에 섰으니 모두가 동방숭앙사상(東方崇仰思想)의 발로(發露)였었다. 도성(都城)밖 동교(東郊)가 마음의 고향이었을 뿐 아니라 이곳이 또한 대단히 비옥한 땅이었기 때문에 왕실에서 신농씨(神農氏)에게 제사지내는 선농단(先農壇)이 동대문에서 도보 30분거리에 설치되었으며 이 선농단제(先農壇祭)는 이 나라가 일제의 완전식민지가 되어버리기 3개월 전인 융희(隆熙) 4년(1910) 5월5일까지 이어지고 잇다. 참고로 융희 3년(1909년) 4월5일에 선농단하(先農壇下) 동적전(東籍田)에서 거행된 순종황제의 친경(親耕)때 모였던 백성들이 부른 친경가(親耕歌)의 1절(모두3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융희(隆熙) 3년 春 4월5일이라 선농단하 동적전(東籍田) 친임(親臨)하시와 천하대본 농사로 세우오야 만민이 표준으로 미시는 장가 삼천리강산 이리로 개간(開墾)일세. 농상증(農桑增) 호구증(戶口增) 융희만만세(隆熙萬萬歲) 오늘날 동대문구의 범성(範城)은 그렇게 넓지 않으며 지난날 동대문구 관내에 있던 동대문도 동묘(東廟)도 이제는 타구 관내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東)에는 리문(里門)의 옛 유적터가 있고 사도세자의 처음 무덤터였던 배봉산이 있으며 홍릉의 울창한 숲과 세종대왕기념관, 청량사, 선농단지 등등 관내에는 역사의 향기어린 곳이 허다히 산재하여 오랜 전통을 지닌 동교(東郊)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새로운 모습으로의 승화(昇華)를 향하여이 지구상의 모든 지역은 그 지역마다의 특색있는 얼굴을 지니고 있다. 서울의 경우만 보더라도 같은 사대문 안이지만 종로와 중구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가 있다. 또 같은 성(城)밖이지만 동대문 지역과 서대문지역의 모습이 전혀 달라 각각 그 특색을 지니고 있다. 동대문구에 바로 이웃해 있는 성동구·성북구와 동대문구의 모습이 전혀 다르고 중랑천을 사이에 둔 중랑구와 동대문구의 모습은 처음부터 비교가 되지를 않을 정도로 다르다. 조선왕조시대 말까지의 모습은 성북지역·동대문지역·성동지역간에 별로 큰 차이가 나지를 않았다. 성북구에는 북한산이 있었고 동대문구내에는 그렇게 큰산이 없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그러한 점을 빼면 대동소이한 평화로운 농촌지역이었다. 그 모습들이 달라지는 것은 개화기·일제시대 이후의 일이다. 다 같은 서울의 동교(東郊)이면서 성북이나 성동에 비해 동대문지역은 훨씬 빨리 개화되었고 그러므로 훨씬 빠르게 발전해 간다. 동대문구에 개화의 물결이 물리적인 형태로 들어오는 것은 우선 명성황후의 국장(國葬)과 능묘(陵墓)가 설치되는 1897년부터의 일이고 이 홍릉(洪陵)이 있었기에 고·순종 양황제의 잦은 능행(陵行)이 있었으며 또 1899년 5월 18일(4월 초 8일)에는 이나라 최초의 전차가 청량리까지 통하게 된다. 당시의 서울거리에는 몇대의 자전거와 인력차가 달리고 있을 뿐이고 한 대의 마차도 없었고 하물며 자동차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대였으니 천지개벽에 가까운 사실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답십리에 전차가 들어간 것이 1914년이었고 성북구의 중심인 돈암동에 전차가 들어간 것이 1941년이었으니 신설동, 청량리가 얼마나 빨리 개발되기 시작한 것인가를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근대적인 가로수가 동대문 밖에서부터 청량리까지 심어진 것도 1890년대의 후반기였고 그것은 한반도 전역을 통하여 최초의 일이었다. 경원선이 개통됨에 따라 청량리역이 영업을 시작한 것이 1914년이었고 경춘철도의 성동역이 영업을 개시한 것은 1939년이었다. 지금 미주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자리에 경성제국대학 예과건물이 준공되어 시업식(始業式)을 거행된 것이 1924년 5월 10일이었고 신설동에 종연방적주식회사 경성공장이 입지한 것이 1925년11월이었으며 역시 신설동에 경성경마장이 설립되어 낙성식을 거행한 것은 1928년 9월이었다. 광복후의 변화, 인구집중현상은 서울시내 전역에 걸친 공통적인 현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동대문구 관내에의 인구집중은 매우 초기에 그것도 대량으로 진행하게 된다. 1960년대의 말에는 이미 신설·용두·제기·전농·청량리 등 각 동에는 거의 공지를 찾아볼 수 없을 만치 주택이 빽빽히 들어서게 되었고 이 경향이 1970년대 전반기에 들어서는 답십리·휘경·회기·이문 등 각 동에도 똑같이 전개되고 있다. 답십리·전농·휘경·회기·이문 등 각 동에 인구가 이동하고 주택이 들어서고 할 당시의 속도는 너무나 빨라서 미처 서울시가 계획적인 개발, 예컨대 구획정리사업등을 전개할 겨를이 없었다. 그것은 청량리역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가 교통면에서나 교육면에서 서울시내의 다른 지역에 비해 대단히 편리했기 때문에 빠른 시일내에 대량인구의 집적·정주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대에 들어선 이들 대량의 주택들은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하나 그 대다수는 30평 정도의 대지에 20평 정도의 건물들, 이른바 「집장수 집」으로 점거되어 있어서 소득수준이 6천달러를 넘어 1만달러를 향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는 거의 모두가 재개발되어야 할 처지에 있다. 물론 동대문구 관내에도 구획정리수법에 의하여 새롭게 개발된 지역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날 경성경마장이 소재했던 신설동일대에 동대문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된 것은 1960년대의 전반기였으나 이미 30년전의 일이라서 그 건물들의 거의가 재개발되어야 할 시점에 있는 실정이다. 장안평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된 것은 1970년대의 후반기에서 80년대의 초에 걸쳐서였으니 이 지역만은 신개발지로서 타 지역에 비해 손색이 없으나 불행히도 그 범역이 협소하여 동대문구 전체의 모습에 큰 변화를 가져 올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산업면에 있어서도 사정은 동일하다. 경성시장에서 청량리시장까지, 그리고 그남쪽의 수산시장·청과물 도매시장은 그 규모면에 있어서나 거래량에 있어서 그리고 그것이 다루는 상품의 다양성 등에 있어서 가히 한국최고 또는 한국을 대표하는 지위에 있다. 「서울 청량리역 근처 경동시장」의 이름을 모르는 한국인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경동시장이 재래식 시장의 대표일 수 있어도 근대식 시장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동대문구 관내의 주택과 산업시설은 거의 모두가 초로의 상태에 접어들었거나 그 상태를 넘어 서려고 하고있다. 전통이 있기에 그리고 빨리 개발되었기에 처해진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다행히 동대문구 관내 주거지역 도처에서 현재 재개발을 향한 거센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 10년 내지 20년내에 이 지역 일대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탈피되고 승화될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예측을 가능하게 해주는 밑바탕에 관내 50여만 주민의 강한 주민의식이 뒷받침되어 있는 것이다. 동대문구 일대가 화려하게 변신(變身)함으로써 아름답고 살기좋은 환경이 마련될 미래를 향하여 오늘도 또 내일도 착실한 발걸음을 옮기기로 하자. 옛이야기하정 유관에 얽힌 이야기청백리의 표상, 효자 유계문, 검소하고 근면한 유관선생, 너무나 서민적인 하정 유관, '우산각 골'과 하정 유관... 안암천, 안감내 다리에 얽힌 옛날 이야기지금은 서울 한가운데로 한강이 흐르고 있지만 예전 조선시대의 한양인 그 당시 서울 한가운데는 청계천이 흐르고 있었다... 회묘에 얽힌 옛날 이야기 우리구 회기동, 현재는 천장산 아래 경희대학교가 위치하여 큰 터를 잡고 교육의 요람으로써 뿐 아니라 동서양방을 겸한 병원, 예술 문화공연장인 평화의 전당 등을 건축하여 그 일대가 번창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때는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가 있던 곳으로 '회묘리'라 불렸다... 동대문에 얽힌 옛이야기 조선초기 수도인 한양에는 외곽이 토성으로 쌓여 있었고, 동·서·남·북으로 각각 커다란 대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4대문 안을 문안 또는 성안이라 하였다... 꽁보리밥과 가평현감조선시대 선조대왕때 영의정을 지냈던 오성 이항복 대감께서 경기도 가평으로 여름휴가를 가던 길이었다. 대감께서 공무가 아닌 사행길이라 평복 차림으로 그 당시 고관들이 행차할 때 타던 가마 대신에 조랑말을 타고 하인 한명을 앞세워 길을 떠났다... 지혜로운 창마을 떡장수 현재 서울시립대학교가 위치한 전농동에서 정신병원이 있는 청량리 쪽으로 넘어 가려면 시멘트다리를 넘어야 하는데 이 다리를 가리켜 '떡전교' 또는 '떡전다리'라 부른다... 엄귀비의 무덤, 영휘원 우리 구 청량리2동으로 편입된 홍릉 일대는 원래 조선왕조 왕가 소유 국유림이었다. 지금은 도로가 나고 구획정리가 되어서 분간하기가 쉽지 않지만 홍릉 일대는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 줄기가 뻗어내려 오다가 천장산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야산지대로서 왕가에서 주로 능 터로 사용했던 곳이다... 슬픈 왕세손의 무덤, 숭인원 홍릉에 있는 영휘원 경내 입구에는 또 하나의 큰 무덤이 있으니 곧 비운의 왕세자 이은(垠)의 아들 즉 순종의 왕세손인 이진(晉)의 무덤이다... 설롱탕인가, 설렁탕인가 모든 것이 음력(陰曆)에 기초했던 옛날에는 1년을 24절기로 나누었다. 긴 겨울이 거의 끝날 무렵에 봄에 들어선다는 입춘(立春)이 오면 이어서 겨우내 내렸던 눈 대신에 비가 온다는 뜻의 우수(雨水)가 지나고 보름 뒤에 긴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이 따라온다... 전차가 처음 다녔던 길, 청량리 지금은 서울시내 곳곳이 지하철로 연결되어 있고 자동차가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약 100년 전만 해도 서울거리에는 사람이 끌거나 밀어서 움직이는 인력거가 가장 편리하고 빠른 교통수단이었다... 보제원에서 하룻밤 쉬어 갑시다 조선시대 흥인문(동대문) 밖 3리 지점에 보제원이 있었다. 보제원이란 명칭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보호하는 구휼기관이었다... 용이 승천한 용두리 찬물내기 풍수지리적으로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은 북악산 줄기에서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구릉 가운데 하나인 산자락을 중심으로 생긴 분지에 동네가 형성되었고, 동네를 감싸고 지나가는 뒷산은 마치 용이 꿈틀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다가 종로쪽으로 향한 동네의 진입부분은 용의 머리에 해당되므로... 봉이 김선달의 용두리 찬물내기 물장사 평양에서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은 금강산으로 들어가 이곳 저곳을 유람하기로 마음먹었다. 대동강물을 팔아 챙긴 돈 4000냥 중에 일부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하여 기부하고... 뒤주 속에 갖혀 죽은 사도세자 현재 휘경2동, 전농동, 답십리에 걸쳐있는 배봉산은 예전에는 경기도 양주 땅이었다. 이 산이 배봉산(拜峰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사도세자의 무덤이 그곳에 있어 서울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향하여 절(拜)을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허위의 충절이 서린 왕산로 "나라가 어찌 이렇게 허망하게 왜놈들에게 유린당할 수 있습니까?"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한데 백성들이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겠소이까?"... 인물송파산대놀이 예능보유자 김학석 송파산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의 예능보유자로 1995년 6월 지정된 김학석(62, 현 동대문문화원 이사)씨는 이문2동에서만 무려 40여년을 살고있는 우리고장의 자랑스런 문화예술인이다... 경기민요 예능보유자후보 김금숙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1975년 7월 12일 지정)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후보인 김금숙(동대문문화원 이사)씨는 현재 회기동에 소재한 김금숙경기민요연수원에서 왕성한 후진양성을 하고 있다... 신설동동대문구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신설동은 조선시대 동부숭신방(崇信坊)에 새로 설치한 마을이라 하여 신설계(新設契)라 하던 것을 갑오개혁 때 신설동(新設洞)이라 하였는데... 용두동왕산로(旺山路)와 하정로(夏亭路) 주변에 신설동과 경계하고 있는 용두동의 동명은 예전에 마을 뒷산의 산세(山勢)가 '용(龍)의 머리'와 같다하여「용머리」또는「용두리(龍頭里)」라고 불리었는데... 제기동왕산로(旺山路) 북쪽 정릉천 양안에 위치한 제기동(祭基洞)의 동명은 조선시대 신농(神農)씨와 후직(后稷)씨를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매년 국왕(國王)이 친히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祭祀)를 지내던 선농단(先農壇)이 있어 유래된 이름으로... 전농동전농동은 조선조 초기부터 이곳에 왕이 직접 농사를 짓던 친경지(親耕地) 적전(籍田)〔일명 전농(典農)이라고도 하며 당시는 東籍田이었음〕이 있었기 때문에... 답십리동답십리 동명의 유래는 조선초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도읍을 정하려고 이곳을 밟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이곳이 도성, 즉 동대문(東大門)으로부터 10리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하여 왕십리(往十里)와 같은 의미로 답십리(踏十里)라 하였다는 설이 ... 장안동장안동의 동명은 원래 동쪽으로 한내(漢川-중랑천의 옛이름)를 등지고 발달한 평야라 하여「장한벌」또는「장한평(長漢坪)」이라고 한데서 비롯 되었다는 설과 ... 청량리동청량리의 동명은 청량리61번지 바리봉 아래 신라말기에 세워진 유서깊은 사찰 청량사(淸凉寺)에서 유래되었다고 ... 회기동회기동의 동명은 회기동 산5번지(경희의료원자리)에 있었던 연산군(燕山君)의 생모 폐비(廢妃) 윤씨의 묘소 회묘(懷墓)에서 연유합니다 ... 휘경동휘경동의 동명은 배봉산 아래(휘경동 산7번지-현 휘경중학교 자리)에 있었던 조선조 제22대 순조(純祖)의 생모 수빈(綏嬪) 박씨의 묘소였던 휘경원(徽慶園)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문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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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코스경희의료원 한방병원경희대학교는 1960년 국내 최초로 한의과대학을 개설하고 1971년 부속한방병원을 개원하였다. 국내 한의학을 선도하는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부속한방병원은 300여개의 병상을 갖춘 한방병원으로 140여명의 각과별 전문의와 한의사가 매년 연인원 40만명의 입원 및 외래환자를 진료하고 있으며, 최첨단 의료기기와 함께 한약물연구소를 개설하여 한의학의 과학화와 표준화를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경희의료원 한방병원에서 건강검진을 실시하여 자신과 가족의 체질과 건강을 체크해 보자. 대중교통- 지하철 : 1호선 회기역 하차(의정부 ↔ 인천, 수원), 경희의료원까지 도보로 약 10분 (마을버스로 약 3분)
- 버스 : 120번, 147번, 261번, 1222번 휘경시장 하차
서울약령시 및 한의약 박물관한의약의 기원과 역사, 한방의 원리, 한의학 명의와 고서, 다양한 한약재의 종류와 효능 등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박물관으로, 706평 규모의 박물관에는 한약재 500여 점과 한의약 관련 유물 400여 점을 볼 수 있는 전시실, 유물을 보관하는 수장고, 한방 상품을 파는 뮤지엄숍, 한방 체험실, 다목적 교육실 등이 갖추어져 있다. 대중교통- 지하철 : 1호선 제기동역
- 버스
- 간선 : 105, 147, 201, 260, 261, 262, 270, 271, 420, 720, 110, 130, 141, 148
- 지선 : 421, 2012, 2112, 2219, 2221, 2233, 1125
- 광역 : 9205
장안동 · 답십리 고미술 거리마장동 사거리를 지나 천호대교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동대문구의 숨겨진 명소 고미술 상가가 있다. 답십리4동과 5동을 차지하고 있는 이 골동품 상가거리는 '전통박물관' 이라 할 만하다. 이 곳에는 147여 점포가 들어서 있다. 인사동 일대가 도자기 등 고가품의 고미술품을 주로 파는데 비해 이 곳에서는 고가구와 생활용품을 주로 팔고 있다. 골동품값은 천차만별이고 생각보다 그리 비싸지 않다. 5천원짜리 등잔이나 20,000원짜리 떡살, 30,000원짜리 항아리, 50,000원짜리 문짝 등은 집안 장식용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고미술 거리에서 선조의 섬세한 손길도 느끼고 미술품으로 집안을 옛스럽게 장식해 보자. 대중교통- 지하철
- 2호선 신답역에서 하차 후 동부시장까지 시내버스 이용 (10분 소요)
- 5호선 답십리역 하차 후 4번 출구 이용 (도시철도방향) 도보 5분, 1번 출구 이용 도보 2분
청계천동대문 구청과 가까이 있는 청계천 하류 습지에는 어류, 양서류, 조류 등의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갯버들, 매자기, 꽃창포 같은 수생식물이 살고 있다. 수크령과 억새도 청계천을 따라 무성하게 펼처져 있다. 충주 사과나무길에는 충주시에서 기증한 사과나무 116그루가 고산자교와 신답철교 사이 300m 구간에 늘어서 있어 계절의 변화를 물씬 전한다. 재잘거리는 청계천과 보폭을 맞추어 천천히 걸으면 자연이 주는 생명력에 저절로 감동하게 된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에서 진행하는 도보관광코스에 사전 예약을 한 후 문화유산해설사가 동행하며 소개해 주는 코스에 참가할 수도 있다. 1코스와 2코스가 있는데, 1코스 관광은 청계천 상류지역 관광을 하게 되고, 2코스 관광은 중하류지역 관광을 하게 된다. 대중교통- 지하철 : 고산자교에서부터 걷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 용두역 3번 출구
- 버스
- 간선 : 105, 147, 201, 260, 261, 262, 270, 271, 420, 720, 110, 130, 141, 148
- 지선 : 421, 2012, 2112, 2219, 2221, 2233, 1125
- 광역 : 9205
홍릉수목원1922년 임업 시험장이 설립되면서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제1세대 수목원이다. 국립산림과학연구원의 부속 전문 수목원으로서 국내 외의 다양한 식물 유전자원을 체계적으로 수집·관리하여 기초 식물 학문분야 발전은 물론, 식물 유전 자원 확보를 위해 조성한 시험 연구림이다. 홍릉수목원과 산림과학관은 매주 일요일은 일반인에게, 평일에는 학생 단체관람객에게 무료로 개방하여, 자연 및 환경학습, 산림의 소중한 가치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참가인원이 제한되어 있어 평일에는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대중교통- 지하철 : 1호선 회기역 경희대 방향, 6호선 고려대역 3번출구
- 길안내 : 청량리역에서 청량리전화국,홍릉 방면으로 3블럭 후 정면 방향
영휘원 · 숭인원, 세종대왕 기념관영휘원 · 숭인원조선조 고종의 후궁 순헌귀비 엄씨(1854∼1911)의 묘소인 영휘원(永徽園)은 동대문구 청량리동 205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다. 영휘원은 1만 6,642평 규모의 부지에 엄씨의 묘와 손자인 이진(李晋)의 묘소 숭인원이 들어서 있다. 경내에는 문인석(文人石),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정자각(丁字閣) 등이 남아 있어 1991년 10월 사적 제361호로 지정됐다. 영친왕의 생모로 명성왕후가 시해된 뒤 후궁이 된 엄씨는 신교육에 관심을 쏟아 진명여학교 설립 등 근대교육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엄씨의 위패는 조선 역대왕이나 왕으로 추종된 이의 생모인 7명의 후궁을 모신 칠궁(七宮:종로구 궁정동 소재)에 봉안돼 있다. 대중교통- 버스 : 1215번, 1226번 세종대왕기념관 하차
세종대왕기념관1973년 한글날 개관한 세종대왕기념관은 세종의 여러 문화적 업적과 역사를 접하고 학습할 수 있는 장소다. 1만8,500㎡ 규모의 대지에 연면적 2,475㎡, 2층으로 지어진 기념관은 일대기, 한글, 국악, 과학진열실 등 4개의 전시실과 강당, 열람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일대기실에는 세종대왕의 어진(御眞)과 함께 재위 32년 동안의 업적을 14폭의 동양화로 제작하여 진열하고 있으며, 한글실에는 세종 당시와 세종 이후의 한글관계 문헌을 진열 전시하고, 훈민정음 창제의 참고 문헌 및 외국 문자의 탁본, 한글 기계화 관계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과학실에는 세종시대의 조판·인쇄 과정을 재현시킨 활자관계 유물을 비롯하여 측우기·해시계·물시계 등의 발명품과 여러 천문 기구 및 지도·한약재 등을 진열하고 있다. 국악실에는 세종 시대에 정비된 각종 국악기와 악사 복식 및 무용 복식, 진연 청도 등을 전시하고 있다. 현재 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은 능엄경언해(보물 제763호),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보물 제769호), 금강경삼가해(보물 제772-(1)호),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보물 제837호), 수표석(보물 제838호) 등이 있으며, 세종대왕신도비를 비롯한 구영릉석물 12기가 2002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돼 있다. 대중교통- 버스 : 1215번, 1226번 세종대왕기념관 하차
1일코스경희의료원 한방병원(반일) -> 서울약령시 한의약 박물관 -> 서울약령시장(전일)경희의료원 한방병원경희대학교는 1960년 국내 최초로 한의과대학을 개설하고 1971년 부속한방병원을 개원하였다. 국내 한의학을 선도하는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부속한방병원은 300여개의 병상을 갖춘 한방병원으로 140여명의 각과별 전문의와 한의사가 매년 연인원 40만명의 입원 및 외래환자를 진료하고 있으며, 최첨단 의료기기와 함께 한약물연구소를 개설하여 한의학의 과학화와 표준화를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경희의료원 한방병원에서 건강검진을 실시하여 자신과 가족의 체질과 건강을 체크해 보자. 대중교통- 지하철 : 1호선 회기역 하차(의정부 ↔ 인천, 수원), 경희의료원까지 도보로 약 10분 (마을버스로 약 3분)
- 버스 : 120번, 147번, 261번, 1222번 휘경시장 하차
서울약령시 한의약 박물관 한의약의 기원과 역사, 한방의 원리, 한의학 명의와 고서, 다양한 한약재의 종류와 효능 등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박물관으로, 706평 규모의 박물관에는 한약재 500여 점과 한의약 관련 유물 400여 점을 볼 수 있는 전시실, 유물을 보관하는 수장고, 한방 상품을 파는 뮤지엄숍, 한방 체험실, 다목적 교육실 등이 갖추어져 있다. 대중교통- 지하철 : 1호선 제기동역
- 버스
- 간선 : 105, 147, 201, 260, 261, 262, 270, 271, 420, 720, 110, 130, 141, 148
- 지선 : 421, 2012, 2112, 2219, 2221, 2233, 1125
- 광역 : 9205
서울약령시장전국 최대 규모의 한약재 유통시장으로 수천년 역사와 전통 한의약의 명맥을 이어온 서울약령시는, 1960년대 말부터 청량리역과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을 이용하여 전국각지에 생산된 한약재를 취급하는 상인들이 대규모로 모여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한약 전문 시장이다. 지금은 제기동 · 용두동 일대 23만 5천㎡에 한의원 3백 24개소, 약국 3백 12개, 한약도매업체 57개소, 한약수출업체 99개 등 한약관련업체 8백 99개소가 밀집되어 있다. 한의약 박물관에서 익힌 한약재를 둘러보면서 살펴 볼 수 있고 필요한 한약재 구입도 가능하다. 대중교통- 지하철 : 1호선 제기동역
- 버스
- 간선 : 105, 147, 201, 260, 261, 262, 270, 271, 420, 720, 110, 130, 141, 148
- 지선 : 421, 2012, 2112, 2219, 2221, 2233, 1125
선농제향 행사 참여매년 봄, 조상의 선농제향 행사를 재현한 행사가 동대문구에서 개최된다. 선농대제(先農大祭)의 기원(紀元)은 신라시대(新羅時代)부터이며, 고려시대 성종 2년(983년) 정월에 왕이 원구단(圓丘壇)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지낸 후, 선농단(先農壇)에서 신농(神農)에게 제사를 지내고 후직(后稷)을 배양했으며 몸소 직전(直田)을 갈았다고 한다. 선농대제(先農大祭)와 친경(親耕)은 이후 계속 이어져 내려오다가 조선조(朝鮮朝) 마지막 황제인 순종 융희(隆熙) 4년(1910년) 5월에도 행하였으나, 일제의 강점기(强點期)에 폐지(廢止)되었으나, 1979년에 제기동의 뜻있는 분들이 선농단친목회(先農壇親睦會)를 구성(構成)하여 선인(先人)들의 뜻 을 되새기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이 단(壇)에서 치제(致祭)를 올리다가 1992년부터 동대문구에서 제(祭)를 올리고 있으며 동대문문화원과 선농제향보존위원회에서 함께 주관(主管)하고 서울특별시, 농협 및 우리은행이 후원(後援)하는 행사로 발전(發展)되었다. 주요행사 내용 : 제관 및 제집사 전향례, 어가행렬, 선농제향 봉행 및 설렁탕 재현 2~3일코스서울약령시 한의약 문화축제 참여서울약령시는 조선시대(1393-1895) 왕명에 의하여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며 의지할 곳 없는 백성과 병자들에게 치료를 담당하던 구휼기관인 “보제원”이 있었던 유서 깊은 곳으로 서울특별시로부터 “ 서울약령시(藥令市)(傳統韓藥市場地域)로 지정 승인 되고 제정경제부로부터 2005년 7월 5일자로 서울약령시한방산업특구로 지정 고시된 것을 기념하고 제세구민과 생명존중을 구현하였던 선조들의 위업을 이어가고자 서울시 전역의 저소득층 1,500명을 대상으로 무료진료와 투약을 실시하는 한의약 문화축제이다. 축제는 2~3일에 거쳐 진행되며, 매년 그 내용에 변화가 있는데 무료 한방 진료 및 투약, 전통 한의약 문화 체험, 약재 썰기 시연, 약첩 싸기 체험, 우수 한약제 전시 및 설명회 등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그 외에 한방 떡매치기, 한약 떡 시식 등 다채로운 행사도 체험할 수 있다. 축제기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축제에 참여하거나 경희의료원 한방병원을 이용해 볼 수 있다. 한방으로 지키는 건강경희의료원 한방병원(반일) -> 서울약령시 한의약 박물관 -> 서울약령시장(전일)경희의료원 한방병원경희대학교는 1960년 국내 최초로 한의과대학을 개설하고 1971년 부속한방병원을 개원하였다. 국내 한의학을 선도하는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부속한방병원은 300여개의 병상을 갖춘 한방병원으로 140여명의 각과별 전문의와 한의사가 매년 연인원 40만명의 입원 및 외래환자를 진료하고 있으며, 최첨단 의료기기와 함께 한약물연구소를 개설하여 한의학의 과학화와 표준화를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경희의료원 한방병원에서 건강검진을 실시하여 자신과 가족의 체질과 건강을 체크해 보자. 대중교통- 지하철 : 1호선 회기역 하차(의정부 ↔ 인천, 수원), 경희의료원까지 도보로 약 10분 (마을버스로 약 3분)
- 버스 : 120번, 147번, 261번, 1222번 휘경시장 하차
서울약령시 한의약 박물관 한의약의 기원과 역사, 한방의 원리, 한의학 명의와 고서, 다양한 한약재의 종류와 효능 등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박물관으로, 706평 규모의 박물관에는 한약재 500여 점과 한의약 관련 유물 400여 점을 볼 수 있는 전시실, 유물을 보관하는 수장고, 한방 상품을 파는 뮤지엄숍, 한방 체험실, 다목적 교육실 등이 갖추어져 있다. 대중교통- 지하철 : 1호선 제기동역
- 버스 : 120번, 147번, 261번, 1222번 휘경시장 하차
서울약령시장전국 최대 규모의 한약재 유통시장으로 수천년 역사와 전통 한의약의 명맥을 이어온 서울약령시는, 1960년대 말부터 청량리역과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을 이용하여 전국각지에 생산된 한약재를 취급하는 상인들이 대규모로 모여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한약 전문 시장이다. 지금은 제기동 · 용두동 일대 23만 5천㎡에 한의원 3백 24개소, 약국 3백 12개, 한약도매업체 57개소, 한약수출업체 99개 등 한약관련업체 8백 99개소가 밀집되어 있다. 한의약 박물관에서 익힌 한약재를 둘러보면서 살펴 볼 수 있고 필요한 한약재 구입도 가능하다. 대중교통- 지하철 : 1호선 제기동역
- 버스
- 간선 : 105, 147, 201, 260, 261, 262, 270, 271, 420, 720, 110, 130, 141, 148
- 지선 : 421, 2012, 2112, 2219, 2221, 2233, 1125
고미술의 향기와 함께장안동 · 답십리 고미술 거리마장동 사거리를 지나 천호대교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동대문구의 숨겨진 명소 고미술 상가가 있다. 답십리4동과 5동을 차지하고 있는 이 골동품 상가거리는 '전통박물관' 이라 할 만하다. 이 곳에는 147여 점포가 들어서 있다. 인사동 일대가 도자기 등 고가품의 고미술품을 주로 파는데 비해 이 곳에서는 고가구와 생활용품을 주로 팔고 있다. 골동품값은 천차만별이고 생각보다 그리 비싸지 않다. 5천원짜리 등잔이나 20,000원짜리 떡살, 30,000원짜리 항아리, 50,000원짜리 문짝 등은 집안 장식용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고미술 거리에서 선조의 섬세한 손길도 느끼고 미술품으로 집안을 옛스럽게 장식해 보자. 대중교통- 지하철
- 2호선 신답역에서 하차 후 동부시장까지 시내버스 이용 (10분 소요)
- 5호선 답십리역 하차 후 4번 출구 이용 (도시철도방향) 도보 5분, 1번 출구 이용 도보 2분
자연과 함께하는 도보 여행 청계천하류(반일) -> 홍릉수목원(반일) -> 배봉산 생태공원(2시간) -> 중랑천(반일)청계천동대문 구청과 가까이 있는 청계천 하류 습지에는 어류, 양서류, 조류 등의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갯버들, 매자기, 꽃창포 같은 수생식물이 살고 있다. 수크령과 억새도 청계천을 따라 무성하게 펼처져 있다. 충주 사과나무길에는 충주시에서 기증한 사과나무 116그루가 고산자교와 신답철교 사이 300m 구간에 늘어서 있어 계절의 변화를 물씬 전한다. 재잘거리는 청계천과 보폭을 맞추어 천천히 걸으면 자연이 주는 생명력에 저절로 감동하게 된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에서 진행하는 도보관광코스에 사전 예약을 한 후 문화유산해설사가 동행하며 소개해 주는 코스에 참가할 수도 있다. 1코스와 2코스가 있는데, 1코스 관광은 청계천 상류지역 관광을 하게 되고, 2코스 관광은 중하류지역 관광을 하게 된다. 대중교통- 지하철 : 고산자교에서부터 걷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 용두역 3번 출구
- 버스
- 간선 : 105, 147, 201, 260, 261, 262, 270, 271, 420, 720, 110, 130, 141, 148
- 지선 : 421, 2012, 2112, 2219, 2221, 2233, 1125
- 광역 : 9205
홍릉수목원1922년 임업 시험장이 설립되면서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제1세대 수목원이다. 국립산림과학연구원의 부속 전문 수목원으로서 국내 외의 다양한 식물 유전자원을 체계적으로 수집·관리하여 기초 식물 학문분야 발전은 물론, 식물 유전 자원 확보를 위해 조성한 시험 연구림이다. 홍릉수목원과 산림과학관은 매주 일요일은 일반인에게, 평일에는 학생 단체관람객에게 무료로 개방하여, 자연 및 환경학습, 산림의 소중한 가치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참가인원이 제한되어 있어 평일에는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대중교통- 지하철 : 1호선 회기역 경희대 방향, 6호선 고려대역 3번출구
- 길안내 : 청량리역에서 청량리전화국,홍릉 방면으로 3블럭 후 정면 방향
배봉산 생태공원배봉산은 해발 106m로 동대문구 전농동과 휘경동에 위치해 있다. 배봉산 자락에는 영우원과 휘경원 터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우원은 조선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이며, 휘경원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였던 수빈 박씨의 묘소이다. 배봉산이라는 이름도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인데, 정조가 평생에 못 다한 불효를 한다며 날마다 부친의 묘소를 향해 배례하게 되면서 산이름이 ‘배봉산(拜峰山)‘으로 불렸다는 설이있다. 이 외에도 이곳 산기슭에 영우원과 휘경원 등 왕실의 묘원이 마련되면서 길손들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기 때문에 배봉(拜峰)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고, 산의 형상이 도성을 향하여 절하는 형세를 띄었기 때문에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동대문구에서는 배봉산 공원 내 위생병원의 콘크리트 담장을 철거한 자리에 야생화 단지, 생태연못 등이 어우러진 자연학습장을 조성하였다. 대중교통- 지하철 : 1호선 회기역 1번출구에서 버스 2211번
- 버스 : 1125, 1218, 2211, 145번
- 마을버스 : 3번 (휘경유수지 견인차고앞 하차)
중랑천한강의 제1지류인 중랑천은 길이가 36.5km이고 평균폭은 8.61km로 청계천, 우이천 등 13개의 지류를 거느리고 있다. 집중 호우에 자주 범람했던 중랑천에는 빗물펌프장이 건설되고 중랑천 둔치에는 여가활동을 즐길 수 있는 체육공간이과 휴식공간이 설치되었다. 5.6km의 자전거 도로 등 레저와 스포츠를 위한 체육공원과, 자운영 · 유채 · 꽃잔디 · 메밀 등을 볼 수 있는 꽃단지가 마련되어 있어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거나 거닐기에 더 없이 좋은 공간이다. 중랑천 둔치를 따라 제1공원~제5공원의 체육공원이 조성되었는데, 주민들이 운동을 하거나 산책 후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설도 함께 갖추어져 있다. 체육공원위치- 제1체육공원 : 장안동장평근린공원앞
- 제2체육공원 : 장안동 삼성래미안아파트앞
- 제3체육공원 : 휘경동 경찰수사연구소앞
- 제4체육공원 : 휘경동 중앙선 철교주변
- 제5체육공원 : 이문동 대우아파트앞(이화교상류)
선조의 문화유산을 찾아서선농단(1시간) -> 영휘원 · 숭인원, 세종대왕기념관(반일) -> 청량사(2시간) -> 연화사(2시간)선농단선농단은 조선초부터 농업과 관련이 있는 고대 중국의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매년 선농제를 지냈던 제단이다. 조선시대 태조 이래 역대 임금들은 풍년을 기원하며 이곳에서 선농제를 지냈다. 제를 올린 뒤에는 선농단 바로 남쪽에 마련된 적전(籍田)에서 왕이 친히 밭을 갈아 백성들에게 농사의 소중함을 알리고 권농에 힘썼다고 한다. 선농단에는 사방 4m의 돌담이 남아 있어 선농제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데, 그 한켠에는 나이가 약 500살 정도로 추정되는 향나무(천연기념물 제240호)가 제를 지내던 단을 지키고 있다. 선농단은 설렁탕이 유래된 유적지로도 유명하다. 선농제를 지내고 나서 국왕을 비롯해 조정 중신드은 물론 서민에 이르기까지 함께 밭을 간 모든 사람들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해 소를 잡아 국밥과 술을 내렸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설렁탕의 기원이 되었다. 매년 4월이면 이 곳에서 선농제향을 재현하는 행사가 열리는데, 선농제향 때에는 이곳에서 전통 제례의식도 체험하고 설렁탕도 맛볼 수 있다. 대중교통영휘원 · 숭인원조선조 고종의 후궁 순헌귀비 엄씨(1854∼1911)의 묘소인 영휘원(永徽園)은 동대문구 청량리동 205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다. 영휘원은 1만 6,642평 규모의 부지에 엄씨의 묘와 손자인 이진(李晋)의 묘소 숭인원이 들어서 있다. 경내에는 문인석(文人石),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정자각(丁字閣) 등이 남아 있어 1991년 10월 사적 제361호로 지정됐다. 영친왕의 생모로 명성왕후가 시해된 뒤 후궁이 된 엄씨는 신교육에 관심을 쏟아 진명여학교 설립 등 근대교육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엄씨의 위패는 조선 역대왕이나 왕으로 추종된 이의 생모인 7명의 후궁을 모신 칠궁(七宮:종로구 궁정동 소재)에 봉안돼 있다. 대중교통- 버스 1215번, 1226번 세종대왕기념관 하차
세종대왕기념관1973년 한글날 개관한 세종대왕기념관은 세종의 여러 문화적 업적과 역사를 접하고 학습할 수 있는 장소다. 1만8,500㎡ 규모의 대지에 연면적 2,475㎡, 2층으로 지어진 기념관은 일대기, 한글, 국악, 과학진열실 등 4개의 전시실과 강당, 열람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일대기실에는 세종대왕의 어진(御眞)과 함께 재위 32년 동안의 업적을 14폭의 동양화로 제작하여 진열하고 있으며, 한글실에는 세종 당시와 세종 이후의 한글관계 문헌을 진열 전시하고, 훈민정음 창제의 참고 문헌 및 외국 문자의 탁본, 한글 기계화 관계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과학실에는 세종시대의 조판·인쇄 과정을 재현시킨 활자관계 유물을 비롯하여 측우기·해시계·물시계 등의 발명품과 여러 천문 기구 및 지도·한약재 등을 진열하고 있다. 국악실에는 세종 시대에 정비된 각종 국악기와 악사 복식 및 무용 복식, 진연 청도 등을 전시하고 있다. 현재 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은 능엄경언해(보물 제763호),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보물 제769호), 금강경삼가해(보물 제772-(1)호),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보물 제837호), 수표석(보물 제838호) 등이 있으며, 세종대왕신도비를 비롯한 구영릉석물 12기가 2002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돼 있다. 대중교통- 버스 1215번, 1226번 세종대왕기념관 하차
청량사신라 말엽에 창건됐다고 전해지는 청량사는 고려 예종이 이자현(李資玄)을 불러 특별히 우대하며 이곳에 머물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의 '경조'분을 보면 삼각산 줄기의 한가닥인 천장산 서쪽 기슭에 비구니사인 돌곶이승방이 있고, 다시 남으로 산등성이를 넘으면 청량사가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지금의 청량사는 1896년 명성황후의 홍릉을 현재의 임업연구원 자리에 조성하면서 조선조 성밖 4대 비구니승방의 하나인 「돌곶이승방」의 자리가 능의 자리로 잡힌 까닭에 청량사의 옛 절터인 현재의 위치로 옮겨가면서 거의 폐허화했던 청량사는 옛 가람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청량사는 한말에는 도성 사람들이 자주 몰려와 쉬던 휴양지였고, 일제 치하로 나라가 어려웠을때는 많은 애국지사, 고승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일제저항기에 독립운동과 불교운동에 앞장선 만해 한용운 선생이 한때 청량사에 머물렀다고 하며, 1939년 7월 12일에 한용운 선생의 회갑연이 이곳에서 조촐하게 열렸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불교계 학자인 박한영(朴漢永)도 이 절에서 기거했으며 대방에 걸린 청량사 현판 글씨는 박한영의 작품이다. 대중교통연화사원래 연산군 생모 폐비 윤씨의 회묘를 회릉으로 승격시키면서 능의 원찰로 출발한 연화사는 연산군 폐위 후 오랫동안 빈터로만 남아 있다가 영조 1년(1725)에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가 안장된 의릉이 근처에 조영되면서 의릉의 원찰(願刹)이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불타 버린 것을 이듬해에 정담(淨潭)스님이 중건하였다. 1993년에 발견된 조선말 고종21년(1884) 10월에 쓰여진 미륵전 상량문 「천장산묘련사중건기」에 의하면 원래 절 이름이 묘련사였음을 알 수 있다. 즉 묘련(妙蓮)이라는 스님이 이 절에서 불사를 하였는데 스님의 성품이 너무 좋아 사람들이 스님의 법명을 따라 묘련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연화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중교통- 지하철 : 1호선 회기역 1번출구 도보 10분
- 버스 : 1222번 경희대학교 하차 도보 5분
서울약령시 홍릉수목원일대 고미술상가 청계천/중랑천 서울풍물시장 "서울 가이드북! 이제 온라인으로 만나보세요" < 서울관광가이드북>과 <서울관광지도>는 visitseoul.net 사이트에서 1인당 1권씩 무료 발송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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