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미술, 3. 고딕 미술 (Gothic art) - 7

草霧 2013. 4. 29. 10:23

 

 

 

 

 

중세 미술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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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미술의 종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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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딕 미술 (Gothic art)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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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미술 1편을 참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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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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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새로운 세기가 다가오다 _ 종교개혁, 르네상스의 개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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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미술. 새로운 세기는 우연히 왔다. 참조하세요.

 

http://cafe.daum.net/cultureSpice/GIMX/220

http://cafe.daum.net/cultureSpice/GIMX/221

 

 

조토 디 본도네 (Giotto di Bondone, 1267~ 133718)

 

 

 

지오토로 인해 회화는 그 후 700여 년간 시각 예술의 대표이자 주류가 되었다. 자연의 관찰에 근거한 새로운 양식으로 그는 그의 세대에게 보는 방법을 새로 보여주었고, 과학에 근거한 르네상스 미술이라는 새 시대의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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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토가 활동한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초는 이탈리아 미술에서 중세 고딕의 마지막(Late Gothic)과 르네상스의 시작(Proto-Renaissance)이 겹쳐지는 분수령이었다. 지오토 이전 이탈리아 회화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당대인들이 그리스 방식(maniera greca)이라고 부르던 이탈리아화된 비잔틴 양식(Italo-Byzantine style)이었다.

 

 고딕과 비잔틴 양식을 중심으로 한 중세적 관습이 주도한 가운데 미술가들은 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고, 그러한 변화의 첨단에서 유럽 회화의 흐름을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바꿔놓은 혁신의 주인공이 지오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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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인물, 전설의 인물

 

 

 

신화적인 화가인 만큼 지오토의 삶에 대해서는 전설 같은 일화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당시 피렌체 최고의 화가 치마부에 (Cimabue, 본명은 Cenni di Pepo)가 피렌체 근방의 시골 마을 베스피냐노(Vespignano)에 갔다가 바위에 그림을 그리던 열살 가량의 양치기 소년을 보고 그 재능을 발견해서 피렌체로 데려와 제자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치마부에가 그린 인물 위에 지오토가 파리를 그려 넣어 스승이 이를 쫓아버리려 했다는 이야기, 교황이 보낸 사람에게 아무 도구 없이 완벽한 원을 그려주어 교황의 감탄을 사고, 로마로 가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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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후 처음으로 이름이 알려진 예술가이기도 한 지오토의 명예를 후대와 고향 너머로 확실하게 알린 데는 당대에 쓰여진 피렌체의 문학 작품도 한몫을 했다. 단테(Dante)는 지오토가 활동하던 시기에 쓴 책 [신곡]의 연옥편 제11곡에 치마부에가 회화계에서 왕좌를 차지했나 했더니 이제는 지오토가 명성을 얻었다. 때문에 전자의 그림자는 흐려져 버렸다라고 썼다. 이 글은 명성이란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예시였으나, 지오토의 경우에는 그 명성의 증거가 되었다. 역시 활동 중이던 1312~3년경에 나온 리코발도 페라레제(Riccobaldo Ferrarese)의 세계사에, 미술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지오토가 포함되기도 했다. 피렌체의 시인 체코 다스콜리(Cecco d’Ascoli)가 쓴 시에 등장한 지오토는 화가의 이름이 최고의 그림과 동의어가 된 예를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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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애위상에 대한 기록은 많은 편이나, ‘작품에 대한 정보 곧 지오토가 정확히 어떤 작품을, 언제 그렸는지에 대한 증거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과거 작품의 제작자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 자료는 크게 세가지 곧 서명, 계약서, 당대인들의 기록이 있다. 그런데 지오토 활동 당시에 서명은 오늘날의 상표처럼 화가의 작업장(bottega)에서 만든 작품에 기계적으로 붙여졌을 가능성이 많다. 실제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지오토의 서명이 들어간 세 점의 작품 모두는 그의 작업장에서 일하던 조수의 작품으로 판단되고 있다.

 

계약서가 있는 작품 중 두 점의 패널화는 현재 남아있지 않고,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벽화도 그의 조수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오늘날 지오토 작품으로 여겨지는 모든 그림은 당대와 가까운 후대의 기록에 의존한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들은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기록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 결국 작품의 양식이 진위 판단의 주요한 근거가 되는데, 이 부분에서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어 논란이 진행 중인 작품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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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토의 소우주, 스크로베니 예배당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한 지오토의 작품이자, 다른 그림의 진위를 판정하는 기준작, 제작 시기가 알려진 가장 이른 작품이 파도바 (Padova)의 스크로베니 예배당(Capella degli Scrovegni) 벽화이다. 근처에 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이 있어 아레나 예배당(Arena Chapel)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상인 엔리코 스크로베니(Enrico Scrovegni)가 집안의 예배를 위해 (현재는 허물어진) 자신의 저택(Palazzo Scrovegni) 옆에 지어, 1305년의 수태고지 축일에 산타 마리아 델라 카리타(Santa Maria della Carita)라는 이름으로 성모 마리아에게 헌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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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배당은 길이 13m, 8.5m인 직사각형 평면의 소규모 건물로, 내부에는 높이 13m의 궁륭형 천장(barrel vault)이 있고 동쪽에 제단, 서쪽에 출입구, 남쪽에 6개의 창이 있는 단순한 구조이다. 벽화를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면을 확보하려 한 듯 다른 장식이 없는 교회 내부, 제단 안쪽을 제외한 모든 벽과 천장에 지오토의 프레스코가 그려져 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근처의 폭격과 지진으로 인한 건물의 균열, 예배당 내부의 습기와 오염 등으로 작품 훼손이 심각해졌다. 1978~9년에 실태 조사를 했고 그 결과에 따라 1985년부터 2001년까지 전면적인 보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지오토가 이곳의 벽화를 그리는 데 사용한 기법인 프레스코는 안료와 석회를 섞어 벽에 바르는 기법으로, 마른 벽에 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건조한 기법(fresco secco)과 구별해서 진짜 프레스코라는 뜻의 부온 프레스코(buon fresco)라고도 부른다. 당시에는 치마부에까지도 마른 벽에 그리는 세코 기법을 사용했고, 로마에서 활동한 화가 피에트로 카발리니(Pietro Cavallini) 정도가 부온 프레스코를 시도했다. 지오토는 이 새로운 기법을 교회의 벽화 전체에 적용했다. 부온 프레스코는 내구성이 좋고 색이 아름다우나, 석회가 마르기 전에 그림을 마쳐야 하고 한번 마른 후에는 수정할 수가 없고,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작업할 수가 없는 등의 제약이 있다. 완성한 후에는 하루에 일한 분량(giornata) 사이에 경계선이 나타나 며칠 동안 작업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경우 852개의 지오르나타가 보여, 간단한 부분을 조수가 맡아서 동시에 여러 면을 작업했다 해도 1304~5년이 거의 다 걸렸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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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처럼 펼쳐지는 이야기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진 교회답게 제단에는 지오반니 피사노(Giovanni Pisano)가 만든 대리석 성모자상이 놓여 있다. (성모자상 뒤의 엔리코 스크로베니 무덤은 그의 사후에 자손들이 추가한 것으로 1360년경에 안드리올로 데 산티(Andriolo de Santi)가 조각했다.) 제단 입구 아치에는 예수를 그린 패널화와 수태고지(Annunciation) 장면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이 두 장면을 포함한 38개의 구획에 마리아의 부모인 요아힘(Joachim)과 안나(Anna)의 일생(남쪽 상단 6장면), 마리아의 일생(북쪽 상단 6장면), 예수의 어린 시절(남쪽 중간단 6장면), 예수의 선교와 기적(북쪽 중간단 6장면), 예수의 수난(남쪽 하단 6장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북쪽 하단 6장면)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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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남쪽 벽 위 왼쪽에서 시작하여 오른쪽으로 진행되어, 북쪽 벽 아래 오른쪽에서 끝난다. 장면 사이 사이의 장식띠와 천장에는 예수, 성모자, 구약 시대의 인물들을 비롯한 성인의 얼굴 33점이 그려져 있고, 이야기 장면 아래에는 대리석 무늬 그림 사이에 단색조로 그려진 미덕과 악덕의 알레고리 7쌍이 마주 보게 배치되어 있다. 출입문이 있는 서쪽 벽 전체는 최후의 심판(Last Judgement)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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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원천은 복음서와 외경, [황금 전설(Golden Legend)]을 비롯한 성인전들이다. 이러한 텍스트를 기초로 건물 입구에 거대한 최후의 심판 장면, 양쪽 벽에 성서의 이야기를 배치한 것은 비잔틴 교회 장식의 규칙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상 구성은 전통과 다른데, 지오토는 예수의 신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기적 장면을 대폭 축소하고 마리아와 그 부모의 일생, 예수의 어린 시절 및 수난을 강조했다. 주제의 선택을 통해 그는 초자연적인 현상보다 인간적인 조건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도식적으로 이새의 뿌리에서 난 가지가 아니라, 따뜻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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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영화까지 나와서 진짜 같은 가상 이미지를 물릴 만큼 보아온 현대인의 눈에 지오토의 작품은 고졸하고 담백한 점이 매력이겠으나, 당대인들에게 그의 그림 속 세계는 충격을 줄 만큼 사실적이었다. 비잔틴 회화에서 무게감 없는 얄팍한 인체로 정면만을 향해 둥둥 떠있는 것 같았던 인물들이, 지오토의 벽화에서는 확실한 부피와 무게를 가지고 설득력 있는 공간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소수의 등장인물과 단순화된 동작 속에 압축하여 보여주는 절제된 드라마는 설명 없이도 관람자에게 이야기를 알아볼 수 있게 하고, 그려진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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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배당 벽화 중 가장 유명한 장면인 [애도 Lamentation]에서 지오토는 예수의 시신을 둘러싼 인물들이 표현하는 다양한 슬픔의 층위를 자세, 동작, 표정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비잔틴 미술에서 발견되는 금속성의 딱딱한 선과 달리 부드러운 명암이 인물의 덩어리감과 공간의 깊이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애도자들 중 등을 보이고 있는 인물은 지오토가 즐겨 사용한 창안으로,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는 비잔틴 미술의 인물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장치이자 화면의 전면을 강조해 공간에 깊이감을 만드는 역할을 하면서, 관람자도 그들과 함께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어 그림의 연극적 효과를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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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히는 예수 Capture of Christ]는 키드론 계곡 건너 정원에서 예수가 붙잡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등불, 횃불, 무기를 들고 예수를 잡으러 온 군인들에게 유다는 입맞춤으로 예수가 누구인지 가르쳐 준다. 예수가 잡히는 것을 보고 흥분한 베드로는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린다. 순차적으로 일어난 이 두 사건이 한 화면 안에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유다의 가식적인 표정과 준엄한 예수의 표정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을 뿐 아니라 인물들의 얼굴에 초상과도 같은 개성이 표현되어 있어 그림의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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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와 같이, 한 시점에 일어난 장면이 아니라 한 이야기에 포함되는 다른 시간대의 사건들을 요약하여 보여주는 방식이나 성인의 후광을 돌출된 금박으로 처리한 것, 의상의 금색 디테일, 인물에 비해 작은 배경 건물 등은 중세적인 요소이다. 또 인체가 해부학적으로 정확하지 않고 공간 묘사에 과학성이 결여된 것은 이후 르네상스 시대에 가서야 해결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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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를 지옥에서 구해낼 그림

 

르네상스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 지오토 양식의 원천으로 거론되는 것은 스승 치마부에의 이탈리아화된 비잔틴 양식과 드라마틱한 내러티브 스타일, 비잔틴의 양식화된 위엄 대신 고전 로마의 견고함을 되살려냈다고 평가받는 피에트로 카발리니로 대표되는 로마 화파, 프랑스의 고딕 조각, 당대 조각가 지오반니 피사노가 만든 감정이 드라마틱하게 표현된 조각, 고대 로마의 조각과 회화, 비잔틴 미술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 13세기 마케도니아의 미술 등이다. 그러나 지오토의 업적은 이들을 월등히 뛰어넘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는 그 이전의 어떤 화가로부터도 영향받지 않았으며 오직 자연의 제자일 뿐이라고 칭송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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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나갈 때 보게 되는 서쪽 벽 전체는 [최후의 심판] 장면이 차지하고 있다. 무지개색 후광(mandorla) 속에 앉은 심판자 예수의 오른쪽에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왼쪽에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보인다. 예수의 좌우로 열두 제자가 앉아 있고 천국으로 오르는 사람들은 천사들의 인도를 받으며 질서 정연하게 줄을 맞춰 서 있다. 반면 작은 크기의 누드로 무질서하게 표현된 지옥의 인물들은 악마들에 의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당하고 있다. 이들은 사탄에게 잡아먹혔다가 배설되고, 몸이 수직으로 톱질되고, 성기가 뽑히거나 잘리고, 거꾸로 매달리거나 억지로 무언가가 먹여지는 등의 고문을 당하는 중이다. 그중에는 돈주머니의 줄로 목이 매달린 고리대금업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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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은행업은 성서가 금지한 고리대금업, 곧 지옥에 갈 죄로 여겨졌다. 이 교회를 지은 엔리코 스크로베니의 아버지 레지날도(Reginado)는 이 죄로 지옥의 제7원에서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주머니를 목에 걸고 떨어지는 불길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고 단테는 그의 [신곡] 지옥 편 제17곡에 썼다. 엔리코가 이 교회를 지은 이유가 바로 아버지와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한 것이었다. 지오토는 엔리코가 이 교회를 마리아에게 바치는 장면을 [최후의 심판] 하단 중앙의 천국 쪽에 그려 넣었다. 이 자리는 수태고지 축일이 되면 창문에서 들어온 빛이 엔리코와 성모의 손 사이로 들어오도록 계획한 곳이기도 해서, 그의 소원이 성취된 듯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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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예수를 기억하게 한 성 프란체스코

스크로베니 예배당보다 앞선 연대에 제작된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교회 프레스코 일부는 지오토의 작품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치마부에와 시모네 마르티니 등 수많은 화가들이 참여한 이 교회의 벽화들은 양식과 수준의 차이가 크고, 누가 무엇을 그렸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지오토의 작품으로 소개되는 프란체스코의 생애 연작을 지오토가 직접 그렸는지는 지오토 연구에 있어서 최대의 논쟁점이다.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또 하나의 프란체스코 생애 연작은 피렌체에 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피렌체에 설립한 교회 산타 크로체(Basilica di Santa Croce) 본당(nave)에 있는 바르디 가문의 예배실(Bardi Chapel) 벽화가 그것이다. (소규모 교회를 가리키는 채플이라는 말은 스크로베니 채플의 경우처럼 독립된 건물을 가리키기도 하고, 바르디 채플의 경우처럼 큰 교회 본당 안의 한 구획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입구 아치 위의 작품을 포함하여 7개의 화면에 프란체스코 일생의 주요 장면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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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5년에 선출된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트 5세가 로마가 아니라 아비뇽에 정착하고 그 후임들도 아비뇽에 남았다. 1378년 로마에서 독자적으로 우르바노 6세를 선출하여 두 교황이 세워지는 대분열의 시기를 거쳐 1417, 모두가 인정하는 새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선출될 때까지, 14세기 대부분은 이탈리아에 교황이 없었고 수도회와 형제단이 늘어나 그 영향력을 높였다. 대표적인 탁발수도회인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크회는 서로 경쟁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피렌체에서 프란체스코회가 동쪽에 산타 크로체를 짓자 도미니크회는 서쪽에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를 건축했다. 두 수도회 모두 16세기까지 이탈리아 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수많은 미술품도 주문했다.

 

성 프란체스코는 단테, 지오토와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태동시킨 세 사람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단테의 [신곡]이 당대 인간의 노래였다면, 지오토는 실제 사람을 보는 것과 같은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고, 성 프란체스코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삶을 산 예수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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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재산과 혈연 관계를 다 포기하고 청빈한 삶을 산 프란체스코는 라베르나 산 위에서 오래 금식을 하던 중 여섯 개의 날개를 단 천사인 세랍(Seraph) 형상의 예수를 보았다. 이후 양손, 양발, 옆구리에 예수의 상처와 같은 5개의 성흔(stigmata)이 생겼다. 이것은 예수가 당한 고통을 느끼길 원해왔던 그의 기도가 이루어진 사건이다. 바르디 예배실 입구 아치 위에 그려진 프레스코 [성흔을 받는 성 프란체스코 The Stigmatisation of S. Francesco]는 이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영적인 사건이지만 눈앞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처럼, 그리하여 관람자가 이 사건의 증인이 되도록, 모든 것이 만져질 듯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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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디 예배실 안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그려진 [성 프란체스코 죽음의 애도와 장례식 Lamentation and Funeral Rites of S. Francesco]은 프란체스코의 죽음과 성흔 확인 장면을 합친 것이다. 성인이 죽었을 때 그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온 영혼은 흰 구름에 둘러싸여 별처럼 밝게 빛나면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림에서 성자의 영혼은 상단의 네 천사가 받들고 있는 상반신의 형태로 묘사되었다. 프란체스코의 시신 오른편에서 그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는 사람은 제롤라모라는 기사인데 그는 성자의 임종 소식을 듣고 성흔을 확인하러 몰려든 사람들 중 하나로 그의 성흔을 만져보고 나서야 이를 믿고 후에 이 진실을 증거하는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화면보다 여유 있는 공간에 배치된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개성적인 용모와 동작, 표정으로 다양한 슬픔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바르디 예배실 옆에는 페루치 가의 가족 예배실(Peruzzi Chapel)이 있는데 이곳에는 세례 요한과 복음서 기자 요한의 생애 벽화가 그려져 있다. 역시 지오토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겨울에 작업한 때문인 듯 세코 기법(마른 벽에 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건조한 기법)이 사용되었다. 산타 크로체에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18세기에 벽에 흰 회칠을 해서 그림들을 덮어 버렸다. 1841년부터 회칠을 벗겨 내고 그 아래에 있던 벽화를 복원했으나 그 과정에서 그림의 많은 부분에 손상이 갔고, 세코로 작업한 페루치 벽화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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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크로체는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을 낳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스탕달이 그의 책 [나폴리와 피렌체: 밀라노에서 레조까지의 여행]에서 산타 크로체 교회를 나서는 순간 심장이 마구 뛰고 생명이 빠져나가 쓰러질 것 같았다고 쓴 이래, 미술품이 준 감동이 신체의 이상을 일으키는 현상을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부른다. 이 교회에는 수많은 미술가의 작품이 있고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명사들의 무덤도 많아 감동을 받을 여지는 많을 것이다. 스탕달 자신은 특정 작품이 그런 충격을 주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탕달 신드롬의 원인이 된 작품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다양한 추측이 있었고, 그중에 지오토의 벽화가 원인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가 이 교회를 방문했던 1817년은 벽화들이 회칠로 덮여 있던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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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회화 예술의 아버지

 

 

지오토는 피렌체를 근거지로 하여 파도바, 아시시, 로마, 나폴리, 밀라노 등을 여행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그 과정에서 이전의 어떤 화가도 누려보지 못한 국제적 명성과 부를 얻었다. 그는 8명의 자녀를 둔 가장으로 고향 등지에 땅을 구입한 지주가 되었고, 양모 직조기를 대여하는 사업을 하기도 했다. 그의 작업장은 매우 번창했고 타데오 갓디(Taddeo Gaddi)와 같은 제자들을 통해 후대의 화가들에게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1334년에는 후에 피렌체의 대성당(Duomo)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Basilica di Santa Maria del Fiore)가 될 산타 레파라타(Santa Reparata) 건설 책임을 맡았고, 이 교회의 종탑(campanile)을 설계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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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후 보카치오(Boccaccio)1353년에 쓴 [데카메론] (6일 제5)에서 지오토가 몇백 년 동안 묻혀있던 미술을 되살려 냈을 뿐 아니라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자연을 사실적으로 모방했다고 썼다. 이것은 처음으로 지오토의 위치를 미술사의 맥락에서 평가한 것으로 이후 이런 시각이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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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기베르티는 1447년경부터 [코멘타리(I Commentarii)]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3부분으로 나뉜 이 책의 제2권에서 당대의 미술을 지오토로부터 서술하면서 지오토가 자연을 연구함으로써 치마부에의 그리스식을 대체했으며 거친 그리스식을 버린 에트루리아에서 가장 탁월한 화가라고 평가했다. 그가 지오토의 것으로 거론한 작품 40여 점은 그 이전 기록에 나온 것보다 월등히 많은 숫자이고 틀린 내용이 거의 없다. 이로써 기베르티는 지오토의 전 작품을 언급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기베르티가 언급하지 않은 작품 중 나중에 지오토 작품으로 인정받은 것이 없다. 1550년에 바사리(Vasari)[미술가 열전]에서 새로운 작품을 추가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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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티(Alberti)1435년에 쓴 [회화론(De pictura)]에서 처음으로 그의 작품 분석을 시도했다. 그는 로마 옛 성베드로 교회 모자이크(Navicella)를 분석하여, 인물의 다양한 동작과 자세가 어떻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는지를 기술하며, 이것이 당대 미술(modern art)의 유일한 예라고 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과거 미술가들에 대해 쓴 유일한 메모에 지오토가 자연을 따랐기 때문에 존경할 만하다고 쓰고, 지오토의 추종자들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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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에 스크로베니 예배당이 오랜 시도 끝에 공공의 재산이 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러스킨이 스크로베니 예배당과 산타 크로체의 프레스코 연작에 대해 쓴 글도 지오토 붐을 일으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후에는 폴 고갱이나 디에고 리베라 등이 간헐적으로 지오토의 단순한 형태를 언급하며 그에게서 받은 영감을 표시했다. 대부분의 20세기 예술가들은 지오토의 뛰어난 기술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에 존경을 표했다. 조각가 헨리 무어(Henry Moore)이탈리아에 가보니 존경할 만한 조각은 거의 없었고, 지오토 조각의 위대함이 그 빈자리를 메워주었다라는 말로 그 육중한 인물이 가진 매력의 무게를 고백하기도 했다.

 

 

 

 


 

 

 

 

스크로베니 예배당 내부 (서쪽을 바라본 모습)

[성 프란체스코 죽음의 애도와 장례식] 1325~28년경, 프레스코, 280×450cm, 바르디 예배실, 산타 크로체, 이탈리아 피렌체

[애도] 1305, 프레스코, 200×185cm, 스크로베니 예배당, 이탈리아 파도바

[붙잡히는 예수] 1305, 프레스코, 200×185cm, 스크로베니 예배당, 이탈리아 파도바

[최후의 심판] 1305, 프레스코, 스크로베니 예배당, 이탈리아 파도바

교회를 지어 성모에게 바치는 엔리코 스크로베니, [최후의 심판] 부분

[성흔을 받는 성 프란체스코] 1325~28년경, 프레스코, 390×370cm, 바르디 예배실, 산타 크로체, 이탈리아 피렌체

[성 프란체스코 죽음의 애도와 장례식] 1325~28년경, 프레스코, 280×450cm, 바르디 예배실, 산타 크로체, 이탈리아 피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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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네이버캐스트>

 

7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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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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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미술 연대기 (500 ~ 1500)

 

청동기 시대

(3650-1100 BC)

에게 미술

중세 미술

(500 ~ 1500)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476-1000)

중세 중기(High Middle Ages, 1000-1300)

중세 후기(Late Middle Ages, 1300-1453)

중세의 몰락(1453)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

인쇄기의 발명(1456)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1492)

종교 개혁(1517)

르네상스

고대 그리스

(1100-146 BC)

고대 그리스 미술 1

고대 그리스 미술 2

고대 로마

(753~476 BC)

로마 황제 연대표

고대 로마 미술 1

고대 로마 미술 - 2

 

비잔틴 제국

(476BC-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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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황제 연대표

십자군 연대표

동방 정교회

라틴제국

비잔틴 미술 - 1

비잔틴 미술 - 2

성서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읽는다. - 1

성서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읽는다. - 2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1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2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3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4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5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1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2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기독교 만 존재한다. - 1

기독교 만 존재한다. - 2

기독교 만 존재한다. - 3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신 보다, 인간의 호기심은 강하다

신이여! 구원하소서!

새로운 세기는 우연히 왔다.

중세 초기 미술

비잔틴미술

로마네스크 미술

아메리카 문명

(300~1533)

고대 아메리카 미술-1

고대 아메리카 미술-2

고대 아메리카 미술-3

아프리카 미술

(BC 3300~1800)

미술의 탄생

원시미술 -2

메소포타미아 미술

이집트미술

아프리카 미술-1

아프리카 미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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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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