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 미술 , 3. 고딕 미술 (Gothic art) - 5

草霧 2013. 4. 27. 13:11

 

 

 

 

 

 

중세 미술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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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미술의 종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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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딕 미술 (Gothic art)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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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미술 1편을 참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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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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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그대는 어디 있는가 _ 건축과 조각, 미술 이야기

 

로마네스크 미술에 이어 12세기 중기에 그 싹이 터서 13세기에 프랑스·영국에서 명확한 양식이 확립되었다. 그 후 2세기 동안 서유럽 전체에 전파되어 더욱 발전·변화해서, 15세기 초부터 이탈리아에서 형성된 르네상스 미술이 대표하는 근세미술로 바뀔 때까지 존속하였다. 고딕이란 명칭은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인이 중세건축을 조야(粗野)한 만족(蠻族) 고트인(Goth )이 가지고 온 것이라고 비난한 데서 유래한 것인데, 19세기 이래 서유럽 중세미술의 한 양식을 가리키는 미술사상(美術史上)의 용어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중세미술에 명확한 형식을 부여한 것은 북프랑스였지만, 결국 전 서유럽적() 현상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고트인들은 이 미술의 형성에는 직접 관계가 없었지만, 약간 모멸적인 뜻으로 말한 것이 이러한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고딕 미술의 양식은 먼저 건축에서, 특히 성당 건축에서 실현되었지만, 여기에 어울려서 형성된 조각· 회화·공예에 대해서도 총괄적으로 이 양식의 명칭이 적용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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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미술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기독교 미술의 절정기의 양식이다. 높은 건물과 첨탑, 첨두 아아치로 수직적 상승감을 나타내는 건물 양식이 대표적이다. 또 건물에 좁고 긴 창문의 스테인드 글래스도 특징할 만하다. 대표적인 고딕 성당으로 아미앵 성당, 스테인드 글래스로 유명한 샤르트르 성당, 노트르담 성당, 랭스 성당, 퀼른 성당, 웨스트민스터 성당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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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0년에 세운 생 드니사원의 예배당과 성가대석은 최초의 순수한 고딕 건물로 추정된다. 그 외의 순수한 고딕 건물로는 1163년에 시작된 파리의 노트르담과 브르주, 라용 등이 있다. 생 드니는 고딕 성당의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서쪽 정면은 장미창이, 서쪽 현관에는 신학의 교과 과정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아미엥 역시 순수한 고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를테면, 기둥은 네 부분으로 된 궁륭의 리브들과 연결되고 성가대석 주위의 회랑은 측랑과 이어지며 세 개의 입구가 있는 서쪽 정면은 네이브와 측랑의 윤곽을 반영한다. 영국에서 이러한 양상은 캔터베리 성당 성가대석에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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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초의 고딕 양식은 큰 교회당 양식을 중단하고 수도원 건축, 지역교구교회, 가정 건축에서 사용되는 요소들을 채택함으로써 국가별, 지역별로 다양해졌다. 건축은 고딕시대를 결정짓는 대표물로서 1140년부터 16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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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고딕 조각의 발전은 렝스와 방베르 성당 조각들과 함께 13세기초에야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된다. 그 작품들은 고전적인 균형과 자연적인 것에 대한 충실함으로 특징 짓는데, 여기에서 로마네스크 건축 조각의 육중한 엄격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 기념비적이고 영웅적인 것으로부터 복잡하고 친밀한 것으로 발전하는데 비례는 과장되고, 감정은 강조되며, 콜로뉴 대성당 성가대석의 사도 인물상에서처럼 주름장식이 인체를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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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건축의 시초로 보는 12세기에 회화 범위는 제한되어 있었다. 사실상 벽 공간이 점차로 제거된 것은 회화를 위한 공간이 없는데서 연유한다. 그 대신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이 디자인과 색채계를 표현하였다. 고전적인 주름, 고딕적 흔들림과 같은 필사본의 서정적 세련성등은 전형적이고 새로운 특징으로 간주된다. 하인리히 폰 펠텍케의 에나이트, 브누아 드 쌩모아레의 트로이 로맨스등을 들 수 있다. 14세기에 둣치오의 시에나성당 마에스타에서 패널화가 일반화되었다. 14세기초 지오토로 시작하여 15세기말 로지에 반데르 바이덴이나 보티첼리로 회화의 발전은 집약되고 그 특징은 양식화, 선적인 특질, 고딕식 흔들림이라 할 수 있다.

 

 

회화

 

 

사실적 경향의 발달과 더불어 순수한 공예는 사양화(斜陽化)하나 사본류는 13세기의 파리를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교회에 귀속하는 것보다 귀족의 주문에 의한 것이 많고 랭부르 형제의 작품인 <베리 공()의 호화로운 기도서(祈禱書)>는 그 좋은 예이다. 특히 그 웃머리를 장식하는 저명한 12개월의 달력에 그려져 있는 농민의 풍속과 풍경 부분은, 회화에 있어서의 자연미의 발견으로서 특기할 만한 것이다. 성채 건축(城砦建築)14세기 이후 발달되어 넓은 홀을 의식하는 미술로서 태피스트리가 등장하였다. 또 북부 지방의 교회에서는 판화 형식의 제단화(祭壇畵)가 요청되게 되었다. 북프랑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고딕 회화는 후에 플랑드르파()의 탄생을 맞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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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회화의 대표적인 것은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이다. 고딕 성당 건축에는 창문이 많고 벽면이 적어서, 자연히 스테인드 글라스의 발달이 싹텄다. 간단한 것은 카롤링왕조 후기에도 있었고 12세기 전반기에도 있었으나, 12세기에 들어와서 고딕 성당 건축이 발달하면서 개화하게 되어, 맑은 청색과 강한 붉은 색의 배색이 훌륭하였고, 화상(畵像)도 점차 인간적 감정을 여유 있게 나타내게 되었다. 13세기에는 전성기에 달하여, 데생(dessin)은 자연스러움이 더해지고, 힘을 잃지 않았으며, 배색도 더욱 섬세해지고 그림에도 깊이가 더하게 되었다. 당시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오늘날에도 많이 보존하고 있는 샤르트르 대성당의 장관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여러 여러 빛깔의 유리 조각을 H자형 납테에 끼워, 창문 전체를 종교적 화상으로 메운 이 스테인드 글라스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통해 들어오는 광선의 영롱함은 이 성당 안을 완전히 종교적인 법열(法悅)로 채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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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왕성(王城) 안의 상트 샤펠은 4면이 모두 창인데, 모두 스테인드 글라스로 된 성당이다. 이런 추세는 13세기 중기 이후, 제작을 서둘러 장식 효과는 아름다우나 깊이가 없어지게 되었다.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에 걸쳐서 무색(無色) 유리에 단색 데생의 그리자유(grisaille) 수법이 나타났고, 한편 유색(有色) 유리는 회화(繪畵)의 영향으로 색조(色調)의 뉘앙스는 풍부하게 되었지만, 빛의 예술인 본래의 성질은 약화되었다. 회화 부문에서 스테인드 글라스와 같이 다루어야 할 것은 사본장식(寫本裝飾)의 삽화인 미니어처(miniature)이다. 로마네스크 회화나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받아들여 인간상을 자연의 모습에 가깝게 해서, 인간적 감정의 분명한 모습을 그려낸 것은 13세기 초의 영국과 프랑스의 미니어처였다. 이것은 뒤에 건축의 호화스러운 액자에 끼워졌다가 13세기 후반부터는 왕후의 사치스러운 생활환경을 반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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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장식의 대표적 화가 장 퓌셀의 화풍은 파리 양식으로서, 당시의 고딕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3세기 후반에 나타나는 서민적인 사실주의는 매너리즘(mannerism) 속에 사멸하는 고딕 회화를 구하게 되었다. 이것을 14세기 후반부터 활약하는 네덜란드 출신의 예술가들이 이어받아 사실주의를 착실하게 추진해 나갔다. 이탈리아에서의 고딕 건축은 알프스 이북의 건축과는 다소 달리, 창이 적고 벽면이 더 커서 벽화제작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13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우수한 화가들이 활약하여 14세기 미술의 방향을 크게 돌려놓았다. 이것은 15세기의 르네상스 미술로 그대로 이어졌다. 특히, 조토(Giotto di Bondone)가 그린 인간상은 그 때까지 보지 못하던 힘찬 양감(量感)과 움직일 듯한 기운이 있어서 거의 조상(彫像)과 같은 인체인데, 북프랑스 성당의 고딕식 부조군(浮彫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14세기 이탈리아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셰나 화가들로, 저마다 걸작을 이 도시에 남겼다. 이들의 활약으로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초에 걸쳐서, () 유럽적 유행을 보인 고딕 국제양식이 탄생하였다. 벽면이 없는 북방 고딕 건축은 벽화의 발전이 그리 성하지 못하였으나, 직물화(織物畵)로서 북프랑스와 플랑드르 지방에서 왕성하게 만들어졌다. 그 내용은 종교적·사전적 제재(史傳的題材)나 그 밖의 당시 풍속을 다룬 것들도 있어서 흥미롭다. 14세기경부터 종이가 생산 보급되기 시작하자 판화도 유행하였으며, 또한, 남부 독일을 중심으로 목판화가 나타났고 얼마 뒤에는 동판화까지 나타나는 등 각지에서 여러 형태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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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는 이탈리아의 프레스코화나 제단의 패널화에서 후기 고딕양식으로 전대되어 르네상스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밖에 필사본 채색, 세밀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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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신> 13세기 아미엥 성당

 

아미엥 성당에 있는 아름다운 신의 이미지에 나타난 얼굴과 12세기 성 클레멘트에 그려진 전능하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비교하면 13세기 기독교 사회의 급진적 변화를 이해하기 쉽다. 이곳의 신은 두려움의 대상이기보다는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는 인간화된 신이다. 고딕의 미술가들은 위대한 신의 개념화 조차도 심미적으로 기쁨을 주는 인간의 이미지를 통하여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결과 고딕의 조각과 회화는 더욱 자연적인 성격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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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고딕회화는 다른 유럽 회화 양식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중 피렌체 화파의 지오토(1266~1334, 치마부에의 제자)는 원근법에 의한 깊은 공간감과 인체에 중량감을 줌으로써 회화에 시각적실재감을 나타낼 수 있었다. 지오토 이후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중세의 평면적인 회화에서 벗어나 현실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표현기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고전적 원근법과 훨씬 부드러워진 형태묘사로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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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애도> 1306년경. 지오토

 

당시 사람들은 지오토의 그리스도의 애도를 보고 그 사실성에 깜짝 놀랐다. 중세의 설명적 작품에 비해 지오토의 작품은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게 그려냈던 것이다. 지오토를 서양 미술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회화에서 주제와 양식의 문제를 방법론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르네상스 회화 탄생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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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치오<마에스타>

 

 

목판에 템페라화로 그린 것이다. 호테게트리아 (Hodegetria, 왼팔에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의 유형)형식을 나타내고 있는 이 그림은 '사크라콘베르사치오네'(Sacra conversazione) , 마리아와 성자들 사이의 '성스러운 대화'라는 회화유형이 생겨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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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부에 (Cimabue, 1240? ~ 1302?)

 이탈리아 피렌체화파의 시조. 조토의 스승이라고 하나 확증은 없다. 조토 이전의 화단에서 이름을 떨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작품으로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에 있는 성삼위일체의 성모, 산타크로체성당의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성당의 벽화 그리스도 책형(磔刑)등이 있다.

 

그의 작품으로 인정되는 것에는 현재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에 있는 성삼위일체의 성모(1290), 산타크로체 성당의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아레초의 성도미니크성당의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루브르미술관의 성모자 제단화등이 있다. 피사대성당의 복음서 저자 성요한, 최대 걸작이라고 하는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성당의 벽화 그리스도 책형(磔刑)성모자와 4천사 및 성프란체스코는 아직 비잔틴 화풍을 남기고는 있지만, 그 늠름한 조형 의욕과 자상한 감성의 추구에서 르네상스의 여명을 보여주고, 조토에 의하여 실현되는 신회화(新繪畵)의 탄생을 예고하였다.

옥좌에 성모 (패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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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토 디 본도네 (Giotto di Bondone, 1267~ 133718)

 

 

이탈리아의 건축가·이탈리아의 화가, 고딕의 가장대표적인 화가로 프레스코화를 잘 그렸다. 피렌체 근교의 끌레 디 베스피자노에서 탄생했으며 피렌체에서 당대의 유명한 화가인 치마부애에게서 미술을 배웠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로서 비잔틴 양식에서 벗어나 피렌체 파를 형성하였다. 투시법에 의한 공간의 묘사에 성공하였으며, 생기 있는 묘사로 종교 예술의 신경지를 개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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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기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회화예술에 빛을 던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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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명성은 살아있을 때는 물론 후대에도 칭송을 받았는데 동시대의 사람인 단테(1265-1321)'치마부에의 시대는 갔다. 지금부터는 지오토의 시대다'라고 극찬했고, 보카치오(1313-1375)는 지오토가 '수세기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회화예술에 빛을 던진 사람' 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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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if]-->  프란치스코 성당의 벽화 <성 프란치스코전>에 참여해 28점 중 일부의 벽화를 그렸다. 그 후 1303~1305년 까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파도바의 아레나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스크로베니 성당의 장식을 맡는다. 3개의 층으로 나눠진 38개의 구획들은 성가족과 예수의 일생을 그린 프레스코화로 채워져 있다. 그 중 서쪽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최후의 심판>(1305, 프레스코)과 벽면 패널 중 하나인 <애도(Lamentation)>(1304, 프레스코)는 조토의 정수를 나타내는 그림을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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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의 대작으로서 피렌체의 온니산티 성당의 <장엄한 성모>(1331, 템페라),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예수의 십자가> 등이 있으며 1334년에는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주임 건축가로 임명되어 종탑 건조에 착수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중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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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전통에서 탈피하여 르네상스를 이끈 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이라 평가받는다[3]. 자연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조토는 정면에서 벗어나 측면과 후면을 묘사하는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공간감을 만들어 냈으며 단축법, 투시법과 명암을 이용해 평면에 입체감을 표현한 인물이다. 배경에 구체적인 풍경과 건물들을 그려넣으며 회화에 배경이란 요소를 최초로 도입한 화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성뿐만 아니라 조토는 인물의 감정과 역동적인 동작의 표현을 보여줬다. 이는 이전 까지 단순히 사실 기록을 위한 도구였던 회화를 작가의 감정을 보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매체로 바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4] 아레나 예배당의 벽화 <애도(lamentaion)>은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역동적인 성 요한의 팔 동작과 전면에 뒤돌아보고 있는 인물들, 배경의 산과 나무들과 각기 다른 인물들의 생생한 표정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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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옥좌의 성모, 아레나 성당벽화, <성프란체스코전>, <최후의 심판>(1305, 프레스코), <애도(Lamentation)>(1304, 프레스코), 피렌체의 온니산티 성당의 <장엄한 성모>(1331, 템페라),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예수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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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f !supportEmptyParas]-->5부 끝. 6부에서 계속