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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관련 서울의 흔적, 서울 연통부 터

草霧 2013. 7. 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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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해에만 있었다?

임시정부 관련 서울의 흔적

 

사종민 | 2013.01.24

 

 

[서울톡톡] 흔히 임시정부라 하면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먼저 떠올린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이어받아'라는 구절이 있듯이 임시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임시정부는 4월 13일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해서 몇 개에 이른다. 1919년 2월 25일에 결성된 러시아 연해주지역의 '대한국민의회', 4월 8일 결성된 '신한민국정부', 4월 9일 서울 시내에 뿌려진 전단에 등장한 '조선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간정부', 4월 15일 중국 길림공화보에 소개된 '고려임시정부', 4월 23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수립하였던 '한성정부' 등인데 그나마 조직을 가지고 활동하였던 상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회의, 한성정부 외에는 전단이나 보도기사에 그 실체가 드러난 정도이다. 서울 지역의 임시정부 흔적으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서울 연통부 터와 한성정부의 취지서를 준비하고 선포한 곳 등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비록 상해에 있지만 조국의 국내 장악이 급선무였다. 산하 조직 중 내무부는 국내 행정을 직접 장악하기 위해 연통제(聯通制)를, 교통부는 연결망을 확보하기 위해 교통국(交通局)을 두었고, 군무부는 국내 비밀군사조직 확보를 위해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을 설치하고 직할부대를 편성하였다. 연통제와 교통국, 군사주비단 등의 삼각체제의 연결망을 타고 내무부의 지방선전대가 국내에 잠입하여 선전, 홍보활동을 펼쳤다. 특히 연통제는 일제의 통치를 무력화하고 국내를 직접 통치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으며, 이를 추진한 인물은 안창호(安昌浩)였다. 연통제의 시행으로 설치된 연통부는 전국 각 지역에 점조직으로 연결되었다. 역할은 임시정부가 발포하는 법령이나 공문의 국내 배포, 독립전쟁 대비 군인 모집과 군수품 조사, 시위운동 준비와 주관, 군자금 모집, 통신 연락 등으로 연통부는 가히 임시정부의 생명선이었다.

 

서울에 연통부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은 상해에서 파견된 이종욱이 1919년 10월 상순 연건동 202번지 자신의 숙소에서 국내 독립운동단체와 수차례 회합을 가지면서 태동하였다. 회합 결과 상해 임시정부와 국내 비밀결사가 서로 뜻을 같이하고 중앙과 지방간의 원활한 연락과 의사소통을 위해 연통제(聯通制)를 시행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참석자들의 전폭적인 동의를 얻어 서울에 연통부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임시정부와 통신 및 문서 수수를 담당할 연락 장소로 경성부 화천정 5번지(중구 순화동 5번지로 현재 서소문로 9길 14) 동화약방 주인의 아들인 민강(閔橿, 1883~1931)에게 부탁해 그의 집을 연락 거점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민강은 3·1운동 당시 한성임시정부 수립운동에 관여하는 한편, 비밀결사 대동단에 가입해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서울 연통부는 일제와 싸우면서 임정이 수립되어 활동하고 있음을 국민에게 알리고 나라 안의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정에 보고 전달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중 민강이 일경에 체포되면서 연통부의 기능이 약화되었고, 1922년경 일제에 의해 저지됨으로써 주춤해졌다.

 

 

3·1운동 직후 한남수 · 홍면희 등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각계의 독립운동 세력을 망라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계통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3월 중순부터 동지규합에 들어가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만국공원 회합에서 참석자들은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일반에 선포하고 독립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정부의 명칭을 한성정부로 하였다. 만국공원 회합 며칠 뒤 한남수 · 김사국 등은 경성부 내자동 64번지 한성오의 집에 모여 한성정부를 위한 「국민대회 취지서」 제작을 비롯한 제반 실무를 협의하였다. 거사 일자는 4월 23일로 하되 계획은 당일 정오에 서린동 춘추관에서 국내 13도 대표자가 모여 임시정부를 선포하고, 노동자를 동원하여 종로 보신각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벌이면서 준비한 문서를 배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당일 보신각 앞에서 일어난 시위 규모는 소규모였다. 계획대로 종로 일대에 「임시정부 선포문」과 「국민대회 취지서」가 뿌려졌지만 현장에서 주동자가 체포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한성정부의 조직 소식은 이미 국민대회 이전 중국 신문에 보도되었고, 국민대회 직후 기독교 세력과 국내 민족운동계에 널리 알려지고 서울발 통신으로 해외 한인사회까지 전파되었다.

 

현재 서울지방경찰청 앞 도로인 종로구 내자동 75번지는 1919년 당시 현직 검사였던 한성오의 집터로서, 한성오는 전직 검사 출신 변호사 홍면희와의 친분으로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고 한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7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한성정부 유적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서울 연통부가 있었던 순화동 5번지는 원래 조선조 숙종대왕비 인현왕후가 탄생한 곳으로, 1897년에 설립한 민족기업인 동화약방이 들어섰다가 1930년에는 동화약품공업주식회사의 자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지하철 2호선 시청역 10번 출구로 나와 경찰청 앞 사거리 방향으로 순화빌딩을 거쳐 오른쪽 골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보로 5분 거리이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 연통부 터 찾아가기

 

 

글/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조사연구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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