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는 조선왕릉
http://royaltombs.cha.go.kr/ 조선왕릉전시관
제1대 太祖의 계후(繼后) 신덕왕후(神德王后)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2동 산 87
사 적 : 제 208 호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1396) 강씨의 무덤
원래의 자리는 정동에 있었으나 태종 5년(1405) 의정부에서 왕의 무덤이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만이 도성 안에 있고, 무덤이 크고 넓다는 논란이 있어서 도성 밖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이것은 태조가 8왕자인 방석을 세자로 정한 것에 대한 방원(후에 태종)의 사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
태종은 무덤을 옮긴 후 정자각을 없애고, 홍수에 의해 없어진 광통교를 다시 짓는데 정릉의 십이지신상 등 석물을 실어다 만들게 하였다. 무덤을 옮긴지 수백년간 정릉은 왕후의 무덤이라기 보다는 주인없는 무덤에 불과하였는데, 현종 10년(1669)에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왕후의 무덤으로 삼게 되었다.
정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호석과 양석이 각 1쌍으로 줄어들고, 무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왕후의 무덤에 비하여 빈약하지만 조선왕조 최초로 만들어진 왕비의 무덤으로서 의의가 있다.
조선왕릉의 무덤 제도는 고려왕릉 제도를 기본으로 하고 약간 변화시켜 만든 것이다. 정릉의 사각명등석이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무덤인 현재 정릉의 것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보면, 조선왕릉은 고려왕릉을 규범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계비(繼妃)였던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 -1396)의 정릉은 처음 도성(都城) 안 황화방 북원(皇華坊 北原: 현 중구 정동)에 능을 조성하고 원찰(願刹)로 흥천사(興天寺)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태조 승하 후에 태종 이방원은 태조가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었던 일{1차 왕자의 난<1398년>}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도성 밖 양주군[현재의 정릉 자리]으로 능을 옮겼습니다. 또한 종묘(宗廟)에 부묘되지 못했고, 세종 즉위년에는 전세(田稅) 5결(結)을 주고 족친(族親)들에게 제사를 맡기기까지 합니다. 그 후 300년 가까이 방치되다가 현종(顯宗) 10년[1669년]에 종묘(宗廟)에 배향되면서 복구되었습니다.
다소 초라한 모습으로 병풍석(屛風石)이나 난간석(欄干石), 무인석(武人石) 등이 없이 다른 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정릉의 수난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고려말 권문세가인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낸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로 태어난 신덕왕후는 이성계와의 젊은 시절 일화로 유명합니다. 이성계가 호랑이 사냥을 하다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 우물가의 한 여인에게 받은 바가지에 버들잎을 보고 화를 냈다가 이유를 알고 여인의 지혜에 감탄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슬하에 방번, 방석 2남과 경순공주를 두었는데, 태조의 총애를 받아 조선 건국 후 현비(顯妃)로 책봉되어 조선 최초의 국모(國母)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태종(太宗)의 핍박으로 사후에 무덤이 옮겨져 방치되다가 현종대(顯宗代)에 종묘에 배향되었는데, 제사를 지내는 날 한(恨)을 풀어주는 많은 비가 내려, 이를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으로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끔 찾는 능이기도 한데, 다소 초라한 모습에서 조선 초대 국모(國母)의 위용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왕릉의 모습보다는 주변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의 운동공간이 되어버린 상황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제1대 太祖의 신의왕후(神懿王后) - 제릉(齊陵)
제3대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내곡동 산13 <獻仁陵 소재>
사 적 : 제 194 호
헌릉은 조선 3대 태종(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 민씨(1365∼1420)의 무덤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로서 아버지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웠다. 1·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정종 2년(1400)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토지와 조세제도를 정비하고 군사제도도 개혁하였으며,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등 국정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초기의 민생안정을 이룩하였다. 태종의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는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이며,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큰 힘이 되었다.
태종(이방원 :1367-1422 : 재위 18년, 상왕 4년)과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1365-1420)의 쌍릉(雙陵) 형태의 헌릉(獻陵)은 창업수성(創業守成)의 업적인 조선 개국(開國)과 왕실의 기반을 공고하게 만든 태종의 치적답게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형식을 따른 헌릉은 원경왕후 승하 후 태종의 명으로 조성되었으며, 건원릉과 같이 신도비(神道碑)를 세워놓고 있습니다. 같은 경내(境內)에 23대 순조(純祖)의 인릉(仁陵)이 함께 모셔져 '헌인릉(獻仁陵)'의 명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헌릉은 쌍릉으로 무덤 아랫부분이 병풍석으로 둘러있으며, 무덤의 형식은 태조의 건원릉을 따랐다. 각 무덤에 12칸의 난간석을 둘러서 서로 연결하였고 무덤 앞에는 양석과 호석·문인석·마석을 배치하였다. 무덤 앞의 석물은 고려시대의 현릉·정릉, 조선시대의 후릉과 같이 망주석을 제외하고는 각각 하나씩을 더 갖추었다. 언덕 아래에는 정자각이 있고 비각을 세웠다. 세종 2년(1420)에 원경왕후가 죽음으로써 무덤지역을 정하였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에 따라 왕릉과 왕비릉을 나란히 하였다.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조선의 개국(開國)에 1등 공신(功臣) 역할을 했습니다.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高麗)의 충신들을 제거하고 개국한 새왕조 조선이었기에 이방원의 야심은 당연히 왕권(王權)에 있었습니다. 세자(世子)였던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소생 방석(芳碩)을 제거한 제1차 왕자의 난과 형 방간(芳幹)을 제거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방원은 즉위 후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확립하고 세종대(世宗代)의 성대(盛代)에 기반을 세웠습니다.
태종은 18년간의 왕위(王位) 동안 국가의 모든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고 명(明), 일본(日本), 여진(女眞) 등 주변국과의 관계 정상화로 국가의 기초를 확립했습니다. 특히 세종(世宗)에게 선위한 후에도 병권(兵權)은 장악하고 세종 원년의 대마도(對馬島) 정벌(征伐)을 주도했으며, 그 후 별궁(別宮)에서 여생(餘生)을 즐기다가 56세의 나이로 승하합니다.
원경왕후는 고려말기의 신하였던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딸로 태어나 슬하에 세종(世宗)과 양녕, 효령, 성녕의 3대군(大君)과 정순, 경정, 경안, 정선의 4공주(公主)를 두었습니다. 말년에 태종과의 불화(不和)로 처남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형제의 처형 등 정치적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했습니다.
제9대 성종(成宗)과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135-4 { 宣靖陵 소재 }
사 적 : 제 199 호
9대 성종과 부인 정현왕후의 무덤
성종은 유교사상을 정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사림을 성장시켜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정치기반을 조성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전반적인 체제를 안정시켰다.
세조의 손자이고 추존(追尊)된 덕종(德宗)의 차남인 成宗(이혈 : 1457-1494, 재위 25년)과 계비(繼妃)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 1462-1530)의 선릉(宣陵)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는데, 성종의 능에는 검약(儉約)해야 한다는 세조(世祖)의 명과 다르게 봉분에 병풍석(屛風石)을 둘러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한 것이 특이합니다.
후에 중종(中宗)의 정릉(靖陵)이 그의 두 번째 계비(繼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해 선릉의 경내로 옮겨져 선정릉(宣靖陵)의 명칭으로 불리는데, 중종의 정릉(靖陵)이 조성될 때 성종의 선릉이 그 모범이 되었다고 합니다.
선릉은 왕릉과 비릉이 각각 다른 산등성이에 있는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왼쪽 등성이의 비릉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고, 다른 석물들은 왕릉과 같으며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왕릉에는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안에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한 십이지신상을 새겼으며, 세조의 광릉 이후 세우지 않았던 병석을 성종의 선릉부터 다시 세웠다. 난간석은 12칸이며 그 밖에 양석·호석·망주석·문인석 등의 석물이 있다. 문·무인석의 얼굴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나 몸통은 입체감이 없다.
성종은 아버지{추존 덕종(德宗)}가 생후 2달만에 승하하고, 예종 또한 1년만에 승하해 세조의 비(妃) 정희대비(貞熹大妃)의 명으로 13살의 나이[1469년]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 때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은 간난아이였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은 병약해서 결국 성종이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7년간의 섭정을 지나 친정(親政)한 성종은 재위 25년간 조선왕조의 기반을 완성시킨<成> 국왕이 되었습니다.
성종대의 치적으로 인해 조선조의 기틀이 완성된 것은 여러 가지 업적에서 나타납니다. 홍문관(弘文館), 존경각(尊經閣), 독서당(讀書堂)을 창설해 어진 인재들을 등용했고, 세조 대부터 시작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개정, 완성 반포하여 국가의 통치체제를 확립시켰습니다. 또한 역사서인 <동국통감(東國通鑑)>과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문학서인 <동문선(東文選)> 등의 편찬에서 보이듯이 왕성한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고, 외적으로도 북방의 여진족(女眞族) 소탕이나 남방의 일본(日本)과의 무역 확대 등으로 조선조의 힘이 크게 진작된 전성기를 이룹니다.
정현왕후 윤씨는 파평윤씨(坡平尹氏)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의 딸로 태어나 숙의(淑儀)에 봉해졌다가, 왕비 공혜왕후(恭惠王后)가 승하(성종 5년, 1474년)하고 원자(元子-연산군(燕山君))를 낳은 숙의(淑儀) 윤씨(尹氏)가 계비(繼妃)가 되었으나 폐위되자 1480년(성종 11년)에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슬하에 중종(中宗)과 신숙공주(愼淑公主)를 낳고 중종 25년에 승하합니다.
제10대 연산군(燕山君)과 부인신씨(夫人愼氏)
소재지 :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77
사 적 : 제 362 호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放鶴洞) 산77번지에 있는 조선시대 연산군과 그 부인 거창신씨(居昌愼氏)의 묘소.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2호로 지정되었다. 성종의 원자인 연산군은 1506년 9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왕이 되어 연산군으로 강봉되고 강화 교동(喬桐)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11월 31세에 병사하였다. 부인 신씨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로서, 연산군의 폐왕과 함께 폐비가 되어 연산군이 죽은 뒤 묘를 강화에서 양주군 해동면 원당리(현 위치)로 이장하기를 청하여, 1513년 2월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이장하고 양주군 관원으로 하여금 치제하게 하였다.
조선 10대 연산군(재위 1494∼1506)과 부인 거창 신씨의 무덤이다. 연산군은 성종의 큰 아들로 성종 7년(1476)에 태어나 1494년 왕위에 올랐다. 두번씩이나 사화를 일으키는 등 성품의 광폭함이 드러나자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나, 1506년 왕직을 박탈당하고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강화 교동으로 추방되었다가, 그 해 1506년에 죽었다. 부인 신씨가 연산군 무덤을 강화에서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 달라 청하여 옮기게 되었다.
조선조(朝鮮朝) 최초의 폐왕(廢王)인 연산군(이융; 1476-1506, 재위12년)과 폐비(廢妃) 부인 거창군 신씨(愼氏; 1472-1537)의 연산군묘는 유배지 강화도 교동(喬桐)에서 31세의 나이로 사망한 연산군을 그곳에 매장했다가, 1512년(중종 7년)에 폐비 부인 신씨의 상언(上言)으로 양주군(楊州郡) 해촌(海村)-{현재의 위치}에 이장(移葬)하여 왕자군(王子君)의 예우로 개장(改葬)했습니다. 그 후 1537년(중종 32년)에 부인 신씨가 사망하자 쌍분(雙墳)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무덤 주변에는 연산군의 딸과 사위의 무덤도 있으며, 혼유석·장명등·향로석 등 석물이 서 있다. 묘비석 앞면에는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이라 새겨져 있다. (연산군묘 → 서울 연산군묘)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교통편 왕자군의 예우로 조성되었기에 곡장(曲墻)과 상석(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만으로 조촐하게 설치했지만, 그 보다는 폐위된 왕이었기에 봉분 앞의 비석 전면의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는 비명과 봉분을 호위하고 있는 문인석의 얼굴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애처로움이 느껴집니다. 더욱이 길 건너편에 조성된 세종의 셋째 딸 정의공주묘역보다 더 협소한 크기를 보면 그 안타까움은 더 커집니다.
묘역의 아래에는 궁인인 의정궁주조씨(義貞宮主趙氏)의 묘와 연산군의 딸, 사위 구문경(具文景)의 묘가 함께 조성되어 있습니다.
성종(成宗)의 장남으로 태어나 1483[성종 14년]에 세자에 책봉되고 왕위까지 오르지만 재위 12년만에 성희안, 박원종 등에 의해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추대하고 연산군을 쫓아내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고 맙니다. 이러한 연산군에 대한 평가는 실록<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등에서 자세하게 서술되어 포악한 성격에 거듭된 실정(失政)과 폭정 등이 나열되지만 당대의 무오사화(戊午士禍)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등에서 보이듯이 권력의 암투 속에서 괴로워했던 한 인간으로 본다면, 더욱이 자신의 어머니{성종비에서 폐위된 윤씨(尹氏}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당사자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연산군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은 당연합니다.
부인 신씨는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연산군과 함께 폐위되었고 자신의 두 아들 또한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는 불우한 일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이라 할 것입니다.
제11대 중종(中宗)
소재지 :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35-4 {宣靖陵 소재}
사 적 : 제 199 호
11대 중종의 무덤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위해 노력하였으나, 개혁파와 공신파의 정치적 논쟁이 끊이지 않아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정릉은 원래 중종 제1계비인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선릉의 석물제도를 본떴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 뿐이다.
임진왜란 때는 선·정릉의 양릉이 훼손되는 변을 겪게 된다. 제사를 지내는 방은 양릉의 사이에 있으며, 여름철의 침수를 피하기 위해 층단에 지었는데 이러한 예는 선릉·정릉 뿐이다.
중종(이역;1488-1544, 재위39년)의 정릉이 현 위치인 성종(成宗)의 선릉(宣陵)에 인접한 곳에 위치하기 까지는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었습니다. 또한 왕비(王妃)가 3명이나 되었으면서도 같은 곳에 능이 조성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세 번째 왕비였던 명종(明宗)의 생모(生母)인 제2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 때문입니다.
처음 중종 승하 후 제1계비였던 장경왕후(章敬王后) 능인 희릉(禧陵;서삼릉 소재) 옆에 조성되었으나, 1562년[명종 17년]에 당시 권력을 움직였던 문정왕후에 의해 현 위치로 옮겨진 것입니다.
겉으로는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따라 옮겼다고 했지만, 오히려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沈水)되었기에 결국 중종의 옆에 같이 잠들고 싶었던 문정왕후는 자신의 능을 다른 곳{태릉}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중종의 정릉(靖陵)을 잘못 옮김으로 인해 그 다음 해에 명종(明宗)의 세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서거하고, 2년 뒤에는 문정왕후 자신, 또 2년 뒤에는 명종(明宗)이 승하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결국 임진왜란 당시에 왜적(倭賊)에게 도굴까지 당하게 되는 비운의 능이 됩니다.
능역의 양식은 함께 있는 성종의 선릉(宣陵) 양식을 따라 웅장하게 조성되어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구름 문양까지 조각했습니다.
권력의 암투에 의해 임금의 능력이 시험대에 오른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중종대 역시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던 안타까운 시대라 할 것입니다. 중종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슬하에서 태어나 자신의 이복(異服) 형이었던 연산군(燕山君)을 폐위했고, 자신의 부인{단경왕후}까지 폐위시킨 장본인 이었기에 처음부터 당대의 국왕의 힘은 필연적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조광조(趙光祖)의 이상적 정치의 실현이 좌초되었을 때{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 불안한 정국은 사회발전을 지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발전한다는 진리처럼 권력 내부의 혼미는 외부의 결속을 가속화시키는 기반으로 작용했고 훈구세력의 몰락의 길이 열리기 시작한 시기도 또한 이때입니다.
中宗의 제2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 - 태릉(泰陵)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산 223-19<泰康陵 소재>
사 적 : 제 201 호
중종(中宗)의 계비 문정 왕후(文定王后; 1501~1565) 윤씨의 무덤
태릉에 모셔진 문정 왕후는 본관이 파평(坡平)으로 영돈녕부사 파산 부원군 윤지임(尹之任)의 딸로서 1501년(연산군 7) 10월 탄생하였다. 중종의 왕비인 장경 왕후(章敬王后)가 1515년(중종 10) 3월 인종(仁宗)을 낳고 7일 만에 승하하자 2년 후인 1517년(중종 12) 7월 춘추 17세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소생인 명종(明宗)이 인종에 이어 즉위한 후 8년 동안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중종(中宗)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 1501-1565)의 태릉(泰陵)은 명종(明宗)의 강릉(康陵)과 함께 태강릉(泰康陵)으로 불리우면서 주변의 태릉 푸른동산, 태릉선수촌 등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입니다.
재위 1년을 못넘긴 인종(仁宗)을 이어 13대 명종(明宗)이 즉위하면서 명종의 생모(生母)였던 문정왕후가 권력을 장악했었기 때문에 사후(死後)의 능역 조성 역시 웅장하고 화려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유난하게 거대한 석인(石人)의 얼굴과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에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十二支身像) 등은 당대 권력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왕후는 불교에 대한 믿음이 깊어 반대를 무릅쓰고 승과를 두었고, 선교(禪敎) 양종을 부활시키는 등 불교 진흥에 노력하였다. 1565년(명종 20) 4월 창덕궁 소덕당(昭德堂)에서 승하하니 춘추 65세였고, 소생은 명종과 의혜 공주(懿惠公主)․효순 공주(孝順公主)․경현 공주(敬顯公主)․인순 공주(仁順公主) 등 1남 4녀를 두었다. 이 해 시호를 ‘문정’이라 하고, 무덤의 이름을 ‘신정릉(新靖陵)’이라 하였다가 곧 태릉으로 고치고, 7월에 양주군 노원면 대방리 언덕에 예장하였다.
왕후는 원래 봉은사(奉恩寺) 주지 보우(普雨)와 의논하여 선릉(사적 199호) 동쪽 언덕이 길지로 여겨 경기도 고양군의 중종 계비 장경 왕후(章敬王后)와 같은 언덕에 있던 정릉(사적 199호)을 후일 자신의 무덤과 함께 하고자 1562년(명종 17) 9월에 옮겼다. 그러나 여름철의 홍수 때에는 무덤 주변까지 침수되어 왕후의 무덤은 양주 노원에 따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태릉의 석물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규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병풍석 12면과 난간석 12칸 밖에 혼유석 1좌․망주석 1쌍․양석과 호석 2쌍 및 3면의 곡장(曲墻)으로서 윗층계를 이루고 있다. 중간 층계에는 문인석과 마석 1쌍․팔각형 명등석 1좌가 있고, 아랫층에는 무인석과 마석 1쌍이 설치되었다. 사람 모양의 돌 조각상[석인]은 4등신으로 입체감이 표현되지 않았는데 당시 석인의 특징을 보여준다. 무덤 언덕 아래 정자각은 6․25 전쟁 당시 파손된 것을 1995년 다시 세운 것이다. 이 밖에 비각․수직방(守直房), 그리고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문정왕후 윤씨는 1501년(연산군 7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임(尹之任)의 딸로 태어나 17세{중종 12년}에 왕비에 책봉되었고, 중종(中宗)과의 슬하에 명종(明宗)과 네 공주를 두었습니다.
문정왕후는 일생이 아주 화려해서 자신이 왕비(王妃)에 오른 것도 중종의 제1계비(繼妃)였던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가 인종(仁宗) 출산 후 승하해서 이루어졌고, 아들 명종(明宗) 역시 인종(仁宗)의 요절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천운(天運)이 작용한 것 같다는 속설(俗說) 전해오는데, 더욱이 12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明宗)을 대신해 8년간이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기에 권력의 정상에 오른 것입니다.
인종(仁宗)의 외척 세력을 제거했던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년) 이후 권력의 정상에 군림했던 문정왕후가 생애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은 바로 중종(中宗)의 옆에 묻히지 못한 것입니다. 중종과 능역을 함께 하기 위해 현재 서삼릉(西三陵)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옆에 조성했던 중종의 정릉(靖陵)을 성종(成宗)의 선릉(宣陵) 가까이 있는 봉은사(奉恩寺) 곁으로 옮겨 놓았지만 낮은 지대로 인해 자주 침수되어 문정왕후 자신은 결국 그곳에 묻히지 못하고 현 위치로 정해진 것입니다.
또한 문정왕후는 불교(佛敎)에 심취하여 봉은사에 보우(普雨)를 주지(住持)로 두고 왕실에서의 불교 부흥에 많은 작업을 했지만, 문정왕후 사후(死後) 보우는 유배지에서 죽고 불교는 다시 배척당하게 됩니다.
태릉은 단릉 형식이며, 강릉은 쌍릉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비공개 지역이다. 규모는 163만 2,281㎡[약 49만 4,631평]에 이른다. 태릉과 강릉의 재실은 홍살문 서남쪽에 있었으나 1970년에 낡아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태릉 푸른동산 안의 수영장 시설이 들어섰다.
제13대 명종(明宗)과 인순왕후(仁順王后)
소재지 :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산233-19
사 적 : 제 201 호
명종(明宗)과 비(妃)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 靑松)의 쌍릉(雙陵)으로 서울시 노원구(蘆原區) 화랑로
인순왕후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이다. 1545년(인종 1)에 왕비로 책봉되고, 명종이 죽은 후 선조가 즉위하자 잠시 수렴청정을 했다. 1569년(선조 2)에 의성(懿聖)의 존호(尊號)가 진상(進上)되었다.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요절하였다. 강릉 관원으로 영(令: 從五品) 1원과 참봉(參奉: 從九品) 1원이 있다.
明宗(이환; 1534-1567, 재위 22년)과 비(妃)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 1532-1575)의 강릉은 현재 원형보존을 위해 비공개 능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중종의 제2계비)의 태릉(泰陵)과 함께 능 위치나 의미에 많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능이라면 태릉 입구에라도 강릉(康陵)에 대한 보다 자세한 안내나 설명이 아쉽습니다.
왕과 왕비의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고, 두 능의 봉분에는 모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고 난간석(欄干石)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좌우측 무인석(武人石)의 외형이 서로 다르게 생긴 것입니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선조 4년[1571년]에 강릉(康陵)의 정자각(丁字閣)에 화재가 나자 임금과 세자가 의복을 갈아입고 풍악(風樂)을 금하며 반찬 수를 줄이는 등 근신(謹愼)의 예를 다했다고 합니다.
명종(明宗)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권력을 움직일 수 없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곧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섭정(攝政)은 외척(外戚)의 전횡(專橫)이라는 비리를 양산하게 되고 국정의 혼란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복형제(異服兄弟)의 왕위 계승이 이어진 것도 권력 암투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종대의 권력의 문란함은 내외의 혼란을 야기시켜 밖으로는 '을묘왜변(乙卯倭變)', 안으로는 임꺽정(林巨正) 같은 군도(群盜)의 만연 등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는 사건들이 이어지게 됩니다.
인순왕후 심씨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로 태어나 명종과의 슬하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두었으나 세자가 어린 나이에 요절하게 되어 슬하의 자식으로 역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명종(明宗) 승하 후 중종(中宗)의 일곱 번째 아들이었던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선조(宣祖)}이 14대 왕위에 즉위하게 됩니다.
제20대 경종(景宗)과 계비(繼妃) 선의왕후(宣懿王后)
소재지 :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1-5
사 적 : 제 204 호
조선 20대 경종(재위 1720∼1724)과 그의 비인 선의왕후의 무덤
경종은 희빈장씨의 소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하여 왕위에 오른지 4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景宗{이균; 1688-1724, 재위 4년}과 계비(繼妃) 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魚氏; 1705-1730)의 의릉은 쌍릉(雙陵)의 형식이면서도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영향으로 좌우로 나란한 봉분 조성이 아니라 앞뒤로 봉분을 조성했습니다. 여주(驪州)에 있는 효종(孝宗)의 영릉(寧陵)과 유사한 모양이지만, 경종의 의릉은 영릉보다 더 정확하게 앞뒤로 조성되어 정자각(丁字閣)에 보았을 때 앞의 능은 선의왕후릉이고 뒤의 능은 경종의 능입니다. 경종의 능에만 뒤에 곡장(曲墻)이 있어 쌍릉(雙陵)의 형식임을 알 수 있고, 숙종의 명릉(明陵)에 이어 역시 왜소한 석물(石物)들과 사각(四角)의 장명등이 특이합니다.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조성하지만 이 무덤은 앞·뒤로 무덤을 조성한 상하이봉릉(上下異封陵)이다. 이처럼 앞·뒤로 만든 것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것으로 효종과 인선왕후의 무덤인 영릉에서 처음 나타났다.
왕릉에는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대신 무덤 주위에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했는데,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간지가 방위에 따라 문자로 새겨져 있다. 난간석 밖으로 망주석·장명등·문무석과 말·양·호랑이가 있다. 무덤의 석물 배치와 양식은 명릉과 같이 규모가 작고 간소한 후릉제도를 택하였다. 왕비릉의 석물 배치는 왕릉과 같으나 무덤 뒤에 담을 두르지 않았다.
장희빈(張禧嬪)의 아들로 유명한 경종은 33세의 나이에 왕위(王位)에 오르지만, 평소 병이 많아 불과 4년 밖에 재위에 있지 못한 비운(非運)의 국왕이었습니다.
신축옥사(辛丑獄事)과 임인옥사(壬寅獄事)로 노론(老論) 세력이 대거 축출되고 소론(小論) 세력이 집권했던 신임사화(辛壬士禍)가 격렬하게 진행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병약(病弱)한 경종은 즉위 원년에 후사가 없을 것으로 예측되니 이복동생인 숙빈(淑嬪) 최씨(崔氏)의 소생(所生) 연잉군{영조}을 세자(世子)로 책봉해야 한다는 노론의 의견을 따라할 정도였습니다.
宣懿王后 어씨(魚氏)
1705년{숙종 31년} 함종(咸從) 어씨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구(魚有龜)의 딸로 태어난 선의왕후는 1718년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고 1722년{경종 2년}에 왕비에 진봉(進封)됩니다. 영조 즉위 후 대비(大妃)로 지내다가 26세의 나이{영조 6년}로 요절합니다.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고 전해지는데, 역시 슬하(膝下)에 자식은 없었습니다.
제23대 순조(純祖)와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
소재지 : 서울시 강남구 내곡동 산 13-1 {獻仁陵 소재}
사 적 : 제 194 호
23대 순조대왕(재위 1800∼1834)과 순원왕후 김씨(1789∼1857)의 무덤
순조는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대신 정치를 돌보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외척에 의한 정치가 극에 달하였으며, 사회가 혼란해졌다.
純祖(이공 : 1790 - 1834, 재위 34년)와 비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 1789 - 1857)의 인릉은 본래 순조(純祖) 승하 후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인조(仁祖)의 장릉(長陵) 옆에 조성했다가 현재의 위치인 태종(太宗)의 헌릉(獻陵) 옆으로 천장(遷葬)되었고 순원왕후도 함께 합장(合葬)되었습니다.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러 쌓여 있는 봉분(封墳)에 상석(床石) 하나를 설치해 놓았으며 기타 석물(石物) 역시 정연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같은 강남 지역에 있는 선정릉(宣靖陵 :성종과 중종)이 도심의 빌딩 숲 속에 포위되어 있는 것과 비교하면 그나마 헌인릉(獻仁陵)은 자연(自然)과 어우러져 있어 다행입니다.
순조는 증 영의정(贈領議政) 판돈녕부사(判敦寧府使) 박준원(朴準源)의 딸인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소생인데,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의 소생인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요절하자 순조를 세자(世子)로 책봉합니다.
그런데 정조(正祖)의 갑작스런 승하로 11세에 즉위한 어린 임금을 대신한 증조모(曾祖母) 대왕대비(大王大妃: 영조(英祖)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외척(外戚)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조(朝鮮朝) 후기(後期)에 마련되었던 영정조대(英正祖代)의 문화적 황금기(黃金期)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 때가 바로 순조대(純祖代)입니다.
순조는 정조 14년인 1790년에 태어나 1800년에 왕위에 올랐고 34년을 재위(在位)하고 1834년에 승하합니다. 순조의 즉위는 천주교(天主敎) 서학(西學)의 탄압으로 시작됩니다. 바로 벽파계(僻派系)의 대표였던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시파계(時派系) 남인(南人)과 남인 중심의 실학사상가(實學思想家)들을 제거하기 위한 일대 숙청으로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킵니다. 천주교 금지를 명분(名分)으로 천주교도들은 물론이고 정약용(丁若鏞) 형제,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 등의 남인계 시파와 자수한 청(淸)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 등을 비롯한 300여명을 살해하고 유배시킵니다.
결국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후 순조 재위 시절에 몇 차례의 천주교 탄압은 세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계속되어 이 후 헌종(憲宗) 때의 기해박해(己亥迫害)[1839년], 고종(高宗) 때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등으로 이어져 쇄국정책(鎖國政策)의 수단이 됩니다.
이와 같은 세도정치의 폐해(弊害)는 당연히 일반 농민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국가 권력 구조가 의정부(議政府)에서 비변사(備邊司)로 넘어가고 그 요직(要職)을 독차지하는 세도 권력의 전횡(專橫)으로 인해 진보적 학자들의 중앙 진출이 봉쇄되고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인한 농민들의 수탈(收奪)이 극에 달해 이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반발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특히 관서(關西)농민전쟁으로까지 불리는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은 부패한 권력 통치 체제에 대한 농민층의 저항 전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또한 홍경래의 난을 이어 안동김씨 정권 말기 철종 대의 임술민란(壬戌民亂)이나 고종 대의 동학운동(東學運動)으로 일어난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등으로 이어져 심각한 국가 위기의 상황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순원왕후 김씨
안동 김씨(安東金氏) 집안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로 태어난[정조 13년] 순원왕후는 왕비로 책봉[순조 2년]되고 난 후 철종(哲宗) 대까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정상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립니다. 특히 철종의 왕위 계승에 결정적인 역할과 철종의 왕비 간택(揀擇)에도 자신의 집안 사람{김문근의 딸 철인왕후(哲仁王后)}을 성사시킴으로 해서 그녀는 권력을 공고히 합니다. 슬하(膝下)에 2남{효명세자[익종], 차남 요절} 3녀{명온, 복온, 덕온공주}를 두었고, 철종 8년에 승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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