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 미술, 3. 고딕 미술 (Gothic art) - 3

草霧 2013. 4. 25. 11:05

 

 

 

 

 

 

 

중세 미술 8

 

기독교 미술의 종합판

 

3. 고딕 미술 (Gothic art) - 3

 

 

 

중세 미술 1편을 참조 바랍니다.

 

B.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C. 그대는 어디 있는가 _ 건축과 조각, 미술 이야기

 

 

 

로마네스크 미술에 이어 12세기 중기에 그 싹이 터서 13세기에 프랑스·영국에서 명확한 양식이 확립되었다. 그 후 2세기 동안 서유럽 전체에 전파되어 더욱 발전·변화해서, 15세기 초부터 이탈리아에서 형성된 르네상스 미술이 대표하는 근세미술로 바뀔 때까지 존속하였다. 고딕이란 명칭은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인이 중세건축을 조야(粗野)한 만족(蠻族) 고트인(Goth )이 가지고 온 것이라고 비난한 데서 유래한 것인데, 19세기 이래 서유럽 중세미술의 한 양식을 가리키는 미술사상(美術史上)의 용어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중세미술에 명확한 형식을 부여한 것은 북프랑스였지만, 결국 전 서유럽적() 현상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고트인들은 이 미술의 형성에는 직접 관계가 없었지만, 약간 모멸적인 뜻으로 말한 것이 이러한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고딕 미술의 양식은 먼저 건축에서, 특히 성당 건축에서 실현되었지만, 여기에 어울려서 형성된 조각· 회화·공예에 대해서도 총괄적으로 이 양식의 명칭이 적용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고딕 미술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기독교 미술의 절정기의 양식이다. 높은 건물과 첨탑, 첨두 아아치로 수직적 상승감을 나타내는 건물 양식이 대표적이다. 또 건물에 좁고 긴 창문의 스테인드 글래스도 특징할 만하다. 대표적인 고딕 성당으로 아미앵 성당, 스테인드 글래스로 유명한 샤르트르 성당, 노트르담 성당, 랭스 성당, 퀼른 성당, 웨스트민스터 성당이 대표적이다.

 

   

고딕 건축의 특징은 두꺼운 벽에 의존하지 않고도 건축물의 구조가 수직으로 높이 올라갈 수 있게 되고 따라서 건물을 유지시키는 기둥과 골조구조사이에는 거대한 공간이 생겨나고, 이제 벽 위에 채색을 하던 벽화는 유리창에 채색을 하는 스테인드 글라스로 대체 되었다. 스테인드 글라스로 둘러싸인 고딕성당의 내부는 환상 그 자체였다.

 

 

 

1140년에 세운 생 드니사원의 예배당과 성가대석은 최초의 순수한 고딕 건물로 추정된다. 그 외의 순수한 고딕 건물로는 1163년에 시작된 파리의 노트르담과 브르주, 라용 등이 있다. 생 드니는 고딕 성당의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서쪽 정면은 장미창이, 서쪽 현관에는 신학의 교과 과정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아미엥 역시 순수한 고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를테면, 기둥은 네 부분으로 된 궁륭의 리브들과 연결되고 성가대석 주위의 회랑은 측랑과 이어지며 세 개의 입구가 있는 서쪽 정면은 네이브와 측랑의 윤곽을 반영한다. 영국에서 이러한 양상은 캔터베리 성당 성가대석에서 보여진다.

 

13세기초의 고딕 양식은 큰 교회당 양식을 중단하고 수도원 건축, 지역교구교회, 가정 건축에서 사용되는 요소들을 채택함으로써 국가별, 지역별로 다양해졌다. 건축은 고딕시대를 결정짓는 대표물로서 1140년부터 16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전형적인 고딕 조각의 발전은 렝스와 방베르 성당 조각들과 함께 13세기초에야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된다. 그 작품들은 고전적인 균형과 자연적인 것에 대한 충실함으로 특징 짓는데, 여기에서 로마네스크 건축 조각의 육중한 엄격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 기념비적이고 영웅적인 것으로부터 복잡하고 친밀한 것으로 발전하는데 비례는 과장되고, 감정은 강조되며, 콜로뉴 대성당 성가대석의 사도 인물상에서처럼 주름장식이 인체를 감싼다.

    

고딕 건축의 시초로 보는 12세기에 회화 범위는 제한되어 있었다. 사실상 벽 공간이 점차로 제거된 것은 회화를 위한 공간이 없는데서 연유한다. 그 대신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이 디자인과 색채계를 표현하였다. 고전적인 주름, 고딕적 흔들림과 같은 필사본의 서정적 세련성등은 전형적이고 새로운 특징으로 간주된다. 하인리히 폰 펠텍케의 에나이트, 브누아 드 쌩모아레의 트로이 로맨스등을 들 수 있다. 14세기에 둣치오의 시에나성당 마에스타에서 패널화가 일반화되었다. 14세기초 지오토로 시작하여 15세기말 로지에 반데르 바이덴이나 보티첼리로 회화의 발전은 집약되고 그 특징은 양식화, 선적인 특질, 고딕식 흔들림이라 할 수 있다.

    

중세기 문화는 그리스도교의 신본주의적인 사상에 입각한 신세계와 새낙원을 건설하려는 정신에서 발전된 것이며 자유정신이 넘치는 새 세계를 동경하여 발전된 것이다.

    

 

고딕(Gothic) 건축

 

12 16세기, 프랑스 북부지방에서 프랜치 노르만 건축이 발생하여 고딕양식의 기초

고딕건축은 로마네스크 양식을 더욱 엄격히 다루러 건축적 완벽성을 지향함으로서 종교적 신념과 사상 을 그대로 건축에 옮겨서 중세 교회건축 양식을 대성하였다.

고딕건축은 15세기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서부유럽과 북부유럽 전체에 전파되었다.

고딕 건축의 특성

- 사용 재료는 석재이며, 역사상 다른 시대보다 고도로 발달된 석공기술에 의해 성립

- 구조를 연구하여 합리적으로 구축되도록 석재를 자유로이 사용한 장점이 있다.

- 포인티드 아치와 리브볼트가 발달하여, 그 반경의 길이를 자유로이 가감할 수 있었고 정점의 높이조절과 횡력 작용을 수직으로 변환 시킬 수 있었다.

- 첨탑(Spire)과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의 발달로 횡력을 합리적으로 처리하여 그로 인해 Nave 외벽의 창호를 증대하였다.

- 구조적 완성을 통하여 건축 자체의 예술적, 종교적 내용이 합치된 건축표현을 할 수 있도록 발전하였다.

- 포인티드 아치, 장미창, 수직선을 강조한 앙천적 경향

- 수직선을 의장의 주요소로 하늘을 지향하는 종교적 신념과 그 사상을 합리적으로 반영시켜 교회건축의 양식을 대성시켰다.(수평적 분절 억제, 수직적 분절 강조)

- 고탑과 하늘을 지향하는 포인티드 아치와 수직선이 고딕시대의 교회건축과 일반건축의 의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 주벽의 개구부가 확장되면서 원화창, 차륜창 및 창살(Tracery)이 다양하게 발전함.

- 개개 형태의 미적 통합을 중시

- 자연을 사랑하고 이것이 갖는 자연적 형태(자연곡선을 많이 사용)

- 조각 장식이 많이 사용

- 성당의 정면이 서측으로 하며 서정면의 쌍탑구성이 확립됨.

- 평면은 라틴크로스가 많으며 서측을 정면으로 하고 동측에 성소(Sanctray)를 두었다.

- 파리 노틀담(Notre Dame) 사원 : 프랑스 고딕의 가장 우수한 건축이며 대표적 건축

- 아미앵(Amiens) 사원 : 고딕건축중 가장 대표적 사원(고딕의 파르테논 이라 칭함)

- 솔스버리(Salisbury) : 영국 고딕의 대표, 탑은 중세건축에서 최고 높이

- 퀄른(Kgin) 사원 : 북유럽 최대 사원

  

 

 

 

 

건축

 

 

 

생드니 대수도원장 슈제르가 이 수도원 재건에 즈음하여, 전유럽에서 건축가·조각가·공예가를불러 모아 고딕양식의 종합적 완성을 이루었다(1144년 성당 祭室部 완성). 건축에 중점을 두었으며 로마네스크의 반원아치에 대하여 첨두(尖頭)아치, 복잡한 교차궁륭, 밖에서 건물을 지탱시켜 주는 버팀벽 등을 짜맞추어 벽체를 극도로 줄이고, 가볍게 하늘을 향해 뻗어나간 독특한 성당양식을 완성하였다. 두터운 벽 대신 찬란한 색채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건물을 둘러싸 성당 안을 빛으로 채웠다.

 

처음에는 건축에 종속되어 있던 조각도 차츰 벽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스러운 3차원의 표현을 하게 되었다. 랭스대성당(1211년 기공)처럼 성 토머스의 신학체계와도 닮은, 정밀하고 광대한 도상학적(圖像學的시각적 체계 가운데 새로운 인간주의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건축의 스콜라적 복잡성이 쇠퇴하고 대신에 벽면을 중심으로 한 회화가 1270년 무렵부터 급속히 발전하면서, 14세기 전반에는 플롯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근세미술로의 선구적 비약을 성취하였다. 조토 디 본도네가 그린 스크로배니가()의 예배당 벽화(1310년경) 등이 그것이다.

 

15세기에 들어서면 프랑스의 화염(火炎)양식과 영국의 수직양식 등 화려한 장식적 경향이 나타나, 조각·회화에도 말기로 갈수록 섬세한 정서적 요소가 강해졌다. 프랑스 북부에서 발생한 고딕양식은 인접한 여러 나라로 전파되었는데, 각 지역에 따라 각각 독자적 양상을 보이면서 발달하였다. 영국에서는 13세기 초기부터 링컨·졸즈베리·요크 등의 대성당이 조영되었는데, 프랑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명쾌한 비례와 단순한 비례로 얼리 잉글리시(초기 영국식)라는 독자적 양식을 확립하였다.

 

이탈리아의 건축가는 프랑스 고딕양식이 달성한 수직성을 강조하는 구조체계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바실리카식에 가까운 양식을 고집하였다. 독일의 세발구스 성당, 퀼른 성당, 영국의 솔즈버리 성당, 글로우체스터 성당, 웨스트민스터 성당과 이탈이라의 밀리노 대성당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구조 기술상(構造技術上)3요소, 즉 지골궁륭(支骨穹:ribbed vault), 버팀도리[飛樑:flying buttress], 첨두(尖頭) 아치에 단적으로 보인다. 이것들의 조직적인 적용으로 말미암아 형태에 있어서는 앙고성(仰高性) 또는 상승감(上昇感)이 강조됨과 함께, 구조상에서는 사압력(斜壓力)이 크게 경감된다. 3가지 요소는 이미 로마네스크 건축에도 있었다. 이런 것은 동방 기원(東方起原)임이 틀림없다. 1213세기 북프랑스의 한 건축가는 이 가구(架構)에 편리하고 강한 궁륭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이것을 제1전제(前提)로 해서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가면서 차례를 따라 새 양식의 실현을 추진해 나갔다. 새로운 성당 건축형식은 합리적인 탐구와 실제적인 기술적 수련을 쌓아서 실현된 것이다.

 

고딕 건축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과제는 벽체의 양괴성(量塊性)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벽체는 엷어지고 창의 면적을 확대해 갔으나, 이 취약화된 벽체를 역학적(力學的)으로 보호하기 위하여 지골궁륭을 적용하였다. 이 구조에 따르면 궁륭의 무게가 지골(支骨:rib)에 의해 지주(支柱)에 집중되기 때문에, 벽체는 거의 중량을 받지 않게 된다. 더욱이 외벽에는 벽에 따라 부벽(扶壁:buttress)이 줄지어 서 있어서, 지주에 걸리는 사압력을 외부에서 받쳐주고 있다.

 

또 궁륭·입구·창 등에서 로마네스크에서는 반원형 아치를 썼지만, 고딕에서는 첨두형 아치를 쓰게 되어, 첨두의 각을 넓히거나 좁혀서 넓이와 높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성당 안의 공간 구성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게 되었다. 12세기 중엽에 이미 지골궁륭의 합리적 적용, 높은 비례의 복합주(複合柱)나 창, 내진회랑(內陣廻廊)의 해방된 공간 등 고딕적 건축 사고(思考)가 이미 나타났다. 그러나 아직도 거기에는 로마네스크적인 점이 적지 않아, 과도기적 성격을 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때의 미술을 초기 고딕미술이라고 한다.

 

13세기에서는 고전적 고딕 성당들이 지어졌다. 창이 높아지며 채광(採光)을 풍부하게 하고, 전체로서 상승효과를 강하게 나타내어, 세련된 건축기술을 과시하는 레요낭양식(rayonnant style)이 퍼졌다. 1415세기에는 후기 고딕 성당들이 건축되었고, 창의 디자인은 물결 모양을 이어 불꽃 모양을 나타내는 플랑부아양양식(flamboyant style)이 유행하여 도시계획에 많이 사용되었다. 이탈리아의 고딕 건축은 전통적인 바실리카형식이 존속하여, 궁륭은 낮고 창은 적어 고딕 특유의 경쾌한 상승감이 적고, 벽면이 넓어 자연히 내벽은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된다. 이탈리아에서는 예외적인 외관구성(外觀構成)을 보이는 밀라노대성당은 주로 북유럽 건축가의 손으로 지은 것이다.

    

 

독일은 최초에 북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14세기 이후에는 독일의 독특한 형식인 할렌키르헤(Hallenkirche)가 추진되었다. 이것은 신랑(身廊)과 측랑(側廊)의 궁륭 높이를 균일하게 하고, 성당 내부를 높은 창에 둘러싸인 단일 공간으로 통일하는 것이다. 에스파냐에서도 당초에는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거기에 이슬람계 양식이 섞여 들어가 에스파냐 특유의 무데하르 형식이 형성되었다. 영국에서는 프랑스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영국 고유의 양식이 확보되어 있어서 13세기의 초영식(初英式:early English), 14세기의 장식식(裝飾式:decorated style), 14세기 이후의 수직식(垂直式:perpendicular style)이라고 하는 양식으로 그 발전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또 후기 고딕 건축에서는 교회 건축 이외에 플랑드르 및 이탈리아 북부에 발달한 시청사(市廳舍)나 저택 등의 세속적 건축에도 이것이 쓰였다.

 

 


 

 

 

사르트르 대성당(Chartres Cathedral) /프랑스 파리

 

 

사르트르는 프랑스 본느지방의 우르..르와르현의 도시. 엣적엔 카르누트인이 스도로 삼았으며, 드뤼두신앙의 중심지. 4세기에 로마신전의 자리에 최초로 세워진 기독교성당은 743년에 소실. 스 후 네 번이나 화재를 만나 12세기 초 사교 휘르베르가 세운 다석번째 건축의 지하성당과 서정면의 탑만이 남아 있다. 현존하는 <노트르담 대성당>1194년 화재 후에 재건되 프랑스. 고딕최성기의 대표적 교회당이며, 특히 성모숭배가 성행한 중세시대에는 많은 순례자를 끌어 들였다. 서정면의 <왕의 문>, 서정 부의 13세기 전반의 것. 1260년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성패아 예배당>14세기, <성반돔 예배당>15세기의 것.

 

 

북탑의 첨답부분은 쟝.텍셰..보스(1507-13)의 작. 남과 북의 익랑입구문의 조각은 13세기 전반의 이상주의, 사실주의가 반반 혼합된 작품의 우수작 스테인드 글라스 중 서정면의 세 개의 대창과 <아름다은 그림유리의 성모>12세기 후반 것이고 다른 모든 창의 것은 13세기 초두부터 중엽에 걸쳐 제작되었다. 이회에 샤르트르에는 11세기의 <.브리스.>,12세기의 <.탕드레> 12-3세기의 <.패르..발레수도원>의 각 성당이 있다.

    

플라잉 버트레스라고 하는 정교한 버팀 구조가 벽을 밖에서 지탱해 준다. 한편, 벽체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외벽에 이어서 만들어진 버팀벽[控壁]과 버팀도리는 스테인드글라스에 의한 채광면의 확대에 유익한 동시에 고딕건축상 외관구성면의 한 특징이 되었다. 이 여러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채택하여, 12세기 중기에 생드니수도원이 개축되었고 이어서 상스··파리 등에 대규모의 성당이 잇따라 기공되면서 초기 고딕양식이 확립되었다.

    

http://blog.daum.net/sunghwa/5599083

 

 

 


 

 

 

노트르담 대성당/파리 (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

 

 

프랑스의 고딕 건축의 대표작. 시테섬의 갈로로망신전에 있던 장소에 로마네스크기 이전부터 성당이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의 것은 사교 모리스..쉴 리가 1163년에 기공. 내진은 1182년에 헌당.신랑 정면과 측면의 피사드와 쌍탑은 1250년 완성. ..셀 및 피에르..몽트뢰유가 13세기 말에 외진을 완성, 내진에 제제실을 추가. 두부의 제실은 14세기 초에 피에르.., 이어서 쟝.라뷔에 의해 건설되었다. 건축외에 현관문의 조각군(12,3세기 단 복원부분이 많음), 19세기에 수복된 남북의 대장 미창의 스테인 글라스(1220-25)가 중요하다. 건물은 프랑스 대혁명때에 파괴, 개변을 입었으나 1845년부터 비올레..뒥 둥에 의해 수복되었다.

 

 

프랑스 파리의 시테 섬의 동쪽 반쪽에 있는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이 대성당은 지금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 건물로서 파리 대주교좌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흔히 프랑스 고딕 건축의 정수로 이야기된다. 이 대성당은 프랑스의 유명한 건축가인 비올레르뒤크에 의해 파괴된 상태에서 보호되어 복구되었다. “노트르담우리의 귀부인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다(성모 마리아를 의미함).

 

노트르담 대성당은 최초의 고딕 성당 가운데 하나이며, 고딕 전 시대에 걸쳐 건설하였다. 대성당의 조각들과 스테인드글라스는 자연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는 초기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부족한 세속적인 외관을 더해준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세계에서 최초로 벽날개를 사용한 건물이기도 하다. 이 대성당은 원래 성가대석과 중랑(中廊) 주변에는 벽날개가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공사가 시작되고 (고딕 양식에서 유행한) 꽤 얇은 벽들이 점점 높아지면서 커다란 균열이 벽이 밖으로 밀릴 때 생겼다. 그래서 성당의 건축가들은 바깥벽 주변에 지지벽을 만들었고, 그 뒤에 비슷한 방법으로 추가되었다.

    

 

1790년경 프랑스 혁명의 급진적인 시기에 노트르담 대성당은 반기독교 사상에 의해 모독을 당했으며, 많은 성상이 손상되거나 파괴되었다. 19세기에의 다방면에 걸친 복원 작업이 완료되어 대성당은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1905년에 프랑스에서 제정된 정교분리법에 따라 프랑스 왕국이 세운 다른 성당들과 같이 노트르담도 정부에 귀속되었으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성당으로 사용하는 것은 승인되었다. 파리에서 시작하는 고속도로에서 거리를 나타내는 참고점인 프랑스의 도로원표(Point zéro)가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 있는 광장에 있다.

 

19세기 초에 대성당은 황폐한 상태였으며, 도시계획가들은 노트르담의 철거까지 고려했다. 프랑스의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는 이 대성당의 찬미자로 대성당의 전통을 일깨우기 위해 파리의 노트르담(노트르담의 꼽추)를 썼는데, 이 소설은 대성당의 운명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호하기 위한 기금을 모으는 운동이 이어졌고, 결국 1845년에 복원이 되었다.

 

대성당의 맨 위에는 13개의 변색된 조각상들이 있다. 그들 중 12개는 열두 사도를 나타낸 것으로 바깥을 향하고 있으며, 나머지 하나는 건축가 자신의 조각상으로 안쪽을 향하고 있으며 그의 팔을 뻗고 있다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h%C3%A9drale_Notre-Dame_de_Paris?uselang=ko

http://ko.wikipedia.org/wiki/%EB%85%B8%ED%8A%B8%EB%A5%B4%EB%8B%B4_%EB%8C%80%EC%84%B1%EB%8B%B9_(%ED%8C%8C%EB%A6%AC)

 

 

 


 

 

 

시에나 대성당(Duomo di Siena), 12세기 무렵

 

 

 

고딕양식이 그 돌파구를 여는 것은 성당건축에서인데, 건축가들에게 최대의 난제가 된 것은 점차로 높이를 더해가는 석조궁륭(볼트)의 가구법(架構法)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구조상의 안정을 확보하면서 상승성(上昇性)을 유지하는 형태를 나타낸 것은 리브(늑골상아치)궁륭과 첨단(尖端)아치이다. 리브궁륭은 밀라노의 성암브로지오성당과 잉글랜드 북부 다람대성당의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최초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북프랑스로 전해져서 12세기 전반에 최초의 고딕식 성당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교차궁륭의 양선(梁線)에 이어서 대각선을 이루는 리브는 궁륭의 중량을 분산시켜 이것을 지주로 유도함으로써, 벽체에 가해지는 횡압(橫壓)을 줄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 리브의 채택으로 건축규모의 확대뿐만 아니라, 궁륭에서의 복잡한 역선(力線)을 명확하게 시각화하며, 합리적인 질서를 갖춘 건축구성을 실현시켜 갔다.

    

 

첨두아치를 사용한 건축디자인은 이슬람건축에서 그 원류(源流)를 찾을 수 있는데, 이슬람의 영향 아래 조영(造營)된 시칠리아섬과 남이탈리아의 성당건축이 매개가 된 것인지, 혹은 십자군이 가져온 것인지, 그 경로는 명확하지 않다. 리브궁륭이 발전결합된 첨두아치의 주제는 궁륭의 교차부는 물론, 입구·창 기타 모든 아치구조에 적용되었다. 첨두아치의 각도는 역학상의 해결법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는데, 이것에 의해서 성당의 구조변경도 자유롭게 되었다.

 

 

 


 

 

 

랭스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Reims) 내부, 121141, 프랑스 랭스

 

 

12세기의 고딕성당에는 아직 로마네스크적 성격이 남아 있었는데, 고딕적 요소를 거의 완전히 구비한 것은 13세기 초기에 착공한 샤르트르·랭스·아미앵의 대성당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B%9E%AD%EC%8A%A4_%EB%8C%80%EC%84%B1%EB%8B%B9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Cath%C3%A9drale_Notre-Dame_de_Reims?uselang=ko

    

 

 


 

 

 

꼴로뉴, 퀼른 대성당 (Kölner Dom, Hohe Domkirche St. Peter und Maria)

 

 

독일에서는 국경에 접한 프랑스 각지로부터 고딕양식을 받아 들였는데, 특히 퀼른과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서 프랑스양식이 두드러진다. 한편, 독일의 건축가들은 프라이부르크와 울름의 대성당에서 나타나듯이, 쌍탑형식을 배제하고 접면 중앙에 1기의 대탑을 두었고 또한 성당 안에 단일공간을 만드는 할렌키르헤(Hallenkirche)의 형식을 개발하였다.

 

이 성당은 독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건축물이며,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쾰른 대성당을 일컬어 인류의 창조적 재능을 보여주는 드문 작품이라고 묘사하였다. 높이 157.38미터로,[3] 울름 대성당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는 세 번째로 높은 로마네스크·고딕 양식 성당이다. 신성 로마 제국 시절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가져온 동방 박사 3인의 유골함을 안치하기 위한 건축물로서 1248년부터 짓기 시작했다. 대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설계되었으나, 오랜 건축 기간을 거쳐 결국 1880년에 네오 고딕 양식으로 완공되었다. 완공 이후 1884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쾰른 대성당은 세계적으로 가장 큰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많은 예술역사학자들은 이 대성당을 후기 중세 고딕 건축물의 완전 품이자 보석이라고 표현하였다.[1] 쾰른 대성당이 13세기 중세시대에 착공되어 19세기가 되어서야 완공되었다는 사실로 왜 그러한 극찬이 나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성당은 개성 있는 거대한 두 개의 탑 때문에 거대한 외양을 갖추고 있는데, 원래 이 두 개의 탑은 1814년에 설계가 변경되어 네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19세기 산업 혁명으로 발명된 증기 기관의 힘으로 지어질 수 있었다.

 

쾰른 대성당은 1996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두 개의 탑을 포함한 서쪽 전면의 거대한 면적은 무려 약 7,100m²에 달한다. 1880년부터 워싱턴 기념비가 새워진 1884년까지 4년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4] 2004년까지 세계 곳곳에서 온 약 5백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갈 만큼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이다. 20058월에는 독일 출신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세계 청년 대회를 맞아 성당을 방문하였다.[5]

 

쾰른 대성당은 원래 건축 재료인 조면암의 색에 따라 하얀색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폭격과 매연으로 검게 변했다. 현재 쾰른 시는 쾰른 대성당을 보수하고 변색을 복원하는 작업에 있다.

 

쾰른 대성당은 1996년 유네스코에 유럽의 고딕 건축 걸작으로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00475일에는 "성당의 라인강 건너편 지역(도이츠)에 대한 쾰른 시의 도시 계획으로 경관을 훼손할 가능성"이 제기되어 '위험에 처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45] 2005713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유네스코 정례 회담에 따라 결국 '위험에 처한 세계 문화유산'에서 해제되었으며 유네스코의 독일 사무국은 2005년 말까지 도이츠지역의 녹지를 더 늘릴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그다음 해에도 그 지역에는 여전히 새로운 건축물 공사들이 계획되고 있었다.

 

20067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열린 30일간의 유네스코 국제위원회는 쾰른 대성당을 문화유산 목록에서 제외하겠음을 시사하였다. 결국, 시 당국에 의해 건설 계획은 대대적으로 변경되어 쾰른 대성당을 중심으로 엄격한 고도 제한을 시행함으로써 논란을 잠재웠다.

    

http://ko.wikipedia.org/wiki/%EC%BE%B0%EB%A5%B8_%EB%8C%80%EC%84%B1%EB%8B%B9

 

 

 


 

 

 

팔라초 푸블리코Palazzo Publico, 시청사, 12891342와 만저탑 (Torre del Mangia, 1349, 시에나

 

 

 

13세기 중기 이후 시에나·피렌체·오르비에토 등의 대성당이 고딕양식으로 건축되었는데, 리브궁륭은 도립에서는 구조적인 의도보다도 장식적 효과가 중시되었다. 우아한 고딕 건물인 푸블리코 궁전을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광장으로 해마다 72일과 816일 두 차례 이 곳에서 시에나의 전통 경마 경기인 팔리오 축제가 열린다.

 

11세기부터 계속되고 있는 토스카나 지방의 가장 유명한 축제인 팔리오 축제는 안장 없이 말을 타는 독특한 승마경주로 정작 경주는 불과 1분도 안될 정도로 짧지만 그 열기만은 대단하다. 경기 전 화려한 깃발 던지기 대회가 펼쳐지고 축제기간 동안은 중세복장을 입은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져 좁은 캄포광장은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열광의 도가니로 변한다.

    

 

고대로마의 공회당 부지였던 이 광장은 원래 시장이 열리던 곳이다. 1327년 시작된 붉은 벽돌을 까는 도로포장공사는 1349년에 완공되었는데, 광장을 아홉개의 특색있는 구역으로 나눠 아홉 의회의 권위를 반영하고 성모 마리아의 망토가 지난 주름을 상징한다고 한다.

 

 

 

 

 

 

 

 


 

 

밀라노 대성당 (Duomo di Milano) 파사드, 1386

 

 

밀라노대성당에는 알프스를 경계로 한 남북유럽의 양식관(樣式觀)이 절충되었으며, 외관은 강한 인상을 준다. 이탈리아에도 북유럽에서 볼 수 있는 고딕양식의 교회당이 있는데, 밀라노대성당(Duomo)이 그것이다. '두오모'는 밀라노공국의 세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지어진 것이다. 공사는 1386년에 시작하여 16세기까지 계속되었고, 정면은 19세기초 나폴레옹의 명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북유럽의 예술적 업적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들의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밀라노 대성당의 비례는 전적으로 이탈리아적인 것으로 높이에 비해 폭이 넓다. 이러한 비례체계는 내부공간을 고대 신전이나 독일의 홀교회당(본 연재 27, 2002119일자 참조)처럼 하나의 공간을 만드는데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또 고창의 크기도 무척 작다. 이탈리아에서는 북유럽에서처럼 큰 창을 필요로 하지도 않지만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 가기 위함에 있었다.

    

촘촘히 세워진 신도석의 기둥에는 각기 8개의 조각들을 올려놓은 커다란 기둥머리(柱頭)가 있다. 이들은 중첩된 아치들의 배경 속에서 연속적인 띠를 이루어 마치 고전건축의 들보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체 분위기는 후기고딕 양식이다. 그 분위기는 구조체계에서 보다는 표면장식과 세부처리에서 더 뚜렸하다. 장식적으로 사용되어진 공중 버팀벽이 그 한 예이다. 숲처럼 무성하게 치솟은 첨탑들 역시 구조적 필연성보다는 18세기와 19세기에 장식으로 덧붙여진 것이다.

 

이런 요소들로 통합된 밀라노 대성당은 화려한 레이스를 입은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느낌은 대리석판을 깔아놓은 완만한 경사 지붕 위를 거닐 때에도 체득된다. 더욱이 해질녘 하얀 대리석에 반사되는 빛과 어우러진 성당의 조형미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생드니 수도원(Abbaye Saint-Denis )

 

 

최초의 고딕건축으로 알려져 있으며, 왕권신장의 일환으로 일 드 프랑스에 세워졌다. 현재는 부속 성당만 남아 있는데, 1966년에 대성당(Cathedrale)이 되었다. 475년경 파리의 초대 주교였던 드니의 묘 위에 성당이 세워졌는데, 거기에 627년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 다고베르트 1세 때에 수도원도 세워졌다.

    

카롤링거 왕조 때에는 서(西)프랑크 국왕 카를 2(재위 843877)의 비호로 크게 번영하여 사경소(寫經所)의 사본(寫本) 삽화를 비롯하여, 장식용 금공예품의 제작으로 당시의 유럽 미술의 중심을 이루었다. 이 후 수도원장 쉬제르(10811151) 때 새 양식에 따라 개축되어 프랑스 고딕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 뒤 13세기 중엽에 당시의 건축가 피에르 드 몽트뢰유에 의해 성기(盛期) 고딕 양식인 현재의 것으로 개축되었다. 17세기까지의 역대 프랑스 왕의 묘소가 성당 안에 있는 유서 깊은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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