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미술, 3. 고딕 미술 (Gothic art) - 6

草霧 2013. 4. 28. 16:43

 

 

 

 

 

중세 미술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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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미술의 종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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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딕 미술 (Gothic art)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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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미술 1편을 참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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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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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그대는 어디 있는가 _ 건축과 조각, 미술 이야기

 

 

로마네스크 미술에 이어 12세기 중기에 그 싹이 터서 13세기에 프랑스·영국에서 명확한 양식이 확립되었다. 그 후 2세기 동안 서유럽 전체에 전파되어 더욱 발전·변화해서, 15세기 초부터 이탈리아에서 형성된 르네상스 미술이 대표하는 근세미술로 바뀔 때까지 존속하였다. 고딕이란 명칭은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인이 중세건축을 조야(粗野)한 만족(蠻族) 고트인(Goth )이 가지고 온 것이라고 비난한 데서 유래한 것인데, 19세기 이래 서유럽 중세미술의 한 양식을 가리키는 미술사상(美術史上)의 용어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중세미술에 명확한 형식을 부여한 것은 북프랑스였지만, 결국 전 서유럽적() 현상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고트인들은 이 미술의 형성에는 직접 관계가 없었지만, 약간 모멸적인 뜻으로 말한 것이 이러한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고딕 미술의 양식은 먼저 건축에서, 특히 성당 건축에서 실현되었지만, 여기에 어울려서 형성된 조각· 회화·공예에 대해서도 총괄적으로 이 양식의 명칭이 적용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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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미술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기독교 미술의 절정기의 양식이다. 높은 건물과 첨탑, 첨두 아아치로 수직적 상승감을 나타내는 건물 양식이 대표적이다. 또 건물에 좁고 긴 창문의 스테인드 글래스도 특징할 만하다. 대표적인 고딕 성당으로 아미앵 성당, 스테인드 글래스로 유명한 샤르트르 성당, 노트르담 성당, 랭스 성당, 퀼른 성당, 웨스트민스터 성당이 대표적이다.

 

유리회화스텐인 글라스 (stained glass)

 

 

 

고딕 회화의 대표는 스테인드글라스일 것이다. 색유리의 사용은 이미 6세기경이라고 알려져 있고, 12세기 이전에 속하는 한두가지 예(아우크스부르크 본사원의 12사도의 일부)도 남아 있으나, 그 개화(開花)는 역시 12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두껍고 넓은 벽면이 제거되고 크고 높은 들창의 형성이 가능해지자 이 예술은 놀라운 진보를 보였다. 13세기까지의 기술은 주로 모양에 맞추어 자른 색유리를 H자형 단면을 가진 납()테에 끼워 한 장의 그림을 조립하고 필요에 따라 쇠 테로 보강하여 창으로 시공하였다. 이것은 게르만 켈트의 전통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긴 중세의 역사를 통하여 발달하여 온 소공예(칠보 등)의 색면 대비(色面對比)의 아름다움에, 투과광(透過光)의 영롱함을 결부시켜 대예술로 발전을 본 것이다. 어두운 성당 안은 영롱하게 비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색과 빛 속에 완전히 종교적인 분위기가 넘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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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 작품 예로 샤르트르 본사원의 150개에 가까운 대소(大小)의 창이 모두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다. 도상(圖像)은 성서의 설교화(說敎畵)거나 성자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색과 빛의 아름다움을 내세우는 이 예술에서는 도상은 2차적인 것이다. 공예적 전통에 많은 것을 의존하였기 때문에, 스테인드글라스는 상당히 오랜 기간, 중세전기(中世前期)의 표현양식과 적색·청색을 대담하게 사용한 구도가 특색으로 되어 있다. 또 두께의 불균일(不均一)과 불순물의 혼입 때문에 그 조합에 따른 색의 변화가 아름다운 효과를 낸다. 13세기는 가장 우수한 작품을 남긴 시대이며, 샤르트르 외에도 브뤼지·생스·톨로아 등의 본사원이나 파리의 생트샤페르에 그 수작(秀作)이 있다. 13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사실조각(寫實彫刻)의 영향도 있고 하여, 대담한 구도법보다도 사실적인 것으로 옮겨 갔다. 유리의 제조 기술이 향상되고, 색이 균일화됨에 따라 열처리에 의한 보채기술(補彩技術)이 생겼기 때문에 표현은 보다 정교하게 되나 오히려 유리 그림으로서의 장식성이 상실되어 그 아름다움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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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산화물을 녹여 붙이거나, 표면에 안료를 구워서 붙인 색판 유리조각을 접합시키는 방법으로 채색한 유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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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ined glass

 

역사적으로 종교건축물에서 사용한 하나의 미적 표현방법 으로서, 로마네스크 시대(11,12세기), 고딕 시대(13,14세기), 르네상스(15,16세기) 시대를 거치면서 각 시대의 건축양식이나 시대적 사상의 흐름에 반영 되었고 종교예술 형태로서 전래 되었다. 스테인드 글라스 색채의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조화는 유리의 특정한 색상 그 자체에 의한 다기보다는 그것을 통과하는 시간과 날씨 강렬한 태양 빛의 속성에 따른 효과와 사람의 시각이 선택적으로 인지하는 광선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초기 유럽에서만 쓰였던 스테인드 글라스는 고딕건축의 탄생으로 그 전성기를 누렸고 유리창을 확대하고 갖가지 신성한 주제를 유리창에 가득히 표현했고 사람들은 창을 통해 투영되는 화려하고 강렬한 빛의 효과를 좋아했다. 이것을 강조한 스테인드 글라스를 고딕 건축에 융화되면서 예술의 경지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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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고딕 양식 성당건축의 어둡고 침침한 실내를 보석같이 찬란하게 밝혀주었던 스테인드 글라스의 색상 대비는 상당히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금속산화물을 녹여 붙이거나, 표면에 안료를 구워서 붙인 색판 유리조각을 접합시키는방법으로 채색한 유리판. 주로 유리창에 쓰인다. 착색에는 구리··망간과 같은 여러가지 금속화합물이 이용되며, 세부적인 디자인은 갈색의 에나멜유약을 써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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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유리를 창이나 천장에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7세기경 중동지방에서 비롯되었으며,이슬람건축에는 대리석판에 구멍을 뚫어서 유리 조각을 끼워, 채광과 장식을 겸하는방식을 많이 이용하였다. 서구에는 11세기에 이 기법이 전해졌으며, 12세기 이후의 교회당 건축에서 이 예술은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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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유리창에 쓰인다. 착색에는 구리 ··망간과 같은 여러 가지 금속화합물이 이용되며, 세부적인 디자인은 갈색의 에나멜유약을 써서 표현한다. 색유리를 창이나 천장에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7세기경 중동지방에서 비롯되었으며, 이슬람건축에는 대리석판에 구멍을 뚫어서 유리 조각을 끼워, 채광과 장식을 겸하는 방식을 많이 이용하였다. 서구(西歐)에는 11세기에 이 기법이 전해졌으며, 12세기 이후의 교회당 건축에서 이 예술은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특히 고딕건축은 그 구조상 거대한 창을 달 수 있으며, 창을 통해서 성당 안으로 들어오는 빛의 신비한 효과가 인식되어, 스테인드글라스는 교회당 건축에 불가결한 것으로 되어 큰 발전을 해 왔다. 프랑스의 샤르트르대성당, 르망대성당, 영국의 요크 및 캔터베리대성당 같은 여러 성당의 것은 1213세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성당에 있는 예언자 다니엘상을 나타낸 스테인드글라스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065년 또는 12세기 전반이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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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초기의 것은 유리의 질이 고르지 못하여 착색에 얼룩이 지고, 섬세한 표현이 잘 안되었으나, 광선의 투과 ·굴절에 미묘한 변화가 있어서 오히려 매력을 더하고 있다. 14세기 이후 유리의 제작기술이 향상되어 세부적인 표현이 잘 되게 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표현이 그림과 같이 되어 초기의 유리가 나타내는 독특한 미가 없어졌다. 19세기 후반 W.모리스, V.존스 등의 예술운동을 계기로 해서 중세기의 스테인드글라스의 미가 재인식되고, 다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F.레제, 마티스, H.루오 등이 현대건축에 스테인드글라스를 활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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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

스테인드 글라스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색유리이다. 최초로 발견된 색유리는 고대 이집트 왕국의 고분에서 발견된 유리제품들이다. 이것들은 지금의 색유리와는 다르지만 스테인드 글라스 미술양식을 성립시키는 근원적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의 색유리 기술은 에게해를 거쳐 그리스 로마로 전달되어 로마 초기 교회 건축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로마는 오랜 종교 탄압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채택함으로 대규모 교회 건축물이 신축되어 교회 건축의 내부 벽면 장식으로 색유리를 이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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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의 벽면 장식 법으로는 텃세라(tessera)기법이 있었는데 이는 석회석 반죽을 하여 그것을 착색시켜 사용하거나 색깔 있는 작은 돌, 대리석 조각으로 모자이크를 하여 벽면을 장식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색유리 조각이 유리 모자이크 형태로 벽면에 부착되어 광채를 내는 보석과 유사한 효과를 내었다. 이는 유리 텟세라로 불리우며 벽면에 부착된 유리 텟세라는 비잔틴, 로마네스크 시대를 거쳐오면서 건축의 변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차차 창문에 응용되었다. 색유리 창으로 직접 빛이 투과되어 자연스럽게 시간과 각도에 따라 변화하는 빛과 색채의 예술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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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스테인드 글라스의 기원은 로마 시대 초기의 교회 건물내부에 유리 텟세라로 벽면을 장식하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그리스도 교회와 교회 건축의 내부 장식과 관련하여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11세기경 로마네스크 건축 창에 도입되고 고딕 시대에 이르러 고딕 건축양식에 응용되어 변화, 발전하는 등 중세 시대까지 교회와 교회건축과 계속해서 관련되어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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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세 시대(11세기 후반14세기말)

중세 유럽 미술은 종교 미술을 의미할 정도로 기독교 정신과 교회 건축을 중심으로 한 미술이었다. 이러한 중세 미술은 특히 고딕 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고딕 성당의 건축과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말 할수 있다. 스테인더 글라스의 특징은 빛의 투과 됨에 있어서 색의 향연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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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 교회는 미술활동에 있어 가장 큰 후원자였고 주문자였다. 따라서 이시대의 미술은 교회 건축을 중심으로 종합적인 미술양식을 보여주며 그 장식 미술이 집중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교회 건축과 미술은 교회 지도층, 성직자 등과 같은 주문자의 지시 아래 수도자, 예술가들 그리고 돌, 유리, 금속, 나무, 직물 등을 잘 다루는 장인들이 함께 창조했다. 즉 교회 건축과 미술 작품은 종합적인 미술 활동과 공동체의 움직임 속에 세워졌다. 그리고 스테인드 글라스는 수도원의 공동 작업장에서 제작되고 이후 길드 조직(guilds)의해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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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수도원은 유명한 예술 작품을 가지고 있었고 지적, 신앙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수도원은 성 베네딕트 (St. benedict, 480-550)가 창시하였는 데 이를 영향 받아 수도원들이 유럽에 퍼지게 되었고 수도원은 지식과 예술의 중심지로 많은 공예품과 미술품, 그리고 예술 작품들을 낳았다. 그 곳은 훌륭한 고대 문화 전통을 보존하고 있었고, 북부와 동부에서 유럽으로 이주하는 민족들로부터 새로운 양식들을 채용하고 그것을 창의적으로 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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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 당시 성직자들은 신플라톤주의에서 얻은 새 통찰력에서 새로운 미적 형태를 갖춘 교회를 만들도록 위임받게 되는 환경이었다. 중세 빛에 대한 전형적 관념은 "빛은 만물의 창조 원리이며 천상계에서 가장 활동적인 것으로 지상의 모든 유기적 성장의 원인이며 질서와 가치의 원리임으로 빛나는 대상을 볼 때의 기쁨에 대하여 존재론적 존엄성을 직관하게 된다." 라는 스콜라 철학자인 Rebert Grosseteste(11701253)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중세 그리스도 교회에서의 빛은 신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천상 세계, 그리스도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런 한 신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고딕 건축양식에서 빛의 의미는 중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창으로써 빛을 유입하여 환상적 색광을 내는 스테인드 글라스는 중세의 시대적 정신과 융합된 양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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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인드 글라스는 9C경에서 11C경 로마네스크 시대의 건축 창에 도입되고 고딕시대에 가톨릭 정신과 이를 구현한 고딕 건축양식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변화,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스테인드 글라스는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한 정신과 문화, 예술을 배경으로 고딕 양식과 관련하여 새롭게 태어나고 발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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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건축양식과 관련하여 스테인드 글라스의 초기에 해당하는 로마네스크 시대와 전성기에 해당하는 고딕 시대로 나누어 고찰해 볼 수 있다. 또한 시대적 배경과 건축양식, 그리고 대표적인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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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네스크 시대(11세기 후반12세기 중반)

로마네스크라는 명칭은 '로마와 같은' 이라는 뜻으로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유럽의 건물에서 두꺼운 벽과 아치가 있는 고대 로마의 석조 건축과 닮았음을 가리키는 건축 용어이다.이는 로마가 AD 475년이래 12세기말까지 이르는 사이에 로마 예술을 기초로 하여 유럽 전 지역까지 형성된 건축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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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라틴 십자가를 평면으로 하고 두꺼운 벽면과 높은 탑을 특징으로 한다.(도판1) 로마네스크 교회는 단순히 예배 장소로 사용되지 않고 학교, 시민관, 박물관 등으로 사용되어 건축 공간의 빛이 측량 위의 계량을 통해 충분히 빛을 비춰 주어야 했다. 창은 아치형으로 만들어졌고 9세기경부터 개구부에 유리가 도입되어 최소의 면적으로 색유리가 사용된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이시기에 로마네스크 건축의 창에 도입되었고 녹색, 적색, 백색, 금색의 사용을 볼 수 있으나 창 면적의 최소화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창보다 벽체의 여백이 많아 벽에 성화와 성상의 장식이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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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초기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교회 건축 창에 전반적으로 이용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로마네스크 건축양식 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반원 아치와 버팀 기둥을 기본구조로 하는 원형 또는 교차궁륭의 구조(도판2)와 이에 따른 두꺼운 벽과 좁은 간격으로 촘촘히 세워진 석주로 구조상 창을 크게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활용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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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작품은 1050-1070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프랑스 알사스 지방 위센버그에 있는 애비교회 (Abbey charch of Wissenbourg: Alsace)예수의 얼굴이다.(도판3) 이는 노틀담 대성당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표현 양식은 단순하게 양식화되어 그려져 있다. 또한 당시 유리 제조 방식이 규사에 목탄을 섞어 만드는 초보적 단계를 보여준다. 즉 유리 표면이 고르지 못하고 예수 얼굴을 트레스 방법으로 제작했다. 두 번째로 초기의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은 11세기경 독일 아우구스 부르그(augusburg) 대성당에 있는 일창형식으로 다섯 명의 성인이 그려진예언자 상이며 이는 우리가 말하는 스테인드 글라스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도판4) 이것은 모자이크 형식으로 색유리 조각을 납줄로 조합하고 페인팅한 양식이다. 세 번째로는 프랑스의 르망 대성당의승천과 포와티에 대성당의 사형을 들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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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인드 글라스 초기 작품들에서 본래 스테인드 글라스가 단순한 유리 모자이크가 아닌 그 위에 페인팅한 글라스 페인팅이라는 점과 색유리와 납줄을 사용한 것으로 이미 초기에 제작 기술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오늘날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많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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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딕 시대(12세기 중반14세기말)

고딕시대에와서 스테인드 글라스는 고딕 건축양식과 함께 장식적이면서 화려해 지며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또한 고딕 건축양식과 융합되고 신앙 표현의 절정으로 스테인드 글라스는 더욱 발전한다. 또한 장식적인 체계속에 성서나 교리를 주제로 이야기식의 도식을 보여주며, 또한 상징적이며 화려한 장식형태를 보여준다. 원색 색유리의 개발로 색채의 강렬함과 화려함, 그리고 고딕건축과 조화를 이루어 최고의 걸작품이 만들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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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건축은 그 당시의 중세철학, 즉 기독교 사상을 건축을 통해 완벽히 구현했다. 고딕 건축양식은 프랑스 쉬제르 수도원장에 의해 창안되어 전 유럽으로 퍼져 나아갔다. 고딕시대는 교황권이 높아지고, 교회의 정치적 사회적 상승과 함께, 교회의 대규모적인 전개가 이루어 진다. 또한 고딕 미술의 3대 미적 관점인 신의 영광(claritas), 위대함(magnitudo), 조화로움(propotio)을 성당 건축을 통해 들어내 보이고자 했다. 따라서 건축양식은 교회당 공간을 가능한 높게 강조하게 되어 수직적인 기둥을 기본 구조로 이루어지고 벽체는 간소하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시키는 창이 많이 생기게 된다. 구체적으로 고딕 건축양식은 늑골궁륭과 첨두형 아치, 버팀기둥을 특징으로 할 수 있다.(도판5)이러한 특징으로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처럼 버팀을 벽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어 많은 창과 큰 창문들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런 크고 많은 창에 스테인드 글라스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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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딕양식의 확립은 쉬제르(Suger, 1081-1151) 수도원장의 공로가 컸다. 그는 성 드니(St. Denis) 성당을 고딕양식으로 최대한의 밝은 창문, 최소한의 벽의 구조로 스테인드 글라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성 드니 성당은 우아한 늑골궁륭, 첨두형 아치의 골격구조로 된 새로운 고딕양식으로 보여주며 스테인드 글라스는 화려함으로 더욱 매력이 고양되었다. 그리고 그에 의해 중세 기독교 정신을 구현한 고딕양식이 확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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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드니 성당 서쪽 파사드의 중앙현관 청동문 위에 쉬제르가 새겨 놓은 글 "어리석은 마음은 물질적인 것을 통해 진리에 이르고 또 진리의 빛을 봄으로써 이전의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라는 그의 말에서 조각, 금속 공예품, 보석, 귀금속, 색유리로된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천상 세계를 명상하고, 신자들을 이러한 신비한 영적 움직임(analogical movement)을 이끌려고 하는 그의 신념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중세의 물질 세계와 정신세계의 조화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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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인드 글라스에 통해 교회에 들어오는 색광은 중세 기독교 사상과 관련된 종교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구약성서의 빛은 선, 지혜, , 권력, 신의 보호로 상징된다. 반면 신약성서에서 빛은 그리스도 그 자체, 영적인 깨달음을 의미하게 된다. 그 당시에는 신플라톤주의 영향으로 빛의 형이상학적 완성이 이루어 지고, 신은 빛 뿐만 아니라, 조화의 미를 갖는 것이었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이처럼 중세 철학자 또는 생각하는 이들에게 신의 본질을 암시해 주었다. 또한 스테인드 글라스는 교회 건축 공간에서 빛을 통해 화려한 광채로 신비한 미적 공간을 마련하고, 성서적 주제, 교리적 내용을 담아 신자들에게 시각적으로 교리 역할을 하였고 교의와 그 당시 생활상 등을 상징적으로, 장식적으로 표현하였고 또한 종교적 정치적 구조에 대한 민주적 성향의 교회 의사를 반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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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인드 글라스는 고딕 시대에 그 절정을 이루며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13세기에 건립된 프랑스의 샤르트르(chartres)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며 그 원형이 잘 간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약 22000ft에 달하는 176개의 창으로 이루어져 보석 같은 빛의 강렬함과 마치 천상에 있는 듯한 다채로운 색광이 성당 내를 채우고 있으며 색채 조화는 짙은 푸른색과 밝은 붉은 색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성당 내진의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창의 우리의 성모(노트르담 드 라 벨 베르에르)][이새의 나무창]에서 알수 있듯이 성모 마리아와 성서의 내용 그리고 그 당시 생활상 등의 다양한 내용을 상징적이며 장식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형태와 구성에 있어서 대칭성과 인물의 정면성을 띠며 중심인물을 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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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부르쥬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양식에 영향을 주고, 13세기 중엽에 건립된 성 루이스 양식을 창조한 성 샤펠의 스테인드 글라스 는 노틀담 사원의 장미창에 영향을 주었다. 독일에서는 쾰른 대성당과 스트라스블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고딕 시대를 대표한다. 영국에서는 요크 민스터, 솔즈베리 대성당, 윈체스터 대성당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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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는 소위 장식형(Decorated Style)이라고 하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1280년에서부터 100여년 동안 계속 지속되었다. 이는 명칭 그대로 장식적인 창구조와 건물 내부의 장식적 성격이 크며, 자연 대상물인 나뭇잎 무늬 (나뭇잎이 엉켜 있는 모양), 가장자리의 문양적인 테두리로 장식적인 도안이 반복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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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시대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양적, 질적인 면에서 변화와 발전을 했다. 13세기에 만들어진 그리자이유창에서는 화려한 색채, 형태보다는 빛과 디자인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도판8) 14세기에는 은착색법을 창안해서 담황색으로부터 점차 짙은 여러 가지 황색계의 음영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납틀의 사용량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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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인드 글라스는 13세기 영국에서 성행하다가 14세기에 세련도를 더하여 프랑스에서 크게 성행하였다. 은착색법은 영국에 전입되고 14세기 중엽 독일에 파급되었다. 14세기 중엽에는 베르 두브레 또는 프레쉬 글라스 기법이 개발되었다. 이 방법은 색채의 범위를 보다 폭넓게 하기 위해 이중으로 색유리를 덮는 기법으로 유리가 녹아 있을 동안 하나의 색에 다른 색을 덮어서 제3의 색 또는 보다 선명한 색을 만들어 내는 기법이다. 스테인드 글라스의 제조기법은 영국, 프랑스, 독일등에서 서로 상호 교류하여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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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건축에서 스테인드 글라스의 전체 형태를 결정하는 창의 형태는 지역적 특성과 시대에 따라 고유한 형식이 채택되었고 스테인드 글라스를 더욱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또한 건축공간과 유기적 조화 통일감을 이끌어 낸다. 이런 예로 프랑스의 화엽형 양식, 영국의 장식형, 독일의 존다고식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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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 형태는 12세기 원형에서 13세기의 엽식형, 1415세기의 수직식, 15세기에는 직선적 수직식 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려하고 복잡해지고 격자식의 창살 형식으로 창의성이 떨어 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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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형 스테인드 글라스는 13세기말에서 14세기말에 걸쳐 전개된 양식이며, 요크민스터 성당을 그 대표적 예로 들 수있다. 여기서 창의 형태가 나뭇잎 모양의 유선으로 이루어져 장식적인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14세기말에는 장식형의 반동으로 수직형 스테인드 글라스가 생겼다. 이는 장식형에 비해 창이 넓고 깊어 외부로부터 많은 채광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보다 정교한 묘사로 섬세함을 보여주고 있다. 수직형 스테인드 글라스가 소장된 대표사원으로 글로체스타 대성당을 들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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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시대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자연 대상물인 나뭇잎, 꽃 모양과 성서 인물, 그리고 그 당시 생활상들을 우화적, 상징적, 장식적인 형태로 되어있다. 또한 조화로운 색채 배열을 보이면서 청색과 붉은 색계열의 대조 등 색채가 원색적이고 강렬하여 그 화려함과 신비감을 더하여 스테인드 글라스의 예술적 극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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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적인 창의 형태속에 스테인드 글라스는 고딕 건축과 조화를 이루어 더욱 더 큰감동을 일으킨다. 고딕 시대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성당 건축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미적 효과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정신의 표현으로 고딕 건축양식과 더불어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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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르네상스 시대와 쇠퇴기(1419C)

르네상스 시기는 15세기, 16세기 중세에서 근세로의 전향기로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정신은 계몽주의 운동으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발생하게 되어 전 유럽으로 퍼져 시대적 정신으로 나타났다. 이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사고와 가치로 복귀하고자 했다. 즉 인간이 모든 사물의 중심이자 척도로 그리고 인본주의적 사고 경향으로 문화와 가치를 새롭게 부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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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대 정신의 변화 속에 경제와 관련하여 지배 계층과 문화 예술의 향유 계층이 달라졌다. 중세에서는 교회 지도자, 왕족, 귀족, 교회가 주도적이었지만 이 시기에서는 자본가 은행가들이 새로운 경제 계층으로 등장하여 문화와 예술의 향유, 후원 계층으로 점차 확대되고, 변화되었다. 예술의 내용과 양식에 있어서도 변화가 생겨 종교적인 내용과 양식에서, 세속적인 내용과 양식으로 변화한다. 또한 예술품은 교회 건축에서 제작 소유하는 대중적 예술품에서, 일반 가정에서도 제작, 소유하는 개인적인 예술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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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스테인드 글라스는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 고딕 시대의 건축양식의 여명으로 15, 16세기 활발히 제작되기는 하지만 점차 과도기를 맞게 되고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에 점점 쇠퇴하게 된다. 쇠퇴된 이유로는 건축양식의 변화, 유화와 벽화의 발달과 15세기 플랑드르 사실주의 회화의 영향, 에나멜 색소의 남용, 16세기 종교개혁과 그 이후 전쟁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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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양식의 변화는 수직에서 수평으로 변하여 중앙 축선에 의한 대칭적 구도의 그리스 십자가의 평면 형태로 바뀌었다. 첨탑은 하늘과 신을 상징하는 부드러운 돔으로 대체되었고 창은 벽의 구멍으로 취급하여 율동의 변화로만 생각하였다. 또한 채광층은 없어지고 높은 창을 통해 빛이 유입되었다. 이처럼 르네상스 시기의 건축은 고딕 건축과는 달리 거대한 창을 요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스테인드 글라스는 발달하기 힘들었고 쇠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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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시기에는 유화와 벽화의 발달로 교회건축 공간에는 유화와 벽화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많은 작업 시간과 고가의 재료비를 요구하는 스테인드 글라스 보다 유화와 벽화가 더 간편하였다. 그리고 15세기 플랑드르 사실주의 회화의 영향으로 스테인드 글라스는 사실주의적인 유화나 벽화의 모방형태로 변하였다.(도판11) 즉 패널 형식으로 유리판이 캔바스(canvas)로 그 위에 사실적인 회화표현을 하였으며 에나멜 색소의 혼용으로 색은 엷고 강렬하지 못하며 빛에 의해 색이 바래지는 등 색유리의 특성을 상실하게 된다. 또한 교회 건축물의 창은 점차 세속적인 성격이 짙어지고 고가인 스테인드 글라스는 가정내 건축에서 장식적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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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즘의 사고가 대두되어 교회 건축물의 창과 예술적인 귀중품들이 우상 숭배라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성서 이야기 대신 세속적인 주제가 애호되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하여 교회 건축물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파괴되어 더욱 쇠퇴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프랑스 에브뢰 대성당, 우룸 대성당에 있는 벳세라 예배당, 영국 성교회당의 보샹 예배당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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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흥시기와 현대시기(19C20C)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러 서구의 오랜 전통의 종교 미술의 양식이었던 스테인드 글라스는 20C의 미술양식, 건축 양식에 응용되어 현대 조형예술로 확대 발전하게 된다. 그것은 19세기말 유럽에서 시작한 아르누보운동으로 스테인드 글라스는 장식적 양식과 건축과의 조화 융합을 특징으로 다시 부활하기 시작한다. 이어 1920년대 바우하우스가 설립되어 교육과정으로 채택되고 활발한 작업을 하게된다. 또한 20세기 미술의 거장들이 스테인드 글라스 작업을 하여 그들의 회화양식을 반영하고, 응용하게 되었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현대 회화양식과 접목되어 건축에 설치된다. 더불어 2차 대전후 교회 건축붐이 일어나고 현대 건축양식과 접목되어, 건축의 공간예술로 더욱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현대 기술의 발달 등과 관련하여 다양하고 독특한 색유리 개발, 그리고 제작 기술이 발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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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 운동은 19세기 아카데미적 역사주의에 대한 반발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서유럽 전역에 넓게 퍼진 운동이다. 이는 장식적 양식을 특징으로 하며 윌리엄 모리스(Morris, William)를 시작으로 일어났다. 그는 당시 유럽의 장식 미술을 쇄신하고자 자신의 장식품 회사를 설립한다. 또한 건축을 통해 전체적 조화의 원칙에 따른 장식의 총체를 실현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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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스테인드 글라스 양식은 건축의 실내와 통합되어 장식적이며, 공예적인 양식으로 과거 중세 미술 모방이 아닌 실제적인 응용 미술분야에 전형으로 나타난다. 아방가르드 운동은 미술가와 장인간의 융합을 꾀하여, 예술적 창조와 기술의 조화를 이루려고 했다. 또한 아르누보 건축에 있어 스테인드 글라스는 빼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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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운동 아래 제작된 스테인드 글라스는 장식적 특징과 함께 납선을 단지 유리를 봉합하는 기능적 차원이 아닌 조형요소로 보아 스테인드 글라스의 또다른 양식 발전을 보여준다. 1885년경에 제작된 존라 파르그의 [공작새와 작약]은 아르누보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스테인드 글라스 양식을 잘 보여준다,(도판12)또한 엑토르 기마르의 [코일리오의 저택의 입구](1898-1900)의 작품, 그리고 스코트랜드 건축가인 맥킨토시의 [그라스 고우의 윌로움 티룸] 작품등에서 알수 있듯이 무채색 또는 유백색 유리로 면과 선의 자유로운 장식적 구성을 볼수 있고 중세와는 달리 납선은 중요한 조형요소로 작용한다. 또한 미국에서는 아르누보 작가인 티파니(Tiffany, Louis Comfort)가 오팔센트 유리를 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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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에는 아르누보 운동의 영향 아래 바우하우스가 설립된다. 이는 그로피우스가 독일에 설립한 종합 조형 학교로 건축을 주축으로 한 기능적이고 합목적 적인 새로운 미를 추구하여 예술과 기술의 종합을 이루고자 하였고 스테인드 글라스가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활발히 제작되었다. 공예를 다시 규합하고 건축을 통한 종합적이고 조화로운 예술을 하고자 함과 작가와 장인등 공동작업을 통해 작품을 미적으로, 기능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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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들어서 스테인드 글라스는 현대 미술과 접목되어 유명한 현대 화가들이 그들 각각의 독특한 미술 양식으로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을 하였다. 이는 스테인드 글라스 양식의 다양한 회화적 표현양식을 보여준다. 또한 건축물 속에 독립된 회화작품으로 보여주게 되고 동시에 현대 건축 공간예술로 자리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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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는 마티스, 샤갈, 루오, 레제, 브라크, 안토니오 타피에스 등, 현대 많은 작가들이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을 하였다 또한 스테인드 글라스 전문 작가로 요하네스 슈라이터와 게오르그 마이스터만, 마가렛 빌거, 마네씨에 등 이외 많은 전문 작가들이 활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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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현대 건축은 형식에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독창적으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신 공법, 신 재료를 응용하게 되고 이에 스테인드 글라스는 건축의 새로운 미디어로 그 가능성과 매력이 부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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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하여 스페인의 안토니오 가우디(Gaude, Antonio)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건축적 표현으로 적극 받아들여 추상에 가까운 스테인드 글라스를 제작했다.(도판21) 독일에서는 2차 대전후 교회의 건축 붐과 함께 교회 뿐 아니라 일반 건물에 독창적인 스테인드 글라스 창을 제작하였다. 1945년에 영국은 비종교적 스테인드 글라스 꽃을 피우게 되어 1970년대 브라이언 클락에 의해 건축적 스테인드 글라스를 출간하고 이를 작품으로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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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접어들면서 스테인드 글라스는 현대 작가들의 회화 양식이 표현되는 독립된 시각예술에서 부터 건축공간 예술, 현대 건축의 조형예술 영역까지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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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 대성당 장미의 창

 

 

노트르담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대표적인 것으로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들 수 있다. 초기 작품은 생드니대성당의 방사상제실군(放射狀祭室群)의 창문장식인데, 빨강·파랑·주황·녹색을 주조로 하는 그 수법은 파리(현재는 없음샤르트르(서쪽 정면)의 대성당에 전해지고, 또 서부 프랑스에서는 앙제·푸아티에의 대성당 등에 우수한 작품이 탄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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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가 되자 도상체계(圖像體系)도 풍부해지고 기술상으로도 자색을 주로 하는 배색이 세분화되어, 샤르트르대성당과 같이 넓은 공간이 천상적 분위기로 충만하게 되었다. 순수한 고딕건축의 도입이 적었던 이탈리아에서는 스테인드글라스 대신에 벽화가 발달하였다. 고딕풍의 줄무늬와 색채에 의하여 독자적 화풍을 확립한 시에나출신인 S. 마르티니는 시에나의 화풍과 파리의 고딕회화와의 매개자(媒介者)가 되어 이른바 국제적 고딕양식의 형성에 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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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고딕의 전통에서 출발하여 유채화의 연구를 거듭하고 근세회화로의 길을 확립시킨 것은 플랑드르출신의 반 아이크형제이다. 유명한 헨트제단화로 대표되는 여러 작품의 박진감 넘치는 묘사는 근세회화의 탄생을 뚜렷이 보여주는 동시에 중세적인 상징주의에 대한 집착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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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의 부흥(Gothic Revival)

프랑스, 체히, 버건디에서 일어난 고딕 미술 용어이다. 이 양식은 14세기 전반 아비뇽 법황청(法皇廳)에 시모네 마르티니가 초빙되어 전파케 된 시에나파()와 북방의 고딕 기법이 교류하여, 후기 고딕의 정교한 화려성이나 사실성과 시에나파의 정서 표현이나 설화성(說話性)이 혼합되었다. 아비뇽에 관계한 각지의 성직자에 의해 이 양식은 전유럽에 보급되어, 14세기로부터 15세기에 걸쳐 유행하였다. 랭브르 형제, 케른파의 로호나, 체코파의 화가들, 이탈리아의 우첼로, 안젤리코 등은 이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다. 이 경향은 조각에도 파급되었다.

 

중세적인 형태와 중세풍의 취미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관심에서 18세기에 시작된 고딕 양식의 부활. 일부는 문학에서 시작되었고, 또 부분적으로는 그 당시 널리 퍼져 있던 팔라디안의 엄격한 건축 디자인 규범의 파괴에서 시작도었다. 몇 개의 예외를 제외하고 초기에는 단지 고딕식 장식이 있는 그레고리안 건축이 그 표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의 양식은 종교적 부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푸긴과 같은 건축가는 그것은 '이교적인 르네상스양식과 반대되는 것으로 교회에 적합한 유일한 양식' 이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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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중세의 고딕 건축물을 조심스럽게 모방하며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대부분 14세기 건물을 모방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영국이나 그 이외의 또다른 진보된 중세 양식들이 유행하였다. 위리엄 버터필드, 스프리트와 같은 건축가들에 이놹해 고딕의 원칙들이 채택되었다. 그 외의 지도적인 건축가로는 길버트 스코트와 피어슨이 있다. 고딕 양식은 도시 및 상업건축을 포함하여 19세기 영구 건축을 휩쓸었다. 찰스 이스트레이크 경은 1871<고딕부흥의 역사>란 책에서 고딕 양식을 '영국에서 일어난 가장 널리 퍼지고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 운동'이라고 언급하였고, '조형예술에서 순수하게 영국적인 운동일 것'이라고 기술하였다.

 

6부 끝. 7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